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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7.10 초겨울
소설-시2021. 7. 10. 22:35

 

초겨울

 

 

 

초겨울이다. 느낌으로는 초겨울이 제일 춥다. 한낮인데도 쌀쌀함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뺨이 더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은 오늘 시작할 새 일자리로 인해서다. 요양보호사 – 명칭은 길지만 하는 일은 짧다, 시간제 돌봄이다. 첫날은 조건 때문에 밀당도 해야 한다. 흔하디흔한 아파트 대문 앞에서 숨을 고르는 찰나, 첫 번째 시험은 초인종이었다. 하필 초인종이 두 개가 있을 게 뭔가. 첫 동작부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신경이 곤두선다. 염려는 기우였다. 띵 똥 한 번에 재빠른 답이 온다. 예에, 하는 소리와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가 함께 다가온다. 대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얼굴은 - 누굴까? 돌봄 어르신은 80대 남자라던데, 그러니까 보호자인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시는 거죠?

아, 네. 오늘 저 혼자 오게 되었어요.

아무려나, 어서 오세요. 아파트 쉽게 찾으셨지요?

네, 뭐.

 

첫 인상은 푸른 나무들로 계절이 겨울인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집이었다. 넓지도 않은 거실인데 한쪽으로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창 쪽으로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즐비했다.

밖에선 얼겠지, 겨울 추위에. 그런데 환자 있는 집에 무슨 화분들을! 하긴 강아지나 고양이들이 튀어나오는 것 보단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는 흔한 아파트 풍경이었다. 텔레비전, 소파 그리고 탁자. 좁은 거실에 탁자는 크고, 탁자 위에는 신문 잡지들이며 뭔가가 수북하다. 노인들이라니! 소파에 누워있는 사람이 내가 돌 볼 어르신일 게다. 소파에 누운 채, 낮인데, 그래서 아픈 거로구나,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들락거려도 반응이 없다.

저, 그런데 태그는 어디다가, 출근부 말예요.

일단 집에 들어왔으므로 출근부에 태그를 해야 시간이 기록될 테니까 그것부터 물었다. 여자가 가리키는 곳은 신발장이었다. 뭐야, 날마다 신발장부터 열어야 한다고? 하필 냄새나는 신발장을! 하긴 어떤 집은 환자가 이 낯선 물건을 훼손하곤 해서 싱크대 문짝 안쪽에 붙여놓기도 한다더라. 싱크대고 신발장이고 냄새는 피할 수 없는 자리다. 뭐, 찌든 담배 냄새만 없어도 다행이다.

 

올라오세요. 오늘 이 양반 꿈쩍을 안 하네요. 점심 다 식는데도.

그러고 보니 식탁이 차려진 채다.

집안은 음식 때문이었을지 아늑할 정도로 따뜻하다. 아, 다행이다!

그럼 어르신이 오늘 특별히 아프신 거예요? 치매 5등급, 1939년생, 남자, 그 외엔 별 특이사항 말 없었는데요.

아뇨. 뭐랄까, 반응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지요. 원래도 말이 적은 사람인데, 최근에는 아예 입을 닫고 살지요. 하고 싶은 말은 겨우 눈으로 해요.

눈으로 말을 해요?

예, 그런 셈이에요. 뭔가 필요하면 그 쪽을 쳐다봐요. 그럼 냉큼 집어다 주면 또 말없이 받아들고. 그러니까 탁자 위 신문을 쳐다보면 신문을, 리모컨을 보면 리모컨을 집어달라는 것이고, 저쪽으로 멀리 냉장고를 쳐다보면 물을 달라는 식이지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이 집 보호자는 내가 환자 상태를 체크를 하는데도, 내 이름이 뭐냐, 오기로 확정한 것이냐 등을 묻지도 않고, 내가 온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듯 편안하게 말을 하고 있다.

예상 외로 젊은 분이 오셨네요. 나이 지긋한 분 부탁했었는데요. 헌데 진짜 젊은 분이 오니까 집안이 갑자기 팔팔 살아나는 것 같은데요.

 

이건 또 뭐야. 그러니까 내가 기대한 것보다 한참 많이 젊은데, 그런데도 통과라고? 아무튼 이 할아버지 서비스를 맡으려면 조건은 미리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저, 그런데 여기 서비스 와달라는 시간이…….

아, 시간요. 시간이 왜요?

저랑은 딱 맞지는 않은데, 과장님이 일단 가보라고 해서요. 저는 1시에 오는 것이라야 맞거든요.

1시라야 된다고요? 그럼 1시 반이면 못 오시나요? 그런 거예요?

그게 좀, 오전 끝나고 중간에 시간이 많이 떠서요.

어쩌나. 1시부터면 4시에 끝날 것인데, 내가 가끔 4시 좀 지나서 집에 오게 되니까 4시 반까지는 봐주셔야 하는데. 참, 선생님 이름이 지은이 씨라고? 차 과장님이 전화했어요. 지 선생님은 추가시간은 안 하실 거라고도.

네, 저는 해당 서비스 시간만 봐드리고는 끝이에요. 저는 아무래도 1시부터면 좋겠는데요. 점심시간에 집에 들어갔다가 오기는 너무 멀고, 그냥 오자면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서요.

…….

저쪽에서 말을 쉰다. 생각이 길어지나 보다. 아쉬우면 나한테 맞추겠지 뭐. 난 쉽게 생각했다. 일단 세게 나가자 싶었다. 초면인데 알게 뭐야, 아니면 말고.

시간이 정 맞지 않으시면, 그게. 아무튼 오늘은 제가 일단 왔으니까 세 시간은 해드리고 갈 거고요.

아니, 잠깐만. 뭐, 1시 반부터면 못할 수도 있다고요? 그럼 서로 15분씩 양보하면 어때요? 1시 15분부터, 난 혹시나 늦어도 4시 15분엔 돌아오고.

 

이번에는 내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밀린 것이다. 스스럼없이 시간을 정하고 만다.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인데 15분을 밀렸다니!

그렇다면 나머지라도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한다. 우리 요양보호사가 해드리는 것들 서비스 범위는요, 라고 말을 뺐는데 그것도 쉽게 통과였다. 환자 아닌 가족을 위한 생활지원은 금물이라는 것부터, 책에 써진 것 외우듯이 다 읊어댔다. 내가 놀라는 눈빛을 하자, 센터에서 보낸 파일 안에 다 있어서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다만 부엌에서는 점심 설거지만 부탁한다면서, ‘설거지만’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환자 밥 챙겨 먹이는 것 - 만들고 먹이고 설거지하고 - 그것과 2인분 설거지만 하는 것의 노동량을 따져보려다가 말았다. 음식 만들기가 더 까다로울 테니까. 엉거주춤, 그것도 밀린 사이에 보호자는 말을 이어갔다.

것보다 문제는, 뭐냐면 우리 양반이 말을 잘 안 들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신청도 안한다니까요. 그게 좀 힘드실 거요.

네에, 그거야 우리 일이니까요.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움직이는 반경은 멀리는 안 되는 것 아시지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쐐기를 박았다.

멀리요? 산책은 멀리 안 가시는데, 못 가는데.

심부름 같은 것 말이죠, 혹시라도 무슨 심부름이나.

심부름이요? 심부름 무슨?

심부름을 이해 못하는 것이 이 집에선 심부름은 없나 보다. 잘 되었다. 보통 혼자 사는 어르신들 돌 볼 때에는 이것저것 해달라는 부탁들이 많다. 마트며 반찬가게 들르라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은 엉뚱한 부탁도 한다. 진짜 엉뚱한 심부름 말이다. 심지어 폐지나 병 같은 것, 모아놓은 고물을 팔아다 달라는 부탁을 해서 고민이라는 동료도 있었다. 고물을 모을 정도인데 재가방문요양 서비스라고? 잠깐 의아했지만, 아서라! 복지사회는 좋은 것, 긁어 부스럼 낼 일은 아니다 싶기도 했다.

아, 물론 병원 가실 때는 함께 모시고 가죠! 병원엔 멀리 가더라도 환자의 진료 기록이 컴퓨터에 뜨니까요. 우리 요양보호사 행동반경과 환자가 함께 있으니까요.

엄격하군요. 그래야 하겠지만요. 암튼 그럼 되었네요. 1시 15분에 오시는 걸로.

우물쭈물 일은 결정이 났다. 이 보호자는 일을 너무 쉽게 결정한다. 내가 그만 그 페이스에 밀렸다. 평상시 내 일은 아니다. 뭐, 정 아니면 한 달만 하고 말지. 아쉬운 건 언제나 노인들, 내가 갑이면 갑이지 을은 아니다. 일 할 데는 널려있다. 뭐, 잠시 안하고 쉬면 쉬는 거다. 나는 결코 생계형 노동자는 아니니까.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기 안방이 환자가 쓰는 방. 여기 욕실 쓰고. 그런데 주로 거실에 저러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도 자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선 점심 먹을 수 있게 해야겠어요.

여기요, 일어나 보세요. 오늘 새로 지 선생님이 왔어요. 말동무 해드릴 거요. 손잡고 산책도 하고. 나는 비틀거리잖아요! 어디, 일어나 봐요!

눈치를 보니 내 차례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저는 지은이라고 하는데요. 오늘부터 어르신 돌봐드리러 왔답니다. 어르신, 일어나 보세요. 점심시간이 늦었거든요.

…….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눈매가 촉촉하다. 계속 감고 있어서 물기인가? 아니, 80대라고 했는데 소년 같은 눈망울이네. 백발의 소년이네.

어르신, 저는 지은이고요. 이제 일어나셔요, 식사하시게요. 식사하시고 나서…….

뭐? 지 - 은 - 이? 지은이라? 책을 썼다고? 지은이라면 내가 지은인데, 이게 대체?

입을 연 것은 반가우나, 하필이면 내 이름이 귀에 걸렸나 보다. 인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렸다. 어르신이 벌떡 일어나더니 탁자에서 신문이며 책들을 주섬주섬 치우면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아니, 내 책이, 책이 어디로 갔나.

무슨 상황인가. 무슨 책을 찾을까. 부엌 쪽에서는 내색이 없다.

엄마아, 준이 엄마, 내 책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아내를 찾는 모양인데, 그런데도 보호자는 무반응이다.

아니, 어르신, 뭘 찾는 건 나중에 하시고요. 우선, 인사드릴게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이 지은이라고요. 이름이 지은이.

아하, 지가 은이라고. 지씨라. 어디 지씬가?

충주 지씨예요. 어르신은 이름이,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 나는……, 에이, 애들이 어른 함자를 묻나. 내가 내 이름을 모를까 봐?

아유, 어르신, 죄송해요. 어서 일어나셔요. 식사시간이에요.

 

그렇게 해서 점심 식탁에 모여 앉는 데까지 또 십여 분이 흘렀다. 그 상황에 더해서 손을 씻고 오느라고 그런 것이다. 노인들이 화장실에 가면 십분은 기본인 경우도 많은데, 이 어르신도 그런 건가 보다. 대소변 문제는 없나? 화장실 쪽으로 따라가면서 직업적인 걱정이 섞인다. 그 사이 냄비들이 가스레인지 위로 다시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밥과 국이 올라온 뒤에도 한참을 레인지 앞에 서 있던 보호자가 숭늉과 누룽지를 내온다.

뭐야, 숭늉을 먹는 집도 있어? 의외이기도 하고, 이러다가 된통 힘든 집에 걸린 것이나 아닌가 하는 불안도 스멀거렸다.

지 선생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네.

보통은 1시 반까지는 밥상이 끝나요. 오늘은 늑장을 부려서는.

상관없어요. 어떻게 드시나 볼게요. 근데 엄청 골고루 차리셨네요.

뭘 먹을지 몰라서요. 아무튼 이제 말 좀 걸어 보세요! 그것이 문제랍니다. 말을 들어야 뭘 골고루 먹게 하거나 말거나.

맞다, 내 차례다.

어르신, 맛있는 것 많이 차려주셨네요. 여기 동치미, 이 국물부터.

내 목소리는 원래 큰 편이다. 또 여기 사람들과는 다르게 서울말투를 쓴다. 그래서일까? 말을 듣지를 않는다던 어르신이 뜻밖에 반응을 보였다. 비뚤게 앉은 자세도 ‘달래서’바로 잡았다. 그런데 먹는 일에 조금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것 드셔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그릇째로 다 비우려고 한다. 저것 드셔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또 그릇째로 다 비우려고 한다. 아, 얼핏 보기에는 정상인데 인지문제가 있기는 있구나.

 

 

아주 엉뚱하게, 혼자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밥상 앞에 앉아있을 어머니가 아른거린다. 일하는 중에 다른 쪽으로 빠지는 일은 드문데, 스스로 갑작스럽다. 어머니는 아예 밥상을 차리지도 않는 끼니가 많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밥상을 챙기는 대신에, 돈을 번답시고 생면부지 ‘어르신’의 밥 시중을 들고 있다.

내갈비도 여적이고마 또 도가니탕을 보냈디야. 그리 보내쌓면 뭘햐. 느그덜이나 노나 먹지야. 느그 아부이가 계심사…….

홈쇼핑에서 갈비탕을 사서 보내드렸더니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는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서 아버지 생각을 하신 거다. 그러고서 냉장고에 그냥 쌓아둔다. 누가 집에 찾아가서 함께 굽거나 끓이거나 해서 드려야 드신다. ‘내’갈비라고 하시는 것은 LA를 ‘내’라고 읽으시기 때문이다. 에이자 위쪽이 넓게 쓰여서 그리 보이기도 한다. 아무려면. 드시기만 한다면. 그런데 아버지 말씀 꺼내시는 것이 수상타. 아버지가 고기반찬을 좋아하신 것은 맞지만, 돌아가신 것이 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가 말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장롱 속에서 모자로도 살아있고, 화장대 서랍 속에도 살아있다. 이 참빗이야, 느그……. 여전히 아버지를 집안 어딘가에 숨겨 놓고 사시는 통에, 우리는 어머니 앞에 가면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언제 되살아나서 우리랑 섞여 앉아계실지 모르는 일이니까.

점심은 드셨을까. 요즈음 엄마한테는 둘째언니가 챙겨 보내는 뉴케어가 답인가 보다. 연명은 되실 테니까. 아버지부터 우리 형제자매들, 그러니까 온통 거구들인 지씨들에 비하면 어머니는 원래 작은 체격이다. 나이 드시면서는 더더욱 작아져서 아기 같다. 아기 같은 어머니는 유난히 추위를 탄다. 내가 엄마를 닮았다. 이런 겨울 날, 추워서 방문일랑 열지도 않고 방안에서 무얼 하실까. 전화라도 하고 지낼 형제자매도 없으시다. 손위 외삼촌 한 분은 돌아가셨고, 다른 식구들은……. 어머니는 문경 외가 말씀을 극히 삼간다. 문경을 떠난 것이 하도 오래전 일일 뿐 아니라,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잠기신다. 문경의 채씨 세거지의 비극, 아니 참상, 아니 학살은 - 멍해 있는 사이 점심이 대충 끝난다.

 

점심 뒤처리를 하는 동안 - 오늘은 첫날이라고 함께, 주로 주인이 치웠다. - 어르신은 다시 거실로 나가서 소파에 ‘제 자리’하고 있었다.

커피 하죠? 점심 후엔 일단 피곤을 덜기 위해서 한 모금. 잠깐 이리 오세요.

저는 가지고 왔는데요. 두 잔째 커피를 따르던 보호자의 말을 내가 막으며 에코백에서 보온병을 꺼내왔다. 꺼내 입으려했던 오리털 조끼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이집은 정말 따뜻하다.

예? 커피를 가지고 다녀요? 우리 집에 오면서 커피를 들고 왔다고요?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겠어요.

아니, 서비스 다니다 보면 커피를 전혀 안 드시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또 제가 원래…….

원래고 뭐고, 집에 커피 둘 다 있어요, 아메리카노도 양촌리도.

양촌리요?

아, 밀크설탕커피, 왜 옛날 농촌드라마에서 달달하게 마시던 커피요. 거기가 양촌리였나 뭐 그래요. 아무렇거나, 오늘은 우선 이 양반 병력을 보실래요? 가만, 건강메모 - 여기 맨 앞에는 평생 큰 병 앓은 내력이고, 그 다음으로는 올해 이 요상한 발병부터 간간히 메모 해 둔 것들.

아무렇지도 않게 핸드폰을 내민다. 갤럭시 노트다.

그러니까 지병이 꽤 있었다가, 아, 네, 약간의 인지문제 그거야 보통 그러지만, 루이소체? 이런 종류는 처음인데요. 가만, 환시와 악몽이 문제라고요?

엠알아이며 브레인페트까지 다 검사 했어요. 환시라는 것 첨엔 무섭더라고요. 심한 착각, 착시 그런 거죠. 가끔씩 엉뚱한 질문에 놀라곤 해요.

어떤…….

조용히 앉아 있다가, 우리 지금 둘이만 있는 사는 거 맞아? 이러는 거예요. 누군가랑 셋이서, 어떤 때는 여럿이서 함께 살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의사선생님 말로는 실제로 보여서 그렇다니, 좀 섬뜩할 때가.

그러시겠네요. 그럼 처음보다 더 나빠지신…….

내가 아나요, 병원에서도 검사를 해서 수치가 나와야 알던데요 뭐. 아무튼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말을 좀 시켜 보세요. 소뿔은 단 김에 빼랬다고, 1라운드가 중요할 것 같아요. 이리 오세요.

 

등을 떠밀리다 싶게 거실로 나온다. 뒤따라 나오던 보호자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소개한다. 상황을 확실하게 해두려는 것 같다.

저기요, - 남편한테, 저기요? - 조금만 앉아서 쉬다가 누우세요! 오늘 지 선생님, 여기 지 선생님 만나서 반갑지요? 우리 애들 또래 같아요. 먼 데 사는 딸이 왔구나, 그리 생각하세요! 자, 지 선생님!

공이 내게로 넘어 왔다.

어르신, 오늘 저 만나서 기쁘시죠?

대뜸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던 보호자는 자리를 뜬다. 큰일이다. 첫 번째 펀치에서 성공해야할 텐데……. 은아, 힘내자! 할 수 있어!

 

환자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나에게로 집중시키기 위해 내가 가진 기술을 발휘할 때다. 어르신들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혀 먹히지 않는다. 빤히 쳐다보기만 할뿐 입은 꽉 다문 상태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유리창 쪽 제법 큰 화분들 앞쪽으로는 자잘한 다육식물들과 선인장들이 있었다. 촘촘한 가시들이 불안하다. 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눈앞에 보이는 화분들로 화제를 옮겨 보기로 한다.

어르신, 아파트에서 어떻게 이렇게 큰 나무를 키우셨을까? 이 키다리, 아니 이렇게 잎들 무성한 것도 있네요. 이 가지는 제 키만 하겠어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어르신, 그런데 이것들 이름 좀 가르쳐 주실래요? 제가 처음 본 것들이라서 궁금하거든요. 요것들은 다육이라죠? 다육이라도 따로 이름이 있다던데. 이 솜털만 많은 꼬맹이 선인장들, 이것들은 또…….

이런 것들 처음 보나? 뭐가 그리 궁금하나?

옳거니. 선인장에서 끌려왔다. 계속 선인장으로 가보자.

이렇게 어찌 보면 못 생긴 것들인데, 죄송해요, 근데 귀하게 귀하게 키우시네요.

갑자기 눈을 들어 이리저리 돌린다. 사람을 찾는가 보다. 보호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아까 방문 소리가 나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 있는지 아무 기척이 없다. 어르신이 턱을 들어 부엌 쪽을 가리킨다. 보호자를 오라는 건지, 보호자를 가리키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뜻을 모르겠다.

보호자분요? 할머니요? 안 보이시는데요. 왜요?

저 사람 거요.

아니, 여기서 주인이 따로요?

그것만 중하게 보듬는다 말이요.

보듬어요? 선인장을?

아, 보듬어 키우다시피 한단 말이지. 물어봐요. 밖에도 끔찍이 챙기는 것들 있어.

베란다 쪽으로 턱을 들면서 말한다. 옳거니, 화초들에 관해서 이견이 있구나. 호불호가 다르다 이 말이겠다.

밖에 또 화분들 많아요? 그러네요. 밖에도 많네요. 그럼 어르신은 어떤 것들을 좋아하시나요? 밖에 내다보고 올게요. 같이 보실래요?

아이쿠, 성공이다. 화초를 뭐라 가르쳐줄 게 있는지 부스스 일어난다.

이쪽으로, 예. 자, 가시게요.

정말 베란다에는 놀라울 정도로 크게 자란 선인장들이 고개를 꺾고 있었다. 천장에 닿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리고 자란 것들이다. 불쌍타. 이 추위에 너른 창이 반쯤 열려 있는데도 베란다 볕이 좋은 듯 했다. 아예 온실처럼 푸른 잎들이 무성하다. 넝쿨로 자라는 것들도 여럿 걸려있다.

우와, 선인장들, 소철인가, 아예 꽃집 같은데요. 어르신은 어떤 걸 젤 좋아하세요?

해피트리, 요거 해피트리야.

아, 그런 이름도 있었군요. 해피……. 그럼 이 엄청 큰 나무는요? 나무 가지 요거 젤 큰 거는 제 팔 길이만 하네요. 고무나문가요?

맞아, 요거 잎 끊어지면 그 자리에서 하얀 고무액이 흘러요. 눈물같이 뚝뚝.

눈물 같이요? 어머나 시를 쓰시는 분 같아요.

시를?

예, 시인 같으세요.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네?

몰라, 다 잊었어. 나는 다 잊었어.

입을 다시 꼭 다문다.

어르신, 어르신?

다 잊었어, 다.

그것뿐이었다. 눈을 다시 반쯤 감더니 그런 채로 소파로 향한다. 키 큰 등의자에 부딪지 않게 하려면 손을 잡아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정적이 감돌았다. 사뿐 발자국 소리와 함께 보호자가 나타났다. 뭐라고 부르지? 잠깐 고민이 되었다. 울 어머니 또래는 한참 아닌데 어머님이랄 수도 없고. 보호자님이라고 하자니 너무 딱딱하고. 이래서 독거노인 돌봄이 속 편한 것이구나. 이게 뒷북이다,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다니. 돌봄 대상과 단 둘이가 아니라 보호자와 삼각관계가 되나 보다. 삼각관계라는 것이 연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 돌봄 시간 내내 보호자가 함께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불편감이 확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말아? 집을 나서면서, 아니 나서기 전 5분 전에 조용히 말하면 된다.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요, 저한테는 시간이 아무래도 맞지 않아서요. 이렇게 말하면 감정 섞이지 않은 허물없는 이유가 되어 줄 것이다. 일단은 호칭 없이 말만 하자.

어르신이 다시 주무시려나 봐요. 정말 말씀 없으시네요. 시만 쓰면 다냐, 어쩌고 그러시던데, 무슨 말씀이셨을까요? 어르신 시인이세요?

…….

아무 대꾸 없는 것이 노부부가 똑 같네, 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무슨 반응이 저러나. 보호자는 말은 없이 무슨 주머니 같은 것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잠 잘 것 같다는데 부엌엘? 정적이 괴롭다. 부엌에 따라 들어가 보니 구석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그것을 돌리고 있다. 구수한 향기가 피어난다. 꺼내 온 것을 보니 핫백이다.

낮잠 청하니까 발 따뜻하게 해주려고요.

아, 네, 핫백 냄새가 좋으네요. 뭐예요?

현미 자루. 몇 년 쓰면 알게 모르게 점점 타버려서 바꿔줘야 해요. 한 번 바꿔 넣었어요. 이건 안심이죠. 전기방석은 온도조절 잘 못하면 큰일 나겠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러네요. 냄새 너무 좋아서 저절로 잠이 올 것 같네요.

정말 그랬다, 잠에 취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따뜻함! 향기!

 

 

서울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벌써 30여 년 전, 서울 살이 첫 해, 봄여름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고 갑자기 겨울이 닥쳤다. 갓 상경한 젊은 애들을 위한 방은 하나같이 딱 한 뼘 마루, 얄따란 방문, 그리고는 방이었다. 반대쪽에 달랑 봉창이 있었지만, 황소바람은 냉돌까지 내려꽂혔다. 시골 고향을, 따뜻한 아랫목을, 더 따뜻한 엄마 품을 떠올리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면 눈까지 얼굴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 그해 겨울에는 따뜻한 몸이 옆에 있었다. 아, 사람도 따뜻하구나. 엄마가 아니어도 따뜻하구나. 처음에는 나보다 더 따뜻한 몸이 내 차가운 몸을 차갑게 느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을까. 애기 기저귀가 모자라서 자다가 밤 빨래를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잠들어 있던 그이가 내 손에 깜짝 놀라 움찔했을 때서야 깨달았다. 내 손이 차가울 때마다 얼마나 차가웠을까. 깨달음이란 언제나 늦게 온다. 그 뒤로는 그이가 내 손을 잡아줄 때라도 손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방안을 따뜻하게 해놓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것이 맞다. 보일러 더 올릴까? - 뭣 하러, 충분하잖아! 정 추우면 옷을 더 입지! 혹시 이런 대답이 두려워서 추위를 그냥 견뎠다. 지금은 보일러 더 올릴까 물어보지 않고 더 올린다. 춥지 않아도, 춥기 싫어서, 추웠던 날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디에서나 따뜻해야 몸이 풀리고 마음이 풀린다. 이 집은 일단 따뜻하다. 그것은 합격점이다!

 

지 선생님, 잠이 온다고요?

아아니요!

핫백 같은 것, 이이는 전엔 뜨거운 걸 참 싫어하더니. 나이 들면서 바뀌네요, 사람이. 시만 쓰면 다냐, 그랬다면, 그거 「넋두리」란 시예요. 젊어서 술을 마냥 마시고 다닐 때면 내가 놀렸어요. 시만 쓰면 다냐 / 살림이 기우는데 / 시만 쓰면 다냐 /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그런 비슷한 시요. 그땐 못들은 척 하더니만, 그걸 어찌 기억하냐. 소싯적 이야기구만,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그런데 사람이 엄청 변해요. 먹는 것도 완전 달라져서, 게다 새우다 먹는 시늉만 겨우 했던 것들을 지금은 엄청 좋아해요. 평생을 살고도 속마음은커녕 좋아하는 음식도 짐작을 못하네요. 지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사람이 늘 한결같던가요?

 

사람이 한결 같은 존재인가, 나이 들어 또는 어떤 상황에서 성품이 바뀌기 마련인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이 할머니, 사람을 통째로 연구할 일 있나.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걸까. 인지문제가 생겨서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일까. 그래도 생뚱맞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철학을 하재? 그래도 대꾸는 해야 했다.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그래도 사람이 변하는 거라서, 애들 두고도 이혼도 하고.

아무리 얼결이라도 그렇지, 갑자기 내 말이 왜 이혼으로 튀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내 인생에 이혼은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이다. 자라난 곳 청원의 시골 정서에 더해서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한 번 맺어진 인연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고 배웠다. 요란하게 연애하다가 달리 결혼하는 일들도 가까운 주변에는 없었다. 그런 내 입에서 느닷없는 이혼 소리가 튀어 나오다니.

아니 제 말은요, 연애결혼 해놓고도 싸우기도 하고 혹시 이혼도 하고 그러는 걸 보면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순이 생각이 났다. 일하다가 만난 친구인데, 동갑이라서 친구하는 사이다. 세상에나, 시어머니 중풍 간호를 8년씩이나 해냈다는 착한 정순이. 그때는 요양병원이 흔치도 않았고, 입원한다 해도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겠지. 뇌졸중이 중풍으로 끝나도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다. 그랬던 정순이 이혼을 했다. 이혼을 당했다. 일찍 정년을 한 남편이 단란주점 여자한테 빠졌더란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하고 흔한 스토리인데, 그런 일이 드라마가 아니라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양심은 있었던지 당시 1억5천쯤 하는 너른 집을 팔아서 5천인가를 아내에게 위자료로 줬다는 소문이었는데, 쌤통, 지금 시가로는 15억도 더 간다 했다. 정순은 노총각 동창생을 만나서 재혼도 했으니 덜 불쌍하다. 그래도 흠은 흠이다, 이것이 나 꼴통의 생각이다.

우리는, 나는,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상하게도 그이에 대한 내 감정은 여전히 처음의 설렘에서 퇴색되지 않았다. 불만이 있어도, 내가 싫어하는 일을 그이가 하더라도, 내가 싫은 일을 내게 하게 하더라도, 결국 다 이해해버리고 마는 나는 바보 멍청이다.

그래도 천성이라는 것도 있고, 글쎄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나는 아무래도 흑백으로 나누어서 답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딱 잘라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하고 정해본 일이 드물다. 정식으로 이유를 대면서 이 일은 해야 하니까 한다 라거나, 하지 말아야 해서 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서지 않는다. 물론 손익은 반드시 따진다. 계산이, 예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어딘가로 쏠리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한다. 그뿐이다. 이런 대화는 머리 아프다.

 

 

익은 멜로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내 것이다. 죄송해요, 라고 하면서 얼른 집어 들었다. 속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일단 어색한 대화에서 빠져나왔으니까.

응, 데레사 언니. 나 지금 일하고 있어서. 아니, 괜찮아요. 좀 있다 저녁에 내가 전화할게, 으응.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데레사, 세례명인가 보다. 엿듣게 되네요, 들리니까. 지 선생님 성당 다니요?

아, 네. 집안이 다요. 얼른 알아들으시는 것 보니까, 여기 어르신들도 혹시?

아니요. 우린 아니에요. 사람은 결국 평생 장님이라는데, 신앙도 없고.

장님요? 평생?

예, ‘사람은 평생 장님이다.’ 괴테라던가, 어디서 본 명언이요. 산다는 게 뭘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니까 장님이라는 거죠.

 

괴테고 뭐고, 평생 장님이라니. 이 아줌마, 사람 멍 때리게 하네. 미래를 설계하고 참고 견디면서 준비하면 보람된 내일을 맞을 것이라고, 그렇게 의심 없이 살아온 나로서는 듣기 허망한 말이다. 기도하고 노력하고 주님의 인도에 따르고. 그런데 이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라니 의지할 데가 없겠다 싶었다. 일 없이 나는 신앙을 권면하는 역할놀이에 들어갔다.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 라고 무조건 시작해보시라고, 피라클리토 성령에 관해서도 말하기 시작했다. 들은 척 마는 척이었다. 이 집 사람들은 노부부가 다 내숭이다. 보호자랑 맞을 필요는 없겠지만, 뭔가 영 엉뚱하다.

지 선생님, 면전에서 좀 그렇지만,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 참 좋으요. 거기다가 신앙까지, 복 받은 사람이요.

제가 복을? 복을요? 웬 복?

전복을! 농담! 지 선생님은 전혀 50대로 안 보이요. 해맑고 건강한, 몸과 맘 둘 다 건강한 사람 인상이라서 너무 좋으네. 잘 살아왔다는 증거인가.

무슨 소리야. 언제 봤다고 농담씩이나! 요양보호사나 하고 있는 나더러 잘 살아온 것 같다고? 보통은 내가 이래 뵈도 어엿한 건물주라는 것을 알 리 없으니, 다들 그저 도우미나 알바 취급 아니던가. 물론 나는 잘 살아왔다. 당장 돈 아쉬워서 일 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시내에는 3층 건물을, 시골에는 농가주택을 가지고 안정적인 노후를 기대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맘 추슬러가며 일하고 모으고 일하고 모으면서 살아왔는데. 곁눈 팔지 않고, 곁눈 팔지 않으려고 맘 잡고, 맘 잡고, 맘 잡고! 그러니까 잘 살아왔는데, 잘 살아왔을 거라고 남이 말하니까, 갑자기 잘 살아오지 못한 느낌이 드는 건 또 뭔가. 지금 어쩌자고 두 타임씩이나 일을 하려는 것인지. 이 자체가 잘 살아왔다는 말과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도 정말 이상하다. 인상 좋다는 말, 어색하긴 해도 듣기 좋은 말들이라서 이 집을 거절하고 갈 이유가 적어진다. 당장 도움이 필요해서 나를 붙잡으려는 뻥튀기는 아니겠지, 설마. 그런데 이 할머니, 날 언제 봤다고 의심 없이 믿는 눈치네. 어쩐다?

 

보호자는 순간 어르신 쪽으로 다시 가더니 들여다본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그냥 살핀다. 살짝 건드리면서 깨운다.

보세요! 여기 지 선생님이랑 사귀어 봐야지요. 무슨 말이든 해 봐요. 심심하면 지 선생님이 내일 우리 집에 안 올지도 몰라요.

협박 아닌 협박이다. 그런데 그 말에 움찔 반응을 보인다. 어르신이 몸을 일으킨다.

아, 다행이네. 지 선생님, 이쪽으로, 여기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세요. 우리 둘만 있으면 정말 심심해요. 그동안 할 말을 죄다 해버려서 새로 할 말들이 없거든요.

정말 내 차례다.

어르신, 네, 그렇게 앉아서 기지개도 켜시고, 자리에서 운동도 하고 그러시게요. 자, 우선 두 손을 쥐었다 폈다! 이렇게요. 팔도 흔들어 보시고, 어깨도 들썩! 제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걸음은 잘 걸으시는지. 자, 일어나서 조금 걸어보실래요?

보호자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어르신이 일어나 앉았다. 어깨도 들썩들썩 해 보인다. 아, 다행이다. 반응이 너무 없었더라면 사실 할 일이 없으니 어색할 노릇이다.

자, 이렇게요! 으샤, 으샤! 그런데 혹시 밖에 나가보실 생각 없으세요? 오늘 쌀쌀해도 바람 별로 없어요, 지금 햇볕이 너무 좋아요. 조금 있음 해가 사라지잖아요.

어르신이 두리번거린다. 아내를 찾는다. 아내는 어느 새 반코트를 가지고 나온다. 체크 머플러도 함께다. 더러 산책을 나가곤 했는지, 어르신 혼자서 천천히 겉옷을 입고, 장갑도 끼고 마스크까지 챙긴다. 아내가 머플러를 고쳐 매준다. 예쁘게 매만져주기를 기대하는 소녀처럼 얌전하게 내맡긴다.

마스크까지 중무장이시네요, 요기 아파트 마당만 갈 거 아녀요?

아, 황사를 싫어해서 마스크를 꼭 끼고 나가신대요. 겨울엔 따뜻해서 좋으니 일석이조죠, 그렇지요?

아내도 겉옷을 챙겨 입고 나선다. 자, 그럼, 오늘은 셋이서 함께 산책을 나가 보죠.

오늘 셋이서 함께.

어르신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갑자기 즐거운 기운이 감돈다.

대문을 열자 찬 기운이 확 밀려든다. 좁은 대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켜서 나서면서 나는 이들과 함께 다시 이 따뜻한 집안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어쩌면 내일도 그 다음 날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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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21 여름호 통권 64호, 208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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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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