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22. 6. 14. 11:17

 

 

놀이터

사람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사람으로 살아보니 그랬다
- 신광철 사람

 

    

    놀이터가 쓸쓸하다. 그려놓은 것처럼 정적인 것이, 그네 줄에 미세한 흔들림도 없다. 바람도 없나 보다. 11월은 무엇이든 쓸쓸해 보이는가. 하긴 평상시에도 놀이터는 옛날 같지 않더라. 그네를 좀 타 보고 싶었지만 세력 좋은 언니들이 오빠들이 좀처럼 틈을 내어주지 않던 어린 시절이 아스라하다. 동네 앞 공터에 색색 미끄럼틀이 생기고 시소가 생기고 나서야 여기저기 조금 놀 수 있는 구멍들이 늘었다. 그래도 그네 아래에는 늘 줄이 길었다. 손을 입에 넣고 빨다가 집에 들어오면 얼굴이 먼지투성이라고 핀잔을 듣곤 했었다. 세월이 마냥 속절없이 흘러버린 지금, 아이들 숫자가 엄청 줄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민지세대라나, - 왜 하필 민지야? 그냥 엠제트라고 해도 알아들을 터인데, 엠지든가, 일 없이 남의 딸 이름을 거기다 부르냐고! - 암튼 신세대 아이들이 결혼을 안 하거나, 해도 애들을 낳지 않을 거라고 한다니까 놀이터가 점점 텅 빌밖에. 코로나도 덧붙여 이유가 된다. 전에는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 한쪽에 노인들이 있곤 했다. 놀이터 옆에 간단한 운동기구들이 있고, 거기서 노인들이 뭔가를 해보거나 더러는 그냥 앉아있기도 했었다. 이제 그 노인들도 주눅이 들어서 집에 꼼꼼 숨은 것이리라. 숨어야지 그럼, 살고 봐야지.

 

    그런 어느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고발을 당했다.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어디가 대순가. 그 자체로 충격스러운 뉴스다. 뉴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웃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을…….’ 그런데 채널이 슬쩍 지나가고 만다. 오전 재가요양돌봄 할머니 어르신 집에서다. 오전 할머니는 뉴스를 잘 틀지 않는다. 바로 다른 채널로 돌려버린다.

    네이버를 뒤져보고 싶었지만, 할머니 어르신은 좀처럼 틈을 주지 않는다. 내가 출근하면 대부분은 교회에 가시는 날이 많고, 집만 아무렇게나 나를 맞는다. 잠깐, 어떤 때에는 의아하다. 혼자서 교회를 다니실 정도면 요양등급에서 흔히 말하는 경도인지장애 정도일까. 그건 치매 전 단계를 말한다. 그래도 거동이 되시는데 돌봄 서비스라고? 물론 혈액암을 앓고 있는 환자이시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과정은 실제로 돌봄일을 하는 우리들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다. 결과적으로 재가요양돌봄 등급이 나왔으니까 서비스를 받는다. 아직은 경증이라서 출입이 가능하시겠지.

    대문을 열면 첫 냄새는 고기냄새다. 치료를 위해서 고기를 드셔야한다. 일단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방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는 빨랫감인지 구분이 가지 않으니까 일단 치워놓고 나중에 물어봐야 한다. 청소가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교회에서 돌아온 할머니의 눈초리는 매섭다. 당신이 없는 사이 뭔가 말끔하게 치워져 있기를 바란다. 오늘따라 더 이것저것을 살핀다. 느닷없이 청소를 의심하는지 말소리가 뾰쪽해진다.

    오늘은 청소도 안 했네이. 멋 했데.

    어르신, 저 오자마자 청소부터 하는걸요.

    아니, 걸레도 쩌렇게 물도 안 묻었구만, 먼 청소를 했다근데.

    아차, 내 실수다.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보니까 별로 닦을 것이 없어서 냉장고 앞과 싱크대 밑만 물티슈로 닦았는데, 이도 저도 큰일이다. 이제 와서 걸레질을 안 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청소했다고 했으니 거짓말이 되니까. 그렇다고 물티슈로 닦았다는 말은 더더욱 큰일 날 소리다. 설거지할 때 온수를 틀어 쓰는 지 그것도 염려하는 할머니 앞에서 물티슈를 쑥쑥 뽑아서 바닥을 닦았다고 하면 이해를 하겠는가.

    아, 이런 민망함은 생각도 하기 싫다. 사실 이 할머니가 방문요양서비스를 받기 전에, 그러니까 작년까지는 치매안심센터에서 물티슈를 충분히 나누어 주었다. 치매환자들에게는 한 달 치라면 모자라기는 해도 일정 양의 기저귀도 제공했다. 그렇다 보니 요양보호사들 입장에서는 사실 집에서는 그리 쑥쑥 뽑아 쓰지 않던 물티슈를 척척 쓰는 습관들이 생겼다. 물티슈가 썩지도 않아서 지구를 망친다거나 몸에도 해롭다느니 그런 것은 호사가들의 말이고, 일선에서야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말이다. 아기용이라고 특별히 따로 나온다고는 하지만, 엄마들이 제 아기들 엉덩이도 닦아주는 것이 물티슈인데. 암튼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할 수 없어서 우물쭈물 넘기고 점심 준비를 하려는데, 이번엔 밥도 먹기 싫다고 하신다.

    솥에 밥 없으까. 새로는 허지 마. 홍시감 쩌렇게 나두고 어째쓰가. 묵어부러야제. 이빨 없다고 홍시만 묵가니, 꼭 요런 것들만 보냉께는.

    자녀분들이 일단 어머니가 임플란트하시느라 고생하시니까 일부러…….

    그런 줄은 알제만, 고기로는 국물이 없간디. 어째 속이 허한 것이.

    그럼 더더욱 밥을 드셔야죠, 홍시는 너무 달아서.

    그람 고구마를 찌제. 고구마도 썩어나간디.

    네, 그러시게요. 홍시도 고구마도 넘쳐나니까 복 받으신 거죠.

    복은 무신…….

 

    아뿔싸, 엎친 데 덮친다더니, 고구마 냄비에서 탄 냄새가 난다.

    아니, 먼 냄시랑가. 냄비 다 태와묵는갑네이.

    아아뇨, 별로 안 탔어요. 살짝 좀 눌었어요.

    머시 그래, 다 타부렀구만.

    부엌으로 쫓아와서 들여다본 할머니는 성화다 성화. 염려마시라, 잘 닦아 놓겠다를 연발하며 고구마를 식탁에 챙겨드리고는 나도 모르게 핸폰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동작을 보셨는지, 또 뭐라고 그러신다.

    오매, 커피 좀 타 봐, 물이라도 조까 떠 줘보던지. 그냥이사 묵겄어, 목 맥혀서 원. 요리 와서 좀 묵제.

    커피 가루를 컵에 털어 넣고 물 끓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커피가 땡긴다. 참는다. 첨엔 내가 사다놓고 같이 타 마셨는데, 이번에 할머니가 사다놓고는 달라졌다. 이렇게 먹으믄 금세 다 먹어불겄네,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통에 아차 싶었다. 오후에 가서 마시자. 그 집에선 내가 첫날 갔을 때 가져간 보온병의 커피를 보고, 집에 온 손님이 커피를 싸들고 다니면 어떻게 되느냐고 깜짝 말렸다. 그래서 커피는 내가 알아서 마시지만, 가까운 손님이나 친척이 된 기분이다. 주인네가 믹스커피를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믹스커피는 손님용, 아니, 아예 나를 위해서 사다놓는 것 같다. 나는 특이한 취미가 없는 것이 편하다. 커피도 아무거나 다 마시지만, 특히 믹스가 땡길 때가 있다. 우리 집이 아닌데 나를 위한 커피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빨리 가자. 그렇게 오전 시영아파트 할머니 집을 나선다.

 

 

    차에 앉아서 시동을 켜고 보니, 서둘러 나와서인지 오후 출근시간까지 시간이 널널하다. 아차, 그 놀이터 뉴스, 기막힌 뉴스를 찾아보자. 다시 시동을 끈다. 놀이터, 아이들, 고소 그렇게 치자 바로 뉴스가 뜬다. 인천 어디, 어디면 어떠랴, 한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다른 아파트 어린이들이 고발조치 되었다는 뉴스다. 그러기도 하는가, 초등학생 아이들을? 뉴스라지만 무지막지했다. 아이들을 고발한 사람은 아파트 관리소장이다. 아파트 입주민들의 의견을 따라야 관리소장 직이 유지되는 사정을 생각하면, 고발자는 아파트 입주민들이다. 아니, 입주민 대표자 회장이란 사람이 시켰단다. 시작은 이랬다. 입주민 대표가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보고는 대뜸 혼을 냈다. 너희들 어디 사냐? - oo에요. - 아니, oo 살면서 남의 아파트 놀이터에 오면 도둑인 거 몰라? 그러고는 가방들을 다 빼앗고 관리실에 억류하라고 데려왔단다. 기물 파손죄로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과 함께. 이웃 놀이터에 가면 도둑? 도둑? 세상에 아이들을! 초등학교 애들을!

    이런 것이 ‘그릇된 정의’인가? 지난번에 조선 천주교 박해 때 이야기를 예를 들어서, 그릇된 정의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를 낳았다던 말이 떠올랐다. 오후 보호자 할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애매했던 그릇된 정의라고 하는 말의 뜻이 이 순간 갑자기 분명히 다가온다. 남의 땅에 들어왔으니 도둑이다, 그러니 고발한다? 아, 이런 것이 바로 그릇된 정의야. 이런 것뿐일까. 권력형 비리 죄목으로 수사하다가 안 되면 사기죄로, 그것도 안 되면 자녀 입시비리로, 아니면 또……. 아무튼 나쁜 놈이 분명하니까 반드시 잡아넣을 테다. 이런 것, 최근에 남편이 속 터져하는 검찰 발 뉴스들도 생각해보니 정의는 허울이다. 남편한테 ‘그릇된 정의’라는 말을 해보고 싶다. 남편은 어떤 사건은 공소시효가 임박했으니까 수사를 안 한다던 뉴스에도 싸늘하게 화를 냈었다. 지난 것도 아니고 임박했다고? 나에게는 별로 화를 내는 적이 없지만, 티브이를 보면서 화를 낼 때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화를 내서 무서울 때가 있다. 누군가가 차갑게 화를 내는 것은 정말 무섭다. 열을 내면서 화를 내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열이 식으면 화도 식으니까. 그래, 세상엔 그릇된 정의가 판치고 있어…… 라고 말해 보자. 내가 이런 어려운 말을 하면 놀라겠지, 아마. 뭐야, 이러다가 늦겠네.

 

 

    오후의 아파트에 들어서면서도 당연히 놀이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싸늘하기는 이곳도 매한가지다. 저렇게 텅 빈 놀이터에 이웃 아이들이 와서 논다고 경찰을 불러? 아직도 그 뉴스가 따라다닌다. 아이들이 없어서 텅 비어있고, 아이들을 오지 못하게 해서 텅 비어 있다. 요즈음은 할아버지 어르신도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신다. 전에는 산책을 나오신 날이면 놀이터 옆 운동기구에서 어깨돌리기와 다리 폈다 오므리기 정도는 하시곤 했는데, 올해 들어서 여름부터는 산책을 아예 기피하신다. 어쩌다가 산책을 나오셔도 놀이터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신다.

 

    내 출근이 살짝 늦었는지, 점심 식탁은 다 차려져 있다. 작은 그릇들에 감자샐러드가 각각 담겨있는 것이 아침 식탁에서 남았나 보다. 어쩌다 그렇게 조금씩 먹으면 맛있다. 내가 집에서 절대로 안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이집에 아기를 맡기고 직장 일을 했으니 손 가는 음식은 꽝이다. 재빠르게 차려 먹고 설거지는 남편이 거의 맡는다. 새로 만든 상치 겉절이에는 흰 깨가, 메밀묵 무침에는 검은 깨가 뿌려져 있다. 요새 두고 먹는 연근조림에는 잣도 듬뿍 들어있다. 간장에 졸여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언젠가, 전라도 사람들은 깨나 잣을 많이 쓰는 것에 내가 놀랐다는 말을 했더니, 그것도 식재료라고 생각하고 일단 무엇이든 많이만 먹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큰 냄비에는 국이, 작은 냄비에는 맹물이 끓고 있다. 밥을 차리고 나서 누룽지를 끓일 물이다. 달걀 물에 파가 송송 썰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북엇국일 것이다. 나를 보더니 그제야 국에 달걀 물을 푼다. 역시 북엇국이다. 기본 영순위인 물김치만 시원하게 내오고 밥을 차리면 된다. 요즈음엔 나도 새로 지은 밥이 더 맛있다는 생각을 한다. 다이어트는 저녁에 하면 된다. 점심 후 설거지는 내 당번이다. 그리고 커피 타임. 오늘따라 오전부터 마시고 싶었던 커피가 달달하고 맛있다. 핸드폰 소리다.

 

 

    딸아이다. 아이는 아니지, 임신 6개월인 딸아이가 아이는 아니다. 이 시간이면 근무 중일 텐데 웬 전화일까. 엄마가 일하고 있는 것도 모르지 않을 텐데. 애가 전화를 하는 시간이 아니다. 방정맞게 염려가 먼저 스친다.

    엄마는 방정맞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염려가 사실이 된다. 딸애가 점심을 먹고 다시 근무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으로 가는 중이란다. 병원으로, 임신 6개월 된 임산부가! 어쩌면 좋을까. 임신 6개월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기다. 이래도 저래도 안 되는 시기다. 열이 나거나 두통이 아니라 배가 아프다고? 다른 방법이 없다. 무조건 딸애를 보러 가야한다. 오후 돌봄 집에 들어오면서 출근 태그를 찍은 것이 겨우 한 시간 남짓이다. 지금 찍고 나가면 오후 근무 전체가 무효다. 그렇다고 시간을 다 채우고 갈만큼 내가 배짱이 있는 엄마가 아니다. 남편에게 전화를 먼저 한다. 식탁에 함께 있던 할머니는 뭔가 다 알아들었겠다.

    운전 조심해서 먼저 내려가요. 근무 끝나고 나도 곧바로 갈게. 남편은 언제나 정답을 말한다. 전화를 끊기가 바쁘게 할머니를 쳐다본다. 할머니도 나를 보고 있다. 말이 필요없다. 알았어요. 지 선샘, 놀라지는 말고 어서 가 봐요. 운전은 천천히…….

 

    유산은 자궁 내막이며 내벽을 상하게 할 수 있어서 문제다. 더구나 6개월 이럴 때 라면 출산과 똑같이 관절이며 자율신경 균형이며 모든 것이 깨질 거다. 간호조무사 생활 첫 시작이 바로 산부인과였다. 나는 아무 탈 없이 임신 9개월을 보냈고, 원장도 산후 2개월이나 쉬도록 해주었다. 역시 산부인과였다. 내 딸은 그런데……, 태동도 한참 전에 느꼈다는데……. 말도 안 돼, 첫 유산은 다음을 장담할 수 없기도 하다. 조기 출산이어도 애매하다. 생존 가능성이 너무 낮다. 잘 해야 25퍼 정도. 몸무게가 2.0은 되어야 한다. 무조건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한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딸애는 건강한 편이니까…….

    집에 가서 뭐라도 챙겨가야 하나 하는 마음과 곧장 딸애에게 가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 집에 다녀간다는 말은 거의 한 시간 차이를 낸다 싶어서 그냥 맨몸으로 고속도로로 향한다. 얼굴을 일단 보자, 그래, 만나 보는 것이 우선이다.

    아이고, 운전 중엔 어떤 전화도 받지 않는 원칙 같은 것도 아무 소용없다. 사위 번호가 뜨자, 정신없이 받는다. 어떤가, 나 지금 내려가고…….

    아, 장모님, 어머님, 민지 괜찮아요. 일단 누워서 안정 찾고 있어요. 천천히 오…….

차의 속도 때문에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전화기는 하필 시트 어딘가로 빠져버린다. 하느님 맙소사. 아니,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가 그동안 하느님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지 않았었는지 어색한 느낌이 들 정도로 큰 소리로 불렀다. 주님, 온 마음으로 기도하오니 또 하나의 생명을 지켜주시옵소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위대한 사람과 하찮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으셨음을 압니다. 하찮은 저를, 저의 딸과 그 딸애를 가엽게 여기시어……. 눈물이 쏟아져서 갓길로 차를 댄다. 숨을 고르며 찻길을 보니, 말이 고속도로이지 이른 오후 시간이어서인지 차들의 왕래가 번잡하지는 않다. 내가 겁이 많은가. 좀처럼 다시 노선으로 들어가기가 겁이 난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마음 부서진 이를 고쳐 주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주시듯

    헤아릴 길 없는 권능과 자애로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바닥까지 낮추시는 분.

 

    언젠가 들었던 신부님의 기도 소리가 귀를 울린다. 마음 부서진 이를 고쳐 주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 그래 꼭 구해주실 것이다. 별들에게 이름 지어주시듯……. 맞아, 우리 아기 이름도 지어주시고.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엉? 가난한 우리를 일으키시고, 그런데 악인을? 가난하지 않으면 악인? 반지하에서 신혼을 보냈던 나는 충분히 가난했지만, 지금은 임대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받고서 살아간다. 세 든 사람들이 가난하면 나는 그럼 악인? 이런 내용이 이해가 안 된 채로 걸려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대놓고 묻지도 못한다. 나는 시원찮은 신자니까. 나는 가끔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 문제다. 신부님의 기도들을 100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새삼 이 어려운 기도를 되새김할 때인가. 어서 가자.

 

 

    병원에 도착해서도 민지를 만나기는 수월치 않았다. 코로나 검사를 해놓고 근처 분식집에 앉아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오후 늦게야 애 얼굴을 보았다. 지금은 웬만한 상태로 회복되어서 링거액을 꼽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는데, 지금은 아이마냥 배시시 웃기까지 한다. 태중의 제 아이를 지켜냈다는 안도감이 웃음기를 돌게 하나 보다. 이삼일 외근이 좀 있었다는데, 그 피로가 쌓여서 그리 된 것 같다고.

    임신부가 웬 외근인가 싶지만, 몸도 마음도 건강한 민지는 평소에 사회생활에서도 여물기까지 하다. 대학을 일류대학 일류학과로 진학한 것은 아니었지만, 졸업하자마자 꽤 괜찮은 직장에 들어갔고, 결혼과 더불어는 사표를 냈다. 엄마로서 조금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사표를 내는 것이 생활을 남편 직장 있는 지방으로 합치는 것이라서 실업수당을 받았다나? 실업수당이라니…… 참 좋은 나라다. 그러더니 어느 기간 후에는 다시 임시직이지만 비교적 안정된, 정직으로 전환되어도 좋을 직장엘 들어갔다. 기본적으로는 사무직이지만 가끔 외근이 있다고 했다. 허니문 베이비까지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해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성인들인데 아기 소식이 없는 것만 살짝 걱정이었다. 그러다 기다림에 지치기 직전에 임신이 되었으니 그 또한 마음대로 되는 듯 했다. 계획도 다 서 있는지, 출산 직전에 그만 둘 예정이란다. 그러면 또 실업수당을 받는 것인지. 아직 나이도 어린데 매사에 믿음성 있게 처신한다. 나는 그 나이에 엄마가 되었었지만, 세상 물정은 잘 몰랐다. 남편에게 처음부터 의존적으로 살았다. 무조건 절약만 하면 되는 줄 알았었다.

    딸애도 혜택을 누렸지만, 그래서 좋은 것이라 느끼지만, 실업수당 제도는 좀 묘한 데가 있다. 요즘엔 간호조무사들만 해도 1년 미만 퇴직금과 거기에 더해서 1년 미만 연차 수당을 받고 퇴직한 다음에, 이제 6개월인가 실업급여 챙기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했다.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몰라도, 규정에 맞춰 설계를 한대나? 요즘 젊은 아이들 똑똑한 것이 바보 같은 내 눈으로는 살짝 무섭기도 하다. 나 젊었을 때는, 스무 살 나이로 간호조무사 노릇을 시작했을 때는, 그 일은 병원에선 바닥을 기는 일이었다. 내가 없음 간호사들이 힘들다, 의사들도 힘들어진다. 결국 환자들에게 처음 필요한 사람은 나다. 얼마나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지나온 시절이었나. 요즘 아이들은 똑똑하다. 똑똑해도 불운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민지는 이번에 태아를 지켜냈다.

 

    사돈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녁 때 두 분이서 함께 다녀가셨다. 맏며느리가 첫 임신 중 입원했다는 소식에 얼마나들 놀라셨을지, 다행이다, 다행이고말고. 뭔 일 있겄냐. 시어머니가 애를 붙들고 하도 설레발을 치니까 시아버지가 말릴 지경이었다. 사돈이 저녁을 사셨으니 내일은 점심이라도 대접해 드리고 올라가야겠다.

    사돈네는 들어가시라 하고 다시 병실에 올라왔더니, 안정을 찾은 민지 얼굴과 대조로 외려 사위 얼굴은 파란 채로다. 저녁도 아직 못 먹고. 해서, 낼 출근할 사람은 좀 쉬라고 집에 들여보냈다. 병실엔 어차피 보호자 1인으로 제한이다. 남편은 내려오지 않기로 했다. 딸이 안정된 후 사위가 곧장 장인어른에게 안심하시라는 전화를 했더란다. 나는 오전 수급자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내일 하루 쉬어야 한다고 말해두었다. 오후 집은 헐레벌떡 떠나올 때 벌써 아셨으니까 일 없다.

 

 

    엄마 나 괜찮아, 잠깐 지나간 일이니까 조금도 걱정 마셔! 엄마도 가서 좀 쉬시지.

    언제 왔다고 쉬러 가냐. 아직 괜찮다. 그나 백이 아빠가 많이 놀랐겠다.

    엄만 동백이보다 백이가 더 예쁘게 들려?

    동백 필 때 첫 나들이 가자고 동백이랬다며? 그렇다고 꼭 동백 동백 해야 되냐? 너도 민지 보다는 민아 민아 해버릇해서 민이라고 먼저 나와. 것보다, 너희 입주 예정 아파트에는 놀이터가 잘 꾸며져 있겠지?

    엄마는 무슨 놀이터 걱정을 벌써 하셔.

    아니, 애는 낳기만 하면 금세 자란단다. 내가 너를 낳아서 이 세월이 흘렀다고? 안 믿겨. 넌 돌도 되기 전에 걸음마를 했어. 말도 빠르고. 어린이집엘 오래 다녔지, 엄마가 일했으니까. 건 미안해. 유치원, 초등학교……. 놀이터에선 어땠을지.

    그만 하셔. 엄마가 일하는 애들 많았어. 그렇다고 아직 애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놀이터 걱정이세여? 방안에서 가지고 놀 장난감 걱정부터 해주셩!

    얘가 어리광은! 다 나았나 보네. 장난감이야 엄마 아빠가 오죽 잘 준비하겠어. 할머니는 애기이불부터 해줄게. 애기이불이라고 말하면서 조각이불이 떠올랐다. 오후 돌봄집 할머니가 손바느질로 만들고 있는 조각이불 말이다. 최근에 얼핏 보아도 100조각도 넘어 보이는 조각들을 잇고 있었다. 대학에 간, 그래서 기숙사로 독립한 손녀딸에게 보내줄 조각이불이란다. 난 바느질은 절대로 못한다. 생각만 해도 미리 온 몸이 쑤실 듯 아프다. 할 일 없이 그런 걸 꿰매고 있는 할머니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얼핏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서라, 부러워할 걸 부러워해라. 모처럼 마트 말고 백화점 신생아코너에 가서 예쁜 아기이불을 사면된다.

    엄마, 그럼 장난감은 안 사줄 거야? 내가 멍하고 있었는지, 딸애가 다시 묻는다.

    사주고말고!

    그러니 놀이터 걱정은 말아요! 아파트 입주하고 나서 아기 나오니까 좋잖아. 입주하면 예쁜 놀이터는 당근 따라오는 것이니까요.

    그래, 그렇구나.

    엄마, 난 아이들 더 가질 거야. 놀이터에서 혼자는 외로워. 외로웠어. 이웃 애들은 언니든 오빠든 동생이든 누구라도 있었어. 나만 혼자였지 뭐야. 애들 여럿 함께 놀이터 가서 소리 지르고…….

    어머나, 이 이이가 외로웠구나. 언니 동생들 사이에서 자랐던 나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나도 남편도 적지 않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5분의 1, 7분의 1의 혜택만으로, 오히려 무엇인가에 굶주린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나랑 남편은, 빠듯한 살림 일구면서 올인해서 기를 수 있으려면 자녀는 하나면 된다고, 하나라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딸 하나에 최대한 지원하기, 대학까지 아무 걱정 없게 쭈욱! 그런 것이면 최고일 줄 알았다. 대체 무엇이 좋은 조건이란 말인가!

    애를 여럿 갖겠다고?

    그래 엄마, 나 실은……. 나 초등 2학년 때 같은 반 수희 기억나? 같은 동 살던 정수진.

    수진이는 뜬금없이.

    걔네 민수 오빠 있었잖아. 오빤 상급반이라 놀이터에서 마주치진 않았지만 아침 학교 갈 때는 다들 함께 나가곤 했었지. 그런데 놀이터 애들은 수진이가 아니라 내가 민수 오빠 동생인 줄 알았었나 봐. 이름 땜에. 그걸 수진이가 알고서는 화가 났었는지 날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내가 그런 말 한 적 절대 없는데! 요샛말로 그때 왕따였어. 애들은 나만 보면 ‘민지는 민수 오빠 동생 아냐!’ 이렇게 떼창을 했다니까.

    아니, 그런 일이. 근데 왜 엄마아빠한테 암말 안했어?

    오빠를 어떻게 낳아주나. 지나가버렸는데.

    지나가?

    오빠는 차례가 지나가버렸잖아. 민수 오빤 수진이 오빠가 맞고.

    없는 오빠 타령을 여태 품다니. 많이 외로웠구나 싶다. 애들 여럿 낳아서 놀이터에서 언니오빠동생 있다고 자랑하게 한다? 어린 시절의 아픔은 작은 것이라도 오래 가는구나. 또래들 중에는 결혼이고 육아고 다 필요 없다는 말도 서슴찮는데. 화제를 돌린다.

    너 일은 안 하려고?

    아니, 해야지. 애 낳는 건 맘먹기야. 출산지원금부터 시작해서 육아휴직이다 뭐다, 아빠들도 그게 가능하거든. 다자녀 혜택으로 분양아파트 청약도 유리할 것이고.

    다행이다. 이렇게 미래를 설계하는 신혼이 예쁘기만 하다. 이웃 놀이터에서 놀다가 쫓겨나고 도둑이라고 고발된 아이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냉정하다 못해 야비하고 잔인한 뉴스는 태교에 절대로 좋지 않다.

    엄마, 애들 놀이터는 진짜 염려 마세요. 우리 들어갈 아파트 말고도요, 순천 기적의 놀이터 안 들어보셨어요? 엉뚱방뚱이라던가, 엉뚱발뚱이라던가, 그런 놀이터인데, 그 흔한 미끄럼틀이며 그네며 시소 같은 것이 전혀 없대요. 그저 넓은 모래밭과 잔디 언덕에 고목나무들만 늘어선 곳에 개울도 있대요. 『놀이터는 위험해야 안전하다』 그 비슷한 책들을 펴낸 아동전문가가 기획한 것이라고, 벌써 유명해요. 아,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놀이터’ 그런 것도 있대요. 시-가-모-노! 그런 곳에 애 걸음마 잘 하면 데리고 가서…….

    그래 알았다. 엄마가 김칫국부터 마시며 안심하마. 애들 다 데리고 가자꾸나.

    엄마는, 김치도 안 좋아하면서.

    그래, 그래. 엄마가 나가도 너무 나갔구나. 어서 눈 좀 붙여.

 

    아예 하루를 꼬박 더 보내고 집에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퇴근 시간되기 전에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반나절하고도 하루내 쉬고 나니까 공기가 좀 변한 것 같다. 엷어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숨을 크게 크게 쉬어본다. 곤하다.

    퇴근한 남편은 민지 민지 어떠냐를 연발 하더니, 한참 후에야 고생했다며 저녁을 나가서 먹자고 한다. 하지만 이미 씻은 뒤라서 외출이 귀찮을밖에. 대충 시켜먹자고 하고는 아이들처럼 치킨을 시켜서 치맥을 한다. 몇 끼 대충 먹었더니, 배가 불러도 맛이 있다. 내일이면 다시 일상인데, 아침에 얼굴이 붓게 생겼다.

 

 

    아침이 그리 쉽게 오지는 않는다. 꽤 늦은 시간 젓가락언니의 전화가 밤을 흔든다. 동네 언니다. 최근 들어서는 시절이 시절이라서 잘 만나지 않았고, 잘 만나지 않으면 할 말도 별로 없는데, 언니는 평소의 헤실 거리는 웃음기 대신 목이 멘 소리로 말한다.

    희선이가, 희선이가 잡혀갔어야.

    잡혀가다니! 언니, 그래, 무슨 일인데?

    어즈께 낮에, 사람들이 오더니 잡아갔단다. 애기들만 놔두고, 세상에 그럴 수도 있다냐, 애기들만 놔두고.

    무슨 말이야? 왜 그런 거냐고!

    갸 신랑이 아프잖냐. 저번에 민지 엄마한텐 말 했잖어, 신랑이 심각하게 아프다고, 사구체가 뭐여, 암튼 신장이 어쯔고 돼서 투석을 시작한다고. 이 속없는 가시나가 지가 나서서 그새 이식 어쩌고 하면서 적합도랑가 멋인가 검사하러 갔잖어, 즈그 둘이서 지난주에 서울을. 애기들은 즈그 시엄니가 올라와서 봐주고. 근디 그 유명 병원에서도 방역이 뚫리다니 먼 그런 일이 난다냐. oo대 병원있잖어, 여그는 병원이 없가니, 거까지 가 갖고는. 암튼 간에 보호자 한 명은 병실에 들어갈 수 있응께, 보호자도 당근 코 쑤시고 나서야 들어갔었겄제. 근디 내려 와서 이틀 만에 연락이 왔다는 거야, 금욜날 잡힌 추가 검사가 취소된 것은 물론이고. 아예 식구대로 다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고 말만 듣고도 무서웠겄제. 그래도 실실 웃더라고, 갸는 2차까지 다 맞었응께, 나도 큰 걱정 안 했제. 근디 글쎄, 식구대로 다 받었는디 가시나 저만 양성 나왔다고. 저만 나온 것은 다행이지만 애기들 놔두고 어쩌냐고, 그냥 펑펑 울더라고. 신랑이나 성한 사람이어야 말이지. 우물쭈물 그러고 있는데, 낮에 사람들이 와서 데려가 부렀다네. 애기들 앞에서, 애기들만 놔두고. 애기들만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서 얼마나 무섭겄어. 외할매라고 가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전화통에만 매달려 있제. 애들이라 속이 없긴 하네, 할무니 머 먹고 싶다고 그런 소릴 하고 있응께. 부랴부랴 멋 쫌 만들어서 들고 갔더니만, 아차 싶어서 문도 못 열어보고 문 앞에다 놓고 내려와서 전화를 하는디, 눈물 안 나고 베겨? 대문 밖에서 전화하면 애기들이 문 열고 나와불까 봐서 내려와부렀제. 짠해서 나도 모르게 안아불고 그럴 것인게. 울고불고 난리일 꺼 아니겄어.

    어쩌냐, 언니. 그래도 언니가 정신 차려요. 누군가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이런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나 보다. 뉴스에서 백신 접종률이 80퍼에 육박하지만 총 누적확진자는 40만에 다다른다고 해도, 우린 모두 설마 하며 뉴스는 뉴스일 것이라고, 남의 일일 것이라 하는데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40만 가정에 날벼락이 떨어지다 보니 어느 날 어느 집에도 일이 닥친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가른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언니가 안쓰럽다.

 

    속수무책이면서 엉뚱하게도 그 언니가 젓가락언니로 불리게 된 이야기가 떠오른다. 젓가락이나 빼빼로처럼 말라서가 아니라, 좀 마른 편이긴 하지만, 젓가락으로 밥 먹다가 날벼락이었단다. 결혼 몇 년 안되었을 때 이야기라지만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건 이 동네에서 살며 만났을 때다.

    복달임한다고 동네 아줌마들 여럿이서 닭죽을 먹던 때였다. 젓가락언니는 못 말리겄소이, 하고 누군가가 이 언니를 놀렸다. 이 언니가 젓가락으로 살코기를 집어먹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모두 깔깔대었고, 나만 모르고 있었다. 아줌마들은 우스개 섞어가면서 그 이야기를 서로 해댔지만, 나는 귀를 의심했다. 몇 십 년 전이라면,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다시피 하고 있는 며느리가 예쁠 리 없는 시어머니가 한말 할 수 있었겠다. 그렇게 젓가락으로 밥을 묵으면 복 달아난다. 숟가락으로 푹푹 좀 떠묵어라. 그러면 며느리의 정답은 하나뿐이다. 네, 네. 그러고서 숟가락을 드는 것이다. 그런데 철부지 언니는, 대박, 오답을 터뜨렸더란다. 그럼, 어머니는 숟가락으로 푹푹 드시니까 이렇게 잘 사시는 거예요? 이 무슨 망발. 너무 순진하다고도 너무 버릇없다고도 어딘가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을 노릇이었다. 내 벌어진 턱은 굳어버릴 뻔했다.

    암튼 그 이야기의 결말은 최악에 가까웠다. 그 길로 시댁에서는 친정어머니 오시라 해서, 친정어머니가 시댁에 가셨고, 시어머니 말씀은 단 하나, 딸 데리고 가시쇼! 물론 나중에나중에 남편이랑 알콩달콩 살면서 들려준 이야기이니까 어디만큼 사실인가는 가늠할 길이 없다. 일단 친정어머니를 따라서 친정으로 갔다가, 여차여차 우여곡절 끝에 다시 시댁으로 들어갔고, 어느 시간이 흘러 독립했고, 뭐 그런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아는 동네 아줌마들은 그 언니한테 젓가락여사님이라고 놀리곤 한단다. 아이큐에 관한한 정말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냐하면 언니가 인간관계에서 1퍼도 이익을 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퍼다 먹이기를 좋아하고, 양념을 아끼지 않아서인지 음식들이 맛도 좋다. 암튼 실제보다, 실제를 모르기는 하지만, 아낌없이 퍼주는 스타일이다. 전혀 되받을 길 없는 상황에서도 그리 잘 하니까, 당근, 누구나가 다 좋아한다. 그런데 사는 일은 그리 잘 풀리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의 일도 그렇고, 언니 자신도 돈벌이라거나 뭔가 그런 쪽으로 생산성은 꽝으로 보인다. 얼마나 안절부절못하고 허둥대고 있을까. 민지 때문에 잠시라도 애 탔던 뒤끝이라서, 엄마 마음이 더 절실히 느껴진다. 젊은 아이들이니까 별 일 없을 게다, 제발.

 

 

    이상한 일이다. 오늘 출근길에는 오전부터 마음이 편하다. 놀람 속 힘든 상황들을 지난 안도감 때문일까. 삶이 힘들고 아슬아슬한 시간들임을 새삼 느낀 뒤라서 그럴까. 까다로운 오전 할머니 그냥 봐 드리자. 평생 아랫사람 없다가 내가 만만해서 까탈 부리는 노인이니 봐주자. 나이에 맞지 않게 미장원 가서 염색하는 돈은 아깝지 않아도, 온수라면 벌벌 무서워하는 것도 이해하자. 평생 습관인 것을 할 말 없지 않은가. 물티슈는 정말 아껴 쓰자. 걸레를 한 번 쓰고 버리다니! 그 할머니 세대의 기준으로 말이 되는가! 아니 썩지 않는 쓰레기니까 내 아이의 기준으로 미래의 기준으로 아끼자! 오후에 커피 한 잔이면 오전 피로는 싹 가실 것이다.

    오후 보호자 할머니는 보자마자 딸애의 상황을 묻는다. 물론 그날 병원 도착해서 바로 전화로 안심이라고 알렸다, 유산기인가 걱정하실 것이 뻔하니까. 그래도 만나자마자 또 걱정을 하니까 또 안심을 시켜드린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순천에는 놀이터가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한다.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이 들며 내려앉은, 전혀 동그랗지 않은 눈이 정말 동그래진다. 자연스럽게 나는 말을 이어간다. 애들이 분양 받아 들어갈 아파트 이야기인데요, 애를 키우려면 놀이터가 좋아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근교에 아주 멋진 놀이터들도 있다고 하네요. 할머니는 그 말에도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금방 웃음기를 흘린다. 지 선샘, 엊그제 그 놀이터 뉴스 때문에 그러는구나. 그러면서 염려 말란다. 그 뉴스의 후속은 아파트 주민들이 사과하고 대표를 경질하고 그런 쪽으로, 바람직한 쪽으로 흘러간다고.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머쓱해지면서도 안심이 된다. 그래도 들킨 김에 계속한다. 말이 너무 끔찍했어요. 그건 너무 심했어요. 이웃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더러 도둑이라뇨! 이웃인데!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한다. 흥분한 탓에 동네 아는 언니네가 코로나에 습격당했다는 이야기도 나와 버린다. 애들이라 해도 밀접접촉자가 되어 격리에 들어가면 놀이터에도 못 나간다고. 그대로 감옥이라고. 아니, 할머니고 외할머니고 음식을 만들어 가도 대문도 못 열고 문 앞에 두고와야 한다고. 이 할머니하고 무슨 상관이길래 이야기를 꺼내는가. 그 집은요, 먼저 딸애가, 제 남편 투석을 시작했는데, 이식 문제에 나서서 같이 적합성 검사받으러 갔다가 서울 유명 병원 병실에서 걸려왔다더라고. 투석 환자도 양성이 나오면 어떡하느냐고. 아, 아이들만 남은 집, 상상도 안 되는 아이들의 무서움을, 시시콜콜, 아니 울먹울먹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더니 혼잣말처럼, 아니 시를 읊는 것처럼 말한다.

    사람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 사람으로 살아보니 그랬다.

    뭐예요? 또 시예요?

    예, 또 시예요. 크게는 이름 없는 노 시인의.

    이름 없는 시인들까지 읽나. 시가 밥 먹여 주나요? 라고 묻고 싶다. 아니, 순간 물었나 보다.

    예, 시가 밥 먹여줘요, 라는 소리가 들린다.

    밥을요?

    그러면서 생각한다. 사람이 눈물로 사는구나. 눈물로 사는 것을 알면, 울면서도 밥을 먹는 것이구나. 시가 밥을 먹여주는구나.

 

    언제나처럼 칼퇴근이다. 문을 나서면 바로 계단이다. 계단으로 들어서는데,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할머니가 힘들게 입구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거운 유리대문은 겨우내 미끄럼 방지라고 써붙여놓고 한쪽 문만 열어두고 있다. 둘 다 열어두면 두 배로 더 미끄러운가? 바깥공기는 아직 차갑다. 퍼덕이는 비둘기 떼도 외면한 놀이터를 돌아보며 저만치 주차되어 있는 차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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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전남여고문학 』 8호, 2022.5. 241~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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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2. 4. 12. 15:51

 침묵과 침묵 사이 

 

[가만보인다. / 산 것들나무들 꽃들 사람들, / 하나같이 햇빛 어딨어빈자리 어딨어목말라 목을 뺄 때 내색 않고 옆에서 태연히 식던 꽃이 누구였더라? / 삶이 뭐냐 따위는 묻지 않고. //
                         
                        황동규 누구였더라?」 중에서

 

 

    침묵이 수다로 바뀌는 일은 가끔은 생각 보다 쉬웠다. 오후 재가요양 ‘어르신’네 집 이야기다. 어떻게 된 게 이 집은 뭔가 모르게 신경이 쓰인다. 햇수로는 3년차이지만 속내를 잘 몰라서다. 그런데 여름 들어 이 보호자 할머니가 수다다.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이게 몇 번째 송이인 줄 아세요? 저 가느다란 첫 줄기에서 어쩜, 상상이나 되세요? 이건 확실히 어디서 날아온 꽃씨라니까요. 저쪽 내가 씨 뿌려놓은 나팔꽃은 푸르스름 보라, 애잔하게 몇 송이 피다 말더니. 요놈들은 완전 다른 진분홍, 분명 개량종이죠? 개량종이라 이리 튼실한가!

    이 줄기를 모두 합치면 몇 미터나 될까요? 베란다 천장까지 2미터, 거기서 창틀 위로 건너간 1미터, 또 뻗어나간 줄기는 3미터는 되죠. 그것이 두 줄이다가 한 줄은 다시 돌아왔으니, 10미터는 훨씬 넘죠. 한 줄기에 스무 송이 넘게 피었다니까요. 아니 또 중간에서 돋아난 줄기도 3미터 넘게 뻗었죠. 오고가고 그러다 만나서 이젠 엉클어져 버렸어요. 칠팔십, 아니 백 송이쯤 되나 봐요, 세상에나.

 

    나는 꽃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흘려들을 밖에. 그렇게 혼잣말이 된다. 혼잣말이 되더라도 이 답답한 할머니의 수다는 침묵보다는 낫다. 아니, 말해도 안 들으니 침묵과 뭐가 다른가. 아니, 수다가 훨 낫다. 아무 말 없이 가만있으면 혹시 내게, 요양보호사에게, 불만이 있어 어둡나 살짝 걱정도 된다. 물론 불만을 말한 적은 없다. 신기하게 한 번도 없다.

    아무튼 한두 번도 아니고 여름을 내내 나팔꽃 하나로 산다는 게 말이 되는가. 꽃이 밥 먹여주나 말이다. 꽃들은 보통 환자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원래 화분 가꾸기를 좋아했었다는 어르신은 베란다로 나가면 닫힌 말문을 열게 하기가 쉬웠다. 어르신도 한번 침묵을 깨면 한참씩은 말을 하신다. 말 대접으로 또는 심부름으로 화분을 사다드리기도 하고, 또 집에서도 한두 개 가져다드리기도 했지만, 그건 나한테는 그냥 인사다.

    어느 날 내가 백장미 화분을 무겁게 사들고 들어갔을 때 보호자는 놀라워했다.

    아니, 무슨 화분이에요? 무겁기도 하겠구만!

    아, 어르신이 사다 달라고 하셨어요.

    예? 화분을 사다 달라고요?

    네, 지난번 산책하다가 동네 화원엘 가자고 하시더니, 거기 백장미가 없다고 낙담하시더라고요.

    백장미를? 백장미를 찾았다고요?

    네, 제일 좋아하시는 꽃이라고. 해서 제가 집 근처 큰 화원에서 사다드릴까 물었더니, 그러라고요. 돈도 주셨어요. 남으면 아무거나 더 사라고요. 이 제라늄도 샀…….

    재밌네. 뜬금없이 백장미라고? 하긴 요즘엔 호·불호가 사뭇 바뀌니까.

    할머니는 다시 혼잣말로 들어갔다, 말을 나누다 말고.

 

    그러고는 여름 내내 어르신은 백장미 화분만 지켜보곤 했다. 겨우 한 두 송이가 피어났을 땐 정말 백장미가 맞다고 좋아하셨다. 어르신에게 다른 화초들은 없었다. 나팔꽃 송이들이 아무리 화려하게 피어나도 없는 꽃이다. 그러니까 단 두 사람이 살면서 나팔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한 사람은 나팔꽃 보는 일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다른 한쪽은 나팔꽃이 보이지도 않는지.

    두 분 신기하세요. 한 분은 나팔꽃만, 한 분은 백장미만 보시고!

    …….

    불리할 때 입을 닫는 것은 이 할머니의 특기다.

    두 분, 말씀이 너무 없으세요. 서로 말씀하시는 것 못 봤네요. 두 분만 있을 때도 그러세요?

     …….

    싸우지도 않으세요?

    그런 거죠, 뭐. 그저 길손들이니까.

    네?

    길가다 만난 사람들, 길손 몰라요?

    부부를 어떻게…….

    길손이라 해서 섭해요? 어떤 인연이더라도 서로에게 손님, 함께 걸어가는 길손 맞지요. 삶이 뭐냐 따위는 묻지 않고. 목말라도 그냥.

    갑자기 삶은 무슨 말씀?

    아, 어떤 시 구절.

    무슨 시씩이나! 머쓱해진 내가 입을 닫았다. 그럴 때가 많다.

    할머니는 에코백을 들고 나간다. 어르신은 아까부터 고개를 비뚠 채 잠들어 있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다. 뭔가 모를 답답함에 움직이지 않아도 덥다.

 

 

    여름이라지만 왜 이리 더울까. 참을 수 없는 더위는 없다고, 그리 알고 살았다. 그에 비해서 참을 수 없는 추위는 확실히 안다. 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겨울 허허벌판 서울까지 올라가서는. 그때 구들장 따뜻한 엄마의 방을 그리며 눈물이라도 한 방울 찔끔거리면 더 추웠다. 빌딩의 숲은 추운 여자아이에게는 전혀 보호막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바람 쌩한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인지 여름이 되면 서러움이 덜했다. 원래 더위를 잘 견디었나 보다. 그런데 이 여름에는 덥다. 다이어트를 못해서 살이 찐 때문일까, 추운 방을 떠나 산 지 오랜 세월이 흘러서일까.

 

    바깥세상이 코로나로 어지러운 데 비하면 개인적으로는 어려움 없이 지냈었다. 그러다가 덜컥 큰 걱정이 생겼다. 지는 알아서 갈 테니께 아프지만 말게 해주셔유, 라고 기도하신다고, 딸도 수녀님인데 내 기도 안들어주시겄어, 라며 여유를 부리시던 어머니! 다른 어머니들처럼 고향에 홀로 살고 계셨다. 당숙의 오랜 친구가 70대인데도 시골에서 개인병원을 열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그 병원에 들락날락하시며 이런저런 영양제도 맞으시면서 큰 불평이 없으셨던 터였다. 4월에 시작된 백신접종도 일 없이 마치셨는데 그런 일이 터졌다니. 어버이날 즈음에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소화가 잘 안되아야, 하시는 말씀 따라서 위내시경 검사를 했지만 별일 없었다. 연세에 비해서는 깨끗하신 편입니다! - 네, 감사합니다. 다음 날엔 버섯전골 집에도 갔었다. 부드러운 팽이를 골라가며 드셨다.

    그러다가, 막상 그러다가 정말로 큰일이 터졌다. 식사를 점점 못하시고 몸은 이상해진다고, 무엇보다 배가 많이 아프시다고. 암튼 가까이 사는 큰언니가 서둘렀고, 오빠랑 대학병원으로 모셔갔단다. 황달기도 있고, 벌써 복수가 생기기 시작하셨다니. 혹시라도 5월에 뵐 때도 황달기? 기억을 해보려 해도 그건 아니었다. 피부가 가렵다고도, 열감도 말씀이 없으셨다. 무엇보다 위내시경에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 다들 안심을 한 터였다. 혼자 사는 노인의 전형적인 스토리다. 어제 괜찮으셨으니 오늘도 괜찮으시리라…… 자녀들이란, 나부터도 전화 목소리로 괜찮으시면 괜찮으시다고 생각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수년 동안 요양병원에 누워계시는 시아버님이 걱정 일 순위였다. 관으로 미음을 드시는데도 몇 년을 버티시는데, 받아놓은 날이려니 했지만 그렇게 지내고 계시는 터다. 시어머님도 함께 요양병원에 계신다. 경증이라서 시아버님 간병도 되고 동무도 되고 그러신다. 거기에 비하면 엄마는 마실도 나다니고, 성당과 병원에 혼자 잘 다니고 계셨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대학병원에서는 깜짝이나 놀랄 결과가 나왔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복부초음파 검사며 씨티며 엠알아이를 하면 뭣하나. 담도조영술이며 종양표지자 검사도 마찬가지. 처음에 씨티만 찍었어도 침윤 정도를 알았을 것을. 담도암이라니! 담도! 담도! 간에서 만들어진 담즙이 담도를 통해서 십이지장까지 가는데, 어쩌자고 담낭을 지나서 십이지장으로 가는 담도에 암세포가 생긴 것이냐고! 후회막급이지만, 후회란 때 늦어서 후회다. 간호보조사가 가진 의학상식이 별 것일까만, 일단은 의료계통 자격을 가진 자식으로서 너무 부끄러웠다. 담석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담도염을 앓으신 적도 없는데. 평생을 바다가 없는 곳에서 사셨으니 간디스토마 그런 병에 걸리신 적도 없는데.

    그렇게 어머니는 담도암 선고를 받으셨고, 반년은 버티실 것이라는 의사의 예상과 달리 두어 달을 겨우 넘기고 가셨다. 첨에 큰언니가 언니네로 모셔갔는데, 우리 모두가 아무래도 미안해서 요양병원으로 모실 채비를 하려는 찰나였다. 나 거그는 안 갈텨! 하시던 말씀 그대로 요양병원을 알아보려던 중에 일이 터졌다. 그렇게 마지막에 가까울 때까지 자녀들이 몰랐다니. 선고 이후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었다. 닥친 일은 닥친 일이고,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이었고, 이제 와 철 좀 나니까 어머니가 가셨다.

 

    피를 나누는 것이 무엇일까. 형제자매들이 앉아서 우두커니 장례식장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물게라도 화분들도 도착하고, 또 나가서 조문객을 받고, 옆에서들 감사도 하고……. 놀랍게도 육개장에 밥들도 말아먹었다.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맞다. 슬퍼도 배는 고프다. 나도 밥을 먹었다. 먹고 나서 울었다. 울고 나서도 먹었다.

    엄마아, 잉잉.

    우리 어무이는 우덜헌티 잔소리 별로 안하셨어!

    그렸나.

    맞어, 잉잉.

    자 좀 달개라.

    아서 엥간히 울어. 울어싸면 못 올라가신댜!

    근디, 잉잉, 천당 가시겄져?

    암만, 수녀님 어무니신데여.

 

    코로나로 옴짝달싹 못하는 통이라지만, 드물게라도 문상객을 맞이했다. 입관하기 전에는 아직 살아계시는 것으로 치고 절을 한 번만 할 때까진 나았다. 염을 하는 중간에 사촌오빠가 등을 돌리고 서 있더니, 누군가 오빠를 아예 밖으로 내보냈다. 나중에 들으니 무슨 회도살이라나, 어머니는 물론 우리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들인데도, 집안 어른들이 그리 시키시는 것 같았다.

    다음날 발인제를 마치고는 잠깐 집에 들러서 간단한 제사를 드리고 나니 정말 끝이었다. 어머니가 산으로 행했다. 사토제니 위령제니 일일이 설명을 해주는 어른이 계셨지만 뭐가 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막상 갓 파헤쳐진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앞에서 딸들은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울음을 땅 속으로 가시기 전에 실컷 들으시라는 것인지. 어머니는 듣지도 못하시지만, 고만 울어라 달래시지도 못한다. 영원한 침묵에 들어가신 것이다. 삶의 끝은 침묵이었다.

    세거지라서 일가친척들이 대부분인지라 지관도 계시고 해서, 사실 우리들은 하릴없이 울다 쉬다가를 반복하기만 했다. 관장을 할지 탈관을 할지는 벌써 결정했다고 했다. 흠결이라고는 없으신 어머니지만, 아버지 때도 관장을 했다고 그대로 결정했단다. 우리는 괜스레 위안이 되었다. 집을 지닌 채 들어가시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서로 슬쩍 나누었다. 그래도 막상 흙을 올리는 때는 정말 무서웠다. 취토 중간 중간에 왜 노래를 부르는지, 왜 빙빙 도는지 의아했지만 가만있을밖에.

    오호 ~ 에헤야, 산이 높아야 물도 깊지 ~

    그러다가 붉은 천이 내려갈 때는 정말 떨렸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돌아서 내려오는 길은 무엇인가가 뻥 뚫어져버린 느낌이었다. 집에 가도 어머니가 안 계신다고?

 

    문경댁 무르팍 말고는 원체 암말 읎더만 속절없이 갔슈!

    그 구녁으로 간겨? 참말, 독새나 만나지 말어.

    인저 가조로니 누어 잘랑가 물러.

    엥간히 집 배까티 좋아혔으니 인저 원 없겄슈.

    우덜 몸뎅이도 얼매 안 남았제만…….

    뒷산이라서 함께 올라왔던 동네 분들이 한마디씩 탄식을 하셨다. 우리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삼우까지 지낸 다음날에는 다들 흩어졌다. 집에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엄청 허전했다. 어머니랑 함께 살던 집이 아닌데도 집이 쓸쓸했다. 고향집에 간다…… 는 생각에 어머니가 안 계실 것이라는 상상이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주 5일 근무는 요일만 세다 보면 금세 지난다. 아직도 숨 막히게 덥다. 세상은 어머니를 잃은 다섯 형제들과 무관하게 여전하다. 여름이라서 덥고, 더워도 날마다 뉴스다. 어디선가는 무슨 일인가 터진다. 무더위 못지않게 숨 막히는 뉴스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이 열리자 세상의 눈들은 그리로 향했다. 양궁 하나만 해도 사람들을 들뜨게 하기 족했다. 이 고장에서 양궁 천재가 나왔으니 더했다. 한참 더울 때 선수들을 향한 애정으로 더욱 달아오른 시간들, 그 시간도 곧 지나갔다.

    그 사이 미얀마 쿠데타가 군부의 과도정부 수립으로 막을 내렸다고, 그 뉴스는 오후 보호자의 입으로 들었다. 거기도 전**이 정권을 잡았네요. 군인들이 그렇지 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최근엔 보통 그랬다.

    거실에 어르신과 둘만 남는다. 어르신은 늘 그렇듯 말이 없다. 못 들어서 말을 안 하시는 것인지, 당연히 대답도 없다. 지난겨울 인지검사 때도 – 등급 조정을 위한 의무적인 검사다 - 결과 수치는 더 낮아졌다. 가끔의 환시와 환각을 제외하면 실제로 심각한 증상들은 없어 보이는데. 건망증도 나이 따라서 다들 그런 정도이고. 하기야 하루 세 시간을 보는 내가 다 알 수는 없겠지.

    날마다 텔레비전은 작은 소리로 돌아가고 있다. 어르신이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도, 살짝 잠이 들 때도 그대로 켜져 있다. 올림픽이 끝난 뒤로는 코로나 뉴스가 다시 화면을 독차지한다. 백신 접종률이 올라가서 1차는 40%를 넘었고 2차까지도 20% 가까이 되는데도, 아침마다 불어나는 확진자는 계속 4자리 숫자이고, 누계가 20만 명이라니 놀랄밖에. 거리두기는 수도권은 4단계, 여기도 3단계가 계속된다고. 아니, 이제 이런 발표는 뉴스가 아니고 일상인가 싶다.

 

    어느 날, 재벌 1위 삼성 소유자가 광복절에 사면될 것이라는 뉴스가 떴다. 또 찬반이 엇갈릴 것이고, 양쪽 다 옳은 말이겠지.

    기업이 돌아가야죠, 뭐?

    내가 다른 할 말도 없고 해서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할머니에게 한 마디 했다.

    들은 체 만 체다. 듣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가 뜬금없었나? 그래도 했던 말인데 뭐라고 대꾸하는지 들어보고 싶어서 재차 말했다.

    다들 경제가 안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삼성, 그래서 내 주려나 봐요!

    …….

    광복절에는 어차피 사면도 있으니까요.

    아, 지 선샘, 나 정치 경제 어쩌고 하면 정말 잘 모르는데. 누구라도 감옥 나오면 좋겠지만, 누구라도 가벼운 처벌을 받으면 좋겠지만, 거 형평성도 문제요.

    형평성이요?

    무슨 형평성 말일까. 나는 왜 이리 생각이 왔다 갔다 할까. 말을 걸어놓고는 이을 말이 없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계속했다.

    그냥, 이쪽저쪽 할 것 없이 누구에게라도 좋은 일들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 그거 저 절대 찬성이에요. 짧은 인생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죠.

    어라? 인생 어쩌고 말을 해놓고는 참 쑥스러웠다. 난 이분들에 비하면 애들 아닌가. 크게 거슬리진 않았는지, 할머니가 대꾸를 했다.

    맞아요, 남에게 도움은 되지 못해도 해는 되지 말자, 그런 정도. 그게 좋은 거죠. 하지만 뉴스를 보다 보면요,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문제지요. 남을 해치는 바이러스들, 해치면서도 그걸 느끼지도 못하는 중증 바이러스들…….

    아차, 괜히 말을 잘못 시작했나? 이 할머니가 또 이상한 수다를 시작하면 어쩌나 싶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또 사람이 아니라 책처럼 어려운 말들을 시작했다.

    사는 차이도 너무 나서 그 이질감은 더욱 벌어질 테고.

    이질감이요?

    설이라고 추석이라고 1,000만원을 주는 할아버지가 있다잖아요. 유치원도 안 간 아이가 주택 스무 채를 가진 세상이라니. 뼛속까지 다르게 태어나서 그렇게 다르게 자라니까 함께 살기가 점점 더 어려운 세상이 될까 무서워요.

    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전체가 훨 잘 사는데 뭐가 문제인가. 우리나라 경제가 50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세계가 대충 60배 성장 할 때 우리나라는 400배나 성장했다고, 남편이 으쓱 말해준 적이 있다. 나도 할 말이 있다. 해야겠다 싶었다.

    저 있잖아요, 우리나라 전체 성장률이 높으면 좋은 것 아녜요? 50년 동안에요, 세계가 60배 성장할 동안에 우리나란 400배 넘게 성장했다고. 작년엔가 그랬다던데요. 미국은 30배, 일본은 100배인가 대충.

     …….

    뭐야, 왜 또 대답이 없어? 이런 성장 발전이 대단한 것 아냐? 전체가 잘 살게 되어서 뭐가 나쁜데? 그러니 엊그젠가 아이돌 가수가 130억 아파트를 샀다는 뉴스도 있었지. 그 청담동 아파트니 펜트하우스니 하는 집들은 집값이 상상도 못할 정도다. 150평 복층 펜트하우스는 300억, 그러니까 평당 2억이라 했다. 내 소유 건물 따위는 건물도 아니다. 이 할머니는 무감각인가?

    우리나라 수준 엄청나다구요. 저, 어떤 아이돌 가수가 최근에 산 아파트가 130억이라고, 혹시 들으셨어요?

    아이돌도 모르고 아파트도 모르요.

    아**라고, 눈 예쁜 여자애, 서른 안 됐을걸요. 십대부터 엄청 잘 나가는 가수죠. 거기 청담동에는 평당 2억 가는 펜트하우스도 있대요, 150평이라니까 300억.

    무슨? 달나라 이야기에요?

    아니, 우리나라요, 서울요.

    평당 2억이라니, 그게 가능이나 하나?

    그게요, 30가구 이상만 안 지으면 분양가 상한제 그런 것 안 걸리거든요. 그러니까 29가구만 지으면 집값을 마음대로.

    상한선 없이 마음대로?

    네, 상한선 없이 마음대로!

    별나라네. 별난 나라네.

    맞아요. 차이가 넘 벌어지져? 세상 요지경이에요. 도쿄에는 평당 3억이 훨씬 넘는 600억짜리도 있대요, 홍콩은 6억이 넘는 아파트도 있고, 평당.

    지 선샘은 역시 건물주답다. 건물들을 쫙 꿰고 있네요.

    세계 최고급 아파트는 2,200억이라고 하는 뉴스도 봤어요. 2,200만원이 아니라 2,200억.

    고만, 고만! 어디에나 최고는 있겠지요. 모든 노력과 운과, 암튼 그런 성공들에 박수를 쳐 줄 일인지.

    당연하죠. 성공이 미덕이라고 하잖아요.

    미덕…….

    미덕이 그런 것은 아니죠! 라고 말할 분위기였다. 그러나 실제로 내뱉은 말은 더 썰렁했다.

    헌데, 집은 그냥 집이죠. 작은 집에서 편안한 잠을 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크고 넓은 집에서 잠 못 드는 사람도 있겠지요. 둘 다 죽을 것이고.

    죽는 이야기는 왜요.

 

    나는 토라지고 말았다. 이 할머니 밉다. 하필 여기에서 죽는 이야기라니.

    나는 근무 시간인데 아무 것도 않고 가만 앉아있기 뭣해서, 뭔가, 정말 그냥 한 말이었다. 아무리 아이돌이라 해도 애들이 100억도 넘는 아파트에 산다고 하는 것이 뉴스 아니면 뭐가 뉴스인가. 터무니없이 잘 사는 데에 눈이 뒤집혀서 한 말도 아니고.

    나도 살만큼은 산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남편은 공무원이고 퇴직하면 연금을 받을 것이고, 나는 국민연금 제대로 들어있고 내 건물 있으니 기본은 되고 남을 터. 농가주택은 어떤가. 일단 기분 좋은 뜰이고 밭이다.

    어머나, 애호박이 저절로 벌어져 버렸네!

    아무리, 설마.

    설마라고 말하며 다가오던 남편이 놀란다.

    정말이네. 넘 더워서 그런가. 이런 건 첨 보는데? 애호박이 쩍 벌어지다니. 온난화 문제인가…….

    저 그런데, 올해도 까만 나비 날아올까?

    남편이 지구 어쩌고 할까 봐서 나는 얼른 말을 바꾼다. 머리 아픈 건 정말 싫다.

    아녀. 더 있다가 저쪽 방아꽃이 필 때야 날아올 걸. 왜 하필…….

    나는 냉큼 넝쿨콩 쪽으로 향한다. 도망치는 것이다. 남편은 연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방아꽃은 맥문동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게 계속할지도 모른다. 말도 잘 하지만, 실은 훤칠하고 잘 생겨서 예능에도 어울릴 것이다.

아무튼 비타민 넘친다는 풋고추는 여름 내내, 상치, 깻잎, 오이 뿐인가. 양파, 감자, 고구마, 깨, 김장 배추……        남편은 귀한 초석잠이나 마도 심는다. 부지런한 사람이랑 함께 살면 좋기도 나쁘기도 하지만, 일단 마트 갈 일도 줄이는 것이 남편의 살림이다. 물론 김장까지는 좀 심하다고 느끼지만, 어쩌랴. 보람도 있다. 여기저기 퍼 나르면 다들 고마워한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그렇다. 시댁에서 반찬 싸주면 가다가 버린다는 젊은 며느리들 이야기는 말로는 들어보았지만, 내 주변에는 없는 것 같다. 내 땅에서 나는 것들, 이 모두가 평생 노력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좋다. 그래, 조금만 더 열심히 인내하고 모으자. 내 이름은 지은이, 요양보호사!

    예쁜 배우가 요양보호사 공익광고에도 나왔다. 복지센터 이름이 적힌 앞치마를 입고 근무하는 우리들 실정을 모르는지, 빨간 투피스에 긴 긴 머리를 휘날리는 것이 우습기는 했다. 어쨌거나 ‘아줌마 아니에요. 요양보호사예요.’ 라는 문구로 사기를 북돋아준다. 좋은 나라다. 요양보호사에게도 좋은 나라.

 

 

    요양보호사가 실제로 병원과 싸워서 이기는 나라다, 우리나라가. 그러니까 큰 병원들의 꼼수를 요양보호사들이 이겨낸 일이 있었다. 이른 봄이었다. 요양보호사 4명이 병원 상대로 임금체불 소송에서 이겼다는 뉴스에 센터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문제된 요양병원은 24시간 근무하고 이틀 쉬는 근무방식이라 했다. 깨어서 24시간을? 말도 안 되는 조건이지만 그런 3교대제도 실은 많다. 그 24시간 근무 중에 명색 야간 휴게시간이 5시간 있었다 했다. 하지만 실상으로는 비상상황에 대응하려고 병실 근처에 있었다고 하니까, 그게 무슨 휴게시간이냐고! 야간 휴게시간이란 임금에서 5시간씩을 제하는 꼼수였다고 판결난 것이란다.

    휴우, 간호조무사 3교대 시절 생각이 새삼스럽다. 일일 8시간 교대도 힘든데, 24시간 근무하고 이틀 쉬는 근무방식은 살인적 아닐까. 어떻게 24시간을 버틴단 말인가. 나는 확실히 그건 못한다. 더구나 요양병원에서 요양보호사는 계급으로 말하면, 계층인가, 아무튼 바닥이다. 나는 간호보조원 시절부터 사다리가 너무 뚜렷하게 심장에 박혀서인지, 무슨 위치를 설명하려면 사다리가 먼저 떠오른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는 당연히 맨 아랫자리다. 더구나 ‘선생님’ 아닌 ‘여사님’이라 불린다. 특히 간호사들이 꼭 ‘여사니~임’ 하고 부른다. 그렇다고 내가 뭐 ‘지 여사님’ 보다 ‘지 선생님’ 소리를 듣고자 요양병원 근무를 피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처럼 집으로 서비스 나가는 재가방문요양의 경우는 내 생각에는 자유가 있다. 수급자 측에서 우리를 ‘자를’ 수도 있지만, 우리도 불편한 수급자의 경우 서비스를 거절할 수 있다. 나도 지난번 오전 고엽제 어르신을 곧 그만두겠다고 센터에다 말했고, 그만 두었다.

    물론 수입 면에서는 약하다. 그러니까 요양병원 근무와 재가방문요양 또는 주간보호센터 근무 등을 우리가 알아서 선택하는 것이다. 알아서 하는 것은 작은 일이라도 기분이 좋다. 나는 간호조무사 평생 직업을 마치고 일을 쉬기로 결정했을 때도, 아니, 얼마큼 쉰 뒤에 다시 이 일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도, 순전한 자유 결정이었다. 그래서 맘 편하다. 그리고 간호조무사 때처럼 전문학원에서가 아니라, 요양보호사 자격증은 야간이었지만 대학에서 딴 탓에 스스로 뿌듯하기까지 하다. 사회복지과에서 이론강의, 실습연습, 현장실습 각 40시간의 정식 교육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크다. 문제는 그래보았자 근년 들어 간단히 자격증을 딴 사람이건 누구건 임금이나 대우에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또 이상한 것은 5년 차인 나와 신입의 시급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전히 알바 개념인 것이다.

    아무튼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한 요양보호사들의 결기가 대단했다. 4명이 한 뜻으로 뭉쳐서 가능했겠지. 나 같으면 뭉치자 해도 피했을 것이다. 나는 불평보다는 침묵으로 삭히는 쪽,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식이다. 제도나 현상을 굳이 고치려 힘 빼지 않는다. 아니면 말고, 그냥 내가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일을 찾는다.

    그런데 어디에나 쉽게 적응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눈꼴사나운 일도 보게 된다. 누구나 다 꼼수를 쓰기 때문이다. 편의점 등 알바들에게도 주인들의 꼼수가 애를 먹인다. 내 첫 알바의 경험은 - 참 옛날 일이다 - 기억 속에서라도 되돌리기 싫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그때는 확실히 옛날이었다. 친척집이라는 어정쩡한 관계는 정확하게 시간 수당을 따질 처지도 안 되었고, 그냥 주는 대로 용돈만 받은 셈이었다. 그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두 번째 알바부터 혹은 그 다음 어떤 직장에 들어갈 때도 일단 조건부터 분명히 따지고 확인하고 그러기 전에는 일을 시작을 안했다. 그런데 몇 십 년을 지나도 꼼수들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간호보조사 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일을 쉬었을 때, 그러니까 전업주부가 되려는 찰나, 그때도 한 두주 쉬고는 왠지 좀이 쑤셔서 일단 간단한 알바라도 해보자 했었다. 그때 나는 동네 편의점에서 12시부터 4시라는 점심시간대를 부탁받고, 잠시니까 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4시에 교대하는 여자에게 들은 이야기로, 자기는 4시부터 11시까지, 그 다음 대학생이 11시부터 새벽 6시까지, 그리고 이른 아침 세 시간을 주인이 직접 챙기고 다시 9시부터 4시까지 다른 여자가 7시간 그렇게 돌아갔었더란다. 그러다가 웬일인지 주인이 오전시간을 더 하고 오후 네 시간만 남겨 놓은 거라고.

    아니, 세 사람 쓰면서 각 8시간이 아니고 7시간씩? 복잡하네요.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저녁시간 여자는 내게 알바 한다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시선을 던졌다. 시급 계산에서 복잡해지는 풀타임 8시간은 절대로 주지 않는 것을 모르냐고! 모든 편의점이며 그 비슷한 알바들이 다 그렇다는 것. 그게 주인들의 꼼수라고. 모르면 바보고.

    옛날에는 꼼수를 쓴다고 하면 일단 쩨쩨하게 군다는 형편없는 뜻이었는데, 이제는 애교 정도인가 보다. 살려면 거짓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말에 비해서, 살려면 꼼수도 알아야지, 라고 하면 훨씬 낫지 않은가. 마치 사회생활에서 줄다리기나 숨바꼭질 같은 것, 죄를 짓는 건 아니고도 잘하면 이득을 볼 수 있는 행동들을 꼼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묘수 같은 셈이다. 그런데 대형 병원들조차? 내가 편의점 주인이 된다면? 모르겠다. 어느 만큼의 꼼수부터 죄가 되는지 세상엔 모르는 일 천지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열심히 잘 지낸다. 어머니는 청주에 계시다가 하늘나라에 계신다. 아니 지금도 청주에 계신다. 톡 프사에 올려놓고 영상 통화하듯 들여다본다. 소리만 없다. 침묵의 영상통화.

우리 은이는 잘 웃어서 이뻐. 어여, 웃어봐. 이빨도 가조로니 얼마나 이뻐. 노상 그러고 살어. - 주문처럼 어머니의 말이 들린다. 침묵의 말이다.

 

    요즘에는 오전 일도 다시 시작했다. ‘고엽제 어르신’ 집을 그만 둔 한참 뒤부터다. 혼자 계시는 이 까칠한 ‘할머니 어르신’은 까칠한 성격 좀 참아주면 된다. 이 할머니도 그러고 보니 암환자였다. 항암치료 중이었는데, 암 전문병원에 가는 날은 딸이 모셔가므로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저절로 쉰다. 받아온 주사약을 가지고 중간급 병원에 맞으러 갈 때는 내가 모시고 가는데, 택시비 때문에는 매번 불편하다. 택시 값이 들쭉날쭉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번 기사에게 불평을 늘어놓으신다. 그러면 젊은 내가 무안해지는 것이다. 이럴 땐 수급자를 차에 태워 다니지 않는 내 원칙이 조금 흔들린다. 하지만 아니지,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같은 센터 요양보호사들의 경우 수급자를 태우고 다니다가 접촉사고도 내고 그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 수리비나 합의금은 누가 주어야 맞는가. 그런 복잡한 일을 왜 하는지 모를 일이다. 매번 기름 값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런데 또 이해 못할 일이 있다. 이 오전 할머니는 따뜻한 물도 못 쓰게 할 만큼 절약형인데, 미장원에 가서 염색도 하고 오고, 은근히 이런저런 물건들도 사들인다. 나이로 보면 오전 ‘수급자 할머니’가 오후 ‘보호자 할머니’보다 좀 많아 보인다. 아니, 상당히. 그런데 오후 보호자는 거의 아무 것도 사지 않는다. 나도 웬만하면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지 않는 편인데, 나보다도 더한 것 같다. 근처 시장이나 슈퍼 갈 때도 입던 그대로 겉에만 아무 거나 걸치고 나간다. 마스크를 쓰기 때문이겠지만 화장도 없다. 하루에 두 집을 다니니까 나도 모르게 비교가 된다.

 

    오후 ‘할아버지 어르신’은 지금 독서에 열중해 있다. 독서는 그 자체로서는 뇌 활동에 좋지만, 더더욱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문제다. 거실이 너무 조용해서인지 보호자가 나온다.

    오늘은 어르신이 책이 재미있으신가 봐요.

    그래도 뭔가 말을 하도록 해야…….

    입 닫으시면 어려워요.

    알아요, 내가 더 잘 알죠. 우린 서로 하는 말이 별로 없어요. 오래 함께 살다 보니까 할 말을 다 해버렸나, 뭐 그런 것. 우물을 다 퍼내서 말라버린……. 그보다, 말 해도 모르는 것은 모르고, 안 해도 아는 것은 알고.

    뭐예요? 말을 해야 알죠. 나팔꽃 이야기를 나한테만 하시니까, 어르신은 완전 모르시잖아요.

    알고도 말 안할 수도 있어요. 말을 꼭 해야 하나요?

    말도 그리 안 하시면, 하루 종일 뭘 하세요, 그럼? 제가 와 있는 시간에나 좀 나가시고 그러세요. 산책이라도 다녀오시고.

    맨날 시장 가잖아요, 병원도 다니고.

    아니, 먹거리 시장 말고요. 산책하신다 하고 시장 줄줄이 상점들 구경이라도.

    살 일이 있어야 말이죠. 지금 있는 것들, 글쎄, 못 다 쓰고 죽을 걸요.

    에이, 또 죽는다는 소리!

    어느 순간 돌아보니까 버릴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오래 살았고 많이 샀다 싶네요. 옷이며 뭐며, 이게 다 쓰레기인데.

    옷은 따로 버리잖아요, 관급봉투 안 쓰고. 무슨 걱정이세요!

    봉툿값 그 말이 아니라. 길어지는데.

    길어도 괜찮아요, 듣고 싶어요. 다들 새 옷을 좀 사잖아요, 요즘은 비싸지도 않고.

    그러게요.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이 연간 68벌을 산다는 통계도 있던걸요. 그 중 10퍼센트 이상을 입어 보지도 않고 버린다고.

    설마요, 저는 6벌도 안 사는데…….

    알지요, 그래서 내가 ‘이쁜 지 선샘’이라 그러죠. 들어보세요, 재미있는 이야기.

    뭘요?

    동생네 딸 말인데요, 웃지 마세요! 그러니까 조카딸이 엄마랑 쇼핑을 갔는데, 제 엄마가 자잘한 것들 재미로 사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한번은, 엄마, 또 예쁜 쓰레기 사려고? 그랬다네요. 살 때는 가볍게 사니까 과잉소비라고 생각 안하죠. 하지만 별로 쓰지도 않고 또 한철 지나면 버리고, 그러니까 예쁜 물건이기는 해도 결국은 쓰레기를 사는 셈이라는 거죠.

    예쁜 쓰레기?

    맞아요. 우리가 재활용수거함에 옷들을 버리면 다 누가 재사용하는 줄 알지요? 그런데 5퍼센트 겨우 쓰고, 나머지는 수출이라네요. 인도나 캄보디아 등 그런 데로, 아프리카로도. 가나라던가, 거기 어디 이야기를 봤는데요. 인구 3,000만에 일주일에 1,500만 벌이 들어오면 절반은 쓰레기고, 처리만 곤란하다고. 70억 명 사람들이 지구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옷을, 예쁜 쓰레기를 만들어 내게요?

    상상이…….

    상상 안 갈 걸요. 일 년이면 만드는 옷이 1,000억 벌이래요. 시간 당 1,000만 벌을 생산하고 그 중 300만 벌은 버려진다네요. 연 330억 벌을 버린다고요.

    설마요.

    나 이 숫자 잘 외웠는지, 뭐 틀릴 수도 있겠지만, 암튼 엄청난 숫자의 옷들이 생산되고 버려지고, 지구는 그 쓰레기를 감당할 수가 없고…….

 

    핸폰이 울린다. 넘 다행이다. 머리 복잡해지는 이야기에서 구해준다. 침묵이 답답해서 말을 시키면 이 할머니는 엉뚱하게 해골 아픈 이야기를 하곤 한다. 침묵이 나으려나. 모르겠다.

    퇴근 후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출발했나 채근하는 친구가 꼭 있다. 사회복지학과 시절 친구들은 젊은 시절 다 보내고 야간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이라 나이도 서로 다르지만, 몇몇은 계속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 모두들 열심히 사는 일에서라면 우승컵을 받을만한 사람들이다. 수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친한, 사랑하는 남편과가 아니라, 이 친구들하고 수다를 떨면 왜 그리 즐거울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말들, 말들.

    어서 가 보세요!

    네, 뭐! 지금 가면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아직…….

    그러게요, 조금 일찍 나갈 수가 없다면서요.

    네, 태그 찍는 것, 칼이에요.

    앞치마를 벗어 두고 핸드폰을 챙긴다. 마지막 3분 4분이 엄청 길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몸조심하세요! - 이런 인사말은 노인들에게 환자들에게 알맞은 말 같다. 나로서는 습관이다. 한번은 이 할머니가, 예, 밤새 몸조심할게요! 라고 대답해서 조금 이상했다. 하루 사이 몸조심 할 일은 아닌가? 얼핏 놀리는 것 같았지만 알게 뭐냐. 몸조심보다 좋은 인사말이 어디 있을까. 오늘도 우렁차게, 두 번은 어떠랴.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예, 내일 봐요.

    판에 박은 인사말을 들으며 계단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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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침묵 사이」, 『국제PEN광주』 19호 2021.12. 168~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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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2. 2. 18. 22:43

먼지 

 

     먼지라니, 사람을. 사람이 다 먼지인가…….

읽던 책을 덮고 일어나면서 보호자가 뭐라고 중얼거린다. 오후 재가요양돌봄 ‘어르신’의 보호자 말이다. 이 시간, 보통 때 같으면 당근 부엌에서 밥상을 차리고 있었을 텐데 웬일일까. 책을 읽다가 밥시간을 놓치다니, 드문 일이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도 더 쉬고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다. 밥은 준비 되어 있었고, 차리는 일만 남아서 조금 서둘러 상을 차린다. 내가 오전 집에서 오후 집으로 바로 이동하는데, 점심은 오후 집에서 어르신을 돌보면서 함께 먹는다. 점심 후에는 보호자랑 둘이서 커피를 마신다. 보호자는 할아버지랑 이야기하고 놀아달라고 한다. 너무 많이 자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니 깨워보란다. 할아버지는, 어르신은, 점심을 드시자마자 그새 또 잠 속에 빠진 자세다. 이 어르신은 요즘 들어서 밥숟가락을 빼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잠에 빠진다. 내가 청소기를 돌려도, 청소기 소리가 시끄러워도 개의치 않는다. 보호자는 별로 어질러 놓은 것도 없으니 청소는 하루 걸러서 하란다. 실제로 청소기 먼지 통에 올라오는 것도 별로 없다. 그렇다 해도 내게도 3시간 일의 리듬은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그보다 궁금한 말이 입에서 맴돈다. 사람을 먼지라 어쩌고 중얼거린 것, 무슨 말이었을까. 물론 말은 추석 연휴부터 꺼낸다.

추석 연휴 힘드셨지요? 근데 아까 먼지 어쩌고 하신 말씀은 뭐예요?

힘들 것까지야. 지 선샘은 잘 쉬었어요?

     먼지 이야기는 잊었나, 그냥 흘려버린다. 나도 그냥 딸네가 왔다 간 이야기, 사위가 오니 확실히 음식 신경이 쓰이더라는 이야기로 대꾸할밖에. 보성 시댁에서 동서들이랑 모였던 이야기도 덧붙인다. 내가 모이자고, 딱 네 집만, 여덟 명 거리두기 숫자는 지켜서 모였었다고. 말을 하다 보니 눈물이 난다. 명절이면 꼭 찾았던 친정집이 하늘이라는 사실, 아니면 땅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판다.

 

     이 보호자는 나에게 잘 대해주는 편이다. 꼬박 ‘지 선샘’이라 부르고, 딱히 요구사항도 없다. 나더러 곧잘 ‘이쁜 사람’이라고도 한다. 이번에도 맏이도 아니라면서 식구들 불러 밥 먹이고 그랬다고 칭찬이다. 이 보호자 할머니도 추석 연휴에 힘들었을 것이다. 명절이면 인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사실 환자 어르신은 연휴 지나고 더 밝아진 느낌이다. 아까도 꽂히는 음식이 있어 잘 드셨다. 그때그때 어떤 특정한 반찬에 집중하시는데, 그걸 예측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어르신이 연휴기간에 컨디션은 괜찮았고, 산소에도 다녀왔다고 한다. 놀랍다. 물론 함께 부축할 요량으로 사람들 여럿이 모시고 갔겠지만, 산소에 가는 것은 큰 외출인데. 이 할머니야 사람들 밥 챙겨주느라고 꼼짝도 못했을 것이다. 밥이 중한 집이다.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할머니가 베란다로 나간다. 그동안 물주는 걸 잊고 있었다고 놀라면서. 나도 할 일이 없어서 따라 나간다.

 

     나팔꽃 다 치우셨네요, 어머나!

     예, 영원한 것이 있나요.

     뭐야, 갑자기 철학은! 하긴 이 할머니한테는 나팔꽃이 구원 같았다. 그러기도 한다. 여름 내내 그것을 보았다. 나팔꽃은 저절로 자라고 꽃을 피우는데, 열, 스물, 꽃송이를 세는 할머니는 당황스레 좋아했다. 이제는 허전하리만치 깨끗하게 비워진 공간이 쓸쓸하다 못해 이상하다. 저쪽 넝쿨장미들은 잎들이 여전하다. 할 말이 없어서 장미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어르신이 백장미를 젤 좋아하신 게 아니었다고요? 근데 왜 그걸 사오라 하셨을까요?

     예, 느닷없어서 놀랐다 그랬잖아요. 평생 저 붉은 넝쿨장미를 끼고 살더니만, 어쩌다가 백장미 생각을 했을지. 저것들이 죽다 살다 했지만 수십 년 전에 본가 앞마당에서 가져온 것이거든요. 서너 번 이사할 때마다 들고 다녔고.

     애지중지하시던 넝쿨장미를 잊으셨다고요? 수십 년 된 걸요?

     예. 우리 집에 있는 것들은 거의 다 그러죠. 낡을 대로 낡은, 늙을 대로 늙은.

     아, 맞다! 지난해 꽃 피었던 선인장도!

     에이, 놀리지 마요! 그건 내 엉뚱한 착각이었구만. 말도 꺼내지 마요!

 

 

     말도 꺼내지 말라는 그 이야기는 싱겁기는 하다. 작년, 가을이 깊은 때였다. 점심 후 밥상을 널어놓은 채로 이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거실로 들여놓은 화분들이 있는 쪽이었다. 꽃기린, 문주란, 산세베리아 그리고 선인장 종류들을 먼저 들여놓은 참이었다. 거기 뭉툭한 선인장 하나를 가리키면서 더듬거렸다. 키가 다 해도 10~15센티쯤 되는 작은 선인장인데, 침들만 무성하지 볼품도 없는 모양새였다.

     여기 꽃 좀 보세요! 이 작은 미세한 꽃, 꽃잎, 보이죠?

     꽃잎이라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돋보기를 꺼내서 쓰고 들여다보았다. 이런 게 무슨 꽃이라고, 꽃인들 이런 보이지도 않는 작은 꽃이 뭐라고! 그런데 꽃이었다.

     어, 어라? 정말 꽃이네요. 작은 꽃잎이 넷이네. 어떻게 딱 한 송이가 이런 가시들 사이에서 핀 걸까요? 근데 이게 왜요?

     그러니까 꽃 맞는 거죠? 꽃이죠? 이게 그러니까 40년 된 선인장이라서.

     아무리, 설마요.

     맞아요. 울 아부지.

      …….

     아부지가, 우리가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그때 1980년 가을에 가만히 들고 오셨어요. 이게 잘 안 큰다. 그래서 금강석이라 그러지, 변함이 없다고. 오래는 가니까 잘 키워 봐라! 그러시고는…….

     그러시고는? 괜스레 조바심이 나서 나도 모르게 채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거든요. 선인장으로 남은…….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부엌으로 향했다. 40년 전이라 해도 어른이었네, 뭐. 아직 중학생일 때 아버지를 여읜 나하고는 비교도 안 되잖아. 이 할머니, 이런 나이에도 감상에 젖나! 아버지 이야기라니! 하긴 나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버지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은이 니가 아부지 젤로 좋아혀서 그랴. 아니라고 내숭 뵈지 말어야. 자석이 아부지 좋아혀서 나쁘가니.

     청소기를 돌리면서 다른 상념들은 곧 잊었다. 그쪽으로 청소기를 밀고 갔을 때까지도 할머니는 여전히 선인장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해서 또 할 수 없이 듣는 시늉을 했다.

     여기저기 몇 시간째 찾아보았는데, 아부지가 말한 금강석이라는 선인장은 없더라고요. 바른 이름은 ‘금강산 선인장’이래요. 군산에선가 60대 누군가가 식물원에 금강산 선인장을 기부했다는 사진이 있더라고요. 여기 캡처, 이것 보세요. 비슷하죠? 이게 아기 세살 때부터 37년간 키운 것이라고 했어요. 암튼 이 종류 선인장이 30년, 40년을 문제없이 살아 있는 거예요. 인터넷 판매도 하는데, 10센티 그 정도. 또 다른 이름들은 암석주, 암석사자…….

     할머니는 두서없는 말들을 암기 숙제하듯 내뱉고 있었다.

     이제 좀 일어나세요, 여기 청소기 밀게요.

     사라져버릴까 걱정 돼서요. 이것 꽃 정말 맞지요? 앗, 지 선샘, 이리 와 보세요. 여기 이쪽엔 두 송이가 피었네요. 너무 작아서 안 보였나봐. 오늘 해가 안 나니까 실내가 어둡네. 이쪽은 두 송이니까 꽃이 분명해. 휴, 살았다. 착각인가, 환시인가, 은근 걱정했거든요. 환시가 무엇인지 알죠,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오늘따라 저이는 내가 들락날락거려도 신청도 안 하네요. 어제 오후에 내 커피를 반쯤이나 슬쩍 마시더니 밤새 잠을 전혀 못 잤다고, 아침부터 아예 누워만 있더니. 지 선샘, 여기 좀 봐요. 이쪽은 두 송이라니까요.

     좀 솔깃했다. 세상에 저렇게나 작은 꽃도 있으려나. 그런데 있었다. 어떻게 이리도 작은 꽃이 이쪽 하나 저쪽 둘, 자리도 예쁘게 어울리게 피어났을까.

     정말 그러네요. 정말 꽃이에요. 아깐 훅 불어 보려다가 혹시나 해서 못했는데, 이젠 불어볼까요?

     에이, 뭣하게 불어요. 어느 순간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40년 동안 한 번도 피지 않았던 꽃이 오늘 피어 나냐고요.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신 것 아녜요?

     무슨 따로 좋은 일이 있겠어요. 좋은 일이라면 어제? 저녁에 외출했던 일, 일이 있었으니까. 근데 어제 우리 할아버지 정말 웃겼지요?

     둘이는 그 생각에 깔깔 웃었다.

 

     보호자 할머니가 전날 저녁 외출을 했었다. 어쩌다 그럴 때면 내가 그냥 단순 시간 알바로 베이비(?)시터 노릇을 한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일단 안방 이부자리를 살펴주고 있는데, 어르신이 아이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해 줘야 하는데, 내가 남자인데 혼자 집에 못 있는다고 지 선생 붙잡아 놓고, 여자는 밤늦게 돌아다니고! 그 순간 마침 들어온 할머니랑 다 같이 깔깔 웃었다. 밤늦게 아니라고, 일찍 오신 거라고, 내가 대신 변명을 했다.

     환갑이 넘으면 남자도 여자도 남자 여자가 아닌 거예요. 그냥 사람이죠.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젊은이가 덜 젊은 사람을 보호해야지요.

     할머니가 늙었다는 말을 빼려고 어렵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또 웃음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그대로 따라서 하다가 늙었다는 말에 이르고 말았다. 내가 덜 젊다는 말이냐, 그러다가 그게 더 늙었다는 말인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마지막으로는, 보호를 해야 하는 쪽이 더 젊은 쪽이니 보호를 받는 덜 젊은 쪽이 낫다는, 할머니의 이상한 우김질로 끝났다.

     할머니가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또 선인장 꽃이 피어나서 설레고 있었다. 나도 따라 설렐 일은 아니지만, 워낙 함박웃음 없던 할머니가 확 밝아진 얼굴하고 있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어떤 일은 너무 쉽게 무너져버린다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이튿날 만난 할머니는 유난히 퍼렇게 얼어 있었다. 집 안에서도 꽁꽁. 그러니까 꽃이 꽃이 아님을 알았더란다.

     잠깐 착각으로 천국과 지옥이네요. 어제는 종일 내가 혼쭐이 나갔었나. 저녁 먹고 나서는 전등불이 밝은데도 것도 모자라 가까이 랜턴까지 들고 가서 들여다보았어요. 또 확인하려고. 그런데 불빛에 자세히 보았더니, 세상에나, 사방에 조금 큰 꽃가루 같은 것들이 널려있는 거예요. 금목서 마른 꽃들이 흩어져서요. 그 지난 주 금목서 가지들을 여기 꽃아 놓았었잖아요. 뒷베란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놈들 한두 가지 잘라다가. 그때 마르면서 흩날렸던 것을. 그 깨알같이 작은 낱송이 하나만 보고서 전체로 풍성한 금목서 꽃을 상상도 못했지.

     네? 꽃이 아니라고요?

     꽃은 꽃이죠, 말랐어도, 부분이라도. 그게 선인장꽃이 아니란 거죠. 그 전날 외출했을 때요, 내가 나름 중요한 일을 마무리 짓고 왔었거든요. 이래저래 맘이 들떴었나 봐요, 헛것이 보이게.

     헛것이라뇨, 그저 착각을 좀. 근데 무슨 일 하세요?

     아니, 그냥 시시한 일. 것보다 문제는 그 여파죠. 어제 주책을 떨었단 말예요. 근년에 친구가 된 젊은이한테 선인장꽃 이야기를 떠벌렸죠. 톡으로 구구절절, 사진까지 보냈으니. 그리 방정을 떤 것이 넘 부끄럽단 말이에요. 나잇값도 못하고.

     나는 차마 말을 섞을 수 없었다. 그래도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야 했다.

     나쁜 의도로 거짓말 한 게 아닌데요, 뭐.

     그런데 그 친구 하는 말이요 – 나이는 딸과 손녀의 중간쯤인데 -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마지막 잎새」도 가짜였지만 진짜였잖냐고! 그러니 진짜인 거래요. 가짜라도 진짜라고!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이었어요. 위로 받고 싶었었는지.

     그러네요, 마지막 잎새!

     어제 아침엔 눈물까지 찔끔거리다가, 온종일 들떠서 40년의 절반은 젊어진 느낌이었는데. 얼어 죽을까 노심초사 겨울도 오기 전에 들여놓고를 40년을 반복했지만 키도 그리도 안 자라더만, 언감생심 꽃은.

     알았어요, 자, 이제 안심하시고! 추억만으로도 감사, 캄사! 또 누가 아나요? 언젠가는 정말로 꽃이 필지.

 

     그렇게 극적인 선인장꽃 에피소드는 애석한 사연을 지닌 채로 짧게 끝났다. 그런데 올여름 어르신의 백장미 사랑은 그 반전의 전개를 알 길이 없다. 빨간 넝쿨장미에 대한 평생의 사랑이 어떻게 잊혔을까. 보호자는 아예 영문을 몰라 하고, 어르신에게서 긴 줄거리를 기대할 수는 없다. 노인들을 보면 과거는 곧잘 끊기기도 한다.

 

 

     입은 채 그대로 보호자가 나간다. 슈퍼나 코 앞 시장에 나가나 보다. 나는 어르신을 깨우려고 소파로 가 본다. 어르신은 여름 내내 산책이라면 고개를 가로 젓고, 소파에서도 늘 이렇게 누운 자세다. 요즘에는 그래도 재미있는(!) 책을 읽느라고 반쯤 기대어 있는 날도 있다. 깨어나면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 지난번에 책을 좀 읽고 싶다고 하시니까, 보호자가 들지도 못하게 생긴 아주 두꺼운 책 하나와 그 반쯤 되어 보이는 책을 내왔다. 이집에 책들은 많다. 노인들 집인데 엄청 많다. 처음에 읽기 시작한 것은 더 얇은 쪽이었는데 제목이 엄청 길었다. 『천 년을 함께 있어도 한 번의 이별은 있다』 - 그러고 보니, 어머니 상을 마치고 처음 왔을 때 보호자가 했던 말이 이 책의 제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별 연습 책인가? 어르신은 그 책을 곧 치우고는 더 두꺼운 쪽을 시작했는데 열심이시다. 제목은 우습기까지 하다.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그 비슷하다. 책에 너무도 관심이 없는 나는 제목을 금방 잊곤 한다.

     어르신은 내가 탁자 위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꿈쩍도 안 하신다. 너무도 깊이 잠들어 계신다. 낮잠도 이렇게 깊을 수가. 탁자에 덮여있던 책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이 보이지도 않는 작은 글씨라 오히려 궁금해져서 읽어보고 싶다. 정말 작은 글씨다. (먼지의 말)이라니, 괄호 속에 쓰인 제목은 정말 먼지 같은 글자로 쓰여 있다. 어르신은 눈을 뜨고서도 움직이지도 않고 대꾸도 없다. 가만히 책을 들어본다. (없지 않은 존재들의 목소리) 라고도 표지에 쓰여 있다. 차례를 펼쳐 보니 ‘이상한 점’, ‘죽었다 아니 죽였다’ 등 조금 무서운 말들이 들어있다. ‘돌연사’, ‘우리들의 죽음’ 그런 제목도 있다. 이렇게 작은 글자들에 너무 엄청난 이야기들이 들어있나 보다.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기려니 손이 떨린다. 서둘러 책을 덮는데 보호자가 들어온다.

 

     아, 지 선샘, 책 보려고요?

     아아뇨, 저 책 별로 안 읽어요. 그냥 제목이 궁금, 잘 안 보이니까.

     먼지라니 놀랬죠? 거기 쓰여 있잖아요, 없지 않은 존재들, 그것이 먼지 같은 인생들 말인가 봐요. 먼지 취급당하는, 그렇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말이죠. 약자들에게도 목소리가 있다고, 더 작은 목소리들을 대신해서, 먼지 같은 목소리라도 말 하련다고.

     그러니까 아까 먼지 어쩌고 하신 말씀이 이 책에? 왜 하필 먼지라고?

사람을, 약자를 먼지 취급하니까, 먼지만도 못한 없는 존재로 아니까. 해서, 먼지 같은 존재도 ‘없지 않은 존재’라고 항변하는 거요.

    없지 않은 거면, 있는, 있는 존재네요.

    예, 없는 존재들도 말을 하네요. 작가가 대중들한테 민주주의 강의를 하다가 ‘부자가 왜 나쁜가요?’ 물었더니, 어떤 할머니가 스스럼없이 그랬다네요. ‘나쁜 짓을 안하몬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모은대.’ 누구라도 터무니없이 많이 돈을 모았다면, 필시 남한테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을 했을 것이라는 거죠. 그 할머니 생각으로.

네?

     그런 큰돈이 나온 곳에서라면 다른 누군가는 필시 울고 있다는 말. 평생 살아보고 깨우친 이치가 그렇다는 거죠. 이 사람, 저자 채oo 선생도 해고당한 인문학자고요.

     인문학자요?

     대학강사 말이죠. 언제부터인가 교육이 완전 실용주의가 되어갔으니 인문학자는 발붙일 자리가 없는 거죠. 인문학은 교수도 인원을 줄이는 판에, 강사들 자리는 풍전등화니까.

     대학강사면 그래도, 우린 다 교수님이라고 부르면서, 야간대학 다녔을 때 말예요, 우리보다 젊은 강사님들,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요.

     지식이 돈이 안 되면 쓸모없다고 말하는 거죠. 쓸모없다고 해고된 강사가 ‘먼지로서 먼지에게’, ‘마음이 견디지 못해, 가슴에서 돌멩이 하나를 빼내듯이’ 썼다네요.

     고약한 책이다.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고, 가슴만 무거워진다.

     고전 철학 때부터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견해가 있었지요. 정확히는 ‘강자의 우위일 뿐’이라고. 소크라테스의 상대 편, 트라시마코스라고. 이름이야 뭐든.

     네, 저 외국 이름들 엄청 약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 핑계를 두리번거린다.

     잠깐만요! 어르신 눈 뜨신 건가?

 

     어르신 쪽으로 가서 살펴보고 있는 동안에도 보호자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지 선샘, 우리 천주교 신자님! 천주교의 정의를 봐요! 초기 천주교 박해 때요, 죽음을 감수한 사람도 죽이는 사람도 정의의 이름이었죠. 칼 든 쪽 정의가 정의인 거죠, 나쁜 정의였지만. 그릇된 바름이 문제죠, 하물며 신앙까지도, 미안!

     나쁜 정의, 그릇된 바름, 그런 말이 어딨어요. 더러운 순백색 그런 말이 어딨냐고요! 그렇게 반박하고 싶지만 말이 짧으니 가만있을밖에. 도망칠 기회를 기다리자. 속도 모르는 할머니는 진지하게 말한다.

     저 책 『잠들면……』 은 기독교 정의를 실천하러 아마존에 들어간 선교사가 쓴 거예요. 가서 보니까 원주민들은 이미 평화로운 정의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걸 감탄하게 되었으니 선교는 그냥 손들고 말았다는 이야기예요.

…….

     선교가 잘 먹힌 것이 우리나라 천주교였지만, 처음 피해는 엄청났죠. 내가 공자 앞에서 문자 쓰나? 천주교 박해니 그런 말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목숨까진 아니라도, 불이익, 느닷없이 해고되고 그런 사람들 숱하게 봤겠죠.

우리가 결혼 초에 근무하던 병원이 급히 문을 닫게 되었던 그때 일이 떠올랐지만 가만있기로 한다. 나는 곧 다른 병원을 찾았지만, 남편은 밤에 알바로 뛰던 병원에만 나갔고, 곧바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던 기억이 새롭다.

     책 거기 스티커 꼽아진 데 펴보세요. 해고된 톨게이트 노동자 1,500명, 강사법 시행에 해고된 대학강사가 거기 ……

     아 네, 7,834명이라고. 도살된 돼지 4,700마리와 다를 바 없다네요. 왜 하필 돼지에다 비교를…….

     다른 책에 보면요, 신문이었나, 출근 했다가 죽는 노동자가 매일 10명이래요. 이런 현실은 총알 없는 전쟁이라고. 실습 나간 고등학생도 죽었잖아요. 여기 보면, 5년간 건설현장에서만 사망자 숫자가 3,400. 먹고 살려고 일하러 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다니요. 돈 만들어 내는 구조가 죽인 거잖아요.

     돈 만드는 구조라고? 점점, 불편한 말들이 속사포로 쏟아진다. ‘죽었다 아니 죽였다’에 쓰여 있는 말인가 보다. 말을 좀 돌리고 싶어진다.

     죽인 게 아니라 안전불감증 땜에 그런 거잖아요. 저번 주택재개발사업 현장에서 5층 건물이 길 쪽으로 붕괴된 그런 사고 말이에요. 조심을 안 해서.

     바로 그 안전불감증이 범인이라니까요. 하도급 또 또 하도급을 왜 주는데요. 경비 절감이잖아요. 이 책에서는 ‘노동을 갈아 넣고 주식이 버는 돈, 자본의 탐욕이 범인’이라고 하네요. 또 망각이 공범이죠, 무서운 공범들.

공범?

     김용균 죽으면 잠시 화들짝 눈물짓다가 돌아서면서 잊어버리죠. 수많은 사람들이, 기계가 아닌 사람들이 지뢰밭으로 일하러 나가는 꼴이죠. ‘누가 돈을 가져가느냐?’ 사람들이 그것을 묻기 시작했다고. 여기 그렇게. 시작은 희망이겠지요. 무엇인가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먼지 같은 존재들도 알고는 있다고.

     저, 그런데, 이런 책들을 왜 읽으세요? 사망 그런 것 뉴스에 다 나오는데?

     뭐, 다 읽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이런 책을 일단 사는 것이 그저 응원 같아서.

     응원요? 읽지 않을 책을 산다고요? 그래서 집에 책들이 많은 거예요?

     우스운가요? 입지 않을 옷을, 먹지 않을 음식물을 사는 것 보단 낫지 않나. 어렵거나 맘 불편해서 못 읽는다 해도, 그 글 쓴 사람들에…….

     이 집에 있는 책들이, 그러니까 읽지 않은, 읽지 않을 책들도 있어요?

     어느 정도는, 예.

     어의상실! 이런 할머니가, 병원비다 뭐다 돈이 남아돌아갈 리가 없는 노인이 읽지도 않을 책들을 산다고?

     책은요, 책을 쓴 사람 생각으로 사는 것도 괜찮지 않나. 어차피 누구나 진리를 쓰진 못할 것이고. 결과물이 미흡해도 오류는 사람의 것! 하지만 뭔가 애쓴 노력이, 그 진지함이.

     그래도요. 버릴 거면 뭐 하러 책을 사나요. 책도 공해란 말 있잖아요, 카세트처럼.

     버려진들 책은 크게 나쁜 쓰레기도 아니네 뭐. 흔적 없이 썩으니까.

     오늘은 어째 나쁜 것 이야기를 많이 하시네요.

     쓰레기도…….

 

     띵똥 – 엄청 반가운 문 소리다. 또 ‘이쁜 쓰레기’ 이야기를 하려나 머리가 아프던 순간에 알맞은 방해다. 어? 부엌 환기통 청소를 하란다. 비대면 시대에 이런 방문도 있나? 하긴 일감이 없으니 방문 청소라도 하러 다니는가 보다. 이집은 청소 전문인걸요, 완전 새것처럼 얼룩 하나 없네요. 안녕히 가세요! 어수룩한 청소업자를 돌려보내고는 서둘러 부엌을 향한다. 일단 도망이다.

 

 

     먼지의 목소리, 먼지의 이야기, 이 책은 안 버리겠네요. 우리가 다 먼지인데. 먼지에서 왔다가 먼지로 돌아가는 인생…….

     보호자는 여태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저 불신자의 버릇이 또 나온다. 신을 믿지 않으니까 죽네 사네를 저리 함부로 말한다. 아니, 잠깐만.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바로 창세기에 그런 구절도 있지 않은가. 내가 젤 좋아하는 재의 수요일 미사 때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 순간 신부님의 목소리는 성당의 높은 천장을 넘어 하늘까지 퍼져나가고, 나는 땅에 묻혀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깨달음을 새기곤 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나는 다시 보호자 쪽으로 향한다.

     저, 그런데 흙은 먼지가 되는 거지요?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여기서 흙이 왜?

     아니,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하시고.

못 말리는 우리 지 선샘. 맞아요, 흙으로 빚어졌으니 망가지고 부서지면 먼지가 되겠지요. 하지만 걱정 마요. 지 선샘은 영혼을 믿는 신자니까 영혼이 하늘나라로, 해서, 먼지가 될 일은 없겠네요. 안 믿는 나는 아마도 흙이나 먼지가 되고 말겠지만. 괜찮아요, 세상 만물이 다 먼지가 되는 것이니까요.

     무섭게 그러지 마세요.

     무섭다니요! 무엇이든 받아들이면 무서울 것이 없답니다. 가난도 병도 받아들이면 덜 무서워요.

     가난하지도 병든 것도 아니면서, 무슨. 이 말도 당근 속으로만 했다. 이상한 말을 잘하는 할머니랑 말씨름 할 일이 뭔가. 하지만 세상에는 살아서도 먼지 같은 인생이 많다는, 탁자 위의 저 글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가만, 떠돌아다니는 카톡에 좋은 말도 많더라. 자기 집 있고, 밥 든든히 먹을 수 있고, 깨끗한 물 마시고, 휴대전화며 인터넷을 하면, 그럼 극소수 특권층이라고! 옳다, 이것이다. 이것으로 대꾸해 보자.

     저 그런데요, 집 있고, 밥 배불리 먹고, 깨끗한 물 마시고, 또 뭐더라, 핸드폰 그런 것 쓰면 특권층이란 말 들어보셨어요? 세계인구 7퍼 이내.

     그런가, 그 정도라는 말 맞겠지요. 근데 7퍼센트 안에 들면 뭐요?

     당근 기쁘죠, 그 정도로 살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죠.

     아니, 100명에 70명 정도가 행복하다면 몰라도 겨우 7명 빼고 나머지 대부분은 어렵다는 말인데. 7명 속에 들었다고 맘 편하게 행복하나. 먹고 사는 걱정은 누구라도 안 해야죠. 누구라도 기본 의식주는 되는 세상, 비굴하지 않게 사람답게 살 정도는 되는 세상, 나는 그래야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영생의 하느님 나라 말고, 여기 땅에서 천국.

     다 같이 잘 사는 나라? 그런 말 하면 공산주의자인데. 물론 이 말도 속으로만 했다. 이 할머니가 무슨 정당 그런 데 소속일까. 설마, 이렇게 집 안에만 박혀 있는 사람이 무슨. 아니, 이 전에 이 할아버지가 건강할 때, 할머니 활동이 자유로웠을 때?

     저 그런데, 젊어서는 일 하셨지요? 무슨 일을 하셨어요?

      …….

     직장 그런 것.

     배운 만큼 일 못했고, 결혼은 그냥 했고, 그것이 삶이니까 살았지요. 따로 뭘 했겠어요. 우리 세대는, 물론 좀 앞서간 친구들도 있었긴 해도, 그냥 거기 있는 삶을 살았지요. 공부를 조금 더 할 수는 있었는데, 잘 써먹을 만큼은 아니었고. 상황도 좋지 않았고요.

     어르신처럼 선생님 하셨더랬어요?

     아아뇨. 결혼 전 쬐금 하다가 말았고, 나중에는……. 암튼 불발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기회가 없었던 것이 필연이었다 싶어요.

     필연?

     어차피 쓸모없는 공부였으니까, 쓸 데가.

     네?

     청년실업이라 하면 우선 인문대 졸업생이죠! 그러니 대학들이 앞 다투어 인문대 구조 조정들 했고요. 취업 안 되는, 돈이 안 되는 쓸모없는 학문이라는 거죠.

     아, 그럼 인문학 공부를?

     하다 그만 둔 공부가 뭐면 뭐겠어요. 학생들 스스로도 교수들에게 뭔가 쓸 모 있는 것을 달라고, 둥지 안의 새끼 새들이 ‘엄마, 나 쓸모 있는 것! 취업되는 것!’ 하고 입을 벌리는 상상을 해 봐요. 그런 공부를 뭐에 쓰겠어요. 나쁜 공부지.

     에이, 아까 그 나쁜 짓과는 다르네요.

     무엇이 나쁜 짓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죠. 쓸모없어서 식구들 밥을 굶기는 아버지가 나쁜가. 너무 쓸모 있어서 다 쓰지도 못할 산더미 돈을 쓸어가는 인간이 나쁜가.

     엥? 나는 정말 머리가 나쁜가 보다. 이 순간 나는 확실하게 어리둥절해졌다. 쓸모없는 것은 나쁜 것이다. 그러니까 쓸모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무능한 아버지가 나쁘다. 그런데 돈 갈퀴질이 더 나쁜가? 무엇인가 기준이 혼란스럽다.

     지 선샘, 이거 리포트 주제 아녜요. 잊어버리세요. 성실하고 예쁘게 사는 우리 지 선샘, 건물주이면서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지 선샘! 충분히 쓸모 있는 사람이면서 충분히 좋은 사람! 남편한테 평생 가슴 설렌다는 사랑스러운 사람!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게 아니라, 모범생 맞죠. 일 밖에 모르고, 일 하면 돈을 벌고, 돈 버느라 놀 시간 없고, 시간 없으니 돈 쓸 시간 없고. 얼마나 좋아요. 다만…….

     다만 뭐요?

     다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쓸모없어도 보면 어떨지요.

     쓸모없는 짓을? 아니, 왜요?

     그건 숙제네요, 후훗.

     뭔가 찜찜한 채로 그렇게 오후 일이 끝난다. 대문을 나오는데 숙제 같은 화두가 그림자처럼 길게 따라 나온  다. 차에 앉아서도 냉큼 시동을 걸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말도 안 돼. 쓸모없는 일로 시간을 버리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왜 생각해야 하는데? 쓸모없어 보라는 헛소리, 뭐라는 거야. 생각할 가치가 어딨어! 하지만 어찌 들으면 ‘나쁜’ 짓은 쓸모 있는 사람들을 빗대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쓸모 있는 누구나가, 모두가, 나쁜 짓을 했다는 말은 말이 안 돼. 헛갈린다. 헛갈리지 말자. 머리를 쓰고 계획을 세우고 어렵더라도 계획에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사는 방식이다. 먼지가 될 순 없잖아, 살아서는. 먼지로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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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문학 2022.1,2월호 vol.165  168~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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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