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7. 3. 7. 14:54

 

말 아닌 ‘소리들’만 넘쳐나 … ‘하얀 돛’ 만날 그날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2. 테세우스의 돛
2017년 02월 20일 (월) 10:30:4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제발 하얀 돛을 달고 돌아와다오!

고대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무찌르기 위해서 크레타 섬으로 떠난 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운명은 야속하여 승리의 기쁨 속에 생환하는 테세우스의 배에 검은 돛이 나부끼고,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기에 앞서 왕은 절벽 아래 푸른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푸른 에게해의 전설이다.

 

탄핵소추의 배는 어떤 색깔의 돛을 달고 돌아오려나. 제발 하얀 돛을 달고 와다오! 살아오면서 검은 돛을 달지는 말아다오!

 

특검이다 헌재다 하는 비일상적인 단어들이 일상이 돼버린 오늘, 우리의 삶은 뒤바뀌고 오리무중인 것들로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특히 말이 의미내용을 담지 않고 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니, 말과 소리의 구별이 참으로 어렵게 됐다. 그런데도 말을 귀에 담고자 뉴스에 신경이 꽂힌 나날이다. 민낯이 다 들어났는가 싶으면 또 터지는 끝이 없는 진창 속, 그 속을 그만 보고 싶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까 봐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아이의 심정이다. 물론 아이도 손가락 사이를 엉성하게 벌려서 볼 것을 어차피 본다.

그래서 아프다. 많이 아프다. 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산더미로 드러나는 가운데, 유독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이 눈에 띈다. 2014년 잔인한 4월 그날, 바닷물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가능하면 회피해왔던 주제, 세월호 그날. 

 

   
  ▲ 사진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그날 저는 정상적으로 이 참사, 이 사건이 터졌다 하는 것을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어요. 보고를 받아가면서.”

 

이 문장을 외다시피 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주어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다. 보고를 받아가면서. 끝. 여기에 주어의 행동은 없다. ‘보고 받는다’는 행동이 아니다. 보고를 받고 나서 취하는 행동, 그것이 행동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거의 종일을 행동은커녕 반응도 내지 않으신 우리 대통령은 어물쩍 오보 탓을 하신다.

 

“그날 참 안타까웠던 일 중의 하나가 ‘전원이 구조됐다’ 하는 오보가 있었어요. (중략) 전원이 구조됐다 그래 갖고 너무 기뻐서, 아주 그냥 마음이 아주 안심이 되고, 이렇게 잘 될 수가 있나, 너무 걱정을 했는데, 그러고 있었는데 또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그게 오보였다 그래 갖고 너무 놀랐어요.” 

 

대통령은 오보가 있어서 아주 안심이 되었고,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오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단다. 정상적으로 보고를 받아가면서 안심했다가 놀랐다. 그것이 골자다. 보고를 받는 것이 행동이 아니듯, 놀랐다는 것도 행동은 아니다. 

그날 아침 9시 19분 ‘500명 탄 여객선 조난 신고’라는 긴급속보가 떴던 그날, 오장육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텔레비전에서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11시 좀 지나서 학생들 전원구조라는 보도에 안도하다가 곧 다시금 지옥으로 빠졌다.

 

그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청와대는 해경본청과의 교신으로 정보가 정확하고 빨랐다. 11시 29분 청와대는 해경에 말했다. “(구조인원이) 161명이면 나머지…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거 아닙니까. 바깥으로 떠 있는 게 없으니까.” 사고의 실체를 청와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 대통령은?

오보라는 단어는 도피의 함정이자, 말이 아닌 소리에 불과하다. 그날 그 참사에도 불구하고, 오보 때문에 점심도 편하게 드시고, 오보 때문에 판단이 늦었을 뿐, 재택근무를 하며 ‘정상적으로’ ‘보고 받으면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는 소리에….

 

갑자기 오리털 이불에 난 구멍에 얽힌 우화가 생각난다. 옛날 서양 이야기다. 부지런한 할머니들은 날마다 오리털 이불을 창틀에 걸쳐놓고 빗자루 같은 긴 막대로 두들긴다. 밤사이의 먼지도 털어내고 오리깃털에 공기가 다시 들어가서 보송보송해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두들길 때마다 구멍으로 오리깃털들이 날아올랐다. 할머니는 구멍을 찾아냈다. 이를 어쩌나! 어떻게 이 구멍을 없애나! 할머니는 궁리 끝에 구멍을 잘라버리기로 했다. 큰 가위를 들고 와서 구멍을 싹둑. 그런데….

 

구멍은 자를수록 더 커진다. 잘못도 변명할수록 더 커진다. 그날의 행적정리에 따르면, “공식 일정도 없고 신체 컨디션도 좋지 않았기에” 관저에 있었다는데. 만일 대통령이 재택근무가 아닌 출근근무를 했더라면….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바라건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됐을까. 아니, 선원들만 구조한 ‘나쁜’ 해경들 때문에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수장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행적정리에는 참상을 인지한 직후에 어떤 조처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빈자리에서 괴소문들이 자라는 것이다. 그 괴상한 단어들을 어찌 차마 입에 올려서 스스로 인격이며 국격을 송두리째 내동댕이칠 수 있는지. 그날, 11시 29분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것’을 해경에게 확인한 ‘청와대’의 입은 누구의 입인가. 청와대가, 곧 대통령이, 그것을 알고도 즉시 마땅한 적극적인 행동을 서두르지 않은 죄 그것 하나, 결과와 상관없이 부작위의 죄 그것 하나가 문제다.

 

그날, 하필 그날에는 ‘컨펌’을 빨리 못 받았을까. 누군가에게서 컨펌을 받는 국가원수라는 이미지는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명목상 여전히 국가원수이면서 공영방송도 아닌 일인매체로 국민을 만나려는 처사(處事)는 국어사전에서 죄의식 또는 품격이라는 단어가 증발해버렸는가 의심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품격은커녕 논리도 없는 변론들은 말이 아닌 소리들로 넘쳐나니, 최고 수준의 지성과 판단력을 갖추었을 대리인단의 심사(心思) 또한 의아할 뿐이다.

 

눈이 그치듯, 언젠가는 비바람도 그칠 것이다. 우리는 곧 기다리는 하얀 돛을 보리라. 예전에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 “시인이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그런 날을 위해서, 하얀 돛이여, 어서 오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50

“집착할수록 곤두박질 치는 게 ‘명예’일진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1. 내려놓기의 미학
2017년 02월 06일 (월) 14:11:51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눈이 가끔 내렸나 보다. 눈이 하얗게 덮인 산자락들의 풍경이 카톡카톡 소리를 내면서 내게 날아들곤 했다. 그러도록 나는 겨우내 눈 쌓인 산야를 보지 못하였다. 소설 쓰는 젊은이들이 태백으로 눈꽃기차여행을 떠나자고 했을 때에도 손을 내저었다. 늙은이 물 흐릴까 지레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행이 힘들어서이다. 소풍도 힘들기는 어려서부터이니, 또래들이 보름씩 해외여행을 떠난다 해도 부럽다 만다. 이 겨울에 따뜻한 섬나라? 한껏 멋이 있지만, 멋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도 오늘은 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씩 둘씩 내려놓아야 할 일들이 밀려옴을 체감한다. 몸 따로 맘 따로, 명절이 다가올 때는 차례상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지 은근히 겁이 났었다. 그렇게 설은 닥쳐왔고,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세배 오는 사람들도 북적대는 집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그렇게라도 모이지 않는다면 ‘함께’ 산다는 것을 어찌 느낄 수 있으랴.

 

이번 설에는 초등학교를 잘 마친 손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했다. 중학생이 되는 시작을 격려해 줄 수도 있지만, 의미를 초등학교 졸업으로 하기로 했다. 주어진 일을 잘 마친다는 것은 초등학교도 어렵다. 보통은 대졸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졸업은 영어로는 시작(commencement)이라는 단어로도 쓰는 것을 보더라도, 또 실제로 엄청난 새로운 시련의 시작임이 틀림없다. 그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다 살았다 싶은 때에 찾아오는 정년은 그 자체로의 허무함과 여생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어려운 고비이리라.

 

누구나 나이를 먹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언젠가는 정년이 되고, 일을 놓고,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죽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무원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업장의 정년이 60세로 정해져있다. 교육공무원은 조금 예외이고, 가장 늦은 교수사회도 만 65세면 정년이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교수는 아예 정년이 없는데도 70세 정도가 되면 스스로 퇴임을 한다고 한다. 메스를 드는 의사는 어떤가. 농사라 해도 본격적인 농사에는 스스로 정년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기대수명이 늘었다고 해서 정년이 늦춰져야 한다는 것은 산술적 주장이다.

이 엄청난 실업과 미고용의 사회에서, 혹시라도 정년을 늦추자는 말은 기득권의 연장과 비슷한 말이 되고 만다. 노동시간을 줄여서라도, 임금을 줄이는 아픔 속에서라도, 일자리를 나누어야 하는 세상이 아닌가.

 

내가 재직했던 학과에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전통이 있다. 칼퇴직이다. 퇴임교수는 단 한 시간도 시간을 맡지 않는다. 내가 조금 남은 정년을 못 채우고 명예퇴직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학과들의 경우 대부분은 갑자기 출근을 그만두게 되는 교수들의 적응을 위해서라도, 또 듣기 좋은 말로 그 아까운 학식을 썩히기에 아깝다는 권유에 못 이긴 채 이삼년 더 시간강의를 맡기도 한다. 평생 하던 일, 이젠 쉬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우리 과의 전통 속에는 후속세대에 대한 배려가 숨어있을 것이다. 아무도 대놓고 말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럴 것이다.

 

강단 떠난 지도 벌써 한참 되었지만, 그러니까 옛날에는, 젊은 강사들의 학식이 내 또래 학자들보다 더 낫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학회지 논문심사 경험들을 되돌아보아도 그렇다. 이름을 가리고 심사할 때 우수하다고 보았던 논문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중에 인쇄되면 강사들의 것일 때가 많았다. 평가기준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내 의식으로는 그랬었다. 연구조차도 세월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옛날, 밥이 귀했던 시절에 노인들은 밥상에서 먼저 수저를 놓았다. 손님을 가더라도 밥을 반드시 남겼다. 젊은 사람들과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기본이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사뭇 다르다. 소위 ‘능력 있는’ 노인들에게서 양보지심이 적다. 특히 정치판이라는 동네에서는 멈춤을 모른다. 노회함으로 포장하여 세를 과시하며,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 드물다. 그런 곳이다 보니 탄핵소추 중의 대통령에게 충언하는 사람 하나 없는 모양이다.

직무태만과 왜곡의 정도가 임계점을 넘었음에도 그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나, 어찌하여 주변의 그 많은 경륜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들이 탄핵정국의 표류를 멈추도록 하지 못할까. 손익 계산을 내려놓을 일이다, 다함께. 내려놓을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현명함의 쓸모가 아니겠는가. 미국의 떠오른 권력자 신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의사를 명쾌히 표명하는 출중한 여야 정치인들을 보는 심정은 오직 부러움뿐이다. 그렇게 할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너 나 없이 내려놓기를 불사해야 한다, 내려놓기만이 마지막 아름다움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을 것이리라. 

 

그렇다. 내려놓기의 미학은 비단 노인들에게가 아니라 그 때가 도래한 이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온 대지가 신춘을 꿈꾸는 동장군의 시절이지만, 도종환의 「단풍 드는 날」을 미리 되뇌어 본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후략]

 

물론 시를 읽고 감동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깨달음과 실천이다. 무엇들을 내려놓기 위한 첫걸음의 시작으로서, 년 전에 새해의 계획으로 무엇들을 사지 않기를 다짐해 본 적도 있다. 늘 그렇듯이 완전한 계획 달성이 되었을 리 없지만, 해가 거듭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새해의 계획은 그 해에 이루지 못한다 해도 앞으로의 삶에 조금은 방향설정이 되는 듯하다. 한번 결심했었던 기억만으로도 머릿속 마음속 어딘가에는 남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내려놓기라는 것이 비단 물건들에 국한되지 않기에 더욱 어려운 것 같다. 보이고 만져지는 물건들에서는 다소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버려야할 것들이 켜켜이 쌓여있음을 느낀다. 궁극적으로는 비물질적인 것들까지, 특히 명예 따위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집착할수록 곤두박질치는 것이 명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연의 덫까지도 내려놓아야 아름다운 마무리라 할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46

‘노인’ 넘쳐나는데 ‘어른’ 찾아보기 힘든 사회라니…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0. 어른스러운 어른
2017년 01월 09일 (월) 14:19:41 교수신문 editor@kyosu.net

동지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더니, 어느새 2017년 깨끗한 달력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한 해가 밝으며,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또 한 살을 더한다. 저항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개개인의 철학이자,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젊어보이시네요!” 

누구나 싫어하지 않는 입발림 말의 1순위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어려보여요!”라는 변형으로 쓰인다. 나이보다 젊어보인다, 또는 어려보인다. 이 말은 과연 칭찬의 말일까. 

어리다는 말의 어원은 『용비어천가』(1447년)에서 ‘어리다(愚)’로 등장한다고 한다. 중세국어에서 ‘어리다’의 의미는 이처럼 ‘어리석다(愚)’였다가 ‘나이가 적다(幼)’로 변화하면서 17세기부터는 ‘어린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라 한다. ‘어린 소견’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현대어에서도 여전히 ‘생각이 모자라거나 경험이 적거나 수준이 낮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옛날에는, 뭔가 잘못을 하면 철이 없다고 속이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반대로 듬직하고 조신하다는 말은 칭찬이었기 때문에, 어른스럽다는 말이 오히려 좋은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변화가 생겼다.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1979)에 이르면 ‘젊은 여자끼리 몇 살쯤 어리다는 게 우월감이 될지언정 열등감이 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고 당시의 세태가 표현되었다. 어리다는 것이 여자의 우월감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론 젊은 여자들에 한한 이야기였고, 어른은 어른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봇물이 터지듯 경계가 무너졌고,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서는 도통 나이를 짐작도 못한다. 

딸을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가 이모 같다느니, 심하면 언니 같다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게끔 ‘어려보이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남자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 아저씨보다는 오빠로 불리기를 좋아한다던가? 어리(석)게도!

   
 

등산복이 노인의 교복이 된 시대 

 

어려보인다는 것, 어린 것이 아니라 어려보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젊음만이 아름다운 가치일까. 온 나라가 운동과 건강식 붐이고, 건강관리를 받는 1년 회원권이 집 한 채 값인 곳도 있다는 뉴스에도 놀라움에 슬쩍 부러움이 섞인다. 

나이 들면 젊게 오래 살자고 운동을 하는 것이 생의 최종목적이 되어버린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웃도어가 노인들의 교복이 될 줄이야. 알록달록 옷들은 노구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고 겉돌아서 보는 눈이 다 피곤하다. 구부정하고 일그러진 자태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은 것이 아웃도어다. 히말라야 원정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온갖 기능성의 이름으로 너무도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도 않을까. 

그렇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돈이 소모되고 있다. 거기에 소모된 시간만큼을 더 산다고 해도, 연장을 위해서 그만큼의 시간이 사라졌으므로 플러스-마이너스로 답은 같다. 

 

또 젊어보이는 것이 생물체의 사멸과도 무관하다. 이 시대의 철학은 그런 진실에 눈을 감는 듯하다. 위아래며 애어른 할 것 없이 미모 집착증이 온 나라를 삼키고 있다. 벌써 10여 년 전에 영국의 BBC에서 <한국에서의 미모의 값>이란 특집방송이 있었다. ‘미모 광(beauty craze)’에 사로잡혀 천차만별의 값을 지불하고 때로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완벽한 몸을 갖기 위해 애쓰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취지였다. 취업에도 필수적이라고 하니, 어쨌거나 젊어서는 미모가 중요할 것도 같다. 또 슈퍼리치들은 천문학적 투자로 미모를 사들이므로, 부와 미모는 동일 차원에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노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젊어보이는 가짜 얼굴들이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삶에까지 침투했다. 무작정 시커먼 눈썹과 억지로 파놓은 동그란 눈 때문에 오히려 밉상스러워진 이 얼굴들을 어쩌란 말이냐. 이것은 차라리 미학적 쇼크다. 우리들 원래 동그란 얼굴은 눈썹도 가늘고 눈도 가늘 때 훨씬 더 예쁜 것을! 

한글문서를 작성하면서 순간 느낀다. 문서처럼 쉽게 ‘되돌리기’를 할 수는 없을까. 요양병원에 내팽겨져서도 그 짙은 억지 눈썹이 낙인처럼 시커멓게 살아있으면 어쩌나. 소용없다. 우리는 옛날부터 따라쟁이다. 영이네가 세탁기 들여 놓았으니 순이네도 빚을 내어서라도 세탁기를 들여놓아야 했던 그 시절부터다. 영이엄마가 했으니 순이엄마도 해야 하는 그것, 야매(!)성형과 미용주사들. 자유성형공화국 만세!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 들어 예쁜 얼굴이야 있을까만, 옛날에 우리가 어려서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괜찮았다. 어려보이는 어른이 아니라 어른 같은 어른들이었다. 그것은 세월을 초월한 조화다. 지금도 기억한다. 적당히 늙고 주름진 얼굴에 적당히 센 머리에 적당히 굽은 등을 하고 널부렁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걷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른 나이에 있었을 많은 어려운 순간들을 이기고, 이제 다가오는 종착역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편안하게 보였다. 가지고 갈 것도 남기도 갈 것도 많지 않아서 뭔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삶이야말로 넉넉해 보였다.

 

내가 늙은이가 된 지금은 주변을 돌아보면, 파리하고 살짝 빛바랜듯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노인들의 자태가 여간해선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초록도 단풍이 들듯이, 황홀한 단풍도 우수수 바람에 날리듯이, 자연을 닮은 노인들이 그립다. 왜 지금은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스러운 어른되기가 힘들까. 거짓과 우격다짐으로 불린 명성과 재산이 많으면 잃을까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분통나고 그러는 것일까. 통계수치로 보면 옛날보다 잘들 사는데, 어른들도 젊은이들 따라서 헬조선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새 달력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다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하차하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은 축복이다. 지구가 아직은 허락한 또 한 번의 봄을 맞게 되다니!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어려서 골목 양지바른 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또래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제 손녀들은 고무줄놀이 같은 것을 모르니 노래를 가르쳐줄 수도 없게 되었나? 할 수 없게 되는 일은 어차피 많아진다. 다만 한 계단 더 오른 어른으로서 덜 어리(석)자고 다짐할 일이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