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이2013. 11. 17. 11:31

 

 

2013.10.31. -

이화독문과 행사를 마치고 우빈-성빈을 만났다.

늦은 저녁이라 잠옷 차림이었지만 할머니를 위해 할로윈 포즈를 취해준다.

 

 

 

    

        요렇게 귀여운 아이들 때문에 인형 만들기를 

                                   서둘렀다, 서둘러야 했다, 서둘고 싶었다.

 

 

 

 

 

 

미국에 살고있는 수빈은 가을부터 5학년(우리나라에선 4학년)  - 안경을 썼다.

우빈은 돼지엄마 인형 때부터 연초록을 좋아한다.

꼬마 성빈은 아무래도 발랄한 빨강을 선택했다.

이 인형들의 특징은 달도르프 인형의 얼굴이라는 것,

그리고  솜싸개를 제외하고 한땀한땀 손바느질을 했다는 점이다.

 

                -  아이들아, 그리 예쁘지 않더라도 사랑해주렴! 이름도 지어주고!

 

 

 

 

 

 

 

 

 

 

 

 

 

 

이건 할아버지의 인형이다.

"그럼, 나는?"

인형들 셋이 손녀들 것이어서 떠날 것을 알게되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할머니는 4번째 인형을 만들었다. - 서재 지킴이가 되었다.  

 

 

 

 

 

 

 

우빈이에게 약속했다, 인형 옷 한벌을 더 만들어 주겠다고.

 원피스 만들고, 앞치마 만들고, 완성된 것이 맨 아래

                 ▼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3. 11. 2. 18:18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창립 50주년 기념

 

 

 

 

 2013.10.31. 늦은 5시

 이화여자대학교 ECC관 이상봉홀

 

 

 

 

 

 

                                                                                            이화뉴스에서 펌

 

  의자 줄: 나(1회), 남재은(2회), 이정화(8회), 이난희 교수, 이병애 교수,

             김선욱 총장, 김영호 교수, 조종남 회장, 이재돈 학장, 차범근 내외.

  왼쪽: 맨 앞 최민숙 교수(5회), 다음 엉거주춤 박종재 아나(40회), 끝 유현자(18회).

 

 

 

 

 

   1회: 나, 김영애, 정수자(대구), 이병애 교수님, 김영호 교수님, 민용자, 김경희

식사 끝이라서 미리 간 친구들도 있어는데...

 

 

       

         답사 - 서용좌(1)

 

          이화뉴스에서 펌

  공로패 증정

 - 이정화 동창회장(8) to 남재은(2), 민용자(1)

 

 

 

답사: 추억의 인사말씀 -

 

  2013년 시월의 마지막 날, 우리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창설 50주년을 맞아, 이렇게 여러 귀빈들 와주시고, 김선욱 총장님, 이재돈 학장님, 또 조종남 총동창회장님께서 축하말씀들 해주셨으니,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말씀 밖에 더 드릴게 없겠습니다. 특히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이 자리를 준비하신 독문과동창회 임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신 독문과 교수님들,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멀리에 산다는 핑계로 힘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우리 동창회장님께 듣기로는, 오늘 제 역할은 독문과 초창기 추억이나 풀어놓는 것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중후한 분들의 뒷순서인 것을 몰랐다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1963년 새 봄, 우리들 열여덟 아홉 살 소녀들은 고만고만한 꿈들을 안고 이화 교정에 들어섰습니다. 선배도 없는 독문과 신입생들의 낯섦. 낯설고 서툴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겠습니까?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 저장됩니다.

  입학시험 치르던 꽁꽁 언 겨울, 지금 보아선 아기자기 아름다운 캠퍼스는 당시 초중고 12년을 코앞에서 걸어 다녔던 시골아이의 눈에는 거대한 미로에 다름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점심시간 후 다시 시험장을 향하다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리고 말았으니 낭패였습니다. 미욱한 성정에 끈을 매고 가는 것과 그냥 좀 천천히 걷는 것 사이를 고민하면서 터덕거리며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사방은 쥐 죽은 듯 시험이 한창이었죠. 그때 갑자기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학생, 여긴가요?" 하시면서 열린 문 사이로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들여보내주셨습니다.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들을 올려놓으시며, 어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감동의 눈물이 눈을 가렸고, 시험지는 뿌옇게 변했습니다. 하필 전공과목 독일어였는데, 1번 문제 ‘voll의 반대말’ 고르기부터 틀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김영호 교수님의 너그러움 덕택으로 이화독문과 식구가 되었습니다. 선배가 없어도 우리는 잘 자랐습니다. 무감독시험으로 학점을 주셨던 특별한 경험까지, 우리를 무한정 신뢰해주셨던 고 한영기 교수님, 고 강희영 교수님, 저 개인적으로는 석박사과정까지 배우면서 전부를 다 베껴먹어 고맙고 죄송한 이병애 교수님, 대학원 시절 만난 양혜숙 교수님, 또 이난희 교수님…… 다시 50년 전으로 돌아가자면, 여름에도 까만 스카프를 쓰고 신입생 우리들에게 독일어로 말을 걸어서 정신 번쩍 들게 하시던 고 전혜린 선생님, 사상계에 『북간도』를 연재하시면서 교양국어를 가르쳐주신 소설가 고 안수길 선생님, 그리고 구약성서에선 배울 것이 없노라고 버릇없는 리포트를 써내도 괘념치 않으셨던 기독교문학 교수님들…… 그분들 모두는, 병아리도 닭도 아니었던 우리를 성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병애 교수님의 독일어발음이 시냇물소리 같다고 느꼈기에 ‘시냇물 Bächlein’이라는 이름의 스터디그룹도 만들었고, 그 친구들을 50년 동안 만나며 살았고, 오늘 이렇게 여기 모여 뿌듯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서 하던 대로 공부만 하며 살면서, 주변을 돌보지 못하고, 저 자신만 무탈한 삶을 살아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남습니다.

 

  삶을 살기 - 인간의 특성 중 하나가 강한 적응력이라고 합니다. 적응력은 인간을 지구상의 생물체들 가운데 우뚝 서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적응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적응해야할 세상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오늘의 문화에 이르지 못하고 한낱 약육강식의 동물계에 파묻혔을 것입니다.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 -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동인이라고, 여기 이화독문과에서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또 만나서, 우리의 젊은 날의 고향 이화 캠퍼스와 독어독문학과 시절을 추억하게 될지 기약 없으나, 내빈 여러분, 존경하는 스승님들, 사랑하는 동기들과 후배 여러분들의 앞날에 하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이쯤해서 어눌한 추억의 말씀을 마치렵니다. 감사합니다.

1회졸업생 서용좌

 

 


[부록]

 

 이병애 교수님께서 찍으셔서 가져오신 사진 -

 2010년 김영호 교수님 팔순 때  

 

 여겨 볼 것 - 3년 전의 내 옷, 자세히

 

 

 

  오늘 50주년에 입은 옷과

  블라우스까지 일치, 어쩌나!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11. 2. 17:57

외할머니 묘소 - 고창군 하고리 왕버들숲 근처

 

  2013.10.26.


 

외할머니(1906~1999)는 슬하에 아들이 없으셨고,
 우리 어머니 무송유씨 석자 순자 분이 유일한 혈손.

  우리랑 함께 사셨지만, 돌아가시자 무송유씨 가문으로 가셨다.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동막상 탑동 -  왕버들숲을 내려다보며 

 무송유씨 제실 <고창 여송제>가 있다. ▼      제향은 매년 음력 3월 20일

 

 중시조 유녹숭의 묘소 ▼

 

 유녹숭: 유금필의 5세손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자 평산에서 분적하여 무송을 본관으로 함.

     80 나이로 1114년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3일 간 조회를 폐하고 고인을 애도,

     '안정(安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동국여지승람>  "강직하여 일찍이 몸을 굽혀 남을 따른 적이 없었고, 비록 귀현  

                       (貴顯)이 되었으나 의복과 사는 집이 선비 때와 한결같았다."

 <여사제강(麗史提綱)>  "성품이 강직하고 유학에 진취하여벼슬을 지낸 40여 년

                             동안 공정한 충성을 근본으로 하는 자기 마음을 가졌다."

 

 

 무송유씨(茂松庾氏): 고려시대 정1품인 태사(太師) 충절공 유금필을 시조로 함.

 유금필: 태조를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익찬공신에 봉해지고

           태사에 오른 인물.

                                                                       [참조] 4세 유장신: 평산유씨 중시조.

 

 

 

 

 

 

 

 


 

 

외할머니 묘소는 외할아버지와 합장되어 중시조 묘역의 초입에 있다.

 

어머니(1925~2011)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 묘소에 처음 와 보았다.

 

이천서씨 가족 선산, 담양에 계시는 어머니와 고창에 계시는 외할머니 -

 

두 분은 75년을 함께 사셨는데, 돌아가시자 이렇게 멀리 떨어져 계신다니!

 

 

오늘 참석은 바로 손아래 여동생 내외와 우리 내외 - 사진사 제부는 보이지 않는다.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10. 15. 23:31
2013년 10월 12일 토요일, 라붐웨딩홀 -  

 

 

광주제일고등학교 58회 졸업생들이 졸업 30주년 홈커밍 행사를 가졌다.

 

1983년 졸업했던 아이들이 어엿한 어른들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 할머니가 되었다.

 

 

 

 

 

 

 

 

 

 

 

 

 

아래 왼쪽은 우리집 주치의 전남대학교 순환기내과 실력자 안영근 교수......

                                                   오른 쪽은 수 십장 사진들과 동영상을 보내준 오인식.

 

  

 

 

 

 

 

                                                                                                                           ▼

 

1.서용좌 선생님 10년만에 뵙는데 넘 반가웠고 그간의 세월이 

   가까이는 10, 길게는 33년전 1학년 10반 독일어를 배웠던

   머나먼 과거의 시간들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 지나가며 ,좋은

   추억들이 다시금 삶의 에너지로 재 충전되는 소중한 시간 이었습니다.

 

2. 가끔 문자로 안부 전해드리고 이번엔 10년후 40주년 ~~

    그 이후도   어제 만난 것 처럼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정을

   늘 함께 공유하길 기원 합니다.

 

3.사진과 동영상을 보내 드리오니 좋은 추억과 제자들을 회상하며

   가끔 소일거리로 보시라고 제가 찍은 선생님 사진과 동영상 보내드립니다.

 

4. 가르쳐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늘 간직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오인식/배상

 

 

 

광주서중‧일고 58회 졸업 30주년 어울림 한마당에 부쳐

- 도망하지 않기 -

 

오늘 서늘한 가을 저녁, 여기 모인 옛 제자들에게, 한 마디 인사는 해야 할 것이기에, 몇 자 적어 왔습니다. 제목은 도망하지 않기 - 이제도 스승과 제자라는 자리가 뒤바뀌지 않는 한 당부 말이라고 여겨주십시오.

 

여러분의 애송이 청춘 시절, 독일어 단어 걸음마를 가르치기보다 훨씬 어려웠던 과제, 진실하게 살기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살기를 지향하였기에 여기 감히 ‘그리웠던 제자들’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많이 잊고 살았으니까요. 여러분들보다 한 해 먼저 일고 교정에 들어섰고, 여러분들보다 한 해 먼저 일고 교정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이 치열한 고3 수험생일 때 나는 벌써 일고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나를 여기에 초대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실 도망치기는 제 특기입니다. 대학졸업 후 외무부 말단으로 잠시 일하다가 그 무의미성에 질려 도망쳐 귀향한 이래, 수많은 도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초짜 교직은 결혼으로, 다시 교직으로, 그러다 일고 3년 재직 후 박사과정 진학이라는 미명으로 또 그렇게 도망친 것은 늘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도망쳤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51%의 제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49%의 제자들에게 무의미한 스승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간단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마지막 퇴임이 된 전남대학교에서도 다른 곳에서보다는 잘 참았지만 역시 도망쳤습니다. 실용주의 사회에서 별 소용되지 않는 독문학을 강의하면서 시험지 채점을 해서 A, B, 또는 C 학점으로 제자들을 편가름하는 것은 참 못할 일이다.…… 그런 생각에 주눅이 들어 결국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 나왔습니다. 핑계는 그 사이 발을 내딛은 소설 쓰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그러니, 오늘의 작은 가르침으로 내놓고 싶은 화두가 ‘도망치지 않기’랍니다.

여러분은 벌써 어른이 되었지만 긴 인생에서 보면 아직 한껏 젊고 기회가 많으니, 부디 생에서 사람에게서 도망치지 말고 다가가세요.

 

그러나 조심하세요. 가끔은 정말로 동참을 거부해야 할 일도 있음을 잊지 마세요. 혹시라도 ‘앞으로 나란히!’만을 외치는 경쟁문화가 살인적이라면 뒤돌아서서 살인에 동참하지 않을 일. 아니라고 말해야 할 순간이 있음을 명심하세요.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 - 그건 도망이 아니라 등돌림입니다. 도망은 뒷걸음질이지만 등돌림은 당당하게 뒤로 돌아서서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명 소설가로서 내가 지향하는 것은 그래서 ‘등돌림의 문학’이랍니다. 다들 너무 앞으로만 내달리니까 멀미가 날 지경이라서요.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두 발을 땅에 확실하게 디디고 섰을 때의 안정감은 행복감을 두 배로 불행감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적 힘을 갖는답니다. 그리고 행복은 모양새 아닌 마음가짐에도 깃들어 있답니다.

언제 어디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제자들에게, 아직 길게 남은 코스도 잘 달릴 것을 믿으며,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볼 줄도 알 것을 믿으며,

2013년 10월 12일, 서용좌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7. 22. 16:44

인형 만들기에 빠졌다.

 

 

 동생이 -

  어려서부터 너무 예뻐서

  그냥 '예쁜 애'라고 불리던

  동생이 인형을 만든다.

  도자기, 염색, 손바느질 등등을

  하다가 요즈음에 손녀를 본

  때문이다.

  덕택에 옆에서 쬐끔 배웠다.

  눈이 아프도록 꿰메도

  솜씨가 그저 그렇다.

 

 1. 면장갑으로 만든 고양이
    (리본 장식은 우빈 작품)

 

 

 

 

 

 

 

 

 

 

 

 

 

 

2. 면장갑으로 만든 코끼리 +

내 티셔츠로 만든

 엄마 코끼리

 

 3. 긴 팔 원숭이 - 아이들이 젠틀맨이라고 부른다.

 

      봉제인형들을   수빈이가 제일 좋아한다!    < 카톡으로 보낸 사진 >

 

 

 

 

 

 

 

 

 

 

 

 

 

 

 

 

 

 

 

 

 

 

 

 

 

 

 3. 엄마 돼지

     - 아기 돼지

 

  손을 집어넣어  

  움직인다.

  성빈 생일 용,

  물론 엄마는

  우빈이가?

 

 

 

 

 

 

 

 

 

 

 

 

 

 

 

 

 엄마돼지  -

    치마를 다시

    만들었다.

    치마 폭이

    너무 좁아서

 

 

 

 

 


 

 

여가에 - TV를 볼 때면 너무 심심해서 일 없이 시작한 레이스뜨기 치마 ▼

 

 뜨게질 후 - 실제 색에 가까움

 

 

  안감을 넣은 완성품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8:07

틈새

 

이 이야기는 실제의 큰 대회에 기대어 썼을 뿐인 완전한 픽션이다.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혹시 어쩔 수 없이 실명으로 거론되는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며, 독자에게는 순전한 픽션으로 읽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1.

유난히 태풍이 무서웠던 여름 끝자락에 경주를 향하고 있었다. 펜 회원이 아니면서 국제펜대회에 참석할 기회는 실로 행운이자 우연이었다. 프랑스어 동시통역 일을 맡게 된 것은 완전히 대타였으니까. 이래저래 작가들 틈새를 기웃거리게 될 행운으로 조금은 들뜬 채, 대회는 9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부터이지만 일요일에는 도착할 양으로 버스터미널로 나갔다. 동서를 가르는 도로는 우리나라의 눈부신 도로 문화에 비하면 턱없이 열악하다. 신라의 고도 경주행 버스는 하루에 고작 두 번뿐이다.

 

경주 - 돌이켜 생각해보니 언젠가 겨울에 이 경주에 왔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차를 처음 사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였다고 기억된다. 인간의 상상을 절하는 석굴암이나 석가탑과 다보탑 등을 보여주시려고 그랬겠지만, 보문단지에서 묵었고 놀이기구가 많더라는 기억이 전부인 걸 보면 어린 시절 유적지 관람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지금도 전혀 앞뒤 연관 없이 세계적인 문단의 거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부담 없는 시간을 미리 즐긴다.

소잉카 - 아프리카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월레 소잉카도 참석한단다. 그가 1986년에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탔다지만, 난 그때 아직 너무 어린애였다. 문학이 다 뭔가! 불문과 학생이 되고나서야 프랑스령을 포함한 프랑스어 문화권에서 프랑스 문화의 독점적 전황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나선 네그리튀드 운동을 처음 들었고, 그 주창자들보다 더 눈에 띤 작가가 그에 비판적인 소잉카였다.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까지 한 셍고르,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의 하나인 마르티니크의 시인 세제르, 역시 프랑스령 기아나의 다마스 등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자행된 인종 차별을 완강히 거부하며, 흑인 공통의 정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하고자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그런데 다음 세대라고는 해도 아프리카이건 카리브 해이건 프랑스에서건 흑인의 정체성을 한 데 모으자는 이 운동에 회의적인 흑인이라? 그 부분이 소잉카에 대한 내 엉뚱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었다.

 

소잉카는 네그리튀드라는 것이 자기도취를 부추기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 지닌 편견을 긍정할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유럽의 이성주의에 대한 아프리카의 감성주의라는 양분적 사고를.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문장이 있었다. “타이거는 타이그리튀드를 외치지 않는다, 다만 행동한다.” 처음에는 ‘타이그리튀드’라는 단어를 몰라서 낑낑댔다. ‘니그로’가 ‘네그리튀드’를 외치는 일에 대한 조롱인 것을 나중에야 알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 코 박고 찾으면 코만 막히는 것은 또 잠깐 잊었었다. 그 일로도 사전 찾지 않고 대충 이해하려고 애쓰는 습관을 기른 것은 맞다.

 

아차, 이렇게 막상 동시통역 일을 상상하자 자신이 무너진다. 정확성, 정확성을 어쩌나.

아니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소잉카는 영국에서 수학했고 미국에서도 아프리카문학을 강의했으니 영어에 능통하다. 내가 통역을 맡은 부분은 프랑스어인 만큼 한국어를 프랑스어로, 또는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참석한다. 그는 한국에 잘 알려진 외국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의 유수한 여자대학에 와서 객원교수로 강의를 하기도 했던 만큼. 그런데 불문학도로서 나는 왜 르 클레지오에게 혹하지 않았을까.

 

대학에서 전공 수업 들어간 첫해 르 클레지오의 이름이 나왔었다. 그 무렵 그는 프랑스 내의 잡지 - <독서>이었던가 -의 설문조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되었다. 강의 시간에 그는 스물다섯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 편으로 국경을 넘어 문단을 강타한 괴테랑 비교되었다. 그러니까 괴테보다 더 이른 나이 스물셋에 혜성같이 나타난 신동에 가깝다고, 르 클레지오에 심취한 교수님께서는 ‘그 괴테보다도 더 이른 나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독문학 개론 시간에서 들은 베르테르는 ‘친애하는 벗이여, 사람의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편지글로 말문을 열며, 당시 인간이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회적 통념을 배척하고서라도 인간 본연의 감정을 예찬했다. 해방된 마음의 고양을, 그 권리를 주장하는 적극적인 정열을 토로했다. 하지만 내게 남아있던 기억은 왜소한 인간이 무궁한 자연에 파묻히는 거대한 느낌뿐이었다. 시작하자마자 반 페이지 넘게 계속되는 자연예찬 - ‘나는 이 현상들의 찬연함의 힘 아래에서 쓰러져 간다.’라던 인상이 강력하게 박힌 탓이었을까? 하긴 편지가 계속되는 동안 불행에 빠진 그는 똑같은 자연 속에서 이젠 ‘영원히 삼키고, 영원히 희구하는 괴물’만을 보게 된다. 감상성의 과다와 감정의 무조건성은 좌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튼 당대의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한 열광으로 베르테르와 같은 옷을 입었고, 또 베르테르적인 유행이 굉장하다 못해 그것이 열병으로 고양된 곳에서는 양식에 맞게 자살도 행해졌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러나 그 시절, 인구가 훨씬 적었을 그 시절에, 이천 명쯤이나 되는 독자가 베르테르의 슬픔에 동조하여 실제로 자살을 했다는 통계는 내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무감동. ‘동조’라니! 그것도 책 속의 주인공을! 나로서는 이십대 청년의 감정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스물세 살짜리 르 클레지오의 첫 작품 『조서』도 자연 속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어쩐지 왜곡된 자연으로, 산 중턱 빈집이었다. 버려진 짐승처럼 살고 있는 젊은이. 탈영병인지, 정신병원 탈출자인지, 그는 하필 이름이 아담이고, 다행히(?) 이름이 이브는 아닌 젊은 여자와 소통할 뿐이다. 아니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르 클레지오의 독창적인 발견이던가? 신문기사 삽입, 찢어진 광고지, 미완성 문장들, 심지어 지워버린 행.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사실성을 해체하는 것이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은 벌써 트렌드였다. 그래도 너무 이른 나이에 첫 작품에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는데 무섭지 않았을까. 이것 역시 독문학개론을 들을 때였는데, 사실주의 시대던가 어느 작가가 첫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는 그 명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일찍이 ‘퇴역작가’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었다. 젊어서 벌써 보름달 인생을 살게 된 천재들에 대한 내 불안감은 차라리 오지랖이었다. 평생 보름달 인생이 되어보지 못할 수많은 군상들을 몰랐단 말인가.

 

르 클레지오의 성공은 전혀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졸업반 때 그의 『황금물고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소개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를 두고 젊은 명성의 후속을 걱정했던 나는 허탈과 안도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30년 넘게도 계속 베스트셀러를 쓰는구나. 그렇다고 대강 소개받은 그 작품에 감동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검은 물고기, 어려서 인신매매 단에 유괴당한 검은 소녀의 파란만장한 삶. 입양된(팔려간) 집에서 신체적 성적 고초를 겪다가, 자라서는 혼자 떠돌며 가진 것이라고는 몸 밖에 없는 젊은 여자의 밑바닥 삶…… 모로코의 사창가, 스페인의 빈민가, 파리의 보헤미안, 마침내 미국 여행, 재즈 싱어가 되는 꿈을 이루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검은 대륙으로 귀향하는 순간 그 검은 물고기가 황금물고기가 된다는 설정. 이런 것은 많고 많았던 동화와 소설들의 세상 어딘가에 늘 존재하지 않던가. 물론 탈 유럽, 탈 서구 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점에서 유럽 순종인 르 클레지오가 돋보였다는 점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이후의 소설들, 소위 누보로망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 우선 너무 어려웠으니까 - 탓이기도 했다. 졸업반 때 나는 그냥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정석이니까 프랑스에 간다는 생각, 어찌 보면 단순했지만 프랑스에 갈 준비만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것이 나를 오늘 경주로 가게 한다.

 

 

2.

현대호텔은 이름만큼 현대식인 보문호반의 호텔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덕에 호텔에서 오후는 한가로움의 극치였다. 국제적인 대회라는 인상은 준비된 플래카드나 안내 표지판들로 넘쳤지만 사람들은 아직 느긋했다. 등록처라고 안내된 지하 1층에는 요원들 수가 더 많았으니 말이다. 프런트에서는 일반 참석자들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탓에 약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이내 방으로 들어서자 갑작스레 자유라는 단어가 온 몸에서 꿈틀거렸다. 사방 벽으로 갇힌 방에서 자유라니. 혼자인 내가 언제 부자유의 구속을 받았는가. 그러나 일상으로부터의 자유 아닌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국제펜 한국회원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했고, 혹시나 사진에서만 보던 소잉카나 르 클레지오, 혹은 터키의 오르한 파묵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셋씩이나 초청한 이 행사를 보면 한국의 위상도 제법인가 싶었다. 국제펜 회장 소울 씨도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언론인 출신답게 수많은 에세이에서 표현의 자유 등을 역설했고, 그것으로 고통 받는 세계 도처의 작가들에 대한 연대 또한 대단해서 마침내 국제펜 회장이 된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문학, 미디어 그리고 인권”이란다.

 

보문호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를 상상했지만 방은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높은 층이라 베란다에 나가보니 둥실 뜬 구름 속만 같았다. 얼마를 거기 의자에 앉아서 하늘 냄새를 느껴보았다. 천천히 짐을 풀고 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벌렁 누어보았다. 나에게는 분명 사치스러운 이 방. 같이 방을 나누어 쓸 사람은 내일 아침 일찍 대회장으로 바로 도착하는 대부분의 일행들과 함께 올 것이다. 밖이 어둑해져서야 뭔가 먹을 것을 구하러 로비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면 호숫가를 산책할 수 있었을 것이나 너무 늦었다.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들어와 먹다보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아직도 나는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거리를 배회함은 옛날 서양에서 모자를 쓰지 않고 나다니는 여자나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로맨스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파리에서 공부만 하다가 청춘을 잃은 것도 그런 가르침을 너무 충실히 따른 탓일까. 아니, 그건 아마 유전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청교도적인 열심. 하는 일 열심히 한답시고 옆길을 쳐다보지 않는 고지식함은 유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즘 세상엔 고지식으로는 밥도 못 빌어먹지만.

 

일찍 씻고 들어앉아 받아온 책자를 열어보니 오후나 저녁 내내 호텔이 조용한 이유를 알았다. 두 개의 선택으로, 불국사며 동리목월문학관 그리고 대릉원이라는 고분군 등에 사전 관광이 있거나, 뮤지컬 관람이 있었으니까 조용했었나 보다. 전체를 살펴보려니, 가방을 가득 채운 A4 그대로 크기의 책자는 두껍기도 했지만, 국어와 영어 쪽이 앞뒤로 겹쳐있으니 내용의 두 배의 두께였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라는 오방색을 상징화 했다는 로고도 참 한국적이었다. 무엇보다 문학포럼 <나의 삶, 나의 문학>에 나올 연사들의 글이 궁금했다. 99쪽을 찾아 열어보니, 좌장, 연사들, 소잉카, 고은, 르 클레지오…… 그런데 고은 씨의 글이 없다. 미리 원고를 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기조연설의 파묵도 프로필뿐이다. 뭐 대순가, 이 정도의 대규모 행사라면 현장에서 통역 원고를 받는 당황함은 설마 겪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일찍 잠을 청했다. 이런 예상들이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빗나가게 될 것을 모르는 채로.

 

 

3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화려한 홀에서 조식뷔페가 제공되었다. 지하층을 기본으로 해서 일층까지를 커버하는 높은 천장이 화려함의 근원지였다. 나는 어쩌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조식 뷔페를 즐긴다. 이런 곳의 빵은 다행이도 내 젊은 시절을 되돌려줄 만큼 맛이 좋았다. 보리밥을 싫어했으면서도 파리에선 왜 검은 빵 맛에 홀렸을까. 맨날 슈퍼에서 사는 토스트 빵이 아닌, 학교 식당에서 자주 나오는 바게트나 크루아상이 아닌 검은 빵, 알곡 빵이라나 뭐 그런 빵을 난 별식으로 즐겼었다. 나는 수많은, 정말 수많은 요리들 사이에서 뚜껑들을 열고 내용물을 살펴보는 시간을 잘 못 참는다. 아침을 그리 무겁게 들 생각도 없었다. 그냥 검은 빵을 두 번 썰고, 유일하게 곁들일 수 있는 동물성인 완숙한 달걀과 살라미를 발견해서 기뻐하면서.

 

저만치 옆자리에 백을 놓고 갈까 말까 엉거주춤 망설이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동양여자였다. 어디선가 스쳤던 인상일까? 그러는 찰나였다. 그때 서양 사람처럼 생긴 서양여자가 서양 사람들에 어울리는 새파란 옷을 입고서 서양사람 같은 미소를 띠고 말을 거는 듯했다. 여기 자리가 어떻고……. 예,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게 여기 제 남편이랑……. 아무래도 합석을 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은지 동양여자가 테이블을 양보하기로 하는 모양이다.

그러자 저쪽에서 그 남편으로 보이는 덜 서양사람 같은 남자가 이미 착석을 하고 서양여자를 부르는 것 같았다. 서양여자는 동양여자에게 정색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 씩 말하면서 자리를 떴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모습이 그랬다. 동양여자도 괜찮아요 같은 말을 여러 번 여러 번 했고, 이제는 음식을 가지러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접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서 앉을 태세였다. 그때 그 자리에는 이미 또 다른, 이번에는 큰 말소리 때문에 한국 사람이 확실한 젊은 남녀가 앉아있었다. 그 여자는 접시를 든 채로 웨이터들을 쳐다보았고, 미안해하는 웨이터를 따라 저만치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나치게 운이 나쁜 분이네 싶었다. 혼자라서 백을 들고 다니니까 빈자리라고 오해받는가보다.

 

쓸데없이 남 걱정을 하다말고 나는 커피를 한 번 더 가져와서 뜨거움과 향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저쪽 편의 아까 그 서양여자가 그 동양여자에게 다가갔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다가 일부러 다시 찾은 모양이었다. 정말 미안했다고 자기의 이름을, 이어서 남편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간곡히 사과를 하는 모양이었다. 참 사과에 열심이구나 싶으면서 남자의 이름이 언뜻 귀에 익었다. 데이비드 맥켄……, 그래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발표자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대회 시작 11시가 가까워 오자 지하1층 컨벤션홀에 마련된 대회장은 만원사례가 되었다. 대회장 밖에 임시로 화장실이 설치될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어느 대회장에서나 늘 그러하듯이, 중앙 앞 쪽은 지정석으로 되어있었다. 연단에 올라갈 임원들이나 기조강연 연사들을 당연하지만, 뭔지 모르게 중요한 인물들, 여기서는 중요한 작가들이 지정석에 이름을 올렸다. 드물게는 이번 행사에 저개발국 회원들을 초청하는 선행(?)을 베푼 분들도 거기에 포함된 듯 했다. 문제는 작가의 중요도라는 것으로, 지정석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 경계에 있는 상황이 애매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만치 바로 그 경계에서 몇 번이고 어색한 장면들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하지만 그것도 지정석에 명사들이 착석한 뒤에는 수그러든다. 우리 측 이사장님, 사진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들, 회장, 그 옆자리엔 노랑머리가 아니라 거의 흰머리의 여성이 보인다. 회장 부인인가 보다. 그러는 사이 오르한 파묵이 예정을 취소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왜 돌연? 그런 이유에 정신을 팔 사이 없이 식이 시작되었다.

 

오프닝은 샌드 애니메이션. 텔레비전에서 한두 번 보았지만 실제로 - 물론 여기서도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 - 보니 더 신기했다. 모래를 확 뿌리는 동작, 그 처음 동작이 나중에 의미를 표시해내는 오묘한 기술보다 더 멋있었다. 한국본부 이사장의 환영사, 소울 회장의 개회사, 축사, 축사, 축사 - 이 모든 과정이 문제없다. 원고는 미리 있었고 (동시)통역은 일사분란. 대회장에는 1번은 한국어, 2번은 영어, 3번은 프랑스어, 4번은 스페인어로 자유스럽게 언어를 선택하는 작은 기계가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외국어 실력 때문에 뭔가를 할 수 없는 세상은 이미 아니다.

기조강연에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분 차례가 왔다. 제목은 <가장 오래된 미래의 길>. 세상사 대조적 현상들을 완벽하게 짜 맞춰 준비해 오신 명 연설임에 틀림없다. 특히 ‘좌-우’에 대한 설명이 좌뇌-우뇌 등을 넘어 한없이 상대적 대조적 개념으로서 제시되었다. 잠든 곰과 포효하는 호랑이를 비유한 판소리, ‘얽어도 장에 가고 굶어도 떡 해먹는 사람들’ - 한국인의 해학과 여유를 충분히 천착하셨다. 강연 내내 인터넷 동영상이나 이미지들도 소문대로 그 분야의 선각자답게 유려하게 사용하시고.

 

그러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로버트 리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스크린에 떠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이름이 두 번씩 흘러나왔다. 너무도 긴장해서 잘 못 들었을지 모른다. 나는 물론 로버트 리 프로스트라고 통역했다. 실은 순전히 내 귀의 착각일 수도 있었나 보다. 나중에도 다른 통역사들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니 말이다. 프루스트는 학부 내내 내겐 트라우마에 가까운 멀고 어려운 대상이었는데, 이렇게 또 나를 혼란케 한다.

그렇게 첫 행사가 끝났다. 갑작스러운 구절들은 많이 없었고, 좌중의 사람들은 작가들 특유의 진지함으로 너무 조용했다. 지정석이 끝난 바로 다음다음 줄에 아침 식당에서 낭패를 당했던 그 동양인이 유난히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혼자서. 대체 누굴까.

 

이어지는 축하공연은 뮤지컬인데, <미소 2 - 신국의 땅 신라>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미소 2’가 무엇일까. ‘미소 1’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춤과 음악을 하는 주체에겐 숫자 2의 의미가 특별하겠지만, 관람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다만 불편한 첨가물이었다. 예상대로 볼륨이 너무 컸다. 예상대로? 공연예술들에 대한 내 인상은 늘 나의 기대보다 훨씬 큰 볼륨이 내용 몰입을 방해했다는 기억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상이 적중했다. 내겐 언제나 볼륨들이 너무 높았다.

 

점심에 통역사들 몇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더러는 함께 일한 적도 있었는지 서로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첫 행사를 마치고난 안도의 마음은 서로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에누리 없이’라던 연사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것 ‘벤또’처럼 일본말 아니냐고. 그러고 보니 그런가?

 

순간 잽싸게 표준국어대사전이 장착된 전자사전을 찾아보던 영어담당이 그건 고유어라고 했다. 한국의 고유어? 그랬군요. 처음 의심을 내놓았던 이가 얼버무린다. 우린 가끔 외래어 노이로제에 시달린다.

 

난 그것보다 갑작스럽게 통역을 더듬거렸던 일이 떠올랐다.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요, 어느 나라 아이들이건 에누리 없이 - 에누리 없이 손가락을 다섯 개로 그립니다.’ - 거기서 ‘에누리 없이’를 ‘값을 깎지 않고’라는 말로 떠올라서 당황했던 순간. ‘가감 없이’ 또는 ‘더도 덜도 아니라’라고 옮겨야한다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동시통역이란 살벌한 일이다. 밥이 먹히질 않았다. 졸지 않으려면 커피는 충분히 마셔두어야 하리라. 첫날부터 지치면 큰일이니까.

오후 스케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서운하게도 파묵이 불참해서다. 그 사이 흘러든 말로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라는 효자 설에 이어 동반자 문제라는 루머도 돌아다녔다. 동반자? 그보다 그의 문학적 대성의 뒤에는 끝까지 글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지원해준 어머니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쪽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섣부른 직업을 갖지 않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호사는 아니다. 아들의 능력을 믿더라도, 환경적으로 허락이 안 되면. 아니면 결과적으로 불발이면.

 

상관없다. 소잉카의 등장엔 그 나름대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허옇거나 대부분 누런 사람들 틈에서 시커먼 얼굴의 그가 돋보이는 분위기. 꼭 노벨상 수상 때문이라기보다 역차별이랄까 흑인으로서의 자존심 하나만으로도 돋보이는 설정이었다.

 

그가 말하는 <마법의 등불>은 다름 아닌 창조성의 마법이었다. 예술적 창조로서의 글쓰기. 권력자들이 민중에게 호기심을 누르라고 명했을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은 혁명이었다. ‘변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광범위하고 원초적인 테러를 상상해보라!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변형적인 마음’이라고 통역했는데, 나중에 한국어판을 보니 ‘변화를 추구하는 지성’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 보편타당성 있게 느껴졌다.

 

이어서 르 클레지오는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이다>라는 제목으로 말했다. 화려한 마야문명은 사원의 화재 이후 책으로 남긴 역사가 없어서 해독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쇄술은 특권의 종말이요 지식을 분배를 뜻했다. 다만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도 식민지에서는 성서에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채찍아래 사는 노예들로 넘쳤다. 고향 모리스 섬에는 문맹이 30%. 현대에 와서 오히려 공부도 일도 않는 ‘니니’들이 생겨났다. 인간의 목소리인 언어만이 추상과 변화와 리듬에 의해 숭고함을 표현한다. 언어로 인해 인간은 완성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책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중에 접근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말문을 닫는다. 여기가 어딘가, 작가들의 잔치자리. 희망이 있구나.

 

첫날이라 긴장되었던지 방에 돌아와 조금 쉰다는 것이 만찬장에 늦었다. 아무렇게나 빈자리에 안내되어 앉고 보니 낯모르는 남성들 사이 불분명한 인종의 여성 하나만 끼어있는 테이블이었다. 그 여성도 나처럼 끼어 앉은 것일까. 까만 머리카락으로 봐서 한국인일까? 그렇지만 저리 큰 눈은? 가볍게 어디 누구라고 서로들 소개하는 틈에 보니 러시아에서 온 한국여자였다. 북소리 공연이 머리를 두둥두둥 울렸다. 큰 소리에는 정말 약하다.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4.

화요일 행사부터는 중복적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이루어진 분과회의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고, 컨벤션홀의 문학포럼의 일환인 <시조>에 참가하면 되었다.

시조 포럼은 21세기 황진이 같은 여성발표자와 하버드 대학의 맥켄 교수 그리고 네팔의 만능 시인 펜다이 회장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유창한 영어의 맥켄 교수, 매력 넘치는 한국어의 홍 시인에 이은 조금 독특한 발음의 네팔인 영어 - 청중들은 미국인 교수의 한국어 ‘청산리 벽계수야……’에 탄복해버렸다. 앙코르에도 만돌린에 맞춰 청산리를 열연하는 그 교수는 참으로 특이한 존재였다. 90세 아버지에게도 영어로 시조를 쓰게 독려했고, 아버지 또한 그것을 즐긴다는 완전한 시조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후에는 평화, 투옥작가, 여성 등에 집중하는 분과회의가 있었지만 통역은 의무가 아니었다. 산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데, 지하층에서 카페를 통과하여 호숫가 산책로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낮 시간에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자가 문 가까이 앉아 있었다. 첫날 아침 식탁에서 이리저리 좌석을 옮겨 다닐 때 보았었고, 오늘 점심 때 합석을 하게 되어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그 한국분이다.

 

점심때는 4인 식탁에 그 사람이 혼자 앉아있었으니까 합석을 하게 되었었다. 앞에 걸고 다니는 이름표로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면서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서 괜히 편했다.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앉다보니, 저쪽 창가에 가까운 식탁에 맥켄 교수 내외가 보였다. 화제는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저기 오늘의 주인공 맥켄 교수네요. 참 독특했죠?

예? 전 너무 놀라서. 뭔가에 그렇게 심취할 수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남의 문화에.

그런데 어제 서로 만나셨죠? 제가 아침에 먼발치에서 본 것 같아요. 좌석 때문에 불편해하실 때.

예?

어제 아침 식사시간에 말입니다. 맥켄 교수부인이랑 좌석 때문에.

아, 뭐 대순가요. 우리가 손님 쪽을 배려해 줘야지요. 그런데 실상 미국이나 유럽 쪽에선 별로 유명 작가들이 오지 않은 것 아녀요?

네, 뭐. 본부 쪽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절반쯤이 초청 케이스라던데요. 86개국인가 참가라면 40개국 가까이가 초청국이라던가 뭐. 외국 참가자들이 한 200명은 된다지요?

그렇게나 많아요. 전 온통 한국 사람들만 보이던 걸요.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상당수가 ‘코리언 센터’ 명패를 걸고 다니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온 교포들이래요. 한국센터 뉴욕지회, 캐나다지회 그런 거라더군요.

그렇구나. 그런데 참, 초청이라니요?

네, 저개발국가의 작가들을 대거 초청했다는.

아, 그래서 서양 사람보다는 아시아나 중동 혹은 검은 모습들이 많았군요.

실제로 오르한 파묵이 오지 않았지만 터키 사람들은 좀 왔다던 걸요. 터키는 참 그 영토로 보자면 90퍼센트 이상 아시아에 속하니까 아시아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우리 보기에는 좀 유럽 사람들 같지요?

파묵 씨 사진을 보면 아예 서양사람 같던 걸요. 사는 것도 서양인이죠. 난 처음에 그가 독일문화 쪽에 가깝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 그랬었는지. 내가 파묵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그게 독일어권 신문과의 인터뷰 내용 때문에 그리 되었으니.

그럼 혹시 독문과? 전 불문과라서 지금 통역으로.

예, 견원지간이네요, 후후. 그래요, 난 독문학을 전공했어요, 끝까지 해내진 못했지만. 건 그렇고, 파묵이 스위스 유명 일간지의 토요판 주간지 <매거진>에 말했던 것 때문에 독일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나 봐요. 그 전엔 몰랐거든요.

주간 매거진에요?

예, 잡지 이름이 <매거진>이었을 겁니다. 3만 명 쿠르드인이 이곳에서 살해되었고, 백만 명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되었다. 그런데 거의 아무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 뭐 그런 정도였죠. 1915년 오토만 아르메니아인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일이 터키에선 잘 감춰진 부분인데, 이제는 과거사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그게 반역죄 비슷한 재판의 빌미가 되어 한동안 떠들썩했지요.

노벨상 수상 전이었던가요?

예. 곧 바로 터키에서는 완전 보수 민족주의자 검사를 앞세워 공화국을 현현적으로 모욕한 터키인은 몇 년인가 징역형에 처한다는 헌법을 도입했어요. 파묵을 옭아 넣으려는 법이었죠. 소위 사후법에 의한 기소라서 더욱 반향이 거셌겠지요. 세계적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연합에선 아예 의문을 제시했어요. 파묵의 케이스를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인지 실험대에 오른 리트머스시험지라고까지 했으니까요.

리트머스 시험지라뇨? 파묵을 그냥 두면 이유에 가입 아니면 불가 뭐 그런 거요?

암튼 그런 분위기였죠. 국제 엠네스티는 파묵은 물론 그 법에 적용을 받게 생긴 다른 몇 명의 고소도 함께 취하하라고, 거의 압력이었죠. 국제펜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국제인권규약 중 자유권 규약을…….

자유권 규약이라고요?

예, 사회권 규약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법률적 효력이 인정되는 것이지만. 국제 규약이라는 것이 늘 권고 수준 아니던가요? 것보다 귄터 그라스다 움베르토 에코다 또 주제 사마라구, 바다 건너 업다이크도, 심지어 남미의 바르가스 요사 후작까지 엄청난 노익장 대가들의 반대성명들이 잇따랐지요.

요사 후작까지요? 그 사람은 페루 대통령에 나오고 그런 사람 아녀요? 하긴 놀랄 일도 아니네요. 작가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실연하고…… 그런 모양새는 이 시대엔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작가들이 반 권력 투쟁을 하다가 권력에 오르기도 하니까요. 돈 권력에도 이르고, 더러는. 아니 유명해진 상당수가.

어쨌거나 파묵은 곧장 비비씨에서 자신의 발언의 근본 취지가 터키 내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의도였을 뿐, 학살 사건 자체가 아니었음을 밝혔어요. 이로써 조국의 과거사와의 한판 승부에서 후퇴하는 듯 했지요. 하지만 곧 이어 그해 가을 스웨덴 아카데미는 파묵에게 영광을 돌렸지요. 앞서거나 뒤서거나 <타임>지에 세상을 흔든 100인에 선정되었고, 소신 발언을 한 영웅과 개척자 부분에.

 

(그랬었구나. 그런 재판과정에서의 소용돌이가 그를 돋보이게 하여…….)

 

난 내 생각을 재빨리 지워야 했다. 2005년 말에서 2006년 사이의 사건에 관해 난 왜 이렇게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일까? 내가 행복했었던 시절, 모교에서 기대주로서 강의에 열중했던 시절에 난 무엇을 더 했던가. 그녀가 계속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이름은 빨강』을 보면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어요. 오래 묵은 책이라 1, 2권을 가져왔는데 헛물 켰죠.

책들을 가져와요? 헛물이라뇨?

예. 사인회에 가져갈까 했죠. 소잉카의 사인회는 지금 바로 가야되어요. 두시부터.

 

 

그렇게 서둘러 식탁을 떠난 그녀를 그날 오후 곧 바로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 겨우 대회 이틀째인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나 자주. 그 순간, 그녀를 처음 본 것이 첫날의 아침 식탁이 아니라 그 전날, 그러니까 여기 도착했던 일요일 저녁때였다는 생각이 났다.

어머, 또 뵙네요. 이렇게나 자주.

참 그러네요. 낮술 들켰나요? 점심이 급했나 어째.

와인이 소화에 좋대죠. 그런데 저 여기 좀…….

예, 뭐. 전 그냥…….

그런데 혹시 대회 전날 오신 거 맞죠? 실은 그날 저녁에 로비 근처에서 뵌 것도 같아서요. 만물상 쪽에서 나오시는 걸.

어머나, 전혀 몰랐어요. 제가 눈도 나쁘고 또 멍하고. 그땐 감기약이 그곳에 있다고 해서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그럼 그 감기는?

예, 아마 버스의 냉방에서 그랬었나 본데, 약이 효과가 좋았는지 괜찮아졌어요. 약 먹기 전에 뜨거운 우동도 한 그릇 다 먹었거든요. 그것도 좋았겠지요.

다행이군요. 어떻게 아까 사인회엔 늦지 않으셨어요?

그럼요. 외려 소잉카가 거의 30분이나 늦게 왔어요. 인터뷰들에 지쳤노라고, 이해는 되었지만, 주최 측에서 하라는 대로 줄을 서있던 우리는 실은 더 지쳤는데도 암말 못했죠. 아니, 사인회용으로 준비된 신간을 살 때 받은 번호표대로 줄을 서라고 해서 좀 떠들긴 했죠. 내가 맨 앞에 서있었지만 들고 있는 표는 4번이었거든요. 세 사람 양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일이 합리적이 아닌 것 같아 언성을 높이게 되었어요. 난 덤으로 『해설자들』을 가져갔기 때문에 마음이 좀 조급했었나 봐요. 그게, 우리가 미리 메모지에 사인을 받고자 하는 이름을 써내는데, 이름과 성을 혼동해서 새로 산 『제로 형제의 시련』에다는 내 이름을 잘 못 쓰더이다, 속상하게. 그게 미안했던지, 황망하게 들이민 『해설자들』 옛 판에는 제대로 쓰더군요.

그럼 오늘 사인은 일단 성공적으로…….

글쎄, 사인이 무슨 의미일 거라고. 암튼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잠깐 인사를 건넸을 때의 인상과는 달랐어요. 피곤한 기색이 너무 심했어요. 내가 네그리튀드와 결부된 그의 유명한 문구를 적어두었지만, 그렇게 사인해줄까 싶어서, 하지만 일별도 하지 않고 내 이름만을 겨우 쓰던걸요.

네그리튀드? 그럼 그 쪽으로도 공부하신 거예요?

아니, 잘 몰라요. 아프리카의 검은 유산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정치적 엘리트주의적 패권과 지배에 대한 투쟁의 도구로 선포한 것이라면 사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도 있는 건지. 난 그것보다 타이거가 짓는 것 보았냐, 직접 행동하지, 그러니 니그로가 니그로의 유산만을 강조하는 구호가 무슨 쓸모냐, 그런 쪽에 의아심을 느꼈어요. 난 기회가 있으면 그 점을 질문하고 싶은데, 여기 운영방식을 보면 청중 측에서 질문이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질문을 준비하셨다고요?

예, 궁금했으니까요. 소잉카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나 무분별한 칭송이 자칫 현대화의 잠정적 이득을 무시하는 생각이라고 비판한 것 맞죠? 외침 대신 행동을 하라는 부분은 공감하지만, 난 그가 말하는 현대화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인지 궁금했어요. 유럽적인, 서양문명적인 변화를 말하는지. 또 그의 말을 확대해석하자면 한국문학의 경우에도 한국적인 것을 외쳐대는 대신 행동을 하라는 것인데…….

내일 저녁 다시 소잉카 발표가 있으니, 그때…….

질문이건 사인이건 참 부질없는 짓이지요. 알죠, 아는데, 여기 참가에 내가 괜히 자잘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나 봐요. 어쨌거나 파묵이 오는 줄 알고 가져온 『내 이름을 빨강』은 더 두꺼운데 두 권이잖아요. 그것들 들고 오느라 무겁기만 했어요. 펜에서도 파묵이 불참하는 것은 마지막에야 알았겠지요. 미리 그런 통보는 없었으니. 그런데 혹시 젊은 인도여자랑 오려고 했을까요? 그래서 그런 말들이…….

인도여자?

예, 인도 출신의 미국작가라던 걸요, 훨씬 훨씬 어린 나이이지만 첫 작품으로 무슨 상들에 빛나는 유망주라나 봐요. 파묵이 뉴욕에서 문예창작 가르칠 때 배웠을까? 서양에선 한 20년 차이는 차이도 아니지만요. 첫 결혼에서 ‘꿈’이라는 이름의 딸도 있다는데, 전 부인도 인텔리라 하던데, 역사학자라던가…… 암튼 이혼한 뒤에 인도여잘 만났나 봐요.

인도여자, 뉴욕…… 파묵에 대해서 꿰고 계시네요.

뭐, 독특한 일을 벌였잖아요. 재판도 그렇고, 필화사건을 겪는 작가들은 많지만, 무엇보다 그 박물관 말이어요. 노벨문학상 받은 뒤로 썼다는 그 『순수의 박물관』에 이르러서는 정말 뭔가 전혀 다른 문학의 콘셉트를, 난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네, 그건 나도 얼핏 들었어요. 소설에 나오는 박물관이 실제로 건립되었다고. 우리나라 어디 출판사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내 친구의 친구의 동생이 거기 파견 차 나갔다왔다고 들었는데. 생각만 해도 멋있던걸요. 189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던데, 벌써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 건물을 사들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박물관을 지을 발칙한(?) 생각은 노벨상 수상 이전의 것이라죠. 그런데 그 박물관 내용은 들어 보셨나요?

아뇨, 뭐 연인의 담배꽁초 등등을 모두 수집해 놓았다고 정도.

그게 3층에 다락까지 있는 건물인데, 1층에서 벌써 4000개가 넘는 담배꽁초가 있고 그것을 일일이 비벼 끄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방문객을 압도한다는군요. 생각해 보세요, 여자가 평생 피웠다는, 피웠을 담배꽁초를 모아서 거기다 날짜를 쓰고…….

…….

2층과 3층엔 소설 전체 83장을 말해주는 83개의 캐비닛에 수천 가지 사진과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락 층에는 서술자 케말이 머물던 공간이라고 해서, 작품의 초고와 박물관 설계도,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판된 『순수 박물관』을 늘어놓은 거예요. 그쯤에 이르면 작가와 등장인물은 하나가 되고 말죠.

…….

퓌순, 그 여자, 퓌순의 귀고리로 대표되는 기념품 가게에선 온갖 잡동사니를 팔고 있고. 일단 박물관에 들어간 사람은 마취에 걸려서 기념품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죠, 자신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가 하는 착각에 빠져서.

슈퍼마켓 계산대 옆에 초콜릿이나 껌 등을 진열해놓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네요. 마지막 순간까지 고객의 푼돈마저 수탈하려는, 강력한 자본주의의 원리가……. 책은 꼼꼼히 읽으셨겠네요!

네, 뭐. 40권인가를 쓴 작가이고 보니 아직도 번뜩이는 말을 어찌 할까 싶은데 대단한 구절들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대부분의 인간에게 삶이란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야할 행복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 압력과 처벌,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말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요즈음 처음으로 느낀다…… 등 등, 무시무시한 진단도 아직 내 뇌리에 박혀 있어요.

말장난 같아도 대가들은 다르군요.

말장난일 리가. 차라리 천재들이죠.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심각한 질병이라고? 뭐 그런 인터뷰도 있었지요, 아마? 그렇게 단언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소설가들에겐 신선한 충격을 주죠. 어중간한 소설가들은 그렇게 단언하지 못해요, 경박하다는 평판이 두려워서라도.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주인공 케말을 긍정적 인물이라고 밀고 나아가는 작가 또한 정신병 아닐까요? 그 말이 심하면 4차원의 두뇌를 지녔다거나.

암튼 독특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탈 경계죠. 소설인지 현실인지. 음악이 춤과 공연과 페스티발로 확대되어 가듯이 문학도 영화로 인터넷으로 이제는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이겠지요.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로 도피했던 문학이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가능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다시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제의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제의? 제의라, 그렇군요. 그런 느낌이 들곤 하더군요.

군중들이 모이기로는 경기장뿐 아니라 음악을 좀 봐요. 거의 광란에 가까운 혼돈 속에서 열광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것이 음악인지 연극인지 원시시대 종교의식인지 알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냥 도취와 마취와의 경계도 없고. 약물에도 의존하는 인공적인 도취상태라면 말입니다.

인공적인 도취상태?

심했나요? 전 그냥 맑은 정신으로 그런 퍼포먼스를 해낼 인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에요. 어떻게 5분 10분이 아니라 한 두 시간을 그런 망아의 경지에서 노래하고 춤 출 수 있죠? 알코올이든 더 강한 무엇이든, 인공적인 자극이 없이 그런 시간을 버틴다? 상상이 안 가서요.

참 별난 생각을 다 하셨군요. 난 그저 취미가 아니면 접어 버리는. 뭔가를 분석할 여지도 없이 덮어버리는 종류죠. 지금쯤이면 많은 것이 버거워서…….

아님, 일종의 경영?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재라는 건 돈과 성공으로 연결되지요. 완전히 창의적인 무엇인가만 살아남을. 이 피 튀기는 경쟁사회, 몇 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싸잡아 대중이죠. 대중은 쓰레기 인생. 주체는커녕 철저히 대상이라는 이름의 쓰레기. 그렇담 문학에도 철저한 마케팅이 필요한 세상이겠지요.

어머나, 젊은 분이라 생각이 다르군요. 천재의 전략쯤으로 본다는 말이죠. 난 그냥 소설 『순수의 박물관』 그 자체에도 질겁했어요. 그런 정도의 집착이라면 무서운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백하자면 내게도 그런 작은 집착이 있었다고 해도 될지…….

네?

이상하네요. 취기도 아니고, 왜 이런 망언이 불쑥 나오는지.

그녀는 조금 남은 잔을 훌쩍 들이켰다.

제가 바로 그 담배꽁초 때문에 타격을 입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건 핑계이고, 어쩌다가 세 마디 꽁초를 내가 가지고 있게 되었어요. 짐 속에 묻혀 있었다고나 할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참 새삼스런 일이라서 그냥 짐 속에 남아 있었는데, 알고서도 못 버리고. 그런데 『순수의 박물관』이 나온 거예요.

『순수 박물관』, ‘의’ 없이, 책 이름은 그렇게 번역되었어요.

예, 『순수 박물관』. 거기 옛 연인의 담배꽁초를 모으는, 아니 그녀와 관련된 모든 사소한 것들을 수집하는 광적인 집착을 자랑처럼 들고 나온 주인공 탓에. 아니, 파묵 탓에 내가 상처를 받았어요, 괜히. 난 그저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더 늙어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게 될까봐. 아니, 사실은 언젠가는 정신이 온전할 때 버려야 할 물건들이었지요.

물건들? 그럼 혹시 그런 것들이 더 있으…….

더 있냐고요? 더 있다면 더 있지요. 혹시 발견이 되어도 아무도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할. 그런데 그 담배꽁초 세 개는…….

꽁초 세 개는…….

그걸 이번 경주행 이전에 버렸답니다.

경주행 이전에요? 왜죠?

왜냐고? 젊은 분이라서 이해를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여행 중엔 죽을 확률이 더 많다는 건 아시죠?

거야.

그거죠. 그래서 남아있을 추한 물품 목록에서 그걸 빼자고 한 거죠.

그럼 그동안 여행일랑은 한 번도?

아뇨, 가끔은 여행을 했지요. 그땐 『순수 박물관』을 생각한 적도 없고 또 꽁초의 존재를 어슴푸레 잊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챙기면서 아차 이건 아니다 싶은 거죠. 꽁초란 것이 너무 적나라하지 않아요? 어쩜 디엔에이마저 그대로 존재할 터이니.

디엔에이요?

내 것인지도,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도. 지금 좀 애매하게 되긴 했지만.

아니 담배를……?

물론 아니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입에 대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장담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나는 상황?

멀리 가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언제부터서는 기억 자체가 의심쩍게 변하죠. 왜곡된다고나, 자의적 기억이라고나. 글쎄. 암튼 누가 디엔에이에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뭔가 흔적이 있는 채로 남아있을 물건이, 온전하기는커녕 일종의 쓰레기인 그런 것이 을씨년스러워서. 아차, 이런 단어일랑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이라서 평생 쓰지 말아야 했었는데 왜 이렇게.

잠깐만,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인 단어들이라고요?

예, 그런 느낌이 드는 단어들이 있죠. 나 문학한다…… 그런 울림의 단어들. 유난히 문학스러운 단어들이랄까 그런 표현들.

에이, 그건 너무 편파적이시다.

편파적이라?

그럼 뭔데요?

내 얘긴 그러니까 딱 보면 문학 냄새를 풍기는 표현들 있잖아요, 이건 굳이 말하면 호불호의 문제인데, 난 냄새나는 건 좀 피하고 싶거든요. 비문을 쓴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문학 냄새나는 문장들은 가까이 하기 싫거든요.

에이, 그렇다고 무슨 단어 하나에.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스산하다, 쓸쓸하다, 그러면 되는데. 을씨년스럽다, 그렇게 말하면 뭔가 내놓고 문학하겠다는…….

재미있으시군요. 문학스러워도 안 된다, 그렇지만 문학이어야 한다.

예, 난 기실은 시인에 대해 외경심이랄까, 시인들을 무서워하는 편이죠.

무섭다면, 좀 이해가 안 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 나을지. 종잡을 수 없어요. 시인이라면 일단은 존경스러운데, 언어의 압축이라는 미에 도달한 사람들이려니 했다가. 그런데 실제로는 가령…… 설명은 어렵군요. 너무도 표피적인, 그러니까 시인에게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서조차 너무 감상적으로 여겨지는 단어들을 직접 그들의 입에서 듣게 되면, 생활에서, 그게 순수인지 정열인지, 아니면 치기인지. 그 경계선은 어디죠? 난 물론 너무 심플하고 너무 드라이하다는 핀잔을 들었지만.

하하, 실례지만 심플하고 드라이하다면 시인이 아니신가 봐요!

시인이 못되는 거죠. 하지만 뭣보다 순수는 상처를 주지 않아야 순수죠.

상처까지야?

괜스레 상처가 되지요. 난 사람을 일반적으로 존중하는 편이예요. 각자 나름대로, 대개는 그리 달갑지도 않은 역할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모두를. 그런데 본능적이랄까, 명과 실의 간극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 혼란은 상처가 되고…….

가볍게 생각하셔요.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 아닌가요?

하긴 그렇군요. 저 그럼 손이나 씻고 저녁 순서에 대비합시다.

 

 

5.

저녁에는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행사가 진행될 것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로비에 늘어선 인파 속에서 설마 다시 그녀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인파에 밀려 밖에 나오니 버스는 여남은 대는 족히 되어 보였다. 표현의 자유를 다루는,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행사였고, 다들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동시 통역기를 받아들고 회장으로 들어갔다. 좌장으로 나온 유명 소설가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이렇게나 친숙한가에 놀랐다. 육안으로는 난생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 책 속표지 여기저기에서 보아온 얼굴이 저기에 있구나, 그 정도였다. 작가 특유의 있을 법한 고약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참 괜찮은 평범한 얼굴이 좋아보였다. 그가 점잖은 좌장 역할만 담당한 것이 안 되었다. 의견 발표의 기회가 없다니!

 

첫 연사인 평론가는 많은 평론가 중에서 경주 출생이라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는 경주 출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통일문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북한문학의 현황과 작가들의 인권에 관해 더 집중하고 있었다. 주체문예론, 선군문학예술에 관하여 객관적 자료들을 들어서 오직 인민군의 활동을 예찬하는 주제의 획일성을 - 예상대로 - 전달해주었다.

 

이어서 민족문제 관련 인사 역시 경북출신이었다. 한국의 필화사건을 시대별로 제시하며, 필화 사건이란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중심에서 김지하 씨의 「오적」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괜히 눈물이 났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감동하면 절대로 안 된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니까.) 지난 70년에 있었던 국제펜한국대회 때 그가 바로 감옥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구속된 문인이 없이 치르는 이 대회야말로 진정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아닐는지.

 

정작 북한의 실상을 다루는 발표들은 상상을 절했다. 탈북 작가들의 ‘참으로 눈물겨운 땅’ 그곳이라는 절절한 증언들은 차라리 그들의 발언이 우리 체제의 선전용이기를 바라는 억하심정을 유발했다. 어찌 사람이 사는 곳이 그 정도일 수가……. 한 여성은 원래 전설적인 무용가 최정희 씨의 직접 제자였다는데, 지도자동지의 은밀한 총애를 받은 무용수 아무개 씨와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던 자신의 생을 회고했다. 만찬 이후 감상할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조작된 누명으로 끌려갔었다는 남성의 경우도 비슷했다. 실명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이런 포럼에도 목적이 아주 없지는 않은 듯, 탈북문인들의 단체가 펜의 일원으로 인준을 받을 예정이란다. 물론 회원국 대표들의 투표에 의해서.

 

『풀하우스』로 한국에 일시에 유명해진 재일동포 유미리 씨는 고상한 한복 차림으로 머리에 한 줄짜리 첩지까지 얹고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한국어로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유창하고 빠른 일어가 튀어나왔다. 이번 포럼에서는 프랑스어가 빠져서 가능하면 영어 버전으로 듣고 있던 나는 당황했다. 얼른 통역기 채널을 한국어로 돌리려다가 그냥 꺼버리고 한국어 발표문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녀의 일본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서 모르는 외국 영화를 - 최근엔 독일어로 하는 <굿바이 레닌>이었던 같다 - 보게 되면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언어를 크게 틀어놓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일단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려면 소리를 들어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통역이란 참 부족한 의사소통행위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간에 쫓겨 떨고 있었다. 순서가 마지막이다 보니, 또 좌장 소설가님이 마음이 독하지 못해서 앞 선 발표자들에게 시간 엄수를 잘 못한 바람에. 아니면 한복을 차려입고서 일어로 말하고 일어로 읽는 부조화에서 도망치는 속도일까.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제한으로 질의와 응답은 형식적이었고, 모두는 서둘러 다음 행사장인 5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두 세대의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기에는 퍽 많은 숫자였다. 전망대는 서늘하다 못해 추웠다. 중앙부에선 경주시장 중심의 주행사가, 양쪽 날개에서는 자유로운 삼삼오오 대화들이 펼쳐졌다. 추위 때문에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여러 칵테일까지 준비된 즉석 바에서 와인 잔을 들고 나오다가 그 소설가를 또 만났다, 역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내가 열심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나, 정말 와인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닌데, 저 원래 소주를 좋아해요. 없으니까 이거라도. 그런데 왜 소주는 없을까요?

어머나, 술꾼이세요?

술꾼이면 다른 독한 칵테일을 마시겠지요. 그냥 뭔가 먹으려면 알코올이 필요해요. 춥기도 하고, 찬 음식은 별로거든요, 특히 고기를 먹어야 하면.

딱히 고기는 아니잖아요? 다른 것들도.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기 케밥 같은 것도…….

예, 뭐. 사실 난 가슴이 아파서 뭘 못 먹을 것 같아요.

안되어요, 뮤지컬이 꽤나 길다던데요.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러니 드셔야죠. 그런데 왜 가슴이. 아, 그 북한의 수용소 어쩌고.

예, 뭐. 아뇨, 난 유미리 씨 때문에 더 울고 싶어졌어요. 대한민국 국적임을 말하려고 한복을 차려입었을까요? 유명하다 해도 아직 젊은 나이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어렸을 때부터 마땅히 있을 장소가 없어서 사는 것 자체가 별로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가…… 매순간이 시련인 현실을 참아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썼다고, 유토피아,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창출해 내는 것이 이야기라고, 그렇게 말하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린 그 얼굴을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어요.

전 뭐 독특하고 똑똑한 젊은 여자 - 뭐 그 정도의 인상이었는걸요. 생각해 보세요, 일본이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개화되었다고는 해도, 어머니가 가출했을 정도의 가정환경이 구김살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유부남의 아이를 가지고서 미혼모 선언을 하는가하면, 헤어졌던 연인이 말기 암이라는 걸 알고선 함께 살다니요! 의지가 확고한 작가 - 그런 인상이었는걸요.

물론 그랬죠, 저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안쓰러움이 일었어요, 나 혼자. 유미리 씨가 들으면 자존심 상하려나? 암튼 정직하기도 외로울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어머, 생각보다 감상적이시네요, 갑자기. 우리가 알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말이에요.

그러게요.

게다가 오늘은 요덕수용소로 눈길을 돌려야 주류에 속하는 것 아닌가요?

주류라뇨?

프리 더 워드 - 이것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언론의 자유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걸요.

정답, 정답. 난 실은 미리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한답니다. 물론 힘든 일이겠지만, 힘들기까지야, 한참 번거로울 것이라서 그냥 이렇게.

관심이 없으세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무섭죠. 그려질 광경이 미리 떠오르기도 해서. 제가 개성엘 다녀왔었거든요. 개성관광이 금지되기 한 달 전쯤이던가, 당일 코스로. 새벽에 임진각에 도착해서 어둑어둑해서 되돌아 왔어요. 물론 종일 해는 떴지만 어둑어둑했단 느낌이지만요. 전체가 그림자 도시 같았거든요. 길에 면한 아파트 창문으로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보였어요. 얇다 못해 세트 같아 보이는 벽은 곧 무너질 것 같았어요. 얇아서가 아니라 꽁꽁 얼어 있다가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갑자기 부서져버릴 것 같은 느낌.

어머나, 겨울이었어요? 차들이 많았나요?

아니 겨울은 아니었고, 늦가을. 차들이란 게, 관광용으로 줄지어 가는 버스들 이외엔 차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죠. 세워진 차 한두 대가 종일 본 전부였거든요. 차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없었어요. 그곳 인구밀도가 그리 낮은 건지. 박연폭포를 향해 걷는 길이 처음 내딛는 북한 땅이었죠.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를 걷는데, 사람들은 남측을 통과해서 온 방문객들뿐이었어요. 평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북한 사람들은 정말 일터에만 열중하는가 싶었어요. 오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본 몇몇 사람들은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다른 색 복장으로 소리도 없이 걷는 인상이었어요.

그런 인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수용소라면 미리…….

그렇죠, 하물며 수용소라면 얼마나 어두운 색깔로 그려질지.

어두움을 싫어하세요? 하긴 어둠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예, 어둠을 싫어해요. 지금까지 외면해온 어둠을 굳이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심정, 비겁하다고 해도 할 수 없죠. 인생을 꼭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어머나, 인생은 어둠이라고 단정해버리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얼마나 밝을까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머나, 한창 인생의 여유로움을 즐기실 차례 아닌가요? 저보단 좀 위이신 것 같은데, 자녀들 다 크고.

한참 위 맞아요, 한샘이 우리 애들 또래로 보여요. 그렇다고 여유로움 같은 건 아직.

그렇게 식은 식사가 끝나고 요덕수용소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소리도 내용도 무대라서 과장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대 위의 극을 견디어냈다. 냉방이 터무니없이 잘되어서 냉기를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1막이 끝나고 휴식 시간, 복도 구석으로 나가서 제자리 달리기를 했다. 마음 뿐 아니라 다리가 통째로 동태가 되었지만, 중간에 돌아갈 궁리는 나지 않았다. 아차, 그 사람은 어쩌고 있을까. 처음부터 아예 돌아가고 싶었다는 그 사람은. 밤은 벌써 어두웠고, 난 어둠 속에서는 유아가 된다. 함께 손을 잡고 있을 걸. 순진하게도 좌석표에 따라 앉은 우리는 각각 따로 얼고 있었다.

 

 

6.

수요일은 오전은 총회장에 있었고, 오후엔 관광이 있어서 한가했다. 저녁엔 본격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중심으로 <나의 삶, 나의 문학>에 관한 발표가 있을 것이었다.

 

어제 나보다 더 얼었을 그 작가가 오늘은 보이질 않았다. 아침 식사에서도, 점심 식사에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닐까? 다른 개인적인 일정이 있는 것일까? 아니 시내관광에 참석했을까?

내 룸메이트는 또래 통역사들과 어울리느라 방에 늘 없다. 관광에 참석했을 수도 있겠다.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워서 천정을 보면서 쉬려는데 이상하게 좀이 쑤셨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름 석 자, 한국인이라는 것. 소설가라는 것. 그 뿐이다.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 그것도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다. 그래, 인터넷을 찾아보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네이버 씨, 아무개를 찾아주세요. 엔터~ 직전에서 멈췄다. 아니다, 이것은 심부름센터 짓과 무엇이 다른가, 직접 들쑤신다는 것만 다를 뿐.

 

프런트의 다이얼을 돌리고, 방을 찾아서 전화연결을 부탁하는 것. 그것이 더 정직할 터였다. 연결이 된다면 쉬고 있는 것을 방해하는 일인데. 대답이 없다면 관광에 참석했을 것이고 쑥스럽기만 할 텐데. 어느 것도 좋은 모양새는 아닐 것이다. 딱히 용건도 없질 않은가. 아니, 어제 공연장이 너무 추웠고, 또 조금 겁을 내고 있었으니 안부 정도는? 나는 벌써 프런트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에 있었다.

 

예에.

저기, 선생님, 저 한금실이예요.

아이쿠, 한샘이 웬일이세요? 관광을 안 갔어요? 왜요?

그냥. 그보다 어제 공연장도 너무 추웠고 해서, 오늘은 어디에서도 안 보이시고 해서. 그러니까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못가신거예요?

아, 그게. 난 오늘 아침 금장대 버스를 타느라 일찍부터 서둘렀어요. 벌써 한 행보를 했으니 지쳤지요.

금장대라뇨? 시낭송회 말이어요?

예. 시낭송회요. 한샘, 이왕 방에서 쉬는 것이면 이리로 올래요? 전화로 이야기하느니.

어머나, 쉬시는데 방해가.

무슨 방해요. 그냥 함께 따로 쉬면 되죠.

네?

오세요. 여기 방에서 보문호가 다 내려다 보여요, 베란다에 의자가 둘 있잖아요.

아예 방문을 빼곡히 열어놓은 그녀는 벌써 베란다에 나가 앉아 있었다.

여기로 와요, 아직 해가 따뜻해요. 냉장고에서 뭐 하나 들고 와요.

아, 예. 괜찮은데요. 그런데 오늘 왜 시낭송 쪽으로 가신 거예요? 금장대를 보러 가셨나요? 「무녀도」의 배경이라서?

그걸 다 아세요? 난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거기 가니까 그런 소개가 다 있더라고요. 금장대 자체는 최근에야 복원했다더군요.

금장대에 가시려던 게 아니라면, 누구 시낭송하시는 분을?

아뇨. 꼭 참석해야 했어요. 나도 할 거니까.

하시다뇨? 시낭송을? 시인이 아니신 걸로…….

예, 일이 그렇게 되었답니다. 시낭송회를 본 적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그게 참 쑥스럽게 된 일이랍니다. 욕심이지 뭐겠어요. 일단 국제펜대회 참가는 망설임 없이 결정했어요. 지난 번 한국 개최 때에는 작가가 아니었고, 다음이라면 살아있을지 의문이고. 살아있더라도 그때까지도 무명이면 못 나서겠죠. 생애 한 번은 국제적인 작가대회에 참가한다 ― 순진한 발상이지만 그냥 그렇게 정했어요. 그런데 공문형식으로 ‘한/영문’으로 시를 집필하여 제출하면 대회장에서 발행되는 책자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왔어요. 첨엔 의아해 했어요, 시인도 아닌 터에. 다음엔 시를 쓸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영어로도 써야한다면 영어로 먼저 써야 운각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도 무지가 용맹이라고 참가한 흔적이라도 남길까 싶어서 시 같은 걸 짜내었죠. 그런데 이번엔 ‘영어로’ 낭송회가 있다는 전갈이 왔어요. 다시 망설였죠, 그러다 에라 내친 김에 - 그렇게 실없는 용맹을 부렸어요. 정말 시인도 아니면서.

잘 하셨네요, 그러면 은근슬쩍 시인으로 등단하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어림없죠. 우리나라 등단은 독특한 문화지요, 아주 엄숙한.

건 그렇고, 오늘 낭송회는 좋았어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던가요?

처음 프로그램 꼭 그대로는 아니지만 조금 변경된 순서가 제시되었고 그대로 진행되었어요. 한국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았고, 특히 경주지역 문인들이 잘 섞이었고, 어떤 언어를 선택하든지 하나의 언어로 진행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조금 무시되기도 하고. 이상하게 말해도 될까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요?

난데없이 웬 비빔밥.

아 그게. 비빔밥을 싫어하는 성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몰라도?

외국 펜 회원들과 한국 펜 회원들이 아무렇게나 섞인 건 좀 수선스럽다고나 할까. 1부는 외국펜, 2부는 한국펜 그런 쪽이 나았을까? 정말 단아한 한국형 미녀이면서 영어가 유창한 아나운서였는데, 아나운서가 마이크로 소개해주는 대로 책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제가 또 느리기고 하고.

아, 그런 말씀이시군요.

암튼 오늘은 일찍부터 수선스러웠어요. 아침을 2층 보문에서 먹고 로비 쪽으로 서두르면서 희한한 풍경을 보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무슨?

멀리 분홍 꽃 재킷에 분홍 바지를 잘 맞춰 입은 여자가 마주오고 있었어요. 이름표를 건 것이 펜 일행이었죠. 깜작이야. 멀찌감치 보아도 우걱우걱 양치질을 하면서 걸어오는 거예요, 복도 한가운데서. 말 그대로 아침 먹은 것이 솟구쳤어요. 틀림없이 한국여자야, 라고 누워서 침 뱉는 욕을 하면서, 피한다는 것이 화장실이었어요. 멍청했죠. 곧 뒤따라온 그 사람의 피 튀기는 열정의 양치질에 기겁해서 도망치다시피 다시 방으로 올라갔어요. 방에서는 룸메이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찍 나왔던 참인데. 그렇게 출발 전부터 엘리베이터를 오르락내리락 했으니 진이 다 빠졌죠. 기러기가 쉬어간다는 금장대 구경이라고 맘먹고 기를 쓰고 올라갔어요. 시낭송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볼 것이라서 꼭 가야만 했으니까요.

그럼 시낭송 스케줄을 다 따라하시려고요.

그게 나도 낭송을 할 양이면 다른 사람의 것도 들어줘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런데 시내관광은 부러 쉬시려고 안 가신 건데 제가 이렇게.

아니 이렇게 느긋하게 ‘초추의 양광’을 즐기는 게 더 쾌적한걸요. ‘정원 한 쪽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떨어지는 해가 아니니까 즐긴들 죄로 갈 리 없겠죠. 그런데 한샘은 왜? 젊은 분이 일단 무엇이건 보고 참여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 아녀요?

저야 늦게 갑자기 참여하게 되어서 큰 관심이랄 게.

난 이만큼의 일정이 빠듯해요. 너무 많아요, 다 참석하기는.

그런데 문무대왕릉엔 가까이 가는 것 아니겠지요?

설마. 그냥 감은사지 석탑이나 둘러보겠죠, 바다 속 왕릉을 어찌.

그렇겠죠. 그때 7세기에 벌써 화장에 수장을 하다니, 그런 걸 보면 화장 개념이 불교에서 온 게 맞는데, 요샌 교인들이 앞장서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요샌 합리적인 사람들이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우리가 전통적이라고 하는 게 무속신앙, 불교에 유교가 섞여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녁에 동국대학교 캠퍼스로 갔다가 늦게 돌아올 예정이라지요? 뭐 따뜻한 걸칠 것을 챙겨가야겠지요?

네,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예, 그럼 이따가.

그날의 대화는 거기쯤에서 끝났다.

 

 

시내의 대학 캠퍼스로 옮겨가려면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었다. 다들 관광을 가고 없으려니 했는데,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설가는 내가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는 로비에 나타나지 않았다. 왜, 나는 또 그녀를 기다린 것일까?

 

호텔을 출발한 여남은 대의 버스는 10킬러미터 남짓이라는 학교까지 근 30분이나 걸렸다. 시작과 꼬리가 길다보니 그럴 것이다. 호텔 팀은 알맞게 도착하였는데, 시내 관광 팀은 늦어지고 있었다. 시내 관광이 지체되어 프로그램 진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과의 변이 전달되고, 그러고도 한참 있어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예정 시각인 6시를 20분도 더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진행자 쪽 무대 한 쪽이 소란해지면서 외국 회원 두어 사람이 본부석 마이크를 행해 돌진했다. 벌써 마이크 대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왁자지껄 수상한 것이…….

사정은 일촉즉발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순간 진땀을 흘려가면서 겨우 그들을 진정시켰다. 오후 관광 코스에 원전폐기물공단이 들어있는 것에 대한 항의인 모양이었다. 이미 돌아오는 버스에서 불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작가들 중에 상당수가 원전에 반대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인데, 특히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에, 한국의 원전은 안전하다는 식의 선전에 분개했더란다. 그러니까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간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나 보다. 다행스럽게 합의가 도출된 모양이었다. 마이크로 그런 내용들이 확산되기 이전에 주최 측에서 간곡히 말린 것이 통했나 보다. 그런 항의를 ‘이해는 하고 또 한편 동감이지만, 항의를 할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주최 측의 고민을 이해해야 했다. 행사지원금을 받은 터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후문이었다. 행사 지원금이라는 것이 늘 말썽이다. 순수한 지원이란 드문 세상이니까.

찰나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연사들이 연단에 올랐다. 말을 해방하라, 프리 더 워드 제 2막에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곤 하는 시인 고은 씨도 함께 <나의 삶, 나의 문학>으로 진행될 것이었다. 객석과 가까워 친밀감을 주는 무대 위에서 좌장 소울 회장의 빨간 양말과 르 클레지오의 하얀 양말이 두드러졌다. 서양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차림새에는 무신경 한 듯. 가운데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전통 복장을 고수했다. 그 헐렁한 원피스 같은 윗도리를 보며 생각했다, 의상은 가리게일 뿐이구나.

 

좌장인 소울 세계회장은 자유언론에 대한 수필과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만해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경주와 친해졌다고 들었다. 그는 앉은 차례대로 먼저 소잉카를 소개한다.

소잉카는 <작가와 의례>라는 제목으로 말할 것이었다. 영어로 보면 제의적 의례라는 말일 것이 분명하다. 그가 쓰는 것들은 의례와 관련된다고 한다. 사회 자체의 표현이 의례요, 사회를 확인하는 것이 의례이고, 계절을 찬미하고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것도 의례라고 한다. 비합리적이 아니다, 미신적이 아니다, 영적인 것을 따르지 않는다 - 그렇게 자처하는 사회 속에서도 의례는 존재하는 것이란다. 의례는 어쩌면 권력과도 통할지 모르는데, 작가는 의례의 남용을 조사하고 비판하고 반대 의례를 창조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어려운 말인데 소잉카의 출발이 희곡 장르이고, 희곡 장르는 그리스 고전극의 의례에서 출발하기 때문일까? 그로서는 살아가는 것이 곧 글쓰는 일이라고 했다.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체험했지만, 그 단선적 교육이란 금기 사항뿐이었고, 그러나 창조성이란 영원한 것이라고.

 

다음 순서인 우리의 호프 고은 시인님은 청중에게 주는 원고 없이 시작했다. ‘푸른 산’과 ‘흰 구름’에 기대어, 노벨상 수상자들은 손님으로서의 흰 구름에, 자신은 주인으로서의 푸른 산에 빗대는 것 같았다. ‘관계가 의미를 만든다.’ - 자신은 구조주의에 가깝다고, 실존주의를 부정했다. 존재한다는 의미를 ‘언제 어디’에 두기 때문에, 우연의 생명체로서의 보편을 믿지 않고, 필연의 존재, 즉 특수성을 믿는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은 함께 존재하느니. 한국전 3년간 청년 1/3이 삶을 중단했다 - 그 결과로서 그가 존재한단다. 그러므로 그들의 중단된 삶이 그의 삶의 의미이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문학을 한단다. 그러므로 그의 시의 본질은 애도의 문학이라고. 우와! 자신의 문학의 본질을 확고히 알 수 있는 작가들이 몇이나 될까. 역시 출중한 분이구나 싶었다. 애도의 필요성에는 100% 공감한다. 옛날에도 그랬다고, 6만 년 전 어린아이 미라 옆에 히아신스 화석이! 장례문화는 곤충에게도 있다고. 5천년 이래의 과거가 오늘의 시가 된다, 시인들은 단명, 요절, 옥사, 자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음을 일깨운다. 겨우 30편 쓰고 죽은 시인이 그의 뮤즈이니, 그의 뮤즈는 과거에 헌신한다고. 그 발언 자체가 서사시다. 산자여 따르라…… 라던 빛고을 광주의 노래가 떠올랐다.

간단한 질문에 답할 때 나온 말, 이웃이 피해를 입을지라도 개인적으로 태풍을, 폭풍을 좋아한다고 - 어쩌나, 사회적 선한 의지만으로 뭉친 것만 같았던 그의 인간성의 다른 면이 드러난 것인가?

 

르 클레지오은 정 반대로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다. 제목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때문에 쓴다.’는 요지다. ‘손으로 씨를 뿌리고 눈으로 수확한다.’는 속담이 고향 모리셔스 섬의 크레올 말인데, 작가는 무슨 싹이 날지도 모르면서 책을 쓰고 독자는 그저 읽는다는 말이란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솔리튀드를 느끼는데, 영-불 사이 부모를 두고 프랑스령 태어나서 2차 대전 상황에서 8살에야 영국군 의사인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 영어를 원한 아버지. 그러나 그는 따뜻한 옛것을 향한 그리움으로 시를 썼고, 나중에는 오케스트라에 심취하다가 코믹을 썼는데 자신의 선생님들을 등장시켰다고. 작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몹시 더운 여름 차일을 내리고 들어박혀서 더위를 피하며 쓰고 출판하고 상 타고 그러나보니 작가가 되어 있었단다. 이어서 많은 여행 속에서 작가는 인류학자라고 느꼈단다. 미국 인디언과 3년 정도 살면서 느낀 것, 문학은 글로 쓰지 않더라도 이미 존재한다는 것.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은 경이, 놀라움이다. 마음은 늘 다른 책들에 사로잡혀 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상황에 대한 갈망이다. 꿈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꿈, 다른 상황에 대한 열망,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현실을 떠남이다?

 

한국어로 들었으면 정확했을 뻔 했다. 그의 목소리도 그가 사용하는 단어도 중요했기에 영어로 들었다가 조금 낭패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시작된 만찬은 다른 어느 때보다 푸짐했다. 와인이 거의 무진장 제공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은 여기 저기 늦게까지 남아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떠들어 댔다. 나도 그렇게 해서 소울 회장의 테이블 가까이로 갈 수 있었다. 그 사이 회장은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고 부인만 내가 찾던 그 소설가랑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전 총독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더 라이트 호노러블’이라는 칭호를 부르는 그녀가 신기했다. 저런 걸 어찌 다 아남!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이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여기에 참석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통역사로서. 나 자신도 누군가의 메모를 정리하다가 한두 편 단편을 발표한 글쟁이에 속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 소설가가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주면서 사진을 부탁하는걸 보니 정말 이 캐나다 여성을 존경하는가 싶었다. 사람들이 또 밀려오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양반을 양보하고 우린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이 여성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되었어요. 지금은 은퇴했으니 파트너 동반여행 자체가 무리는 아니겠지만, 소울 회장보다 한참 연상인데 그럼 칠순도 넘긴 나이겠죠. 어디 동반뿐인가요. 행사마다 동참하잖아요, 걷기도 조금은 불편해보이면서. 홍콩 태생의 중국인이 어려서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건너가서 캐나다에 뿌리를 내렸다 - 것도 모자라서 총독까지 지낼 수 있었다니.

우와, 그 정도이시구나. 그런데 왜 파트너라고 하시는지?

아, 일단 소울 회장과 다른 이름을 쓰고 있고, 클락슨은 첫 결혼의 성이라죠, 아마. 제가 그냥 훑어 본 바로는 둘 사이 오랜 동반자적 관계였다가 클락슨의 총독 취임 시에 거행된 결혼식이니까 그냥.

네, 그렇군요. 그런데 난 고은 선생님 이야기 들으면서 속으로 반론을 펴보았어요, 속으로만. 보편이 없으면 특수라는 개념이 생기는가요? 보편을 향하지 않으면 특수 이익집단을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문화란, 문학도 그 범주에서, 구체적 특수성에서 해방적 관심을 보이면서 동시에 보편주의의 형태를 대변하는 양가적 것이라는 테리 이글턴적 관점에서 하나만을 선택한다는…….

어머나, 이글턴이라면 미적인 것이야 말로 인간의 에너지들을 근본적으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모든 헤게모니적이고 도구주의적인 사고의 적수로 본다 하지 않았나요?

아, 뭐. 꼭 그런 것 같지는 앉지만, 너무 가지는 맙시다.

그래요, 실은 난 공부에서는 손을 떼었답니다.

네 뭐. 준비된 노벨수상후보자 앞에서는 조용해야지요!

내 말에 머쓱해하던 그녀는 ‘증명사진’ 하나 찍어두겠다고 텅 빈 무대에 혼자 올라가 섰다. 우리 둘은 함께 찍지 못했다. 부탁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거의 파장이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그녀는 낡은 책을 따로 들고 있었다.

식사에 책을 가지고 가셨어요?

아, 이거? 난 르 클레지오는 지한파라서 참석했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의 발언이 무척 솔직하여 감동적이었어요. 글쓰기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아팠어요. 내 말을 유명인사가 대신 해주는 것 같아서. 생각하지 못했던 감동에서 저녁식사에 오면서 혹시나 하고 이 책을 가져왔어요. 첫 번역출판본 『조서』 말이어요. 여기에 사인 받았어요, 조금 아까 여기서. 한국에서 첫 출판본이라고 하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80년대 이었으니까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내일은 뵙기 어렵겠지요, 난 종일 총회이고, 선생님은 시낭송회 가실 거라고요?

그래야죠. 잘 자요!

 

 

7.

목요일은 정말이지 종일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총회장에 매어있으면서 나는 왜 그녀를 찾고 있었을까? 시낭송회에 갔을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랬다. 총회는 컨벤션홀에서 종일 계속되었고 시낭송은 근처 제이드홀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점심시간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엔 총회가 끝나자마자 시낭송 홀을 기웃거려 보았다. 그곳은 더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하긴 저녁까지 이어질 인각사 관광을 위해서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인각사는 군위군이라고, 경주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예 경북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한참을 가다가 영천 쪽으로 올라갔다. 거의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린 느낌이었다. 처음 버스가 출발해서 마지막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를 서성이니까 그리 더 길게 느껴진 것일 게다.

 

군위의 동쪽에 있는 인각사는 정확히는 인각사지라고 할까.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다는 때문으로 유명한 곳이고, 명부전과 산령각 이외에 나머지 법당들은 새로 지은 것들이라 했다. 일연스님의 박물관이란 곳은 그 명칭에 걸맞은 자료는 없는듯했다.

 

근처 일연공원의 만찬에도 패션쇼 <삼국유사>에서도 뮤지컬 <삼국유사>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제 좀 과했었나, 여러 가지 의미로? 설마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여기에서 저녁식사 후까지 행사가 계속될 것이니까. 그보다는 ‘천년의 신앙, 천년의 기다림’이라는 부제를 단 도화녀와 비형랑의 뮤지컬 동안에도 그녀가 왔을까를 생각하거나, 무형문화재라는 줄타기 장인의 아슬아슬한 묘기의 순간에도 하늘 위가 아니라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가 우스웠다.

 

안개처럼 부슬거리는 비 때문인지 사람들은 비닐우의를 나누어 받고서도 기분들이 가라앉았다. 외국 회원들은 실망의 표정이 더욱 심했다고 느껴졌다. ‘프리 더 워드’에 꼭 인각사가 알맞은 메시지를 준 것이었는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조금 웅성거리기도 했다. 『삼국유사』를 역사보다는 문학 쪽으로, 기록문학의 의미로 보면 빠지지 않는다고 대꾸하면서도 나도 실은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거나 긴 하루였다. 이제 하루만 더 견디면 된다. 이제 정말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8.

그렇게 금요일이 밝았다. 오전 오후 총회가 있지만, 4시경 폐회가 선언되면 이어서 기자회견으로 일정이 끝난다. 한숨 돌리고 나면 아주 편한 기분으로 환송만찬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마침내 그녀는 시낭송을 했을 것이다. 오전 총회 후 곧장 시낭송회장으로 달려가 보았으니 벌써 끝나고 텅 비어 있었다. 제이드홀 옆 다이아몬홀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는데, 어디에도 사람들은 없었다. 벌써 점심식사 홀로 흩어진 뒤였나 보다. 시낭송회는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 텐데. 숨바꼭질이다, 꼬박 이틀 동안을.

 

어쨌거나 저녁시간 까지는 정리할 것들이 좀 있었다. 일이 끝났으니 간단히 통역사들끼리 정리 겸 마무리인사도 나누었다. 내일 남은 것은 떠나는 일 뿐이다. 조금은 늘어놓았던 짐들도 정리해 넣고, 저녁과 낼 아침에 쓸 것들만 남겼다.

다 저녁에, 갑작스레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벌써 출발해버린 것은 아닐까. 잠시 방에서 쉬다가 그 생각이 들자 좀이 쑤셨다. 우린 전화번호를 주고받는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 대부분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과 눈인사나 하는 정도가 이렇게 무슨 대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환송만찬에 가려다말로 프런트에 들려 보았다. 그녀가 묵는 방은 아니까 혹시 물어나 볼까 하고. 프런트에서는 내 예상대로 체크아웃 했다는 말을 한다. 설마.

 

아, 여기 메모가 있는데, 혹시 한금실 선생님이신가요?

 

그것이 다행하게도 내 이름이었다. 나는 메모를 받아들고, 받아만 들고 그냥 서 있었다. 지나가던 영어담당이 불러 세웠을 때야 만찬장으로 함께 향했다. 만찬은 파장답게 더 편안한 가운데 공연들도 더욱 수준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참 제대로 된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들어본 것이 언제 적이던가. 중창단도 재즈밴드도 몇 년 간의 문화생활을 하룻저녁에 다 맛본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둔 메모는 방에 들어와서야 펴 보았다.

한샘, 저 벼락같이 출발합니다. 허무하게 내 일정을 끝내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졌어요. 오후 총회엔 투표권이 있는 분들만 들어간 대죠? 오후를 어슬렁거리며 환송만찬을 기다리기엔 나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고 싶어져서요, 집에서.

나를 조금 걱정했겠죠, 아마도? 낭송은 조금 떨린 채 시작하니 끝이 나더군요. 몇몇 감동적인 외국 시인들의 낭송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실한 시도 영어도 부끄러웠는데, 끝난 뒤 뜻밖에 동문들 선후배들을 만나서 외롭지는 않았어요.

사족 : 책자에서 잠비아의 니콜라스 카윙가의 「우리 자신들」, 트리에스트의 안토니오 로카의 「아직은」을 읽어보세요.

 

그렇게 사라져버린 소설가 그녀를 생각한다. 시인도 아니면서 시낭송을 하려했다는, 그때까지는 도망가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그녀를. 그리고 도망가 버린 그녀를. 나는 그녀가 부끄러움에 도망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외로움에 사무쳤을 것이라고도 믿는다. 외롭지는 않았다고 쓰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다. 나는 외로운가? 나는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거나 그런 말을 하지도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괜찮다.

 

나도 물론 메모를 썼다.

 

아무개 선생님, 총회 결과를 말씀드릴게요. 레바논과 망명 북한작가 펜 센터 가입안이 통과되었고, 2013년 펜대회 개최예정지는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랍니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학수호 도시래요.

아차, 그녀는 퇴실을 했고, 나는 그녀가 있는 곳을 모른다. 안다고 하더라도 이런 내용을 뭣 때문에 써 보낸단 말인가. 메모를 습관대로 잘게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 일찍 나는 첫날 아침을 먹던 자리로 가서 똑같은 빵에 똑같은 커피를 마셨다. 그날 아침처럼 자리 때문에 어색해하던 그녀는 물론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쪽을, 첫날 아침 그녀가 앉으려다 말다가 옮겨 다니던 테이블들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순간은 반복되지 않는다.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내가 예서 누군가를 만났었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라고 내가 그랬었다. 꼬박 일주일의 작가들 틈새 기웃거리기를 뒤로하고 일상을 향한다. 행여 내 틈새는 새나가지 않았기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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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6.5. 중편 「틈새」,『동리목월』 2013 여름호 (통권 12호), 233-279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8:04

포이동 266번지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포이동 226번지 - 이 지번은 픽션이어야 한다. 포이동 226번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거기 사람들의 허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달을 허비한 것이 잘 한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를 그리로 데려간 것은 아직 이른 나이에 요양병원에 들어있는 당숙모다. 아버지의 사촌동생, 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당숙의 부인, 그 당숙모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챙기신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 둘째 큰아버지는 벌써 옛날 결혼 전에 미국에 가서 안착하셨으니까 - 아버지가 집안의 연결고리가 되신 것 같았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 뒤에서 늘 분주하시다.

 

 

요양병원 로비는 정작 환자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화려한 셈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간단한 음식을 챙겨 오셨다.

(누구?)

나 금실엄마.

(금실엄마 누구?)

여기 우리 금실이. 나 금실엄마. 우린 동갑내기 한실이들!

한실이란 말이 당숙모를 움찔하게 한다.

한종남 씨 아내!

어머니가 길게 부르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머니는 아차 하는 작은 소리를 내시더니만 그냥 가져온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여기, 아지매 좋아하는 파전 있어요. 동래파전! 아이쿠 다 식어버렸네, 꼭꼭 싸 왔는데.

눈동자가 음식 쪽으로 옮겨가지를 않는다.

어머나,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올 걸 그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엄마, 정구지 지짐이라뇨?

아, 부추전을 거기선 그렇게 부르나봐. 하긴 네 숙모 말 듣다보면 웃겼다. 할머니는 얇은 솔전을, 외할머니는 두툼한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주더란 말이지.

잘 드시는 것도 있군요.

응, 조금. 네 고모는 수완이 좋으시잖냐. 헌데 지금은 무릎 땜에 많이 못 다니시더라, 칠순 때까진 펄펄 날더니. 해서 네 당숙모를 이쪽 병원으로 옮긴 것 아니냐. 고모한테 대면 내가 한참 젊지 뭐.

엄마가 뭘 젊다고 그러세요. 엄마도 좀 쉬엄쉬엄 하실 나이신데.

며느리도 없는 사람이 무슨 쉴 복? 하긴 요샌 며느린 소용없다더라. 난 딸이 셋이나 되니 좀 쉬엄쉬엄 살아 볼거나. 아차, 이를 어쩌나. 아지매! 이간호사님! 이선생!

어떻게 불러도 당숙모는 영 모른 체 하시고 만다.

음식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도와주니 조금 받아든다. 규칙적으로 벌리는 입이 아기 같다. 요양병원 생활에도 이력이 붙나 보다.

보세요,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먹이면 곧잘 드세요.

어떻게 요령이 좋으시네요, 다행스레.

안 먹으면 혼내준다고 그러시나요?

내가 엉뚱하게 끼어들었다.

예, 정말 그래요. 이걸 안 먹으면 뭘 안주겠다. 뭐 좋아하는 간식 같은 것. 그렇게 어르기도 하고. 차라리 아기 같은 분들이 우린 쉬워요. 말은 안 해도 크게 고집을 부리시지는 않으니까.

그럼 왕고집부리는 환자들도 있어요?

그럼요, 폭력도 있어요. 사정없이 손을 휘저어버리죠. 무작정이니까 얻어맞기도 해요. 지난달엔 신출내기 요양보호사가 울고 그만 두기도 했는걸요.

울어요?

꼭 아파서라기보다. 여기 일 작정하고 나서기 쉬운 건 아녀요. 여기가 처음인데 크게 충격이었나 봐요. 다음 직장에선 잘 하게 될 거예요. 누구나 첨엔 견디기 어려워요.

자, 어르신, 이묘순할머니, 이묘순아줌마, 한번만 더!

몇 입 먹이다가 지친 요양보호사는 소용없다 싶으니 입이 귀에 걸리는 미소를 순간 해보이고는 자리를 뜬다. 당숙모는 멍하니 멈추어 있다. 주섬주섬 그릇을 챙긴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 숙모 몸은 멀쩡해 보이지 않더냐?

저를 잘 모르시던걸요. 실어증뿐 아니라 아무래도 눈도 좀. 아니 기억 자체가.

그럴 것이다. 어떻게 정신을 붙들어 매고 살아갈 것이냐, 식구 모두를 다 잃고. 그런데 어찌어찌 버티다가 하필 포이동에서 장롱에 목매단 사건 이후로 더 저리 되었다고,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 설레야.

장롱이라뇨?

신문도 안보고 사냐.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모르는 것 없이 다 뒤져 본다던데.

재작년엔가 포이동 화재사건이야 알죠, 그 다음 더욱 처량해진 사람들. 하긴 당숙모가 저리 되신 건 한참 전이죠? 포이동이면 당숙모 사시는 데도 아니잖아요.

그게 가까운 거리지. 걸어서 15분, 20분도 안 되는 거리야. 네 숙모 사는 데가 물론 포이동 재건마을하고야 같겠냐. 개포 시영은 재건축 기대로 한 때 잘 나갔었다더라. 그럼 또 뭐하겠어, 당사자가 저리 되었는데. 또 성한들 24평 그런 걸 받으려면 들어갈 돈이 얼마고……. 모르겠다. 아무렴 네 숙모 정신이 돌아오려나.

그런데 장롱 사건은 뭔데요?

그게 화재사건 한참 전 일이지, 저 사람 저리 멍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어디서부터 하랴? 아서라. 말죽거리 네 고모가 저 사람들 서울로 불러들일 때만해도 희망은 있었지. 아니, 우리가 볼 때는 어처구니 없더라만.

어머니는 섣불리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러다 결국 털어놓으신 것은 고모를 통해서 알게 된 당숙모의 얄궂은 포이동 가슴앓이였다.

1979년 마산의 작은 병원의 간호원 이묘순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늦깎이 대학생 한종남과 미래를 설계하는 사이였다. 종남을 처음 만난 것은 전방으로 오빠 면회를 갔을 때, 간호고등을 졸업하고 간호원이 되어있을 때였다. 시를 좋아했지만 언감생심 대학은 꿈도 안 꾸었던 그가 제대 후에 대학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묘순 때문이었다.

한종남은 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지만, 아직 꼬마였던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함흥에서 1.4후퇴를 피해 흥남부두를 떠나온 어머니가 거제도 피난민촌에 도착한 다음날 철 이르게 세상에 나왔다. 북에 남은 아버지 - 우리 아버지의 막내삼촌 - 생사를 모른 채 흥남이라 불리며 부산에서 자라고 있었다. 입학할 때가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정문리 본가로 모자가 찾아온 뒤로 항렬자를 따라 종남이 되었지만 부산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는 많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부마사태의 와중에서 체포되었는데, 며칠 뒤 대통령 사망뉴스가 나갈 즈음 구토를 하며 의식을 잃다시피 병원으로 실려 갔다. 뇌와 관련하여 응급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불행했다. 그렇게 그의 생은 졸업은커녕 그 상태에서 정지해버렸다. 중환자실로 달려온 여자 친구는 - 그이가 당숙모다 - 놀랍게도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고, 그 길로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해서 4인 가족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한 두 해를 버티다가 치료에 대한 희망으로 서울로 왔다. 아빠는 아기가 재롱을 부리면 함께 친구하며 웃었다. 아기는 겨우 아장거리다가 넘어지다가 점점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아빠는 점점 움직이는 일을 못하게 되었다.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흔한 감기에도 입원을 반복했다. 생활은 기울고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다시 직장을 구했다. 간호원 자리는 점점 대졸로 채워졌고 지방의 간호고등 출신으로는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야간 담당만을 자원하면서 준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아기는 저녁마다 자장가를 불러주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랐다. 어머니도 아내도 온갖 힘을 쏟았지만 종남삼촌은 감기에서 폐렴으로, 폐렴에서 패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시장엘 갔으려니 했다. 그날따라 아일 데리고 어른걸음으로도 10분도 넘는 양재천엘 왜 갔을까. 징검다리 부근에서 빠졌을 리는 없다. 거긴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깊이이니까. 혹시 모른다, 먼저 아기를 놓치고 구하려다가……. 멀리서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아기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했다. 할머니는 잠깐 아기를 잃었다가 뭔가를 소리치며 물속으로 정신없이 뛰어든 것 같았다고. 그렇게 할머니와 아기가 갔다. 혼자 남은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병원에도 다시 나갔다. 낮이면 양재천엘 자주 나갔다.

당숙모가 포이동 266번지와 연을 맺은 것은 일단 양재천변 코앞의 동네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심코 천변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곤 하다가 이상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두 세 시쯤이면 폐지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이 박혀버린 때문이었다. 누굴까. 당숙모는 할아버지들의 얼굴과는 친숙치 않았다. 친가 외가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조차 일찍이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란 어떤 얼굴인가를 몰랐다. 그런데 등 위쪽이 마르고 아기처럼 수줍은 얼굴의 할아버지란 당숙모에겐 상상이 안가는 어떤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 할아버지는 꿈에선가 어디에선가 분명 만났던 사람이었다. 누굴까. 몇 번을 그렇게 스치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곳이 포이동 266번지였다. 개포 시영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그곳에, 사람살이인가 싶게 살아가는 동네. 아니 동네 느낌이 아니라 쓰레기하치장 같은 곳. 거기가 그 아기 같은 할아버지가 몸을 누이고 사는 데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도통 말이 없었다. 처음 쭈뼛거리는 인사에도 알아듣는 듯 마는 듯. 귀가 안 들릴까. 그렇게 기웃거리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뉘시우? 그 양반 무신 말 잘 안허걸랑.

아유, 죄송해요. 제가 아는 분인가 싶어서 따라왔는데, 언젠가 헤어진 누군가 싶기도 하고.

에고, 잘 되었우, 행여 아는 사람이믄. 이 양반 평생가야 사고무친에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걸랑.

아니, 어떻게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게, 우리 아저씨가 하꼬방 살 때부텀 만난 사람인데 말이우.

하꼬방이요?

아, 그 청계천서 폐지 하다가 이리로들 왔다는 것 아니우. 난 여기 온 뒤로 만났다우.

그럼 아저씨께선 잘 아시겠네요?

알다마다요, 그 사람을 살렸다는데. 뭔 인연인지 여기꺼정 함께 왔으니.

아저씨는 해가 넘어가서야 판자촌으로 들고, 당숙모는 밤 근무를 해야 해서 주말에야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설명도 아리송하기만 했다.

한참 군사정권 때 일인데, 어느 새벽 청계천변 하꼬방 판자문 앞에 모로 누워서 새우잠을 자다가 발견된 사람이란다. 첨엔 자는 줄로 알았는데, 정신을 잘 못 차려서 일단 끄집다시피 하꼬방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자기 이름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말을 시켜도 못하고 알아듣는지 마는지 그런 사람이었다. 하꼬방에서 한데 살던 둘 중에서 나이든 사람이 삼십 중반의 김 씨였다. 이 노인네를 어쩌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렇게 며칠, 가만 앉은자리에서 폐지를 혼자 정리하고 그러더니 고물 책 하나를 보고 눈이 뒤집히더란다. 그걸 품고 자는 것이 신기해서 구경거리가 났나 싶었단다. 다음날엔 두 사람이 각각 일을 나서는데 엉거주춤 따라나서더란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성 싶었는데도. 결국 첨엔 뒷짐을 지고 따라다니더니 오후엔 뭔가 글자가 있는 것이면 슬며시 집어 올리더니, 그제서는 버린 책이며 휴지를 집어오는 일을 곧잘 하더란다. 어수룩한 사람 버리기도 뭣하고. 그러다 하꼬방 사람들이 한꺼번에 재건마을로 쫓겨 올 때 묻어왔는데, 이름이 난감했다. 순간 김 씨가 얼른 생각을 해낸 것이 이 노인이 처음 집어든 책에 적힌 이름이었다. 그것을 비슷하게 따서 김수용이라고 둘러댔다. 일가 아저씨인데 말을 잘 못한다고 하고. 나이도 대충 적어 넣었으니까 실제 나이는 모른다. 일단 서류들을 만들어 재건대원등록증을 나누어 받았으니까 유령에서 사람이 된 것. 어쩜 다행인 것이 호적 없는 사람들도 그땐 주민등록 취득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포이동 200-1번지. 정말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서인가는 이 동넬 완전히 유령 취급을 해서 아예 주민등록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 뭐 그런 정보였다.

김수용이래요, 유령이었다가 사람이 되었다네요. 참 그런 일들도. 그래도 유령처럼 되기 이전엔 분명 사람이었을 거 아녜요? 어디서 뭘 하다가 청계천 하꼬방 문간에 나타났을까요? 그 얼굴이 뭔가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설까, 알 수가 없어 고민 중이예요.

걸 뭘 고민하고말고. 거야 병원에서 그 많은 환자들 보며 살아온 세월 때문이겠지. 자네 살기도 힘 드는데…….

양재동 고모가 그렇게 말하면, 글쎄요, 난 포이동 거길 꼭 들여다봐야 숨이 쉬어지는 걸 어쩌죠, 하면서 웃곤 했단다. 이후로 고모가 당숙모의 입에서 듣는 말은 모두 그 재건마을 이야기뿐이었다.

포이동 266번지 - 장화 없인 살 수 없는 진흙탕 속. 어쨌거나 땅을 개간하고 얼기설기 판잣집을 지어 만든 마을이래요.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꼬, 했어요. 망태할아버지들 말고도 일가친척이 없는 고아 출신도 느닷없이 이리로 팽개쳐졌다고도 해요. 어쨌거나 양재천 저쪽 사람들은 여길 양아치 소굴이라 한다네요. 무슨 특별단속기간 같은 때는 난데없이 절도범이라고 잡혀가는 사람도 있고. 그게 실적을 세우려는 형사들이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도 하고. 죄 있고 없고를 누가 그리 훤히 안대요? 그래도 이렇게 여자들도 들어왔고 아이들도 생겨난 것이 사람 사는 동네죠.

포이동아재 - 숙모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언제 다리를 다쳤을까요? 보아하니 상이군인은 아닌 것 같고, 뭐 총상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요.

포이동아젠 가족이 없었을까요? 도통 가족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질 않으니. 김 씨 아저씨네가 옆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집 꼬마 애를 보면서 눈가가 축축해지는 걸 난 봤어요.

포이동아젠 나이도 알 수 없으니. 누런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는 걸 보면 환갑이나 되었을까? 책은 고물에서 골라낸 것들. 신문도 날짜 관계없이 샅샅이 보는 것이 뭘 찾는 사람인지…….

아, 포이동아재가 처음에 꼭 껴안다시피 내놓지 않고 읽었다는 책이 뭔 줄 아셔요? 눈 큰 김수영의 시집이에요, 아마 첫 시집이죠. 『달나라의 장난』. 작은 나무상자 위에 그 책이 있더라고요. 1950년대에 나온 데다 버려진 것이니 너덜너덜했지요. 원래 주황이었을 바닥 몇 센티미터 위로 펜 하나로 그린 고층과 저층의 상징적인 집들, 그 위로 한 가운데 둥글게 뜬 달. 글자들이 종이 속으로 녹아들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보다 온전했어요. 그보다 기가 막힐 일은요, 집엔 애 아빠가, 종남 씨가 남긴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가 있거든요. 함께 샀어요, 900원 주고. 양장본인데 표지 색깔이 독특해요. 처음 그걸 샀을 때 난 무심코 바다색이라고 했더니, 제목의 달을 보고서도 우주보다 바다가 먼저 생각나느냐고 나를 놀렸던 얼굴이 떠올랐어요. 우린 「복중」에 애를 배서 조용해진 계수 이야기에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나도 그럴까? 너무 조용한 것도 병이다, 너무 생각하는 것도 병이다…… 그런 구절들을 외었지요. 그 얼굴이 갑자기 포이동아재 얼굴에 겹쳐지는 거예요. 아이 같던 그 표정에 주름이 깊어지더니……. 아, 세상에 어떻게 똑같이 김수영의 시집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달 어쩌고. 세상엔 닮은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어떻게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같은 취향을 나누죠? 형님도 그 아재 한번 보면 안 될까요? 얼굴만 좀…….

물론 고모가 포이동까지 가서 그 노인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사람이 우연도 있는 것이지 뭘 그러나. 봉산가 뭔가 이젠 좀 그만 하지, 자네도 요새 보면 얼굴이 부숭부숭하고 그러는걸.

고모가 그렇게 말리면 당숙모는 이젠 포이동 들르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거기 종남 씨 얼굴이 겹쳤던 주름진 얼굴을 보러 가야만 한다고. 언제 어느 순간 옛날 생각이 나거나 입이 열리거나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게 실어증이라기보다는 함구증일지…….

그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때서. 병원에서 보는 환자들로 모자라는가. 이젠 자네도 뭔가 앞날 생각을…….

고모는 실어증인지 함구증인지 말을 거의 못하는 답답한 노인을 찾아다니는 당숙모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거긴 여름에도 방역 한번 안 나와요. 사람 사는 동네에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마을 생긴 것이 언젠데 아직 수돗물도 없어요. 어떻게 여기 한 동네만 빼놓고 공사를 해요? 사람들은 땅에 구멍을 파놓고 지하수를 길러다 먹죠. 물을 떠다 붓고 한나절이면 물이 퍼렇게 변해요. 숯을 놓거나 짚 같은 거나 베 쪼가리를 깔고 걸러보기도 하고.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사는 포이동아재한텐 물이 젤 문젠거라요. 밭은기침도 가끔 하는데. 참 형님, 구룡사 물이 아주 좋다지요? 불공드리러 가서 안 드셔봤어요?

당숙모는 불심과는 상관없이 고모를 따라 약수라고 소문난 구룡토수를 길러 다녔다.

아, 그런데 재활근로대가 해산되었다는 것이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포이동아젠 요즈음엔 마을 출입이 통째로 통제되니까 좀 쉬겠지요?

그건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이 동네 밖으로 출입이 통제될 때 한 말이라 했다. 실제로 나라 안팎이 88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들뜬 때였다. 서럽게도 이들 빈민들의 꼬락서니가 국가의 수치라며 마을 밖 출입을 통제했단다. 고모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당숙모는 더 자주 그를 찾을 밖에.

포이동아젠 큰일 났어라. 포이동 266번지가 개포4동으로 번지수가 바뀌면서 주민등록을 안 해준다는군요. 더 큰일 났어요. 자활근로대 해산이란 게 심상치 않은 거라네요. 원래는 우선으로, 그러니까 재건마을 사람들을 먼저 선착순으로 땅을 불하해준다는 조건이었는데. 그게 글쎄, 이미 살고 있는 땅을 새삼스레 돈을 주고 사가라는 것인데. 아무튼 법이 바뀌어서 266번지 사람들이 불법점유자가 되었다네요. 첨엔 하천 가에다 잡아넣다시피 억지로 데려다 놓고서 조용히 살면 땅을 준다고 했었다는데. 고달픈 삶에서 제 각각 나름대로 꿈같은 것을 품고 왔었을 것 아뇨. 고물상 김 씨 아저씨도 청계천 사과상자보단 나은 집을 가질 줄 알았다네요. 그러다 십년 살고 나니까 불법점유라고.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만, 그게 원래 서울시 도서관 부지였다는 것이 말이나 된가요. 십년만 더 살면 일 없을 텐데, 아니, 그리 될까봐 미리 수 쓰는 거래요. 나라가 국민한테 수를 쓰다니. 고르고 골라서 제일 비참한 국민한테.

진짜 큰일 났어요. 한번 불법점유자라 딱지를 붙이니깐 이젠 무단 점유 변상금을 내라고 세금이 날아들었대요. 각 집에 30만원도 넘는데 그게…….

당숙모의 근심은 해가 갈수록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이어졌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못 해내라. 옆집은 둘이 벌어도 다 못 한대요. 김 씨네 아줌만 청소일 다녀요, 벌써 언제부터. 근데 이자가 20퍼센트나 된다는데 그게 자꾸 불어나면 어쩌냐고요.

포이동아젠 분명 병이 있어라. 몸 움직이는 것이 더 근들근들한데 병원엘 가지 않으니 알 수 없지요. 내가 간호사라고 해도 들은 신청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 알아들었다는 말인지, 내버려 두란 말인지. 오늘은 피붙이는 없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퀭한 눈을 한번 크게 뜨더니 눈을 딱 감아버리더라고요. 말은 안 해도 분명 알아는 듣는 거예요. 무안해서 혼났는데, 얼결에 잘 계시라는 소리도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맘 아픈 걸 물어요…….

당숙모의 근심걱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포이동아재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진즉에 그를 등졌으므로, 그는 쉽게도 떠났다. 옆집 김 씨 아저씨가 한 이틀 꼴을 보지 못해서 들여다보았다는데 숨소리 없이 천장을 보고 누어있더란다. 그제는 놀라서 뛰어 들어가니 오른 손 검지로 나무상자 하나를 가리키더니만 눈을 스르르 감았다고 한다. 몸을 일으키려하니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계속 상자를 가리키고. 해서 상자를 열었더니 거기 몇 소장품이라는 것 중에 처음 발견해서 가슴에 품고 읽었다는 시집과 낡은 회중시계가 하나 있었고.

장례랄 것도 없이 김 씨 아저씨하고 동네 몇 사람이 구룡산 언덕에 뿌려주면서 승천하라고 빌었다. 아홉 형제들 함께 승천을 못하고 남은 막내 용이 승천을 기다린다는 구룡산, 여기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살아서 못 오른 하늘에 죽어서는 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고도 바로 흩어져버리지 못하고 포이동아재의 빈 단칸방에 돌아와 앉은 몇몇 사람들. 임자 없는 세간들, 그것이라도 대충 필요한 사람이 써보자고 챙기는 실팍한 사람들. 실팍하지 않고서야 곤곤한 삶을 어찌 살아남겠는가. 작고 낡은 나무상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상자를 고이 가져갈 사람은 우리 간호사 선생 밖에 누가 또 있겠냐고, 딸도 아니면서 그만큼 극진히 위했으면 당연히 뭐라도 간직하라고. 또 우리들 중 누가 책 같은 걸 보겠냐고 했다. 그렇게 동네 이웃도 아닌 당숙모에게 상자가 돌아왔단다. 『달나라의 장난』과 낡아서 서버린 회중시계가 들어있는.

이게 무슨 조화예요. 이 시집이 나한테 오다니. 또 이 회중시계는 뭘까요. 쇼와 18년 HDK - 이게 이름이면 김 씨는 맞나? 고 씨, 구 씨도 있지만 김 씨일 확률이 높고. 얼결에 붙인 이름이 성이라도 얼추 맞았네요. 참, 쇼와 18년이면 해방 전이잖아요, 사십 몇 년? 이게 포이동아재 것은 아니겠죠, 설마? 그때 벌써 이런 시계를 가진 사람이 누구였을까? 포이동아재 아버지였을까요? 젊어선 부잣집 도련님이었을까요? 아참, 성을 앞에다 썼으면 한 씨? 안 돼. 잠깐, 설마 종남 씨 아버님 항렬은 뭐죠? 규자 맞지요. 하긴 진자 규자라셨으니 그것도 아니고.

고모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다시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이북에 있을, 살았건 죽었건 북에 남았다는 진자 규자 삼촌을 떠올리다니. 아닌 건 확실하겠지만, 너무 그럴싸한 예감에. 하지만 어떻게든 가운데 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으셨단다.

세월은 또 흘렀다. 뭔가 들뜨게 하는 새천년이 되어도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더욱 풀이 죽었다. 당숙모의 말로는 원래대로라면 이제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가질 때가 되었는데 현실은 무단점유자로서 빚 방석에 주저 앉아버렸으니 말이다. 1998년에야 서초구와 강남구가 서로 밀던 수도공사가 완성되어 사람들이 순간 환성을 질렀다. 그 기쁨도 잠시, 이것이 내 집 수도가 아니라는 박탈감은 차라리 수도 없는 내 집을 원하게 했다. 마을은 여전히 결함투성이였다.

그 사이 김 씨도 젊지 않은 나이가 되고, 간호사인 당숙모의 지식으로서도 다 알 수 없는 병을 주저리주저리 달고 살았다. 심부전 등 치료가 불가능한 건 아니나 산소공급이 문제라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한 번에 몇 십만 원씩 하는 치료비 감당을 해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그가 덜컥 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의료보험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무슨 일일까. 그들은 국민건강보험도 기초생활수급자 지정도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냐고! 난 그런 걸 정말 모르고 있었다. 재작년 초여름 심각한 화재사건 보도를 보면서도 몰랐다. 어떻게 초등학교 아이의 불장난이…… 라고 애석해 하면서도 재건마을이 뭔지 몰랐다. 아버지가 70년대 80년대를 가족을 돌보면서 묵묵히 맡은 일만 하시면서 살아온 것을 후회스럽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보다도 더 많은 공부를 하고서도 이렇게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불발인 내 처지만 통곡하면서.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 인권이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구나. 그걸 까맣게 몰랐다. 자유와 평등과 박해의 상징인 파리 복판에 가서 박사학위를 했으면 뭣 하는가.

포이동 이야기는 장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청소일로 병마 속 남편을 돌보던 김 씨의 아내가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되어 따라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가 말이다. 장롱에 목을 맨 참극은 로맨틱 러브스토리로 먼저 간 짝을 따라 죽는 환상이 아니다. 2,3십 년 전 아웅산테러사건 뒤에 극도의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고관의 아내와도 전혀 다른 결정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렇게 끼적거린 메모를 남겨 놓고 죽어버린 참담함. 의식주 - 문자 그대로 의식주 해결을 못해서 죽어야 했던 삶. 하필 그들의 아들은 명예와 충성심과 용기로 무장하고 무엇보다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군복무 중이었다니.

이 아들은 실제로 군대에 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는 어머니가 직장이 있다는 이유로, 겨우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다고 한다. 막상 어머니마저 죽었을 때에는 이제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역시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고. 병마와 가난 속의 부모를 지킬 수 없는 젊은이들이 필승의 신념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이 군인에게는 15년째 밀린 토지 변상금 4,5천에 자동차세 천여만 원 등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굴러왔다.

뭐 자동차세라고? 그럼 그 동네에도 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네.

그렇지만 차가 다 차인가. 고물 일을 하느라 고물 차 하나를 얻었는데, 명의를 이전하자마자 압류를 당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법을 모르는 그들. 설상가상. 명의만 있지 압류당해서 탈 수도 고물을 실어 나를 수도 없는 차는 그들의 저승사자였다.

하필 장롱에서, 키가 작다고 어떻게 장롱에서.

그 아줌마,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아주머니가 발견된 다음날 당숙모는 혼 빠진 사람 같았다고 한다. 사실 포이동 백 가구 가까운 사람들은 끈끈한 정이 양재천 북쪽 강남과는 사뭇 다르다 했다. 둘, 셋 모이면 비교요 갈등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워낙 가난의 평준화 속에 가라앉으면 키 재기할 기운이 나지 않는 법인지. 설마 싶으면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회고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안다.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그것이 숙모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더란다. 그리고는 말을 접었다. 어떻게 실어증이 걸리는가. 가족의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너덜너덜한, 눈 큰 시인의 닮은 꼴 시집 두 권을 가슴에 품고, 호주머니에 쇼와 18년의 회중시계를 감추고 방안에 들어 앉아버린 여자를.

얼음장 같은 냉기에 놀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족보를 뒤져본다. 우리할아버지 상자 규자, 그 아래 덕자 규자, 진자 규자 할아버지들. DK라면 덕자 규자의 이니셜일 순 있지만 그 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학도병에 끌려가셨다 했다. 또 확실히 돌아가셨다, 해방에서 동란 사이에. 아니다, 혹여 일본 유학생 인텔리 작은할아버지의 시계를 막내할아버지가 지니고 있었을 확률은? 해방과 동란 사이 두 할아버지들은 뜻이 맞아 늘 함께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니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 아들을 한 번도 못 만난 채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생면부지의 며느리를 마주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숙모의 혼돈은 분명 포이동 266번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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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30. 단편 「포이동 266번지」,『광주문학』 2013 봄호(통권 66호), 197-21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7:59

초혼장

 

겨울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

강의보다 몇 배 어렵고 성가신 성적처리가 끝나자 슬그머니 집이 그리웠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그리웠다. 서둘러 기차를 탔다.

엄마, 어머니이!

그래, 다 저녁에 오는구나, 날이 춥구나!

어머니는 이번에도 부엌에서 나오셨다.

뭐 하세요, 또 부엌이세요?

아, 너도 오고.

얼굴에 웃음이 핀다.

뭐 좋은 일 많으세요?

좋은 일은. 하긴 좋은 일이지. 김실이가 숨 줌 돌렸지 않냐. 김 서방이 제 자릴 찾아가는 중이니까. 지금 다시 출근한지 며칠 안 되었다.

엄마, 이제 좀 김실이라 그만 하세요. 외가에서나 엄마한테 한실이 그러지, 누가 요즈음 그렇게 불러요? 엄마니까 은실이라 이름 부르든지 애 따라 승연엄마 하든지. 김실이 때문에 금실, 한금실, 내 이름이 사라지잖아요.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시잖냐. 괜스레 이름 가지고.

그런데 아버진 안 계세요? 또 정문리에 가셨어요?

아니, 이 추운데. 방에 계시는데 너 오는 것도 모르시네, 어째.

아버지는 살짝 잠이 드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내가 방문을 열자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으신다.

한박사, 왔구나아. 방이 따뜻해지면서 졸음이 왔나 보다.

말씀마다 또 그 한박사다.

아버지 저 왔어요, 금실이. 더 주무실 걸 그랬네요. 요새 어디 편찮으세요? 엄마 말씀은…….

아니다, 내가 궁리가 많아서 요새 잠을 좀 설쳤드니라.

그러게, 느 아부지가 요샌 개포동 종수씨 땜에 저러신다. 그 집 일이라면 지난 윤삼월에 끝났나 했었지만 여태도…….

소생이 없질 않소. 그러니.

그렇다고 꼭 그렇게 당신이, 당신 혼자서.

아무도 없질 않소.

지난 윤삼월에도…….

그건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소. 그것이 선친의 뜻이라고 헤아리자고…….

알았어요. 하지만 또 종수씨 일이 마냥.

그게 난들……. 애한테 무슨. 거 너무 긴 긴 이야기가 되놓으니 여기서 그만 둡시다.

평상시와 다르게 불평조의 말을 털어내던 어머니는 거기서 멈추셨다.

곧 있어 이모, 이모~ 하면서 승연이 승주가 들어왔다. 은실도 함께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종이연필 한 자루 씩에 입이 귀에 걸린다.

이모, 이모~, 이게 종이라고요, 엉?

그래, 나무가 아니고 폐휴지를 재생 한 것이지.

신기하다, 승주야, 그치?

누나, 이게 안 부러질까?

야, 조심 해야지. 걱정되면 나 줘! 난 이 초록이 너무 예쁘다.

아이들 수다로 떠들썩해지자 대번에 집안에 온기가 퍼졌다. 아이들이 온기다. 엄마가 된 은실의 공이다. 둘러앉아서 먹는 저녁밥은 밥맛도 사는 맛도 넘쳐나게 한다.

아직 차가운 방바닥에 요를 펴놓고 책상에 앉아본다. 내가 썼던 이 방은 지금은 누구나의 공부방처럼 쓰인다. 아직 한 쪽으로는 내 책들이 남아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아버지가 건너오셨다.

예, 아버지. 어머닌 일찍 주무시나요?

그래 요사인 좀 일찍 주무신다. 해서 내가 보통…….

아, 책 보시다 주무시고 그러시는군요.

아니 뭐, 오늘은 너라도 알아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뭐를요?

아, 네 어머니가 좀 성가시게 여기는 그 일 말이다.

아, 정문리…….

그러게. 그게 묘를 썼다고 끝나는 건 아니지 않냐.

묘를 쓰셨다고요? 누구를?

그게…….

아버진 말을 꺼내시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고 계셨다. 그러면 나는 늘 저런 이야기는 아들이 있어 나누고 싶으셨을 종류라는 인상을 받는다. 관습적으로 부자 사이에나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잘 모른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냥 계셨다. 그러다 결국 작정하고 입을 떼셨다.

윤삼월에 새로 묘를 쓴 분은 내 막내삼촌이셨다. 내가 새삼스레 이야기를 해두려는 것은 언제라도 한번은 너도 정문리엔 가 볼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언제라도 한번은.

아차. 정문리 이야기라면 두말없이 청주 한 씨 우리 집 내력이다. 우리 아버지는 장손의 막내시다. 1910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가 장손이셨고, 그 아래로 작은할아버지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삼촌들이다. 진사를 한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일찍 가장이 되시자 동생들에게 신학문의 길을 적극 열어주셨단다. 그런 동생들이 블랙홀로 빨려들듯이 가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여기까지는 몇 번이고 들어서 알고 있는 내력이다. 어느 집안인들 일제와 동란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만은.

쇼와 18년, 오늘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알아듣기 어려운 시절로.

그러니까 1943년 본격적으로 징병이 난무할 때 나는 아직 잉태도 되지 않았지. 선친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동생 하나를 징병으로 보내야했다더구나. 학도병으로 끌려간 삼촌 이야기는 처음부터 너무도 슬펐단다. 그렇게나 가슴 아픈 것은 하필이면 당신 딸이 당신 동생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부분이야. 일제가 고향 경찰서에서 ‘아버님 위독’이라는 전보를 도쿄 등지로 보내서 유학생을 귀국을 하게 해놓고서는 부산에서 배에 내리자마자 온갖 회유와 강요로 지원서에 도장을 찍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흰 설마 하겠지. 그뿐이냐. 순진한 소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일본 유학 중에 고향으로 숨어든 대학생들을 색출했단다. 아홉 살 난 여자애가 스무 두 살 제 삼촌을 일러바치는 일은 누어서 식은 죽 먹기였겠지.

내겐 누이가 둘 있었는데, 큰 누이가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그런 초여름 날, 학교에서 예쁜 일본 선생님이 최면을 걸었더란다.

일본에 유학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형이나 오빠가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 보세요!

누이는 번쩍 손을 들고 말했겠지, 우리 집엔 오빠 말고 삼촌이 왔는데요!

일본은 천진한 아이들도 이용했어. 그렇게 해서 큰삼촌은 일본군이 되었던 거야. 그렇게 해서 병을 얻었고 그리고…….

그래, 또 내 막내삼촌은 이번엔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인민위원회에 붙들려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북으로 패주하던 중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돌아오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그랬다. 실은 큰삼촌이 학도병으로 편입되었을 때 막내삼촌은 농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만주로 보내셨다고 들었지. 종전 후 두 삼촌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학도병 때 쇄약해진 몸으로 큰삼촌은 회생을 못했더란다. 난 너무 어려서 그렇게 들은 데로만 믿었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된 비밀은 무섭고도 슬펐다.

선친이,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배운 것 없는 농부의 자격으로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었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구나. 아버지는 당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삼촌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셨다고 했는데. 그게,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하필 국치의 해에 태어난 할아버지에게 땅만 파고 살라고, 일제의 교육 일체를 거부하신 것과는 대조적이었단다. 아마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셨을지. 어떻든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이상재 선생의 노선을 신봉했고, 신석우 선생의 문자보급운동을 숭앙했으니. 뭐 그건 그렇고.

해방에서 6.25전쟁까지는 어느 가정이나 상당부분이 덮인 채로 기억되곤 하지 않더냐. 우리 집에서도 아깝게도 삼촌 둘이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다만 병사요 납북이라는 통상적인 설명으로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었다. 추억은 아름다워라 - 그런 셈이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픈 과거를 잊으려 하니까.

해방된 대한제국에서 - 맞는지 모르겠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었다가 해방되었으면 대한제국이 맞겠지? 아니다, 대한민국 임정이 성년이 될 나이를 먹었으니, 이미 대한민국의 땅이었나? 그 사이시간에 삼촌 둘은 매우 적극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거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그것이 비밀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나중에 알게 된 내막은, 그래 무섭고도 슬펐다. 막 일제가 떠난 땅에서 내가 태어났지만, 흩어진 가족들이 다 모이기는 어려웠더란다. 종전이 되고도 한참을 기다렸을 때야 돌아온 큰삼촌은 병을 얻어왔다고 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진출했었으니까 기후인들 견딜 수 있었을까. 병중에도 큰삼촌은 막내삼촌과 더불어 청년답게 새나라 건설에 열정적인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지. 해방되던 해 스물두 살이 된 막내삼촌은 몸도 마음도 건강했고, 징용 갔다 온 형이 또 감옥을 드나들 때도 형을 우상처럼 존경했을 수밖에. 그러다 그 형은, 그러니까 학도병삼촌은 그만 더욱 쇠약해진 몸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대. 겨우 아장아장 걸었을까 말까했던 내게는 물론 손톱만큼의 기억에도 없지만.

그리고 막내삼촌 말이다, 같은 말 또 한다만, 남북이 여전히 대치 상태인 나라에서 남북과 관련된 꼭지는 공개된 비밀 아니더냐. 물론 이제는 그나마 좀 비극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러니까 막내삼촌은 납북당한 것이 아니었단다. 민전 활동 중에 뜻하는 바 있어 벌써 1948년도 봄에 월북하는 인사들을 따라가신 거래. 민전이 뭔 줄 네가 알 리가 있겠냐. 나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는걸.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고, 미군정 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계열의 연합단체 이름이 그랬단다. 암튼 해방되던 그해 연말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나오자 우리 한민족이 좌우 이념으로 갈라서는 사단을 겪게 된 것 아니냐. 바로 반탁과 찬탁이 갈등의 시작이었지. 김구 선생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는 반탁운동을, 그에 맞서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던 민전이 찬탁론을 편 것이지. 아무튼 오늘 이념논쟁 이야기가 아니고…….

-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렸지.

- 우리나라하고는 무슨 상관?

- 그 무렵에 파리회담에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한 인물들이 있었지. 역사를 봐, 당연히 좌절하였지. 하지만 거기서 바로 이듬해 3.1 만세운동을 기획하게 된 것이야.

- 누가?

- 김규식 선생도 모르냐. 지금은 여운형 선생이랑 좌우합작운동을 준비하시지.

이런 대화들, 아버지는 두 삼촌들의 대화를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둘이가 민전과 관련해 활동하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 동생들이 만일을 위해 큰형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 했지만, 만일, 만일……. 만일 형제가 모두 위험에 빠질 수는 없다는 논리를 무언중에 나누고 있었겠지. 아버지는 동생들의 일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는데, 그러다가 덜컥 큰삼촌이 떠나버린 것이야. 폐병이 사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옥고의 후유증인 것을 다 알았다더라. 그러나 그것은 사실 약과였던 셈. 생사의 갈림길은 어쩌면 인사가 아닐지도 모르잖느냐. 그런데 막내삼촌은? 막내삼촌의 운명은 외려 사람의 책임이라고 해야지. 큰삼촌과 세 살 터울이었는데, 형을 따라서 여운형 씨를 가장 존경했다고 그러더라. 그게 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여름 여운형 씨도 사망하고 나서 막내삼촌은 충격과 회의 속에서 방황도 했던 모양이더라.

아버진 어려서 도통 모르셨겠죠?

그렇지. 내가 중학생이 된 다음에야 아버지한테, 네 할아버지께, 듣게 되었지. 할아버지는 동생들을 다 잃고서 넋이 나가셨을 거야. 그때가 막내삼촌의 아들이라고, 내게는 유일한 사촌동생이 집에 왔다 간 즈음에야 말씀을 하셨어. 그때도 난 잘 이해를 하면서 들었던 것은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것도 한참 지나서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지.

아무튼 그 시절, 삼촌은 좌우합작운동이란 그 말만으로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네 할아버지께 말했더래. 김규식 선생이 이어 민족의 자주노선을 표방하는 의미의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니까, 47년인가, 겨울이었대. 강령은 독점자본주의도 아닌 무산계급독재사회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었고.

제3의 길이요? 한반도에서? 같이 분단의 운명을 겪은 독일 땅 젊은 지식인들의 노선과 같았네요. 민주주의를 사회화 하는 길, 사회주의를 민주화 하는 길 - 제3의 길. 그것이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독일도 한반도도 분단국의 운명 속으로 끌려들었던 것이군요.

그래, 너도 공부를 했으니 그만큼은 알겠지. 1948년은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더욱 불안한 형국이었단다.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어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는 생각으로,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고 해야 할지. 결국 그 결과가 우리나라니 그걸 부정해선 안 되겠지만. 2월 초에는 밀양에서 농민들이 아침 일찍 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져서 경찰이 발포까지 했고, 물론들 다쳤겠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었대. 한 보름간에 이곳저곳에서 200만 명은 참가했을 정도라니. 그때 무슨 일을 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막내삼촌은 그 사건이후 북으로 옮겨간 셈이지. 그해 4월에 열렸던 남북협상에 김규식 선생의 일행을 따라 간 것이 삼촌의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적극적인 참여를 천명했고 평양에서 연석회의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래. 하지만 늘 깃발에 쓰인 문구와 실상은 다르기 마련.

4월 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지만, 협상의 결과는 실천과는 거리가 먼 길이었겠지. 공동성명서라는 것이 조항마다 이견이 없었겠느냐고. 김규식 선생은 김구, 김일성, 또 누구더라, 암튼 4김회담까진 참석했어도 이후 연석회의에 불참했던 모양이야.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논의되지 못하였으며, 북은 백범과 우사가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약속했던 전기와 농업용수도 다 끊어버렸다는데 뭘.

그럼 막내할아버지는 왜 돌아오지 않으신 거죠?

말 말아라. 그것은 정말 두고두고 의문이었다. 삼촌이 그토록 존경하던 김규식 선생은 분명코 반공적이었는데, 삼촌은 왜 함께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 시기 일은 종내 의문 투성이었다. 반공주의자 김구 선생은 왜 반공주의 남한에서 암살당했을까? 어쨌거나 남북협상에 참여한 탓으로 빨갱이라 의심되던 김규식 선생은 왜 북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했을까? 난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뭘 알 수가 없었다! 암튼 이듬해 6월인가 평양에서 무슨 회의가 열릴 때부터 민전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간단히 조국전선으로 통합되었다는데, 그때까지는 삼촌에게서 소식이 있었단다. 그러나 곧 함흥으로 갔던 모양이라. 함흥은 벌써 해방 이듬해 초봄에 반공학생의거가 일어난 이후 불안한 곳이었는데.

함흥에서 반공의거요?

그렇다니까. 조직된 인민위원회가 함남중학교를 인민위원회 청사로 차지하자 학생들이 학교를 빼앗기려 했겠느냐. 5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위를 하자 시민들이 합세해서 만 명도 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보안서원들이, 아니 소련군까지 동원되었다던가, 아무튼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사건 말이다. 사상자가 생겼다는 소문도 있었고. 남북이 다 같았어야. 삼촌이 그런 사건이 터졌던 곳에를 왜 갔을까. 세세한 이야기들은 결국 아무도 모르게 되었지. 함흥까지 간 사실도 전쟁으로 완전히 두절될 뻔했지. 난리는 각각 집안에서도 난리였던 거야, 생이별이 어디 한 두 집이었냐 말이다. 삼촌 소식은 1.4후퇴 전에 피난 내려온 만삭의 아내가 전해준 것이지, 단편적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거기서 결혼을요?

그래 뭐. 결혼 소식은 몰랐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무튼 만삭의 아내, 삼촌이 동지이자 아내로 맞았던 여자의 피난길은 유행가에도 나오는 처절한 흥남부두를 그대로 상상하면 된다. 삼촌이 함께 배에 오르지 못한 것인지 안탄 것인지는 이제와 누가 알랴.

아버지는 맥없이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흥남이, 너희가 어렴풋이 부산삼촌으로 들어 알고 있는 분이 그때 그 역사적인 흥남부두 철수작전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막내삼촌이 아이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헤어져버려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태어난 내 종제 말이다.

흥남은 너희 세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명이겠지만, 6.25 세대에겐 9.28 서울 수복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미연합군이 혼비백산 패주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대표하는 곳이지. 그 당시 중공군 - 그땐 그렇게 불렀어, 요즈음 말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보낸 조선전쟁인민지원군이라 해야겠지 - 40만 명 가까이가 참전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평양-원산 라인은 저들의 손에 넘어갔지. 인해전술에 맥아더라고 철수명령을 안 내릴 재간 있었겠냐.

인해전술을요?

엄청난 병력 투입을 그땐 그렇게 불렀단다. 집중적으로 투입한 전투원의 희생을 상관 않고 계속 공격하여 수적인 압도로 돌파구를 만들고 방어부대나 방어지역을 고립시켜 궤멸하는 작전 말이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수반했겠지만 일시적으론 승리를 거두었지. 퇴로가 막힌 한국군 제1군단과 미국군 제10군단 병력만 해도 10만 명에, 차량에, 보급물자 전부를 흥남항구로 철수시켜야 했으니. 거기에 몰려든 또 10만 명 피난민들을 어쩐다더냐. 그런 건 영화에서도 드물 것이다.

그때 인구로 10만이나요?

그래, 그때 인구로 피난민만 10만. 미10군단장이었다지, 그가 헬기에서 흥남부두를 시찰하다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더러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피난민들을 보고 사람들을 데리고 가리라고 결정을 했더란다. 그런 점은 서양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지는 부분이지. 결정이 내려지자 군함이고 상선이고 차출된 배가 200 척인가 뭐 엄청 동원되었단다. 그 마지막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인 거라. 그 배의 선장이 이미 실었던 모든 무기며 보급품들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은 12월 21일. 아무튼 군인과 민간인 등 무려 14,000명이 승선한 이 배가 소리 없이 마지막으로 흥남 항을 빠져나온 것은 이틀 뒤. 이 기록적인 숫자는 나중에 기네스북에 올랐지. 그렇다고 이 배가 타이타닉 수준이냐! 어림없지, 겨우 60명 정원인데, 벌써 선원들이 40여 명 승선해 있었다니까 탈 수 있는 인원은 열댓 명 수준이었나 봐. 선장이 나중에 회상하는 이야기는 처절하다 못해 공포 그 자체야.

선장이요, 직접?

그래, 선장이 쌍안경으로 본 비참한 광경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드는 피난민들 옆에 닭과 겁에 질린 아이들이었단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떻게 그 작은 배가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어떻게 단 한사람도 잃지 않고 끝없는 위험들을 안고 갈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이 배의 조타장치를 잡고 계시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를 느꼈다고 했대. 그거 다 어디 기록에 남아 있어. 암튼 그 모든 것이 독실한 가톨릭 신앙의 힘이었는지, 그는 50년대에 바로 바다를 영영 떠나서 수사가 되었단다. 뉴저지의 베네딕트회 무슨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더라고. 선장 라루가 아닌 마리너스라는 이름의 수사로서 십여 년 전 87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아버진 어떻게 그렇게 나중 일까지 소상히…….

그게, 그 양반이 한국과 인연이 깊게 닿아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 수도원이란 곳이 경북 왜관의 베네딕트 수도회와도 연결이 되었다던가 뭐, 그렇더라. 또 그뿐이냐. 그 배에서 항해사였다던가, 스물두 살 항해사의 회고는 가슴이 찢어지지. 캔 속의 정어리들처럼 쑤셔 박혀서 거의 모두가 서서 어깨를 부딪치며 서서, 그런대도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이. 음식도 물도 거의 없이 사실상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아무리 극기심이 많은 한국인들이라 해도 어떻게 꿈쩍 않고 서있을 수 있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단다. 그는,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암튼 이 피난민선을 기네스북에 등재하는 데 일조를 했더래.

그래요. 2000년 대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에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 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본 기억이 나네요.

그뿐이냐, 항구에서 피난민들의 승선을 사수하던 미군은 몇 명 전사한 반면 배에서는 사상자는커녕 새 생명이 다섯이나 태어났다는 믿기지 않는 기록도 있단다. 사실 안 그러느냐, 내 사촌도 게서 태어날 뻔 했으니. 아슬아슬하지. 헌데 정작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피난민을 내리지도 못하게 했단다, 피난민이 하도 넘쳐서. 그렇게 해서 거제도 장승포항에 내린 이들 피난민들의 자취는 지금은 박물관처럼 되어 있다던 걸.

- 서른 시간도 넘었어요. 살을 에는 바람이 무서웠어요.

- 아기가 잘 버텨주었지만, 그 전에 죽을 것 같았어요.

- 외투 주머니 속에 붉은 지폐가 남아 있었어요. 여기서는 쓸 수 없는 돈.

- 가마니로 비바람을 겨우 막을까말까, 수용소 거적에 눕자마자 아기가 태어났지요. 아비 생사도 모른 채. 나이든 여자들이 도왔죠, 그저 앞날이 캄캄했어요. 어미의 한숨과 눈물로 맞은 아기라니.

아버지의 말씀 사이로 바람이 말하고 바람이 실어다준 속삭임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수용소 첫날 아기를 낳은 1927년생 함흥 여자. 애 아버지는 만삭의 아내를 배에 태우고는 그만이었다. 누군가는 양보해야할 흥남부두에서 건장한 애 아버지는 부두에 서서 아내와 작별했다,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가겠노라고. 그 아버지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도록 부산바닥에 나타나지 않았다.

1950년 12월 25일생 흥남이. 흥남에서 온 흥남이. 아기의 이름을 그저 흥남이라 부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서 태어난 아이 다섯 모두 흥남이가 아닌가. 흥남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호적을 만들어야 했고, 엄마와 아들이 정문리에 나타났다. 그때서야 우리는 막내삼촌이 북에 남은 것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난 사촌이 있는 것을 알았단다. 사촌은 일단 가계를 찾았으니 더 이상 흥남이가 아니었지. 족보의 이름을 따라 한종남으로 불리게 되었으니까, 나에게는 유일한 사촌동생 종남이. 부산에서 피난살이 살림을 혼자 꾸리던 어머니랑 그렇게 단 둘이 부산사람이 되었지. 숙모는 함흥에서는 여고를 다닌 신식 여자였지만 따로 여자가 할 일은 없어서 수선 바느질을 업으로 살아내셨다고 해. 아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려주려고 사고무친의 부산을 떠날 수 없었을 그 심정을 누가 알랴. 흥남부두에서 탄 배가 부산으로 향했으니까,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올 것이라 믿고. 배가 끊겼으니 육로라도. 차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근 삼십년을 흘러가고 있었다.

 

1979년 한종남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4학년 재학 중이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졸업반인 이유는 애초에 초등학교 입학부터 늦어진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했었던 때문이었다. 대학은 종남에게는 사치였다면 사치였으니.

종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좀 늦게 1972년. 처음 초등학교 입학부터 호적 때문에 늦어졌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그만 부산상고로 진학하겠다고 원서를 고집하는 와중에 일 년을 놓쳤단다. 어머니의 힘든 일이 늘 맘에 걸렸던 그는 그 일 년을 놀면서 제법 돈을 벌었대. 깡통시장에서 - 지금은 부평시장이라 부르는 재래시장이지 - 게서 심부름하는 마술 같은 일을. 그러니까 어머니 수선 집에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군복 같은 것들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서 깡통시장에 낼 물건들을 받아다가 대주는 일. C-레이션 박스를 지붕으로 한 가리개 판잣집에서 시작된 미제물건이 구호물자에서 거래물자로 탈바꿈되는 세상이었지. 물론 어머니 몰래. 꼬리가 길면 들키는 것은 사필귀정, 그런 일을 들킨 뒤 종남은 손을 털고 고등학교에 잘 입학했으나 이번에는 문학에 빠졌더래. 공부보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일에 열중했고, 수업시간에 그런 책들을 읽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 것은 다반사였다더라고.

집안에 난데없는 문학 지망생이라? 내 큰삼촌은 선린상고 시절 김수영의 동기생으로, 김수영이 오스카 와일드의 영문을 줄줄 외며 두각을 나타냈을 때나 이어 도쿄상대에 진학했을 때에도 동기였다더라고. 하지만 김수영이 학병 징집을 피할 수 있었을 때 삼촌은 끌려갔고, 김수영이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할 무렵 삼촌은 이미 병사하고 말았지. 그렇다고 막내삼촌이 문학적인 자질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안 해보았지만, 종남은 그런 기질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 예민함으로 오히려 대학을 포기했겠지. 어차피 연좌제 비슷한 일로 종남이 공무원이나 법조인이 될 길은 요원했을 것이니. 살았건 죽었건 - 그 당시에는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 아비를 북에 둔 사람이라. 뿐만 아니라 대학은 그에게는 돈 지출과 같은 단어였으니까. 그 시절 우리 모두 그랬지. 나도 겨우 2년제 교육대학엘 진학하지 않았더냐. 종남인 어머니의 성화를 피해 달아난 곳이 군대였더래. 그런데 군대를 마치고 온 그가 변했다더군. 사람은 떳떳한 직업을 가져야 하리라고. 젊은이의 변화의 원인은 더러는 여자야. 군부대에 면회 온 선임병의 여동생 - 그 여자를 위해서 반듯한 직업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시인이 되는 길은 막연했으니 국어선생님이 되리라 - 그렇게 해서 국어교육과 진학을 목표로 뒤늦은 대학입시 준비를 했고, 경남대학에. 마산에 애착이 간 건 여자가 마산에서 작은 병원의 간호원이었나봐.

개포동 당숙모가 그럼…….

그래, 그 양반이다. 고향은 섬진강 어디라던데, 순천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외가 쪽 마산으로 취업을 했었나 봐. 그땐 간호고등만 졸업해도 충분히 간호원 노릇을 했었지. 아차, 지금 말로는 간호사라지. 그것 보다, 그해 1979년 여름을 아비규환의 태풍 쥬디로 마감하며 마산의 인심은 흉흉했더래. 마산-진해 간 도로도 유실되고 사람 몇 천에 차량 몇 백 대가 혼란 속에서 마비되었고, 마진터널에서는 산사태 위험으로 사람들을 철수시키던 해군장병들이 그대로 매몰되는 사고까지 났더란다. 암튼 그해 여름엔 전국적으로 백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났던 것 같아. 뭐 가물가물 하지만.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국회위원에서 제명되는 사태가 벌어진 거야. 유신정권은 데드엔드를 향해서 내리막을 달리고 있었지. 택시기사가 택시에서 대통령 욕을 한 승객을 신고하면 그 포상으로 그렇게 어려운 개인택시를 받는다는 루머까지 떠도는 지경이었어. 그 정도면 공포정치나 뭐가 달랐냐. 유신반대데모는 사필귀정이었지.

공포정치요?

그럼 뭐라 말하랴? 실체도 없는 재건윈가 뭔가로 엮은 사람들을 사형판결 해놓고, 판결 열여덟 시간 만에 처형하는 정치를 공포정치 아니고 뭐라 해? 그렇게 몇 년을 엎드려서 지냈으니 폭발할 만도 했지.

그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죠, 아닌가?

너희 중 둘은 태어났었지, 넌 다섯 살 쯤 되었을 걸. 난 참 평범한 가장에 불과했다. 초등 근무하면서 중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너무 내 앞가림만 했어. 늘 부족하여 공부는 열심히 했다지만 다 나 자신을 위해서였지, 선생을 할 자격은 한참 부족했었다 싶어.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었어야 말이지.

아버지가 아버지죠, 그럼!

들어 봐라, 그때 경남대학에서는 여학생들이 오히려 주도권을 잡았다고 알려졌어. 같은 국어교육과 3학년이던 종남은 뒤늦게야 그들에 합류했다더라고. 여학생들은 이미 9월 말에 대학 방송실 장악 기도에 실패한 뒤에,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더래. 죽음을 불사하는 모습으로 호령을 해대는 여학생들에 혼쭐나기도 부끄럽기도 해서 모두들 거리로 진출했겠지. 마산시청을 거쳐 3․15탑 주변으로까지 나갔지만, 경찰과 대치하던 초반에 모두들 연행되고 말았겠지, 수가 없어.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자꾸나. 어쨌거나 주모자 급은 아니었던 종남이도 군필에 나이까지 많은 상황이라 위험한 부류로 분류되었을지 모르지. 그때 일 주일인가 구치소 안에서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들었다더라고. 누구라도 귀를 의심했는데, 어떤 간수가 너희 놈들은 기쁘냐고 묻더래. 죽음 때문인지 그 질문 때문인지 바로 그 순간 종남이 구역질을 시작했다는 거야, 같이 있던 학생들 말이 그랬어.

종남이 구토와 어지럼증을 못 이기며 뒹굴자 일단 병원으로 이송되었나 보더라. 의식 소실이 온 것은 여자 친구가 도착한 직후였다고. 생각해 보렴. 그렇게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할까 걱정되는 상황에서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뜨고 말을 하고……. 얼마간 희망이 자라는 것 같기도 했었대. 하지만 아름다운 환상은 그 다음 장면에서는 그만 깨지고 말았단다. 종남인 그길로 이미 저만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야. 뇌수술에 이어 근 반년 간의 사투에도 그냥 그렇게 어린아이의 얼굴로 깨어난 채 퇴원을 했지. 그 후론 그대로 그냥 살았으니 산 것인지 아닌지. 심한 것은 그 사이 여자 친구가 낳은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지. 결혼식도 하지 않은 사람 병간호에 매달리던 여자가 곧 배가 불러와도 놀라지도 않더니, 아일 낳고는 혼인신고에 호적정리를 다 마쳤고. 종남네는 어정쩡한 그런 상황에서 서울로 옮겨왔어. 부마사태 후 한 2년인가 지난 후였지.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병원이 있을까 하고. 함흥 숙모님이, 종남 어머니가 결단을 내리신 거야. 북에서 나타나줄 남편을 기다리기보다는 아기처럼 세월을 놓아버린 아들을 구하기로 마음 잡수신 거지. 혼자 사시는 서울고모가 늘 간이역 구실을 하시지. 말죽거리가 이름부터 그런 곳 아니더냐. 나중엔 너희도 데리고 계셨었고. 암튼 종남네가 올라갈 때는 고모가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재천 건너 개포동에 방 두 개짜리 주공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셨지. 변두리라지만 그때 돈 천만 원이 쉬운 건 아니어서 조금씩 십시일반 돕기도 했어, 그렇게라도 해야 집안 우애 아닌가 하고들. 그래도 말도 말아라. 아이는 자라고 애 아빠는 더 아이 같아지고. 그러다가 종남이 결국 떠났지. 어머니의 태중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생사도 모른 채. 그때 깨달았지. 금실아, 난 알았어. 북에 남았다는 막내삼촌은 이미 떠도는 영혼이 되었을 것임을.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떠났음을.

 

세월이란 것 참 무심한 물건이다. 그러고 다시 삼십 년이 다 되어가더라. 그 사이 그 집안일을 말로는 다 못하지. 네 당숙모 입장에선 남편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님과 아기를 한 번에 잃었지. 그렇게 넋 놓고 살아오더니 결국엔. 아서라, 작년 윤삼월, 사람들은 윤달이라고 해서 이장들을 하는 데, 일부는 그게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나를 말리더라. 나에겐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윤달을 기다렸다.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기다려왔다. 마침내 여건이 되었으니 윤삼월을 왜 피한단 말이냐. 큰아버지도 작고하신지 언제냐, 결국 고향에 남은 당숙들 제당숙들과 어찌어찌 상의해서 전체를 손을 보았지. 성가 전에 세상을 버린 큰삼촌도 제대로 자리를 찾아드리려고. 특히 설마 설마 생사를 몰라 엉거주춤했던 막내삼촌을…….

초혼장 - 지령석을 모셔 그걸 통해서 영혼을 불러다 모시는 장사법을 그리 말한다. 양재천에 뿌려진 함흥 숙모도 함께. 그렇게 아내도, 또 어렵게 탈출해 보낸 태중의 아들을 저 세상에서나마 만나보시라고. 어떻게든 피붙이들 속으로 가서 살라고 보낸 그 서러운 아들도 죽어 삼십년이라고. 허니 이제 이승과는 연을 끊고 훨훨.

아버진 ㄹ 받침에서 멈추셨다. 나도 덩달아 입이 얼어붙었다.

아버지, 이젠 그 짐을 벗으셨나요? 대체 왜 그렇게 가슴 무겁게? 먼 먼 가족사의 짐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아버지는 아들이었고 조카였고 종형이었고…… 또 우리 아버지시군요.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묻고 싶은 궁금함을 감추느라 거짓 하품을 참는 체 손으로 입을 막아본다. 꿀꺽 보따리를 삼킨다. 앞으로도 삼십 년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는 한 자락 귀퉁이를 풀어도 될까? 핏 속으로 핏 속으로 녹아든 이해와 불가해의 접점을 찾아서. 허나 그 전에는 절대로.

......................................................................................................................................................

2013. 3.15. 단편 「초혼장」,『문학춘추』 2013 봄호 (통권 82호), 38-56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6. 10. 17:36

 

 

여름에 겨울 스웨트를 완성했다, 그것도 1977년 털실을 리폼해서.

얼마나 할 일이 없었을꼬!

 

아니, 마음이 불편했다.

소설집, 곧 장편소설 출판 지원을 도모하다가 실패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 기다리는 두 달 동안 불행했다.

미리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소설 따위는 일반 인문학 분야와 경쟁에서 영순위로 탈락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한 달은 더욱 불행했다, 새로운 글 쓰기에 집중하기에는. 

 

 

 

 

 

 

 

 

 

 

 

 

 

 

 

 

 

 

 

 

 

 

 

 

 

 

 

 

원래의

 실이

비슷한

색깔로 섞여

 

 

새해의 소망이랄까 계획 Resolution을 물으면 새 옷 사지 않기라고 말했다. 원래 새해가 되어도 늘 특별한 계획이 없었지만 근년 들어 자꾸 질문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춧구멍이 낡아버린 스웨터를 풀어서 부분을 다시 짜서 완성한 것이 첫 작업이었고, 5월 들어 본격적으로 남은 털실들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 첫 작품(?)으로 1977년 독일에서 짜 입었던 스웨터를 풀어둔 것이 생각났다. 그때까지는 예쁜 시작이나 예쁜 마무리를 잘 못하면서 그냥 떴던 터에, 실이 무겁고 거칠어서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볼품 따윈 별로 생각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 털실 째 굴러다니는 것이 민망하여 옷으로 만들어 내고자 했다. 하지만 독일의 실은 놀랍게도 거칠고 무겁고, 한 마디로 순모 함량이 낮았다. 여름에 완성한 겨울 스웨터는 아직 한참을 주인이 입어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 나, 나는 이 글을 계기로 글쓰기에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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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5. 30. 18:31

 

2013년 5월 25일 개교기념일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 그 무서운 세월이 지나고.........

 

우리는 서로 얼굴과 이름이 가물가물할까 봐 이름표를 준비했다.

 

미국과 서울 등지에서 31명 참가, 정작 광주의 칠우회 회원 28명. 3명이 불참.

 

 

 

 

 

 

5월 초 - 임경순 선생님 댁을 찾았다.

김용임과 나. 친구들의 성원을 대리해서.

임꽃예란 별명으로 처녀 같았던 선생님,

전남대학교 국문과에 재직하시고 정년하셨다. 지금은 조금 편찮으신 듯.

고 주기운 선생님 댁에서는 사모님만 만나고 나와야 했다.

 

 

 

 

 

개교기념일 당일에는 금강산도 식후경.

광주역 도착 후 곧 모교로 - 역사관 둘러보고 땀흘려 가며 구내식당에서 점심.

그 다음 본 행사 사진은 동문회 홈피에 넘친다. 

                 http://www.cnygo.com/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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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