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6. 12. 18. 23:09
       

그들은 왜 檀紀를 못쓰게 했을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8. 역사 배우기
2016년 12월 12일 (월) 14:44:1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대통령 탄핵소추가 국민의 불같은 염원 속에서 들끓고 있다. 그렇다고 탄핵 정국에 파묻혀 어물쩍 지나가서는 아니 될 정말 중요한 것이 역사 교과서 문제다. 문자 그대로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는 중대 사안이다. 교육부가 “균형 있는 역사관과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수 있는 교과서”라고 현장본을 제시했지만 오류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올바르다’는 말은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는 뜻인데, 이치나 규범은 누가 정하고 옳고 그름을 누가 정하는가. 바로 그런 이유로 ‘역사 국정교과서’은 그 자체로서 위험을 내포한다. 특정 시대의 특정 정권이 ‘옳다’고 정하는 것이 영원 무궁히 옳을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몸소 체험했으니 전문가가 왜 필요하냐는 집필진의 인터뷰를 보고는 많이 놀랐다. 체험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역사서가 아니라 장님 코끼리 관람기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1948.8.15)”는 문장은 엄청난 오류와 저의를 지녔다. 역사 기술에서 오류는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지만, 저의는 더욱 문제다. 역사 기술의 객관적인 방법은 기록물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관보』가 현존한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이 실려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당시에 이 문구의 뜻은 분명했다. 대한민국은 애초에 ‘기미 3·1운동으로 건립’됐고, 광복 후에는 다만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 

그 관보의 발행 일자에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는 연호가 사용됐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기미년(서기로 말해서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확인이었다. 엄연한 사실, 팩트다. 저의로 보이는 부분은 바로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다. 제헌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재건’을 어물쩍하게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려는 목적은 다분히 수상하다. 


‘광복 후 건국’이라는 논리는 기미년 임시정부 구성 이래의 대한민국 30년 기간을 부정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세력의 주장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30년 동안을 부인함으로써, 국가가 없었으므로 우리 민족이 일본에 붙어살았건 만주국에 붙어살았건 그다지 죽을죄가 아니라는 해석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주군에 복무했건 일본군에 복무했건 나라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는 해석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희생된 넋들은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저항에서 그리된 것으로 격하될 위험에 처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도 해방 후 이념 투쟁에서 적대시된 인사들은 애국은커녕 좌익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것이고, 만주국이나 일본국에 복무를 했어도 여차여차 노선을 바꾸어 몸을 세탁하고 나면 애국적인 인사가 될 수도 있다는 횡재 아니겠는가. 아니, 대박인가?

 

역사 기술의 규범은 감계(鑑戒)다.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경계’만이 실록과 사초를 지켜낸 정신이다. 그러므로 ‘뼈아픈 진실(home truth)’을 마주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를 미화하려는 효도가 결코 효도가 아닌 것이, 권력자의 자화자찬은 후안무치일 뿐이다. 뼈아픈 진실을 외면하려다가 닥친 오늘날의 현실을 직시하시라.

저간의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의심한다. 기업인단은 국정교과서 편찬에 또 얼마를 선의로(?) 출연하고 ‘역사돋보기’같은 그 좋은 코너를 할당 받았을꼬! 가차 없는 무한경쟁으로 엄청난 부자가 된 이야기가 무에 그리 교육적일까.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축재에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너무 못 가진 사람들의 몫이 치우쳐 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부들이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이 사는 동네에 더 많은 산소농도를 보유하기위해서 가난한 마을의 공기마저 빼앗아갈 기술을 개발할지도 몰라, 그런 불안감마저 들 정도로 그들은 두렵고 막강한 존재다.

또 하나 엄연한 사실이 있다. 광복 후 재건된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우리는 단군기원으로 역사를 배웠다. 재건된 대한민국은 그 처음에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지만, 곧바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은 『삼국유사』에 기록되기를 환웅이 웅녀와 결혼해 낳은 아들로서 단군왕검이라고 불렸다고 배웠다. 곰이 변한 선조할머니라는 이야기는 약간 꺼림칙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자연친화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곰일 수도 있었을 우리들, 고기를 먹기 싫으니 차라리 토끼였으면 좋겠다고 깔깔대던 시절이었다.

 

훈민정음 3779, 임진왜란 3925, 을사늑약 4238, 경술국치 4243, 기미 독립선언 4252…. 네 자리 숫자 외우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4000년 전 사람들이 아득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단기를 살다가 4295년이 되려는 아침에는 갑자기 1962년 1월을 맞게 됐다. 우리는 난데없이 모든 연도에서 2333을 빼서 외워야 했다. 훈민정음 3779-2333=1446, 임진왜란 3925-2333=1592, 을사늑약 4238-2333=1905, 경술국치 4243-2333=1910, 기미독립선언 4252-2333=1919…. 역사 공부는 뭔가 엉켰고 힘들어졌다.

 

누가 단기를 없앴는가. 쿠데타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군부세력은 집권하자 괜스레 공식연호부터 변경했다. 단기연호를 폐지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문명국가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우리나라의 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니, 단기를 사용하면 야만국이라는 논리는 무슨 근거였을까. 우리 역사의 상징인 단기를 버리고 서양을 따라가는 문명국가, 바로 그러한 사관이 사대주의다. 단기가 없고서는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가 아니다. 역사 배우기를 단기로 시작했던 늙은이의 단순한 향수나 푸념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52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2. 18. 23:06
不義·不正 휩쓸려간 교수들… 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7. 인식과 행동 사이
2016년 12월 01일 (목) 10:44:4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옛날에, 청소년기에, 가슴을 떨게 했던 한 문장이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생각, 즉 사유의 주체인 내가 존재한다는 개념은 순수존재로서의 순수의식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은 존재하지만, 그 문장이 완전하지 않음은 한참 뒤에야 터득하게 됐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다는 의미로서 의식에 가깝다는 것.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 오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식에 가까운 이 의식은 의식할 무엇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 즉 대상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육신이 우리가 섭취하는 것의 총체이듯이,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의 집합이다. 그러다보니 먹고 싶은 것을 좇아 먹이를 구하듯이, 인식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서 인식하려는 본능이 발동하게 된다.

자유의 개념에 걸면,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무한 자유에 내맡겨진 존재다.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라는 카테고리를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 심지어 생물학적인 질서를 거스르는 동성애자가 되는 일도 가능하다. 이슬람이 될 수도 이슬람을 저주하는 십자군이 될 수도, 아예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다. 되어도 좋다. 다만 무엇이 되건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안과 더불어 그 책임도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책임을 뺀 그 극단에 가면 곡학아세의 상태가 되는가 보다. 바른 길에서 벗어난 학문,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는 학자가 많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한국의 수치스런 민낯을 만들어낸 장본인들 중에는 학자 출신이 적지 않다. 폴리패서라고 불리는 모두가 그러할 리는 없지만, 상당수의 빼어난 폴리패서들이 정치권력 앞에서 곡학아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사전에서 설명하는 '정치'란?

정치의 속성이 학자를 삼켰나? 궁금하면 사전을 찾는 버릇대로 사전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집 서재에 최초의 영어사전이라는 로버트 코드리의 『알파벳 순서로 된 단어일람표』(1604년)는 아니지만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1755년) 사본이 있다. 언젠가 ‘귀리’ 항목에서 너무도 쓰라진 진실을 발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말에게 먹이는 곡물,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의 생계를 담당한다.’ 그래, 18세기에는 그랬구나. 어휘를 정리해주는 사전이야말로 시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느꼈다. 그래서 ‘정치’란 옛날에는 어떤 뜻이었을까 찾아보기로 했다.

정치적이라는 단어 ‘political, politic’의 뜻에 ‘artful, cunning’이라는 의미가 있고 보면, 예로부터 정치란 교묘하고 교활한 어떤 것을 포함하는가 싶다. 그래서 고결하게 학문에 정진하던 학자들도 정치판에 가면 교묘하고 교활한 면모를 갖게 되나 보다. 그러니까 고결성을 지켜내는 첩경은 아예 정치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학자로서 정치적 야망이 있다면 자신의 고결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촌철의 수행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권의 과잉 호의에는 검은 그림자가 따라오게 돼 있다. 불의와 부정의 블랙홀로 휩쓸려 들어간 일부 교수들의 행태를 신자유주의의 덫이라고 이데올로기 탓만 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타당도와 선악도를 생각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이 바로 학자요 교수의 책무이거늘. 

이것은 그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지는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에야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칠레의 밤』을 읽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상이라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연설에서 “암흑 속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으로 뛰어내릴 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글”만이 그 품격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첫 페이지에서 말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다.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공부했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생각났다. 볼라뇨에 비하면 반세기 전인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보다도 살인다도 더 악랄한 수법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강도나 살인에는 명백한 법조항이 있고, 선고받은 죄인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열어준다. 결국 산수 계산문제처럼 딱 잘라서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만큼은 죄의 정산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그의 언어가 말하는 모든 전체를 팔아넘기는 것이며, 불문율 앞에 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작가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교황의 무오류성을 예외로 하면, 모든 인간은 많건 적건 오류 덩어리다. 오류란 사유의 혼란이나 감정적인 동기 때문에, 또는 부주의나 태만의 결과로서 발생한다. 선의의 당의정을 입힌 악행은 악행일 뿐이다. 자신의 속성을 배반하는 것은 거짓이다. 어미가 어미임을, 의사가 의사임을 배반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정치가, 학자, 작가, 예술가 등이 자신을 배반하는 일은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파장이 크다. 소위 폴리패서들이 학자의 본성을 포기하는 순간 곧 ‘교묘하고 교활한’ 정치가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검은 세상의 블랙리스트

그렇게 학자들이 정치판에 묶여있는 동안 후안무치의 일들이 온 나라를 삼켰다. 문학예술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과 함께 믿거나말거나 명단마저 돌아다닌다.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작가들을 존중한다. 세상이 검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들어가야 하얀 사람이라는 증명이 된다. 블랙리스트에도 못 들어간 나 같은 회색분자가 가장 비열할지도 모른다. 문학이 세상의 고결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식과 행동 사이 불안한 공간을 뚫고 나가는 의지를 갈구할 일이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생각한다.’ 비판은 누구나 한다. 인식이 아니라 행동에 이르렀을 때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벌써 옛날에 괴테의 파우스트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라고 외쳤지 않은가.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30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1. 22. 01:22

대학마저 집어삼킨 권력 … 악명 높던 공평 다 어디갔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6.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

2016년 11월 16일 (수) 12:18:5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알 수 없는 것이 선거인가 보다. 부도덕의 집합으로 보이던 인물도 자유 천국이라는 국가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 지난 대선에서 우리나라도 국정원 관련 엄청난 의혹 속에서 가까스로 이긴 대통령을 낳았다. 가까스로 이겨도 권력은 통째로 주어지는데, 아뿔싸, 우리는 “개인사도 홀로 챙길 줄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을 뽑았었나 보다. 그러니 국사와 역사를 어찌 감당했겠는가.

예쁜 옷 갈아입혀주면 입고, 우아한 미소 지으라면 짓고, 가끔 레이저 광선 쏘라면 쏘고. 나머지는 개인사와 국사를 통틀어 전권을 위탁했으니,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그들이 권력을 쥐었으렷다. ‘권력이란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이 갖는 합의를 통해 나오는 힘’(한나 아렌트)일진대, 저들의 손에 바쳐진 권력은 온 국민들을 향한 폭력이 되어버렸다.

 

이화여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이 위탁정치의 전횡은 방방곡곡에서 깃발을 날렸다. 그 하나, 대학입시에서 휘두른 폭력은 모든 청소년과 그 부모들을 슬픔과 한탄에 빠뜨렸다. 대통령이야 자녀가 없으니 부모 마음을 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 상상을 절하는 국정농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2013년 5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여자대학 체육과학부에서 체육특기자 종목을 갑자기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승마가 포함됐다. 한 특정 여학생이 전국 승마대회에서 2위를 한 다음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2위에 불만을 품은 여학생 측의 명령(?)으로 승마협회가 곤욕을 치르고, 문체부 공무원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지목돼 경질됐다. 이상한 촌극이었다.

이듬해 그 속편은 경악의 수준을 넘었다. 우리들 가슴에 지금도 현재형으로 가라앉고 있는 잔인한 4월의 세월호 참극이 공교롭게도 그 여학생의 승마 국가대표 선발 의혹의 와중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대통령께서 세월호 난 그 다음날, 체육개혁 확실히 하라고 오더(지시) 내려왔다”는 차관의 전언이 드러났다. “세월호 난 그 다음날”, 아직도 에어포켓에 살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지도 모를 수백명의 생명들을 버려둔 채, 최고 권력자가 ‘조카’를 위해서 체육개혁이나 명령하는 이런 세상에선 아무도 살아서는 안 된다. 아니, 그 폭력에 우리 모두 이미 죽었다.

무소불위의 폭력이 된 권력은 대학마저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위한 산학협력의 한 부품으로 전락시켰고, 이화여대 집행부도 굴했나 보다. 2015년도 체육특기자 모집 요강 중 어떤 자격도 없던 학생이 면접일에 금메달을 걸고 입장한다. 월등한 면접점수는 정성평가 항목이니 법적 책임을 면한다고 치자. 그 메달은 원서접수 마감일 이후의 단체전에서 받은 것이라서 입시 요강에 명백히 어긋나지만 ‘승마공주’는 버젓이 입학한다. “돈도 실력이야…”라고 거들먹거리는 못된 아이, 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폭력 속에서 잘못 키워진 아이.

그 아이(?)가 짓밟아 뭉갠 결과는 참담하다. 하긴, 입학 후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하지 않은 것, 차마 서술하기 곤란한 행동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일탈 그 자체는 개인의 자유요 권리다. 그에 합당한 결과를 인정하고 정규교육을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다. 젊은 모두에게 꿈틀거리는 욕망일 수도 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가들 중에는 상식에서의 일탈을 승화해 인류를 구원하는 예술작품을 남기기도 했지 않은가. 문제는 그 지저분한 일탈을 만회한답시고 권력을 이용해 학원을 난도질해 입시고 성적이고 뭣이든 “대박”을 터뜨리려는 짓거리다. 우리는 그 폭력의 저열함에 분노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옛날의 이화여대는 정직성이 생명인 곳이었다. 1960년대 학부에서는 심지어 무감독시험이 가능했던 곳이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나간다. 학생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독하면서 감독교수가 없는 채로 시험을 마친다. 커닝을 정직성 훼손으로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번 부정직하다고 낙인찍히는 일이 벌어지면 그 다음 학교생활은 끝이었다.

사무적으로도 봐주기 없는 경직에 가까운 공평성으로 유명했다. 거의 악명 수준이었다. 예컨대 1980년대, 지방에 거주하는 졸업생이 취업을 위해 증명서들을 떼러 간다. 방학 동안의 관례라고, 신청서를 써서 제출하면 다음날 아침 일괄 결재가 나기 때문에 다음날 받으러 가야한다. 지방에서 온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한 사람만 편의를 봐 줄 수 없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립대에서도 비슷한 서류를 떼는데, 사정을 듣더니 시간을 정해주며 다시 오란다. 그런데도 모교를 원망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을 믿었으니까.

지금은 마땅히 사라졌지만, 금혼규칙도 누구에게나 공평했었다. 같은 동기인 인문대 다른 학과 학생이 4학년 2학기를 마친 겨울에 현직 교수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총장 왈 “O교수님, 부인 졸업장 어디 쓰실 일 없으시죠?”라고 농담처럼 던졌다는 말이 법이었단다. 학칙에 결혼하면 퇴학이었고, 결혼식은 졸업식 이전이었다.

 

대통령이라는 ‘허명’

 

공평할 때 우리는 불편함이나 억울한 정황도 받아들일 수 있다. 지금 이 수치스러운 현상들은 공평과 정직과는 몇 광년은 떨어져있다. 다만 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낳은 결과일 뿐이라서, 온 나라가 치를 떠는 것이다. 사상 초유의 범죄, 딱히 살인을 하지 않았다지만 보통사람들 전부를 ‘혼’을 죽여 버린 그 죄상들은 더 이상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또 수백 번 죽어야하니까.

그 폭력의 정점에서 도덕적 권위와 국정 장악력을 다 잃어버린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깊이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아니요. 용서란 그 잘못에 합당한 구체적인 행동으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옷이 아무리 화려한들 그 옷이 맞지 않으면 벗는 것이 옳지요. 이름이 아무리 높은들 그 이름이 허명이라면 마땅히 내려놓아야지요.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