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5. 12. 27. 23:20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이상한 노랫가락도 뭣도 아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한데 정자형 경로당이었다. 노래를 했을 것 같지 않은 할머니 한 사람만 몸을 웅크린 채 천천히 어딘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근들근들 세운 무릎이 턱에 닿았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사람들은 다 들로 나간 모양이다.

정자를 반쯤 덮고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동네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얼마나 긴 세월을 여기서 사람들을 보듬었을까.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느낄 수 없으리만치 마르고 갈라터진 몸통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러고서도 연초록 새순을 내면 새날이 새봄이 온다. 늘 보아도 경이롭다.

삼월 어느 주말, 벌써 겨울에 있었던 약속으로 옛 도자기 마을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 만나기로 한 가마 주인은 도자기 굽는 일 뿐 아니라 여러 장르의 예술적 작업을 하는 분이라 했다. 정작 본인은 평범한 주부의 취미생활이라고 한다는데, 그 여러 작품들을 생활과 곁들인 서사와 함께 도록으로 내고자 하는 일 때문이었다.

전화로 일러준 대로 정자 옆에는 몇 발짝 안 가서 비스듬히 놓인 한데 가마가 보인다. 울퉁불퉁 붙어있는 누룩두레는 몇 백 년 되었을 나이를 말해 준다. 그 건너 큰대문집에 묶인 덩치 큰 개는 멀리서도 눈을 맞춘다.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고는 정자에 웅크려 앉은 노인뿐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이 동네 민 아무개 선생님 댁 저기가 맞나요?

어르신……. 누구 어르신 말이여?

아, 할머니 안녕하시냐고요. 그리고 도자기 굽는 민 선생님 댁이…….

선생님 누굴까. 긍께, 그럭 굽는 데믄 사모님 댁? 쩌어그, 누랭이 매진 디 거그. 근디 사모님 왔는강 몰러. 오늘은 못 봤잉께. 글고, 누랭인 등치만 크제 소양 없어.

노인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다 만다. 고개로만 저리 저리 가르쳐주고 나서는 입을 꽉 닫고 먼 데 하늘을 본다.

큰 대문 쪽으로 다가가자 컹컹 짓는 개 소리가 동천한다. 그런데 웬걸 곧 멎는다. 정자의 노인 말이 맞다. 순하다.

계셔요?

문을 흔들어 본다. 대꾸가 없다. 빙 둘러 보아도 초인종 같은 것은 없다. 대문이 가만히 열린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다. 문틈으로 빼곡히 보이는 집까지는 한참 멀어서 낭패스럽다. 기차역에 내릴 때부터 시도했지만 전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시간 약속을 한 것은 아니나, 와도 좋다고 한 것이 분명 오늘인데.

오른 걸음을 다시 내려온다.

저기요, 여기 민 선생님 댁 문은 열렸는데 안에 아무도 안 계시네요.

글씨, 거까장은 모리고. 근디 오늘이 메칠이다우?

예?

메칠이냥께. 경칩이 지났능가. 엊그저끄 찰밥 묵었는디 그새 경칩은 아니겄제라.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민 선생님 어디 가셨을까요?

거까장은 모린당께. 일단지간 여 앉아서 지둘려. 거자 날마다 오긴 오는디. 정심은 우리랑 묵을 때가 많어라.

예, 그럼.

이리 올라 오랑께.

 

지금 누구랑 야그하고 있었냐믄…….

할머니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니, 아까부터 혼자 계셨잖아요? 누구랑 이야길 하셔요?

긍께, 남순이, 내 동생허고.

아, 동생 분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래 말여, 내 동생 남순이.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우리 육촌 가시나 말이여, 갸는 시방도 잘 살어. 우리 남순이가 금메, 웬선놈의 돈 땜시 정순일 따라 서울을 갔어. 가차이 광주까장만 갔더라믄 되얐을 것을.

……?

우리 방골 사람들은 돗자리를 짜서 묵었어. 학교는 문턱만 째까 디레다보다 말었제,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그랬시라. 그래도 울 아부진 우덜 돗자리 짜는 젙엔 못 오게 혔어라. 여자 아그들 볼 거시 못돼야, 허심서. 짠 돗자리를 무지게 큰 둥치로 지고 집을 나서믄 한동안썩 소식도 없었제만, 우덜한테 가시나그 소리 한번 안 허셨어라.

우덜끼리, 참 삼남매 사연도 많았제. 엄니 없이 큰께로 너메 동네 외할매가 더러 오심사 우덜 생일이나 진배없었제만. 그도 복이라고 얼마 못 사싰제. 글다가 아부지가 한번은 먼 아짐을 데꼬 왔어라, 새엄니 자리였제. 새엄니랑 항꾸네 온 짐 속에는, 기도 않차제, 틀이 있더라고. 방골 사람들 생전 첨 보는 틀이라. 솜씨꺼정 좋은디, 틀바느질로 혀갖고 명을 날렸제. 드르륵 박아내믄 순식간에 치매도 되고 내리닫이도 되얐응께. 방골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등지기 한나썩은 다 얻어 입었을 것이고만. 긍께 사람들은 안 입는 한복덜 어쩌고 해달라고 새엄니한테 내다중께, 새엄니 방엔 니 구퉁이 모다 헌옷들로 한짐이었제.

아, 근디 남순이가 말여, 내 손 아래 동생 말여, 만날 새엄니 방을 기웃거림시롱 말대꾸랑도 잘 허고 멋이든 맨지작거림시롱 틀질에 귀를 세우더라고.

어메, 드르륵, 진짜 신기혀, 성아.

갸는 외약팔을 쩌리 오린팔을 요리 댐시롱 천을 잡고 밀고 숭내를 내믄서 지랄이여, 좋아서. 나는이라 틀에서 나는 소리도 싫도만. 덜덜 들들, 몸까장 떨리도만 그거시 멋이 좋다고. 나야 그냥 광주까장만 가믄 로케트회사에 가넌 거시 소원이었제. 마을서 얼굴도 반반허고 몸도 튼실헌 성들 둘이가 나가 살믄서 모다 부러와 했제. 로케트회사 모링가?

느닷없는 큰 소리에 눈을 들었더니 노인은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셔요?

어메, 로케트회사도 모린당가.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그 시간에 젖은 노인은 내게 엉뚱한 타박을 하며 소상히 뭔가를 설명하는 품새였다.

제가 민 선생님을 만나려고…….

아, 온다니께. 날마다 오긴 와여. 긍께 여그서 지둘고 있으믄.

제가 전화 좀 한번 더 해보고요.

털고 일어나서 주위를 거닐며 통화 시도를 해도 잘 안 된다. 신호는 가는데 도통 대꾸가 없다.

남순아, 아야, 멋흐냐. 이리 오랑께.

좌우를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없는데, 노인은 이제 나를 동생으로 아는지 이름을 불러댄다.

아야, 성이랑 같이 로케트로 가장께, 사람 새로 뽑을 때 우리 데꼬간다 안 허드냐. 멋흐게 혼자 나스냐. 기언치 봉젠가 먼가로 할라고,

얼결에 나는 다시 정자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노인이 맨발로라도 내려올 기세였다.

 

노인의 이야기를 다 옮길 수는 없다. 첨엔 연락이 안 되는 민 여사님을 언제 또 만나러 오기도 마뜩찮고 해서 좀 기다리려던 것이 요상한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용은 독특한 말법 때문에 알아듣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간상으로도 왔다 갔다 해서 더욱 어지러웠다. 하도 진지한 그 표정 때문에 자리를 털고 나올 수도 없었다. 딱히 민 여사를 기다릴 만한 다른 장소도 없고.

하이틍간 정순이가 설레발을 쳤제. 당숙네가 젤 안 잘 살었냐, 정순이 덕에. 식우곤로가 다 뭐시였냐, 그 집이 젤로 몬자 디레놨제, 대리미도 라지오도 거가 젤 앞섰제. 아야, 멋보담 그 사탕가리 말은 국수 말여, 그 집 말고 어디서 그런 달코롬헌 것을 맘대로 묵었다냐. 어째 딸 많은 집이 더 잘 되얐이야 잉, 남순아.

내게 동생 대하듯 부르는 통에 기분이 묘해졌는데, 또 이내 내가 아무도 아닌 줄 아는 듯 했다.

금메 그렇게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서울을 갔어도 첨엔 멋이 먼지 몰랐제. 갸가 고향 땅도 제대로 못 볿음서 돈을 벌긴 벌었어. 남동생 하나 있는 것, 우리 순길이 말여, 갸는 남순이 덕 봤제. 국민학교 졸업허고 쫌 놀았어도 낭중에라도 중학하고 다 간 거시 남순이 덕이었제. 나는 큰누나가 되야갖고도 못 허는 것을 남순이가 했응께. 그나 울 아부지는 왜 신식 새엄니랑 오래 못 살었는지. 멋이 부족혀서 고렇게 가시부렀는지. 새엄니 탓들도 허더고만이, 동네 으른들이. 초승에 과부되면 또 과부 된다는디, 새엄니가 그랬디야. 원래도 곰방 과부되얐다더라고. 남자 없는 팔자 지닌 여잘 만나믄 남자가 가분다고. 암튼지간에 아부지 저 세상 가시고넌 새엄니랑 우리랑은 뜨제, 쌩 놈 아녀. 오래 같이 산 세월도 없응께. 글고 누가 어쯔고 중학을 보냈겄어, 방촌에서. 그저 돗자리나 짜묵넌 마을인디. 그랑께 남순이 덕에 동생은 성공했제. 째깐혀도 테레비도 우리집이 영 일찍 디레놨당께.

그러게 나도 정순이 성을 따라갔지, 성.

이거시 잘된 거여? 너 첨에 광주서 시장서 오천원 육천원 받고 틀질혔을 때도 보신이다 뭐다 밸것 밸것 다 맨들었담성. 그리 혔음 되얐을 것을, 멋허러 욕심은 내갖고.

성, 그래도 서울 가서는 댑방에 만원부텀 시작했으니께 어딘가. 나도 할 만큼은 했지.

그 고생을 혀갖고 종래는 뭐시여. 니가 낭중엔 그놈의 만오천원 소리에 넘어갔담성. 정순이년 땜시.

정순이 성 탓 말어. 이왕지사 고생함서 한 푼이라도 더 준다믄 다들 옮겨갔지. 모다 그랬다고.

웬선놈의 돈이랑께.

그 대목에서 나는 너무도 놀랐다. 사투리지만 뭔가 좀 다르게, 목소리까지 달라지면서 두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챈 것은 두어 마디가 지나서였다. 갑자기 무서움증이 들었다.

헐만큼 헌 거이 그거여? 멫 년 뼈꼴 빠지게 허고는 먼 병신이 돼서 왔는디. 외약손 이리 내놔 봐. 시상에, 얼매나 아펐을겨.

노인은 내 왼손을 잡아끌려고 했다. 그 순간 다행스레 사람들이 나타났다. 구세주 다름없었다.

누군디, 먼 일로 여그를 오싯다요?

오매, 이 할매 좀 아픈디, 어쯔고 상대허고 있다요!

불현듯 나타난 아주머니 둘 덕에 나는 앙상한 할머니에게서 풀려났다. 서울사모님은, 여기 사람들은 가마 주인을 그렇게 불렀다, 차가 세워져 있으니 틀림없이 동네 안에 있을 거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든지, 아예 집안에 한번 들어가 보든지 하라고.

 

동네가 대문도 열어 놓고, 좀 멍한 사람도 혼자 놓아두고, 편하다면 편하고 느슨하다면 느슨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갈 수는 없지 않나 싶어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아까 지나간 아주머니 한 분이 그쪽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부르며 손짓을 한다.

쩌그 안에 기시네. 이리 오시쇼. 쩌 안마당이나 웃채에 있으먼 누가 와도 몰라라. 근디 들어가 보도 않고 어쯔고 알것소이.

정자의 할머니가 누렁이라 하던 커다란 개가 몸도 가볍게 팔랑거리며 뛰는 모습과 주인이 문을 열면서 나타나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전화로만 인사를 나눈 민 여사인가 보다.

나는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자의 노인이 내 옷자락을 쥐면서 쉬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피는 정말 무서웠어라. 남순이랑 둘이서 두 손을 꽉 잡고 뒤얀으로 나가 울었지라. 남순아, 남순아……. 울 엄니럴 으짠다냐. 울 엄니한테서 생각나는 거이라곤 피뿐이랑께.

노인은 지금 피를 보는 양 울먹였다.

엄니가 원래도 빼뺏한 몸이 점점 말라가도 누구나 그런갑다, 엄니덜은 밥을 잘 안 묵응께, 엄니덜이 다 그랬응께, 매일 지쳐빠진 모양을 봄서도 엄닝께 그런갑다 했어라. 그란디 내중에는 피까장 토허더니 얼메 못갔지라. 그란디 남순이가 거그서 서울서 피를 보고는 기냥…….

동순 씨, 오늘 말 잘하네. 첨 만난 선생님하고.

민 여사는 정자에 당도하여 내겐 눈인사만 하고는 노인에게 말을 건넨다.

누가 선상이여, 여가?

동순 씨, 아무랑도 이렇게 말 잘 해야 써, 그래야 다들 동순 씨 좋아해요.

으응, 그려. 근디 암도 없어.

봄비가 해갈은 안 되었어도 땅이 촉촉하니까 다들 바쁘지. 종자를 심어야 거두제!

어즈께 그놈만치 비가 왔어도 안적 해결이 안 되얐다고?

그래, 해결되려면 좀 더 와야 한대요.

이상한 대화에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는지 민 여사가 배시시 웃는다.

동순 씨, 쉬고 있어요, 응? 곧 있다가 무궁화배추 절이지 한다니까 점심 먹게. 나는 여기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하니까.

동순 씨라 불리는 노인을 달래 떼어 놓고서야 민 여사가 인사를 한다.

어쩌나, 한 선생님, 너무 미안하게 되었어요. 오늘 내가 휴대폰을 안 가져온 모양이네요. 위채에서 뭐 좀 찾느라고 대문 소리도 못 들었네요. 바쁘실 텐데 미안해서 어쩌나요.

아뇨, 좀 전에 왔는걸요. 동네가…….

아, 동순 씨한테 붙들려 놀랐겠지요. 아무한테나 동생 이야기죠. 말도 이상하죠? 여기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비가 와서 해갈되나, 잘 되었으니 해결되나, 결국 마찬가지 아녀요? 지난 설에는 원래목사님한테 너도 나도 집에서 낳은 계란을 선물한다고 해서, 누굴까 했어요. 누구는 원래부터 목사이고 누구는 신부님 하다가 목사가 된 건지 하고. 내가 교회 안 다니니까 모르기도 하고요. 그랬더니 글쎄, 면에 교회에 두 분 목사가 있는데 원로목사를 원래목사라 그런 거예요. 표준어다 맞춤법이다 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산지기 집 거문고예요, 여기선. 그래서 나는 설 쇠고 나서 원래목사님 집에 계란 훔치러 가야지…… 하면서 따라 웃고 말았지요.

아, 원래목사님……. 그럼 무궁화배추는 무공해 배추?

그래요, 한 선생님은 얼른 알아들으시네. 무공핸들 알겠어요? 그러니 무궁화배추라면서, 저이가 유난히 봄동 겉절이를 좋아하더라고요. 안됐죠 뭐. 여기가 원고향은 아니지만 명색이 시집 온 셈이라고, 좀 시원찮은 여동생이랑 데리고. 그러다 동생 죽고는 저 사람이 조금 멍하죠. 한참 되었어요. 여기 사람들 고생 안 한 사람 없더라고요. 그렇게까지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강남에 계속 살았더라면 모르고 죽었을 것, 여기 와서 많이 알게 되었어요. 환경이 참 중요해요, 사람은.

그럼 저 할머니는 무슨 사고라도, 피는 또 무슨 말이어요?

그게 이야기가 길죠. 사연 없는 사람 없겠지만. 궁금하세요?

민 여사는 오늘의 본론을 미뤄두고 정자의 노인 이야기를 한다.

동순, 남순과 순길 삼남매 이야기도 그 시절 모두가 궁핍한 채 살아가던 이야기와 비슷할 터였다. 돗자리 만들어 파는 마을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본 삼남매는 학교 교육은 의무교육까지도 다니는 둥 마는 둥 어려웠다. 새어머니는 재봉틀을 가지고 들어와서 제밥 신식 살림을 차리는가 싶었는데, 아버지가 곧 돌아가시고 덜렁 삼남매만 남자 한 해를 못 버티고 다시 떠났다. 남순에게 재봉틀에 대한 바람만 넣어주고 떠난 셈이다.

남순은 기어코 광주에 있는 시장 뒷전의 영세 봉제공장에서 견습공이 되어 틀질을 배웠다. 돈 오천원 받고 버선, 속옷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틀질을 했다. 그런 어느 명절에 서울에서 일하던 친척 언니를 만났고, 서울 소식에 혹해서 따라가더니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상승 곡선이었다. 곧 만원을 받았으니 횡재 다름없었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했던 철야작업은 한창 피어나는 젊음도 삼켜버릴 기세였다. 두어 달 지나니까 코피는 일상이 되었고, 시간도 없고 돈도 아끼자고 사먹는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현기증은 다반사였다. 남순은 어쨌거나 서울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돈을 보냈고, 남동생 순길이는 제 할 일답게 공부를 계속했고 또 잘 해냈다. 맏이 동순은 건전지공장에 나갈 꿈도 접고 살림을 도맡았다. 순길에게 누나들은 어머니요 아버지였다.

그렇게 서울 생활 사오년이 계속되면서 남순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꿈은 점점 멀어지는 무지개 같았다. 타이밍이란 약까지 먹어가는 동안 젊다 못해 어린 몸은 파괴되어 갔다. 그들을 졸지 못하게 한겨울에도 찬바람 들어오게 문을 열어놓다가, 그래도 안 되면 나누어주고 먹이는 약이었다. 첨엔들 모르고 먹었고, 나중에는 청해서 먹었다. 졸음 쫒는 귀신. 하지만 약을 먹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졸다가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가 틀 속에 깊이 끼어 들어가 버렸다. 상처가 낫고도 엄지는 병신 모양으로 남았다. 두 가지 출구가 어른거렸다. 쉽게 살기 위해서라면 중랑천 뚝방으로 ‘언니들’의 그림자를 따라 섞이는 길, 아니면 아예 모두 다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뚝방 길로 나서자니 그들도 짙은 화장을 하고도 허무해보이기는 매한가지였고, 죽자니 내려 보내는 월급이 필요한 동생이 걸렸다.

가끔 야학 교사들의 한 마디가 이들의 삶을 지탱시켜주기도 했다. 못 배우고 가난한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다, 라고 가르치시던 ㅅ 선생님. 광릉 숲에 희귀새 한 마리가 죽으면 떠들어대는 신문들이 우리들 노동자 손가락 잘려나가도 행여 굶어 죽어도 한 줄도 보도 안한다. 신문들 믿지 맙시다, 서로를 믿읍시다, 라던 목사님. 차츰 어깨동무가 되는 친구들이 생겼다. 거기서 ㄷ 방직에서 노조 어쩌고 시작도 못해보고 똥물 사건 뒤 면목동으로 옮겨온 친구도 만났다. 그 가발공장은 바느질만 잘하면 대우가 훨씬 낫다는 소문에 남순도 그리로 옮겼다. OO무역주식회사 사원증을 받게 된 기쁨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든든한 유대가 좋았다. 남순 자신보다 더한 역경에서 대의원까지 올라간 언니도 돋보였다. 초등 졸업도 하기 전부터 진면에서, 누에고치를 삶아서 뽑아낸 솜에서, 실을 뽑아내는 일을 했다는 언니였다. 고향도 가까운 곳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 면목동 공장을 충청북도로 옮긴다는 공고가 떴다. 그리고 따라 갈 수 없는 몇 백 명이 사표를 썼다.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정말 폐업공고가 나붙고, 기숙사에 물도 끊고 전기도 끊자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결의’를 하자, 그러자…….

‘우리는 거리에 내쫓겨 올 데 갈 데가 없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는 사이 누군가 혈서를 쓴다고 했다. 무서웠다. 무조건 무서웠다. 피는 무섭다. 어머니의 피……. 피로 무슨 글자인가를 썼겠지만, 남순은 한일자가 채 그려지지도 전에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한일자는 ㄷ자의 첫 획이었고, 나중에 알려진 대로 글자는 ‘단결투쟁’이었다. 그것을 다 쓴 언니, 타이밍 같은 것은 내뱉어버리고 삼키지 말라던 언니는 그날 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새벽에, 아니 깊은 밤중에 쳐들어온 사람들은 - 쳐들어온 것이 맞다고, 남순이 그리 말했다고 - 삼 백 여공들을 팔다리 하나씩 들어서 끌어냈고, 그 중에 그 언니는……없었다. 나중에야 들것에 실려 나왔지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 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농성 걱정하던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귀가 아프게 들은 대로 이야그 해줄끄나?

민 여사가 갑자기 정자의 노인과 똑같은 사투리로 말한다.

웬선놈에 돈땜시. 그라고는 야도 내려왔제라. 서울은 통 무섭다고. 그때는 이상시레 날마다 헛소리만 했응께로.

그 언닌 절대 자살 아녀. 그 언니도 남동생 뒷바라지 하고 있었는데 왜 죽어. 엄니도 있었는데 왜 죽냔 말여. 그 언니한텐 엄니가 있었다니까. 글고 꼭 고향 내려와 산다고 했어. 사람이 고향을 잊아뿔믄 못 쓴다고. 시집을 가도 고향 사람 만나고 잡다고 했어. 시집 꿈도 꾸던 사람이 왜 절로 죽겄어. 절대로 아녀, 아니라고.

울 엄니라도 있었으믄 야가 맘을 잘 다스렸겄제. 그래도 고향 내려왔응께 우리 둘이 살어 남았제. 둘 다 박복했던 거시, 남순이는 다시는 틀질을 안 허기로 작정헌 듯 방에만 틀어배겼고, 그런 남순이 놔두고 내가 멋을 혔겄소. 젊은 날 나도 날벼락이었제. 쪼깨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었제만, 우리 사정이 그러코롬 됭께 다 틀려부렀제. 그 사람이 거그서 살림을 차링께 한동네 살기도 하잔코. 그라다 이 동네 나 먹은 남자 따라 왔는디, 야랑 거둬 준당께. 그라도 복이라고 죽어붕께. 그락저락 세월은 가드라고, 눈 깝짝에 가분당께.

우리 순길이 말이라? 순길이는 거장 다 배왔고, 남지기는 지가 알아서 혔고, 그라도 살어 남었는디. 요짐엔 고향도 모린다네. 그거시 흠이라믄 흠이제만, 고향 모리는 사람 어디 한 둘이여야제. 고향에 엄니가 있나 아부지가 있나. 고향도 고향이 아니겄제. 남순이 살았을 적엔, 그때까장은 더러 여글 댕겨가곤 했는디. 인자 멋허러 여글 오겄어라. 나는 지 갈친 누님도 아닌디.

 

새삼스레 도자기 굽고 염색하고 바느질한다는 이 분이 돋보였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여기 사투리를 그대로 흉내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얼굴은 영 아니다.

사투리가 너무 자연스러우신데 얼굴은 영 아니시네요.

숭악한 사투리 말예요? 여기 산 세월이 얼만데요. 나 여기 사람 다 되었죠. 강남 집 팔고 내려올 때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세 놔놓고 가지 그러냐고! 돈으로 말하자면 그 말이 옳았지요. 가만히 있기만 했어도 수십억은 족히 되는 아파트를 그때 시세대로 훌쩍 내놓고 왔으니. 이젠 강남 복판에 재입성은 글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왕창 손해 봤다고만 생각하니까.

그래 이제 완전히 정착하신 거로군요.

정착이고 뭐고, 사는 곳이 집이고 고향이겠죠. 여기 내려와서 배운 것이 얼만데.

배워요?

일테면 외지 사람, 그러니까 도시 사람들이 와서 감탄하는 잔디밭이 얼마나 수고로움의 대가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지요. 하루 세 번, 새벽 한낮 초저녁에 십분 씩 자동으로 스프링클러를 조정해 놓으면 그저 자라는 것이 잔디밭인 줄 알았죠. 게 다리 같이 퍼진 바랭이풀도, 그냥 보면 예쁜 민들레도 잔디밭에선 불청객이죠. 어찌 보면 사랑스런 강아지풀도 고맙지 않죠. 클로버는 어떻고요, 소녀시절엔 행여 네잎클로버라도 찾아볼까 반기는 것 아니었어요? 그런 잡초들, 손으로 하나하나 골라내야 잔디밭이 유지되지요. 아무려나 담장 대신 둘러선 나무들이 얼마나 대단한 꽃들이며 향기를 뿜어주는지. 대문 바로 곁이 조팝나무죠, 오늘 여기 이러다 말겠네요. 다음엔 4월 돼서 오세요. 산야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내 정원에 와 있지, 그 윤기 나는 밤색 가느라단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피는 하얀 꽃잎들. 바람만 우수수 불어도 죄 저버리지만 한동안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런 걸 서울 복판 살면서 알았겠어요?

조팝나무, 상상이 안 가는데요?

이건 그냥 사치스런 말이라 할지도 모르겠네요. 강남에서라면 절대로 몰랐을 것들로, 그래서 풍요롭다면 좀 거하고, 폭이 넓어진 셈이죠. 물론 감탄할 일만 있는 건 아녜요. 실은 쓸쓸한 일이 더 많아요.

쓸쓸한데도 이곳이 더……?

쓸쓸하죠, 사는 것이, 다. 저이야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그렇다 치고요. 멀쩡한 할아버지 한 분도 벌건 대낮에 혼자 정자에 앉아있어 보았자 나무둥치 신세가 되죠. 바로 저 아래 길가 어느 집 나락 말려놓은 걸 웬 젊은이가 트럭 대놓고 착착 거두어 가더래요. 아, 저 집은 아들인가 조칸가 일이랑 도와주려고 오니 좋겠다, 그랬다는데요. 그거 온통 실어가 버린 날강도였죠. 여기 살면 인심이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사는가, 바닥을 보는 것 같을 때도 많아요.

아무래도 가난 때문에…….

가난이 처음 문제겠죠. 그러다 가난 말고도 가정 문제들이 심상찮게 생겨요. 여기 바로 이 아랫집도 지금 비었지요. 아저씨가 후두암으로 세상 떴어요, 자식도 없이. 아들 딸 데려온 여자랑 늦장가 식으로 합쳐 살았다는데, 여자가 좀 함부로랄까, 자격지심이랄까. 동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하면 그쪽이더라고요. 아무튼 아저씬 일해서, 노동일이죠, 돈 모이면 그 동안 각시 몰래 나한테 조금씩 맡겨서 저축을 했어요. 동생이 특히 주의를 주곤 했더래요, 형한테. 여자 좋은 일 말고 조카한테 뭐라도 남겨줘야 죽어서 찬물이라도 얻어먹을 것 아니냐고 채근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가 임자라고 그러고. 그 얄팍한 살림에도 쪽박 깨지는 소리가 나서 보기 안됐더라고요. 몇 년 그렇게 앓았는데, 결국 세상 뜨자 대충 초상치고는 여자가 동넬 뜨더군요. 동생 예감이 맞았죠. 데려온 애들은 벌써 결혼해 나갔고, 단 둘이 살다가 그냥 가버리더라고요. 이장한테 전화해서 헐값에 집 내놓으란 소리만 했다는군요. 그런 소리 듣고는 내가 갖고 있던 통장을 조카를 줘서 제사라도 지내게 해야 할지, 참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고요. 그 여자, 가만있었음 집값 다 되는 저축 돈을 받을 뻔 했었는데, 집은 그냥 살고.

그러니까 가난이……. 우리가 부유함에 너무 애착하면 부의 노예라 하지만, 교황님 말씀이죠, 결국 가난이 모든 것을 망치는 거죠. 그러니 부유함에 돈에 집착할 밖에요. 축적된 돈은 계속 돈을 낳고, 돈은 계속 돈 쪽으로 몰리고. 쇳가루가 지남철에 쏠릴 밖에요.

그래요, 가난이 일상이 되면 뭐가 뭔지 아예 모르는 것 같아요. 보조금만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뭐라는지 아세요? 나는 요로코롬 나라에서 믹인게로 먼 걱정잉가. 정부다 군청이다 면사무소다 그런 개념은 별로 통하지 않죠, 불필요해요. 가끔 봉사단체에서 연탄이나 반찬들 보내주죠. 몸 그런대로 움직이니까 들판에서 이런저런 일 거들면서 함께 먹고 푸중가리도 얻고.

푸중가리요?

아, 푸성귀. 푸성귀를 그리 말해요. 우리 한 선생님은 서울분이겠지요?

서울은 아니고, 평택요.

평택이면 서울이지요, 경기도 살면 다 서울 사는 거죠. 전남 어디 살아도 서울 가면 광주사람이라는데요 뭐.

아, 그렇구나. ‘나라에서 믹인게로’ 우리나라 좋은 나라 투표가 나오는 것이구나. 가난은 의식마저 죽인다. 적선으로 의식을 죽인다. 그나마 월급쟁이한테서 세금 걷어 밑바닥에 적선함으로써. 부자는 부를 애착하기를 멈출 리 없고, 기꺼이 부의 노예임을 즐긴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지수가 높단다. 절대적 가난은 절대적 불행이다. 적선은 가난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도구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먹먹한데 노인이 꼼지락거린다.

남순이넌 왜 안 온당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넋 놓고 있던 노인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어쩜 좋아. 할매, 남순이 서울 도로 갔다고 했잖아. 남순이는 서울이 좋다잖아.

아니여, 나랑 끝까장 여그 산다고 그랬는디.

남순이가 좀 아파서 거기 서울 병원에 있다니까 그러네. 뭣보다 동네 사람들하고 잘 살라고, 그러고 갔다니까 그래. 맨날 남순이만 찾으면 동순 씨도 병원 보내버릴까 보다, 거긴 맨날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하긴 무릎 아파서 잘 못 걸으니 정말 병원에 가야할지 몰라. 보건소 선생 불러줄까?

싫여, 나 암시랑토 안흔디. 집에 갈겨.

금방 여기서들 밥 차릴 건데. 무궁화배추 무친다니까. 집엔 해름에 가셔.

무궁화배추 만난디. 삼천리강산에~.

그러고는 노인은 페트병에 물을 채운 베개를 모로 베고 저쪽으로 드러눕는다.

 

해가 지는 모습이 어떤 것일지.

나는 삼천리강산에~ 그것이 뭔가 묻고 싶었는데, 민 여사가 불쑥 해 지는 이야기를 했다. 연초록 잎들을 뚫고 비치는 여린 해가 중천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뜬금없다.

해가 꼴깍 산 너머로 넘어가기 까지는 어떻게 살았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렇죠?

해 지는 이야기는 왜 새삼스럽게요?

이 사람을 좀 봐요. 더 심해지면 이장도 어쩌지 못하고 요양원 보낼 거라 그러고 있고. 저기 저 목련, 백목련 피길 누구나 기다리죠. 놀랍게도 큰 꽃잎이 피면 누구라도 압도당하죠. 그러다 봄비라도 주르륵 내리면 절반은 시들어 붙어있지요. 조금씩 조금씩 죽는 거예요. 바닥에 나뒹굴어서도 얼른 죽지 않죠, 두툼한 살 때문에 그렇죠. 차라리 우수수 지는 꽃들이 더 예뻐요, 후두둑 지는 동백이 서럽다 해도 차라리.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랬나요, 송창식 노랜 잘 모르죠, 아마?

참다가 참다가 참을 수 없어서 뚝 떨어지는 꽃이 동백이라 했던가, 시인 김용택의 말은. 동백이건 목련이건 한 때가 있지 않았나. 그냥 풀꽃, 풀꽃처럼도 피어보지 못한 삶도 있는데. 동순 할머니가 아직 회갑도 안 된 나이라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민 여사가 왜 말을 좀 편하게 놓나 했더니 실제로 더 젊다는 말이다. 훨씬 늙은 몰골을 하고서. 무엇이 이렇게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는 삶을 점지하는가.

봐라, 부유함에 집착하는 노예들은 당당하게 삶을 즐긴다. 평생 부유함 근처는커녕 그림자도 못 밟고 스러질 생은 뭔가. 동순 할머니의 경우 여동생의 트라우마에서 전염된 간접피해치고는 결과가 참담하다. 물론 그 YH사건 현장에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전부 다 후유증으로 폐인이 된 건 아니다. 사건 당시에 임신 중이던 몸으로 활동했고 그 신념으로 일생을 살아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경우도 있다고, 어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다수는 다잡고 살아남았지 않은가 말이다. 직접은 아니라도 그 여세를 몰아 유신정국을 흔들었고, 억울한 죽음도 늦게라도 인정받고 동료들과 시민들의 추모를 받고. 튼실하게 살아남지 못한 책임은 당사자의 신체적 정신적 나약함에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나약함은 죄인가. 모르겠다. 가난은 죄인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괜히 맘 아픈 이야길 했나 보네요.

내가 멍하니 있었던지 민 여사가 물었다.

아, 아뇨. 저도 알 만큼은 알죠. 그런데 여긴 굴뚝새는 없나요?

웬 굴뚝새요? 요즘엔 겨울에도 잘 안 보이던데요. 여긴 소쩍새다 쑥국새다 그런 얘기가 많죠. 솥이 적어 굶어죽었느니…….

시어메 무서워 쑥국도 못 먹고 죽었느니, 그런 거죠? 옛날엔 참 서러운 상상이었어요!

나는 얼결에 튀어나온 굴뚝새 이야기를 감추려고 말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저 아래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벌써 이른 점심시간인가 보다.

나 좀 봐. 여긴 새벽밥 먹고들 들에 나가니까 점심이 일러요. 내가 오늘 작품 이야기는커녕 집 안으로 구경도 못 시켜드렸네요. 그런데 점심 같이 하고 가실래요? 점심 후엔 나도 읍내 나가야 해서.

아뇨, 오늘은 자료만 주셔도.

그래요, 그럼. 저기 차 안에 있어요. 검토해 보시고 나서 한번 만나게요. 난 책 내고 그러는 것 별 뜻이 없는데, 남편이 자꾸 권해서. 담엔 차분히 작품들 보시면서…….

검토라뇨, 잘 감상해보겠습니다.

몇 걸음 아래로 함께 걸어 내려오는데 다시 노랫소리가 들린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은 갈고 씨를 뿌린다~.

모로 누운 채 말도 안 되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사람, 여기 어느 한적한 마을, 아직은 추운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 마을 정자에서 넋을 놓고 있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되었나. 먼저 떠난 동생의 무서운 기억이 전염되었을까. 무서움이 얼마나 무서우면 전염이 될까.

조팝나무 꽃 필 때 오세요.

연락 하셔요, 저는 토요일이 좋은데요.

손에는 가벼운 유에스비를 받아들고 맘에는 모로 누운 앙상한 그림자를 무겁게 안고 발걸음을 옮긴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벌써 들리지 않을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왔는데도 귓가에 그 요상한 멜로디가 아스라이 따라온다. 새봄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일까, 정말 누구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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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 단편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천년의 하루』, 광주전남소설가협회, 7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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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27. 23:02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를 동경했다, 동경했었다.

 

1997년 겨울, 세 번째 독일에 갔던 그때만 해도 내게 자유는 아름다운 가치였다. 저 남쪽 어느 대학의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일종의 인문학 강좌에서였다. 쾰른에 거주하며 뷔페탈 대학에 오가느라고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코앞의 별다른 과제가 없다 보니 야간의 가벼운 강좌도 기웃거리다 유명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갔던 참이었다. 연사였던 그 교수는 자신의 책과 논문들을 읽었다는 이역만리 한국의 시원찮은 독문과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이 기분 좋은 일에 속하겠지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마치 뭣을 구하러 가정과 애들이 있는 나이 든 여자가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실제로 전문자료를 구하게 위해서 독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는 시대였으니까. 또 이미 교수자리에 있는데 - 독일에서는 교수 자리가 대단해서 그랬겠지만 - 뭣 때문에 애써 독문학의 본고장을 쓸쓸히 배회하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어차피 독일 사람들처럼 독일 정서에 함몰되어 독문학을 완벽하게 체득할 수도 없으면서? 문학이 뭐라고?

질문의 저 깊은 회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술에 달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강의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어쩌면 생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혹은 학교당국의 연구비로,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를 어찌 예찬하지 않았겠는가.

 

추상적인 자유는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건배라도 할 일이 있으면 자유를 위하여, 라고 외칠 뻔도 했다. 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해온 우리들, 이 아니 자랑스러운가, 라고.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민주주의와 합심해서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우리들로부터 온갖 원래적 자유를 침탈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는 막연히 자유를 예찬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므로, 다른 말로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기업경제다. 기업경제가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 자유는 상대에게 창끝을 겨눈다. 창끝은 가진 자유가 적은 사람의, 창을 든 손은 가진 자유가 넘치는 사람의 몫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상승해도 노동자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최악의 경우, 기업이 투자는 미루면서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잘 준비된 시나리오만 있으면,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만 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가 된다. 기업의 자유는 노동자들을 단박에 해고할 자유까지를 말한다.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 그렇다.

 

이러고서 자유를 예찬해야 하다니. 나는 언젠가부터 자유를 증오한다.

원론적으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상충이 일어난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성장의 시대에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했다. 상당 수 자수성가를 꿈꾸던 사람들은 계층 상승을 이루어 냈다. 계층 상승을 이루다 - 이 말 자체가 사회에 상존하는 계층의 구분을 인정하는 씁쓸한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꿈을. 경쟁할 자유? 그것도 자유인데 경쟁에서 낙오된 것은 낙오된 자의 무능이다, 라고들 한다. 자유 경쟁이란 어불성설이다. 같은 조건이 아닌 자유 경쟁은 자유 경쟁이 아니다.

 

느닷없는 생각. 내가 자유 경쟁으로 대입을 뚫었지만, 딸을 낳으면 꼭 이화여대에 보내겠다는 우리 어머니의 성화와 딸을 무슨 대학공부 시키냐는 다른 어머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분명 무심한 어머니의 딸 대신에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를 담보로 하기가 십상이다. 내가 마시는 물과 먹는 쌀은 누군가의 부자유의 대가이다. 쉬고 싶어도 하기 싫어도 물과 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일의 결과다. 그들이 내게 물과 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고자 했을 뿐이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퍼 쓴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내 자유를 담보로 나와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노력이 그 생활비를 충족하지 못할 때, 나는 내 자유를 다 내어 주고도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 자유 - 인격을 유지하면서 살 자유 - 를 건지지 못한다. 내 자유는 저당잡힌다,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이 자유시장경제 체제 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자유를 증오한다. 증오해야만 자유를 누릴 심보를 줄이게 된다.

자유를 누리고픈 심보가 문제다. 나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은커녕 말도 자유롭게 못할게 뭔가, 하지만.

 

내가 자유를 느낄 때 그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닐까. 내가 덜 자유로울 때 나 아닌 타인들의 자유가 덜 침해받으리라는 것이 공식이니까. 지구상에 자유의 부피와 무게는 일정한데, 내가 덜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누리는 자유만 해도 73억분의 1, 그 만큼의 자유로 만족하려면 아예 자유를 외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는 온통 인간들의 소유물만도 아니다. 셀 수 없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의 자유는 인간들의 자유의 희생이 되고 있다. 땅과 물 또한 인간들의 자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태고의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미식의 자유를 위해 커피재배 단지로 변하고, 사육동물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변해간다.

 

자유라는 가치를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증오한다, 자유를. 원래는 꿈꾸었던 아름다운 가치, 자유를.(15.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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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0. 『바람으로 별빛으로 또 가슴으로』, 이화동창문인회, 개미, 230-233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2. 27. 23:01

더불어 살기

 

오랜만에 강의를 준비했다. 독문학 강의 몇 십 년을 늘 낯설어하며 결국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었는데. 그 뒤 외국인대학생들에게 교양과목 한국어강의를 몇 학기 했었지만 그건 말하자면 강의는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만나는 인문학 - 스무 개의 강의로 이루어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인문학 강좌라 했다. 그 중 두 강좌를 맡게 되어 제목을 결정하기에 앞서 내가 어느 속성에 속하는가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무명이지만 소설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강의를 할 수 있는 소설가로는 어림없다고 느껴졌다. 어쨌거나 독문학 분야에서라면 너스레를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망설여졌다. 인문학이 쓸모없다고 홀대 받으니까 권장하는 이런 (억지)강의에서 - 물론 자발적인 수강생들의 숫자는 예상 보다 많아서 흐뭇하기까지 했다 - 전문적인 독문학 강의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인류의 지적 진화와 사회의 발전 단계’라는 주제로 1)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2) 인간에게서 물질에게로 라는 강의 제목을 잡았다. 마음으로는 두 번째 강의에 역점을 두기로 하면서, 물질이, 물질의 풍요가 어떻게 인간을 ‘삼켜버리게’ 되었는가를 역설하고 싶었다. 초봄의 일이었다, 강의 계획은.

 

그리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가 현실이 되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그 정도면 얼마나 좋았을까.

강의는 6월이었지만 말하면서 속으로는 울었다. 물질을, 돈을 숭배하는 우리의 가치관이, 교황님의 말씀처럼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가 몰고 온 참극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인문학 강의가, 무슨 소설이, 무슨 시가…….

 

우리는 먹고 사는 일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의를 끝냈다. 아프리카 최빈국 에티오피아는 커피를 수출한다. 하지만 커피 농장 노동자의 하루 평균임금이 1달러도 안 된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소비자 가격의 1%도 되지 않는다. 유엔식량기구의 발표대로라면 오늘날의 농업시스템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일일 성인 기준 2,200칼로리로 계산해서 120억 인구가 먹고살 수 있는 양이다. 현재 세계 인구는 71억5,500만 명이다. 그러니까 식량이 절반 가까이 남아도는데, 매일 기아로 5만7000명이 죽고 8억4,200만 명이 기아상태라고 한다. 기아로 죽는 사람은 암살당하는 것이고, 살인자는 동족을 잡아먹는 식인적인 ‘글로벌’ 경제 질서다.

 

이 경쟁에서 질 새라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한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심한 수준이다. 스위스의 1,636시간과 비교하면 엄청나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시민계급은 사유와 학문이나 하고 노동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개신교에서 노동은 ‘신의 소명’이 되었다. 인문주의 시대에는 인간은 주체요 자연은 객체로서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과학 기술이 전권을 쥐더니 인간노동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추출하는 (귀)신이 되었다. 우리는 컨베이어벨트의 리듬이 명령하는 대로 정확히 인간노동을 제공해야한다. 그러므로 인간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저열한 것이다.

 

노동은 소득과 비례하지도 않는다. 미국 CEO의 연봉이 일반 사원 평균 보다 331배라고 한다. 1983년에는 46배였었는데. 우리나라도 어느 그룹 회장은 301억 원, 다른 어느 그룹 회장도 140억 원을 급여로 받으셨다고 한다. 대기업 일반 직원들 평균 연봉의 500배, 200배에 해당한단다.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 이근호의 연봉이 178만8000원으로 이번 월드컵 출전 선수 700여 명 중 최하라고 했을 때 우리는 (군인이라서 당연한 일인데도) 다 놀랐다. 선수들 중 최고 연봉 742억 원은 4만 배, 우리나라 선수 최고 연봉 40억 원도 2천 배가 넘는다니 ‘살인적인’ 격차다. 군인들 상호간도 예외가 아니다. 창군 당시 이등병과 대장의 월급 차이는 30배였지만, 지금은 200배라고 한다.

 

노동시간은 삶을 위한 필요 정도로 규제되어 마땅하다. 생명과 안전 그리고 환경 관련 규제는 강화되어도 모자라다. 필립 제닝스 국제사무직노조연합 사무총장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규제완화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올드 버전이며,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친다. 규제완화가 아니라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대도 우리 코끝엔 ‘474목표’라는 홍당무가 걸려있다. 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말이다. 지금 국민소득 2만 5천 달러라 해도 대부분의 4인 가족 가정이 연 1억을 전혀 체감하지 못한다. 4만 달러 소득은 어느 계층 소수에게만 집중될 것인지? 허무한 꿈이다.

 

우리는 경쟁이 성공의 열쇠라고 교육받았고 또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라는 생각,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값있는 무엇, 태환권이라는 생각,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라는 생각이 미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 초창기 교육자들의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행복한가? 이럴 때엔 노자의 ‘절학무우’가 떠오른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그 구절을 순 한글로 번역하시면서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라고 쓰셨다.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를 ‘팔꿈치사회’라는 단어로 말한다. 동료를 친구를 심지어 형제를 팔꿈치로 젖히고서야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 - 결국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승자의 팔꿈치에 밀려 떨어져나간 많은 패자들이 함께 누렸어야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구상의 자원도 재화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봉건 피라미드 위에 ‘신 대신 돈이 자리한’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빈곤 못지않게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인구 10만 명 당 33명,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연속 8년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 - 우리는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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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20. 「더불어 살기」, 『어디쯤일까』, 이화동창문인회, 개미, 128-131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