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7. 7. 5. 02:13

 

 

다른 사람의 죽음

-페트라 켈리를 기억하기 위해서 -

 

효주 전 의원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뉴스속보가 방송마다 떴다. 3월 중순, 20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이라는 화두가 온 나라를 삼키고 있던 때였다. 날마다 사건사고이지만 그래도 큰 건에 속했나 보다. 온 나라는 잠시 연효주라는 이름 석 자를 불쏘시개로 하여 뜨거운 가마솥 같은 열기와 연기에 휩싸였다.

혼자서? - 그럼 혼자서지, 독신인데.

아무도 없었을라고? 케미라도! - 아무도 없었대.

그래도 죽을 이유가 없으……. 아서.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4월 들어 본격적으로 선거가 다가오면서는 선거증후군치고도 상상을 절한, 시쳇말로 멘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날마다 더 지독한 단어들이 황사와 미세먼지에 섞여서 뱃속으로 침투되고 있었다. 엉뚱한 문자가 날아들었다.

한금실, 갑작스레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통화하자. 여고, 손경화.

우리 의원님이었어,

그 비보.

늦은 밤이었다. 깨어있어서 바로 들여다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우리 의원님이라니? 이름을 쓰고 나서 덧대어 쓴 것으로 보아 의미심장한 내용 같았다. 가만, 의원님이라면…… 설마 저 뉴스에 나왔던?

 

손경화를 생각해 보았다. 상냥함에 예쁘기까지 한 경화는 아나운서가 되겠다며 신방과를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반이었지만, 서로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경화가 웬일로 나를?

아니, 언젠가 꿈에서 내가 국회위원 보좌관일 때, 그것도 남자일 때, 딱 한번 경화를 만났다. 나는 우습게도 급한 연설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는데, 늘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옆방의 보좌관이 날 불러 세웠다. 소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보니 그 애가 바로 경화였다. 실제로 보좌관이 된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특별히 정치적 야심 때문이 아니라 집안의 배려로 의원실에 발탁되었다고들 했다. 느닷없이 꿈속에서 ‘금실아’ 하고 나타나더니, 또 느닷없이 현실에서 문자를?

어처구니없다. 경화가 내려오겠다고 했다. 우리대학의 김경래 교수를 만나러 오는데, 나더러 함께 가자는 부탁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연약했던 본성이 나오는가, 국회의원 보좌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행보이지만 약속을 했다. 전달할 물건이 있는데……, 경화의 말이었다.

 

김경래 교수는 현직이 아닌 명예교수였다. 과실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느닷없는 내 전화에도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연효주 의원님 돕던 제 친구가 교수님을 찾아뵙고 전할 것이……’라고 할 때도 크게 동하지 않았다. 다만 약속 당일에 시간이 임박해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나더러 이왕 다리가 되었으니 전할 물건만 받아 두라고, 다음에 연락하겠다고만 했다. 난감했다.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경화가 들고 온 것은 연의원의 아이패드였다. 김 교수님 앞으로 남겨진 아이패드. 그것을 가져온 경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놓고 가는 일이 중요했다. 유품보관소도 아닌 내 좁은 원룸에서 헝겊 가방에 덮인 그 아이패드는 죽은 듯 며칠을 그러고 있었다.

과실 강사용 우편함에 한금실 선생 앞이라고 쓰인, 작고 두꺼운 샛노란 봉투에 비뚤한 부피감이 있는 우편물이 있었다. 봉투를 열자 학교 사진이 들어있는 옛날 그림엽서가 나왔다.

최근의 현실을 맞닥뜨리기에는 뇌도 마음도 상했소. 이 또한 그 물건과 함께 있어야할 것이라서 보냅니다. 비겁하게 도망친 나를 찾는 대신 모두를 열어보아도 좋소. 그 다음은 알아서 하시오.

 

유에스비가 함께 있었다. 난생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물건을 받다니. 해골이 흔들릴 일이다. 조만간 그에게 전해져야 할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에게서 내게 무엇이 오다니. 생판 남의 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도 해와 달은 운행을 쉬지 않았고, 어김없이 선거일이 닥쳤다. 필연도 이변도 뒤범벅으로 새 판이 짜였다. 사람들이 한국이 어찌 되건, 지구는 아픔의 고통을 모르는 듯 했다. 아이패드와 유에스비가 나란히 놓인 책상 한쪽에 신경이 쓰여서 요새는 강의 준비에도 집중이 흩어졌다. 치워놓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마땅히 분류해서 치울 카테고리가 없다. 연효주를 검색해보았더니, 어디나 벌써 1964-2016이라고 고인 취급이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된다고만 간단히 실려 있다. 김경래 교수도 찾아보았다. 1943년 생, 미국 워싱턴대학 박사학위, 그 뒤 굴곡지긴 했지만 경제학과 교수직을 정년까지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어찌된 것일까? 두 사람은 지인이기 보다는 부녀 쪽에 더 가까울 정도로 다른 세대에 속했다. 어떤 자석의 힘이 두 물건을 이 책상으로 끌어당겼을까. 호기심이 인간의 저열한 특성인 것을 모르진 않지만, 나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우선 하나라도 열어보는 일이었다. 간단한 유에스비가 먼저였다.

무의식적으로 예상했던 대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거의 연대기 형식이었다.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을 하면서 정리를 하기로 했다. 정독을 해야 그 다음 행동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경래는 태평양전쟁의 틈에 태어나 해방 후 유년기를 거쳤다. 받아 마땅한 애정을 받을 길 없이 자라기는 동년배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해방 후 뒤숭숭한 정치와 한국전쟁을 다 몸으로 부대끼면서 통과했고, 게다가 그때는 드물지 않았던 소아마비를 앓아 가볍게 다리를 전다. 운동성이 떨어진 사람들이 그러듯 책을 가까이 했고, 성적은 늘 우수했다. 장학제도는 인색했지만 최소한의 영재들에게는 기회가 있었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학비 걱정은 없었다. 집안도 극빈한 상황은 아니라서 병신치고는 훌륭하게 자랐다. 물론 장애는 늘 장애였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그가 혐오하는 군대를 면케 해주는 깜짝 귀여운 역할을 해냈다. 그가 군대를 혐오하게 된 것은 부실한 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공부를 제대로 하다보면 사람은 반전주의자가 되기 십상인 모양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장학금으로 워싱턴에 입성했다. 세상은 책 속의 간접 경험으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넓고 다양했다. 1966년은 학생의 해였다. 페트라 켈리를 만났다. 입학도 전에 벌써 ‘우리 세대는 달라’라는 시를 써서 유명해져 있었다. ‘이번 세기 숱한 전쟁을 일으킨 모든 세력들 / 그러나 아무리 극성스런 악의 세력도 / 사랑의 힘만은 꺾을 수 없어 / 그 놀라운 힘 우리 안에서 / 66학번 우리 친구들의 힘이 되어 / 세상 밝히는 빛이 되리라.’

글짓기나 웅변대회를 휩쓸 정도였다는 이 유명한 여자는 놀랍게도 미국 태생이 아니었다. 전후 독일에서 태어난 페트라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 아버지를 만났다. 그가 본국으로 전근되었을 때, 페트라는 열 살 남짓 나이로 모국어를 떠나 영어로 살게 되었다.

외롭게 느끼면 더욱 열심히 하게 되는 거야……. 그는 자신의 이야기인지 그녀의 이야기인지 구분 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김경래가 유학 시절에 받은 가장 큰 충격은 행동하는 세대들의 태동을 몸으로 목격한 것이었다. ‘우리 흑인이 자유를 갈망한다고 해서 증오의 잔으로 자유를 마실 수는 없다.’고 했던 킹 목사를 눈으로 보았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타는가 했더니 곧 이어 암살당했고, 애도가 폭동으로 변질될 지경인 것을 가까이서 체감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 몇 번씩 투옥되고 집은 불타고 또 불타고…… 그런 박해를 겪고도 말하다니. ‘주님을 믿을 때 고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내 개인적인 불행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킹 목사가 암살되기 2주 전 집회에서 했던 말을 그는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 우리의 투쟁은 진짜 평등을, 그러니까 경제적 평등을 위한 것입니다. 점심을 통합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햄버거를 살 돈이 충분하지 않은데 통합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득이 됩니까?’

그래 진짜 평등은 경제적 평등이야.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금의환향의 시절, 그는 실은 귀국 예정에서 조금 뒤쳐졌다. 국내에서 받아서 나갔던 장학금은 끊겼지만, 미국은 잘 비비면 비빌 구석이 있었다. 그 당시 남한은 약체 신생국으로 간주되어서 보호의 대상이라는 분위기였다. 친절과 동정 사이 애매한 관심을 받는 미미한 나라의 미미한 학생은 조용히 공부에 매진했다. 페트라 같은 엄청난 에너지에 감격했지만, 어찌 보면 페트라를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그녀는 국제정치학, 그는 경제학으로 전공도 달랐다. 다만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 간 뒤에야 터득했는데, 그것이 그녀의 영향이었는지, 공부의 지향점과 맞아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두 사람 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떠났고, 그리고는 실은 그녀를 잊었다.

 

페트라 켈리가 그의 뇌리 속에 되살아 난 것은 1980년 초였다. 독일 녹색당이 창당되고 대변인으로 우뚝 선 페트라가 뉴스의 중심에 섰다. 그렇구나, 여자가 독하게 일어서는구나……. 그때부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독일의 녹색당과 페트라 켈리를 뉴스의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다.

그해 한국은 봄부터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시위로 시작하더니, 오월 광주의 엄청난 민중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변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항쟁은 피로 좌절되었고,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진 하 세월이 걸렸다. 여름이 되면서 연좌제는 폐지한다면서 삼청교육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몰려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이 시작되는 것과 거의 맞물려 대통령은 오월항쟁 등의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숨도 쉴 틈 없이 새로운 대통령이 등극했다. 그제야 100일 넘게 문을 닫았던 대학의 휴교령이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대학이 문을 닫은 동안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그 세월을 우리는 그저 가만히 살고 있었다.

가만히, 다들 가만히 살았다.

광주 오월 비극의 그해 8월 초,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의 사태에 대해 뒷북치는 입장을 밝혔다. 누구라도 한국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한국의 안보가 유지된다면 이를 한국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특히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복종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진단까지 내렸다. 그의 말에 분노했지만, 그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뜬구름이었다. 장군이 군복을 벗더니만 대통령이 되는 나라였다. 80년 5월 17일의 계엄령은 8월 27에 새 대통령을 낳는 웅대한 막으로 대단원을 장식했다. 석 달 열흘이면 세상이 평정된다. 어쩌면 순진한 광주가 어딘가 타깃이 필요한 작전에 스스로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도 없는 채로. 그렇게 통곡하는 광주는 도처에서 다시 통증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김 교수의 말로 정리를 해야겠다, 내가 왜곡하느니.

1983년 그때 연효주는 새내기 대학생이었다. 내가 지도교수를 맡은 학생인데, 한 학기를 채 마치지 않고서 돌연 자퇴를 상담하러 왔던 그녀를 기억한다. 경영대는 자신과는 너무 맞지 않다고, 경제면의 기사들을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마인드로 어떻게 전공책을 읽느냐고.

무슨 책을 못 읽는다고……?

『경영학적 OO의 틀』, 교수님이 기본 필독서라 하셨잖아요.

김교수로서는 자신보다 한발 앞서 도미해서 유펜에서 학위를 한 S대 O교수의 책을 신입생들에게 추천했다. 당시 미국은 가히 경영의 시대라는 화두가 각광이었다. 변호사나 정부관리가 유망 직종이었다가 70년대를 거쳐 기업경영의 시대가 되면서 경영학 석사과정이 최고의 주류를 이루었다. 미국 따라쟁이 우리 유학생들도 그런 분위기였다. O교수도 원래 독문학 전공이었다. 그렇게 다른 전공에서 경영학 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경영학과에 여학생들은 여전히 적었다. 그런데 똘똘해 보이던 여학생 하나가 시작서부터 이제 그만 두겠단다.

 

그 여학생이 재수 끝에 서울 소재 모 대학에 합격했다고 인사를 왔다.

하필 독문학을?

예. 독문학에서 출발해서 경영학자로 대성하신 분이 있으면, 경영학 시도하다가 독문학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하죠.

참 청개구리 심보네요.

그런 것만은 아녜요. 교수님은 우리가 입학하자마자 왜 독일 녹색당의 페트라 켈리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그 봄, 지지율 겨우 5.5%로 독일연방의회에 의석 27석을 확보해낸 젊은 여성이, 유학 시절에 워싱턴에서 만났던 여학생이 독일 사회를 흔들어 놓고 있다고. 이런 비슷한 말 기억하세요? 저는 다 외우는데요! 귀농을 꿈꾸는 자연주의자, 반체제 철학자, 젊은 무정부주의자, 고집스런 동물애호가, 마당을 잘 가꾸는 할머니로 구성돼 있는 오합지졸 국회의원들 이야기를.

그랬었나요, 내가?

그런 다음에도 연은 - 성만 불러야겠다 - 계속 연락을 해왔다. 방학에 고향에 내려오면 연구실에 자주 들렀다. 이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연의 고향 사람들은 북대보다는 이쪽으로 진학을 많이 했다. 그래서 처음에 우리대학에 진학했었던 것이고. 페트라 켈리의 근황에 대해서도 묻곤 했다. 연이 독일을 기억하는 코드는 오직 페트라 켈리였다. 동독의 수반 에리히 호네커가 그들을 대화에 초청한 내막이며, 녹색당은 나토의 결정에도 반대할 수 있는 정당이라고도. 의회 내 중점 사업은 평화정책, 인권 그리고 소수민족에 관한 것들이라고도 말해줬다. 돌이켜보면 나는 결국 연의 대화에 이끌려가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 역시 역사의 한 부분을 제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1985년이었다. 오월만 되면 대학생들은 광주의 오월을 실감했다. 그때는 ‘삼민투’가 결성된 직후였다. ‘민추위’ 산하 ‘민주화투쟁위원회’ 계열과 ‘주도세력’ 계열의 절충으로서 반쯤은 공개적인 투쟁조직이었다. 그들의 주도로 서울에서 70여명의 학생들이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광주에서는 80년 당시에 이미, 그러니까 그해 마지막 가는 12월에 벌써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고, 이태 뒤 부산에서는 사망사고까지 부른 방화사건이 크게 터졌었다. 무고한 한 학생이 연기 질식으로 사망했고, 주동자들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니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5개 대학 삼민투 위원장 중에 연의 고향 동기가 있었다. 고향 동기는 금서가 된 독일어 책 부분 복사물을 들고 그녀를 찾곤 했다. 독일어를 아는 건 당시 ‘금서’를 읽는 큰 장점이었다. 다른 대학의 삼민투 위원장들도 만나게 되었다. 미국문화원 농성 사건 뒤 체포된 73명 중 몇몇 사람은 연에게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건너서 언뜻 스치거나 했던 존경스런 인물 중에는 앞선 방화사건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아 복역 중인 놀라운 선배들도 있었다. 막연히 그녀의 가슴 속에 살기 시작한 누군가도 거기 있었단다.

연이 한 번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그 누군가’는 타 대학의 삼민투 위원장이었고, 당연히 구속되었다. 구속자 가족이 이루어낸 민가협에서 활동하는 그의 부친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더란다. 대개는 어머니들인 단체에서 혼자만 아버지여서 혹시 어머니가 안 계신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고. 물론 생각뿐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간헐적으로 내게 쏟아내는 연에게는 더는 가까운 사람이 없었을까. 젊은 그녀에게 설마 했지만 그래 보였다. 연은 미국문화원 안에 들어간 73명 속에도, 후에 수배당하거나 구속된 속에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한 지근거리에서 삼민투의 투쟁방식을 지켜보았다.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 그 어느 것도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통한의 아픔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이 흘렀다. 연은 졸업을 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막상 독일에서는 독문학 전공이외에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해서 조금은 놀랐다. 이메일이 가능해진 때였고, 가끔 씩 소식들이 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페트라의 소식을 먼저 알려주었다.

근년에는 티베트 문제에 개입해서, 독일 의회에서 티베트 문제가 언급되도록 했더군요.

그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들의 생명보호에까지 관심을 가졌더라고요.

녹색당 선거구호 들어보실래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 또한 보호할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인식한다……’ 어쩌고.

이번엔 ‘사회적 보호연맹’이란 것을 만들어 창립의장이 되었는데, 어째 녹색당과는 오히려 삐걱거린다네요. 현저히 영향력도 상실하고.

<12시 5분전>이라는 환경보호 시리즈를 낼 것이라고 하네요.

맙소사, 비보예요, 들으셨지요? 이 가을 시신으로 발견된 페트라 켈리, 게다가 추정하건대 사후 이삼주 후에야 발견되었다니요!

그랬다. 페트라 켈리가 ‘돌연’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1992년 가을이었다. 독일 신문 방송에서도 열 띤 보도들이 있었다. 총성에 얽힌 추측성 기사들도 난무했다. 자살, 타살과 자살, 타살…… 음모론까지 잠시 혼선이었다.

 

연은 자초지종 기사를 요약해서, 더러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이후 페트라의 일생 전체를 요약해서 알려왔다.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못하고 내버려 뒀다.

워싱턴의 미국 사람 - 그때는 그랬다 - 페트라는 우선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유럽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1972년부터 10여 년간 브뤼셀의 유럽공동체에서 일했다. 유럽공동체 경제사회위원회 행정사무관. 그러면서 독일 사민당 당원이었다. 1979년에는 사민당 슈미트 총리에게 공개서한을 쓰고 탈퇴했다니 거창했다. ‘다른 형식의 정치적 대표’를 모색하겠노라고, 생의 보호와 평화만이 우선이 아니라 남녀평등권의 원칙이 중요한 그런 단체를.

유럽공동체 본부가 있는 베를레몽 건물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세상은 남성의 것이라는 편견뿐이었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던 여성해방운동의 기치를 뼈저리게 느끼고 실천하려 했던 일벌레의 눈은 만족하지 못 했다. 성공한 여성은 남성의 배려(?)의 결과일 뿐, 양념처럼 빛나는 존재일 뿐, 핵심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너무 재미있어, 하인리히 뵐 등이 함께 했다는 유럽의회 진출을 모색하던 당시 그 이름말이다. ‘여타 정치연합 녹색’ 그게 뭔가. 그녀가 의미하는 ‘정당 반대당’ 바로 그것이었다니. 그녀 자신 앞으로 가지게 될 정치적 영향력을 상상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은 시비꾼, 잘해야 시민운동가쯤이라고 느꼈다는 그녀.

 

하지만 주변에서 볼 때는 처음부터 스타 이미지를 가졌다. 요제프 보이스나, 대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 등 눈부신 인물들과 나란히. 27명의 ‘여타 정치연합’으로서 출발했던 녹색당의 결과물은 다시 말해도 찬란한 성과였다. 생태주의와 사회적 책임, 풀뿌리민주주의와 비폭력에 관심을 집중한 녹색당은 시민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원자력발전소 건립반대에 그녀가 그토록 열심이었던 것은 어린 여동생의 암 발병과 죽음의 원인을 거기서 봤다는 개인적 경험도 크게 작용했었다. 여동생의 아버지인 미군장교는 일본의 원폭 투하 때 일본에 주둔했었다고.

연은 잔뜩 써 보냈다.

 

소설 같은 사생활도 기사화되어요. 보세요!

1947년, 전후 독일의 절대빈곤기에 태어난 페트라 카린 레만의 ‘새 생활’은 곤곤했다. 아버지 레만은 동독출신 나치병사로 바이에른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그곳에 정착했지만 일찍 집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새아버지 미군 중령 존 E. 켈리를 따라 1960년에 미국으로 갔다. 그래서 켈리다.

워싱턴 대학 재학시절엔 교수님도 만났다 하셨잖아요. 교수님 말씀과 똑 같아요. 페트라 켈리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활동들, 그리고 죽음, 그의 비폭력 원칙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요. 독일의 현대사와 전쟁의 잔혹함을 깊게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고. 여기까진 교수님이 가끔 말씀해 주셨던 이야기죠. 그리고는 교수님이 말해주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아예 사생활. 유럽공동체의 행정사무관으로 일할 때 위원장이었던 그는 페트라로서는 ‘세 번째 아버지’같은 연인이었다고. 그와는 석 달 열흘을 못 간 것이, 40살 가까운 나이 차이 보다 사고의 낙차가 컸을 것이라고. 비효율적 농민을 이농하도록 권유한 ‘농업 1980’을 기획해낸 장본이었으니까. ‘네 번째 아버지’ 같았다는 연인인 20세 연상의 운송노조 위원장에게서는 아이를 갖는 특별한 경험을 했지만 헛일이었다. 가톨릭교도이자 아일랜드인인 그로서 이혼은 상상 불가였고, 설상가상으로 페트라의 건강도 심각했다. 의사는 중절을 권고했고, ‘매우 고통스러웠던’ 그 일로 모든 것은 끝났다.

 

마지막 동반자이자 ‘마지막 아버지’였다고 하는 G.장군과의 십여 년은 그녀의 일생 전부였다. 24년간 서독의 연방군 복무로 기갑사단 사령관이었던 그는 1979년 나토의 퍼싱II 유럽배치 계획과 관련하여 180도 방향을 바꾸어 재무장 반대로 돌아섰다. 1980년에는 재무장 반대와 평화를 요청하는 크레스펠트 선언문을 기초했고, 일 년 뒤 이백만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모스크바의 돈을 받았다거나 동독의 사주를 받았다고, 그렇게 간주되거나 모함되었다. 몇 번의 연좌데모 때마다 벌금형도 받았다. 전향한 장군과 생래적인 이상주의자의 결합은 스물 네 살의 나이를 뛰어넘어 눈부시게 출발했다. 때늦게 정치에 뛰어든 노장군에게 페트라는 ‘반은 수호천사요 반은 맹도견’이라 불렸다. 그렇게 무기 없는 평화를 외쳐대는 그들이 1983년에는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상상이 간다. 연방의회 중에 뜨개질하고 있는 녹색당 의원 사진이 뉴스에 나왔었지. 구겨진 바지로 자전거 출근은 기본, 후훗. 녹색당 초창기엔 퇴역 장군의 정치적 무게도 컸고 켈리의 녹색당 창립자로서의 이미지도 대단했지. 왜 노선 투쟁에서 영향력을 상실해갔을지. 하긴, 이상주의자가 이해하는 녹색당은 사상을 내놓더라도 권력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 여전히 원외야당의 성격을 고수하고 있었으니 정치에선 안 통했겠지. 녹색당은 정당이 되어갔고, 켈리는 녹색 이상으로 남은 거야.

 

티베트 까지 걱정, 아니 세상 전체를 개혁하려고 사방에 부딪혀갔지요. 산더미 같은 일 속에 살아가니까 주위의 걱정을 들었나 봐요.

‘사람들의 곤경과 자신을 선을 그을 필터가 결여되었지요.’

‘병참술도 없이 세계정치를 했지요.’

이상하죠, 통일의 열매는 사민당이 아닌 기민당의 것이네요, 참.

통일이후 총선에서는 녹색당이 오히려 참패했어요.

페트라 켈리는 지고한 요청과 엄격한 도덕으로, 체르노빌, 소아암 ……끝없는 테마에 매진했네요. 세상은 그들을 잊어가기 시작하는데.

그러다가요, 갑자기. 갑자기 그렇게.

 

 

다음 다음해 연이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는 담담하게 페트라 켈리를 일축했다. 모교에서 시간을 얻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한참을 빈둥대고 있었다. 내게 와서 하는 말로 미루어, 옛 동아리 사람들을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막상 정치 일선에…….

그들 중 마음을 보냈었다고 나중에 살짝 흘린, ‘그 누군가’를 여전히 멍하니 보는 느낌이었다.

일단 조치원 캠퍼스에 강의는 얻었어요. 학위하고 온 사람들 줄줄이 밀려 있어서 겨우…….

90년대 중반은 박사들 정체가 폭죽처럼 불어난 때였고, 인문학 특히 문학은 학생 정원의 축소로 신규전임에 임용되는 기회가 극히 줄고 있었다. 결혼은 충격적으로 멈칫하고 나더니 잊은 듯 했다. 해라, 안 한다, 그 일로 어머니와 심각한 지경에 갔었다 했다. 오히려 15대, 16대 총선을 치르는 동안 직접은 아니나 ‘그 누군가’를 지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에서, 그 다음엔 고향에서 무소속을 고집하던 ‘그 누군가’는 계속 고배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상대는 여당에서 고위직을 지낸 노장이었으니 고배를 마실밖에. 정당까지 바꾸어가면서 계속 당선되는 상대를 어쩌랴.

교수님, 이건 좀 너무 심한 경우 아녜요? 이 당에서 장관하고 국회의원하고, 대통령 바뀌니까 또 당 바꾸어서 국회의원 하고.

정치 현실에 ‘너무’ 라는 게 어디 있기나 하던가?

 

 

세월은 또 흘렀다. 세기가 바뀌었다.

연은 십년이 넘어도 ‘시간’ 꼬리를 떼지 못 했다.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비례대표에 넣으시겠다고요!

뭐, 비례대표라?

예, 저를 18대에. 아버지가 이루지 못하신 꿈이고, 다른 형제가 없으니까. 또 어머니가 아프셔요. 가업은 사촌 오빠에게 일임했고요. 제 미래를 보증해놓고 나서야 편히……. 결혼하는 걸 기다리느니 그것이 더 빠르겠다고! 마침 정치학도 부전공으로 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그렇게 그녀는 의원이 되었다. 마흔 다섯이었다. 상향공천을 시도하는 정당이라고 했지만 예외란 늘 있는 법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 무리수였을 외동딸 의원 만들기에 성공하시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말 그대로 혼자가 되었다. 그때도 그녀의 ‘그 사람’은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아니, 지방방단체장 선거에서까지 낙선한 후유증으로 아예 총선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했다.

나와 급격히 가까워진 시기는 바로 그 시기였다. 대화 상대가 그만큼 더 절실할 때였는가 보다. 물론 젊은 시절 소위 운동권에서 만났던 선후배들과도 다시 국회에서 또는 외부에서 접촉이 잦아졌겠지. 이상하게 통증을 호소하곤 했다. 삼민투 투쟁 선봉의 몇 사람이 전향하는 과정에서 연은 많이 놀라워했다. 서울 미국문화원 농성 사건뿐 아니라 부산문화원 방화사건 주동자들 중에서도 180도에 가까운 전향을 보일 때, 연은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녀가 존경스럽다고 여겼던 사람들, 제 몸을 던져 이웃을 민족을 위해 변화에 목숨 걸었던 사람들이 변할 때의 어리둥절함을 또래들에게는 토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아시잖아요. 그 선배는 ‘민족을 학살하고 그 피 위에 선 정권이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 할 수 있냐’고 항변하며 사형선고를 받았죠. 어떻게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그 신문을 대변하는 양 기사를 써요? 심지어 그 대통령후보를 지지할 수가 있는 거예요?

사형선고까지 당해 봤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연의원. 대한민국이 자유국가임을 명증하는 또 다른 사건이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의식을 바꿀 수도 있고 그것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좋은 나라.

연의원은 예상과 다르게 국방위원회에 들어갔다. ‘그 누군가’를 대신하는 심정인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라고도 했다. 다음 지역구 출마와 연계가 멀어서 그렇다고도 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가. 연 의원은 군복무 가산점제도를 들고서 내게 열변을 토한 적이 있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군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 복무 년 수만큼 혜택이든 가산점이든 너무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겨우 동등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여대 졸업생들과 장애 남성의 헌법소원으로 위헌 판결이 나왔지만, 현실을 보라는 것이었다. 누구는 말 그대로 청춘을 나라를 위해 저당 잡혔는데, 몸과 맘을 위험스레. 누구는 부자 모두가 병역기피를 하고도 떳떳한 나라꼴이라뇨.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에 이어 ‘사람의 아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로 나뉜 팔자타령이 몇 십 년이 가도 그대로인거예요.

 

그러던 연이 돌연 번아웃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번아웃 - 일을 집착적으로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다 타버린 연료처럼 무기력해지는 일이라니!

연이 의원이 적성에 맞았을까? 그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맡은 일이면 그 일과 삶에 보람을 느끼고 충실감에 젖어 있는 편이었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그리도 그 보람을 잃고 돌연히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인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가 극도로 쌓였겠다. 국회 안에서 밖의 그를 기다리는 일이라니.

 

2012년이 되었다. 연의원은 의원실을 비울 준비를 했다. 지역구 경쟁은 처음부터 관심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사람의’ 지역구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예 당을 선택해보려던 그가 고등학교 한참 후배에게 밀렸을 때의 심정을 나도 알 것 같았다. 연은 입을 다물었다.

대학으로 돌아가려고?

강사 자리는 여전히 밀려들어오는 박사들로 넘치고 있죠.

그럼 무슨 연구소 내고?

아니에요. 우선 쉬고요. 참, 우리나라에도 녹색당이 태동이 될 것 같아요.

무슨 소리, 소속 당을 대표하던 의원님이 엉뚱한 이야기를.

교수님이 거기 동참하시는 건 어때요?

내가 무슨. 무슨 정치를.

페트라 켈리를 제 머리 속에 심으신 게 누군데요. 독일을, 독일의 녹색당을, 녹색의 가치를 심으신 게.

 

연은 녹색당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녹색당은 당명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뭘 하고 지낼까. 잠시 소통에서 잠적했지만, 어쩜 환영할 일인 것도 같았다. 그 나름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시점이니 분주할 터였다.

 

해가 바뀌더니 한 두 마디 코멘트를 해왔다.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방글라데시가 그 정도일까요? 건물이 무너져 3,000명이 죽어요?

어머, 싱가포르에도 폭동이라는 단어가 있나 보네요. 44년 만이라네요! 하긴 외국인 노동자들의 분노이니까, 내국인은 여전히 얌전한 나라. 얌전한 게 뭐죠?

 

해가 또 바뀌었다.

쾌거예요. 드디어 녹색당이 이름을 찾았어요, 녹색당. 아직도 망설이세요?

이 시대에도 합병이 이루어지다니요,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 말이어요.

새정치민주연합 탄생이라, 민주당은 역사 속으로 묻히는가요?

군부대 내 구타 사망사건이 터졌네요. 곪은 게 터진 거죠!

그것이 2014년 4월 초였다. 곧 이어 더 끔찍한 비극이 우리를 통째로 잠식해버린 이래…… 돌이켜 보니 우린 거의 소통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소속을 고집하는 묘한 그 사람을, 선거마다 낙선하는 그 사람을 외부에서 해바라기하는 일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또 한 번의 낙선을 더는 지켜볼 수 없는 심장은 미리 저절로 터져버리는 것일까. 내가 아는 한 연의 ‘그 누군가’는 이번에도 고전을 했다. 현역의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끝내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연은 떠났다. 아이패드에는 남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보낸 어느 것도 열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다. 가장 큰 배신은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연은 누구였을까.

 

 

기록 거기에서 돌연 멎어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머지 하나, 미지의 아이패드를 열어야 할지 그저 멍한 심정이 된다. 나는 아이패드의 주인 너머로 뜬금없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있다. 주검이 아니라 죽음이다.

일흔 살 남자와 마흔 다섯 살의 여자가 몇 분 간격으로 죽는다. 사는 집에서. 조그만 테라스가 있는 막다른 골목집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여자는 타살된다. 남자는……

 

아니, 다시.

그들은 베를린에서 본으로, 본 시내에서 북서쪽 타넨부쉬의 후미진 골목집으로 돌아온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도착하여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아침 남자가 일찍 일어난다. 나이든 사람 특히 장군의 이력으로 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은 상례다. 타이프라이터에 앉은 그는 뮌헨의 아내에게 일상적인 편지를 쓴다. 두 번째 편지지를 타이프라이터에 끼운다. 주어 다음 동사 ‘해야한다’의 철자 중간에 일어선다. 타자기 전원은 켜져 있다. 침실에서 잠들어 있는 젊은 연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동반자, 녹색의 아이돌. 장군 출신답지 않게 퍼싱II 서독 배치 정책에 반대하며 돌아선 그의 이력은 녹색당에서 이 아이돌과 함께 빛났다, 빛났었다. 선제공격을 염두에 둔 미사일 배치는 유럽 내 군사 균형을 깨뜨린다. - 라고 사직서를 썼던 그 손으로, 조금 전에 편지를 쓰던 그 손으로 피스톨을 든다. 자신을 쏘기 전에, 잠들어 있는 연인을 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우리가 행하지 않고 놔두면, 우리는 생각도 못했던 일을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 라고 말했던 연인의 입은 영원히 닫힌다. 희망을 위해 투쟁 - 이라고도 썼던 그녀의 손은 썩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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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들, 47호 (2017년 봄호)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5:04

 

“봄은 멀고 다리 밑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3. 다리 밑
2017년 03월 06일 (월) 14:49:0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밤새 또 다리 밑에서 얼어죽은 사람이 있었구나, 쯧쯧.”

아침 일찍 신문을 보신 아버지가 아침 밥상에서 한마디 하셨다. 어쩌다가 장독대에 쌓인 하얀 눈 틈새로 얼어죽은 까치를 발견해서 놀란 것과는 또 다른 무서운 전율이 일었다. 밥알은 모래알이 되었다. 밥알을 씹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만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다리 밑’이 참으로 무서운 화두였다. 고집이 센 아이에겐 으레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애라서 그런다고 겁박하거나, 다리 밑에 모여 사는 집 없는 거지들은 아이들이라도 잡아먹는다고 위협을 했다. 그래도 가장 무서운 말은 다리 밑에서 누군가 얼어죽었다는 신문기사였다.

어린 나름대로 철학을 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인간의 입을 창조했을까. 왜 날마다 똑같은 일, 먹어야 하는 일을 시켰을까. 입 때문에 사람이 싸우고 죽고 그럴 것을 몰랐단 말인가. 공짜인 햇빛과 물만 먹고 살아가는 식물들은 좋겠다. 동물은 공짜인 산소 말고도 먹이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동물인 인간에게도 먹이가 필수적이다.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 식물을 먹이로 하는 것으로 모자라 움직이는 동물까지를 먹이로 삼는다. 너무 어려운 일, 불공평하다. 나는 식물이고 싶다. 아니 풀만 먹는 토끼이고 싶다….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고귀하다는 의미를 알 수 없던 어린 시절이었다.

 

내 땅에 심은 곡식으로 내 식구가 연명하던 옛날에는 한반도만 하더라도 같은 땅에 훨씬 적은 인구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농사법을 몰랐던 탓이라 했다. 분업의 세상이 와서 농경은 농경대로 축산은 축산대로 전문 경영이 가능하다보니, 이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게 되었다. 아니, 언제부턴가는 건강상의 이유로 식욕보다 섭취를 줄이려는 어긋난 세상이 됐다. 뭔가 어긋났다는 말은, 여전히 넉넉지 못한 가계로 아사 직전에 이르는 경우를 전하는 충격적 뉴스들 때문이다. 못다 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의 요절 소식을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비슷한 참상이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돈이 돈을 낳아 무한축적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졌거나 이 험난한 인생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다. 직업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판검사나 변호사는 올곧은 심성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도 편견이고, 누군가를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단언하는 판검사나 변호사가 있어서도 아니 된다. 그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재벌 3세로 태어났다면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지칭될 확률이 없었을 것 아닌가. 경찰도 자신이 단속을 받아 불리하면 신분을 속이고, 성직자나 교직자들도 파렴치한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동전까지 털어서 소방서에 기부하는 풀빵장사를 보라. 소유와 기부도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나로서 겨우 조금 더 아는 이야기를 하자면, 하인리히 뵐의 전후 작품 중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로 번역된 소설이 있다. 루르 탄광지대의 부유한 갈탄재벌의 아들이 전쟁 중에 돈과 권력의 결탁을 보면서 자라난다. 통장에 쓰인 어마어마한 숫자와는 상관없이 인색하게도 음식물을 아끼는 어머니, 심지어 바깥 애인에게조차 돈을 아끼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정상적인 교육의 기회를 버리고 어릿광대가 된다. ‘추상적인 돈’을 버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인과 군상』에서도 독특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 말기에 연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생필품(때로는 고급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 유산으로 받은 집을 저당 잡혀서 살아가는 그녀에겐 인플레 내구성을 지닌 잠정적 자산을 지불하고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다.

 

자산은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과는 무관하므로 무의미한 추상적 돈일뿐이다. 돈을 생계유지와 무관하게 무한정으로 축적하는 일, 더구나 그것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돈이 돈을 낳는 식의, 놀고먹으면서 부를 축적하는 일이라면 추악함을 넘어서 죄가 되는 일이리라.

놀고먹는 재벌이 있을까만은, 사람들은 재벌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요술과 마술을 행사하는 우수한 두뇌들이 고용되어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양분화를 고착시킨다고 믿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언어에도 없는 한국적 의미의 재벌은 영어로는 겨우 사업집성체(business conglomerate)쯤으로 소개된다.

신화적인 추진력과 성실함으로 부를 일궈낸 일세대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면서도, 가족이나 친인척 중심으로 출자한 지주회사를 핵심으로 여러 자회사들을 지배하는 현재의 재벌구조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적은 지분을 가지고서도 경영권을 독단으로 행사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재벌가의 의지가 최근 국정농단의 사태에서도 무거운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다리 밑 지키는 딱한 소수는 여전히 존재한다

 

왜들 다 쓰고 죽지도 못할 엄청난 양의 돈을 원할까. ‘자손대대로 물려줄 자산이니 잘 관리하라’고 했다는 자산이 어디 한 두 군데인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서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고, 둘 사이 격차가 클수록 부의 불평등 구조가 증폭된다.’는 피케티의 주장에 자본가들은 귀를 기우려야 할 때다. 죄까지는 아닐지라도 돈만을 추구하는 일은 너무 허망한 일이다. ‘일생을 돈 벌기에 매달리는 것은 야망의 빈곤이요, 자신에게 너무 시시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오바마의 말이 신선하다. 우리는 돈 자체보다는 조금 더 나은 존재이니까.

사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그 밥을 벌기 위해서 많은 좋고 나쁜 일들을 해야 하는 숙명이지만, 그 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칫하면 낙오자가 될 상황이니까. 몰락은 의외로 쉽게 오나 보다. 오늘도 천변 산책로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혹시 다리 밑 사람들이 간밤에 이부자리로 썼을 쓰레기 버금한 물건들에 마주치면 가슴 쓰려 어쩌나. 옛날에는 다 같이 주렸다지만, 지금은 더러는 건강과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로 안간힘을 쓰는 세상이 되었건만. 이 딱한 소수는 어쩌다가 다리 밑으로 밀려났을까. 촛불에서 십분 거리, 봄은 멀고 여전히 춥고 배고픈 다리 밑을 어쩌나.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7. 3. 7. 15:04

 

 

중학교 가는 우빈이 그리고 4학년 되는 성빈이를 위한 미니 백 - 용도?

 

그건 모르겠다. 우빈에게는 순천 이모할머니가 줄 100 달러 축하금도 넣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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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