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5. 5. 10. 11:57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를 동경했다, 동경했었다.

1997년 겨울, 세 번째 독일에 갔던 그때만 해도 내게 자유는 아름다운 가치였다. 저 남쪽 어느 대학의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일종의 인문학 강좌에서였다. 쾰른에 거주하며 뷔페탈 대학에 오가느라고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코앞의 별다른 과제가 없다 보니 야간의 가벼운 강좌도 기웃거리다 유명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갔던 참이었다. 연사였던 그 교수는 자신의 책과 논문들을 읽었다는 이역만리 한국의 시원찮은 독문과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이 기분 좋은 일에 속하겠지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마치 뭣을 구하러 가정과 애들이 있는 나이 든 여자가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실제로 전문자료를 구하게 위해서 독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는 시대였으니까. 또 이미 교수자리에 있는데 - 독일에서는 교수 자리가 대단해서 그랬겠지만 - 뭣 때문에 애써 독문학의 본고장을 쓸쓸히 배회하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어차피 독일 사람들처럼 독일 정서에 함몰되어 독문학을 완벽하게 체득할 수도 없으면서? 문학이 뭐라고?

 

질문의 저 깊은 회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술에 달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강의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어쩌면 생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혹은 학교당국의 연구비로,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를 어찌 예찬하지 않았겠는가.

추상적인 자유는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건배라도 할 일이 있으면 자유를 위하여, 라고 외칠 뻔도 했다. 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해온 우리들, 이 아니 자랑스러운가, 라고.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민주주의와 합심해서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우리들로부터 온갖 원래적 자유를 침탈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는 막연히 자유를 예찬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므로, 다른 말로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기업경제다. 기업경제가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 자유는 상대에게 창끝을 겨눈다. 창끝은 가진 자유가 적은 사람의, 창을 든 손은 가진 자유가 넘치는 사람의 몫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상승해도 노동자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최악의 경우, 기업이 투자는 미루면서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잘 준비된 시나리오만 있으면,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만 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가 된다. 기업의 자유는 노동자들을 단박에 해고할 자유까지를 말한다.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 그렇다.

 

이러고서 자유를 예찬해야 하다니. 나는 언젠가부터 자유를 증오한다.

원론적으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상충이 일어난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성장의 시대에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했다. 상당 수 자수성가를 꿈꾸던 사람들은 계층 상승을 이루어 냈다. 계층 상승을 이루다 - 이 말 자체가 사회에 상존하는 계층의 구분을 인정하는 씁쓸한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꿈을. 경쟁할 자유? 그것도 자유인데 경쟁에서 낙오된 것은 낙오된 자의 무능이다, 라고들 한다. 자유 경쟁이란 어불성설이다. 같은 조건이 아닌 자유 경쟁은 자유 경쟁이 아니다.

느닷없는 생각. 내가 자유 경쟁으로 대입을 뚫었지만, 딸을 낳으면 꼭 이화여대에 보내겠다는 우리 어머니의 성화와 딸을 무슨 대학공부 시키냐는 다른 어머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분명 무심한 어머니의 딸 대신에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를 담보로 하기가 십상이다. 내가 마시는 물과 먹는 쌀은 누군가의 부자유의 대가이다. 쉬고 싶어도 하기 싫어도 물과 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일의 결과다. 그들이 내게 물과 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고자 했을 뿐이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퍼 쓴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내 자유를 담보로 나와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노력이 그 생활비를 충족하지 못할 때, 나는 내 자유를 다 내어 주고도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 자유 - 인격을 유지하면서 살 자유 - 를 건지지 못한다. 내 자유는 저당잡힌다,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이 자유시장경제 체제 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자유를 증오한다. 증오해야만 자유를 누릴 심보를 줄이게 된다.

자유를 누리고픈 심보가 문제다. 나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은커녕 말도 자유롭게 못할게 뭔가, 하지만.

내가 자유를 느낄 때 그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닐까. 내가 덜 자유로울 때 나 아닌 타인들의 자유가 덜 침해받으리라는 것이 공식이니까. 지구상에 자유의 부피와 무게는 일정한데, 내가 덜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누리는 자유만 해도 73억분의 1, 그 만큼의 자유로 만족하려면 아예 자유를 외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는 온통 인간들의 소유물만도 아니다. 셀 수 없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의 자유는 인간들의 자유의 희생이 되고 있다. 땅과 물 또한 인간들의 자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태고의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미식의 자유를 위해 커피재배 단지로 변하고, 사육동물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변해간다.

 

자유라는 가치를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증오한다, 자유를. 원래는 꿈꾸었던 아름다운 가치,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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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이화문인회에 내는 수필이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