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7. 3. 7. 15:04

 

“봄은 멀고 다리 밑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3. 다리 밑
2017년 03월 06일 (월) 14:49:0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밤새 또 다리 밑에서 얼어죽은 사람이 있었구나, 쯧쯧.”

아침 일찍 신문을 보신 아버지가 아침 밥상에서 한마디 하셨다. 어쩌다가 장독대에 쌓인 하얀 눈 틈새로 얼어죽은 까치를 발견해서 놀란 것과는 또 다른 무서운 전율이 일었다. 밥알은 모래알이 되었다. 밥알을 씹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만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다리 밑’이 참으로 무서운 화두였다. 고집이 센 아이에겐 으레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애라서 그런다고 겁박하거나, 다리 밑에 모여 사는 집 없는 거지들은 아이들이라도 잡아먹는다고 위협을 했다. 그래도 가장 무서운 말은 다리 밑에서 누군가 얼어죽었다는 신문기사였다.

어린 나름대로 철학을 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인간의 입을 창조했을까. 왜 날마다 똑같은 일, 먹어야 하는 일을 시켰을까. 입 때문에 사람이 싸우고 죽고 그럴 것을 몰랐단 말인가. 공짜인 햇빛과 물만 먹고 살아가는 식물들은 좋겠다. 동물은 공짜인 산소 말고도 먹이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동물인 인간에게도 먹이가 필수적이다.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 식물을 먹이로 하는 것으로 모자라 움직이는 동물까지를 먹이로 삼는다. 너무 어려운 일, 불공평하다. 나는 식물이고 싶다. 아니 풀만 먹는 토끼이고 싶다….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고귀하다는 의미를 알 수 없던 어린 시절이었다.

 

내 땅에 심은 곡식으로 내 식구가 연명하던 옛날에는 한반도만 하더라도 같은 땅에 훨씬 적은 인구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농사법을 몰랐던 탓이라 했다. 분업의 세상이 와서 농경은 농경대로 축산은 축산대로 전문 경영이 가능하다보니, 이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게 되었다. 아니, 언제부턴가는 건강상의 이유로 식욕보다 섭취를 줄이려는 어긋난 세상이 됐다. 뭔가 어긋났다는 말은, 여전히 넉넉지 못한 가계로 아사 직전에 이르는 경우를 전하는 충격적 뉴스들 때문이다. 못다 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의 요절 소식을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비슷한 참상이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돈이 돈을 낳아 무한축적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졌거나 이 험난한 인생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다. 직업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판검사나 변호사는 올곧은 심성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도 편견이고, 누군가를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단언하는 판검사나 변호사가 있어서도 아니 된다. 그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재벌 3세로 태어났다면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지칭될 확률이 없었을 것 아닌가. 경찰도 자신이 단속을 받아 불리하면 신분을 속이고, 성직자나 교직자들도 파렴치한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동전까지 털어서 소방서에 기부하는 풀빵장사를 보라. 소유와 기부도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나로서 겨우 조금 더 아는 이야기를 하자면, 하인리히 뵐의 전후 작품 중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로 번역된 소설이 있다. 루르 탄광지대의 부유한 갈탄재벌의 아들이 전쟁 중에 돈과 권력의 결탁을 보면서 자라난다. 통장에 쓰인 어마어마한 숫자와는 상관없이 인색하게도 음식물을 아끼는 어머니, 심지어 바깥 애인에게조차 돈을 아끼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정상적인 교육의 기회를 버리고 어릿광대가 된다. ‘추상적인 돈’을 버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인과 군상』에서도 독특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 말기에 연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생필품(때로는 고급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 유산으로 받은 집을 저당 잡혀서 살아가는 그녀에겐 인플레 내구성을 지닌 잠정적 자산을 지불하고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다.

 

자산은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과는 무관하므로 무의미한 추상적 돈일뿐이다. 돈을 생계유지와 무관하게 무한정으로 축적하는 일, 더구나 그것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돈이 돈을 낳는 식의, 놀고먹으면서 부를 축적하는 일이라면 추악함을 넘어서 죄가 되는 일이리라.

놀고먹는 재벌이 있을까만은, 사람들은 재벌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요술과 마술을 행사하는 우수한 두뇌들이 고용되어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양분화를 고착시킨다고 믿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언어에도 없는 한국적 의미의 재벌은 영어로는 겨우 사업집성체(business conglomerate)쯤으로 소개된다.

신화적인 추진력과 성실함으로 부를 일궈낸 일세대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면서도, 가족이나 친인척 중심으로 출자한 지주회사를 핵심으로 여러 자회사들을 지배하는 현재의 재벌구조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적은 지분을 가지고서도 경영권을 독단으로 행사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재벌가의 의지가 최근 국정농단의 사태에서도 무거운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다리 밑 지키는 딱한 소수는 여전히 존재한다

 

왜들 다 쓰고 죽지도 못할 엄청난 양의 돈을 원할까. ‘자손대대로 물려줄 자산이니 잘 관리하라’고 했다는 자산이 어디 한 두 군데인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서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고, 둘 사이 격차가 클수록 부의 불평등 구조가 증폭된다.’는 피케티의 주장에 자본가들은 귀를 기우려야 할 때다. 죄까지는 아닐지라도 돈만을 추구하는 일은 너무 허망한 일이다. ‘일생을 돈 벌기에 매달리는 것은 야망의 빈곤이요, 자신에게 너무 시시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오바마의 말이 신선하다. 우리는 돈 자체보다는 조금 더 나은 존재이니까.

사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그 밥을 벌기 위해서 많은 좋고 나쁜 일들을 해야 하는 숙명이지만, 그 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칫하면 낙오자가 될 상황이니까. 몰락은 의외로 쉽게 오나 보다. 오늘도 천변 산책로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혹시 다리 밑 사람들이 간밤에 이부자리로 썼을 쓰레기 버금한 물건들에 마주치면 가슴 쓰려 어쩌나. 옛날에는 다 같이 주렸다지만, 지금은 더러는 건강과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로 안간힘을 쓰는 세상이 되었건만. 이 딱한 소수는 어쩌다가 다리 밑으로 밀려났을까. 촛불에서 십분 거리, 봄은 멀고 여전히 춥고 배고픈 다리 밑을 어쩌나.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7. 3. 7. 15:04

 

 

중학교 가는 우빈이 그리고 4학년 되는 성빈이를 위한 미니 백 - 용도?

 

그건 모르겠다. 우빈에게는 순천 이모할머니가 줄 100 달러 축하금도 넣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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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54

 

말 아닌 ‘소리들’만 넘쳐나 … ‘하얀 돛’ 만날 그날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2. 테세우스의 돛
2017년 02월 20일 (월) 10:30:4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제발 하얀 돛을 달고 돌아와다오!

고대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무찌르기 위해서 크레타 섬으로 떠난 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운명은 야속하여 승리의 기쁨 속에 생환하는 테세우스의 배에 검은 돛이 나부끼고,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기에 앞서 왕은 절벽 아래 푸른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푸른 에게해의 전설이다.

 

탄핵소추의 배는 어떤 색깔의 돛을 달고 돌아오려나. 제발 하얀 돛을 달고 와다오! 살아오면서 검은 돛을 달지는 말아다오!

 

특검이다 헌재다 하는 비일상적인 단어들이 일상이 돼버린 오늘, 우리의 삶은 뒤바뀌고 오리무중인 것들로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특히 말이 의미내용을 담지 않고 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니, 말과 소리의 구별이 참으로 어렵게 됐다. 그런데도 말을 귀에 담고자 뉴스에 신경이 꽂힌 나날이다. 민낯이 다 들어났는가 싶으면 또 터지는 끝이 없는 진창 속, 그 속을 그만 보고 싶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까 봐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아이의 심정이다. 물론 아이도 손가락 사이를 엉성하게 벌려서 볼 것을 어차피 본다.

그래서 아프다. 많이 아프다. 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산더미로 드러나는 가운데, 유독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이 눈에 띈다. 2014년 잔인한 4월 그날, 바닷물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가능하면 회피해왔던 주제, 세월호 그날. 

 

   
  ▲ 사진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그날 저는 정상적으로 이 참사, 이 사건이 터졌다 하는 것을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어요. 보고를 받아가면서.”

 

이 문장을 외다시피 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주어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다. 보고를 받아가면서. 끝. 여기에 주어의 행동은 없다. ‘보고 받는다’는 행동이 아니다. 보고를 받고 나서 취하는 행동, 그것이 행동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거의 종일을 행동은커녕 반응도 내지 않으신 우리 대통령은 어물쩍 오보 탓을 하신다.

 

“그날 참 안타까웠던 일 중의 하나가 ‘전원이 구조됐다’ 하는 오보가 있었어요. (중략) 전원이 구조됐다 그래 갖고 너무 기뻐서, 아주 그냥 마음이 아주 안심이 되고, 이렇게 잘 될 수가 있나, 너무 걱정을 했는데, 그러고 있었는데 또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그게 오보였다 그래 갖고 너무 놀랐어요.” 

 

대통령은 오보가 있어서 아주 안심이 되었고,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오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단다. 정상적으로 보고를 받아가면서 안심했다가 놀랐다. 그것이 골자다. 보고를 받는 것이 행동이 아니듯, 놀랐다는 것도 행동은 아니다. 

그날 아침 9시 19분 ‘500명 탄 여객선 조난 신고’라는 긴급속보가 떴던 그날, 오장육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텔레비전에서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11시 좀 지나서 학생들 전원구조라는 보도에 안도하다가 곧 다시금 지옥으로 빠졌다.

 

그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청와대는 해경본청과의 교신으로 정보가 정확하고 빨랐다. 11시 29분 청와대는 해경에 말했다. “(구조인원이) 161명이면 나머지…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거 아닙니까. 바깥으로 떠 있는 게 없으니까.” 사고의 실체를 청와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 대통령은?

오보라는 단어는 도피의 함정이자, 말이 아닌 소리에 불과하다. 그날 그 참사에도 불구하고, 오보 때문에 점심도 편하게 드시고, 오보 때문에 판단이 늦었을 뿐, 재택근무를 하며 ‘정상적으로’ ‘보고 받으면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는 소리에….

 

갑자기 오리털 이불에 난 구멍에 얽힌 우화가 생각난다. 옛날 서양 이야기다. 부지런한 할머니들은 날마다 오리털 이불을 창틀에 걸쳐놓고 빗자루 같은 긴 막대로 두들긴다. 밤사이의 먼지도 털어내고 오리깃털에 공기가 다시 들어가서 보송보송해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두들길 때마다 구멍으로 오리깃털들이 날아올랐다. 할머니는 구멍을 찾아냈다. 이를 어쩌나! 어떻게 이 구멍을 없애나! 할머니는 궁리 끝에 구멍을 잘라버리기로 했다. 큰 가위를 들고 와서 구멍을 싹둑. 그런데….

 

구멍은 자를수록 더 커진다. 잘못도 변명할수록 더 커진다. 그날의 행적정리에 따르면, “공식 일정도 없고 신체 컨디션도 좋지 않았기에” 관저에 있었다는데. 만일 대통령이 재택근무가 아닌 출근근무를 했더라면….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바라건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됐을까. 아니, 선원들만 구조한 ‘나쁜’ 해경들 때문에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수장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행적정리에는 참상을 인지한 직후에 어떤 조처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빈자리에서 괴소문들이 자라는 것이다. 그 괴상한 단어들을 어찌 차마 입에 올려서 스스로 인격이며 국격을 송두리째 내동댕이칠 수 있는지. 그날, 11시 29분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것’을 해경에게 확인한 ‘청와대’의 입은 누구의 입인가. 청와대가, 곧 대통령이, 그것을 알고도 즉시 마땅한 적극적인 행동을 서두르지 않은 죄 그것 하나, 결과와 상관없이 부작위의 죄 그것 하나가 문제다.

 

그날, 하필 그날에는 ‘컨펌’을 빨리 못 받았을까. 누군가에게서 컨펌을 받는 국가원수라는 이미지는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명목상 여전히 국가원수이면서 공영방송도 아닌 일인매체로 국민을 만나려는 처사(處事)는 국어사전에서 죄의식 또는 품격이라는 단어가 증발해버렸는가 의심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품격은커녕 논리도 없는 변론들은 말이 아닌 소리들로 넘쳐나니, 최고 수준의 지성과 판단력을 갖추었을 대리인단의 심사(心思) 또한 의아할 뿐이다.

 

눈이 그치듯, 언젠가는 비바람도 그칠 것이다. 우리는 곧 기다리는 하얀 돛을 보리라. 예전에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 “시인이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그런 날을 위해서, 하얀 돛이여, 어서 오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