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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1.07 빙하가 녹았다
  2. 2021.09.07 사피엔스의 언어
수필-기고2023. 1. 7. 08:12

 

빙하가 녹았다

 

 

     빙하가 녹았다. 초여름 폭염으로 알프스 산의 빙하가 무너져 내렸다. 산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졌고,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눈과 흙이 쏟아져 내렸다. 얼음 덩어리가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며 눈사태를 일으켰다. 맙소사, 산골 부락은 아니었지만 등산로까지도 덮쳤고, 사람들이 숨졌고 실종되었다.

     등산객 몇 사람이 숨진 일에 지구인들은 꿈쩍도 안한다. 몇 사람의 사망사고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더 많은 죽음들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우와 토네이도 할 것 없이 변화된 지구 환경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자연재해라고 치부하는 이 사고들도 엄밀하게 보자면 지구인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역작용이다. 하물며 인재는 어떠한가.

 

     먼 데 말고, 작년 한 해 우리나라의 산재사고 사망을 보자. 3월에 KDI(경제정보센터)가 내놓은 자료다. 산재 사망자가 연간 828명이라고 하니, 하루에 두세 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했다. 이러저러 산재 통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죽음을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말을 하다 보니 죽음을 숫자로 말하는 자체가 죄송스럽다. 숫자에 애도를 곱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빈다. 다행인지 올해 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즈음하여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고사망 사례는 감소했다고 한다. 공동생활에서는 엄격한 법이 필요한가 보다.

     재해 유형으로는 떨어짐과 끼임 등 재래식 사고가 여전히 많다고 한다. 건설업의 기계와 장비에 의한 사고들이다. 밥 벌러 나갔다가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영안실로 조퇴 당하는 사람들이다. 왜소한 몸으로 구릿빛보다 더 붉게 탄 얼굴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죽음도 간간히 보고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사탕수수 농장 등에 홀려서 떠났던 우리들 누런 얼굴들의 수모를 새삼 일깨운다.

 

     순간에 저승으로 떠난 이 사람들은 마지막 그 순간에 힘들었던 삶을 원망했을까. 증오심을 지닌 채 죽었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까. 어느 지옥으로 갈까.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 편을 보면 형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되돌려 받는 형식이다. 콘트라 파소 – 정반대의 고통이란 이 말은 인과응보와 통한다. 지상에서의 악행과 똑같이 대응하는 지옥의 형벌이라면, 떨어짐이나 끼임으로 죽어간 그들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방치한 위인들이 받을 형벌이다. 기도교적 의미에서 신을 몰랐다 하더라도, 예수 탄생 이전의 선인들처럼 천국에는 갈 수 없으되 지옥의 천국이라 할 림보에 평화롭게 머물 것이다. 지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림보에서 시작하여 음욕 지옥 - 식탐 지옥 – 탐욕 지옥 – 분노 지옥 - 이단 지옥 - 폭력 지옥 – 사기 지옥 – 배신 지옥으로 깊어지는 층을 보면서 마지막 최악의 지옥에 들어가 있다는 위인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최종지옥인 코키투스 호수의 쥬데카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더불어 카이자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롱기누스가 악마 루시퍼의 발아래 눌려있다. 쥬데카라는 이름은 이스카리옷 유다에서 유래했으니, 말 그대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이 가는 지옥이라고 한다. 다만 신성모독죄보다 더한 죄가 배반과 배신이라는 점이 기이하다. 21세기 자본의 시대에 생명을 배신한 죄, 안전에 무감각한 기업과 제도의 담당자들을 단테라면 최종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하다. 상상으로나마 이처럼 복수 같은 것을 꿈꾸는 글은 ‘시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용서가 될까.

 

     우리나라에도 콘트라파소 같은 것이 있었다. 인과응보라는 개념으로 있어 왔다. 전생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내세에서의 행과 불행이 생긴다고 믿는 태도이다. 인과응보 개념이 불교에서는 윤회사상의 원리가 되며, 덕 또는 업보와 연관된 실천철학에 가깝다.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참회하고 덕을 쌓아 업을 없애면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선 내세에 대한 믿음이 줄고, 무엇보다도 정의라는 개념조차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라고 하면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이거나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의는 예로부터 왜곡되어 왔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견해는 이미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했다. 정권이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피통치자에게 정의로운 것이라고 공포하고, 이것을 어기는 자는 부정의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물론 대화의 상대편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변호했지만, 글쎄다. 유사 이래 법도 정의도 늘 강자의 편이 아니었던가. 약자는 비겁한 채로 강자의 선의(?)에 기댈 뿐이고.

     강자가 어찌 약자의 설움을 알랴.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은 곱잖고, 권선징악도 헛일, 선하면 바보짓이고 악해야 겨우 사는 모양새를 내는 것만 같다. 경쟁과 대결에서 어떻게 선하냐고! 내 팔꿈치는 억수로 강하게 뻗도록만 훈련되었는데!

 

     S대학교는 만일 내가 거기 들어가면 누군가 한 사람은 못 들어가는 것이네여…….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3 아이, 그의 아이가 중3이 되도록 세상은 여전히 살벌한 경쟁터다. 아니, 더 공포스럽다. 무감각이라는 바이러스가 공기 속 무서운 전파력으로 온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우리는 다만 유능한 기능인을 흠모하며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커녕 무참히 사라지는 생명조차도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안톤 슈낙의 글에서 끝났다.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도 이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 이런 이미지에 슬퍼했었다니!

     알프스에서 빙하가 녹았고, 눈사태가 등산로를 덮쳤고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푸집에 노동자가 끼었다. 외국인이었다. 결국 죽었다. 그것들은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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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빙하가 녹았다」, 『마음이 머문 순간들』, 이대동창문인회, 206~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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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1. 9. 7. 02:10

사피엔스의 언어

 

 

장편 『숨』이 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늦은 가을이었다. 하루에 한 매를 썼을까. 과작이 아닐 수 없다. 과작이라도 다행이다. 필을 놓고 있는 것 보다는, 그렇게 위안을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무엇을 썼을까. 무엇하러 썼을까.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아무 쓸모없는 것을 내놓았다. 선배 또는 동료 소설가들이 말한다. 이번엔 더 좋았어요. 이런 친절은 선의의 거짓일 것이다. 누구나 다 그래요, 바닥에 내려가야 올라올 수 있어요. 이런 위로가 더 진실하다.

외도를 저지르기도 했다. 당연히 단편 청탁일줄 알고 예스! 했다가 덤터기를 썼다. 「순수에의 강요」라는 제목으로, 장르문학의 세상에서 순수문학의 일에 관한 고찰이라니! 주문대로 쓰고서도 허탈했다. 논문을 손 놓은 지 십여 년, 그 세월엔 강산도 변한다거늘, 숙제를 맡으면 되돌리지 못하는 바보이다 보니 정말로 바보 같은 글을 내놓게 되었다. 시간을 또 얼마나 죽였는지. 달리 할 대단한 일도 없지만, 죽인 시간과 결과물을 보면 한심해서다. 그런 생각이 엄습하여 오래도록 짙은 우울감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한다.

 

눈을 밖으로 돌려 보아도 마찬가지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미래가 있을까. 전염병의 창궐로 우울해진 우리의 일상이 회복될까. 생태환경이 변해가는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라는 양대 혁명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이 인간이기가 가능할까. 일자리는커녕 할 일조차 없어질 무용지물의 인간이 생존의 위협 앞에서 문학을 예술을 탐할까. 탐해서 뭣할까. 다시 한 번 소설이야 말로 무용지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때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책들은 도착한다.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을 다 못 읽은 터에 어쩌자고 『고대근동문화』를 주문했고, 느닷없이 『희망의 원리』 여러 권을 서재 깊은 안쪽에서 꺼내다 놓았다. 꼭 읽고 싶은 『도동 사람』 이라는 632쪽짜리 소설도 왔다. 또 시집들 수필집들이 도착한다.

책을 꼭 읽어야 됩니까? -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안과에 갔더니 안과의사가 하는 말이다. 이쯤 나이가 들면 책을 읽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느냐는 말인가 보다. 널려 있는 매체들에서 정보며 오락을 다 누리는 세상인데 굳이 책을 보려 하느냐, 시력을 더는 교정할 안경이 없다. 그런 얘기였다. 정이 책을 읽으려면 수정체를 바꾸는 수술을 하세요! 큰 병원으로 가셔서 상담을 해 보세요, 저는 이제 수술 안 합니다. 이상하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안과의사가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이 사람도 시력이 엉망이 되었다는 말인가. 늙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책을 덮으라고? 눈을 바꾸거나? 책을 보는 대신 다른 곳들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찬장이며 싱크대는 세월의 때가 앉아서 닦아도 닦아도 반짝임을 되살려내지 못한다. 젓가락을 넣어 다닐 왜소한 주머니들을 만들다 둔 바느질 상에는 천 쪼가리며 실밥들이 어수선하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시력이라는 안과의사의 말이 맞기나 한 것일까. 보이느니 먼지뿐이다. 글자는 보이지 않고 먼지만 보는 눈이 되다니. 회전근개 어쩌고 수술대에 잡혀갈 뻔했던 어깨가 다시 빠질 판이다.

밖을 바라보자, 창밖을 내다본다. 아, 또 유리창의 얼룩들. 애써 외면하며 베란다 밖으로 향한다. 모기장으로 어두운 서재의 창밖에 나팔꽃 송이들이 피어난다. 심지도 않은 곳에서 피어나는 분홍 나팔꽃. 베란다 천정까지 자라더니 창틀 위까지 뻗어나가던 줄기들을 더 어디로 보낼까 걱정하려던 참에, 줄기 뻗는 것을 멈추고서 꽃을 피운다. 신기하다. 요 며칠을 눈만 뜨면 분홍 나팔꽃 송이를 세러 베란다로 나간다. 한 두 송이가 피었다가 지면서 새로 두어 송이가 피어나는 줄기를 따라 넋을 놓는다. 스물 하나, 스물 둘……. 그래, 꽃들을 보라는 눈이구나. 두 줄기를 따라서 나란히. 초록색 포장노끈으로 만들어둔 길이 호강을 한다. 그런데 줄기가 자라는 것을 멈추고서 꽃송이를 피워내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아이를 낳는 나이가 되면 더는 키가 크지 않듯이.

아차, 내 안경! 이번에는 안경을 찾아서 쓰고 핸드폰을 가지고 다시 나간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창틀 위 꽃송이들을 담을 수 있다. 날짜별로 컴에다 저장을 해둘 까 싶다. 돌아서다 보면 몇 년을 쉬다가 올해 피어난 소철의 새 잎들을 경탄한다. 소철의 나이 40대인데 – 우리가 이 집에 이사 올 때 그러니까 1986년 봄, 이미 상당히 무겁게 자란 화분을 어느 지인이 낑낑거리며 들여놓았으니까 – 그 모양새가 그리 많은 물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물주는 일에 등한했었다. 그것이 올해는 하필 어디서 묻어온 나팔꽃 씨가 소철 분 가장자리에서 잎을 띄웠기 때문에 충분한 물을 만났나 보다. 소철도 놀랄 만치 예쁜 새순을 함께 틔웠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햇빛을 받지만 물이 그리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도 물이 생명이라더니, 정신은…….

 

그렇게 글 쓰는 일과 관련해서는 바닥으로 가라앉아서 다른 짓만 하고 지낸다. 병원에 갈 일이 자주 생겨도 시집 한 권 들고 가지 않는다. 진료실 앞 의자에서는 아예 조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서 시간을 때운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거야, 바닥으로!

그렇게 바닥에 부딪다 보니 어느 순간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징이 허구성이라던 문장이 떠오른다.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많지만,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 바로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21세기를 살아갈 상당한 정보를 주는 책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쓴 말이다. 이 자체가 허구일 리는 없다고 믿으면, 허구를 창조하는 언어가 진정 인간의 언어라는 말이 된다. 기대고 싶은 말이다. 함부로 기대지 말라는,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이라던 이바라리 노리코의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픽션을 쓸 수 있는 언어를 지녔으니 픽션을 써야하지 않을까. 흔들리는 이 마음 갈대와 같다.

 

 

_____________________
2021 이대동창문인회 「사피엔스의 언어」 , 『바람의 눈과 문 』, 이대동창문인회, 열린출판, 241~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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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