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20. 3. 20. 12:37

2019 이름 - 소설시대 2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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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대는 한국작가교수회에서 발행하는 소설전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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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9. 9. 11. 12:57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809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신문>으로부터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30회 걸쳐 가벼운 칼럼을 쓴 일밖에 한 것이 없는 나에게.
2년이 지나서,  <방송통신대학 위클리>에 역시 가벼운 글 하나를 쓰고서 생각이 난다.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가 출판되었을 때, 그리고 그 작품으로 "놀랍게도" PEN문학상을 받았을 때......

 

‘글쓰기’ 절실해 떠난 강단 …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할 뿐” - 교수신문

때로는 한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냉철하고도 날카롭게, 때로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이 나라, 이 사회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교수가 있다. 현재 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을 연재하고 있는 ...

www.kyosu.net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0455

 

“과분하고 기적 같은 受賞 … 쉽지 않지만 예술의 길 계속 갈 것” - 교수신문

2017 PEN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의 영예는 서용좌 전 전남대 교수에게 돌아갔다.에 인기 연재칼럼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을 집필했던 서 명예교수는 이화여대 독문학과 1회 졸업생으로, ‘글쓰기’에 좀더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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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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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나방이나 채소밭의 상추도

밤에 달을 쳐다보면서

어쩌면 꿈을 꿀 지도 몰라요.

- W. 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에서

 

나무를 사 올까봐. 나무 심는 식목일이네, 벌써.

퇴근길에 말예요?

응. 작은 꽃나무를 고를까? 낼 쉬는 날이고. 아차, 낼은 마침 산소에 가는 날이네, 4월 첫 토요일. 이번엔 한식과도 맞아 떨어졌으니 딱 좋네. 산에다 심을 거면 좀 큰 나무를 살까?

산에다 나무를?

그냥. 사방에 산불도 나 쌓고. 올핸, 낼 한번 같이 다녀올까? 생각해 둬요.

 

닫히는 문과 함께 사라지는 말꼬리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우선 소파에 털썩 앉아서 달력을 들여다본다. 오늘 식목일은 청명과 겹치고, 낼은 한식, 다음은 음력으로 집는 삼짇날이다.

언제부터인가 시월상달의 시제는 봄으로 옮겨졌다. 음력 시월이면 눈 내리던 풍경일 때도 있었다. 시월 보름치는 ‘꾸어다’라도 한다 했던가? 보름께 올 눈비가 미리 올 때도 있었고, 바람까지 부는 언덕은 늘 추웠다. 나무들도 칼바람을 가려주지는 못했다. 음복이라고, 바깥에서 먹는 음식들은 다 식어 빠지고 말랐어도 유쾌하게들 먹었다. 밥은 그런대로 스티로폼박스에 보관해서 미지근하지만, 코펠 두 개로 끓여대도 국물을 데우기가 문제였다. 어떻거나 세월은 흐른다. 집안마다 어른들이 세상을 뜨시고 땅 속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차츰 세대가 바뀌니 참석자들이 점점 줄었다. 방식에서도 이것저것 원칙을 지키려는 뜻이 수그러들었다.

우선 축문을 한자로 쓰거나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한글로 써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어색해했다. 소지(燒紙)를 두고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축문을 잘 못 읽더라도 분축(焚祝)이 대신해주니까, 우리들 기원이 충분히 전달되라고 하는 것이제. 암, 연기와 그을음이 하늘 높이 오를수록 감응이 크시지요. 손바닥으로 축문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해가면서 소지를 생략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반대도 만만찮았다. 밭두렁에서만 산불이 비화되는 것 아니라고, 축문 태우다 산불 내는 것을 조상님들이 원할 것 같냐고. 축문을 못 태울 거면 쓰지도 읽지도 말라요 뭐요, 설마. 갑론을박에서는 매사에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이 결정권을 쥔다. 그래도 그쪽도 향불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절이 끝나면 향대 가득 생수를 부어 향을 끈다. 아예 불씨를 말린다, 아니 적신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좋은 일이다. 상차림도 완전히 간소화되어 주과포로 한정되었으니 따로 불 피울 일도 없다. 삼삼오오 차들로 나누어 타고 어느 식당에 가서 함께 점심을 나눈다. 이만하면 되었지, 조상님들도 우릴 기특하다 여길 것이네. 조상님들 아니라면 이리 모이기가 쉬운가. 옳은 말이다. 크게 나눌 것 없으니 다툴 것도 없는 일가들, 화기애애하다.

 

부엌은 아직 널브러져 있다. 아침 차리고 먹고 설거지, 점심 차리고 먹고 설거지, 저녁 차리고 먹고 설거지. 꼭 밥을 먹고 나면 그때야 오는 거지가 뭘까요? 답은 설거지! 며칠 전 라디오 영어방송에서 느닷없이 한국말 아재개그가 흘러나왔으니 웃을 밖에. 오늘은 그리 웃고 싶지 않다. 설거지하면서 벌써 다음 끼니 반찬 생각이라니, 무얼 먹을까. 무얼 먹을까. 무얼 먹을까. 무얼…….

삼짇날엔 진달래 화전이 얌전하다지만 맛은 여린 쑥을 따다 섞어서 찐 쑥떡이 일품이다. 내일 쑥떡이나 좀 해서 따라 나설까. 근년 들어서는 주과포라 해서 약식 시제를 드리니까 여자들이 음식에 매달리는 일은 사라졌다. 혹시 쑥떡을 하게 되면 오미자차나 보온통 하나 가득 담아가면 되겠지. 오지랖도! 뭣 하러 종일 부엌에 틀어박히나. 시키지도 않은 짓을 사서 할 것까지는 없지. 봄날을 즐기면 될 일이다.

 

봄은 4월이 되어야 봄 같다. 소프라노로 불리던 4월의 노래가 떠오른다, 4월의 시다.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하더니, 왜 또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라고 읊었을까. 이 행은 앞뒤가 맞지 않다. 내가 원래 시적 감흥력이 낮아서겠지만 이해가 잘 안 된다. 빛나는 꿈이 눈물어린 무지개가 된다!? 시인들을 시를 곧장 이해하기란 난수표 해독이나 다름없다. 세기의 시인이라는 한 시인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시간이라면서 4월을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 읊었을까. 100년쯤 흘러 먼 나라에서 막 피어나는 라일락 송이들을 몇 백 송이 째로 깊은 바다 속에 수장할 것을 미리 감지라도 했다는 말일까. 시인은 예언자도 신도 아닐 텐데.

아서라. 4월은 자연스럽게 무엇인가 움트는 시간임이 분명하다.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이란 긴 이름으로 4월을 부르는 인디언도 있다고 했다. 비슷한 다른 인디언들은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랬다지. 씨앗을 뿌리며 느끼는 기쁨만 한 것이 있을까. 내 손으로 뿌린 씨앗이 뭐였더라? 있기나 한가? 분꽃 몇 알? 먹을 것이 아닌 볼 것을 위한 씨앗이지만,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까만 씨앗에서 어찌 그리 예쁜 꽃이 피어날까. 경이롭다는 말은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을 보는 일에 쓰는 게 가장 적합하다. 게다가 꽃잎이라니! 유용성은 다음 일이다. 먹을 수 있는 것만 유용한 것도 아니다. 배가 불러도 불러도 불행한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 또한 배가 불러서 이러고 꼼짝 않고 앉아만 있는 것인지.

 

 

전화다. 집 전화다.

핸폰 왜 안 받아? 카톡도 안 보고!

안 받았어? 가만, 어딨더라? 충전기에 안 꽂혀 있는데 어딨나! 미안. 그런데 왜? 아침부터 급해서 전화야?

티비 안 보고 있냐고!

왜?

밤새, 아니 아침에도 티비 안 보냐고!

뭐, 산불 말야?

텔레비전을 켜니 불길이 아직도 훤하다. 무서우리만치 타고 있다. 밤새 손을 쓸 수 없었단다. 동 튼 지가 언제인데 여태도 못 잡았을까? 아니, 그 이상이다. 소나무 가지들이 송진으로 불타며 비화해서 100km를 날아갔단다. 설마 잘 못 들었나?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

은숙이, 은숙이 강릉 간 거 알지?

뭐야? 강릉엘? 지금 강릉엘?

그래, 어제 갔잖아. 케이티엑스 덕에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강릉 가서 여유 있게 점심 먹고 있다고 자랑질이더니. 오후엔 경포대 바다를 볼 거라고 하더니만.

이 봄날 무슨 바닷가.

바닷가 타령이 아니라니까. 강릉 일박이라고 했으니 이 불길 속에 강릉에 있었다는 말인데, 지금 연락이 안 된다니까.

호들갑이네. 그곳 사람들 집들이 문제지, 관광객들이야 빠져 나왔으면 된 것 아냐?

설마겠지만, 여자들만 갔다는데 일단 걱정이 되잖냐.

별일이야 있을라고.

하긴. 그런데 올케가 발언권이 세서 좋은 일도 있더라고. 그 집은 시누올케들만 남자들 다 떼어놓고 잘도 뭉치더라고. 해외도 가요, 며칠씩이나. 하긴 해외여행이야 어차피 여자들이 대세 아닌가. 남자들은 직장에 매어있는 동안에.

그러니 어쩌자고?

몰라 몰라. 그냥 연락이 안 되니까 여기 저기 돌리고 있지.

뉴스를 보면…….

친구가 불길 속인데 뉴스만 보고 있어? 매정하긴! 끊어!

성주는 전화를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급하게 돌아선다.

 

매정하긴! 그래, 매정하다. 나는 매정한 편이다.

남이 씨, 그렇게 매정한 사람 아니잖아.

아뇨, 나 매정해요. 인정머리 없고 매정한 사람, 그게 나예요.

매사에 이런 식이다. 내가 따뜻함 넘치는 푸근한 전업주부의 인상을 주지 못 함을 알고 있다. 지적인 커리어우먼도 아닌 것이 따뜻한 사람냄새도 없으니, 뭔지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미안하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 모두에게? 똑부, 똑게, 멍부, 멍게! 누가 그런 분류를 해 놓은 것인지. 멍게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멍청하고 게으르고. 공감하는 일조차도 멍하고 게으르니까.

게으르지 말자. 멍청한 건 못 고쳐도 게으름은 개선할 수 있겠지. 우선 설거지나 마저 끝내자. 점심은 굶자. 간단하다. 간단한 하루가 흐른다.

조용한 한낮이다. 넷플릭스 - 영화의 세상으로 가보자. 두 시간은 좋게 지나갈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영화이야기가 진지하게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 들었던 어떤 제목을 검색해 보았더니 아직 넷플릭스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제목들도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변형이라는데. 아니, 청소년 버전인 모양, 패스! 〈첫 키스만 50번째 〉- 뭐야, 기억상실증인가? 정말 그렇다네. 단기기억상실증으로 매일 만나는 남자를 매일 처음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의 이야기란다. 첫 키스? 사랑은 키스로 시작되는가? 그럼 나에게 사랑은 없는 것이다. 고개를 젓게 된다. 입맞춤이 그리 쉬운가. 그것이 사랑의 충분조건인지 모르겠지만 필수조건은 아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입맞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마땅하다.

 

조용해! 엘뤼아르가 말한다.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숯으로 불을 지피며/ 입맞춤으로 인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인간의 뜨거운 법이다.’

‘쇼드 르와’, 엘뤼아르님, 죄송합니다. ‘입맞춤’은 그냥 상징으로 쓴 거죠? 진짜 묻고 싶은 것, 물을 수 없는 것은 그 제목이다. ‘좋은 정의’라고? 좋지 않은 정의가 있다는 말인가요?

 

 

아차, 이건 아니다. 헛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대문 밖으로 나가자. 아스팔트를 조금만 걸으면 흙길도 나온다. 길이라기보다는 도로 아래 천변의 산책로에 오솔길만큼 흙길이 남아 있다. 치유로서의 흙길을 찾아보자. 맑고 따뜻한 봄 날씨라더니 변덕을 부린다. 빗방울 냄새가 난다. 벌써 빗소리가 들린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집으로 향한다. 천변으로 오르내리는 층계 근처에 노점상이 있다. 오징어튀김과 어묵이랑 떡볶이를 판다. 요샌 김밥도 있다. 봄날 어울리는 메뉴는 없다. 봄날엔 봄날엔 봄날엔……. 봄날에도 배는 고프다. 아침에 뭘 먹었더라? 지금은 몇 시나 되었을까. 오징어튀김과 어묵과 떡볶이를 보다가 김밥을 집어들고 들어왔다.

점심 거른다는 거짓말. 김치 통에서 큰 무쪽만 달랑 하나 꺼내서 김밥을 씹는다. 아, 역시 여러 가지 맛이 서로를 죽인다. 왜 김밥에는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들어갈까. 우엉김밥, 계란김밥 그런 것은 왜 없을까. 일본사람이 하는 초밥집에서 오이김밥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수십 개 메뉴 중에서 오이김밥을 주문했는데 정말 오이만 들어있었다. 일본어는 완전 깡통에 영어도 별로라서 겨우 큐컴버를 알아보고 시켰을 뿐인데, 너무 괜찮았다. 평소에 내가 김밥을 헤집고 속을 빼내면 함께 먹는 사람들이 으레 한마디씩 한다. 자장면이나 비빔밥을 비비지 않고 먹을 때도 더러 궁시렁댄다. 이렇게 혼밥이니 누가 나를 탓할 일은 없겠다. 이럴 거면 그냥 묵은 김치를 잘 씻어 물기를 빼고 햇반을 하나 덥혀서 김밥을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스민다.

 

톡! 은숙이다.

내 걱정했었다고? 미안. 강은숙 완전 무사함다. 서울서 온 팀들 따라서 어제 강릉 철수, 서울 가서 밤새 놀았지. 늦잠 자고 뭐 좀 먹고 톡 볼 시간이 어딨어.

됐다, 그만. 우리 모두 성주 등쌀에 괜스레 놀랬지 뭐.

성주 미안! 고맙고! 울나라 기차 엄청 대단해. 새벽에 눈 비비고 출발했지만, 서울서 아침 먹고 강릉서 점심이 상상이 돼? 경포대가 당일 된다니까!

옹심이 맛 워뗘?

메밀전병 먹고파.

마음대로 드쇼! 직접 가서 먹어보삼! 강릉역서 시티투어도 있더라. 10시 전에 강릉역 도착해야 하니 당일로는 불가. 2박3일 한번 가자. 오죽헌, 주문진수산시장, 도깨비 촬영한 해변가, 물론 정동진 포함. 제대로 못 보고 와서 서운타.

못 보고 나오길 천만다행이지. 불구덩이 속에서 어쩔 뻔!

아슬아슬하지도 않아? 거길 다시 갈 맘이 난겨? 언제 불똥이 날아올지 모르는 그곳엘?

이 불이 여름까지 계속 타고 있다고 하냐?

비화! 날아다니는 불! 그거 소나무라 더 그렇다네. 옛날에 불쏘시개로 송진을 썼잖아.

완전 벌거숭이라니, 새까만 숲, 상상이 안 돼.

암튼 벌거숭이 숲 보려고 관광객 밀릴 일은 없을 테니 한번 가자.

밀리긴. 관광지가 유지되려나 모르겠네. 웬만히 타버렸어야지.

그러니 더 가보자. 숲 말고, 시티투어도 말고, 경포대 가자니까.

누구 경포대 목매는 사람 있다냐?

한 두 사람 카톡에 따라 붙더니 곧 수다로 수선스러워진다.

나! 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친구들이 그때 그 옛날 일을 기억하고서 저러는 걸까. 강산이 서너 번 바뀌기 전 옛날이었다.

 

 

경포대로 갈 거다, 우린.

철없던 그때, 내게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이 경포대였다.

어딘데? 언제? 왜?

동해안 말이야, 여기선 꽤 먼 곳이라서 가보고 싶을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래사장이래. 1㎞도 넘는 해변을 거닐며…….

뭐야, 누구랑?

아니 뭐, 언젠가 결혼을 하면 말야.

결혼? 너 결혼 생각하는 누군가 있어? 그런 거야?

이 엉큼이 응큼이!

누구였더라, 날 막 때리는 시늉을 했었지…….

신혼여행을 경포대로? 꿈꿈스럽게 웬 동해바다야?

기껏? 신혼여행이면 제주도엘 가야지. 서귀포의 낭만을…….

아니, 대체 누구랑! 지금 장소가 문제가 아냐, 누구냐니까!

 

그때 벌써 우리는 전통과 서양이 뒤범벅되는 시절을 살고 있었다. 전통혼례는 촌스럽게 받아드려지고,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로망이었다. 명화극장에서 본 《졸업》에서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물론 도망은 아닌,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신랑과…….

우리는 《졸업》의 마지막 장면 때문에 유난히 개똥철학을 폈었다. 버스에 올라앉은 둘을 위한 테마음악이 ‘침묵’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그 애매모호한 표정 때문에, 그 불안한 눈빛 때문에. 하긴 젊음이란 개똥철학을 먹고 사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그 나름 새로운 출발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출발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변혁이다. 그럼에도 출발은 생각과는 다른 출발이기 십상이다. 나도 처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생각했었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출발을 했다. 경포대에서의 출발을 접었기 때문에 신혼여행지는 정 반대쪽 남쪽이었다. 마침 겨울이라서 남쪽이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그런데 밤새 눈이 많이 쌓였다. 남북을 관통하는 큰 도로에 차가 오르질 못해서 호텔 근처 정방폭포만 봤을 뿐 종일 호텔에서 어슬렁거렸다. 찬바람에도 해변을 거닐면서 경포대 바닷가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귀가 윙윙거렸다. 하늘이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남이 씨, 나남이 씨!

허겁지겁 나를 부축하여 일으키는 신랑을 밀치며 다시 한 번 고꾸라졌다. 호텔 로비 쪽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나를 긴 의자에 눕혔다. 그리고는 곧 얼굴 양쪽을 붙잡고 흔들었다. 제가 의삽니다, 신랑이고요. 걱정들 마십시오. 자, 비키세요. 사람들이 몇 모여들었는데, 제복을 입은 직원들도 있었던 것 같다. 괜찮습니다, 저리 좀 비키세요!

그렇게 곧 동서남북을 회복한 내가 어찌어찌 앉을 수 있게 되자 그때서야 사람들이 흩어졌다. 그렇게 더 얼마를 앉아있던 내게 그는 뜨거운 커피를 가져왔다. 괜찮은 거죠? 괜찮죠, 남이 씨?

 

괜찮은 거냐, 남아! 너 괜찮아? 너 정말 괜찮은 거냐고!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가슴이 떨려온다. 나는 정말 괜찮다! 나는 그때도 괜찮았고, 지금도 괜찮다. 그 뒤로도 어쩌다 이석증이 일어나 성가신 일이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나가면 흔적이 없으니까. 내가 처음 이석증을 일으킨 그날, 그 남쪽 바닷가에서 들은 소리들, 그런 소리들이 문제였었다.

남아, 춥지 않아? 우리 이 모래밭 끝자락에서 순비기나무꽃 찾아볼까? 중부 이남에 피는 꽃이라지만 난 꼭 경포대 바닷가에도 피는지 찾아보고 싶었단 말야.

왜 하필 순비기?

아니 뭐. 내한성, 내염성을 다 갖췄으니, 좀 춥더라도 이 바닷가에서도 살아있지 싶어서. 있더라도 잘 안 보여서 세심하게 찾아봐야 해. 회색빛 잔털에 벽자색 자잘한 꽃망울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얼른 눈에 띠지 않지. 꽃을 보려면 여름에 한 번 가자.

벽자색이 뭔데? 푸른 자색?

푸르스름한 회색빛. 푸르스름 보라스름 그런 회색.

보라스름이 다 뭐야! 응, 알겠어, 보라 냄새!

보라 냄새는 또 뭐야. 색깔에 무슨 냄새!

색깔마다 냄새가 왜 없어! 어떤 보라에서는 제비 꽃 냄새, 어떤 보라에서는…….

에이, 그거야 나도 알지. 핏빛에서는 피 냄새!

그만 해. 그건 아냐.

 

나는 정말 괜찮고, 순비기나무꽃을 찾던 선배도 괜찮을 것이다. 우린 경포대에 간 적도 없으니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입술을 살짝, 아주 살짝 스친 것만큼만 가까웠고, 입술을 아주 살짝 포갠 사이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다만 더는 누구와도 입술을 포갤 수 없는 것, 그것은 그냥 내 문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어느 두 사람 사이에서 입술을 포개는 것은 대단한 접촉인 것 같기도 하다. 입술이야말로 싱그러움과 관련된 어떤 신성한 곳이니까. 그에 비해 남녀의 접촉이라고 할 때 흔히 떠올리는 거기 그 곳은 생명의 창조와 관련된다 하더라도 적나라한 열기와 혼돈과…….

 

 

아이스 블루 톤이다. 톡이 아닌 전화소리다.

남이야, 나.

그래 은숙아, 왜? 톡 봤는데, 보고 있었어. 산불 용케 피했으니 잘 됐다 뭐.

남이야, 나.

뭐? 왜?

나, 누굴 슬쩍 본 것 같아.

누구를?

그 선배, 식물인간.

뭐라고? 선배를? 언제, 어떻게?

강릉에서지 어디야. 바닷가에서 나와서 감자옹심이 먹으러 가는 중에. 길에 지나가는 사람인데 왜 그리 닮았는지.

설마.

지나가는 모습이 틀림없었어. 옆의 사람이 귀에 올려대고 말을 하는데, 약간 오른 쪽으로 기우뚱 하고 그렇게 들으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그 뭔가 독특한 자세 있잖아.

시끄러, 잠시 지나가는 사람 모습을 보고 웬 옛날 생각을 해. 세월이 언젠데.

가슴이 덜커덩, 내가 왜 덜커덩이었는지, 암튼 틀림없었다니까. 애들 톡방엔 쉬쉬할게 염려 마.

 

 

약간 기우뚱 하고서…….

그랬다. 그는 그때 젊은 시절에도 약간 기우뚱 기울고서 걸었다. 키가 비쩍 커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다. 실루엣을 보면 피사의 사탑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가리켜 피사라고도 했다. 물론 식물인간이라고 돌려서 말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 시절 우린 참 너무나 순진해서 남자친구 이름들을 대놓고 부르지도 못했었다. 식물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뭔가 동물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는 화끈한 멋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또 그가 입만 벌리면 식물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식물 이야기. 나는 지금도 식물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지만, 식물 이야기는 널려있다. 『나무수업』이라는 책도 재밌다. 『동물 속의 인간』 보다 더 먼저 번역된 책이다. 둘 다 독일인들이 쓴 것이 흥미롭다. 아니, 둘 다 인간적 식물과 인간적 동물에 대해서 쓴 것이 더 흥미롭다. 동물만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나무들도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고 하는 부분은 우리 인간들처럼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을 넘는다. 경쟁하고 부대끼며 지혜를 발견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도 인간과 닮았다. 정말이냐고? 식물도 설마 그러냐고? 내가 식물 관련해서 책들을 다소 무조건 사 보는 습관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책들의 광고를 보면 그 식물인간이 저자일까 흠칫 놀라기도 하는 이 심정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무가 경쟁을 하는 것쯤은 우리들 감각으로도 안다. 햇빛은 중요한 경쟁대상이고, 햇빛 잘 드는 자리를 위해 다툼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다들 햇빛을 향해 키를 키우고, 햇빛 쪽으로 굽는다. 이태 전이던가 『나무수업』을 처음 읽었을 때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하다가 그때도 호들갑이란 핀잔을 들었다. 5월 초 학교 후문에서 만나 점심 먹고 캠퍼스 내를 산책하던 때였다.

 

아, 이 이팝나무들 좀 봐. 곧 전체가 하얀 천지가 되겠네. 아카시아도 곧 만발할 테니까. 감탄사는 대게 정인이가 시작한다.

그러게, 이건 팥배나무 아냐?

팥배건 콩배건, 난 정말 하얀 꽃들이 좋더라. 어쩜 이렇게 싱싱하게…….

나무도 영양분을 두고 친구들과도 적들과도 나눈대. 『나무수업』이란 책에서 봤어.

미쳤냐. 움직일 수도 없는 그놈들이 무엇을 나누고말고 해.

아니, 막 움 터서 자라나는 새끼들에게 직사광선을 가려주려는데, 옆의 나무들과 합세해서 큰 가지들로 가려준대. 지나친 햇빛을 막는 거라고. 너무 빨리 자라서 아무 것도 학습하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지. 겁 없이 막돼먹지 말고 느리게 자라기, 뭐 그런 것. 느리게 자란 놈들이 장수하는 거래.

말도 안 돼.

아스팔트 가로수들이 왜 빨리 죽냐면…….

죽냐면?

숲을 떠난 아이들은 말하자면 집 나온 아이들이래. 처음엔 햇빛도 마음대로 누리고 뿌리도 맘껏 뻗지. 그러나 곧 아스팔트 속 단단한 물질들에 길은 막히고, 살려면 하수도관이라도 뚫어야 할 지경이 돼. 하수도 뚫리면 도로는 범람하고. 몇 백 미터도 자랄 뿌리들인데 막혀서는, 참 불쌍도 하지. 우린 숲의 나무를 데려온 순간 그들을 고아에 장애자로 만드는 것이야.

야, 여기 인간적 인간 나셨네. 얘가 요새 점점 더해요.

왜 그래. 일리 있는 말이다야.

그렇지. 동물애호가들도 더 나아가 식물애호가가 되어야 해. 난 물론 이기적 동물이라서 겨우 내 몸 내 주변 관리도 잘 못하지만.

그러니까 나무들에게도 알맞은 삶의 형식이 있다는 말이지. 간단하네. 아스팔트로 끌려오지 말고, 그건 유배니까. 아니, 사람들 좋으라고 기쁨조 노예로 끌려온 거니까. 완벽한 흙, 적당한 온도와 수분을 갖춘 흙 속에서, 숲 속에서 사는 것이야. 가능하면 같은 종끼리 모여서. 그러니까 사회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완벽한 흙을 갖춘 진짜 숲에서 성장하는 거야. 언제 책 가져와 봐, 나도 좀 보자. 미선이 거들어줘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렇다니까. 그렇게 해서 터득한 생존 지식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뭐야, 식물들이 자녀교육까지?

아니란 법 있어? 나무의 자녀교육, 참 좋은 말이네. 나무답게 사는 법, 그런 책이 있을 법 하네. 바람소리로 전달되는 책이.

날아가라 날아가, 상상은 자유다!

상상 아니라니까. 숲 전문가, 동물 전문가들이 쓴 책이니까.

이 애가 아직도! 너 책을 100퍼센트 신뢰하는 거야? 까만 글씨면 무작정 모두 믿느냐고!

난 글씨를 믿는 편인가 보다. 까만 글씨, 인쇄되어진 말은 확실히 무겁다. 말은 다소 즉흥적으로 튀어나오니까 독이 묻어도 살짝 묻은 것이지만, 글은 다르다. 곰곰 생각했고, 썼고, 아마 다듬었고…….

 

 

나무들 일단 들여올까?

대문을 여다 말고 그이가 말만 먼저 들여보낸다.

어, 왔어요? 나무들 큰 거예요? 뭘 샀는데! 뭐가 되었건 들여오세요. 현관에 두든지 발코니에 내놓았다가 가져가야죠. 차 안에다 두면 불쌍해.

그런 남이 씬 불쌍찮게 집밖에 나갔나요? 오늘도 집안에만 있었어?

그냥 좀. 빗방울 때문에.

그렇다니까. 사람이 바깥바람을 쐬야, 통풍이 돼야……. 내 무서운 말 한번 할까? 외로움은 치매의 지름 길이예요!

치이!

미안, 미안. 여기 봐요, 자잘한 것 두 종류. 둥근 측백, 이것들은 양쪽 앞 쪽으로 심을까 해서 둘. 또 배롱나무가 좋을 거래서 하나 샀네, 자손들이 우애를 한다나 뭐라나. 장소가 아직 마땅치는 않지만, 낼 보고서 심으면 되겠지.

배롱나무는! 가로수로 널려 있는 게 배롱나무들 아녜요? 새삼스럽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대충 씻고 와요! 저녁이 좀 늦었네요.

아무래도 나무들 고르다 보니까.

반찬은 밖에서 장만해 왔으니 걱정 없네요.

내가? 내가 반찬 장만을?

예, 울 할머니가 ‘가만 있거라, 반찬 장만해서 먹자’ 그러시면, 좀 기다렸다 시장하거든 먹자는 말씀이셨거든요. 실은 아버지 기다리시면서.

그런가. 시장이 반찬이다, 그 말이군. 그런데, 와우, 이 부추전! 이런 거면 배가 안 고파도 맛이 넘치겠네요. 물오징어에 알새우까지 넣어주니 입이 호강이군. 내가 오늘도 뭘 그리 잘 살았나!

애 많이 쓰셨죠! 환자 보는 의사님들 모두.

감기 환자들 기침 냄새 가래 냄새 맡고……. 이런 말은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그런 생각만으로 난 벌써 음식이 목에 걸린다. 애를 써서 먹을 양식을 버는 일이 짠하다. 남편 뿐 아니라 세상 누구나 다 짠하다. 먹을 것을 벌어야 하는 숙명이라니!

 

대강 치우고 앉으니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활활 타고 있다.

속초 의료원 큰 일 날 뻔 했더만. 세상엔 괜찮은 사람들이 더 많아. 지성으로 환자 대피시키고 보호하고.

어쩌냐. 숲이 저렇게 완전히 타버리면 개미가 돌아오는 데에도 13년이 걸린다네요.

그러게나. 그런데, 개미? 개미라고? 남이 씨 개미 무서워하지 않았어?

무서워하기까지는. 예, 개미 무섭죠. 어딘가로 옷 속으로 스며들 것 같은 느낌. 스멀스멀, 그래서 숲 속에 잘 안 가죠.

안 가기는, 아예 못 가지. 우리 그러니까 숲 속에 가 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숲 속은! 숲 속에 꼭 함께 가야되는 것도 아닌데 왜 안 가시고 그러시나?

아, 나야 가죠. 더러 가 봤죠. 남이 씨랑 숲 속에 함께 갈 수 있을지 이제부터 희망을 가져도 되나 싶어, 반가워서 하는 소리지. 가까운 축령산 편백 숲이라도 함께 가는 거요! 점심 먹고 거기 가면 피톤치드 확확 뿜어져 나오는 시간이니까 딱 좋을 텐데. 40킬로쯤인가, 한 시간도 안 걸려. 개미 무서우면, 가자마자 비닐천막 깔개를 넓게 깔고 삥 둘러서 모기 진드기 약을 뿌리면…….

아서요. 누가 개미 무서워 안 간다고 했나요.

그럼 왜?

 

새삼스럽다. 내가 숲을 피한다는 생각을 왜 할까. 산소에 갈 일 있으면 대강 따라 가는 편이다. 그러니까 일이 있으면 간다. 숲이나 밭이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흙속에는 작은 동식물들이 섞여있는데, 그것들에 가끔 놀란다. ‘나방이나 채소밭의 상추도 밤에 달을 쳐다보면서 어쩌면 꿈을 꿀 지도 모른다’ 비슷한 말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렇게 꿈꾸는 상추를 밟기도 하고 뽑아서 먹기까지 하면서 나방 애벌레를 보면 무섭다. 사람, 아니 어떤 위협적 생물의 발자국을 느끼면 동그랗게 몸을 말고서 도망가는 작은 생명들, 어쩌다가 으깨어져 뒹구는 물컹한 어떤 것들이 무섭다. 나를 해칠까 봐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바뀌었을 상황이 생각나면서 무서운 것이다. 나는 너를 무심코 밟았고, 어쩌면 내가 너였을 수 있고, 그런 것 말이다. 동물들과는 동일시가 되나 보다. 그러니까 생명이 무섭다. 곧 또는 조만간 손상되거나 사라질 생명이 무서운 존재다.

남이 씨, 나남이 씨!

응, 예.

올봄엔 정말 숲에 한번 갑시다. 아스팔트로 계속 달리다가 잠깐 숲에 들어가는 건데 못 갈 것 없겠죠? 쌍계사 벚꽃 길을 섬진강 따라서 종일 걷는 사람들도 있대요. 우린 그냥 어디로든 30분만 걷다가 딱 뒤로 돌아 하고 오면 될 텐데.

그렇게 유명한 델 어찌 가려고요. 꽃구경은커녕 사람들에 떠밀리고.

사람 참. 사람이 사람 속에 섞이지 그럼 코끼리 사이에 섞일 테요?

철새 따라 섞이지, 날 수만 있다면.

철새라고? 철새라!

아니, 만일 우리가 어딘가 다른 동물 그런 데 섞일 수 있다면, 그런 상상이라도 해본다면, 새가 낫죠. 것도 철 따라 이동하는 철새가.

웬 철새 찬양!

지금이 철새 대이동 시기니까 서해안에 가면 엄청난 새들을 볼 수 있다던데. 우리나라 새들이 500종이면 텃새는 100종류도 안 되고.

어, 거의가 다 철새네!

왜 철새들은 이 시기엔 북쪽으로만 나는지. 두루미 기러기는 벌써 시베리아로 떠나고, 어떤 놈들은 일단 우리나라에 들렀다가 시베리아까지 올라갈 것이고. 삼짇날이니 제비도 남쪽에서 올라오겠네. 바다제비며 슴새들 번식지도 따로 있대요, 가거도. 이름도 예쁜 가거도에.

남이 씨, 참. 워낙 방콕이 취미인 사람이라 철새 같은 건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네요.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모르는 것이…….

그거야, 사람이 변해서죠. 누구라도 변하죠. 할 일 없이 앉아서, 뜸부기다 뭐다 노랫말 때문에, 아니면 시 같은 데에서 귀에 익은 새 이름들 찾아보다가. 그런데 난 파랑새가 진짜 새인 줄도 몰랐다니까요. 파랑새는 그냥 상징으로, 파란 꿈에 대한 상징 같은 것으로 알았죠.

직박구리 그 이름을 찾느라고 온갖 새 이름을 뒤졌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다. 새 울음소리 때문에 내 생전 처음 듣는 청혼을 흘려들었다고, 아니, 새 울음소리를 핑계로 청혼을 흘려들었노라고, 그것을 누구에게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난 정말 못 들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만 듣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키 큰 은목서 위의 그놈들은 직박구리였다. 내 첫 이별의 자리에 함께했던 새, 새 이름을 뭣 하러 애써 찾았는지, 누가 알랴. ‘훌우룩 빗죽새’라고도 불리는 시끄러운 직박구리, 그 울음소리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우리 남이 씨, 나는 한 마리 파랑새 되어 저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파~ 그런 것이네.

뭐예요. 그 노랫말을 어떻게?

어떻게 외우냐고? 남이 씨 노래인데, 당근 나도 외우지. 사랑한 것은 너의 그림자, 지금은 사라진 사랑의 그림자~.

무슨 내 노래가 있고 그런가.

그러게 말도 안 되는 소릴 왜 해요. 날 수 있다면 철새 따라간다는 소리는 뭣 하러. 죽었다 깨나도 사람이 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뭐. 찹쌀이 있으면 팥을 빌어다 찰밥을 해먹을 텐데 시루가 있어야지, 그런다잖아요.

뭐예요? 찹쌀도 시루도 암 것도 없다고? 우리 말 참 재밌네. 옛날이야기들엔 밥 타령이 많아.

좋아요, 말 나온 김에 찰밥을 찌죠. 낼 찰밥 해서 따라갈게요, 산소에.

어, 정말? 웬 찰밥! 여럿 먹이려면 남이 씨 힘들 텐데.

맛으로 나눠 먹을 것 좀 하는걸요. 다른 건 잘 못해도 찰밥 찌는 건 쉬워요. 찹쌀도 팥도 시루도 다 있는데요 뭐.

어마무시 고마워요!

낼 몇 시에 출발? 10시쯤 나갈 거죠? 그럼 시간 충분해요. 가만 나물 감이…….

혼잣말을 하면서 다시 부엌으로 향한다.

 

오늘 밤은 길어질 것이고, 그런대로 시간이 잘 갈 것 같다. 곡식들 꺼내려 뒤편 발코니로 나가 밖을 본다. 살짝 내리던 비는 멎었고 바람이 살랑거린다. 나무 잎들도 살랑거린다. 여전히 비를 품은 냄새일까. 낼 산소 가는 일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비가 내려야한다면 비가 내려야 한다. 먼 데 불을 끄기 위해서라면 우리도 비를 맞자.

그 땅의 나무들은 언제나 돌아오려나. 개미들 돌아오고 나서도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새들이 날아든다는데, 나무들은 또 몇 년을 더 기다려야 움터서 자랄 것인지. 그렇게 새로 자란 나무들을 보게 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은 느릿느릿 저절로 자라나서 하늘을 가리도록 무성한 잎들을 낼 것이다. 누군가가 숨죽이고 자신들을 기다렸을 것일랑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훗날 새파란 아기들이 태어나면 그들 선조가 겪은 대재난을 이야기해주려나.

얘들아, 세상엔 피할 수 없는 재앙도 있는 법이란다. 불이라는 게 비화하면 우리 나무들은 속수무책으로 타버린단다. 다만 그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는 기적을 꿈꾸는 거야. 어째도 꿈은 꾸는 거야. 살 떨리는 긴 기다림으로, 후훗, 살 한 점 남아있지도 않았지. 그래도 흙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는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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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고문학 2019, 5호, 222~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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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9. 8. 26. 11:08

누수

누수 때문에 이 난리다. 우리 발코니의 누수가 아래층 발코니 천정을 망치고 있단다. 페인트를 망가뜨리고 이러저러 피해가 났다고, 방수공사를 해달라는 당당한 요청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나는 기껏 누군가의 1㎡ 공간에서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 값이 누군가가 소유한 1㎡의 값이라니 분통이 터지다가도, 아냐, 이건 기적이야, 하는 생각을 한다. 내 키가 크진 않지만 1m 보다는 2m쪽에 가까우니, 그 금싸라기 1㎡를 갖는 것보다 이만한 아파트를 갖게 된 것이 그나마 요행 아닌가. 문제는 닭장이나 진배없는 이런 아파트에 살다보면 공동생활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 점이다. 층간소음은 기본이다. 애들은 뛰게 마련이고, 윗집에서 옛날식 제사라도 드리는 날이면 도마소리 그릇소리 밤중까지 한낮이다. 그뿐이랴. 고요한 밤중에 들리는 너무 세밀한 화장실 소리는 산다는 일에 비참함을 더한다. 노랫말에 나오는 언덕위의 하얀 집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곳에 괜찮은 주택을 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줄 안다. 알면서도 비참한 것을 어쩌랴. 상황에 알맞게 구부러져야 산다, 쯤은 알게 되는 세월을 살았다. 나는 밤중에 화장실에 가게 되면 일단 수도꼭지를 세게 틀어놓아서 누군가의 귀에 들릴지도 모를 적나라한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누군가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나에 대한 예의다. 시답잖은 말인가. 아무튼 내 요상한 귀는 못 듣는 것이 많으면서도 한밤중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흘리지 않고 잘도 듣는다.

그만한 층간소음 쯤은 일상이다. 일상의 흐림은 폭우 쏟는 태풍처럼 밀려오는 누수문제와 비길 바가 못 된다. 윗집의 누수는 시간적으로 다툴 문제는 아니다. 참아가면서 기회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랫집에서 점잖게 혹은 점잖지도 않게 클레임이 들어오면 용서가 없다. 꼭 우리 집 문제만이 아니죠. 그냥 두면 아파트 전체에 균열이 번질까 봐서……. 이런 이타적인 언동에 무슨 수로 맞서랴. 당장에라도 발코니의 살림들을 꺼내고 방수공사를 해야 한다. 한 해 걸러 앞뒤 발코니 공사다. 지난 번 뒤쪽 발코니 때는 누수 원인과 상태를 전문가의 말로 들었을 때 사실 놀랐다. 소금이 범인이라니! 묵히는 소금가마니에서 염분이 흘러내려 차츰 시멘트를 부식시켰고, 그러 인해 상당한 누수가 진행되었다 했다. 발견이 다행인 셈이었다. 치울 살림들도 장독대 몇 개와 선반들에 보관하는 곡물들, 빈 통들 등 어수선한 물건들 정도였다. 이번엔 다르다. 앞쪽에도 햇빛이 필요한 장독대들이 있고, 문제는 가히 영국풍 정원이라 할 얽히고설킨 화분들 때문이었다. 천정에 닿아서 이미 비뚤게 올라가는 선인장들은 수도 없고, 물론 한 사람의 힘으로는 움쩍도 못할 종려나무 분이며, 넝쿨장미에, 세상에 시누대나무까지. 자잘한 분들도 그 숫자로는 사람 손을 타게 마련이다. 지난 번 공사도 했던 업자 양반이 물건 치우고 들이는 것도 맡아 해주겠단다. 낮 동안엔 나 혼자 뿐인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도 아는 때문이리라.

점심 먹으러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기색이다.

커피 드셔야죠? 설탕은 어떻게요?

아무 거나 주시쇼. 다달하면 더 좋지라.

서둘러 단감도 몇 개 깎아낸다.

밥 막 묵었는디라.

어쩌가니. 아따, 근디 싱싱허요이.

보쇼, 화분 내놔붕께 베란다 엄청이나 넚소이. 저짝 끝에 하나 이짝 끝에 하나 침대도 놓겄구만이라.

텀턱스럽네.

아니 진짜여. 보쇼. 이라고 넓은 베란다 봤소? 그나 저 화분들 다 디려놓지 말고 이라고 훤허게 사시쇼.

먼 감놔라 배놔란가. 나중에 양주 간에 헐 일로 가지고서는.

그려 언능 해불게 시작협시다.

아무도 발코니라고 하지 않고 베란다라고 말한다. 사장부터 그러니까 그럴 게다. 주택공사의 설명으로는 아파트엔 베란다가 없는데……. 이런 따위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소통이면 그만이다.

우리가 발코니를 확장해서 발코니가 넓은 건 아니다. 반대로 발코니를 거실로 집어넣지 않아서 발코니가 넓은 것이다. ‘발코니 확장’은 옵션인데, 우린 그냥 발코니를 유지하기로 했다. 거실이 발코니까지 확대되어 훤히 비치는 유리창 하나로 바깥과 구분된다는 것은 아찔한 느낌이었다. 옛날 집들은 문풍지 하나로 바깥과 구분 되었지만, 창호지는 뭔가를 가려주는 맛이 있었고, 마루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방과 마당의 사이였다. 발코니 유리창 밖은 말 그대로 허공이라서, 공기가 주인인 곳, 나랑은 아무 관련도 없는 곳이었다. 발코니는 일단 완충지가 되어준다. 전체적으로 사용 공간이 좁더라도 안정감을 더해준다면 그 편이 좋을 성 싶었다.

그건 그렇고. 왜 햇빛 잘 드는 앞 발코니에서 누수가 생기는 것일까. 웬만한 습기는 하루해가 말릴 것 아닌가. 하기는, 화분들 속의 흙이 머금고 있는 습기들이 바닥을 스물 네 시간 습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화분과 화분 사이들도 늘 물기에 젖어있기 마련이다. 뒤 발코니 누수의 범인은 소금이었고, 이번에는 흙인가 보다. 흙은 물기를 품고 있어서 탈이고, 염분은 그 자체로서 시멘트를 녹인다. 물리 화학이다. 사는 것이 과학이다.

발코니가 없었으면 화분들도 없었고 누수도 없었다, 라는 말이 되나? 모르겠다. 거실로 확장되었더라면 거실에 화분들이 있었을 것이고, 거실에서 누수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실은 난방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의 누수는 스미거나 말랐을 것이다. 모르겠다.

오늘로는 다 혔소.

어, 빨리 끝내셨네요.

방수 처리허기 그거는 기중 쉽소. 요고 방수제 잘 되야라.

아 그래도 낼 내가 한 번 더 입혀야쓰제요.

낼 또 하세요?

낼은 나 혼자 와서 살짝 한번 볼라부러야제라.

그럼 타일은 언제?

그거야 이삼일 재와야 방수가 지대로 되니께로. 연락 디리께요.

우르르 사람들이 나갔다. 거실은 여전히 마당 다름없다. 문에서 앞 발코니로 기역자로 깔아놓은 은박지 통로는 흙투성이 발자국 그대로이고, 화분을 대강 들여놓은 저쪽 끝 방까지도 여전히 임시변통으로 깔아져있는 은박지 위가 지저분하다. 지저분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모자라다. 집 안에서 신발로 다니는 길과 슬리퍼로 혹은 맨발로 다니는 길이 어떻게 구분될까. 앞으로도 며칠을 더.

옛날엔 흙길 밟기가 일쑤였다. 아주 어려선 댓돌만 내려가면 그대로 흙이었다. 아니 신발 속이 흙 그대로인 어른들도 있었다. 속에 지푸라기 같은 것이며 흙모래가 들어간 신발을 벗어 놓고 샘가에서 찬물에 발을 씻던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미역 짐인지 뭔가를 한 짐 이고지고 팔러 다니는 행상이었는데, 아무튼 뭔가를 가지고 집에 가끔 들리곤 했었다. 마루 끝에 걸린 밥 바구니를 내려서 그럭저럭 나그네 밥상에서 한술 뜨고 나면 대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데, 애어른 할 것 없이 넋 놓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내 팔자 어느 세월에 비단길로 다녀볼이거나…….

그때 우리는 어렸고, 길은 길인데 흙길이니 비단길이니 하는 말이 애매하게만 느껴졌다. 비단이라고 하면 할머니 치마 지어 입으신 그런 비단일 텐데, 누가 그런 비단으로 길을 만들까 의아했었다. 그런 길이 있기나 할까. 어떻게 비단으로 길을 만들까. 비단신으로 걷는다 해도 곧 찢어질 텐데. 비단신이라는 것도 아장거리는 아이들에게 방안에서 걷게 신겨주는 장식품으로 밖에 생각이 안 되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의 아스팔트를 제외하면 길이란 원래 흙길이었다. 길은 흙이었다. 누가 비포장도로라는 말을 하면 나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필요에 따라서 포장 했으면 포장도로이겠지만, 비포장도로라고 하면 그것도 포장되어야한다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 왜 꼭 다 포장해야 하는가. 길은 원래 흙인데, 왜 어둡고 힘든 길을 흙길이라 비유할까. 요즘에는 흙길과 대비되는 말이 비단길이 아니라 꽃길이다. 내 아가, 꽃길만 걸어라! 모든 부모들의 소원이다. 순탄하고 순조로운 경로를, 평안하고 행복한 길을 살아 가거라!

행복한 - 행복이 뭘까. 심심하면 하는 버릇대로 ‘행복’을 검색해 보려다가 서점을 찾아본다. 행복이라……『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라니. 애매해서 눈에 띤다. 행복하면서 동시에 불행한 사람? 책의 부피를 보니 곧 외면할 마음이 생긴다. 1,000쪽이 넘는 책을 무슨 수로 읽나. 이런 건 폭력적이다. 어라, 『나는 행복한 불량품이다』라는 얼핏 매력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 행복한 성공작품이라야 최상이겠지. 성공해도 불행할 수도 있으며 성공하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아편서인가? 아차, 나는 행복하지도 않은 불량품이라면? 행불행과 성공여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라면, 이런 것도 사절이다.

행불행의 피안이라고? 그건 못된다. 소확행이란 유행어를 듣고도 화가 나는 심보인데 뭐. 따뜻한 빵을 찢어 먹는 행복,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는 행복? 그게 무슨 행복인가. 잠시의 기분 좋음, 더러 안락함 정도가 행복일 수는 없다. 그건 어쩌면 마약이나 다름없다.

내가 왜 열을 내느냐고? 나를 위해서는 아니다. 젊음을 위해서다. 내가 젊을 때 그리 야망을 갖진 못했었다. 그건 성격 문제였을 것이다. 작은 온실에서 자라면서, 개성도 없고, 못 났으니까. ‘멍게’ - 그래서 놓쳤다. 나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삶을 놓쳤다. 마음에 있었던, 마음에 있었을 사람을 놓아버렸다. 겁이 나서. 그의 청각장애가 무서웠다고 변명하면서 살아왔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생각하고 살아왔다.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누수, 누수가 두려웠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가 새어나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선배가 청각장애라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을, 그에게 묻어있을 어떤 것들이 두려웠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 그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와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있는 뒷모습은 생경했다. 해는 저물고…….

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는 터부였다. 나는 질투 같은 단어를 저열하다고 생각하고 증오했으므로, 선배가 어느 다른 여학생 또는 남학생 선배 또는 후배와 단둘이 앉아있는 장면을 목격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각각의 대화는 다를 것이라고 상상하고 그렇게 믿었다. 나랑은 식물이 거의 전부다. 한번은 우연히 대학생과 노동자의 독서량에 관해서 말이 튀어 나왔을 때 얼른 회피한 쪽은 나였다. 나는 물론 안 들은 것까지도 다 듣는 귀를 가졌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기도 했다.

너희는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가까워진 선배로부터 시각교정용 독서를 권유받는 거야. 여학생들은 조금 덜한가?

…….

시각을 교정한다니까. 그런데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독서량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해? 아냐. 노동자들, 월소득 5만 원 이하를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라 치자, 이 저소득층 노동자 40퍼센트가 독서를 즐긴다는 거야. 취미 독서가 30퍼센트. 전문서적과 문학작품을 읽는 것도 20퍼센트씩이야. 독서를 통해서 스스로 여타 노동자와는 다른, 소위 교양을 갖춘 인간임을 상상하고 믿는 것이지. 하긴 텔레비전이 게까지 보급되지도 않았었고.

…….

무반응인 내게 선배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가져다주었다.

이건 읽어봐야 할 거야. 교양 아냐!

제목은 동화나 환상소설 같았다. 책을 읽어나가자 곧 무거운 마음이었다. 낙원구 행복동 사람들이라니! 주택개량 사업 지구로 선정된 동네. 자진철거를 하지 않으면 강제철거 당해야 하는, 그러고도 철거비용까지 물어야 하는 기막힌 약자들의 이야기였다. 철거 현장의 비애. 초라한 밥상이 끝나기를 못 기다리고 들이닥치는 철거반원들이 더욱 초라하다. 그들 또한 상황이 열악하지는 낙원구 행복동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일 사람들인데, 권력의 하수인인 동안에는 착각 속에서 권력자가 된다.

예상은 했었지만, 내용이 너무도 무거웠다. 다만 울고 싶어졌다.

다 못 읽었어, 그만 읽을래. 다른 사람들 빌려 줘.

그때 선배에게는 다 읽지 않았다고 둘러댔었다. 말하기가 싫었으니까. 선배가 책들을 여럿에게 빌려주기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선배가 풀밭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S교육인 것도 알고 있었다. 누가 내게 슬쩍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S가 무슨 약자인지는 알지? 말할 수 없는 그것!’이라고 하면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육하는 선배들이 S라고 알고서 후배들에게 일대일로 교육하는 내용들이 ‘실은 꽁이야, 더 상부 지도부에서는 그리 알고 있는 거야.’라고 자못 조용히 일러주기도 했었다. 바로 일 년 위 고교선배였는데, 자기 오빠도 그런 일을 하니까 안다고,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대단?

대단하지 그럼. 도시빈민의 참상과 좌절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운동인데.

고리를 끊어? 그래도 다소 폭력적인…….

아서, 잊어라.

분신자살 같은…….

잊으라니까.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폭력이라는 이해가 쉽진 않지. 드라마 속의 말이지만, 폭력만이 도움이 된다고 했어,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뭐야?

잊으라니까. 넌 잊어.

고리가 끊겼나?

최근까지도 난쟁이 동네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신도시 계획을,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표한 이래, 설왕설래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좋자고 하는 일이니 당연히 기대하고 반기는 쪽이 있겠지만, 그 반대도 있다. 만일 그린벨트 지역에 신도시가 들어서게 되면 녹지만 없어질 뿐 기존 주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개발될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농민이며 영세한 가구들이 그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문제란다. 우리보다 어디로 가라고 하남요! 몇 억씩 갖고 새 아파트 못 산다고 아우성치는 젊은이들이 어째서 불쌍한가, 지어 준다 해도 못 사는 우리가 더 불쌍하제. 그런 말들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지나간다.

노후 아파트 단지 재개발의 경우에도 입주권만 가지고서는 새 아파트에 입주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상당수라는데……. 그러니까 행복동의 고리가 끊어 졌는가 말이다.

아니다. 아닌 것 같다. 동네 저쪽에도 아주 쇠락한 5층짜리 아파트에 내로라하는 건설의 재개발 조합원 모집 어쩌고 현수막이 걸린 지 오래다. 색이 바랄 지경이다. 그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온 적이 있다.

징혀, 열 두 집인가는 절대로 도장을 안 찍는다잫아.

열 두 집이 아니라 스물 두 집이라여. 이백 세대가 고 사람들 땜시에…….

꼭 그렇게 말할 거는 못 되제. 우리야 어찌다 봉게 고 돈이 됭게 말이제만. 아무케도 아들 덕이제. 근디 아조 노인들도 있잖여, 자석들도 노인들일 턴디.

그렇기는 허지. 놈의 집 아닌게로 이대로 살다 가먼 된다, 그러고 사는 양반들도 있겄제.

새로 입주권을 통째로 준다고 안 혔냐. 일원 한 장 더 안 보태고.

근디, 그 말이 사실일까. 쪼까 걱정도 되고이.

사람 참, 준다고 혔으니 주제이. 우리라도 흔들리지 말장게.

잘은 몰라도 재개발이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라 했다. 조합인지 건설사인지에서 주겠다는 보조금 보다 조금 더 얹어 입주권을 팔게 되는 사람들이 꼭 나온다 하니까.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가나. 만일 오늘도 그렇다면 1978년의 아버지 ‘난장이’는 지금도 어디선가 굴뚝 위에 올라가서 죽는 것일까. 40년 세월, 강산이 네 번 바뀌어도 고착된 틀은 그대로다. 행여 더욱 견고해진 것은 아닐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이 200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을 때, 이어서 출간 30년엔가, 작가의 인터뷰가 특이했다. 소설가로서의 보람과는 무관한 말이었다. 아직도 그 책의 내용에 공감해야 하는 현실이 괴롭다고. 그 비슷한 말로. 내 말이. 세상이 어떻게 한 발도 더 나아지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 소설가는 요샌 뭘 쓰나? 세상이 여전히 똑 같다면?

유명 소설가를 내가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 자신이 한심하다. 오늘 누수공사를 시작했으니 아직 며칠을 더 매달려야 한다. 집은 먼지투성이인데, 청소는 않고 옛 생각에 잠기다니. 하긴 바로 그 누수라는 단어 때문인 걸 어쩌나.

누수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내 인생 말이다. 청혼을 흘려들은 것은 귀나 청력 때문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었을 누수가 내 머리를 적시어갔고, 마음까지 견고함을 잃었을 것이다. 선배가 단순한 교양 교육이 아닌 S교육을 담당하는 대단한 사람임을 알게 된 순간이었을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 실은 두려웠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막연하게 작은 삶과 작은 행복을 꿈꾸었었다. 요즈음 말로 소확행이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행 어쩌고 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선다. 삶은 소확행으로 재단되어서는 아니되는 무엇이다. 살만큼 살고 보니 그렇다. 우리 아버지 보다 더 오래 살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강아지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의 무릎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는 소확행이 괜찮은 가치일는지 모른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버렸으니까. 야생의 개와 고양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반려동물 말이다. 만일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생을 가치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구조의 신에게 소유되어버렸다는 뜻이 된다. 현상의 구조 앞에 무릎을 꿇었거나 외면한다는 말이다. 이 구조는 외면한다고 해도 거기 그대로 버티고 있을 것이고 더욱 강해 질 것이다. 그들이 이 구조에 굴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나면 너무 허무할 뿐이라고, 너무 허무해서 감당하기 힘든 노년을 맞게 된다고. 노인이라고 해서 시시함과 허무함을 다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아차, 이 난리 통에 혼났겠네요, 남이 씨.

그이가 현관문을 열면서 뱉는 소리다. 신발을 벗을까 말까 어리둥절해 한다.

마침 수요일이었다. 수요일엔 신경과 유 원장이 오후 진료를 쉬고 교회 일을 보기 때문에 이비인후과 유 원장도 일찍 귀가하는 날이 많다.

거기선 그냥 신고 들어와요. 화분들 좀 보고, 이쪽으로 오면서 벗으면 되죠.

와, 남이 씨 청소 제대로 못해서 어쩌나. 이제 좀 잘 참으시나? 그런데 화분들 다들 괜찮겠지? 키가 큰 놈들 옮기느라 엄청 고생했겠네. 아니, 이건 비뚜로…….

거야 거실 천정에 닿을 거라서 그렇게 놔 둔거죠. 목을 자를 수도 없고.

이 가시들은…….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그렇게 놓아두는 수밖에. 저것들 다시 다 들여놓을 거냐고 아저씨들이 걱정들이던데요, 뭐.

웬 걱정들! 남이사.

그냥 할 말 없으니 하는 소리들이죠.

그러게. 나 씻을게요. 오늘따라 새삼 집밥이 그립네. 점심 메뉴가 카레였거든. 난 아무래도 조선밥 체질이라.

식탁으로 오는 그이의 손에 책이 하나 들려 있다.

배고프다면서요.

으응, 밥 먹고 읽으려고. 신경과 유박 말야,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어. 이번엔 『동물 안의 인간』 그런 책인데 왜 동물들이 생각, 감정, 행동에서 우리랑 비슷한지 그걸 쓴 거야.

아, 시원 상큼하다.

연분홍빛 물김치를 들이키면서 그가 심하게 너스레를 떤다.

이건 또, 구이보다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부추가 편육에 어울리는 것 그런 걸 여자들은 어떻게 알죠?

새 밥도 못 했는데 뭘 그래요.

아, 무슨. 이렇게 메인이 훌륭하면 새 밥 아니면 어때서. 새 밥 했으면 많아서 못 먹죠.

먹는 것 마다 칭찬하는 것은 외교일까 작전일까. 그냥 생활인가 싶다. 공동생활의 노하우 같은 것일 게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머리를 장악하고 있는 화제가 터져 나오기 십상이다.

글쎄, 쥐가 사람 뺨친다네. 전기충격을 받은 다른 쥐를 보면 보는 것만으로 그대로 얼어붙어버린다잖아.

단순히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실험에선 그렇대. 암튼 쥐에게도 공감능력이 있다는 말이지.

쥐에게만 있나 보죠.

무슨 말이 그래요?

인간에게, 현대인에게 그런 공감능력이 있나?

대개는 있지요, 남이 씨, 왜 그렇게 까칠하세요!

아니, 쥐는커녕 파충류만도 못한 경우가 하도 많아서.

뭘 그렇게 평가절하하시나. 인지기능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은 인간 고유의 뇌기능이랍니다.

인지기능이 딱히 뭔데요?

가만 있자, 어째 구두시험 보는 느낌이네요. 보자, 인지라면 지식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이니까……, 에이 관두고. 암튼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대뇌피질이라는 것인데, 그 신경세포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나 가? 140억이래, 믿거나 말거나.

그만, 그만. 인간도 동물이라면서 또 동물과 엄청 다르다니. 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소리 안 들려요?

아프면 그만 둘게, 질문을 하지 말던지. 머리 아픈 소리가 다 뭔데, 참!

머리 아픈 소리, 우지끈.

소리가 들려요? 상상력도.

동물 먹으면서 이야기까지 동물 하지 말죠. 소화 잘 되게.

동물 이야기로 소화 걸리는 우리 남이 씨, 어째야 좋을까.

내 저녁밥이 끝나고, 그러니까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치고서 소파에 앉자 그이가 계속한다.

것 참 대단하네. 인간과 동물의 같은 점이, 아니 같다네 뭐. 기뻐하고 화내고 하는 것도 몸과 머리 반응이 인간과 완전 같다네.

그렇겠죠. 인간이 포유류니까요, 뭐.

포유류가 감정이입 능력은 물론 학습도 하고 의사소통을 한다는 건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 맙소사, 트릭을 쓰기도 한다네. 맘에든 암컷과 짝짓기 하기 위해서 대장을 따돌리는 협동이라니, 약한 놈들이 그렇게 상부상조도 하고. 심지어 개성도 있고, 똑부와 멍게 그런 차이가 있는 거래, 첨부터 개성이래. 또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니, 동물의 인간성, 이상한 말인가?

개성이요? 인간성도? 감정이입을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거야 그러겠네요. 개들의 감정이입능력 대단하잖아요. 주인의 무덤을 7년을 지켰다던가 뭐 그런.

그 정도를 넘는다니까. 쥐들이 알츠하이머를 피하는 방식이라거나, 모르모트가 사회적 스트레스를 피하는 법?

쥐가 알츠하이머에 걸려요? 그걸 예방도 하고?

뇌 구조가, 아예 기능이 같은 거라네.

알츠하이머 - 요즈음 들어 드물지 않게 듣는 단어다. 곧 죽는 질병은 아니지만 비가역적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애매해서 사전을 찾아보았던 생각이 난다. 치료해도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는, 그냥 치료 불가라는 뜻이다. 정말 질병인가 아닌가 질병코드도 찾아보았다. 있다, F00. 손가락 사전 참 좋다. 온갖 지식이, 세상이,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런데 알츠하이머 등 뭐든 치매 같은 것을 앓게 된다면, 치매환자가 된다면, 이 시시함과 허무감 대신 가벼운 만족감에서 지낼 수 있으려나? 내가 벌써 신경세포 손상으로 지능, 의지, 기억 따위가 지속적으로 본질적으로 상실되는 그 병에 노출될 리는 없다. 생각만으로도 무섭다. 언젠가 지능이 떨어지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 까지는 크게 손해될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지능과 기억으로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어질 테니까. 하지만 의지가 상실된다니! 의지가 상실된 상태 - 그런 일을 100퍼센트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소확행인가. 그저 따뜻하게 그렇게 살라고?

소확행 -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어느 일본 작가가 30년 전에 쓴 말이 이제 와서 한국에 퍼뜨려졌단다. 물론 그 자체로서는 기분 상쾌해지는 장면이다. 냄비에 갓 지어 고슬고슬한 밥에 섞박지 무 한 쪽을 얹어서……. 그런 안락한 순간을 말하자면 나라도 열 스물은 센다. 하지만 안식과 힐링, 그것도 젊은 나이에 안식과 힐링만을 구한다면 다들 늙은이야? 늙은이라고 해서 안식과 힐링만 구하하는 법도 없지.

일전에 동기들 단톡에서 누군가 말했었다.

젊어서는 눈 뜨면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랐는데, 이젠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바라네.

뭐라?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면서 눈을 뜬다?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서글펐다.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란다면 사는 것일까? 무엇하러 눈을 뜨나? 잠이 깨니까 일어나고, 배가 고프니까 먹고……. 그보다는 조금 더 무엇인가를 느끼고 싶었다. 느껴야 한다고 느꼈다.

여생이라고, 그런 단어는 없어. 없어야 해. 사는 날까지 생이지.

한 마디 보탰다. 손가락이 방정이다.

무안했을까? 활동성이 줄어드는 것은 활동성에 관해서만 맞는 말이다. 활동성이야 어림과 젊음과 늙음 사이 포물선을 인정한다. 하지만 생이라고 하는 것이 활동성이 전부는 아니다. 생은 소멸 전까지 생이다. 어떤 형태로든 생이다. 그렇게 긴 말을 쓰지는 않았다. 철학 하시네! 잘난 체는! 그 다음 말들이 미리 들렸다.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어요. 누구 무서워 말 올리겠냐. 언제부터 저리 ‘까탈스럽게’ 되었다냐. 귀가 아프다. 한 마디 보탠 걸 후회했다. 삭제하고 싶다. 맨날 이렇다. 말하고 후회하고, 또 잊고서 말하고 후회한다.

후회라는 것은 요상한 놈이다. 무엇을 하고서도 후회하지만, 놓아버려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도 후회한다. 사는 일에서 무엇인가가 새는 걸 막지 않으면 정말 낭패다. 새는 줄도 모르고 있다면 더욱 난감해진다. 대부분 몰라서 방치하게 된다. 알고도 모르는 척 살기도 한다. 현상유지가 중요할 때도 있다. 나의 현상은…… 언제부턴가 근처에 있었고, 남편이 되었고,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람과의 공동생활이다. 그 나름대로 안정된 수입과 화초 기르는 취미를 가진 남자다. 이이는 모가 나지 않아서 어디에고 부딪거나 그러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렇더라도 그리 크게 부서지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의대생들은 공부가 너무 부담되어서 S주의에 물든다거나 하는 잡념(?)의 기회가 적었을까. 오빠는 의대를 그만두었지만, 개인적인 문제였지 사회와의 갈등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 오빠의 그 당찬 후배는 오빠의 맘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오빠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의대 잘 마치고 성형외과를 개업해서 거의 떵떵거리고 산단다. 지방의대 출신답지 않게 강남에다 병원을 내는 배짱이 배틀의 성공이었다고! 연예인도 드나든다는 그 병원의 1㎡는 얼마나 값이 나갈까. 의대동문의 날이면 그 성공신화가 둥둥 떠다닌단다. 오빠가 그렇게 떵떵거리는 사업가(?) 아내와 살아간다는 상상은 불가능하다. 오빠가 의대를, 그 ‘후배’를 피해 달아난 것은 잘 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대개의 경우 잘 한 일이다. 무엇인가를 못 견디어서 피했거나, 무엇인가를 죽도록 좋아서 선택했거나 다 잘 한 일이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 보듯, 가지 않은 길은 다만 동경으로 남을 뿐이다. 간 일이, 그러니까 걸어온 길이 잘 온 길이다. 무엇인가가 좀 빠져나간, 누수 정도의 상흔이면 좀 어떤가. 견디면 견디는 것이다. 만일 소금이 시멘트를 녹였듯 현재의 삶이 녹아내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살림집 아파트가 낙원구 행복동 어딘가에서 날마다 올라간다. 간헐적으로 누수문제가 터지고, 성가시고 돈도 들지만 공사를 하면 막는다. 막아진다. 이 아파트는 아직 단단하다. 단단해 보인다. 더구나 앞 뒤 발코니 모두 누수공사를 마치면 거의 완벽해질 것이다.

내게서 새어나가는 것은 무엇으로 막을까. 내게서 새어나가는 것은 어쩌면 실존의 파편들이다. 미세한 파편이지만 끊임없이 새는 느낌, 이 느낌 때문에 말라간다. 누수의 정체도 모르면서 살아 있으면서 말라가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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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 문학 2019. 7.8월호 vol. 150  121~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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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9. 5. 9. 09:52

 

시베리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

 

오늘도 꼭 밖에 나갔다 오고 그래요! 날씨도…….

대문이 닫히면서 남편의 녹음기 소리가 함께 잘린다.

 

피플 토킹 위드아웃 스피킹, 피플 히어링 위드아웃 리스닝.

우리의 대화다. 침묵의 소리. 노랫말이 인생을 대변할 때가 있다. 많다. 말하고 있지만 말이 아니다. 듣고 있지만 듣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에도 세월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동안 많은 대화들이 저절로 녹음되었다. 녹음되었다가 적당한 장소 적당한 시간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녹음 대목을 찾느라 고심할 필요도 없다. 그 일에 관한 한 로봇의 정교함을 넘는다.

걱정 말아요.

아주 적당한 말을 내뱉고 돌아서는 나의 역할놀이도 만점이다.

 

맨날 어딜 가래! 맨날 혼자서 어딜 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식탁으로 돌아오려다 말고 거실에 앉아서 광주극장 상영작을 네이버에 쳐본다. 정말 영화관에라도 가볼까. 오늘처럼 혼자 가려면 광주극장이 낫다. 평소에 영화관 가려면 백화점 가면 될 일이다. 몇 개씩 되는 상영관이 있으니 골라 보면 될 일이고, 친구도 만나고. 그런데 친구들이 발칸반도에 가 있다. 미순은 평일에는 시간이 없을 것이고.

사실 미순과 내가 여행에 동참하지 못한다 했을 때, 친구들은 시큰둥했다. 대부분 그러려니 했고, 누가 나서서 가자고 채근하는 이도 없었다. 미순은 일찍 못 간다고 말했었다. 벌써 지난해 여행계획이 나올 때부터였다. 친구들 전체가 비싼 성수기 요금으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말로는 여름방학에도 잠시 중한 일정이 있다고 했다. 나는 늘 빠지는 축이다. 그게 실은 나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단체여행을 가는데 누구랑 함께 자게 되면 한숨도 안자고 있다가 다음날 비실대면서 일정에 영향을 주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누가 나랑 함께 자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니 무슨 무슨 핑계거리를 만들어 빠지는 것이 상책이다.

 

오래전부터 해외여행 운운 하다 보니 며칠 전에는 이야기가 그이 귀에도 들렸나보다. 결국 참견을 했다.

크슬보라고? 발칸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꽤 멀리들 가네.

그래요, 가까운 데는 다들 갔다 와서요. 어디는 누가 갔다 오고, 또 어디는 누가. 그러니 많이들 안 가 본 곳으로 낙착된 거죠. 동유럽 돌 때 슬쩍 크로아티아에 갔던 애들은 거긴 또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오히려 반겼다고도 하고.

그렇게들 다니나?

자그레브 같은 데는 팬도 있어요. 가톨릭도 아닌데 거기 고딕식 높은 성당에 저절로 들어가게 되었다나, 암튼 거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라 그랬대요.

아, 크로아티아란 곳이 그런 매력이 있나? 그럼 발칸에 지금 여섯 나라, 일곱이라던가? 우리가 유고슬라비아라고 그렇게 배울 때는 요상한 나라였지. 민족은 다섯, 언어는 넷, 문자마저 둘로 갈라졌다고 하더니만 결국 따로 살게 된 거네.

언어가 다르다는 건 좀 문제겠지요. 같은 언어를 써도…….

그건 그러네, 소통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말이 통해야 소통이. 헌데 당신도 참, 무슨 핑계를 대고라도 여행을 가려고 할 일이지, 왜 단체여행마저 빠지려고 해요? 사람이 바람을 쐬러 나다녀야 한다니까 그러네. 난 혼자서 일주일은 끄떡없어요. 어려서 못 해본 보이 스카우트 하지 뭐.

보이 스카우트라고? 저녁마다 어머니한테 갈 거면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눈에 선하다. 스치는 생각과는 다르게 말은 평이하게 나간다.

발칸이면 일주일 더 걸려요. 혹시 중간에 멀미라도 나면 친구들 보기 난감하죠.

왜 멀미가 날 거라고 생각해요? 요샌 멀미 잘 안하더니만. 하긴 어딜 가야 멀미를 하거나 하지.

이건 일주일도 넘게 9일이래요. 그냥 힘들어요.

당신 참 특이해. 다들 기회가 없어서 야단인 것을. 참, 우리 여행은, 그건 내가 알아서 추진합니다. 올해가…….

뭣 하러요.

저번에 약속 했잖아요. 이번엔 간다고. 이제와 안 간다는 핑계 찾기 어려울 거요.

그이가 쐐기를 박았다.

 

카톡 카톡.

그냥 마저 밥을 먹는다. 황태국이 오늘은 당기지 않는다. 콩나물이 늘 고소하고 깔끔하다. 조금 꺼내서 무침으로만 했다. 나머지는 국물 째로 아껴 두었으니 저녁에는 찰밥을 해도 좋겠다. 가만, 오늘 금요일인데 그인 늦으려나? 하긴 찰밥이야 해 놓았다 내일 먹어도 뭐.

카톡 카톡.

웬일들일까. 그러고 보니 오늘이 출발일이다.

나남이, 우리 지금 비행기 탔다. 30분 뒤 출발. 이제 핸폰 끌 거야. 정인이다.

남아, 남겨두고 가서 미안, 잘 다녀올게. 쏘리(이모티콘). 유향이, 지금 회장이다.

다들 잘 다녀와. 여행가방+선글라스(이모티콘). 나도 답을 보낸다.

젓가락을 들려고 하는데 또 울린다. 이번엔 단톡 방이 아니라 그냥 카톡이다.

남아, 오늘 시간 있지? 나올래, 흰밥 먹자.

성주다. 아차, 성주도 못 간댔지.

성주는 가끔 흰밥 먹자는 소리를 한다. 남편이 당뇨라서 꽁보리밥만 씹는다고 너스레다. 꽁보리밥은 아니지만, 검은콩에 수수다 귀리다 이상한 잡곡들 죄다 섞는다고. 귀리 좀 씹어 봐! 밥도 아니야. 우리들은 모두 웃는다, 요즘 흰밥 먹는 사람들 어디 있다고! 그럴 땐 미순의 말이 제일 웃긴다. 나 혼자라도 스스로 발아현미밥 해먹거든요! 현미밥을 하기는. 햇반 종류가 그렇다. 발아현미밥 작은컵은 나도 좋아하는 편이다. 그냥 데울지 유리그릇에 옮겨서 데울지 그게 늘 고민이다. 참, 성주에게 답 해야지.

오늘 말고 내일, 낼 봐.

왜? 알써. 낼 봐. 굴비 먹자.

또 굴비 타령이다. 이밥에 소고기 대신, 이밥에 굴비. 성주가 좋아하는 밥이다. 오늘은 사실 일감이 좀 있다. 숙제를 두고 나가는 건 편치 않다.

 

 

굴비 먹자 응? 집에서 굽는 것 징글징글하다. 구어 주는 것 좀 얻어먹자. 우리 둘 다 고긴 별로잖아.

성주는 만나자마자 또 굴비 타령이다.

그래 그러자, 난 집에서 굴비를 잘 안 먹게 돼. 그인 삐쩍 마른 것 말고 탕을 좋아하거든. 그런데 넌 또 왜 여행을 안 갔어? 첨엔 가는 것 아녔어? 지한 씨 때문에?

아냐, 응.

아냐는 뭐고 응은 뭐야?

그래, 우선 먹자니까.

 

그랬다. 성주는 지한 씨랑 동갑내기라서 함께 회갑이 되니까 둘이 여행을 가게 되었단다. 딸이 벌써 어른스럽게도 ‘엄마아빠 해외여행’을 선물로 내놓았단다. 그런 차에 두 번의 해외여행은 무리라고.

그래, 어디로 가려고?

그게 말이야, 지한 씨는 무조건 시베리아래.

왜 지금 시베리아를 가? 분위기들은 곧 철도가 뚫릴 거라니까 기다렸다가 가겠다는 것 아닌가.

글쎄, 지한 씨가 자신 없는 소리를 하면서 고집을 부리네.

고집을?

지병 때문이지 뭐.

당뇨가 무슨 큰 병이라고 그래. 혈당 좀 있는 걸 가지고. 고혈압이다 고지혈증이다 하나씩은 다 있잖아, 우리 나이면.

언제 기다려! 철조망 뚫렸을 때, 그러니까 몇 년 후면 내가 여행을 갈 수나 있을지 알아? 갑자기 성주에게 말하는 지한 씨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들려온다. 너무 놀라서 고개를 흔든다. 성주네 둘의 대화를 훔쳐 들을 마음은 없는데, 왜 들려올까. 아, 나남이 살려줘! 온 힘을 다 해서 앞이마 중심에 두 눈을 고정시키니까 소리가 사라진다. 성주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들킨 것 같지는 않다.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간다.

해서 시베리아에 간다고? 올해 안에?

으응, 그럴 셈이야. 가까운 무안공항에서 직행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패키지들도 나와 있나 봐. 춥기 전에 가면 될 거라고.

그렇담.

그렇담 뭐?

나는 우리도 거기 따라갈까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이는 분명히 여행을 가자고 하고 있지만, 아직 무슨 계획이 확정된 것도 아니다. 생각만 해도 성가시다. 뭣 보다 이런 순간에는 내 귀가 무섭다. 들은 것은 못 듣고, 듣지도 않은 것을 듣는 불안한 청각에 이젠 좀 떨린다. 춥다, 늦은 봄날에.

건 그렇고 다다음 월요일 저녁, 나올 수 있지?

저녁이지 참.

응, 밥 좀 일찍 먹고 시민회관이야. 그땐 발칸 간 애들도 돌아왔을 거고, 여럿이 거기 갈 거라고. 정인이 당부 안했어?

했지 벌써. 나 저녁에 잘 안 나가는 줄 알면서도, 웬 일로 졸라 대더라고.

 

 

정말 시베리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시베리아가 오고 있다. 뉴스에서만이 아니다. 정인을 따라 간 음악공연에서도 시베리아, 시베리아, 시베리아가 울려 퍼졌다. 정인은 통기타로 배우는 발라드 교실에 노래를 배우러 다니는데, 어느새 강사의 팬이 되었단다. 나름 이름 있는 가수의 통기타를 듣는 것도 남다른 즐거움이고, 공감되는 것이 많다고. 그가 달마다 음악공연을 하는데 이번엔 특별 이벤트가 있으니 꼭 함께 가보자고 모두를 졸랐고, 정인이가 대놓고 조르면 그냥 따르게 된다.

월요일, 음악공연과는 어울리지 않는 월요일 저녁이었다. 입장료는 없고, 공연을 위해서이거나 북녘어린이를 위한 빵공장에 후원금을 내는 시스템이란다. 알아서 형편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런 방식도 그런 빵공장의 존재도 신선한 느낌이었다. 강당 안에는 온통 시베리아가 공기방울처럼 날고 있었다. 붉고 푸른 조명에 밀려 천정으로 날고,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눈동자 속으로도 날았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 나타샤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 가사마저 웬 시베리아? 우리말 노래 속 시베리아는 가까운 곳처럼 느껴졌다. 나타샤는 또 왜? 하긴 백석이 불러온 나타샤겠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 때문에 미순에게서 핀잔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 그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던 때였으니 꽤 오래 전 일이다. 내 말이 멍청하긴 했다. 사랑과 눈이 무슨 상관이래? 누군 사랑하면 눈이 오고, 누군 사랑하면 새가 운다냐? 그랬더니 미순이 한참 한심해 했다.

시에서 무슨 논리며 합리야! ‘내 마음은 호수요’하면, 마음이 어떻게 호수야, 그래도 호수지. ‘동해 쪽빛 바람에……’ 바람이 어떻게 쪽빛이냐고 따질 테냐? 바람이라는 촉각이 쪽빛 시각으로 전이되는 것, 그런 것이 시어야. 시의 심상이라고. 하물며 누군가 사랑을 하면 눈도 푹푹 내리라지.

그때 미순은 우리에게 아예 강의를 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백석은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의 영어사범과에 다니면서도 러시아어를 죽자 사자 공부했다고. 고향인가 함흥에선가 영어교사를 할 때도 시내 양복점이건 서점이건 러시아 사람이 있는 곳이면 늘 쫓아다니며 러시아말을 배웠다고. 『테스』 말고 러시아 작품 번역도 있었다고!

알았어. 너 요새 전공 바꿔 러시아어냐? 나타샤,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톨스토이의 손끝에서 태어난, 아니 그의 영혼 속에서 태어난 나타샤에게 러시아어 광팬이 매료되었다는 강의, 잘 알아들었네요!

더 있어. 나타샤 말고 안드레이 볼콘스키를 봐.

아, 그 그윽한 눈빛의 멜 화라!

누군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대개는 전집 빌려다 놓고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해버리고는 영화만 봤던 것이 들통 나는 순간이었다. 미순도 따라 웃어버렸다.

햅번을 버린 그 바람둥이 배우는 냅두고. 볼콘스키 그 이름이 우연이 아니거든. 톨스토이의 외가 쪽 실존인물이었던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이 작품에서 되살아난 거야. 러시아의 미래를 농민에게서 본 그의 사상도 ‘농민공작’ 볼콘스키의 영향이라지.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참여했다가 30년도 넘게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고서 풀려난 그를 만나보고는 그 고결함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그랬대.

뭐,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가 디셈버니까, ‘12월 혁명당원’을 그리 불러. 나폴레옹전쟁 때 유럽의 자유주의 공기를 흠씬 맛보고 돌아온 청년장교들이 조국의 반동정치에 회의를 품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 일단 입헌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비밀결사를 만들었어. 제정러시아 최초의 반란이지만 허망하게 불발로 끝났지. 처형에 시베리아 유형에. 볼콘스키 공작은 주동자급이었지만, 젊은 새 황제 니콜라이 1세랑 어려서 친구처럼 지냈던 배경으로 교수형은 면했던 거래. 어떤 지식인도 시인도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는 거야.

그렇구나. 백석만 해도 해방 후 고향에 남은 건 자연스런 일인데 월북 작가네.

월북은 아니지. 해방된 땅에서 러시아어 통역하면서 신 났겠지. 그래보았자 부르주아라고 크게 쓰이지도 못하고. 그러니 평등이란 뭘까.

그냥 북에 남은 것, 납북도 월북도 아닌 그것은 뭐라 한다냐.

모릅니다요. 월북 납북 작가들의 해금조치도 88올림픽이라는 배경 덕택이었지.

 

그랬다. 문화는 역사의 바람을 탄다. 해금되어서 불쑥 나타난 김기림, 정지용, 백석…… 들. 목마른 데 해갈처럼 많이들 좋아했었다. 그러고도 벌써 한 세대가 흘렀구나.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 나타샤는 영원한 여인이고, 연인들은 시베리아 유형지 같은 산골로 들어간다.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숲 속의 짐승들 시퍼렇게 불을 켜고 나를 노리네 하여 나는……

노래는 바뀌어 시베리아의 바이크가 나온다. 실제로 청년 탐험가가 시베리아를 자전거로 여행했고, 그것을 기념하여 노래한 것이라고 가수가 설명한다. 자전거로 시베리아를? 환상특급에 들어온 것 같다.

정인아, 저거 사실이야?

사실이지 그럼. 작년엔가 그 탐험가가 저 무대에 나왔어, 다부진 젊은이던데. 96년이었다던가, 암튼 12,000km를 모터바이크로 달렸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다섯 달을.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나왔을지. 특별한 사람이네.

대학 때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을 읽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던가.

책을 읽고 탐험을?

소설이 아니라, 유형지 현실을 실증적으로 기록한 데서 크게 감동했더래.

 

내게 시베리아는 뭘까. 에너지도 용기도 없는 내게는 정복의 대상이기는커녕 꿈의 관광지도 아니다. 그냥 한 죄인이 ‘점차로 소생되어가는’ 유형지 시베리아이다. 오래 오래 전에 읽었지만 각인된 구절,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때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지금의 대도시들이나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여전하다. 물질적인 상황이 정신적인 상황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단순하지만 솔직하다. 멀쩡해야할 법학도가 출구 없는 상황에서 병적인 사색에 빠져들고, 나폴레옹적인 선택된 강자라고 스스로 세뇌된다. 자만심이 오죽하면 인류전체를 위하여 사회의 도덕률 쯤 넘어 설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될까. 노파의 죽음으로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건 산술적 계산인가 감상인가.

바보같이! 이나 벼룩 같은 인생이라고 하여 네가 죽여도 된다? 이나 벼룩을 죽인 대가로 결과적으로 네 인생을 박살내? 박살났는가? 적어도 사회적 의미에서는 그렇다. 라스코리니코프의 깨달음, 절대적 고립의 체험은 오직 죄의 결과다. 죄인은 그렇게 점차로 소생되어 간다. 그렇다면 죄는 그에게 성숙의 과정을 위한 필요악이었나? 이 무슨 망발. 이런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난 아직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기억은 어쩐다?

살인에 관한한 카라마조프 아들들은 더 하다. 살부의 죄. 아들마다 트라우마가 있고 아들마다 살부의 이유가 있다. 아들마다 죄인이다. 누가 더, 누가 덜 죄인인가? 어머니의 유산을 두고, 아버지의 정부를 두고,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고, 죽여 버리겠노라 떠들었던 너절한 아들이 죄인인가. 이 호색한 아버지를 벌레처럼 혐오하는 유럽 유학파 냉혈한이 죄인인가. 살인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가능하다니, 신만 없다면 그렇다고 했지. 그래서 니힐리즘으로…….

 

저 있잖아, 5월 영령들을 위해서 어느 해 가을엔가 49일간 노래를 불렀단다, 저녁마다 망월동에 가서.

으응, 누구?

노래를 듣다말고 멍하니 시베리아 유형지에 가 있던 나는 정인의 말에 놀란다.

저 가수지 누구야.

뭔가 대단하다아.

 

155마일 철조망이 꽃나무였으면 좋겠어/ 꽃 한 송이 들고 경계를 넘어 가는 거야/

앞으로 앞으로 가는 거야 ~~

휴전선에 꽃나무를 심자고? 언감생심, 지뢰나 없애라지. 목함지뢰 사건으로 상이군인이 된 젊은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래, 나무를 심는 날이 오겠지. 와야 하겠지.

가만, 꽃나무 철조망이라. 모순형용도 형용이고, 불협화음도 화음이다. 격정적인 흑조의 춤은 사악하지만 아름답다. 〈세례 요한의 목을 들고 있는 헤로디아스〉. 머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서서, 꽃다발을 안듯이, 한 손으로는 목에서 흐른 피를 닦고 있는 얼굴 표정은 담담한 미녀. 이런, 목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핏방울들을 왜 감상하는가. 예술의 권능은 무한대인가. 소설 속 미친놈들, 죄인들은 또 왜 이리 오래도록 살아있는가. 그들이 어찌해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가. 아무 ‘쓰잘 데기’ 없는 소설인데, 겨우 소설인데, 신의 권능을 감히 넘본 자들, 죄인들이 넘쳐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가 왜 불멸인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불가사의 한 일들, 그 중에서도 가장 경악할 일들이 오래 살아남아서 우리의 정신을 영혼을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는 일에 애당초 의미가 있을까만.

 

얼결에 음악회는 끝나고 있었다. 시베리아밖에 들은 게 없다. 마지막에는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왔던 메시지를 그대로 노래했는데, 상당 수 청중들이 따라 불렀다. 우리는 결코 뒤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가사도 멜로디도 단순하고 반복적이라서 쉽게 따라하는가 보다. 광주 서울 평양 시베리아 모스크바 베를린…… 그러다가 독특하게 암스테르담으로 끝나는 가사였다. 정인이 말했던 그 특별 이벤트, 시베리아대륙횡단공연이라는 프로젝트가 이 노래로

서 시작된단다. 코리아-유라이사 프로젝트, 그 정식 발표회인가 발족회인가는 따로 금요일 밤에 열린다고 했다. 취지에 박수를 친다 해도 거기까지 따라나설 일은 아니다. 연속해서 밤 외출도 싫고.

 

 

음악회 어땠어요?

다음 날 느지막이 저녁을 먹을 때였다.

음악회라기보다는, 예, 음악회죠. 문예회관 음악회하곤 다른, 무지 다른.

대중음악이라서?

그것보다는 무슨 문화행사 같았나. 모래그림인가 음악회하곤 아무 상관없는 것도 있고, 시작하자마자 남북 두 정상 얼굴을 그렸어요. 그려 왔던가, 복사처럼.

음악회에 샌드 애니메이션?

전형적인 음악회는 아니더군요. 암튼 모래는 난 원래 별로예요. 좀 만화 같고, 여자는 여자 남자는 남자, 늘 같은 선에, 표현이 한정되어 있어서인가 어디서 봐도 판박이죠.

만화 맞지요. 헌데 음악회 얘기 하다가.

그래요, 거기서도 시베리아입디다. 노래마다 시베리아라, 계속 계속 시베리아가 튀어나오드만. 게다가 코리아-유라시아, 코리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서 유럽까지 땅으로 땅으로 공연여행을 떠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멈춰 서면 공연무대가 되도록 제작된 초대형 버스가 있대요. 그 버스를 몰고 대장정에 오를 거라고. 우선은 국내를 한 바퀴 돌고, 철조망 터지면 떠난다나요. 청중들도 함께 출발해서, 평양까지 가서 돌아올 사람 돌아오고, 블라디보스토크 가서 멈출 사람 멈추고. 힘 닿고 마음 닿으면 암스테르담까지래요.

웬 암스테르담?

모르죠. 모스크바, 베를린까진 그러려니 했다가, 왜 하필 암스테르담일까, 혹시 동화 때문인가 했어요. 풍차가 연상되기도 하고!

아하, 잔세스칸스 풍차마을! 풍차 하면 암스테르담이지. 그럼 에펠탑의 파리는 어쩐다?

우리가 뭘 걱정해요! 파리보다는 여기선 베를린이 더 어울리죠. 베를린장벽에서 죽어간……

에이, 베를린장벽 이야기가 왜 나와요. 그건 확실한 과거이고, 독일 사람들이야 이제 덮을 만하지요. 거기 몇 십 년 동안의 희생이 5.18 일주일 때와 맞먹는 정도 아녔나. 아차, 숫자 이야긴 하는 게 아닌데. 어쨌든 그쪽 일은 잊어요. 그럼 우리도 그럼 그 공연을 따라서 갈까?

우리가 모래사막 대상들 따라가는 상인들도 아니고 어떻게 그 일행을 따라가요? 당신 병원은 어떻게 하고요?

어, 병원 걱정이에요? 일 년쯤 쉬지 뭐. 나도 늘 꿈꾸는 여행이 있어요. 두어 달 계획으로 떠나는 여행. 동쪽이냐 서쪽이냐 그것부터 늘 왔다갔다지만.

우리에게 동쪽이 어디 있다고. 우리가 극동 아닌가.

에이, 지도를 봐요. 우리 동쪽에 드넓은 태평양 아냐. 그 건너 미국, 캐나다. 일단 상식적으로 미국을 끝까지 가서 나이아가라폭포를 생각하지. 그러고는 알라스카까지 올라가는 거요. 아니면 아래로 헤밍웨이의 쿠바, 잉카 유적들. 하지만 또 서쪽으로 쏠리면,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시베리아, 그 다음 유럽들, 어딘지 음산한 북구, 햄릿의 덴마크도.

그렇구나. 난 어쩐지 우주의 배꼽…….

우주? 배꼽이라고?

아니, 세계의 배꼽 델포이가 궁금해요. 신의 뜻이 전달되는 산꼭대기의 신전, 파르나소스는 무등산의 두 배쯤은 높을 걸요. 내가 등반하는 건 아닐 테고, 안개 낀 작은 숙소의 창가…….

뭐야, 벌써 다 다녀왔네. 왜 숙소가 작은데?

높은 산중이잖아요. 산길이 넓겠어요? 좁은 산길에 서있을 숙소가 작을밖에.

상상도 참.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요. 세계의 중심으로 날거라! 그랬더니 이 두 마리가 바로 델포이에서 만났죠. 제우스가 직접 옴파로스를 그 자리에 놓아요. 옴파로스, 배꼽을. 100년 전 쯤 그 돌이 실제로 발굴되었다니, 신화란 신화가 아녜요. 나중에 도난 사건이 있었다던가, 지금 산에 놓인 건 평범한 바위, 모조품이래요. 모조품이라 해도 배꼽자리는 배꼽자리, 한번 가만히 만져 보고 싶은.

당신 신화 좋아하는 것 여전하네.

실제로 발굴되는 것들이 신화예요? 역사지!

그렇다 치고, 우리 여행지는 투표해야겠네요, 민주적으로.

민주적으로?

우리나라도 민주적 체제에 산다고 분류되었던데. 내과 우 원장 알죠, 〈타임〉지 팬이잖아요. 엊그제 떡 하니 펴놓고 설명하더라고요. 세계지도에 푸른 색 짙은 곳이 민주적 체제라고. 우리나라도 푸른 쪽은 분명하더구만. 서양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그런대로 명색이 민주주의가 실행되고 있는 곳이란 설명이 붙어있긴 해도.

그럼 정말 북한은 하얀 색이던가요?

그러게. 가까운 라오스, 아프리카 몇 나라, 차드, 콩고랑 심각한 독재라고 되었더라고.

콩고민주공화국 아닌가?

이름은 북한도 민주공화국이지. 아, 재밌는 건 미국이 캐나다나 북구 나라들에 비해 푸른색이 살짝 엷더라고.

설마요.

이 눈으로 봤어요.

하긴 요즘 미국 꼴이. 참, 멜라니아 부모가 시민권 얻었다면 특별대우죠. 자유만 가지고는 안 돼. 평등해야 민주주의죠.

그러게. 트럼프도 참. 자기가 기필코 없애겠다고 떠드는 연쇄이민제도를 장인장모에겐 대놓고 이용하다니. 장인이란 사람, 유고슬라비아 살 때 공산당원 전력도 있었다지만 멀쩡하게 통과되고. 세상이 그래요.

맞아, 미국도 말도 안 되게 불공평한 나라야. 군인신분인데도 쫓겨날 뻔했던 한국계 여자애 이야기 들었죠? 기도 안 막히던데요 뭐. 어떻게 아홉 살부터 거기 살고 학교 다닌 애를, 그러니까 20년을 미국말로 미국서 산 사람을 미국시민이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미국시민인가.

뭐 잘 되었다면서. 그리 어렵다는 시민권 받았으니까요.

암튼 여행은 둘이서 투표해서 50대 50이면 영원히 결론은 글렀네요. 답이 안 나오면 안 가는 것으로!

나중에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날 때. 그때 가서 이 설득의 천재가 나서지요 뭐.

 

 

설득의 천재.

그는 설득의 천재다, 맞다. 우물쭈물 청혼이 결혼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내가 남이랑……, 그만큼 오빠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더니, 제가 남이 씨랑…… 그런 정도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것이 전부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왜 내 귓속에 박힌 청혼의 말을 모른 채 하고 다른 소리를 들었을까. 다른 소리에 나는 설득 당했고, 결혼을 했다.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난 정말 못 들었다. 나무 아래 함께 서 있었던 선배의 목소리는 잘 못 들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만을 기억한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날로 나는 아예 그 장면을 도망쳤다. 생물교육과가 있는 사범대학 쪽은 얼씬도 하지 않았고, 선배가 인문대 쪽에 가만히 나타나는 화요일 오후나 금요일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미리 도망쳤다. 아예 수업시간을 빼먹었다. 과 친구들 사이에선 그리 단짝이 없어서 누가 날 찾지도 않았고, 그렇게 잘도 피해 다녔다. 다른 친구들도 내 속마음을 잘 몰랐으니까 괜찮았다. 그 즈음부터였을까. 들은 것 안 들은 것들이 혼재하는 상태에 어리둥절한 것만 문제였다.

무서웠을까. 결혼, 결혼이라는 것 자체, 그 개념이 안 생겼을 때였다…… 라고 하면 변명이 될까. 스물이 넘은 애, 대학생, 선배랑 함께 걸어 다니면 기분 좋았고. 더 무엇이 필요했을까. 확신? 둘이서 일생을 함께 한다는 상상? 아니 상상을 하기 이전이었다. 선배는 군필 대학생이었으니까 결혼을 생각하는, 생각해도 되는 나이였겠다. 청력장애를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대학생활이, 생활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을 터다. 나는 곧잘 그의 청력장애에 적응했다. 적응이라기보다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미 장애였다. 어쩌면 나는 그 장애를 즐기기조차 했다. 혼자 중얼거리기 좋아하는 내게 편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기도,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한 이야기들. 나 혼자서 하는 둥 마는 둥 지껄여도 선배는 크게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용은 잘 몰라도 뭔가 조잘거린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어도 묻지는 않았다. 나는 어쩌면 선배를 살짝 이용했다. 혼자서 지껄인다는 것은 혼자서 답을 찾게 되는 과정이었다. 선배는 내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나는 이 모두를 과거형으로 말한다. 그것은 먼 과거에 속했다. 나의 미래를 장애를 가진 선배랑? 그런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그런 애였다. 밴댕이 속아지에, 겁이 많기로는 토끼나 사슴 저리 가라다. 일단 움츠리기, 그건 정말 못난 짓이다. 지금도 별 나아진 것은 없지만, 젊어서는 정말 심했다. 그 어떤 용기도 없었다. 용기 없음을 느끼지도 못했다.

막상 결혼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에도 의사라는 직종이 살짝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이는 의사라기보다는 내게 오빠 친구로 여겨졌고, 오빠 친구라서 겁이 덜 났다. 사실 의사들은 환자와 죽음과 가까이 사는 한에서 내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관장하는 군인도, 범죄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판검사도, 예술에 빠져서 실 인생을 모를 예술가도, 돈과 성공을 목표로 가정도 경영하고야 말 사업가도, 이들 모두는 결혼과 관련해서 기피 인물들이었다. 못났다. 그럼 누구, 어떤 부류와 결혼을 해야 할지. 생물과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던 선배가 제격이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아니, 선배는 좀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장애를 지닌 사람과 평생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은 극한의 두려움이었다. 나는 따뜻한 물을 좋아하고 단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맹꽁이다. 맹꽁 맹꽁 울어서가 아니라, 흐리멍덩해서 맹하고, 꽁한 성격이니 꽁하다. 흐리멍덩하려거는 꽁하지나 말지. 드디어 꽁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난 아녜요. 시베리아 안 갈 거예요.

빈 그릇들을 들고 일어나면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난 얼음공화국에 가고 싶은 맘은 없어요.

왜 또오! 무작정 반대는 안돼요. 어디든 가기는 갈 테니까, 배꼽이든 어디든 꼭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 날 설득해요!

난 설득과가 아닌데……. 다시 중얼거리지만 입은 꼭 다물고 있다. 이 소리는 어디에 녹음이 되려나.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않고 녹음해둔 말들과 이렇게 저렇게 들어서 저장해둔 말들로 내 해마는 언젠가는 터질 것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가 언제까지 견딜까. 해마에 실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릇 딸그락 소리, 물소리가 새소리들만큼 시끄럽다. 소리를 뚫고 온기를 만끽한다. 따뜻한 물이 이렇게 좋은데……. 물이 따뜻하지 않다면, 세제를 아무리 퍼부어도 이렇게 말갛게 그릇이 씻길 리가 없다. 온도의 법, 온도의 마법이다. 스물 네 시간 따뜻하고 찬 물이 흐르는 이 부엌이 그이 덕분이다. 그이는 내게 그 나름대로 아늑한 가정을 주고 있다. 답답하지 않은 집, 넉넉한 밥을 위해서 그이는 감기환자들의 콧물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 수입이 괜찮은 편에 속하는 직업군이라 해도, 공중에 흩어져 떠도는 돈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대단한 일이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번다는 일은 성스러운, 존경스러운 일이다. 남편을 존경할 일이다.

물론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업그레이드 된 것은 맞다. 여름에도 발 시리면서도 땀을 못 견디는 건 어쩔 수 없다. 씻어야 잠을 청할 때 따뜻한 물이 얼마나 좋은가. 옛날에야 여름 철 따뜻한 물이 어디 흔했나. 젊어서도 찬 물은 힘들었었다. 주전자 물이라도 데우지 못하면, 허겁지겁 물 끼얹으며 얼마나 시렸던가. 어유, 저 오리새끼, 여름감기나 안 들면서 저러지 원. 핀잔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던 여름밤들. 좁은 가슴팍이 얼음물에 담근 풍선처럼 오므라들던 때를 생각한다.

시베리아라고? 씻기도 힘들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사흘 밤낮을 덜컹거리면서 무얼 구할 것인가. 바이칼 호수가 여러 날의 덜커덩 소리와 추위와 더러움을 상쇄할 마력이 있나. 데카브리스트박물관에 가면 유형지에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고 살았던 옛 사람들의 발자취가 잘 간직되어 있단다. 하지만 그걸 꼭 눈으로 보아야 감동하는가. 난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으스스 떨릴 만큼 감동해 있다. 귀족의 몸으로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또는 친정의 보살핌 속에서 유형지로 따라나선 몇몇 아내들의 사랑과 헌신, 그 이야기도 내겐 이야기로 충분하다. 오지의 은광산에서 중노동을 감수해야했던 그들의 12kg짜리 족쇄를 두 눈으로 보는 기분은 어떨까. 나라면 오히려 그런 적나라한 물증들을 눈으로 보면서 아파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눈으로 보아서 기억하고 싶은 것이라면 푸른 들판, 설마 설마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넓게 펼쳐지는 평원들이다. 수수만년 특별할 리 없는 무수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대지들이 경이롭다. 그래, 내게는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도 자작나무 숲들도 상상만으로 충분히 되었다. 신비를 품은 우주의 배꼽이 아닌 그냥 평범한 땅을 보듬자. 풀이며 지렁이며, 미생물부터 온갖 생물들이 살고 죽어가는 땅, 버드나무 늘어진 천변의 풀 무성한 보잘 것 없는 땅이면 되었다. 봄까치꽃을 피워내는 땅이면.

나를 설득해 보라니까요. 멋진 곳! 내가 유혹 당할만한 그런 곳!

그이는 여태 내 대꾸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약한 구석 있잖아!

당신 약한 구석이라고? 뭘까, 그런 게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보니 입이 열리지 않는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을 해 놓고서 답을 하라면 어떻게 해.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하느냐고. 내 입은 더욱 닫힌다.

남이씨, 조옴, 나남이씨!

그이가 내 이름 석 자를 불러 댈 때는 상기된 채 속으로 혼잣말을 내뱉고 있을 때다. 내 귀는 마이크로 증폭된 소리를 듣는다.

나남이 넌 뭣이 그렇게 복잡해! 여행 한번 가자는데, 병원을 잠시 쉬고라도 내가 가겠다는데. 무슨 말에 쉽게 한번 따라오면 큰일이라도 나느냐고. 뭘 생각할 게 그리 많으냐고! 망쳐버린 신혼여행부터 꼭 다시 말로 해야 해?

짐작만으로도 미안해진 나는 우물쭈물 말을 시작한다.

왜 이름은 부르고. 알았어요.

일단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싫은 이유부터 말해 봐요, 내가 설득 당할지. 아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도 아예 비행기를 이용하든가.

하지만 당신 정말 가고 싶은 것은 전체잖아요. 9,000km가 넘는다는 시베리아횡단철도 전체를 가보고 싶은 것.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는 스무날은 걸릴 것이고, 아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 끝가지 바로 달리기만 한다면, 로시야호라든가, 그 열차로는 일주일이면 직통으로 간다더라고. 하지만 여행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요. 어째도 바이칼은 이르쿠츠크는 보고 싶고. 그러니 우선 거기까지 만이라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일단 가서, 거기서 러시아 맛을 보고 그 다음에 결정을 해도.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무슨 자유여행을, 유럽도 아니고 낯선 땅을 자유여행이라니. 뭐 당장 낼모레 가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얘기해요.

아무튼 간다고 약속 했어요!

그래요, 천천히요.

속으로는 나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보세요! 자유여행이라면 우리 자유로 여행하기, 어때요? 자유로! 시베리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냥 당신 혼자서 가면 안 되나요. 친구들하고든지. 여행을, 해외여행을 왜 부부가 함께 해야 하나요. 집에서 보다 더 서로에게 갇혀있게 될 여러 날들을. 여행지에서 단둘이란 통째로 교집합이 되어버리니 숨이 막히잖아요. 헤쳐모여 해서, 자유롭게,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가는 것이 왜 안 되냐고요. 아예 방콕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혼자서 일주일 이주일. 대문을 걸어 잠그고! 그것도 꽤 좋은 여행일 텐데, 내면으로 내면으로. 최소한만 먹고 최소한만 자고. 무엇을 할까. 무엇이 하고 싶은가.[8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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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시베리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 『블랙 시베리아』, 광주전남소설가협회 76~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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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9. 5. 9. 09:49

발자국

 

발자국이 발단이었다. 그는 도처에 발자국을 남긴다. 거실은 그의 발자국으로 덮인다. 순식간이다. 밀걸레는 그 속도를 그 시간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어쩌다 집에 있는 주말이면 더 했다.

아침밥은 해 맥여 내보내야사제! 귓속에 박힌 암호에 따라 평일 아침은 부산하다. 불려놓은 쌀과 잡곡을 반반으로 섞어서 불에 올리면 17분이면 두 그릇 밥이 된다. 밥이 어렵지는 않다. 어려울 리가 없다. 반찬이 늘 문제다. 김치가 문제다. 맛있게 익었다고 생각되는 김치는 그에게는 시어 빠진 것이다. 신 김치에 유산균이 얼마나 많은……. 알아요, 안다고요. 설이 지나면 김장김치는 들다 나다를 반복한다. 국물도 쉽지 않다. 아침상엔 필수다. 17분에 되는 국은 드물다. 저녁에 미리 끓여 놓을 때가 많다. 토장국과 맑은 장국을 가리는 편은 아니다. 어우, 국물 좋네요! 입맛이 좋거나 국물 맛이 괜찮으면 늘 같은 감탄사를 낸다. 그 왜, 내 친구 있다고 했지, 대학에 있는 친구, 절대로 국을 안 먹는. 그 집엔 아예 국이라는 게 없대요. 뭔 맛으로 밥을 먹을까.

그래요? 그렇담 그 집 아내는 얼마나 편할까, 하려다가 꿀꺽 말을 삼킨다. 애들도 국을 못 먹어보고 자랐을까. 웬 남 걱정! 우리 집 밥상도 엉망인데. 야채를 더 챙기기 시작한 뒤로는 국적도 없는 밥상이다. 우선 양배추를 채 썬 것, 껍질 벗긴 토마토를 한 개 먹는다. 오이나 사과를 먹기도 한다. 그러고서 밥을 먹는다. 수선스럽다. 나는 반대 순서로 먹는다. 어차피 함께 먹기는 어렵다. 누룽지와 숭늉까지를 가져와서 앉으면 그의 식사는 끝난 참이 된다. 숭늉은 본채 만 채 냉장고의 찬물을 들이키고는 친절한 녹음기를 튼다.

오늘도 집에만 있지 말고요, 당신 아무튼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그래요. 에너지를 밖으로 내뿜는 게 중요해요, 우리 나이엔 특히. 날씨도 좋은데, 날씨가 나쁘더라도. 그건 날씨 따라 변형이다. 그가 그렇게 집을 나서면 시계는 다시 느리게 가기 시작한다.

일요일 아침엔 밥이 없다. 국도 해방이다. 선식이나 떡을 챙겨 쟁반에 차려 거실로 들고 나간다. 채소와 과일은 듬뿍 가져간다. 나도 따로 쟁반을 챙겨 거실로 나간다. 그러다가 눈에 띠는 것이 발자국이었다. 그의 발자국이다. 더 일찍 일어난 그는 발코니 쪽 문을 열어놓았다. 통풍이 중요해! 지론대로 창문 열기를 좋아하지만 요새는 약간의 변형이 있다. 미세먼지가 요인이다. 나는 미세먼지 주의보를 흘려듣지만 곧 알게 된다. 그가 창문을 열어놓은 날이면 미세먼지가 양호하다. 문제는 발자국이다. 그이 생각으로는 발코니는 집안이고 충분히 깨끗하다. 조금 덜 깨끗하다고 쳐도 잠깐 밟고나가서 창문을 여는 정도로 슬리퍼 바닥이 더러워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먼지며 물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거실에는 발자국이 난다. 발코니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화장실로, 심지어는 안방에까지도. 그날도 마찬가지. 쟁반과 팔 사이로 힐끗 거실의 발자국들을 보고야 말았다. 쟁반을 서둘러 내려놓고는 바로 밀걸레를 들고 나선다. 그이는 살짝 찡그린다. 음식을 두고 걸레질이라니, 병이다, 병. 아니면, 발자국 따라다니는 것 징허네. 속으로 그럴 것이다. 내 눈에는 발자국들이 줄을 잇는다.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문 입으로.

아침이 그렇게 끝나고 부엌을 나선다. 아차! 다시 보이는 발자국! 이번엔 여러 갈래는 아니다. 그래도 또 나 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것이다. 내가 결혼식에 갈 일이 있어서 느긋한 호사를 부릴 수도 없던 차였다. 시계를 쳐다보면서도 걸레질을 지나칠 수가 없다. 다시 거실바닥을 줄줄이 닦는다. 나도 모르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닦는다. 참지 못하고 그이의 슬리퍼를 잡아 벗기는 상상을 한다. 이렇게는 안 돼욧! 그 일이 실제로 임박했음을 느낀다.

머리에서 클립을 풀고 대충 옷을 챙겨 입는다. 결혼식장에 입고 가는 옷이야 뻔하다. 적당한 길이의 치마에 적당한 크기의 재킷을 입는다. 검정색을 피해서 적당한 색깔을 입는다. 적당, 적당, 적당.

나도 나갈 거라 했죠. 밥 잘 먹고 천천히 와요.

벌써 뉴스 채널에 빨려 들어간 남편이 손만 쳐들고 흔든다.

살짝 늦었다. 어머니들이 카펫을 밟고 있었다. 신랑신부에 앞서 누군가가 새하얀 카펫을 밟는 장면은 늘 보아도 적응이 안 된다. 주례도 없는 것이 요즘 유행인지, 서로 사랑고백을 하고 선서를 한다. 냉택없이 감상에 젖은 꼴이라니, 내가 외려 부끄럽다. 예능프로 같은 사회도 머리를 아프게 한다. 뒷줄에 끼어 앉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우르르 뷔페음식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람들도 그편을 선호하고, 취사선택이란 어찌 보면 합리적이겠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 닿지 않게 하려 해도 섞이는 음식들이 문제다. 1라운드로 찬 것, 다음엔 따뜻한 것, 그리고 후식. 못해도 세 번은 들락거리게 된다. 수만 가지가 차려져 있으니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기 위한 탐색전은 필수다. 둘러보다가 벌써 지친다. 막상 가져올 때는 가짓수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한꺼번에 너무 여러 가지를 삼키면 맛을 알 수가 없다.

맞아, 『소박한 밥상』은 레시피가 있는 요리책이 아니라, 간단하게 먹자는 설교집이야.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빨리, 더 빨리,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곱게 바느질하는 데 쓰자고요.’ 숲속에서 손수 지은 집에서 살아가는 중년노년 부부의 이미지가 올곧이 떠오른다. 헬렌 니어링은 바느질도 스스로 했겠지. 손으로 여러 겹 덧대어 꿰맨 재킷을 입고 있는 남편의 사진이 남아있다. 필요한 만큼 자급자족하면 더 많이 일하지 않고 그냥 삶을 즐긴다. 축적하기 위한 노동을 하는 대신 그냥 사는 일에 충실한 삶,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21세기에도 가능할까. 옆 자리 사람들이 일어나는 데 맞춰서 덩달아 일어선다. 급히 마신 커피가 너무 뜨거웠는지 입안이 얼얼하다.

그이는 집에 없었다. 어머님 댁에 갔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도 가끔 어머니한테 들리는 효자다. 평소처럼 다시 혼자인 오후다. 대충 씻고 나니 개운하다. 아직 햇살이 좋다. 발코니에 무슨 바쁜 볼 일이 있어서 그리 슬리퍼도 못 갈아 신고 드나들며 발자국을 남겨놓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 발가락이 터진 놈과 막힌 놈, 두 개의 바깥 슬리퍼가 있는데 왜 갈아 신지 않을까. 나는 앞이 막힌 놈을 신고 나가서 이리저리 살핀다. 어라, 풀꽃이 내팽겨져 있다. 푸르스름한 풀꽃. 어디서 뽑힌 걸까. 진달래 분에 덜 뽑힌 나머지가 있다.

작년에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달랑 혼자서 핀 진달래를 보았다. 분홍빛이 파리하기까지 했다. 무리와는 멀리 떨어진 채 흔들리는 참꽃이 애처로워서 파오기로 했다. 마침 과일칼이 있었다. 뿌리가 그리 깊지도 않았다. 그땐 풀꽃은 없었는데, 풀씨가 묻어온 것일까. 올해 피어나서 흙이 덮이다 말다한 모양새로, 뽑힌 놈들은 뽑히고 남은 놈들이다. 아이쿠, 봄까치꽃이다. 이른 봄 진달래랑 함께 피는 풀꽃.

진달래는 뭐고 철쭉은 뭐야? 둘 다 분홍색에…….

내 색시 하렸는데 안 되겠네. 참꽃 개꽃 모르면 어떻게 해. 이거 봐, 이렇게 홑꽃이면 참꽃이야, 진달래. 수채화 같지, 화전도 해 먹고. 하지만 개꽃 따먹고 죽지 말아.

피이, 누가 색시 한댔나!

여기 요 파르스름한 게 봄까치꽃이야. 요걸 큰개ㅇㅇ꽃이라고 했다니, 이름 한번 험하지? 열매가 댑다 커서 그랬다지만 너무했지. 심한 이름들은 여럿 순화됐어. 문제는 사전엔 아직 안 바뀐 것 같아. 영어로도 되게 이쁘다. 버즈 아이, 어때, 새의 눈 같아? 학명도 이뻐, 이쁜 여자이름이야, 베로니카 페르시카. 이 납작한 거꿀심장꼴에 푸르스름 그림자를 띤 하얀 색. 듣고 있어? 남이야, 남아!

거꿀심장? 하트 모양 거꾸로?

말은 대충, 나는 풀밭에서 푸른 기운이 도는 그 네잎클로버모양 꽃들을 한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네잎클로버잖아. 어떻게 꽃잎이 네 개일까.

아니, 꽃잎이 네 장인 걸 첨 봐? 개나리도 몰라?

개나리 꽃잎이?

그럼, 완전 네 장이지. 설마 개나리 그리면서 꽃잎 다섯 개씩 그렸어? 통꽃 중간부터 넷으로 짝 갈라져서 정확하게 십자모양인걸. 녹색 꽃받침도 4개로 갈라져 있고. 십자화과 식물들이 다 그래.

난 무심코. 누가 개나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나?

응, 실은 네 닢짜리 십자화도 많고 많은데 그냥 지나쳐서 모르는 거야. 노란 색 꽃다지 알지? 냉이랑 아주 비슷한 노란 풀꽃, 다 먹는 풀들이야. 그러고 보면 냉이는 실은 이름이 없어, 나물이라는 뜻이거든. 먹을 수 있는 풀들, 우리가 즐겨먹는 채소들 대부분 십자화 종류야. 배추꽃, 갓꽃, 유채꽃 다 비슷비슷해. 뭐가 섞여있어도 잘 몰라.

우와, 그런가. 배추는 배추 무는 무만 알았지, 꽃 필 때를 봤나.

그때 나는 좀 부끄러웠을까. 화단에 피어있는 분꽃이나 맨드라미는 알았지만, 과꽃도 초롱꽃도 이름들을 알았지만, 풀꽃들은 이름을 상상도 안 해 보았다. 봄까치꽃이라고! 배추꽃, 무꽃도 있구나. 그래, 뿌리가 중요해도 꽃들이 먼저다. 연근을 먹지만 연꽃이 훨씬 더 아름답지 않던가.

선배는 내가 바보 같았을까. 시야가 좁아터진 맹꽁이, 젊다 못해 어린 시절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지금이라고 그리 나아진 건 없겠으나, 적어도 배추꽃 무꽃은 구별한다. 오묘한 무꽃들이라니. 그리고 하나 더. 봄까치꽃이라는 단어만으로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흉측한 이름 대신 봄까치꽃이라고 부르라 당부하던 선배는 어디만큼 가 있는 것일까.

나는 진달래며 봄까치꽃을 보면 살그머니 가슴이 아프다.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나중에 선배가 정작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새소리를 따라 하늘만 쳐다보았다. 놀라서, 부끄러워서, 대답을 몰라서 그냥 못 들었다. 남아, 나랑 결혼하자고! 선배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말하지 않았다. 새의 모습도 기억하지만 무슨 소용인가. 모양은 참새지만 훨씬 큰 새. 그땐 몰랐지만 이젠 이름도 안다,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너무 큰 새. 울음이 아니라 말소리였겠지. 무슨 말이었을까? 청혼이었을까? 그놈들은 지금도 그런 찌익 찌익 소리를 내며 아파트 하늘을 누빈다. 직박구리가 먼저인지 진달래가 먼저인지 봄이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발자국 원인을 탐색하다가 웬 꽃 타령인가. 진달래에 묻어왔다가 뿌리 뽑힌 봄까치꽃을 어쩌나. 바깥 풀밭으로 보내야할까. 주먹 안에 가만히 쥐고 아파트 화단으로 나간다. 반 토막이 난 동백나무 앞을 서둘러 지나친다. 겨우내 몰랐었는데 일전에 꽃봉오리가 맺혀서야 주저앉은 동백을 보고서 놀랐다. 관리소 아저씨 말이, 새로 이사 온 1층 사람들이 그늘진다고 가지들을 다 쳐내라고 했단다. 아무런들 우아하게 자란 굵은 동백을 그렇게 잘라버리다니 너무 허망했다. 안쓰러운 동백나무를 안 보려면 풀꽃을 멀리에 심어야 한다. 꽃잔디 무리도 지나친다. 눈부시다 못해 눈이 상할 것 같은 현란한 색깔에 이 여린 놈들은 묻히고 말 것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공간, 살짝 그늘이 지는 쪽 흙을 파고 묻듯이 심는다. 선배는 봄까치꽃을 두해살이식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올해 핀 이것들이 살아 견딘다 해도 내년엔 꽃피지 않을 것이다. 푸르스름한 꽃망울이 피어나는 것을, 내후년 봄을 기다릴 일이 하나 생겼다.

그늘이 생긴다. 그이가 서 있었다. 아파트 출입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화단에 쪼그린 나를 보았나 보다.

뭐하고 있어요?

아, 풀꽃.

풀꽃을 뭐하는데?

당신이 버린 것들 여기서 크라고요.

내가 뭘 버려요? 풀꽃을 크라고? 풀꽃이 크기는 크는 건가?

그냥 살아 있으라고요. 대대로.

실없기는. 들어가요!

설마 그이가 부러 버린 건 아닐 게다, 그럴 이유를 알 턱이 없으니까. 내 눈은 뒤를 향한다.

그렇게 봄까치꽃은 해마다 이사를 했다. 오늘도 직박구리 녀석들이 울어댔다. 나도 올려다보았다. 이 동네 나무위에서 태어난 녀석들의 후손이 틀림없다. 해마다 돌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다. 놀랍게도 경칩 다음 날이던가,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우리 왔어요, 라고 떠드는 것 같았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나를 따라 온다고 느낄 정도였다. 내 앞을, 내가 가는 길을 앞서서 날며 나무를 옮겨 다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더니 며칠을 잠잠했다. 내가 헛들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이제 직박구리들이 봄까치꽃을 보았으니 이태 후에도 알아봐 줄는지 모른다. 불쌍한 봄까치꽃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알아볼 것이다. 내가 그들 직바구리를 못 알아본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거나 봄까치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설마 새들인데, 저들이 반가움 또는 기쁨이나 슬픔을 모를 리 없다.

하늘을 올려보면서 발은 그를 따라 들어온다. 그이가 번호키를 누른 다음에 나를 앞세운다. 나는 다시 현관을 살핀다. 흩어진 신발들을 가다듬고, 현관문을 확인한다. 오늘은 마감이다.

그런데 당신 일찍 들어왔네. 시간이 아직 되니까, 옷 입은 김에 영화나 보러갈까요?

영화 안 좋아하면서요. 나도 나갔다 와서 피곤하고요.

꼭 좋아하는 것만 하나?

일이라면 몰라도 여가생활인데 좋아하는 걸 해야죠! 일도 좋아하는 걸 해야…….

아차, 말을 내뱉고 보니 걱정이다. 그이가 이비인후과 의사 일을 좋아할까. 겁이 난다. 내 이상한 청력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택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늘 미안하다. 내가 전원이 끊겼다 말았다 하는 것처럼 말소리를 들었다 못 들었다 하는 병을 앓기 시작할 무렵 오빠와 그이는 의과대학생이었다. 아니, 오빤 벌써 그만두었을 때였나. 아무튼 모두들 나를 걱정했다. 내가 회복이 됐더라면 덜 미안할 수도 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 실력으로도 내 청력을 회복시키지 못하니까 후회할까. 나를 위해서였다면 정신신경과를 택했어야 했다고 고개를 갸웃거릴까. 뭐야, 이건! 하고서, 나를, 내 상태를 진작 실망했을까. 오빠가 의과대학을 집어치운 것과 함께 묶어서 이상한 집안과 엮였다고 땅을 칠까? 아버지로 유지되던 집안은 기울었고, 오빠로 기대되던 집안은 서지 못했다. 게다가 이비인후과는 잘 나가는 과가 아니다. 정신신경과를 했더라도 인기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라리 근년 들어 이비인후과에는 성급한 감기환자들이 몰려서 조금은 나을 거라 위안해 본다. 감기가 들면 낫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감기라고 그러면 시원찮고, 비염에 걸렸다고 믿고 싶어 한다. 기관지염 같은 것은 위험한 병인데도, 목감기보다는 기관지에 염증이 있다는 말을 더 듣고 싶어 한다. 질병친화적인 민족? 병에 관해서 잘 알고 여러 종류 많은 약을 먹고 있어야 안심인 사람들이다. 덕택에 의사와 가족들이 굶는 일은 드물다.

가볍게 산책이든. 일요일 오후인데. 그러니까 나가요, 안 나가요? 난 그럼 씻을 테요.

그는 내가 대꾸를 않자 욕실로 향한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떠올린다. 센강 주변의 전원 속, 잔뜩 멋 부린 파리지앵들의 휴식처인가. 애 손 잡고 산책하는 아줌마, 풀밭에 누운 아저씨, 뛰어다니는 아이들, 강아지들. 수십 명 사람들을 수만 개의 점으로 그렸다는 게 신기하다. 만일 쉬라가 지금 살아있어서 ‘지구 섬의 일요일 오후’ 같은 걸 그린다면 우릴 겨우 하나의 점으로 그릴까. 혼잣말은 어차피 발화되지 않는다. 나는 듣기만 잘 못하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잘 못한다, 안 한다. 그게 뭐 문제인가.

야아, 오랜만에 달걀을 했네요. 우리 이제 달걀을 먹는 거네.

저녁 밥상에 앉은 그 기분이 좋다.

뭐, 아예 안 먹는 것도 아니잖아요.

맘 편하게 먹자고요. 어차피. 어, 명란도 넣었어요? 왜 맘이 바뀌었는데요?

뭘 바뀌었다 그래요. 그때그때 그냥저냥 뭐.

아아니, 나는. 나는 당신이 편안해지면 내가 두 배로 편안해져서 말이요. 뭘 해놓고 안 먹으면 불편해서. 무엇이든 함께 먹는 쪽으로 갑시다. 어차피 인명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알았어요. 누구 또 비명횡사라도?

늘 그렇지 뭐. 아는 사람은 아니고. 병원의 일상인 걸요. 정형외과 환자 하나가 패혈증으로 갔어요. 내과로 트랜스퍼 될 때는 늦기 십상이지. 뭐 새삼스런 일도 아니요. 한 원장이 혼났어요.

의사가 혼났다고요? 환자는 죽었는데, 의사가 혼났다고요? 죽은 사람도 있는데 혼 난 것이 대순가? 속으로만 내뱉는 말이다. 소리가 없으니 말이 아닌가? 말은 다르게 나간다.

벨기에랑 덴마크도 이제 수습 되었겠죠?

청청지역이 있을까마는 문명화된 지역은 다 오염지역이요. 어설픈 문명국이 더 문제고. 우리, 중국…….

중국도 우리랑 비슷할까요?

알 수 없지, 넘 거대한 덩어리라서. 그런데 달걀하면 중국 아뇨. 살충제 문제는 저리 가라지. 가짜 달걀, 아니 인공달걀이라나, 그걸 만드는 학원도 있다잖아요.

중국 가서 달걀 먹을 일은 없고요. 그러니까 우리 달걀은 먹는 거예요, 다시 예전만큼.

당신, 돼지고기는 절대로 안 먹을 거요?

앗, 또 그 이야기. 인터넷에서 너무 끔찍한 사진을 봤다니까요! 돼지가 창살을 물어뜯고 있었어. 입에서 피가 날 지경.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그런 독기가 어디로 가. 잡아먹는 인간들에게 들어가서 독이 퍼질밖에. 그래서 돼지플루가…….

걱정도 참.

걱정도 팔자라고, 못 말린다고! 그래요, 내가 심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참을 수가 없는걸요. 세상에, 한 공장에서 닭오리 100만 마리를, 돼지 2만 마리를, 소 3천 마리를 창살에 가두어 놓고 키운다고 상상해 봐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니까요.

본 것은 아니잖아, 그만 눈 감아요.

눈 감으면 더 생생하죠. 보도가 됐으니 사실이죠. 2,000㎡ 헛간마다 4만 마리 넘는 닭을 키우는 농장이랬어요. 농장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서도 하루 종일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질 못 한댔어요. 2,000㎡면 600평인데, 600평에 4만 마리면, 가만, 계산해 보자, 150평에 만 마리, 15평에 천 마리. 15평에, 아이쿠, 15평 아파트를 생각해 봐요, 거기에 닭이 천 마리가 우글거린다고! 우리 집이면 2천 마리가 넘게 꼬꼬댁거리겠네! 으악!

무슨 그런 상상을! 병아리 한 마리도 키우자고 안 할 테니 참아요, 참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그 생명이 중하다고 믿기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 있죠.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동물의 죽은 몸을 나를 살리고 강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어요. 내 음식을 위해서 살생은 하지 않겠다, 뭐 그런.

거야 새로운 말도 아니고 불교에서는 옛날부터 그러는걸. 서양 사람들이 말하면 뭐 특별해지는가. 당신 그 『소박한 밥상』에 빠진 이래 내가 피 보는 것 아뇨! 숲에서 살았다는 그 사람들, 가진 돈도 좀 있고, 유식해서 책도 쓰고, 원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서 기본적으로 건강했고. 뭣이 문제였겠소! 스콧 이어링인가 니어링인가, 그 사람 반전이다 친평화다 해봤자, 결국 공산주의자 아녔나! 그러니 대학에서 퇴출당했고, 오죽하면 스파이 혐의를.

어, 내 책들을 봤어요? 언제?

내 책 네 책이 어딨어요. 집에, 탁자에 있으니 봤죠. 좋은 머리로 미래를 내다봤는지는 몰라도. 그래봤자 온 사회가 배척했으니 죄인 취급할 만 해서지, 근거 없이 그랬을까.

무슨 말예요? 혐의라는 것 그게 어때서요, 엮으려다 안돼서 무죄판결이면 무죄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귀도 따라 운다. 맙소사, 이이도 여론재판을 거드는 것이야. 여론재판에 휩쓸리는 것은 지식인이 할 일은 아니지. 하긴 의사가 곧 지식인은 아니다. 또 지식인들이 외려 여론재판에 앞장서기도 한다.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하는 게 지식인이다. 의사들이나 지식인들이나 싫어진다. 싫다. 이런 말도 섞기 싫다.

나는 어떡하다가 당신 완전 비건이 될까 걱정이요!

비건, 비건. 헬렌 니어링의 말을 듣고 있다. 들려온다.

‘소박한 밥상, 그래요, 육신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 식사할 뿐, 미식에 빠지지 않은 검소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썼어요!’ - ‘나는 30분 이상 걸리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답니다. 가루를 섞어 반죽하는 대신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10분 15분 끓이면 맛좋은 음식이 되는데, 뭣 하러 두어 시간씩 걸려서 빵을 구울까? 사과 파이보다는 사과 소스나 사과를 날것으로 먹자. 감자를 먹으려 한다면 튀기거나 으깨려고 소란스럽게 쓸 것 없다. 튀기거나 으깨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감자를 씻어서 오븐에 넣고 구우면 끝’.

헬렌은 기막히게 유식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사실, 그런 것도 안다. 먼저 자연 속 홀로서기를 실행했던 소로우의 글이니까 당연히 읽어 봤겠지. 『우울의 분석』을 쓴 17세기 어떤 사람은 ‘배설물을 만들 것에 뭣 하러 마음을 쓰느냐’고 했다는 것, 그런 에피소드까지도 안다. 아침을 조리한 적 없고, 명절의 번잡함 속에서는 오히려 단식을 하고, 부엌에 오랜 시간 처박혀 있는 대신 음악과 책을 가까이한 덕택일가?

‘난 날 때부터 채식인이었어요. 도축한 고기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고사하고 막대기를 들고 건드리지도 않을 거예요.’ 헬렌의 말은 좀 심하다, 편파적이랄 밖에 없다. 실제로 구운 고기는 만인의 희망사항이라는 글도 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브런치였던가, ‘구운 비둘기가 널려 있는 놀고먹는 세상을 꿈꿀 때, 그런 곳에서라면 우선 만인이 동등하며, 유복하며, 수고도 노동도 없을 것’이란 에른스트 블로흐의 구절을 소개해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블로흐의 글은 무척 어렵지만, 또한 늘 인상적이다. 여기선 왜 하필 구운 비둘기일까, 암튼 만인이 원하는 것이 채식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남편, 스콧 니어링은 철학적 채식주의자다. 두 사람의 『조화로운 삶』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숲 속의 자립, 그런 삶을 설계했다는 자체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가 말한 경제공화주의 따위 어려운 개념들은 기어코 인터넷을 찾아서 읽었다. 기회 균등, 시민의 의무, 민주 정치, 인권 - 이런 기본적 민주개념을 말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졌다고? 필화사건은 동서고금 어디서나 같구나. 헨리 조지라는 이름도 찾아보았다. 스콧 니어링이 스승으로 삼았다 해서였다. 이름만으로는 대대로 영국 왕인가 싶었는데, 왕들하고는 완전 딴판이었다. 토지공개념이라니, 책 제목도 찾아보았다. 『진보와 빈곤』, 130년 전에도 대단한 사람이 있었구나. ‘노동생산물은 생산자에게 소유권이 있어 마땅하고, 자연에서 주어진 땅이라거나 숲, 크게 보아서 환경 전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 분명한 말에 세상은 왜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이 간단한 말을,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나, 나 좀 봅시다. 또 어디에 가 있어요? 책 속? 인터넷 속?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나는 것을 그냥 말로 해요. 내 뱉으라고요. 음식은 조금만 많아도 못 삼키면서 머릿속엔 뭘 그리 삼켜두고 있는지.

내가 뭘 또 안 들었다 보다. 헛듣고 있는 것을 또 들켰다.

나남이씨, 뭐 하나고요! 그러니까 돼지고기는 절대로 기대하지 말라고? 오늘 달걀이라도 내놓았으니 감사해야 하나? 해도 달걀찜은 좀 구식인걸, 어머니 하시던 것 고대로요.

‘튀기기보다 끓이기, 끓이기보다 굽기, 그보다 찌는 것이 낫다. 가장 좋은 것은 날것으로 먹기.’ 나는 여전히 헬렌의 소리를 듣는다. 날것으로…… 물론 야채와 과일 말이다. 태생이 채식인이라서 브라만을 만날 수 있었을까? 유럽으로 바이올린 공부를 하러 갔던 젊은 날 헬렌의 처음 상대가 크리슈나무르티였다니!

선배는 그때 저자의 이름을 읽기도 어려운 얄따란 책을 들고 있었다. 바람 불던 날, 캠퍼스 내 작은 호숫가 언덕이었다.

읽어볼래?

뭔데요?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라고? 아니, 뭐든 알려고 대학 다니는 것 아닌가? 알지 말라니. 어지럽네.

자유란 모든 권위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하며, 권위의 부정은 두려움의 해방이라고 했어, 독특해. 읽어봐! 지난번 시집 『고통의 축제』, 그 시인이 번역했다니까. 함께 구원받고 싶어서 번역을 했다네. 혼자만 구원받는 건 구원이 아닐 것 같다고.

구원씩이나.

어두운 연둣빛 책자는 얼핏 시시해 보였다. ‘어제가 죽어야 오늘이 있고, 매순간 죽어야 매순간 살 수 있다.’ 뒷면에 그런 비슷한 말이 쓰여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읽었지만 남은 건 별로 없었다, 너무 어려워서. ‘자유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 그런 구절은 가슴 철렁하니 좋긴 했다.

그나저나 책으로 볼 때는 사람과 신 중간 쯤 되는 존재 같았던 그 사람, 그런 ‘세계의 지도자’, 터무니없이 영적인 사람과 사적인 인연이라니, 헬렌이라는 사람 참. 하긴 현실적으로 그녀가 택한 것은 고향 미국, 스콧 니어링, 숲속의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실제로 매우 독립적으로 ‘좋은 삶’을 정하고 그대로 ‘살아간’ - 리빙 -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대신에 아는 것을 살아간 사람들, 이 의지의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관습으로 재단된 숙제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의지란 무엇인지 가늠할 길이 없는데.

‘대충 말고 철저하게 살자. 부드럽게 말고 단단하게 먹자. 음식에서도 생활에서도 견고함을 추구하라.’ 헬렌의 이런 구절에 정말 덜컥 걸렸다. 단단함, 견고함, 그게 정확하게 뭘까. 애매하고 궁금하여 내가 어떻게든 영어 원문을 찾아보았다면 누가 믿을까. 누구라도 믿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정말로 그 구절을 찾아보았다. 소프트, 하드, 파이버. 내 멋대로 이해하자면, 그냥 단단함을 표방하는 것이리라. 음식과 생활에서 섬유질을 추구한다. 파이버, 원래 섬유질이란 말이지만 근성이나 정신력 같은 뜻도 있었다. 음식과 생활에서 근성을 추구한다. 정신력을 추구한다. 단단함을 추구한다.

어쩌나, 달걀찜은 단단함과는 완전 거리가 머네.

무슨 말요. 달걀찜이 부드럽지 그게 어때서요. 찜이 찜이지.

그런가. 간이 괜찮나 보세요! 싱겁게 싱겁게 하려니 맛도 없는 것 같아요.

맛있지. 내가 길이 들어서 그런가, 남이씨 밥상 사랑합니다.

사랑씩이나.

왜 이러세요, 맛있다는데. 좋아요, 오늘은 명란이라, 다음엔 알새우일까 기대되네. 사실 우리가 목포갈치, 흑산홍어, 무안낙지, 그런 것 빼버리면 뭔 맛으로 사는가요. 가덕대구 추가요, 고니 한 그릇 쏟아지는 대구 정도는 돼야! 남이씨, 나남이씨, 하늘같은 남편 좀 봐 주세요!

알았어요, 맨날 하잖아요.

우리라니, 혼자서 말하면서. 하늘, 하늘은 또. 하늘이면 모르는 것이 없겠구만, 이이는 내가 『소박한 밥상』을 보기 훨씬 전부터 피하는 식재료들이 많았던 것을 모른다. 느그 신랑, 저실엔 그저 생명태다이. 멋이든 매운탕으로 허면 좋아허고! 생선을 토막 내는 것이 싫어서, 무서워서, 할 수없이 자잘한 생선들을 쓰는 것을 그는 모른다. 십년을 몇 번씩 살고 나서도 모른다. 도마 위에 눈을 뜬 채로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물고기를 토막내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물고기들은 왜 죽어서도 눈을 뜨고 있을까. 온통 한데 그물에 걸려버려서 눈을 감겨줄 살아있는 이웃이 없어서일까. 눈은 안 보지만 낙지처럼 참수를 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대체 난생 처음으로 문어나 해삼들을 먹어본 용감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누구라도 먹었을까. 하긴 누구라도 배가 정말 고프면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먹을 것이다. 어라, 내가 소로우의 말을 흉내 내고 있네! 그래, 배가 정말 고프면 아무거나 먹는다. 풀들도 이것저적 먹다가 죽기도 하고 미치기도 했다지. 옛날이야기에 미치광이풀 이야기가 있었다. 먹을 것이 동이 난 보릿고개에 친정아버지가 다니러 오셨는지라 담벼락 아래 풀을 뜯어다 삶아 드렸는데, 친정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어얼쑤, 시아버지가 덩달아 저얼쑤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고 푹 고꾸라졌다고. 실제로 참나물과 비슷한 독초가 있으니 헛이야기가 아니다. 둘 다 쌍떡잎식물이다. 언제부턴가는 식물들을 보면 인터넷을 찾아볼밖에. 선배가 더 이상 말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량의 독은 약이 된다고, 미치광이풀 뿌리는 진통제로도 쓴단다. 그러다 보면 항암효과 최고라는 명이도 선뜻 먹고 싶지 않다. 사약으로 썼다는 박새라는 독초와 어찌 구분하느냐고! 털이 난 곰취는 먹는 것이고, 못 먹는 동의나물 잎에는 털이 없다고 구별하란다. 하지만 어떤 땐 다르다. 털이 많은 게 독초 여로이고, 잎에 털과 주름이 없어야 먹는 원추리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알랴. 선배는 알겠지, 전문가가 되었을 테니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 그런 책이 나왔을 때, 제목을 지나쳐서 흠칫 저자 이름부터 보았다면 이 무슨…….

하늘같은 남편 조옴! 아니, 하늘 빼고, 밥 잘 먹는 남편 좀 봐줘요!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 냉장고로 가더니 물병을 꺼낸다. 찬물이 성이 차지 않으면 얼음을 넣는다. 냉동실엔 제빙기가 필수다. 지난번 설 명절엔 남은 음식들 넣느라 제빙기를 빼냈다가 낭패를 당했다. 봄이 되자마자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서 부랴부랴 제빙기를 제자리에 집어넣었는데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전화 상담만으로 가능할 것 같다며, 일단 전원을 끄랬다. 그러고 한 시간 쯤 후 다시 전류를 흐르게 하면 작동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지시였다. 반신반의, 어쨌거나 냉장고를 통째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아서 퓨즈를 내리기로 했다. 집의 1/4 쯤 전기를 통째로 껐다가 켰다. 그런데 정말 물이 제대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왜 그냥 섰을까. 왜 껐다 켜는 것만으로 다시 작동할 거면서 섰을까. 기계란 놈은 눈곱만치의 조건만 아니 되어도 그냥 선다. 우리가 절뚝거리거나 허리를 못 펴도 걷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선다, 그 말은 죽은 것을 말한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진 않는다. 몇 퍼센트 이상 상해야 죽는다. 그 몇 퍼센트가 몇 퍼센트일까.

아차, 소식을 모르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까. 무엇이 다를까. 나는 첫 번째 청혼을 흘려들었고, 두 번째 청혼에 결혼했다. 첫 번째 그 사람을 지금 모른다. 사실 어떤 친구들은 더 여러 번 청혼을 받았는데도 그 사람들 소식은 그런대로 알고서 사는 것 같다.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소식을 모를까. 얼마나 멀리 갔을까. 왜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을까. 얼마나 깊은 숲으로 산으로 갔을까. 깊고 깊은 숲속에서 산골에서 꽃을 가꿀까, 농부가 되어 있을까. 옛이야기 속 연달산 농부처럼 산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 천사를 만나 사랑하고 천사는 떠나고, 이제는 딸에게 아들에게 참꽃 개꽃을 말해주려나. 새봄에 피는 홑꽃만 따먹어라, 늦게 피는 겹꽃, 점박이 개꽃은 먹으면 큰일 난다아. 아님 주왕산에 숨어 수달래 축제에서 한 역할 하고 살아가려나. 시답잖은 상념이랑 털자. 고개를 흔들어 본다. 오른쪽은 심하게 흔들린다.

뭐해요, 밥 먹다 말고! 난 벌써 참외를 깎았고만. 참외가 일찍도 나왔네. 반은 씨 빼놨어요!

참외 껍질이 든 작은 쟁반을 들고 그가 일어선다. 아차!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다용도실을 밟을 것이다. 다용도실은 축축할 때가 많아서 슬리퍼는 또 한 번 심각한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되풀이 되는 내 녹음테이프.

그냥 두세요! 거기 그냥, 싱크대 위에 그냥 두세요!

왜, 아무가 버림 어때서요.

아니, 그냥 조옴!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야. 도와주려는 걸 그리 말리니. 무엇이 문젠지 알다가도 몰라!

그는 휭 하니 거실로 나간다. 나는 부엌에서 뱉고 싶었을 그의 성난 목소리를 듣는다. 내 발자국이 문제라고? 까짓 닦으면 되는 흔적이 문제라고? 너 그 귓구멍 속 남아있는 소리들은 뭔데? 그 흔적들은 언제 지울 건데? 지워볼 생각이라도 했냐고! 소리 없는 그의 말이 귓가를 심장을 도려낸다.

맞다. 내 발자국, 그것이 문제다. 그는 내 발자국을 알고 있다. 그저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은 하려던 말 중에서 몇 퍼센트를 말할까. 이번에도 말을 삼키는 나는 엉뚱하게도 먼 데 헬렌 니어링을 듣는다. 인디언의 노랫말을.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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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소설시대 21, 한국작가교수회, 22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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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8. 3. 15. 12:53

  

                            편지, 메피스토에게

 

1.

 

비를 품은 날씨가 스산하다. 밤새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쳤을 뿐이다.

나 나가요! 오늘도 계속 비 소식이네. 비 오면 외려 외출이라도 해요!

남편은 잔소리를 남기고 출근한다. 집안 공기가 더 나빠요. 우산 꼭 챙기고! 남편은 비 오는 날을 더 염려한다. 안다. 나를 위해서 염려한다. 늘 햇빛 타령이다.

평소에 좀, 햇살 좋은 날 산책을 좀 해야 할 텐데. 당신 얼굴색을 보면, 딱 봐도 멜라토닌 부족이라……. 두 손으로 어깨를 잡으며 눈에다 대고 말할 태세다.

알았어요.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기분이 더 가라앉아서……

그래요, 다 외웠으니 더는 말하지 말라? 그럼 실천을 좀……

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문을 닫았다. 남편이 꼭 끝말을 하려는 것이 싫었다. 싫은 날도 있다. 우울증은 일조량과 관계가 있다. 게다가 비가 오면 습도로 인해 우울 모드가 상승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먼 데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가까운 소리들은 다 들어야 해서 귀가 윙윙거린다고 느낀다. 당신이 가까운 소릴 못 듣고 먼 데 소리만 들린다고 하는 건 그냥 상상이다. 실내 운동이라도 하면 좀 좋아요. 남편의 레퍼토리는 유독 비오는 날엔 더 증가한다.

비가 오면 뛰어다니라고? 그게 강아지지 사람인가! 대문을 닫아 놓고도 혼자 중얼거린다. 비와 우울증과 상관관계가 있기는 한가.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기는 하다. 그걸 믿을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의학서도 아닌 소설의 말을 믿다니. 외려 며칠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는 숙제가 있다. 미순이 메피스토를 들먹였기 때문인데, 그 애 말이 늘 그러듯 알쏭달쏭했고 난 머리가 아팠다.

 

메피스토 말이 맞아, 인간은 신이 짐승들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준 이성을 사용한답시고 외려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되었다고.

 

합리적 이성이란 철저한 계산의 다른 말이라는 대목에서 내 머리가 복잡해졌다. 귀로는 들렸는데 알 수가 없었다. 이성적 인간일수록 더 잔인하게, 경제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향해서 맹수보다 더한 잔인성으로 상대들을 제압해 나간다고, 그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구조라고, 미순은 말했다. 유대인을 하등인간으로 분류했던 시대는 지났어. 이젠 외려 유대인들의 돈과 명성이 최강국 미국을 움직이는 동인이야. 이스라엘이 유네스코에서 탈퇴하는 것과 맞물려 미국이 탈퇴하는 것 봐. 누구의 돈이건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 첨엔 그냥 객관적 지식으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다 알아들을 필요가 있나 뭐. 그러다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다시 궁금증이 요동쳤다.

미순은 평범한 우리들이랑은 다르다. 요새 말로 비혼족이다. 젊은 날 다 태워버린 열정이 그 애를 일찍 성숙하게 했는지, 우리와는 뭔가 차원이 달랐다. 분명 그 문장에도 대단한 곡절이 있을 거야. ‘그’ 인간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란 말에서 그 인간을 떠올린 것은 내 선입견일까. 맹수보다 더 잔인한 그 인간을 눈앞에 떠올리며, 내 상상이 맞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그 맹수를 함께 욕한다.

그래 맘먹은 대로 편지를 쓰자. 누구라도 웃을까. 웃으라지. 하지만 악령의 권능이라면 이런 것쯤 읽지 못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생각이 병통이다.

 

 

2.

 

조금 놀라시려나, 메피스토님, 편지입니다. 인간에게서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을지 모르지만, 세상엔 처음 일어나는 일들로 넘치잖아요.

당신을 내게 불러와 이런 계기를 만든 것은 내 친구 미순이니까, 소개부터 할게요. 윤미순은 평범한 아줌마-할머니 우리들과는 다르답니다. 평생을 공부를 놓지 않고 스스로 밥을 번 독립적 인간이죠. 대부분 다소 어려운 말을 하고 우리를 일깨우곤 하는 미순이 말끝을 흐릴 때도 있답니다. 그럴 땐 풋풋하고 튼실해 보였던 캠퍼스커플의 미래를 쓸어간 파도가 범인임을 우린 다 알죠. 시쳇말로 몸과 맘을 통째로 다 퍼내주고도 대어를 그물 밖으로 놓아 보낸 회한이라고 해 두죠. 속절없이 파편으로 흩어진 날들을 어찌 쉽게 잊나요.

진부한 이야기죠. 한국에서 사시합격은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는 말, 알죠? 근년에 우수수 떨어지는 판검사들의 모양새를 보세요. 당신이 파우스트를 유혹했던 첫 번째 낚싯바늘도 젊음 그리고 욕망을 눈뜨게 한 거였잖아요!

 

지금처럼 무엇이든 센서로 작동하는 시절은 아니었죠. 절거덩거리는 열쇠꾸러미를 주렁주렁 들고 나타난 솔직한 예비 장모님, 목소리 또한 사근사근 노랫소리처럼 들리는군요. 보소, 고마 자랑스러운 기라! 예비 장인은 또. 마, 우리 집으로 온나. 아들 하나 저거는 얼라다. 난 다 들을 수 있었어요, 내 기막힌 청각에 잡히는 먼 데 소리들을.

젊은이의 욕망, 그 욕망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때 누군들 망설이겠어요. 보통 인간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문이 열려 있어요. 칙칙한 오솔길에 비쳐든 햇살에, 누구라도 그 순간 꿈처럼 드러난 따뜻하고 환한 길로 각도를 확 꺾죠.

뒤돌아보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젊은 나날이었을 텐데요. 아니,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단어일 뿐, 눈물과 땀과 땟국 얼룩진 남루함의 연속이었겠죠. 나야 그토록 격하게 공부를 해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죠. 하지만 공부 그것이 희열이기만 했을까요. 합격 후 다시는 글자들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럴 법도 하죠. 그래서 법조문들은 그리도 낡아서 시렁에 걸려 마르다 말다하는 시래기 같은 것인지.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 글자들이라지요. 너희 무지렁이들은 법률용어 같은 것 모른 채로 대충 살아라, 그런 식이죠. 능력에 못 미치는 부류는 아예 하등인간 취급하고요. 반려견 보다 아래, 심하면 두더지나 벌레 보듯 하면서. 암튼 다른 계급에 발돋움한 그가 일순간 사라졌을 때, 우린 그를 증오했을 밖에요. 비열한 놈!

미순이 인사대의 퀸 같은 존재일 때 그는 도서관 붙박이, 파리하고 왜소하여 눈에 띄지도 않았어요. 우리가 ‘도파’라고 부른 이유죠. 기지에 빛나는 구석도 있었죠. 미순더러 ‘레미’라 부르며 도레미파 화음을 과시하곤 했을 땐 솔직히 모두 부러워했었거든요. 미순 혼자 과외알바 뛰고 남친은 공부만 하기, 그런 듀오전략이 흔들린 건 4학년이 되어서죠. 우리 모두 졸업에 대한 부담감으로 우울할 때였죠. 게다가 여름엔 느닷없는 과외금지령으로 속수무책이었죠. 가을학기엔 결국 미순이 휴학을 했어요. 종일 일해서 남친은 공부만 계속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졸업도 늦고 일만 하던 미순은 산 정상에 첫발을 올린 순간에 벼랑을 만나더라고요.

이 날개를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을 했었다고. 나중에 세월 흐른 뒤 미순이 그러더군요. 그 망할 놈의 날개, 밀랍으로 만든 이카로스의 날개였음 좋겠다! 내가 아예 저주를 했죠! 미순의 속마음은 모르는 채로. 그러다가 근년 들어 고위직 판검사 한 둘 티비에서 뭇매를 맞을 때 그 이름이 살짝 튀어나오기에, 그래 에게해로 빠져나 버려라, 속으로 그랬지요. 웬걸, 어물쩍 살아나더군요.

 

이런 미순이 당신을 불러낸 거죠. 나는 차라리 원전을 찾아보기로 했죠. 미순더러 언제 학교 가는 길에 도서관에서 『파우스트』 좀 빌려다 달랬죠. 웬 고전? 이라는 표정으로 웃더군요. 아마 자신이 했던 말을 잊었을 거예요. 방황돼서 그래, 인간은 방황하는 한 어쩌고, 그것 좀 읽고 싶어져서. 나는 딴청을 부렸지요.

책을 손에 넣었죠. 회심의 각오로 신과 내기를 벌렸다가 실패한 당신의 방대한 이야기는 내버려두죠. 오늘은 그 서곡에서 당신이 신과의 내기 가운데 말했던 ‘천상의 빛’에 관한 것으로 한정할게요. 그 단 한 문장이 얼마나 어려운 말들을 내포하는지.

 

메피스토펠레스: 지상의 작은 신(이라는 자) …… 차라리 천상의 빛을 비춰주지 않았던들 그가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는지. 그것을 이성이라 부르고는, 어떤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사는 데만 써 먹고 있군요.

 

당신은 인간을 지상의 작은 신이라고 했죠. 이성을 사용하여 짐승처럼 살아간다고. 그러니까 예컨대 도파 씨의 이성적 결정과 행동은 짐승보다 더 짐승 같다, 이거죠. 맞나요?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랍니다. 미순도 자신을 저버리고 성공의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남친의 이성적 결단을 맹수의 잔인성으로 표현했고요.

하지만 신이 비춰준 천상의 빛이 어떻게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요인이 되죠? 쉽게 이해되지가 않아요. 지적 사고의 훈련에 익숙지 않아서겠죠. 원래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성’의 긍정적 측면과도 상치하고요.

 

할 수 없이 당신을 끌어낸 괴테라는 작가에게서 ‘이성’을 더 찾아보기로 했지요. 웬 쓸데없는 짓인지, 암튼 미순에게 이번엔 소설작품을 부탁했지요. 우리 또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죠. 그 다음 소설작품이라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펼쳤어요. 빌헬름의 출신이야 메피스토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베르테르의 철 든 긍정자일까, 여전히 시민사회의 부를 버거워하는 빌헬름은 이제 연극에 생애를 걸죠. 유전은 한 세대를 건너뛴다던가요, 유능한 상인의 전형인 부친이 아니라 예술애호가였던 조부의 피가 드러난 거군요. 마침 그 조부를 알고 있었던 한 낯선 길손을 만났을 때, 그가 빌헬름에게 들려주는 말이었지요.

 

이 세상이란 직물은 필연과 우연으로 짜여있는데, 인간의 이성이 이들 둘 사이에 들어서서 둘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오. 이성은 필연을 자신의 현존재의 기반으로 취급하고, 또 우연을 조종하고 지휘하며 이용할 줄 알지요. 그런데 다만 이 이성이 굳건히 흔들리지 않고 서 있어야만 인간이 지상의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오.

 

보세요, 다만 이성이 확고부동한 인간이라야 ‘지상의 신’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다는군요. 우연을 조종하지 못하는 인간은 비이성적인 저능한 인간이다, 뭐 그런. 그러니까 도파 씨가 빛나는 기회를 잡은 것 또한 이성적인 행동이고, 그러므로 가히 ‘작은 신’다운 인간으로서의 선택이다. 사랑 따위 어설픈 감성의 세계에 머물러 최적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의 세계이고. 또 사전적 정의를 봐도 ‘이성이란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진위와 선악 또는 미추를 식별하는 능력’이잖아요. 그러면 이성은 무조건적으로 긍정의 영역에 존재해야 맞지요.

그런데 괴테는 왜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저기서는 부정적으로 그렇게 헛갈리게 말했을까요? 악령인 당신의 입에서 나올 때만 부정적인가요? 지금 듣고는 있는 거죠?

말의 강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건가요? 이성은 인간으로서 갖출 최소공약수이다. 다만 과도한 이성은 부작용을 불러 올 수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계산의 영악함과는 경계가 필요하다. 그럼 그 경계는? 그 경계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아뇨, 그런 경계는 없더군요. 책 속의 문장과 현실의 괴리는 엄청나서 우리의 인식을 넘는 항성의 간격이죠. 잠깐만요, 숨 좀 쉬고요.

 

 

3.

 

이렇게 편지를 쓴답시고 앉아 있자니, 돌덩이 가슴이 된다. 뭔가 육중하게 걸린 일이 한둘이 아니다. 내가 해왔고 하는 일들은 내 나름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누구라도, 나는 쉽게 틀리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 틀림없는 것인지.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내가 선배의 목소리는 못 듣고 나무 위 지저귀는 새 소리만 들었다는 사실, 그 확신이 바닥부터 요동친다. 가까이 선배 옆에 서서 선배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고 먼 데 나뭇가지 위의 새 소리만을 들었다는 느낌, 그 기억. 이 기억은 내 의식이 있는 한에서 회상하는 것에 불과할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자 내가 서술할 수도 있는 기억. 나의 의식이 개입된, 내가 그렇게 기억을 하고 싶어서 기억을 하는 형태일까. 그래서 소뇌가 아닌 해마에 저장된다는 기억.

하지만 난 정말 못 들었다. 나무 아래 함께 서 있었던 선배의 목소리는 잘 못 들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만을 기억한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 소리만 들었다. 그 순간 두려운 것이 무엇이었을까? 청혼 그 자체, 결혼이라는 일에 놀랐을까? 그의 심한 청력장애가 덜컥 걸렸나? 군대 간 첫해 사격훈련 중 총기를 잘 못 다루다 그리 되었다는, 심한 청력장애였다. 캠퍼스 곳곳을 안 쳐다 본 나무들 없이 함께 산책했던 우리. 꽃잎파리 하나하나를 모두 설명해준 선배. 꽃만 피는 건 진달래, 잎과 함께 피는 건 철쭉이야, 개꽃이라고! 개꽃 따먹다 죽으면 안 되지, 내 색시 하려면!

사람들은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게다. 나중에 나중에 미순한테 살며시 그 말을 했을 때, 미순도 나를 의심했다. 미순이 벙어리가 되었던 그때, 그 앨 위로할 필요 때문에 ‘우리도’ 헤어졌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검지 둘을 살짝 합쳐 보이면서 말했다. 나란한 두 직선이 있어. 가까워져서 만나면 다음 순간 서로를 뚫고 지나가 버리게 돼. 상황은 오히려 나빠졌다. 미순은 나를 죄인 취급했다. 제 남자친구였던, 저를 떠나 속절없이 사라진 아무개랑 똑같다 했다. 배신 가까운 개념을 들먹였다. 아무개나 나나 다 같은 배신자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딱히 배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은 그 애의 미덕이다. 미덕이 참으로 여러 가지인데도, 미순은 야멸치게 배신을 당했다. 확고부동한 이성이 범인이었다.

 

아니, 이젠 미순 문제가 아니다. 선배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고 믿는 나의 기억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기억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확보하려면 타자의 기억들은 자의적이며 인위적이라고 밀어붙여야 한다. 타자, 실제로 청력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선배는 내 우스꽝스런 장애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나는 무조건 듣지 않았다는 기억을 고집한다. 그러고서 그 순간이 귀에 걸려있음으로 해서 평생 귀앓이를 한다. 그 벌이다. 먼 데는 잘 듣고 가까운 소리들을 흘려듣거나 못 알아듣는 병을 앓는다. 하필 이비인후과 의사인 남편도 그냥 허허 웃고 있는 모양이다.

며칠 전이었다.

내가 주중에 한 나절씩 쉴까 봐요, 수요일 오후 쯤. 산책도 하고.

무슨 소리예요.

우리병원 피부과도 그래요. 그 양반이야 대단한 신자라서 그렇지만.

신자라서?

수요 저녁예배요.

저녁예밴데 오후부터 쉬어요?

준비도 하고 그러겠지요. 저녁예배 준비, 예-배-준-비 한다고요.

내가 또 헛듣는 기색이었나 보다. 남편의 말소리가 커졌다. 이비인후과 의사인 남편이 내 귀를, 청력을 어쩌지 못한다니 속상하겠다 싶다. 처음에 이비인후과 전공의가 되었을 때는 내 이상한 습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청력을 걱정했던 것이 맞다. 오빠랑 함께 의대를 다녔으니까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오빠가 도중하차하고 진로를 바꾸었지만, 계속 친구이니까. 결혼 후 이비인후과 의사도 내 귀를 어쩌지 못하는 것을 알고 나서는 세부전공에서 귀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이비인후과 의사가 돕지 못하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가 ‘잘 나가는’ 과를 선택했을까? 가장 파리 날리는 전공이 이이비인후과인 것 같아서 늘 조금 미안하다.

이비인후과 혹은 이비인후-두경부외과는 귀 뿐만 아니라 코와 후두며 인두 그리고 두경부 질병을 관리하는 의학이랬다. 이만큼 범위가 엄청 많다는 것은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에 알게 되었다. 학위논문에는 가성크루프 운운, 일반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무튼 후두학이라고만 들었다. 인두보다도 더 아래 기도나 폐 쪽에 가까운 곳이라 해서 더 중요한 기관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미 의사로서 활동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가 상대하는 환자는 이비인후 모두를 망라할 것이다. 박사가 아닌 부분도 진료하는 것이 의사들의 일이라고 생각할 때 조금 걱정도 되고 그랬다. 내가 왜 걱정을? 남편이라서? 그 보다는 세상의 모든 의사들에 대한 걱정이다. 내가 좀생이라서 남 걱정이다. 오빠는 나랑 그런 좀생이 기질을 공유해서 의대를 포기했을 것이다, 아마. 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오빠는 의대생 친구를 나에게 데려다 놓고는 진로를 바꾼 셈이다. 친구가 자발적으로 왔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 이야기도 나눈 적은 없다, 남편하고도, 오빠하고도. 왜 우리는 이야기 나누는 일이 적을까. 싸우는 것을 소통이나 이야기에 포함한다 해도 적다. 싸우지 않으니까 더 소통이 없다. 그래서 메피스토를 불러내려는가?

 

 

4.

 

메피스토님, 아직 듣고 있지요? 낡은 노트북 꼬마자판 위의 글씨들이 당신의 귓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 느낌. 어떻게 내가 악령과 한패를 먹고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네요.

세상은 사적인 고민에 빠져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용인치 않더군요. 지축이 울리면 어떤 시금석도 사라져버려요. 나머지 대학생활은, 그 시절의 대학생활은 개인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대통령 시해라는 역사적 사건 속 술렁임으로 요동쳤지요. 서울 YWCA 집회에서 발표되었다는 거국민주내각구성을 촉구한 성명서는 우리 캠퍼스까지도 왔어요.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우리대학만 해도 그 때 수천은 되었을 걸요. 조기 개헌, 군대의 중립, 또 빼놓지 않고 어용교수 퇴진! 특히 교육지표 사건 이후로 어용 문제는 심각했었죠. 수배자가 생겨나고, 구류에 재판에 넘겨지는 학생들. 미순 남친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하더군요. 수배중인 후배를 하룻밤 숨겼는데, 무사히 고향집으로 데려갔으니 망정이죠. 그건 전화위복이 됐어요. 홀어머니가 병중인 걸 보고는 짐 싸가지고 내려갔더래요. 다음 봄 학기를 휴학했고요.

그렇게 졸업반이 되었죠. 우리들 몇은 정치를 워낙 몰랐었다 봐요. 이러다가 결국 군부가 약화되고 민간의 정치로 옮겨가리라는 순진한 기대도 없지는 않았거든요. 웬걸, 서울역 회군(?)이 갈림길이었다죠. 수천이 아니라 수만의 함성들. 하지만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의견이 갈렸다죠. ‘다음을 기약하자!’ ‘아니, 지금 멈추면 엄청난 보복으로 돌아올 거야.’ 신중론에 따라 흩어지는 학생들, 사람들. 사흘 후 전국 동시다발을 기약하자!

 

- 뭐라? 사흘 뒤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나선다꼬? 요놈들! 비상계엄 전국 확대다. 대학교 휴교령 내리고, 걸거치는 놈들 다 잡아넣어! 가택연금 시킬 놈들 시키고!

- 됐다, 마! 인자는 언가이 됐제. 어데, 광주가 들고 나선다꼬?

- 미친놈들, 아예 폭도의 이름으로 처단해뿌라! 거 불온세력, 빨갱이들 폭동, 그런 것 안 있나! 전국으로 확대되는 일은 단디 막으라.

- 모든 수단 동원하라꼬! 군은 자위권 발동인 기다!

 

내 귀엔 지금도 이 모든 소리가 들려요. 뇌세포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튀어 나오죠. 그런데 서울역에서의 후퇴 결정은 합리적 이성에 따랐던 게 맞나요? 공포 또는 비겁의 산물이었나요? 잠정적인 소강상태 후 사흘 뒤 산발적으로 봉기하자! 약속은 약속이지만, 약속을 깬 다른 지역은 결과적으로 이성적이었나요? 약속은 약속이다, 약속을 지켰던 이곳 학생들은 어딘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비이성적 하등인간들이었나요? 다가오는 극한위험을 모른 채 행렬에 나선 그들, 사라져간 그들, 함께 스러져간 광주사람들.

 

그해 5월, 참 따뜻한 일요일이었죠. 미순은 일요일에는 알바를 더 하느라 꼴 보기 어려웠어요. 집이 시내 쪽인 성주랑 둘만 만났지요. 영화를 볼까 하다가, 이 좋은 날에, 그러면서 버들가지가 나부끼는 천변을 따라 산책을 했지요. 느리게 걷는 사람들, 다리 아래 풀밭에서 나물을 뜯는 아주머니도 보였어요. 소만이 낼모레구나, 냉잇국을 끓여야겠네,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날은 무등산 쪽으로가 아니라 물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었죠. 한 참 걷다가 큰길로 올라왔는데 학생운동기념탑이 훤히 보이는 거예요. 담장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자리에 예쁜 창살 같은 철책만 둘러져서 얼핏 담장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성주가 느닷없이 안에 들어가 보자 했어요. 기념탑에 새겨진 작은 이름들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찾아보겠다고. 성주는 정말 깨알 같은 이름들을 짚어보고 있었어요. 나는 그냥 잘 다듬어진 정원, 작은 바윗돌에 멍 때리고 앉아 있었지요. 곧 일어날 생각으로.

우당탕 탕탕. 길 쪽에서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리는 발소리가 나요. 우르르 쾅쾅. 계속 달리는 사람들. 한 사람이 어느 가게의 옆문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여요. 계단으로 올라가는지 하얀 셔츠의 뒷모습이 곧 사라져요. 모두 그쪽을 쳐다보고 있어서 들킨 건가. 뒤쫓던 군홧발들도 쿵쾅거리며 따라 올라가요. 아악, 내려오는 건 세 둥치인데 걷는 건 둘이어요. 가운데 새빨갛게 변한 셔츠의 뒷모습은…….

어느새 시커먼 군복들이 담장 안쪽에 우글거렸어요. 성주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힐끗거리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손을 꼭 잡고 교문을 빠져나왔죠. 대학 캠퍼스에 우르르 몰려든 전경들이야 수없이 봤었지만, 고등학교 애들이 있는 곳이잖아요. 게다가 총칼인지 뭔지 무장한 군인들을 마주치다니. 고개를 땅으로 처박고 길가로 붙어서 발걸음을 떼었어요. 조심조심 천천히,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는 포즈를 강조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어떤 가게로 빨려 들어갔어요. 거기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먼저 우릴 끌었는지 우리가 먼저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아무튼 그리로 들어갔지요. 실뭉치가 가득 쌓인 가게였어요. 코바늘을 든 채 서 있는 아주머니도 있었어요. 여럿이 계셨어요. 대학생들 큰일난당께. 어찌끄나, 어쯔고 집에 가끄나. 아주머니들도 떨고 있었어요. 한참 후 나올 때에는 아주머니 한 분씩이 따로 우릴 데려다 준댔어요. 묶은 머리를 대충 올림머리처럼 해주시고, 커다란 비닐봉투에다 우리 가방을 넣고는 뭔가를 구겨 넣어 부풀려서는 그렇게 들고가라 했어요. 시장바구니 행세였죠.

그날 『장터의 스피노자』던가, 아이작 싱거의 단편집을 들고 나갔는데, 거기 놓고 왔었나 봐요. 그 모사점에는 한동안 가지 않았죠. 필름이 끊긴 부분에 해당되었나 봐요. 몇 년 후에야 뜨개질 생각이 났고, 그 집엘 갔고, 책은 당연히 흔적도 없었고. 하긴 학생탑 근처 어디에 흘리고 왔었는지도 모르죠, 혼비백산했을 때. 다시는 그 책을 읽을 생각도 없이 몇 해를 지난 거예요. 노벨상 때문에 반짝했다가 곧 잊은 거죠. 대표단편은 다 읽었었는데, 주인공은 철학박사이면서 스피노자처럼 살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이성의 완전한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자이다.’ 뭐 그런 말에 매료되었던 것도 같고. 다시 말해도 이성은 대단한 성질이죠, 우리 인간에게서. 너무 어렵지만요.

 

그 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함성은 내란이라는 이름으로 진압되었죠. 새빨갛게 물든 셔츠의 뒷모습을 잊고, 잊으려고 하면서, 숨죽여 온 세월이 이성적이었을까요? 할머니가 계시던 우리 집은 그날 이후 대문부터 안에서 봉쇄되었죠. 다시 학교가 풀렸지만, 졸업을 하기까지 들고나는 시간에 애들처럼 초저녁 통금이 붙었죠. 여자 애가 조신하게 있다가 결혼해야지. 그렇게 살다가 결혼하고 엄마가 되고. 그렇게 보통으로. 딴전을 부리며 살아남기. 공포를 누르고 잊은 체하기.

몇 백을 폭도의 이름으로 학살함으로써 전국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계산은 효과적이었죠. 겉으로는 안정되었으니까요. 죽은자도 행불자도 ‘다만’ 소수에 속했죠. 과외를 못해서 휴학하는 학생들, 가난에 지쳐서 팔려가는 공부벌레들, 그래도 죽느니에 비하면 대순가요. 소수를 밟고 다수가 행복했으니 합리적 이성의 승리였나 봅니다. 못난 소수, 잘난 다수. 그런데 어쩌죠, 참상은 참상인 걸요.

못 믿을 손 이성이여! 메피스토 당신의 말대로라면 신이 천상의 빛이라고 준 것이 이성인데, 이성이 빛이 아닌 거네요.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덕 - 인간은 태초에 선한 존재이다가 필요에 의해 악을 수행하나요? 이성의 힘으로? 말도 안 돼요. 아, 숨 막혀…….

 

 

5.

 

메피스토님, 아직 거기 있죠? 악령이라면 낮 시간 동안은 별로 할 일도 없는 것 아녜요? 세상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오히려 우울과 자기 환멸에 빠진 또 다른 파우스트를 찾아가기엔 이른 시간이죠 뭐.

오늘 이야긴 사정이 좀 달라지네요. 인간에게 만일 언젠가부터 죄의식 같은 것이 싹 터 있다면요, 부채의식이랄까, 그런 경우요. 그건 이성의 작용으로 해결 가능할까요? 살다 보니, 얼결에 아이도 낳고 기르고 깔깔 웃고. 그러는 세월 동안 죄의식인지 부채의식인지 무엇인가 무거운 장막을 드리우고 있음을 깨달았네요. 내가 너무 행복한 것 아닌가. 누군가를 ‘합리적’ 그러니까 이성적 이유 없이 외면한 내가 행복해도 되는가. 그건 그저 사적인 잘못이라 쳐도요. 이웃들의 불행을 불행이라서 참상을 참상이라서 깡그리 외면했으면서. 그런 죄를.

 

죄와 벌,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중죄가 아닐 때에는 뭔가 선한 행동으로 보속할 방법이 없을까. 죄를 지으면 절대자를 찾는다고, 신앙에 의지할까 생각도 했지요. 성당을 염두에 두고 알아 봤어요. 입교식을 하고 예비자가 되어 일반교리지식과 미사참례예절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데, 잘 해도 반년쯤은 걸린다더군요. 마지막엔 신부님과의 찰고라니 그건 좀 무섭고요. 성세성사라고 하는 것이 인류 전체에 관련된 원죄며 내가 저질렀던 본죄며, 그것이 내가 용서받고 싶은 것인데, 아무튼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 대단한 일이긴 해요. 하지만 회개라는 말도 심각하죠. 나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길로 향한다?

아님 교회의 문을 두드릴까. 좀 더 편하지 않을까. 교회를 통해서 기본교육을 받는 건 같죠. 그런 후 신앙고백을 하고서 세례를 받고요. 신앙이 안 생긴다면 것도 큰일이죠. 또 교회들은 종류가 하도 많아서 교회의 바다에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기독교나 예수교나. 기장과 예장이라더니, 예장도 합동에 통합에. 우와, 합동과 통합의 차이를 잘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았답니다. 얼핏 구별 못하겠더라고요.

합동: 둘 이상의 조직이나 개인이 모여 행동이나 일을 함께함.

통합: 둘 이상의 조직이나 기구 따위를 하나로 합침.

옳거니, 합동은 여럿이 함께, 통합은 하나로! 메피스토님, 당신은 한글을 알 리가 없죠. 아니, 마법적 능력으로 한글도 아시려나? 암튼 성서 어딘가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비슷한 말씀을 얻어들은 풍월로 기억해 냈지요.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뭐 그런. 그래서 숫자가 적은 기장 쪽으로 입문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일단 예장이란 교회는 엄청난 숫자니까요. 그래, 좁은 문으로 들어가자. 기장이라는 표식의 교회를 찾아보았어요. 일단 내가 찾은 것 만해도 셋이었어요. 어떻게 구별하느냐고요? 십자가 표식을 보면 되죠. 짙은 파란색 원에 왼쪽 아래 1/4은 보라색이고 경계선에 하얀 색으로 ‘기’자 표시되어 있으니까 금방 알죠. 십자가 이미지로는 예장합동이 맘에 들었어요. 신구약성서를 상징하는 듯, 책 모양의 파란색과 연두색 직사각형 사이에 하얀색 십자가. 성서를 초록색 두루마리로 나타내고 그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는 예장통합이더군요. 두루마리가 하나인 것은 하나를 지향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좋더군요. 교회 속내는 전혀 모르니 피상적인 인상이죠.

교회를 찾아가는 것, 실은 그럴 용기가 부족했어요. 어떤 문도 두드리지 못했죠. 성서를 읽는 것으로나마 죄를 면해보려고요. 비겁하지만 그쪽으로 맘을 정했죠. 성서읽기는 인터넷이 좀 좋은가요. 허나 종류가 너무 많은 건 좀 힘들더군요. 하느님과 하나님의 다름은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머리로는 따라가죠. 여호와와 야훼와 주와 주님과…… 아휴, 이건 너무 헛갈리죠. 성서번역부터 다름인지 다툼인지가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어요. 서로 찢어지잖아요. 어찌되었건 성서를 가끔씩 읽는답니다. 좋아하는 찬송들도 생겨나고요. 악보도 쪼끔은 읽거든요.

 

어때요, 메피스토님, 성서 한두 줄 읽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수작이라는 것이 결국 이기적인데, 나만 그럴까요?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 아닌가요? 당신도 은근히 성악설에 기대는 거예요. ‘선한 인간이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저 노인’의 성선설에 반대해서 내기를 건 것이니까. 사실은 종교가 성악설에 기초한 것 아닐까요?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타락의 원죄라고 하니 말이죠.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아니, 하느님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단 말인가요? 그렇담 하느님에게 인간은 무엇이죠? 하느님은 누구를, 무엇을 창조하셨나요? 설마 우리는 하느님에게 반려인간인가요? 신을 기쁘게 해주고 가끔 위로해줄지언정 선악일랑 모르는, 알면 안 되는 반려인간. ‘이제 인간아, 너희가 나처럼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생겼다면 더 이상 나의 반려인간이 아니니라. 나가거라! 낙원은 끝이다!’ 그로써 반려인간이 아닌 유기인간의 인생이 시작되다, 뭐 그런.

우리 인간에게서도 반려견이 유기견이 되곤 한다죠. 그런데 반려견의 삶이 유기견의 삶만 못하리라고, 그건 우리 인간이 오해한 것일 테죠. 만일 어쩌다가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난다면 나는 기꺼이 유기견이 되겠어요. 누군가의 반려견이 되어 재롱을 부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 개의 삶은 아니죠. 주인처럼 손을 흔든다거나 입맞춤을 한다거나, 쥐어주는 크레용을 들고 훈련받은 대로 뭔가를 그린다거나. 뭣 하러 본성에도 없는 것을 죽어라 연마하나요, 기껏 개 주제에.

바로 그런 이유로 인간으로 태어난 이번 생에서는 그냥 인간이고 싶군요. 겨우 자연의 일부를 먹어치우다가 사라지는 존재, 그게 억울할 것도 없답니다. 권태를 달래주는 장치들이 좀 많은가요. 세상 구경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만 있더라도, 온갖 죄들이 난무하는 신화며 성서며 문학작품들도 매력적으로 우리 곁에 있잖아요. 신도, 신들도, 위대한 인간들도 늘 방황하고 죄에 들곤 하더군요. 그러니 어리도록 젊은 날 누군가의 진정(?)을 외면한 것이 죽을죄인가요 뭐. 참상을 참상이라 인식하지 못한 것, 그건 좀 무거운 죄목인 것은 확실해요. 하지만 겁이 나서 모르는 체했을 뿐, 그로써 대단한 이익을 구한 것도 없고요. 굳이 죽을죄라면, 일신의 영달이거나 왕관의 탈취라거나! 타인을 밟더라도 오직 성공의 최정상을 향해! 실재하는 권력을 향해! 합목적적으로! 어라, 어찌된 일이죠? 이성의 합목적성은 진정 선인가요?

세기의 악령인 당신을 불러내서 뭘 하고 있는지. 이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미덕인양 서 있군요. 여기엔 제 허물이나 변명하는 맹한 인간이 투덜거리고 있을 뿐이고. 알아듣기나 하셨소? 언어라는 게 그저 뻔뻔한 수다에나 사용하는 도구로 전락했군요. 누군가 그랬죠, ‘언어는 생각의 하녀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그런 걸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아니라 세치 혀가 병통, 아니 손가락들이 병통이군요. 말은 소리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어 흐르는군요.

 

어, 밖엔 비가 정말 왔었는지 실내 공기조차 축축하군요. 속절없이 날이 저무네요. 이제 어서 밤으로 날아가세요! 또 누군가 대단한 자를 유혹해 내려면 이번엔 어떤 무기를 사용하실까 궁금해집니다. 이런 오지랖, 인간이 악령을 걱정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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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 통권 590호, 2018년 4월호, 189~206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8. 1. 25. 14:21

 

제 33회 PEN문학상 - 국제PEN한국본부

 

 

 

2017.12.22.

 

 

 심사평 [소설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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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작들 중 서용좌 작가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소설은 우선 독특하다. 문체도, 구성도, 내용도 독특하다.

주인공 한금실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왔지만,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40대의 독신녀다. 그녀는 시간 강사로 객지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만나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기도 한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 속에서>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그녀는 예술에서 구원을 찾고자 한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열심히 써내려 간 단상 같기도 하다. 어떤 서사보다 사유가 돋보이는 글이다. 그러나 그 속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고, 제목 그대로 흐릿한 하늘에서도 해를 기다리는 희망이 있어 좋았다.

 

심사위원:  안 영[글], 전영애.

 

 

후보작들 중 서용좌 작가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소설은 우선 독특하다. 문체도, 구성도, 내용도 독특하다.

대체로 소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는 줄거리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없다. 대신에 한 서술자가 자기 자신, 가족, 이웃, 그리고 전혀 모르는 주변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덧붙이며 묘사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종일관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연민 어린 눈길이 있고, 지식인으로서의 고독과 고뇌가 표출되어 있다. 한마디로 줄거리 중심의 서사라기보다는 사유가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이 새로움이 선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 PEN문학 2018.1‧2월호 vol. 141. 23쪽 -

심사위원:  안 영[글], 전영애

 

 

 

 

                        ▲제33회 PEN문학상 시상식

 

 

 

 


 ▲ 수장자들과 PEN 임원진들

 

 

 

  *전경애 PEN부이사장 
  * 김선주 한국여성문인회 이사장

  * 안영 심사위원장

 

 [수상소감]   삶은 파편들의 우연한 조우
 

저에게 PEN문학상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이 기적을 행여 손끝으로 느끼는 날을 설마 꿈꾸었겠습니까. 글을 쓰면서 늘 열에 들떠 있었습니다. 쓰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은 안에서 밀려나왔으니, 굳이 비교하자면 인상주의가 아닌 표현주의 그림입니다.

 

하필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말로 된 소설들을 파먹는 하루하루가 하이에나 같은 삶이라고 깨닫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저도 모르게 ‘내 말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한글로, 아주 서툴게. 그래서 제가 쓰는 이야기는 겨우 파편들입니다. 저의 서술자는 순전한 우연으로 조우하는 인물들에 대한 ‘시선’을 기록할 뿐입니다. 인물들은 우연히 가까이 또는 멀리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거리는 지척이 없고 항성의 간격입니다. 삶은 늘 외롭고 불발입니다. 꿈을 꾸기 때문에, 또는 꿈도 꾸지 않기에 불발입니다. 인생에는 개연성의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글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집니다. 소설의 기본이라고 하는 플롯은 제 관심사가 아닌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인생에는 플롯이 없으니까요. 순간의 채색은 순간으로 남아 영원으로 향합니다. 다음 순간은 명도도 순도도 우연히 바뀌어 옵니다.

 

어떻게 담아낼까. 열심히만 쓴다고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도 못 채우고 캠퍼스를 떠나는 초랭이짓을 하고도 소용없었습니다. 이제 이 과분한 PEN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겁이 덜컥 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소설가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더 잘 쓰지는 못해도 소설가로 살겠습니다. PEN International 헌장처럼 ‘인간의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길이 전승되는’ 예술작품을 향하여, 쉽지 않은 이 길을 가겠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종교 밖에서도 써도 된다면, 저는 이 상으로 거듭납니다.

 

 

 

 

 
- 축하해주신 분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기억해야할 일이다 싶어져서

기억나는 대로 올린다. -

 

 

  •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김선주 이사장님, 이대동창문인회, 조한숙 회장,
  • 국제PEN광주지역위원회, 박판석, 박신영, 조숙형 부회장님들, 구용수선생님.
  • 이대독문과 총동창회, 이대독문과 이병애 명예교수님, 최민숙 교수, 이봉무 교수,
  • 이대독문과 동기모임, 강영옥, 김경희, 김성희, 김영자, 김영희B, 민용자, 오영란.
  • 전남여자고등학교 동창회 (서울) 김문자, 신소영, 이금자, 이성자, 정민옥, 정방하, 한정원, (광주) 이강자.
  • 전남대학교독문과교수일동, 제자 신성엽.
  • 전북대학교 독어교육과 제자 소현숙의 따님.
  • 일고제자들: (57) 김정기, 오한권, 이상칠, (58) 안영근, 김선윤.
  • 아들 재호, 윤기,
  • 조카 조유영, 조병광.
  • 사돈 등 이름 말씀 드리기 어려운 분들....중에는 아사모 회원님들도 있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8. 1. 25. 14:21

 

 

 

 

2017년 한국하인리히뵐학회는

하인리히 뵐 탄생 100주년 사업으로

《하인리히 뵐과 행복사회》를 펴냈다.
하인리히 뵐은 전후독일문단을 대표하며

국제PEN독일본부, 국제PEN세계본부의

회장을 맡았고,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공동저자:
공선옥, 곽정연, 사지원, 서용좌, 안은영,
원윤희, 이화경, 정인모, 정찬종, 최미세 .

 

 

 

 

 

 

하인리히 뵐의 독자 구하기

서용좌

 

내 친구는 묘한 직업을 가졌다. 그는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가 정서법의 몇몇 잠재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문장론의 몇몇 규칙들을 막연하게나마 통달했고, 이제 타이프 한 장 한 장을 문체의 연습들로 점철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런 한 뭉치를 만들자마자, 그것을 그는 원고라고 부른다.

그는 수년 간 이 문화의 황야에서 예술이라고 하는 마른 풀만을 겨우 뜯어먹고 살다가 마침내 출판사를 찾아냈다. 그의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극심하게 낙담해 있는 그를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 기가 꺾일 만했다. 출판사의 정산에 따르면, 반년 동안 350권이 비평을 부탁하려고 무값으로 배포되었고, 몇 우호적인 비평도 나왔고, 실제로는 13권의 책이 팔렸단다. 그로써 내 친구에게는 5,46마르크의 대변이 발생했단다. 그런데 그는 800마르크를 선지급 받았기 때문에, 같은 비율로 셈하자면 이 선지급금은 대략 150년이 되어야 상쇄될 수 있는 것이란다.

이제 문제는 한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평균적으로 그만 못하다는 점이다. 그게 대략 몇몇 거의 전설적이다 싶은 터키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강 70살을 본다. 더러 우리 잃어버린 세대의 기념비적인 혹사를 생각할 때는 안심하고 한 십년을 더 칠 수도 있다.

나는 친구에게 두 번째 책을 쓰라고 충고했다. 책이 출판되자 전문가 권에서는 기쁘게 환대를 받았다. 비평용 책은 400권으로 급등했고, 반년이 지났을 때 판매고는 29권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담배 두 개비를 말아주고는 어깨를 도닥거리며 제안했다, 이제 세 번째 책을 쓰라고. 그런데 친구는 그 말을 아이러니로 이해하고는 모욕을 당한 듯이 물러서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투명작가 비트”라고 문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에 관한 평전 한 권이 나오자 평전이 그의 작품들 전체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근 반년동안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다시 고독한 천재성의 영역에서 맴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와서는 후회막급하다고, 그래 아무튼 세 번째 책을 쓰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이번에는 젤라틴판 등사기로 밀어서 30에서 50권쯤을 서적상에 넘겨주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선지급금을 받았다. 둘째 아이가 태중에 있었고, 그는 말하자면 몇몇 식자공과 인쇄업자, 포장이나 발송담당 여직원들의 실직에 협조하는 죄를 짓기는 싫었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공익적 감각은 항상 정말로 강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에 관한 근 100편 정도의 호의적인 비평이 나왔고, 두 권을 합친 판매부수는 90권을 넘었다. 출판사는 “독자 구하기”이라 명명한 작전에 돌입했다. 곧 각 서점마다 쪽지가 발송되었는데, 내용인즉, 비트-구매자를 확보해놓고 바로 출판사에 알려달라고, 그러면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을 개시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이다.

이 작전의 결과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작해서 4주 만에 저 위쪽 북부에서 한 남성이 나타나서 내 친구의 책에 대해서 묻고 그것을 사고 돈을 지불했음에 틀림없었다. 서점주인은 곧 전보를 보내왔다. “비트­구매자 출현 - 다음 지침은?” 그러는 사이에 서점주인은 구매자를 대화로 붙잡아 놓고 커피를 따라주고 담뱃갑을 권하고 그랬다. 이 모든 행동들이 구매자를 놀라게 했지만, 그는 조용히 그러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자 번개처럼 빨리 출판사의 답변이 왔다. “구매자 이쪽으로 보낼 것 - 전 비용 이쪽 부담.” 다행하게도 구매자는 교사였고 마침 방학이어서 남독으로의 공짜여행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는 첫날은 쾰른까지 갔고 그곳에서 하루저녁 좋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아름다운 라인 강변을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며 여행을 즐겼다.

이틀째 오후 4시경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역에서 출판사까지 택시로 이동했고, 출판사에 가서는 출판업자의 매력적인 부인과 더불어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면서 조금은 들뜬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여행경비를 받아 챙겨서는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2등 열차로 내 친구가 뮤즈에 봉사하고 있는 그 소도시로 갔다. 그곳엔 그 사이 둘 째 아이가 태어난 지 한참 시간이 흘렀고, 친구의 아내는 영화관엘 가고 없었다. - 작가의 아내에게라면 어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허해서는 아니 되는 휴식 아닌가. 구매자는 그러니까 내 친구를 마침 그가 아이들 저녁우유를 데워가지고 그들을 달래려고 노래를 부르고 있던 참에 만나게 되었다. 그 노래란 게 하찮은 어휘들로 구성되었을 밖에. 아무튼 이 말이 최근 독일문학에 언짢은 빛을 던지게 되었으니…….

내 친구는 자신의 독자에게 감동어린 인사를 하고서 대뜸 그의 손에다 커피 분쇄기를 밀어주고는 재빨리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이행했다. 곧 커피 물도 끓었고, 이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 수줍은 사람들이어서 서로 묵묵히 감탄하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마침내 내 친구가 외침소리를 토해냈다.

“선생은 천재이시오 - 제대로 자라난 천재이시란 말이외다!”

“아, 아닙니다,” 손님은 온유하게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작가선생이 그렇소.”

“틀린 말씀,” 내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침내 커피를 따랐다, “천재의 주요 특징은 그 희귀성에 있지요, 그리고 선생이야말로 저보다 더 희귀한 인간계층에 속합니다.”

방문객은 겸손한 이의를 달려고 했지만 혹독한 방식으로 훈시를 받고 말았다. “거 말 마쇼.” 내 친구는 말했다. “책을 쓰는 일은 그게 만들어지는 일에 비해 그저 반쯤 나쁜 일이오, 출판사를 발견하기란 장난질이요. 그러나 책을 산다는 것 - 그것을 저는 천재적 행위라 하는 것입니다. - 그나저나 우유와 설탕을 치시지요.”

그 남자는 우유와 설탕을 치더니만, 수줍어하면서 외투 오른 쪽 안주머니에서 그가 저 위 북쪽 지방에서 샀었던 책을 내밀며 헌정 사인을 부탁했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내 친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한 가지, 선생이 제 원고에다 헌정 사인을 해주는 조건이오!”

그는 서가에서 바인더를 꺼내더니 거기서 빼곡히 쓴 원고뭉치를 꺼내 와서 손님의 커피 잔 옆에 놓고는 말했다. “부디 저에게 기쁨을 주시오!”

손님은 혼란스러워 만년필을 덜덜 떨면서 원고뭉치 마지막 장 맨 아래 여백에다 머뭇머뭇 썼다. “진정한 존경심을 담아서 - 귄터 슐레겔!”

그러나 내 친구가 잉크를 말리기 위해서 그 원고를 난로위에서 흔들고 있던 한 30초쯤이 지나서 손님은 이번에는 외투 왼쪽 안주머니에서 타이프가 되어있는 종이 다발을 꺼내더니 내 친구에게 청했다, 그가 최근 독일문학에 대한 기여라고 간주하는 이 결과물을 출판사에 감정 의뢰해달라고.

내 친구는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자기는 실망감에서 몇 분간 말을 잃고 있었노라고. 이 남자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 그를 깊은 비통에 빠지게 했었노라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몇 분간을 묵묵히 건너다보고 앉아있었다. 마침내 내 친구가 나직이 말했다. “제발 간청하건대 그만 두십시오 - 선생의 독창성을 처분하는 일이외다!”

손님은 고집스레 침묵하고 있더니 자기의 원고를 쓸어 모았다.

“선생께선 여행경비를 받으실 수 없을 겝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생크림케이크가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요. 출판인의 부인은 찡그린 낯빛을 할 것이구먼요. 선생을 위해서 간청 드리는 것이니, 제발 그만 두시지요!”

그러나 손님은 찡그린 채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내 친구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한 인간을 구한다는 뜨거운 노력으로 출판사의 정산서를 가져오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슐레겔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서 내 친구는 이야기를 중단하고자 했지만, 나는 그가 방문객과 그만 드잡이를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휴지부가 발생했고, 그 동안 내 친구는 불끈 쥔 주먹을 생각 깊게 내려다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들은 것은 슐레겔이 짤막한 인사와 함께 떠났다는 것이고, 그의 원고는 놓아두고 갔었더란다.

그러는 사이에 슐레겔의 장편 『슬프도다, 페넬로페여!』가 귀향소설로서 전문가 권에서 상당한 주목을 이끌어냈다. 슐레겔은 교사직을 떠났고,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직업을 떠났는데, 말하자면 다른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다. 나로서는 여전히 직업도 아니라고 간주하는 그런 직종에 종사한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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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구하기 Die Suche nach dem Leser」는 하인리히 뵐이 1954년에 함부르크의 《일요신문 Sonntagsblatt》에 발표한 단편이다. 여기에서는 Böll, Heinrich: Romane und Erzählungen 2. Hrsg. von Bernd Balzer, Köln 1977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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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공선옥, 곽정연, 사지원, 서용좌, 안은영, 원윤희, 이화경, 정인모, 정찬종, 최미세 공저,《하인리히 뵐과 행복사회》, 한국문화사, 13~18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8. 1. 25. 14:21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

― 서용좌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장두영(문학평론가)

 

 

1. 한금실의 시선

 

서용좌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장편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소설집이라 불러야 할지 망설여진다. 책표지에 떡하니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으니 당연히 장편소설이 아닌가? 작가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 《표현형》이라는 전작에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 곧 한 편의 장편소설 아닌가?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보면 <슬픈 족속>부터 <안개>까지 12편의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작품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굳이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시작과 중간과 끝을 지니고 있어, 따로 떼어 발표하더라도 단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술자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12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한금실’이라는 인물이 서술자로 설정되어 있다. 한금실의 눈과 귀를 통해 소설의 모든 내용이 포착된다. 이야기 12편은 각기 다른 주제의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서술자가 그것을 묶어냄으로써 이야기들 사이에는 제법 견고한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굳이 장편소설이 아닌 단편소설에 가깝다고 보더라도 뚜렷이 연작소설을 떠올리게 하게끔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바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서술자 한금실의 존재이다.

 

실상 《흐릿한 하늘의 해》는 한금실의 시선으로 읽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작가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쓴다」에서는 글의 말미에 ‘한금실, 가공의 서술자’가 썼다고 적혀 있다. 굳이 작가의 이름대신 한금실의 이름을 들고 나온 것, 그것도 ‘가공의 서술자’임을 또 다시 강조한 것은 실제 작가의 존재를 소설 속 가공의 인물로 완벽히 대체하고 싶은 소설가의 원초적 욕망의 반영일 터이다. 물론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의 분리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분리의 성공이 작품의 성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허구적 형상화의 성취 정도를 따지는 차원에서는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흐릿한 하늘의 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소설을 읽다보면 한금실에 관한 신상정보들이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그것도 반복적으로 뛰쳐나온다. 1975년생, 여성, 미혼 혹은 비혼, 프랑스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현재는 광주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시간강사.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어떤 성격이고, 동생은 몇 명인지 따위.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아무리 《흐릿한 하늘의 해》를 독립된 12편의 단편들로 여기고 읽어나가더라도 어느새 한 손에는 한금실의 프로필이 슬그머니 쥐어진다. 어느 한 편이 아니라 12편 전체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어, 소설은 연속성을 확보하고, 일단 확보된 연속성은 구체성의 획득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2편 이야기의 모든 내용이 결국 그녀의 사상과 감정을 경유한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가 취할 태도나 반응은 무엇일지 궁금하게 여기면서 따라가게 된다. 곧,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따라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어가는 일은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된다. 또한 12편 이야기는 오롯이 그녀의 초상이 된다.

 

 

2. 관찰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에 속한 12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자 한금실은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남들은 지나치기 쉬운 작고 사소한 일상적 소재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진득하게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다. 이를 테면 <유예된 시간>에서 발견한 ‘농게’가 그러하다. 남들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을 양념게장 속 아직 살아 있는 게 한 마리, 한금실은 묻어 있는 게장 양념을 씻어내어 기어이 농게의 분홍색 집게발이 드러나도록 만든다. 물론 표면적으로 ‘게장 파동’은 친척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사건이지만, 그것은 허구적 형상화의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다. 정작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농게의 꿈틀거림을 관찰하고, 나아가 유예된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해 사색하는 인물이 바로 한금실이기 때문이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금실 앞에 관찰의 대상들이 툭툭 던져진다. 그녀의 관찰이란 우연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다리 밑>의 첫 문장은 우연이 소설의 시작임을 분명히 한다. “거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149면) 농게(<유예된 시간>)와 윤동주 시집(<슬픈 족속>)은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것들이었고, 집 마당에서 굴뚝새를 관찰하거나(<굴뚝새>), 판교에 가서 노부부를 만나게 된 것(<화학 반응>)은 본인의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심지어 출판 관련 일 때문에 민 선생을 만나러 가던 도중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을 ‘우연히’ 만난 것(<삼천리강산에 새봄이>)을 보더라도 한금실의 관찰이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우연의 강조는 곧 개연성의 법칙을 따르는 플롯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플롯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물의 운용 방식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막상 주된 관찰 대상이 등장하고 나면 그 전에 나왔던 인물은 서사의 중심에 완전히 밀려나버리는 현상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농게를 집어들고 즐거워했던 친척 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져 다시는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친척 아이들은 한금실에게 농게라는 관찰 대상을 던져주기 위해 동원된 인물에 불과하며, 일단 주어진 역할을 마쳤으니 무대에서 퇴장한 셈이다. 졸을 잘 움직여 나중에 장군을 부르겠다는 욕심은 없는 듯하다. 극적인 갈등의 고조라든가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coup de grâce)이 자아내는 짜릿함을 찾아볼 수 없다. 사건은 평탄하고 밋밋하다.

 

대신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한금실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변화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 관찰은 소설의 장면 묘사를 감당하는 풍경 스케치로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한 인물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젖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마주친 농게로 하여 나는 나의 유예된 시간을 보았다. (……) 대야 속의 농게와 원룸 속의 나. 나는 농게다. 농게는 나다.”(<유예된 시간>, 61-62면) 간장게장 속 우연히 발견한 농게에 대한 관찰이 거듭되는 파편적인 단상을 거치고, 어느 순간 깊이 있는 사색과 회의, 반성을 거쳐 급기야 자기 자신이 농게랑 다를 바 없다는 비약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내면적 변화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급기야 한술 더 떠서, 온 인류가 농게이자 진드기라고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면서 폭발적인 비약을 거듭한다.

 

그보다 우리 모두가 은접시 위 치즈 덩이 속에서 생성된 진드기들의 운명은 아닐까? 지구째로 우리를 삼켜버릴 거인은 원전 폭발일까? 억눌린 사람들의 자폭일까? 오늘날 잘나가는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맹신자들도 포함될까? 우리에게 유예된 시간은 얼마일까? 유예된 시간이 있기나 할까? 나는 불혹이 되도록 살아보지도 못한 나의 삶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 인류를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빠져든다. 비혼 여성 세입자, 대한민국 400만 넘는 1인 가구의 한 사람으로 최저 생계비 월 61만 7,281원을 벌어야 하는 코앞의 사실을 잊다니.(<유예된 시간>, 62-63면)

 

‘오지랖 떨기’와 ‘옆길로 새기’야말로 한금실의 주특기이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광폭의 행보다. 구속적인 플롯의 짜임새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소한 일상적 소재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거기에 상상력을 날개를 달아주는 것, 관찰이 자유로운 연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연상에 연상을 거듭하여 전 지구적인 차원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 뚜렷한 목적지와 결론에 도달함 없이 끝없이 관찰과 상상과 사색을 거듭하는 것.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적 변화의 방향은 구심적인 것이 아니라 원심적인 것에 가깝다. 이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관찰자 한금실은 동시에 한없이 자유로운 몽상가 한금실이다.

 

 

3. 번역가의 시선

 

미라보 다리―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 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슬픈 족속>, 30-31면)

 

한금실의 시선에서는 강한 서구지향성이 감지된다. 용정 용문교에서 ‘미라보 다리’를 떠올리는 그녀의 아련한 눈빛을 보라.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한 해란강과 거기 놓인 용문교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하고 실망과 허탈함을 느끼면서, 한금실은 미라보 다리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떠올린다. 무등산을 오르면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떠올리거나(<산의 소리>), 다리 밑에서 올려다 본 하늘을 두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은 다니엘 오테이유의 차가운 눈빛 그대로였다.”(<다리 밑>, 149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단순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사가 서구문화와 문학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포착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관찰의 내용은 일종의 ‘번역’ 과정을 거쳐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별도의 목록이 필요할 정도로 서구작가와 작품이 빈번하게 언급된다. 아폴리네르, 빌헬름 베클린, 잉에보르크 바흐만, 하인리히 뵐, 다니엘 오테이유, 지브란, 라 보에시, 쿠젠베르크, 토마스 만, 헤세 등. 대체로 프랑스와 독일에 집중되어 있는 목록은 서구문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에게는 두꺼운 장벽이 될 수 있다. 서술자도 그 점을 의식한 듯, 서구작가나 작품이 언급될 때는 주석에 가까운 학구적인 설명을 첨부하는데, 이는 서구문학의 배경 속에서 작품을 풍성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역으로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이 자칫 소설의 흥미를 감퇴시킬 위험성도 지닌다.

 

서구지향성은 심리의 표현뿐만 아니라 사태의 해석이나 판단의 영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소설 속에서 다루면서 서독 초기 공산당 해산의 역사를 언급하며 비판의 날을 세운 것은 대표적인 예시다.(<날마다 비겁함>)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밝히는 외사촌과의 대화에서도 동성애와 동성애 차별의 역사를 프랑스의 경우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목소리>)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서 경험한 서구의 사례를 한국에 도입하여 적용해보는 것, 이것이 그동안 한국의 학계가 수십 년 동안 수행해온 작업이다. 어떻게 보면 서구의 중심지에서 유학을 한 한금실은 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철저히 내면화한 인물이며, 그러다보니 소설 속에 내면화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녹아 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금실이 무턱대고 서구를 추종하는 얼치기라는 뜻은 아니다. 정반대로 그녀는 자신이 서구의 문화와 지식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다. 마치 강의하듯 라 보에시의 사상에 대해 한참 떠들다가도 “느닷없는 파리 시절에 대한 향수가 멋쩍게 느껴졌다.”(<날마다 비겁함>, 185면)고 깨닫는 순간, 그녀는 과거 유학시절 프랑스가 아닌 현재 한국에 있는 자신의 현실과 대면한다.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외국 문학 평원에서 하이에나가 된 느낌이었어요”(<날마다 비겁함>, 175면)라고 밝히는 대목에서도 그녀가 맹목적인 서구지향성과는 뚜렷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라는 윤동주의 시구를 읽으며 자신이 나이키를 신고 캘빈 클라인을 입고 있음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한다거나(<슬픈 족속>, 35면),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청출어람>, 78면)라면서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 또한 그녀가 서구와 한국을 ‘동시에’ 관찰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원본의 언어와 번역본의 언어를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 번역가의 기본 임무가 아니던가.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환기되는 서구 문화의 조각들은 한금실과 우리들이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과 일상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양쪽을 들여다보면서 비교·대조하면서 번역하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우리를 반성으로 이끈다. 이것은 세심한 관찰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예민한 감각으로 대상을 관찰하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의의를 추출하기 위한 판단의 잣대가 필요하다. 한금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잣대를 소설 속에 끌어들여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우연한 관찰을 넘어 진지한 해석과 통렬한 반성으로 거침없이 도약하는 곳, 그곳이 바로 번역가의 시선이 향한 곳이다.

 

 

4. 여행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다양한 종류의 여행을 서사의 실마리로 활용하고 있다. 맨 앞에 실려 있는 <슬픈 족속>은 백두산 관광 여행을 다루고, <유예된 시간>은 가족 여행 중 겪은 에피소드가 중심이며, <산의 소리>에서는 친목 도모를 위한 무등산 등반에 나선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사전적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여행으로, 여행지에서 관찰한 내용에 여러 상념과 사색이 얹어지면서 소설의 내용이 펼쳐진다. 판교에 사는 친척 할머니를 방문한다든가(<화학 반응>) 옛 도자기 마을에 사는 민 선생을 방문하는 식의 짧은 여행(<삼천리강산에 새봄이>)도 있다. 한금실은 그곳에서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그것을 소설로 옮기는 형식을 취한다. 만약 그곳으로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관찰’은 없었을 것이고, 소설 또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금실은 방학이면 부모가 계신 평택에서 머물다가 다시 학기가 시작되면 광주의 원룸으로 돌아오는데, 평택과 광주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도 일종의 여행으로 볼 수 있다. <굴뚝새>, <목소리> 등이 평택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속하며, 특히 <굴뚝새>는 평택에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쌍용차 고공 농성을 작품의 전면에 내걸고 있다. <다리 밑>에서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길을 가다가 잠깐 천변으로 내려가 보는 것 같은 여행 같지도 않은 여행도 있다. 평택이든 천변이든 우연히 그곳 여행지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관찰했다.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은 곧 소설 쓰기의 시작이 된다. “나는 천변에 더 나가보기로 했다. 찬찬히 살펴보거나 가능하면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쪽이 훨씬 생생한 체험이고 글감일 터였다.”(<다리 밑>, 160면) 만약 광주의 원룸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소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소설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여행과는 별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여행을 다룬다. <청출어람>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청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있어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외규장각 의궤의 머나먼 여정을 다룬 셈이라서 결국에는 여행에 한 발을 걸친 셈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안개>에서 배승한은 유럽 여행 중이다. 그는 한금실에게 ‘안개 속입니다, 이곳도.’라는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녀는 배승한이 머물고 있는 그곳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프랑스 유학 시절의 기억은 적어도 내면의 차원에서 그녀가 여전히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흐릿한 하늘의 해》는 시종일관 여행 중인 한금실이 남긴 메모와 일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여행은 항상 두 개의 장소를 비교하게 한다. 하나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터전, 다른 하나는 일상을 벗어난 여행지. 두 개의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상정한 채 이루어지는 것이 여행이라 할 때, 그것은 두 개의 언어를 오고가며 양쪽을 다 살펴보아야 하는 번역의 작업과도 닮아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여행을 하거나, 끊임없이 여행의 기억이나 여행자의 존재가 상기된다는 것은, 서구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이 소설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습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때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언어는 서로 얽히고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해석과 반성의 가능성으로 나아감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삼천리강산에 새봄이>에서는 공간의 축이 아닌 시간의 축을 따라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YH 무역 농성 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죽은 남순과 여동생의 트라우마에 전염된 동순 할머니의 사연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과거의 상처를 현재로 불러온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 농성 걱정하는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삼천리강산에 새봄이>, 243면) 과거와 현재가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오랜 침묵 속에 망각되었던 과거의 상처는 뒤늦은 애도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과거가 현재에 되살아남으로써 과거의 YH 무역 농성 사건은 현재의 평택 쌍용차 굴뚝 농성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재가 과거를 위로하고, 과거가 현재에 힘을 실어주는 연대의 방식이자 협력의 방식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 수록된 12편의 이야기들은 간혹 서로 간에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여행이나 번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자 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홈리스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다리 밑>을 이어주고, 쌍용차 고공 농성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굴뚝새>를, 다시 똥물 소재가 <굴뚝새>와 <삼천리강산에 새봄이>를 연결한다. 소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날마다 비겁함>에서는 배승한도 바흐만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유예된 시간>과 연결되기도 한다. 엄연한 간극을 지닌 채 따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래서 어쩌면 별개의 단편소설들을 묶어놓은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작고 사소한 연결고리를 근거로 서로 엮인다는 발상이 12편의 이야기를 연작소설처럼 보이게 하고, 한 편의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게 한다.

 

쌍둥이 형제의 아버지는 무한한 지식욕으로 아들들에게 대백과사전을 암기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페터에게는 알파벳 ‘에이’에서 시작하여 ‘엘’까지를, 파울에게는 ‘케이’에서 ‘제트’까지를 통달하게 하였다. 결과는 완벽했고, 쌍둥이 형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지식을 보충하여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쌍둥이들이 서로 소통해야 할 경우였다. 그들은 ‘케이’에서 ‘엘’ 사이만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작은 영역이 그들의 천국이 될 수 있었을망정, 파울은 ‘에이’로 시작하는 사과도 몰랐고, 페터는 ‘피’로 시작하는 복숭아를 몰랐다고.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굴뚝새>, 215면)

 

두 개의 공간을, 두 개의 언어를, 두 개의 작품을 오고가기에 바쁜 여행자 한금실이 12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긴 여정의 끝에 도달한 지점에는 ‘소통을 향한 갈망’이 놓여있다.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 서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여행을 시작할 때, 남들은 미쳐 눈여겨보지 않았던 무언가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제야 그녀는 관찰을 시작하고, 그 의미를 해석·번역할 수 있다. 끊임없이 맞은편을 향해, 혹은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노력이야말로 여행자의 시선에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미덕이라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말하고 있다.

 

 

5. 교집합을 찾는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으면 안개가 자욱한 고흥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순규의 고향이 그곳 ‘섬마을’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아직 유럽을 떠돌고 있는 배승한이 여전히 ‘안개 속’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바다 위 섬들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저마다 외따로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기에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서로에게는 눈을 감을 채, 자신만의 백과사전 조각을 암기하기에만 급급하기에 무척이나 위태롭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압축한다. “밤이다. 안개보다 짙은 회색의 밤이다.”(<안개>, 336면)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과 섬을 횡단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는 한금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무척 호기심 어린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이 발견한 조각들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돌아다닌다. 그러고 나서는 번역자의 시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관찰 조각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기에 바쁘다. 교집합을 찾으려는 노력, 장소와 장소 사이의 교집합, 언어와 언어 사이의 교집합,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집합,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집합을 찾으려고 그녀는 부단히도 애를 쓴다.

 

과연 그녀는 그토록 갈망하는 교집합을 찾아 외로운 섬들을 횡단할 수 있을 것인가? 톱니바퀴 인생을 살아가는 1975년생 지방시에게 자신을 가둔 굴레를 파괴하고 횃불을 들어 밤을 밝히기를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도 연약하고 가냘프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화해나 통합의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결말은 달콤할 수 있겠지만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하므로. 대신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경유한 우리 독자들에게 ‘그녀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전달된다. 아니, 교집합을 찾으려는 여행은 소설이 끝나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또 시작해야만 한다는 가냘픈 외침이 잿빛의 흐릿한 하늘 너머에서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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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소설시대』 통권20호, 405~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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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