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6. 11. 22. 01:22

대학마저 집어삼킨 권력 … 악명 높던 공평 다 어디갔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6.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

2016년 11월 16일 (수) 12:18:5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알 수 없는 것이 선거인가 보다. 부도덕의 집합으로 보이던 인물도 자유 천국이라는 국가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 지난 대선에서 우리나라도 국정원 관련 엄청난 의혹 속에서 가까스로 이긴 대통령을 낳았다. 가까스로 이겨도 권력은 통째로 주어지는데, 아뿔싸, 우리는 “개인사도 홀로 챙길 줄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을 뽑았었나 보다. 그러니 국사와 역사를 어찌 감당했겠는가.

예쁜 옷 갈아입혀주면 입고, 우아한 미소 지으라면 짓고, 가끔 레이저 광선 쏘라면 쏘고. 나머지는 개인사와 국사를 통틀어 전권을 위탁했으니,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그들이 권력을 쥐었으렷다. ‘권력이란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이 갖는 합의를 통해 나오는 힘’(한나 아렌트)일진대, 저들의 손에 바쳐진 권력은 온 국민들을 향한 폭력이 되어버렸다.

 

이화여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이 위탁정치의 전횡은 방방곡곡에서 깃발을 날렸다. 그 하나, 대학입시에서 휘두른 폭력은 모든 청소년과 그 부모들을 슬픔과 한탄에 빠뜨렸다. 대통령이야 자녀가 없으니 부모 마음을 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 상상을 절하는 국정농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2013년 5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여자대학 체육과학부에서 체육특기자 종목을 갑자기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승마가 포함됐다. 한 특정 여학생이 전국 승마대회에서 2위를 한 다음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2위에 불만을 품은 여학생 측의 명령(?)으로 승마협회가 곤욕을 치르고, 문체부 공무원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지목돼 경질됐다. 이상한 촌극이었다.

이듬해 그 속편은 경악의 수준을 넘었다. 우리들 가슴에 지금도 현재형으로 가라앉고 있는 잔인한 4월의 세월호 참극이 공교롭게도 그 여학생의 승마 국가대표 선발 의혹의 와중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대통령께서 세월호 난 그 다음날, 체육개혁 확실히 하라고 오더(지시) 내려왔다”는 차관의 전언이 드러났다. “세월호 난 그 다음날”, 아직도 에어포켓에 살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지도 모를 수백명의 생명들을 버려둔 채, 최고 권력자가 ‘조카’를 위해서 체육개혁이나 명령하는 이런 세상에선 아무도 살아서는 안 된다. 아니, 그 폭력에 우리 모두 이미 죽었다.

무소불위의 폭력이 된 권력은 대학마저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위한 산학협력의 한 부품으로 전락시켰고, 이화여대 집행부도 굴했나 보다. 2015년도 체육특기자 모집 요강 중 어떤 자격도 없던 학생이 면접일에 금메달을 걸고 입장한다. 월등한 면접점수는 정성평가 항목이니 법적 책임을 면한다고 치자. 그 메달은 원서접수 마감일 이후의 단체전에서 받은 것이라서 입시 요강에 명백히 어긋나지만 ‘승마공주’는 버젓이 입학한다. “돈도 실력이야…”라고 거들먹거리는 못된 아이, 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폭력 속에서 잘못 키워진 아이.

그 아이(?)가 짓밟아 뭉갠 결과는 참담하다. 하긴, 입학 후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지 않은 것, 차마 서술하기 곤란한 행동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일탈 그 자체는 개인의 자유요 권리다. 그에 합당한 결과를 인정하고 정규교육을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다. 젊은 모두에게 꿈틀거리는 욕망일 수도 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가들 중에는 상식에서의 일탈을 승화해 인류를 구원하는 예술작품을 남기기도 했지 않은가. 문제는 그 지저분한 일탈을 만회한답시고 권력을 이용해 학원을 난도질해 입시고 성적이고 뭣이든 “대박”을 터뜨리려는 짓거리다. 우리는 그 폭력의 저열함에 분노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옛날의 이화여대는 정직성이 생명인 곳이었다. 1960년대 학부에서는 심지어 무감독시험이 가능했던 곳이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나간다. 학생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독하면서 감독교수가 없는 채로 시험을 마친다. 커닝을 정직성 훼손으로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번 부정직하다고 낙인찍히는 일이 벌어지면 그 다음 학교생활은 끝이었다.

사무적으로도 봐주기 없는 경직에 가까운 공평성으로 유명했다. 거의 악명 수준이었다. 예컨대 1980년대, 지방에 거주하는 졸업생이 취업을 위해 증명서들을 떼러 간다. 방학 동안의 관례라고, 신청서를 써서 제출하면 다음날 아침 일괄 결재가 나기 때문에 다음날 받으러 가야한다. 지방에서 온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한 사람만 편의를 봐 줄 수 없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립대에서도 비슷한 서류를 떼는데, 사정을 듣더니 시간을 정해주며 다시 오란다. 그런데도 모교를 원망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을 믿었으니까.

지금은 마땅히 사라졌지만, 금혼규칙도 누구에게나 공평했었다. 같은 동기인 인문대 다른 학과 학생이 4학년 2학기를 마친 겨울에 현직 교수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총장 왈 “O교수님, 부인 졸업장 어디 쓰실 일 없으시죠?”라고 농담처럼 던졌다는 말이 법이었단다. 학칙에 결혼하면 퇴학이었고, 결혼식은 졸업식 이전이었다.

 

대통령이라는 ‘허명’

 

공평할 때 우리는 불편함이나 억울한 정황도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 이 수치스러운 현상들은 공평과 정직과는 몇 광년은 떨어져있다. 다만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낳은 결과일 뿐이라서, 온 나라가 치를 떠는 것이다. 사상 초유의 범죄, 딱히 살인을 하지 않았다지만 보통사람들 전부를 ‘혼’을 죽여 버린 그 죄상들은 더 이상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또 수백 번 죽어야하니까.

그 폭력의 정점에서 도덕적 권위와 국정 장악력을 다 잃어버린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깊이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아니요. 용서란 그 잘못에 합당한 구체적인 행동으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옷이 아무리 화려한들 그 옷이 맞지 않으면 벗는 것이 옳지요. 이름이 아무리 높은들 그 이름이 허명이라면 마땅히 내려놓아야지요.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1. 22. 01:16

진짜 구중궁궐은 따로 있었으니… 모멸감의 폭발력을 진정 모르는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5. 레미제라블
2016년 11월 01일 (화) 11:30:36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굳이 ‘불쌍한 사람들’ 또는 ‘비참한 사람들’이란 설명 없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레미제라블』은 지난한 소설읽기를 힘들어하는 대중들에게도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깊이 각인돼 있다. 옛날엔 불쌍한 장발장이 감옥을 탈출해 더 불쌍한 코제트에게 꿈과 같은 인생을 선물하는 줄거리만으로도 감동을 주었고, 오늘도 브로드웨이는 소설 『레미제라블』 초판에서의 삽화를 내걸고 공연을 진행한다.

실제 인생이라면 막다른 사창가의 판틴이 꿈을 꿀 수나 있는가, 흙수저 에포닌에게 사랑이 가능이나 한가. 실제 인생에서라면 그릇된 규율에 반기를 든 장발장이 시대적 정의감의 화신 자베르 경감의 대립에서 반드시 승리할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왜 시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주는 것일까.

빅토르 위고는 젊은 시절에는 전형적인 근왕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을 정점으로 확실한 공화파가 됐다. 혁명의 열매로 탄생한 제2공화국 의회에서 위고는 선출직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의 실용적 개혁주의에 적극 찬동했다. 그 대통령이 스스로 쿠데타를 통해서 황제임을 선언하는 일을 상상이나 했었겠는가. 실제로 혁명을 ‘물러버린’ 대통령의 쿠데타는 억지로 나폴레옹의 가계를 잇겠다던 그 황제는 그렇게 역사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그 지점에서 위고의 반대는 시작됐고, 시민군을 조직해 투쟁하다가 체포돼 추방당했다. 

『레미제라블』은 그렇게 스무 해 가까운 추방 생활 중에 쓴 역작이었다. 그의 공화주의 사상은 더욱 심오해졌고, 민중과 민중의 실패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졌던 것이다. 작품 속 민중봉기 장면은 성공한 1848년 혁명이 아닌, 단 이틀 만에 진압돼 실패해버린 1832년 파리의 6월 봉기다. 바로 그 실패로 인해 더욱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리라. 

그대 듣고 있는가 / 분노에 가득찬 노래 / 굴종의 삶을 거부하는 / 우리들의 노래를 / 너의 심장소리와 / 북소리 울려 퍼지면 / 어둠 뚫고 새날이 / 밝아 오리라…… 

영화와 뮤지컬에서의 원제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 혁명을 선도하는 학생회 지도자 앙졸라가 선창하고 학생회 회원들과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육성으로 들은 것은 아직은 여름의 혹서를 예감하지 못했던 초여름, 광주 5월의 달거리 공연에서였다. 어둠에 쌓인 무대를 손에 든 촛불만으로 밝히며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를 노래하는 김원중과 작은 시민합창단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환하게, 장엄하게. 이 마지막 곡이 끝나고도 한참을 무대며 객석은 움직일 줄 몰랐다. 

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은 위고의 작품 도처에 스며있다. 또 다른 작품 『비참한 세월』에서의 광부들의 일상도 비참 그 자체다. “주인은 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빵이 모자라서 석탄을 깨물고 있었다. 우리는 [……] 일을 조금 줄이고 임금을 조금 낫게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총탄이다.”

임금 대신 퍼붓는 총탄! 현대의 한국어로 바꾸면 총탄을 세금폭탄 정도로 바꾸면 될까. 허나 세금폭탄도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증세는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쓰일 것이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 세금폭탄도 좋으니 제발 모멸감만은 주지 마시오! 21세기 한국의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모멸감을 견뎌내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일상이다. 최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경찰의 물대포 직사와 관련된 실험과 디테일을 제 정신으로 볼 수 있었을까. 철판이 날아가는 방송 제작진의 실험보다는 유리도 안 깨진다는 경찰의 실험을 믿어야 하는가. 물대포 현장에서 쓰러진 응급환자의 수술을 집도한 교수는 ‘단순 외상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임상적 소견’을 피력했었다. 결국 300일 넘게 의식불명이던 환자는 사망했고, 사인은 병사라고 작성된다. 의학을 모르는 우리는 의대교수의 전문가적 견해를 믿어야 한다.

경찰은 어떤가. ‘대한민국 경찰이 설정한 15bar는 안전한 수압’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사망사고가 있어도 사과를 하는 것이 법적으로 어긋난단다. 법을 모르니 경찰의 견해를 믿어야 한다. 믿으라면 믿어야 ‘혼이 정상인’ 국민이 될 터인데!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혼돈의 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모멸감은 증폭해 망연자실에 이르게 한다. 온갖 재단이다 법인이다 설립하기를 무슨 종이접기 정도로 해대는 ‘실세’는 우리를 모욕하다 못해 돌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왕자와 공주가 버젓이 존재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시중드는 시종들이 즐비한데, 공주들이 동화에서처럼 순결하고 착한 성품을 지닌 것도 아니라면 어찌 하오리까. 진짜 구중궁궐은 따로 있고 정치는 수렴청정을 거치는 모양새라는데, 이를 차마 어찌 믿으오리까. 아뿔싸,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셨단다! 차라리 절대로 아니라고 부정을 하실 것이지, 그렇게 대놓고 국민을 능멸하시다니! 우리가 위임한 성스러워야 할 국가권력이 길거리에 그리도 너절하게 굴러다니다니!

레미제라블! 국가의 품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삶의 근간은 불안하기만 하다. 불쌍한 사람들은 여전히 ‘임금을 조금 주더라도 일정한 일자리를 주시오!’라고 절규한다. 밥은 먹어야 하는데, 전망은 어둡다. 한국의 우상인 미국에서 최저시급을 올리겠다는 대선 선거공약에 그 반작용으로 생산비 절감의 묘수가 봇물을 텄다고 한다. 패스트푸드점 직원만 해도 36.5도의 온도를 가진 성가신 인간에서 무감각한 존재인 로봇으로 바뀔 전망이란다. 로봇은 원래 혼이 없으니 혼의 유무를 걱정 안 해도 돼서 좋아할 사람 많겠다. 인간을 로봇보다 저열한 위치로 끌어내리는 갑의 모욕질에 을의 모멸감은 도를 넘는다. 

그런데 ‘돈 있어 실력 있는’ 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의 가공할 힘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모멸감의 폭발력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밀폐된 공간, 썩은 가스의 압력은 철판도 뚫고 폭발하는데. 역사는 「민중의 노래」를 기억하라고 하는데. 무지해서 모를까, 겁이 나서 외면할까. 충분히 불행한 오늘, 그것이 알고 싶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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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1. 22. 01:08

민중의 노래

 

내 고향 광주는 봄이 늘 고통이었다. 그러기를 수십 년, 한 세대가 바뀌어도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른다. 진혼곡이든 무엇이든 불러 목이 터져도 시원치 않을 그날이 오면 더욱 서럽다. 이 노래는 저 노래는 된다 안된다, 합창은 제창은 된다 안 된다, 해서 상처는 더 벌어진다. 근년에는 T.S.엘리엇의 의미에서 잔인한 달이 아닌, 숨이 멎도록 잔인한 4월이 더해져서 남도의 5월은 이미 먹구름 슬픔 속에서 시작된다.

그런 5월이 끝나가는 즈음 사직공원에 위치한 작은 음악당에서 ‘김원중의 달거리’라는 음악공연이 있었다. 매월 있는 공연이라는 의미로 달거리이며, 2003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82회째에 이른 이 굿마당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부제가 ‘빵 만드는 공연’인만큼 출발할 때부터 실제로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을 후원해오고 있다고. 지금은 정치적 여건으로 공장 가동이 멈추었다고 하니 한 구석 씁쓸해진다.

올해를 여는 달거리 5월 공연 무대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막이 올랐다. 악기 없이 목소리의 화음만으로 연주하는 아카펠라 그룹이 부르는 아름다운 선율에 청중은 그만 숨이 멎었다. 장내에는 완벽한 고요만이 흘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이 노래는 80년 5월의 한이 녹아내린 광주의 노래가 맞다.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보루 도청에서 제 나라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한 시민군 대변인 윤OO과 먼저 떠난 노동운동가 박OO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다. 하지만 유족이건 시민들이건 아무런 연유도 작정도 없이 저절로 옛 5월을 추념하면서 불러온 노래다. 어느새 민중가요가 되어,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의 자리에서 늘 불리게 되었다. 마침내 1997년에 이르러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어 정부 주관으로 첫 기념식이 열렸을 때는 기념곡으로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다. 그제야 ‘사랑도 명예도’ 한을 푸는가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야속했다. 지난 정부 들어서 돌연 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고 식전 행사로 밀려나더니, 어느새 제창 자체가 폐지되고 합창단의 메뉴로 변질되었다. 한술 더 떠 현 정부에서는 ‘별도’의 기념곡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미명으로 아예 광주의 노래를 묵살하기에 이르렀다.

광주는 봄만 늘 고통이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는 사시사철 의붓자식이요 외톨이였다.

“선배님, 요샌 괜찮으세요?”

80년대에 어쩌다 서울에서 대학 후배들을 만나면 묻는 안부의 말이 하 수상했다. 불온한 소굴쯤인 광주에서 교수노릇하면서 밥 먹고 살자니 얼마나 고생이냐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이었다.

그런 광주에서, 또 어느 5월에 열린 음악공연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불려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게 되다니. 어쩌면 당연한 선곡이었을 것이다. 공연을 주관한 김원중은 대학 재학 시절에 「바위섬」으로 세상에 나온 가수다. 소위 지방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유명해진 노래는 드물다고, 올해도 7월 초 7080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그렇게 소개한 곡이기도 하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 인적 없던 이곳에 /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 모두 사라지고 /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 [중략] //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 살고 싶어라~ //

80년 5월 이래 어쩔 수 없이 고립된 광주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였으니, 그는 광주를 노래하는 가수일 운명이었다. ‘광주의’란 형용사가 더 큰 세상으로의 발돋움에 걸림돌이 될지언정, 그가 없는 광주는 이상할 터다.

이번 5월 공연의 주제는 가수의 말 그대로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더는 노예적 삶을 참지 않겠다는 민중의 노래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 삽입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혁명을 선도하는 학생회 지도자 앙졸라가 선창하고 다른 학생회 회원들과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그대 듣고 있는가 / 분노에 가득찬 노래 / 굴종의 삶을 거부하는 / 우리들의 노래를 / 너의 심장소리와 / 북소리 울려 퍼지면 / 어둠 뚫고 새날이 / 밝아 오리라……

영어와 한글로 노래하는 김원중과 시민합창단의 목소리는 손에 든 촛불만으로 밝힌 어두운 무대 위에서 떨고 있었다. 환하게, 장엄하게.

노래의 배경이 된 1832년 파리의 6월봉기는 진압된 민주화운동으로서의 광주의 5월과 놀랍도록 맞닿아있다. 1830년 7월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하원에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공화주의자들의 견해에서 보자면 왕에서 왕으로의 대체는 무의미했다. 1832년 6월 라마르크 장군의 시민장 장례 행렬이 바스티유광장으로 향하면서 시작된 봉기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터졌다. 하지만 밤새 2만 5천명 정규군이 합류했으니, 시민군의 바리케이드는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마지막 보루 생 메리 교회에서 시위대의 손실은 93명 사망에 291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로 컸다.

1980년 광주의 5월. 군부독재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행해 시위 나흘째인 21일에 본격적으로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27일 새벽 투입된 2만 5천명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이란 이름으로 1만여 발의 사격을 감행했다. 진압은 훌륭하게(?) 종결되었다. 정부가 인정한 공식적인 사망자 수만 해도 154명이었다.

그러나 잠깐, 순간의 평가로 본 실패란 언제나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파리의 6월봉기는 좌절했지만 혁명의 정신은 잉태되어 무르익어 갔다. 세월은 흘러서 1848년 2월혁명이 도래하고, 그제서 성공한 혁명은 마침내 제2공화정을 이끌어 내며 온 유럽으로 확대되어 세상을 변하게 하지 않았던가. 하긴 그 대통령이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화국을 폐지하고 제2제정을 수립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수밖에.

역사의 아이러니는 끝도 없다. 1980년 5월 광주의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했던 그 11공수특전여단이 이제서 감히 그 광주의 금남로에서 호국퍼레이드를 꾀하다니. 보훈처가 그 계획을 전격 취소했으니 망정이지, 11공수특전여단이 광주에게 누구인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그들은 잊을 수도 있다니. 때로는 무심함도 죄렷다. 광주 사람들은 어째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쉬이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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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속에 봄은 잉태되고」 , 이대동창문인회, 320~324 , 2016.11.7.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