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8. 1. 25. 14:21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

― 서용좌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장두영(문학평론가)

 

 

1. 한금실의 시선

 

서용좌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장편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소설집이라 불러야 할지 망설여진다. 책표지에 떡하니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으니 당연히 장편소설이 아닌가? 작가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 《표현형》이라는 전작에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 곧 한 편의 장편소설 아닌가?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보면 <슬픈 족속>부터 <안개>까지 12편의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작품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굳이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시작과 중간과 끝을 지니고 있어, 따로 떼어 발표하더라도 단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술자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12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한금실’이라는 인물이 서술자로 설정되어 있다. 한금실의 눈과 귀를 통해 소설의 모든 내용이 포착된다. 이야기 12편은 각기 다른 주제의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서술자가 그것을 묶어냄으로써 이야기들 사이에는 제법 견고한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굳이 장편소설이 아닌 단편소설에 가깝다고 보더라도 뚜렷이 연작소설을 떠올리게 하게끔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바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서술자 한금실의 존재이다.

 

실상 《흐릿한 하늘의 해》는 한금실의 시선으로 읽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작가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쓴다」에서는 글의 말미에 ‘한금실, 가공의 서술자’가 썼다고 적혀 있다. 굳이 작가의 이름대신 한금실의 이름을 들고 나온 것, 그것도 ‘가공의 서술자’임을 또 다시 강조한 것은 실제 작가의 존재를 소설 속 가공의 인물로 완벽히 대체하고 싶은 소설가의 원초적 욕망의 반영일 터이다. 물론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의 분리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분리의 성공이 작품의 성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허구적 형상화의 성취 정도를 따지는 차원에서는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흐릿한 하늘의 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소설을 읽다보면 한금실에 관한 신상정보들이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그것도 반복적으로 뛰쳐나온다. 1975년생, 여성, 미혼 혹은 비혼, 프랑스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현재는 광주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시간강사.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어떤 성격이고, 동생은 몇 명인지 따위.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아무리 《흐릿한 하늘의 해》를 독립된 12편의 단편들로 여기고 읽어나가더라도 어느새 한 손에는 한금실의 프로필이 슬그머니 쥐어진다. 어느 한 편이 아니라 12편 전체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어, 소설은 연속성을 확보하고, 일단 확보된 연속성은 구체성의 획득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2편 이야기의 모든 내용이 결국 그녀의 사상과 감정을 경유한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가 취할 태도나 반응은 무엇일지 궁금하게 여기면서 따라가게 된다. 곧,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따라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어가는 일은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된다. 또한 12편 이야기는 오롯이 그녀의 초상이 된다.

 

 

2. 관찰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에 속한 12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자 한금실은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남들은 지나치기 쉬운 작고 사소한 일상적 소재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진득하게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다. 이를 테면 <유예된 시간>에서 발견한 ‘농게’가 그러하다. 남들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을 양념게장 속 아직 살아 있는 게 한 마리, 한금실은 묻어 있는 게장 양념을 씻어내어 기어이 농게의 분홍색 집게발이 드러나도록 만든다. 물론 표면적으로 ‘게장 파동’은 친척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사건이지만, 그것은 허구적 형상화의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다. 정작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농게의 꿈틀거림을 관찰하고, 나아가 유예된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해 사색하는 인물이 바로 한금실이기 때문이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금실 앞에 관찰의 대상들이 툭툭 던져진다. 그녀의 관찰이란 우연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다리 밑>의 첫 문장은 우연이 소설의 시작임을 분명히 한다. “거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149면) 농게(<유예된 시간>)와 윤동주 시집(<슬픈 족속>)은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것들이었고, 집 마당에서 굴뚝새를 관찰하거나(<굴뚝새>), 판교에 가서 노부부를 만나게 된 것(<화학 반응>)은 본인의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심지어 출판 관련 일 때문에 민 선생을 만나러 가던 도중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을 ‘우연히’ 만난 것(<삼천리강산에 새봄이>)을 보더라도 한금실의 관찰이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우연의 강조는 곧 개연성의 법칙을 따르는 플롯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플롯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물의 운용 방식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막상 주된 관찰 대상이 등장하고 나면 그 전에 나왔던 인물은 서사의 중심에 완전히 밀려나버리는 현상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농게를 집어들고 즐거워했던 친척 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져 다시는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친척 아이들은 한금실에게 농게라는 관찰 대상을 던져주기 위해 동원된 인물에 불과하며, 일단 주어진 역할을 마쳤으니 무대에서 퇴장한 셈이다. 졸을 잘 움직여 나중에 장군을 부르겠다는 욕심은 없는 듯하다. 극적인 갈등의 고조라든가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coup de grâce)이 자아내는 짜릿함을 찾아볼 수 없다. 사건은 평탄하고 밋밋하다.

 

대신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한금실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변화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 관찰은 소설의 장면 묘사를 감당하는 풍경 스케치로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한 인물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젖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마주친 농게로 하여 나는 나의 유예된 시간을 보았다. (……) 대야 속의 농게와 원룸 속의 나. 나는 농게다. 농게는 나다.”(<유예된 시간>, 61-62면) 간장게장 속 우연히 발견한 농게에 대한 관찰이 거듭되는 파편적인 단상을 거치고, 어느 순간 깊이 있는 사색과 회의, 반성을 거쳐 급기야 자기 자신이 농게랑 다를 바 없다는 비약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내면적 변화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급기야 한술 더 떠서, 온 인류가 농게이자 진드기라고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면서 폭발적인 비약을 거듭한다.

 

그보다 우리 모두가 은접시 위 치즈 덩이 속에서 생성된 진드기들의 운명은 아닐까? 지구째로 우리를 삼켜버릴 거인은 원전 폭발일까? 억눌린 사람들의 자폭일까? 오늘날 잘나가는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맹신자들도 포함될까? 우리에게 유예된 시간은 얼마일까? 유예된 시간이 있기나 할까? 나는 불혹이 되도록 살아보지도 못한 나의 삶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 인류를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빠져든다. 비혼 여성 세입자, 대한민국 400만 넘는 1인 가구의 한 사람으로 최저 생계비 월 61만 7,281원을 벌어야 하는 코앞의 사실을 잊다니.(<유예된 시간>, 62-63면)

 

‘오지랖 떨기’와 ‘옆길로 새기’야말로 한금실의 주특기이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광폭의 행보다. 구속적인 플롯의 짜임새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소한 일상적 소재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거기에 상상력을 날개를 달아주는 것, 관찰이 자유로운 연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연상에 연상을 거듭하여 전 지구적인 차원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 뚜렷한 목적지와 결론에 도달함 없이 끝없이 관찰과 상상과 사색을 거듭하는 것.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적 변화의 방향은 구심적인 것이 아니라 원심적인 것에 가깝다. 이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관찰자 한금실은 동시에 한없이 자유로운 몽상가 한금실이다.

 

 

3. 번역가의 시선

 

미라보 다리―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 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슬픈 족속>, 30-31면)

 

한금실의 시선에서는 강한 서구지향성이 감지된다. 용정 용문교에서 ‘미라보 다리’를 떠올리는 그녀의 아련한 눈빛을 보라.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한 해란강과 거기 놓인 용문교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하고 실망과 허탈함을 느끼면서, 한금실은 미라보 다리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떠올린다. 무등산을 오르면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떠올리거나(<산의 소리>), 다리 밑에서 올려다 본 하늘을 두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은 다니엘 오테이유의 차가운 눈빛 그대로였다.”(<다리 밑>, 149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단순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사가 서구문화와 문학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포착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관찰의 내용은 일종의 ‘번역’ 과정을 거쳐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별도의 목록이 필요할 정도로 서구작가와 작품이 빈번하게 언급된다. 아폴리네르, 빌헬름 베클린, 잉에보르크 바흐만, 하인리히 뵐, 다니엘 오테이유, 지브란, 라 보에시, 쿠젠베르크, 토마스 만, 헤세 등. 대체로 프랑스와 독일에 집중되어 있는 목록은 서구문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에게는 두꺼운 장벽이 될 수 있다. 서술자도 그 점을 의식한 듯, 서구작가나 작품이 언급될 때는 주석에 가까운 학구적인 설명을 첨부하는데, 이는 서구문학의 배경 속에서 작품을 풍성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역으로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이 자칫 소설의 흥미를 감퇴시킬 위험성도 지닌다.

 

서구지향성은 심리의 표현뿐만 아니라 사태의 해석이나 판단의 영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소설 속에서 다루면서 서독 초기 공산당 해산의 역사를 언급하며 비판의 날을 세운 것은 대표적인 예시다.(<날마다 비겁함>)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밝히는 외사촌과의 대화에서도 동성애와 동성애 차별의 역사를 프랑스의 경우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목소리>)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서 경험한 서구의 사례를 한국에 도입하여 적용해보는 것, 이것이 그동안 한국의 학계가 수십 년 동안 수행해온 작업이다. 어떻게 보면 서구의 중심지에서 유학을 한 한금실은 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철저히 내면화한 인물이며, 그러다보니 소설 속에 내면화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녹아 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금실이 무턱대고 서구를 추종하는 얼치기라는 뜻은 아니다. 정반대로 그녀는 자신이 서구의 문화와 지식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다. 마치 강의하듯 라 보에시의 사상에 대해 한참 떠들다가도 “느닷없는 파리 시절에 대한 향수가 멋쩍게 느껴졌다.”(<날마다 비겁함>, 185면)고 깨닫는 순간, 그녀는 과거 유학시절 프랑스가 아닌 현재 한국에 있는 자신의 현실과 대면한다.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외국 문학 평원에서 하이에나가 된 느낌이었어요”(<날마다 비겁함>, 175면)라고 밝히는 대목에서도 그녀가 맹목적인 서구지향성과는 뚜렷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라는 윤동주의 시구를 읽으며 자신이 나이키를 신고 캘빈 클라인을 입고 있음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한다거나(<슬픈 족속>, 35면),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청출어람>, 78면)라면서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 또한 그녀가 서구와 한국을 ‘동시에’ 관찰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원본의 언어와 번역본의 언어를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 번역가의 기본 임무가 아니던가.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환기되는 서구 문화의 조각들은 한금실과 우리들이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과 일상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양쪽을 들여다보면서 비교·대조하면서 번역하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우리를 반성으로 이끈다. 이것은 세심한 관찰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예민한 감각으로 대상을 관찰하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의의를 추출하기 위한 판단의 잣대가 필요하다. 한금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잣대를 소설 속에 끌어들여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우연한 관찰을 넘어 진지한 해석과 통렬한 반성으로 거침없이 도약하는 곳, 그곳이 바로 번역가의 시선이 향한 곳이다.

 

 

4. 여행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다양한 종류의 여행을 서사의 실마리로 활용하고 있다. 맨 앞에 실려 있는 <슬픈 족속>은 백두산 관광 여행을 다루고, <유예된 시간>은 가족 여행 중 겪은 에피소드가 중심이며, <산의 소리>에서는 친목 도모를 위한 무등산 등반에 나선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사전적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여행으로, 여행지에서 관찰한 내용에 여러 상념과 사색이 얹어지면서 소설의 내용이 펼쳐진다. 판교에 사는 친척 할머니를 방문한다든가(<화학 반응>) 옛 도자기 마을에 사는 민 선생을 방문하는 식의 짧은 여행(<삼천리강산에 새봄이>)도 있다. 한금실은 그곳에서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그것을 소설로 옮기는 형식을 취한다. 만약 그곳으로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관찰’은 없었을 것이고, 소설 또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금실은 방학이면 부모가 계신 평택에서 머물다가 다시 학기가 시작되면 광주의 원룸으로 돌아오는데, 평택과 광주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도 일종의 여행으로 볼 수 있다. <굴뚝새>, <목소리> 등이 평택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속하며, 특히 <굴뚝새>는 평택에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쌍용차 고공 농성을 작품의 전면에 내걸고 있다. <다리 밑>에서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길을 가다가 잠깐 천변으로 내려가 보는 것 같은 여행 같지도 않은 여행도 있다. 평택이든 천변이든 우연히 그곳 여행지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관찰했다.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은 곧 소설 쓰기의 시작이 된다. “나는 천변에 더 나가보기로 했다. 찬찬히 살펴보거나 가능하면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쪽이 훨씬 생생한 체험이고 글감일 터였다.”(<다리 밑>, 160면) 만약 광주의 원룸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소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소설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여행과는 별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여행을 다룬다. <청출어람>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청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있어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외규장각 의궤의 머나먼 여정을 다룬 셈이라서 결국에는 여행에 한 발을 걸친 셈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안개>에서 배승한은 유럽 여행 중이다. 그는 한금실에게 ‘안개 속입니다, 이곳도.’라는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녀는 배승한이 머물고 있는 그곳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프랑스 유학 시절의 기억은 적어도 내면의 차원에서 그녀가 여전히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흐릿한 하늘의 해》는 시종일관 여행 중인 한금실이 남긴 메모와 일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여행은 항상 두 개의 장소를 비교하게 한다. 하나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터전, 다른 하나는 일상을 벗어난 여행지. 두 개의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상정한 채 이루어지는 것이 여행이라 할 때, 그것은 두 개의 언어를 오고가며 양쪽을 다 살펴보아야 하는 번역의 작업과도 닮아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여행을 하거나, 끊임없이 여행의 기억이나 여행자의 존재가 상기된다는 것은, 서구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이 소설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습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때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언어는 서로 얽히고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해석과 반성의 가능성으로 나아감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삼천리강산에 새봄이>에서는 공간의 축이 아닌 시간의 축을 따라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YH 무역 농성 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죽은 남순과 여동생의 트라우마에 전염된 동순 할머니의 사연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과거의 상처를 현재로 불러온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 농성 걱정하는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삼천리강산에 새봄이>, 243면) 과거와 현재가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오랜 침묵 속에 망각되었던 과거의 상처는 뒤늦은 애도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과거가 현재에 되살아남으로써 과거의 YH 무역 농성 사건은 현재의 평택 쌍용차 굴뚝 농성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재가 과거를 위로하고, 과거가 현재에 힘을 실어주는 연대의 방식이자 협력의 방식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 수록된 12편의 이야기들은 간혹 서로 간에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여행이나 번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자 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홈리스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다리 밑>을 이어주고, 쌍용차 고공 농성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굴뚝새>를, 다시 똥물 소재가 <굴뚝새>와 <삼천리강산에 새봄이>를 연결한다. 소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날마다 비겁함>에서는 배승한도 바흐만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유예된 시간>과 연결되기도 한다. 엄연한 간극을 지닌 채 따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래서 어쩌면 별개의 단편소설들을 묶어놓은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작고 사소한 연결고리를 근거로 서로 엮인다는 발상이 12편의 이야기를 연작소설처럼 보이게 하고, 한 편의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게 한다.

 

쌍둥이 형제의 아버지는 무한한 지식욕으로 아들들에게 대백과사전을 암기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페터에게는 알파벳 ‘에이’에서 시작하여 ‘엘’까지를, 파울에게는 ‘케이’에서 ‘제트’까지를 통달하게 하였다. 결과는 완벽했고, 쌍둥이 형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지식을 보충하여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쌍둥이들이 서로 소통해야 할 경우였다. 그들은 ‘케이’에서 ‘엘’ 사이만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작은 영역이 그들의 천국이 될 수 있었을망정, 파울은 ‘에이’로 시작하는 사과도 몰랐고, 페터는 ‘피’로 시작하는 복숭아를 몰랐다고.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굴뚝새>, 215면)

 

두 개의 공간을, 두 개의 언어를, 두 개의 작품을 오고가기에 바쁜 여행자 한금실이 12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긴 여정의 끝에 도달한 지점에는 ‘소통을 향한 갈망’이 놓여있다.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 서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여행을 시작할 때, 남들은 미쳐 눈여겨보지 않았던 무언가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제야 그녀는 관찰을 시작하고, 그 의미를 해석·번역할 수 있다. 끊임없이 맞은편을 향해, 혹은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노력이야말로 여행자의 시선에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미덕이라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말하고 있다.

 

 

5. 교집합을 찾는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으면 안개가 자욱한 고흥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순규의 고향이 그곳 ‘섬마을’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아직 유럽을 떠돌고 있는 배승한이 여전히 ‘안개 속’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바다 위 섬들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저마다 외따로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기에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서로에게는 눈을 감을 채, 자신만의 백과사전 조각을 암기하기에만 급급하기에 무척이나 위태롭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압축한다. “밤이다. 안개보다 짙은 회색의 밤이다.”(<안개>, 336면)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과 섬을 횡단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는 한금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무척 호기심 어린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이 발견한 조각들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돌아다닌다. 그러고 나서는 번역자의 시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관찰 조각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기에 바쁘다. 교집합을 찾으려는 노력, 장소와 장소 사이의 교집합, 언어와 언어 사이의 교집합,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집합,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집합을 찾으려고 그녀는 부단히도 애를 쓴다.

 

과연 그녀는 그토록 갈망하는 교집합을 찾아 외로운 섬들을 횡단할 수 있을 것인가? 톱니바퀴 인생을 살아가는 1975년생 지방시에게 자신을 가둔 굴레를 파괴하고 횃불을 들어 밤을 밝히기를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도 연약하고 가냘프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화해나 통합의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결말은 달콤할 수 있겠지만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하므로. 대신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경유한 우리 독자들에게 ‘그녀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전달된다. 아니, 교집합을 찾으려는 여행은 소설이 끝나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또 시작해야만 한다는 가냘픈 외침이 잿빛의 흐릿한 하늘 너머에서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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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소설시대』 통권20호, 405~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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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8. 1. 25. 14:19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

 

하이네의 시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오자 특별히 부산한 일이 생겼다. 졸업 50년 홈커밍을 앞두고 흩어져 살던 동문들이 단톡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단톡 반장이 혹시나 하면서 초대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 목소리는 참으로 신기했다. 50년 세월을 마치 축지법처럼 축시법을 쓰는 마법이었다.

 

명실공이 이 할머니들은 분주했다. 갑자기 아침 문안에서 결혼 50주년 소식까지, 미국에 나가서 그쪽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들까지 불려 나와서는 다른 시간을 살면서도 부지런히 톡 시간을 맞추곤 했다. 현안은 50주년 나들이에 있었다. 전야제로서 1박2일 남도 여행, 그리고 본 행사인 메이데이에 이대 캠퍼스를 정중히 방문하는 일이 준비되었다.

 

두 번의 나들이라고? 여행과 운동, 운동과 여행을 기피하는 행동 1, 2순위로 꼽는 나로서는 둘 다는 어려웠다. 물론 더 많은 얼굴들을 만날 본 행사에 무게가 갔다. 그런데 하필 남도 여행이라니! 여수 또는 순천의 1박은 유혹적이었다. 한 시간 남짓 차를 달린다면 저녁에 숙소에 든 친구들 얼굴을 잠깐 보고 올 수는 있으리라. 돌아오는 밤길 고속도로가 좀 걱정이긴 하지만 …….

 

그런 염려는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새벽에 눈을 거의 감은 채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발이 슬리퍼 한 짝을 잘 못 꿰었고, 그것으로 여행계획은 물 건너갔다. 다행하게도 왼쪽 손목만 골절이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붓다 못해 뒤틀린 손목에 깁스를 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친구들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하필 그날에. 내 불쌍한 왼팔, 이라고 써서 깁스한 사진을 보냈다. 오늘 못 참, 이라고 쓰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렇다고 졸업 50주년 나들이까지를 포기하기에는 단톡방에서의 늘그막 우정이 너무 진했다.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전국이 일일생활권인 나라에서 50년 만의 해후를 포기할 순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병원에 실려 간 것도 아니니까. 두 발은 성하니까. 기차표를 예약해서 프린트아웃을 해 놓았다. 사진으로 단톡방에도 올렸다. 마음 흔들리는 것을 막는 방편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 날이 왔다. 깁스한 팔을 감추기 위해서 머플러로 감싸면서, 요즈음 보기 흔한 장면, 수갑을 감싸는 스카프가 생각나서 혼자 킥킥 웃었다. 그렇게 나타난 내 모습을 친구들은 정말 반겨주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렸던 긴 머리 소녀는 조신한 스타일 머리로 놀라게 했고, 목소리들마저도 3도 화음정도로 알토 음으로 변해 있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의 작용은 참으로 신기했다. 다행하게도 눈도 함께 노화작용을 겪는 우리는 현미경 눈이 아님으로 해서 친구들이 예쁘기만 했다.

 

흐뭇한 것은 이제는 후배들이 튼실하게 동창회를 꾸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초창기부터 오래도록 협력하던 후배들도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왜냐하면 우리가 독문과 1회였기 때문에, 졸업하고 곧 동창회를 이끌어야 했던 초창기 그룹들은 평생을 봉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당연히 눈에 띄는 후배가 있었다. 선의에 가득 찬 긍정적인 얼굴이 참 고운 사람이었다. 나를 만나면 매번 똑같은 인사를 하곤 했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무슨 뜻일까 애매하면서도, 처음엔 멋쩍어서 대답이 서툴렀다. 광주에서 기차로 오를락 거리며 뒤늦게 공부를 다니고 있는 선배의 처지가 고달파 보였거나, 비실비실한 몸으로 사서 하는 그 고생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박사과정이라는 것이 지난한 과정이다 보니 또 얼마 후에 만나게 되고, 또, 또, 모교의 행사에 가면 만났다. 그 같은 인사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 후배는 부산이나 대구에서 서울의 모교에 나들이 오는 선배들을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 다만 광주라는 ‘불온한’ 고장에서 사는, 살아가야 하는 선배가 내심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대학에서 살아간다니……. 그 착한 마음이 떠올라서 후배에게 진한 미소를 보냈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대신, 팔 웬일이세요? 라는 변형을 들었다.

 

그러니까 믿음의 문제다. 믿음은 믿는 마음이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의 심리가 믿음이다. 그것이 정치나 사회 또는 철학적 가치와 관련될 때는 신념이라고 주로 한자어로 쓰게 되며, 뭔가 객관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건 신념이건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의 정체를 생각하면 곧 깊은 회의가 드는 것은 우리가 신념으로 인해 빚어지는 반목을 밥 먹듯이 경험하고 살기 때문이다. 다 같이 신 또는 신들을 믿으면서도, 다 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와 박해를 일삼아 온 종교적 반목이 가장 큰 문제다. 다 같이 이념들을 신앙하면서도 그 이념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반목의 극치를 달리는 정치도 적 아닌 적들을 양산한다.

 

예컨대 아주 간단히 줄여서 5‧18이라고 부르는 그 해 5월 10일간의 광주의 일은 신념대로 해석되는 것이다. 만날 때마다 ‘험지’에서 고군분투 살아가야 하는 선배를 걱정해주는 고마운 후배는 광주와 광주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고, 상당 부분 오해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알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기 전에는 진실이 무엇인가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법이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실상에 관해서 들으면 ‘설마’ 하고서 의심하며 부인을 해버리는 쪽을 선택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참혹하니까, 차마 믿을 수 없으니까, 내심 믿고 싶지 않으니까.

 

마침 올해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광주에서는 의미 있는 두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크라운판 216쪽 분량의 『5.18 10일간의 야전병원』과 신국판 608쪽 분량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되었다. 『야전병원』은 ‘전남대학교병원 5‧18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이고, 『넘어 넘어』라고 불리는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은 32년 전의 소위 ‘지하 베스트셀러’를 전면개정판으로 내놓은 것이다.

 

특히 이번에 새로이 알려진 대학병원의 열흘간 진료기록은 광주사람들에게도 놀라운 부분이 많았다. 설마, 대학병원까지야. 적군을 정성스레 간호하는 전선에서의 간호장교의 모습들을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우리들로서는 병원만은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처참했다.

 

대학병원 구성원으로서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말하는 진솔한 실상, 수술실에도 날아드는 총탄에 대한 증언과 이름표가 붙어있는 의사가운에 뚜렷이 남아있는 관통 흔적 등은 1%도 픽션이 아니었다. 의식도 없고 신원이 확인 되지 않아서 ‘파추하(파란 추리닝 하의)’ ‘검파상(검고 푸른색 상의)’ ‘남광여(남광주역에서 발견된 여자)’ 등으로 환자를 불렀던 새내기 간호사의 증언에 가감이 있을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깁스한 팔은 통증이 거의 멎었는데 명치끝이 막히고 가슴이 쓰려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반가웠던 50년 친구들, 후배들, 특히 나를 늘 걱정해주던 후배의 얼굴, 아니 이화 캠퍼스를 가득 채운 그날의 행복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이 얼굴들은 오래도록 아파왔고 여전히 아프고 있는 광주를 잘 알지 못 한다. 몸과 마음이 멀어서 알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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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아름다웠던 5월의 그날들 - 『그대에게 가는 꽃길』 이대동창문인회, 에세이문학출판부, 2017.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10. 25. 18:46

요가교실

 

 

하아나 두울, 하나 두울.

요가선생님은 깡마른 작은 체구에도 목청껏 단어들을 내뱉는다. 첫해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호들을 이젠 대충 알아듣는다. 소 - 고양이 - 소 - 고양이 - 자, 손바닥하고 무릎, 발등까지 완전히 바닥에 밀착시키고, 이제 완전 고양이자세요, 두 팔 바닥으로 쭉 벋고 가슴 눌러서 바닥에, 자, 이제 아기자세로 풀고요.

이상하다. 아기자세라고 하면 그냥 그대로 ‘한하고’ 있고 싶어진다. 정말 우리 모두 어머니 몸속에서 그렇게 아기자세를 취하고 있었을까. 조그맣게 몸이 수축되면서 아주 편안함 그 자체다. 하긴, 누워서 길게 뻗고 팔까지 올린 기지개자세가 더 편해야 맞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푸른 초원을 생각하면서.

 

따사로운 햇살아래……를 생각하면 곧 다른 장면으로 빠져든다. 오래 전에 서양 소설책에서 읽은 독특한 소녀가 떠오른다. 영성체 빵이 왜 그리 맛이 없는 마른 빵이어야 하는지를 이해를 못하는 아이, 갓 구운 빵을 탐닉하는, 그만큼 감각에 충실한 아이. 햇살아래 초원에 누워서 사람들이 ‘무한한 행복감’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한 소녀 말이다. 그것이 나중에 사람들이 오르가즘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의아해했던 아이, 그런 일이 남자와 여자의 교접 시에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녀 말이다. 나는 반대로 웅크려야 편하고 행복감을……

 

남이 씨, 나남이 씨, 뭐하세요, 고만 일어나세요. 나남이 씬 아기자세만 나오면 그렇게 꼬부라져갖고 어푸러져 있으니 참. 여기요, 요가 하는 동안엔 눈들 감지 마세요. 눈을 감으면…….

 

나는 행동이 느리다. 느린 것으로 정평 나 있다. 내가 잘 못 듣는 것을 요가반 사람들은 모른다. 주민센터에서 그것까지는 알 리 없다. 장애자 등록이 될 정도로 청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언뜻 보면 그냥 가끔씩 멍한 사람이라는 정도, 그나마 다행이다.

 

자아, 그대로 그 자세에서 다리 쭉 뻗어 좀 털고요, 예, 이제 누우세요. 편안하게 다리 펴고, 두 팔 올려놓고 차려자세요, 뒤꿈치 쭉 밀고, 밀어내고……, 양팔 옆으로, 이제 악어자셉니다. 왼발 90도 들어 올려서…….

카톡. 카톡. 왼발을 오른쪽으로 넘기고 고개는 반대쪽으로 하다 보니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눈은 그 쪽으로 쏠리지만 선생님의 곁눈질을 피하려면 그냥 나중에 봐야지. 어, 카톡. 카톡. 누가 뭘 한꺼번에?

다시 차려자세, 이번엔 반대로. 자, 다시 완전 차려자세로 풀고요, 두 팔 머리 위로 쭈욱, 양팔 기지개…….

 

휴, 다시 차려자세네. 햇살아래 잔디밭이라 상상하고 쉴까. 햇살아래 황홀감…… 소용없어, 아름다웠을 처녀시절을 전쟁으로 보냈지. 선배가 보고나서 준 책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시작하자마자 48세 여자의 일상이 펼쳐졌지만, 평범하진 않았다. 멀쩡한 독일여자가 골칫거리 터키노동자의 애를 배다니, 것도 고향에 처자가 있으니 혼외자를.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에’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는 여자를 누가 이해해. 주변의 노골적인 질시는 당연, 등 뒤에선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욕설까지 나왔다.

그때는 그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딱딱하기도 했고, 읽다말다 했다. 그래도 유복한 가정의 예민한 소녀가 겪은 전쟁이야기는 뚜렷이 남았다. 그래 히틀러가 죽인 건 군인들과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지. 죽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야. 책 속의 레니, 그 여자의 평범했을 인생도 죽었지. 탈영으로 총살당한 오빠, 자포자기로 죽은 아버지, 전선에 나가는 젊은이들과 결혼하는 여자들, 그녀도 얼결에 사촌오빠와 결혼했고, 전사했고. 여자는 묘지에 딸린 화원 노동자로 몰락했지.

 

자아, 뒤꿈치 밀고요, 쥐가 안 나려면 항상 뒤꿈치를 밀어내야…….

 

장례사업은 호황이었겠지, 얼마나 일손이 부족했음 포로들을 거기다 배당했을까. 하필 소련군 포로를 만났지. 그가 온 첫날, 여자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넨 일이 사람들한테 ‘경악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선배, 따뜻한 커피 그게 뭐가 경악스러운 일이래요? 하등인간에게 커피를 줬다고? 소련사람이 왜 하등?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게르만은 아리안의 후예라고 선전한 정치 때문이었지.

이상하네, 아리안, 그거 이란 어쩌고 하는 것 아닌가?

맞아. 그 이란과 같아. 몇 천 년 전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서 살다가 서쪽으로 가서는 유럽 아리안, 남쪽에서는 인도 아리안의 선조가 된 것이니까.

아리안, 그러니까 독일인들 대부분 기독교인 아녔나요, 기독교나 유대교나?

그렇게 말하자면 이슬람도 같은 뿌리지. 아브라함의 자식들의 자식들이니까.

머리 아파.

암튼 아리안 아님 무조건 하등인간, 순정한 피의 문제였지. 그 땐 할머니 할아버지 중 한 쪽만 유대인이어도 유대인 딱지였지. 친위대에선 더 했대. 사병은 1800년도까지, 장교가 되려면 1700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순수혈통을 증명해야 했다니, 끔찍했지.

선배, 뭐예요, 생물에서 인간으로 전공을 바꾸려고?

아니, 이건 아직 피 흘리고 살아있는 역사야. 소설이 아냐. 실제로 하등인간 분류가 유효했다는 것이지. 친위대장 히믈러는 ‘유대인 소개, 유대인 섬멸’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잖아.

소개?

그래, 강제소개. 하등인간은 파괴욕과 원시적 탐욕 때문에 밝은 인간들을 해칠 것이므로 소개시켜야 마땅하다! 페스트균 같은 게 건강한 육신을 넘보지 못하도록! ‘유대-볼셰비키’라고 하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동물보다 더 낮은 단계라는 판정이었어. 상상이 가? 동물보다 더 낮은 인간들. 그들 법으론 유대, 슬라브, 소련의 아시아계 모두 하등인간이었으니까.

하등인간, 죽어도 바꿀 수 없는 피 때문이네.

그 책이 그러저러 내 많지 않는 책들 속에 섞여 있었고, 내가 실제로 마흔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정확히는 마흔 여덟을 다 보낸 겨울에 그 해를 돌아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읽었다. 머리 아프기는 비슷했지만, 좀 읽히는 것은 나이 탓이었을까.

 

인종, 인종도 사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부턴가는 한국말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친다. 다문화 가정도 날마다 는다.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가계에도 진작 혼혈이 발생했다. 도희가 미국에 잠시 교환학생으로 다녀왔을 뿐으로 그리 되었다.

언니, 어떻게 해. 누가 한국에 오겠다는데.

누가?

으응, 미국에서 만났던.

뭐야, 너 그 틈에 연애했어?

연애는 아니고, 그냥 캠퍼스에서 친절하게, 차분한 선배였는데.

선배? 어떻게 외국사람이 네 선배야?

그럼 뭐라고 불러, 다카하시상…….

미국에서 만난 일본인이 청혼을 위해 한국에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일본인 청년은 친척집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더란다. 그를 모습으로는 얼른 외국인이라 알아보지 못했다.

혈통은 지켜야지!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청소년기를 일제 밑에서 보낸 세대였으니 두말한 나위가 없었다. 더구나 둘째 형은 ‘묻지마라 갑자생’이었다. 징집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사도 묻지마라. 결국 우리 집엔 둘째큰아버지란 이름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희는…….

 

자, 차려자세 그대로요, 팔을 넓게 벌리고, 오른 손 만세, 상체 들어서……

내 자리는 맨 가라서 손을 조금 더 뻗는 순간 핸드폰이 만져진다. 살짝 엿본다. 꼬마 4자가 걸려있는 동그라미 안이 완전 초록이다. 맙소사, 초록이면 숲 사진의 도희다. 도희에게서만 넷이다. 도희, 도희가 웬일일까.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찬성할 수 있는 이유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았었다. 첫째가 혈통이고, 그것도 하필 일본인이라니. 외아들에, 너무 부자에.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다녀갔던 청년이 다시 또 다시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어머니는 무엇에도 버틸 힘이 없었을 것이다.

 

롤링, 자 롤링 다섯 번 하고 일어나세요. 팔 벌려 숨 쉬기 하고요, 다시 한 번, 자, 반대로…… 어깨 흔들고…… 그대로 숨쉬기, 네에, 수고하셨습니다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든다.

못 보고 가겠지, 아마. 엄마한텐 전화 못 했어.

100평이라는데 침실은 두 개 뿐이네. 베란다에 풀은 엄청 좋으네, 애들 왔음 정말 좋아했을 텐데. 언제 시간 맞춰서 하루 이틀 사용해.

어제 늦게 펜트하우스에 들어왔어, 기장이라고 알아, 해운대에서 고리 쪽, 부산 끝.

언니, 여기는 THE ANANTI COVE.

거꾸로 찾아 읽으니 도희가 부산엘 왔었단다. 아난티 코브? 매트를 접을 것도 잊고 애꿎은 네이버를 두드린다. 부산 끝 시랑리, 부산 시민들도 잘 찾지 않았다는 한적한 어촌 마을. 느닷없이 300실 규모의 힐튼호텔과 100실 가까운 아난티 펜트하우스 그리고 100채가 넘은 프라이빗 레지던스를 갖춘 관광 명소가 되었단다.

그래, 지친 도시인들을 위한 도심 가까운 명소도 필요하겠지. 쉬고 싶고 돈이 되면 명소에 가서 쉬어 마땅하지. 일본에서도 오는 걸 보니까 일단은 성공한 관광지인 모양이다.

 

도희는 결혼하고서 일본에 정착하는 줄 알았는데 곧 중동으로 나갔었다. 시댁 회사의 지점이 있는 두바이에 가서 살았다. 어머니가 늘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다행히 아이를 낳은 뒤로 애 교육 문제가 생겨서부터 도쿄에서 살았다. 도쿄 서울은 쉽게 오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머니한테는. 그러다 아이가 자라면서는 아예 미국 지사에 나가서 살았고, 오랫동안 한국엔 오지 않았다. 한국에 오더라도 집에까지 내려와서 어머니를 보고 가는 일은 드물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에는 다시 도쿄에 살고 있으니까, 부산도 마음만 먹으면, 또는 비즈니스면, 쉽게 오갈 수 있나 보다.

 

다시 네이버. 아난티 코브, 연결된 힐튼호텔 10층 로비의 전경은 지상낙원?

어,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미치면, 뛰어내리면 어쩌나. 하긴 바다를 보고 미칠 인간이면 아난티 코브 힐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위인이 못 되겠지. 돈이고 명성이고 완벽한 그들, 현대판 귀족들이 바다에 뛰어내릴 염려는 1도 없단다, 이 소심아!

몸 말고 맘도 두뇌도 융숭한 대접을 받는군. 500평에 달하는 대형서점 이터널 저니에는 여행, 인문, 철학, 예술 등을 주제로 2만여 권의 책을 비치해 놓았단다. 여행, 인문, 철학, 예술이 돈의 소유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허나 돈이 모자라면 여행, 인문, 철학, 예술 모두에서 영영 이삭줍기 인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는 대목이다. 7, 8천 그루의 교목과 관목을 자랑한다는 아난티 정원, 참 낙원이겠다. 힐튼호텔 앞 쪽에는 장흥의 시골마을에서 300년 넘은 은목서를 옮겨 심었다고. 대단하구나.

문자 내용으로 보아서 체크아웃이 임박했다는 것 같았다. 곧 있으면 부산 도쿄 비행기에 오르겠지. 나도 문자를 쓴다. 그래, 300년도 넘었다는 장흥 산 은목서는 안녕하시든? 어디에 있던 행복하면 돼!

 

행복하면 된다! 행복하자면 최소한 열등하진 말아야 하는데. 우선 장애는 열등이다. 그런데 난 듣는 데 장애가 있다. 거기다가 또 어딘가 아프면 큰일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건 곤란하지. 귀찮아도 요가교실에 다닐 이유를 또 한 번 확인한다. 우리 중 누가 회복불능으로 아프면, 어차피 죽을 거면, 몰래 수면제 치사량을 먹이기로 약속하자! 도희랑 고등학교 땐가 약속했었는데, 아마 도흰 잊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확인할 계제가 안 된다. 우선 너무 멀다. 태어나면서 미모도 우열을 갈랐지. 뚱한 언니에 비해 상큼하게 예뻤던 도희!

 

그런데 미모로 사람을 나누는 것은 해결된 것도 같다, 잘만 하면. 10년도 넘은 이야기다. 그때 비비씨 뉴스라던가 런던타임즈라던가에서, 아니면 둘 다에서, 남편이 성형의 나라 한국 이야기를 보고는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성형외과를 하는 건데.

…….

이거 봐, 제목이 아예 ‘프라이스 오브 뷰티 인 사우스 코리아’, 미모의 값이라. 미모에 대한 광증이 지배하고 있는 남한. 여기 봐, ‘얼짱’이라는 한국어도 그대로 소개되었다니까. 20대 여성 50%는 어떤 방식이건 성형을 했다는 거야. 스물다섯 살 여자가 몇이야, 80만 명은 태어났을 것이니 여자가 40만, 그 중 절반이면 20만 이상이 어딘가 손을 댔다는 말인데, 어휴.

이비인후과 환자 수는 그에 비길 바가 못 될 것이다. 게다가 거의 노인들이 오겠지. 잘 못 듣고 어벙한, 기침감기가 오래되어 목이 쉰 노인네들. 그래도 썩은 이빨을 내미는 치과 보다는 낫지 않을까. 무슨 과이건 하루 종일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라는 직업이 개인에게는 상쾌한 직업은 못 될 것이다. 그렇담 하루 종일 범죄자만 다루는 경찰이나 검찰, 그러니까 판검사들도 개인적으로 쾌적한 직업은 못되겠다. 꽃나무나 꽃을 파는 화원이, 문방구를 파는 가게가 좋겠다. 다음 생에서는 소소한 그런 일들을 했으면 싶다. 아니, 아주 만일에 다음 생이 있다면 그보다는 먹을거리를…….

암튼 그 순간에는 우선 남편을 위로하고 싶었다.

성형외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매번 확실하게 더 예뻐지라는 법도 없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쑤나. 본인들이 선택하는 건데 뭐.

마취 같은 것도 무섭고.

마취가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지 그래, 그렇다고 마취 무서운 의사가 의사인감. 의사를 말던지. 하긴 피부과 지원자도 엄청나다더라고, 전엔 성적 좋은 애들이 피부과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피부과를?

피부과에서 간단한 성형을 상당히 해결하제, 수술을 많이 안 하고도.

나라면, 내가 만일 의사라 해도, 확실히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었다. 의사가 아닌 주제에 가정법으로 말해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선배도 있다. 베드가 100에 육박한대나, 그거 다 쌍수해서 벌은 거라니. 내과은사님 떡하니 모셔다 놨더구만. 개원 때 다녀와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모습이 좀 안타까웠다. 내과와 정형외과 위주의 종합병원을 차린 후배들 여남은 틈에 끼어 혼자 파리 날리는 이비인후과를 맡아서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살면 어쩌나.

 

남편이 왜 이비인후과를 택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오빠 고등학교 동기로 함께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빠완 일찍 갈렸다. 오빠는 본과에 가자마자 탈락했다. 무작정 작파했다. 결국 해부학교실 때문임이 드러났다. 그러고도 사내 녀석이냐! 인생이 그게 땅 파먹고 살 거냐? 호미로 지렁일…….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가 우리 방 창문까지 흔들었다.

오빠, 해골 봤어? 시체해부도 했어? 좀 있다가 도희는 풀죽은 오빠에게 짓궂게 물었다. 멋쩍은 오빠 표정은 우리 어려서 샘가에서 한 솥 가득 토막 난 허연 뼈다귀들을 보고나서 도망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도희는 샘가에 그냥 있었지 싶다.

누이들아, 실망했지? 그래, 나 구역질해서 쫌생이 됐다. 망신 산 것? 것보다 그 애, 그 애가 키득거렸어. 샐샐 웃고 있었다고! 입을 꼭 다문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어렴풋이 오빠의 ‘그 애’를 알고 있었다.

오빠가 진로를 바꾸어 서울로 간 뒤에도, 오빠가 집에 오는 방학 때면 친구도 어김없이 왔다. 오빠가 유학을 앞두었을 무렵엔 우리의 결혼 말이 오갔고, 곧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윗감이 이비인후과 레지던트란 사실에 우리 부모님들은 뭔가 안심하셨을 것이다. 딸이 요상한 병, 먼데는 잘 듣고 가까운 데는 잘 못 듣는 병에 걸려있었으니까. 그것이 이비인후과 소속의 병일 것이라 믿고 계셨으니까. 그런데 남편의 세부전공은 귀가 아니라 목이다, 뭐 그런.

 

편한 운동화 위에서 걷고 있는 내 몸을 내려다본다. 요가하는 날에는 기장이 긴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못 살게 뚱뚱한 건 아니지만 운동하려면 몸을 덮는 게 편타. 남자 회원들이 두엇 섞여서 불편한 점도 있다. 팔을 위로 뻗을 때면 허리가 드러날지, 고양이자세 같은 것을 하려다간 정말 배통이 나올지. 더러는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막상 그런 회원들은 무신경하다. 무신경하니까 행복한가. 요가시간 마지막쯤에는 스트레스 해소 웃음을 웃으라고 할 때가 있다. 억지웃음이 잘 안 나오는데, 제일 잘 웃는 건 배통을 보통 내놓는 영님 씨다. 몽글몽글한 몸매로 귀여운 여자인데, 엉덩이는 쳐들고 배가 훌러덩 벗겨져서 뱃살이 바닥에 눌릴 때면 솔직히 나도 모르게 눈이 감아진다. 그런데 제일 행복한 얼굴이다.

 

나남이 씨, 뭐해요. 파란 불이구만, 언능 갑시다.

건널목에 서있던 내게서 누가 가방을 잡아당긴다. 바로 행복한 영님 씨의 친구다.

어, 내가 젤 늦게 나온 줄 알았더만요. 근데 오늘 친구는 안 보이든…….

예에, 해외여행 갔다요, 7박8일이나 된다요. 신랑이 환갑잉게 환갑여행인디요, 사돈네랑 같이 갔다요. 거그는 내년인디 한테 가자고.

사돈네랑 해외여행을? 나도 모르게 말하고서 움찔했는데, 다행히 스스럼없는 반응이다.

며늘애가 참 좋아라. 긍께 그라고 항꾸네 여행 모시고 다니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우리는 건널목을 건넜고, 건널목을 건너자 바로 헤어졌다.

 

나도 하와이엘 간 적이 있었다. 도희네가 카일루아 쪽에 집을 통째 빌려 놓았다. 우리는 한 달 내내 함께 있지는 않았다. 코앞의 해변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런데 희극적으로 뚱뚱한 사람들, 배통을 다 드러낸 남자들 여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덜렁덜렁, 출렁출렁, 거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몸매들. 임신 후반기처럼 보이는 여자도 배를 한껏 밀어 벼슬처럼 쳐들고 뒤뚱거리며 휘젓고 다녔다. 가까이 보면 발가락들하며 발 모양은 희한하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저런 발을 몸을 뭣 하러 내놓을까.

다음 순간, 우리가 우리 몸을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보라고 내놓는 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등신이 아니라고, 배가 출렁거린다고, 그것이 밝은 대낮에 따뜻한 모래사장에서 햇볕을 즐겨서는 안 될 이유는 아니었다. 한번 그만큼으로 살아있으므로.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법, 그것이 문제야. 도희는 달랐다. 예쁘기도 했지만 뭔가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 그래서 고향을 멀리 멀리 떠나서도 자신 있게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우수한 형질이란…….

플라잉 인 더 스카이~~, 핸드폰 벨 소리다. 모르는 번호다. 그것까지 응대할 마음도 여유도 없다.

어라, 도희에게 썼던 문자가 그냥 거기에 그러고 있다. 그래, 300년도 넘었다는 장흥 산 은목서는 안녕하시든? 어디에 있던 행복하면 돼!

놀라서 근처 아이들 놀이터 그네에 가서 앉는다. 카톡을 전송을 아직 안 한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앞줄을 주르륵 지운다. 은목서 안부를 물어서 뭐하려고! 그 순간 내가 어딘가 팍팍 꼬였었나 싶다. 살짝 바꾼다. 울 도희, 어디에 있던 행복해라!

 

내가 짜릿한 행복감을 잘 모른다고 해서 그리 불행한 것도 아니다. 밥걱정해 본 적 없이 불행 어쩌고 하면 죄로 간다. 행불행은 돌고 돈다는데 나머지 생에서 밥걱정하게 될 까 그것이 걱정될 때도 있다. 꼭 그 때문은 아닌데 가끔 귀가 울만큼 머리가 아플 때가 많다. 예컨대 예쁘고 활달한 도희 사는 걸 듣다보면 혹시 우리는 하등인간인가? 아난티 코브를 거닐 수 없으면, 또는 수억 짜리 명품시계 안내행사에 초대된 적이 없으면.

그 얘기도 슬쩍 들었었다. 서울, 유수의 호텔 브이브이아이피 룸, 아직 붐비지 않은 늦은 오전 시간,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장갑까지 끼고서 단 대여섯 명의 귀빈들에게 ‘신상 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 눈에 선하다. 절제된 몸놀림, 조용한 목소리.

그러게, 5억 그런데도 별 게 아니더라. 시계얼굴은 뭐 예뻤는데, 줄이, 보석장식들도 너무 자잘자잘하고. 스타일은 괜찮아서 차보기는 했어. 점심대접까지 해줘. 서울 사는 친구, 숙인이 알지, 숙인일 데려갔어. 샴페인 곁들인 메뉴판 보고는 눈 좀 휘둥거리더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집값을 훨씬 넘는 시계나 아난티 코브 수준의 펜트하우스는 사람을 나누어 팽개쳐버리는 것 같다는 말이다. 120만 원을, 내가 잘 못 들었나, 잘 못 들었기를, 그 돈을 하루 숙박에 지불해야하는 데를 누가 쉬이 구경하겠는가. 누군가가 지불할 수 있는 숙박요금의 상한선 말인데, 그게 바로 자존감의 높이다. 그렇게 취급된다. 숙박비 말고도, 아무라도 기분 따라서 이삼일 그냥 쉴 수 있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여행을 떠날 수나 있는가.

집은 안 그런가. 서울 어딘가 평당 5천만 원이 넘는 아파트도 있다고, 올 초에 뉴스에 나왔다. 그때 누군가 티브이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다, 꽈당, 꽈다당! 아래층인가?

 

날마다 수많은 아파트들과 빌라들이 들어서고, 날마다 수많은 모델하우스들이 공개되지만, 손님들을 선별적으로 조용하고도 융숭하게 안내하는 곳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다 아는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몰랐었다. 어떤 특정 모델하우스에 초대되어 살며시 다녀왔다는 도희가 전화를 했었다. 그때도 부산이었다.

전망 끝내주더라. 아파트 보다는 레지던스가 관심이 가던데.

레지던스? 부산에 주택을 사려고?

무슨 주택을, 브렌드 레지던스지.

브렌드?

점점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5성급 호텔과 한 건물에 있어서 똑같은 서비스를 받거든. 아래는 호텔이고 위는 아파트라고 생각하면 돼. 살림도 하지. 젤 좋은 건, 언니, 사서 등기도 할 수 있어. 서울 어디 레지던스는 평당 일억도 한대나. 좀 되긴 하지. 그래도 외국인은 투자이민 식으로 영주권도 받을 수 있고, 내국인은 일가구이주택도 해당 안 돼서 좋고.

 

그냥 들은 풍월이라고, 도희가 무심코 이야기하는 일상은 내게는 특별한 영상이다. 비교할 수 있는 일상의 꼬투리가 없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아서, 일상의 자리 어딘가에 묶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내가 언니니까. 언니가 시시콜콜 그런 것을 묻는 건 아니다. 자매라 해도 각각 결혼해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세월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많겠지. 아니, 서울로 진학을 고집했을 때부터 남다르기도 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난 아마 그리 꿈이나 욕구가 높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대학 때부터였나. 잘 듣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보니 더 멍해진 것도 사실이다. 헬렌 켈러도 그런 말을 했다더라, 청각상실이 시각상실보다 더 불행하다고. 시각상실은 사물들로부터 고립시키지만, 청각상실은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기 때문이라고. 사람과의 연관을 어렵게 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게 하니까. 좀 충격이어서 어렵사리 영어원문까지 찾아보았다. 프럼 띵스, 프럼 피플.

아, 선배는, 청력장애였던 선배는 어땠을까?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저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난 정말 못 들었다. 못 됐다.

 

어차피 잘 못 듣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오기를 부리는 편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초라함에 질린다. 월 만원 수업료를 내는 주민센터 요가교실에 다녀오는 길, 하릴없이 아이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는 나. 스파 앤 클럽 입회보증금으로 집 한 채 값을 슬쩍 긁어대는 마이다스 손들은 우리 모두를 하등인간이라고 치부하겠지. 반려동물만 못한, 동물보다 아래 부류의 인간. 으스스 떨린다, 알 수 없는 모욕감에. 땅을 차고 두어 번 굴려본다. 하늘 - 땅 - 하늘 - 땅.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 친 사람들도 있다. 다이애나가 죽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우르릉 꽈당! 지하차도를 달리던 차가 벽을 들이받는 소리가 난다. 헉, 하고 쓰러지는 사람, 사람들. 끼익, 끼이익! 뒤쫓다 멈추는 차량들. 파박, 파팍! 터지는 셔터소리, 소리들.

셔터 소리야, 셔터 터지는 소리, 소리들.

나남이, 뭐하고 있어!

가만, 고통스런 저 숨소리. 응급처치는 않고 셔터들만 눌러대고 있어, 파박 파팍!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래! 정신 차려, 남이야, 다 끝난 일이야. 뉴스에 뜬 건 이미 끝난 일들이라니까.

그러네, 연인이랑 함께 있었다고, 불행 중 다행이네.

갔는데 무슨 소용.

그래도. 이집트 무슬림이라면 이제 피는 안 따지는 세상이 되었나 봐.

무슬림이지만 누구냐가 문제지! 런던 한 복판 세계적 수준의 해롯백화점 상속자라잖아. 혈통이나 피부색이 별 문제가 아닌 거지.

왜 아냐, 영국 왕실에선 그 일로 크게 노했다는 음모설도.

설은 설이고. 인간 등급의 새로운 기준은 이제 혈통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이지. 돈이 되면 되는 거야. 돈이 안 되는 인간은 하등인간이고. 돈의 피라미드, 상부에 오르려면 최강 맹수처럼 살아내야 해. 누구든 제껴야지. 메피스토 말이 맞아, 인간은 신이 짐승들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준 이성을 사용한답시고 외려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되었다고.

언제 적 사람?

왜 이래,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 유혹자!

애초에 그리 말하지. 인간도 약육강생이란 말이지?

너 왜 이래 오늘, 약육강식! 인간 정글에서 철저히 계산된 약육강식을 누가 말리냐고. 합리적 이성이란 다른 말로는 잇속 따른 철저한 계산일뿐야.

졸업 후 일만하다가, 일하면서 누군가를 사랑만 하다가, 그러다가 그냥 혼자, 평생을 혼자 공부만 하며 살아가는 미선은 가끔은 너무 어려운 말을 한다. 지난번에 집에서 커피 마시다가도 그랬다. 발아래 모래땅을 톡톡 건드리다 일어서려니, 모래가루에서 커피향이 올라온다.

 

여전히 폴저스 깡통이구나.

뭐 그냥. 인스턴트 때부터지. 네 말대로 합리적이다, 왜!

합리? 커피 값도 요지경이야. 저번 서울에 갔을 때, 우연히 소문난 중국식당엘 갔었다.

커피 값 말하다가 웬 식당?

으응, 요리골목 그런 데. 요리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네 식당이라고.

맛이 다르든? 비싸겠지 뭐.

맛에 돈에 놀란 것 아냐. 웬만하더라고. 근데 식당 영수증을 가져가면 근처 커피집에서 1,000원에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다는 거야. 괜찮은 오퍼지.

괜찮으네.

그게 다가 아냐. 바로 옆 다른 커피전문점 앞을 지나는데 섬뜩하더라고. 전문점이면 나름 비싼 아라비카 원두를 쓸 테니 4,000원은 되겠지. 누가 거길 가느냐고. 값싼 로부스타 원두면 어때, 식후에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충분한 것이 보통 우린데.

대기업의 문어발 공격은 막아준다 안했었냐. 프랜차이즈 빵집, 식당, 그런 것들 중소기업 적합업종 뭐 그런 것 정해주지 않았어?

소용없다니까. 호랑이 없는 굴 속 여우가 왕 노릇이지. 여우는 꾀를 낸다고, 여기서 식사하고 이 커피로 가세요! 밥집과 커피집이 한통속이더라고. 알바도 같이 쓰고.

설마.

커피 주문받는 애 손톱 땜에 기억이 났어. 열 손가락 무지개. 내가 기어코 물어 봤어, 아까 저쪽 식당에서 본 것 같다고. 뭐랬는줄 알아? 맞아요, 같은 사장님이 운영하세여. 점심 바쁠 땐 그 쪽으로 순환근무죠. 저녁시간엔 더 많이요. 그랬다니까.

설마.

남이야, 내 귀로 직접 들었어. 꿩 먹고 알 먹고, 여우같은 인간들.

우리는 네 눈을 둘 데를 몰라서 뚫어지게 커피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갔다.

왜, 여우라고 하니까 로트카-볼테르 공식이 떠오르네. 내가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너 어떻게 그걸? 바로 그거야, 포식자 피식자에 관한 로트카-볼테라 방정식. 여우 까짓것 한껏 늘라지. 첨엔 여우가 늘수록 토끼가 줄겠지. 토끼가 아예 줄어들면 여우도 따라 줄어. 그럼 다시 토끼가 늘 것이니까. 움츠려 보자고!

응, 로트카-볼테라.

난 가끔 단어들을 틀리게 말해서 무안할 때가 있다. 주홍이나 주황이나, 분홍이나 분황이나. 뭐 내가 언어학잔가.

 

아파트 하나를 건너서 걷다 보니 집이다. 우리 아파트다. 문을 열면 바로 작은 욕실이 있는 구조는 참 이성적인 생각에서 만들어진 결과다. 청결을 추구하는 우월한 이성이 좋구만! 메피스토며 미선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사람의 몸 중에서 어디가 제일 불결한 곳이죠?

우리 꼬마들은 말을 못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다들 대변 소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더러는 매일매일 새까매지는 양말을 보면서 발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선생님은 말했다. 손이 젤 더러운 곳이에요, 손이! 손이 무엇이든 만지고 다니잖아요, 하루 종일! 그러니까 손을 잘 씻는 사람이 젤 깨끗한 사람이에요!

 

어려서 배운 것은 정말 평생 간다. 내가 만지는 것들이 다 문제가 많은 것들이 맞다. 요가매트는 공용이다 보니 첫날 바로 몸이 쑤시고 간지러웠다. 곧 누비천으로 덧깔개를 만들어 갔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다른 회원들도 여럿 깔개를 쓴다. 문제는 계속 생긴다. 요가선생님은 앞쪽으로 누우라고 했다가 다음날은 또 뒤쪽으로 누우라고 한다. 머리와 발을 바뀌지 않게 하려고 이름까지 수를 놓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름 표시 자체는 정말 필요가 없다. 날마다 가지고 다니니까. 뭣한데 짊어지고 다니요! 여기 요레 놔둬도 안 없어진디! 누군가가 친절히 말해 주었지만, 내 맘 속에서는 아니다. 내가 결석을 했을 때 누가 내 깔개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 아니, 다른 사람들 거랑 함께 쑤셔 박혀있는 상상이 그리 유쾌하지 못한 걸 어쩌라고. 집에 가져오면 여름철엔 매번 널기도 하고 또 자주 빤다. 빨래는 세탁기 몫이니 문제없다. 날마다 물청소를 할 수 없는 물건들이 심각한 것들이다. 하긴 날마다 물청소를 한들, 빨아 쓰는 걸레도 그 나름 불결하겠지. 그렇담 쓰고 버리는 종이걸레를 써야 할 텐데 그건 또 못하겠다. 이율배반이다. 일회용 걸레를 쓰지 못하면 하등? 아 참, 오늘 왜 이리 등급 타령일까.

 

괜찮다. 난 괜찮다. 밀걸레질을 하려면 수건걸레를 다섯 번은 바꾸어야 하지만 괜찮다. 대신 깨끗한 마루를 내가 좋아하니까. 오늘은 샤워를 먼저 하고 머리를 싸매고 나와서 마루를 닦았는데, 매번 갈팡질팡한다. 걸레질이 먼저인가 샤워가 먼저인가.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일단 손을 먼저 씻고 나와서 청소를 마치고나서 샤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 을 씻다가 순간에 샤워 꼭지를 틀고 만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나서 밀걸레를 들자면 쭈욱 뻗고 쉬고픈 마음과 싸워야 한다. 그래도 결국 한다. 의심도 따른다. 나에게 깨끗한 마루가 그렇게 중하다면, 몸을 짓이겨서라도 청소를 하러든다면, 내 몸은 마룻바닥보다 아래인가. 소중한 것, 소중한 것들. 판단의 시금석이 불안하다. 곧 바로 혼란이다.

 

세상도 그러하다. 시금석 같은 건 없다. 어떤 이성은 아내를 남편을 부모를 버리고 보험금을 택하고, 어떤 감성은 강아지를 위해 남편을 지인을 이웃을 죽인다. 메피스토도 절반은 몰랐다. 지상에서 신이라 자처하는 인간들, 이젠 이성뿐 아니라 감성도 함께 통째로 미치고 있답니다!

아, 편지를 쓰자, 메피스토에게.

햇살이 마루 깊숙이 왔지만, 여전히 긴 하루가 남아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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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단편 「요가교실」, 『한국소설』 2017 12월 (통권 221호), 98~115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