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6. 12. 18. 23:22

산의 소리

 

봄날이었다. 온도 차가 요동을 부리는 사이, 따뜻한, 봄날 같은 봄날에 대한 기대가 일렁였다. 대학의 봄은 구성원들 따라 다르게 온다. 새내기의 봄과 고학년의 봄이 다르듯이, 정규와 비정규는 칼로 에듯 다른 모양으로 봄을 맞는다. 학기가 모양새를 잡아가기도 전에 뒤숭숭한 소식들이 쏟아졌다. 주로 이메일을 통해서 밀려오는 걱정들이다. 그것들은 문자로 왔지만,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그것들을 재연하느라 귀가 아렸다.

전국강사투본 입장으론 연구강의교수 제도가 오히려 비정규트랙 강화라고 단언하네요.

그도 재계약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김OO 남OO 선생이 우리의 내일이지 뭐.

15년 강의 잘 하다가 대우교수인데도 잘리고는 15년 투쟁 중이고, 10년 넘게 강의 하면서 우수강의에 몇 차례씩 뽑혀도 어느 날 순간에 해고되고, 것도 이메일로요.

이메일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남OO 선생 이야기가 나오면 난 더욱 기가 죽었다. 같은 프랑스어과에, 또 비슷하게도 여자대학교다. 프랑스에서 13년이나 공부를 했다는 학구파로, 나보다 훨씬 선배이지만 같은 시기에 대학 강단에 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난 상황에 밀려서 스스로 자리를 뺀 경우였고, 그 선배는 우수강의 상을 받으면서 여전히 희망을 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해고당했단다. 나도 계속 모교에 얼쩡거리고 있었더라면 게서도 잘렸을까. 온 몸의 피부가 얼음인지 마그마인지 모를 강렬한 자극으로 움츠러들곤 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실은 겨울로 들어 뭔가 더 심한 내리막 곡선을 느꼈었다. 설 며칠을 맘 편하게 지내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을지. 보퉁이보퉁이 먹을 것을 챙겨 싸주신 어머니, 3월 살 일 걱정하시며 미리 가만히 용돈을 넣어주신 아버지 생각을 떨칠 수 없어 무거운 나날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모처럼 집에 와서 일 없이 쌍용차 굴뚝농성을 걱정하는 딸이 더 걱정되었을 것이지만, 딸은 어머니 아버지의 딸 걱정을 모르지 않으니 누구의 가슴이 더 무거울까.

연인들이 사랑보다 사탕을 나누는 화이트데이가 찾아 왔지만 모두에게는 아니었다. 그날 평택공장 정문에 몇 백 명 사람들이 모여들어 철조망에 자물쇠를 거는 행사를 가졌다는 보도가 쪼그맣게 실렸다. 사탕 같은 빨강 하트 파란 하트, 각양각색의 자물쇠는 더 이상 상징적일 수 없었다. ‘힘내세요’, ‘이긴다’, ‘전원 복직’ 글귀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써서 연대의 의미를 새기는 사람들, ㅎ중공업 사람들, ㅁ송전탑 반대 할매들도 모였다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70미터 높이의 굴뚝에서 외로운 농성을 택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땅을 밟았지만,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는 때였다.

그러다가 ‘말이 씨가 된다고’, 오히려 굴뚝농성 관련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아버지가 꺼내셨던 70년대 ‘똥물 사건’의 먼 후유증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이야. 어떤 도록에 서사와 편집 일감을 소개받아 찾아간 시골 마을에서였다. 마을 가운데 정자에 덩그러니 혼자 앉은 앙상한 몰골의 노인네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외약손 이리 내놔 봐. 시상에, 얼매나 아펐을겨. 나를 어느 순간 ‘사건’의 후유증을 앓다가 죽은 여동생으로 알았는지, 재봉틀 속에 딸려가서 병신 된 손을 내놓으라고 달래던 할머니. 나는 이 순간에도 왼손이 저려오는 것은 느낀다. 졸음 사이로 엄지와 검지 사이로 재봉틀의 바늘이 달려와 꽂힌다. 타이밍, 아아, 약 먹는 것을 잊었구나. 으아악!

지난해, 그렇게 봄이 왔다가 갔다. 여름가을겨울도 왔다가 갔다. 여름방학엔 메르스로 놀란 평택 집에서 아예 귀향을 금하셨다. 이곳은 청정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대회도 치르고 아시아 단위 문화전당도 개점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는 이 도시의 생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원룸에 박힌 날들이 더 늘었다. 강의 없는 겨울에도 세배만 겨우 하고 내려왔다. 서로 대화를 피했다는 것이 맞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날이 다시 왔다. 이번엔 쌍용 굴뚝이 조용했다. 마지막 굴뚝새마저 굴뚝을 내려와서 투항한 지 오래고, 변화는 사전 속에 죽어 널브러진 단어에 불과했다. 총선이라는 칼바람마저 불어댔으니, 봄날 같은 따뜻한 봄날에 대한 기대는 사치였다. 학기가 시작되어 모여든 이들은 뒤숭숭하다 못해 외계어같은 소리들을 쏟아냈다. 뭐가 뭔지 모를 ‘정견’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이메일을 통해서는 언제나처럼 우리 비정규의 단결을 촉구하는 소식들이 밀려왔다. 그것들은 늘 문자로 왔지만,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그 소식들을 곱씹느라 입과 귀가 아팠다.

대학교육협의회 농간 좀 봐요, 오히려 강사법을 폐기해서 교원신분 회복을 없던 일로…….

어떻게 임상강사만 인정하고 일반 강사는 교원지위 건에서 제외시키려 하니.

1년계약과 4대보험 덧붙여 퇴직금까지만 보증해줘도 언감생심…….

평생을 강사로 늙어가기도 어렵게 된…….

그러게, 부산OOO대 대선배님 말이요, 그 정도로 인정받는 학자가 그리 되실 줄이야.

훔볼트 대학 근대서양철학 전공이셨대죠 아마.

나름 유명했지요, ‘성과 사랑’이라거나 ‘차별과 차이’는 학내 최고 인기 과목이었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일반대중 상대로 ‘인간학’, 뭐, ‘행복의 조건’ 그런 강의로 호응 좋았대요.

무슨 소용.

자살이라니, 자살. 아무리 자살률 높은 나라라고 하지만 참.

작년엔가 일 년이면 1만 4천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던 걸. 하루 거의 40명이라고요.

거야, 한국사람들이 유독 우울증 치료를 꺼려서 그렇다고도 하고.

그 말은 안 맞아요. 우울증은 여성이 취약하다는데, 자살은 남자가 여자 두 배 더 넘으니. 사회적 원인이 더 큰 거네 뭐.

인정받는 학자 생활 만년에 빈곤으로 자살이라니.

빈곤, 그래요. 여기 서OO 샘, 그 왜, 논문 54편 대필했다고 유서 남기고 간 사람, 본인이 스트레스성 자살이라고 규정했었다지만, 빈곤 역시…….

그런데도 문제의 지도교수는 잘도 정년퇴임까지 갔다는 걸 보면, 참.

그 교수가 자신이 안 썼다고 실토를 했는데도, 대학조사위에선 그걸 공동연구니 관행이니 그랬다면서요. 그러니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아니, 사회 전체가 그냥 용인하는 겁니다요.

공동연구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것 아닌감? 다분히 창의적인 해석을 전제로 하는 인문학에서는.

아, 우리 이번 주말 무등산에나 가봅시다려!

견디다 못한 누군가가 엉뚱한 소리로 숨통을 텄다.

그랬다. 우리 모두는 살고 죽는 소리 아닌 다른 평이한 소리들을 그리워했다.

 

털고 싶다. 다 털고 싶다. 사람의 소리들을 털고 싶다. 그래, 무등산 팀에 슬쩍 끼어보자. 몸도 맘도 가볍게 원룸의 계단을 내려간다.

1187번 버스를 타면 되거든! 신안사거리에서 광주역 방향으로, 방향 틀리면 안 되고!

나를 인도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소리다. 나를 외지인 취급하는 신 선생의 말투를 떠올리며, 내가 광주사람은 아님을 실감한다. 이 시대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의 방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생각으로는 번지수가 사뭇 틀린 분개한 목소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도 그렇다. 민주의 성지에서 제 당을 버린 인사들을 옹호하다니! 난 물론 정치적 감각은 꽝이니까.

어디서 돌아오는지 모르겠지만, 신안사거리에서 탈 때도 버스엔 거의 빈 좌석이 없었다.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창밖으로 나는 벌써 보이지 않는 산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자연이라고 하면 대지를 흙을 말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산이 자연이다. 높은 산은 그대로 거대한 자연의 품일 것 같은 상상으로 자랐다. 고향 팽성에는 산이라고야 백 미터 남짓 되는 것들뿐, 동네에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리는 부용산은 정말 나지막한 언덕에 불과하다. 평택 이름이 그렇지, 조선 초기 어느 문신이 지은 시에 ‘물은 천천히 흐르고 산은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골골마다 밭갈이를 일삼노라.’ 했다는 곳 아닌가. 그래서인지 산은 내게 늘 꿈의 장소였다.

파리 생활 첫해에 여행이랍시고 국경을 넘은 곳이 다보스였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으면서 동경하던 산, 마의 산이 그곳이었으니까. 베르니나 특급 등 접근성도 좋지만, 누가 스위스에 갈 기회에 다보스를 놓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천 년 묵은 전나무들…… 오래 묵는 사람들은 스키를 즐기기도 하겠지만, 잠시 방문한 여행자들에겐 산 자체가 온 정신을 빼앗아버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게 하는 그곳. 그저 산만을 바라보고 산을 숨 쉬라고 말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폐결핵요양소, 병약한 유럽 시민계층의 집합소인 그곳으로 사촌을 방문한 주인공 또한 병이 들어서…… 병과 죽음이 여전히 정신적일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었다, 그때는. 정신이 육신의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으니까.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다르다. 몸과 맘의 길항작용은 효력을 잃었다. 미국에서는 휘트먼쯤부터는 알았다. ‘영혼은 몸보다 더한 것이 아니고, 몸은 영혼보다 더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신도 그 어떤 것도 누군가의 영혼 보다 더한 것은 아니다.’라고. 몸과 맘은 하나다. 그만큼 확실한 사실이 산은 인간보다 거대하다는 것이다. 오늘 산에 이르면 잠시라도 산의 소리에 취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인간의 소리를 잊으며.

버스는 시내 길을 한 삼십 분 가더니 산길을 한참 돌아 종점 원효사에 도착한다. 버스 실황정보를 볼 생각도 않고 집을 나선 탓에 정류장에서 기다린 시간까지 하면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기분은 시쳇말로 째지게 좋았다. 얼마 만인가. 산의 정상은 아니라 해도 정상 같은 느낌을 받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높은 곳에도 절이 있고, 또 이 엄청난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이라니. 버스도 둘이나 정류소에 쉬고 있었다. 아래 너른 주차장도 차들로 거의 빈 데가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이 산 속으로 흡입되었을지, 새삼 놀랍기도 하고, 그 중의 일원이 되었다는 뿌듯함도 든다.

여기야, 한샘, 빨리 오네! 벤치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드는 쪽에서 나는 소리다.

산에서 나를 반기는 것도 우선 사람의 소리다.

아, 신샘, 더 빨리 왔네! 난 잘 모르니까 미리 온다고 온 건데.

누가 늦었대나!

우리는 저절로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자연에서 만나면야 어중간한 상표 떼고 친구다 싶다. 중요한 건 3월이 가기 전에, 그러니까 더운 기운 나기 전에 무등산을 만나는 일이다. 아니 이미 만났다. 첫 모습은 버스정류장의 형태로서. 벤치 주변에는 깡통이나 휴지들이 뒹굴고 있어 조금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절이 참 높은 곳에 있네.

그래, 원효사, 엄청 유서 깊은 절이야. 6세기엔가 지었대. 지증왕인가 법흥왕 때라고 하니까.

우와, 그런데 웬 지증 법흥이야? 그때 설마 여기가 신라의 땅이었나?

절의 역사란 것이, 아니 역사란 것이 원래 우물쭈물 아닌가.

뭐야, 큰일 날 소리. 역사를 우물쭈물 써도 된다는 말로 들리네. 암튼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절이라면 역사 속의 전화들은 피했겠네.

웬걸. 임진왜란 땐가 정유재란 땐가 다 탔고, 동란 때도 또 탔다던데. 그 후 제대로 지은 것이 지금 모습이래.

이 높은 산 위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전쟁인가. 그래도 짓고 또 짓고…….

어, 유민샘이네.

어, 박샘이랑 같이 오네.

어, 두 사람 썸타?

글쎄, 두고 볼 일. 후훗.

 

절로 가는 길 - 재미있는 이름의 찻집인지 밥집인지가 웅장한 일주문 옆에 있었고, 우리는 절로 가는 길을 따라 절로 갔다. 곧 나타나는 건 작은 성벽처럼 늘어선 축대 위에 한 칸짜리 사모지붕의 범종각이다. 내가 정말 오랜 만에 이런 풍경들을 보는지, 이어지는 한 줄 6개 기둥의 회암루 대청마루에서만 한나절 쉬어가도 좋겠다 싶어졌다. 그래도 숙제처럼 절 마당에서 서있는 보살상과 금강역사상을 돌아, 너무 인공적이다 싶은 감로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샘,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약수 한 쪽박 마시고……. 원효대사의 진영을 모신 개산조당, 말끔한 느낌의 굽은 담장 너머에는 무등선원이라는 수행의 집도 얼핏 건너다보고서야 절을 나왔다. 절의 소리, 불경소리는 내가 고대하는 산의 소리는 아닐 터.

곧 등산객 수를 수집하는 계산기 앞을 통과하고 나니 비로소 산길이 나온다. 나는 공식적인 숫자가 되어 산에 발을 들여놓았고, 산은 나를 하나의 숫자로 기억할 모양이었다. 어딜 가나 겨우 숫자로서 존재한다는 공포심이 잠시 되살아났다. 세계인구, 한국인, 여자, 미혼, 비정규…….

산행이 시작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아스팔트길이다. 하지만 좌우가 숲이니까, 숲의 나무들이 엄청 높아서 산길이 맞나 보다. 산길은 놀랍게도 나뭇가지 끝에 어른거리는 연보랏빛으로 사람을 맞는다. 상식적으로 연둣빛을 기대하던 내 눈에 불그스레한 보랏빛은 의아했다.

어, 웬 보랏빛이네. 분홍빛. 이게 무슨 나무들이야, 꽃부터 피는 나문가?

에이, 한샘 꽝이네. 이파리들이 움트는 자리지. 이파리를 틔워내는 껍질들, 그게 나중에 갈색으로 붙어있을 받침들이지.

난 또.

유민샘의 직답에 시원하면서도 머쓱해졌다.

보랏빛이든 연둣빛이든 빛의 변화, 그게 봄 색깔 아냐? 그리 생각하려다가 문득, 봄빛은 나뭇가지의 목을 분지른다, 라던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들이었다, 그 시인의 시는. 시란 본디 어려운 글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까. 나뭇가지들이 봄빛에 닿아서 분질러지는가, 정말로. 버거운 양의 눈도 버텨내고 있다가 하필이면 봄빛에 닿아서 분질러질까. 툭 끊어져 죽어버리지 않고 되살아나려는 이 늙은 가지들에 피어나는 여린 숨이 추악하다고? 가지들을 올려다보는 내 목이 먼저 분질러질 참이다.

뭐해, 한샘, 벌써 지치는 거야?

저만치 앞서던 신 선생이 뒤를 돌아 소리친다.

으응.

으응, 뭐?

간다고!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린가. 아주머니 둘을 앞질렀더니 계속 소리가 따라온다.

딸년이 아니라 빨대지, 완전 빨대.

빨대라니. 댑다 뭔 말이래?

정금이 말이여, 딸년이 아조 대놓고 지가 엄마 빨대라 그란다네. 젙에서 봐도 그래. 즈그 엄마한테 빨대질 맞더라고. 직장조까 댕긴다고 저 치장허고 나갈라, 꼬맹이덜 학교다 어린이집이다 보낼라, 신랑 밥도 못해준다고 아예 꼭두새벽부터 엄말 불러댄다더라고.

요새 아덜이 죄 그라제 뭐. 그라도 시집이라도 갔응게 낫제. 다 큰 아덜 틀어 안고 사는 집 어디 한 둘이당가.

맞어, 아예 처녀총각 귀신나게 생겨서는, 돈 벌로 안 나가는 아덜도 쌔았다고 하데 뭐. 참, 명숙이 아들은 미국서 졸업장 땄어도 도로 왔다잖은가. 거그도 취직이 안 된갑제.

미국이라고 대졸이라고 다 취업이 되겄어. 세상이 취업 전쟁턴가 벼. 인구가 많어 그러겄제. 묵을 입은 많고 일자린 없고. 자동환가 뭔가 기계가 사람보다 낫으니까 사람 들어갈 자리가 줄제. 알파곤가 멋인가 좀 보소. 한판은 어쩌고 이겼다 해도……

사람 암 것도 아녀 참. 기계가 사람 일 다 해중께 편한 세상 왔다고 했는디, 그럼 인자 더 좋은 세상은 없겄네. 참, 세탁기 첨 나왔을 때 얼마나 좋았는가잉. 나넌 유난시레 손등이 까지고 그랬는디…….

좋은 일도 다 도가 있는 거여. 달도 차면 기웅께.

두 사람의 끈질긴 넋두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하필 보속이 비슷한지 소리는 계속 뒤를 따라온다.

그란디 희자 있잖여, 에지간히 희희낙락거리더만은.

먼 말?

아들 고시 합격했을 때도 그랬제만 연수원 졸업허기도 전에 재벌 집 사우 돼 갔잖어. 금방 또 판사로 발령 났고. 그땐 쪼까 뻐겼제. 근디 당아도 즈그 사는 집에 어메아밸 오락허덜 않은다잖어. 잘나도 병 아녀.

잘나믄 내 아덜 아녀, 나라 것이고 장모 것이제.

그나 무장 부모자석 간에도 잇속인지, 멋이나 써먹해지니께…….

못 살겠다. 일정하게 뒤따라오는 푸념들은 머리를 돌게 했다. 더러 옳은 소리도, 그 나름대로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 귀에는 다만 소음이었다. 목청들은 또 왜 그리 큰지. 툭 터진 공간에 나오니까 소리가 흩어지리라는 본능이 소리를 더 크게 내지르게 하는지도 몰랐다.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예사롭지 않게 주시했지만 소용없었다. 좀 시끄럽소, 라는 내 눈짓에 영향 받을 사람들도 정황도 아니었다. 순간 그들에게는 세상에 친한 둘만 있었다. 아무래도 미리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아서 벤치로 피했다. 이만 허면, 머시 어짜고…… 다행히 그런대로 소리가 앞서며 먼저 길을 오른다.

저들은 얼핏 보아도 울 어머니 또래다. 어머니도 친구랑 산 나들이라도 하실까. 가만, 팽성엔 산다운 산이 없지. 안성의 고성산도 300미터도 안 된다. 산책이라도 가실까. 어디로 가실까. 평택대학교 캠퍼스로 벚꽃 구경이라도 가실까. 나들이 길에 친구하고 우리들 이야기를 하실까. 큰애는 프랑스서 박사 해 와서도 교수되긴 어렵나 봐, 시집도 안가고 큰일이다. 막내는 미국 보냈더니 - 옥실은 일찍 미국에 정착한 큰아버지의 양녀가 되었다 - 미국 사람하고 결혼해서 미국서 살아버리네. 조금 덜 쌩쌩한 둘째 하나가 결혼해 애들 낳고 가까이 살 뿐인데……. 아들이 없어 한탄이라도 하실까.

 

아서라, 일 떠나 집 떠나 산에 왔으니 집 생각일랑 집에 두자. 정말 산의 소리가 그리워 숲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새소리 벌레소리 하나 없다. 당연히 바람소리도 없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발성난청으로 고생하셨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는 오히려 파도소리 비슷한 소리들이 들리셨다지. 그러니 이런 무음은 난청은 아냐. 이 조용함은…….

눈을 슬며시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산의 공기라도 느끼고자 했다. 공기 속에 황사 섞이듯 소리 가루 같은 것이 섞이지 않을까? 순간 엄청난 노래방이 통째로 다가오는 착각에 빠졌다. 쿵짝쿵짝 반주에 맞춰 대형 마이크를 통해 울려나오는 소음이었다. 그것이 하필 바로 코앞에서 울려댄다. 아뿔싸.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일어서니, 노란 통실한 배낭과 노란 통실한 사람이 옆 벤치에 한데 멎어있고, 소음은 거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친 놈.

깜짝 놀랐다. 내 입술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와 버렸다. 소리가 작았는지, 상대가 천둥 같은 기계음 소리에 휩싸여 못 들었는지, 칼부림은 나지 않았다.

못 말리는 인간이네.

내가 어처구니없어서 벤치에서 물러서려는 사이에 신 선생이 다가와 속삭인다.

그러게, 앞뒤가 안 맞는 인간이야. 자연사랑 산악회 노란 리본을 펄럭이지 말든지 공해물질을 유발하지 말든지.

저렇게 노래 크게 들으려면 산엘 왜 와.

우리가 된통 큰소리로 두런거려도 노래방 인간은 못 듣는 모양새였다.

와 여 섰노. 퍼뜩 가자.

다른 노란 리본이 노란 노래방을 채근하며 지나간다.

가만있어 보래이.

신 선생이 거기다 비꼬아 뭐라 큰 소리를 내질러보아야 어림없다. 그저 서둘러 기계의 소음에서 도망칠밖에. 휴우, 숨을 몰아쉬며 빨리 자리에서 멀어져야 했다. 이럴 땐 다행으로 오르막인데도 경사가 거의 없다. 오른쪽으로 한 번 굽는 삼거리에 쉼터가 나온다. 늦재라더니 만치정이라 쓰여 있다. 원효가 팔경으로 헤아렸다는 이곳 나무 벤치에 앉아 만치초적을 상상해본다. 해질 무렵 나무꾼들이 부는 풀피리 소리, 문득 그 소리가 그리워진다. 무엇이든 발전하는데, 있었던 것은 왜 사라지나. 발전이란 확장이 아니고 대체련가. 풀피리 소리는커녕 무리지어 떠들어대는 사람들 소리에 떠밀려 일어선다.

가자고, 더 쉴 것 없어. 계속 이 높이야.

산길이 아니네, 정말, 여기 무등산 이름은 이렇게 평평하고 가파르지 않는 산이란 뜻이라지?

아, 그건 아니고. 광주의 원래의 이름 무진과 무등이 같은 어원이라는 설.

어떻게?

‘무진(武珍)’이 원래 한자어가 아니라 차자표기니까. 그 ‘진’자의 한자 새김이 ‘들’에 가깝고. 그래, 실은 ‘무들’이나 ‘물들’에 가까운 소리라고. 물이 많은 들판. 무등도 무들에 가깝잖아, 그래 물이 많은 들판에 있는 산, 뭐 그런 것.

물이 많은 들판이면, 예부터 농사는 잘 되었겠네.

그렇지. 마한고분군이 나주에서 발견된 걸로 보아서는 저 아래 나주평야만은 못했겠지만. 하긴 그보다는 무등산 이름이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걸랑.

놀리지 마. 무등산은 이름 그대로 계급이 없음을 상징한다고, 광주사람 아닌 나도 아는데. 광주 오기 전부터도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그런 시 정도는 아는데 왜.

맞아, 슬픈 현대사와 맞물려 보통은 계급이 없다는 식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정치구호쯤으로 알려져 있지. 헌데 원래는, 그니까 예전에는 오히려 등급이 없는 최선, 절대 선의 의미였다고 하거든. 불교가 전래된 담에, 부처란 세상 모든 중생과 견줄 수 없이 우뚝하다는 존칭으로 무등산이라 불렀다는 이론이야. 고려 때는 여기 300개가 넘는 암자가 있었을 만큼 속세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고 하거든.

어, 그런가.

가자고.

거기서 바람재까지는 완전한 평지였다. 제대로 갖춰 입은 등산복이며 장비들이 무안하리만치 그냥 평범한 길이다. 왼쪽 언덕으로 건물들 대신 산철쭉이 다를 뿐.

갑자기 새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산의 소리다. 참새보다는 꼬리도 길고 큰 새, 설마 날씨로 보아 굴뚝새는 아닌, 별로 예쁘지는 않은 새 한 마리가 앞장서듯 날아간다. 어디선가 보았던 새였나? 바람재 470미터라 쓰인 표석을 안고 인증사진 한 장. 원효사가 해발 450미터였으니까 높이로는 겨우 20미터를 오른 것이다. 새는 건너편 가지에 앉아 있다. 더는 울지 않는다.

새 소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재생이 안 된다. 기호화되지 않아서 기억도 재생도 안 되는가? 뭐야, 그럼 그리운 산의 소리라는 것을 결국은 담아가지 못하는가? 기호를 모르니 표기할 수 없고, 표기할 수 없으니 저장이 될 리 없다. 언어라는 것, 인간의 언어로 표기하지 못하는 것들은 저장되지 않는다니. 기호화 되지 않은 소리는 소리에 불과하다. 아름답게 느꼈더라도 그저 아름다운 소리에 불과하다. 정체를 기록할 수 없다. 정체를 모른다. 정체가 없다.

 

여기선 밥을 못 먹어.

밥 소리가 유의미하게 들린다. 밥이라는 소리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워낙 드나들어.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한적한 곳이 있는데. 저쪽 중머리재 쪽으로.

너무 멀지!

아니 게까진 아니고, 조금 가면 토끼등, 게서 조금만 가면. 살짝 가파르긴 해도 조금만 가면 된다고.

아까 철쭉쉼터 덕산정으로 돌아가지.

인생에 되돌이는 없어. 험지라도 그냥 앞으로 내닫는 거지.

산에 올라서도 철학하시네, 휴우.

설왕설래 중에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나는 큰 숨만 내쉴밖에. 결국 여전히 평평한 길을 따라 소리정에 이른다. 정자마다 이름이 있지만 소리정이라니. 흩어지는 일행을 불러 모으기엔 참 좋겠다 싶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고 있어서 나쁠 것도 없고. 그런데 웬 소릴까. 여기에선 정말 산의 소리를 들을까. 그건 아니었다. 저 아래 쪽에서 뭉클뭉클 사람들이 쑥쑥 올라왔다.

아, 그쪽이 증심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라서 그래. 그냥 이리로 와!

갑자기 가파른 울퉁불퉁 길이 나타난다. 잠시 헉헉대는데 백운암처라는 작은 정자가 나온다. 크기는 작아도 이곳 오기가 힘들어서인지 빈 나무 탁자들이 남아있다. 시간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편이다.

그런데 아까 저 아래는 왜 소리정? 거기만 소리가 특별할까? 다를까?

거참, 우선 밥 먹읍시다요. 어, 배고파.

이것저것 어울릴 리 없이 아무렇게나 꺼내 놓은 밥들은 보기보다 훨씬 꿀맛이었다. 그러다가…….

밥맛 좋으요. 다 이리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트레스성 자살이란 유언을 남긴다냐.

그러게. 고등교육법에서는 교원이 아니고, 근로기준법에도 지위가 없으니, 우리는 유령이란 말이지.

일용직 노동자지 뭐.

일용직도 사람이다 그 말요.

우리는 밥만 먹으면 그 문자들 그 소리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재삼 확인해야 했다. 물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외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냉철히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 뭔가 유의미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 아님 누구라도 먼저 힘이 약해지면 그만 움켜쥔 손을 스르르 놓고 말 것이다. 54편의 논문을 쓸 수 있기도 전에 손을 놓아버릴 것이다. 책상에 쌓아놓고 온 벙어리 문자들이 천 톤의 무게로 짓눌러왔다. 산 위의 나를 아래로아래로 끌어당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내려오는 길로 접어들었다. 해발 500미터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반도 못 올라왔지만, 오르는 일에 매력이 있을 리 없다. 생이 내리막인데. 이리 젊어서 벌써 내리막인데.

모든 내리막처럼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박 선생은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더니 언제부터 흔적도 없다. 일행을 따르자니 나무를 올려볼 틈이 없다. 상수리나무들은 겨울이 되어도 바싹 마른 잎들이 더러 매달려 있다더라, 봄엔 어떨까. 눈에 보이는 건 땅에 떨어져 깔려있는 침엽수들이다. 앞서 내려가던 사람들이 낮은 바위 아무 데나 앉아 기다리고 있다. 할 말들이 없어져서 입을 꽉 다물고들 앉아있다. 곁에 주저앉으면서야 침엽수들이 떨어져온 가지들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죽은 가지들은 부러져 떨어져버려야 추악하지 않다니. 낙오자가 되었으니 툭 부러져 떨어져버려라? 추하게 생에 매달리지 말고? 모르겠다. 식물학적으로는 그 시인의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식물학적으로 ‘죽어 있는 가지들은’ 새순을 내지 못하겠지.

서른도 안 되어 죽어버릴 거면서 하필 「노인들」을 읊은 그 젊은 시인은 죽은 가지 툭툭 부러지지는 봄 소리를 들었구나. 그래도 죽어 보이는 그런 앙상한 가지에서 연초록 새순들이 나오지 않은가. 나무들의 생존 전략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말라 비틀어져도, 더 말라 거의 죽어 있어 보여도, 마지막 숨을 놓지 않았다가 새 순을 내는 너희들. 한껏 소리를 질렀더냐?

그래, 나무의 생존전략은 그런 것이다. 어떤 동물들 보다 오랜 억겁의 진화를 거치는 동안 생성된 식물의 생존 방식이다. 생존 방식이란 그것이 어떻다 해도 추악할 리 없다. 생명은 생명으로 아름다울 권리를 가져 마땅하다.

문제는 이 우월한 지구상에서 살 수 없음을 절감하는 저열한 사람들이다. 우리들 또한 벌써 아름다움을 잃었다. 다른 사람의 넋두리는커녕 시마저 못 읽어낸다. 코앞의 생존에 매달려 다른 사람에 귀 기울일 틈이 없다. 겨우 끼리끼리 말한다, 우리들끼리, 비정규끼리. 급하면 서로도 외면한다. 모교에서의 뼈아픈 기억을 되새긴다. 은사님이 정년 하시면 당연히 내 차례려니 믿어왔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된 건 순간이었다. 추월에는 예고가 없었다. 결과는 지방시 신세다, 지방대학시간강사.

그래, 출세가 대수냐. 내가 공부한 대로라면 루소는 그렇게 말했었다. 작가란 출세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생계를 위해 사고하는 사람이 고상한 생각을 하기는 힘든 법이라고. 나는 그런 위대한 작가와는 다른 차원을 살고 있다. 그저 공부를 더 하면서 작은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생필품이 필요한 왜소한 존재일 뿐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잊었나 싶으면 떠오르는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사르트르 계열, 전후독일의 하인리히 뵐이었다. ‘어릿광대’ 비슷한 제목의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밖’은 실존철학적 의미로, 지금처럼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전쟁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잠깐, 웬 거장들 타령이냐. 전설이 된 그들은 이곳 산이 아니라 책상에 붙어서 날 노려보고 있음만으로 족하다. 그들은 나의, 내 생활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혼자임을 애석해하지 않으니 그들의 조언이 불필요하다. 혼자임은 생물체의 근본 속성이다. 타인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다. 나의 정서를 위해서, 오늘은 오직 산의 소리가 간절히 필요했을 뿐이다. 여기 어딘가에 분명 산의 소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표기할 수 있건 말건 소리는 있어야 한다. 있어 마땅하다. 생각을 접고 감각을 집중해서, 산 냄새를 느끼고 산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산에 침입한 인간들 아닌, 어떤 본래적 산의 존재가 토로해내는 소리를. 하지만 걱정의 소리들을 가득 품고 산에 들면서 산에서 온전히 산의 소리만을 탐한다면 그것은 욕심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들어섬으로 인해 이미 손상된 산은 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니, 산은 소리를 내고 있지만, 소리를 기호화해서 듣고 기억하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죽은 나뭇가지 분질러지는 소리, 마른 가지 껍질을 뚫고 움을 트는 소리를……. 아니, 나는 다만 내 울음소리만을 듣느라, 산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산은 산 높이가 아니라 별자리까지 가 닿을 머나먼 거리로 내게서 떨어져 있다.

밥 먹다 말고 집단 우울증에 빠져서 서둘러 내려가는 이 길에서 싱겁게 산 나들이가 저무는 모양이다. 그저 고통스러운 문자들의 아우성을 잠시 피했다는 안도감은 원룸의 방문을 여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농아들의 전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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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단편 「산의 소리」, 『햇빛에 취하다』, 시누대, 예원, 20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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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2. 18. 23:09
       

그들은 왜 檀紀를 못쓰게 했을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8. 역사 배우기
2016년 12월 12일 (월) 14:44:1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대통령 탄핵소추가 국민의 불같은 염원 속에서 들끓고 있다. 그렇다고 탄핵 정국에 파묻혀 어물쩍 지나가서는 아니 될 정말 중요한 것이 역사 교과서 문제다. 문자 그대로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는 중대 사안이다. 교육부가 “균형 있는 역사관과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수 있는 교과서”라고 현장본을 제시했지만 오류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올바르다’는 말은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는 뜻인데, 이치나 규범은 누가 정하고 옳고 그름을 누가 정하는가. 바로 그런 이유로 ‘역사 국정교과서’은 그 자체로서 위험을 내포한다. 특정 시대의 특정 정권이 ‘옳다’고 정하는 것이 영원 무궁히 옳을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몸소 체험했으니 전문가가 왜 필요하냐는 집필진의 인터뷰를 보고는 많이 놀랐다. 체험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역사서가 아니라 장님 코끼리 관람기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1948.8.15)”는 문장은 엄청난 오류와 저의를 지녔다. 역사 기술에서 오류는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지만, 저의는 더욱 문제다. 역사 기술의 객관적인 방법은 기록물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관보』가 현존한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이 실려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당시에 이 문구의 뜻은 분명했다. 대한민국은 애초에 ‘기미 3·1운동으로 건립’됐고, 광복 후에는 다만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 

그 관보의 발행 일자에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는 연호가 사용됐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기미년(서기로 말해서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확인이었다. 엄연한 사실, 팩트다. 저의로 보이는 부분은 바로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다. 제헌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재건’을 어물쩍하게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려는 목적은 다분히 수상하다. 


‘광복 후 건국’이라는 논리는 기미년 임시정부 구성 이래의 대한민국 30년 기간을 부정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세력의 주장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30년 동안을 부인함으로써, 국가가 없었으므로 우리 민족이 일본에 붙어살았건 만주국에 붙어살았건 그다지 죽을죄가 아니라는 해석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주군에 복무했건 일본군에 복무했건 나라가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는 해석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희생된 넋들은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저항에서 그리된 것으로 격하될 위험에 처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도 해방 후 이념 투쟁에서 적대시된 인사들은 애국은커녕 좌익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것이고, 만주국이나 일본국에 복무를 했어도 여차여차 노선을 바꾸어 몸을 세탁하고 나면 애국적인 인사가 될 수도 있다는 횡재 아니겠는가. 아니, 대박인가?

 

역사 기술의 규범은 감계(鑑戒)다.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경계’만이 실록과 사초를 지켜낸 정신이다. 그러므로 ‘뼈아픈 진실(home truth)’을 마주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를 미화하려는 효도가 결코 효도가 아닌 것이, 권력자의 자화자찬은 후안무치일 뿐이다. 뼈아픈 진실을 외면하려다가 닥친 오늘날의 현실을 직시하시라.

저간의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의심한다. 기업인단은 국정교과서 편찬에 또 얼마를 선의로(?) 출연하고 ‘역사돋보기’같은 그 좋은 코너를 할당 받았을꼬! 가차 없는 무한경쟁으로 엄청난 부자가 된 이야기가 무에 그리 교육적일까. 상대적으로 너무 많은 축재에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너무 못 가진 사람들의 몫이 치우쳐 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부들이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이 사는 동네에 더 많은 산소농도를 보유하기위해서 가난한 마을의 공기마저 빼앗아갈 기술을 개발할지도 몰라, 그런 불안감마저 들 정도로 그들은 두렵고 막강한 존재다.

또 하나 엄연한 사실이 있다. 광복 후 재건된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우리는 단군기원으로 역사를 배웠다. 재건된 대한민국은 그 처음에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지만, 곧바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라고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은 『삼국유사』에 기록되기를 환웅이 웅녀와 결혼해 낳은 아들로서 단군왕검이라고 불렸다고 배웠다. 곰이 변한 선조할머니라는 이야기는 약간 꺼림칙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자연친화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곰일 수도 있었을 우리들, 고기를 먹기 싫으니 차라리 토끼였으면 좋겠다고 깔깔대던 시절이었다.

 

훈민정음 3779, 임진왜란 3925, 을사늑약 4238, 경술국치 4243, 기미 독립선언 4252…. 네 자리 숫자 외우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4000년 전 사람들이 아득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그렇게 단기를 살다가 4295년이 되려는 아침에는 갑자기 1962년 1월을 맞게 됐다. 우리는 난데없이 모든 연도에서 2333을 빼서 외워야 했다. 훈민정음 3779-2333=1446, 임진왜란 3925-2333=1592, 을사늑약 4238-2333=1905, 경술국치 4243-2333=1910, 기미독립선언 4252-2333=1919…. 역사 공부는 뭔가 엉켰고 힘들어졌다.

 

누가 단기를 없앴는가. 쿠데타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군부세력은 집권하자 괜스레 공식연호부터 변경했다. 단기연호를 폐지하는 것이 국제적으로 문명국가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우리나라의 인상을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니, 단기를 사용하면 야만국이라는 논리는 무슨 근거였을까. 우리 역사의 상징인 단기를 버리고 서양을 따라가는 문명국가, 바로 그러한 사관이 사대주의다. 단기가 없고서는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가 아니다. 역사 배우기를 단기로 시작했던 늙은이의 단순한 향수나 푸념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52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6. 12. 18. 23:06
不義·不正 휩쓸려간 교수들… 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7. 인식과 행동 사이
2016년 12월 01일 (목) 10:44:4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옛날에, 청소년기에, 가슴을 떨게 했던 한 문장이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생각, 즉 사유의 주체인 내가 존재한다는 개념은 순수존재로서의 순수의식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은 존재하지만, 그 문장이 완전하지 않음은 한참 뒤에야 터득하게 됐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다는 의미로서 의식에 가깝다는 것.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 오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인식에 가까운 이 의식은 의식할 무엇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 즉 대상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육신이 우리가 섭취하는 것의 총체이듯이,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의 집합이다. 그러다보니 먹고 싶은 것을 좇아 먹이를 구하듯이, 인식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서 인식하려는 본능이 발동하게 된다.

자유의 개념에 걸면, 우리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무한 자유에 내맡겨진 존재다.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라는 카테고리를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 심지어 생물학적인 질서를 거스르는 동성애자가 되는 일도 가능하다. 이슬람이 될 수도 이슬람을 저주하는 십자군이 될 수도, 아예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다. 되어도 좋다. 다만 무엇이 되건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안과 더불어 그 책임도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책임을 뺀 그 극단에 가면 곡학아세의 상태가 되는가 보다. 바른 길에서 벗어난 학문,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는 학자가 많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한국의 수치스런 민낯을 만들어낸 장본인들 중에는 학자 출신이 적지 않다. 폴리패서라고 불리는 모두가 그러할 리는 없지만, 상당수의 빼어난 폴리패서들이 정치권력 앞에서 곡학아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18세기 사전에서 설명하는 '정치'란?

정치의 속성이 학자를 삼켰나? 궁금하면 사전을 찾는 버릇대로 사전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집 서재에 최초의 영어사전이라는 로버트 코드리의 『알파벳 순서로 된 단어일람표』(1604년)는 아니지만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1755년) 사본이 있다. 언젠가 ‘귀리’ 항목에서 너무도 쓰라진 진실을 발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말에게 먹이는 곡물, 스코틀랜드에서는 사람의 생계를 담당한다.’ 그래, 18세기에는 그랬구나. 어휘를 정리해주는 사전이야말로 시대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느꼈다. 그래서 ‘정치’란 옛날에는 어떤 뜻이었을까 찾아보기로 했다.

정치적이라는 단어 ‘political, politic’의 뜻에 ‘artful, cunning’이라는 의미가 있고 보면, 예로부터 정치란 교묘하고 교활한 어떤 것을 포함하는가 싶다. 그래서 고결하게 학문에 정진하던 학자들도 정치판에 가면 교묘하고 교활한 면모를 갖게 되나 보다. 그러니까 고결성을 지켜내는 첩경은 아예 정치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학자로서 정치적 야망이 있다면 자신의 고결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촌철의 수행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권의 과잉 호의에는 검은 그림자가 따라오게 돼 있다. 불의와 부정의 블랙홀로 휩쓸려 들어간 일부 교수들의 행태를 신자유주의의 덫이라고 이데올로기 탓만 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타당도와 선악도를 생각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이 바로 학자요 교수의 책무이거늘. 

이것은 그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지는 작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에야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칠레의 밤』을 읽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상이라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연설에서 “암흑 속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으로 뛰어내릴 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글”만이 그 품격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첫 페이지에서 말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다.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공부했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생각났다. 볼라뇨에 비하면 반세기 전인에도 똑같은 말을 했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보다도 살인다도 더 악랄한 수법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강도나 살인에는 명백한 법조항이 있고, 선고받은 죄인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열어준다. 결국 산수 계산문제처럼 딱 잘라서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그런대로 얼마만큼은 죄의 정산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그의 언어가 말하는 모든 전체를 팔아넘기는 것이며, 불문율 앞에 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작가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교황의 무오류성을 예외로 하면, 모든 인간은 많건 적건 오류 덩어리다. 오류란 사유의 혼란이나 감정적인 동기 때문에, 또는 부주의나 태만의 결과로서 발생한다. 선의의 당의정을 입힌 악행은 악행일 뿐이다. 자신의 속성을 배반하는 것은 거짓이다. 어미가 어미임을, 의사가 의사임을 배반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정치가, 학자, 작가, 예술가 등이 자신을 배반하는 일은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파장이 크다. 소위 폴리패서들이 학자의 본성을 포기하는 순간 곧 ‘교묘하고 교활한’ 정치가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검은 세상의 블랙리스트

그렇게 학자들이 정치판에 묶여있는 동안 후안무치의 일들이 온 나라를 삼켰다. 문학예술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과 함께 믿거나말거나 명단마저 돌아다닌다.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작가들을 존중한다. 세상이 검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들어가야 하얀 사람이라는 증명이 된다. 블랙리스트에도 못 들어간 나 같은 회색분자가 가장 비열할지도 모른다. 문학이 세상의 고결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위험한 직업이라는’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식과 행동 사이 불안한 공간을 뚫고 나가는 의지를 갈구할 일이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생각한다.’ 비판은 누구나 한다. 인식이 아니라 행동에 이르렀을 때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다. 벌써 옛날에 괴테의 파우스트는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 라고 외쳤지 않은가.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30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