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7. 7. 22. 01:44

제목: 대단원을 지나서 다시 한글

 

                                        이글은 192015년 9월 세계한글작가대회에 맞춰 발간된 

                                        문집에 있었고, 이제 생각이 나서 올려둔다.

 

 

다행스럽게도 일제 치하가 아닌 세상에서 이 땅에 태어난 나는 한글전용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았다. 지금 쓰는 용어인 문법은 말본이었고, 실제로 교과서 제목이 그랬다. 심지어는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모교는 배꽃큰애기배움터라야 한다고까지 한글 사랑에 목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말 우리글은 공부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면서 자랐기에 우리 음악도 당연히 7음계라 믿어버렸다, 제법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러니 우리 것은 모두 그냥 저절로 있는 것이고, 뭔가 낯설고 어려운 것이 학문의 대상이리라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 살았을 뻔 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연구논문을 쓰면서 오직 갈수록 멀어지는 그것들을 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순간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른나라다른사람들의소설들을파먹느라자판위를달리는손가락들이하이에나의발가락처럼넷씩으로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이런고백과함께나는소설을쓰기시작했다.

하지만 소설 쓰기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 글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하려니 내가 소설은커녕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글쓰기를 배워 본 적도 없이 논문이라는 이름의 글들을 써 댔다니.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번갯불에 콩 볶는 심정으로 남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서 처음 한 일은 한글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다 살고서 무슨 짓이람, 이라고 핀잔할 지경인데도.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계속 외국어만 파던 대학의 언어교육원 어딘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교사가 된다는 상상은 어색했지만, 분명 국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때까지도 국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따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국어는 다만 나라말인 것을, 한국어라야 고유의 우리 언어를 국제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가며 부끄러움 속에서 단기간이나마 (한)국어를 배웠다. 내친 김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룹 스터디도 하고 혼자 날밤도 샜다. 과락은 면했던지 2차 시험을 보러 갔을 때에는 한참 젊은 면접관들 앞에서 얼얼했지만, 막상 자격증을 손에 쥐자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일진대, 무턱대고 평생 써댄 글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게로 치면 어떤 것은 1킬로그램을 어떤 것은 2킬로그램을 넘는 것들이었으니 이들을 어쩐다?

기억을 왜곡하기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고는 새로운 한글로, 내게는 새로운 한글로 글을 쓴다. 새로 쓰는 글들이 많아지면 잘 못 썼던 글들이 덮이기라도 하는 양. 덮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님을 알지만 모른 체하기로 한다. 어차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라고 위로를 한다. 나의, 우리의 한글로 글을 쓰면서 외국어 공부할 때만큼 사전을 찾는다. 글의 맞춤법 검사에도 넣어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서 살핀다. 잘은 아니더라도 틀리지는 말자고, 잘 쓰는 건 타고나거나 어떤 은총의 문제이려니 틀리게 쓰는 일이나 말자고 애를 쓴다. 물론 세상 일이 애 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알만큼은 살았다. 그래도 다른 묘수가 없다. 다만 한글을 다시 배우게 된 것이 기쁠 뿐이다. 내 말을, 우리의 말을 늦게라도 다시 찾은 것이 의미라면 의미다. 한편의 연극일 인생의 대단원을 지난 오늘에서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니, 의미를 떠나 나는 그냥 한글에 파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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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문학을 노래하다, 세계한글작가대회 기념문집 - 산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2015.9.7.

238~240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11. 23:54


‘글쓰기’ 절실해 떠난 강단 …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할 뿐”

 

퇴임교수가 사는 법_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출간한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

2017년 07월 10일 (월) 15:44:18 김홍근 기자 mong@kyosu.net

 

   
     
 

때로는 한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냉철하고도 날카롭게, 때로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이 나라, 이 사회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교수가 있다. 현재 <교수신문>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을 연재하고 있는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다.

독문학자이지만 우리말로 글을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이 행복하다는 서 명예교수는 어느 날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유는 ‘소설가’로서 좀 더 매진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2001년 『열하나 조각그림』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첫 발을 내딛은 후 이화문학상(2004년), 제6회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2013년), 제30회 PEN문학상 문학활동상(2014년) 등 다양한 수상경력 또한 갖고 있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 교수는 본인의 소설 작품 끝에 실었던 ‘작가의 말’ 한 구절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퇴임 이후 소설가로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서용좌 명예교수를 서면으로 만나봤다.

 

 

△중학생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소설가를 꿈꾼 배경이나 계기가 궁금하다.

 

“소설가?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다기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그리됐다. 2001년 얼결에 『열하나 조각그림』이라는 장편을 발표한 것이 문단에 디딘 첫 발이었다. 독문과 졸업한 제자들 가운데 출판사를 차렸다고, 글 좀 내자고, 수필이라도 출판하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비밀이 터져나와버렸다. 수필은 말고, 소설이라면 끼적거리고 있노라고. ‘막고 품는다’는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둑을 막고 물을 모조리 퍼내면 고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쓰는 말이다. 옛날에는 부족한 실력으로 교수가 되고 했으니, 무조건 뿌리째 또는 송두리째, 중요성의 경중을 따지기 이전에 모조리 공부하는 방식이라서 시간을 많이 써야 했다. 전공이 독일소설이었는데, 공부를 하다하다 지치면 나도 모르게 ‘소설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소설쓰기가 무엇인지 배워 본 적도 없이. 무엇보다 외국어에 매달려 살면서 그 반작용으로 우리말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제목에서와 같이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자 했나.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이다. 유토피아란 아무데도 없는 곳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에. 더구나 오늘 이 땅의 삶이 점점 녹록치가 않다. 국민총생산이니 하는 지표의 성장과는 무관하다. 한 겨울에도 집이 따뜻하다 못해 반쯤 벗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라고는 하나, 우리들 마음속 어디에도 온기라고는 없다. 사회라는 궤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뇌세포는 주판알 굴리는 상처로 피범벅이다. 특히 지식을 환전하지 못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느끼면서 애달파 하다 보니, 그들을 위해 글을 쓰게 됐다.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픔을 보듬고 살아간다. 그런 것들을 확인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동료애, 인류애 같은 것을 되살려 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유명한 시인의 시구이지만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는 담쟁이넝쿨의 이미지를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다.”


 

△퇴임 이후의 삶은 어떤가. 강단에 있을 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졌을 듯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퇴임’이란 단어는 생소하다. 곧 다가올 정년을 기다리지 못하고‘명퇴’를 한 것은 충동이자 절실한 선택이었다. 강의하던 것을 정리해서 『도이칠란트. 도이치 문학』으로 내놓고는 회의가 깊어졌었다. 평생 공부한 것이 이 부끄러운 수준이구나, 해도 해도 잘 안 되는 것 그만 하자, 교수라면 객관적으로 책임이 막중하지만 글 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겠지……. 그래서 교단을 떠났다. 소설로 등단은 했었지만 여전히 무명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렇고, 그래도 무작정 한 가지 일에 몰입하련다는 심정이었다. 그때로서는 내 소설에 독자를 얻을 일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쓸 일이 절실했었다. 또 다른 고통이 밀려올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로. 선택, 그러니까 앞서 말 한대로 하이에나처럼 사는 일을 그만두고서, 그럼 만족하느냐? 최소한 문학작품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일차적 작품을 쓰는 일이 그리 좋으냐?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글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뭔지 모를 행복감을 느낀다. 소설가로서의 불발은 행복한 고민에 속할 것이다.”

 

△이번 소설에는 “나는 글을 쓴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라고 선언한 크리스타 볼프의 말이 등장한다. 소설가로서 생각하는 어떤 ‘신조’ 같은 건가?

 

“‘…… 그러므로 살아있다’라는 명구에는 숱한 변형들이 있다. 글 쓰는 사람들의 경우 누구에게나, 글을 쓰느라고 살아있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밀도가 강하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도 신조 같은 것은 정립해놓고 살지는 못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하는 것, 그것으로도 벅차다. 오늘 살 수 있다면 공들여 살 것이고, 오늘 쓸 수 있다면 정성들여 쓰는 것뿐이다.”

 

   
  ▲ 1997년 10월 추월산에서  
 

△후배 교수들에게, 혹은 학문후속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후배 교수들, 특히 인문학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뭔가 말해도 된다면, 자긍심을 가지고 현실을 버티자는 것이다. 늦게라도 다른 현실이 필연코 닥친다. 학자들에게는 그렇게 만들 책임도 있다. 문학과 문학연구를 포함해서 인문학은 사람에 관한 학문이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사람의 도구에 관한 학문들이 사람에 관한 학문을 추월하여 학계를 주도하고 ‘자본주의의 돈’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이 현실이 영원할 리는 없다. 진자운동을 생각한다. 인류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진자운동 같아서, 감성과 이성이 주도하는 시대상이 번갈아 나타난다. 합리적 계산의 과학이 그네의 최고점에 다다르면 그만 내려오고, 그네는 다시 우아하게 다른 쪽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틀림없이 멋진 호의 곡선을 그리며.”

 

김홍근 기자 mong@kyosu.net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11. 23:32

상대를 혐오하는 말과 글들의 폭포수 … 
                                   할 말 다하는 자유에 ‘갸우뚱’하는 이유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30. 신념
2017년 07월 07일 (금) 19:36:1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믿음은 믿는 마음이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의 심리가 믿음이다. 그것이 정치나 사회 또는 철학적 가치와 관련될 때는 신념이라고 주로 한자어로 쓰게 되며, 뭔가 객관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건 신념이건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벤-오일러의 다이어그램에 따르면 진실과 신념의 교집합은 그래서 ‘형편없이 당연시 된 참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형편없이 당연시 된 참 신념’ 중에 조건이 확실한 경우에 겨우 ‘참 신념’이 가능하고,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가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무한대의 우주! 이런 신념에도 오래 전에 클레임이 걸렸다. 우주를 모래알로 채운다면 10의 63승보다 작을 것이라는 아르키메데스의 신념!

 

사실 그 옛날에는 고교 수학책에 집합이라는 단원이 없었다면 놀랄 것이다. 수학에서의 집합을 모르는 채로 졸업을 했던 나는 유난히 집합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생의 수학 책에서 독학으로 집합 단원을 공부했을 때의 신기함이라니!

 

물론 오늘은 집합 예찬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것의 정체를 생각하면서 깊은 회의가 드는 일을 말하고자 함이다. 다 같이 신 또는 신들을 믿으면서도, 다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와 박해를 일삼아 온 종교적 반목이 그 첫째요. 다같이 이념들을 신앙하면서도 그 이념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반목의 극치를 달리는 정치가 그 둘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목격자가 둘이면 그 증언은 두 가지라고 한다. 한 쪽이 거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기억이 두 가지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투표권을 가진 인구수가 4천235만7천906명(19대 대선)이라니, 사람들의 각양각색은 4천만 가지 이상이리라. 정당으로 크게 나누어 말하더라도 여러 신념들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팩트로 드러난 사건을 두고서도 전혀 다른 신념에 입각해서 말을 한다면, 몰라서일까 알고서도 당략 때문일까.

 

말의 진정성은 무엇으로 가늠해야 할까. 예컨대 ‘지겟작대기’는 긍정적인 표현일까 그 반대일까. ‘선거 때는 지겟작대기도 필요하다’라고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지겟작대기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필요로 해준다니 고마울까, 그렇게 무가치하다는 표현에 분노할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고마워하리라고 예상하고 말했을까, 분노하라고 말했을까, 그도 저도 아닌 시선끌기 용이었을까, 아님 또 다른 고단수의….

노련한 정치가가 아닌 평범한 대중들은 그 높은 뜻을 읽지 못하니 답답하다. 다만 최근에 방송에 나오는 말들은 많이 거칠다는 느낌은 확실하다. 신념이 다르면 상대를 혐오스런 곤충에 빗대기도 하니, 인간에 대한 미미한 존중도 없다.

 

예로부터 신언서판이라고, 그것이 비단 관리 등용의 기준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신체가 미남미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듯이, 특히 말은 ‘비단 혀’가 아니라 그 뜻을 지칭하는 것이고, 글 또한 미려한 서체가 아니라 문필력을 지칭한다. 말(言)과 글(書)은 판단력(判)으로 모아지니, 말과 글의 이치가 우아하고 뛰어난 것을 높이 산다는 뜻이었다. 말과 글이 요즈음처럼 폭포수로 쏟아지면서 게다가 거의 경박한 수준으로 타락하고서야 어찌 바른 판단력을 기대할까. 자신의 판단과 주장만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신념은, 그런 마음의 상태는 참이 아닐밖에.

 

신념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사르트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했던 체 게바라가 떠오른다. 흔히 신념을 실천한 휴머니스트라 불리는 그에게 신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여행은 산 경험들을, 꾸준한 독서는 죽은 경험들을 넣어주었고, 그것들을 통해서 사상과 신념이 정립됐고, 그러한 신념에 실천이 따랐다고 평전은 말한다. 그렇다면 성공한 혁명의 열매를 누리는 대신 미련 없이 다시 떠나는 신념, 그것은 또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것은 혁명 후 쿠바사회에 대한 회의였을 것이다. 혁명의 높은 완성도를 위해 부활된 사형제도 등 다른 신념을 박해해야 하는 과업이 회의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혁명이 아니라 해도,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서라 해도, 이념이 전과 다른 정치체제가 됐을 때는 그런 회의가 병행돼야 하지 않을까.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사에 관해서는 물론 일반 정치에도 문외한인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말과 글이 경박해진 이 시대를 사는 때문이라고 변명이 될는지.

 

사실 반세기 전만 해도 할 말하고 사는 사람이 적었었다. 개인의 신념은 사치이고, 가치는 주어진 것들을 신봉하면 되었다. 그래서 말과 글로 다툼도 적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할 말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 자유를 누리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그러나 그 신념이 문제다. 어떤 신념에서 어떤 식으로 말을 하더라도, 논리적 정당성까지는 못 갖추더라도, 말로서 누군가에게 모멸감을 주거나 상처가 되지나 않을까 최소한 그런 염려는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신념에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불행에 빠뜨리게 되지나 않을까 최소한 그런 배려는 해야 할 것 같다.

 

예컨대 로미오와 줄리엣 버금가는 두 앙숙 집안이 있었다고 치자. 옛날이라면 산 넘어 두 집안 간에 만석꾼인가 천석꾼인가를 다투었다고 치자. 두 집안에 공교롭게도 자식이 귀하더니, 어느 한 집안에서 옥동자가 태어났겠다. 그럼 다른 집안은 그 자식농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걸음발도 떼기 전부터 걷지도 못할 아이라고 저주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정서였었다.

 

강보에 쌓여있을 때부터 새 정부를 옭아매면 어떻게 할지, 이제 첫걸음을 내딛는 상대에게는 일단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적이라 할지라도 세워놓고 맞싸워야 떳떳한 것 아닌가.

 

신념이 표현되는 말이라고 해서 사회적 함의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지어 옳건 그르건 신념조차 수반되지 않은 허구도 남발하는 오늘날, 할말 다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자유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 같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