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2015. 1. 23. 01:58

「유예된 시간」

 

다시 여름이 되자 가슴이 묘하게 조여 왔다. 지난여름 이맘때 물속에 빠졌던 기억이 문제였다. 봄, 수백 명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뉴스로 아수라장이 된 봄날 이후 더 나빠졌다. 나 또한 돌아오지 못하고 검은 바다 멀리로 떠내려가는 꿈이 계속되곤 했다.

언어교육원 휴가기간은 원어민 강사들의 귀향을 배려해서 꼬박 3주다. 나도 평택 집에 머물기로 했다. 가끔은 지치고, 엄마 밥이 그립기도 했으니까. 마침 미국에서 잠시 다니러 온 막내 옥실이랑 몇몇 친척들이랑 남쪽 바다로 휴가를 떠났다. 하필 바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옥실이 굳이 담양의 원조 대통밥을 먹어보겠다고 하고 - 옥이는 수습이지만 맨해튼의 꽤 유명한 식당 요리사다 - 다른 사람들은 땅끝의 의미를 내세웠다. 나는 뭐, 어른스럽게 그 일을 잊은 듯이 처신하면서 물만 피하면 될 일이었다. 거기서 뜻밖에 물 밖으로 나온 게 한 마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놈을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식당, 정확히는 식당의 밥상에서였다. 일은 아직 떡갈비가 나오기 전에 일어났다. 한참 접시들이 들어와서 밥상 위 교통정리를 하는 순간이었다. 승연이 벌떡 뛰면서 일어났다. 까악, 다른 아이들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소동의 진원지는 집게발이 유난히도 꿈틀거리는 접시였다. 대여섯 마리의 사나운 게들이 비명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말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게들에게 입혀진 양념은 색깔로 미루어 간장과 고춧가루 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잘리지도 않은 통째의 게들이 단말마의 춤을 추고 있었다. 인간들의 이빨 사이에서 부서지지 않는다 해도, 진한 양념 탓에 그대로 몇 분이 지나면 생명을 부지할 길은 없을 것이다. 누구도 그 쌩쌩한 게들을 집어서 씹을 용기들은 없어 보였다. 서둘러 사람을 불러서 접시를 물리려는데 재경이 소리쳤다. 저 하나 주세요.

재경인 이종매의 아들이다. 은실의 아이들인 승연이 승주와는 달리 재경은 외동이라서인지 어려서부터 제 주장이 강했다. 재경에게 한 마리를 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순간은 다들 어리둥절해서 별 생각 없이 그래라 하고 말았다. 재경인 빈 접시에 옮겨진 게 위로 제 컵의 물을 부었다. 마치 양념을 씻는 동작이었다. 침착한 재경의 행동에 다들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놈은 재경이 일단은 자신을 숨 쉬게 해준 장본인임을 알 리가 없는 모양으로 그에게 덤볐다.

어쨌거나 게장 파동은 가라앉았고 떡갈비와 양념갈비가 반씩 담긴 접시들이 나오자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의 일상이 되살아났다. 대통밥을 본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문제는 밥이 끝나고 디저트 과일까지 다 먹을 때까지도 놈이 씩씩하게 살아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두들 재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경은 이마를 찡그렸다.

승주가 갑자기 일어서서 복도로 나가더니 종이컵을 들고 왔다. 여기 넣어서 가져가면 될 걸. 그러면서 종이컵에 게를 조심스레 옮겨서 재경에게 내밀었다. 재경은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흥미가 떨어졌는지, 아무튼 염려하는 낯빛이었다. 재경이 뒤로 물러서자 승주가 나섰다. 그럼 내가 가져가야지. 승주는 물까지 조금 넣었다. 누군가 소금을 좀 넣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금도 얻어서 넣었다. 완벽한 집이 지어졌다. 도망갈까 봐서 지붕까지 종이컵으로 씌우니 좁고 불편한 집이었다. 승주는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이 늘어선 둑을 따라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컵을 조심히 들고 다녔다.

 

우리 모두는 일단 다 같이 평택 집으로 가는 차들에 나누어 탔다. 나는 승연이 승주랑, 그러니까 게랑 함께 아버지 차를 탔다. 은실은 성수대교 ‘아차’사고 이후로 많은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므로 운전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가 퇴임 후에는 큰 차를 가지고 다니신다. 순전히 은실네 때문에.

뒷좌석의 승연은 할아버지의 스마트폰을 가져다가 게의 종류를 찾는다고 야단이다.

엄마, 컨이모, 울나라 게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아셩? 18종이네용.

말 좀 예쁘기 하시지! 우리나라!

았써요. 그게…….

알았어요!

예, 알았어요. 여기 봐, 이 사진, 요게 농게래요, 농게!

논게? 논에서 살아?

엉뚱한 승주는 누나에게 핀잔을 듣는다. 논게라니, 농게라니까. 딱 이 분홍색 집게발이 농게야. 게 발이 몇 갠 줄 알아, 너?

그야 여섯 개!

뭐야, 게가 곤충이니? 집게발 두 개 빼고도 여덟 개야. 들어 봐. 집게발가락은 길고 숟가락 모양이어서 개펄에서 먹이를 긁어먹기에 알맞다. 수컷의 한쪽 집게다리는 암컷과 같으나 다른 한쪽은 커서 집게길이가 50mm에…….

언니, 이 게가 살까? 아이들 떠드는 데는 아랑곳없이 은실이가 걱정스레 말한다.

살아 있으니 걱정 마.

언니, 난 좀 무서운데. 이게, 이 게가 지금 무섭지 않을까? 난데없이 컵 속에 갇혀서…….

컵인 줄 알 리 없잖아. 집에 도착해서 넓은 데 놓아주고.

어떻게 살아?

걱정 마, 일단 살아 있잖아. 잠을 청해 봐, 너 깨어있음 멀미하잖아.

은실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다. ‘아차’사고란 우리가 서울 고모네 집에서 강 건너로 학교 다닐 때, 고1 은실이 늦장부리는 나랑 같이 나서서 지각하는 바람에 성수대교 사고를 비껴갔던 일을 말한다. 하지만 친한 친구를 잃은 은실에게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가 되었고, 그 이후 은실의 삶은 뭐랄까, 그리다가 반쯤 지워서 뭉그러진 수채화 같다. 아래 절반쯤을 손바닥으로 지워버린. 나무도 집도 살아있는 풍경이기는 하지만 아랫도리는 뭉그러져 불안한, 덧그릴 수도 없이 여전히 물감들이 흐르고 있는 그림.

은실이 농게 걱정을 놓아두고 스르르 잠이 든다. 아이들은 벌써 다른 주제로 깔깔대고 있다.

아버지, 일단 천당의 문턱에서 살아나왔으니 다행인 거죠?

그럼.

아버지, 이 게는 운이 좋아 살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님…….

아서라, 생사의 문제 어쩌고 은실이 들을라.

아니, 아버지, 자기가 맹렬하게 탈출을 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믿을까 궁금…….

그만 두래도. 게가 무슨 철학을. 아버지 운전하잖냐. 여보, 한박사 좀 말려요!

‘한박사’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는 이름이다. 어머니는 뒤만 한번 돌아다보신다.

그날 저녁에도 아직 헤어지지 않고 다들 집에서 북적대느라 부산한 휴가의 연속이었다. 안방은 여자들…… 그런 식으로 분류된 잠자리는 불편해도 다들 즐거워하는 편이었다. 옥실과 은실을 가운데 두고 나와 어머니가 바깥으로 끼어 누운 잠자리에서 눈은 더 말똥말똥해지는 밤이었다.

올핸 모기도 별로 없어 다행이구나.

예, 엄마. 맘도 한번 오면 좋은데.

옥이는 엄마와 맘으로 엄마와 큰엄마를 구별한다.

그렇게 여름휴가가 끝나 갔다. 며칠 후 옥이가 돌아가자 나도 바로 내 굴로 돌아왔다.

 

철학이 다시 떠오른 것은 애들이 거의 날마다 농게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개학 전이라서 다른 재미있는 일은 없는 듯 보였다. 분홍 집게발 농게라서 ‘분농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다시마도 넣어줘 보고, 물속에 돌도 넣어주었다고. 제법 의식주가 갖춰져 가고 있었다. 그러니 게라고 철학을 하지 않겠는가.

밥이 없으면 죽지만 밥만으로는 살지 못하는 인간처럼, 생명체인 게도 그 나름의……. 아직 수업이 없어 빈둥대니까 이불 속에 누워서도 잠이 헛들곤 했다. 그러면 물에 빠지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눈을 버럭 뜨고 온갖 상상에 매달린다. 분농이는 행동에 점수를 주어 자유의지론자 쪽으로 분류해 두었다. 그 순간 아주 우연히 그 반대가 떠올랐다. ‘진드기 철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가, 배승한 교수가, 단 한번 함께 했었던 언어교육원 회식자리에서 읊어대던 이야기였다. 대충 소맥이 한 두 바퀴 돌았을 때였다.

술, 좋군요. 아, 현세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 최고의 세계다, 옳소! 더 나은 세계가 있다면 신은 인간을 위해 반드시 그 더 나은 세계를 주셨을 거라, 가라사대 라이프니츠! 세계에는 무엇보다 완전한 신이, 이 세계질서를 보장하는 선한 신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니까…….

말씀은 선한 신이라면서 어감은…….

아니, 모든 생물체며 자원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믿음이 오늘날 더 확고해지고 있잖슴까.

거야,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과 지능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니, 그건 인간을 상대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로 보았다는 뜻이죠. 빌헬름 베클린이라고, 라이프니츠에 비하면 달걀로 바위치기도 안 되는 위인이, 물론 라이프니츠 사후였지만 재밌는 글을 썼어요. 내용인즉슨, 치즈에 생긴 진드기도 철학을 한다 이 말씀.

치즈 진드기?

어라, 저도요 덩어리 치즈 속에서 시꺼먼 날벌레를 본 적 있어요. 날개랑 더듬이도!

눈 좋으시네요. 하지만 곤충학 말고 철학이라잖아요. 계속해 보시죠, 배 교수님.

제가 아니라 베클린이요. 진드기 철학자 말씀이…… 읊어요? 아, 이 치즈의 향기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 맛은 낙원과 같구나! 얼마나 영양가 있는 음식인가! 내 집은 편안키도 하여라! 헤아릴 수 없이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여! 치즈를 만드신 그분, 우리 진드기를 위해 치즈를 창조하신 그분은 얼마나 전능하고 훌륭하신지!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의지요, 우리의 행복이 그분의 목적이다…….

그때 나는 배승한이 아니라 진드기 철학자라는 게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라이프니츠에 대해 나는 피상적으로만 알았을 뿐인데, 당대에도 프랑스에선 의견이 엇갈렸다. 디드로가 그를 플라톤만큼 치켜세우자, 볼테르는 철학소설 『캉디드』를 써가면서까지 드러내놓고 그를 비아냥댔다. 베클린은 철자도 모르는 생경한 이름이라서 찾는 데 한참 걸렸다. 제목은 「에담 치즈의 8층에 사는 진드기의 독백」이었다. 에담 치즈라면 진드기에게는 타워팰리스 정도는 되는 명품 집이다 싶었다.

은접시 위에 에담 치즈가 한 덩이 놓여 있고, 그 가까이에 촛불이 비추고 있다. 진드기는 치즈의 유기성분들이 내부에서 발효하여 생성된 생물체다. 꼭 그렇게 본문에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분명 대혁명 이전의 글이었고, 그러면 다윈을 한참 앞서는데도 ‘생성’을 말하다니 놀랍다고 생각했었다. 진드기들 가운데 한 철학자가 치즈와 진드기의 근원과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는데, 그때 은접시째로 치즈의 주인이, 한 신사가, 이 치즈를 먹으려는 찰나에 진드기 철학자의 독백을 엿듣게 된다, 그런 식의 재미있는 설정이었다.

어디엔가 내가 저장해 두었었는데? 못 말리는 조급증을 어쩌지 못하고 그만 일어나서 노트북의 폴더를 뒤져냈다. 파일 명 에담 치즈.

진드기철학자는 촛불을 찬미한다. 이 빛은 진드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로구나! 행복한 진드기들이여! 너희들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구성체들 가운데 중심이며 궁극의 목적이다. 빛은 너희의 기쁨을 위해 빛나고, 치즈는 너희를 위해 향을 풍기며, 치즈의 지방질 성분은 너희를 환락으로 초대하는구나! 바야흐로 이 연설가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할 참이다. 미래에 그 일부를 뜯어먹으면서 살게 될 치즈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진드기 형이상학의 수많은 기본개념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신사는 이 철학자를 그가 서 있던 강단과 함께 입안에 넣어 삼켜버리고 만다. 이 진드기 철학자는 교살자의 이빨 사이에 씹히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보존과 행복이 자연의 궁극 목적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푸훗. 그때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무슨 뜻으로 진드기 철학을 읊었을지 궁금한 내 꼴은 뭐냐 싶었다. 완전한 신은 그 행위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신은 항상 최선을 지향한다는 최선의 원리를 비웃는 그는 자유의지론자?

파독 광부와 간호원으로 돈 모아서 돌아온 착실한 부모, 어머니의 비밀 아닌 비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입양해야 했던 아픔, 그 아픔을 품어주고 첫아들로 키워낸 아버지. 유난히 키들도 작은 시골마을에서, 동네 사람들과 판박이인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훤칠한 서양아이로 자라나면서 느꼈을 형의 혼란. 멋모르고 순진했던 자신의 유년시절. 있을 수 있는 최상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상을 일찍 간파했을까, 형은. 친아버지를 찾아 독일로 떠난 형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지만……. 형은 아직 떠돈다, 무소식인 채로. 형을 찾아 형 따라 독일로 간 그는 독문학 박사가 되도록 형을 찾지 못했다. 그는 지방대학에 전임이 되었고, 언교원에 왔고, 그래서 만났고, 다시 독일로 떠났다. 그런 뒤에야 나는 그의 독일 해바라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독일에 가서는 얼마 지나서부터 내게 우편물을, 주로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그러나 꾸준히. 그러니까 자유의지로. 그가 찾는 형의 흔적은 브레멘에서 베를린으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까지 뻗쳤다. 그 또한 형을 찾아 거기까지. 그곳에서 형의 행적은 수상해졌다. 남미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형은 뉴욕에 두 번의 족적을 남겼지만 그 다음은 사라졌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형과 그가 차례로 찾아간 뉴욕의 한인은 서독 간호원 계약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취업해서 건너간 아주머니였다.

그 아주머니가 늦은 나이에 결혼한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 큰아버지였다는 우연을, 옥이가 자식 없는 큰아버지의 양녀로 미국인이 되었다는 더 거짓말 같은 우연을 그는 아직 모른다. 의지의 결과가 우연이라니. 그는 이 아이러니에 굴할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전근대적인 극이나 소설에서 가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엉뚱한 힘이거나 돌발사건이라고 비웃음 받을 우연은 또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독일을 거쳐 귀국한다고 말하고는 우편물을 하나 놓아둔 채 떠났다. 내 주소만 써둔 작은 소포를. 그것을 발견한 옥이는 수신인으로 기록된 내게 보냈다, 착실하게도.

내용물의 주인과 소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했다. 첨엔 이 장난스러운 혼란에 개봉을 미루었지만, 나는 곧 그에게서 연락이 있을 것을 믿었던 것 같다. 우연은 자신에게 발생하면 필연이 된다.

 

유예된 시간은 그의 침묵에서 비롯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돌아와 말이 없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어떤 마음으로 떨어져 있는 동안 이메일이나 우편물을 계속 보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와서는 이토록 침묵일까. 물론 그것들은 그냥 첨부파일이었다. 보관할 곳이 없는 물건을 퍼내듯이 보낸 메모 뭉치들에, 본문은 없었다. 그것은 그랬다. 모년 모월 모일, 모처에서, 아무개. 그 이상은 뭔가를 써 보낸 적은 없었으니까. 그 자신에 대해서 혹은 나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없어왔다. 아직 아닌, 유예된 관계는 한편으로는 유예된 삶이었다.

배승한이 떠났고, 메모들을 보냈고, 메모들이 쌓였고, 나는 그것들을 엮었다. 첨부파일들은 내 프린터에서 종이로 바뀌었고, 내 침을 발라서 종이들을 넘겼고, 내 손때를 묻혀서 글을 확인하고 다듬었다. 자판기의 비닐 커버가 구멍이 나서 버렸을 정도로 매달렸다. 원작자(?)와는 상의도 없이.

내 글이 혹여 『어둠의 자식들』처럼 성공하면 그가 저작권 문제를 거론할까. 하긴 그럴 염려는 없다. 그것이 단편으로 나간 지는 이태도 넘었고, 또 장편으로도 묶여 나갔지만 어느 중앙지 단 한줄 언급도 되지 않은 채 해가 지날 모양이니까. 또 그는 이철용이 황석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설 그런 것 나도 쓰겠다 싶어서 써가지고 완성된 원고를 통째로’ 윤문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설명 없이 ‘조사된’ 글들의 파편을 보내왔을 뿐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들을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리했을 뿐이다. 누구라도 아무런 맥락 없는 파편들을 보면 정리하고픈 생각이 났을 것이다. 시간차도 있었고, 시간 배열도 아니었다. 쉽지 않아서 심혈을 기울였고. 그러는 사이 글들은 나의 것이라 여겨졌다. 내가 여러 단어들을 배열했고, 내가 문장을 문단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아마 알고서도, 발표된 글들을 보았음에 틀림없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발표된 글 때문에 시작을 못하는 것일까.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발표된 글 때문에 시작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들에게 유예된 시간? 어디선가 들었던 말인 것 같아서 움찔한다. 그런 구절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학부 때였다. 우리 과에는 아직 없던 여성문학 강의가 독문과에 있었다. 그때 담당 여교수는 이름부터 전투적인 『계급과 사랑』 같은 작품들은 간략한 소개로 끝내고는, 잉에보르크 바흐만이라고 하는 작가에 몰두했다. 「유예된 시간」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독일어권 최초의 매체용 작가라고, 전후 50년대에 문학계의 스타였다고. 그러나 시는 시작 줄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님이 더 많은 설명을 곁들인 바흐만의 후반기 소설들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스타처럼 사적인 불행과 비극적인 죽음이 곁들여진 - ‘곁들여진’은 되돌릴 말이다, 이렇게 모독적인 단어들은 지워 마땅하다 -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졸업 후 파리로 직행한 나는 센 강을 보면서 가끔은 바흐만의 첫사랑 첼란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가 그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파리에 살며 독일어로 쓰는 시인 - 시는 심오하다 못해 해독 불능이라고들 했다. 두 시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었다. 따로 먼 데 떨어져서, 자살 그리고 자살 같은 죽음으로.

그런데 막상 시의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인터넷을 뒤진다. 유명한 시라서 금방 나온다.

훨씬 모진 날들이 온다, / 이의신청에 의해 유예된 시간이 / 지평선에 뚜렷이 모습을 보인다…….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제와 그 시의 제목이 갑자기 떠올랐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시를 표절하지는 않는다고 확신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배승한의 메모들을 표절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내 글의 출발이 그의 가족사를 정리하는 데서 비롯된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내 손이, 머리가, 그의 메모들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 그는 멀리에 나와는 무관한 세계에 있었다. 내 곁에는 교양한국어를 듣는 학생들과 가끔 전화를 하거나 불쑥 나타나는 이순규가 있었을 뿐이었다.

세상에!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쓰다니. 난 정말 혼자였음을 실감한다. 나는 일자리를 이유로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홀로 혼자서 살아왔다. 홀로 혼자서 - 이런 개념은 파리의 유학생활 이후로는 퍽 자연스럽다. 어떤 연관에도 불구하고 삶은 홀로 혼자서다. 어떤 의미에선 구원을 갈구하면서.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구원. 부재의 구원을.

 

구원 같은 것, 사실 우리는 그것을 이웃에서 찾지 못한다. 그 이웃도 구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멀리 있는 타락한 - 노동도 질서도 모르고 때로는 가족도 모르는 - 어쩌면 조금은 미친 사람들의 예술에서 구원을 찾는다. 정상적인 삶 속에서 예술혼이 불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외도 있었지만 그건 옛말이다, 폴 클로델이나 괴테나. 실제로는 광기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경우가 더 많다. 물감이나 테레빈유를 먹는 정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귀를 자른 이야기에 이르면 으스스하다. 여행 혐오증은 취미라 볼 수 있지만, 씻기 혐오증은? 예술가들에게서는 도덕 또한 평가를 비켜간다, 다분히. 랭보에 집착한 베를렌, 수많은 카사노바 행각들. 그들의 광기는 비난받기보다 우리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예술로 인해서. 예술이란. 예술이란.

광기 한 톨, 앙 그랑 드 폴리 -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최고의 것이라고, 고호가 동생 테오에게 그렇게 썼다. 폴 망츠의 <살롱 전> 비평문에서 비슷하게 인용해서. 그때가 서른두 살, 그리고는 겨우 5년 간 미친 듯 그렸고 가슴에 총을 쏘았다. 미쳐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도 귀를 잘라버린 이듬해 봄까지 그렸다. ‘캄캄한 어둠이지만 그조차도 색을 가지고 있는’ 밤을.

안락하고 안정된 삶을 위한 정직한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먹이는 데 그친다. 우리를,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안락하고 안정된 삶은 이론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안락하고 안정된 삶을 방해하고 얻는다. 재화가 한정된 이 세상을 떠올리면 그렇다. 또한 그 과정의 살얼음판, 그 외나무다리는 늘 불안하고, 그만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다스리기는 웬만한 철학으로도 어렵다. 뛰어내림은 자살이다. 그 사이에 광기가 자리한다. 조심조심 인내심을 가지고 걷기 아니면 그냥 뛰어내리기. 그렇다면 광기는 예술이다. 다음 발걸음을 좁은 길 위에 조심조심 내려놓기와 넓은 공간으로 몸을 던지기, 그 사이의 시간. 유예된 시간. 예술의 시간. 시의 시간.

순간 갑자기 그 이해하지 못했던 시구가 해명된다. 훨씬 모진 날들이 온다. / 이의신청에 의해 유예된 시간이……. 그건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판결이 완료되지 않았을 뿐, 처벌은, 힘든 날은, 예료되어 있다는 상황 아닌가. 물론 그 시에서 ‘모래가 연인의 죽음을 묻어버리는’ 혹독한 시련의 삶에 관한 이해도 부족했었다. 하지만 ‘유예된 시간’이란 단어를 어찌 그리 오래도록 이해할 수 없었던가. 혹독한 처벌의 운명, 이라고 했다면 쉬웠을 것을. 유예된 시간이란 참 고상하면서 어려운 말이었다. 시는 어려운 말로서 사람을 매어두는구나.

예술의 시간은 아니되, 내게도 그러한 유예된 시간이 와 있었다. 나는 소포의 개봉과 소포 발신자와의 만남 사이 유예된 시간을 왜곡된 자학으로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먼저 봉투를 뜯을 것인가. 그가 먼저 연락을 할 것인가. 정당한 게임은 아니다. 그는 소포의 존재를 아마 모르니까.

유예된 시간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자 매력이 사라졌다. 해치우자.

저 한금실이예요. 소포가 저에게 …….

저 한금실이예요. 보내시려던 소포가 저에게 …….

저 한금실이예요. 뉴욕에 버려두고 오신 소포가 저에게 …….

‘보내려’ 했었는지 ‘버리려’ 했었는지를 모르니 단어를 고르기가 어렵다.

저 한금실이예요.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래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소포라는 단어를 피해서 썼다. 이번에는 <전송> 위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어쩌자는 말인가. 입력된 문자들을 주르륵 지우고 만다.

 

금세 가을이 깊어졌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9월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을은 경계의 계절이다. 더위와 추위의 권력 다툼 덕에 일교차는 있더라도 보통 상쾌한 날들이 이어진다. 유래 없는 청백 하늘이 나타났다는 뉴스가 있었다. 한쪽은 완전 흰 구름으로 다른 한쪽은 완전히 파란 하늘색이었다고. 하늘까지 양분돼서는 안 될 터다. 그렇게 양분된 땅의 세상은 이미 고정되어 석회로, 시멘트로 굳어 있는데.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나 주말은 완전 늦잠이다. 먹지 않으려고 일어나지도 않은 채 노트북을 끌어다가 뉴스를 뒤적인다.

국내 최고가의 아파트 값이 나온다. 면적은 192.86㎡로 가격은 65억 원. 단위환산에 넣으니 58평이다. 한 평에 일억 원이 넘는다고? 나는 내 셈이 틀리기를 바란다. 그 비싼 너른 집들에 누가 살까? 그런 곳에서는 부모 모시고 대가족이 사는 일이 드물다. 불효여서가 아니라 그들 차원에서는 아무리 넓어도 한 공간에서 부모 자식 세대가 겹쳐서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생활이 더 있는지도 모른다. 세련된 감각도 보통사람들 보다 훨씬 더 예민해서 서로를 더 존중해서 따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서울숲 갤러리아 포레는 90평도 있다. 런던에는 2,500억 펜트하우스도 있다. 일억 원 하는 집 2,500채와 맞먹는 한 채. 이런 기사들에 아픈 나는 좌빨이 아니다. 이 구조와 셈법을 의아해하는 멍청이일 뿐이다.

보자, 최저가 아파트도 있다. 통째로 500만원이 못된다. 최저가 아파트 스무 채가 최고가 아파트 단 한 평 값만 못하다. 이 무섭게 저열한 인생이 차라리 부끄럽다.

하필 고흥이다, 이순규의 고향. 고흥 어디일까. 고흥도 넓다. 도화면이라고, 네이버 지도에 보니 도화면은 섬이 아닌 본토에 속한다. 이순규의 고향은 그보다 더 오지, 섬이다. 섬을 지나서 다시 섬. 연륙교와 연도교로 이어졌으니 섬 아닌 마지막 섬. 어쨌거나 나는 지금이라도 이 원룸 보증금을 들고 그곳에 가면 아파트를 살 수 있다. 이상한 뿌듯함이 비굴함을 덮는다. 하지만 두 번 씩 시도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간다는 것을.

적나라하지만 아기를 상상했을까, 그때? 아기는 실체다. 실체를 향한 유예된 시간. 아뿔싸. 아기를, 아기 갖기, 아기 낳기가 유예된 상황이라니. 유예된 아기. 전제가 텅 비었지 않나. 내 난자가 어떤 정자를 잡아야 내 아기를…….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수학공식에 대입하면 정자는 뜬구름이 된다. 뜬구름으로서의 정자. 정자는 뜬구름이다. 은유법. 대표, 내 마음은 호수다. 내 마음은 은유다. 내 마음은. 그렇게 그에게 갔었다.

마음 다져 먹고 - 표현이 좀 이상한가? - 배승한의 소포를 닫아둔 채로 이순규를 향했던 것은 아마도 조바심 탓이었을 것이다. 여자에게 불혹은 불임과 동의어다. 그런데 그날, 밝다 못해 뜨거운 대낮에, 나는 자발적으로, 자동적으로 물에 빠졌다. 한 팔랑거리는 여자아이의 치맛자락을 따라서. 그리고 그가 오기 전인지 그맘때인지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둘 다 변을 면했다. 멀쩡했다는 아이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내가 의식이 없는 채로 앰뷸런스에 누워 큰 병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후로 이순규는 좀 어눌해졌다. 역사를 줄줄이 외던 달변은 어디로 갔을까? 섬에 살면서 어부를 하지 않는 집안 내력이 되살아났을까? 분명 자신에게로 오고 있던 여자가 만나기도 전에 물에 빠졌다는 상서롭지 못한 일에 짓눌렸을까?

무솨서 다시고롬 올라고 허지도 않겄제.

어른들의 말씀을, 이순규는 내게 그렇게만 전했다.

이태 전에 그가 작심하고 낙향했을 때에도 근심 반 걱정 반으로 대했더란다.

뭔 일이랴, 느그들이라도 나가서 터를 잡고 살어야 하는디.

여그서 어짤라고. 누가 여그까정 와서 산다고 그랴.

나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의 걱정을.

뭔 마전이다냐. 처녀가 왔다믐서.

오면 뭔 소용이여, 지대로 왔어야 말이제.

뭔가 인연이 가당찬흔게 그랬겄제.

그려, 없던 일로 해사제.

근디 약혼자였당가?

아니 거까장은 모리고.

집안이며 동네 어른들은 겁을 냈을 것이다. 사고를 듣고서 하늘이 막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우린 약혼자도 아니었고, 사랑은 더욱 아니었다. 선을 보는 문화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결혼 시장이 공공연한데, 왜 꼭 사랑과 결혼을 엮는지 모르겠다. 아이 낳아 기르는 데는 결혼만한 좋은 장치가 없다. 성적 충동과 겹치면 금상첨화겠지만, 건강한 젊은 남녀가 서로 웬만하면 가정을 이루지 말라는 법이 없다. 어차피 오랜 사랑 기간을 거쳐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변함없는 나 - 그것부터 허구다. 하물며 누군가를 믿어 의지한다는 것은 치기다. 따뜻하고 듬직한 이순규는 참 괜찮은 후보감이었는데.

미운사위국이라는 매생이국, 우리 섬 특산인데요.

미운사위국?

안 이쁜 사위놈 오면 뜨거운 매생이국 끓여서 골탕 먹인다, 그 말이요.

사위가 미워요? 우리 제부는 아닌데.

요샌 더하지요. 사위는 그저 돈 잘 벌어다 앵기고, 집안일 잘 거들고. 뭣보다 마누라 말에 꺼뻑 죽어야하는데, 백점 만점 사위가 흔컸나요? 암튼 우리 섬엔 미운며느리국은 없으니까 안심하시요.

그는 이런 이야기들을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산이며 숲이며 그 나무들, 300년도 넘은 잣밤나무 몇 백 그루, 둘이 팔을 벌려야 안는다는 동백나무들. 나는 어느새 나로도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 봉래면에 발을 딛고 나서야 내가 난생 처음 이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했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배가 고파서 점심이 급했다. 잔치국수에 고춧가루 듬뿍……. 그제서 전화를 했고, 곧 물에 빠졌다.

 

금줄 - 산모가 있는 집에 쳐놓은, 숯과 가끔 고추도 달린 금줄 앞에 선 느낌이 이럴까. 나는 거부되었다, 그것이 그 느낌이었다. 금이 그려져 있으면 기어코 넘어가고 싶은 호기심도 욕구도 없는 나는 늙은이일까?

깨어났을 때, 다시 삶이 지속됨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오래도록 색 바랜 병실에서 몇 년 전에 보았던 천지의 검푸른 물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회복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돌아서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환생의 기쁨보다는 책임감 같은 것, 또 한참을 살며 결정하며 그런 일을 되풀이해야 하리라는 막연한 지루함 같은 것이었다.

설마 내게 남은 다른 가능성으로서 곧 바로 배승한의 낡은 소포를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스스로 우긴다. 몸이 거부되었다고 곧바로 맘을 쫓을 만큼 내가 양손에 떡을 쥐고 저울질하는 인간은 아니고 싶었다. 내가 남자를 찾아 섬에 갔다가 사고로 죽을 뻔했다는 것 - 그것을 풍문으로라도 그는 알고 남을 터였다. 작년 가을학기를 접었는데 모를 리 없다. 흉한 소문만 남기고 사라졌던 나를 두고 그는 어쩌면 일종의 마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개봉 못 하고 있는 소포뭉치를 감싼 아우라가 맴돈다. 황동규의 ‘어제를 동여맨 편지’같은 것일까? 단순히 유예된 시간일까?

우연히 마주친 농게로 하여 나는 나의 유예된 시간을 보았다. 농게와 내게 똑같은 의미의 유예된 시간을. 간장게장 속에서 살아나온 농게와 물속에서 살아나온 나. 대야 속의 농게와 원룸 속의 나. 나는 농게다. 농게는 나다.

사실 올 여름 농게는 사건이었다. 승연이 승주는 처음 얼마 동안은 거의 날마다 분농이 소식을 전했다. 바닷물 농도를 맞추려고 책을 찾아서 3.5% 소금을 넣었다는 자랑이 생각난다. 제부는 3.5%를 정확히 맞춰줄 사람이다. 주먹보다 큰 돌도 두 개나 넣어주었다고 그랬다. 숨기도 하고 또 물에서 나오고 싶을 때 나와 있으라고.

내게 필요한 산소 농도를 맞추려 애쓰는 사람은 없다. 내 방에 들어오는 공기에는 가깝게는 아래층 남자의 담배와 누군가의 찌개 냄새가 묻어든다. 창문 아래 자동차 매연의, 멀리는 가축농장의 오염물질로 적셔진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산소 농도에 무심하다. 그러니 분농이만큼도 보살핌을 못 받는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우리 모두가 은접시 위 치즈 덩이 속에서 생성된 진드기들의 운명은 아닐까? 지구 째로 우리를 삼켜버릴 거인은 원전 폭발일까? 억눌린 사람들의 자폭일까? 오늘날 잘나가는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맹신자들도 포함될까? 우리에게 유예된 시간은 얼마일까? 유예된 시간이 있기나 할까? 나는 불혹이 되도록 살아보지도 못한 나의 삶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 인류를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빠져든다. 비혼여성세입자, 대한민국 400만 넘는 1인가구의 한 사람으로 최저생계비 월 61만7281원을 벌어야 하는 코앞의 사실을 잊다니.

아서라, 자기연민은 최악이다. 털고 일어나자. 살아있음에 탄식도 한다. 살아있음에 먹이를 탐한다. 기상을 하지 않아도 깨어있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나는 더위와 추위와 배고픔 등 감각의 총체에 불과하다. 흄의 말이던가.

바깥의 흐릿한 해가 따뜻한 빛으로 변해있다. 시간이 한참 되었다 싶다. 그만 이불 속에서 나와서 아점을 해결하려다 분농이 생각이 난다. 다시마를 정말 먹을까? 두 달인데, 아직 살아 있을까? 독감방에서 교도관이라도 그리울 완벽한 홀로서기, 아니 홀로 기기. 일단 사형집행에서 풀려났으니 행복해할까? 유예된 시간을 설마 원망할까? 물도 먹이도 있으니까 지루한 시간에 사색도 철학도 하지 않겠는가.

물을 끓이면서 안부문자나 넣을까 싶어 폴더를 연다. 아차, 거기엔 오다가 만 문자가 들어있다. 한금실 샘, 저 배승한입……. 단 한 줄만 뜨다가 사라진다. 뭣 하러 이름 부르느라 이름 소개하느라 겨우 보이는 한 줄을 다 써버린단 말인가. 메모리관리자가 말한다, 메모리가 부족합니다…….

풀더폰이라서 문자 수신 못 했슴다. 설마 그런 답을 쓸 수는 없다, 이 유예된 시간의 끝에. 무심한 폰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푸른빛을 내뿜다 사라진다. 또 하나의 금줄을 느낀다.

 

『한국소설』 2015-1-186호 139-156쪽

 

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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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2011. 10. 24. 22:56

        배달민족          
 


한 선생님!

…….

아홉 명입니다, 아홉.


가볍게 젖은 어깨를 털며 들어선 나에게 언어교육원 직원이 걱정부터 터뜨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쪽 책상에 앉아있던 그 남자는 괜스레 조금 허둥대고 있어 보였다. 그가 미안해 할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 미안해 할 일이 전혀 없다. 영어 세상에서 소외된 같은 제2외국어 권이라 해도, 일단 언어가 다르면 전공이 다른 것이다. 전공이 다르면 다른 쪽의 불행(?)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수 없다. 전공이 같아도 마찬가지다. 학계에서 살아남고 아니고는 도통 운수소관이었다. 그는 다만 소문만으로도 나를 안 되었다 싶어 하는 것이리라.


나에 관한 소문은 좀 초라하게 났을 것이다. 모교에서 버림받은, 한 때의 유망주면 뭣하나. 서울의 적당한 모 여자대학의 1회 졸업생. 외국 유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모교 강단으로 강사가 되어 돌아왔다. 8년 전 일이다. 그 당시 한참 돌아오던 해외파 박사들 틈에서 혜성처럼은 아니라 해도 충분히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인 줄로 알았다. 더구나 어느 대학이건 1회 졸업생은 유리한 고지를 반쯤은 점령한다는 통념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우수 대학들의 우수죽순격인 잘난 박사들보다, 사람들은 오히려 나의 밝은 미래를 점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은사님들이 연이어 정년이 다가왔다.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동안 저 아래 후배 하나가 역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 세대는 지성과 미모를 한 데 갖추는 세대였는지, 나의 비위로는 너무 여자 같아 보였다. 필시 학자적으로 부족할거라 단정하고 미리 얕잡아 생각했었나 보다. 선거는 마지막 한 표까지 개표가 끝나봐야 알고,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고 했다. 경력으로나 학자적 줏대로나 앞섰다고 자만했던 내가 후배에게 패했다. 이태 전 일이었다. 그제야 모교를 떠나고자 다른 대학의 문을 두드릴 생각을 해보니 학력에서 밀렸다, 유수한 대학들의 이름에 눌려서. 일단 서울을 떠날 요량으로 지방대학을 기웃거렸다. 안쓰러워하는 눈길들을 도망쳐 나오는 데는 성공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오늘 이렇게 참담하다. 봄비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에서 쉰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실내조차 축축해진다.


한 선생님, 아홉 명입니다. 벌써 네 시가 넘었는데요.


직원은 다시 말했고,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홉 명이면 폐강인 것을 누가 몰라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인문학 중에서도 그래도 외국어 강의는 도구과목으로 조금 쓰이고 있다 했지만, 그것도 나라 나름이다. 그러니 전국의 대학에 OO정보통신영어대학교 라는 간판을 갈아붙여야 할 지경 아닌가. 영어 일변도에다 최근에는 협력 수완으로 중국어와 근동의 언어들이 외려 주목을 받는다. 나는 점점 굳어지려는 입을 여는 대신에 눈을 들어 시계 쪽을 향한다. 무정한 시계는 멈추지 않고, 더 이상 사람은 올 것 같지 않다.


방법이 있어요, 궁여지책이지만. 우물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그가 등록을 했다, 엉뚱한 과목에 아주 엉뚱한 방식으로.


사무직원과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그가 제2외국어 팀장 배 교수였다. 오해하지 말라거나, 무안해 하지 말라거나, 그런 언급도 없었다. 이 엉뚱한 일을 호의로 해석한다? 강의 담당자가 속수무책이므로, 팀장이 책임진다? 규칙에 따르자면 폐강일 것을 면하는 일, 제2외국어 팀장이 그 일을 했다. 그것을 호의라 보면 호의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치명적인 모욕감을 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왔다. 밴댕이 소갈머리가 뒤틀렸다. 이튿날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서 폐강신청 절차를 밟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밤사이 구세주가 생겼나 보다.


한 선생님, 괜찮게 되었어요. 다 저녁에 등록을 하신 분이…… 컴퓨터로요. 바로 입금까지도 끝냈고요.

…….

열 한 명이 되었다니까요. 괜찮아요, 제2외국어 쪽은 보통 늘 그래왔어요. 이만한 수로 설강하는 대학도 드물 거예요.

그래도 이건.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마음 쓰지 마셔요, 배 교수님이 좀 고지식하세요. 아직 경험도 적으시고. 일단 폐강을 막는 것을 책임으로 아셔서 그러시는 거죠.

그럼 다시 명단에서 빼셔요. 당분간 얼굴 마주칠 일은…….

얼굴 마주치지 않으면?


그렇게 시작된 그와의 만남은, 어찌 보면 호의요 다른 한편 모욕이라는 이율배반으로 시작되었다. 애초 큰 규모의 조직체 안에서 데면데면 지낼 인연이었다. 도무지 인간과는 관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부만을 한답시고 살아버린 청춘이 이제와 안쓰럽게 돌아올 리도 없고.


나는 겨우 일 년을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드디어 겨울 강의가 펑크가 났다. 여름이면 저녁 시간이 겨울 들어서는 오밤중이 된다. 무슨 억척으로 늦은 시간 제2외국어 강의에 나방이가 꼬인단 말인가. 매번 폐강이 될까 말까를 애태우며, 불안정한 수입에 매달려 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도 불쌍했다. 나는 아예 그만 둘 생각으로 담당인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 송구영신. 이렇게 옛날사람이 되어갑니다. 다른 곳을 향해서 걷는 느낌이면서…….

받은 문자함에 메시지가 떴다. - 지상의 삶은 또 다른 별에서 만날 인연… 추위에 건강…

받은 문자함의 답은 반쪽짜리 줄임표까지 합쳐도 겨우 54자. 간단한 말로는, 이제 다른 별에서나 봅시다. 옳은 말이다. 이승에서 더는 볼 일은 없다! 지나간 인연은 지나간 인연이다, 악연이든 아니든. 악연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 일도 없지만, 좋은 인연이라고 해서 늘이려고 하면 그 성격이 변하고 만다. 짧을수록 좋은 것은 미니스커트와 연설이라더니, 거기에 인연을 더해야 할 것 같다.


그렇습니다. 옛사람은 지나가는 겁니다.

눈으로만 문자를 쓴다.

다른 별에서나 만날, 이승에선 다시는 볼 일 없을 사람에게 건강은 무슨.

건강은 무슨. 그런데 이렇게 예의바른 민족이 우리민족이다. 배달민족.

그리고 갑자기 화두가 떠올랐다. 내가 만일 소설을 쓴다면 첫 소설의 화두는 바로 배달민족일수도 있겠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일 테니까.

웬 소설? 혼자 쓸쓸히 웃는다.

소설을 아무나 쓰나.

하지만 평생 소설에 관해서 매달리어 온 것이 전부인데, 달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옮겨가고 싶은 고장도, 눌러 있고 싶은 생각도 정리가 안 된 채.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책장이 붙은 책상 하나가 전부인 원룸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불 하나를 끄면 암흑이다.


그렇게 세월이 가던 봄날이었다. 6년간의 모교 강단이 아리게 어른거렸다. 분홍 빛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었구나. 지방대학의 시간은 부질없었다. 아예 강의를 잃은 봄은 말 그래도 나른했다. 잔인한 사월? 사실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습관처럼 이메일 박스를 열다 눈에 띈 그의 이름. 그에게 무슨 일이? 결혼 소식? ‘배승한’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에서 상상되는 것은 그에 관한 어떤 소식일까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설마? 다행스럽게도 - 다행스럽게도? - 그것은 그에 관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의 결혼 소식도, 사고 소식도. 실망스럽게도 또한 - 물론 내가 그로부터 편지를 기다린 적은 없다 - 그것은 그의 편지도 아니었다. 편지글이라면 있어야 할 서두조차 없는 글. 어떤 의미에선 그것들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확증도 없었다. 우편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 문자 메시지가 이렇게 짧을까? 메시지보다도 짧은 이메일.

그리고 우편물이 도착했다. 가끔은 수첩에, 가끔은 작은 노트에. 다만 메모조각들. 담화표지를 완전히 무시한 글. 글이라고 할 수도 없는 메모. 메모의 연속. 혼란된 메모 조각들. 왜 이것들을 나에게? 그러나 나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정렬해야 하는 숙제를 안은 느낌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정리한 것은 그의 메모 순서가 아니다. 메모에 날짜가 불분명했다. 날짜는 대개 있는 편인데, 가끔 연도가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순서를 덜 헷갈리게 하려고 애를 쓴다. 가능하면 시대 순으로. 그의 아버지의 과거에서부터 그의 현재를.


*


아버지, 파독광부


그는 독일 태생이었다. 그가 독일에서 태어나게 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1970년대 한국판 엑서더스, 노동 엑서더스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해외파견노동자 일세대로 독일에 나갔다가, 아내와 아들(?) 둘 사이에서 줄타기 삶을 살았다.


그의 메모에는 객관적인 자료들로 넘쳐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자료들과 아버지의 삶 사이에서 무엇을 찾으라는지. 해외파견노동자라면 대개 사우디에 파견된 건설노동자들을 생각하지만, 최초의 해외건설사업은 1965년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에 진출한 것이 시초였다. 그보다 앞서 1963년 12월 20일에 이름 하여 서독광부 파견을 위한 결단식을 치른 250명의 대한민국 국적의 남자들이 선발대였다.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뽑힌 젊은 광부들은 서독의 채탄기술을 배워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이튿날 1진 120여 명이 서독으로 출발했다. 그러니까 1963년 12월 21일, 중학교 책에서 들어봤던 루르탄광지대를 향해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에어프랑스 기내에는 123명의 광부들이 타고 있었다. 월급이 162달러 50센트로 계약이 되어 있으니 두려움은 설렘에 녹았다. 지엔피가 80달러 이쪽저쪽일 때였으니 기가 막히는 수입이었다. 그때 1달러가 한국 돈 250원인가 260원 정도였으니 어땠겠는가. 한국은 여전히 열에 세 명은 실업이었고, 통계가 그렇지 사방에 널린 것이 실업자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0년대에 수천 명의 우리나라 광부들이 서독으로 진출했다. 1967년 이른바 서독 간첩사건으로 서독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광부파견이 중단됐지만, 이후 70년대에도 우리나라 광부 수천 명이 서독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 배 아무개 씨는 1971년에 스물 네 살의 나이로 독일의 탄광으로 흘러 들어갔다. 첫 지망을 망설이고 소위로 못 박았던 형이 5000원도 못 받는 월급을 한탄했던 일을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그때 군 동기 중에 서독광부로 간 친구는 근 열 배의 월급을 받는다던 형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었다. 그뿐이 아니다. 1965년 10월 그 이름도 용맹한 육군 맹호부대 파병에 자원했던 형은 그곳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긴 긴 일 년이 지나고 어느 날 106 후송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고 전갈이 왔다. 그러니까 1967년 4월 중순 경 치탄의 308고지에서 의식을 잃고 후송된 것이 마지막 행적이었다. 행불자가 된 것보다는 낫다고…… 보고된 것이 전부였다. 행불자라면 시신을 수습하거나 확인하지 못한 미 귀대병을 말한다고 했다. 더욱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을 수도 있었으니. 그러나 얼마 뒤 두코전투의 주역이었던 같은 맹호부대 기갑연대 x중대 y소대장은 복부 관통상과 머리, 팔 등 엄청난 총상을 입고 전장에서 의식을 잃었지만 몇 주 후에 의무중대로 살아 돌아왔다는 기적 같은 소식도 있었다. 목숨만 붙어 들어오면 반드시 살려낸다는 미군 이동외과 병원 덕택이었다고. 운명의 여신의 심사를 누가 알랴. 그때는 형이 미군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했던 것이 한이었다. 미군은, 형의 편지에 보면, 적의 시체들도 한 데 모아 덮어서 장사를 지내준다고도 했었다. 다른 증언들에 따르면 더러운 짓도 했다지만.

어쨌거나 집은 형의 죽음만 빼면 다른 것은 더 나아졌다. 미국은 한국군을 차출하기는 2차 대전의 일본과 마찬가지였지만, 대우에서는 크게 다른 나라라고 여겨졌다. 일제 때의 초근목피 대신 미국과 관련해서는 곁에 가면 떡고물이 있었다. 형은 죽고 떡고물이 남았다. 그가 대학 문턱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형의 떡고물, 형의 죽음이 가져온 떡고물 덕이었다. 문제는 형의 죽음을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폐인처럼 몰골이 변해갔다. 형의 죽음 값으로 산 논밭을 어찌 벌어먹느냐고, 건사를 못하시더니, 결국 아무렇게나 다 넘겨버렸다. 가세는 다시 기울었다. 그래서 그가 떠났다. 1971년 독일로 떠났던 그가 1976년 말 돌아올 때만 해도 환율이 500원쯤이었으니 일단 그 돈은 대단한 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


이역만리에서 한국 남녀들은 그나마 동포끼리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교회의 선교활동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게 독일교회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보는 곳에서 나는 아내를 만났다. 저녁이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촐한 한식식사가 우리들 마음을 녹여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유난히 영이 순이의 얼굴이라서 눈에 띄었다. 내 눈에 띄었다. 아내 옆의 여자가 고급공무원 중에서도 지원해서 서독간호원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강조했다. 첫 파견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아내도 그 대단한 분 이야기를 지금도 심심찮게 한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그 양반은 지금도 한의약박물관에 자원봉사를 나가 안내를 한대요. 자원봉사 경력은 무려 20년도 넘고, 봉사시간만 따져도 3만 시간이 넘어서 ‘서울을 빛낸 인물 600명’인가 그런 어마어마한 기록에 들어 있다더라고요. 기네스북보다 나은 것이, 남산 서울타워 아래 타임캡슐로 보존된다나요. 텔레비전에도 나왔고요. 암튼 첨에 간호고등 나와서 동두천의 외국사람, 미국은 아니고 어디 외국사람 야전병원에 취직해서 서양말을 배웠다느만요.

누가 뭐래요, 능력이야 타고 나는 것이제.

아니, 의사들이 영어를 쓰니까 저절로 배웠기도 허겄지요.

암튼 공부를 더 해가지고 나라에서 필리핀인가 어딘가로 유학을 보내주어 또 공부를 하고 그러다보니 보건부라던가 그런 데서 공무원이 되었대요. 그런데 여보 들어요?

그래 내 가만 들을 테니 마저 해봐요.

그런데도 서독에 젤로 먼저 갔더래요. 일단 돈을 더 받으니까. 그 양반 참 대단한 것이, 결혼도 했는데 갔더래요. 아무리 서양말이라도 다 같은 건 아닐 테니 고생했겠지만, 어디 아예 외국말 깜깜한 우리하고야 같았겄어요.

당신은 어쩌다가 ……, 그래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나는 지쳐서 떠났다니까요. 어디에서도 지쳤더랬어요. 워낙 시골이다 보니까 곰수리에서 대처로 나와 고등학교 공부했으니, 것도 대단 했죠. 그래도 중고등 6년을 자취하면서 다녀 봐요, 늘 지쳐있었다니까. 빨래와 밥해 먹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된장까지 직접 담가 먹어봤나요?


첨에는 아내의 이야기 중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더러 있었다. 어린 나이에 살림을……. 나중에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나는 진짜로 날 낳아준 엄니가 다른 식구들 눈치봐가며 꾹꾹 눌러주는 밥을 먹고 자랐으니까.


난 일찍부터 독립한 거요, 쌀만 가져다 묵었제. 자취할 때 한 방 쓴 친구도 일가는 일가였어요, 같은 고향. 부락은 달라도 같은 성씨에 같은 고향이었죠. 그런데 제 외사촌언니 자랑이 시끌벅적했어요. 그 언니가 외국에서 돈을 번다고요. 서독이라는 나라에 간호사로 취직했다니.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귀가 번쩍 했다니까요. 서독이 뭐예요. 독일, 독일, 라인 강의 기적 독일. 아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외국 아녀요? 일본도 중국도 아닌 진짜 외국? 정말 아무나 무엇이 되는구나. 당시는 신문에 서독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와 간호보조사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매일 실렸어요. 그때는 큰 병원의 정식 간호사들도 대우가 좋다는 소식에 독일 취업을 신청하는 분위기였고, 막 고등학교 교련교사 발령을 받았는데 우리가 탄 비행기에 함께 타고 간 선생도 있었다니까 그래요.

그래 누가 뭐라요.

아내는 허리를 세우는 척 하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는 것이리라.



어머니 


유순한 사람이 되라고 붙여준 이름을 가진 유순은 유순했다. 그 또래의 고향 여자아이들은 다 유순했다. 사촌들이 일찍 대처로 나가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유순 또한 일찍 중학교 시절부터 대처로 나와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만, 이번에는 사촌들처럼 서울까지는 따라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유순을 다시 고향으로 유혹하는 것은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찾은 돌파구는 바로 서독 행이었다. 간호원양성소를 수료한 후 서울에 있는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서독병원 취업을 지원했다. 그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병원 측에서 취업허가가 나오면 독일취업비자를 신청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석 달이나 독일어를 배워야했다. 지방의 여고에서 독일어를 2년이나 배웠다는 사실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독어공부는 뒷전이었었다. 1, 2학년 때에는 서독 간호원 생각을 미처 하지 않은 때였고, 영어 다음에 또 배우는 외국어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때 열심히 따라하지 않았던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단어나 문장들이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라도 있었다. 생판 독일어를 모르는 다른 이들을 보면서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구텐 타크, 이히 코메 아우스 코레아. 이히 프로이에…….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만나서……. 다른 사람들은 ‘코레아’란 발음도 틀렸다.



어머니의 이야기


1972년 11월 30일이었다. 그때는 김포공항에 가보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나 같았다. 우리 마을에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떠나 본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전세비행기라 했다. 비행기에도 전세가 있나? 어쨌거나 전셋집이 그냥 집만 못한 것처럼, 전세비행기는 그냥 비행기만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만 비행기가 어쩌면 좋은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전세라면 온통 우리만 탄다는 것이란다. 그런데 우리나라 비행기가 아니고 일본 비행기였다. 일본비행기라면 더 나은가? 그땐 분명 뭐든 한제보다는 일제가 더 나았다. 비행장은 북새통이었다. 우리 같은 간호보조사와 진짜 간호사를 합쳐서 250명이 타고 갈 비행기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이 두 배는 넘었다. 우리 식구들은 없었다. 3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나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큰집에 계시는 할머니께는 인사를 갔지만, 3년 그런 소리는 잘 못 알아들으실 만큼 귀가 먹었으니까. 어머니, 동생들의 어머니한테는 3년 뒤에 오겠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3년 뒤에 오는 것은 나도 잘 몰랐다.

버스 보다 몇 배나 커 보이는 비행기에 질렸다. 지레 겁이 났다고 해야 맞다. 가벼운 연도 가끔은 곧장 가라앉는데, 이 무거운 것이 어떻게 뜰까? 그런 염려를 뒤로하고 비행기는 구름 속으로 둥실 떠올라 들어갔다. 비행기는 정말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물리시간에 배운 무엇인가를 실제로 경험하기 위해서 용을 쓰고 느낌을 갖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북극이다. 알래스카. 어쩌면 내가 북극에 오다니. 밖으로만 내다 본 북극이 아쉬웠다. 그 매서운 공기를, 북극의 겨울 공기를 꼭 만져보고 싶었는데. 그냥 쉬기만 한 비행기는 다시 이륙하여 마침내 12월 1일 드디어 독일 땅에 착륙했다. 그곳은 이름이 프랑크푸르트, 지금도 유업의 돈이 넘실대는 곳이지만, 그 때는 세상의 중심인 듯 했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어딘가로 흩어질 모양이었다. 또 한 번 어수선한 수속을 마치고 모두 쌕쌕한 짐 가방을 들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온 데 서독 지역 병원에서 온 버스며 승합차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들 몇은 당나귀 음악대로 유명한 곳 브레멘으로 갈 것이었다. 버림받은 당나귀, 개, 고양이 그리고 수탉의 처량했던 출발을 상상하며, 또 멋진 결말을 우리 것인 양 상상하며, 의기양양하게 승합차에 올랐다. 정확히는 우리가 브레멘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브레멘까지 가기 전에 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못 미친 빌데스하우젠이라는 도시에서 멈췄다. 한 번 멈췄던 시간을 빼고도 다섯 시간 이상을 달린 뒤였다. 산간과 숲에 둘러싸인 곳으로, 가보지도 않은 강원도 어디 쯤 같은 곳이리라 느껴졌다. 그러나 초가집이나 판잣집 대신 어딜 가나 빨간 지붕들이 초록빛 나무들 사이에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누군가의 집이 불쑥 커서 뒷집의 햇빛을 몽땅 빼앗아버리거나 그러는 일이 없어보였다. 희한했다. 일곱 난장이들처럼 똑 같이 작달만한 키의 집들이 일곱 여덟 씩 있었다. 바깥 창틀도 약속이나 한 듯이 동네마다 밤색이면 밤색 흰색이면 흰색이었다. 그건 참 신기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보름 전쯤 시간당 200킬로미터가 넘는 태풍이 몰려와 건물이며 차량이며 완전히 망가진 일들이 널렸더란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태들을 알지 못했다. 기숙사에 갇혀서? 그랬다. 기숙사에서 단 하루를 쉬고 월요일부터 근무에 들어갔다. 1972년 12월 4일 월요일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시간이 늦게 간다고. 이상한 체험이었다. 물리 시간에 배운 그대로, 고향의 할머니는 벌써 오후 곁두리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서둘러 일어났다. 사실을 거의 밤을 새웠는데, 그게 시차랬다. 그리고는 새로운 시간에 새로운 공간에 갇혔다. 그냥 부품나사처럼 시계추처럼 건물 안에서 건물 안으로만 이동했다. 뉴스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컬러텔레비전이라는 것이 나온 지 몇 년이 안 되었고 참 신기한 것을 틀림없었지만,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구텐 타크’, 그건 별 소용이 안 되는 독일어였다. ‘구은 타, 타’ - 그렇게 여기에 와서 배운 독일어가 더 유용했다. 아니, 아예 어색한 웃음기가 더 잘 통했다. 검은 머리의 우리는 백의의 천사였다. 미소는 사람을 천사로 만들어주니까. 사람들, 독일 사람들은 천사에겐 슬픔도 고통도 없는 것이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슬픔이나 고통 같은 무거운 감정들은 없는 인형 취급을 받았다.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부지런한 인형.

때로는 인형이 복도 터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일가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독일할머니가 죽었는데, 침대 머리맡에 넣어둔 종이돈 다발을 몽땅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그냥 슬쩍 갖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병상의 할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뭐라고 하던 말 중에, 우린 몰랐지만, 미리 옆자리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더란다. 자기가 죽으면 아무개 간호원 주라고, 평생 처음 손톱발톱 깎아주는 젊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고. 실제로 서양 노인들은 너무나 뚱뚱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러면 자신의 발을 만질 수가 없었다. 영락 그림책에 나오는 마귀할머니 몰골이 되어있는 손톱 발톱을 깎아 주는 일은 우리들에겐 어렵지 않았다. 나도 할머니한테 가면 늘 손톱발톱을 깎아드렸었다. 그만 한 일에도 이 할머니들은 ‘당크 당크 힙시 힙시’ 그렇게 우물거렸는데, 고맙고 예쁘다 그런 말인 것은 나중에야 알아들었다.

물론 그런 일들은 한 참 뒤에 병실에 배속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처음에 우리들 간호사도 아닌 간호보조사에게 돌아온 일은 응급실과 영안실 사이 심부름이었다. 일이 별로 없는 날에는 응급실과 영안실의 깨끗한 의료집기들을 다시 닦는, 해도 안 해도 되는 일을 할 때도 있었다. 다 씻은 식기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제거하는 일 같은 것은 너무 쉬웠다. 이런 일 시키려고 비행기 태워서 사람을 사오는지, 그 부자 나라가 한심하기도 했다. 물론 알코올 솜으로 시체 닦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쉽고 편했으니 오지기만 했다. 나중에 병실에 배속되었을 때에도 간호보조사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간호사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병실을 찾아가 장갑을 끼고 환자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일은 그 중 일다운 일이었다. 양국에서 병실로 약을 가져다주는 일, 변기를 대주는 일, 변기를 빼내는 일, 환자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일, 식사를 거두어들이는 일. 아, 나중에 들으니 전설적인 아줌마 간호사들도 독일에서 일했다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여섯 모두 처녀들이었다. 어쨌거나 꿈 많은 처녀들. 우리는 말썽 없이, 사랑까지는 아니라도 귀여움을 받을 만큼은 열심히 일했다.


정말 어색했던 일은 우리가 그 나라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일이었다. 열흘 쯤 되었을까, 아무튼 얼마 만에 우리 여섯을 한 곳으로 부른 병원관계자는 우리에게 서양식 이름을 하나씩 지으라고 했다. 환자들은 물론 병원 사람들이 우리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제대로 부를 수도 없다고 불평을 하기 때문이라 했다. 성을 갈라는 말은 다행히 아니었지만, 우리는 저마다 아는 독일이름을 생각해내야 했다. 나는 생각나는 이름이 성모 마리아밖에 없어서 마리아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리아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할 수 없이 언니뻘에게 양보를 하고서 메리라고 하려다가 사람들을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그게 그것이랬다. 아무튼 독일소설 어딘가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떠올라서 그냥 루이제가 되기로 했다. 마리아, 루이제, 사라, 엘리, 주잔, 로테. 이 무슨 이름들인가, 누런 얼굴에 물고기 눈을 한 검은머리의 처녀들이. 하긴, 여기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어차피 서양식 이름으로 따라야 했다. 그건 그랬다. 고향 친구 중 언니 하나가 한국에서도 유난히 그런 서양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았다.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서 루이제였다.


최근 들어서는 그 독일에서 외국인 거주자들을 아주 색안경으로 보는 풍조가 생겼다 해서 놀랐다. 참 웃긴다 싶다. 그때는 아쉬워서 데려가 놓고, 이름까지 저희들 식으로 고쳐 불러놓고서, 거기 뿌리 내리면 미워하다니. 우리들 중에는 그곳에 남아서 출세한 사람도 있다. 또 가끔은, 아주 가끔은 늦은 나이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열성파들이 있고, 그렇게 해도 성공하기도 했다. 아무튼 성공한 경우라면 꽤 유명한 화가가 된 사람도 있으니까, 물론 독일이름으로. 독일이름이란 독일남자와 결혼해서 생긴 이름이다. 연애가 상당히 인생을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이 독일남자와 연애를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연애 - 우리는 물론 사랑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싶지만, 사람들은 그냥 연애라 그랬다. 마리아, 루이제, 사라, 엘리, 주잔, 로테가 모두 연애를 했다면 그 말은 틀렸다. 누가 연애를 하는지는 금세 드러났지만,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내밀하게 알지도 못하니까 말할 수도 없다. 독일남자 조심해라, 연애로 끝나고 마니까! 그것이 우리들에게 내려진 금기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용돈이 많이 들고, 용돈을 아껴서 고향에 보내려고 타국에 온 그 목적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독일병원에 취업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들어간 돈부터 갚아야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돌아가신 집안은 누군가가 일으켜야 했다. 그때 돈 400마르크씩은 누구나 집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용돈으로 50마르크 정도를 남겨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아껴서 현금이 불어났다. 돈을 쓸 일이 없었다. 고사리를 뜯어 말리다 냄새 때문에 혼이 나기도 했지만, 우리는 억척스레 먹을 것도 아꼈다. 병원식당에서 먹을 때 많이 먹어둠으로서. 그렇게 1년 쯤 지나자 고향집에 텔레비전을 사드릴 수 있었다. 누구나 대개 그랬다. 딸을 독일 간호원으로 보낸 고향집은 활발해진다는 것이었다. 정신을 다잡고, 연애 같은 것은 말아야 했다.


그래도 3년 째 되던 해 여름, 우리도 독일 간호원들처럼 난생 처음 휴가라는 것을 떠나보기로 했다. 말하자면 유럽여행이었다. 하필이면 우리는 독일의 북쪽에 쳐 박혔으므로, 독일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남쪽을 향하기에는 돈이 빠듯했다. 그래도 여행에는 흐름이 있었다. 다들 남쪽으로 떠나는 것이 휴가인 줄 알았다. 우리도 그런 때도 있었다는 말이다. 돈이 중했지만 한번쯤은 숨통을 터야 살았다.



다시, 어머니


정작 3년간의 계약이 끝났을 때 유순은 브레멘의 다른 병원에 계약을 했다. 왜 꼭 브레멘에 가고 싶었을까? 여전히 그림동화에서의 브레멘 음악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낭만적이기는 틀린 나이였는데도. 게다가 취업할 수 있는 병원은 많지 않았고, 정신병원에 일을 얻었다.

인구 50만이나 될까, 유순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한국의 지방도시의 인구정도였지만, 면적은 엄청났다. 사실 브레멘의 면적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6년간 학창시절을 보낸 중소도시에는 고작 시내를 가르는 하천이 있었을 뿐이나, 브레멘은 가도 가도 끝없는 강을 끼고 양쪽으로 도시가 뻗어 있었다. 강을 몸으로 치면 정강이 까지는 작은 배들이 올라 다니는 항구였다. 환자들을 보며 차츰 알게 된 일이었지만 사실 순 백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강산업 등 노동자들이 많아 다른 인종들도 섞이어 있었다. 그곳의 외지인이라 해도 물론 우리 같은 동양인이 아니라 얼굴선이 날카로운 중동인들, 그러니까 중간쯤 되는 사람들이었다. 저절로 숙연해지는 역사를 자랑하는 시청건물은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때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다고 들었다. 복음교회라나, 우리나라 말로는 개신교들이 대부분이라는데도 성당 같은 건물들은 여전히 많이 보였다. 유순은 기독교신자가 된다면 성당 때문만으로도 가톨릭이 되고 싶을 것 같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할 때 쯤 그러니까 76년 봄, 브레멘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한인 천주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렸다. 계속 독일에 남아있었더라면 혹시 모를 일이었다. 다만 성당 속에 들어가 앉아있기 위해서라도 그곳에 가게 되었을지. 그때 유순은 무엇인가를 약속하기 위해서라도 신앙심이 절실한 때이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


네 어머닌 우리가 독일에 도착할 무렵 벌써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미국으로 떠난 한국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더구나. 미국에서는 그때 한국의 간호원자격등을 그대로 사용하여 취업할 수 있었다 했고, 한 번 서독에서 살아본 사람들이라 미국이라고 별 다르겠냐고 그런 생각들이라 했다. 똑똑한 누군가는 미국에 가서 대학에서 장학금 받고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 미국에는 간호원이면서 암에 관련된 공부를 하면 장학금을 주는 대학도 있었다고 하더라. 실행은 못해도 그런 꿈들을 꾸었더래.

물론 네 어머닌 그런 꿈을 꿀 위인은 아니었지. 네 어머니가 맡게 된, 결국 내가 맡아야 할 네 형 요한의 문제도 컸다면 컸다. 형은 네 어머니의 죽은 언니가 남긴 아들이었다. 친언니는 아니지만 여기 와서 외로운 생활들 견디면서 동기간 같아진 사람. 그 언니가 벌써 오래 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라.

그 언니는 내나 네 어머니랑 비슷한 운명으로 외국에 돈벌이 나간 신세. 그 언니의 이야기라 해서 네 어머니 이야기와 다를 바 있겠느냐. 독일에서 일했던 한국인 간호사에게 그 사회에서 개성이라거나 감정이 무슨 작용을 했겠냐 말이다. 문제는 그 연애였제.


아버지가 들려준 어머니의 언니뻘 간호사의 연애는 처음부터 암담하게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환자로 맞닥뜨린 남자, 그 백인 남자의 모습은 예수 같았더란다. 영화에서 본 예수. 독일에 처음 만나본, 주위에 흔한 아주 희멀건 뚱보들 사이에서, 그는 오히려 눈에 띄었다. 조금 짙은 머리카락에 다소 가라앉은 얼굴색을 한,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그럼, 첨엔 다 똑 같더라, 독일이나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나. 다 어려운 독일말 멋들어지게 하고. 한국처녀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나라 오스트리아라면 무조건 감탄의 대상이었겠지. 네 어머니라도 그랬을 것이야. 그럼, 그 사람이 조금은 덜 서양 사람처럼 생겼다 했제, 그러면서 키는 훤칠하고. 아무튼 그런 인상을 다들 다정함으로, 고향의 느낌으로 느꼈더래. 거기까진 아름답지. 다음은 비극적인 연애의 시작이었지, 다른 한쪽은 일탈의 시작이었고.


연애? 시작은 허망했다더라. 아버지는 말을 쉬이 잇지 못하셨다.

요하네스라는 이름의 독일남자는 오른쪽 팔다리가 다 부러져 들어온 환자였더래. 난생 처음 만난 제 누이와 더불어 여행 중이었더래. 누이랑 어떻게 난생 처음으로 만났냐고? 그거야 거기 서양 사람들한테는 흔한 일이기도 하지. 아, 동서독도 우리 남북처럼 갈려 사니까 더더욱. 암튼 둘은 시인이었다는 저들의 아버지가 태어난 도시까지 가려다가. 운전은 누이가 했고. 이 독일이란 나라가 제한속도가 없는 나라지 않냐. 둘 다 초행길이었고. 그렇게 해서 병원에 실려 온 것이었지. 누인 곧 떠나고. 어디로? 제 자리겠지.


연애? 결과는 참담했지 뭐. 그 남자는 일단 빈으로 돌아갔고.

그럼 빈 사람?

그가 빈 사람은 아니고, 동독에서 빈으로 유학 나온 사람이었더래. 제 아버지 고향 빈에 가서 누이를 찾아 나선 것인데, 처음 만난 것이었대. 아무튼 언니는 독일을 떠나 빈으로 직장을 옮길 수가 없었다더구나. 당연하지, 계약은 독일 계약이고. 오스트리아가 좀 복잡한 나라냐. 그때도 파리에도 그냥 가는데 오스트리아는 통과만 하려해도 비자 받아야 하고 어쩌고, 중립국 아니냐. 물론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일은 계속하는데, 뱃속에 아기의 생명을 의식하자 어쩔 줄 몰라 했겠지. 곧 배가 불러왔고, 그것이 직장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람인 언니는 미혼모가 될 예정이었기에 수치심이 어쨌겠어? 아기를 낳고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을 때 요하네스는 어느 새 베를린에 있었다던가. 그러다가 더 멀리 동독으로 돌아갔겠지. 원래 왔던 곳으로. 그것 까지여.


동독 - 동독이 어디냐. 그곳이라면 그 언니가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도 죽어도 갈 수 없는 땅, 공산주의 나라로 돌아간 것 아니냐. 그때 언니는 삶을 포기했다는구나. 자살? 그런 건 아니지. 나는 어쨌거나 잘은 모른다. 산후에 그냥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앓아누웠는데, 병원에 함께 있던 한국 간호원들이 아기 요한을 돌보았지. 아기 이름은 따로 지었다기보다는 아기 아버지 요하네스를 줄여서 부른 이름 그대로였대. 아기와 아버지가 무슨 차이가 있었겠어, 애 엄마에게는. 아이 엄마가 막상 그렇게 죽어가는 중에 네 어머니가 계속 내 얼굴만 보더구나. 네 어머니랑 내가 미래를 기약할 만큼 가까이 의지하고 지내던 때였으니. 요한은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게 되었지. 절차가 간단하지만은 않았지만, 어쨌거나 한국 여자가 낳은 아이를 한국 부부가 키우겠다니 일이 쉬었지. 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따라갔는지 모를 일이야. 암튼 그 덕택에 결혼이 급물살을 탔지. 결혼 하나는 독일이 간단하더구나.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 제대로 하자고 하고, 그냥 한국교회 목사님에게 갔어. 결혼이 성립되니까 입양은 아주 쉬웠고. 어쨌거나 우린 곧 귀국을 서둘렀지. 최소한 한 달을 남겨두고는 그만둔다고 말해야 하더구나.



형을 찾아서


그러니까 내가 독일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결국 형을 뒤따라간 여정이었다. 형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군대에 들어갔다. 한국인 남자에게 군필은 유학의 필수 조건이었으니까. 그리고는 제대하자마자 서둘러 독일로 떠났다. 한국에서 자란 청년답게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서. 여권에도 분명한 한국인 배요한이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나 오래 동안.


형 요한은 자신의 처지와 친부의 존재를 일찍 알게 되었다. 서양 남자였던 친부보다도 더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한 눈에 동생인 나의 비릿한 모습과는 대조되었다.


큰 아는 참 다르게 생겼네여.

글쎄, 어메 아배가 서양밥 묵다가 낳아서 그렇겄제.

아니, 영판 달라.

둘짼 여기 와서 낳았으니까 다른 거지, 뭘 그래.

그래도.

조용 혀, 한 날 한 시에 난 손가락도 길고 짧은디 뭘 그러나.


두 살 가까운 터울의 두 아들을 흔적 없이 키우려던 부모님의 소망은 일찍 깨졌다. 독일에서 낳았으니까, 독일에서 독일 소시지 먹고 낳았으니까,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배달민족에 다른 피가 섞이면 사뭇 다르게 나왔다. 그렇다고 형이 크게 말썽부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형이 형이라고 큰 소리 한번 치지 않은 것이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었다.

형은 초등학교 졸업 쯤 해서 독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국인 어머니의 이야기도 함께였을지? 그때 어머니는 요하네스라는 본명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요하네스라고 부르는 일은 없었다. 요한과 승한 사이에서 이름이 변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우리를 차별하지 않았다. 크게 배운 것 없는 어머니지만 참 너그러웠다. 직업이 백의의 천사였으니까 뭐. 어머니는 젊은 시절 그렇게 고생해서 모은 경험과 돈을 가지고도 그대로 시골에 살았다. 아버지의 고향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왜 어머니의 고향이었을까, 진짜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안 계신 고장인데? 그 생각엔 곧 답이 나왔다. 아버지의 고향에서라면 형과 나와 다른 얼굴로 살아가기가 더 수월하지 않았을 것임을. 물론 아버지의 고향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농부이자 목수이며 모든 것을, 어머니는 온 동네 의사와 간호사를 겸하면서 부지런히 사셨다. 키위라는 이상한 종의 식물재배에도 성공했고, 오리농사로 질 좋은 쌀 생산을 들여와 동네는 전체로 넉넉해졌다. 그래서 형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입대를 서둘렀을 때 많이 서운해 하셨다. 그렇지만 어서 군대를 마치고 독일로 유학 가겠다는 설명에 걱정 반 희망 반으로 그런 승낙을 하신 것이다.


형은, 요하네스 베르너는 배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뮌헨의 괴테어학원에 등록을 하고 떠났다. 그러니까 처음 기착지가 뮌헨이었다. 자신의 출생지 브레멘이 아니라 뮌헨을 선택했을 때, 괴테어학원 본부가 있는 곳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형이 일부러 뮌헨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을 알았다. 형의 아버지가 당신의 누님을 만나서 지진과도 같은 충격에 쌓였다던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남은 우리 모두는 형이 브레멘이고 어디고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을 것임을 안다. 내가 형이라도 그랬을 것이니까. 내가 대학 일학년 때의 일이었다.

형으로부터 소식은 점점 느려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드물었다. 그러다가 뚝 끊겼다. 나도 곧 군대에 입대했으므로 어머니는 두 아들의 편지를 바라느라 야위어 갔을 것이다. 휴가 때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놀랍게 초췌해 갔다. 한번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란 군대 동기생들 누구라도 어색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시대가 그랬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는 일도 창피한 일에 속했다. 그래도 가끔 씩 어머니는 편지를 보내셨다. 형 때도 그랬고, 군대에 면화를 오시거나 그런 부모님은 아니셨다. 우리고향에선 아들 군대 면회 다니고 그런 집은 없었다. 그러니 궁금한 마음에 편지를 쓰셨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어머니가 쓰시는 편지는 형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어머니는 형의 소식이 더 궁금한 것이다. 그런데 형으로부터는 소식이 거의 없었으니까 내게 편지를 쓰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형하고는 주소조차 끊긴지 한참이 지나있었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의 일상은 전방에서 보낸 군대 때보다 더 전투 같았다. 나는 어쨌거나 형의 흔적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장학금을 받아서 독일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독일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지역 통틀어서 한두 명 뽑는 선발시험에 어찌 붙는단 말인가. 그래도 전력투구를 감행했다. 졸업 전에 시도한 시험에서 한 번 떨어졌다.


한 번의 실패는…….

아서라, 우선 떠나거라.


아버지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네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고요? 어디가 특별히 안 좋으세요?

보면 모르겠냐. 어디가 한참 안 좋다. 통 밥을 못 드신다. 네 형이 시작했던 어학원부터 가서……. 요하네스 베르너, 거기서부터 살펴라. 그 사람 아버지는 시인인가 그랬다더라.


그 정도의 말씀에 일 년을 더 시험 준비로 보낼 수는 없었다. 형과 같은 코스로 뮌헨의 괴테어학원을 목적지로 일단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는 앙상해진 손으로 봉투를 쥐어 주셨다. 아버지 모르게. 정 막히거던, 정 어렵거던 그때 펴 보거라.


그런 부탁을 정 어려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나는 그래도 여정을 꾸려 출발할 때까지 봉투를 열지 않았다. 네덜란드항공사 비행기가 암스테르담으로 도착해서 거기서 독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서, 나는 가장 싼 요금의 그 노선을 탔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쾰른 행 비행기는 오싹했다. 자동차로 말하면, 참 미안한 말이지만, 장갑 끼고 모퉁이 돈다는 프라이드 같은 것. 여남은 명이 타자 이륙한 비행기엔 좌석이 스물이 될까 말까 싶었다. 그 요동치는 몇 십 분을 참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그 정신에도 어머니의 편지를 찾았다. 손에 드는 가방 안에 여권 가까이 두었으니까. 어머니의 편지를 보지 못하고 비행기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봉투를 손에 쥔 순간 다시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게 겁이 났다. 찢는 손이 떨렸다.


형은 바로 네 형이…….

무슨 말인가. 형이 나의 형이라니. 형이 형이지 그러면?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것인가? 설마……. 그것은 설마여야 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설마는 설마다.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며 깨어났다. 다음을 읽으려고.


그 순간 도착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다시 비행기가 떨어질 것이라는 환상 때문에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서둘러 몸을 사렸다. 비행기는 쾰른 땅에 무사히 내렸다.


쾰른에서 처음 계획은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가서 짐을 푸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남쪽으로 갔다가 브레멘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브레멘은 코앞이다. 비행기로 그 창공을 건너 왔을 것이다. 물론 어학코스 시작 날이 빠듯하기는 했다. 그래도 역의 보관소에 큰 짐을 맡겨놓고 형의 출생지로 먼저 향하기로 했다. 출생지에서 무엇을 건질 것인가, 생각에 미치자 멍해졌다. 서독파견 동양인노무자의 아들이 형이 태어난 병원에 가서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아는 것이라고는 형의 출생연도와 이름 뿐. 찾으면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형의 출생기록을 찾아서 무엇을 하려고? 형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는 그 이름으로 기록에 남았을까? 혼외자에게도 생부의 이름이 적히는가? 독일의 출생신고 제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의문만 떠돌았다. 기록에 있다고 치자. 그러면 기껏 생년월일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소라면 늘 바뀌는 것이니까. 경찰 신분도 아닌, 더구나 외국인이 독일인 누군가의 행방을 합법적으로 문의할 수나 있는 것일까? 또 기차 속에서 발견한 일인데, 어머니의 편지가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손에 들고 있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이를 어쩐다?


어쨌거나 형의 흔적을 찾는 것이 한강에서 바늘 찾기였다. 형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결국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의 그림자를 쫒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편이 더 수월했다. 실마리라도 있으니까.



독일남자, 요하네스 베르너


예상대로 나는 독일남자의 입원 기록 같은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 독일남자를 찾을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에. 독일남자 요하네스 베르너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거기에 없었다. 다행히 오래 전에 간호사 일을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간 한국인 간호사에 대해 이름만 겨우 얻어 들었다. 한국식당을 한다고 들었으니 찾기 쉬울 것이라고. 어머니 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말 그래도 뚱뚱한 직원이었다. 간호사이신지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경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옛날 한국 간호사들을 기억하시나요?

아, 베를린으로 가 볼 것이면, 그 사람은 어쩌면 그 이야기를 알지도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몇 년 전에도 똑 같은 사람을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으니까 생각이 더욱 또렷하네요. 


베를린. 나는 뮌헨을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개강 날짜에 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목적을 잊지 말자. 어머니는 한시 바삐 형의 소식을 기다린다. 개강에 늦으면 대순가.

베를린 행 기차는 급행이었다. 베를린에서 한국식당 찾기는 쉬울까? 염려보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에 한국식당이 있었다. 우리 같으면 서울 명동 비슷한 거리에서 발견한 한국식당에서는 그동안 벌써 그리워진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브레멘에서 온 분들이 아니었다.


브레멘에서 온 이 아무개라는 분을 혹시 아십니까?

주인아주머니는 아예 내 앞 걸상에 앉았다. 또 박 아무개 씨? 아니, 이 아무개 씨를! 아, 그게 그거라 혼란스럽죠? 여긴 아예 남편 성 하나로 통하니까, 헤어 리, 프라우 리, 헤어 박, 프라우 박. 우리 여자들은 독일 와서 결혼하면 성은 아예 잃어버린다니까요. 참 그건 그렇고. 그런데 이상타. 몇 해 전에도 꼭 당신만한 젊은이가 그 사람을 찾더니만.


그러니까 이곳 한국인들이 남편 성을 써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이 아무개라는 분은 박 아무개가 되어 있었고, 형도 그 사람까지를 찾아냈다. 나는 형의 뒤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

박 아무개 아줌마는 식당을 하는 것이 아니라 - 첨엔 그럴 생각이었다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했다 - 한 나절 한국식품점을 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조금 더 알고 있었다.


그 나쁜 사람은 꼭 봉함엽서를 보냈는데, 발신자 주소는 없었어요. 첨엔 빈, 다음엔 베를린. 우편소인으로 보아서 빈인지 베를린인지 알 뿐이었어요. 모르지요, 속에다는 썼겠지요. 우리들이 겉봉만 보고 속닥거린 말들이죠. 우리 모두 다 가슴 졸이며 편지를 기다렸어요. 아기 엄마 운명이 우리 운명이었으니까. 그 나쁜 사람이 나중에는, 그러니까 그 아기 데리고 부부가 한국에 돌아가 버린 다음에, 그땐 동독 소인이 찍힌 봉함엽서가 왔는데, 참 우린 그것을 한국에 보낼 수 도 안 보낼 수도 없었어요. 한국 가서 아들을 또 낳았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그래도 소식을 전해…….

그래 말이에요. 다들 어쩔 줄 몰라서. 그런데 바로 형이라고요, 그러니까? 접 때 먼저 날 찾은 젊은이가? 참 잘생기기는 했다만. 똑 같이 이레 이야기 해 줬어요. 나도 그 때 결혼 직전에 깨져가지고 상심했던 때이고. 또 학생, 학생이라고 불러도 되죠? 난 그때 학생 엄마가 차라리 부러웠을 때라서. 어찌되었건 아들 데리고, 뭣 보다 탄탄히 벌어 귀국했는데, 잘 살라고 두지 뭣 하러……. 다 소용 없어, 친부모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따 같은 사람들끼리, 아따 한민족 공동체, 아따 배달민족 안 있나, 그런 것이 중요하니까는. 형은 참 섞어져서 잘 생기긴 했더니만. 그러니까 형이 제 아버지를 찾더구먼, 그것이…… 암튼 학생 아버지 같은 분은 세상에 없을걸. 다른 남자 아이를, 것도 서양사람 아이를. 한국남자 치고 누가 그런 것을…….


한국남자 치고? - 말끝이 이상하긴 했지만, 조선식 사고방식의 한국 사람들은 입양 자체를 꺼리는 편이었고, 더구나 서양사람 핏줄의 아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선뜻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는 백퍼센트 동감한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없어 뮌헨으로 어학원 시작에 대어 가야했다.



베를린


괴테문화원 어학코스는 2개월 단위였다. 그 2개월 단위의 코스 사이, 외국학생들은 우선 프랑스나 이탈리아 여행을 선호한다. 물론 나는 베를린이 급 선무였다. 그 일주일 동안에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지만, 나는 베를린엘 다녀왔다. 당연히 대학 등록 준비도 베를린을 향했다. 물론 원래의 베를린대학, 그러니까 동쪽의 훔볼트대학이었다. 어딘가 그쪽이 더 가까울 것 같은 이유로.

어학코스에서는 중급에 합격해야 대학진학이 가능한데, 말하기가 마음에 걸렸다. 좋지 않은 점수를 걱정했지만, 평점에서는 중급에 겨우 우를 받아서 대학진학이 가능했다.


21세기의 베를린, 더 이상 분단이라는 단어가 없는 곳. 그러나 사실 여전히 무엇인가가 들끓고 있는 베를린이 좀 불편한 도시인가. 몇 년 전에 시장이 되었다는 이 도시의 수장은 사회민주당의 진보인사인줄로만 알았더니, 웬걸, 게이를 표방하고도 당선된 사람이었다. 꼭 100년 전에도 베를린은 게이의 수도라고 했다. 그러니 한편 또 얼마나 편한 도시인가. 1977년 생 한국 남자는 이곳에서 그리 눈에 띄는 인종은 아니었다. 통일 후에 두 배로 불어났다는 4만 명 정도의 재학생 중 나는 4500명이 조금 넘는 외국인 학생 중에 하나. 열 명에 한 명 이상은 외국인 학생이다. 다른 쪽 자유대학엔 외국인이 더 많다고 했다. 밖에 나가도 외국인이 많았다. 꽤나 열린 도시다.

내가 전공하려는 과목은 무심코 문학이었다. 철학이나 문학은 보통 그저 수리에 약하고 실리에도 덜떨어진 경우에 선택하게 되는 과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었다. 독일을, 독일 사람을, 독일남자를, 독일남자시인을 찾는, 그를 이해하는 방편이었다. 어찌 보면 선택이라기보다는 그리로 밀렸다. 그러는 몇 년 동안에도 형은 감감 소식이었다. 대신에 나는 현대문학의 황금기 언저리에서 놀라운 인물을 발견했다. 카스파 에스 베르너 -


카스파 살로모 베르너의 이름에서 멈춰버린 이상한 경험에서 나는 1920년대 표현주의 작가들 연구를 논문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느낀 의문점들로 보아도 독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어 냈다고 하는 그들에 대한 연구는 나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 마디로 같은 출발점에서 국수주의 문학과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극단적 결과가 나온 뿌리이니까. 식물로 말하면 전혀 다른 꽃을 피우는 하나의 줄기라고나 할까. 여기서 내 연구와 관련된 이야기는 접어두어야 한다. 카스파 에스 베르너가 직접 연구대상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가 내가 찾는 요하네스 베르너의 아버지인 것은 확실했다. 그가 시인이 아니라 극작가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독일어에서 ‘디히터’는 시인이요, 작가요, 뭐 그런 것을 다 포함하니까. 그것보다는 베르너라는 이름이면 충분했다. 또 1902년이라는 출생연도가 아버지이기에는 딱 떨어지게 맞지는 않지만, 아들을 낳는 나이가 어디 딱 떨어지는가. 그가 그의 아버지인 것은 거의 확실했다. 다음이 내가 조사한 것이다.



요하네스의 아버지


요하네스는 분단독일의 냉전 분위기 속에서도 압박 없이 자란 세대에 속했다. 아버지 카스파 베르너가 어쨌거나 전후 서구사회를 버리고 동독 사회주의공동체를 선택한 이상 아들은 우수한 출신성분을 가진 셈이었으므로. 또한 부계 혈통이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상대적인 특권을 누리며 동독의 철조망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했다. 특히 1971년 울브리히트에 이어 호네커가 권력을 승계했을 때는 동서독 관계 전체가 푸른 신호등을 만났다. 교조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시대가 간 것이었으니까. 울브리히터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벌써 공산당 베를린지구 서기였고, 나치스 집권 후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전쟁 중에는 소련군으로 복무했다가 전후 귀국하여 도이칠란트 통일사회당을 설립한 골수 공산주의자로, 집권 이래 독재자적 면모를 의심받았다. 새로운 주역 호네커는 나치스 12년 지배 동안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확고한 반 나치주의자로,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권좌에 오르자 무언가 젊은이들은 무언가 봄바람이 느껴진다고 믿었다. 그곳에서 보기에 저쪽 - 서독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전설 브란트가 집권해 있었다. 70년대 벽두엔 동독의 문단에서도 상당히 정치적일 수 있는 주제들이 나왔다고 한다. 김나지움 독서목록에 주인공 젊은이의 “새로운 슬픔”의 원인을 권위적 교육자와 그 비슷한 어른들에 돌리는 등, 규범에 대한 적대감, 모범적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작품들이 들어있었다. 더러는 통상적인 삼각관계의 구도 속에서 실제로는 순응메커니즘, 허위, 모순들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들. 사회주의 사회에서 왜 개인들은 사적인 행복을 방해받고 있는가 의심하는 책들마저 나오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빈을 향한 것은 순전히 뿌리가 그리운 회귀본능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늦둥이인 그에게 아버지는 이름으로만 남았다. 청소년기를 반 나치스 사회주의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랐던 그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서쪽으로 향했다. 온전한 사회주의의 아들로서, 그는 빈 대학으로 유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흔적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은 그를 오스트리아 깊숙이 아버지의 고향을 찾게 했다. 이복누이가 있단다, 거기까지가 어머니가 일러준 아버지의 흔적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을 향했던 요하네스는 이복누이가 빈 근교에 있지 않고 벌써 뮌헨 대학에 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뮌헨의 이복누이와 연락을 시도했다. 뮌헨에서 누이를 만났다.

클라라 브레너, 나이 차이가 한참 되는 누이였다. 우리나라 말로 띠동갑도 넘는. 그러니까 남매는 전혀 다른 아버지 이미지를 가진 채 서구와 동구에서 살아왔다. 딸은 진작 오스트리아를 떠나 뮌헨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출판사에서 원고감사원으로 일하며 제 글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의 재능이 딸에게서도 확인될 법 했다. 다만 이번 세대에는 드라마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소설은 주목할 만한 영웅 대신 설명이 필요한 시대를 담기에 더 적합한지도 몰랐다. 그 자신은 손위 누이와 달리, 또 자라난 동독사회의 영향이었을지, 글쟁이의 유업을 이어갈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화학을 전공하는 그는 염료라거나 페인트 등 응용화학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잘 나가던 작가였던 시절에 대한 관심은 당연했다. 누이가 그 길을 보여줄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진짜 고향에 가 보자.

진짜 고향?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곳.

할아버지들?

넌 그걸 몰랐던 거야? 우리에겐 할아버지가 둘이야.


이른 문명, 출생 서류 정정, 결혼, ‘이상한’ 관계 - 아내 자살, 아카데미 퇴출 - 재혼 - 친자관계 소송 - 아카데미 재 입회 - 재 퇴출 - 레지스탕스 - 이혼 - 동베를린 행.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이와 더불어 아버지의 원래의 고향 슐레지엔을 향하는 중이었다. 느닷없는 비밀이 그를 강타했다. 요하네스는 까무러쳤다. 누이의 이야기는 까무러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뿌리 이야기. 그에게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둘 있었다고. 정확히는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버지가? 그가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히틀러 집권 이전에 이미 성공한 극작가였다는 사실 뿐이었다. 비밀은 엄청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밀. 혈통의 문제, 아버지가 1/2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유대인이 아닐 수 있었는가?



카스파 베르너 - 베른슈타인


문학사전? 여기에서 나는 인물사전이나 문학사전 등을 찾아보았다. 일단 카스파 베르너 - 재미있는, 아니 슬픈 일이다. 보통 카스파 에스 베르너라고 불리는 카스파 살로모 베르너의 출신 란에는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입양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항목에서는 카스파 베르너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입양자?


카스파 베르너(카스파 살로모 베른슈타인의 예명)는 유대인인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과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1920년대의 벽두에 표현주의에서 출발한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집권 이전에 이미 문명을 날렸던 것. 무슨 예감이었을까. 정확히 1929년에 그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출생에 관한 ‘이상한’ 증명을 받아두었다. 예명으로 썼던 베르너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나, 그가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친자가 아니라는 증명서였다. 나치스 이전에도 유대인은 개종만이 유럽문화에의 입장권을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 세기를 풍미했던 시인이자 독설가 하이네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카스파 베르너는 히틀러 집권 전에 벌써 1/2 유대인의 피를 부인하는 서류를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순 독일인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의 희망에 따라 아들을 유대인 핏줄에서 보호해야 했다. 아들의 생부를 순 독일인 누군가로 지목했으니, 자신이 혼외자를 데리고 유대인과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미 나치스 집권 직후에 프로이센 아카데미에서 축출 당했어야 할 위인이었지만 ‘이상한’ 친분이 그를 구하고 있었다는데. 카스파 베르너의 특별한 아내는 소문에 의하면 나치스 복판의 권력자와 3각 관계였었다고.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내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곧 이어 그가 재혼했을 때가 1937년. 곧 이은 오스트리아 합병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에게는 위험 그 자체의 환경이 되었다. 그는 유대혈통의 교사이자 작가였던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에게 친자포기 소송을 내었다. 결국 이삼년을 끈 소송 끝에 아버지는 아들이 완전한 아리안임을 서류상으로 확인해 주었다. 곧,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은 아들에게 패소하여 부권을 영원히 상실했고, 입양자 아들은 예명 베르너로 개명이 확정되었다. 물론 독일인 신교목사의 친자확인 증언 하에서다. 한 젊은이의 목숨이 달려있다 하더라도 그 신교목사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태 독일여자와 유대남자의 아들이던 젊은이가 새삼스럽게 독일인 신교목사의 혼외자라는 설에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런 일이 조작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것이 성공했기에 아들이, 요하네스의 아버지가, 나치스 시대를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짐승이고, 벌레고, 벌레만도 못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증명서가 있었으니까.

다시금 프로이센 아카데미에 받아들여진 것도 잠시 후 출판금지와 재 퇴출을 경험해야했던 카스파 베르너. 그토록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졌던 그는 두 번째 아내, 전형적인 합스부르크 백성이던 아내와 더불어 전쟁을 살아남았다. 물론 마지막을 향하던 1944년의 어느 날엔 레지스탕스에 관련하여 반 군사적 행동으로 체포되는 운명을 겪었다. 감옥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그를 구해냈고, 그것이 전후에 그를 구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아카데미 퇴출이나 출판금지 보다는 이 레지스탕스 관련 행동이 부각되었다. 더구나 그의 영어 실력은 나치스 초기의 협력이라는 문제점을 넘어서 그를 구해내었다. 과거의 나치스 시절의 경력보다도 영어 실력이 중요시 된 것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과거를 정당화 하는 노력이 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요약해서 오른 쪽 왼쪽을 구분해 보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그의 이력이었다.

결국 아내는 그를 떠났다. 현실적으로는 그가 아내를 떠난 것일까. 순 독일 혈통의 어머니도, 순 독일 혈통의 아내들도 더 이상은 그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아내는 세상 자체를 버리더니, 다른 아내는 그를 버렸다. 그는 모색했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다른 곳에서! 옛날의 동지들, 표현주의 시절의 동지들, 나치의 집권으로 흩어지기 전의 동지들이 아직 다른 곳에 건재했다. 소련군 점령지였다. 미국 점령지에서 앞장섰던 정치경력을 가지고서도 그는 대담하게 그쪽으로 건너갔다. 물론 옛 동지들, 바이마르 시대의 동지들과 접촉한 다음이었다. 그곳에 다른 국가가 생겨난 다음이었다. 그때 벌써 독일은 반쪽으로 나뉜 둘이었다. 그길로 오스트리아에 남은 아내와 두 딸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으로 남아서만은 아니었다. 동 베를린에 정착했을 때는 이미 오십을 넘긴 나이였지만, 새 출발은 새 출발이었다. 옛 동지들 덕에 사회주의국가건설 이데올로기에 동참하는 지식인 계열로 분류되었다. 나치스 시절에 다소 핍박을 받은 극작가 이미지가 한몫을 했다. 정작 작품 활동을 하기에는 그의 공산주의 사상은 분명하지가 않았다. 역시 다행히도(?) 문화연맹은 함께 표현주의에서 출발했던 작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또 무슨 매력이 남았을까? 그는 문화연맹의 사무직으로 있던 젊은 작가지망생과 다시 한 번 결혼했다. 아들 요하네스를 보았다. 그러다가 아들이 세 살이 지났을 무렵 맹장염으로 사망했다. 1956년 말.


여기까지다. 서양에서 맹장염?


또 다른 사이트다. 다시 카스파 베르너의 이야기. 그는 순 독일인 증명 덕택에 나치스시절을 살아남았다. 그러나 출판은 여전히 난관에 부딪쳤고, 제국작가연맹에서는 그를 재차 탈퇴시켰다. 여기까지는 일치한다.


요하네스가 들어 알게 된 또 다른 충격적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어머니 이전에 두 명의 아내가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는 당연히 아버지의 오스트리아인 아내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복누이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한창 나치시절에 짧았던 결혼이 더 있었던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떻게, 순 독일혈통과 결혼했었구나, 매번.

누이는 상당히 정확하게 첫 번째 결혼의 화려함과 수치를 함께 이야기 해주었다. 일찍 성공한 극작가와 극단배우 지망생. 오스트리아 문학은 독일문학과 경계를 나눈 적이 없었지만, 국경은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찍 성공한 오스트리아 출신 극작가와 순 독일 태생 극단배우 지망생의 관계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모의 아내와 나치 실력자와의 공생관계는 …….


그만, 그만. 그는 갑작스러운 정보들에 눌렸다. 아버지 상이 일시에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문화연맹에 전설적으로 남은 일 세대 작가들과의 동일선 상에서 아버지를 이해했던 그에겐 날벼락이었다. 아버지가 사상적으로 다소 의심을 받았던 부분, 나치와의 일시적 공생관계, 그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유대인 아버지를 부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청천병력이었다. 결혼마저도 안전을 위한 것 이상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 아니면 어떻게 아내를 나눈다는 말인가, 비록 그것이 수군대는 말에 불과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 미모의 젊은 아내가 자살을 택하는가? 누이의 어머니는 또? 전쟁을 살아남은 뒤에는 순 독일 혈통이 의미가 없었는가? 아니지. 자신의 어머니도 순 독일 혈통이다. 그럼 아버지의 순 독일 혈통에 대한 파격적인 선호는?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유대혈통에 대한 반작용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유대혈통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믿어졌다.

그리고선 여행목적지가 바뀌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첫 번째 아내를 만났다는 함부르크, ‘독일극장’을 향해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브레멘 못 미쳤을 때.



백인 남자, 백인으로 보였던 남자


그러니까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혈통으로는 반의반쯤 유대인이었어.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이 서양인들의 눈에 그것이 그것이듯, 우리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것이었지.

앵글로 색슨인지 아리안인지 유대인인지는 참 알아 보기 힘든 구별?


서유럽 유대인 남자와 동양 여자가 낳은 아이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에 앞서 그는, 승한은 형 요한의 아버지였다는 서유럽 태생의 1/4 유대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용없었다. 알다 가도 모를 일, 아니 아예 모를 일이었으니까. 유대인보다 저열하다고 간주되는 동양인, 그것이 편해서였을까. 강자 앞에서 굴하는 사람이 약자에게 더 세다고 하는 법칙의. 저열한 법칙의 소산?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알 수 없었던 사실은 요양 중이던 요하네스의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는 으스러졌던 어깨뼈가 다 낳고도 요양병동 신세를 져야 했다. 뇌 손상은 전혀 없었지만 불안초조에 몽유병 증상까지 남아서 몇 달을 그렇게 허송해야 했다. 그에게는 실존적 의미의 공황상태에서 하필 사고를 당한 것이었으니 이해도 된다. 사랑 같은 감정이 호사일 만큼 정신이 나갔을 때. 그러니까 사고는 누이를 만난 뒤의 충격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정치적 변절은 아주 가끔은 용서될만한 변명거리를 발견한다. 다른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친부를 부인했던 아버지 상은 ‘도덕적인’ 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후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동독의 청소년들이 반파쇼 교육의 효과로서 나치스를 악으로 규정지으며 성장했을지라도, 그것이 곧 유대인에 대한 연민과 미화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런 것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유대혈통을 간단히 받아들일 유럽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니,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에 완강하게 저항하여 당대에 시대적 대표자로 불렸던 지드 같은 사람도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프랑스 어로 작품을 쓰는 것을 통탄했었다. 프랑스 인에게 충분한 실력이 없어지는 날, 누군가가 특질적인 인간이 프랑스인의 이름으로, 프랑스 인 대신에 그 역할을 하도록 허용하기 보다는, 프랑스 인이 사라져버리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라고. 유대인으로 하여 프랑스 문학이 발전하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편이 좋다니! 유대인은 유럽의 군중 속으로 섞이어 들어갈 수 없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피로 인한, 이 민족적인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핏줄


무서운 핏줄의 비밀이 드러난 후. 요하네스 베르너의 절망을 상상해 본다.

나의 아버지가 절반 유대인? 유대인? 어불성설. 아버지는 반유대적, 아니, 아리안 예찬, 초인적 인간의지에 대한 소신으로 문명을 얻은 분 아니었던가. 프로이센 아카데미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분.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였지만, 남겨두고 간 족보는 확실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엄연한 신교목사였다. 작가들 중 상당수가 목사의 아들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동독에서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설명으로는 아버지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흐를 수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사요 극작가였다는 유대인 할아버지? 그렇담 절반의 유대 피를 가진 아버지?

아버지의 청년기 문제작이었다는 『살의』의 내용에 치가 떨렸다. 그러면 그것이 픽션이 아니었단 말인가? 상징적 의미로,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껍질 벗기로서의 아버지 살해가 아니라, 실제 아버지를 살해하고픈 충동이었다? 물론 극에서도 아버지 살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들의 확고부동한 살의에 질식한 아버지가 저절로 쓰러져버리기 때문이다. 아버지 스스로 아버지임을 포기하라고 종용한 극이었나? 몸서리 쳤을 것이다.

그리고 무너졌다. 이번에는 작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 무너졌다. 그 아버지의 ‘살의’에 질려서. 살의는 다름 아닌 핏줄의 거부였다. 핏줄을 거부하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태어난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그 아버지를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


나는 갑자기 그의 메모들의 무더기를 배열하거나 발췌하는 작업을 덮었다. 이게 뭘까? 민족의 문제가 보통 예민한 것이 아니구나. 가해자 그룹 아리안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서 피해자 유대인 피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것은 그때의 가해자가 그 한 때의 과오를 덮고서 여전히 우월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때의 피해자는 지금도 무언지 모르게 배척당하는 느낌에 서늘해진다는 사실이다.


피. 핏줄? 최근의 유전자 표지 조사다 뭐다 해서 밝혀진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면, 인류의 모든 디엔에이가 아프리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모든 남자에게서 발견되는 와이 염색체, 모든 여자에게서 발견되는 미토콘드리아 - 그렇게 해서 15만 년 전 모두 하나의 뿌리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이렇게나 원수처럼 갈리어서. 세렝게티의 호모 사피엔스. 이제는 원수처럼 갈라선 민족, 민족들.


그 중 유대인은? 신의 부름에 답한 아브라함은 누구이며, 무엇이 유대인들의 운명을 전 세계로 흩뜨려 놓았나. 디아스포라 - 그 끝없는 이산의 시작. 그 피가 그의 형에게? 형에게는 1/2 유대인 할아버지와 순 독일인 할머니가 있다. 그러니까 형의 아버지는 1/4 유대인, 3/4 독일인. 형은 어떤가. 분명한 1/2 한국인, 나머지 1/2 중에 유대 핏줄로 말하면 1/8. 다시 해 보자, 1/2 한국인, 3/8 독일인, 1/8 유대인. 그의 형은 나치스 시절이라면 수용소 행인가? 그렇다. 나치스 시절에는 1/8까지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나치스 시절이 지나서 천만다행이다.

지금은 어떤가? 일반적으로 부계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다. 그 보다는 시너고그에 참석하는 정도가 유대인을 결정한다. 유명하기로는 마릴린 먼로가 아서 밀러와 결혼하기 위해서 유대인으로 개종했을 때도 그랬고, 바렌보임과 결혼하면서 개종한 첼리스트도, 이름이 뭐였더라,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면 혈통이 그리 대순가?

다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이스라엘민족과 아랍민족으로 나뉘어 적대하기를 수 천 년. 왜 유독 이스라엘민족만이 국가를 잃고 흩어지는 운명을 겪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을 운명, 동화를 통해서, 아니면 그 나름대로의 시너고그 공동체를 통해서 배타적으로. 중부유럽의 유대인 - 그들은 최근 이론에 의하면 혈통으로는 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동남부 러시아지역에 있었던 카자르왕국의 후예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중부유럽 유대인들의 혈통은 그러니까 터키계 백인의 혼합 유목민족이다. 그래야 그들 아슈케나짐 계통의 유대인들의 애매한 모습들이 설명되기도 한다. 그들은 원래의 셈족에서 유래한 지중해 계의 유대인 세파라딤의 외모가 아랍 족과 비슷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유대인은 인종 분류에서 코카소이드가 아니던가.

게다가 오늘날엔 세계의 경제권을 장악한 그들을 오히려 배우려 한다. 물론 경원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대인들의 지혜의 서 탈무드는 스테디셀러에 속한다. 우리는 - 한국인들만 말고 어쩌면 온 세상 사람들이 - 지금 눈부시게 잘 나가는 유대인들을 흠모한다. 그들이 성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니까. 성공하는 법, 부자 되는 법! 그 첫 번째 롤모델들이 모두 유대인이다. 법칙 하나, 날아오른 새에게는 국경이 없다 - 그들의 국가 초월적 적응을 일컫는 말이다. 법칙 둘, 영감을 무한 리필하기 - 쉬운 말인가. 아무도 믿지 않는 카산드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 인텔인가 무슨 회장 아무개는 그 말로서 유명하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그 콧대 높다는 프랑스인들이 선출한 대통령도 유대계다. 그가 비록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전후 프랑스로 이민 온 헝가리 귀족 출신 부친과 그리스계 유대인 - 세파라딤 - 모친 사이의 자녀이므로 절반은 유대인이다. 어머니가 유대인일 뿐 아니라, 이른 부모의 이혼으로 외할아버지에게서 성장했으니 유대인 아니고 뭔가.

성공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수 백 개의 논문이 필요할 것이다. 수백 사례를 분석해야 하니까. 내 말은, 어찌하여 유대혈통을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하는 부분에 대한 나의 이해 부족이다.



배달민족


잠깐, 유대인 타령이 지금 무슨 이야기인가? 유대인 핏줄이 섞인 형을 찾아 잠적한 배 교수는 누군가? 그 길을 따라 적고 있는 나는? 그럼 우리 민족은? 나의 처음이자 궁극적 관심인 배달민족은? 나는 갑작스레 인터넷을 뒤적였다.


오늘날 지구상의 인종은 피부 색깔, 머리의 모양, 머리카락의 색깔과 조직 등 형질적 특징에 따라 몽골로이드, 코카소이드 그리고 니그로이드 등 세 인종으로 분류된다. 흔히 유럽에서 건너간 미국의 백인들이 코카소이드이다. 그래서 유대인도 백인이구나. 그리고 같은 조상 아브라함을 가진 아랍인들도 당연히 그들에 속한다. 여기에 이르면 혼란스럽다. 노아의 아들 셈은 아브라함에 이르러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갈라놓더니, 다시 다윗왕의 후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독교인 갈래를 만들어 냈다. 유전자인지 계보인지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하나의 핏줄이다. 노아가 누구인가. 그의 직계조상 셋은 카인과 아벨과 함께 아담의 아들이고 보면,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전체가 아담의 자손들이 갈라서 숭상하는 종교이다. 많은 순서로 말하자면 10억이 넘는 가톨릭과 그 절반이 안 되는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와 성공회 등을 다 합친 기독교가 20억 인구에 못 미치며, 이슬람이 14억 정도로 다음을 따른다. 다음이 힌두교도로 10억, 불교신자는 4천만 정도라고 하는데, 크게 보면 힌두교 권이 아니던가. 유대교인은 실상은 단 1500만 정도라고 하니, 그 목소리에 비하면 수는 적다. 그 또한 기독교로 변화 확장 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이렇게 기독교(유대교) 20억, 이슬람 14억, 힌두교(불교) 10억에, 물론 공공연히 종교를 부정하는 10억 인구를 제하고 나면 무엇이 얼마나 남는가? 당연히 그들 모두 인종 분류로는 대부분 코카소이드. 아리안에 속하는 게르만인들이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일은 형제의 난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는?

세상에 그 나머지는 많지 않다. 아니, 지금 종교가 문제가 아니다. 인종의 갈래가 궁금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라.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는 나라에서 기독교인과 불교도의 구별은 인종과 무관하다. 우린 기본적으로 한 핏줄이다. 어쨌거나 우리민족은 몽골로이드, 몽골 인종에 속한다. 몽골 인종은 가장 최후에 인류의 계통수에서 지분되었다고 하니 언제쯤이었나. 아무튼 그 이름이 유래하는 몽골인 외에 이뉴잇, 아메리카 인디언, 말레이인도 모두 몽골 인종이다. 몽골 인종 중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배달민족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란다.


함께 강사실을 사용하던 이박 생각이 난다. 역사철학 전공인데, 전공과는 달리 한국통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자의식을 가진 한국인으로, 그 부분에서는 늘 열을 낸다.


『환단고기』에 보면 고조선보다도 더 일찍 배달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니까요.

거야, 현재 사학계에선 실증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게 바로 식민사관이죠. 백산과 흑수 사이 위치까지 나왔는데, 지금의 백두산과 흑룡강 중간 지역이죠.

흑룡강이라면, 그러니까 아무르 강까지? 설마, 그렇게 추정하는 거겠지요.

추정이라니. 수도로 알려진 신시의 역사를 쓴 「신시역대기」에 보면 18대를 내려가면서 환웅이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 넘어요. 어찌 이것이 픽션이겠어요? 14대쯤엔 철제무기로 중원까지 정복했다고 하면? 또 조선시대에 황해도 구월산에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사의 존재가 허구라고요? 27대 500년의 조선은 믿으면서?

환웅이 그럼 왕의 개념?

그런 셈이지요. 18대를 이어간 왕의 계보가 분명한 국가였다니까요.


저는 그 이름 ‘배달’이 궁금한데요. 왜 배달이죠?

거야 국조 단군과 관계있는 박달나무의 어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곧 박달나무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을 말하죠.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입니다.

우와, 그걸 외우세요?

외울 것이 뭐. 어쨌거나, 아니, 그러므로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라는 것이죠. ‘밝달’민족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빛의 산을 말하기도 하지만.

아, 된 것 같아요. 됐습니다. 정말 입력이 안 되는데요.

그게, 객관적으로 우리는 이웃 중국에서 동이족으로 불립니다. 말 타고 활잘 쏘는 동이족은 단군 통치이래로 동방 조선의 구이를 모두 한 겨레로 일컫는 말이죠. 말갈 여진도, 일본 왜이족도 다 포함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만주족과 일본족을 뺀 한민족이 배달민족의 원형으로 남아있는 것이고요.

일본족도 동이족이라고요? 처음 듣는…….

거참, 중앙아시아 지방으로부터 구석기시대를 전후하여 몽골과 만주지방에까지 이동해왔다가, 후에 일부가 일본으로 옮겨가서 일본족의……. 거참, 일본에 한국인 디엔에이를 가진 분포가 주민의 25% 정도는 된다는 보고가…….

그만 하시죠, 정말.

아니, 잠깐만. 신라의 엉거주춤한 통일이 배달민족을 갈라놓았지요. 통일국가에 소속될 수 없는 나머지 배달민족이 고구려의 땅을 포함해서 만주 등까지 정착했으니. 어찌 보면 북쪽 경계는 무너졌다기보다는 확장되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싶다. 배달민족은 만주 벌판에도 뿌리내렸다. 오늘날 한민족은 한반도 밖으로도 중국 조선족 약 270만 명, 러시아 지역의 고려인 약 50만여 명을 포함하여 미국 등 전 세계에 7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단다. 8000만 명이 넘는다. 가만, 그의 형은 1/8만 한민족이므로 이 숫자에 포함이 안 되나? 아니, 그는 포함된다. 법적으로 한국인 배요한으로 등록된 한민족의 일원이다. 그러면 남쪽 인구에 포함된 외국인 100만 명은 여기서 빼내야 하나? 아, 그만두자. 인구통계를 뭐하는데 쓸 것인가.


나는 아직 시각이 없다. 나를,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설프게 외국문학 전공을 하고보니 서양문화 중심으로 문화를 판별한다. 개인주의냐 집단주의냐 - 그러면 나는 우리 민족의 집단주의적 사고가 저열하다고 느낀다. 내부집단에 충성을 보이는 이 나라가 싫다. 이런 마음 때문에 안정된 직업을 못 가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이 들켜서. 이런 마을을 들키면 누가, 어느 조직이 좋아하겠는가.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성이 지독하게 강한 결과 나타나는 초조와 불안 - 이것이 바로 우리 고맥락 사회의 특징이다. 조바심에서 오는 우리의 부지런은 발악이다. 이것이 도태된 자의 변명일까. 선악의 구별은 또 얼마나 혹독한지. 성공이 선이다. 그런대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난 몸살 나게 초조하다. 이렇게 불안하게 사는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글은 쓸 수나 있을까? 누군가가 인쇄하겠다고, 읽겠다고 할 글을? 


나는 다시 슬며시 그의 메모 쪽지로 눈을 돌린다. 지금은 그의 메모에 따른 습작일 뿐이다. 내가 쓰고 싶은 배달민족 이야기는 아직 멀다. 준비도 되지 않았다. 눈앞의 메모쪽지들이나 잘 정리할 일이다.


*


병원 생활


메모는 요하네스의 의혹 부분에 오래 멈춰 있다. 한없이 편해 보이는 천사들 사이에서, 그러나 병상의 그는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 양으로 적혀있다.


그 때 아버지는 자신의 유대성분을 알고 있었을까? 나치집권 이전에도, 집권초기에도 분명히 나치 찬양적 작품을 썼다. 왜 유대성분의 부정을 시도했을까? 그것 자체가 너무도 확실한 유대인의 피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긴 빈은 특별한 곳이다. 다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유명한 독설가 카를 크라우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유대인 프로이트에 대한 폄하의 의미에서 정신분석이야 말로 새로운 유대인의 질병이다 라고까지 했으니까.

친 나치적인 작품으로 성공한 아버지가 어쩌다 나치의 금서목록에 올라갔을까? 아버지의 의심스러운 혈통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이 금서 이력 때문에 나중에 반 나치의 공적이 부각되었다니. 인생은 아이러니다. 더구나 문단 일선에서 후퇴하자, 오스트리아 쪽의 저항단체와도 은밀한 작업을 시도했었던 정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동독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마침 옛 동지들 덕택으로 그 유명한 ‘베를린 앙상블’에서 일할 수 있었으니까. 그만하면 당당한 이력을 가진 아버지인데, 아버지의 생부가 ……. 아니, 아버지를 배반한 아버지라니.

용서하자 그를, 아버지를. 아니, 사람이라면 못할 짓이다. 무슨 소리,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 파시즘 시기에 그 진영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배신한 아버지. 생부이면서 양부라는 증명을 내준 할아버지 또한 극작가였다는 사실은 뭔가. 글쟁이 디엔에이까지 물려받고도 제 아비를 팔아치운 아버지의 상은 나치스만도 못한 것 같았을 것이다. 나치스는 적어도 아리안의 피를 지키련다는 명목으로 방계 유대 피를 말살하려는 범죄를 저지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아버지의 존재 자체에 대한 말살은?


그런 어두운 상황의 환자와 무심한 간호원의 관계는 한시적이고 잠정적일 운명 아니었던가. 요하네스는 학생 때 참여했던 연극이야기를 자주 되뇌었다 했다. 연극 같은 것은 알 수도 없었던 한국의 간호원들. 교대시간이 끝나고 그의 병상을 찾으면 정원으로 나가서 들려주던 이야기라 했다. 주인공 이름도 극의 제목과 비슷한데, 극이 안도라면 주인공은 안드리, 아니면 그 반대이던가 하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마을의 덕망 있는 교사였는데,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아들을 부정했더란 말이오. 이웃해 있는 적국의 여자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니 혼외자였던 것.

혼외자? 밖에서 낳은 아들?

응, 바람을 피워서 밖에서 낳은 아들. 그 아들을 마치 선심에서 주워온 아이인 양, 유대아이로 키웠더래요. 멀쩡한 독일 핏줄을 유대인이라 하여 ‘다름’을 차별해서 기른 것.

불쌍하게도. 

그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선입견에서 그렇게 자라나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지. 마침내, 마침내 숱한 유대인의 운명처럼 죄인이라는 숙명을 안고 죄 없이 죽어갈 때까지.

죽어갈 때까지?

마지막 순간에도 친아버지는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죠. 모두의 죽음을 대가로 한 종말.

…….

명예를 지키려고 혼외자를 부정하는 아버지들은 이 연극 말고도 더러 있겠지.

그래도.

뭐가 그래도?

우리나라에선 밖에서 아이 낳아서 데려오는 일이 더러 있는데…….

제 아이라 하고서?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입양이 드물고.

희한한 나라네. 밖에서 낳아온 아들을 받아주는 아내들?

예. 

그렇다 쳐. 여기 아들을 부정한 아비는 아비를 부정한 아들보다 나은 걸까 아닐까?

누가 아버지를 부정해? 아버지를 어떻게 부정해?

아, 모르는 소리.

요하네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한국 간호원 유순은 눈만 크게 떴을 것이다.


누이의 변명이자 이론은 아버지라는 권위가 나치스의 권위로 대체되어 그 권위에 속박당한 것이 아버지 세대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치스가 희망이었을 때. 세계대공황 직후에는 나치스가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치스가 다수당이 되었고 - 나치스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고자 했던 야심찬 작가라면 유대인 아버지를 버려야만 했을 것이라는 해석. 용서인가 동정인가? 누이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가? 더구나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아버지를?


아, 모르는 소리. 세상에는 아버지를 부정한 아들도 있지.

설마.

있다니까.

아들이 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면, 그럼 누구의 아들?

그러게, 유순.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오, 아버지. 그럼 나는 누구의 아들일까?

요하네스, 오늘은 너무 엉뚱한 말만 하네. 그만 들어가 누워야겠어. 잠을 잘 못잔 것 아냐?


요하네스는 몸과 마음이 겉돌았다. 그는 직감했다, 누나가 잘 못 생각했다고. 아니면 미화한다고. 아버지는 그 이전에 벌써 친부확인 서류를 어머니로부터 받아낸 뒤였으니까. 이 말을 누이에게 하지는 않았다. 할 겨를도 없었다, 곧 사고 속으로 내던져졌으니까. 말을 했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말이 어떤 사실도 바꾸어 주지 않으니까.

나치스란 동독에서는 죄악 그 자체로 배웠다. 서방세계에 나와 보니까 -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 나치스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런 식. 나치스는 물론 나쁜 것이었지만,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주도적이었다.

또 다른 버전도 가능하다. 나치스에 동조한 것을 살아남기 위한 행위로서 용서한다고 치자. 남은 하나, 혈통 말이다. 유대혈통이 용서되는가. 나에게 물려준 유대의 피. 유럽에서 유대인으로 살기. 이 피는 어느 세월에 희석이 되어 사라지는가. 동화유대인. 기독교인이 되어도 조금도 묽어지지 않는 피의 성분. 그는 숙명의 피에 발광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종적


이제는 베를린이었다. 동서가 합쳐져서 정말 대도시가 된 곳. 어느 곳에서 형의 종적을 볼 수 있을까. 베를린 대학에 재학 내내 형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그가, 승한이 60년대 말, 70년대의 주거공동체에 눈을 돌린 것은 우연이었다. 절필한 68세대 대학생들의 온상에서 형의 아버지 세대를 갑자기 느낀 때문이었다. 약물과용으로 요절한 한 젊은 작가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미완성 작품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아버지가 나치 어용작가였다는 짐으로 받은 고통 - 그 대목에서 형의 아버지 요하네스를 괴롭혔을 비슷한 과거의 부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공동체는 특히 스스로를 코뮌이라고 부르던 일단의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그 곳을 거쳐 간 사람들에게서 그에 관한 실마리가 나올까? 일단 어디에서부터 수소문할지도 문제였다. 지금은 더러는 이른 죽음으로 더러는 독일을 떠나버린 사연들 때문에 그들의 종적이 묘연할 것 같았다. 그러나 헨젤의 조약돌처럼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시대를 격동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들과도 접촉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서 감옥에 수감되었던 한 오프셋기술자가 그랬다. 분명 이름이 같은 사람의 소설이 출판되어 있었다, 『우리들』. 오프셋기술자가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오프셋인쇄의 수요가 감소하며 디지털인쇄가 선호되는 세상에서야. 또한 7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번성한 자전적 성장소설 작가들 반열에 이 오프셋기술자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가 이제는 또 느닷없이 사진작가가 되어 늘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일정을 따라 만나보기가 수월찮았다.


이번에는 또 누구요?

저는 ……. 그럼 또 누가? 그럼 혹시?


여전히 깡말라서 다른 독일인들과 쉽게 구별되는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는 대뜸 ‘또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형도 이 작가를 찾아냈구나.


아, 예. 형이었군요. 제가 궁금한 것은 형의 행적이지만, 일단 형에게 들려주셨을 형의 아버지에 대해서 좀…….

형? 형의 아버지라?

예, 제 형입니다. 형은 아버지를…….

그런데 당신이 형제라면? 그럼 당신은?

예, 형의 동생이지요, 얼굴은 좀 달라도. 형을 기억하시나요? 제가 찾는 건 물론 형입니다.

아, 그러니까 형.

예, 제 형이 아버지를 찾아서.

형, 그 아버지의 아들이 찾아온 건 몇 년 전 초여름이었지요, 아마. 아버지에 관해서는 그에게 이미 들려준 이야기인 걸, 또…….

형의 아버지가 제게는 힌트입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오프셋기술자-소설가-사진가의 이야기


요하네스를 어떻게 만났느냐고요? 당신이 알고 왔다시피, 이곳 서베를린의 코민, 주거공동체에서 만났지요. 1970년대에는 주거공동체가 이곳 서베를린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생활방식 속에 그 나름대로 퍼져 있었지요. 우리는 대개 어디선가 모여들었어요. 서독 본토에선 진작부터 군복무를 피하는 손쉬운 길이기도 했고, 동독 출신의 요하네스라고 특히 이상할 것도 없었어요. 처음엔 출신도 밝히지 않았지만요. 우린 출신도 배경도 서로 따지지 않았어요. 부르주아 도덕에서 볼 때 무질서, 무분별은 오히려 우리의 정체성이었죠. 시민사회의 가족 개념이 송두리째 깨진 이곳 공동체에선 인간애면 그만이었죠, 누구이건 무엇을 하건. 마약이라는 부작용도, 예 뭐, 인정할 건 해야죠, 어쨌거나 우리의 폭풍 같았던 혁명의 대상은 우리의 무작정 건강한 몸도 포함되었으니까요. 건강해서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을 착복하여 얻은 건강이라면?

무엇보다 요하네스는 정말 앤리헤 베그리페 - 동류항이란 말 어려운 말이라서 나중에야 알았다 - 딱 제 친구를 만났지요, 역시 유명 나치작가의 아들을. 그러니까 요하네스는 어떻게 이 작가 친구를 뒤따라 우리에게 온 것인데, 어떻게 만난 것인지는 몰랐어요. 과거에 관심을 안두는 것이 우리들의 방식이기도 했다니까요.

그 친구는 나치시절의 막강한 실력의 소설가를 아버지로 두었지요. 엄청 힘든 과거의 덫을 쓰고 있었던 거죠. 아니 물론 어떤 아버지의 아들들도 어느 점에선 비슷하겠지만요. 예컨대 내 아버지는 출전 3일 만에, 그러니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전사해서 부도덕할 틈도 없었지만, 과거의 짐은 마찬가지였죠. 나중에야 알았지만, 요하네스도 작가를 아버지로 두었더군요. 해서 그가 그에게 집착을 보였던 것이죠. 그것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요하네스에게 절반의 유대인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도 쉬운 건 아니었죠. 암튼 작가의 아들들 - 우리 독일의 경우 작가의 아들들은 무서운 심적 부담에 시달리죠. 특히 이 친구는 …… 우선 그 자신이 벌써 글을 발표하는 수준의 작가였고, 굳이 비교하자면 요하네스는 글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또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던 것도 요하네스완 달랐지요. 확신에 찬 나치였던 그 아버지는 벌써 나치의 정권창출 이전에 『용맹스러운 민족』이던가 그 비슷한 종류의 인종주의적 작품들로 유명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은 건전하고 밝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외다. 그렇지만 나치는 곧 패망했고, 시골로 은퇴한, 그러나 여전히 강한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아버지 밑에서 그 나름 힘들었답니다. 또 상상해 봐요, 공부를 하다가 이율배반적으로 깨달았을 아버지의 상을. 신들린 듯 분서갱유의 앞잡이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소화해 내기는 힘들었을 것 아니요. 다 같이 무엇인가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세대라고 분노했던 우리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훨씬 불행했던 거죠. 그러한 분열은 젊은이를 정말로 피폐하게 만드는 거죠, 나락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길은 약물이었을까요? 아니, 우리들 모두 알 수 없는 분노와 절망에 많이들 그 유혹에 들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해방은 새로운 감옥의 문턱이었다 싶기도 해요.

자, 요하네스의 이야기. 우리 코뮌에는 요하네스와 그 유명 작가의 아들 이외에 그의 여자 친구인 목사의 딸, 절필한 시인 그리고 필하모니에서 나와서 전자회사에 다니던 친구랑 나, 그렇게 함께 살았어요. 우리들과 함께 살면서 그는 많은 것을 의아해 했어요. 우선 내가 혼자서 미니출판사를 차려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제일 의아해 하더라고요, 불법이었으니까요. 동독 젊은이들이 원하는 온갖 자유를 여기서는 이미 누리면서도, 심지어 군복무면제의 자유까지를 누리면서 이런 불법 인쇄물들을 통해서 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카뮈의 부조리성의 문제』 비슷한 학위를 하고서도 사회주의대학생연맹에서 맹활약을 하는 친구도 이상하다는 거죠. 뭔가 이율베ㅐ반적이라고. 또 어떻게 카라얀의 필하모니를 자발적으로 떠날 수 있는지, 그가 클라리넷을 버리고 하는 일은 지멘스의 수위라니. 게다가 사회주의대학생연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할수록 사회민주당을 저주하게 되었다는 시인이자 가수가 우리 집엘 자주 왔었는데, 그 모든 것을 요하네스는 첨엔 정말 이해 못하더라고요.

그는 너무 깊이 서독의 폐해 속으로 들어와 버린 셈이었죠. 처녀림과도 같은 동독사회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오염에 노출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대도 그는 서베를린에서의 느낌을, 그 적응과정을 기록하는 대신, 동독에서의 체험을 회고적으로 메모해두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하더군요. 동독의 청소년답게 자유도이칠란트청년단에서 길러졌으니. 그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6살에서 10살까지는 푸른 목수건을, 그 다음에는 붉은 목수건을 두르고 자라났겠지요. 히틀러 청소년단과 다른 것이 있다면 목수건의 색깔이 갈색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인사말이 ‘히틀러 만세!’에서 ‘우정!’으로 바뀐 것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고. 기관지《젊은 세계》는 물론, 아예 독서의 나라 동독을 경험하면서, 그는 홀어머니의 아주 모범적 아들은 아니었다고 했어요. 어머니의 소원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작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자신은 지치도록 의무독서를 하다 보니 직업으로 글을 읽거나 쓰고 싶지 않았었다고. 반파시즘 망명문학들이 그곳 고전이었지만, 『제7의 십자가』나 『벌거벗은 채 늑대들 사이에서』같은 소설들이나 영화는 정답이 있는 수식처럼 재미가 없었더래요. 인간은 파시스트 늑대보다 더 강하다! 이렇게 뻔한 답을 위해 우회가 심했을 뿐이라고.

독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재미있어 했어요. 동독에서 권장되었던 작가들 보다는 듣도 보지도 못했던 조이스나 프루스트, 아참, 카프카도 물론, 또한 베케트나 지드 등, 동독에서 시민사회의 퇴폐주의라고 혹독하게 비판되었던 작가들의 호기심 가는 읽을거리가 여긴 넘쳤으니까요. 물론 우린 그 반대로 그런 작가들을 부정하고 있었는걸요, 그런 무기력한 퇴폐성을 왜 읽는답니까. 보니까, 청소년기가 상당히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더라고요. 문제는 그가 책 읽는 일에 경직되어 있었던 점인데. 동독에서 독서나 글쓰기는 그에게는 공식외우기 같았다고 그러더군요. 작가가 되는 것도 라이프치히에 가서 문학원에 들어가면 쉽게 될 수 있었다나. 그라면, 나치에게 박해받은, 혈통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망정, 일단 나치의 박해를 받은 작가의 아들로서, 그라면 우선순위로 발탁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거기 문학원에 간 그의 친구는 문학사, 문학이론,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창작의 실제를 배운다고 했다던가. 그가 빈 대학으로 나오기 전까지 못해도 백 명 정도는 새로운 공화국에서 작가들이 생산(?)되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생산이란 그에게는 특별한 염료나 그에 따른 새로운 기술들이었고. 그래서 우선 고향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나왔을 때도, 어차피 베를린대학으로 옮길 심산이었대요. 프러시안블루 - 300년 전 그 전설의 감청색의 산실이 이곳 베를린 아니던가요.


저, 그분이 그 다음에…….

아, 우선 들어봐요.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요. 우리 중에 작가가 있었다고 했지요, 그 친구의 깡마른 여자 친구가 아들을 낳게 되었어요. 그러자 아이는 공동의 아이였지요. 저쪽에서는 일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유아기 아동들을 위한 킨더가르텐이 완벽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작 집에서 공동육아라니. 요하네스가 그렇게 섣불리 내뱉는 말에 다들 웃었지요. 전통적으로 현모양처인 여성이 육아를 담당한다는 식의 시민사회의 방식은 우리들이 가장 혐오했던 것이었으니. 어떻든 우리 중 요하네스가 유난히 아기를 잘 돌보았어요.


아기를 잘 돋보아요?

예, 아기 돌보는 데 남녀노소 구별은 없었다니까요, 이곳에선. 우린 그가 시간이 많아서 아기에 열중한다고 생각했었지요. 직업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라서. 그는 대학에 등록은 했었는데, 공부에 열을 올리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그러니까 그때 요하네스에게서 서독 어딘가에 아이가 태어나 있었을 것이라고요? 댁의 형이란 사람은 그런 이야긴 없었는데. 참 듣도 보도 못한 말이군요. 그가 알기나 했을까요? 아이의 존재를요, 미안합니다. 하긴 그렇게 유난히도 아기를 돌보는 이유가…… 뭐 이유까진 아니라 해도 켕기는 뭔가가 있었을까요?


그냥, 그 분 이야기를 마저…….

우리들이, 일은 점점 더 꼬였어요. 우리 코뮌의 유일한 여성이자 아이의 어머니가 정작 집을 떠났거든요. 아기를 놔 둔 채로요. 그것도 다른 남자친구에게로. 아이를 떠나는 엄마의 부도덕성을 상상도 할 수 없어하던 요하네스는 촌놈이라는 눈총을 받았어요. 애 아버지조차도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애 아버지가 점 점 더 약물에 의존해 갔어요. 떠난 여자친구는 더 큰 이상을 위해서 사생활을, 아이까지를 버렸다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었어요, 요하네스만 몰랐죠. 그는 도대체 우리들의 대안모색을…….

대안이라면 이 사회가 썩어문드러졌다는 말인가요? 단 한 번도 독일이, 그때의 서독이 썩어문드러진 사회였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걸요.

부패하지 않은 사회라면 이상향이었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니었죠. 독재자의 독재는 아니었지만, 자본과 정치, 게다가 교회까지 합세한 삼위일체의 교묘한 군림이었죠. 민중은 언제나 어리석죠, 빵과 서커스만 주면 만사형통이라던 히틀러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배부르면 진실 따윈 눈감으니까. 아이 엄마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사건들의 주인공이 되어갔어요. 새로운 남자친구와 함께 테러사건들에 휩쓸린 뉴스가 나오고, 그들은 온 나라를 문자 그대로 충격의 도가니로 내몰았죠, 체포와 구금과…… 말로는 다 못하죠, 왜 학생도 뭐 다 알겠지요, 이 나라 70년대의 소용돌이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고 깨어나지 못했어요. 그는 응급실로 이송되고 요양병원에 보내졌지요. 이어서 사회복지센터 사람들이 아직 우유에 의존한 아기를 아동보호소에 위탁해버린 사단이 났어요. 그 즈음에 요하네스는 더욱 넋을 놓았던 것 같아요. 아기의 운명이 그에게 그렇게 충격인 것은 그땐 몰랐어요. 다만 그 후로…….


그 후로?

아무튼 나도 잡지사건 뿐 아니라 격한 데모현장에서의 불법선전물 문제로 경찰과 마찰이 있었죠.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총격사건까지 발생했으니, 결국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지요. 처음 몇 달 동안 감옥으로 몇 번 면회를 온 것이 내가 그를 만난 마지막이었어요. 그가 코뮌을 나갔다고 다른 친구가 말해주었어요, 서베를린을 떠나려 한다고. 그리고는 연락이 끊겼죠. 난 6년 동안 그렇게 들어앉아 있었으니. 그 동안 우리의 체험을, 우리의 좌절을 반성 겸 쓴 것이 소설로 팔려 나갔어요, 채 출감도 하기 전이었죠. 얼떨결에 작가가 된 거죠. 우리들 중에 진짜 잘 쓸 수 있었던 친구는 영 떠나버렸는데. 그 친구는 요양병원에서 수면제에 또 뭐에 잔득 삼키고서는 깨어나지 못했다지요. 내 서툰 책은 단기간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지요. 오래 감옥에 있는 상황이 선동적이었을지. 어떤 의미로든 좌절한 젊은이들이 우리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읽었기 때문이겠죠.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

예. 나 스스로는 소설가라는 느낌이 없어요. 나는 그저 전무후무한 경험의 내용만으로 소설가라고 떠밀린 것이죠. 심상도, 의지도,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한 뼈를 깎는 고민도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후속 작품들에선 실패했고요.


그럼 지금은?

사실 우린 뭔가 뿌리를 잃은 거죠. 우리의 투쟁이 - 사실 우린 삶이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세대니까요. 이 나라가 생경해져서 밖으로 떠돌기도 했어요. 그래도 댁의 형이 - 요하네스의 아들이라고요? -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출판사를 거쳐서라면 누구라도 나와는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때문이었지요. 학생도 마찬가지고.


그럼 지금은 그분은 혹시…….

하지만 이젠 내 책들은 거의 팔리지 않아요. 책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던 시대는 끝난 거죠. 언어는 소통의 기능을 잃었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지요.

소통 부재라고요?

예. 동서의 대치도, 좌우의 대립도 무너져버린 유럽이 답이오. 여전히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외치는 교육자적 작가는 시대착오. 독서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보다는, 그 분은 오스트리아로 가셨을까요? 바로 동베를린으로 가셨을까요?

모를 일. 어디로 향했던 지금 그의 아들이 한 가닥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어디든 찾지 않을까요?

도이치의 울림?

보르헤스를 아는가요?

…….

독서는 다른 낯선 두뇌를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예찬했던 작가지요.

아, 예.

독서에 관해서라면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겠소?

…….

앞을 거의 못 보았으니. 80만권의 책과 어둠을 동시에 가져다 준 신의 절묘한 아이러니라고 그랬다던가. 그래서 더 울림이 중요했던 것인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울림이 그득한 언어는 도이치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하필?

그냥 해보는 말이오. 지금은 동서남북 자유로이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그가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지 않겠나 그 말이오.


자유로이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


여기까지, 그의 뒤죽박죽 메모는 베를린에서 멈춰 있었다. 그가 아직 공부하고 있었던 시절에서 멈춘 것. 그가 보낸 것은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공백은 너무 길었다.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갑자기 전기가 나간 것처럼 내 손가락의 작동이 멈췄다. 애초에 이 기록은 뿌리 없는 나무에 물주기였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구상도, 가닥도 없이. 흩어진 메모조각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리기. 나는 무슨 알갱이를 향해서 이 종이부스러기를 헤집고 있었을까. 벌써 스산한 계절의 축축함이 벤다.

그해 겨울도 점점 깊어만 갔다. 그에게서 더는 소식이 없이. 정적 속에서 자판도 쉬고 있었다.



다시 봄이 꿈틀거린다. 언어교육원에서 연락이 왔다. 프랑스어 강의도 다시 강화해보련다는 전갈이었다. 제2외국어 담당은 그가 아니었다. 사무직원은 그대로였다.


한 선생님! 이번에도 고생 좀 하시겠어요.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수준을 세분해서 나누지 않아서요.

…….

배 교수님은 다시 독일에 가셨답니다.

예.

안 놀라시네! 다들 놀라시던데요. 벌써 지난봄에요, 갑자기.


묻지도 않았는데 직원은 그의 이야기를 흘렸다.

개인적인 일이라고. 사람들 말이, 모르죠, 독일에 두고 온 애인이 있었다든가, 암튼 누군가를 찾으러 갔다고, 추측들만 성하죠. 정말 그랬을까요?


그랬구나. 

나는 확신한다. 그가 다시 한 번 형을 찾아 나섰다고.

왜 그는 100% 핏줄도 아닌 형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동포의 끈? 배달민족의 품도 아니질 않는가? 생물체를 조직하는 미세한 원형질이 같음? 최소한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그가 암스테르담에서 쾰른 사이 비행 중에 놓쳐버린 어머니의 편지에는 네 형은 네 형이다, 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상상이 맞을 것임을 느낀다. 무엇인가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가 편할 수 없음을 느낀다. 베를린 다음은 어디메 일까.

어느 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내게 보낼 것임을 믿는다. 한번 흘린 비밀은 쏟아진 물이나 같으니까. 움켜쥔 손이 아프면 그는 또 놓을 것이다. 나는 가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흘려놓은 물에 덩달아 적시어진 채로.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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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2011년 10월호 (147호) 196~253쪽



Posted by 서용좌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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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2008. 9. 15. 23:30
  그 여자의 글쓰기
                 

                                     //소설 「네 번째의 죽음」을 읽고 //


이 소 림 (전남대학 독문과 박사과정 2학기)

2008년 9월 30일


단편 「네 번째의 죽음」은 마리루이제 플라이서 Marieluise Fleiβer(1901~1974)의 『심해의 물고기 Der Tiefseefisch』(1930)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남자주인공 라우렌츠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 생각, 말, 남자에 대한 태도를 순종적으로 할 것을 여성에게 종용한다. 대등하지 않은 이성간의 관계에서 억압받던 여자는 결국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난다는 것이 플라이서의 소설 내용이다. 이러한 서두는 「네 번째의 죽음」의 큰 틀이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벌어질 것을 시사한다. 더불어 인용된 소설의 남녀주인공들이 작가라는 것과 「네 번째의 죽음」속 일인칭 화자 '나'와 친구인지 누구인지 아무튼 가까운 '그'라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설정도 공통적이어서, 독자는 「네 번째의 죽음」에서 남녀의 지배관계와 글쓰기의 문제가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인칭 화자 '나'와 '그'를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소설의 주체로서 그녀의 시각에서 남과 여 각각의 세계가 그려진다. 이들 두 세계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세계의 양극단으로 분리 되어있다. 그들은 비슷한 날에 (사실은 한 날에) 태어나고 지적인 교육을 함께 받으며 자라났음에도, 그의 지성은 명철함과 합리성으로 그녀의 지성은 표현하지 않고 적당히 감추어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이다. 여성 고유의 생물학적 특질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는 모범과 질서와 선행의 세계 속에 있어, 그녀가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무질서함과 산발성과 초보성은 늘 그의 비난대상이 된다. 남과 여 이원의 세계는 그녀에 대한 그의 힐책으로 소통될 뿐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더욱 자세하게 들려주기 위해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소설 속에 삽입해 넣은 액자소설이다. '독서-글쓰기-싸움-병-죽음'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진행된다. 다섯 단계의 내부이야기는 (독서-글쓰기를 '생'으로 묶어) 자연의 법칙인 '생-노-병-사'에 병렬 할 수 있다. 각각의 주제 속에서 그녀와 그의 인물성향이 나타나고, 에피소드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적 세계 안에서 여성의 글쓰기 문제와 작가로서의 창작의 문제는 '실존(삶)'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음은 액자소설 속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독서>

그는 친구와 관념의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한다. 그와 친구가 서로를 반박할 때, 그는 혁명적, 반항적, 이방인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친구들과 멀어져 갈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한다.

독서의 문제로 그녀와 그가 티격태격 할 때, 그는 평생 주워 읽은 모든 것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236)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녀는 너무 많이 읽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글쓰기>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다. 독서를 한 후 그와 친구와의 토론에서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드러난 것처럼, 그의 글쓰기도 그 시대의 문단에서 요구되는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담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글에 타인의 글이 섞이는 것,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 고민한다.


<싸움>

그는 자기 스스로 창안한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그녀를 힐난한다.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게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 중독.(241) 결국 사랑에 빠질 듯한 그녀에 대한 힐난이기도 하다.


<병>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신의 일산화탄소중독은 그녀의 신체적 병으로도 나타난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 후반부에 그녀가 바흐만 Ingeborg Bachmann(1926~1973)의 작품 『말리나 Malina』의 여주인공이 벽 속으로 사라지며 자살하는 것을 패러디 함의 전조이다. 그녀 삶이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되는 것이 문제라는 소설창작의 문제는, 역으로 그녀 삶(논픽션)과 소설(픽션)이 혼합되는 문제와 교차된다.


<죽음>

그와 그녀는 남성(작가)의 문학작품 속에서 '대상화된 여자'(245)에 대해 토론한다. 대상화된 여자를 두둔하는 그녀를 그는 '골통나부랭이들'(246)이라고 비난한다.

그녀가 작품을 처음 썼을 때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것에서부터 그는 그녀를 비난해왔다. 그는 그녀에게 규칙적이고 표준적인 글쓰기 과정과 내용의 논리 정연함과 개연성, 그리고 그 안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완벽한 픽션을 창작하기를 요구해왔다. 그는 그녀 앞에서 곧 질서이자 상징이자 규칙으로 군림한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는 그가 제시한 지배적 글쓰기 체계가 그녀의 창작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

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 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244)

 

이 단계에서 그녀가 창작하는 이유도 드러난다. 그녀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246)으로 창작을 한다. 창작의 문제가 실제 삶의 문제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면서 군림해온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자신이 사라지는 수 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말리나의 죽음을 패러디 한다.


삽입된 다섯 개의 에피소드에서 남성의 규칙을 여성에게 내면화시키려는 '그'의 모습과 그와의 상호관계에서 억압받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글쓰기라는 모티브를 통해 심화되었다. 주지할 것은 그녀가 빛나는 상상력과 창작에의 열정과 상상력을 필력으로 옮길 수 있는 지성을 갖추었음에도 상징적으로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상황과, 일인칭 화자인 그녀가 내레이터로서 고백적 에세이의 '글을 쓰고 있다'는 모순적 상황이다. '픽션'과 '팩션'의 문제를 창작의 고뇌로 안고 있는 그녀의 글쓰기 문제는 글을 쓰면서도 쓰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소설을 써내려 가는 그녀 삶 자체다. '생-노-병-사' 삶의 법칙을 글쓰기에 대위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233)를 부렸다. 세계문학사의 남겨진 고전명작들의 작가들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과 정통을 그의 전유물로 만들어 글을 쓰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소설에 팩션 형태로 용해시키며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소설에서의 개연성(233)이란 남성 본위의 가치 판단 하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총체성에 다름 아니다. 한편, 그녀는 무작정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237)하고 자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조적 정신을 발현시키기 이전에 기계적으로 가부장적 사유체계로 점철된 대가들의 글을 읽었고, 남성의 전유물로 구성된 외부세계의 틀에 맞추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그녀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작업을 규정화된 조건에 맞출 수 없는 데 기인한 자기비하이다.

그녀는 기존의 전통과 정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한 후에 생겨나는 자의식을 비정통적이고 불분명한 척도라 생각해 부유하고 있다.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가늠 지어진 사회적 성 차별의 이데올로기  성 역할의 내면화  여성의 자의식의 발현을 향한 욕구- 욕구발현의 실패- 주체로서의 자아 정립 실패'의 과정이 그녀의 글쓰기 문제에서 나타난다. 상식적 '글쓰기', '언어'라는 것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며, 이러한 가부장적 사유체계의 지배 속에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언어, 여성의 자아는 억압되어 왔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 <죽음>에서, 그녀가 이와 같은 상황을 깨닫고 자살을 연출하는 것은 큰 전환점이다. 그런데 뒷방 서랍 속에 자살의 형태로 가두어 버린 '나'는 남성의 규범에 얽매인 '외부적 자아'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고픈 원래의 나'이다. 그녀는 '자신의 방'의 종이쪽지들, 물건들을 가리키며 "택배 방"(251)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녀이지만, 그 곳에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기만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은 여성에게 주인이자 절대자로서 행하는 남성들의 물건들(택배)로 오염되어, 그 방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 수 없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나'를 버리고 '그'가 되기로 한다. '그'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면서 다만 내면화 되어 일인칭 화자였던 '나'는 '그'에게 투항한 것이다. '그'가 기실은 남성적 질서 속에서 능란하게 적응하고 있는 건강한 여자임이 마지막에 언니와 남편의 등장에서 확인된다.

 

「네 번째의 죽음」은 바흐만의 『죽음의 방식들』 연작 3부작에 이은 네 번째 죽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부작 중『말리나』와 외부액자 속 '나'의 이야기, 액자 속 내부 이야기는 삼중의 메타픽션 구도를 이룬다. 『말리나』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남녀관계와 문학세계의 불평등성, 늘 훈계하거나 야단치는 남성의 모습, 여성의 정신세계와 실존을 무시하는 남성상 등이 차용되고 있다. 말리나의 정신이 남과 여로 분열된 모습은 남성적 세계 안에서 원래의 자신이기를 바라는 여성성의 발현으로 이해되는데, 결국 말리나의 여성성이 살해(강요에 의한 자살)된 것처럼,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도 같은 형식의 죽음을 취한다.

여성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결말은, 이 소설의 자서전적 성격과 더불어 남성들의 발전교양소설의 내용과는 대치되는 것들이다. 기존의 문예학은 여성들의 자기산출적인 텍스트들을 폄하해왔다. 자기고백적 성격, 줄거리의 부재, 주인공의 비 발전성 등은 여성의 자기고백적 텍스트에서 보는 일부 특징이다.


자서전적인 것의 혼합, '삶'에의 천착 그리고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출

판의 소망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한에 있어서 문학사 서술에 의해 통속성이라는 낙인이 찍히

게 된 문학표지들인 것이다.1)


페미니즘 문예학자 뷔르거 Christa Brger는 여성의 글쓰기를 삼 단계로 설필한다.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의 요한나 폰 쇼펜하우어나 샬로테 폰 칼프 등을 예로 들어, 여성들이 기존의 제도 문학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소피 메로 등이, 완전히 비고전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일기 책과 편지 글을 통해 소위 '고급'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는 요구를 따르지 않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카롤리네 슐레겔-쉘링, 베티나 폰 아르님 등이 글쓰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들에 의해 산출되는 자아에 대해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단계라 한다.2) 페미니즘 문학사에서, 세 번째 단계는 여성의 글쓰기가 삶과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미학적 실천3)으로 실행되어 온 시기이다.

뷔르거의 견해에 따르면,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는 위의 세 번째 단계에 있다. 글을 쓰지 못한다고 자기를 비하하는 그녀의 생각은 기존 문예학적 입장에 기인한 것일 뿐,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한다. 그와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알력다툼은 기존 문예학의 전통에 반하는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문제로 확대되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가 글을 쓸 수 없다며 상징적인 자살을 감행하고 체념하는 것을 비극적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 여성고유의 것을 표현하기 위한 규범이 부재한 현실을 비관하고 그 상황을 기술하는 것이 부지 중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전통을 따르는 '그 여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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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나 린트호프, 이란표 역: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110쪽 재인용.

2) 참조 : 앞의 책, 113~114쪽.

3) 참조 : 앞의 책,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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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2008. 9. 1. 23:30

[한국소설 2008년 9월호]

번째의 죽음


                     

라우렌츠: 앉아서 써 봐. […]

여자는 질문을 받으면, 질문으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질문을 받으면, 즉시 대답해야 한다.

여자는 라우렌츠의 생각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는 심한 말로 라우렌츠의 문장을 끊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적당한 장소에서 말할 줄 알고 또 침묵할 수 있어야 하고 라우렌츠를 사랑하고 착하게 대해야 한다, 그가 비록 거칠더라도 말이다.

이걸 자주 읽는 거야, 알았지.

 


이 글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극중의 라우렌츠(남자)와 여자는 작가죠. 집에 들어앉은 여자는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결국 여자는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납니다. 글을 쓸 수 있었냐고요? 우여곡절 끝에 겨우 썼죠. 적어도 남자의 글보다는 훨씬 의미 있게 언급이 되는 작품들이었죠. 그러니 근 한 세기 전 서양의 이 작품이 여기에서 인용되겠죠. 


제 이야기를 할 차례군요. 나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얼핏 골빈 여자들에 속합니다. “적당한 장소에서 말할 줄 알고 또 침묵할 수 있어야 하는” 틀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죠. 더구나 순간의 감정에 잘 휩쓸려서 조급하다는 핀잔을 듣곤 하죠. 조급하다 - 그 말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그것을 하필 나와 가장 가까운 그가 모릅니다. 그는 나랑 생일이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남성들의 전유물인 이성과 합리성과 또 모든 명철함을 가졌기 때문에 늘 잘난 체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일찍 서로를 발견한 셈이지만, 마찰은 자라면서였죠. 중학교 때, 여전히 잘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거즈와 반창고를 대고 다니던 어느 날이었죠. 난생 처음으로 팔꿈치나 무릎이 아닌 속옷 깊은 곳에서도 피가 흐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란 어느 날, 그는 퍼렇게 날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소 비웃음을 머금은 채, 휑하니 돌아서 나가는 그는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빠져나가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여름날이었는데도 그가 떠난 자리로 창문을 통해 전해오는 공기는 얼음장 같았으니까요.


나: 이 첫 작품에 난 제목을 붙일 수가 없었어.

그: 제목이 없음 무슨 시. 제목이 없이 주제가 나오며, 주제가 없이 시를 쓸 수 있다고!

나: 처음이라서.

그: 넌 그냥 시를 쓴다는 폼을 사랑해서지! 생각부터 가다듬어야 했어. 생각이 있어야 글이 나오지. 글쓰기 과정은 단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문장구성과 단락 나누기 등에서…….


제목이 있을 자리에 “무제”가 뭐냐 라는 질책에서 시작하여 그는 정말로 내 첫 작품을 난도질했답니다. 그 버릇이 평생가게 된 거죠.


그: 자 시작해보자. 단어들을 준비해. 핵심단어들을.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을 것 아냐. 그것들을 문장으로 연결해 내는 거야. 문장의 유형을 결정해, 서사와 묘사를 구분해야지. 원인과 결과는 소설이라 해도 개연성을 위해 필수적이지.

나: 지금 시를…….

그: 담엔 소설도 쓰겠달 것 아냐! 개연성이라면 우연에서 필연을 볼 수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꼭 단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그러하리라고 생각되는 만큼의 가능성 말이야.

나: 참인 것 같은 거짓말?

그: 뭐 그 정도로 이해하든지. 논리학에서는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를 수량적으로 잴 수 있는 경우만을, 철학적으로는 확실성의 정도를 말하니까. 개연성은 어떤 논증의 전제와 결론 사이의 특별한 관계라…….


어렵사리 “개연성”의 고개를 넘었지만 아직 멀었죠. 그는 아는 것도 많았거든요. 문장들을 멋대로 자라게 내버려둬선 안 되지. 단락이라는 큰 그림을 구상해 둬. 섣불리 정의를 내는 것은 문학작품에선 금물…….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를 부렸죠. 그래도 난 그가 고시 쪽을 택할 것이라 믿었어요. 사법이건 행정이건 또는 외무이건. 어쩌자고 문과대학엘 진학했는지, 그건 지금도 모를 미궁이랍니다. 허영이었을까요? 뭐 정신적인 일에 탐닉한다는. 일직선의 성공을 얕잡아 보는 허영? 다음 몇 토막글은 우리의 숨 막히는 이야기랍니다.


*


독서


그: 독서로 우정을 깨긴 싫구나.

친구: 독서란 원래 우리 머리통을 깨부숴야 되는 거라며. 네 입으로 안 그랬어? 대단한 작가의 말이라고.

그: 건 지금 상관없고. 넌 그러니까 “반항적 인간”을 비난하는 거잖아.

친구: 그럼 넌 가차 없는 혁명제일주의를 단순무식하다고 내몰겠다?

그: 카뮈작품이 그런 말 아닌 것 너도 알잖아, 왜 억지야? 한 발 물렀다고 혁명 끝내자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 봐, 볼셰비키혁명의 정당성을 위해서도 그런 반항적 인간이 더욱 요청되는 것 아니었겠냐고.

친구: 언제부터 카뮈로 돌아섰나. 혁명 대신 반항? 부조리? 웃기시네. 극한상황에선 정당한 목적만이 정의로운 것.

그: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믿을 순 없어.


이건 『정의의 사람들』을 두고 벌어진 틈이었다. 이런 대화는 흔했다. 난 사실 대학시절만 해도 그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충분히 지적이고 게다가 사려 깊었다. 섣불리 연애한다고 마음을 내놓지도 않았고, 이슈에 따라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데모에도 동참하지 않을 만큼 줏대도 있었다. 그가 정과 혈기에 넘치는 친구들을 잃어가는 동안에도 난 걱정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친구란 원래 남이고, 남이란 다른 존재이고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이 없는 점에서는 우리는 무척 닮았다 싶었다.


독서목록에 스따브로긴이 등장했을 때 친구들과의 상황은 몹시 나빴다. 친구 하나가 그를 사실은 말 뿐인 퇴폐적 스따브로긴에 빗대어 비난했을 때, 독서회의 우정은 송두리째 위기에 처했다. 항상 굿이나 보던 나의 생각으로도 그 부분에선 친구들이 좀 심했다 싶었다. 그가 얼마나 금욕적인가를 친구들이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기름진 맛있는 음식을 죄스러워 하는 것, 그가 검소한 차림을 중시하는 것들을 다들 몰랐다. 스따브로긴은 그에겐 상처였다. 그는 한 동안 정체성 위기에 빠졌다. 그는 누구이어야 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오히려 무신론의 상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던 끼릴로프에 가까운 결벽증의 인물이었다. 자아의지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회복불능의 행위도 불사하리라 믿은 끼릴로프. 하긴 그것은 그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어떤 인간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악령』은 우리들의 터부가 되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소설들 모두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냐고? 천만의 말이다. 줄리앙 소렐의 터무니없는 성공집착이나 애정행각은 물론, 레날 부인의 진정한 사랑도 도저히 알지 못했다. 에마 보바리의 충동은 차라리 저열하다고, 별 증오심도 없이 남편에게 비소를 먹인 테레즈 데께루의 무감각은 어불성설이라 간주했다. 난 소설들을 그저 읽어치우기에만 급급했다. 사람이 쓴 글을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못 참는 것에 불과했나? 책도 중독이 된다.


독서 때문에 그와 티격태격하는 것은 늘 일상에 속했다. 『죽음의 방식들』 3부작을 놓고는 한참 심각했다. 여자들이 남자들로 “인해서” 죽는다는 내 생각에 그는 화까지 냈다.


그: 뇌진탕과 폐렴이라는 사망진단은 뭔데! 세 번째 죽음은 죽음도 아니야, 승복일 따름이지.

나: “그것은 살인이었다.” - 이 마지막 문장은 뭔데?

그: 여자가 스스로 사라진 장면에서 어떻게 그 자구만을 고집해? 그만 왈가왈부하고 네 것을 써보라니까. 평생 주어 읽은 모든 것들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 있을 걸.

나: 악담은.

그: 악담이면 어때서, 바른 말이면 바른 거지.

나: 바르고 바르지 않고, 그게 그리 쉽나?

그: 내 말이 아냐, 그건 정설이지.

나: 정설을 누가 만들었는데? 것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을 것 아냐?

그: 정설과 사설도 구별 못해? 사설, 사삿사람의 의견이나 중요시하는 버릇이 어쩌자고!

나: 나도 사삿사람이니 그렇겠지.

그: 글을 쓰겠노라 늘 꿈을 꾸는 건 뭔데? 마냥 읽어대기만 하고, 여차하면 이런 저런 글귀나 끄집어내고…….


그렇게 무작정 읽은 것은 사실이다.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하고서야 내 글을 시작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막연한 준비심에 불과했을까? 부수적인 효과도 짭짤했는데, 그땐 책 좀 읽는 애라면 괜찮은 프리미엄이 따라붙는 시대였었다.


글쓰기


정작 글다운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는 신들린 듯이 진력을 다했다. 하지만 학보사에서 거절당했고, 신춘문예도 두어 번 탈락했다. 그러더니 또 후다닥 글쓰기를 중단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카프카도 아니라면 누구도 더는 글을 써서는 아니 된다고. 이 무슨 황당한 궤변인가. 그래서 내가 슬며시 끼어들기 시작했다. 박경리, 박완서는 왜 아냐? 수지와 수인(오목)의 이야기만으로도? 라고 반문하면서. 나는 어쩌면 그의 탈락을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데올로기에 충실했을 그의 글은 이 시대의 문단에서 한편으론 요청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두들기는 문은 정반대의 색깔이었으니 말이다.


색깔? 그런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런 빛도 아닌 회색이었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흘렀다. 밥을 해결할 직업도 갖게 되고, 연애(?)랑 결혼도 하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오늘 하려는 이야기와 무관하다. 생략법은 특히 그가 좋아한 화두였으니, 그 또한 이런 생략에 찬성일 것이다. 진부함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보고를 생략한다는 것.


어쨌거나 생이 더 이상 진부해질 수 없을 만큼 아스팔트바닥 위를 맴돌고 있을 때, 내가 옛날의 종이들을 헤집어 내기 시작했다. 책상으로 썼던 낡은 교자상아래 밀려들어간 먼지투성이의 원고들은 가장자리가 열 번 백 번의 물걸레질에 밀려 짓이겨 졌지만, 용케도 누렇게 뜬 내용물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나 치기어린 글들인지 쑥스럽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것들. 누구라도 제 글을 읽는 것은 고문이다. 어쩌면 살인이다. 내 경우엔 심했다. 어떤 글에 비해 보아도 내겐 독창성이라곤 없었다. 너무 많이 읽은 탓에(?) 못 쓰는 나. 그가 옳은 것 같다.


처음엔 내가 빛바랜 원고지들을 넘겨보다 지쳐서 일이 그만 시작도 없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세상 따라서 완전히 생경한 원고지, 줄도 없고 마음대로 변하는 백지화면에 글을 “삽입/수정”하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우선 원고지에 대고 훈수 놓던 일을 못하게 되었다. 내가 <내 글>을 암호로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신나는 세상.


그가 또 모르는 일로서 이 이야기를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 고백할 것이 있답니다. 나는 누군가 내게 보낸 보배 같은 글귀들을 싸구려 감상적 픽션에 섞어 짜 넣고 있었죠. 곧 사라져버릴 듯이 연필로 쓰인 것, 또박또박 예쁜 팝글씨로 쓰인 것, 편지지도 아닌 화면으로 도착한 것, 더 작은 지우개만한 화면에 떠오른 것들까지, 순간 되살아나는 타인의 글들. 타인의 글을 내 글에 섞어 쓰는 짓거리. 그 짓에 대한 가능한 변명은 오직 하나,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그 몇 짧은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내가 죽은 다음에까지도 세상에 흔적으로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악마다. 그 조각글들의 주인에게는 악마다. 나는 소설을 시작한다면서 마음 한 구석으론 기껏 일기를 쓰는 수준에 머물었나 보다. 픽션 또는 팩션에 관련한 괴로움은 여전하다. 나는 물론 내 주인공을 창조하여 실존인물과 섞어 놓는다든지 해서 실존인물을 모욕하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실존인물의 한 작은 조각을 잘라내어 창작된 인물의 어느 부분에 끼워 넣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실존인물은 그렇게 됨으로써 생명 한 조각을 도난당하고, 창작된 인물을 독창성을 잃는다. 윈-윈 게임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 세상에서, 둘 다 망하자는 싸움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싸움


너 죽고 나 죽자! -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도 그건 그냥 하는 말이다. 마음속으론 ‘너 죽고 나 살자!’라고 싸운다. 그와 나는 죽자 사자 싸우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그가 좀 잘난 체를 하는 편이라서, 내 우정이나 사랑의 장면에까지도 끼어들곤 한다. 그의 충고가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의문이다. 이렇다 할 우정도 사랑도 쌓아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남편을 또는 아내를 버려두면서 까지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달려갈 인사가 있는가? 세상 친구들의 우정을 다 버리고라도 아내 또는 남편의 사랑에 매달릴 것인가? 어느 쪽도 경우의 수에 해당하지 않으니 모순이다.


쪽지의 글자들이 춤을 추듯이 살아난다. 퍼즐조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풍선처럼 바람을 먹은듯하다. 그것들이 다시 한꺼번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검은 바늘들이 되어 내 가슴으로 향한다. 그렇게 무수히 쏘아져 내게 꽂혀버린 바늘 끝에는 독이 묻었을까? 헤집어 뒤집어 보아도 보이지는 않으나 녹아버린 내 가슴 한 자락.


그가 읽을 수 있었다면 당장에 태클을 걸 것이다. 네 이야기를 쓰라는 게 아니잖아. 네가 창안한 이야기라야 한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암호 때문에 읽지 못한다.


헤어지기 30초 전, 어두운 밤길. 차에 타려는 동작으로 몸을 구부리려는 찰나, 그 손이 내 팔을 잡는다. 가볍게도 아니고 너무 무겁게도 아니게. 알맞은 무게로 알맞은 온기로 팔을 잡는 손. 5초, 10초…… 나는 그대로 좌석으로 몸을 내린다. 아 아까운 10초. 또는, 그 오른 손 바닥 2/3쯤이 내 왼쪽 손등에 머문 3초, 언젠가의 3분을 30분을 불러내는 마술……


걱정할 일은 아닌 것이 손의 주인과 팔의 주인, 또는 오른손의 주인과 왼손의 주인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15%쯤 실존인물이고 누가 30%쯤 창작인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그는 내 글을 보지 않고서도 내가 뭘 쓰고 있었는지 아는 게 참 희한하다.


그: 그 순간의 그 마음의 활자화를 당사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잊지 마. 넌 차라리 화석화될지라도 기념물을 원했으나, 마음이란 것이 살아서는 화석이 되는 게 아니지.

나: 알고 있어, 주어 담을 수 없는 물인 줄.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채로 누군가가 누군가의 산소가 된다면, 그게 그리 나쁜 일이겠어?

그: 아니지,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겐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중독.

나: 연탄가스 중독?

그: 그래, 일산화탄소.


일산화탄소중독.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두통에서 시작하여 현기증과 이명.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누군가를 생각하면 두통이 일고 현기증이 인다. 희미한 한 두 마디가 귓속에서 웅얼거림이 되어 이명 현상이 생긴다. 무슨 말인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 그 사람의 면전에서 홍조가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할 뿐. 일산화탄소중독 증세 중엔 홍조에 이어 발적도 따른다고 했다. 마음처럼 축축한 날, 이 두드러기가 발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호흡은 가늘고 불규칙해진다.


누군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부정맥이신가요?

(속으로만) 부정맥이라고요? 그래요, 가슴이 제 템포에 맞춰 뛸 수 있을 리 없죠.


코를 골게 되는 증상을 제외하곤 영락없는 일산화탄소중독 그대로다. 저체온도 그렇다. 누군가 앞에서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피어난 홍조도 아무 소용없다. 누군가의 냉기는 상상을 절한다. 몇 미터 밖까지도 유효하다. 평소의 체온을 유지할 수도 없을 만큼 그 냉기는 사람을 얼리고 만다. 그러다가 호흡곤란이 오는 줄도 모르는 사이 호흡이 멈춘다. 일산화탄소중독에서처럼, 정지된 감정은 호흡곤란을 일으키다가…….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 평소에 의사는 연령에 비해 많이 촘촘한 젖이 오히려 약간 불안한 형국이라 그랬다. 의례적인 정기검진에서 젖이 아닌 갑상선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1㎝에 못 미친다지만 기분 나쁜 이상한 물체임엔 틀림없다.


의사: 조직검사 소견은 괜찮습니다. 콜로이드갑상샘종이라고.

나: 괜찮다면, 수술 그런 것…….

의사: 아 그 염려는 안하셔도 되겠습니다.


이듬해 봄엔 간헐적이지만 참을 수 없는 두통이 계속되었다. 고개를 숙여 밥상을 내려다볼 수도 없었다. 검사는 아프고 길어만 갔다. 접형골이상정체낭종. 두통은 간헐적이지만 멈추지 않는다. 또 한 해가 가도 통증은 여전하다. 서울로 검사를 옮겼다. 똑 같다. 곧 죽는 건 아니란다.


다시 이태만의 초봄, 무서운 꿈에 놀라 종합검진을 받기로 했다. 갑상선기능저하. 위가 가진 대여섯 가지 병적 증상. 담낭의 용종 두세 개. 간의 물혹. 왠지 불안했던 췌장은 아니었지만, 우와! PET 검사를 했다. 죽고 싶지 않구나. 두 해 봄이 지났지만 그 상태를 유지한다. 매번 검사 갈 때마다 알 수 없는 냉대를 받는다. 예약용지를 가져가지 않았거나 무턱대고 이름을 대려다가 그런다. 종합병원에선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다. 병원의 나는 여섯 자리인가 일곱 자리의 숫자다. 숫자가 인격적인 감정을 가지면 곧 불쾌한 일을 당한다.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가고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한다.


가장 금기는 왜? 라는 질문이다. 그 답은 미리 나 있다. 아프니까. 아픈 죄인이니까.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린 죄인. 무엇보다 자신의 주인공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하는 죄인. 그는 병이란 건강을 해치는 생활습관 탓이라고 나를 나무라는 눈빛을 한다.


죽음


병의 다음 단계는 죽음이다. 물론 병과 관련 없는 죽음도 더러 있다. 대량죽음들이 그렇다. 예기치 못하기로는 교통사고가 가장 흔한 죽음이고, 아니 자연재해도 있다. 쓰나미와 지진들. 그건 내가 감히 기술할 범위를 넘는다. 그 의미와 무의미를, 그 우연성과 필연성을 기술할 위인들은 따로 있다. 글을 쓴다고 다 같지는 않은 법이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그렇게 말한 위대한 작가가 있었다. 벌써 200년도 전에, 그것도 스물 몇 살에 쓴 작품 속에서 그런 말을 했다. 그러니 위대함의 크기는 글쟁이들 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렇게 말한 주인공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실연과 자살이라는 세기적인 유행의 틀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정말 200년쯤 지나서도 지치지 않고 죽음의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우리가 정말 심하게 싸운 건 앞에 말한 『죽음의 방식들』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 여자는 뇌의 부상으로, 다음 여자는 폐렴으로 죽는다. 처음 여자는 정신과의사인 남편과의 불화와 증오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웃음, 부드러움, 기쁨의 능력들을 박탈당한 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을 받았다고 느낀다. 여자는 이전의 다른 여자들이 왜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을지 놀라워하면서, 자신이 세 번째 아내로서 자신을 수정해가는 일에 더욱 놀란다. 결혼은 양성간의 투쟁이다. 아랍 어딘가를 거치는 힘든 여행 중에 여자는 뇌를 심하게 다쳐서 죽는다.


나: 그건 단순한 뇌진탕이 아니야. 죽음으로 “밀려간” 것이지.

그: 그러니까 일부러 넘어져서 뇌를 다쳤다고?

나: 생각해봐, 이건 패러디야. 같이 살다 헤어진 유명작가의 유명작품에서도 아리따운 여자애가 그리스여행 중에 뇌를 다쳐서 죽지 아마? 여자는 어린애 같고 그러니 열등하고, 그리고 죽는 거야. 너흰 실제로도 작품에서도 여자를 죽인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그: 그럼 두 번째 여잔 어때? 폐병을 남편인가 애인이 옮겼어?

나: 그건 아니지만. 애인이란 작자가 여자를 발가벗겨 작품을 썼으니 그게 간접살인 아냐? 그것도 “영원히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성”이길 바라는 남자들의 헛칭찬에 노심초사하는 미숙한 여자를. 여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는데 남자들은 여자를 문자화한다면, 대상화된 여자는 연인에 의해 “도살된” 것처럼 느낄 밖에. 자기 고유의 역사를 박탈당한 채 한낱 소재가 되어 대중 앞에서 진열되고 있는 것처럼. 그 기분에 공감이 안 돼?

그: 그럼 처음 여잔 정신분석가인 남편이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 그것에 가장 상처를 입었단 말이야 참? 작품 이야기 말고 한번 가정해 봐, 여자들은 만일 피부과의사인 남편이 실험적으로 젊어지는 시술을 해줘도 그렇다 할 건가?

나: 난데없이 피부과는? 픽션과 사실을 혼동한다고 나를 나무랄 땐 언제고!

그: 그 부분 취소할게. 이제 넘어 가자.

나: (어라, 양보할 때도 있네!) 좋아, 세 번째 죽음을 “살인”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또 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세 번째 여자는 M이라는 이름을 가진 확실한 제 자신 속으로 스며들었잖아. 이름도 없이 “나”라던 여자는 M에서 빠져나왔던, 비정상적으로 감수성이 많은 여성성이었을 뿐이야.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작가. 그런 여자가 이제 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제 자신, 이성적인 M으로 되돌아갔을 뿐인 것. 여기서 살인이라? 게다가 네 진짜 문제는 뭔 줄 알아? 이 작가의 죽음마저 세 번째 소설의 죽음 넘어 네 번째 죽음이라 떠드는 것이지. 꼴페 나부랑이들!

나: 꼴페? 꼴통페미니스트는커녕 그냥 페미니스트도 못된다!


다만 내게서 창작이란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이다. 나는 그 네 번째 죽음을 흉내 내기로 했다. 세 죽음의 작가가 그 세 번째 죽음을 실 인생에서 실연했듯이. 그가 끼어든다. 아니지, 그 여잔 골초였어.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다 불을 낸 것이라니까!


나는 흉내보다는 패러디를 준비한다. 그렇담 그가 사라져야 한다.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는 나를 무시하면서 군림해 왔고, 나는 그에게 종속되어 그에게 결정권을 유보한 채 공존해왔다. 그를 사라지게 하는 일에 내가 실패한다면 남은 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다.


다른 이야기 하나. 교도소에 선행(?)을 하러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교도소에는 일반인의 예상대로 남자수인들이 훨씬 더 많단다. 그 친구가 이야기하기 전에도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 살인 등 중죄인 비율은 예상을 뒤엎는단다. 남자죄수들이 살인자일 비율을 그냥 대충 10%도 안 된다고 한다면, 여자죄수들이 살인자인 경우는 그 몇 배란다. 살인자 수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상과는 너무 다르다.


친구: 걸 여태 몰라? 여자들은 가정에서 대개는 억압을 당하는 관계에 놓여 있잖아. 부당한 일들, 억울한 일들을 참도록 길러졌으니까. 헌데 쥐가 완전한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지 않았어? 극한상황에 내몰리면, 억수 밀리던 여자가 상대를 죽이고 만다는 것이지. 평생 기세등등했던 강한 종족을, 자신의 남편을, 애인을, 아무튼 가까이서 그녀들을 억압해온 강한 남자를. 


나도 여자다. 내가 연출할 죽음의 패러디를 분류하자면 자살보다는 살인의 가능성이 높다. 그는 언제나 옳았고, 언제나 강했다. 멋모르고 피아노연주의 추상적 음체계에 빠져들려는 순간에는 타인의 체계를 답습하는 무의미성을 강조하여 제동을 걸었다. 지하의 미술실에서 바다그림을 연습하면서도 행복했던 순간에는 구경하지도 않은 바다를 모사한답시고 그것도 덕지덕지 물감을 발라서 바닷물을 더럽히는 맹목을 조롱하여 붓을 놓게 만들었다. 소설책을 읽고 또 읽어 외우다시피 하는 밤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긴 긴 남의 나라 이름들을 외우는 바보천치 같은 짓을 책망했다. 이름이 대수냐고. 실존한 적도 없고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태어났을 뿐인 인물들의 이름이 대체 뭐냐고.


그래도 나는 때때로 소설의 인물이 실제 사람들 보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 오래 살아? 오래 산다고 착각하는 너 때문이지. 그건 오래 산다기보다는 그냥 환영이야. 살아본 적이 없는 환영.

나: 환영은 무의미한 거야? 왜 내겐 그 환영이 실제로 살았을 많은 사람들보다 더 실제 같을까? 내가 쓰려는 이야기도 실제 같을까, 환영 같을까? 실제 같을 때 오래 사는 걸까, 환영 같을 때 오래 사는 걸까? 내 말은 이야기가…….

그: 넌 아니야. 넌 안 되겠어. 내가 할게. 네 이야기를 내가 쓸게. 약속해, 꼭 쓰겠다고. 아무리 글을 쓸 시간이 없어도. 글을 쓸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네 이야기를 쓸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네, 내가 쓰겠어.

나: 왜 그렇게 선선히 봐주려는데?

그: 봐주고 싶어서가 아냐. 넌 안 된다니까. 이거 보아. 여기 네가 써 놓은 글들은 기껏 세 죽음의 양상이 무슨 학습과정처럼 기술되어 있을 뿐이야. 여전히 독후감 수준이네, 안 그래?

나: 정리해 본 거야. 그 다음에 이어서 내가 쓰려고, 네 번째 죽음 이야기를.

그: 아니 수십 년을 두고 싸워도 우린 아직 여기야? 남의 글 읽는 건 그만 하라니까. 네 뜻 가는 대로 글 나오는 대로 네 이야기만 창작하는 거야. 그게 안 되면 그만 두든지. 아이, 애초에 너랑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 넌 그냥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넌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이 암호였다. 우린 상대에게 그 암호를 말하는 순간 사라지게 될 운명이었다. 암호를 내뱉은 건 내가 아니었다. 여성성은 늘 도태된다. 네 번째 죽음의 패러디도 픽션에서와 같은 패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살인이었다.”


*


남편은 평상시처럼 늦은 저녁을 마치고 귀가한다. 아내가 저녁시간에 집에 없기는 드문 일이라서 의아했지만, 전혀 없는 일도 아니어서 그냥 씻고 쉬고 그러다가 시계를 본다. 메모도 연락도 없이? 한 밤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희한한 일이로군. 별 일이야.


이튿날은 처형에게 전화를 한다. 꺼져있다. 둘이서 어딜 갔을까? 점심이 기운다. 서둘러 아내의 흔적을 뒤진다. 허나 아내의 뒷방문은 닫힌 채다. 쓰다 둔 메모지들, 원고지들 때문이라며, 아내는 외출하려면 늘 방문을 닫아건다. 연락이 된 처형이 흠칫 놀란다. 처형은 풀냄새와 흙냄새를 풍기며 들이 닥친다. 썬 캡에는 낮에 묻은 햇살이 아직 박혀 있다. 경쾌한 바지에 시원한 셔츠 차림이지만 귓불은 도톰한 풀빛 보석으로 묵직하다. 처형은 생각보다 덜 염려하는 표정이다. 얘가 또 병이 도진 거예요? 제부, 애초에 저런 작업을 말렸어야…….


다 저녁이 되어 방문이 안에서 열린다. 아내가 나타난 것이다. 한 5분 전에 방안에 들어갔다는 듯 당당한 표정이다. 왜들 그렇게 봐? 라고 묻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욕실로 간다. 외출해서 돌아왔을 때처럼 욕실로 직행한다. 그 버릇은 예외가 없다. 나설 땐 오히려 준비 시간이 짧지만, 귀가해선 화장실을 오래 쓴다. 한참 만에 말끔해진 얼굴로 소파를 기웃거리고는 곧 부엌으로 향할 태세다.


아내: 여보, 미안해요. 얼마나 잤는지. 언니, 공치다가 왔구나. 배고픈데 뭘 빨리 만들지?

처형: 나 일어서야 해, 이리 좀 와 앉아. 어쩌자고 제부 걱정하게 만들어?

남편: 어디 걱정 정도인가요? 어떻게 꼬박 하루를 게 박혀있어? 뭘 좀 먹기는?

아내: 그냥. 일은 진척이 안 되고, 주말이 되었나 싶고, 실컷 잠 좀 자려던 게. 사실 비몽사몽으로, 그래도 한결 개운해요.

처형: 그래도 그렇지, 방에 틀어박혀 있더라도 알리긴 해야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말없이 사라진 줄 알았지 모두.


*


내가 가끔 완전히 변덕인 것을 동기간의 정으로 언니가 제일 못 참아 한다. 혼란된 나와 그의 싸움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건 사실 언니뿐이다. 언니는 부엌으로 향하는 내 꽁무니를 따르며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언니: 그런데 너 누구야? 어느 쪽으로 갔느냐구, 그 장난 때문에 내가 다 아슬아슬해 죽겠다. 네 남편 좀 그만 괴롭혀라.

그(나): 남편을 괴롭혀요? 직장 다니고 깔끔하게 의식주 마련하고, 틈틈이 내 일하는 것이 누굴 괴롭히는 건 아니죠.

언니: 아 또 논리 시작이구나. 그럼 그쪽으로 가버린 게야? 너 그럼 제발 그대로 살아. 더는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나도 그쪽이 훨씬 편타. 반듯하고 질서 있고…….

그(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염려마세요.

언니: 왜 염려가 안 돼? 너 보면 뻔해, 네가 어질러 놓은 것. 사람이 방구석에 들어서 그리 지내다니. 종이쪽지들에 벗어던진 옷가지에 슬리퍼는 또 왜 이리 짝으로 굴러. 아무리 너 혼자 쓰는 방이라지만.

그(나): 됐거든요. 그냥 택배 방쯤으로 해 둬. 택배 받은 것, 택배 보낼 것……. 아직 완전히 내 것이 되기 전의 물건들이 쌓여 있는 창고.

언니: 게서 네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노라고 눈물 글썽일 땐 언제고! 택배는 또 무슨 암호야?

그(나): 그게, 물질이란 게 나의 소유라는 것이 좀 애매하죠. 내게 온 선물도 상자를 열어서 내가 나와 관련시킬 때만 내 것이 되죠. 기차가 서울 부산을 아무리 오가도 서울 것도 부산 것도 아니듯이 말이야. 내 밖에 있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택배처럼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것이죠.

언니: 뭐야, 그 궤변들 보니 정말 본업에만 충실하기로 작정한 것이구나. 잘 되었네.

그(나): 아니 뭐. 남아있는 저 작업들은 잘 마무리할 거요. 다음 일은 모르겠어, 저 창고를 저리 놔둘 일이 있을지. 회사일로도 벅찬 시간에, 저기 태반은 불필요한 일들이었고.

언니: 회사라고? (아니, 본업을 회사라고 에둘러 말하는 저 말투. 이 애가 이젠 그 애가 되었구나. 내가 걱정할 필요 없는 오달진 애.) 그래, 사람이 온갖 일을 다 할 순 없지. 너 좀 정신이 개운해진 듯하니, 하루 이틀 잠에 빠져도 좋은 구석이 있네.


뒷방 서랍 속에 갇혀버린 원래의 나는 사람들이 있는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언니는 염려와 다르게 당찬 내 현재의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안심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집을 나서는 언니는 나의 네 번째의 죽음을 서러워해주지도 않습니다. 나이고 싶은 나는 다만 네 번이 아니라 열네 번을 스물네 번을 죽었지만, 언니는 물론 아무도 더는 알지 못합니다.(끝)

 


...................................


작가의 말 (창작노트)


글을 읽고 또 읽다가 겨우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은 부지중에 대선배 작가들의 글을 훔칩니다. 동서고금 위대한 작가들의 모범은 남성들이 태반입니다. 새내기가 만일 여자라면 더욱더 모범들에서 탈피하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형편없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것이고 싶어서죠. 그러나 오랜 관습의 눈에 비추어지는 자신이 초라해져서, 번번이 대부분의 남성작가들의 현란한 모범에 휘둘리고 맙니다. 언어의 구조조차도 합리적이거나 분석적인 가치로 해부된 세상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려는 일은 늘 좌절에 부딪습니다. 작가로 살자면 자칫 여성성을 포기해야할 위기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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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17:26 [ ADDR : EDIT/ DEL : REPLY ]

소설-시2004. 11. 1. 21:36

건들장마
한국소설 64호

                                                                         

  - 작가의 말 -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나의 심장에서 이웃들의 심장에서 일렁이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왜 우리는 저 혼자서 제 삶을 생경해하는 것일까. 가을 비 차갑게 내리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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