소설2015. 12. 14. 21:31

국제PEN광주 - 2015 PEN문학상 시상식 등 연말 행사

 

 

 

 

 

 


 

식순대로

 

- 회장 인사

- 강만 광주문협 회장 축사

- 조진태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축사

- 수상자들: 국제PEN광주문학상 박판석 시인, 올해의 작품상 강대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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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9. 18:14

 

끊임없이 지배하려 ‘세뇌’ … 자신 위해 ‘맞설 용기’ 가져야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⑧ ‘사페레 아우데’ 감히 알려고 하라
2015년 12월 09일 (수) 14:05:05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유난히도 빨리 가을이 저물었다. 사라져가는 가을 꼬리를 잡고 매달리면 수많은 가을들이 딸려 나온다. 1968년 베를린의 늦가을, 서른 살짜리 여성이 공식 석상의 단상에 걸어 올라가서 현직 수상의 뺨을 때리는 장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만세 삼창처럼 ‘나치, 나치, 나치’를 외쳤다. 숨은 나치 전력자들을 찾아내어 진상규명(?)에 전력을 기울이는 활동가였다. 

당시 독일의 수상은 나치 12년 통치기간에 당원이자 전쟁 중엔 외무부 라디오 정책국 부국장으로 활동했었고, 패전과 더불어 체포돼 18개월간 수감된 전력이 있었다. 전후 독일, 서방측의 온건한 탈나치화 프로그램에서 4급 ‘단순 가담자(Mitlaufer)’ 판정을 받아 면책증명서를 지니고 새 인생을 시작한 식자층은 넘쳐났다. 

변호사, 기민연 연방의원을 거쳐 수상 직에 오른 65세의 거물 정치인에게 모욕을 가한 동기는 간단했다. 독일민족 일부는(특히 청년층은) 나치가 독일의 정상에 서있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함이었다고. 순간 세상이 들끓었다. 

오늘 이 이야기는 그 정치적 동기와 파장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작가가 그 여성에게 파리까지 붉은 장미다발을 보냈고, 다른 한 작가는 그 일을 비난했던 일을 말하고자 함이다. 꽃다발을 보낸 이유는 “작가로서의 행동의 철저한 연속선상에서, 1944년 공습에서 죽은 어머니, 나에게 나치를 증오하라고 심어주셨던 어머니 때문에, 또한 나의 세대, 살아남았지만 교사, TV편집자, 출판편집자 등의 직을 잃을까 염려해서 ‘꽃의 힘’으로 그 여성에게 공감을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세대 때문”이었다고 했다.(하인리히 뵐, <Zeit> 1969.1.10)

 

더보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852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12. 8. 00:03

 

『국제펜광주』 제 13호가 나왔다.


광주지역에서 영어대역으로 나오는 잡지는 드물다. 전 작품은 불가능하고 우선 시(시조, 동시)와 수필 작품들에 한한다. 그것도 편집국에서 요청하는 매수를 지킨 작품들만 번역을 한다. 한국인 번역의 경우는 반드시 원어민의 감수를 받는다. 이번에는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재직중인 Scott F. 교수님. 어쩐지 부끄럼 없이 책을 내놓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안심은 하지 않는다.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의 변주 가운데 그저 ‘이해되는 영어’를 선택했을 만큼, 시란 문학이란 우선 '읽기'가 어려워 번역하기는 더 어려운 종이다. 시인과 수필가, 번역자, 감수자 - 세 차원을 오가는 연결에 종사하다보면 한 두달은 머리가 멍했다.

 

수필 번역자 - Denise Suh는 캐나다에서 이메일로만 작업과 통신을 했다. 12호 작업할 때는 전남대학교 언어교육원 "원어민영어회화" 선생님.

책이 보고싶지도 않은지 오프라인 주소도 안 준다.

 

 

 

 

To our Readers 2015!

 

Joyce Carol Oates once defined the act of writing as an art, one that permits humans to transcend the impermanent and participate in their "culture", fulfilling a need that is equal to the drive to procreate. But there have been times in history when writers had their freedom to write taken away from them, mainly by the governments.

Of course, we know that the Constitution guarantees freedom of speech, freedom of worship, and freedom from want etc. but, sometimes there is a sidereal distance between the Constitution and its practice. In the literature field, the freedom to write what we want to write always walks a tightrope, not only because of state power. Today the neoliberal experiments in the free market economy reach an apex and now only the convertible note, money, dominate the public. Who emphasizes moral culture will pass into a proverb. And then, after that tragic 'plagiarism incident' in June this year another painful word 'literature authority' makes us feel small. Because such authority is, if there is any, nothing but the internal evidence of our inadequacies and weaknesses.

Besides, we poets and writers are required to keep ourselves awake against the hedonistic tendencies in this material-dominated world which is exaggerated deftly with pleasure. And pleasure dies at the very moment when it charms us most, as the saying goes.

However, we members of PEN Gwangju, gathered here in this small book, say we participate in our culture.  

 

Till we meet next year with another book, we shall be with you in spirit.

With my thanks to all members of PEN Gwangju and supporters,

 

Suh, Yong-Jwa

Head of PEN Gwa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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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7. 23:56

王命 앞에 눈이 다 따갑구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⑦ 적상산 단풍
2015년 11월 25일 (수) 10:47:48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가을은 깊었는데 기차여행이라는 꼬드김에 넘어가서 단풍 구경을 나섰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대체 이런 나들이가 얼마만인가 아득하다는 생각을 했다. 몇 번 안 되는 여행 중에 인상 깊기로는 단연 개성 방문이었다.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출경’ 수속을 하던 일, 짐을 엑스레이로 통과시켜놓고 ‘녀자출구’에 섰던 기억이 새롭다. 검색대에 서면 사람들은 무조건 불안하다. 카메라는 따로 들고 서있어야 했는데, 배율을 확인받은 디카만 허용됐다.
언니 뭐해, 긴장되는 거야?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787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7. 23:54

출석체크 만만히 봤다가 큰코 다친 사연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⑥ 출석부
2015년 11월 09일 (월) 15:00:0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검열도 모자란 것인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라는 화두가 온 나라를 집어 삼키는 블랙홀이 돼있는 동안에도 수능일은 어김없이 닥쳐오고 대학 입시지옥은 아가리를 한껏 벌리고 있다. 정작 대학은 재정지원이라는 홍당무를 든 국가(정부)의 위력에 떠는 초라한 신세로 위축되고 있다. 대저 대학의 감사와 관련해서 출석부까지 회자되다 보니, 학문의 위상이란 것이 어디까지 내려가야 멈출 것인지 그 끝이 있기나 한지 두려울 뿐이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701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11. 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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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11. 5. 12:48

단풍놀이 다녀와서 푸르름이 더 낫다?

 

 

시월의 마지막 날, 해발 900미터 적상산, 단풍은 아름다워야 할 시절에도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여름 강수량의 부족 때문이란다. 우리는, 인간은 우주에도 가지만 자연에다 대고는 단풍 색 하나 조절할 수 없다. 인공호수 주변에 단풍과 푸른 소나무가 함께 하고 있었다. 솔이 의연하더라...... 그런 말이다.

 

 

 

단풍 대신 반가운 옛날을 만나고 왔다.  

조성왕조실록 사고지유허 -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은 하나 남은 전주본 원본과 교정인쇄본을 합쳐 실록 5부를 만들어 춘추관, 마리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각각 보관했다고 한다.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어 묘향산본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1614년(광해군 6)에 적상산에 실록전을 건립하여 옮기기 시작해서 1633년(인조 11)에 모두 적상산 사고로 옮겼다. 그 후 1641년(인조 19) 이곳에 선원전을 건립하고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게 되었다.  실록 824책, 선원록, 1,446책, 의궤(儀軌) 260책, 잡서 2,984책으로 총 5,515책이 보관되어 있다가, 1910년 이후 일제가 왕실 규장각으로 옮겼고, 6·25전쟁 때 북한으로 반출됐으며 김일성 종합대학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완전 훼손되어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 축조로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1997년 선원전을, 1998년 실록전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조선왕조실록> 복본 34권(왕조별로 1권씩 27권, 무주에 관한 기록 7권)과 왕실 족보인 <선원록> 복본 5권이 비치되어 있다고 한다.[출처 무주군청]

 

 

 

 

 

 

 

광해군은 죽어서도 후대에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광해군이니까. 그의 치적은 실록이 아닌 <일기>로서 남아있고, 연산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뿐만아니라 사초 문제로 무오사화등 사화가 일어나기도 했고, 당쟁의 결과로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경종개수실록』 등이 있었지만, 수정본과 정본을 함께 간직해왔음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크다. 명불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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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1. 5. 11:16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한 <제1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중, 한 파트의 참관기를 쓰라는 청탁을 받았다. 빠듯한 일정에 힘들었지만 맡은 부분의 "숙제"는 공부다 치고 열심히 하려고 했다. 2015년 9월15~18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17일 둘째 마당, 모국어 문학 활약상]

 

이민 현장에 대해서 쓰라뇨?

 

세계한글작가대회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한글로 글을 쓰는 사람들 - 이민지에서 한글로 글을 쓴다면 그 소속은 어디인가. 그래서 예컨대 국제PEN한국본부 산하에 국제PEN한국본부캐나다지역위원회가 있다. 3년 전 78차 국제PEN대회가 경주에서 열렸을 때 왜 그 많은 교포문인들이 ‘Korean PEN’이란 이름표를 목에 걸고 다니는지, 그땐 의아했었다. 이름표의 주인이 ‘한글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표지인 줄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이번 세계한글작가대회는 바로 그런 작가들 중심의 대회였고, 특히 ‘모국어 문학 활약상’을 논하던 자리로 돌아가 본다.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이사를 좌장으로, 이중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민용태 명예교수가 시작을 열며, 자화자찬 같다는 전제로 스페인과 한국에서 종횡무진 시를 쓴 이야기를 했다. ‘하늘에 별들은 너보다 많아 / 땅에 꽃들은 너보다 많아 / 하지만 너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네 이야기 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로 끝나는 자작시를 스페인어로 이어서 한국어로 읊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민자의 고독을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 한글로 글을 쓰면 본국 한국과 접촉하라. 바람직하기는 이중언어로 써라. 더 낫게는 아예 그 나라 언어로, 영어권이라면 ‘여지없이 절대로’ 영어로 써라. - 누구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민용태 교수의 이중언어 제안이란 실제로 어려운 것임을 전제로 시작한 정정호 교수는 비교문학 학계를 이끌었던 경험으로 ‘영어권에서의 한글문학 번역문제’에 집중했다. 영어권의 재외동포재단의 자료집을 기초로 문단의 현실을 방대하게 소개했고, ‘한글문학’이라고 정의할 때의 ‘문학’의 외연을 넓혀서, 문리가 있는 문자로 구성된 모든 것을 모두 문학으로 본 만해 선생의 견해를 지원했다. 이어서 이민1세의 경우에는 한글문학(만)이 가능할지라도, 2세와 3세는 다르다는 견해를 폈다. 영어로 써서 헤밍웨이 상을 받은 이창래 소설의 경우 미국문학 내 소수문학으로 분류된 것으로 미루어서도 그것이 한국문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에서의 한글문학의 문제란 결국 번역의 문제인데, 문학이란 ‘구체적 보편’이고 보면, 번역만이 평등한 사회로의 진입에 공헌하며, 번역은 모국어가 다른 언어로 거듭나는 정도를 넘어서 세계문학의 생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한글/한국문학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탁월한 최고 수준의 번역’이 없는 때문이라고, 번역에서의 완벽성을 강조했다.

질 메나주가 말했다는 번역에서의 ‘부정한 미녀’보다는 ‘정직한 추녀’를 지지하는 쪽이냐고 묻고 싶은 질문은 발화되지 못했다. 최홍규 시인 등의 열정에 넘치는 설명 조의 질의들에 ‘질의응답’은 어려웠다. 번역을 지원하라는 청중들의 일체감을 전달받은 좌장은 경주의 박목월 시인의 예를 들어 글을 발표할 수 없던 일제시대에 고향에 칩거해서 쓴 시들이 해방 이후 박두진 시인 등에 의해 『청록집』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며 ‘글쓰기’에 집중하는 일이 우선임을 피력하며, 2부 외국에서의 활동상 소개로 차례를 넘겼다.

처음 발언자인 재독 서정희 시인은 구상 시선집 『드레퓌스의 벤치에서』를 시작으로 김남조 시선집 『바람세례』 등 12권을 독역한 경력을 지닌 분이라서 앞서 말한 ‘탁월한 최고 수준의 번역’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심정이 들게 했다. 시인은 한국통상 우호항해조약 이후 1893년 첫 『전래동화』가 독역되기 시작한 이래, 1950년 이전에 겨우 7종이던 사례가 2013년 말을 기준으로 291종에 이른 번역의 현실도 소개했다. 1968년 일본에 최초 노벨상수상자가 난 이후 한국의 현존 작가들을 독일에 소개하고 있는 《Han》과《Hören》문학지도 소개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과 독일의 문화적 차이가 번역에서도 문제점으로 작용하는 점을 들췄다. ‘착한 배달민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쓴 작품들이 경쟁적이고 진취적 독일인들에게 수용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 서부를 대표하여 발표한 LA의 이승희 시인은 올해로 28회째를 연 ‘해변문학제’ 이야기는 접어두고, 오직 이민1세와 2세의 한글문학 계승 문제에 집중했다. 본국에서 초청된 강연자들이 ‘현장에 대해서 써라’고 할 때는 야속했지만, 사실 이민1세대에게는 향수문학이 전부였다고. 30년이 되어도 언어는 멈춰있어 영어문학은 불가능하지만, 문학지와 단체들도 많아지고 안정되어간다고 한다. PEN 연간집은 한글과 영문 50%씩 낼 수 있게 되었단다. 그러나 2세와 3세에게 한글문학의 전수는 어렵고, 이중언어가 가능한 그들이 이민한글문학의 희망이라고, 미주중앙일보에서 ‘미래신인한글문학상’을 제정했는데 응모 열기가 뜨겁다고 했다.

PEN한국본부캐나다 지회장 이정순 시인의 캐나다 현황 소개에 따르면 약 300명 문인들이 PEN과 캐나다한인문인협회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2세의 한글문학 계승은 난제이며, 보다 활발한 번역을 모색하는 점에서 이민사회에서의 한글문학의 고민은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아베마리아’ 선율에 담긴 캐나다 한국문인들의 활약상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는데, 김양식 시인은 캐나다 현지 문인들과의 교류에 대해서 물었고, 100개가 넘는 언어와 150개 인종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마음과는 달리 실제 교류가 어렵다는 답이 되돌아 왔다.

마지막 사례발표는 본론과는 좀 다른 이야기로, 인도네시아 소수부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문자를 가져다가 그들의 말을 표기하는 문제였다. 라틴문자 등이 아니고 왜 한글이었냐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 바우바우 지역의 아비딘 교사는 한국유학 시절에 이호영 서울대언어학과 교수의 추천으로 부족회의를 거쳐서 ‘부족의 문자’로 허가 받은 과정을 사진 자료로 보여주었다. 인구 10만명이 안 되는 찌아찌아족의 언어에는 문자가 없다가 한글자모가 들어간 것인데, 처음 반응들은 한국문화의 혼입에 대한 염려였지만, 부족의 지도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한글이 ‘소리의 기록’에 쉽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학교간판도 ‘세쿨다’ 등으로 쓰는데, 한글을 아는 우리가 소리로 읽을 수는 있지만 뜻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가 한글로 교과서를 써서 최근에 출판했다는 소식에 박수를 쳤지만, 정작 한국어 교육의 산실 세종학당은 철수한 지 몇 해라는 이율배반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질의응답 중에도 이중언어 창작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편파주의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민 교수의 염려는 이어졌다. 한편 이민2세대가 영어로 쓴 작품들은 미국문학에 속하더라도 한국의 정체성과 혼이 들어 있으므로 한글로 번역되기를 바란다는 정 교수의 발언으로 둘째마당이 끝났다. 필자는 이민자로서 ‘모국어 문학’의 고민은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일 터, 한글 창제의 과학적 우수성에 우쭐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쓰는 한글에 인류가 공유하는 문학어로서의 보편적 문법을 갖추어 작품으로서 문학성이 넘칠 때라야 세계의 독자를 얻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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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PEN한국본부 기고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1. 5. 10:47

교수신문

 

 

역사왜곡의 유불리, 따져나 봤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⑤ 새옹지마
2015년 10월 26일 (월) 13:11:4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나는 사람들이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말할 때마다 싫었다. 매사를 결과적으로 유불리로 따져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내 인생 새옹지마 한 줄기가 떠오른다. 때는 아주 옛날로 거슬러 간다. 

   
  ▲ 일러스트 돈기성  
 

제1공화국 시절, 어떤 포병장교의 졸업식에 오는 대통령을 위해 화동들이 동원됐다. 열 명쯤으로 기억에 남은 여중생 아이들이 꼬까옷 한복을 특별히 차려 입고 큰 군용차를 타고 비행장에 도착했다.

 

[계속]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625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10. 27. 00:30

일요일.
광주극장에 5시에 《토리노의 말》을 보러갈 마음을 먹었다. 천변을 산책해서 15분 거리에 있으니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리라. 꼭 보고 싶은 영화였다. 두드러기 때문에 먹는 약으로 종일 졸면서 그대로 5시가 지나버렸다.

 

저녁 준비에도 늦은 시간.
“밥상 차리고, 밥상 치우고, 설거지하고, 장보고, 반찬 만들고, 밥상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한다. 저녁엔 무얼 먹지? 일년에 365번 질문한다. 저녁엔 무얼 먹지?” 이것은 1977년에 어느 유복한 젊은 여자를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주인공과 ‘비슷한’ 생을 살았던 작가는 브리기테 슈바이거(1949~2010)로, 또 다른 여주인공처럼 “안온함(Geborgenheit)”을 찾아 헤매었다. 그리고 차갑다고 느꼈던 빈에서 도나우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안온함의 실체는? 차봉희 명예교수가 번역한 『아름다운 불빛』에 방대한 부록이 달려있다. 읽어도 못 찾는 안온함의 실체가 무엇일까?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정평난 단어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서 정의하기 어렵기도 하고, 세상에 있을지 그것도 알 수 없는 단어이다.

 

밥을 먹는 일, 먹어야 사는 법칙이 곤곤할 때가 있다.
그러면 병석에서도 ‘조실이는 가서 공부해라, 너는 공부를 해야지...’ 라고 하시며 나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정의해주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공부를 잘 하려면, 밥 잘 먹고 몸부터 강해야 한다....’

 

30년보다 더 오래도록 떠나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는 단초 - 금강석이다. 오래도록 변치 않는다는 금강석의 상징처럼 오래도록 자라지도 않고 그대로 있는 금강석.
아버지의 정원에는 꽤 많은 화초들이 잘 자랐었다. 맨드라미의 붉은 덩어리는 무서우리만치 싱싱했었고, 꼬마 채송화는 물론, 분꽃도 백일홍도, 무엇보다도 나팔꽃이 감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넝쿨들로는 여자도 수세미도 있었고, 무화과나 대추나무 같은 유실수도 있었다.
왜 이런 왜소하고 눈에 띄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는 선인장을 주고 떠나셨는지, 우리 아파트의 작은 공간을 위해서 고르셨을 게다. 새끼를 쳐보려는 두어 번의 실패 이후 최근의 새끼다. [사진: 손가락 길이다.]
사랑을 나누어 가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쪽을 떼어간 여동생에게서는 잘 자라고 있는지,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은 그저 연두색을 품고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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