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6. 10. 17. 22:38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불로소득으로 부자 꿈꾸는 젊은이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4. 장래희망
2016년 10월 17일 (월) 12:17:42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장학 퀴즈 비슷한 어느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한 명 씩만 남은 상태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도중에 숨을 고르라고 여유를 두면서 아나운서가 물었다. 장래희망이 무엇입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채널을 고정하고 귀를 쫑긋했다. 옛날 같으면 남학생은 피상적으로 대통령 아니면 장군이었고, 여학생은 현모양처인 적도 있었다. 자신들의 꿈보다는 부모님들의 소원을 들어서 그렇게 말하곤 했으리라. 시대가 바뀌고 또 바뀌어 남녀학생 모두 연예인을 꼽는다는 보도가 나온 지도 오래다. 부모들도 앞 다투어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만들기에 투자한다고들 했다. 그래, 공부로 승부할 것 같은 두 사람, 너희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남학생의 대답은 상식적이었던 것 같다. 의사이거나 판검사, 뭐 보통 선호하는 번듯한 직장이었다. 다음 여학생의 대답에 놀라서 앞에 들었던 단어가 확 날아가 버렸다.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 

예로부터 정석에 없던 새로운 희망직종, 건물주다. 청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꿈은 젊은이의 권리다! 다 시궁창에나 처박을 옛말들이다. 건물주가 되어 불로소득으로 생활하고 싶다! 그것이 저 앳된 소녀의 장래희망이라니. 

다음 순간 아이를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건물주를 잘 못 만나서 전전긍긍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구나. 커서 건물주가 되어 효도하고 싶다며 자랐을 것이다. 본심이 다 그런 세상에서 본심을 말하는 것이 정직한 일 아니냐. 갑질하는 건물주가 죄고, 일 적게 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을 효율이라고 가르친 우리가 죄다. ‘투입과 비교된 산출의 비율로 정해지는’ 효율성은 인적자원개발(HRD)이라는 이름으로 조직 내 인적 자본의 확충을 위한 활동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구나. 잘 되려고, 무조건 잘 되려고!

하긴 생각해보면 ‘건물주’의 위력이 도처에서 드러나는 세상이다. 오피스텔을 열도 아니고 백 채를 소유한 고위 공직자가 있었다. 최상의 대학을 나와서 최상의 시험에 합격해서 최상의 자리를 넘나들던, 참 교양 있어 보이던 엘리트도 ‘부동산 임대사업자’ 등록까지 하고서 합법적으로 부동산 재테크를 했더란다. 지도층은 주식인지 펀드인지 하는 금융투자에서도 수직 상승만을 거듭한다. 신기하다. 이렇게 운 좋은 사람들은 청문회도 통과하고 요직에도 임명된다. 이제는 투자와 부자 되는 일은 능력이다 못해 덕목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옛날에는 달랐다. 흉년에는 논도 사지 말라고 했다. 보릿고개에 처자식 굶어 나가는 꼴 차마 못보고 내미는 땅문서를 곡식 몇 자루 내어주고 사들이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똑같이 주어진 공기를 훔칠 수 없듯이, 누군가에게 똑같이 주어진 기본적인 먹을 기회를 앗아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앗아간다. 그것이 투자다. 재화의 양은 정해져 있으므로 누군가 많이 소유하면 누군가에게는 없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는’(크레디트스위스, 2013) 불평등 세상이 됐다. 

자본의 소유 과정도 점점 문제가 되고 있다. 옛날에는 자본가들이 제조와 생산 중심인 ‘본연의 자본주의 구조’로 돈을 벌었는데, 요즘에는 금융에서 돈을 축적한다. 자본의 본고장 미국의 예를 들면, 아버지 롬니는 1950년대 자동차 업계 최고경영자였고, 기업을 운영한 동안 소득의 36%를 세금으로 냈다고 한다. 2012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였던 아들 롬니는 무슨 캐피털에서 금융으로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고,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 1980년대 이래 최저 세율임에도 부자 감세를 주장한다.(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 2015) 

그러니 따라쟁이 한국 부자들도 생산보다는 금융으로 부를 축적한다고 보면 옳을 것이다. 보다 효율적인 방식을 위해 권력이 동원돼 부를 낳고, 부가 권력을 낳는 상부구조가 정착된다. 나머지는 그들의 우월감을 확인시켜줄 대상으로 전락한다.

자식을 낳으면 너도나도 죽자고 공부만 시켜온 나라인데, 공부만으로는 상부구조 진입이 수월치 않은 구조가 됐다. 돈은 인재를 스카우트해서 ‘패밀리’를 견고히 하는 이득을 얻고, 인재는 효율적으로 상부구조에 안착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상부구조는 거미줄 한둘쯤 뚫리어도 끄떡없다. 거미줄의 재질은 다이아몬드 가루를 둘러쓴 듯 견고하니까.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희망이 없지는 않다. 거미줄에 덤비는 일은 자멸인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누군가가 (아마 도가 지나쳤다고 믿는 경우) 책임감으로 ‘그들의’ 의혹을 폭로한다. 물론 아직은 달걀로 바위치기다. 의혹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의혹에 손을 대려는 사람은 사생활이나 형식적 사안만으로 퇴출된다.

여전히 남는 의문 하나. 충분히 상부구조에 안착해 있어도 왜 요직을 희망해 청문회장 같은 곳에 나올까. 요직에 가면 혹시 더 많은 건물주가 될 요술방망이라도 쥐는 것일까. 다만 고등동물의 명예욕일까. 청문회장이 아니었다면 다소 과한 부의 축적 과정에서의 도의적 부끄러움이나 ‘간단한’ 교통사고쯤 인간적 흠결도 완전히 숨길 수 있었을 것 아닌가.

하긴, 사고현장에서 경찰을 속이고 나라와 법을 속인 행위도 요직에 임명되고 나면 윤리적인 ‘마음의 빚’으로 치환된다. 의문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증폭된다. 신분을 속인 과거를 가진 인물이 자신이 속였던 조직의 수장이 되는 일은 모순일까, 아닐까. 우리 보통사람들은 그 조직을 존중하고 신뢰해야 하는가, 아닌가. 부적격 판정을 받아도 임명되면 장관이고 해임건의안이 통과돼도 철옹성이 지켜낸다. 이번에도 형식적 문제를 침소봉대해서 그것만 죽을 죄라고 할 것인가.

본말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됐다. 제 안전은 제가 지켜야하는데, 돈 아니면 권력, 아니면 그 둘의 합이 요술방망이다. 퀴즈 방송에서 장래에 건물주가 되고 싶다던 여학생이 다시 떠오른다. 그래, 건물주가 되거라!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세상에서, 너라고 다른 이상적인 직업을 꿈꾸어야 되는 법은 없겠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성인이 되면 이민가고 싶다’던 기사에 비하면 네 꿈은 덜 절망이구나. 

하지만 미안하구나. 세상에 태어나 겨우 그 만큼만 꿈꾸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네 후손들이 더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으려면, 너희는 또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이더냐. 부디 세입자 눈물 빼지는 말아다오. 혹시 더 많은 건물을 소유하게 되더라도 학교 건물주가 되는 일은 삼가다오. 그건 교육 철학의 문제가 먼저이니까. 그리고 설마 고위 공직을 탐하거나 정치까지는…. 당부 하자니 한이 없구나. ‘착한 건물주’는 애초에 모순형용의 개념이니 어쩌겠느냐.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