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린다. 국제PEN한국본부 주관, 9월 15~18일 경주.
기념문집을 내는데 6개의 주제 중에서 한 편을 내도록 되어 있다.
처음 것은 제출 한 것, 나중 것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이다.
주제: 내게 특별한 우리말
대단원을 지나서 다시 한글에
다행스럽게도 일제 치하가 아닌 세상에서 이 땅에 태어난 나는 한글전용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았다. 지금 쓰는 용어인 문법은 말본이었고, 실제로 교과서 제목이 그랬다. 심지어는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모교는 배꽃큰애기배움터라야 한다고까지 한글 사랑에 목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말 우리글은 공부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면서 자랐기에 우리 음악도 당연히 7음계라 믿어버렸다, 제법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러니 우리 것은 모두 그냥 저절로 있는 것이고, 뭔가 낯설고 어려운 것이 학문의 대상이리라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 살았을 뻔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연구논문을 쓰면서 오직 갈수록 멀어지는 그것들을 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순간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이런 고백과 함께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설 쓰기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 글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하려니 내가 소설은커녕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글쓰기를 배워 본 적도 없이 논문이라는 이름의 글들을 써댔다니. 우와,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번갯불에 콩 볶는 심정으로 남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서 처음 한 일은 한글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다 살고서 무슨 짓이람, 이라고 핀잔할 지경인데도.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계속 외국어만 파던 대학의 언어교육원 어딘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교사가 된다는 상상은 어색했지만, 분명 국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때까지도 국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따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국어는 다만 나라말인 것을, 한국어라야 고유의 우리 언어를 국제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가며 부끄러움 속에서 단기간이나마 (한)국어를 배웠다. 내친 김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룹 스터디도 하고 혼자 날밤도 샜다. 과락은 면했던지 2차 시험을 보러 갔을 때에는 한참 젊은 면접관들 앞에서 얼얼했지만, 막상 자격증을 손에 쥐자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일진대, 무턱대고 평생 써댄 글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게로 치면 어떤 것은 1킬로그램을 어떤 것은 2킬로그램을 넘는 것들이었으니 이들을 어쩐다?
기억을 왜곡하기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고는 새로운 한글로, 내게는 새로운 한글로 글을 쓴다. 새로 쓰는 글들이 많아지면 잘 못 썼던 글들이 덮이기라도 하는 양. 덮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님을 알지만 모른 체하기로 한다. 어차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라고 위로를 한다. 나의, 우리의 한글로 글을 쓰면서 외국어 공부할 때만큼 사전을 찾는다. 글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서 살핀다. 잘은 아니더라도 틀리지는 말자고, 잘 쓰는 건 타고나거나 어떤 은총의 문제이려니 틀리게 쓰는 일이나 말자고 애를 쓴다. 물론 세상 일이 애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알 만큼은 살았다. 그래도 다른 묘수가 없다. 다만 한글을 다시 배우게 된 것이 기쁠 뿐이다. 내 말을, 우리의 말을 늦게라도 다시 찾은 것이 의미라면 의미다. 한 편의 연극일 인생의 대단원을 지난 오늘에서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니, 의미를 떠나 나는 그냥 한글에 파묻혀 있다. 내 글쓰기가 세계를 폭로하는가, 사르트르의 말인데, 그건 그 다음 일이다.
주제: 한국적인 정서
제목: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 민족에 알맞고 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정서가 있으리라. 한국인에게도 한국에 알맞고 한국의 특징을 보여 주는 정서가 있어 마땅하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에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세계가 한 뭉텅이로 글로벌스탠더드에 입각해서 글로벌경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우리민족은 새로움에 능하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천재적 감각을 자랑한다. 식민지배의 질곡과 내전의 참상에서 놀라운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낸 것 또한 새로운 가치를 날렵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한 결과라고 한다. 유사 이래 공동체 의식 속에서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자유’가 초고속으로 우리 사회 속으로 이식되었다. 자유연애, 자유결혼,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온통 자유 천지다.
거기에 우리는 예부터 우물 안 개구리를 경계하리만치 독선적인 기질이 있다. 사전은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을 독선이라고 푸는데, 독선적인 사람은 자신이 독선적인 줄 모르기 때문에 독선적이 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또한 독선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 독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깊은 개성적 성찰보다는 유행되고 있는 가치들에서 버무려 낸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데 있다. 유행, 다시 말해서 외면적 평가의 기준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독선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자유경쟁으로 얻은 돈의 위력과 자유선거에 의해 잠정적으로 대표가 된 그들의 독선은 대중을 벼랑 끝으로 유치할 수도 있다. 대중의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기 때문에 회의도 주저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훌륭히 성공한’ 그들이 내세운 기치를 추종하다 보면 거의 한 줄 서기를 해서 그리로 달려가게 된다. 그들이 내어 건 깃발에는 ‘자유’가 너풀거린다. 대중은 자유를 향해 죽을 경쟁을 한다. 친구도 형제도 팔꿈치로 제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당위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앞서 달리는 사람들을 좇아 모두가 달려가는 길에서 옆도 뒤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물론 다른 가치나 방식을 거론하면 순간에 낙인찍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큰 소리를 낼 조건이 아닐 때에는 더욱 몸을 사려야 한다.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오늘날 한국에는 정서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에 내어 줄 틈이 없다. 새것에 취한 채, 학문과 예술마저 유행을 좇느라, 정녕 우리의 문화유산의 뿌리 없이도 앞으로만 내달려도 좋을 것인지. 밥이 부족했을 때 서로 양보했던 우리네 인심은 밥이 넘쳐나는데도 나누기는커녕 빼앗는 현실로 바뀌고 말았다. 국민소득 2500불인 나라에서 연극에 예술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병들고 굶어서 죽어가는 불공정 분배를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방치하고도 숨을 쉬며 살아간다. 언제부턴가 목소리 큰 사람이 대접 받는 일이 다반사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목소리 큰 아이가 늘 이겼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공동체도
늘 49%는 51%에 눌려서 소수의견으로 폐기되는 것을 견뎌야 한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은 종말의 시작이다. - 카뮈가 『페스트』 영문판 서문에 썼다는 이 말을 반추해 본다. 대중에게 깃발을 내어 건 위정자들이 이 말을 음미해보면 어떨까.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내건 깃발 만 옳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좇아가는 이 가치 만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이 자유이지 이 경쟁은 공평하지도 않고 심하면 살인적이라고. 나의 자유는 필히 너의 자유를 다소간에 다치게 하는 것이라고. 그 또한 한이 되고 한을 키울 것이라고. 그러니 자유의 천칭 다른 한쪽에 평등을 올려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발언에 별 효력이 없는 한 무명소설가의 부질없는 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