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1999. 8. 1. 23:30
  R    E     N     내     E     조   N

     N     알     E      N       지     N    고    L    E    기    K
 


   서
를 전혀 모르고서 한 학기를 한 교실에서 보낸다는 것은 조금 모독입니다.
    겉보기엔 좌판을 들고 앉아서 지식을 파는 지식산업 행태로 전락되는 한이 있더라도,
    짧은 상호간의 영향이 남아 있는 한, 교수-학습 간, 학습자 상호간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얼굴과 이름은 기억해야 <없는>의미도 살아 날 수
    있으리니, 여러분 졸업 후에 <영2> 혹은<수2>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끔찍해서라도
    이름을 개강모임이라 하여 간단히 초대합니다.

   대상: 현대 독일소설, 독일여성문학 수강학생 따로.
   시간은 가까운 목요일, 단 미리 이야기 하기.
   장소는 상의해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우연히 두 과목 다 수강하며 열쇠담당으로
   수고하는 류oo(94학번)와 의논하세요.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30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욕망과 망집 없는 삶 - 그것의 허위?

 

죽음과 결부시켜서는 매우 생경한 나이에, 서른 해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젊다 못해 시퍼런
시인/글쟁이가 남긴 시들을 읽게 되었었다, 실로 우연히 지난 겨울에.그것도 시집을 선물받아서,
선물에 참 맞지 않은 시집이었는데....
섬뜩한 몇 구절은 곧 가슴에 박혔다. 입술이나 뇌리가 아니라 바로 가슴 속에.    
 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고 또 쓰는 구나!

이 봄에 책방을 기웃거리다가 그 사람의 산문집을 발견했다. 10년 가까운 세월 지나서 28쇄 째의 책을 이제서야.생각보다 -- 시구절에서 얻은 표상에 비해 -- 훨씬 훤한 젊은 얼굴, 그리고 퍼뜩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

 

     ■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도서출판 살림, 2000년 28쇄, 26면에서

이 글귀는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무망을 목표로......."라고 하는 입버릇과는 어긋나게, 빈 들 햇살에 녹아들면서도
안에서는 냉큼 녹지 못하는, 그래서 속이 굳어지는 잔설처럼 짓눌린 욕망에 평안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 시인은 시로써 말하였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것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겨울을 났고, 이제 미련없이 나며 우두둑 꺽어지는 나뭇가지들은 서럽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으려는 "
남루한" 나뭇가지는 추악하단다.

그는 그 "매달려있음"을 욕망이라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이제 산문에서 욕망없음을 위선 쯤으로 규정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한다?
시인의 글을 시가 우선하지 않을까? 산문은 지나가는 느낌일 뿐이며.
 

 또 다른 시 한편: {우연히 시집의 좌우 페이지에 해당한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두 시의 공통점은 "봄"이라는 시간이다.
봄의 이미지가 시작이 전혀 아닌 무엇인가의 끝을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봄이 무서우리만치 생경한 것은 이 시인으로서는 너무 오만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나의, 것이다.
그는 완성되기에는 너무 젊은 인격으로 마쳤다. 그러니 불균형이 당연하다고?
그렇지만 사람이 나이와 더불어 별 되는 것도 없다. 불균형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라도 헤메는 것인가?

 누군가와 끝까지 이야기하고 싶다. 논쟁이 되어도 좋고, 마침내 서로의 몰이해에 화를 버럭내며
 나가 떨어져도 좋을 것이다.     벌써 그  "....하고 싶다"가 욕망이라고 힐난하려는 사람이어도 좋다.
 누구라도 허튼 이야기를 나눌 마음만 있으면 족하리라.
 이 세상 그러나 어디에 그 소용없는 일에 밤을 지샐 위인이남아 있을 것인가!
 혹은 속으로 왼다: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00

그 이야기 둘 : 스스로 격리된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中에서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치유할 수 없는 병?

 ♠  인용

아니면 사랑은 어느 날 우리 몸에 저항력이 떨어지고 발작 증세가 나타나면서 갑자기 피할 수 없는
병에 걸릴 때 까지 우리 몸 속에 둥지를 틀고 조용히 머물러 있는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포로처럼 우리 몸 속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끔 씩이긴 하지만 사랑은 스스로를 해방시켜서 바로 자기가 갇혀있는 감옥인 우리를 부수고 나올 수도 있다.
사랑이 평생 갇혀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온 죄수라고 생각할 때, 왜 사랑이 자유를 맛보는 아주 드문 순간에
그렇게 날뛰고, 그렇게 은총과는 거리가 멀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희망의 나라로 이끌었다가 뒤이어 곧
불행으로 떨어뜨리는지, 나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이런 특성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허용하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랑이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용

사랑의 첫 단계, 모든 사랑의 첫 단계는 진정한 감사의 시간일 것이다.  한 인간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여러 특성들이 우리 내부에 파묻혀 있거나 아직 계발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특성들은
우리가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익숙해져 있던 특성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는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러워지며, 현명해진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그에게
헌신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베푼 그 기적을 위해 우리 삶을 바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그가 바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묻지 않는다. 바로 그가 우리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우리 삶의 윤곽을 분명히
그린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의 만남의 순간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은밀히 조물주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감지하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용

프란츠와의 관계된 문제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스스로 결정한 기억은 없다.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결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빠져있었던
사랑의 그 완벽함으로 인해 나의 자존심이 상했을지라도 나는 오랫동안 사랑의 요구에 저항할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을 제지시키고자 한 몇 번의 나의 시도는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으며, 나는 또 다시 완전히 기가 꺾였다.
그럴 때마다 사랑에게서 배운 교훈은 오로지 사랑의 계획에 따르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었다.              
                      

 인용

살아있는 동안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랑뿐........사랑은 현실의 삶 외부에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트리스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장애물을 설치해
나갔으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진정으로 구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을 때 까지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  우리의 의문 :

   ♤ 주인공은 "슬픈 동물"인가? 왜 "슬픈 동물"인가?

       사랑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저주를 사랑하는 - 떠나 버린 - 사람에게
       걸고  있는 일이 가능한가? 혹은 사랑에?

    ♤ 보편적인 질문: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한가?                                                                                                                                                                        

 소설의 개관

동베를린 태생의 주인공은 고생물학 전공자로, 결혼하여 남편과 성장한 딸이 있고, 1990년 당시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 중이다. 서독출신 개미연구가 프란츠가 박물관의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왔을 때, 둘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떠났고, 그는 어김없이 부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이다. 그에 대한 격렬한 사랑의 요구는 심한 질투로
변하고, 그의 부재 중에는 상상 속에서 그 부부의 흔적을 추적한다. 넘쳐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현실세계를 넘어서
주인공의 의지와 상상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영원히 그녀를 떠났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몇 십년을 회상하는 그녀에게
이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회상하는 몇 십년의 시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몇 십년은 곧 현재요
미래이다.    "뭉툭한 코와 몸을 휘감는 긴 팔을 가진 갈색 털의 원숭이" 처럼 그렇게 그녀는 꼼짝 않고 누워서 그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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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