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2. 9. 16. 22:25
[전일시론 2002년]          
 

한가위 유감 - 우리를 스산하게 하는 가을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를 지나면 처서와 백로는 금새 다가온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옛말처럼, 음력 칠팔월은 어정어정 건들건들하는 사이에 지나는 것이다. 그것은 추수만 남아 한가해진 농촌을 이르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농촌을 보라.

입추는 물론 처서절기에마저 비가 내리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일년 농사 마무리는 튼 일이 된다. 오죽하면 “처서에 비 오면 독에 든 곡식도 준다”는 속담이 있었을까. 그래서 입추 절기엔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기구하고 비의 재앙을 피하고자 기청제(祈晴祭)가 있었다 했다.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여 밀물과 썰물의 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사리 현상이 발생하면, 서남해안 지역의 저지대는 침수하게 마련이었으니까.

자연재해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속수무책임이 드러나고 있다. 올해의 세계적인 기상악화로 인한 피해는 21세기 인류문명의 발전을 무색하게 한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인재의 요소가 더 짙게 드러나기도 한다. 산사태의 상당 정도가 인공적인 자연훼손 - 축지법을 위한 도로개설 - 탓이라는 보도였다. 그러고서 오늘의 농촌을 보라. 태풍에 쓰러진 벼포기에 매달린 경우는 그래도 상이다, 아예 논의 형태도 없는 우리의 훼손된 땅들... 잃어버린 꿈들.

우리는 기청제를 지내는 마음가짐으로 가을을 맞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도로 하나도 다리 하나도 “돌다리 두드리듯이” 생각에 생각을 또 하고 놓아야 한다. 내년이면 사라질 장흥군 유치면 덕산마을의 운명에도 가슴 조인다. 수몰지구로 고시되어 모두 이사를 해야 했겠지만, 여전히 아직 이사가지 못한 집들은 이번 집중폭우에 물에 잠겼다. 애초 댐공사로 인해 면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쯤으로 묵인하는 우리들. 댐이 파괴하는 것은 환경만이 아닌 우리들의 연대감이다. 댐의 혜택을 받을 대다수는 댐공사가 묵살한 소수의 인생에는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기주의와 무관심 ― 그것은 어찌보면 하나의 끈이다. 풍성하고 한가로워야 할 가을의 문턱에서 스산하기만 한 기운은 도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길을 뜯어 놓아 방치되던 것이 드디어 “푸른 길” 조성이 시작된다니 우선은 반가울 밖에. 철길이란 단순한 선이기보다는 어딘가로의 연결이었듯이, 이제 주변 공간과의 연계 속 풍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철도부지로 묶여 재산권 행사에 저자세이던 인근 주민들의 입장에선 다른 견해가 나올 법하다. 그들의 소수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무시해서는 진정한 민주적 사업이 아닐 것이다. 푸른 공원으로 변할 네 곳 광장에 대한 기대나 푸른 길을 산책할 수 있을 혜택과 더불어, 우리에게 푸른 길을 제공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소수의 권리를 잊어도 되는가.

그러는 사이에 “광주현대미술관” 계획도 설왕설래가 재현되고 있다. 애초에 현대미술관 건립 계획이 도청 이전 이후의 도청부지와 예술의 거리를 하나로 묶는 문화벨트 프로젝트로서 구상되었다지만, 그러나 예술의 거리 끝 중앙초등학교의 문제는 여전히 혼미한 상태로 이제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도심공동화로 중앙교는 20년전 5천 규모의 학생이 십분의 일로 줄고 교실은 아무리 특별실을 늘린다 해도 폐실되고 있는 현상이라니 축소 또는 이전이 바람직하겠지만, 이를 전체의 논리로서 소수를 핍박하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할까.

행여 일이 잘 마무리되어 우리 도시가 예향답게 또 하나의 미술관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문턱 높은 예술의 성곽을 지어 놓을 양이면, 기존의 광주시립미술관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100주년 기념전을 가진 베니스 비엔날레의 귀감을 보자. 2년에 걸쳐 자르디니 공원에 중앙 전시장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기에 우회 공사를 해야 했다는 일화는 냄비방 가슴으로 쉬 뜨겁기만 한 우리들 행정에 경종이 될 것이다. 냄비방 말고도 우리에겐 또 하나 흠이 있으니, 흉내 좋아하는 습성이다. 어디 좋은 데 미술관 따라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웅장한 규모의 위용을 자랑할 생각이라면, 아예 역사 깊은 초등학교를 절단내지나 말자. 낡은 교실은 허물어 푸른 나무들을 가꾸면 우리들에게 산소를 선사해 줄 것이니까.

이제 곧 한가위, 그러나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노래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언제냐 싶게 이제 곧 밤 동안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 수증기는 엉겨서 풀잎에 이슬을 내릴 것이다. 밤이슬같은 썰렁한 가을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사에 어딘지 따뜻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2002년 9월 16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