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6. 11. 22. 01:08

민중의 노래

 

내 고향 광주는 봄이 늘 고통이었다. 그러기를 수십 년, 한 세대가 바뀌어도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른다. 진혼곡이든 무엇이든 불러 목이 터져도 시원치 않을 그날이 오면 더욱 서럽다. 이 노래는 저 노래는 된다 안된다, 합창은 제창은 된다 안 된다, 해서 상처는 더 벌어진다. 근년에는 T.S.엘리엇의 의미에서 잔인한 달이 아닌, 숨이 멎도록 잔인한 4월이 더해져서 남도의 5월은 이미 먹구름 슬픔 속에서 시작된다.

그런 5월이 끝나가는 즈음 사직공원에 위치한 작은 음악당에서 ‘김원중의 달거리’라는 음악공연이 있었다. 매월 있는 공연이라는 의미로 달거리이며, 2003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82회째에 이른 이 굿마당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부제가 ‘빵 만드는 공연’인만큼 출발할 때부터 실제로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을 후원해오고 있다고. 지금은 정치적 여건으로 공장 가동이 멈추었다고 하니 한 구석 씁쓸해진다.

올해를 여는 달거리 5월 공연 무대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막이 올랐다. 악기 없이 목소리의 화음만으로 연주하는 아카펠라 그룹이 부르는 아름다운 선율에 청중은 그만 숨이 멎었다. 장내에는 완벽한 고요만이 흘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이 노래는 80년 5월의 한이 녹아내린 광주의 노래가 맞다.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보루 도청에서 제 나라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한 시민군 대변인 윤OO과 먼저 떠난 노동운동가 박OO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다. 하지만 유족이건 시민들이건 아무런 연유도 작정도 없이 저절로 옛 5월을 추념하면서 불러온 노래다. 어느새 민중가요가 되어,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의 자리에서 늘 불리게 되었다. 마침내 1997년에 이르러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어 정부 주관으로 첫 기념식이 열렸을 때는 기념곡으로서 공식적으로 제창되었다. 그제야 ‘사랑도 명예도’ 한을 푸는가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야속했다. 지난 정부 들어서 돌연 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제외되고 식전 행사로 밀려나더니, 어느새 제창 자체가 폐지되고 합창단의 메뉴로 변질되었다. 한술 더 떠 현 정부에서는 ‘별도’의 기념곡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미명으로 아예 광주의 노래를 묵살하기에 이르렀다.

광주는 봄만 늘 고통이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는 사시사철 의붓자식이요 외톨이였다.

“선배님, 요샌 괜찮으세요?”

80년대에 어쩌다 서울에서 대학 후배들을 만나면 묻는 안부의 말이 하 수상했다. 불온한 소굴쯤인 광주에서 교수노릇하면서 밥 먹고 살자니 얼마나 고생이냐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이었다.

그런 광주에서, 또 어느 5월에 열린 음악공연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불려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게 되다니. 어쩌면 당연한 선곡이었을 것이다. 공연을 주관한 김원중은 대학 재학 시절에 「바위섬」으로 세상에 나온 가수다. 소위 지방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유명해진 노래는 드물다고, 올해도 7월 초 7080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그렇게 소개한 곡이기도 하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 인적 없던 이곳에 /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 모두 사라지고 /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 [중략] //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 아무도 없지만 / 나는 이곳 바위섬에 / 살고 싶어라~ //

80년 5월 이래 어쩔 수 없이 고립된 광주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였으니, 그는 광주를 노래하는 가수일 운명이었다. ‘광주의’란 형용사가 더 큰 세상으로의 발돋움에 걸림돌이 될지언정, 그가 없는 광주는 이상할 터다.

이번 5월 공연의 주제는 가수의 말 그대로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더는 노예적 삶을 참지 않겠다는 민중의 노래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 삽입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의 시작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혁명을 선도하는 학생회 지도자 앙졸라가 선창하고 다른 학생회 회원들과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그대 듣고 있는가 / 분노에 가득찬 노래 / 굴종의 삶을 거부하는 / 우리들의 노래를 / 너의 심장소리와 / 북소리 울려 퍼지면 / 어둠 뚫고 새날이 / 밝아 오리라……

영어와 한글로 노래하는 김원중과 시민합창단의 목소리는 손에 든 촛불만으로 밝힌 어두운 무대 위에서 떨고 있었다. 환하게, 장엄하게.

노래의 배경이 된 1832년 파리의 6월봉기는 진압된 민주화운동으로서의 광주의 5월과 놀랍도록 맞닿아있다. 1830년 7월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하원에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공화주의자들의 견해에서 보자면 왕에서 왕으로의 대체는 무의미했다. 1832년 6월 라마르크 장군의 시민장 장례 행렬이 바스티유광장으로 향하면서 시작된 봉기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터졌다. 하지만 밤새 2만 5천명 정규군이 합류했으니, 시민군의 바리케이드는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마지막 보루 생 메리 교회에서 시위대의 손실은 93명 사망에 291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로 컸다.

1980년 광주의 5월. 군부독재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행해 시위 나흘째인 21일에 본격적으로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27일 새벽 투입된 2만 5천명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이란 이름으로 1만여 발의 사격을 감행했다. 진압은 훌륭하게(?) 종결되었다. 정부가 인정한 공식적인 사망자 수만 해도 154명이었다.

그러나 잠깐, 순간의 평가로 본 실패란 언제나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파리의 6월봉기는 좌절했지만 혁명의 정신은 잉태되어 무르익어 갔다. 세월은 흘러서 1848년 2월혁명이 도래하고, 그제서 성공한 혁명은 마침내 제2공화정을 이끌어 내며 온 유럽으로 확대되어 세상을 변하게 하지 않았던가. 하긴 그 대통령이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화국을 폐지하고 제2제정을 수립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수밖에.

역사의 아이러니는 끝도 없다. 1980년 5월 광주의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했던 그 11공수특전여단이 이제서 감히 그 광주의 금남로에서 호국퍼레이드를 꾀하다니. 보훈처가 그 계획을 전격 취소했으니 망정이지, 11공수특전여단이 광주에게 누구인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그들은 잊을 수도 있다니. 때로는 무심함도 죄렷다. 광주 사람들은 어째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쉬이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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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속에 봄은 잉태되고」 , 이대동창문인회, 320~324 , 2016.11.7.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