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1989. 5. 20. 14:54


한신문화사 1989. 5.20.


전후 독일문학 세계문단에 끌어올린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자 전후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1917-1985)의 방대한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섭렵한 입문서. 아직은 학문의 깊이보다는 넓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생들에게  안내서가 되기를 바라며, 그 차례를 소개합니다
.

  1. 개괄 및 연구방향
 
  2. 앙가즈망
 
     1) 시간적 현재성           2) 공간적 연대감

  3. 인도주의 미학  
     1) 언어의 도덕성           2) 인간의 존엄성           3) 문학의 자유와 한계

  4. 전쟁과 개인
     1) 전쟁의 무의미    
                  전후 단편들/ 『기차는 정확했다』/ 『아담아, 네 어디 있었더냐?』
     2) 평등의 허위
                  50년대 풍자적 단편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빵』
     3) 과거의 부담  
                 『돌보는 이 없는 집』/ 『아홉시 반의 당구』

  5. 현실과 이상사회
     1) 사회로부터의 탈영    
                 『어릿광대의 견해』/『부대 이탈』/ 『마지막 군복무』
     2) 이상사회의 싹  
                 『문둥병』 /『여인과 군상』
    
     3) 어떤 사회주의  
                 『카타리나 블룸의 실추된 명예』/ 『국민의 성향 보고』/
                『보호라는 이름의 포위』/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6. 요약과 정리       
       각주
       참고 문헌  
       연보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9. 5. 23:30

              문 둥 병 ................

    


   
이 작품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매우 예외적 장르인 극본 <Aussatz>로서,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던 독문과의  축제인 독문학제(1996)에 번역극으로서
   공연하기 위해서 급히 번역되었다.  1986.9.5. 전남대학교출판부

   
                        
 얼마나 급했던지 등장인물의  이름 중 Gerta를 Greta로 보고서
                         잘못 번역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그 이름이 시사적 이름(telling name)
                         으로서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암시하지만, 다행이도 이 경우는 그것을
                         면했기에, 부끄러운 가운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위안한다.)  


  
 하인리히 뵐은 방송극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지만, 첫 극본
 
  『 한 줌의 흙  Ein Stueck Erde 』(1961)은 초연에 실패했고, 이 두 번째

   극본인 이 작품은 그러나 아헨의  무대에서는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문둥병은 누구나 알 듯이 천형의 벌이라 간주되는 격리치료의 질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문둥병에 감염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인물을 위해서  사회가 빙자한 질병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

  이라서 격리가 필요한가? 성직자의 독신 계율을 구체적 소재로 다루는 이 작품은 사실

  평신도에게도 의무로 되어있는 정절의 덕행마저 이미 기만적인 현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혼인에 관한 "추상적 질서원칙"( 63년 작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참조!)에 대한 기만적 복종은 대기업주 부르의 <민주적> 작태에서 드러난다.

  아내에게 아내의 자유를 준 남편!  매우 민주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선행(?)은 그러나

  그의 성공적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 그는 자산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도 필요한 것이고, 또 가톨릭 신자로서의 평판을 위해서sms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임을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나 APO의 동조자인

  젊은 쿰페르트신부가 외치는 장면이다:
 
 
 
              
저는 다만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성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내연의 관계나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순결의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또한 이미 결혼 한
              사람들까지도  […] 순결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은 우리가 정말이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너그럽고, 죄악 자체에만 혹독하지요
  
  심지어 "신앙을 버리거나 여자를 보더라도 눈감아 줄" 여생의 성직 대신 "특권을 부여

  받고서 특권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일, 그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젊은 신부, 그리고 "포도주를 즐기고, 신학서보다는 소설 읽기를 즐기는, 그것도 최근의

  초현대적 소설을, 또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고 고백하면서도,  감히 "부랑자 신세"를 택하지 못하고 조금 타협하고 신학 안에 남아있

  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의  노 신부.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검역소에 억류된다. 젊은 신부의 자살이 '신원미상의

  문둥병자 사망'으로 둔갑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낌새>를 알아챈 형사 -- 그는

  시체에 접근했었으므로 잠정적 감염자로  분리된다 --, 죽은 신부의 <동쪽> 친구 --

  그는 신부의 동구행 잠적이라는 시나리오에 어울리도록 함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이자 대 부호의 아내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여자,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뛰쳐나온 주인공 쿰페르트신부 등이다. 이 특이한  문둥병

  아닌 문둥병의 치료 또는 해결은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둔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2. 25. 14:37

 

삼성출판사 1986.2.25


― 라인강변의 호화로운 별장지대를 무대로한 권력층 부유층 그러나 매우 서러운  여자들의  이야기 ―

이 작품은 1985년 여름에  타계한 하인리히 뵐에게는 그가  탈고하고 출판사에 넘긴 마지막 작품이다.


원제 Frauen vor Flusslandschaft


 "라인강의 기적"의 결과를 흠뻑 누리며 살고있는(?) 정치가 혹은 사업가의 아내들의 이야기


이런 여자들의 서러움과 고통이 무엇일까? 고통을 알기나 한가? 기껏해야 풍요의 권태가 주는 실존적 위기감 또는 잘해야 예술적 또는 정신적 일에 관계된 사치스러운 고민이겠지 …

그러나 그러한 기우는 첫 장면에서 사라진다. 이들의 고뇌는 보지 말아야 했던 것을 보았던, 듣지 말아야 했던 것을  들었던자의 매우 인간적 고통이다. 제 1장이 시작되면 라인강을 바라보는 별장 발코니에서 우수 속에 잠겨 일생을  회고하는 에리카 부플러가 등장한다. 그녀의 성공한 남편 헤르만, 그는 쿤트를 축으로 하는 정당의 기획자로서,  그의 두뇌 속에서   40년간의 연방독일의 정치가 요리되어 왔다. 이 정객들의 권모술수의 <연극>에 얽혀든 여인들은 일종의 배우들이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득표를 위한 행동이다, 그들은 체제의 긍정적 산물인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대신 공허한 내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안신경증적인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그 <연극>에서 이탈하면, 치유할 수 없는 우울이나 절망, 자살에 이른다. 종전 직후 옛 나치들이 민주주의자로 둔갑하여 정치의 일선에 뛰어들 무렵, 그들에 의해 영도되는 연방공화국의 땅 대신 차가운 라인강물을 택한 여인이 그런 경우이다. […]

그녀는 이 죽음을 통해서 당시 다섯 살 난 아들에게 결코 군복(유니폼)을 입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갔다. 그 아들은 당연히 군복무 거부자에 합류한다. 이 백작가문의 <빗나간> 황태자는 아버지의 칭호인 "백작"을 거부한다. "민주주의자 백작 ooo", 예컨대 이러한 불협화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야기는 호화판 요양소에 감금되어 살고 있는 정치가의 아내, 엘리자베트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녀는 "결혼의 파기"와 더불어 정신병원에 유폐되어 있다. 남편 역시 쿤트 주변의 인물이다. 그는 한 귀족의 딸을 아내로 원했기에 그녀와 결혼했다. 당시, 아버지를 소련군에게 잃고 자신은 그들에게 겁탈당한 귀족의 딸은 매우 값진 액세서리였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다. 전쟁 말기  나치당 남작이었던 아버지는 극렬당원이던 누군가  - 작품 내에서 "피의  사냥개"라고만 불 린다 - 의 사주에 의해서 남자 아이들을 다 목매달고 자신도 목을 맨 애국적 군인들 중의 하나였고,  남겨진 딸 그녀의 처녀성은   "하등인간" 소련군의 겁탈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랑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녀는 그 디미트리를 평생 사랑했고, 남편은 오히려 그녀를 겁탈해야 했다. 그녀는 결국 출산은 거부했지만, 표밭을 모으는 연극에는 동참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피의 사냥개가 변성명해서 복권되어 나타났을 때, 그를 알아본 그녀는 자제심을 잃고 광기에 내맡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은 본의 정치사회를 깡그리 부정하는 듯한 비판의 안목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비판서가 아닌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는 예를 들면 제 4장의 에파의 독백에서 넋을 읽게 된다:


 

     에파:  […] 저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빨강이건 초록이건 배의 각등들 하나 없구나.

             정박 금지인 봐 .

             아마 여기 어느 곳엔가는 니벨룽겐의 보물이 발견될지도 모르지 ― 라인강 기슭으로

             떠밀려 올라와, 찌그러진 왕관들, 황금쪼가리가 라인의 강물과 자갈에 오랫동안

             씻겨서, 구르는 잔돌에 맞아, 뭔가 사육제의 휘장처럼 시달려서 […]

             오오, 크림힐트와 브룬힐트, 그대들의 팔찌들, 구르는 돌에 쇠잔하여 강의 해초들이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겠지, 아마 미국의 장갑차가 진압했을 대 놀란 어느 시민이 급히
             떼내서 내버린 나치의 
표장과 비슷하겠지. 거기 초록빛 수렁 속에서 사라져버렸을 모든 것들 ― 

 

바로 그것이다. 니벨룽겐의 흥망성쇠를 태고의 유산처럼 음미하다가 갑자기 섞이는 "미군 장갑차", 그리고 어느  놀란 시민이 황급히 떼서 내버린 나치의 표장  ― 이렇게 인류의 속성과 원죄적 약점에 대한 평이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찾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