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6. 9. 20. 20:52

직이는 림자

 

<문학공간> 2006, 9월호 (202호)


“너는 왜 쓰는가? 너는 왜 쓰지 않을 수 없는가?” ― 젊어서든 아니든, 글을 쓰는 세계로 ‘떨어진’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첫 질문이다. “글이 밥 먹여 주느냐? 글이라는 것이 대체 인간사에 무엇이냐?” 말로 하지 않더라도, 의심은 눈길에서 눈길로 아프게 찔러온다. 선뜻 대꾸할 말이 없다. 곰곰 생각해 봐도 없다. 정말 아무 것도 ‘들여놓는’ 것이 없어 보인다. 글은 홍수로 고립된 계곡 마을에 식수 하나 건네지 못한다. 쓸려 무더기진 쓰레기더밀랑 까딱도 못한다. 커피잔 늘어놓고 줄담배 입에 물고서 책상에 죽치고 있는 문사들이라니, 장맛비 피해를 외면하고 골프나 친 위인들보다 한 치도 더 낫지 않다.

그런데 왜? 인류가 있고 문자가 아직 없던 시대까지 거슬러 가도 ‘문학’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리고 다시 휴머니즘 ― 도도히 흐르는 인류의 정신사 어느 시대에도 문학은 우리를 동반했다. 제대로 학문도 아닌 그것이, 제대로 예술도 아닌 그것이.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문학이 현실과 꿈 사이의 매개체와도 같은 존재인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고달팠고 여전히 고달프다. 방탕에 이르는 부패한 황제 아래서도 고달팠고, 금욕적 수도사가 지배하는 신정정치 아래에서는 신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에도 고달팠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기치 아래 신분제가 철폐되었어도 고달프다.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귀족들. 혈통귀족 양반님네가 사라지기도 전에 돈귀족이 새 양반님 행세다. 지배하는 일부가 있는 한 지배당하는 일부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결핍으로 고통당하는 일부가.

그러나 결핍은 외부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는 본래 다양한 개성의 인간을 위축시켰다. 개인은 인류역사의 진보를 위해 본성의 충족을 포기(당)해왔다. 그래서 내면은 늘 ‘다른 현실’을 꿈꾼다. 이 꿈이 언어예술작품으로 빚어나온 것, 그것이 문학작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지리 밥도 못 먹여주는” 문학이 이 첨단과학의 세상에서 명줄이나마 보전하겠는가?

이때 행여 우리는 문학의 효용성 논란에 풀이 죽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쓸데 있고 없는 것이 따로 없음을 성현들은 벌써 알았다. “있는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 혹은 “땅이라는 것은 턱없이 넓고 크지만 사람이 걸을 때 소용되는 곳이란 기껏해야 발이 닿는 지면뿐이요,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재어가지고 그 둘레는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 버린다면 사람들에게 그 땅이 그래도 쓸모가 있겠소?”라고. 디디고 선 땅을 디디고 설 수 있기 위해 무수한 땅이 필요하듯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에겐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 절실하다. 아니면 우리는 질식하거나 로봇으로 전락할 것이다. 결핍과 갈등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더욱 깊어지게 하고, 이 내면을 끌어내는 것은 상상력의 힘으로서만 가능하다. 상상력은 자신조차도 공감하기 어려운 내면을 개연성으로 설명해낼 줄 아는 힘이다. 상상력이 우연과 혼돈을 필연성으로 바꿔낼 때, 작품세계는 리얼리티를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나, 문학에게 이 시대는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글쓰는 이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문학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더 이상 깊은 내면의 샘을 퍼 올리지 못할 때, 그 파국이다. 상상력은 꼬마아이가 움직이는 긴 제 그림자를 발견하고서 신명이 났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문학을 놓아선 안 된다. 읽건 쓰건, 그 차이는 그림자를 몸 앞에 두는가 뒤에 두는가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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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5. 11. 3. 22:45

내 딸의 어머니


                                                                『눈물향기의 어머니』2005 (이화에세이)

 

 

내 가능한 딸에겐 내가 어머니일 것이다.

내 딸의 어머니에게도 물론 어머니가 계신다.

그 어머니에게도 또 어머니가....... 

                                                                     ※


누구나 사춘기에는 자신의 평판에 예민하다. 그 시절 평판의 첫 가름은 얼굴 생김새다. 그녀는 천하미인 소리를 듣는 예쁜 여동생과 짧은 터울로 고민이었다. 겉으로는 평온을 가장할 수 있고 말 수 적은 표정으로 넘기며 할 일없이 책상에나 붙어 지냈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불공평했다. 물오리란 별명을 들으리만큼 씻고 또 씻는 습성에도 돋아난 여드름은 참을성을 폭발시켰다. 예쁜 여동생은 정말이지 상대적으로 말하면 잘 씻지도 않지만, 그 매끈한 피부마저도 동네는 물론 학교에서도 제일을 뽐냈다. 여드름이 이마에만 송기송기 돋을 때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이마에 나는 여드름은 누군가가 당신을 좋아하는 증거다 하는 속설 때문에. 하지만 볼에까지 빨간 뾰루지가 돋기 시작했을 때는 심각했다. 게다가 예쁜 여동생은, 어마, 언니도 누굴 좋아하는 거야, 그러네, 하면서 예쁘고 까만 눈을 흘겼다. 그런 어느 날 그녀는 유난히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어머니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어머닌 정말, 첫째는 조물주 실패작품을 낳았더니만 둘째는 예술작품을 낳았어요?


조물주 실패작품?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한참을 더 자라서 어머니가 되어서야 느낀 것이지만, 어느 어미가 제 자식을 낳아놓고 실패작품이라 느끼랴?


그녀의 첫 아기도 갓 때어났을 때 도저히 미남이 아니었다. 포도같이 검고 호수같이 깊은 눈동자를 지닌 둘째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작은 눈에 남달리 푸른 눈매가 오히려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려나, 아이들은 제 어미를 힐난할 좀생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아들들은 딸들에 비해 적어도 자신의 외모에는 관대한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일반론보다는, 아이들이 제 어미보다 좀 더 관대한 품성을 지닌 것이리라.


어머니 ―

첫 아이 실패작품을 낳았냐는 딸의 공박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의외로 당당하셨다. 너희들 시집가서 나만큼만 아이들 반듯하게 낳아 보거라! 어머니로서 큰소리 치실만큼 어려선 제법이었던 자식들이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훨씬 넘긴 지금. 자식들 모두 제 아이들이야 어떻건 사는 형편들이 어머니처럼 큰소리 낼 계제가 못된다. 물질의 권능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기를 보낸 아이들은 자라서는 분명 그 물질에 굴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물질의 중요성을 너무도 늦게 깨닫거나,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산다. 농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세상이 바뀌었으되, 사업공식에 접근하지 못하고 유아적 신뢰로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건지는 것이 없다. 철없는, 더러는 기고만장하던 자식들이 재력의 손상과 함께 권위는커녕 자칫 품위도 상실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 그 아린 가슴에도 습관은 추억을 버리지 못하시는.


소도시에서 방학을 맞은 딸이 어머닐 뵈러 올라온 날이다. 실패작품과 예술작품 다음으로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 낳으시고 얻은 셋째다.

어머니 좋아하시는 맛있는 데 가서 점심이나 하시지요.

점심은 무슨, 맨 날 먹는 것이 밥 아니냐.

그래도 어머니.......

누가 운전이나 하면 어디 물가에나 다녀왔음 싶구나.


물가.

그렇다. 물가에도 가지 않고 여름을 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어머니다. 젊은 시절, 어린 아이들 살필 사람 많으니 봄가을 몇 차례씩 설악산으로 제주도로 관광 일 세대를 자랑하시던 가락이 여전하신 것. 해외여행 붐이 터지자 관광 목적지는 넓어갔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꼭 이민 가서 살겠더라!” 뉴질랜드의 경관에 감탄하신 것이 칠순 무렵이시니, 정신적인 에너지는 차치하고 건강 또한 그만하면 되신다. 그런데 팔순을 넘기신 지금, 이 근년에는 사정이 다르시다.


특히 올여름은 실패작품 큰 딸네도 고장이 나 있다. 모처럼 막둥이 생일을 핑계 삼아 모두들 며칠 쉬자는 ―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며칠 사는 것처럼 살자는 ― 땅 끝 콘도 예약도 틀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며칠 전 다녀온 예술작품 둘째네 전원생활의 품은 양에 차지 않으신 것이다.


썬 크림도 안 바르는 여자가 어디 있다더냐!

어머니는 둘째네 도자기골을 가실 때마다 썬 크림을 사들고 가시지만 매번 퇴짜다.


그렇게 예쁜 딸을 낳아서 그렇게 예쁘게 길러서 ― 이 예술작품도 이화인이다 ― 시집보내 놓으니, 이제 와 시골생활이라니. 시커먼 고무신에 그보다 더 시커멓게 탄 발등을 하고, 뭣이 좋아서 저 아줌마들하고 종일 살거나. 다른 자식들에게 푸념이시다.

그 아주머니들 단체로 난생 처음 제주도 여행도 데려 갔대요. 제 신랑 말이 “몽강리 여자주민 탐라국원정대” 대장노릇 했다나요?

참 할 일도 없구나.


어머니는 “제주도”라는 지점에서 특히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어느 자식 하나 어머니모시고제주도 다녀올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핑계라면, 자식들 누구도 어머니는 젊어서 충분히 제주도를 가셨다는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터다.


어쨌거나 시커먼 얼굴로 흙 속에서 살아가는 예쁜 딸이 일본식 미인 기준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로서는 통탄할 일이다. 어머니는 항상 “살빛 그을린다고” 한여름에도 얇은 긴팔만을 고집하셨다. 그렇지만 이제 팔순도 넘기시지 않았나! 그것은 딸들의 착각이다. 지금도 차라리 덥고 말지 반팔을 못 입으신다. 지난 번 집에 잠깐 오실 때 과일가게에 들려 수박짐 뒤따라 몇 발 걸으시며 땀을 흘리셨기에, 더운데 좀 짧은 팔 입고 다니시라했더니 답은 의외였다. “팔꿈치가 다 늙어서야.......” 어머니도 참. 누가 어머니 팔꿈치 보고 다닐까 봐서요? 제 나이도 밖에 나가면 아무도 안 쳐다보는걸요.


그때도 어머니는 마음이 상하셨을까? 가까운 냇가에라도 드라이브를 하려던 그날, 어머니는 “지나치게 꼼꼼하게” 화장을 하시더란다. 파운데이션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 그 앞인지 뒤인지 또 썬 크림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 드라이브 다녀와서 해 안에 다시 소도시로 내려가야 하는 딸의 입장에선 바쁘기도 하고, 해서 튀어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그냥 대충대충 하세요, 누가 본다고요!” 어머니는 막 바르려던 립스틱을 홱 던져버리시더란다. 며칠 전 큰애가 했던 말이 생각나셨을까?


저녁 늦게 멀리 전화로 후일담을 나누던 두 딸은 웃고 말았다. “우리도 나이 들면 더 열심히 단속을 하게 될지 알겠어? 또 깔끔한 것이 백번이나 낫지 뭐.” 허나 웃음은 곧 썰렁함으로 바뀌었다. 화려함의 끝에 서있는 어머니의 삶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파운데이션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도 외출할 곳이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 세상은 바뀌어 전체가 업그레이드다. 그냥 멈춰선 자리매김에 혼돈스러워 추억 속에서나 자신감을 붙들고 계시는 어머니가 안타깝기만 하다.


아카시아 향기 ― 어머니는 라일락 향이라고 하시지만 ― 그 아련한 어머니의 체취가 특정 화장품을 평생 고집한 덕택인 것을, 그녀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어쩌다 아이들이 용돈 모아 선물한 이상한 크림일랑 뚜껑도 열지 않으신 결과인 것을. 그런데 그녀는 모든 브랜드를 무시하고 먼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로션을 집어 든다. 나중에 제 아이들이 선물할 모든 화장품을 쓰겠다는 시위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머니에게 화장품을 선물하고 싶어 하거나 예쁘게 낳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딸이 없다. 딸의 귀감이 되어야할 의무가 면제된 삶은 한편 자유스러웠다. 하지만 딸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은 삶에는 비판의 시금석이 빠졌을까 겁도 난다. 그 딸의 어머니로서, 딸아이가 제 어머니와 공통분모를 찾아 분석하는 일이 이제서 궁금하지만 그건 꿈이다. 사람은 꿈속에서도 논리를 지닐 수 있을까? 가능한 딸의 분석에 평균점은 되는 어머니고 싶은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듯, 큰 부채로 손을 뻗는다. 바랜 창호지 부채살이 몰고 오는 시원한 바람에 상념은 더 높이 난다.(200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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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5. 10. 15. 23:30

 

교집합과 합집합  

 

<문학사상> 2005년 11월호


 

“수학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형은…….”

첫 강의시간에 운을 떼자마자 학생들의 얼굴이 굳어지려 한다.

봄이, 가을이 올 때마다 우리 선생들은 새 학생들과 만난다. 학생들과 세대간 거리가 더해갈수록 앞으로의 상호이해에 대한 불안감은 커지기만 한다. 강단에 선 사람은 소통을 터야할 의무를 갖지만, 시작은 항상 이렇게 어렵다. 첫 시간의 단골메뉴가 하필 수학에서 차용된 것들이라 더욱 낭패다.

수학은 성년이 된 이들에게는 학창 시절 골치만 아픈 존재였다고 기억되곤 한다. 졸업 후 바로 실 인생에 뛰어든 경우도 그렇지만, 인문계열에 진학을 해 보아도 수학은 쓰임새가 없다.

아예 인문계열에 수학을, 자연계열에는 국어를 면제하고, 영어만을 공통입시과목으로 택하는 대학도 있다. 대한민국은 가히 영어-정보화 대학들로 넘쳐있다. 그에 걸맞게 동영상으로 맞이해야할 젊은이들에게 분필로 그리는 삼각형이라니. 그것도 밑변에 해당되는 선분 하나만 달랑 그려놓고 잔소리에 들어간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이 밑변을 그리는 시기에 있습니다…….”

밑변을 최대한 넓히는데 힘쓰라는 당부를 위해, 카프카의 빈둥거리기 예찬까지 들먹인다.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참 안 되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 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아 확고한 성취동기로 무장하고 앉은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찬물을 끼얹어야 할까. 산학연계 학습과정을 개발하라는 사회적 독촉에도 어긋나고……. 해서 그것이 요즈음엔 점점 벤다이어그램 쪽으로 기운다. 교집합과 합집합을 인간관계에 비유해 설명하기 위해서다.

교집합은 쉬운 말로 공통의 원소를 가지는 집합이다. {김, 이, 박, 최, 정}과 {최, 정, 강, 조, 윤}이라는 두 집단이 있을 때, 교집합은 {최, 정} 두 사람으로 좁혀진다. 그러나 합집합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으로 여덟 사람이 된다. 여기에 성씨 대신 나의 특성과 타인의 특성을 대입하면, 교집합은 공통점을, 합집합은 두 사람의 합을 드러낸다. 합집합의 크기는 교집합과 반비례하므로, 큰 합집합을 위해서는 교집합이 작아야 한다. 물론 가장 큰 합집합을 위해서는 교집합이 없어야겠지만, 그것은 무의미하다.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교집합은 필수적이니까. 장황한 설명보다도 동그랗게 원 두 개로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면 모두에게 순간 확연해진다. 땅 따먹기라 해도 합집합을 늘리기 위해선 교집합을 줄여야 함이.

수 개념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출발을 결정한다. 그 중요하다는 영어를 배울 때의 어려움 중 하나도 단수 복수 구별이었다. 물질은 셀 수 없기 때문에 많아도 단수다. 하나 둘, 세어지는 사물은 둘 이상이면 복수다. 거기에 또 집합적 단수. 얼마나 힘든 개념이었던가. 개와 고양이는 합쳐서 말하면 ‘동물들’이고 복수로 ‘데이 아’인데, 여러 ‘사람들’인 가족은 복수가 아니라 집합적 단수라 했다. 우린 참 형제자매가 많은 가족이었으니 더 혼란스러웠을까.

그래 우리가 영어나 독일어로 말하면서 복수 쓰기를 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말에서 ‘우리’와 ‘우리들’을 굳이 구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심지어 내 고향에서는 “나는 매운 것을 무척 좋아해서”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운 것을 원칸 좋아해서”라고 하는 일이 허다하다. “우리는 도통 요새 영화는 범벅이요”라고 하면, “나는 요즈음의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무남독녀인 우리 어머니도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라 하신다. 서울 중심의 사람들이 쓴다는 표준어에서도 ‘나의’ 아버지 대신 ‘우리’ 아버지다. 심지어 ‘우리(!) 집사람’임에랴.

왜 ‘나’ 대신 ‘우리’를 즐겨 사용할까? 언어에서 연원하는 문학을 전업으로 사노라니, 진작 언어 일반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소홀히 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소설가 ‘ㅂ’이 한껏 조롱한 늙은 교수들에 속하게 되었다. “명성이라는 더러운 스타킹을 뒤집어쓴 부패한 관료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물론 그 명성도 없이. 그러면 차라리 학생들도 그 소설책에서처럼 모두 “독학자”가 되겠다고 캠퍼스를 버리는 상상을 한다.

첫 강의를 마친 저녁에 낯선 이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실명대신 별명으로도 스팸메일을 걸러내는 전산시스템에 통과된 것이다.

‘1학년에겐 점수를 잘 안 주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알고 계시느냐. 또 첫인상으로 보아 자기주장이 강하신 교수님 같은데, 하고 싶은 말 있어도 못하게 되면 어떡할지, 이것들이 괜한 걱정임을 밝혀주셨음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빠른 반응에 대한 기쁨 한편으로 숨이 막혀 왔다. 그러나 숨 막힘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인상을 여태 못 벗어났단 말인가?

실은 지루한 강의 사이에 우스갯소리를 그리워하는 학생들을 내 나름대로 이해한다. 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학생들은 결석할 자유가 있어서 좋겠소!” 정도다. 일단 학생들은 웃는다, 출결석에 까다롭지 않은 교수를 만나서 다행일까 하는 기대로.

말을 이어가자면, 자유시장경제에서 살고 자유결혼도 해봤지만 그리 자유로울 것이 없는 것이 삶인데, 한 학기 한두 번 결석조차 못할까 보냐! 그쯤에 이르면 웃음을 거둔다. 거 봐요, 이 사람은 우스갯소리 해보아야 썰렁해지니 아예 기대하지 마시오!

결석할 자유, 졸업하지 않을 자유! 이론상으로 인간에겐 자신의 진리를 고안해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자유는 우리를 미결정의 상태로 놓아둔다. 자유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자유는 변화를 갈구하는 프로메테우스적 본성이다. 모든 것을 알고자 언제나 다시 새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충동이다. 자연으로, 곧 너의 본성 안으로 돌아가라! 너에겐 너의 진리를 고안해낼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보편화하고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관철시키려 하지 않는 한, 이 자유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다치지 않아도 될 아주 작은 자유를 꿈꾸는 나는, 그러니까 소인배였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인간을, 인류를 사랑하고 그래서 선의를 행동하려는 역동적인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들을 사회에 적용시켜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삶에도 영향 주고 싶어 한다. 사회적인 장치가 인간의 본성에 합당하게 조직되지 못했다는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과감히 새로운 원리를 들고, 특히 소외된 계층의 구원이라는 입장에서 소유의 평등한 분배를 향해 사회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이론적으로는 정치가나 사회운동가나 참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차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합일에 대한 소망은 참담한 결과를 부르기도 한다. 사회가 공감으로 채워져 있는 공동체로 변화하는 루소의 꿈을 멋대로 끌어들이면 로베스피에르의 ‘덕에 의한 테러리즘’으로 왜곡되기도 했으니.

그런가 하면 소유의 분배 이전에 아예 소유를 초월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산업사회의 소비주의를 탄식하며 소유가 아닌 존재를 지향하는 삶을 꿈꾼다. 인간에게 소유욕으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주어서 본래적 존재로 되돌려 놓을 사명을 지닌 듯하다.

본래적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여러 단수의 복수들인 인간에게라면 이 본래적 존재 또한 무수한 변형으로 파악불능에 이른다. 인간을 집합적 단수로 볼 때라야 그들의 사명이 실현 가능해 보인다. 위대한 진리들로 인간을 치유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여러 이론들은 매번 교집합의 확대를 꿈꾼다.

혼란스러운 단수와 복수. ‘나’와 ‘우리’의 조화는 뫼비우스의 띠를 맴돈다. 그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정작 분열적 환상에 시달린 사람들은 자기 안에 서로 다른 집합들을 가진 경우다.

나 역시 뭔가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남의 글들을 공부할 때, 자판 위를 날아다니는 손가락들이 먹다 남은 먹이를 파헤치는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으로 변하는 환상에 떨 때가 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나머지 손가락 하나씩을 위한 나의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글 공부와 글쓰기 ― 두 성분은 필연적인 분리를 지향한다. 궁극적 확장을 위해서 파괴되기 직전까지의 분리를 향하여. 미쳐버린 렌츠와 횔덜린에 이르지 않을 만큼만. 자신과 타인 사이, 자신과 사회 사이, 아니 제 자아들 사이에서 한 점 교집합이 없이 터져버린 이 영혼들을 새삼 보듬고 싶어진다.

교집합을 동경하면서 합집합의 확장을 꿈꾸는 모순이 먹안개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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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11. 15. 21:34

 

라인


                                                                『그대 안의 풍경』2004 (이화에세이)        

 

 

아직도 내겐 아파트 입구 편지함을 둘러보는 버릇이 남아있다. 그러나 건져오는 것은 고지서나 광고성 안내장이기가 쉽다. 하긴 편지가 기이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주고받는 명함에도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로만 표기된 것이 흔하다. 세상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추월한 지 오래다.


이메일의 편리함은 말해 무엇 하리. 우선 글을 쓰다가 지우거나 구겨버리곤 하던 편지지와 달리, 매번 글자를 고쳐놓는 일이 쉽다. 마음이 변하면 강도도 조절하고 뉘앙스 다른 어휘를 고르면 된다. 상대가 읽었을까 마음 조릴 필요도 없는 것이, “읽음 확인 메일”을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로, 빠르고 정확한 모든 장점 위에, 가장 중요한 배달사고가 없다. 간직하고 싶다면 보관함에, 그것도 안심이 안 된다면, <내문서>에 옮겨서 다시 <A 플라피>로 옮겨놓으면 거의 영구하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엽서 하나 손수 써 보내는 일도 드물다. 하물며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드물다. 손으로 줄은 친 듯한 편지지에 쓴 편지 하나와 그보다 앞서 그냥 종이에 세로로 쓴 편지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나는 기념사진 한 장과 예스런 학자의 고결함이 베인, 하나는 인간미가 뚝뚝 묻어나는 선배의 글이었다. 두 분의 편지글에 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틀렸다. 실은 두 분께 전화로 답을 해야 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화의 편리성을 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전화가 어렵다.


“안녕하셔요, 저 아무갭니다. 선생님, 사진까지 일부러 보내주시고. 그런데 지난 번 뵈었을 때…….”


그러면 저쪽에서 말씀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 먼 데를 일부러 올라와서 고마워요. 거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잘 내려갔는지 걱정되었고, 그리고 부군도 잘 계시는지…….”


그러면 또 언제 무슨 말로 대답을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팥으로 메주를 쑵니다…… 라고 했더라도, 아 그래! 하고 믿어주셨던 은사님을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몇 번이나 뵈었던가. 겨우 산수(傘壽)연에 다녀온 것을 칭찬하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이고, 대학생활 전체가 테트리스 조각처럼 한 순간에 내려와 쌓이는 바람에 꼭 드려야 할 말을 놓치고 만다.


선배님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초록빛 바다색 아니면 비취색 하늘거리는 가운데 단아한 얼굴모습에 압도당하던 느낌을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혹시 모를 내 작은 잘못에, 음색만으로는 조금 노여워하시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주시려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순간 어떤 반응도 멈춰 버리는 것이 순발력 없는 내 본바닥이다.


전화보다는 이메일을, 이메일보다는 편지를 선호하는 내 마음 바닥에는 서툰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내가 어느 결에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 때의 내 자신이 문제학생 사례연구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인데, 중 2때 나는 어떤 선생님께 집중적으로 불려가곤 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결석이 좀 잦은 것을 제외하고는,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공납금도 아무 문제없던 내가 왜 문제학생이었을까? 편모, 편부도 아닌, 계모, 의부도 아닌, 정상적인 대가족의 맏이가 무슨 문제를 가졌다고 비쳤을까?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지배성, 도덕성, 사회성 등 무슨 인성들을 수치로 조사하면서, 모든 성질에서 25~75% 안에 들어가기를 중용의 인간이라고 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회성 불량으로, 뭔가 15% 미만임을 추궁 당했던 기억이 늦게 서야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사회성 문제아였구나!


그러니까 우선 부모님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달한 어머니를 이해하기엔 어렸고, 나는 소설 속의 전통적 어머니상을 그렸다. 어머니에겐 모든 어머니들의 착각처럼 자식들은 최고가 될 소질이 보였을 것이고, 피아노와 미술은 기본으로, 남자애들은 웅변술까지 과외를 시켰으니, 그때 원조 치맛바람은 우리를 수소풍선처럼 띄워 올렸다. 아마 중학교의 자유는 어머니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 금지된 장난을 골라서, 부러 내리막길을 달렸던 시절이다. 실습지 토끼장의 토끼를 풀밭에 놓아주긴 쉬웠지만, 오디를 따먹으려면 날쌘 친구가 나섰다. 선생님들 눈밖에 난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기는 쉬었다. 토끼들이 토끼장에서 사라지면 범인(?)들은 토끼를 다 몰아넣기 전까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렸다. 허리까지 자란 풀밭에서 털썩 누워버리면 하늘은 풀밭과 맞닿게 내려앉고, 우리는 하늘 속에 누었다. 주머니를 함께 털어서 싸구려 꽈배기를 사먹었다. 그 순간에는 네 것 내 것 없는 완전한 공동체가 실현되었다. 불량꽈배기의 밀가루와 기름은 양분인 것이 틀림없으니, 나는 자꾸 쓰러지는 약골로 자랐지만 키가 클 대로 컸다. 가끔은 상표도 없는 아이스케이크도, 어머니가 양잿물이라고 했던 삼각 비닐주머니 속의 색소와 사카린으로 만든 물도 먹었다. 어머니의 금기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없이 금기를 내놓으셨다. 금기에 대항하느라고, 책가위를 누구보다 가장 예쁘고 깔끔하게 싸주신, 연필 다섯 자루를 저녁마다 깎아서 키대로 나란히 필통에 넣어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책과 필통은 사랑스러웠지만, 학교에는 어머니를 대신할 여선생님들이 많았다. 요구와 간섭은 어머니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담을 쌓았고, 사회성이 전현 없는 문제아라고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니 그건 변명이다. 지금도 함께 생활하는 직장동아리에 80가까운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연구생활을 하는데, 그중 얼굴과 이름을 다 알 수 있는 경우는 반이 될까 말까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데, 간섭 때문에 사람을 기피한다는 변명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것 - 그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공부를 해도 해도 그것은 어렵고,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그것은 어렵다고. 마주쳐서는 말이 안 떨어지면 목례라도 무슨 몸짓이라도 하는데,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은 전화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에다 대고, 처음 무슨 단어로 말문을 열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고.


그래서 편지가 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메일이건 종이편지이건. 그 중에서도 쉽게 PC에 저장되어 무생물 같아지는 이메일보다는, 여간 간직하지 않고서는 곧 사라지는 종이편지가 부담이 없어 좋다. 문제는 여전히 덜떨어진 사회성이다. 더구나 이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아본 후에는, 아마 누구도 쉽게 편지지를 펼치지 못하리라. 아니 어떤 단어로도 그 시작을 찾지 못하리라. 나는 그저 저물어가는 오프라인 시대의 추억에 잠긴다.

 

 

튼튼한 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튼튼한 정신이 좋습니다.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선

당신의 젊은 정신이 좋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정신의 튼튼함이 당신의 육체를 병들게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몸 생각해서 정신을 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웃는 부드러운 입매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엄격한 입매가 좋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굳은 입매가 싫다고,

당신을 멀리한다면

나는 참 기뻐할 겁니다.

그만큼 당신은 제 것이 될 테니까요.


                                                                       200x년 1월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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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3. 1. 21:43

 서정인 선생님 서재 탐방기 
                                      영어로 글읽기와 한글로 글쓰기 

                                                                  
소설시대 7호

심부름


전주시 덕진동, 사람들이 호반촌이라 하는 곳, 전화로 길 안내해주신 호반2길을 찾다보니 아담하고 질서정연한 주택가가 나온다. 오가는 사람 드문데, 길까지 마중 나오신 분이 『달궁』의 서정인 선생님이시리라.


이미 누렇게 찌들은, 87년 초판 열흘 뒤에 나온 2판『달궁』을 들고 선생님을 뵈러온 터다. 실로 십수 년이 지나 작가와 마주앉은 곳, 전기스토브가 막 켜진, 차라리 서늘한 거실이다. 누렁이와 흰둥이가 힘차게 짖던 햇빛 밝은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현학의 무게가 내린다. 서재에 쌓여있는 고서들의 무게일 것이다. 난생 처음 하는 숙제를 위해, 마음 다잡고 준비한 말문을 연다. 일천한 역사의 한국작가교수회에서 그나마 새내기인 제가, 평소 말을 안 듣는 사람이지만 이건 기꺼이 하고 싶은 심부름이라서… 더듬더듬. 선생님은 작가와 교직을 겸하는 같은 종의 운명에 일단 우호적이시다. 되었구나!



우선 가장 진부한 수순으로 여쭙는다. 사상계에 발표된「후송」으로 등단하실 때, 이미 대학원에 진학하셨고 또 교직에 계셨다 했는데, 어떻게, 왜, 글 쓰는 일에 투척하셨나요? 보통 말하는 60년대 당시 특유의 미학적 자의식에 관해서는 제 개인적으로는 경외감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문학이라는 것에 기꺼이 자기 삶을 던지고 싶은 욕망, 그 근원적인 생의 충동”을 무한히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왜 썼냐? 그냥 썼다. 그렇게 말씀하실 차례다. 정성들인다고 치장해서 내놓은 우문에 현답으로. 말씀 대신 『달궁가는 길』을 가리키신다. 정년을 기념하여 문단과 학교의 동료와 후배들이 출판한 책이다. “서정인의 문학세계”라는 부제답게, 선생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편집이다. 머리글에도 나와 있다.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보려던 기획 의도를 방해하고 간섭한 큰 훼방꾼이 바로 선생님이셨다고. 그런데 “술친구 서정인”만 예외로 삶을 들려준다. 글쓴이의 기우와는 달리, 절대로 옥에 티가 아니라 청자연적의 여유다. 여기 부록에 읽어 보세요.


예, 읽어 보았습니다, 한국일보에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리즈로 볼 때보다는, 여기 이 책에 “왜 써?”라는 제목으로 나오니 더욱 선생님 말씀답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평생의 업이 된 글쓰기에 뛰어들었어요. 중학교 때 몰래 읽었던 연애소설이나 삼국지가 재미있어서,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의 칭찬에 고무되어서. 어쩌면 내가 잘났다는 것을 과시할 방법이,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타낼 방법이 달리 없어서, 또는 어떤 갈증 때문에, 어쨌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판이 벌어졌다” 그 비슷하게 말씀하셨지요. 왜 쓰냐? 그동안 그저 글을 써왔다고.


누구는 노름 빛을 깊기 위해, 누구는 혁명가와 그 혁명가가 처형한 왕의 아들 둘 다를 위해서 시를 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며, 심지어 가슴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썼다는 바이런, 목이 잘리는 것같이 느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썼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다들 이름 없이) 예로 들면서도, 자신은 “그냥” 썼다고 하셨다.


그렇습니다. 말을 하래서 하지만, 문학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 쓰는, 쓰려는 사람들은 이유가 없습니다. 좋아하니까. 갑자기 다소 고조된 어조이시다. 최근에 어떤 상업학교 교장선생님이 말하기를, 자기 학생들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생산성이 높으니까. 문학이 뭐 필요하냐. 시, 소설 그런 것은 뭘 생산해 내는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필요 없다, 그러는 겁니다. 이래서야 되겠어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합니다. 하긴 또 어떤 학생이 그럽디다, 아무개작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쓴다고, 써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정도라야 작가의식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만 합니다. 하지만 주먹을 쥐고 혁명에 나서는 것과, 주먹을 쥐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의식의 변화를, 행동가는 행동을 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작가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볼 눈을 가지게 하면 됩니다. 문학이 왜 필요한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선생님께선 무엇을 쓸 것인가를 보기 위해서 눈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눈이 있으되 못 본다. 마음을 비우면 물건의 덧없음이 보인다.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럼 마음이 욕심입니까?


세상 많은 일들이 별들의 운행처럼 틀림없이 필연일 것이오. 허나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로 여겨져요. 그러니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지요.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 이 세상은 그것의 의미를 그것을 볼 눈을 갖춘 사람에게, 그 갖춘 정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볼 눈”을 우연히 제가 공부하는 독일 작가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겐 사물이 뚜렷해진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물을 통찰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며, 그러면 언어를 수단으로 통찰하고 그 안으로 꿰뚫어보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전후 독일 작가로는 처음으로 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뵐인데, 그는 인간적인 “촉촉한” 눈을 권했습니다. 라틴어의 “유머”가 독일어로는 “습기, 촉촉함”을 의미한다고.


열두시, 아니 『아홉시 반의 당구』, 그 작가 말이군요? 영역된 것을 읽었지요. 누구라도 작가는 우선 자신이 잘 보아야 합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것, 독자에게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것이 쓰는 이유와 또 목적이 되겠지요, 만일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쓰냐? 이것은 나의 평생 문제입니다. 쓰기는 항상 새로운 실험이다, 이 말은 나로서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형식? “형식과 신념”이란 제목으로 선생님의 한국문학창작상 수상소감이 있다. “형식과의 싸움은 끊임없는 실험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실험이라는 말은 처음 해 본다는 뜻이고, 그 처음이 마지막입니다.” (“처음의 낙하산도 반드시 펴져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작동한다고 믿는 신념” 아 그런 것을 가질 날은 멀구나. 큰일이네.) “달을 그리되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리는 것은 구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고 인용하신 것이 얼마나 어렵고 오묘한 주문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한 구름을 그려 달을 그린다?


형식미라면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강」은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단편소설 중의 하나”로 정평이 났지 않습니까? 절제된 문장, 단일한 인상과 효과, 통일된 구성, 인생의 한 단면을 통찰하는 능력 등으로, 교과서적 단편소설 미학의 최고봉으로 격찬되고 있는데, 그것을 대표작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누구든 떠올릴 『달궁』입니까? 혹은 시기별로 등단작「후송」이나 「강」을 거쳐, 『달궁』의 고지,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등을 통해 어떤 특징과 차이 또는 변화를 의식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미한테 어떤 자식이 제일 예쁘냐는 식이지만.


속으로는 내가 처음 빠져든 『달궁』이라 하시길 기대한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신다. 그게 굳이 말한다면 「뒷개」, 그리고 「벌판」… 그 언제 목포엘 간 적 있었어요. 종점 분위기, 싸한 비릿내가 늘 코끝에 머무는… 그런 것 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뒷개지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읽고 해설해 놓은 것만 따라 읽어요, 다른 것들 좋은 것 많은데….


‘뒷개’는 선생님의 회상에 잠긴 듯한 설명으로 어디 부둣가로 상상이 되지만, ‘벌판’은 어디 멜까. 선생님 작품들도 다 모르면서 여기 선 것이 부끄럽다. 「뒷개」는 『달궁』의 “바다 횟집”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아닙니까? 그런데 (저부터도) 사람들은 한번 명이 나면 몰리는 경향입니다. 「강」은 아예 학교 숙제의 표적이 되었고, 예컨대 「후송」만 해도 이명증 같은 병리현상이 개인적인 불행의 수준을 넘어서 어떤 사회적, 정치적 성격을 수반하는 고통의 표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사람들은 병약함이나 정신이상을 더 이상 낭만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병의 도덕적, 정치적 알레고리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달궁』의 사설조는 아예 서정인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창성은 문체만이 아닌 어휘들에서도, 예컨대「무자년 가을 삼일」의 “무자년”, 또는 “움직이는 계단”을 “도롱태”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 “얼음과자”를 빨고, “영상띄”를 감상하는 군상들,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시고.


이번에도 대답 대신 『문화예술』(문예진흥원, 2003년 10월호)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보여주신다. “한글로 글쓰기: 한국말은 한국인의 운명”이라는 글의 시작부분은 이렇다.


“나는 우연히 한국말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나는 한국 땅에 태어나서 한국말과 만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과 만났다. 그것이 준 것 말고는 나에게 세계가 없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결정했다. 나중 커서 외국어를 배우고, 제이, 제삼 외국어들과 접하자, 그것들은 나의 첫 말이 만든 세상을  넓혔다. 외국어 하나를 알면, 세계를 하나 더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운명으로서의 한국말을 쓰는 사람과 그냥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다르겠다 싶다. 부끄럽게도 나는 후자에 속한다. 



글읽기 - 글쓰기


그러기에 영문학 공부와 한국말로 글쓰기를 병행하시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혹시 상충이 될 것인지, 실로 그것이 궁금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영문학 공부한 것을 나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대학 진학 할 때, 그래요 영문학을 택한 것은 아마 고등학생의 눈으로 읽던 우리 소설에서 뭔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야겠지요. 손창섭의 「비오는 날」같으면 참 좋았는데 (나는 「잉여인간」을 읽었는데), 별로 많지가 않았어요. 지금은 달라요, 연전에 순천대학에 문예창작과에 교환 교수로 갔을 때 박지원의 「호질(虎叱)」 같은 것도 잘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함께 공부했어요. 그러나 50년대 당시엔 국문학은 별로다 그리 생각했었지요. 하여간 노문학과가 있었으면 좋을 걸 그랬어요. 그래 영문과 밖에 없었어요. 독문학, 불문학은 고등학교 때 안 배워서 어렵고. 여담이지만, 참 독일어 그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독일어가 어렵다 하셨습니까? 아주 우연입니다만, 어제 한 밤중도 넘어서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독일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클레멘스 브렌타노라고, 낭만주의 시인입니다, 영화는 물론 불행한 결혼생활을 다룬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시를 쓰다가 일어서서 읊어 내려가는 독일어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환상적인 한편 내면의 황홀과 고통을 함께 노래하는 시라서 그랬겠지만,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이제 제가 독문학에 대한 평생의 짝사랑을 접고 나의 언어로 나의 글을 쓰겠노라 작정한 이 시점에서. 저의 배신에 대한 시위였을까요? 하필이면 존경하는 소설가를 만나 뵙기 꼭 열두 시간 전에 들려오는 아름다운 독일어.


톨스토이 또한 제대로 원 텍스트로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았겠어요? 어쨌거나 영어로 제정러시아의 소설들, 프랑스 소설들을 읽었지요. 텐느의 불어저서 『영문학사』도 영어로 읽었지요. 제 자신은 전공하는 영시들 이외에도 많은 책들을 영어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외국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무엇이건 우선 많이 읽어야지요, 그런데 많이 읽는다는 것은 주체성을 그르칠 우려가 있지요. 그래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지요. 학이불사 즉망 (學而不思 則罔)이라….


허나 요새는 내용 없이 떠들기만 하니, 사이불학 즉태 (思而不學 則殆)라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의 경우, 많이 읽을수록 상아탑에 들지 않고 평범한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고, 외국문학을 읽을수록 한국적이 되셨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영어로 영문학 작품을 넘어 다른 책들까지 읽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은 톨스토이를 노문학하는 분들이 제대로 번역해 놓았더군요.


톨스토이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는 작가는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의 두 사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고골이고, 좋아하지 않는 작가는 헤밍웨이입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보면, 미국 신문 파리 특파원과 함께 피레네 산맥 계곡에서 낚시를 하다가, 국경 너머 스페인에서 투우 구경을 하는 여자가 나오지요. 가만히 세어보니 여러 남자, 마지막에는 아마 투우사와 놀아났습니다. 그게 원 소설인지. (우와, 내가 중학교 때 『해』를 소화 못한 것이 그냥 무식이 아니었구나.) 요즘 잘 팔리는 젊은 여자 작가들, 다들 재치 있고, 너무 멋있고, 세부에 대한 풍부한 자료도 돋보이고, 감각도 세련되어 훌륭합니다만, 집요함, 깊이, 객관성, 자기 아닌 딴 사람 이야기, 폭, 능청떨기나 시침 떼기, 뭐 그런 것이 조금 아쉬운 것 같습니다. (나는 젊지도 않고 잘 팔리기는커녕 이름도 없으니 다행이다. 내게 나무라심은 아니니까.)


그런데 선생님, 저희 미술대학에 오래 전에 화가교수가 역시 화가인 아버지의 훈계로 교수직을 그만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화가는 오로지 제 그림만 그려야지 무슨 남 가르칠 시간 있느냐는 호통에 고개를 숙였다는 후문이.


화가가 미대에 있었는데 그랬나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교수, 혹은 교수작가를 ‘주말작가’라 그러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시간 없어 못쓴다? 글쎄요, 이점은 확실합니다. 부지런만 하면 가르치면서도 쓰고, 게으르면 시간 많아도 못쓴다. 간결하고 단호하시다.


하긴 다시 독문학 얘기라서 죄송하지만 조금 안다는 게 그거라서, 에.테.아 호프만이란 역시 낭만주의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평일에는 판사요 기껏 약간의 음악가, 일요일 낮에는 그림을 그리며, 저녁이면 깊은 밤까지 매우 위트 있는 작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불안한 사회상황이나 혹은 필화사건으로 법관직을 잃으면 시립극장의 악장을 많았을 수준이었고, 모차르트를 존경해서 세례명을 아마데우스라 개칭까지 했답니다. 아무래도 옛사람들이 전인적인 경우가 더…….



어리석은 질문


선생님 작품을 읽다가 갑자기 느낀 점입니다만,「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에서 미로와 마이욜을 왜 혼동된다 하셨을까 의아했습니다. 마이욜 하면 우선 ‘누드의 조각가’를 떠올리지만, 중요한 것은, 로마 시대 이후 종교적 테마를 일체 사용하지 않은 첫 번째 조각가라는 점 아닙니까? 그가 표현하는 여성은 더 이상 신화 혹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 여성은 그 자체로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는 “우리들의 시대는 이미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했습니다. 같은 작품에 이런 구절, “믿음심판은 물론, 기독교가 시들해지고, 종교 자체가 희미해지자, 이상하게도 평화가 왔어요. 종교가 가르친 것이 종교가 없어지자 실현된 셈이지요. 종교가 사랑과 평화를 가르친 것은 그것이 가는 데마다 미움과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종교가 살신성인했어요.”라는 대목도 함께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특히 시대적 초미의 관심사와 관련하여 종교관을 살짝 여쭤 보고 싶어집니다. “대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라 규정하는 이슬람의 관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실지? 지금 종교가 성해서 싸움이라고 보십니까?


사실은 선생님께서 최근에 한 신문에 연재하시는 칼럼을 본 기억이 있다. 그 기억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다. 선생님은 이 비극을 “크게는 문명의 부딪힘이고, 작게는 종교의 다툼일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의 9.11 때 정해진 것이 아니고, 아주 먼 옛날, 어쩌면 예수와 마호멧이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쓰셨다. 가슴이 아프게 공감되는 부분이다.


기독교인인가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신다. 기독교를 우선 우리 정신의 말살 때문에 좋아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영문학교수로서 기독교문화를 열강하곤 했지요. 기독교문화 없이 영문학이 없으니까. 또 기독교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내가 말할 수 없이 존경하는 것, 그것은 겸손과 굴종(사실은 단 한번 영어를 쓰셨는데 ‘휴밀리에이션’이라고, 정확한 번역인지 모르겠다)입니다. 하나는, 온갖 바라는 것 해주십사 기도 후에,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둘은, 무조건적 신 앞에의 굴종.


그러나 이 본질적 기독교는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만 가능했다고 보신다. 현대의 타락한 기독교를 배제한 톨스토이의 원시기독교, 혹은 함석헌씨의 무교회주의를 말씀하신다. 현대에는 ‘기독교적’이란 말이 침략적, 자본주의적, 미국적 변주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양심적인 기독교 사회는 존재한다고. 예를 들면 에즈라 파운드, 미국 시인이면서 『사서』를 탐독하고 이탈리아에 살고, 미국 군인들을 일컬어 “루즈벨트와 그의 유태인들," “유태인들과 그들의 루즈벨트"한테 속아서 전장에 나왔다고 반전방송을 했던 노익장에 대해. 역사적으로는 미국 건설 초기의 중농주의에 대한 중상주의의 승리와 그 이후의 주류를 형성한 세력들에 대한 심도 높은 강의가 펼쳐질 기운이 넘치신다.


양심적인 서양인이 하필 매우 동양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파운드 비슷한 연배였던 극작가 브레히트도 노신을, 그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아큐정전』을 개작하기도 하고.  


그건 중국의 고전을 뒤집는 방향이잖아요. 오히려 헤세 같은 반전주의자도 동양사상에.


예 물론, 다른 이데올로기에서도 ‘양심적'이라 할 서양 작가들의 경우 동양을 또는 소위 제3세계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일 뿐입니다. 독일 시인 에리히 프리트는 유태인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이여!」라는 시를 발표했지요. 팔레스타인인들을 불시에 사막으로 내몬 이스라엘에게 경고였어요. “우리가 박해받을 때/ 나는 너희 중 하나였다./ 너희가 박해자가 되면/ 내 어찌 그대로 있을 수 있나?// [중략] 패배자들에게 너흰 명령했다/ “신발을 벗어라!”/ 속죄양들처럼/ 그들을 황야로 내몰았다.// 황야의 모래 위/ 그 맨발의 기억은/ 너희들 폭탄과 장갑차의 흔적 보다/ 더 오래 가리라.” 양심적인 서양인들은 사해동포주의로 돌아갈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호전적인 조국에 무조건적 순응하지는 못하는 것이 시인들의 생리입니까? 그렇게 조국에게서 곤욕을 치른 파운드 외에도, 선생님 작품 속에 “현대 영어시인 천오백 명을 상대로 조사해봤더니, 스물일곱인가가 신경파탄을 일으켰고, 열다섯이 자살했고, 열다섯이 술중독됐고, 열넷인가 전사했고, 감옥에 간 사람도 근 스물이…”라는 대목에서도 멍해졌습니다만.


꼭 시인보다도, 의식이 강하다 보면 충돌하는 경우가 흔하지요. 대중매체의 언어와 싸우는 것도 그렇고. 거기 보면….


다시 가리키시는 “한글로 글쓰기”에는, 말을 잘 못하면 방송이나 텔레비전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피해’는 ‘해를 입다’이니 ‘피해 입다’는 잘 못이다. “이런 글 백 번 써 봤자, 방송매체에서 태풍 매미가 입힌 피해라고 한 번 말하는 것을 당할 수 없다.”


축구 못하면 운동장 안나오는 것이 기본이지요. 그것을 지키니까, 인맥이고 학연이고 다 무시하고, 축구 잘하는 선수만 뛰게 하니까 월드컵 때 일이 되었지요. 그러니 한국말 못하면 방송 안나와야지요. 예상보다 단호한 어조로 한글의 오용을 나무라신다.


그 글에는 ‘미국 들어간다’는 틀렸고, ‘미국 나간다’가 맞다고 쓰여 있다. 맞다. 미국 나가계실 때, 하버드와 털사 대학에 몇 년 씩 계실 때, 영시 공부와 한글로 소설쓰기 두 가지를 다 하실 수 있었나요? 속으로만 물었다. ‘미국 나간다’라는 표현을 써보기 위해서.


그 밖에도 속으로만 물은 것이 많았다. 선생님이 애지중지하시는 오래된 책들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고 싶은 마음도 속으로 접었다. 출입문과 창문을 빼고는 모두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 소장서 중에는 영어권 책은 차치하고라도, 고전의 영역본들이 모두 19세기 책이다. 『오위디우스의 변신과 헤로이데스 선집 축자 행간 번역』(필라델피아 1861년), 『‘에픽테투스 전집』(보스턴 1865년), 『유리피데스의 비극들』(뉴욕 1875년, 1863년),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텐느의 불어 저서 『영문학사』(뉴욕, 1879년)와 『실러의 생애』(런던 1883년)를 영역본으로 가지고 계신다니. 하지만 무엇을 더 욕심내랴! 『용병대장』의 후속이자 결미부라고 하신 『말뚝』을 선물로 받았지 않은가.


겨울 해는 일찍 진다. 강아지들이 새삼스레 짖는다. 선생님의 배웅으로 문간을 나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니까. 솜씨 소문난 전주의 저녁밥, 곁들일 소주 한잔을 아쉽게 사양한다. 이름모를 한국 차의 향기가 옷에 베어있으니 되었다. 『달궁』의 산실 그 서재를 혹시 모를 두 번째 방문을 위해 다 헤집지 않고 아껴두길 잘했다. 사람들이 하이델베르크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은 그곳에 심장을 떼어놓고 오기 때문이라고 하질 않는가. 믿거나 말거나.          


                                        2003년 12월 30일 화요일


 소설시대 7호 , 한국작가교수회, 평민사 2004. 9-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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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3. 11. 20. 21:57

와의 만남

『꿈꾸던 것들은 아직도 꿈인가』2003 (이화에세이)

1.

해방의 떠들썩한 열기가 식어버린 새해 혹독한 겨울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바다 구경 한 번 못한 우물 안 개구리로 상경하여, 이화여자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르는 겨울 또한 혹독한 추위를 실감했다. 합격 통지에 한껏 누그러진 봄이라 해도 서울은 여전히 추웠다. 돌 벽으로 된 기숙사 건물만큼이나 이질감으로 추운 방은 마찬가지로 썰렁한 교회당과 더불어 냉랭한 서울 시대를 열었다.


손이 시린 봄은 마음도 시리게 한다. 왜 그래야 되는지도 모르게 대의원이 되어서, 칸막이 교수실로 학생-교수간 심부름을 다니던 걸음걸음이 얼마나 가시밭이었을지……. 유창한 독일어로 일년생 기를 죽이는 교수님 ― 나중에야 그 유명한 천재이자 당시 신분은 강사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 서슬에, 그녀는 아예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사투리건 표준말이건 우리말을 아예 더듬는, 독일어는 주눅 든 꺽다리 신세. 큰 키는 당시 그리 탄성의 대상도 아니었고, 쥐구멍을 찾고 싶을 땐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그때 주눅 든 버릇으로 지금도 등이 남달리 일찍 구부정한 것이리라.


천재 교수님은 검은 스카프를 즐기셨다. 첫 봄의 기억은 그것뿐이었다. 그분이 그녀들에게 친칭을 썼는지 경칭을 썼는지도 들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문법은 충분히 마스터했노라’ 자부했던 독일어 실력(?)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과외로 학원에서 단편소설까지도 읽었던 독해력이 적어도 대화하기에는 제로였다.


문제는 그녀가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으로 키워진 시골학생이라는 데 있었다. 남자 교수님들 보다는 친근해야할 대상으로서 여성만을 찾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여자는 드물고, 서양 선생님도 영화에서처럼 낭만적이 아니라, 새의 부리 같은 날카로운 느낌만을 받았다. 자연히 천재 선생님이 오시는 요일에만 교수실에 갈 핑계를 찾았다. 그러나 말로는, 그 천재 선생님이 왠지 싫어서 그 분 오시는 날엔 교수실 들르는 일을 피한다고 광고했다. 이율배반의 감정으로 못난 시골티를 감추며 그 선생님만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실은 너무도 훗날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럴 것이 곧 이어 ‘진짜 독일어 목소리’를 가진 여교수가 부임하셨고, 너나 할 것 없이 이성적인 교수의 표상인 독일어 목소리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들 몇몇은 그 시냇물 구르듯이 읽는 독일어 목소리에 반해서 독일어로 “시냇물”이란 이름의 스터디 그룹으로 성장했다. 스터디 그룹은 생존의 방법이기도 했다. 상당한 분량의 원서를 한 학기에 읽어야 했지만, 그녀들은 터무니없이 실력이 부족했고, 교수님들은 더러 나머지 부분을 숙제로 내주시기 때문이었다. 번역본?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공부만 하느라 세월 보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일단 나머지 분량을 몇 등분해도, 불안한 소심증의 그녀는 소설작품이건 드라마건 전체를 보아야했고, 밤샘이 습관이 되었다. 천재 선생님은 어느 새 다른 대학으로 옮겨 가셨고, 그녀들은, 적어도 그녀는 그분을 잊었다. 무수한 밤샘의 나날에서 잊었다고 생각했다.


검은 스카프는 사실 첫 학기가 끝나가는 여름까지도 여전했다.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검은 스카프는 앞쪽으로 당겨져서 턱 끝에서 묶여 있었고, 그러면 삼각형 얼굴이 드러났다. 오월 말 메이데이 행사 때면 성급한 민소매 원피스도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서 학기말까지 검은 스카프라면 조금은 섬뜩했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동기생이 있었는데, 그애 또한 놀랍게도 선생님 따라서인지 시커먼 눈매를 하고 검은 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 아인 사업가인가 장차관인가 아무튼 엄청 (돈)귀족에 미스 코리아 같은 몸매를 지닌 부족할 것 없는 친구였지만, 대개는, 그리고 그녀도, 일부러 못 본채 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혹은 신포도의 경우였다. 그리고 천재를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겐 보다 지적이며 시냇물 구르듯이 독일어를 읽어주는 새로운 우상이 나타났으니까.

 

2.

인연은 길고 길어서 그녀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한 가지 공부를 위해 이화 터전에서 살았다. 이제와 본업은 지방대학 독문학과 교수, 현대독일소설을 중심으로 강의한다. 그녀들의 ‘독일어 목소리’ 우상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여성문학 강의도 시작했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을 새삼 경탄하며, 바흐만의 환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심지어 작품만이 아닌, 막스 프리쉬와의 좌절된 사랑에, 좌절된 공동생활에, 의미부여를 하기도 안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깊은 밤중이면 그녀는 글을 썼다. 여중 시절 교지에 「무제」라는 시 한편을 발표한 것 이외에는 불모로, 여태 남의 글 읽는데 비겁함을 소진하고 있는 자신이 안쓰러워서였다. 마침내 어느 날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으로 소설계의 문턱을 넘보았을 때, 그때 그녀는 옛 사랑을 다 들켜 버리고 말았다. 인용된 시는 물론, 많은 지면이 오직 그 천재 선생님을 위해 바쳐졌기 때문이다. 물론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변신되어 나타났지만, 누군들 이화에서 함께한 사람이라면 천재 선생님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시 중에서 「배반」은 이름조차 거명하며 인용했고,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라는 구절도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인용했으니. 그녀는 첫 애증의 대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화의 첫 학기 천재와의 만남은 쟝 아제바도를 나누어 품게 했으며, 오늘 밤새워 글을 쓰게 한다. 그녀에게는 습작이란 없다. 글쓰기가 의식적인 작업이라기보다는 그냥 살아있는 표식이니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게 도와 줘…… 나를 살게 해 줘…….”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천재의 목소리가 환영으로 다가온다. 목소리는 어스름 글씨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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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3. 4. 19. 22:20
 

어머니가 되세요!


 

<Friends> 2003년 5월호


 

고생 많았소, 아이들 이렇게 자라도록 보살펴 기르고.

그리고 저 ……, 나 또한 불편 없이 살아온 세월이었소.


큰 아이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남편의 어색한 감사 표시다. 함께 부모이면서 감사라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과묵한 남편의 그만한 말은 큰 의미이리라.


‘아이들 이렇게 자라도록’ 살아온 세월이 믿기지 않았다. 이 많은 날들, 사랑이 지속되고 결혼해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결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한 청사진의 미래를 꿈꾸며 결혼한다. 그러나 더러는 크게 미래를 설계하지 않고서도 결혼을 한다. 절실한 현재 때문일지……. 사람은 생각보다 근시안적이다.


그녀는 후자에 속했다. 아직 통금이 있던 시절, 통금 때문에 헤어지는 연인들은 차라리 결혼을 했다. 상대적 빈곤감이 덜한 시절이라 결혼에 조건은 그리 없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얼떨결에 아기 엄마가 되는 일이다.


그녀는 엄청난 사태 앞에 세워졌다. 만삭에도 걱정은 설마였고 여전히 책방이나 영화관을 쏘다니며 맹렬한 기세를 부렸었건만, 새로 태어난 아기는 경이 그 자체이자 어쩌면 공포였다. 손가락을 차마 만져보기도 두려운 존재, 온전할까 깨어질까 두렵기만한 존재였다. 아기는 어미보다 훨씬 용감했다. 어미와 눈을 맞추기도 전에 가슴을 파고들며 양식을 찾았고, 눈을 맞추게 된 이래로는 모든 것을 어미에게 의탁하고 물어왔다. 20대 어머니가 되는 여자들은 미숙하기 그지없다. 학교를 오래 다닐수록 상대적으로 생을 몰라서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아도 불완전한 인간에게 더 불안한 작은 생명이 의심 없이 다가올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을 움츠렸다. 긴 겨울밤의 몽상도,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잊혀져가고, 봄가을 들판을 헤맬, 혹은 여름 바다의 일렁이는 황혼을 그리겠다는 치기도 사라졌다. ‘네가 찾을 때’ 그 자리에 있자,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겠다는 다짐으로.


아기는 목욕시킬 때면 앙앙 울다가도 곧 젖을 물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만으로도 어미를 행복하게 했다. 쏘옥 삐져나오는 앞니만으로도, 뒤집는 엉덩이만으로도 기쁨을 주었다. 그녀는 아기를 따라서 말을 배웠다, 아기처럼 좋은 말들만 골라서 배웠다. 세상에는 좋은 말들만 있었다. 아장아장 아기 따라 걸음을 배웠다, 위험한 행보가 아닌 가장 안전한 길을 익혔다. 아기가 둘이 되자 둘을 똑같이 사랑하기를 배웠다. 두 아기를 보면서 서로 사랑하기를 배웠다. 세상에서 여럿을 똑같이 사랑하기를 배웠다. 아이들은 날로 새롭게 모든 사물을 향해 호기심에 넘쳤고, 그녀 또한 생에 호기심을 더해갔다. 아이들의 눈을 따라 세상을 보면서 순수한 긍정을 배우고, 아이들의 필요로 살아있는 의미를 느꼈다.


의미가 생기자 그녀는 새삼 생기가 돌고 진정한 의욕이 생겼다. 세상엔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이 많았다. 그것을 왜 몰랐을까, 알 수 없는 불안과 허망과 좌절로 애태우던 날들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토론을 하면 할수록 아득한 안개 속 미궁을 헤맸던 시절이 정말 있었던가?


그녀는 아이들 따라서 사람이 해서 즐겁고 좋을 일들을 골라서 하는 법을 배웠다. 온통 세상을 다시 배웠다. 마치 처음 배우듯이 조심조심 배워 나갔다. 이번엔 훨씬 신중하고 안전한 선택들이었다. 그 모든 일은 아이들이 그녀를 인도하는 그대로였다. 아이들이 고개 들어 쳐다보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의 능력으로나마 그저 어머니이고자 했다.


고생이라구요? 아니지요. 어미가 아이들을 키운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어미를 살게 했지요. 아이들이 있어 진정 웃음을, 행복을 알았고, 아이들이 있어 건강한 나날을 꿈꾸어 왔지요. 아이들 아니었음, 무엇이 생에 이만큼 나를 매어놓을 가치가 있었겠어요?


그렇게 대답하려던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 말 없이 미소만 보낸다. 남편은 어쩌다 술이 거나해진 날이면 차갑고 참을성 없어 보인다는 그녀가 살아온 방식을 슬쩍 건드려보곤 했었다. 예상보다 나았다는 의미인지,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는 투를 감추지 않았다. 오늘 같은 표현을 하리라고는 조금 의외다.


정체성? 그녀는 순간 생각한다. 정체성은 불변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 그 본질은 변치 않더라도, 누구이어야 하는가를 포함시키면 조금 변화가 생긴다. 어머니인 사람은 ‘어머니’가 큰 비중이 된다. ‘비중’이라고 하는 말에서 나이 따라 점점 무거워진다는 여자들의 희화적 상이 생각나서 혼자 피식 웃었다. 남편은 감사 표시에 웃음기를 흘리는 그녀가 의아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모처럼의 덕담이 쑥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한다, 그냥 다른 말인데, 웃으세요. 아내 칭찬일랑 마시구려, 여자들은 나이 들어가면서 너무 무거워진다는군요. 늘어나는 체중에다, 머리는 석두요, 얼굴은 철판이 아줌마 상이랍디다. 그러게 올려주려 해도 무거워서 절로 가라앉는답니다.


사람 참. 그렇게 자조적이라면 여자들이 상당히 지적 유머에 능하구려.


되려 적나라한 말이지요 뭐. 아무튼 우리 애들은 당신을 더 닮아 참을성도 어미보다 낫고, 내차기도 덜하니 다행 아닌가요.


그렇게 대꾸하면서 오늘따라 어색한 표정의 남편 곁을 슬쩍 일어난다. 그녀는 속으로 되뇐다, 다음 생에서는 그럼 당신도 어머니가 되어 보세요!                                        (2003. 4. 19.)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11. 20. 22:21


입시지각생의 운동화 끈

                                                         『우리 어디에 서 있어도』2002 (이화에세이)          


해마다 겨울이 오고 수능이든 입학시험이든 결정적인 시험이 있는 날은 대개 날씨가 혹독한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한지 모두들 마음이 얼어붙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기억들이다.


오전의 논술과 오후의 면접, 그만하면 교수에게나 입시생에게나 긴장된 하루가 틀림없다. 차가 밀렸다가는 큰 일이므로 학생들이 움직이기 아예 전에 서둘러야 마음놓고 학교에 이른다. 신체리듬에 따라 참새형과 올빼미형이 있다지만, 나는 새벽같이 출근할 날이면 아무리 마음을 풀어도 짜증을 이기지 못한다. 입실 시간이 지나고도 빈자리가 꽤 있었다. 입시가 여러번의 지원기회가 있어서, 첫 시간에 지각하는 학생은 예상대로 대개 결시로 이어질 것이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고, 우리는 서서히 원서대조에 들어갔다. 삐그덕 교실 문이 열리고, 놀라서 고개를 든 학생들 앞에 울상으로 지각생이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규정대로 라면 입실이 거부될 상황이었다. 새벽부터의 짜증까지 겹치면 지각생이 불리하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상념은 불현듯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수십년 전 어느 이른 봄, 선배도 없는 외로운 대학시절은 신설독문과 신입생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라서 처음 외지로 나간 지방도시 출신에게는 대도시의 낯설음까지 더했다. 낯설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었나? 입학시험을 치르던 꽁꽁 언 겨울, 백설공주가 숨어사는 산만큼이나 오르락내리락 미로를 거쳐가는 캠퍼스는 주눅들게 하기 알맞았다. 오늘날에 보아서는 그저 아기자기한 정도라 해도, 당시의 시골소녀의 눈에는 그랜드 캐년 다름없었다. 약간 비뚜름히 오른쪽으로 산을 오르다가 어디에선가 왼쪽으로 굽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 쪽 아래로 펼쳐지는 거대한 건축물, 보기는 무맛이었고 우중충한 색조마저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데... 거기서도 어렵게 몇 고개를 올라 드디어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김치 다름없었다. 종일 7과목을 필기과목으로 치르는 입시에 겁도 났고, 하루 종일은 그 자체로서 부담이었다. 어떻게든 숨을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은 축복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어머니답게 따뜻한 맛있는 점심을 자꾸 더 뜨게 했고, 가물거리는 눈...


다시 시험장을 향하는 발걸음은 아침보다 더 무겁기만 했다. 시간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잡았지만, 들어갈 때는 오르막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렸다. 끈은 걸기적거리며 안팎으로 덜렁거렸다. 당연히 몸을 굽혀서 끈을 매어야 했겠지만, 미욱한 성정에 몸을 굽힐 시간이 없기도 했고, 몸을 굽혀서 버릴 1,2분과 끈이 풀려서 방해받을 1,2분 사이를 계산하는 머리는 실타래같이 얽히기만 했다. 누구도 실험을 해 보지 않은 두 가지 경우를 두고서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한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생각은 그 둘 사이를 헤맸고, 걸기적거리는 발은 자동적으로 옮겨 떼고 있었다. 시험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흘끗 바라본 시계로 이미 시작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 길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다면 어머니의 소원으로 지원대학을 바꾼 분풀이로서 도중하차했다는 누명을 쓸 게 뻔했다. 이제는 지각을 해도 일단 고사장에 갈 것인가 아닌가의 투쟁이었다. 계단에 이르러 넘어진 것은 꼭 풀린 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르막만 나타나도 피를 품어내기에 지쳐버리는 심장이 진짜 범인이었을 것이다.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5분도 더 지난 상태... 아 이렇게 두 학교를 다 놓지는 구나. 층계를 올라온 가슴은 콩콩 뛰다 못해 겨울 두터운 옷 위까지 벌렁거리고 있었고, 시계는 째각거렸다. 이 벽 너머, 바로 벽에 밀착된 책상 하나에 응시학생이 없구나...


우연이었을까?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아니 다시 쓰자. 나는 문을 붙잡았다. 숨을 몰아쉬고, 시간이 흘렀다. 눈을 떴다. 문을 조금 열었다.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빈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와서 문이 안에서 열렸는지, 밖에서 열렸는지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많은 세월 동안 그 순간을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버전으로 쓰이던 그 장면이 원본을 잊어버린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손수 그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나를 앉게 하신 교수님의 엉거주춤한 행동이었다. 덮혀있던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를 올려놓으시기까지 했다. 까만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구나... 나는 까막눈 비슷했다. 놀람의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시험지는 뿌옇게 변해갔다. 그렇게 치른 5교시 과목은 공교롭게도 전공이었다, 독문과 학생들을 위한 <독일어>.


그렇게 해서 나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 덕으로 이화식구가 되었다. 60년대 학부, 70년대 대학원, 80년대 박사과정을 이화에서 공부하면서, 그 시발점에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이 계신 것을 상기하곤 했다. 오늘 이렇게 입시에 늦는 학생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꼭 선생님을 본받으려는 생각에서는 아니겠지만, 지각생에겐 언제나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은 내가 교단에 선 이래 결석생을 결코 홀대하지 않는 숨은 이유 또한 선생님께서는 짐작도 못하실 비밀로 남아 있다.


지난 학기에는 모교의 학위논문 심사에 합류해서 감시회로까지 갖춘 현대식 교수실을 드나들며, 그 옛날 칸막이 교수실의 사랑 반만이라도 나의 제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지 새삼 코끝이 찡했다. 아슬아슬한 입학 후 여전히 지각 결석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어주시던 강희영교수님, 김영호교수님도 이화 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시고 정년하신지 오래이다. 너무 오랜 동안 배워서 다 베껴먹은(?) 이병애교수님마저 이제 곧 교정을 떠나시게 된다니, 내년 이맘때의 모교가 얼마나 썰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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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9. 16. 22:25
[전일시론 2002년]          
 

한가위 유감 - 우리를 스산하게 하는 가을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를 지나면 처서와 백로는 금새 다가온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옛말처럼, 음력 칠팔월은 어정어정 건들건들하는 사이에 지나는 것이다. 그것은 추수만 남아 한가해진 농촌을 이르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농촌을 보라.

입추는 물론 처서절기에마저 비가 내리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일년 농사 마무리는 튼 일이 된다. 오죽하면 “처서에 비 오면 독에 든 곡식도 준다”는 속담이 있었을까. 그래서 입추 절기엔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기구하고 비의 재앙을 피하고자 기청제(祈晴祭)가 있었다 했다.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여 밀물과 썰물의 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사리 현상이 발생하면, 서남해안 지역의 저지대는 침수하게 마련이었으니까.

자연재해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속수무책임이 드러나고 있다. 올해의 세계적인 기상악화로 인한 피해는 21세기 인류문명의 발전을 무색하게 한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인재의 요소가 더 짙게 드러나기도 한다. 산사태의 상당 정도가 인공적인 자연훼손 - 축지법을 위한 도로개설 - 탓이라는 보도였다. 그러고서 오늘의 농촌을 보라. 태풍에 쓰러진 벼포기에 매달린 경우는 그래도 상이다, 아예 논의 형태도 없는 우리의 훼손된 땅들... 잃어버린 꿈들.

우리는 기청제를 지내는 마음가짐으로 가을을 맞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도로 하나도 다리 하나도 “돌다리 두드리듯이” 생각에 생각을 또 하고 놓아야 한다. 내년이면 사라질 장흥군 유치면 덕산마을의 운명에도 가슴 조인다. 수몰지구로 고시되어 모두 이사를 해야 했겠지만, 여전히 아직 이사가지 못한 집들은 이번 집중폭우에 물에 잠겼다. 애초 댐공사로 인해 면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쯤으로 묵인하는 우리들. 댐이 파괴하는 것은 환경만이 아닌 우리들의 연대감이다. 댐의 혜택을 받을 대다수는 댐공사가 묵살한 소수의 인생에는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기주의와 무관심 ― 그것은 어찌보면 하나의 끈이다. 풍성하고 한가로워야 할 가을의 문턱에서 스산하기만 한 기운은 도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길을 뜯어 놓아 방치되던 것이 드디어 “푸른 길” 조성이 시작된다니 우선은 반가울 밖에. 철길이란 단순한 선이기보다는 어딘가로의 연결이었듯이, 이제 주변 공간과의 연계 속 풍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철도부지로 묶여 재산권 행사에 저자세이던 인근 주민들의 입장에선 다른 견해가 나올 법하다. 그들의 소수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무시해서는 진정한 민주적 사업이 아닐 것이다. 푸른 공원으로 변할 네 곳 광장에 대한 기대나 푸른 길을 산책할 수 있을 혜택과 더불어, 우리에게 푸른 길을 제공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소수의 권리를 잊어도 되는가.

그러는 사이에 “광주현대미술관” 계획도 설왕설래가 재현되고 있다. 애초에 현대미술관 건립 계획이 도청 이전 이후의 도청부지와 예술의 거리를 하나로 묶는 문화벨트 프로젝트로서 구상되었다지만, 그러나 예술의 거리 끝 중앙초등학교의 문제는 여전히 혼미한 상태로 이제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도심공동화로 중앙교는 20년전 5천 규모의 학생이 십분의 일로 줄고 교실은 아무리 특별실을 늘린다 해도 폐실되고 있는 현상이라니 축소 또는 이전이 바람직하겠지만, 이를 전체의 논리로서 소수를 핍박하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할까.

행여 일이 잘 마무리되어 우리 도시가 예향답게 또 하나의 미술관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문턱 높은 예술의 성곽을 지어 놓을 양이면, 기존의 광주시립미술관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100주년 기념전을 가진 베니스 비엔날레의 귀감을 보자. 2년에 걸쳐 자르디니 공원에 중앙 전시장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기에 우회 공사를 해야 했다는 일화는 냄비방 가슴으로 쉬 뜨겁기만 한 우리들 행정에 경종이 될 것이다. 냄비방 말고도 우리에겐 또 하나 흠이 있으니, 흉내 좋아하는 습성이다. 어디 좋은 데 미술관 따라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웅장한 규모의 위용을 자랑할 생각이라면, 아예 역사 깊은 초등학교를 절단내지나 말자. 낡은 교실은 허물어 푸른 나무들을 가꾸면 우리들에게 산소를 선사해 줄 것이니까.

이제 곧 한가위, 그러나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노래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언제냐 싶게 이제 곧 밤 동안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 수증기는 엉겨서 풀잎에 이슬을 내릴 것이다. 밤이슬같은 썰렁한 가을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사에 어딘지 따뜻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2002년 9월 16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8. 19. 22:30

전일시론 2002년            

우리의 골목대장들

 

어느 시기나 어느 동네나 골목대장은 있기 마련이다.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아이”, 국어 사전도 마지막 설명을 “아이”라고 규정한다. 아이들은 동네 골목대장을 두려워하고, 커서도 지금처럼 힘이 세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한다. 두려움과 불안은 부지중에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다. 그것이 문제이다.


옛날엔 어린 시절의 골목대장은 어미의 걱정이었다 ― 하긴 요즈음엔 그것도 대장이라고 대장하기를 바라는 어미도 있다 하지만. 골목대장에도 두 가지 형이 있다. 좋은 의미에서는 다른 아이들의 선두에서 놀이의 지도자가 되거나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좋은 성격과 능력의 소유자임을 엿보게 하는 경우이다. 문제는 아무 데서나 폭력성을 드러내고 약한 친구들을 못살게 굴며, 혼자서 대장이 된 기분을 독차지하려는 경향이다. 골목대장을 자처하는 아이들은 대개 지적으로 미숙한데 완력이 강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약한 아이들도 마음속으로는 완력에 대한 저항심을 갖게 된다. 더구나 골목 밖으로부터 위협이 닥쳐올 때는 놀랍게도 이러한 골목대장형이 제일 먼저 몸을 사린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비겁성이 그 속성인 것이다. 그나마 어린 시절의 골목대장을 귀엽게 봐 주며 그 긍정적인 면을 살리고자 함은, 그들이 아직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골목대장이 자라서 한 가락한 경우가 적지 않다. 동학의 전봉준이 고창 당촌 마을에서 훈장의 외아들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적에, 아이들의 골목대장으로 패싸움에선 늘 앞장을 섰다는 일화도 있다. 더 거슬러 가면 오성 이항복의 어린 시절 악동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동네 골목대장을 하던 그가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학문에 힘쓴 일이며, 16세에 어머니가 타계하자 제복하고 아예 학궁(學宮)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에서 선조왕을 호위하여 임진강을 건너는 충신이 되었음이며, 장인 권율장군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난세의 귀감이 된 일을 두고 말함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에 이른 김훈의 『소설 이순신』에도 어김없이 “골목대장으로 범상치 않았던” 어린 시절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당파싸움이 심했던 사실을 두고도, 우리에겐 골목대장을 선호하는 기질이 대대손손 있어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골목대장을 졸업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예컨대 어른들의 정치세계에서는 미숙함이 면죄부도 아니고, 더더구나 골목대장의 행태가 칭송될 수는 없다.


요즈음 정치계 인사들을 둘러싼 거짓말 공방은 골목대장의 목소리 다툼과 꼭 같아 우울하다. 아웃이야 ― 아니야, 싸움은 공이 아웃인가 아닌가에 따라 결판나지 않고, 골목대장이 아웃이라고 외치면 아웃이 된다. 정치인 도덕성 문제로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있는 “병역 비리” 운운 테이프의 진위, 테이프의 목소리의 진위, 물론 그 내용의 진위, 그런 판단이 꼭 골목대장의 큰 목소리 따라 결판이 날까 걱정이다. 완전 조작이다 ― 천만에 진실이다, 공이 아웃인지 아닌지, 다음엔 또 어느 쪽으로 튀어나갈지, 보통 사람은 골목대장들 등쌀에 어지럽기만 하다. 국회위원 재보선 때에도, 거물급 인사가 겨우 동네 골목에서 재기했다고 큰 소리였다. 거물급이면 누구라도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마빡 터지는” 싸움을 붙어보기라도 했어야 한다. 동네 골목은 전장에 차마 내보내기 여린 동지에게 맡겨두고, 쉬운 산술로 좌석 하나라도 바깥 전장에 나가서 챙겨야 했지 않은가. 동네 골목에서는 소인배에게도 너그러운 것이 인심이다. 그러다 보니 골목대장들은 골목만을 맴돌며 큰 소리다.

90년대 후반 한국의 개혁실패 이유를 진단하는 어느 책에서, 개혁세력이 군사독재의 그림자에 몸을 적신 나머지 국민대중을 개혁의 길로 동참시키지 못한 채 골목대장의 오만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는 논지를 폈던 생각이 난다. 골목대장들의 큰 목소리 정치로는 우리에게 개혁은 요원할 것이다. (2002년 8월 19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