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5. 4. 1. 23:23

 

날마다 비겁함

 

 

연말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눈은 어느 해보다 많이 푹푹 내렸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라고? 그런 밤이다. 엉거주춤 따라 들어선 시장 통에는 지붕이 얹어져서 그리 질척거리지는 않는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술집 골목이 아니라 밥집 하나 겨우 문이 열려 있었다.

 

사실 그날 저녁 때 문학상 시상식장에 가게 된 것은 순 우연이었다. 원룸 입구와 나란히 붙은 작은 꽃가게에서 박 선생을 만난 때문이었다. 인문대에서 국어 강의를 하는데, 언어교육원의 한국어 선생들하고 터놓고 지냈기 때문에 나하고도 동료처럼 지내는 터였다. 고등학교 때의 은사님이 문학상을 받게 되어 꽃을 사러 왔다는 그는 무턱대고 나더러 그곳에 가자고 졸랐다. 내가 소설을 발표한 일을 알고 있었고, 그러니 이런 기회에 문인단체 분위기를 맛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서 은사님을 모셔다 드리는 길까지 함께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은사님의 아파트가 그곳에 있을 줄이야. 차가 천변 쪽으로 향할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고, 지나치거니 했던 참에 막상 그곳에서 정말로 멈추자 두 눈을 꼭 감았다.

잠깐이야, 내려드리고 우린 가면 되니까.

그런데 은사님이란 분은 게서 내리는 게 아니라 함께 탄 우리 모두를 끌어 내리셨다. 이런 날 지금 그냥 집에 들어가겠는가! 집사람, 막내 산바라지 하러 가고 없다고 안 했는가!

 

왜 하필 이곳인 거야! 근처 다리 밑에 노숙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 나도 모르게 사람을 찾아 몇 번이고 나다녔던 곳. 실제로 한 여자를 발견하고는 외려 도망친 이래 가슴만 졸이고 있던 참인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내리깔고 얼른 시장 안으로 숨어 들어갔을 밖에. 데면스러운 자리도 자리지만 미리 주눅이 들어있던 탓에 사제 간의 틈에서 술만 찔끔거리고 있었다.

 

 

오늘 말씀 의미심장하시던데요. 짧았지만, 내용은.

파리에서 학위 받아와서 프랑스어도 또 한국어도 가르치고 있고, 소설을 쓴다고, 나를 대충 소개한 뒤에 박 선생이 은사님에게 수상 소감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스제 프랑스문학 박사요? 왜 그럼 불문과 교수될 생각을 않고 소설을 쓰시려나?

은사님은 소설이라는 단어에 걸렸는지, 대꾸 대신 나를 주목했다.

외국문학 평원에서 하이에나가 된 느낌이었어요.

하이에나?

예, 자판 위 손가락이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털이 돋는 느낌요. 남의 글 파먹고 사는 비겁함이요.

그건 틀린 말이오. 하이에나가 실은 사냥선수라, 밤중에 사냥을 해 놓으면 동틀 무렵 사자가 나타나 빼앗아 갖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긴다고 합디다. 어찌되었건, 그래, 하이에나 짓거리 안 하고 소설 쓰는 심정은 어떤 거요?

아니, 선생님. 소감 계속 하시라니까요, 괜히 한 선생 뭐라 마시고.

 

수상 소감을 다시 묻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시상식에서 그의 은사님은 마지막 순서였고, 소감은 우물우물 지나가 버렸다. 문학의 장르를 배울 때는 서정적 양식, 서사적 양식, 극적 양식이라 했는데, 실 문학인생에서는 3대 양식에 들지 않은 수필도 앞서고, 아무튼 소설이 꼴찌였다. 시간상으로도 청중의 주목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연단 쪽 진행과 무관하게 시끌벅적한 것이 조금 놀랍기도 했다. 잘나갈 때 가끔 참석했던 학회장 분위기완 영 딴판인 것이, 문인들은 예술가이구나 싶었다. 더구나 음식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으니, 차려진 밥상이 기다리는 중에 행사를 진행하는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인지도 몰랐다.

 

듣기 좋은 노래도 석 자리 반이라는데 이제 마이크 차례가 되었으니, 예의 없는 사람이 될지언정 감사 인사는 접겠습니다, 하더니 그의 소감은 좀 엉뚱했다.

오늘이 어떤 날입니까. 오늘,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오늘……. 말이 막힌 듯 문장이 흐트러지더니. 오늘 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제 소설 또한 늘 불발이지만, 예술적 성취를 포기하고라도 이 불발인 이웃들과 함께 하는 글을 쓰겠습니다. 오늘, 하필 오늘 상을 주시니, 오늘을 기억하라고, 그렇게 알고 그렇게 쓰겠습니다.

 

그뿐이었다. 이제 제자가 다시금 소감 이야기로 화두를 돌려놓으니까, 소설가는 짧았던 소감 일부가 여태 목에 걸려 있었던지 나머지를 쏟아냈다.

내가 원래 뭔 말을 해야 되면 통 미리 써 갖고 가서 하지. 같은 내용을 자네들 열두 반씩 돌며 수업할라치면 들쑥날쑥해선 어떡하는가. 그렇게 수업내용을 죄 써 갖고 다니던 것이 습관이 돼 놔서. 오늘도 미리 준비한 원고가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거든. 근데 꺼낼 계제가 아니더라고, 시선도 다 흩어졌고. 실은 거기다 위방불입 난방불거(危邦不入 亂邦不居) - 위험한 나라는 드나들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선 거하지 말라는 공자님 말씀을 척 허니 써두었지. 그런데 헌재의 명판결 시점에서 이런 발칙한 말을 해서 쓰나? 주눅이 든 거제. 오늘 판결은 자유의 침탈이다. 문학이 뭐냐, 자유로운 글쓰기에서 출발한다. 의견을, 사상을 침탈하는 곳에서 무슨 문학이, 문학상이 필요하냐. 어지러운 나라, 못 살겠다…… 그런 말을 꿀꺽 삼켰으니 늙은 여우제 뭔가.

 

그래도 핵심은 말씀하셨는데요, 오늘을 강조하셨으니. 초심자도 알아들었습니다.

멍해진 박 선생 대신 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초심, 초심자. 누구나 초심자였지요. 그땐 참 간이 콩알만 하지는 않았었는데. 아까는 비겁해질 대로 비겁해져서 술도 안 마셨소, 거기서. 말 막 튀어나올까 봐서.

지금은 울 선생님, 하실 말씀 다 하시는데요?

자리가 다르잖나. 여서는 뭔 소린들 못 해요. 나 잡혀가라고 자네가 고발하겠나, 여기 이……. 암튼 세상이 얼어붙었네.

그렇긴 해요. 정당 해산 판결 같은 건 헌정 사상 첨이라죠, 선생님?

그건 좀. 건국 초창기에도 진보당인가, 조봉암 선생 사형 때 있었던 일은 어쩌고요.

나는 설마 처음일까 하는 생각으로 아는 체를 했다.

아니, 그건 달라요. 그땐 당수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되었고, 정당을 등록 취소로 한 것이니까 행정처분이었던 거고.

역시 연륜이 달랐다. 박 선생도 나도 입을 다물었다.

우리야 원래 한국적 민주주의로 시작했다고 해도, 이제쯤은 한국적이란 수식어는 떼었을 만큼 그 동안 흘린 피가 얼만데.

수식어가 늘 문제이긴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경제랑 맞물린 것 아닙니까.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또 끼어들었다.

그렇소. 자유, 그 단어가 거기 가 붙으면 묘해지는 것이라. 거기 가 붙으면 자본주의가 덧칠된다 그 말인데, 어불성설이라. 자유경쟁과 민주주의란…….

선생님, 경쟁의 기회가 공평하다고 하잖아요. 물론 누구는 바퀴 달고 달리고 누구는 모래주머니 끌고 달리는 환경에서 무슨 자유경쟁일까 싶지만요.

최고의 이상적인 시스템은 아직 없네, 영원히 사상누각이요, 신기루지 그게. 대의제 민주주의라 해도 다수대표제가 되고 보면 늘 소수는 있기 마련이니.

그렇담 개인이, 소수가, 국민 다수가 뽑은 정부에 저항할 권리가 있는가요?

나는 사제지간의 대화에서 엉뚱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대다수의 견해가 정의이니까…….

그럼 소수는 늘 죽어라 기어야 되는 겁니까?

자기 패를 다수로 만들거나 다수에 넘어가거나.

 

은사님이 빈정대는 투로 나오자 박 선생이 놀라는 듯했다.

그래서 말 아닌가, 오늘 소수의견이 단 한 사람이었다니. 하긴 그거라도 다행이제, 만장일치는 아니라서.

오히려 정말 암덩어리라면 단칼에 도려내는 것이 상책일지도 모른다고, 일단 여론조사 결과는 다수가 헌재의 판결을 찬성한다고 나왔던데요.

나는 비겁한 역할을 하기로 했다.

암덩어리라니, 그런 엄청난 말은 아무나 하면 되남요. 한 선생, 그거 표절이요, 표절! 함부로 써선 안 될 말이제라!

 

말꼬리가 사투리 색으로 변할 때쯤, 그날은 일찍 헤어졌다. 밥집 아주머니가 눈치를 준 때문이기도 했다. 시장은 온통 조용하고 술도 안주도 안 굴리는 서넛이 떠들고 있으니 술상이 끝나기를 노골적으로 원하는 것 같았다. 김장을 이백 폭을 해서 피곤하다고도 했다. 남쪽에선 김장이 늦나 보다. 엄마가 보내준 김치는 꼬마 냉장고 안에서도 다 익어 가는데.

박 선생이 은사님을 대문 앞까지 모셔다 주고 오는 동안 나는 그냥 아파트 입구에 서 있어야 했다. 가로에 가로등은 드물고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아무 것도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다. 다리 밑 여자는 어디에서건 잠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예 천변을 등지고 서서 꼼짝 않고 아파트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찬바람에도 등이 따가웠다. 어둠 속, 알 수 없는 뜨거운 화살촉들이 쏘아댔다.

 

 

날은 삼한사온이 맞나 보다. 아니 딱히 들어맞진 않지만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다. 방학 때면 무궤도의 일상을 피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겠다 작심하지만, 작심은 작심으로 끝나곤 한다. 그러니 요일도 시간대도 애매모호한 시간들이 이어진다. 해가 나면 낮이다. 배가 고프면 식사시간이고, 먹기 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샤워기 물이 시원찮아 긴 샤워가 힘들다. 그렇다고 추적추적 비누 바구니를 들고 목욕탕엘 가기는 싫다. 이렇게 대충 씻고 사는 줄 누가 알랴.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는 짧아졌다.

아니, 나는 너무 자주 씻는다. 다리 밑의 여자는 씻기나 할까.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산책을 하고 운동을 하는 공간이다. 땀을 흠씬 뺀 사람들은 사우나로 찜질방으로 향한다. 아파트에 스물네 시간 따뜻한 물이 나오지만 시원찮다고 그리로 간다. 날마다 씻지 않으면 사람 축에도 못 낀다. 국내총생산 세계 13위 부자나라에서 다리 밑 여자는 하천 물에 무김치 조각을 씻는다. 빨래도 한다. 몸은? 아무리 가난이 인격을 말살한다 해도, 그로 인해 모든 부끄러움을 잃었다 해도, 그 공공장소에서 목욕을 하지는 못하리라. 여름인들.

 

나는 여자가 징검다리 시작 부분에서 작은 속옷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상상에 빠진다. 앞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고 쭈그리고 앉아서.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는 못 보았다. 내가 피했나? 여자는 징검다리 시작부분 꼭 그 자리에서 몸집에 비해 형편없이 작아 보이는 속옷을 하천 물에 헹구고 있다.

 

 

문자 울림 음이 난다.

잘 지내심? 저번 날 넘 늦어 미안, 박박.

박박이란 말에는 웃음이 절로 난다.

미안은. 문인들 세계 좋은 경험. 감사!

담 금욜……

그렇게 문자가 오가다 말고, 곧 벨이 울린다.

 

난리도 아니네요. 창원대 교수 뉴스 못 봤어요? 헌법학 교순데, 국회에다 청원서를 냈대요. 헌재 8인 탄핵소추 의결 청원.

누가, 뭐라고요?

암튼 의원 제명권은 국회에 있는데, 헌재가 월권을 했다 뭐 그런.

국회에다 직접?

개인 미니홈피에다 올렸다는데요. 어라, 문자도 전화도 죄 들통 나는가?

설마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야. 하긴 너무 많이 배웠으니 보통은 넘지, 그래 봤자 수입은 88세대에도 못 미치니 그건 보통도 못 되네.

넘고처지고, 결국 보통인가. 보통 사람도 조심합시다.

뭐요, 그럼 공포시대?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자고? 다들 자기 할 일만 하고 살면 쌍용아저씨들은 누가?

효리 있잖아요.

효리가 왜 나와요?

웃자고! 오늘의 본론, 한국어실 몇 사람, 함께 저녁이나 하면서 올해를 넘기자네요.

글쎄요.

무슨 글쎄요. 미리 날짜 받는 것이니 꼭 나와요, 담 금요일. 디테일은 그때.

글쎄.

기다림다.

왜 박샘이 연락을…….

 

순간에 전화가 끊겼다. 기다린단 말에서 끝이었다.

사실은 반가운 연락이었다. 집중적으로 독서를 하거나 글쓰는 일도 불가능한 뒤숭숭한 시간에 계속 혼자 있는 것은 좀 두려운 일이다. 알 수 없는 초조함으로 잔뼈들이 떨릴 지경일 때가 있으니 말이다.

쌍용자동차와 효리 이야기를 하고 웃었지만 그런 세상 때문에도, 또 내면의 부조화 때문에도 초조감이 쌓인다. 쌍용차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어떻게 이 겨울에 한데 고공 굴뚝에 사람을 놓아두고 살아가는지 싶다. 물론 스스로 굴뚝을 선택한 그들은 다리 밑 여자처럼 홈리스는 아니다. 노숙인은 주거가 없다는 뜻이지만, 가정이 없다는 뜻에서 홈리스가 더 애절하다. 가만, 혼자서 굴뚝 위에서 200일 - 20일이 아니다 - 넘게 항의 중인 사람이 있고, 최근에 올라간 사람들도 벌써 2주째다. 사람 무릎 꿇렸다고 비난의 화살이 삼천리강산에서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해고당하고 굴뚝에 올라갈 지경은 삼천리강산이 외면한다. 이 매정한 오늘 속에 녹아서 작용하고 있는 과거의 조각조각들이 쑤시기 시작했다.

 

 

파리 시절, 여행에 소극적이던 내가 사를라에 간 적이 있었다. 몽파르나스 역에서 테제베를 타고 보르도의 리부른에서 갈아탔다. 와인을 좋아한다면 포도가 익어가는 여름 보르도에 내려 눈길마다 들어오는 포도밭을 즐겼을지 모르지만 오직 사를라로 향했었다.

손잡고는 돌아다니기도 버거울 좁은 골목들, 돌벽 쌓아올려 지은 집들, 12세기에 지었다는 생 마리 성당도 폐허가 다 된 채로 보존된(?) 그냥 시간이 정지해 있는 느낌의 소도시. 정말로 그곳에는 라 보시에가 탄생한 집이 보존되어 있었다. ‘위마니스트 - 인문주의자, 인본주의자, 인간주의자 뭘까 - 에틴 드 라 보시에 태어나다, 근대 민주주의의 시조들 중 한 사람’이라고 박혀 있었다.

라 보시에를 알게 된 것은 루소를 통해서였다. 『누벨 엘로이즈』는 머리로만 사랑을 알던 풋풋한 젊은 시절의 나를 매료하기에 충분했었다. ‘오 쥘리! 시간도 노력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인상이라는 것이 있어요. 상처는 아물어도 그 자국은 남아 있어요.’ 막상 파리에서 루소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소설은 물러가 버렸다. 『불평등 기원론』은 말하고 있었다. 소유는 도둑질이다, 부자들은 인민의 착취자들이다, 압제자를 제거하는 것은 일종의 권리다……. 그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주권과 자유는 소멸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자유의 아버지였다. 자유 - 얼마나 아름다운 개념이었나, 추상적, 아니 피상적 의미도 잘 몰랐으면서. 그런데 루소를 200년쯤 앞서 라 보시에라니! 오를레앙 법학도 시절 쓴 『자발적 노예상태』는 사후 십 년이 넘어서야 발표되었고, 실제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는 보르도의 고등재판관으로 재직 중에 서른셋에 요절했고, 그에게서 모든 것을 위임 받은 친구 몽테뉴는 출판을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한참 되어서 잊었다, 내용인즉슨. 세르비튀드 - 이 단어는 종속, 예속 그런 의미이자 봉건 노예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 문제다. 우리는 노예상태로 태어나 그렇게 자라고 살기 때문에 자유를, 우리가 자유임을 모른다. 독재 치하에서는 사람들은 쉽게 비굴해지고 나약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앙탕드망 네트 - 순수한 오성, 그리고 에스프리 클레보아용 - 통찰력 있는 정신만이 우리가 자유인 것을 깨닫게 하고 자유이기를 원하게 한다. 솔직한 의지와 솔직한 소망이면 된다. 바른 행동을 위해서는 배우자! 그런 마지막 말.

몽테뉴가 영지로 은퇴한 뒤에 이 글을 발간한 것은 모나크마르키였다. 이 폭군방벌론자(?)들은 주로 박해당하는 위그노였다. 라 보시에는 요절이 그저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살아서 늙었으면 엉뚱한 변절과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르면서. 한 동양 대학생이 사를라 골목을 거닐고 라 보시에가 태어났던 집의 현판을 애정을 담아 쓰다듬고 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일만 단어 정도의 이 짧은 격문은 이미 500년을 넘어서 살아 있으니.

 

느닷없는 파리 시절에 대한 향수가 멋쩍게 느껴졌다. 자유를 향한 독서가 네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네 앞의 세상은 자유로우냐. 비겁한 넌 지금 라 보시에가 아니라 그보다 서른 해를 더 살면서 독서에 파묻혀 넉넉한 인생을 향유한 몽테뉴가 부럽지 않으냐. 『수상록』은 이 세상 얼마나 많은 서가에 꽂혀 있는가 말이다.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더러 밤에 꾸는 꿈들은 중요하지 않다. 낮꿈이 문제다.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원하는 것이 있기나 한지. 또 오늘의 어느 조각이 혹시 있을 내일에 흘러 들어갈는지. 혹시 있을? 나는 정말로는 내일을 은근히 그리고 있나 보다.

 

이 몇 년간 나는 가끔씩 머리가 돌게 불안할 때가 있었다. 내게 미래가 있어도 영영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 혼자서 할 수 없는 일, 아이를 갖는 일을 생각하면서 달력을 연두색으로 칠해놓기도 한다. 분홍색이면 수상해서 일부러 반대색을 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임 기간.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나도, 칠하는 내 손도 알고 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어려선 나는 그 말이 낭만적인 말인 줄로 알았다, 하늘과 별에 관련된 아름다운 이미지. 그것이 적나라한 그 표현임을 깨달은 것은 최근이었다. 문제는 어떤 낭만적인 동기도 없이, 아이는 벌써 잉태되어 있고, 곧 태어나고, 그 다음 상상은 막히고 만다. 아버지가 없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버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혹시 아버지가 가능하다고 쳐도, 그 적나라한 순간에까지 어떻게 이르는가. 얼마의 시간이, 어떤 장소가 필요할까. 내 침대가 자연스러울까. 아니, 너무 좁다. 원룸에는 딱 이만한 침대가 붙어 있을밖에. 아니,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사랑에도 감정이입이 필요할 터인데, 내 방은 몰취미다. 유일한 유리문 밖은 가스레인지가 있는 옹색한 부엌이다. 부엌에 붙은 창은 바람막이 천 쪼가리 하나 없이 앙상하다. 복개상가에서 천을 사서 바느질까지 맡겨놓고는 찾으러 가지를 못한다. 비겁해서, 다리 밑의 여자를 정말로 만나게 될까 봐서 못 간다. 또 천을 가린다 해서 나아질 지도 의문이다. 시큼한 부엌은 일상이고, 사랑은 일상이 아니다. 나의 가능한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잃는다. 이렇게 말하면 가난한 연인들에 대한 모독일까? 아니, 한번 마음에 들어왔었던 - 과거형으로 말해야 하는 - 아버지들이 어느덧 천천히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빈 마음 때문에 초조감이 더하다는 것을 안다.

 

 

거울을 책상에 앉힌다. 2014년 마지막 금요일, 아침에 박 선생에게서 어김없이 문자가 도착했다. 6시 반, 청솔. 알? 나도 알! 이라고 답신했다. 최단 통신.

바삭바삭한 얼굴에 로션을 바른다. 립스틱을 들어본다. 아니다, 입술은 아니다. 아이섀도로 힘을 줄까 하다가 마스카라 생각에 괴롭다. 나를 ‘격파한’ 마스카라. 후배 강사의 눈 끝에서 빛나던 그것. 전임이 되었으니 강단에서 당당하게, 여전히 깜빡거릴 때마다 부스러기가 날릴 마스카라의 눈에 또 다시 아프다. 재빨리 아이섀도를 집어 든다. 초록빛은 고양이 느낌이라 피하자. 하늘을 보려면 하늘색을 써야지. 하늘 누구를?

 

 

하늘 후보는 아예 없었다. 박 선생이 모아놓은 그룹에는 그가 청일점이다.

김, 신, 유 그리고 정원, 유민. 이 선생 둘은 구별을 위해 우리끼린 이름으로 부른다. 인문계열에 남학생이 적으니 강사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하나쯤은 더 없을까, 남자가? 그러는 순간……. 나는 울고 싶어졌다. 거의 눈물이 나왔다.

 

아, 배 교수님, 여깁니다.

박 선생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는 시선의 끝에 그가 오고 있었다, 배승한. 내 마음 속에 무심코 내 아이의 아버지로 들어왔다가 소멸해버린 그가.

 

아, 좀 늦었어요. 미안합니다.

어머나, 배 교수님 이야긴 안 하던데요?

뭐 굳이. 첨에 둘이 볼까 하시더니, 몇 사람 함께 만나자고.

네, 우리 좀 심심하던 참이어요. 괜히 속상하고 몸은 뒤틀리고.

다들 섣달 크내기라?

누가 개밥 퍼줄 일 있어요? 개나 고양이 프렌들리?

나는 안티. 그렇다고 모피 애호가도 아니지만.

애매하네요, 동물 프렌들리는 아닌데 모피 반대자라…….

 

이율배반이 인간의 속성 아닙니까.

그, 배 교수는 거창하게 시작했다.

나라면 지록위마 대신 이율배반을 골랐겠어요.

너무 쉬운 말 아녜요? 교수신문은 되게 어려운 말들 좋아하던데…….

민주주의하자고 민주주의를 흠집 낸 결과니까 이율배반이지 뭐겠소. 민주주의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이해인데, 옳다고 믿는 다수가 다른 소수를 틀렸다고 말살했으니.

 

모이면 또 그 소리. 머리가 아팠다. 국가 차원의 정치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요즘 다리 밑 여자 걱정만 했다. 겨울것을 웬만큼이라도 가졌을까. 어디서 잘까. 온전히 잘 수나 있나. 누군가가 굶주린다면, 우리가 호의호식하는 하루하루 때문이다. 물론 나는 호의호식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어도 잠자리가 있다. 그런 생각들로.

 

배 교수님, 독일공산당도 해산당했다고…….

알다시피, 그러니까 서독 초창기에 위헌 판정이 났죠. 완벽한 민주주의가 쉽지 않으니.

독일은 프랑스와는 정말 다른가 봐요.

누군가의 말에 다들 나를 쳐다보았다.

예, 전후 프랑스에선 파쇼 청산이 시급했으니까요. 내가 겨우 답했다.

서독에서는 나치스 색출보다 공산당 방어에 급급했지요. 그가 제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서독, 그러니까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그게 헌법이죠, 헌법에 아예 위헌정당 해산제도가 있었어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하거나, 연방공화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려는 정당은 위헌이고, 위헌 여부는 연방헌법재판소가 결정한다고. 그러니 규정대로 한 거죠. 공산당이 내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지만, 구체적 기도가 없이도 이 질서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위헌이라는 취지였으니까요.

구체적 기도 없이 의도만으로도? 우리나라랑 똑같네요!

다르죠, 우리 헌재판결문을 보면 ‘실질적 해악을 끼치는 구체적인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적시되어 있어요. 통진당은 구체적으로 위험하다는데요?

내란음모사건이 유죄인지 판결도 안 났는데 그걸 근거로 정당해산을 판결하기는 좀…….

판사 나셨네!

흔히 우리나라를 미국이나 외세에 예속된 천민자본주의라거나 뭐 그렇게들 말하는데, 바로 그 점이 헌재에서 밝힌 통진당 해산 이윱니다. 조심들 해요.

조심들 하자고!

말이 자유민주주의이지, 자본가 중심의 권력이 지배한다고 보는 견해는 일반적 아닌가요? 구조적으로 불평등사회인 것도 맞고.

통진당 강령에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진보적 민주주의 목적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소수의견도 분명…….

다수결이 민주주의 아닌가요. 어쨌거나 헌재 판단으로는…….

 

말들이 핵심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도 국회의원들 자격이 박탈되었나요?

그건 좀 달라요, 오년이나 걸렸으니까. 공산당이 제소되었을 때는 열댓 정도 의석을 갖고 있었지만, 곧 교섭단체권도 의안상정권도 잃었어요. 이어서 총 득표율 미달로 연방의회에 아예 입성을 못했으니까 정작 해산 땐 연방의원이 없었지요. 하지만 판결 이후도 문제였어요. 공산당과 관련해서 십만 명 넘게 조사를 받았고, 칠팔천이 어떤 식으로든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까.

 

우리가 웬 독일공산당 걱정, 것도 옛날 일을.

옆에 앉은 신 선생이 시큰둥해했다. 나랑 둘이는 싫증을 내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아직 뜨겁게 정치적이었다.

그게 역사는 여기저기서 되풀이되기 때문이지요. 이번엔 테솔도 가지고 있는 유 선생이 나섰다.

그 유명한 매카시 선풍도 딱 그 무렵이었잖아요. 국무성 안에 이백 명인가 공산주의자가 활동하고 있다는 억지 연설이 먹힌 게 시대 탓이지 뭐였겠어요. 중국이 공산화되었지, 한국전쟁 터졌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정치권에서 이용한 거죠. 수백이 감옥에 가고 만 명 이상이 실직을 했고. 정작 정치인들마저 매카시즘 공포에 떨었으니까, 외교노선은 경색된 반공노선을 걸었을 밖에요.

 

사람들은 왜 대세에 약할까요.

사람이니까. 비겁함이 살아남는 장치니까.

국가가 대외적 위신이나 지적 환경에 먹칠을 해도 사람들은 우선 대세에 손뼉을 쳐요.

대세는 있기 마련이죠, 언제 어디서나. 문제는 다수가 소수자를 존중하느냐 아니냐 그거죠.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서구에서도 그런 걸, 하물며…….

하물며 우리는 어설픈 민주주의다 그거요?

어설프기보다 아직 뿌리가 깊지 못해서…….

그런데 정말 후폭풍이 일까요?

며칠 전 창원대 교수의 헌재 8인 탄핵소추 청원도 해프닝으로 묵살해 버리나?

그런 일이 다? 뉴스에 못 봤네요.

혹독한 날들이 올 겁니다. 훨씬 모진 날들이…….

 

훨씬 모진 날들이 온다,/ 이의신청에 의해 유예된 시간이/ 지평선에 뚜렷이 모습을 보인다……. 시구가 허공에 어른거린다.

 

아, 아아. 그는 「유예된 시간」을 알고 있었다. 독문과 아니던가. 내가 아는 바흐만의 시를 그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의’ 유예된 시간을 예감하기나 할까?

우리들? 나는 헛꿈에 잠겨있고, 동료들은 여전히 현실에 들려있다.

사람은 생각보다 무력한 존재요, 생명의 일회성 때문에.

화제는 잠시 일반화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곧 심각해지고 말았다.

죽을 때를 안 사람도 있어, 단원고 교감선생님 같은.

맞아, 구조자 명단 76번째였어, 그 교감선생님.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300명 넘은 학생들 데리고 출발해서 단 75명 앞세우고 나왔으니. 믿기지 않았겠죠?

누가 세월호를 입에 올려? 아, 그 지독한 슬픔, 아니 절망의 단어를 오늘 좀 잠시 잊으면 안 되남? 지통재심(至痛在心) - 지극한 아픔이 내 맘에도 있다고요.

술이 좀 들어간 박 선생이 갑자기 물러 터진 소리를 해댄다.

그래요, 세상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이 있어요.

뭘 못 해요? 못 하면? 둘러댄다고?

그는 태도가 돌변해서 아무에게나 공격적이 되었다. 술이 그런 것이다. 이랬다저랬다.

뭐라도, 살다 보면…….

살다 보면 좋아하시네, 얼마나 사셨다고! 정치개입은 뭐고 선거개입은 뭔데, 것도 선거 기간에! 아, 참 미묘하고 멋지네요!

인간사 미묘한 것 이제 아셨나!

나도 괜스레 쏘아붙였다.

그 순간 내 호르몬은 너무 사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외적인, 그러니까 사회나 정치나 그런 화제가 정말 버거웠다. 나는 그냥 한 사람, 한 여자이고 싶었다. 아이 아빠 후보를, 후보였던 사람을, 이리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마당에.

 

어려운 문제요. 죽어서 살고 살아서 죽는다는 말은 진리 같은데.

우리 이러다 모두 병나겠어요. 어쨌거나 살아남은 오늘, 지독한 슬픔과 상실의 한 해였다 쳐도 우린 살아남았고, 살았는데 어떡하라고.

네, 그래요. 말 수 적은 유민샘이 모처럼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어느 심리치료사가 그랬대요. 병은 다 마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일테면 위장병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땜에 생긴대요. 새로운 것을 소화할 수 없어, 그런 무서움이 원인이라고.

별소리!

아니, 일리는 있는 말이야, 걱정이 위장병 된다는 건 통용된 사실 아닌가?

그래요. 건망증도 삶에 대한 두려움 땜에. 삶에서 달아나고자 그런 방어기제를 편다 그거죠.

설마.

더 재미있는 말도 있더라고요. 당뇨병은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달콤함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 깊은 슬픔 땜에 온다고.

뭐? 당뇨가 쓸쓸한 슬픔 때문이라…….

웃픈가? 아니 어떻게든 웃어야 할 게 아뇨, 살려거든. 애도 낳고.

아차, 나는 무심코 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섞인 마당에 속마음 내비치지 않으려고 술을 삼가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풀렸나 보다.

웃프담서 거기 애는 왜 끼어 넣는데요?

속 모르는 박박은 이제 놀리는 수준으로 가고 있었다.

잠깐만. 웃프다, 애 낳자. 이게 무슨 말이냐고! 아, 유민샘! 유민 에브리 씽 투 미. 어때요?

싱겁기는. 유민샘이 뽀로통했다.

 

 

다들 왁자지껄 와중에서 그, 배승한은 갑자기 말이 없었다. 나도 그만 입을 닫았다. 손이 그에게로 뻗침을 누르느라고 아파왔다.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니 눈을 감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서 원하는 것은 아이다. 나는 아이를 원하고, 내 아이의 아버지로서 다른 선택이 별로 없어서 그를 생각한다, 생각했었다. 최소한은 몸을 섞는 일, 그게 거북살스럽지는 않을까. 생각이 그에 미치면 껄끄럽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까지 한다. 잠깐, 오늘은 아니다. 연두색 날, 아기가 준비된 날도 아니다. 날이면 또 어쩔 건데. 번갯불에 콩 볶을 일도 아니고.

 

한샘, 술자리서 왜 핼쑥해요, 피곤한가 보다. 피로회복제 뭐 있더라?

피로를 회복해 뭐 하게요, 없애줘야죠!

그러네. 암튼 미리 도망갈 생각 말아요. 갈 때는 함께, 카풀 해야죠.

 

아, 박 선생 이 사람은 도통 겉만을 본다. 두어 시간 앉아 있고서도 공기를 감을 모른다.

아니, 공기다 감이다 하는 것이 나 혼자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 몇 백만 한국인이 희로애락의 술잔을 부딪고 있을 흔하디흔한 송년의 밤에 무슨 공기와 감이 특별할까. 어느 해보다 강렬한 감정들, 슬픔이건 절망이건 분노건 배신감이건, 알코올에 제곱되어 언제 발화점을 건드릴지 모를 아슬아슬한 순간일 뿐.

 

나는 마음과 상관없는 얼굴을 하고서 마음과 상관없는 단어를 내뱉으며 마지막 금요일을 보내버린다. 나는 홈리스가 아니다. 어머니의 밥이 떡국이 그립다. 벌써부터 새해엔 양처럼 순하게 살라고 덕담들이 공중에 떠있다. 순함, 말썽 일으키지 않음, 비겁함으로 무장하고 또 한 해를 살라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하지 않을 또 한 해를 살라고. 날마다 비겁함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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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광주문학상 수상자 특집

 

광주문학 2015년 봄호, 통권 74호, 46-64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12. 22:52

 

서용좌 작가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
광주문인협 내일 시상식

2013년 12월 11일(수) 00:00 광주일보
 

광주문인협회(회장 노창수)가 주최하는 제26회 광주문학상 시상식과

제6회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 시상식이 12일 오후 6시 용산동

삼영웨딩홀에서 열린다.

광주문학상 수상자는 시 부문 조숙형·이춘배 시인이, 시조 부문 김산중 시인이,

수필 부문에는 탁현수 씨가 선정됐다. 그리고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 수상자는

서용좌 작가(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가 선정됐다. 작품은 ‘광주문학’ 66호에

실린 ‘포이동 266번지’.

한편 이날 시상식에는 시낭송 및 광주문학인의 밤 행사도 함께 열린다.

문의 062-227-0811.

 

 

 


제26회 광주문학상 수상자 선정

2013년 12월 11일(수) 무등일보



 

 

 

 

 

 

 

 

 

 

 

 


 

 

 

 

 

 

 

          조숙형·이춘배·탁현수·김산중·서용좌씨

조숙형·이춘배 시인이 제26회 광주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발표됐다.

광주문인협회(회장 노창수)는 10일 올해 광주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두

시인을 선정했다. 수상작은 조숙형 시인의 시집 '붉은 카펫', 이춘배 시인의

시집 '하얀 강 푸른 별이다.
또 수필 부문에 탁현수 수필가의 '조화를 위한 조율', 시조 부문에 김산중

시인의 '무돌길 따라'가 수상작으로 확정됐다.
올해의 작품상에는 소설가 서용좌씨의 '포이동 266번지'로 결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오후 열린다.

 

 

 

 

 

 

 

 

 

 

 

 

 

 

 

 

 

 

 

 

  수상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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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 수상 인사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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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늦어서 죄송합니다. 피치 못한 사정이 하필 오늘에 중복되어 이제야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못 오는 것은 정말로 예가 아니다 사료되어 불참대신 지각을 무릅썼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늘 2013년 12월 12일, 오로지 글쓰는 일에 전념해 오신 동지 여러분들 앞에서 부끄럽게도 가르치기와 글쓰기라는 이중 얼치기 생활을 해왔던 제가 감히 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되어 어리둥절하면서도 한껏 기쁩니다.

  이 상은 아마도 제 글쓰기에 대한 상이 아니라 꼭 써야 할 것을 썼기에 주시는 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문학 2013년 봄호, 통권 66호』에 기고했던 「포이동 266번지」는 사실 저로서는 혼신을 더욱 기울인 작품이었습니다. 포이동 266번지, 지금은 공식적으로 개포4동 1266번지, 속칭 재건마을을 아십니까. 이곳이 주목을 받은 것은 2011년 6월 그곳의 화재 때문이었습니다.

  1981년, 자활근로대란 이름의 45명을 이주시켜 경찰을 지도관으로 두어 통제하던 곳, 나중에는 베트남 참전 상이용사들, 양재천 주변의 넝마주이들을 이주시키면서, 매번 “이곳이 당신들이 살 터전이다.”라고 약속했던 정부와 강남구청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재건마을에 화재가 나서 총 95가구 중 75가구가 전소했지만, 화재 후 몇 달 씩 수거물을 방치해둔 채 임대주택으로 이전을 종용한답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 임시로 보증금 300에 월세 6만원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 누가 어떻게 무슨 돈으로 신축하련다는 임대주택으로 이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떠올렸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대로 문학의 스승격인 독일 작가 고 하인리히 뵐의 외침을 기억해냈습니다. “문학은 분명코 사회에 의해 쓰레기로, 경멸적이라 선언된 것만을 그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던 경구를 잊지 말자고. 사회에 의해 쓰레기로 선언된 것, 또는 경멸적으로 간주된 것을 그 고결성에서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작가의 글쓰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 오늘 이 상의 의미는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 회원들께서 스치고 읽지 않으셨던 포이동 266번지」를 이 상을 계기로 다시 찾아 읽어주신다면, 그것으로 이 상의 의미는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정신하겠습니다.

 

                                                                             2012년 12월 서용좌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8:04

포이동 266번지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포이동 226번지 - 이 지번은 픽션이어야 한다. 포이동 226번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거기 사람들의 허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달을 허비한 것이 잘 한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를 그리로 데려간 것은 아직 이른 나이에 요양병원에 들어있는 당숙모다. 아버지의 사촌동생, 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당숙의 부인, 그 당숙모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챙기신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 둘째 큰아버지는 벌써 옛날 결혼 전에 미국에 가서 안착하셨으니까 - 아버지가 집안의 연결고리가 되신 것 같았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 뒤에서 늘 분주하시다.

 

 

요양병원 로비는 정작 환자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화려한 셈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간단한 음식을 챙겨 오셨다.

(누구?)

나 금실엄마.

(금실엄마 누구?)

여기 우리 금실이. 나 금실엄마. 우린 동갑내기 한실이들!

한실이란 말이 당숙모를 움찔하게 한다.

한종남 씨 아내!

어머니가 길게 부르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머니는 아차 하는 작은 소리를 내시더니만 그냥 가져온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여기, 아지매 좋아하는 파전 있어요. 동래파전! 아이쿠 다 식어버렸네, 꼭꼭 싸 왔는데.

눈동자가 음식 쪽으로 옮겨가지를 않는다.

어머나,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올 걸 그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엄마, 정구지 지짐이라뇨?

아, 부추전을 거기선 그렇게 부르나봐. 하긴 네 숙모 말 듣다보면 웃겼다. 할머니는 얇은 솔전을, 외할머니는 두툼한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주더란 말이지.

잘 드시는 것도 있군요.

응, 조금. 네 고모는 수완이 좋으시잖냐. 헌데 지금은 무릎 땜에 많이 못 다니시더라, 칠순 때까진 펄펄 날더니. 해서 네 당숙모를 이쪽 병원으로 옮긴 것 아니냐. 고모한테 대면 내가 한참 젊지 뭐.

엄마가 뭘 젊다고 그러세요. 엄마도 좀 쉬엄쉬엄 하실 나이신데.

며느리도 없는 사람이 무슨 쉴 복? 하긴 요샌 며느린 소용없다더라. 난 딸이 셋이나 되니 좀 쉬엄쉬엄 살아 볼거나. 아차, 이를 어쩌나. 아지매! 이간호사님! 이선생!

어떻게 불러도 당숙모는 영 모른 체 하시고 만다.

음식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도와주니 조금 받아든다. 규칙적으로 벌리는 입이 아기 같다. 요양병원 생활에도 이력이 붙나 보다.

보세요,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먹이면 곧잘 드세요.

어떻게 요령이 좋으시네요, 다행스레.

안 먹으면 혼내준다고 그러시나요?

내가 엉뚱하게 끼어들었다.

예, 정말 그래요. 이걸 안 먹으면 뭘 안주겠다. 뭐 좋아하는 간식 같은 것. 그렇게 어르기도 하고. 차라리 아기 같은 분들이 우린 쉬워요. 말은 안 해도 크게 고집을 부리시지는 않으니까.

그럼 왕고집부리는 환자들도 있어요?

그럼요, 폭력도 있어요. 사정없이 손을 휘저어버리죠. 무작정이니까 얻어맞기도 해요. 지난달엔 신출내기 요양보호사가 울고 그만 두기도 했는걸요.

울어요?

꼭 아파서라기보다. 여기 일 작정하고 나서기 쉬운 건 아녀요. 여기가 처음인데 크게 충격이었나 봐요. 다음 직장에선 잘 하게 될 거예요. 누구나 첨엔 견디기 어려워요.

자, 어르신, 이묘순할머니, 이묘순아줌마, 한번만 더!

몇 입 먹이다가 지친 요양보호사는 소용없다 싶으니 입이 귀에 걸리는 미소를 순간 해보이고는 자리를 뜬다. 당숙모는 멍하니 멈추어 있다. 주섬주섬 그릇을 챙긴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 숙모 몸은 멀쩡해 보이지 않더냐?

저를 잘 모르시던걸요. 실어증뿐 아니라 아무래도 눈도 좀. 아니 기억 자체가.

그럴 것이다. 어떻게 정신을 붙들어 매고 살아갈 것이냐, 식구 모두를 다 잃고. 그런데 어찌어찌 버티다가 하필 포이동에서 장롱에 목매단 사건 이후로 더 저리 되었다고,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 설레야.

장롱이라뇨?

신문도 안보고 사냐.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모르는 것 없이 다 뒤져 본다던데.

재작년엔가 포이동 화재사건이야 알죠, 그 다음 더욱 처량해진 사람들. 하긴 당숙모가 저리 되신 건 한참 전이죠? 포이동이면 당숙모 사시는 데도 아니잖아요.

그게 가까운 거리지. 걸어서 15분, 20분도 안 되는 거리야. 네 숙모 사는 데가 물론 포이동 재건마을하고야 같겠냐. 개포 시영은 재건축 기대로 한 때 잘 나갔었다더라. 그럼 또 뭐하겠어, 당사자가 저리 되었는데. 또 성한들 24평 그런 걸 받으려면 들어갈 돈이 얼마고……. 모르겠다. 아무렴 네 숙모 정신이 돌아오려나.

그런데 장롱 사건은 뭔데요?

그게 화재사건 한참 전 일이지, 저 사람 저리 멍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어디서부터 하랴? 아서라. 말죽거리 네 고모가 저 사람들 서울로 불러들일 때만해도 희망은 있었지. 아니, 우리가 볼 때는 어처구니 없더라만.

어머니는 섣불리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러다 결국 털어놓으신 것은 고모를 통해서 알게 된 당숙모의 얄궂은 포이동 가슴앓이였다.

1979년 마산의 작은 병원의 간호원 이묘순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늦깎이 대학생 한종남과 미래를 설계하는 사이였다. 종남을 처음 만난 것은 전방으로 오빠 면회를 갔을 때, 간호고등을 졸업하고 간호원이 되어있을 때였다. 시를 좋아했지만 언감생심 대학은 꿈도 안 꾸었던 그가 제대 후에 대학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묘순 때문이었다.

한종남은 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지만, 아직 꼬마였던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함흥에서 1.4후퇴를 피해 흥남부두를 떠나온 어머니가 거제도 피난민촌에 도착한 다음날 철 이르게 세상에 나왔다. 북에 남은 아버지 - 우리 아버지의 막내삼촌 - 생사를 모른 채 흥남이라 불리며 부산에서 자라고 있었다. 입학할 때가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정문리 본가로 모자가 찾아온 뒤로 항렬자를 따라 종남이 되었지만 부산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는 많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부마사태의 와중에서 체포되었는데, 며칠 뒤 대통령 사망뉴스가 나갈 즈음 구토를 하며 의식을 잃다시피 병원으로 실려 갔다. 뇌와 관련하여 응급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불행했다. 그렇게 그의 생은 졸업은커녕 그 상태에서 정지해버렸다. 중환자실로 달려온 여자 친구는 - 그이가 당숙모다 - 놀랍게도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고, 그 길로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해서 4인 가족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한 두 해를 버티다가 치료에 대한 희망으로 서울로 왔다. 아빠는 아기가 재롱을 부리면 함께 친구하며 웃었다. 아기는 겨우 아장거리다가 넘어지다가 점점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아빠는 점점 움직이는 일을 못하게 되었다.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흔한 감기에도 입원을 반복했다. 생활은 기울고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다시 직장을 구했다. 간호원 자리는 점점 대졸로 채워졌고 지방의 간호고등 출신으로는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야간 담당만을 자원하면서 준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아기는 저녁마다 자장가를 불러주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랐다. 어머니도 아내도 온갖 힘을 쏟았지만 종남삼촌은 감기에서 폐렴으로, 폐렴에서 패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시장엘 갔으려니 했다. 그날따라 아일 데리고 어른걸음으로도 10분도 넘는 양재천엘 왜 갔을까. 징검다리 부근에서 빠졌을 리는 없다. 거긴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깊이이니까. 혹시 모른다, 먼저 아기를 놓치고 구하려다가……. 멀리서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아기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했다. 할머니는 잠깐 아기를 잃었다가 뭔가를 소리치며 물속으로 정신없이 뛰어든 것 같았다고. 그렇게 할머니와 아기가 갔다. 혼자 남은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병원에도 다시 나갔다. 낮이면 양재천엘 자주 나갔다.

당숙모가 포이동 266번지와 연을 맺은 것은 일단 양재천변 코앞의 동네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심코 천변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곤 하다가 이상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두 세 시쯤이면 폐지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이 박혀버린 때문이었다. 누굴까. 당숙모는 할아버지들의 얼굴과는 친숙치 않았다. 친가 외가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조차 일찍이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란 어떤 얼굴인가를 몰랐다. 그런데 등 위쪽이 마르고 아기처럼 수줍은 얼굴의 할아버지란 당숙모에겐 상상이 안가는 어떤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 할아버지는 꿈에선가 어디에선가 분명 만났던 사람이었다. 누굴까. 몇 번을 그렇게 스치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곳이 포이동 266번지였다. 개포 시영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그곳에, 사람살이인가 싶게 살아가는 동네. 아니 동네 느낌이 아니라 쓰레기하치장 같은 곳. 거기가 그 아기 같은 할아버지가 몸을 누이고 사는 데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도통 말이 없었다. 처음 쭈뼛거리는 인사에도 알아듣는 듯 마는 듯. 귀가 안 들릴까. 그렇게 기웃거리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뉘시우? 그 양반 무신 말 잘 안허걸랑.

아유, 죄송해요. 제가 아는 분인가 싶어서 따라왔는데, 언젠가 헤어진 누군가 싶기도 하고.

에고, 잘 되었우, 행여 아는 사람이믄. 이 양반 평생가야 사고무친에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걸랑.

아니, 어떻게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게, 우리 아저씨가 하꼬방 살 때부텀 만난 사람인데 말이우.

하꼬방이요?

아, 그 청계천서 폐지 하다가 이리로들 왔다는 것 아니우. 난 여기 온 뒤로 만났다우.

그럼 아저씨께선 잘 아시겠네요?

알다마다요, 그 사람을 살렸다는데. 뭔 인연인지 여기꺼정 함께 왔으니.

아저씨는 해가 넘어가서야 판자촌으로 들고, 당숙모는 밤 근무를 해야 해서 주말에야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설명도 아리송하기만 했다.

한참 군사정권 때 일인데, 어느 새벽 청계천변 하꼬방 판자문 앞에 모로 누워서 새우잠을 자다가 발견된 사람이란다. 첨엔 자는 줄로 알았는데, 정신을 잘 못 차려서 일단 끄집다시피 하꼬방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자기 이름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말을 시켜도 못하고 알아듣는지 마는지 그런 사람이었다. 하꼬방에서 한데 살던 둘 중에서 나이든 사람이 삼십 중반의 김 씨였다. 이 노인네를 어쩌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렇게 며칠, 가만 앉은자리에서 폐지를 혼자 정리하고 그러더니 고물 책 하나를 보고 눈이 뒤집히더란다. 그걸 품고 자는 것이 신기해서 구경거리가 났나 싶었단다. 다음날엔 두 사람이 각각 일을 나서는데 엉거주춤 따라나서더란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성 싶었는데도. 결국 첨엔 뒷짐을 지고 따라다니더니 오후엔 뭔가 글자가 있는 것이면 슬며시 집어 올리더니, 그제서는 버린 책이며 휴지를 집어오는 일을 곧잘 하더란다. 어수룩한 사람 버리기도 뭣하고. 그러다 하꼬방 사람들이 한꺼번에 재건마을로 쫓겨 올 때 묻어왔는데, 이름이 난감했다. 순간 김 씨가 얼른 생각을 해낸 것이 이 노인이 처음 집어든 책에 적힌 이름이었다. 그것을 비슷하게 따서 김수용이라고 둘러댔다. 일가 아저씨인데 말을 잘 못한다고 하고. 나이도 대충 적어 넣었으니까 실제 나이는 모른다. 일단 서류들을 만들어 재건대원등록증을 나누어 받았으니까 유령에서 사람이 된 것. 어쩜 다행인 것이 호적 없는 사람들도 그땐 주민등록 취득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포이동 200-1번지. 정말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서인가는 이 동넬 완전히 유령 취급을 해서 아예 주민등록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 뭐 그런 정보였다.

김수용이래요, 유령이었다가 사람이 되었다네요. 참 그런 일들도. 그래도 유령처럼 되기 이전엔 분명 사람이었을 거 아녜요? 어디서 뭘 하다가 청계천 하꼬방 문간에 나타났을까요? 그 얼굴이 뭔가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설까, 알 수가 없어 고민 중이예요.

걸 뭘 고민하고말고. 거야 병원에서 그 많은 환자들 보며 살아온 세월 때문이겠지. 자네 살기도 힘 드는데…….

양재동 고모가 그렇게 말하면, 글쎄요, 난 포이동 거길 꼭 들여다봐야 숨이 쉬어지는 걸 어쩌죠, 하면서 웃곤 했단다. 이후로 고모가 당숙모의 입에서 듣는 말은 모두 그 재건마을 이야기뿐이었다.

포이동 266번지 - 장화 없인 살 수 없는 진흙탕 속. 어쨌거나 땅을 개간하고 얼기설기 판잣집을 지어 만든 마을이래요.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꼬, 했어요. 망태할아버지들 말고도 일가친척이 없는 고아 출신도 느닷없이 이리로 팽개쳐졌다고도 해요. 어쨌거나 양재천 저쪽 사람들은 여길 양아치 소굴이라 한다네요. 무슨 특별단속기간 같은 때는 난데없이 절도범이라고 잡혀가는 사람도 있고. 그게 실적을 세우려는 형사들이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도 하고. 죄 있고 없고를 누가 그리 훤히 안대요? 그래도 이렇게 여자들도 들어왔고 아이들도 생겨난 것이 사람 사는 동네죠.

포이동아재 - 숙모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언제 다리를 다쳤을까요? 보아하니 상이군인은 아닌 것 같고, 뭐 총상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요.

포이동아젠 가족이 없었을까요? 도통 가족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질 않으니. 김 씨 아저씨네가 옆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집 꼬마 애를 보면서 눈가가 축축해지는 걸 난 봤어요.

포이동아젠 나이도 알 수 없으니. 누런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는 걸 보면 환갑이나 되었을까? 책은 고물에서 골라낸 것들. 신문도 날짜 관계없이 샅샅이 보는 것이 뭘 찾는 사람인지…….

아, 포이동아재가 처음에 꼭 껴안다시피 내놓지 않고 읽었다는 책이 뭔 줄 아셔요? 눈 큰 김수영의 시집이에요, 아마 첫 시집이죠. 『달나라의 장난』. 작은 나무상자 위에 그 책이 있더라고요. 1950년대에 나온 데다 버려진 것이니 너덜너덜했지요. 원래 주황이었을 바닥 몇 센티미터 위로 펜 하나로 그린 고층과 저층의 상징적인 집들, 그 위로 한 가운데 둥글게 뜬 달. 글자들이 종이 속으로 녹아들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보다 온전했어요. 그보다 기가 막힐 일은요, 집엔 애 아빠가, 종남 씨가 남긴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가 있거든요. 함께 샀어요, 900원 주고. 양장본인데 표지 색깔이 독특해요. 처음 그걸 샀을 때 난 무심코 바다색이라고 했더니, 제목의 달을 보고서도 우주보다 바다가 먼저 생각나느냐고 나를 놀렸던 얼굴이 떠올랐어요. 우린 「복중」에 애를 배서 조용해진 계수 이야기에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나도 그럴까? 너무 조용한 것도 병이다, 너무 생각하는 것도 병이다…… 그런 구절들을 외었지요. 그 얼굴이 갑자기 포이동아재 얼굴에 겹쳐지는 거예요. 아이 같던 그 표정에 주름이 깊어지더니……. 아, 세상에 어떻게 똑같이 김수영의 시집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달 어쩌고. 세상엔 닮은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어떻게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같은 취향을 나누죠? 형님도 그 아재 한번 보면 안 될까요? 얼굴만 좀…….

물론 고모가 포이동까지 가서 그 노인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사람이 우연도 있는 것이지 뭘 그러나. 봉산가 뭔가 이젠 좀 그만 하지, 자네도 요새 보면 얼굴이 부숭부숭하고 그러는걸.

고모가 그렇게 말리면 당숙모는 이젠 포이동 들르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거기 종남 씨 얼굴이 겹쳤던 주름진 얼굴을 보러 가야만 한다고. 언제 어느 순간 옛날 생각이 나거나 입이 열리거나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게 실어증이라기보다는 함구증일지…….

그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때서. 병원에서 보는 환자들로 모자라는가. 이젠 자네도 뭔가 앞날 생각을…….

고모는 실어증인지 함구증인지 말을 거의 못하는 답답한 노인을 찾아다니는 당숙모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거긴 여름에도 방역 한번 안 나와요. 사람 사는 동네에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마을 생긴 것이 언젠데 아직 수돗물도 없어요. 어떻게 여기 한 동네만 빼놓고 공사를 해요? 사람들은 땅에 구멍을 파놓고 지하수를 길러다 먹죠. 물을 떠다 붓고 한나절이면 물이 퍼렇게 변해요. 숯을 놓거나 짚 같은 거나 베 쪼가리를 깔고 걸러보기도 하고.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사는 포이동아재한텐 물이 젤 문젠거라요. 밭은기침도 가끔 하는데. 참 형님, 구룡사 물이 아주 좋다지요? 불공드리러 가서 안 드셔봤어요?

당숙모는 불심과는 상관없이 고모를 따라 약수라고 소문난 구룡토수를 길러 다녔다.

아, 그런데 재활근로대가 해산되었다는 것이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포이동아젠 요즈음엔 마을 출입이 통째로 통제되니까 좀 쉬겠지요?

그건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이 동네 밖으로 출입이 통제될 때 한 말이라 했다. 실제로 나라 안팎이 88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들뜬 때였다. 서럽게도 이들 빈민들의 꼬락서니가 국가의 수치라며 마을 밖 출입을 통제했단다. 고모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당숙모는 더 자주 그를 찾을 밖에.

포이동아젠 큰일 났어라. 포이동 266번지가 개포4동으로 번지수가 바뀌면서 주민등록을 안 해준다는군요. 더 큰일 났어요. 자활근로대 해산이란 게 심상치 않은 거라네요. 원래는 우선으로, 그러니까 재건마을 사람들을 먼저 선착순으로 땅을 불하해준다는 조건이었는데. 그게 글쎄, 이미 살고 있는 땅을 새삼스레 돈을 주고 사가라는 것인데. 아무튼 법이 바뀌어서 266번지 사람들이 불법점유자가 되었다네요. 첨엔 하천 가에다 잡아넣다시피 억지로 데려다 놓고서 조용히 살면 땅을 준다고 했었다는데. 고달픈 삶에서 제 각각 나름대로 꿈같은 것을 품고 왔었을 것 아뇨. 고물상 김 씨 아저씨도 청계천 사과상자보단 나은 집을 가질 줄 알았다네요. 그러다 십년 살고 나니까 불법점유라고.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만, 그게 원래 서울시 도서관 부지였다는 것이 말이나 된가요. 십년만 더 살면 일 없을 텐데, 아니, 그리 될까봐 미리 수 쓰는 거래요. 나라가 국민한테 수를 쓰다니. 고르고 골라서 제일 비참한 국민한테.

진짜 큰일 났어요. 한번 불법점유자라 딱지를 붙이니깐 이젠 무단 점유 변상금을 내라고 세금이 날아들었대요. 각 집에 30만원도 넘는데 그게…….

당숙모의 근심은 해가 갈수록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이어졌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못 해내라. 옆집은 둘이 벌어도 다 못 한대요. 김 씨네 아줌만 청소일 다녀요, 벌써 언제부터. 근데 이자가 20퍼센트나 된다는데 그게 자꾸 불어나면 어쩌냐고요.

포이동아젠 분명 병이 있어라. 몸 움직이는 것이 더 근들근들한데 병원엘 가지 않으니 알 수 없지요. 내가 간호사라고 해도 들은 신청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 알아들었다는 말인지, 내버려 두란 말인지. 오늘은 피붙이는 없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퀭한 눈을 한번 크게 뜨더니 눈을 딱 감아버리더라고요. 말은 안 해도 분명 알아는 듣는 거예요. 무안해서 혼났는데, 얼결에 잘 계시라는 소리도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맘 아픈 걸 물어요…….

당숙모의 근심걱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포이동아재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진즉에 그를 등졌으므로, 그는 쉽게도 떠났다. 옆집 김 씨 아저씨가 한 이틀 꼴을 보지 못해서 들여다보았다는데 숨소리 없이 천장을 보고 누어있더란다. 그제는 놀라서 뛰어 들어가니 오른 손 검지로 나무상자 하나를 가리키더니만 눈을 스르르 감았다고 한다. 몸을 일으키려하니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계속 상자를 가리키고. 해서 상자를 열었더니 거기 몇 소장품이라는 것 중에 처음 발견해서 가슴에 품고 읽었다는 시집과 낡은 회중시계가 하나 있었고.

장례랄 것도 없이 김 씨 아저씨하고 동네 몇 사람이 구룡산 언덕에 뿌려주면서 승천하라고 빌었다. 아홉 형제들 함께 승천을 못하고 남은 막내 용이 승천을 기다린다는 구룡산, 여기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살아서 못 오른 하늘에 죽어서는 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고도 바로 흩어져버리지 못하고 포이동아재의 빈 단칸방에 돌아와 앉은 몇몇 사람들. 임자 없는 세간들, 그것이라도 대충 필요한 사람이 써보자고 챙기는 실팍한 사람들. 실팍하지 않고서야 곤곤한 삶을 어찌 살아남겠는가. 작고 낡은 나무상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상자를 고이 가져갈 사람은 우리 간호사 선생 밖에 누가 또 있겠냐고, 딸도 아니면서 그만큼 극진히 위했으면 당연히 뭐라도 간직하라고. 또 우리들 중 누가 책 같은 걸 보겠냐고 했다. 그렇게 동네 이웃도 아닌 당숙모에게 상자가 돌아왔단다. 『달나라의 장난』과 낡아서 서버린 회중시계가 들어있는.

이게 무슨 조화예요. 이 시집이 나한테 오다니. 또 이 회중시계는 뭘까요. 쇼와 18년 HDK - 이게 이름이면 김 씨는 맞나? 고 씨, 구 씨도 있지만 김 씨일 확률이 높고. 얼결에 붙인 이름이 성이라도 얼추 맞았네요. 참, 쇼와 18년이면 해방 전이잖아요, 사십 몇 년? 이게 포이동아재 것은 아니겠죠, 설마? 그때 벌써 이런 시계를 가진 사람이 누구였을까? 포이동아재 아버지였을까요? 젊어선 부잣집 도련님이었을까요? 아참, 성을 앞에다 썼으면 한 씨? 안 돼. 잠깐, 설마 종남 씨 아버님 항렬은 뭐죠? 규자 맞지요. 하긴 진자 규자라셨으니 그것도 아니고.

고모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다시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이북에 있을, 살았건 죽었건 북에 남았다는 진자 규자 삼촌을 떠올리다니. 아닌 건 확실하겠지만, 너무 그럴싸한 예감에. 하지만 어떻게든 가운데 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으셨단다.

세월은 또 흘렀다. 뭔가 들뜨게 하는 새천년이 되어도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더욱 풀이 죽었다. 당숙모의 말로는 원래대로라면 이제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가질 때가 되었는데 현실은 무단점유자로서 빚 방석에 주저 앉아버렸으니 말이다. 1998년에야 서초구와 강남구가 서로 밀던 수도공사가 완성되어 사람들이 순간 환성을 질렀다. 그 기쁨도 잠시, 이것이 내 집 수도가 아니라는 박탈감은 차라리 수도 없는 내 집을 원하게 했다. 마을은 여전히 결함투성이였다.

그 사이 김 씨도 젊지 않은 나이가 되고, 간호사인 당숙모의 지식으로서도 다 알 수 없는 병을 주저리주저리 달고 살았다. 심부전 등 치료가 불가능한 건 아니나 산소공급이 문제라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한 번에 몇 십만 원씩 하는 치료비 감당을 해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그가 덜컥 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의료보험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무슨 일일까. 그들은 국민건강보험도 기초생활수급자 지정도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냐고! 난 그런 걸 정말 모르고 있었다. 재작년 초여름 심각한 화재사건 보도를 보면서도 몰랐다. 어떻게 초등학교 아이의 불장난이…… 라고 애석해 하면서도 재건마을이 뭔지 몰랐다. 아버지가 70년대 80년대를 가족을 돌보면서 묵묵히 맡은 일만 하시면서 살아온 것을 후회스럽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보다도 더 많은 공부를 하고서도 이렇게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불발인 내 처지만 통곡하면서.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 인권이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구나. 그걸 까맣게 몰랐다. 자유와 평등과 박해의 상징인 파리 복판에 가서 박사학위를 했으면 뭣 하는가.

포이동 이야기는 장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청소일로 병마 속 남편을 돌보던 김 씨의 아내가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되어 따라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가 말이다. 장롱에 목을 맨 참극은 로맨틱 러브스토리로 먼저 간 짝을 따라 죽는 환상이 아니다. 2,3십 년 전 아웅산테러사건 뒤에 극도의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고관의 아내와도 전혀 다른 결정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렇게 끼적거린 메모를 남겨 놓고 죽어버린 참담함. 의식주 - 문자 그대로 의식주 해결을 못해서 죽어야 했던 삶. 하필 그들의 아들은 명예와 충성심과 용기로 무장하고 무엇보다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군복무 중이었다니.

이 아들은 실제로 군대에 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는 어머니가 직장이 있다는 이유로, 겨우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다고 한다. 막상 어머니마저 죽었을 때에는 이제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역시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고. 병마와 가난 속의 부모를 지킬 수 없는 젊은이들이 필승의 신념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이 군인에게는 15년째 밀린 토지 변상금 4,5천에 자동차세 천여만 원 등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굴러왔다.

뭐 자동차세라고? 그럼 그 동네에도 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네.

그렇지만 차가 다 차인가. 고물 일을 하느라 고물 차 하나를 얻었는데, 명의를 이전하자마자 압류를 당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법을 모르는 그들. 설상가상. 명의만 있지 압류당해서 탈 수도 고물을 실어 나를 수도 없는 차는 그들의 저승사자였다.

하필 장롱에서, 키가 작다고 어떻게 장롱에서.

그 아줌마,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아주머니가 발견된 다음날 당숙모는 혼 빠진 사람 같았다고 한다. 사실 포이동 백 가구 가까운 사람들은 끈끈한 정이 양재천 북쪽 강남과는 사뭇 다르다 했다. 둘, 셋 모이면 비교요 갈등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워낙 가난의 평준화 속에 가라앉으면 키 재기할 기운이 나지 않는 법인지. 설마 싶으면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회고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안다.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그것이 숙모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더란다. 그리고는 말을 접었다. 어떻게 실어증이 걸리는가. 가족의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너덜너덜한, 눈 큰 시인의 닮은 꼴 시집 두 권을 가슴에 품고, 호주머니에 쇼와 18년의 회중시계를 감추고 방안에 들어 앉아버린 여자를.

얼음장 같은 냉기에 놀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족보를 뒤져본다. 우리할아버지 상자 규자, 그 아래 덕자 규자, 진자 규자 할아버지들. DK라면 덕자 규자의 이니셜일 순 있지만 그 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학도병에 끌려가셨다 했다. 또 확실히 돌아가셨다, 해방에서 동란 사이에. 아니다, 혹여 일본 유학생 인텔리 작은할아버지의 시계를 막내할아버지가 지니고 있었을 확률은? 해방과 동란 사이 두 할아버지들은 뜻이 맞아 늘 함께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니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 아들을 한 번도 못 만난 채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생면부지의 며느리를 마주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숙모의 혼돈은 분명 포이동 266번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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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30. 단편 「포이동 266번지」,『광주문학』 2013 봄호(통권 66호), 197-21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0. 12. 9. 23:56

 

 



 

거울 앞에서 입 꼬리에 힘을 주어 웃음기를 흘려 본다. 몸과 맘이 수고로울 일을 앞에 두면, 집을 나서기 전에 꼭 거울을 본다. 아직 쓸쓸한 봄, 할아버님의 기제사가 마침 주말에 걸리다보니 여느 때보다는 맘 편하게 집을 나선다. 형님네 대문은 빼곡히 열려있고, 부엌 쪽에서는 벌써 생선 익어가는 냄새가 먼저 내달아와 코를 맞는다.


잘 계셨어요, 숙모님. 일찍 나선다는 것이 늘 늦고 마네요, 형님.

어서 손 씻고 와 앉소. 자네 형님만 뭔 죈가.

형님이 대꾸할 틈도 안 주시고 가닥을 잡으실 양이니, 오늘도 숙모님이 주인공이시다.


동서, 빨리 왔구먼. 오늘은 시간 넉넉하겠어.

고구마 색이 곱네요.

채반에 노랗게 익어있는 얇은 고구마 조각들이 내 손을 기다린다. 뒤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열어 젖혀놓아도 수건 사이로 머리카락 올올이 기름 냄새로 범벅이 될 하루가 시작된다.


어디 쓰겄는가, 밀가루를 되직하게 하소, 뽀얗게 색 내려며는. 고구만가 호박인가 너무 노랗잖은가.

소생이 없어 늘 외로우신 숙모님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런 날이면 더 외로움을 타신다. 다행히 음식 솜씨며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단정한 맵시로 젊은 여자들을 누르신다. 형님의 입장에서는 어머님이 안계시고 보니 숙모님께 상의도 하고 도움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둘이서 조금 엇박자 느낌이 든다. 숙모님은 이말 저말을 섞어 하시고 형님은 그저 시늉만 대꾸를 한다.

식혜 솥 열어볼 때 되었네. 밥풀 서너 개 떴는가.

예.

이 꼬막은 씻은 건가 아닌가. 뻘이 그냥 붙어있네.

예.

그런데 참 늦네. 몇 시야, 지금. 여섯시가 되가는데 왜들 안 와?

이번엔 내가 놀란다. 아니 웬 여섯시 말씀을. 여기 아직 육전도 안 끝났습니다. 고추전쯤 마치고 점심 상 보잖아요. 아직 점심도 안 드시고 여섯시라뇨!

박실이는 또 안 오겄지? 숙모님은 엉뚱한 말씀으로 둘러대며 자리를 뜨신다.


형님, 오늘따라 왜 저러셔요? 이 제사 때면 애기씬 시어르신 일이 겹쳐서 언제나 시골에 가잖아요. 설마 다 아시면서.

아마 기다리는 사람 생각에 시계를 헛보신 게지.


그렇게 점심상을 차리고 치운다. 다시 번철이 열을 낸다. 벌써 두부 조각들이 기름에 지글거리고 있다. 점심 후로는 숙모님이 속이 불편하시다고 소파에 누워 계시니 우리만의 부엌에 능률이 더 나는 느낌이다. 실제로 거들어주는 손이 빠졌는데도.


갑작스레 집안에 활기가 차며 숙모님이 몸으로도 부산해지신다. 드디어 서울 사는 시동생 내외가 들어선 까닭이다. 오매, 우리 원장님 오느라 애썼네. 차는 안 막혔나? 답은 거의 듣지 않으시고 바쁘시다. 술참 때가 겨웠으니 시간이 애매하지만 일단 밥상이다. 오래 서울 물 먹다보면 냄새가 너무 진하다고 할 진짜 굴비하며, 홍어, 토속적 음식이 든 접시들로 손이 바쁘다. 부엌은 이제부터는 완전히 조용할 터다. 원장조카 턱 앞에서 음식 먹이는 맛에 푹 빠지신 동안. 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진설 시간이 될 때까지다. 해마다 기제사 때 되풀이 되는 훈계가 시작되면, 할 말은 아니지만 숙모님 입엔 작은 게거품이 돋는다. 게거품은 싸울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그래서 안다. 신바람이 나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진설을 위해서, 심지어 상에 올리는 순서까지 정하시는데 어쩌랴. 그것이 이 근년에는 순서가 조금씩 섞이는데, 그걸 종잡을 수가 없다. 좀 있으면 핀잔의 시선이 전자빔처럼 따갑게 공간을 가를 것이다.


아니, 그런데 큰 변형이 생긴다. 오늘따라 진설 시간이 되어서도 원장조카 시선만 붙잡고 계시는 것이 이상 일이다. 제기들이 죄 닦이어 줄을 서 있어도 소용이 없다. 고개는 아예 비뚜름히 고정되어 있다. ‘한 시 오 분 전’이란 별명의 여학교 때 선생님 생각이 난다. 다른 점이라면 그 선생님은 ‘한 시 오 분’과 ‘오 분 전’을 가끔 바꾸셨던 것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카 쪽으로 굳은 고개. 주름만 빼면 표정이랑은 영락없이 연인을 바라보는 드라마 주인공의 모습이다. 숙모님이 오 분 전이면 조카는 계속 오 분을 유지해야 서로를 보게 되는 것이라 그것이 썩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뉴스 시간이라도 되면 좋겠다 싶다. 


형님이 그냥 알아서 하세요. 조금 아까부터 부엌으로 섞인 막내동서가 조바심을 낸다.

숙모니임, 저희들이 대충 올려 보아요? 기다리다 못해 형님이 묻는다.

대충이 무에야. 자네들 할아버님 들으실라. 시간이 이르잖아.


서너 시간 서울사람 곁에 앉아계시더니만 신기하게도 서울 말씨에 가까운 억양이 나오신다. 심지어 모음들이 바뀐다. ‘이거 묵어보소’ 라고 할 계제면 ‘요거 먹어 봐’가 된다. 입술을 동그랗게 하면 나이 불구하고 조금 더 귀엽다. ‘응’ 할 자리에는 ‘잉’이라 하시며 웃음기를 흘린다. 원순모음과 평순모음이 둘 다 귀여운데 사용되니 이상하다. 이 말은 순전히 내 직업병에서 온다. 국어선생 기질이 어디 가랴.


신기하셔. 형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들으시려고요.

하긴. 귀도 참 밝으시니 조심하자.

형님 그런데 요즈음 좀 힘드신 일 있어요?

뭐 그냥. 사는 것이 쇼 같아서.

아무 일 없어 보이는 안정감을 특징으로 하는 형님의 입에서 조금 놀라운 단어가 튀어 나온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왠지 조금 뜨끔하다.

아니 내 말은 누구나. 조금은 억지로 참기도 하고.

그럼 속내 다 내놓고서야 어떻게 매끄럽나요? 기름칠을 좀 하는 거죠. 입가에 다시 한 번 힘을 준다. 여기는 시댁이다. 불편해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 사이.

그 정도가 아니라 내 말은. 숙모님 어제 오셨잖은가. 여전히 사뿐 걸음이시긴 한데, 뭔가 조금. 뭐라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암튼 근년 들어 느닷없이 가리는 음식들 땜에 옆에서 손을 못 쓰니 참.

거야, 티비가 범인이죠 뭐. 소가 농약 묻은 풀을 뜯어 먹는다니 우유 못 마셔, 허리둘레를 줄여야, 탄수화물을 줄여야 장수한다는 뉴스에 떡도 뭣도 못 먹고. 막내는 범인을 따로 정한다.

하긴, 내가 괜한 걱정이네. 총하시니까 뉴스 따라 사시지.


찜솥이다 냄비들이다 번철 가에서 눈을 들어 잠시 숨을 쉰다는 게 어째 말들이 샌다. 숙모님 쪽에선 반응이 없다. 막무가내로 당신 조카만 올려다보고 계신다. 살짝 미소 짓다가 조금 찡그리다가. 몇 미터 거리에서, 식당과 거실 사이 커튼 사이로 건너다보니 표정일랑은 그대로 영화다. 디카든 셀카든 등장해야할 판이다.


평소에도 저러세요?

동서는 새삼. 당신 감정에 솔직하신 거지. 지난번엔 며칠 화장실 출입 못한다고 자네한테 전화하셨다며?

거야 내 차로 움직이실까 해서……. 

그래도 오밤중에는 심하시지.

겁을 내셨더라고요, 응급실 가야하는가 싶어서. 가진 않았고요.

겁이란 것이 무서움일까 욕심일까? 암튼 오늘은 우리끼리 그냥 해보세.


사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조율시이로 시작해 첫째 줄을 다 놓아도 여전히 꼼작 않고 조카만 쳐다보시다니. 시동생의 입장에선 숨이 막힐 지경이라. 손을 끌로 내려와서 진설을 도와달라고 하자 숙모님은 갑자기 깨어나신 듯하다.


감이 곶감이제 뭣들 하는가?

요즘 세상엔 시절이 좋아 감과 곶감이 늘 함께 있다 보니 문제다. 평상시에 숙모는 감이 있어도 곶감자리 다음에 반드시 배를 올려 ‘법에 맞게’ 하라던 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곶감 다음이 나란히 감이라신다.

어머나, 생선 배들이 왜 이쪽인가? 거 산적이 빠졌구먼, 마저 좀 하지. 어머나, 꼬막 색은 왜 이래, 새꼬막을 샀던가?

산적은 닭찜이 있다고 말라시고, 꼬막 껍질은 덜 깨끗하다고 몇 번을 물리셨잖아요.

어머나, 오늘 내가 그랬어? 내가 요새 이러네. 통 기억이 읎어서는.

거야 저희들도 그럽니다. 숙모님 건강 염려는 마세요. 아까 보니 손도 따뜻하시고, 혈색도 아주 좋으시고요.


혈색 -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시동생의 입에서 의사의 전문용어로 혈색이란 말이 튀어 나오자 그것이 울타리를 넘는 신호였나 보다.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시다 말고 숙모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눈을 이상스레 치뜨시는 듯, 새침해져 말없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신다. 우리는 또 어린양이 시작되셨나 보다 하는 생각에 별 신경을 안 쓴다. 무엇보다 나머지 진설을 마쳐야 하고, 우선이라도 부엌 정리를 하고 또 저녁 밥상 차릴 준비를 해야 하니까. 우리 집은 제사 중에 진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다 진설해놓고 진찬 때는 메만 올린다. 그리고 초헌 절차가 끝나면 그대로 음식을 드시리라는 여유 시간에 자손들도 저녁을 먹는다.


진지 드시지요.

식사들 하세요.

거실에 큰상 펴고 남정네들이, 부엌 식탁에는 여자들이 이런저런 의자들 보태서 둘러 끼어 앉는다. 숙모님은 어른대접으로 거실 상에 자리한다. 늘 시동생 옆자리다. 아니면 반찬 얹어주시느라 다른 사람들이 수저질하기가 불편할 정도가 되니까. 요거 맛있어, 요거도. 그런데 안 나오신다.


자네가 좀.

형님의 말 따라 숙모님 모시러 들어가 보니 그만 말이 안 나온다. 당신의 빨간 색 바바리를 내려놓고 - 원래 놀라운 옷 치례를 하신다. - 웬 잔잔한 꽃무늬치마에 발을 꿰려는 몸짓으로 버둥거리고 계시니. 형님이 오늘 무색으로 갈아입느라고 벗어 둔 모양인데.


형님, 아니 원장님 좀 와보세요.

급히 물러난 나는 우선 시동생을 불렀고, 밥상에 막 앉아있던 사람들이 방으로 내달으려 하자 시숙이 말렸다. 뭐 별일이시겠나. 다들 저녁을 먹어야 마저 제사를 지내지. 원장도 식사나 하고 들어가 보소.


숙모님은 완전히 정신을 놓으신 것 같다.

이그, 이그 내 농이 어디 간 거야? 난데없이 애들 옷장을 보며 탓을 하신다. 앉은걸음으로 농을 미는 시늉을 하니 겁이 날밖에.

숙모님 농이라뇨. 여기 애들 오면 쓰는 방이잖아요. 숙모님 댁 아니고, 저희 집.

자네네? 내가 그럼 왜 왔어?

할아버님 기일에 오셨잖아요.

그랬어? 그런데 왜 안와? 우리 김 원장 왜 안와?

다시 또 시작이시다. 거의 성화다. 그렇게 몇 번씩을 묻는데 시동생이 들어와 우릴 내보낸다.

걱정 마시고 우선 식사들…….


그렇게 성급해진 마음으로 저녁을 해치우는 동안 귀는 거실로 쏠린다. 물소리 그릇들 소리 사이로 남정네들 이야기가 심상찮게 건너온다. 시동생이 서둘러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일어서는 모양새를 보니 일단 응급실로 가야한다고 결정하나보다. 하필 제삿날 숙모님이 이러셔서 좀 뭣하지만 별 수 있나, 뭐 그런 논리인가 보다. 그리고 산 사람이 우선인 것은 맞다. 숙모님 입장으로는 시아버님 기일에 무슨 동티인가. 어쨌거나 산 며느리가 우선이다. 시동생이 숙모님을 모시고 응급실 행이다. 이곳 의대 출신이라 병원이야 훤하겠지만, 노인 모시고 혼자서는 힘들 것이니 부부동반이다.


크게 도움이 안 되기는 동서가 나보다 더하다. 설거지는 늘 내 차례다. 막내동서가 서열 잘 안 지키는 데 대해서는 숙모님이 이상하게 너그러우시다. 여전히 부엌에서 물소리 그릇소리로 실제인가 이명인가 혼동하고 있을 때 전화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라 더 크게 들리는가. 시숙이 전화 받는 음성만 들어도 일이 예상보다 안 좋은 것 같았다.


거 병원 상황이 썩 안 좋다네. 엠알아이도 해야 할 거라요. 원장 네는 오늘 못 올라가려나 보오.

그건 잘 되었네요. 한 밤중에 차 몰고 가느니.

당신도 참. 시동생 걱정하길 이녁 애들 걱정 같소.

거야 누구라도 밤운전은 좀.


자시에 시작한다는 제사지만, 어머님 살아계실 때 벌써 일찍 차리기 시작한 내력이다. 숭늉이 올라간 지도 한참이고 자정이 되기 전에 벌써 철상이다. 사실 시동생이 의사로서 의심하는 대로 심각한 그 증세의 초기라면 큰일이다. 요조숙녀의 경우에 치매 가능성이 더 많다던 설이 맞나? 그런 불안한 상황이다 보니 함부로 내던져지는 그릇들만 불쌍타. 수저 젓가락이며 국자 등 쇠붙이들을 따로 걷어 내다말고, 컵이나 잔들은 왼쪽으로, 오른 쪽은 사기그릇이라는 규칙도 오늘따라 우왕좌왕이다.


저 여보, 그런대로 일단 퇴원하실 것 같다는 군요. 그러니까…….

다시 시숙의 전갈에 형님은 시동생 내외까지 재울 잠자리 준비에 정신이 없고, 나는 한없는 그릇과 씨름한다. 손아래 동서는 이 대단원이 끝날 즈음에나 숙모님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나머지는 나중에 형님에게 들은 대로다. 밤이 늦었다고 형님이 자꾸 밀어내는 바람에 병원 간 사람들을 채 기다리지 않고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밤으로 일단 퇴원은 하셨단다. 입원실이 마땅찮고, 또 응급상황도 아니고 해서. 그런데 분명 뇌파에 뭔가는 있더란다. 그래서 숙모님은 김 원장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서 요양병원에 가시게 되는 거란다. 형님은 마리오네트마냥 김 원장이 김 원장 친구에게 가라는 대로, 김 원장 친구가 또 어디로 가라는 대로 여차 여차 날을 받아서 숙모님을 모시고 가면 되는 거란다.


*


숙모님이 나흘 밤을 요양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그곳을 찾을 시간이 절대로 없었다. 금요일엔 잠시 시간이 났지만 숙모님 핸드폰 구입을 내가 맡아서 그 일로 시간이 빠듯했다. 토요일이 되어서야 면회시간 맞춰 찾아간 나에게 환자의 첫마디는 완강하시다.


이 바보들, 더러운 것들과 여기서 못 지내.

그렇게 까진 예상을 못했던 터라 말문이 막힌다.

자네들 귀찮게 안할 것이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내나 같이 말하다가 ‘당신 누구요’ 그러는 바보가 없나, 밥 먹다 토하고, 기저귀에…….


우선 나는 핸드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시동생과 통화하시라고 핸드폰을 건넨다. 1번 하나만 누르시면 시숙, 2번은…….

그러는 순간 내 핸드폰이 울리더니 시동생이다. 여기 숙모님, 마침 김 원장이네요.


전화를 바꿔드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다. 목소리를 금세 바꿔서 저리 나긋나긋 통화하는 숙모님은 멀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쩌면 이것도 내 의무일까. 시동생이기 전에 의사인데, 의사에겐 그러니까 실상을 말해주어야 한다. 숙모님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첫째, 너무도 깔끔하시다. 둘째, 우리들 모두 생활에 균형이 무너진다. 요 며칠 사이 형님은 숙모님이 평소에 드시던 약 갖다드리랴, 다음날은 성당의 월보 갖다드리랴 정신없었을 것이다. 왜 한꺼번에 부탁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어렴풋이 안다. 그것이 숙모님의 방식이다. 이태 전에도 어지럽고 몸이 가라앉는다고 요양병원에 한 스무날 계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날마다 무슨 핑계로 사람들 오게 하시고, 병실 내에서 공주다 각시다 하는 별명을 들어가며 사뿐 걸음으로 병원생활을 즐기셨다. 누군가 해온 음식을 다음 찾아온 누군가에게 자랑하시며 나누어 드시면서. 그러니까 장기입원으로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풀죽어있는 다른 할머니들을 더 풀죽이면서 숙모님은 기세가 살아나셨다.


세상의 기운은 온이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에겐 모자라다. 기운을 돈이나 권력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에겐 모자라다. 욕심 중에 기운 욕심이 제일 큰 욕심 같기도 하다. 호주에선가 인류의 수명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수명에도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고 하더니. 하지만 퇴원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비겁하게도 의무를 접는다. 아예 둘째네 의견은 없는 편이 낫다. 애들 아버지가 일 년이면 파견근무 나간 날이 더 길기 때문이다. 또 집안 장손과 의사의 결정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몇 달이 흐른 지금 이 유난한 더위 속에서 숙모님은 어떻게 사시는가. 심기증이라고 하는, 쉬운 말로 건강염려증이라는 병 때문만으로 저리 되신 양반. 병이 아니기에 약도 없는, 아프지 않기 때문에 낫지도 않는 병, 마음의 병. 거식증에 가깝게 몸을 말려가며 어린양이 조금 과했던 숙모님. 십여 년 전과 비교하면 20 킬로그램은 족히 줄었을 몸무게가 더 줄었을까 무섭다.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진짜 의사들에게 ‘걸려서’ 환자복을 입고 지내노라면, 옷맵시도 음식 솜씨도 다 무슨 소용인가. 그 ‘더러운’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되면 숙모님의 어린양은 과녁을 빗맞힌 셈이다.


다 저녁에 전화다.

낼 숙모님 모시고 나와서 계곡에나 잠깐 가볼까 하는데 자네 시간이…….

예, 그러죠. 아직 방학이니까요. 수박이나 미리…….

준비는 되었고. 쇼는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녀.

수더분하기만 한 형님이 전화기를 놓으며 흘리는 말에 흠칫 놀란다.


광주문학 2010겨울호, 186-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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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