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2. 4. 19. 10:48

은실

 

 

『PEN문학』2012 5,6월호(통권 108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146-165쪽.

 

 

 

  은실이 거의 울고 있었다.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은실은 내 바로 손아래 동생이고, 딸 뿐인 집안에서 아버지 어머니랑 함께 사는 효녀다. 사람 좋은 제부 덕에 그만할 것이었다. 그런 은실이 전화 저 쪽에서 말을 잇지 못한다.

  언니, 어쩜 좋아.

  왜, 왜 그러는데? 아버지가 안 좋으셔? 아님 엄마가?

  아니, 승연아빠가, 승연아빠가 그래. 무서워 죽겠어. 지금 병원에 있어.

  뭐야, 이 밤에? 그럼 입원한 거야? 왜? 그리 단단한 사람이?

  강단은 무슨. 조용했지, 그냥.

  그래, 조용했던 사람이 왜? 어디가 아파서? 무슨 병이냐니까?

  모르겠어.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아. 아무 상관없는 말들을 계속 내뱉고 있어. 기계처럼. 무서워 죽겠어.

  뭐라 그러는데?

  병원에서 그대로 입원시켜놓고 집에 연락을 했다니까. 해서 그냥 쫒아왔어.

  병원에서 바로 입원을?

  그래, 옆방 놀이치료실 여선생이 퇴근하려다가 들여다보았었대. 검사시간은 벌써 끝났는데 안에서 소리가 나서. 승연아빠가 검사실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더래. 얼마나 놀랐겠어!

  뭐야?

  치료실 선생이 김샘, 김샘을 아무리 불러도 안 되니까 이비인후과 진료실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왔대.

  뭐야, 그럼 정신이 나간 거야?

  뭐 그런 거 비슷하대나 봐. 한 박사야, 나 무서워.

  거기서 한 박사는. 그래 언니가 일단 올라갈게. 낼 일찍 출발해도 한낮이 다 되겠지 뭐.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계셔?

  자세히는 말씀 안 드렸어. 어지럼증으로 퇴근 못 하고 그냥 병원에 있다고 둘러댔어. 물론 의아해하시지, 언제 아파 누운 사람이었어? 링거 꼽고 누워있으니 병원 가서 함께 있겠다고 왔지 뭐.

  제부네 집은? 누님이랑 형님이랑?

  나 좀 봐. 어머나 몇 시야, 더 늦기 전에 거기 먼저 연락해야지. 끊어, 끊어!

 

 

  은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제부네 쪽에 연락도 않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은 그냥 본능이었을 것이다. 제 일이니까 제 언니에게! 그만큼 남편의 일과 자신의 일을 동일시 한다는 뜻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지금쯤 제부네 집에선 얼마나 놀랐을까. 거긴 부모님이 안 계시고 큰형이 아버지 같은 집안이라 했다. 자세히는 내 머리 속에 없다.

  달력을 올려다본다. 낼 올라가면 월요일까지는 괜찮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갈 생각으로 미리 간단한 짐을 챙겨둔다.

 

 

  봄은 봄인데 우중충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 같다. 나서다 말고 다시 현관문을 열고 구석의 우산을 구겨 넣는다. 살 하나가 잘 굽지 않는다. 은실은 비뚤어진 우산을 보면 칠칠맞다고 핀잔일 것이다. 한길에 나서자 물주전자를 내려놓았는지 가스를 잠갔는지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다시 집으로 향한다. 내 방이 화재에 휩싸이는 것도 문제지만, 방화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옆방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흠집 내서야 되겠는가.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성가시기도 하다. 무늬가 짝짝이 다른 양말이 눈에 들어와서 미소가 나온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양말이라고 해서 꼭 아름다울 리는 없다. 나는 괜찮다, 조금 다른 무늬의 짝짝이 양말이. 무늬도 다른 양말이 싸지도 않네, 라고 하던 은실이 생각났다.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생산가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은실은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부러 다른 무늬로 짜면서 경제성으로 그랬다고 하지는 않겠지, 하면서.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 동생이 그냥 언니보다 더 언니 같아지나 보다.

 

 

  제부가 근무하는, 아니 지금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려면 평택에 내려서도 근 한 시간을 이동한다. 집이 더 가깝지만 방향이 다르다. 짐이 짐스럽다. 이래서 사람들이 장거리운전을 마다하지 않는지 모른다. 병원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버스에서 내렸지만 건물에 들어설 즈음에는 사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긴 시간 기차에 버스에 시달려서이기도 하겠지만, 병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겁이 난 탓이리라.

 

  저, 청력검사실 김 선생님이 입원하신 곳이 어딘가요?

안내에선 청력검사실 김 선생님을 잘 몰랐다. 이름 석 자를 대고서야 안내 받은 곳은 그냥 이비인후과 병동이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귀에 문제가 있다면 그리 대순가? 일단 병원 밖의 일반인들은 이비인후과라면 조금 안심을 하게 된다. 안과라고만 해도 만에 하나 실명에 이를 병도 있어 무섭지만, 귀머거리가 된들 좀 어떠랴,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다.

 

  병동 간호사는 내가 처형이라는 말에 다소 놀란다.

  김샘이 우선 우리 병동에 계시긴 한데, 지금 들어가시기가 좀 뭣하신데요.

  예?

  놀라실까봐서요. 계속 헛소리를 하다 잠들다…….

  그렇담 간호사님 말씀을 들어야겠지요 뭐. 그런데 어쩌다가?

  모르세요? 어제 퇴근 무렵에…….

  간호사는 소리를 낮춘다.

  어제 퇴근시간에 놀이치료실 민샘이 첨 발견했대요. 검사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중얼중얼, 암튼 모두가 놀랐대요. 일단 병동에 입원해 놓고 밤엔 응급검사 몇 가지만 했고, 오늘은 보자, 지금 정신과 쪽에서 검사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피.에이.아이도 할 수 없는 상태고.

  그게 뭡니까?

  네, 성격심리검사 종류요, 그런 것이 기본인데 한 시간 쯤을 조용히 검사를 못 하죠 아직은. 그게 디.에스.엠 - 그게 혹시 정신질환 진단 관련해서요.

  어쩌나. 식사는 제대로 하나요?

  그럼 좋게요. 링거 들어가는데, 안정제랑 함께죠, 지금 다이아제팜 10미리그람 맞고 잠들었을 걸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던 나는 결국 복도 한쪽 휴게공간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은실에게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야 될 일이었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일단 좀 시원했다. 전화기는 속 어딘가로 들어가서 얼른 잡히질 않았다. 그 사이 은실이 전화가 세 번이나 걸려와 있었는데 몰랐다. 기차에서 진동으로 바꾸어 놓은 때문이었다.

 

  나야, 언니. 병원에 왔어. 왜 승연아빠 혼자 있어?

  일단 아침 회진까지 보고 잠깐 집에 왔지. 며칠이나 걸릴지, 챙겨 갈 것도 있어서. 승연아빤 어쩌고 있어?

  병실에 못 들어갔어. 간호사가 들어가지 말래. 자다 말다 혼란스러워 한다고. 아직 검사들도 안 끝난 모양이야.

  그럼 어쩌나. 언니, 나 곧 출발 하니까 언닌 집에 와. 와서 아부지 어머니 보고 갈 거지?

  그래.

  암튼 언닌 집으로 와. 승연이 승주 좀 봐 줘. 언니, 일감 가지고 왔지, 노트북이랑?

  왜, 일감은?

  빨리 내려갈까 봐서 그러지, 며칠 좀 있어! 그럴 거지?

  우선 여기 있어 볼게, 천천히 와.

 

  휴게공간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개그프로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에겐 다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할 수 없이 병원건물 밖으로 나가볼까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구내식당 같은 데 식사는 끝났을 것 같았다. 뭔가 뜨겁고 물기 있고 매운 것을 먹고 싶은데. 왜 이런 순간에 시장기가 밀려오는지. 가끔 이렇게 느닷없이.

 

 

 

  혼자 살아온 시간들이 통째로 시장기로 몰려오면 기억은 늘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무슨 생각으로 이역만리 공부를 향해 돌진했을까. 무슨 자랑이라고 외국문학의 박사가 된다는 것에 청춘을 걸었을까.

  외환위기의 봄. 졸업식을 앞둔 겨울, 책에서만 배웠던 국제통화기금이 실체로 다가왔다. 아이.엠.에프 위기. 사람들은 장롱에 넣어두었던 금반지들을 내다 팔았다. 그보다 앞서 재미교포들이 달러를 모아 보내오기 시작했단다. 놀라운 애국애족이었다. 난 아니었다.

  세상은 안팎으로 흉흉했다. 그 한해도 뉴스는 온갖 죽음들을 날랐었다. 여름에는 대한항공이 괌에서 추락했다. 200명도 넘게 순간에 그냥 변을 당했다. 베트남항공이 뒤따랐다. 작은 비행기였던 것이 그나마 다행, 한국인도 있었다. 그 사이 세기적인 교통사고가 있어 떠들썩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 37세로 굵고 짧게 살다간 영국여자의 최후가 된 파리의 터널은?

 

  그 겨울 나는 파리를 향해 진력하고 있었다. 사실이지 도망갈 궁리를 했다. 우선 재수마저 시들시들 실패한 은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컸다. 우리는 마주앉아도 말이 겉돌았다. 떠날 구실도 좋았다. 대학졸업장은 은실에겐 미안함이었고, 사회엔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으니까. 영문과 부전공을 했던 친구들은 예상 밖으로 입지가 넓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전격적으로 영어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영어 세상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그러니까 멋모르고 다른 부전공을 하지 않았던 내 불어교사 2급자격증은 별 쓸모가 없었다. 임용고시에 아예 불어과는 없었으니까. 더러 사립학교에 원서를 넣어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용기를 낼 이유가 있어야 했다. 나한테는 용기가 없었겠지만, 이유도 없었다.

  봄이 되자 꿈틀거렸다. 그동안 공들였던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내게 곧바른 길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도 대학원 진학이 틀어졌으니 일단 파리 행이 낫겠다고 하셨다. 언제까지가 상현달 인생이었을까? 아니, 조금 뒤까지도 달은 자라나고 있었을까? 손에 묻은 크루아상의 기름기를 닦고 또 닦으면서, 바게트 부스러기를 줍고 또 주우면서, 그렇게 살면서 느꼈던 허기, 시장기 속에서도.

 

 

  그때의 허기는 비단 위장의 시장기만은 아니었다. 쥬 느 꽁프랑 빠, 쥬 느 쌔 빠 - 프랑스 말 잘 못한다는 구실로서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화불량을 누군가 위의 문제라고 말한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소화불량은 귀의 문제였다. 삶은 언어로 비롯되고, 귀가 불량이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으.에프. 캠퍼스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제9구역의 캠퍼스에서 주변문화를 향유하며 또는 홈스테이를 통해 반쯤은 프랑스 사람이 되어서 대학에 들어가는데 무엇이 힘들랴! 국일관이며 참새와 방앗간 등 한국식당도 좋을 것이고.

  그때 나는 귀의 소화불량으로 영양실조에 걸려 입으로만 먹어댔다. 바게트를 먹다가 물리면 크루아상으로, 다시 곧 바게트로. 요리가 예술인 세상에서 무조건 빵들만 먹어댔다. 은실이가 - 은실은 내가 떠난 그해 겨울에 결혼을 했다 - 빈 우유깡통에 넣어서 땜질해서 보내준 고추장은 잼 대용이었다. 그렇게 탄수화물을 먹어댔으니 뚱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지고 간 옷들이 많지도 않았지만 곧 꿰어 입을 수도 없이 뚱보가 되어갔다. 패션의 중심에서 뚱보는 가만히 엎드려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공부는 가만히 엎드려야 잘 되기도 한다. 그 덕택에 공부는 빨리 된 셈, 그것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그것이 괜찮은 것인 줄 알았다. 파리에 살면서 파리도 모르고 파리 사람도 모르면서도 서둘러 학위를 끝내는 것. 그것만이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파리는 자판위에서 적당히 벌리고 춤추던 내 손가락 사이로 다 사라지고 없었다. 파리에서 살면서 파리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 그 다음에는?

  아니 그런데 속이 쓰리다. 어디 컵라면이라도 먹어야겠다. 매점엘 가자.

그런데 금의환향처럼 돌아온 모교 캠퍼스에서는 어땠나? 그러고 보면 연속…….

 

 

  언니, 어디야? 집에 가고 있어?

  아니, 그냥. 너 오는 것 보고 갈까 해서. 기다릴게.

  어, 그래?

  은실은 안절부절못했다. 계속 전화를 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금의환향인줄 알고 돌아온 그때, 맙소사,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은실은 거의 만삭이었다. 둘 째 아이였다. 세 살 승연이는 뒤뚱뒤뚱 걷다 넘어지다 했다. 웃다가 침을 흘렸다. 우리가 헤어져 있던 4, 5년 사이 은실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있었다. 튼실해진 은실이. 김실이가 된 은실이. 제부는 조용했지만 은실이 기댈 만한 어깨를 내주었나 싶었다. 나는 뭔지 모를 짐을 벗은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명치끝이 막히곤 했다. 막힘과 허기가 샴의 쌍둥이였을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은 프랑스어 때문만은 아님이 분명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모교의 괜찮은 강사시절에도 마찬가지로 허기 속에 살았던 것 같다. 입은 늘 말보다는 먹는 일을 탐했다.

  강의는 어쩔 수 없었다. 강의는 말로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통로였다. 그런데 내 강의는 살아있는 말이 아니었다. 첫 학기에는 조심스러워서 그랬겠지만, 난 늘 강의 거의 전부를 미리 써둔다. 그러니까 다음 날 가져가서 하는 강의는 이미 죽은 것들이다. 보고 읽지 않고 외워서 읽더라도 마찬가지다. 간밤에 벌써 태어나서 조금도 자라지 않은 그 물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중간에 살짝 농담이라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까지도 살짝 표시를 해 둔다. 내가 강의시간에 혹시 농담을 했더라도 그것마저 즉흥적이 아니었으니 죽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머리통은 즉흥적인 발상이라거나 융통성이 없이 꽉 막혔다. 유연성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라 해도 내겐 없었다. 속이 말랑말랑한 식빵을 뜯어먹게 된 것이 한국에 돌아와서 빵의 변형이었다. 말랑말랑한 음식을 먹는다고 유연함이 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은 정말 따뜻하다 뭣해 뜨겁고 매콤한 무엇이 절실히 그립다. 이 병원 마당에서. 저만치엔 틀림없이 장례식장이 있을 것이고, 장례식장에는 뜨거운 국물이 있을까?

  멍청하도록 무례한 생각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식당에는 점심이 없을 시간이지만 장례식장엔 스물네 시간 식사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맞다. 그렇지만 배가 고픈 순간 장례식장을 떠올렸다면 참 엽기적이다. 아니, 결혼식장을 돌며 하객인양 점심을 해결하는 얌체족 이야기는 들었다. 축의금 봉투를 내밀어야 식권을 나누어주는 중산층의 결혼식장이 아니라, 아예 밥표 같은 것을 초월해서 식장이자 식당인 거대한 홀로 안내하는 부유층의 결혼식에 끼기가 쉽단다. 그러려면 옷만 잘 갖춰 입으면 될 터. 의복이 날개라고, 옷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문화가 여전한 나라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난 지금 결혼식 하객 면모는커녕 장례식장에 끼어들기에도 옷차림이 말이 아니다. 또 대부분의 장례식장에선 절을 하고 봉투를 넣고 식탁으로 안내되니까 몰래 비집고 들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니, 정녕 그런 국밥을 탐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뜨거운 국물은 라면국물이지. 식당 내 매점에서 김치라면에 물을 부어서 텅 빈 식당 한 구석에 주저앉았다. 저쪽에 스터디쯤으로 보이는 뭔가를 하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물론 하얀 가운들이었다. 식당이 빈 시간을 이용하는 모양이다.

 

 

 

  거기, 학교 카페테리아는 천장이 높았다. 값이 싼 음식들과는 어울리지 않은 높이라고 생각했었다. 음식 냄새를 잘 참을 수 있게 하기에는 높은 천장이 옳았다. 김이 나는 고기 요리를 즐기는 사람도, 요구르트와 사과 한 알만으로 점심을 먹는 여학생도 있었다. 난 샐러드를 먹었다. 빵은 미리 썰어가지고 간다. 바게트 - 굴러다니다 조금 마른 바게트에는 참치 캔을 더해 먹으라는 어느 한국학생의 말을 따라 그가 말해준대로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걸 산 적이 있었다. 해바라기 기름이었을까? 올리브기름에도 적응을 못하던 나는 슈퍼에 가면 안절부절못하곤 했었다. 뭔가 먹을 것을 거의 모두 슈퍼에서 해결해야 했는데도.

 

 

  단순무식하게 살던 그 세월 동안 나는 팡테옹에도 가보지 않았다. 루소뿐이 아니었다. 빅토르 위고도 에밀 졸라도, 아, 앙드레 말로도 거기 잠들어 있다고 하지만, 거기 까까이 간다고 뭘 더 얻을 것인가.

  모딜리아니의 무덤엔 가 볼 마음을 먹었다. 감수성 과잉의 청소년기에 무한한 흡입력을 지녔던 그림, 목이 긴 여자 잔느 에뷔테른. 아직 파리가 낯선 때였지만, 페르 라세즈는 20구역의 바로 같은 이름의 역에서 내려서 올라가면 곧 있으니 찾기 쉬웠다. 그 그림에서처럼 목이 긴 장미 한 송이를 살까 하고서 꽃집에 들렸다.

  바랜 금발의 뚱뚱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뿌르 쇼팽?

  농! 뿌르 모딜리아니! 그렇게 답하자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양 여성들은 거의 쇼팽을 찾아온다는 것이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이 서툰 동양여자였다.

  그렇게 실팍한 프랑스 아주머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딜리아니를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어쩌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객관적 평가도, 그의 세파르디 유대인인 혈통도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첨엔 남자가 죽은 다음날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가 어린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남서쪽 바뉴 묘지에 묻혔다가 10년이 지나서야 모딜리아니 곁으로 갈 수 있었다는 잔느. 스물세 살. 치명적 사랑, 나는 물론 사랑을 믿거나 그러지는 못한다. 믿을 증좌가 없었다. 내 가슴을 흔들어놓은 것은 나중에 화첩에서 본 그의 카리아티드 몇 점이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에 이적행위에 대한 중벌로서 카리아이 마을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여자들은 건축물을 떠받치는 벌을 받았다는 것이 신화적 설명이다. 하지만 고전적 에레크테이온 신전이며 오스트리아 국회건물에까지 카리아티드 입상들은 아름답기만 하다. 모딜리아니의 그것들은 도발이었다. 건물의 무게에 짓눌린 채 힘을 지탱하고 있는 분절된 나신들은 그 단순한 선에서도 터질듯 했다.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 낼 것인가. 나는 해석 중독자였다.

 

 

  나는 그때 모딜리아니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 안내에서 받은 묘지지도를 가지고서도 찾지 못했다. 안개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묘석들 사이를 헤매다가 화려한 검은 무덤에 닿았다. 프루스트였다. 높이보다 넓이가 큰, 반듯하게 잘라낸 매끄러운 검은 대리석은 부동의 단단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 나는 영생이다, 뭐 그 비슷한 메시지 같았다. 평생을 공부하고 글을 쓰기만 해도 되었던 사람. 약한 몸이 변명이 될까? 의식의 ‘흐름’이라니? 의식이라니?

  사교모임에 드나드는 젊은이가 홍차에 프티트 마들렌을 적셔먹는다. 순간 과거의 무의식적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로써 자신의 길을 자각한다고? 동급생 거의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넋을 잃고 매료되었을 때, 그때 그 강의를 하신 교수님은 대단한 평판이 있는 분이셨다. 반대로 그때 나는 프랑스문학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후회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자아가 시간 속에 매몰되어 해체된다고? 열아홉 살 나는 자아만이 기댈 곳이라는 독단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래서 프루스트 같은 박학다식한 회색 인물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 회색은 어스름 매력의 베일이 아니라 몽환이었다. 숨은 - 당시에는 커밍아웃이란 없었으니까 - 동성애자의 혼돈 같은 것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싫어했다. 그 특별난 취향은 예술가들의 병적 특성일까? 영혼이 있다면 그 크기가 좁쌀만 한 내게는 위대한 영혼들을 담을 공간이 부족했다.

  그것을 거스르는 과정에서 문학 아닌 문학으로서 매료된 것이 장-자크 루소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사회 이전의 상태,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상태를 향하여 -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그때는 적어도 어떤 실체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어느 사상가나 작가의 생각을 ‘해석’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남의 나라 남의 글이나 파먹는 하이에나 …….

 

 

  전화다. 또 은실이다.

  언니, 어디야? 병원 나선 거야? 나 아직 도착하려면 30분쯤은 더 걸릴 텐데, 병실에서 보호자 오라는데?

  보호자? 그럼 내가?

  으응, 언니. 언니가 좀 가봐.

  그래.

 

 

 

  컵라면 쓰레기를 치운 둥 마는 둥 곧장 달려갔는데 병실이 비어있다. 옆 병상에도 사람이 없다. 간호사실로 내닫는다.

  염려 마세요. 검사 갔어요. 보호자가 있었대도, 따라가 보아도 할 일은 없어요.

  할 일이 없으면서…….

  근처에 계시면 따라갈 수 있을까 해서. 가도 도움은 안 됩니다, 뭐.

  무슨 검산데요?

  나중에 주치의 선생님한테 들으세요.

 

 

  다시 넋 없이 환자도 없는 빈 병실에 앉아있자니 내가 환자가 되는 기분이다. 은실인 언제 오려나.

 

 

 

  우리가, 은실이 고등학교에,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봄은 따뜻하기만 했다. 우리 둘은 집에서 보다 더 친해졌다. 은실은 서울의 여고에 진학할 수 있었던 행운을 언니 덕이라고 신이 났었다. 나는 그리 신날 것은 없었다. 여자들만의 대학생활은 고등학교의 연장선에 있었다. 딸들을 여자대학에 보내겠다던 어머니의 소망이 크게 작용했고, 또 불문과가 신설된 대학으로 진학하면 진로가 좋을 것이라는 고3 담임선생님의 권유도 있었다. 왜 하필 불문과였는지는 의외로 간단했다. 영어로 내 이름은 케이에스 에이취가 되어 아이들이 ‘미스 에취’하고 놀렸었는데, 불어로는 ‘마드무아젤 아슈’ 얼마나 멋진가. 또 불어 선생님이 그러셨다. ‘쓰 끼 네 파 끌레 네 파 프랑세.’ - 명확하지 않으면 프랑스 말이 아니라니. 더 매력적인 유혹도 있었다. 모음마다 색깔이 있다니. A는 검정색, E는 흰색, I는 빨강색, O는 파랑, U는 초록이다. 어린 내게는 랭보가 프랑스어를 대표했었다. 대학생이 되어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불문과 학생답게 세계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가 생긴 정도였다.

  도버 해협의 ‘처널(Chunnel)’ 개통 소식. ‘채널 터널’을 줄여서 그리 부르는 곳. 해저만 해도 40킬로미터를 통과하는 유로스타를 타면 파리에서 런던까지 2시간 반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인간승리! 아니, 기술의 승리! 인간승리라면 아파르트헤이트의 땅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뉴스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뉴스는 독서보다 더 직접적인 세계와의 연결고리처럼 느껴졌다. 책이 마음속으로 젖어든다면 뉴스는 곧 바로 피를 건드렸다. 물론 뉴스란 항상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해 여름 지독한 폭염에 비실거리다가 다시 캠퍼스로 돌아간 가을, 우리는 한번 끔찍한 뉴스의 중심에 들게 되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느닷없이 무너져 내린 한강 다리. 아직 8시는 안된 시간, 게을러 늘어터진 대학생들이 아직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은 고등학생들과 직장인들을 덮쳤다.

  게을러 횡액을 피하기도 하는구나, 그것은 훗날 먼 나라 911사건 때도 그랬다. 희망찬 아침이 절망과 죽음의 나락으로 변해버린 그 아침을 가까이서 경험한 우리는 갑작스레 벙어리가 되었다. 화두가 따로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휴대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사용자는 드물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도 그러려니와 손바닥 길이만큼 길고 무거운 그것을 실제로 쓸 필요를 몰랐던 때이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아버지는 ‘그날’ 모두에게 휴대전화가 있었으면, 삐삐라도 있었으면, 덜 놀랐을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사실 저녁때까지도 사건내용을 자세히 몰랐고, 무사하다는 연락을 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은실과 나는 양재동 고모네에 나와 살고 있었는데, 고모나 팽성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강바닥으로 떨어진 16번 버스는 남에서 북으로 가던 중이었고, 하필 우리도 그 방향이었으니 놀라실만했다. 은실은 가끔 나랑 함께 가겠다고 아침자율학습에 늦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금요일 아침에도 은실로서는 조금 늦은 시간에, 나로서는 빠른 시간에 함께 집을 나섰다. 한강 근처에 이르렀는데, 비뚤거리는 다른 길을 따라 다른 다리로 - 알고 보니 동호대교였다 - 강을 건넜을 때조차 은실이 지각할까봐 조바심을 내는 건 나였다. 설마 다리 상판조각이 통째로 강물로 떨어지고, 그 순간 하필 그 상판에 버스며 차들이 지났으리라고는, 더구나 은실이네 같은 학교 학생들이 그렇게나 많이 그 버스에 탄 채 추락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현실은 늘 상상보다 더 잔인하다. 그런 명제가 무서움과 불안을 동반하고 핏속으로 스며들었다. 도버 해협 바다 밑을 기차가 통과하는 세상과 다리 위로 버스가 지나갈 수도 없는 세상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각인되었다. 세상은 믿을 수 있는 세상과 믿을 수 없는 세상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럽으로의 정향이 어쩌면 벌써 그 가을에 확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하고 안전한 유럽의 이미지가.

  은실은 이후 학교생활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만큼 충격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같은 반 학생이, 그것도 한 자리 건너 친구가 국화 꽃 한 다발로 남다니. 자신이 탔을 수도 있는 바로 그 버스! 충격이라는 단어는 너무 완곡한 단어였을 것이다. 은실은 그해는 물론 2, 3학년을 다 마치도록 내내 뭔가 불안을 극복하지 못했다. 2학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행당초등학교 뒤쪽으로 방을 마련해 옮겨 주셨다. 고모는 많이 서운해 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작 은실이 양재동으로 주소를 옮겼으면 8학군 배정을 받았을 것인데, 하시면서. 대신 며칠이 멀다하고 우리에게 반찬을 나르셨다. 고모가 오셔서 은실이 응석을 부리느라 결석을 했는지, 은실이 결석을 해서 고모가 자주 들르셨는지. 아무렇거나 은실은 결석 투성이로 겨우 졸업을 하자 그냥 고향집에 틀어박혔다.

 

 

  그해 겨울, 은실이 졸업을 하고 나는 4학년만을 남겨놓은 겨울 내내 나는 서울에 남았다. 은실이 고등학교 생활을 망친 것이 꼭 나 때문일 리는 없지만, 은실이 서울로 나온 것은 분명 나 때문이었다. 나는 은실의 실패를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설날과 대보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보름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아버지는 은실을 데리고 강남의 학원가를 둘러보러 가셨다. 이제 다시 고모네로 옮기면 학원 다니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설득하시겠다고 했다. 그날 더는 건널 필요 없는 그 한강변을 왜 다녀오셨는지. 다리 붕괴사고 현장에 이제 얼마 안 있어 새로운 다리가 준공된다고 하는 때였다. 아버지는 은실에게 현장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다시금 다리를 건너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려고 하셨을 지도 모른다. 재차 충격을 받은 것은 은실이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였을지. 아무튼 집에 들어오시면서 집안에서 웬 파도소리가 난다고 하시더니, 그것이 갑작스러운 이명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원래 귀가 썩 좋은 편은 아니셨다. 우리는 그냥 아버지들은 다 그러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그 동안 한쪽 귀만으로 생활하셨던 것, 그런 걸 도통 몰랐다. 그러다 심한 이명과 함께 갑자기 전혀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까 다들 놀랐다.

 

  괜찮다, 조금 만 더 크게 말해 봐라.

  아버지이!

  아버지 소리는 안다, 다른 것 말해 봐라.

  아빠가 언제부터 이러세요? 엄마도 모르셨어요?

  나도 건성이었구나. 전화 온 걸 바꾸어 드렸더니 통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날더러 뭔 소린가 들어보라고 하셔서 깜작이나 놀랐지. 전화 끊고 말을 걸어보니까 통 못 알아들으셔야. 이게 어찌된 일이라니!

  아빠 아빠, 내 목소리 안 들려요? 막내도 방방 뛰었다.

  괜찮다, 머리가 좀 띵한 것이, 몸살 나려고 그러나.

  몸살 난다고 소리가 안 들려요? 큰일 났어요, 병원엘 가야지.

 

  그러다보니 다저녁때였다. 모두가 조금 어리둥절한 채 저녁이 깊어 갔다.

  아빠가 서울 갔다 오셔서 병나신 거야? 나 때문에?

  은실이 숨죽이며 물었다.

  설마.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튿날 병원에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데, 은실도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은실을 말리셨다. 가까운 이비인후과에서는 큰 병원엘 가보라고 했다.

  보통 한쪽 귀에 이런 일이 오는데, 돌발성 난청이라고.

  그럼 왜 완전히 안 들리세요? 아부진 거의 못 알아들으세요.

  모르셨어요? 왼쪽은 오래 전부터 완전히 고장이 나 있으신데요. 어쩜 어렸을 때부터.

  그럼 어떻게?

  그러니까 큰 병원에 가셔서, 지금 당장 가셔셔 입원치료를 시작하세요.

  입원을요? 청력 때문에?

  예, 응급상황입니다.

  응급상황? 응급실에를요?

  응급실이 아니라, 일단 종합병원으로 바로 가세요! 서두르세요.

 

 

  그런데 그 금요일 오후를 또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귀가 안 들린다고 큰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버티셨다. 사리분간 보다는 고집 센 시골 할아버지들처럼 우기셨다. 그렇게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이번에는 은실도 기어코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일단 학교에 출근하셨다가 병원으로 가시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학교에 들어가신 동안 차 안에서 은실은 울 것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비인후과 첫 진료는 귀 때문이면 으레 청력검사실을 거친다. 검사실에서는 말 한 마디 없이 결과지만 내밀었다. 아버지는 청력검사실에서 받은 종이를 들고 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약간은 애송이로 보이는 초진의사의 말도 같았다.

  이 병은 입원치료가 최선책입니다. 물론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죽고 사는 일은 아니다? 그러면 되었다, 나는 또.

  아버지는 난감해하셨다. 새 학년 교실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고 하셨다. 차선책으로 귓속 주사로 결정을 하셨다. 이상한 자세로 20분 이상을 앉아 계셨는데, 밖에 있는 우리는 기웃거리며 불안에 떨었다.

  그 때 청력검사실 아저씨가 복도에서 끼어들었다, 왠지 화가 난 듯.

  의사가 응급상황이라면 응급상황입니다. 아버지 한쪽 귀마저 안 들리시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요?

  입원치료가 확실히 더 좋은 거예요, 확실히?

  은실이 그에게 다가가서 불안하게 물었다.

 

 

  아버지도 밤새 고심 끝에 다음날 담임을 내놓으시고 입원을 하셨다. 병가 2주면 치료가 끝난다니 믿어볼 밖에. 그 봄학기, 티.에이. 일을 계속하면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나는 서울에 있어야 했다. 은실이가 아버지 병원 시중을 도맡았다. 그러고 저러다 그 청각사가 아버지의 사위가 되었다. 이듬 해 내가 서둘러 프랑스로 떠난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착실하다는 단어에 걸맞은 제부는 작은 종합병원의 청각사다. 단순한 일이어서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았다. 승진이나 그런 것과 거리가 멀 것이니까. 어찌 보면 그냥 하나의 부품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이비인후과가 있는 병원이라면 꼭 한 명은 있어야 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런데 왜? 어쩌다가?

 

 

  상념에 잠긴 나를 은실이 깨운다.

  언니, 아직 있네.

  어, 벌써 와?

  승연아빠는? 아직 안 끝났어?

  모르겠어. 그냥 뒤따라 갈 것 없다고 해서.

  그렇지 뭐. 난 어디 좀 가볼래. 언닌 그만 엄마한테 가봐. 애들도…….

  아니, 잠깐. 승연아빠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는 거야. 아무 상관없는 말들이라니. 기계처럼 무슨 말을.

  그게, 그게 말이야. 청력검사 때 쓰는 말들 같이 단어들만. 뜻도 뭣도 없이.

  뭐, 청력검사?

  그래, 귀, 힘, 갓, 잔, 수도, 우유…… 그런 말들 말이야. 나중에 얘기 해. 나 어딘지 검사실로 가볼래. 몇 층이래?

  그게, 이비인후과 검사가 아니라던데…….

 

 

 

  정신없이 서두는 은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병실을 나섰다. 청력검사 때 쓰는 말들? 그걸 외워서? 귀, 힘, 논, 맛……. 그때 아버지가 청력검사를 할 때 왠지 그 좁은 공간을 꺼리셔서 내가 따라 들어갔었다. 검사자 옆에, 그가 밀어준 작은 작은 의자에서 이상한 단어들을 들었다. 솔, 잔, 국, 솜, 닭, 옆? 아니면 수도, 마포, 학교, 돼지, 접시, 기차, 바다, 전기 그런 것? 그날 밤 나는 그 의미 없는 낱말의 집합이 신기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다가 웃었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제부라면 그것을 완전히 외울 법도 하였다. 외우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늦은 오후, 바람이 차다. 봄바람은 품으로 드는 님바람이라더니.

  좌석버스에 오르니 눈이 절로 감긴다. 지하철이건 버스건 자리를 잡고 앉으면 눈을 감는 버릇이 이젠 아주 굳었다. 집으로 가자면 우선 40분쯤을 가는데 그 사이 잠이 들진 않겠지. 통복육교에서 갈아타고 나면 그땐 눈을 뜨자. 10분 정도에 내려야 하니까. 아침에 남녘에서 올라온 시간의 흔들림까지, 아득하다. 은실이 이 일을 어찌 감당할까. 은실이 다시 힘든 상황에 빠진다면 나는 어쩌나. 아버지는 또 속내를 아시면 은실이가 안쓰러워 어쩌실까.

 

________________________

 

PEN, 2012년 5,6월호 투고

* 국제펜클럽 제78차 대회(경주)를 앞두고 원고청탁을 받아 뛸듯이 기뻤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주대회에 참가한다. 9월 9~15일.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3. 29. 01:29

                            한국어


  지루한 장맛비 사이로 한줄기 태양이 스민다. 후줄근한 땀이 베이는 오후, 강의실 창밖으로 푸르다 못해 검은 느티나무 잎들이 너울거린다. 벌써 만하인가.

  베를린 다음은 어디에서 서성이는 것일까.

  그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 무소식이 늘 희소식일까. 어느 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내게 보낼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린다. 한 동안 내가 그 자료들에 매달려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의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정리할 과제물이 없어진 상태에서, 난 할 일이 없어진 금단현상을 겪었다. 전공논문은 접은 지 한참 되었다. 다시 그리로 돌아갈 여력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는 뭔가 잘 못되었다고 느껴질 무렵 언어교육원에서 벽보를 보았다. 한국어 -

  한국어가 무엇인지를 아는 한국인은 별로 많지 않다. 언교원에서 더러 한국어 강사들과 목례를 하고 지냈으면서도 왜 그들이 ‘한국어’ 교원인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한국어는 우리가 쓰는 언어의 객관적 명칭이란다. 우리들의 나라말 ‘국어’를 외국인들이 배우면 그들에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도 무관심한 것이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한국어는 내게 또 하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반짝 새로운 문을 가리키는 팻말이었다. 넋 놓고 그에게서 자료들이 오기를 기다리느니, 글 쓰는 형식에 다가가자! 글을 읽을 만하게 쓰고 싶었던 감춰진 욕망이 전기 스위치처럼 켜졌다. 한국인이 수강할 수 있는 한국어강의는 한 가지뿐이다.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 등록하기.

  그날, 모니터 화면 앞에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복잡한 마음이 일었다. 자발적으로 심문관 앞에 불려나가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자기소개서의 내용이었다. 단 두 개의 질문이 있었는데, 기대했던 ‘왜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습니까?’에 앞서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선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엉뚱한 놈이 A4 반 장 크기로 버티고 있었다.

  살면서 행한 선한 일? 그것도 가장 선한 일?

그런 빈 칸을 메우려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은 선한 일을 떠올려야 한다. 최상급 ‘가장’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어교사가 되는 일에 선한 일은? 자격증을 출원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교사양성과정 공부하겠다는데 선행 경력을 쓰라고?

  괜히 심통이 난다. 휑하니 화면을 바꾸어 <배달민족> 파일을 연다.

   …… 한번 흘린 비밀은 쏟아진 물이나 같으니까. 움켜쥔 손이 아프면 그는 또 놓을 것이다. 나는 가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흘려놓은 물에 덩달아 적시어진 채로.

  마지막 단어 ‘채로’에 커서가 머물러 있다. 나는 거기 그렇게 정지해 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킨 것인가. 물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보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내게 어떤 일을 주문한 적은 없다. 범인은 나다. 스스로에게 덫을 씌운 것은 나였다.

  ‘편집-찾기’ 메뉴에서 ‘배승한’을 따라가 본다. 그는 다만 파일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안도한다. 그는 적어도 내 파일 속에는 존재한다. 아주 사라질 리가 없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읽을 만하게 잘 써내기 위해서라도 국어공부를 해야 한다. 국어이든, 한국어이든, 무슨 상관이랴.

  다시 한국어교사양성과정 지원서로 돌아갔다. 눈을 질끈 감고 역설을 쓰기 시작했다.

  1.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선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 나는 그런 일을 해 본 것 같지가 않습니다. 1970년대 서울 근교 태생의 여자아이가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공부했고 유학 생활 동안에도 삶은 늘 경쟁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 오직 지적인 생활을 동경하면서 프랑스에 처박힌 동안 - 여기는 재빨리 고쳐 썼다. 컴퓨터는 고쳐 쓰기 따위 기적과 같은 기능을 밥 먹듯이 가능하게 한다. - 프랑스 체제동안에도 늘 무엇인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고,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 여기에서 정말 막혔다. 거짓말 좀 하자. 너스레 좀 떨자. 너, 문학박사! 인문학이 뭐냐. 세 치 혀, 입 잘 놀리는 학문 아니더냐. - 적어도 공동생활에서 공평했고, 강사생활 근 십년에도 알찬 수업준비와 칼끝처럼 정직한 성적관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굳이 선행이라고는…….

  눈 딱 감고 적당히 마무리를 썼다. 2번 질문, 왜 한국어 교사가 되려느냐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써내려가는 동안 내가 정말 한국어교사가 되려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심취해서 썼다는 말이다. 그의 메모를 이야기로 옮기는 지난 한 해 동안 감정이입 능력이 발달했나 보다. 나는 정말 한국어교사가 되려는 심정으로 나머지 서류들을 준비해서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 등록했다.

  그 렇게 해서 강의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학생 자리에서.

 

  스터디 룸펜

  6월 중순에 시작된 강의는 8월 초순까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과정은 A4 400쪽이 넘은 복사 교재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수료 기준’이라는 유인물에는 과정 전체 42회 중 34회 이상 출석, 종합점수 평균 60점 이상인 자에 한해 수료할 수 있다는 주의사항 등이 빼곡하다. 수료 후에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동기생들과 스터디를 계속하라는 권장사항도 친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동기생? 얼핏 둘러보니 천차만별의 집합이었다. 풋내기 대학생들과 함께 어디에선가 정년을 했음직한 어른들도 눈에 들어왔다. 성별은 여자가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하필 첫 시간이 <음성학>이었다. 수강생들은 묻지 마 전공자들로 모두 섞여 있는데, 이런 전문성이 가당키나 한가.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에 음운이 몇 개나 됩니까? 최소대립쌍에서 음운을 판별합니다. 동과 통. 여기에서 ㄷ과 ㅌ의 다름을 알아내는 것이지요. 기역, 니은…… 자음은 몇인가요?

  수강생들은 멍하다. 생각보다 더 멍하니 강사를 올려다보고 있다. 누구 하나 기역, 니은…… 하고 세어서 대답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이에 강사가 계속한다.

  제가 너무 갑자기 질문했나요? 열아홉 개죠. 그리고 단모음이 열 개. 소리는 있지만 문자는 없는 반모음도 있지요. ‘오기’에서 ‘요기’를 만드는 음.

  가나다라는 열네 줄인데……. 열아홉이면 쌍기역 등을 합한 것이구나. 그럼 복모음은 왜 빼고? 다 합치면 몇인가?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나하고 놀자. 철수야, 가자. 영이야, 가자. 이렇게 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우리 세대만해도 음성이란 자연적인 산물인 줄로만 알았다. 무식함에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혼란스러운데, 강사는 여자 목소리로선 우렁찬 목소리에 달변이다.

  자, 먼저 자음의 발성에서 시작하죠. 기동과 발성과 조음의 과정을 거쳐서 자음소리가 나옵니다. 조음위치에 따라…… 왜 거, 훈민정음에서부터 아․설․순․치․후 아닙니까? 조음방법에 따라서 나누면 파열음, 마찰음…… 또. 마찰음엔 귀신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있죠. 이힛, 흐, ‘ㅎ’말예요!

  그리고 아무렇게나 쓱싹 칠판에 자음 도표를 그린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휙휙 그려대는 손. 이제 사람들은 강사를 거의 우러른다.

  제가 좀 빨랐나요? 아무튼 자음에서는 ‘ㅂ,ㄷ,ㄱ’ 곱하기 3만 알면 거의 다 아는 거죠. ‘ㅂ’소리가 ‘ㅃ’ 또는 ‘ㅍ’로 경음 또는 유기음이 되는 현상 말입니다. 자, 같이 해보실까요? 손바닥을 입 5cm 앞에 두세요. 소리 내어 보세요. ‘ㅃ’소리를 내려면 후두가 긴장되지만 기는 없죠. 하지만 ‘ㅍ’의 경우에는 기식이 많아져요. 자, 해보세요. 불, 뿔, 풀. 불이 났어요. 뿔이 났어요. 풀이 났어요. 조음위치가 같은 파열음의 경우에도 이런 차이가…… 괜찮은가요?

  알아듣기나 하느냐고 묻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 휴식 시간이 되었다. 물을 홀짝거리던 강사의 눈빛이 내게 머무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라도 한두 번 스쳐지나간 얼굴인 모양이다. 출석부를 훑어보는 모양새가 내 이름을 확인하려는 듯싶었다. 그냥 자수하기로 했다.

  김 선생님. 저, 한금실입니다, 프랑스어.

  아 네, 설마 했는데. 그래도 벌써 알아봤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길?

  좀 웃기죠. 저 그냥 국어공부가 좀 하고 싶어서. 새삼 국문과 대학원으로 진학하긴 너무 무겁고.

  한샘, 이거 한국어. 한국어는 국어랑.

  아, 압니다. 다르게 부르는 것 알지만 저한테는 국어공붑니다. 첫 시간부터 맹타 당했는걸요. 실은, 수강생들 모두가 그렇겠지만, 국어학개론 쯤을 기대했습니다. 교재를 막 받아들자마자, 아니 아직 목차도 채 들여다보기 전에 음운론이라니. 지레 겁먹고 도망치고 싶어지는데요.

  한샘도. 별거 아녜요. 원래 개론이 첫 시간에 잡혀요, 헌데 그 강사 샘이 다른 스케줄로.

  예, 뭐 그럴 수도. 암튼 화들짝 정신 나는군요.

  한샘, 그래도 어떻게 한국어를 등록할 생각을?

  그냥. 지금 딱히 하는 일도 없고요. 여전히 스터디 룸펜이라.

  자조적이시기는. 실은 이 길도 아직 개척단계라서 전망이…….

  전망은 무슨.

  첫 시간에 혼쭐이 난 수강생들은 꽁꽁 얼어 보였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서는 맘을 빼곡히 열고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다시 경쟁자들을 만난 것인가? 한국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이다. 준비성이 강하다. 사람들이 슬슬 그룹이 되어 나타났다. 가을에 있을 자격시험에 도전하는 일. 가만 보니 중간 보다는 젊거나 나이 든 이분적 집단이었다. 정말 스터디 룸펜족도 끼어 있다. 연령제한에 걸려 기업체 입사를 놓쳤거나, 미래가 불투명한 직장을 집어치우고 홀로서기를 꿈꾸거나…… 설마, 국어과 자격증을 가지고서도 임용이 안 된 예비교사도 있었다. 그 둘은 강의 도중에 강사들이 가끔 내던지는 질문에 척척 답을 해서 우리 다른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나이든 쪽이 더 확실한 사정들이 있었다. 정년 후 삶의 무대를 근동 외국으로 옮길 꿈이 있기도 했고, 오지의 선교사로 나가서 벌써 한국어 강의를 벌여놓은 분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자격취득이 현지 한국어학원의 신분승격에 필수적이라서 자격증에 도전한다고 했다.

  평생의 직업을 예상하고 온 젊은 그룹에도, 노후의 종교 활동이나 보람 있는 투자와도 무관한 나는 어정쩡했다. 분류되지 않는 회색분자였다. 그래도 양쪽 그룹 모두에서 세 확장의 의미로 러브콜이 있었다. 난 젊지 않은 쪽으로 끌렸다.

  가을은 참 심란했다. 8월에 강의 일정이 끝나는 우리로서는 10월초 자격시험까지 최소한의 유예뿐이다. 한다는 대학마다 이런 수료생들을 일 년에 4회 배출해 내는데, 여름 수료생들의 공부기간이 가장 짧을 밖에. 더구나 설 명절보다는 추석을 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방식 때문에 추석명절은 결정적으로 공부시간을 고스란히 삼켜버렸다.

  추석 중심 - 별 것은 아니었다. 벌초에서 차례와 성묘까지 일습을 고향에서 함께 보내자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셨다. 설에는 교통사정도 모를 일이고! 이건 막내가 먼데서 사는 이유를 아버지가 감안하시기로 한 때문이다. 단순히 비행기여행에 기상상태가 미치는 영향 때문만은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안다. 막내는 본격 기독교문화권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면 남편의 고향집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가 온다면 언제가 되더라도 추석쯤에나 가능하다. 딸 셋 중 ‘제대로’ 결혼해서 본 둘째(?)사위 얼굴 때문에라도 나더러는 꼭 참석하길 바라신다. 둘째가 결혼을 했을 때 좀 우스운 일이 벌어졌었다. 둘째 딸 신랑이니 둘째 사위가 맞긴 맞는데, 집안에서 처음 보는 사위니까 말이었다. 결국 유일한 사위노릇을 하고 있는 제부가 장인어른 모시고 처갓집 벌초를 도맡는다. 서울에 나가 사는 것도 아니고 근거리에 살면서.

  언니, 이거 다 뭐야. 아부지가 또 미안 닦음 하라셨어?

  아니거든.

  내가 오히려 미안해. 어무니아부지 사랑 나 혼자 다 누리고 살잖아.

  네가 복 받게 하지. 너 아님 우린 얼마나 더 죄송하겠어. 더구나 이번엔 내가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애기 뭐 사러 갈 틈이 없었거든.

  그래 놓고 추석날 차례가 끝나자마자 다시 내 굴속으로 돌아왔다. 스터디 그룹은 거의 비상이었다. 저녁으로만 함께 시간이 나서 대학가 공부방을 빌려서 모였는데, 각자 맡은 부분을 요약해서 ‘강의’하는 수준이 요구되었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학, 언어교육론, 거기에 한국문화론이 추가되었다. 한국어학 분야에서 맡았던 ‘조사’만 해도 40쪽 분량이 가도 가도 새로운 정보였다. ‘한국어의 역사’에서는 예컨대 신라어의 특징을 어떻게 공부한단 말인가. 또 무엇 하러?

  아니, 시험 준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몇 달 사이에 수험생이 되어버린 기분은 뭔가에 코를 꿰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편한 시간이었다. 코앞에 과제가 있어서 마음속의 일 쏠림을 잠재웠으니까. 미완성 이야기에 대한 그리움을.

  기본적인 과목들을 함께 섭렵하고서도 한국문화라는 미지의 숲을 헤매는 동안 9월이 갔다. 10월 첫 일요일, 무슨 공단 지부에 출석해서 하루 종일 시험을 치렀다. OMR 카드에 수험번호 작성부터 엇나가는 손으로 200 문항에 가까운 문제를 풀어야 했다. 확실히 알고서 쓴 문제가 없다시피 했다. 처음 대여섯 문제를 일사천리로 풀고 나서, 자음이 다양한 조음 ‘방법’으로 발음이 되는 단어 고르기에서부터 막혔던 기억뿐이었다. 조음 ‘위치’를 두고 찾으려 했다니, 기본도 안 된 수험생이었다. 막혔던 문제에서 시간을 다 허비하고서는 뒷부분 절반은 지문을 겨우 읽을까 말까 4선지 내용을 채 변별해서 읽을 시간도 없었다. 자살골과 같은 오답들로, 답안 표시는 언감생심. 만 24시간 뒤에 모범답안 발표가 인터넷에 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맞춰 볼 수 있는 내 답이 없었다. 스터디 그룹 사람들의 ‘처참한’ 소식에 나도 덩달아 움츠러들었다.

  구겨졌다. 이제는 공부도 안 되는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남은 것 같지 않았다. 10월 한 달을 두 손 놓고 지내는 동안 다시 기다림이 꿈틀거리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원고정리를 계속한다면 이제는 실력이 분명 나아졌으리라는 희망이 들었다. 정말 뭔가를 써보고 싶었다.

  11월 초가 되어 정작 발표 날에는 다른 스터디 그룹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놀리는 줄 알았다. 2차 면접시험 준비는 각각 혼자의 싸움이 되었다. 누가 도와 줄 수가 없는 성격이다. 난 실은 말을 잘 하지 못하면서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 전날이면 무진장 준비를 한다. 말할 내용을 거의 다 써서 프린트를 하고, 조금 필요한 양념으로서의 농담까지를 특정 부분에 표시해 놓는다. 물론 농담의 수위도 정해 놓는다. 강의 중에 돌발사건이란 거의 없다. 교실에 가서는 어젯밤 책상에서 태어나 이미 죽은 강의를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는 것이다.

  왜 한국어 교사가 되고자 하십니까? - 면접시험에서 예상되는 이 뻔한 질문에도 답을 적어 두었다. - 서양문화가 우월하다고 배운 청소년 시기의 결정으로 외국어와 외국문학 연구로 보낸 세월 동안 국어로 논문을 쓰거나 외국작품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미진한 국어 실력에 자괴감이 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라도 그 반대로…….

  예상되는 문법 관련 질문에 대비하기는 참 방대한 작업이었다. 공책 두 권이 다 들었다. 실로 어려운 것은 소리, 음운이었다. 서울 근교에서 자란 탓으로 비교적 서울 표준말을 쓰지만 다는 아니다. 시험공부를 하다보니까 발음 마다 오갈이 든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는 사람. - 이때는 그냥 [파트로].

  팥이 풀어져도 솥 안에 있다. - 이번에는 [파치]로 구개음화다.

  구개음화는 표준발음법 18항. 아니, 17항. 표준발음법을 번호까지 외우는 것은 구구법 외우기나 같다. 앞에서 틀리면 죽 이어서 틀린다. 육칠 사십팔에서 틀리면 육팔은 당연히 틀리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표발 17항’ 하고 외웠다. 의문은 꼬리를 문다.

  ‘사건’은 왜 [사ː껀]이고 ‘사고’는 왜 그냥 [사ː고]인가?

  왜 ‘머리말’이고 ‘노랫말’인가?

  면접시험은 11월 말, 전국의 합격자들이 마포에 있는 산업인력공단 본부에 나타나야 한다. 면접관 세 명 중에는 나보다 더 젊어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고약한 과정을 다 겪고 공단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새삼 지하철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니, 어디로 가든지 지하철이 먼저이긴 하다. 서울의 정액권이 있을 리 없는 나는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공덕동, 여길 어떻게 왔더라? 그랬다. 기차에서 내려 바로 이곳으로 향했다. 이제 돌아가는 길은 바로 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지척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가. 느닷없이 들른 딸을 반기시겠지.

  퇴근 시간이 아직 이른 지하철은 곧 자리가 난다. 두 눈을 감자. 종점까지 시간은 넉넉하다. 아예 이렇게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을까? 이쯤 해서 그냥 연줄 하나를 놓아버리면 되는 것을. 지적인 삶이라고 수놓인 연. 다른 말로는 난 정신적이고 싶었다, 내내. 왜 사람이 정신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누군가는 보다 정신적이면 안 될 것인가? 나는 가장 정신적 부류가 되고 싶었다. 공부했으니까. 공부란 본능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어딘지 뒤엉킨 세상의 소음들이 아득히 멀어진다.

 

  한국어 교실

  둘, 넷, 여섯, 여덟, 열…….

  내가 학생들의 수를 세는 방식이다.

  어, 파블로, 파블로 아모르솔로, 오늘 안 왔군요?

  대학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파블로는 필리핀 학생으로, 유일하게 결석이 잦은 편이다.

  봄 학기부터 한국어강의를 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언교원이 아닌 대학에 새로이 교양한국어 강의들이 개설된 덕이었다. 교원양성과정과 자격시험을 위한 한국어공부에 못지않게, 한국어강의는 주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레바논의 이슬람인 시망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결코 4명의 아내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어가 공용어, 케냐엔 영어가 공용어. 그래서 다비드 마카우나 패트릭 삼부 같은 이름이 있다. 타이의 잉랏은 지난 학기 학생인데 학기 내내 일주일이 멀다하고 이메일로 질문을 즐겼다. 지난 달 타이가 물에 잠겨가고 있다는 뉴스에 잉랏의 가족 안부를 물었을 정도다. 몽골에서 온 바트수흐 어용다르는 당찬 여학생이다. 수업시간 중에 모르는 말이 튀어 나오면 “OO가 뭐예요?” 하고 바로 묻는다. 대부분 수동적인 중국 학생들과 다르다.

  이 가을학기를 기준으로 대학 전체에 오륙백 명 이상의 외국인 학생이 등록했다고 하는데, 그중 오백 명은 중국 국적의 학생들이라고 한다. 중국에 한국어학과가 많이 생겨서인지, 스무 곳도 정도, 한국어과 학생들의 수준은 안정적이다. 교환학생 자격이니 우수한 학생들만 선발되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일본은 그 열 배 가까운 한국어학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유학생은 적다. 다카하시 나미는 매우 조용한 일본인이다. 수줍은 표정이 부드러워서 성숙한 여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번은 선생인 내가 나미에게 미안해 졌다. 글감 때문이었다.

 

  종달새

  피천득의 「종달새」를 감상문 쓰기 글감으로 가져갔다. 내가 늘 좋아하던 짧은 수필이다.

  피천득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의 해에 태어났습니다. 경술년에 있었던 국치가 뭐냐, 여러분 모두…….

  말을 계속하려다 턱이 굳었다. 일본 학생 나미가 맨 앞줄에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제목 설명으로 넘어갔다.

  ‘종달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영어가 매개어가 된다, 스카이라크. 종달새는 하늘 높이 까마득하게 떠서 종잘거리는 새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떤 새일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니까. ‘스카이’ 한 마디면 하늘 가장 높이 올라가 지저귀는 새라고 금방 이해한다. 한국어로 한국어 수업하기는 100퍼센트는 안 된다.

  서술자는 처음에 조롱 속의 종달새를 보고 뭐라 말했나요? “하늘을 솟아오르는 것이 종달새지, 저것은 조롱새야.” 다음은 이 말을 곧 후회하는 서술자의 생각들이 펼쳐지지요. “종달새는 갇혀 있다 하더라도…… 푸른 숲, 파란 하늘, 여름 보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가 꿈을 꿀 때면, 그 배경은 새장이 아니라 언제나 넓은 들판이다. …… 설사 그것이 새장 속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들을 모르는 종달이라 하더라도, 그의 핏속에는 선조 대대의 자유를 희구하는 정신과…….”

  이 대목에서야 다시 놀라서 목이 막혔다. 글을 읽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대 일본 저항정신에 관해 말해야하는 나 한국인은 지금은 나약한 일본 여학생을 궁지로 몰고 있다. 나미는 잘 견뎌주었다.

  며칠 전에도 음식의 의미와 관련하여 ‘백설기’를 소개할 때 실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백’은 ‘밝다’를 의미하고, ‘밝’은 옛날에는 신과 하늘이란 뜻이었죠. 그대로 태양을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 민족은 부여 및 고구려에서부터 모든 시대에 걸쳐 흰 옷을 신성하게 알고 즐겨 입었는데, 곧 순수와 평화를 추구한 민족이라고 할 수…….

  거기까지면 좋았을 것이다.

  반면에 ‘흑색’은 오정색중에서…….

  선생님, 오정색이 뭐예요?

  또 바트수흐였다.

  아, 오정색은, 그러니까 동서남북 알죠? 한국인은 동서남북 방위에 색깔을 대비시켜 생각했어요. 중앙은 노랑으로 정해놓고, 동방은 파랑, 서방은 흰색, 남방은 빨강 그리고 북방은 검정이라고. 여기서 보면 검고 캄캄한 것을 ‘흑’이라 여겼어요.

  정말 거기까지만 해도 되었을 것이다.

  흑과 백이라는 대조에서 흑은 늘 부정적…….

  아차! 이런 설명을 했어야 하는가. 까만 피부의 학생을 앞에 두고서.

  그때 다행히 곧 국제마라톤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아프리카 선수들이 1등, 2등, 3등을 모두 차지했을 때 그것을 슬쩍 언급해서 마음을 달래주면 되겠다 싶었다. 막상 교실에 그날따라 케냐 학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큰일이다. 한국어 수업에 회의를 느낀 걸까? 세계 여러 곳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한국을 찾은 이들에게 불쾌감을 심어주다니. 졸업 후의 계획을 묻는 설문에 보면 한국회사에 취업하고 싶다는 것이 가장 많다. 한국에 살고 싶다고 대놓고 쓰진 않지만, 관심도 있어 보인다. 발표 시간의 주제로 한국음식, 민속은 물론 더러는 한국의 국제결혼 실태를 조사해 오기도 한다. 한국어를 이들에게 얼마큼 잘 가르쳐야 하는지. 한국어를, 한국을.

  이 빚진 기분을 꼬깃꼬깃 쑤셔 넣을밖에. 그러고서 종달새 이야기로 돌아간다.

  “칼멜 수도원의 수녀는 갇혀있다 하더라도 그는 죄인이 아니라 바로 자유 없는 천사다. 해방 전 감옥에는 많은 애국자들이 갇혀 있었다. 그러나 철창도 콘크리트 벽도 어떠한 고문도 자유의 화신인 그들을 타락시키지는 못했다.” 어떻습니까? 이 구절에 오면 종달새는…….

  선생님, 수녀는 원래 갇혀 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에 와있는 한주선 선교회는 아주 자유스러운 활동을 하는데요.

  이냠바네 해변이 고향이라는 호세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 여기 수녀회는 프랑스대혁명 때 집단으로 순교한 수녀회의 일화를 바이런 경이 들춰내 시를 쓴 것이고, 피천득 선생이 인용했습니다. 지금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가톨릭보건의료사업이 들어가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가요? 모잠비크에는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죠?

  예, 수도 마푸토는 로마가톨릭이 많습니다. 북쪽은 도착종교가 많고.

  도착 아니고 토착! 자, 토착이라고 발음해 보세요. 토착종교!

  예, 토착종교. 이슬람, 힌두교도 있어요. 언어도 많이 여러 개입니다. 한국 같이 한국어 하나 아니고요.

  참, 그렇군요. 한국은 배달민족이 이룬 나라라서…….

  배달이 뭐예요?

  이번에도 궁금증이 많은 바트수흐였다.

  아, 한국인의 원형이 배달민족입니다. 한민족은 크게는 몽골로이드, 몽골인종에 속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배달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름이 배달이었습니다.

  발음이 이상해요, 배다르.

이번엔 나미였다. 일본인다운 발음이다. 나미로서는 수업내용에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용기 내어 표현하는 것이리라.

  배달, 다 같이 소리 내어 봅시다, 배달. 짧게요. 길게 ‘배애달’이라고 하면 우체부나 택배의 배달이 됩니다. 한국어에도 첫음절에는 장음이 올 수 있고, 가끔은 뜻을 변별해주죠.

  자, 짜장면 배달은 길게.

  다음, 배달민족은 짧게.

  왜 하필 배달인가? 그것은 국조 단군과 관계있는데, 어원에서 박달나무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이랍니다. 또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입니다. 그러므로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한민족은 백산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아뿔싸, 나는 언젠가 이박에게서 주입된 배달민족 신화를 외국인 학생들에게 열심히 주입하고 있구나! - 모교에서 빛나는 강사시절 함께 강사실을 사용하던 이순규 선생. 유럽대륙의 역사철학 전공인데, 자신의 말로 ‘적어도 헤겔에선 고개를 넘었는데……’라고 말하곤 했었다. ‘세계정신’ 운운하는 서양 철학자들은 동양을 우습게 본다고, 그래서 그는 거꾸로 동양에, 한국의 원류에 기대는지도 몰랐다. 나는 재빨리 현실로, 교실로 돌아온다.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로 내려왔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통일이 되어 있었죠. 한국에도 지금은 백사십만 외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점점 늘어갈 추세이고요. 자, 다시 「종달새」로 돌아갑시다. 이 글에서 저자가 가장 아끼면서 내놓은 주장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잘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겁니다.

  자꾸 멍해지려는 가닥을 다잡아 서둘러 감상문 쓰기 과제를 낸다.

  선생님이 독서 감상문을 쓰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정리해서 홈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보다 여러분이 먼저 할 일은 브레인스토밍, 「종달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모는 단어들을 써보고, 모든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해서 글의 개요를 써오는…….

 

  작문

  그렇게 다음 시간에는 좋은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하여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좋은 글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의 일이리라. 나는 밤새 ‘좋은 글을 쓰려면’ 이라는 제목을 써놓고 궁리에 빠진다. 여러 책들, 여러 사이트들이 여러 다른 조언을 준다.

  - 눈을 크게 뜨고 의미를 찾아낸다.

  - 짜임새 있게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

   - 말하려는 내용에 어울리는 리듬감 : 대구법, 대조 등을 이용할 것.

  - 생략과 확장 등을 통한 변화주기.

  부지직, 문자메시지 음이 들린다. 두 번 이어 들어오는 문자들. 하나는 인터넷 변경을 부추기는 유혹이고 다른 놈은 친절한 대출안내이다. 누군가 나를 찾는 일은 드물다. 더 드물어졌다. 나는 아마 세상에 없는 것 같다.

  느닷없이 이박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가 화드득 놀랐다. 내가 전화를 한다면 그가 너무 놀랄 것이다. 수업시간에 배달민족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말해도 놀랄 것이다. 다시 ‘좋은 글쓰기’로 되돌아간다.

  갑자기 나는 내가 이전에 썼던 글, 지금 쓰고 있는 글들에 생각이 미쳤다. 미쳤었구나. 미쳤구나. 나는 누구에게서 작문을 배웠던 기억이 없다. 아마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기본은 배웠겠지만, 서양말을 안고 산 세월동안 까맣게 망각했다. 국어에도 글쓰기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저 입말을 글말로 옮기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 것을.

  얼굴이 달아오른다. 분명 이것은 수치에서 오는 홍조다. ‘부끄럽거나 취하여 붉어짐. 또는 그런 빛.’ 박사논문을 초라하지만 프랑스어로 자비출판하고 말기를 잘했다. 번역했더라면 누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 이후의 논문들은 프랑스어 보다 국문이 더 많았다. 프랑스어 논문의 부족함은 용서된다,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니까. 국문 논문의 미흡함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는 인간이 국어를 유린하다니.

  아니 괜찮다. 논문은 어차피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 배승한에게서 받은 메모 쪽에서 생성된 내 글은 어떠했을까. 내 글이라 할 수 있을까? 내용이나 어휘는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정리만 했으니까. 구성에 관해, 또는 리듬을 염두에 두었나? 아니다. 갑자기 하나의 명제가 떠오른다. 글은 진실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명제를 가지고 쓰면 될 것 아닌가.

  진실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 나로서 진실은 내 몫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글을 쓰면서 생각이 변하는 것을 느낀다, 완결된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독창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고갱을 훔치지 않고, 우리는 얼마큼 독창적이 될까?

  답은 나오지 않고, 모니터의 화면은 ‘자러 간다.’ 화면이 그렇게 말하면서 꺼졌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미국산 휴렛패커드라 그런가 보다. 나도 자러 간다, 한국어로.

  잠깐, 사고나 인식보다, 더 나아가 세계보다 언어가 우위에 있다고 그렇게 가르쳐야 하나? 언어를, 외국어를, 외국어 한국어를 가르치자면 그렇다.

  우리는 모국어가 설정한 선을 따라서 자연을 분석한다. - 이것이 사피어-워프의 언어 결정론적 입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적는다, 다음 시간에 할 말을.

  아니, 그건 소개해야할 이론이긴 해도.

  이론이지만, 뭐?

  자문자답이 지겹지도 않아?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로 생각한다잖아. 자연언어와는 별개의 추상언어 ‘멘털리즈’, 이건 인지과학자 핑커의 말, 아니 그의 글.

  작문시간 준비를 하다가 나는 또 분열을 겪는다. 오른 쪽 뇌와 왼쪽 뇌가 다툰다. 나는 내 생각을 지원하지 못하고 늘 토론을 들이댄다. 뭐든 삼천포로 빠진다. 인터넷에서 삼천포는 겹겹으로 쌓이는 창들이다. 문어발도 아닌 것들이 어딘가로 기어가서는 달라붙어 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가. 나를 홀렸던 한국어 몸살에도 결국 틈이 보인다. 틈, 틈새로 쓰다 만 이야기를 그린다. 수십 개 열린 창을 하나씩 닫는다. <한국어>도 닫는다. 쓰다가 멈춰있는 처음 화면에게로.

...........................................

* 2012 단편 「한국어」,

『계간문학』 봄호(통권 18호), 한국문인협회, 2012.3.15. 152-169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2. 28. 16:12


파리하고 세상사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인 그대 - 마그마로!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내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어느 가을날 문자를 받았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나는 왠지 늦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어느 늦가을,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아니면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

<문학에스프리> 2012 봄 창간호, 52-53쪽

'수필-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거운 책들  (0) 2012.06.13
채 알기도 전에 떠난 선배소설가  (0) 2012.06.13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0) 2011.12.31
중독 - 행복 에세이  (0) 2011.03.01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0) 2010.12.31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