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6. 11. 22. 00:57

To our Readers 2016,

 

All over the planet this summer was awful with its heat. The mercury went up to 39 degrees on the Korean Peninsula, which set a weather record here. How can human beings endure the heat which is higher than their own body temperature? Meanwhile man-made catastrophes have rocked the whole world. Besides, anticipating a third war due to North Korea's nuclear bomb tests and the plan to deploy THAAD, a heated debate has arisen. Even relatively people recall Plato's word: ... he who refuses to rule is liable to be ruled by one who is worse than himself. People in a dilemma have to have a stance.

In such intense heat and underlying anxiety the members of PEN Gwangju tried to publish our annual and the editorial board was working on translating poems and essays. We did it to help our literary works be read in another corner of the world. The will itself is praiseworthy, but who knows, it could transform or even destroy the meaning of the originals.

The French words "belles infidèles" is frequently cited to suggest that translations can be either faithful or beautiful, but not both. How can we satisfy such an antinomic demand? We, the editorial board, concentrate on the Scottish historian Alexander Tytler, saying that an assiduous reading is a more comprehensive guide to a language. Sometimes more than dictionaries can do. We read the original texts so earnestly, that we had to trouble the writers with many stupid questions. These tasks are done. We just hope it will not end in great failure. Please read this annual with a somewhat Korean accent and mind.

Thank you for everyone who gathered here to bring out this shabby annual. Thanks for the decision of President Park Panseok and the executives to continue the translation publishing, partially as usual, in spite of the unfavorable financial condition. Of course, the best thanks to our readers!

Suh Yongjwa

Honorary President of PEN Gwangju (Korea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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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광주』 14호, 14~15쪽, 2016. 11. 15.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0. 17. 22:38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불로소득으로 부자 꿈꾸는 젊은이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4. 장래희망
2016년 10월 17일 (월) 12:17:42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장학 퀴즈 비슷한 어느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한 명 씩만 남은 상태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도중에 숨을 고르라고 여유를 두면서 아나운서가 물었다. 장래희망이 무엇입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채널을 고정하고 귀를 쫑긋했다. 옛날 같으면 남학생은 피상적으로 대통령 아니면 장군이었고, 여학생은 현모양처인 적도 있었다. 자신들의 꿈보다는 부모님들의 소원을 들어서 그렇게 말하곤 했으리라. 시대가 바뀌고 또 바뀌어 남녀학생 모두 연예인을 꼽는다는 보도가 나온 지도 오래다. 부모들도 앞 다투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만들기에 투자한다고들 했다. 그래, 공부로 승부할 것 같은 두 사람, 너희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남학생의 대답은 상식적이었던 것 같다. 의사이거나 판검사, 뭐 보통 선호하는 번듯한 직장이었다. 다음 여학생의 대답에 놀라서 앞에 들었던 단어가 확 날아가 버렸다.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 

예로부터 정석에 없던 새로운 희망직종, 건물주다.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꿈은 젊은이의 권리다! 다 시궁창에나 처박을 옛말들이다. 건물주가 되어 불로소득으로 생활하고 싶다! 그것이 저 앳된 소녀의 장래희망이라니. 

다음 순간 아이를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건물주를 잘 못 만나서 전전긍긍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구나. 커서 건물주가 되어 효도하고 싶다며 자랐을 것이다. 본심이 다 그런 세상에서 본심을 말하는 것이 정직한 일 아니냐. 갑질하는 건물주가 죄고, 일 적게 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을 효율이라고 가르친 우리가 죄다. ‘투입과 비교된 산출의 비율로 정해지는’ 효율성은 인적자원개발(HRD)이라는 이름으로 조직 내 인적 자본의 확충을 위한 활동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구나. 잘 되려고, 무조건 잘 되려고!

하긴 생각해보면 ‘건물주’의 위력이 도처에서 드러나는 세상이다. 오피스텔을 열도 아니고 백 채를 소유한 고위 공직자가 있었다. 최상의 대학을 나와서 최상의 시험에 합격해서 최상의 자리를 넘나들던, 참 교양 있어 보이던 엘리트도 ‘부동산 임대사업자’ 등록까지 하고서 합법적으로 부동산 재테크를 했더란다. 지도층은 주식인지 펀드인지 하는 금융투자에서도 수직 상승만을 거듭한다. 신기하다. 이렇게 운 좋은 사람들은 청문회도 통과하고 요직에도 임명된다. 이제는 투자와 부자 되는 일은 능력이다 못해 덕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옛날에는 달랐다. 흉년에는 논도 사지 말라고 했다. 보릿고개에 처자식 굶어 나가는 꼴 차마 못보고 내미는 땅문서를 곡식 몇 자루 내어주고 사들이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똑같이 주어진 공기를 훔칠 수 없듯이, 누군가에게 똑같이 주어진 기본적인 먹을 기회를 앗아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앗아간다. 그것이 투자다. 재화의 양은 정해져 있으므로 누군가 많이 소유하면 누군가에게는 없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는’(크레디트스위스, 2013) 불평등 세상이 됐다. 

자본의 소유 과정도 점점 문제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자본가들이 제조와 생산 중심인 ‘본연의 자본주의 구조’로 돈을 벌었는데, 요즘에는 금융에서 돈을 축적한다. 자본의 본고장 미국의 예를 들면, 아버지 롬니는 1950년대 자동차 업계 최고경영자였고, 기업을 운영한 동안 소득의 36%를 세금으로 냈다고 한다. 2012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였던 아들 롬니는 무슨 캐피털에서 금융으로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고,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 1980년대 이래 최저 세율임에도 부자 감세를 주장한다.(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 2015) 

그러니 따라쟁이 한국 부자들도 생산보다는 금융으로 부를 축적한다고 보면 옳을 것이다. 보다 효율적인 방식을 위해 권력이 동원돼 부를 낳고, 부가 권력을 낳는 상부구조가 정착된다. 나머지는 그들의 우월감을 확인시켜줄 대상으로 전락한다.

자식을 낳으면 너도나도 죽자고 공부만 시켜온 나라인데, 공부만으로는 상부구조 진입이 수월치 않은 구조가 됐다. 돈은 인재를 스카우트해서 ‘패밀리’를 견고히 하는 이득을 얻고, 인재는 효율적으로 상부구조에 안착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상부구조는 거미줄 한둘쯤 뚫리어도 끄떡없다. 거미줄의 재질은 다이아몬드 가루를 둘러쓴 듯 견고하니까.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희망이 없지는 않다. 거미줄에 덤비는 일은 자멸인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누군가가 (아마 도가 지나쳤다고 믿는 경우) 책임감으로 ‘그들의’ 의혹을 폭로한다. 물론 아직은 달걀로 바위치기다. 의혹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의혹에 손을 대려는 사람은 사생활이나 형식적 사안만으로 퇴출된다.

여전히 남는 의문 하나. 충분히 상부구조에 안착해 있어도 왜 요직을 희망해 청문회장 같은 곳에 나올까. 요직에 가면 혹시 더 많은 건물주가 될 요술방망이라도 쥐는 것일까. 다만 고등동물의 명예욕일까. 청문회장이 아니었다면 다소 과한 부의 축적 과정에서의 도의적 부끄러움이나 ‘간단한’ 교통사고쯤 인간적 흠결도 완전히 숨길 수 있었을 것 아닌가.

하긴, 사고현장에서 경찰을 속이고 나라와 법을 속인 행위도 요직에 임명되고 나면 윤리적인 ‘마음의 빚’으로 치환된다. 의문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증폭된다. 신분을 속인 과거를 가진 인물이 자신이 속였던 조직의 수장이 되는 일은 모순일까, 아닐까. 우리 보통사람들은 그 조직을 존중하고 신뢰해야 하는가, 아닌가. 부적격 판정을 받아도 임명되면 장관이고 해임건의안이 통과돼도 철옹성이 지켜낸다. 이번에도 형식적 문제를 침소봉대해서 그것만 죽을 죄라고 할 것인가.

본말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됐다. 제 안전은 제가 지켜야하는데, 돈 아니면 권력, 아니면 그 둘의 합이 요술방망이다. 퀴즈 방송에서 장래에 건물주가 되고 싶다던 여학생이 다시 떠오른다. 그래, 건물주가 되거라!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세상에서, 너라고 다른 이상적인 직업을 꿈꾸어야 되는 법은 없겠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성인이 되면 이민가고 싶다’던 기사에 비하면 네 꿈은 덜 절망이구나. 

하지만 미안하구나. 세상에 태어나 겨우 그 만큼만 꿈꾸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네 후손들이 더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으려면, 너희는 또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이더냐. 부디 세입자 눈물 빼지는 말아다오. 혹시 더 많은 건물을 소유하게 되더라도 학교 건물주가 되는 일은 삼가다오. 그건 교육 철학의 문제가 먼저이니까. 그리고 설마 고위 공직을 탐하거나 정치까지는…. 당부 하자니 한이 없구나. ‘착한 건물주’는 애초에 모순형용의 개념이니 어쩌겠느냐.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0. 17. 22:36

멀어질수록 커지는 관계 ‘가족’ … 변화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3. 교집합과 합집합
2016년 09월 29일 (목) 13:46:1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한가위에는 말 그대로 풍성함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라는 말이다. 풍성함만 넘쳤을까. 걱정도 한껏 부푼 나날이었다. 어쩌면 몸과 맘이 따로따로인 채 연휴가 지났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추석의 차례는 설날보다도 풍성했겠다. 예전에는 상 뒤로 병풍을 둘러 세우고 지방을 써붙이거나 상 위에 위패를 세워 놓고 차례를 지냈다. 집안에 따라 정월 대보름, 단오, 백중이며 동지에도 차례를 지내기도 했었다. 예전에는 일용할 양식이 부족할지라도 ‘좀도리 쌀독’을 놓아두고 매끼 한 움큼씩 차례나 제사를 위해 곡식을 모아두었던 것이 어머니들의 지혜였다. 

   
  ▲ 일러스트 돈기성  
 

19세기 말 1896년생 시어머님이 살아계셨을 때를 보면, 우리 집안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동지에도 간단한 예를 지냈다. 지금도 약식이나 오곡밥 또 동지죽을 소소하게 차려놓는 정도의 시늉을 한다. 이제 차례는 형식적이라 해서 대폭 간소화 되는 추세이자, 신앙에 따라서는 우상숭배라 하여 아예 차례를 치운 집도 많다. 차례에 선악의 가치는 해당되지 않고, 다만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문제는 만남이다. 아무리 사는 것이 힘들어도 설명절과 추석엔 고향집을 찾는 것이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다. 윤치호 선생이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했다고 하더니, 세월이 가도 한국 사람들은 감성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아 보였다. 오죽하면 명절 이동 인구를 민족대이동에 비유했을까. 물론 이성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비이성적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말이었다.

그런데 근년에는 그 대비가 바뀌어 이성적인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가 분명하다. 귀성열차를 봐도 그렇다. 이번 코레일 추석 열차 승차권 판매기간 내의 예매율은 52.5%로 최종 마감됐다고 했다. 예상처럼 그날로 동이 난 것이 아니다. 14일 호남선 하행 예매율이 97.6%로 1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전체적으로는 절반에 훨씬 못 미친 경우가 많았지 않겠는가. 

이제는 귀성보다는 독자적인 연휴를 보내려고 하는 경우가 늘고, 그것이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서울역의 아이러니를 보자. 귀성객 대비보다는 해외여행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는 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에 추가 인력을 배치하고 탑승 수속 카운터를 탄력적으로 확대해야 했단다. 첫차를 앞당기고 막차 시간을 늦춰가며. 당연한 서비스로되 조금은 뭔가 이상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떠났을까. 인천공항공사 발 뉴스로는 10일에서 18일까지 하루 평균 출국자와 입국자가 모두 8만명을 넘어, 9일 동안 모두 140만명이 인천공항을 이용했단다. 그렇게 명절에 북적대는 인천공항을 비춰주는 뉴스화면은 우리 같은 구시대 사람들에겐 생경한 것이 사실이다. 제주도를 포함해서 ‘해외’에 나간 적이 없는 사람들도 실은 많다. 내가 사는 주변에서는 상당하다. 이런저런 핑계로 가끔씩 해외에 머물던 나를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진다. 

명절 연휴 해외여행이 부쩍 늘어나는 이유는, 이제는 자녀들에게 너흰 꼭 고향에 와야 한다고, 조상께 성묘는 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부모들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명절 연휴를 보내는 데 모범답이 따로 없는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 우리 세대도 예로부터 하던 습성을 벗어나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도 되는 것이리라. 심심찮게 그런 이웃들도 보인다. 물론 그것이 꼭 해외여행이어야 하는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또 날마다 연휴인 노인들까지 덩달아 명절에 맞춰 나설 필요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어머니 집을 찾고 싶으면 어쩌라고! 하긴, 차례 문화에 속박되어 살아왔던 젊은 시절에 대한 반작용일까도 싶다. 

1960~1970년대 유럽에서의 일화가 생각난다.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강의실이나 학생 식당의 문을 열어준다. 예전에는 여학생은 가볍게 고마워요 하며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여성해방운동의 시절, 여학생은 ‘난 해방되었거든요!’라고 톡 쏘며 먼저 입장하는 우선권을 내려놓고 뿌듯해 한다. 남학생은 고개를 흔들며 먼저 들어간다. 그건 물론 시작이었다. 피상적인 의례를 버리고, 많은 것들을 그 여학생들은 되살려냈다.

‘명절 연휴를 가족과 함께’라는 관습적 슬로건의 효과가 분명 떨어지고 있다. 가족과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가족이라는 원과 나라는 원, 두 원의 관계다. 관계라 하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말이 아니다. 어떻게든 겹치는 부분이 있어야 관계다. 이것을 집합에 대입해서 생각해 본다. 

두 원의 합집합과 교집합은 반비례한다. 교집합이 커지면 합집합은 작아지고, 교집합이 작아지면 합집합은 커진다. 내가 가족에게서 빠져 나올수록 나와 가족을 합한 합집합은 커지고, 내가 가족에 포함될수록 합집합은 작아진다는 말이다. 두 원은 부모와 자식으로도, 남편과 아내로도, 두 연인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너의 관계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가만히 있으면 당연히 외로운 혼자다. 외로운 나는 외로운 너와 함께이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최소로 조금만 엮여 있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로 연결돼 있을 때 우리는 거의 두 사람이다. 우리가 온 몸으로 포개어 있을 때 우리는 거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이면 나는 반인데, 나는 반이고 싶지 않고 온통이고 싶다. 그렇기에 손가락 하나로만 연결되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나 하나로 너는 너 하나로, 우리는 거의 둘로. 이럴 때 인간은 이성적이 된다.

문제는 교집합의 질이다. 양보다는 질적으로 우수한 교집합이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이성적 판단을 초월하는 절대적 신뢰, 사랑 같은 어떤 것이 녹아있는 달콤 씁쓸한 알갱이, 아니 두 팔 벌려 아무렇게나 누워도 흔들리거나 터지지 않을 바닥이면 좋겠다. 작아도 안전한 교집합을 지니고 있는 동안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생래적으로 외로운 숙명의 인간이 외롭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꿈 같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꿈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닐 터.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덜 소유한 데서 오는 허전함은 손에 쥘 수 없는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써 달래고도 남을 것이다. 

누구랑도 손가락 하나만 걸고 함께 있는 느낌의 작고 탄탄한 교집합을 쌓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다르게 함께 살기. 완전히 이성적인 사람은 없다. 누구나 마음 속에는 본향 어머니의 집이 있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