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6. 10. 17. 22:36

멀어질수록 커지는 관계 ‘가족’ … 변화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3. 교집합과 합집합
2016년 09월 29일 (목) 13:46:1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한가위에는 말 그대로 풍성함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라는 말이다. 풍성함만 넘쳤을까. 걱정도 한껏 부푼 나날이었다. 어쩌면 몸과 맘이 따로따로인 채 연휴가 지났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추석의 차례는 설날보다도 풍성했겠다. 예전에는 상 뒤로 병풍을 둘러 세우고 지방을 써붙이거나 상 위에 위패를 세워 놓고 차례를 지냈다. 집안에 따라 정월 대보름, 단오, 백중이며 동지에도 차례를 지내기도 했었다. 예전에는 일용할 양식이 부족할지라도 ‘좀도리 쌀독’을 놓아두고 매끼 한 움큼씩 차례나 제사를 위해 곡식을 모아두었던 것이 어머니들의 지혜였다. 

   
  ▲ 일러스트 돈기성  
 

19세기 말 1896년생 시어머님이 살아계셨을 때를 보면, 우리 집안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동지에도 간단한 예를 지냈다. 지금도 약식이나 오곡밥 또 동지죽을 소소하게 차려놓는 정도의 시늉을 한다. 이제 차례는 형식적이라 해서 대폭 간소화 되는 추세이자, 신앙에 따라서는 우상숭배라 하여 아예 차례를 치운 집도 많다. 차례에 선악의 가치는 해당되지 않고, 다만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문제는 만남이다. 아무리 사는 것이 힘들어도 설명절과 추석엔 고향집을 찾는 것이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다. 윤치호 선생이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했다고 하더니, 세월이 가도 한국 사람들은 감성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아 보였다. 오죽하면 명절 이동 인구를 민족대이동에 비유했을까. 물론 이성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비이성적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말이었다.

그런데 근년에는 그 대비가 바뀌어 이성적인 사람들이 늘어가는 추세가 분명하다. 귀성열차를 봐도 그렇다. 이번 코레일 추석 열차 승차권 판매기간 내의 예매율은 52.5%로 최종 마감됐다고 했다. 예상처럼 그날로 동이 난 것이 아니다. 14일 호남선 하행 예매율이 97.6%로 1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전체적으로는 절반에 훨씬 못 미친 경우가 많았지 않겠는가. 

이제는 귀성보다는 독자적인 연휴를 보내려고 하는 경우가 늘고, 그것이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서울역의 아이러니를 보자. 귀성객 대비보다는 해외여행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는 서울역 도심공항터미널에 추가 인력을 배치하고 탑승 수속 카운터를 탄력적으로 확대해야 했단다. 첫차를 앞당기고 막차 시간을 늦춰가며. 당연한 서비스로되 조금은 뭔가 이상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떠났을까. 인천공항공사 발 뉴스로는 10일에서 18일까지 하루 평균 출국자와 입국자가 모두 8만명을 넘어, 9일 동안 모두 140만명이 인천공항을 이용했단다. 그렇게 명절에 북적대는 인천공항을 비춰주는 뉴스화면은 우리 같은 구시대 사람들에겐 생경한 것이 사실이다. 제주도를 포함해서 ‘해외’에 나간 적이 없는 사람들도 실은 많다. 내가 사는 주변에서는 상당하다. 이런저런 핑계로 가끔씩 해외에 머물던 나를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진다. 

명절 연휴 해외여행이 부쩍 늘어나는 이유는, 이제는 자녀들에게 너흰 꼭 고향에 와야 한다고, 조상께 성묘는 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부모들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명절 연휴를 보내는 데 모범답이 따로 없는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 우리 세대도 예로부터 하던 습성을 벗어나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도 되는 것이리라. 심심찮게 그런 이웃들도 보인다. 물론 그것이 꼭 해외여행이어야 하는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또 날마다 연휴인 노인들까지 덩달아 명절에 맞춰 나설 필요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어머니 집을 찾고 싶으면 어쩌라고! 하긴, 차례 문화에 속박되어 살아왔던 젊은 시절에 대한 반작용일까도 싶다. 

1960~1970년대 유럽에서의 일화가 생각난다.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강의실이나 학생 식당의 문을 열어준다. 예전에는 여학생은 가볍게 고마워요 하며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여성해방운동의 시절, 여학생은 ‘난 해방되었거든요!’라고 톡 쏘며 먼저 입장하는 우선권을 내려놓고 뿌듯해 한다. 남학생은 고개를 흔들며 먼저 들어간다. 그건 물론 시작이었다. 피상적인 의례를 버리고, 많은 것들을 그 여학생들은 되살려냈다.

‘명절 연휴를 가족과 함께’라는 관습적 슬로건의 효과가 분명 떨어지고 있다. 가족과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가족이라는 원과 나라는 원, 두 원의 관계다. 관계라 하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말이 아니다. 어떻게든 겹치는 부분이 있어야 관계다. 이것을 집합에 대입해서 생각해 본다. 

두 원의 합집합과 교집합은 반비례한다. 교집합이 커지면 합집합은 작아지고, 교집합이 작아지면 합집합은 커진다. 내가 가족에게서 빠져 나올수록 나와 가족을 합한 합집합은 커지고, 내가 가족에 포함될수록 합집합은 작아진다는 말이다. 두 원은 부모와 자식으로도, 남편과 아내로도, 두 연인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너의 관계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가만히 있으면 당연히 외로운 혼자다. 외로운 나는 외로운 너와 함께이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최소로 조금만 엮여 있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로 연결돼 있을 때 우리는 거의 두 사람이다. 우리가 온 몸으로 포개어 있을 때 우리는 거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이면 나는 반인데, 나는 반이고 싶지 않고 온통이고 싶다. 그렇기에 손가락 하나로만 연결되고 싶다는 말이다. 나는 나 하나로 너는 너 하나로, 우리는 거의 둘로. 이럴 때 인간은 이성적이 된다.

문제는 교집합의 질이다. 양보다는 질적으로 우수한 교집합이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이성적 판단을 초월하는 절대적 신뢰, 사랑 같은 어떤 것이 녹아있는 달콤 씁쓸한 알갱이, 아니 두 팔 벌려 아무렇게나 누워도 흔들리거나 터지지 않을 바닥이면 좋겠다. 작아도 안전한 교집합을 지니고 있는 동안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생래적으로 외로운 숙명의 인간이 외롭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꿈 같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꿈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닐 터.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덜 소유한 데서 오는 허전함은 손에 쥘 수 없는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써 달래고도 남을 것이다. 

누구랑도 손가락 하나만 걸고 함께 있는 느낌의 작고 탄탄한 교집합을 쌓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다르게 함께 살기. 완전히 이성적인 사람은 없다. 누구나 마음 속에는 본향 어머니의 집이 있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9. 6. 21:10

       
‘좋은 게 좋은 것’하다 무기력에… ‘노년의 복병’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2. 자기방어
2016년 09월 06일 (화) 10:22:58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퇴임 한참 지난 선생을 선생이라고 가끔 찾아주는 제자들이 눈물 나게 고맙다. 퇴물을 통해 소유를 늘릴 가능성이 전무한데도 말이다. 집에 저녁밥이 끝나야 나서는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약속 시간과 관계없이 늦게 나타나도 반겨주는 것은 더욱 고맙다. 

문제는 의사소통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너무 딸린다. 귀엽게 혹은 무자비하게 줄여서 꼬아서 쓰는 어휘 때문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잡지 못해서다. 젊은이들은 멀리 본다. 이렇게 말하면 다른 늙은이들이 발끈할지 모르겠지만, 나이 들어 현명하리라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감상에 젖어서는 그것을 인간적이라고 착각하기 십상인 것이 늙어가는 증거 중의 하나다. 누군가는 부모를 비극적으로 잃었으므로 그저 짠하다거나, 설마 그것이 자식에게 평생 면죄부라도 된다는양 하면서 스스로 인간적이라고 믿는다. 감상적이면서 또한 편파적이다. 잘 된 사람에게만 너그럽고, 못난 사람에게는 부모 없이 커서 그런다고 버럭 핀잔이다. 

물론 사람은 다소 감상적인 면도 있어야 사람이다. 잣대로 재는 것처럼 사는 건 로봇이지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좋은 것이 좋지…’ 하고 넘어가려는 비겁함이 노년의 복병인지 몰랐었다. 요즘 내가 바로 그런 무기력한 상태이다가 젊은이들을 만나면 화들짝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러고는 기가 죽는다. 좀 더 공부해둘 걸, 공부하는 것을 놓지 말 걸. 새로운 일에 대해서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귀를 쫑긋해야하나 보다.

“봐,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성공을 보면 사드가 필요한가 싶어.”

“사드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요격용이죠. 그게 왜 우리나라에 필요해요? 북한은 만일의 경우 스커드 미사일이나 장사정포로 우릴 공격합니다. 우리에게 사용될 것은 그런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아니라고요.” 

“뭐, 뭐? 무슨 미사일?”

“참, 선생님은. 아무리 군대 안 갔다고 그걸 몰라 물으세요. 300km, 400km짜리 스커드미사일이면 한반도 평정이죠, 맘만 먹는다면. 것도 600발이 넘는다는데. 북한이 만일 기어코 장거리 미사일을 남쪽에다 대고 쏠 거라면 아주 고각으로 발사해야 할 텐데, 사드라는 장비는 그 보다 훨씬 저각으로 요격을 하는 놈이라서 쓸 데가 없어요. 사드 40~50발 정도로 600발을 다 막을 수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가 반발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죠. 사드를 미군부대에 설치해놓고 미군이 중국과 러시아를 감시하는 형국이라서, 중국도 러시아도 자신들을 위해 반대하는 거죠, 북한 편을 드는 게 아니고요.”

“거참.”

“전쟁 중이었죠, 우리 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넘어간 것이.”

“그거야 전쟁 중이었으니. 하나의 적을 염두에 두고서 작전지휘권이 통합될 필요가 있었겠지.”

“바로 그 말이죠. 휴전이 언젠데, 여전히 유엔군사령관이 최고 명령권자라니까요. 전쟁이 끝나고, 끝난 건 아닌가, 암튼 1953년 가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그대로 굳힌 것이 문제였겠죠. 몇몇 대통령들의 노력으로 평시작전통제권이라도 가져온 게 1994년, 우리들 입학한 해였어요. 그게 다예요, 전시작전통제권까지 가져오려는 대통령이 있었는가 하면, 줄다리기 있잖아요, 고싸움, 그래요, 고싸움하다 아랫동네 줄패장이 윗동네 편들어 살짝 줄을 놓아준 꼴이잖아요.” 

“고싸움 말 나오니 한번 보고 싶다. 지금도 보름날 하는 거지?”

“예, 칠석동에요. 줄패장이 그날 책임지는 사람이 삼사백 명이예요. 고를 메는 멜꾼은 마을 장정들이죠. 거기에 꼬리 잡고 나대는 여자들 각각 칠팔십은 매달리죠. 거기에 농악대도 서른은 되고 횃불 든 횃불잡이도 여남은…… 수도 없어요. 또 깃발들 기수들도 댓 명. 그런데 줄패장이 명령한 번 잘 못 내리면 그냥 패하는 거죠.”

“그런데 왜 여기서 고싸움이?”

“줄패장이 작전권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그 말입니다. 2007년 양국 국방장관 회의에서 우리 군이 전시작전권도 회수한다고 합의를 했었지요, 2012년 4월 날짜까지 잡아서. 그러던 것이 2010년 한미정상회담에서는 2015년으로 미루어졌어요. 그나마 2014년 안보협의회에서는 도로 아미타불, 또 한없이 연기되고 만 것이니 분통 안 터져요? 안보환경이라니, 한국군의 군사능력이라니, 북한 핵에 대한 우리의 대응능력이라니…. 말이 좋지요, 어느 세월에? 누가 그것을 판단해서?” 

“전시작전권 회수하겠다는 대통령은 어찌 되었나요? 날짜 받아 연기하자는 대통령은 누구며, 아예 영원히 연기하자고 도로 갖다 바친 대통령은 누군가요?”

젊은이들을 만나면 기가 죽는다. 내 등이 굽기 시작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자꾸 등을 펴주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아는 게 없이 늙었다. 많은 늙은이들이 아는 게 없이 늙어서, 오래 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진짜 자기방어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젊은이들 살기만 더 팍팍하게 생겼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8. 27. 01:46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851

 

‘턱없이 많이 소유한 자’의 빈궁한 철학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⑪ 소유의 시대
2016년 08월 22일 (월) 14:22:57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를 발표한 지 꼭 40년이 지났다. 이미 소유로서의 삶을 걱정해 진단한 이래 눈곱만치도 그 일은 뒤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에도 머피의 법칙이 적용됐다. 소유 관계로서의 삶은 벌써 그 꼭짓점에 달했다. 만일 이 꼭짓점이 반환점이 될 수 없다면 이 지점에서 인류는 살기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 일러스트 돈기성  
 

올 여름 너무 덥다. 습관처럼 에어컨은 손님이 올 때의 장비다. 나는 에어컨을 샀지만 소유하지는 못한 것 같다. 얼마를 무엇무엇을 소유했는가로 가리는 경주에서 아무래도 패배자군에 속한다. 생활철학으로서의 소유개념은 나를 제외한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자신의 잠정적 소유물이라고 여기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류의 역사는 무생물의 소유권을 두고 벌여온 각축장만은 아니었다. 동물은 물론 고등생물이라는 인간도 유사 이래 소유의 대상이었고 거래의 대상이었다. 비단 노예제도를 말함이 아니다. 거래는 금이든 돈이든 화폐가치로서 성사되기 때문에 일단 ‘많이 소유한 자’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기회를 얻는다.

망할 놈의 자비라는 단어는 그래서 늘 비굴함을 먹이로 유지돼 왔다. 조금 더 머리 회전이 잘되는 ‘많이 소유한 자’는 비굴함을 줄이는 방책으로서 사랑이라는 개념도 쓸 줄 알았다. 사랑의 당의정을 씌우면 수탈에 의한 소유도 아름답게 승화된다. 바로 그 자연적 생식의 방법으로서의 성교를 사랑과 연결시켜서 수탈한 것이다. 암수가 교미함으로써 생식 행위에 참여하게 되는 생식 행위는 성스러운 종족보존의 사명이기 때문에 자연은 쾌감을 함께 부여했을 것이다. 누가 불쾌한 종족보존의 사명을 이행하려고 하겠는가. 

문제는 그 쾌감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상이 덧발라져서, 인간은 한편 사랑의 노예가 됐다. 사랑의 이름으로, ‘많이 소유한 자’는 소유를 늘려갔다. 여전히 남성이 더 우세한 ‘많이 소유한 자’ 집단은 상대성인 여성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족쇄를 걸고 소유해왔다. 이 조금만을 보아도, 자본을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은 턱 없이 많은 쾌감들을 누리게 돼있다, 구조가 그렇다. 

이런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많이 소유한 자’ 집단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뿐인 인간은 그 ‘많이 소유한 자’ 집단이 소유한 개와 돼지들과 비슷할 터이다. 강아지도 얼마나 사랑을 받는가, 그 주인을 상처내기 전까지는. 돼지도 얼마나 극진히(?) -이건 좀 아니다, 요즈음 창살 속 사육을 보면- 대접을 받는가. 영양제도 먹이고 더운 날이면 에어컨을 틀어주기도 한다는데. 그러니 전기 누진세를 겁내서 에어컨 엄두를 못 내는 모두는 개와 돼지들만도 못하다.

이런 관점에서 대중을 개와 돼지에 빗댄 어느 고위공직자가 무슨 큰 죄를 지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그런 싸가지가 -내 말이 아니지만- 고위공직자라니 분통이 터져서 열들을 냈었지만, 열기가 식고 보면 열 낼 일이 그뿐이더냐 싶어지기 마련이다. 100억원은커녕 10억원 뇌물을 받은 적도 없고 사석에서 삐딱한 말 좀 했다고 파면인 것이 뭔가 형평이 맞지 않아 보인다. 개와 돼지들을 달래려면 문제의 장본인을 눈앞에서 치워주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굳이 파면이라는 초강수를 두어서 개와 돼지들을 과하게 만족시켜준 데에 다른 의도는 없었을까. 진정으로 개·돼지 사육의 묘를 아는 높으신 판단은 역시 ‘많이 소유한 자’ 집단에서 나왔으리라 추론된다. 

어쨌거나 개와 돼지들은 원래 마땅한 ‘타깃’을 잘 모른다. 그러니 ‘위에서’ 내던져준 먹잇감이 있으면 무작정 달려가 물어뜯고 분풀이를 한다. 오만방자한 말씀 한마디로 가버린 고위공직자는 이 경우 개와 돼지들의 먹잇감이 됐다. 덕택에 개와 돼지들은 보다 중요한 진정한 타깃을 놓치고 개돼지 발언자를 뜯어먹고 열을 올리기만 했을 것이다. 먹잇감이 나돌았을 때는 늘 뭔가 은밀한 다른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고, 나중에야 깨닫는 것이 개와 돼지들의 속성이다. 

그런데 민중은 개·돼지란 그 발언은 몰상식적인 발언이어야 하지만 실은 거의 상식 수준의 말이다. 예를 몇 개만 들어도 안다. 증세 없는 복지가 대표적이다. 이것을 약속하는 발언 가운데도 개·돼지론이 버젓이 들어있다. 세금 올리지 않을게, 그러고도 더 배불리 해줄게! 이런 약속을 믿을 아이큐는 개와 돼지들의 것이 아닌가.

일전에는 어느 당의 당대표 경선에 나선 의원이 1980년 5월의 광주를 어처구니없게도 폄하했다. 광주는 기껏 밥그릇이 서러워서 나섰더란다. 비슷하게라도 그의 말을 옮기면, “인사에, 지역발전에, 많은 것에 소외를 받다 보니 가슴 속에 쌓인 게 많아서 어느 순간 탱크도 무섭지 않게 돼서” 나섰더란다. 아하, 지역구에다 밥그릇 큰 놈을 안겨줬더니 재선이 됐다는 말인가 보다. 그래서 더 큰 권력에 이르면 밥그릇 더 큰 놈을 어디로 가져간다는 말일까 궁금하다.

이렇게 밥그릇 싸움이나 하고 사는 것이 어디 사람 사는 일인가.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에서 개·돼지로 보는 우리들이 그냥 사람 축에라도 들려면 어찌해야 할까.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에게서 그냥 사람을 개·돼지로 보는 생각이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어찌 개·돼지 같은 사람들이 없어질 것인가. 하나를 파면 시켜서 입을 틀어 막아봐도 소용없을 것은 ‘턱 없이 많이 소유한 자’ 집단님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이다. 하긴 우린 영영 개·돼지다. 꼬리 치면 사랑받고 미우면 차이고, 이렇게 사는 건 개·돼지도 한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