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8. 1. 25. 14:21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

― 서용좌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장두영(문학평론가)

 

 

1. 한금실의 시선

 

서용좌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장편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소설집이라 불러야 할지 망설여진다. 책표지에 떡하니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으니 당연히 장편소설이 아닌가? 작가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 《표현형》이라는 전작에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 곧 한 편의 장편소설 아닌가?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보면 <슬픈 족속>부터 <안개>까지 12편의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작품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굳이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시작과 중간과 끝을 지니고 있어, 따로 떼어 발표하더라도 단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술자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12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한금실’이라는 인물이 서술자로 설정되어 있다. 한금실의 눈과 귀를 통해 소설의 모든 내용이 포착된다. 이야기 12편은 각기 다른 주제의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서술자가 그것을 묶어냄으로써 이야기들 사이에는 제법 견고한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굳이 장편소설이 아닌 단편소설에 가깝다고 보더라도 뚜렷이 연작소설을 떠올리게 하게끔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바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서술자 한금실의 존재이다.

 

실상 《흐릿한 하늘의 해》는 한금실의 시선으로 읽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작가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쓴다」에서는 글의 말미에 ‘한금실, 가공의 서술자’가 썼다고 적혀 있다. 굳이 작가의 이름대신 한금실의 이름을 들고 나온 것, 그것도 ‘가공의 서술자’임을 또 다시 강조한 것은 실제 작가의 존재를 소설 속 가공의 인물로 완벽히 대체하고 싶은 소설가의 원초적 욕망의 반영일 터이다. 물론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의 분리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분리의 성공이 작품의 성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허구적 형상화의 성취 정도를 따지는 차원에서는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흐릿한 하늘의 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소설을 읽다보면 한금실에 관한 신상정보들이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그것도 반복적으로 뛰쳐나온다. 1975년생, 여성, 미혼 혹은 비혼, 프랑스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현재는 광주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시간강사.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어떤 성격이고, 동생은 몇 명인지 따위.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아무리 《흐릿한 하늘의 해》를 독립된 12편의 단편들로 여기고 읽어나가더라도 어느새 한 손에는 한금실의 프로필이 슬그머니 쥐어진다. 어느 한 편이 아니라 12편 전체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어, 소설은 연속성을 확보하고, 일단 확보된 연속성은 구체성의 획득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2편 이야기의 모든 내용이 결국 그녀의 사상과 감정을 경유한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가 취할 태도나 반응은 무엇일지 궁금하게 여기면서 따라가게 된다. 곧,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따라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어가는 일은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된다. 또한 12편 이야기는 오롯이 그녀의 초상이 된다.

 

 

2. 관찰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에 속한 12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자 한금실은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남들은 지나치기 쉬운 작고 사소한 일상적 소재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진득하게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다. 이를 테면 <유예된 시간>에서 발견한 ‘농게’가 그러하다. 남들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을 양념게장 속 아직 살아 있는 게 한 마리, 한금실은 묻어 있는 게장 양념을 씻어내어 기어이 농게의 분홍색 집게발이 드러나도록 만든다. 물론 표면적으로 ‘게장 파동’은 친척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사건이지만, 그것은 허구적 형상화의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다. 정작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농게의 꿈틀거림을 관찰하고, 나아가 유예된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해 사색하는 인물이 바로 한금실이기 때문이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금실 앞에 관찰의 대상들이 툭툭 던져진다. 그녀의 관찰이란 우연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다리 밑>의 첫 문장은 우연이 소설의 시작임을 분명히 한다. “거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149면) 농게(<유예된 시간>)와 윤동주 시집(<슬픈 족속>)은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것들이었고, 집 마당에서 굴뚝새를 관찰하거나(<굴뚝새>), 판교에 가서 노부부를 만나게 된 것(<화학 반응>)은 본인의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심지어 출판 관련 일 때문에 민 선생을 만나러 가던 도중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을 ‘우연히’ 만난 것(<삼천리강산에 새봄이>)을 보더라도 한금실의 관찰이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우연의 강조는 곧 개연성의 법칙을 따르는 플롯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플롯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물의 운용 방식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막상 주된 관찰 대상이 등장하고 나면 그 전에 나왔던 인물은 서사의 중심에 완전히 밀려나버리는 현상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농게를 집어들고 즐거워했던 친척 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져 다시는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친척 아이들은 한금실에게 농게라는 관찰 대상을 던져주기 위해 동원된 인물에 불과하며, 일단 주어진 역할을 마쳤으니 무대에서 퇴장한 셈이다. 졸을 잘 움직여 나중에 장군을 부르겠다는 욕심은 없는 듯하다. 극적인 갈등의 고조라든가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coup de grâce)이 자아내는 짜릿함을 찾아볼 수 없다. 사건은 평탄하고 밋밋하다.

 

대신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한금실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변화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 관찰은 소설의 장면 묘사를 감당하는 풍경 스케치로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한 인물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젖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마주친 농게로 하여 나는 나의 유예된 시간을 보았다. (……) 대야 속의 농게와 원룸 속의 나. 나는 농게다. 농게는 나다.”(<유예된 시간>, 61-62면) 간장게장 속 우연히 발견한 농게에 대한 관찰이 거듭되는 파편적인 단상을 거치고, 어느 순간 깊이 있는 사색과 회의, 반성을 거쳐 급기야 자기 자신이 농게랑 다를 바 없다는 비약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내면적 변화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급기야 한술 더 떠서, 온 인류가 농게이자 진드기라고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면서 폭발적인 비약을 거듭한다.

 

그보다 우리 모두가 은접시 위 치즈 덩이 속에서 생성된 진드기들의 운명은 아닐까? 지구째로 우리를 삼켜버릴 거인은 원전 폭발일까? 억눌린 사람들의 자폭일까? 오늘날 잘나가는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맹신자들도 포함될까? 우리에게 유예된 시간은 얼마일까? 유예된 시간이 있기나 할까? 나는 불혹이 되도록 살아보지도 못한 나의 삶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 인류를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빠져든다. 비혼 여성 세입자, 대한민국 400만 넘는 1인 가구의 한 사람으로 최저 생계비 월 61만 7,281원을 벌어야 하는 코앞의 사실을 잊다니.(<유예된 시간>, 62-63면)

 

‘오지랖 떨기’와 ‘옆길로 새기’야말로 한금실의 주특기이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광폭의 행보다. 구속적인 플롯의 짜임새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소한 일상적 소재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거기에 상상력을 날개를 달아주는 것, 관찰이 자유로운 연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연상에 연상을 거듭하여 전 지구적인 차원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 뚜렷한 목적지와 결론에 도달함 없이 끝없이 관찰과 상상과 사색을 거듭하는 것.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적 변화의 방향은 구심적인 것이 아니라 원심적인 것에 가깝다. 이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관찰자 한금실은 동시에 한없이 자유로운 몽상가 한금실이다.

 

 

3. 번역가의 시선

 

미라보 다리―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 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슬픈 족속>, 30-31면)

 

한금실의 시선에서는 강한 서구지향성이 감지된다. 용정 용문교에서 ‘미라보 다리’를 떠올리는 그녀의 아련한 눈빛을 보라.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한 해란강과 거기 놓인 용문교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하고 실망과 허탈함을 느끼면서, 한금실은 미라보 다리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떠올린다. 무등산을 오르면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떠올리거나(<산의 소리>), 다리 밑에서 올려다 본 하늘을 두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은 다니엘 오테이유의 차가운 눈빛 그대로였다.”(<다리 밑>, 149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단순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사가 서구문화와 문학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포착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관찰의 내용은 일종의 ‘번역’ 과정을 거쳐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별도의 목록이 필요할 정도로 서구작가와 작품이 빈번하게 언급된다. 아폴리네르, 빌헬름 베클린, 잉에보르크 바흐만, 하인리히 뵐, 다니엘 오테이유, 지브란, 라 보에시, 쿠젠베르크, 토마스 만, 헤세 등. 대체로 프랑스와 독일에 집중되어 있는 목록은 서구문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에게는 두꺼운 장벽이 될 수 있다. 서술자도 그 점을 의식한 듯, 서구작가나 작품이 언급될 때는 주석에 가까운 학구적인 설명을 첨부하는데, 이는 서구문학의 배경 속에서 작품을 풍성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역으로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이 자칫 소설의 흥미를 감퇴시킬 위험성도 지닌다.

 

서구지향성은 심리의 표현뿐만 아니라 사태의 해석이나 판단의 영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소설 속에서 다루면서 서독 초기 공산당 해산의 역사를 언급하며 비판의 날을 세운 것은 대표적인 예시다.(<날마다 비겁함>)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밝히는 외사촌과의 대화에서도 동성애와 동성애 차별의 역사를 프랑스의 경우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목소리>)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서 경험한 서구의 사례를 한국에 도입하여 적용해보는 것, 이것이 그동안 한국의 학계가 수십 년 동안 수행해온 작업이다. 어떻게 보면 서구의 중심지에서 유학을 한 한금실은 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철저히 내면화한 인물이며, 그러다보니 소설 속에 내면화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녹아 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금실이 무턱대고 서구를 추종하는 얼치기라는 뜻은 아니다. 정반대로 그녀는 자신이 서구의 문화와 지식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다. 마치 강의하듯 라 보에시의 사상에 대해 한참 떠들다가도 “느닷없는 파리 시절에 대한 향수가 멋쩍게 느껴졌다.”(<날마다 비겁함>, 185면)고 깨닫는 순간, 그녀는 과거 유학시절 프랑스가 아닌 현재 한국에 있는 자신의 현실과 대면한다.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외국 문학 평원에서 하이에나가 된 느낌이었어요”(<날마다 비겁함>, 175면)라고 밝히는 대목에서도 그녀가 맹목적인 서구지향성과는 뚜렷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라는 윤동주의 시구를 읽으며 자신이 나이키를 신고 캘빈 클라인을 입고 있음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한다거나(<슬픈 족속>, 35면),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청출어람>, 78면)라면서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 또한 그녀가 서구와 한국을 ‘동시에’ 관찰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원본의 언어와 번역본의 언어를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 번역가의 기본 임무가 아니던가.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환기되는 서구 문화의 조각들은 한금실과 우리들이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과 일상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양쪽을 들여다보면서 비교·대조하면서 번역하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우리를 반성으로 이끈다. 이것은 세심한 관찰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예민한 감각으로 대상을 관찰하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의의를 추출하기 위한 판단의 잣대가 필요하다. 한금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잣대를 소설 속에 끌어들여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우연한 관찰을 넘어 진지한 해석과 통렬한 반성으로 거침없이 도약하는 곳, 그곳이 바로 번역가의 시선이 향한 곳이다.

 

 

4. 여행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다양한 종류의 여행을 서사의 실마리로 활용하고 있다. 맨 앞에 실려 있는 <슬픈 족속>은 백두산 관광 여행을 다루고, <유예된 시간>은 가족 여행 중 겪은 에피소드가 중심이며, <산의 소리>에서는 친목 도모를 위한 무등산 등반에 나선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사전적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여행으로, 여행지에서 관찰한 내용에 여러 상념과 사색이 얹어지면서 소설의 내용이 펼쳐진다. 판교에 사는 친척 할머니를 방문한다든가(<화학 반응>) 옛 도자기 마을에 사는 민 선생을 방문하는 식의 짧은 여행(<삼천리강산에 새봄이>)도 있다. 한금실은 그곳에서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그것을 소설로 옮기는 형식을 취한다. 만약 그곳으로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관찰’은 없었을 것이고, 소설 또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금실은 방학이면 부모가 계신 평택에서 머물다가 다시 학기가 시작되면 광주의 원룸으로 돌아오는데, 평택과 광주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도 일종의 여행으로 볼 수 있다. <굴뚝새>, <목소리> 등이 평택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속하며, 특히 <굴뚝새>는 평택에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쌍용차 고공 농성을 작품의 전면에 내걸고 있다. <다리 밑>에서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길을 가다가 잠깐 천변으로 내려가 보는 것 같은 여행 같지도 않은 여행도 있다. 평택이든 천변이든 우연히 그곳 여행지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관찰했다.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은 곧 소설 쓰기의 시작이 된다. “나는 천변에 더 나가보기로 했다. 찬찬히 살펴보거나 가능하면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쪽이 훨씬 생생한 체험이고 글감일 터였다.”(<다리 밑>, 160면) 만약 광주의 원룸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소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소설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여행과는 별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여행을 다룬다. <청출어람>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청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있어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외규장각 의궤의 머나먼 여정을 다룬 셈이라서 결국에는 여행에 한 발을 걸친 셈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안개>에서 배승한은 유럽 여행 중이다. 그는 한금실에게 ‘안개 속입니다, 이곳도.’라는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녀는 배승한이 머물고 있는 그곳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프랑스 유학 시절의 기억은 적어도 내면의 차원에서 그녀가 여전히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흐릿한 하늘의 해》는 시종일관 여행 중인 한금실이 남긴 메모와 일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여행은 항상 두 개의 장소를 비교하게 한다. 하나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터전, 다른 하나는 일상을 벗어난 여행지. 두 개의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상정한 채 이루어지는 것이 여행이라 할 때, 그것은 두 개의 언어를 오고가며 양쪽을 다 살펴보아야 하는 번역의 작업과도 닮아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여행을 하거나, 끊임없이 여행의 기억이나 여행자의 존재가 상기된다는 것은, 서구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이 소설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습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때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언어는 서로 얽히고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해석과 반성의 가능성으로 나아감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삼천리강산에 새봄이>에서는 공간의 축이 아닌 시간의 축을 따라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YH 무역 농성 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죽은 남순과 여동생의 트라우마에 전염된 동순 할머니의 사연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과거의 상처를 현재로 불러온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 농성 걱정하는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삼천리강산에 새봄이>, 243면) 과거와 현재가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오랜 침묵 속에 망각되었던 과거의 상처는 뒤늦은 애도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과거가 현재에 되살아남으로써 과거의 YH 무역 농성 사건은 현재의 평택 쌍용차 굴뚝 농성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재가 과거를 위로하고, 과거가 현재에 힘을 실어주는 연대의 방식이자 협력의 방식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 수록된 12편의 이야기들은 간혹 서로 간에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여행이나 번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자 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홈리스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다리 밑>을 이어주고, 쌍용차 고공 농성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굴뚝새>를, 다시 똥물 소재가 <굴뚝새>와 <삼천리강산에 새봄이>를 연결한다. 소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날마다 비겁함>에서는 배승한도 바흐만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유예된 시간>과 연결되기도 한다. 엄연한 간극을 지닌 채 따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래서 어쩌면 별개의 단편소설들을 묶어놓은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작고 사소한 연결고리를 근거로 서로 엮인다는 발상이 12편의 이야기를 연작소설처럼 보이게 하고, 한 편의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게 한다.

 

쌍둥이 형제의 아버지는 무한한 지식욕으로 아들들에게 대백과사전을 암기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페터에게는 알파벳 ‘에이’에서 시작하여 ‘엘’까지를, 파울에게는 ‘케이’에서 ‘제트’까지를 통달하게 하였다. 결과는 완벽했고, 쌍둥이 형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지식을 보충하여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쌍둥이들이 서로 소통해야 할 경우였다. 그들은 ‘케이’에서 ‘엘’ 사이만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작은 영역이 그들의 천국이 될 수 있었을망정, 파울은 ‘에이’로 시작하는 사과도 몰랐고, 페터는 ‘피’로 시작하는 복숭아를 몰랐다고.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굴뚝새>, 215면)

 

두 개의 공간을, 두 개의 언어를, 두 개의 작품을 오고가기에 바쁜 여행자 한금실이 12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긴 여정의 끝에 도달한 지점에는 ‘소통을 향한 갈망’이 놓여있다.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 서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여행을 시작할 때, 남들은 미쳐 눈여겨보지 않았던 무언가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제야 그녀는 관찰을 시작하고, 그 의미를 해석·번역할 수 있다. 끊임없이 맞은편을 향해, 혹은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노력이야말로 여행자의 시선에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미덕이라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말하고 있다.

 

 

5. 교집합을 찾는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으면 안개가 자욱한 고흥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순규의 고향이 그곳 ‘섬마을’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아직 유럽을 떠돌고 있는 배승한이 여전히 ‘안개 속’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바다 위 섬들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저마다 외따로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기에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서로에게는 눈을 감을 채, 자신만의 백과사전 조각을 암기하기에만 급급하기에 무척이나 위태롭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압축한다. “밤이다. 안개보다 짙은 회색의 밤이다.”(<안개>, 336면)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과 섬을 횡단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는 한금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무척 호기심 어린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이 발견한 조각들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돌아다닌다. 그러고 나서는 번역자의 시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관찰 조각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기에 바쁘다. 교집합을 찾으려는 노력, 장소와 장소 사이의 교집합, 언어와 언어 사이의 교집합,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집합,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집합을 찾으려고 그녀는 부단히도 애를 쓴다.

 

과연 그녀는 그토록 갈망하는 교집합을 찾아 외로운 섬들을 횡단할 수 있을 것인가? 톱니바퀴 인생을 살아가는 1975년생 지방시에게 자신을 가둔 굴레를 파괴하고 횃불을 들어 밤을 밝히기를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도 연약하고 가냘프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화해나 통합의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결말은 달콤할 수 있겠지만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하므로. 대신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경유한 우리 독자들에게 ‘그녀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전달된다. 아니, 교집합을 찾으려는 여행은 소설이 끝나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또 시작해야만 한다는 가냘픈 외침이 잿빛의 흐릿한 하늘 너머에서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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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소설시대』 통권20호, 405~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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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10. 25. 18:46

요가교실

 

 

하아나 두울, 하나 두울.

요가선생님은 깡마른 작은 체구에도 목청껏 단어들을 내뱉는다. 첫해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호들을 이젠 대충 알아듣는다. 소 - 고양이 - 소 - 고양이 - 자, 손바닥하고 무릎, 발등까지 완전히 바닥에 밀착시키고, 이제 완전 고양이자세요, 두 팔 바닥으로 쭉 벋고 가슴 눌러서 바닥에, 자, 이제 아기자세로 풀고요.

이상하다. 아기자세라고 하면 그냥 그대로 ‘한하고’ 있고 싶어진다. 정말 우리 모두 어머니 몸속에서 그렇게 아기자세를 취하고 있었을까. 조그맣게 몸이 수축되면서 아주 편안함 그 자체다. 하긴, 누워서 길게 뻗고 팔까지 올린 기지개자세가 더 편해야 맞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푸른 초원을 생각하면서.

 

따사로운 햇살아래……를 생각하면 곧 다른 장면으로 빠져든다. 오래 전에 서양 소설책에서 읽은 독특한 소녀가 떠오른다. 영성체 빵이 왜 그리 맛이 없는 마른 빵이어야 하는지를 이해를 못하는 아이, 갓 구운 빵을 탐닉하는, 그만큼 감각에 충실한 아이. 햇살아래 초원에 누워서 사람들이 ‘무한한 행복감’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한 소녀 말이다. 그것이 나중에 사람들이 오르가즘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의아해했던 아이, 그런 일이 남자와 여자의 교접 시에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녀 말이다. 나는 반대로 웅크려야 편하고 행복감을……

 

남이 씨, 나남이 씨, 뭐하세요, 고만 일어나세요. 나남이 씬 아기자세만 나오면 그렇게 꼬부라져갖고 어푸러져 있으니 참. 여기요, 요가 하는 동안엔 눈들 감지 마세요. 눈을 감으면…….

 

나는 행동이 느리다. 느린 것으로 정평 나 있다. 내가 잘 못 듣는 것을 요가반 사람들은 모른다. 주민센터에서 그것까지는 알 리 없다. 장애자 등록이 될 정도로 청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언뜻 보면 그냥 가끔씩 멍한 사람이라는 정도, 그나마 다행이다.

 

자아, 그대로 그 자세에서 다리 쭉 뻗어 좀 털고요, 예, 이제 누우세요. 편안하게 다리 펴고, 두 팔 올려놓고 차려자세요, 뒤꿈치 쭉 밀고, 밀어내고……, 양팔 옆으로, 이제 악어자셉니다. 왼발 90도 들어 올려서…….

카톡. 카톡. 왼발을 오른쪽으로 넘기고 고개는 반대쪽으로 하다 보니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눈은 그 쪽으로 쏠리지만 선생님의 곁눈질을 피하려면 그냥 나중에 봐야지. 어, 카톡. 카톡. 누가 뭘 한꺼번에?

다시 차려자세, 이번엔 반대로. 자, 다시 완전 차려자세로 풀고요, 두 팔 머리 위로 쭈욱, 양팔 기지개…….

 

휴, 다시 차려자세네. 햇살아래 잔디밭이라 상상하고 쉴까. 햇살아래 황홀감…… 소용없어, 아름다웠을 처녀시절을 전쟁으로 보냈지. 선배가 보고나서 준 책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시작하자마자 48세 여자의 일상이 펼쳐졌지만, 평범하진 않았다. 멀쩡한 독일여자가 골칫거리 터키노동자의 애를 배다니, 것도 고향에 처자가 있으니 혼외자를.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에’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는 여자를 누가 이해해. 주변의 노골적인 질시는 당연, 등 뒤에선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욕설까지 나왔다.

그때는 그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딱딱하기도 했고, 읽다말다 했다. 그래도 유복한 가정의 예민한 소녀가 겪은 전쟁이야기는 뚜렷이 남았다. 그래 히틀러가 죽인 건 군인들과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지. 죽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야. 책 속의 레니, 그 여자의 평범했을 인생도 죽었지. 탈영으로 총살당한 오빠, 자포자기로 죽은 아버지, 전선에 나가는 젊은이들과 결혼하는 여자들, 그녀도 얼결에 사촌오빠와 결혼했고, 전사했고. 여자는 묘지에 딸린 화원 노동자로 몰락했지.

 

자아, 뒤꿈치 밀고요, 쥐가 안 나려면 항상 뒤꿈치를 밀어내야…….

 

장례사업은 호황이었겠지, 얼마나 일손이 부족했음 포로들을 거기다 배당했을까. 하필 소련군 포로를 만났지. 그가 온 첫날, 여자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넨 일이 사람들한테 ‘경악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선배, 따뜻한 커피 그게 뭐가 경악스러운 일이래요? 하등인간에게 커피를 줬다고? 소련사람이 왜 하등?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게르만은 아리안의 후예라고 선전한 정치 때문이었지.

이상하네, 아리안, 그거 이란 어쩌고 하는 것 아닌가?

맞아. 그 이란과 같아. 몇 천 년 전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서 살다가 서쪽으로 가서는 유럽 아리안, 남쪽에서는 인도 아리안의 선조가 된 것이니까.

아리안, 그러니까 독일인들 대부분 기독교인 아녔나요, 기독교나 유대교나?

그렇게 말하자면 이슬람도 같은 뿌리지. 아브라함의 자식들의 자식들이니까.

머리 아파.

암튼 아리안 아님 무조건 하등인간, 순정한 피의 문제였지. 그 땐 할머니 할아버지 중 한 쪽만 유대인이어도 유대인 딱지였지. 친위대에선 더 했대. 사병은 1800년도까지, 장교가 되려면 1700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순수혈통을 증명해야 했다니, 끔찍했지.

선배, 뭐예요, 생물에서 인간으로 전공을 바꾸려고?

아니, 이건 아직 피 흘리고 살아있는 역사야. 소설이 아냐. 실제로 하등인간 분류가 유효했다는 것이지. 친위대장 히믈러는 ‘유대인 소개, 유대인 섬멸’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잖아.

소개?

그래, 강제소개. 하등인간은 파괴욕과 원시적 탐욕 때문에 밝은 인간들을 해칠 것이므로 소개시켜야 마땅하다! 페스트균 같은 게 건강한 육신을 넘보지 못하도록! ‘유대-볼셰비키’라고 하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동물보다 더 낮은 단계라는 판정이었어. 상상이 가? 동물보다 더 낮은 인간들. 그들 법으론 유대, 슬라브, 소련의 아시아계 모두 하등인간이었으니까.

하등인간, 죽어도 바꿀 수 없는 피 때문이네.

그 책이 그러저러 내 많지 않는 책들 속에 섞여 있었고, 내가 실제로 마흔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정확히는 마흔 여덟을 다 보낸 겨울에 그 해를 돌아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읽었다. 머리 아프기는 비슷했지만, 좀 읽히는 것은 나이 탓이었을까.

 

인종, 인종도 사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부턴가는 한국말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친다. 다문화 가정도 날마다 는다.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가계에도 진작 혼혈이 발생했다. 도희가 미국에 잠시 교환학생으로 다녀왔을 뿐으로 그리 되었다.

언니, 어떻게 해. 누가 한국에 오겠다는데.

누가?

으응, 미국에서 만났던.

뭐야, 너 그 틈에 연애했어?

연애는 아니고, 그냥 캠퍼스에서 친절하게, 차분한 선배였는데.

선배? 어떻게 외국사람이 네 선배야?

그럼 뭐라고 불러, 다카하시상…….

미국에서 만난 일본인이 청혼을 위해 한국에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일본인 청년은 친척집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더란다. 그를 모습으로는 얼른 외국인이라 알아보지 못했다.

혈통은 지켜야지!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청소년기를 일제 밑에서 보낸 세대였으니 두말한 나위가 없었다. 더구나 둘째 형은 ‘묻지마라 갑자생’이었다. 징집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사도 묻지마라. 결국 우리 집엔 둘째큰아버지란 이름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희는…….

 

자, 차려자세 그대로요, 팔을 넓게 벌리고, 오른 손 만세, 상체 들어서……

내 자리는 맨 가라서 손을 조금 더 뻗는 순간 핸드폰이 만져진다. 살짝 엿본다. 꼬마 4자가 걸려있는 동그라미 안이 완전 초록이다. 맙소사, 초록이면 숲 사진의 도희다. 도희에게서만 넷이다. 도희, 도희가 웬일일까.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찬성할 수 있는 이유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았었다. 첫째가 혈통이고, 그것도 하필 일본인이라니. 외아들에, 너무 부자에.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다녀갔던 청년이 다시 또 다시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어머니는 무엇에도 버틸 힘이 없었을 것이다.

 

롤링, 자 롤링 다섯 번 하고 일어나세요. 팔 벌려 숨 쉬기 하고요, 다시 한 번, 자, 반대로…… 어깨 흔들고…… 그대로 숨쉬기, 네에, 수고하셨습니다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든다.

못 보고 가겠지, 아마. 엄마한텐 전화 못 했어.

100평이라는데 침실은 두 개 뿐이네. 베란다에 풀은 엄청 좋으네, 애들 왔음 정말 좋아했을 텐데. 언제 시간 맞춰서 하루 이틀 사용해.

어제 늦게 펜트하우스에 들어왔어, 기장이라고 알아, 해운대에서 고리 쪽, 부산 끝.

언니, 여기는 THE ANANTI COVE.

거꾸로 찾아 읽으니 도희가 부산엘 왔었단다. 아난티 코브? 매트를 접을 것도 잊고 애꿎은 네이버를 두드린다. 부산 끝 시랑리, 부산 시민들도 잘 찾지 않았다는 한적한 어촌 마을. 느닷없이 300실 규모의 힐튼호텔과 100실 가까운 아난티 펜트하우스 그리고 100채가 넘은 프라이빗 레지던스를 갖춘 관광 명소가 되었단다.

그래, 지친 도시인들을 위한 도심 가까운 명소도 필요하겠지. 쉬고 싶고 돈이 되면 명소에 가서 쉬어 마땅하지. 일본에서도 오는 걸 보니까 일단은 성공한 관광지인 모양이다.

 

도희는 결혼하고서 일본에 정착하는 줄 알았는데 곧 중동으로 나갔었다. 시댁 회사의 지점이 있는 두바이에 가서 살았다. 어머니가 늘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다행히 아이를 낳은 뒤로 애 교육 문제가 생겨서부터 도쿄에서 살았다. 도쿄 서울은 쉽게 오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머니한테는. 그러다 아이가 자라면서는 아예 미국 지사에 나가서 살았고, 오랫동안 한국엔 오지 않았다. 한국에 오더라도 집에까지 내려와서 어머니를 보고 가는 일은 드물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에는 다시 도쿄에 살고 있으니까, 부산도 마음만 먹으면, 또는 비즈니스면, 쉽게 오갈 수 있나 보다.

 

다시 네이버. 아난티 코브, 연결된 힐튼호텔 10층 로비의 전경은 지상낙원?

어,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미치면, 뛰어내리면 어쩌나. 하긴 바다를 보고 미칠 인간이면 아난티 코브 힐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위인이 못 되겠지. 돈이고 명성이고 완벽한 그들, 현대판 귀족들이 바다에 뛰어내릴 염려는 1도 없단다, 이 소심아!

몸 말고 맘도 두뇌도 융숭한 대접을 받는군. 500평에 달하는 대형서점 이터널 저니에는 여행, 인문, 철학, 예술 등을 주제로 2만여 권의 책을 비치해 놓았단다. 여행, 인문, 철학, 예술이 돈의 소유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허나 돈이 모자라면 여행, 인문, 철학, 예술 모두에서 영영 이삭줍기 인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는 대목이다. 7, 8천 그루의 교목과 관목을 자랑한다는 아난티 정원, 참 낙원이겠다. 힐튼호텔 앞 쪽에는 장흥의 시골마을에서 300년 넘은 은목서를 옮겨 심었다고. 대단하구나.

문자 내용으로 보아서 체크아웃이 임박했다는 것 같았다. 곧 있으면 부산 도쿄 비행기에 오르겠지. 나도 문자를 쓴다. 그래, 300년도 넘었다는 장흥 산 은목서는 안녕하시든? 어디에 있던 행복하면 돼!

 

행복하면 된다! 행복하자면 최소한 열등하진 말아야 하는데. 우선 장애는 열등이다. 그런데 난 듣는 데 장애가 있다. 거기다가 또 어딘가 아프면 큰일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건 곤란하지. 귀찮아도 요가교실에 다닐 이유를 또 한 번 확인한다. 우리 중 누가 회복불능으로 아프면, 어차피 죽을 거면, 몰래 수면제 치사량을 먹이기로 약속하자! 도희랑 고등학교 땐가 약속했었는데, 아마 도흰 잊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확인할 계제가 안 된다. 우선 너무 멀다. 태어나면서 미모도 우열을 갈랐지. 뚱한 언니에 비해 상큼하게 예뻤던 도희!

 

그런데 미모로 사람을 나누는 것은 해결된 것도 같다, 잘만 하면. 10년도 넘은 이야기다. 그때 비비씨 뉴스라던가 런던타임즈라던가에서, 아니면 둘 다에서, 남편이 성형의 나라 한국 이야기를 보고는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성형외과를 하는 건데.

…….

이거 봐, 제목이 아예 ‘프라이스 오브 뷰티 인 사우스 코리아’, 미모의 값이라. 미모에 대한 광증이 지배하고 있는 남한. 여기 봐, ‘얼짱’이라는 한국어도 그대로 소개되었다니까. 20대 여성 50%는 어떤 방식이건 성형을 했다는 거야. 스물다섯 살 여자가 몇이야, 80만 명은 태어났을 것이니 여자가 40만, 그 중 절반이면 20만 이상이 어딘가 손을 댔다는 말인데, 어휴.

이비인후과 환자 수는 그에 비길 바가 못 될 것이다. 게다가 거의 노인들이 오겠지. 잘 못 듣고 어벙한, 기침감기가 오래되어 목이 쉰 노인네들. 그래도 썩은 이빨을 내미는 치과 보다는 낫지 않을까. 무슨 과이건 하루 종일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라는 직업이 개인에게는 상쾌한 직업은 못 될 것이다. 그렇담 하루 종일 범죄자만 다루는 경찰이나 검찰, 그러니까 판검사들도 개인적으로 쾌적한 직업은 못되겠다. 꽃나무나 꽃을 파는 화원이, 문방구를 파는 가게가 좋겠다. 다음 생에서는 소소한 그런 일들을 했으면 싶다. 아니, 아주 만일에 다음 생이 있다면 그보다는 먹을거리를…….

암튼 그 순간에는 우선 남편을 위로하고 싶었다.

성형외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매번 확실하게 더 예뻐지라는 법도 없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쑤나. 본인들이 선택하는 건데 뭐.

마취 같은 것도 무섭고.

마취가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지 그래, 그렇다고 마취 무서운 의사가 의사인감. 의사를 말던지. 하긴 피부과 지원자도 엄청나다더라고, 전엔 성적 좋은 애들이 피부과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피부과를?

피부과에서 간단한 성형을 상당히 해결하제, 수술을 많이 안 하고도.

나라면, 내가 만일 의사라 해도, 확실히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었다. 의사가 아닌 주제에 가정법으로 말해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선배도 있다. 베드가 100에 육박한대나, 그거 다 쌍수해서 벌은 거라니. 내과은사님 떡하니 모셔다 놨더구만. 개원 때 다녀와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모습이 좀 안타까웠다. 내과와 정형외과 위주의 종합병원을 차린 후배들 여남은 틈에 끼어 혼자 파리 날리는 이비인후과를 맡아서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살면 어쩌나.

 

남편이 왜 이비인후과를 택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오빠 고등학교 동기로 함께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빠완 일찍 갈렸다. 오빠는 본과에 가자마자 탈락했다. 무작정 작파했다. 결국 해부학교실 때문임이 드러났다. 그러고도 사내 녀석이냐! 인생이 그게 땅 파먹고 살 거냐? 호미로 지렁일…….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가 우리 방 창문까지 흔들었다.

오빠, 해골 봤어? 시체해부도 했어? 좀 있다가 도희는 풀죽은 오빠에게 짓궂게 물었다. 멋쩍은 오빠 표정은 우리 어려서 샘가에서 한 솥 가득 토막 난 허연 뼈다귀들을 보고나서 도망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도희는 샘가에 그냥 있었지 싶다.

누이들아, 실망했지? 그래, 나 구역질해서 쫌생이 됐다. 망신 산 것? 것보다 그 애, 그 애가 키득거렸어. 샐샐 웃고 있었다고! 입을 꼭 다문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어렴풋이 오빠의 ‘그 애’를 알고 있었다.

오빠가 진로를 바꾸어 서울로 간 뒤에도, 오빠가 집에 오는 방학 때면 친구도 어김없이 왔다. 오빠가 유학을 앞두었을 무렵엔 우리의 결혼 말이 오갔고, 곧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윗감이 이비인후과 레지던트란 사실에 우리 부모님들은 뭔가 안심하셨을 것이다. 딸이 요상한 병, 먼데는 잘 듣고 가까운 데는 잘 못 듣는 병에 걸려있었으니까. 그것이 이비인후과 소속의 병일 것이라 믿고 계셨으니까. 그런데 남편의 세부전공은 귀가 아니라 목이다, 뭐 그런.

 

편한 운동화 위에서 걷고 있는 내 몸을 내려다본다. 요가하는 날에는 기장이 긴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못 살게 뚱뚱한 건 아니지만 운동하려면 몸을 덮는 게 편타. 남자 회원들이 두엇 섞여서 불편한 점도 있다. 팔을 위로 뻗을 때면 허리가 드러날지, 고양이자세 같은 것을 하려다간 정말 배통이 나올지. 더러는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막상 그런 회원들은 무신경하다. 무신경하니까 행복한가. 요가시간 마지막쯤에는 스트레스 해소 웃음을 웃으라고 할 때가 있다. 억지웃음이 잘 안 나오는데, 제일 잘 웃는 건 배통을 보통 내놓는 영님 씨다. 몽글몽글한 몸매로 귀여운 여자인데, 엉덩이는 쳐들고 배가 훌러덩 벗겨져서 뱃살이 바닥에 눌릴 때면 솔직히 나도 모르게 눈이 감아진다. 그런데 제일 행복한 얼굴이다.

 

나남이 씨, 뭐해요. 파란 불이구만, 언능 갑시다.

건널목에 서있던 내게서 누가 가방을 잡아당긴다. 바로 행복한 영님 씨의 친구다.

어, 내가 젤 늦게 나온 줄 알았더만요. 근데 오늘 친구는 안 보이든…….

예에, 해외여행 갔다요, 7박8일이나 된다요. 신랑이 환갑잉게 환갑여행인디요, 사돈네랑 같이 갔다요. 거그는 내년인디 한테 가자고.

사돈네랑 해외여행을? 나도 모르게 말하고서 움찔했는데, 다행히 스스럼없는 반응이다.

며늘애가 참 좋아라. 긍께 그라고 항꾸네 여행 모시고 다니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우리는 건널목을 건넜고, 건널목을 건너자 바로 헤어졌다.

 

나도 하와이엘 간 적이 있었다. 도희네가 카일루아 쪽에 집을 통째 빌려 놓았다. 우리는 한 달 내내 함께 있지는 않았다. 코앞의 해변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런데 희극적으로 뚱뚱한 사람들, 배통을 다 드러낸 남자들 여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덜렁덜렁, 출렁출렁, 거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몸매들. 임신 후반기처럼 보이는 여자도 배를 한껏 밀어 벼슬처럼 쳐들고 뒤뚱거리며 휘젓고 다녔다. 가까이 보면 발가락들하며 발 모양은 희한하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저런 발을 몸을 뭣 하러 내놓을까.

다음 순간, 우리가 우리 몸을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보라고 내놓는 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등신이 아니라고, 배가 출렁거린다고, 그것이 밝은 대낮에 따뜻한 모래사장에서 햇볕을 즐겨서는 안 될 이유는 아니었다. 한번 그만큼으로 살아있으므로.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법, 그것이 문제야. 도희는 달랐다. 예쁘기도 했지만 뭔가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 그래서 고향을 멀리 멀리 떠나서도 자신 있게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우수한 형질이란…….

플라잉 인 더 스카이~~, 핸드폰 벨 소리다. 모르는 번호다. 그것까지 응대할 마음도 여유도 없다.

어라, 도희에게 썼던 문자가 그냥 거기에 그러고 있다. 그래, 300년도 넘었다는 장흥 산 은목서는 안녕하시든? 어디에 있던 행복하면 돼!

놀라서 근처 아이들 놀이터 그네에 가서 앉는다. 카톡을 전송을 아직 안 한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앞줄을 주르륵 지운다. 은목서 안부를 물어서 뭐하려고! 그 순간 내가 어딘가 팍팍 꼬였었나 싶다. 살짝 바꾼다. 울 도희, 어디에 있던 행복해라!

 

내가 짜릿한 행복감을 잘 모른다고 해서 그리 불행한 것도 아니다. 밥걱정해 본 적 없이 불행 어쩌고 하면 죄로 간다. 행불행은 돌고 돈다는데 나머지 생에서 밥걱정하게 될 까 그것이 걱정될 때도 있다. 꼭 그 때문은 아닌데 가끔 귀가 울만큼 머리가 아플 때가 많다. 예컨대 예쁘고 활달한 도희 사는 걸 듣다보면 혹시 우리는 하등인간인가? 아난티 코브를 거닐 수 없으면, 또는 수억 짜리 명품시계 안내행사에 초대된 적이 없으면.

그 얘기도 슬쩍 들었었다. 서울, 유수의 호텔 브이브이아이피 룸, 아직 붐비지 않은 늦은 오전 시간,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장갑까지 끼고서 단 대여섯 명의 귀빈들에게 ‘신상 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 눈에 선하다. 절제된 몸놀림, 조용한 목소리.

그러게, 5억 그런데도 별 게 아니더라. 시계얼굴은 뭐 예뻤는데, 줄이, 보석장식들도 너무 자잘자잘하고. 스타일은 괜찮아서 차보기는 했어. 점심대접까지 해줘. 서울 사는 친구, 숙인이 알지, 숙인일 데려갔어. 샴페인 곁들인 메뉴판 보고는 눈 좀 휘둥거리더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집값을 훨씬 넘는 시계나 아난티 코브 수준의 펜트하우스는 사람을 나누어 팽개쳐버리는 것 같다는 말이다. 120만 원을, 내가 잘 못 들었나, 잘 못 들었기를, 그 돈을 하루 숙박에 지불해야하는 데를 누가 쉬이 구경하겠는가. 누군가가 지불할 수 있는 숙박요금의 상한선 말인데, 그게 바로 자존감의 높이다. 그렇게 취급된다. 숙박비 말고도, 아무라도 기분 따라서 이삼일 그냥 쉴 수 있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여행을 떠날 수나 있는가.

집은 안 그런가. 서울 어딘가 평당 5천만 원이 넘는 아파트도 있다고, 올 초에 뉴스에 나왔다. 그때 누군가 티브이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다, 꽈당, 꽈다당! 아래층인가?

 

날마다 수많은 아파트들과 빌라들이 들어서고, 날마다 수많은 모델하우스들이 공개되지만, 손님들을 선별적으로 조용하고도 융숭하게 안내하는 곳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다 아는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몰랐었다. 어떤 특정 모델하우스에 초대되어 살며시 다녀왔다는 도희가 전화를 했었다. 그때도 부산이었다.

전망 끝내주더라. 아파트 보다는 레지던스가 관심이 가던데.

레지던스? 부산에 주택을 사려고?

무슨 주택을, 브렌드 레지던스지.

브렌드?

점점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5성급 호텔과 한 건물에 있어서 똑같은 서비스를 받거든. 아래는 호텔이고 위는 아파트라고 생각하면 돼. 살림도 하지. 젤 좋은 건, 언니, 사서 등기도 할 수 있어. 서울 어디 레지던스는 평당 일억도 한대나. 좀 되긴 하지. 그래도 외국인은 투자이민 식으로 영주권도 받을 수 있고, 내국인은 일가구이주택도 해당 안 돼서 좋고.

 

그냥 들은 풍월이라고, 도희가 무심코 이야기하는 일상은 내게는 특별한 영상이다. 비교할 수 있는 일상의 꼬투리가 없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아서, 일상의 자리 어딘가에 묶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내가 언니니까. 언니가 시시콜콜 그런 것을 묻는 건 아니다. 자매라 해도 각각 결혼해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세월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많겠지. 아니, 서울로 진학을 고집했을 때부터 남다르기도 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난 아마 그리 꿈이나 욕구가 높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대학 때부터였나. 잘 듣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보니 더 멍해진 것도 사실이다. 헬렌 켈러도 그런 말을 했다더라, 청각상실이 시각상실보다 더 불행하다고. 시각상실은 사물들로부터 고립시키지만, 청각상실은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기 때문이라고. 사람과의 연관을 어렵게 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게 하니까. 좀 충격이어서 어렵사리 영어원문까지 찾아보았다. 프럼 띵스, 프럼 피플.

아, 선배는, 청력장애였던 선배는 어땠을까?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저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난 정말 못 들었다. 못 됐다.

 

어차피 잘 못 듣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오기를 부리는 편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초라함에 질린다. 월 만원 수업료를 내는 주민센터 요가교실에 다녀오는 길, 하릴없이 아이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는 나. 스파 앤 클럽 입회보증금으로 집 한 채 값을 슬쩍 긁어대는 마이다스 손들은 우리 모두를 하등인간이라고 치부하겠지. 반려동물만 못한, 동물보다 아래 부류의 인간. 으스스 떨린다, 알 수 없는 모욕감에. 땅을 차고 두어 번 굴려본다. 하늘 - 땅 - 하늘 - 땅.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 친 사람들도 있다. 다이애나가 죽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우르릉 꽈당! 지하차도를 달리던 차가 벽을 들이받는 소리가 난다. 헉, 하고 쓰러지는 사람, 사람들. 끼익, 끼이익! 뒤쫓다 멈추는 차량들. 파박, 파팍! 터지는 셔터소리, 소리들.

셔터 소리야, 셔터 터지는 소리, 소리들.

나남이, 뭐하고 있어!

가만, 고통스런 저 숨소리. 응급처치는 않고 셔터들만 눌러대고 있어, 파박 파팍!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래! 정신 차려, 남이야, 다 끝난 일이야. 뉴스에 뜬 건 이미 끝난 일들이라니까.

그러네, 연인이랑 함께 있었다고, 불행 중 다행이네.

갔는데 무슨 소용.

그래도. 이집트 무슬림이라면 이제 피는 안 따지는 세상이 되었나 봐.

무슬림이지만 누구냐가 문제지! 런던 한 복판 세계적 수준의 해롯백화점 상속자라잖아. 혈통이나 피부색이 별 문제가 아닌 거지.

왜 아냐, 영국 왕실에선 그 일로 크게 노했다는 음모설도.

설은 설이고. 인간 등급의 새로운 기준은 이제 혈통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이지. 돈이 되면 되는 거야. 돈이 안 되는 인간은 하등인간이고. 돈의 피라미드, 상부에 오르려면 최강 맹수처럼 살아내야 해. 누구든 제껴야지. 메피스토 말이 맞아, 인간은 신이 짐승들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준 이성을 사용한답시고 외려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되었다고.

언제 적 사람?

왜 이래,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 유혹자!

애초에 그리 말하지. 인간도 약육강생이란 말이지?

너 왜 이래 오늘, 약육강식! 인간 정글에서 철저히 계산된 약육강식을 누가 말리냐고. 합리적 이성이란 다른 말로는 잇속 따른 철저한 계산일뿐야.

졸업 후 일만하다가, 일하면서 누군가를 사랑만 하다가, 그러다가 그냥 혼자, 평생을 혼자 공부만 하며 살아가는 미선은 가끔은 너무 어려운 말을 한다. 지난번에 집에서 커피 마시다가도 그랬다. 발아래 모래땅을 톡톡 건드리다 일어서려니, 모래가루에서 커피향이 올라온다.

 

여전히 폴저스 깡통이구나.

뭐 그냥. 인스턴트 때부터지. 네 말대로 합리적이다, 왜!

합리? 커피 값도 요지경이야. 저번 서울에 갔을 때, 우연히 소문난 중국식당엘 갔었다.

커피 값 말하다가 웬 식당?

으응, 요리골목 그런 데. 요리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네 식당이라고.

맛이 다르든? 비싸겠지 뭐.

맛에 돈에 놀란 것 아냐. 웬만하더라고. 근데 식당 영수증을 가져가면 근처 커피집에서 1,000원에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다는 거야. 괜찮은 오퍼지.

괜찮으네.

그게 다가 아냐. 바로 옆 다른 커피전문점 앞을 지나는데 섬뜩하더라고. 전문점이면 나름 비싼 아라비카 원두를 쓸 테니 4,000원은 되겠지. 누가 거길 가느냐고. 값싼 로부스타 원두면 어때, 식후에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충분한 것이 보통 우린데.

대기업의 문어발 공격은 막아준다 안했었냐. 프랜차이즈 빵집, 식당, 그런 것들 중소기업 적합업종 뭐 그런 것 정해주지 않았어?

소용없다니까. 호랑이 없는 굴 속 여우가 왕 노릇이지. 여우는 꾀를 낸다고, 여기서 식사하고 이 커피로 가세요! 밥집과 커피집이 한통속이더라고. 알바도 같이 쓰고.

설마.

커피 주문받는 애 손톱 땜에 기억이 났어. 열 손가락 무지개. 내가 기어코 물어 봤어, 아까 저쪽 식당에서 본 것 같다고. 뭐랬는줄 알아? 맞아요, 같은 사장님이 운영하세여. 점심 바쁠 땐 그 쪽으로 순환근무죠. 저녁시간엔 더 많이요. 그랬다니까.

설마.

남이야, 내 귀로 직접 들었어. 꿩 먹고 알 먹고, 여우같은 인간들.

우리는 네 눈을 둘 데를 몰라서 뚫어지게 커피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갔다.

왜, 여우라고 하니까 로트카-볼테르 공식이 떠오르네. 내가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너 어떻게 그걸? 바로 그거야, 포식자 피식자에 관한 로트카-볼테라 방정식. 여우 까짓것 한껏 늘라지. 첨엔 여우가 늘수록 토끼가 줄겠지. 토끼가 아예 줄어들면 여우도 따라 줄어. 그럼 다시 토끼가 늘 것이니까. 움츠려 보자고!

응, 로트카-볼테라.

난 가끔 단어들을 틀리게 말해서 무안할 때가 있다. 주홍이나 주황이나, 분홍이나 분황이나. 뭐 내가 언어학잔가.

 

아파트 하나를 건너서 걷다 보니 집이다. 우리 아파트다. 문을 열면 바로 작은 욕실이 있는 구조는 참 이성적인 생각에서 만들어진 결과다. 청결을 추구하는 우월한 이성이 좋구만! 메피스토며 미선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사람의 몸 중에서 어디가 제일 불결한 곳이죠?

우리 꼬마들은 말을 못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다들 대변 소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더러는 매일매일 새까매지는 양말을 보면서 발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선생님은 말했다. 손이 젤 더러운 곳이에요, 손이! 손이 무엇이든 만지고 다니잖아요, 하루 종일! 그러니까 손을 잘 씻는 사람이 젤 깨끗한 사람이에요!

 

어려서 배운 것은 정말 평생 간다. 내가 만지는 것들이 다 문제가 많은 것들이 맞다. 요가매트는 공용이다 보니 첫날 바로 몸이 쑤시고 간지러웠다. 곧 누비천으로 덧깔개를 만들어 갔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다른 회원들도 여럿 깔개를 쓴다. 문제는 계속 생긴다. 요가선생님은 앞쪽으로 누우라고 했다가 다음날은 또 뒤쪽으로 누우라고 한다. 머리와 발을 바뀌지 않게 하려고 이름까지 수를 놓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름 표시 자체는 정말 필요가 없다. 날마다 가지고 다니니까. 뭣한데 짊어지고 다니요! 여기 요레 놔둬도 안 없어진디! 누군가가 친절히 말해 주었지만, 내 맘 속에서는 아니다. 내가 결석을 했을 때 누가 내 깔개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 아니, 다른 사람들 거랑 함께 쑤셔 박혀있는 상상이 그리 유쾌하지 못한 걸 어쩌라고. 집에 가져오면 여름철엔 매번 널기도 하고 또 자주 빤다. 빨래는 세탁기 몫이니 문제없다. 날마다 물청소를 할 수 없는 물건들이 심각한 것들이다. 하긴 날마다 물청소를 한들, 빨아 쓰는 걸레도 그 나름 불결하겠지. 그렇담 쓰고 버리는 종이걸레를 써야 할 텐데 그건 또 못하겠다. 이율배반이다. 일회용 걸레를 쓰지 못하면 하등? 아 참, 오늘 왜 이리 등급 타령일까.

 

괜찮다. 난 괜찮다. 밀걸레질을 하려면 수건걸레를 다섯 번은 바꾸어야 하지만 괜찮다. 대신 깨끗한 마루를 내가 좋아하니까. 오늘은 샤워를 먼저 하고 머리를 싸매고 나와서 마루를 닦았는데, 매번 갈팡질팡한다. 걸레질이 먼저인가 샤워가 먼저인가.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일단 손을 먼저 씻고 나와서 청소를 마치고나서 샤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 을 씻다가 순간에 샤워 꼭지를 틀고 만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나서 밀걸레를 들자면 쭈욱 뻗고 쉬고픈 마음과 싸워야 한다. 그래도 결국 한다. 의심도 따른다. 나에게 깨끗한 마루가 그렇게 중하다면, 몸을 짓이겨서라도 청소를 하러든다면, 내 몸은 마룻바닥보다 아래인가. 소중한 것, 소중한 것들. 판단의 시금석이 불안하다. 곧 바로 혼란이다.

 

세상도 그러하다. 시금석 같은 건 없다. 어떤 이성은 아내를 남편을 부모를 버리고 보험금을 택하고, 어떤 감성은 강아지를 위해 남편을 지인을 이웃을 죽인다. 메피스토도 절반은 몰랐다. 지상에서 신이라 자처하는 인간들, 이젠 이성뿐 아니라 감성도 함께 통째로 미치고 있답니다!

아, 편지를 쓰자, 메피스토에게.

햇살이 마루 깊숙이 왔지만, 여전히 긴 하루가 남아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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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단편 「요가교실」, 『한국소설』 2017 12월 (통권 221호), 98~115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10. 20. 18:35

 

파면

 

파면이었어요, 파면되었다고요.

파면? 무슨 말이야?

첫 발령지에서 파면되었다고요. 사흘 째 되던 날에요.

무슨 말인지…… 대관절 뭘 잘 못해서?

 

5월의 첫날이었다. 우리 몇은 해마다 5월의 첫날이면 옛 학교 근처에서 만난다. 벌써 여러 해 째다. 추억 삼아 대학 후문 근처 식당에서 만나는 것이다. 모처럼 뭔가 카페 분위기 식당에서 양 칼질도 해보고 생맥을 나누어 마시고……
그렇게 만난 우리는 대게 미선의 주문을 따르고 느긋하게 기다린다. 미선은 우리 각각에게 다른 음식들을 시켜놓고는 이리저리 나누어주느라 법석이다. 연어살 샐러드는 짙푸른 채소들과 섞이어 꽃밭처럼 보이면서 상큼하고, 오리엔탈 어쩌고 하는 목살 스테이크는 매콤해서 고기를 꺼리는 성주도 거부감 없이 가져간다. 재미있다. 이런 곳에서 스파게티가 빠지랴. 나는 한번 먹어본 것만을 좋아하는 애들처럼 옛날 처음 먹었던 보통 스파게티를 고집하니까 미선은 그것도 시켰나 보다. 케첩이 듬뿍 묻은 면발을 집어들고 입술에 묻을까 조심하려고 살짝 멈춘 순간,

 

파면은 그 순간에 건너온 화두다.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한 자리 다음 그 건너 옆 자리에 서로 다른 나이로 보이는 두 여자가 있었다. 편안하게, 거의 아무렇게나 입고 나선 것으로 보일 정도로 편한 차림의 둘은 식사를 거의 끝낸 모양이다.

어서 계속해 봐요, 그래서 그 다음엔? 냉택없는 내 기다림과는 달리 둘은 말이 없었다.

 

쟤 좀 봐. 또 넋 나갔네.

뭐해, 스파게티 떠서 들고 뭐 하냐고!

손이 굳은 거야 뭐야?

으응, 아니. 귀에…….

뭐야, 또 이명인 거야?

왜, 쟨 이명보다 더한 뭐라더라, 응, 메니에르 병으로.

그래, 쓰러지고 그랬었지?

갑자기 어지러운 것 이제 우리들에게도 낯선 증상 아냐.

원인을 모르니 예방도 못하고.

그래, 림프액의 압력차이로 생기다고 말하면 우리가 알아들어? 림프액이 뭐고, 그 압력 차이는 왜 생기는데?

암튼, 것도 싱겁게 먹으라는 병이라던데?

 

난 오이피클을 집으려다 말고 다시 귀를 먼 쪽으로 기우린다. 가까운 소리를 필터링하고 먼 데 소리를 듣는 건 가벼운 고문 같다. 그 통감을 나는 즐긴다. 그쪽은 좀체 말을 잇지 않는다.

말해 보라고, 웬 영문인지.

그게 첫 발령에서 두 군데로 발령이 났어요.

웬 일? 그런 일이 어떻게?

에이 참. 말 좀 끊지 말고 그냥 계속하게 두지……. 내 핀잔을 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림없다. 내 목소리는 입 안에서 삼켜지고 만다. 정말 참견했다가는 되레 큰일 당하리라. 벙어리 냉가슴으로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난 꽤 먼 소리를 듣는 장기가 있다. 헌데 오늘따라 먼 데 사냥이 잘 안되고, 들리는 건 코앞의 소리들뿐이다.

 

올봄엔, 어때, 다들 좀 들 뜨지?

뭐가, 그날이 그날이고만.

선거잖아, 선거!

무슨 큰일이라고. 큰일은 지났잖아.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대선에?

우리 58개띠도 나왔잖아.

어, 그러고 보니 유승민이 개띠라지.

거기까지 출세한 이도 있네!

대선후보만 출센가. 정치 쪽에도 꽤 많지 이젠. 추미애도 이정현도 그럴 걸. 단식 위문 갔을 때 둘이 동갑이랬어. 힙합 춤 멋쩍던 김성태도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인데. 동갑이라고 찍나?

그렇다는 말이지.

암튼 올봄도 우리 58개띠들 씩씩히 나가자. 완전 대량생산, 우린 시작부터 대세였다잖아. 정인이 느닷없이 개띠 타령이다.

설마 했는데, 우리 동갑내기들이 100만이라더라.

무슨 100만까지야, 암튼 90만은 넘었다더라.

에이, 그게 그거고만. 베이비붐이라더니, 유명인사도 그래서 많은가. 가수만 해도 신형원 진미령 나미…….

참, 너 무슨 신원조회 했어?

그렇다는 거지.

하긴 우린 중학교 고등학교 편하게 들어갔다 했더니, 갑자기 대학 문턱에서 경쟁률 덕에 혼쭐났었지. 우리 77 대학정원이 겨우 6만5천이었던 것 알아? 것도 76들에 비해서 5천 쯤 늘어났다는 게 그 정도였어.

세상에, 90만 명 태어났는데 겨우 6만5천명 정원? 생각도 못해 봤네. 예비고사를 29만인가 봤었지? 경쟁률 피터진다 했는데, 세상에, 60만 이상이 미리 제풀에 탈락이었네, 예비고사도 안 봤으니.

예비고사 통과해도 힘들었잖아. 대입에서 또 탈락했으니까. 예비고사 수험표 눈에 선하네, 여섯 자리 수험번호, 너 외어?

얘들은! 뭣 땜에 옛날이야기야. 오늘 낼이 중하지.

그렇게 말하는 미선은 옛날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나는 오직 저 건너 쪽으로만 귀를 쟀다. 이상하다. 두 사람은 말을 끊었다. 하긴 아무 상관없는 생판 남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사연인데, 선뜻 내뱉기야 하겠는가. 뜸을 들여야 할 거다. 둘 다 커피 잔만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파면, 파면이라니! 동명이인이었을까. 왜 그것을 묻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궁금해보았자 그들의 대화에 끼일 재간은 없었다. 착오가 있었으면 바로 잡으면 될 일이지 웬 파면? 처음 학교로 돌려보내지……. 설마 내 안달을 느꼈는지(?) 듣고 있던 쪽이 먼저 묻는다.

그래서 장학사는……

그렇게 말을 끄집어내던 이는 상대가 아무 말 없자 멋쩍어서인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엘 가려나. 곧 이어 또 한 사람이 일어선다. 어라, 카운터 쪽으로 가네.

 

남이 너 뭐해.

정인이가 꾹 찔렀다. 뭔데 그쪽만 흘겨 보냐고!

아아니, 왜?

어쩐다고 움직임 하나하나 그쪽만 보고 있냐고. 너 그 스파게티 다 불어터진 것 몰라.

아니 그냥.

스파게티는 네 메뉴잖아. 다른 것도 덜어가지도 않고. 식욕 없어지고 체중 빠지면 우울증 와. 부신기능저하증 땜에.

무슨 소리. 나 체중 안 빠져.

빠져 보여. 너, 완벽주의 그것만 봐도 부신기능저하증 오게 되어 있어. 너 저혈압에 저혈당 아니었어? 혹시 짜게 먹는 건 아니지?

아차 싶다. 그러고 보니 감자 한 알도 소금 없인 안 넘어간다. 소금 좋아하면 병인가, 쇠약감, 무기력증, 손톱에 거무스레한 색소도 그런 것 때문일까.

 

나중에 일어섰던 사람이 먼저 돌아온다. 파면 당했다는 말을 했던 쪽이다. 그쪽은 화장실 간 것이 아니라 계산을 하고 온 것 같다. 뒤 이어 먼저 갔던 사람 역시 카운터 쪽으로 가더니 이내 돌아온다.

아니, 웬 계산을? 내가 빌 가지고 갔었는데.

빌 없이도 하죠. 제가 대접해 드려야죠.

무슨 사이일까. 아까 그 이야기는 언제 계속 하려나.

 

남이 너 아까부터 스파게티는 안 먹고 피클만 계속 먹던걸. 얘 큰일 났네. 물 좀 마셔!

밥 먹다 말고 찬 물을 어찌 마셔, 생맥 하나 시켜, 나눠 마시게.

미선이 벨을 누르고 서빙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도 내 눈은 저 쪽의 둘 사이를 오간다. 벗어 둔 옷과 백들을 집어 드는 것이 일어날 모양새다. 젊은 쪽은 모자도 있다. 어쩌나, 그 이야기의 후속을 들을 기회가 없구나. 영 없구나. 따라나설 수도 없고.

 

그들은 일어서고, 마침 출입문 쪽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은 나는 그들을 눈으로 쫒는다. 더 나이든 쪽이 문을 열고 틈을 내어준다. 애프터 유~ 라고 하는 입술이다. 상상인가. 유아 웰컴, 하면서 더 젊은 쪽이 나간다. 나가버린다. 말의 줄기를 쥔 이가 나가버린다.

 

휴우, 한숨을 짓는 나를 다들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왜?

왜 그래?

실은 대화를 엿들었어. 엿듣다 보니 빠졌고. 그런데 이를 어째. 뒷이야기를 못 들었잖아.

우리가 자꾸 널 말려서?

아니, 아직 거기까진 이야길 안 했으니 못 들었지. 끝까지 안 하고 그만 나가버리네.

그 참, 신기하다. 웬 남의 이야기에 목매달 일 있어?

목매달기는, 말도 무섭게 하네.

무섭긴, 너가 웃겨서 그래.

그게 엄청…….

엄청, 뭔데? 썰 풀어 봐, 중요한 건지 아닌지 보게. 나 이래 뵈도…….

미선이 말끝을 흐린다. 나 이래 뵈도 판사 각시야, 라고 할 수 없어서인 걸 모두 안다. 판사 각시 하겠다고 뒷바라지 하다가……. 그건 여기서 풀 말이 아니다. 다만 남의 일이라도 절대 안 잊히는 그런 것들이 있다.

응, 그게 졸업하자마자 중학교 교사로 신규 임용되어 갔다가 사흘 만에 파면당한 이야기야.

뭐라고? 전교조였대?

도둑도 이르다. 무슨 발령 나자마자 전교조야. 그리고 전교조는 90년 다 되어서 생긴 거잖아. 그보다 더 전의 이야기 같았는데. 거의 우리 또래로 보였어.

우리 또래? 그럼 58개띠?

아니, 무슨 그런 걸 알아, 내가 점쟁인가. 그냥 또래로 보였단 말이지.

또래라 치고, 그럼 80년대 초 이야기네.

그럼 부임하자마자 과외 섭외했다가? 그땐 교사가 과외하면 감옥에 가고 그랬었잖아.

설마.

울 큰언니 말이 그랬어, 감옥 간 이야기. 내 결혼 무렵에 언니가 집에 자주 왔지. 울 언니 근무하던 여고에서 영어샘이 동료 딸 과외 해주다가 잡혀갔대. 딸 과외 시킨 선생님은 해직인지 사푠지 뭐 그랬고. 조용하던 성주의 말에 다들 놀랐다.

잡혀갔음, 감옥까지 간 거야?

서슬 퍼런 세상이었네 참.

그건 다른 얘기고. 어쩌다가 사흘 만에 파면이었을까. 부임하자마자 과외란 말도 안 되지, 더구나 시골에서 뭔 과외가 그리 심했을라고.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그만 하래도. 뭐 탐정 났어?

아니, 부임지 잘 못 갔으면 정정해주면 그만이지, 왜 파면이냐고. 완전 인생을 종치게. 파면이 어떤 건지 난 알거든.

뭘 알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그 문구 몰라? 그 보다 더 대단한 파면도 있어? 대통령 ……를 파면한다.

어마무시한 문장이다, 사실.

어마무시하지, 그래서 설마 하고 있다가 막상 닥친 일일 것이고.

설마 안 될 일은 없겠지, 사람들은 행여 그걸 걱정했는데, 당사자만 설마 그리될까 방심했다고?

설마 설마 설마라니, 점쟁이도 내일 일 몰라.

파면, 누구에게나 엄청난 사건이야. 대통령 자리 아니라도 엄청난 건 똑 같아. 파면은.

 

파면 -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의 해외여행으로 파면이 되셨다. 집안 송두리째 날벼락! 그때 해외여행은 자랑이면 자랑이었지, 불법인 줄은 몰랐었다, 아무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랑 은행본부의 간부 몇 명이 거래처 재벌의 임원직을 도용해서 5년짜리 상용복수여권을 만든 것이 죄목이었단다. 아버지는 갑작스레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얼굴을, 체면을 잃은 것이 컸고, 건강을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집에서도 친지들 사이에서도 도망쳤다. 혼자서 꼭두새벽에 나가시거나 오밤중에 들어오셨단다. 내가 결혼해서 이태쯤 되었을 때니까, 집에는 졸업을 앞둔 도희랑 어머니 아버지뿐이었다. 막둥이는 군대에 가 있었고.

 

남이야, 나남이!

엉?

뭐해 말하다 말고. 파면은 누구에게나 엄청난 사건이라고, 그래 알아들었으니 잊어, 너도. 그거 병 된다, 생판 남의 일에.

어디서 다시 만나면 알아볼 것 같아. 난 그래, 그쪽이야 날 전혀 모르겠지만.

병 다 나버렸네 뭐. 우리 무슨 얘기하다가.

으응, 알았어. 그래 소금 이야기던가? 커피에 소금을 넣는 사람도 있대.

소금이고 뭐고, 난 특별히 기피하거나 특별히 챙기는 것 없어. 먹고 싶은 것 있음 먹어야지, 더 늙으면 먹고 싶은 것도 없다고 그러시더라, 울 엄마.

할미 되서도 엄마 타령이냐!

그 말 알 것 같아. 맛있는 것이 점점 없어져. 정말 그래.

그래, 집에만 있음 안 돼. 운동을 좀 해 봐.

제일 좋은 건 운동보다 춤이라는데, 어디서 춤을 추나 그래.

문화센터 그런 데 있겠지. 알아볼까?

치, 남이가 가겠어? 낯은 된통 가리는 애라.

운동이 무슨 의무라고 그래. 점심 먹으러 나오는 건 운동 아닌가. 힘들다 벌써. 일어서자.

 

이상하다. 활기가 아닌 스산함이 대학가 거리를 메우고 있다. 미선은 기어코 캠퍼스 안으로 이끈다. 잠시라도 걷잔다. 친구들에게도 원하는 일을 기어코 시키는 미선은 분명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캠퍼스는 이맘때면 늘 이맘때 모습이다. 물이 오른 연둣빛 잎사귀들에, 잎사귀들 사이로 비치는 가녀린 햇살들에 답답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저쪽으로 가자, 저기 대강당 옆 홍매화 피는 곳! 미선은 계속 우리를 채근했고, 홍매화는 지고 없을 거라는 정인의 말에도 아랑곳 않는다. 적당한 보폭을 두고 흩어져서 발길을 옮겨본다. 개나리 진 가지들 옆으로 철쭉이 주르르 피어있다. 진달래 분홍빛 철쭉이 아니라 흰 철쭉들이다. 붉은 철쭉 무더기와는 달리 시원함을 준다.

 

 

의 생김새를 봐, 도란형라고 해. 거꿀달걀꼴, 달걀꼴 거꾸로란 말이지. 수술은 열 개나 되는데 암술은 하나지. 진달래도 마찬가지. 생물학적으로 암술이 늘 강해.

그는 생물과 복학생이었다. 청력 손실로 다소 멍한 것이 눈에 띠었다. 사격훈련 중 스스로 총기를 잘 못 다루다 생긴 일 때문이었단다. 말을 잘 못 듣는다고 해서 옹고집은 아니고,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진달래 철쭉을 어떻게 구별해요?

뭐?

진달래 철쭉 구별! 둘 다 분홍색에, 둘 분홍색, 참꽃 개꽃 이름만 달라……. 내가 큰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색시 하렸는데 안 되겠네. 시골 살면서 개꽃 따먹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누가 색시 한다고!

색시 한다고? 알았어. 그럼 내 가르쳐주지.

안 한다고요! 색시 안 해!

색시 안 해도 좋아. 가르쳐줄게.

선배의 말로 진달래 철쭉 구별은 확연했다. 이른 봄 개나리와 함께 피어 있으면 진달래. 개나리 없는 곳에서라면 잎은 없고 꽃만 피어있으면 진달래. 그러니까 4월에 꽃만 피는 건 진달래, 5월에 잎과 함께 피는 건 철쭉. 또 홑꽃이면 진달래.

홑꽃이 뭐야? 홑꽃 뭐냐고!

응, 홑꽃은 꽃잎들이 한 겹이란 말이지. 그래서 수채화 같다고나 할까? 철쭉은 꽃잎이 여러 겹이야, 또 꽃잎에 짙은 자주색 반점들이 박혀 있어. 나리꽃에서처럼.

알 것 같아요. 알았어요!

그래 조심해, 철쭉 꽃 따먹지 말고. 색시, 죽지 말고.

누가 꽃을 따먹는다고 그래요. 진달래도 철쭉도 안 따먹어요. 안 따먹는다고요!

네가 화전을 몰라서 그래. 너무 예뻐서 보기만 하고 있다가 밤늦어서 먹어야 되는 화전을.

왜 밤늦게 먹는데? 왜 밤에? 왜 밤?

아침 되면 못 먹게 될까 봐서. 밤새 사라지거나.

사라져요? 사라진다고?

거야 누군가의 입으로 사라진다는 말이지.

참.

 

그런 그는 당연히 말이 적었다. 상대가 힘을 들여야 겨우 소통하는 상황을 버거워했다. 결정적으로는 그가 옳았다. 힘을 들여도 들여도 소통이 안 되는 일이 많았다. 대화의 내용이 객관성을 띈 경우에는 큰 소리로 떠들어댈 수 있으니 좀 나았다. 진달래 철쭉은 괜찮았다. 힘든 것은 심상을 나타내야하는 경우였다. 그래서 마음을 전달하지 못했다. 나는 소리를 질러가면서 내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애초에 언어라는 것이 마음을 나타내는 도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말로 규정하지 말고 그냥 옆에 있을 수는 없었을까. 아니, 지금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건 아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 다시 떠오르나~

그 가을엔 이 슬픈 노래를 어찌 합창하면서 다녔을까. 노래는 늘 정인이 배워다 퍼뜨리곤 했었다.

 

 

아파트 외벽에 스파이더맨 여럿이 줄에 매달려 있다. 위를 보고 걷다가 여자와 부딪힐 뻔 했다. 여자는 땅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마, 뭐래요? 뭐 하는 거예요?

세척이요.

세척? 청소요?

예, 세척. 세척 나가고 말라야 뺑끼 발르제라!

가만 올려다보니 줄 타는 남자들은 물줄기를 쏘아대고 있다.

아, 아래서 보고 있는 사람이 감독이시네?

감독은요, 이 아래 차들도 덮고 청소도 하고 그래야 하는디.

그러고 보니 띄엄띄엄 주차된 차들에 비닐 커버가 덮여있다. 무엇인가 가느다란 작은 조각들이 바람 속에 섞여 눈으로 날아드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다 덮고 있다.

 

며칠 전 아파트 새 단장을 한다고 페인트칠을 한다는 공고문이 있었다. 입구에 꼬마 스티커를 붙이라는 입간판도 서 있었다. 푸르스름 계열과 누르스름 계열의 두 가지 최종 안을 이미지로 올려두고 찬성 쪽에 투표를 하랬는데, 투표 천지네, 하고서 지나쳤던 기억이 났다. 오늘은 입간판이 치워지고 없다.

작은 일에도 기회를 지나쳐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요즈음 부쩍 시들하고 느슨해진 삶이 슬쩍 염려가 된다. 그날도 그랬다, 무슨 색이면 어때! 아파트 외벽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 부엌이라면 몰라도. 그랬으니 외벽 페인트 색이 어찌되던 싫고 좋은 내색을 할 자격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세척이 먼저라니? 내 삶도 가끔씩 새 단장을 하려면 색칠 전에 오염된 구석부터 씻어내야 하는가? 오염된 구석, 어디?

 

문을 열면 넓은 현관이 문제다. 모델하우스 때는 현관 넓은 것이 좋은 인상을 주었다. 입주 후에는 그 넓은 공간이 창고로 변하는 데 놀랐다. 남편이 운동기구들을 놓아두기 시작하더니 심지어는 간이 쓰레기장이 되어있다. 버리고 싶은 물건들을 내다 놓고는 몇 달이 지나도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다. 더러 다시 집어 들여오기도 한다.

죄다 내다버리고 싶은 심정을 누른다. 나갈 때도 참고 들어올 때도 참는다. 착한 심성에서가 아니다. 나도 그 자리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마음으로는 나도 이미 그 자리에 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꼭 그런 것만 같다. 내 마음 자리에서도 남편이 들락날락하니까 안다. 내가 물건들 쌓여있는 모양새를 참지 못하는 것쯤은 이젠 남편도 안다. 다만 못 참는 내가 과민이라는 표정이다. 사는 게 뭔데, 집이라는 것이 뭔데. 어질러지기도 하고 젖은 수건 아무데나 던져도 되고……. 그거 못 참는 내가 외려 병이라는 눈초리, 그것 나도 안다. 하나 뿐인 남편의 눈초리쯤은 안다.

 

일단 씻자.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는 건 누구나 한다. 하지만 내가 좀 심한 것도 안다. 나는 얼굴을 씻기 위해 세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씻기 위해서 한다. 선배의 청혼을 흘려들은 다음부터 귀를 열심히 씻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그땐 귀를 잘 씻지 않아서 잘 못 들었다고 믿기 위해서. 이젠 열심히 씻는다. 귀를 씻어 옛날 들은 것들을 다 지우지 않으면 그 다음 새로운 말을 들을 수 없다는 핑계로. 클렌징 쭉 짜서 북북 문지르고 이태리타월에 또 비누를 묻혀서 문지르고…… 귓바퀴, 귓불, 귓속……

 

 

, 계속이다.

그게요, 그게 첫 발령지에서 두 군데 발령이 났거든요.

무슨 말인지…… 어떻게 두 군데 발령이 나는데?

그 다음을 확실하게 들은 것 같다. 그대로 생각난다.

글쎄요. 저야 모르죠. 지금도 몰라요. 제가 첨에 ㅂ군으로 ㅂ중학교로 부임을 했거든요. 그런데 마침 그곳에 옛 은사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실은 두 군데 발령이 났고 일단 여기 왔다고 했더니, 듣자마자 ㅆ면의 ㅆ중학교로 가래요. 둘 다 어차피 집에서 통근은 못하지만 일단 더 가까운 곳이고, 또 학교 자체가, 암튼 ㅆ중학교가 낫다고. 은사님이 교육청에 전화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길로 ㅆ중학교로 가서 근무를 시작했지요. 그쪽은 왜 그런지 분위기가 좀 냉랭하다 싶었어요.

둘 중 하나니까 뭐.

그러다가 사흘 째 되는 날 파면을 당한 거죠.

뭘 잘 못해서?

명령불복종이랬어요. 갑자기 교장실로 불러서 갔더니 명령불복종이라고 …….

말을 잇지 못한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소리에 물기가 섞여 배어나는 것 같았다.

명령불복종으로 당신은 이 순간 부로 파면이요. 그러니 교무실로 소지품도 가지러 가지 말고 그대로 현관으로 나가서 이 학교 근처에 얼씬도 말라…… 그런 말이었죠.

말도 안 돼. 이중 발령으로 간 것이지 잘 못 간 것도 아니고. 파면이라 해서 소지품도 다 놓아두고 바로 현관으로 나가라고? 말도 안 돼.

국립사대 졸업생이, 저 성적 좋았어요, 정식 발령을 받고 갔는데, 사흘 근무하고 파면이랬어요.

아니 글쎄. 근무지가 잘 못 되었으면 바로 잡아주면 될 일이지 파면이라니.

다시 말을 멈춘다. 손이 얼굴 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것 같다.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르겠다. 듣고 있던 쪽이 오히려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런다고 현관을 나왔어? 그냥 나와 버렸냐고? 장학사든 교육청이든, 완전 그쪽 잘못이었잖아!

네. 도교육청으로 갔지요. 담당 장학사에게 갔어요. 그 양반도 하필 중학교 시절 은사였고, 나를 알아보시더라고요.

알아봤겠지, 최우등생이었으니까.

히. 제가 그랬어요. 선생님, 제자 아닙니다. 여기 교사로서 장학사를 만나러 왔지 제자로 온 것 아닙니다, 하고. 당연히 따졌지요. 대학에 와서 임용 설명하실 때도 성적순이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실은 발령이 시내로 날거라 생각했었죠. 저 성적 좋았거든요. 꼭 발령 받아야했으니까 죽어라 공부했죠.

거야 미루어 알지.

군 단위 면 단위로 밀렸어도 발령이 났으니 좋았죠. 저 그때 월급이 정말 필요했으니까요. 대학입시 때 왜 사범대학을 갔겠어요. 그것도 인기학과를. 그래야 졸업과 동시에 월급을 받아다 엄마아빠한테 드릴 수 있을 거 아녜요!

그런데 사흘 근무하고 파면이었다고? 파면이면 다른 공립에 발령이 다시 나지도 않을 거 아냐?

것보다 제가 걸어 나올 때, 다른 교사가 가져다 준 가방 달랑 들고 빠져나올 때, 교무실은 물론 창문마다에서 내 등 뒤를 바라보던 어린 아이들의 눈빛이 얼마나 따가웠던지. 못 잊을 것 같아요. 못 잊나 봐요. 지금도 등이 따가워서 잠들지 못할 때가 있어요.

맙소사! 참 희한한 일도 있었네. 그거 소송 감 아냐!

지금 시대 같음 그랬겠지요.

그래서 어찌 되었냐고!

발령 낸 총 숫자도 몰랐냐고 따졌지요! 저 졸업성적 아주 좋았단 말도 했지요!

가만있지 말지. 시골로 발령난 것도 실은 억울했을 텐데. 왜 첫 학교로 돌려보내지 파면이냐고!

거긴 그 사이에 후임이 왔었나 봐요. 그래서 따진 거였죠, 대체 총 발령 숫자를 알기나 하냐고!

그러니까, 그럼 교사를 했다고, 못 했다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ㅆ중에 저 쫓겨난 다음 날 바로 새로 교사가 왔더래요. 그래서 저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고요.

무슨 말인지 원.

실은 저 있는 삼일 동안 저한테 다들 냉랭했던 이유가…….

뭐야, 잠깐, 잠깐만. 한 사람을 ㅂ중에 ㅆ중에 양쪽 발령내놓고, 이젠 ㅆ중에 두 사람?그럼 수산은, 스잔은, (이름이 불분명하다) 그냥 ㅂ중으로 다시 보냈으면 될 것 아냐? 거길 왜 또 다른 사람을 발령냈는데?

그러니까요. 그보다도 ㅆ중에서 저를 일단 아주 오해했더래요. 제 자리 전임자가 전근을 원치 않았던 경우였대요. 순환근무제 때문에 근무 연수가 차면 옮겨야 하잖아요. 그래도 일 년인가는 사유서 내고 유보되고 그러는데,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던 여교사였나 봐요. 새 학교에 전근가자마자 출산하게 되면 미안코 하니, 암튼 전근을 정말 원치 않았겠죠. 그런 사람을 기어코 전근 보내놓고 그 자리엘 제가 갔었나 봐요. 그래서 낙하산인가 하고서 저를 경계했더래요. 그러다 곧장 쫓겨나니까 낙하산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동정하게 된 거고요.

뭐가 그리 복잡해.

네. ㅆ중에 여럿이 얽혔던 거죠. 하나는 전근, 다른 하나는 파면, 그 다음 또 새로 부임한 선생이 진짜 낙하산이었던 거죠, 아마. 집도 통근거리였고, 그 보다도 어디 무슨 다른 과 장학사 딸이었다고요. 장학사 딸들은 괜히 오해를 받기도 하겠지만요. 보세요! 자동 발령나는 국립도 아닌 사립대학 출신에, 너무도 가까운 통근거리니. 집이 바로 인근 ㅅ시내였대요. 게다가 두 사람이나 물 먹이고 부임했으니, 그렇게 의심할 밖에요. 요새말로 합리적 의심!

 

 

생각이 솟아난 거다.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소리들이 튀어 나온다. 둘이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구나. 내 레이더는 원거리 소리 청취에 민감하다. 근시와 원시가 있는 것처럼 내 귀는 먼 데 소리를 더 잘 듣는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가을학기 개학하자마자 대학가요제란 것이 열렸고, 사람들이 덩달아 나 어떻게해~ 나나나나 나나나~ 그러고 다닐 때였다.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난 정말 못 들었다. 나무 아래 함께 서 있었던 선배의 목소리는 잘 못 들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만을 기억한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새의 모습도 기억한다. 모양은 참새지만 훨씬 큰 새. 울음소리가 너무 큰 새. 울음이 아니라 말소리였겠지. 무슨 말이었을까? 청혼이었을까?

그놈들은 지금도 그런 찌익 찌익 소리를 내며 아파트 하늘을 누빈다. 아까 들어올 때도 보았다. 이 철엔 전혀 돋보이지 않는 동백나무 윗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놈들 후손이라면 몇 대 째일까. 일 년에 한번 씩은 후손을 낳았겠지.

하필 그런 자리엘 왜 갔을까. 첫 발령지 처음 갔던 학교에 그냥 있지, ㅂ중학교에 그냥. 하긴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겠지. 그 사람이 괜스레 안타까웠다. 우리랑 비슷한 또래가 틀림없었다. 우리처럼 퍼진 건 아니었지만, 톡톡 튀는 세대는 분명 아니었다. 그때 그 상실감으로 어찌 살았을까. 나중에라도 교사를 할 수나 있었을까. 월급이 필요했던 상황을 어찌 이겨냈을까. 내가 오지랖이 넓다. 너무 넓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 땜에 그런지도 모른다. 파면된 사람. 아버지는 난데없는 파면을 억울해 하시다가 병을 얻었다. 결국 일찍 돌아가셨다.

얼굴의 물기를 닦으면서 밀걸레를 찾는다. 거실 마루를 또 한 번 훔친다. 오전에 청소를 해놓고 나갔기 때문에 걸레가 깨끗한 채로다. 약간의 물기가 지나가고 난 마룻바닥이 말끔해지면서 맘도 차분해 진다. 그러나 거실에도 실은 서로 어울리지 않은 가구들이 눈에 띈다. 단 둘이서 사용하는 가구들이 서로 엉뚱한 것만큼 서로 소통과 이해도는 낮다.

물론 나는 괜찮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 필요한 장소에 있다. 그것이면 되었다. 신방을 꾸린 새댁도 아니고, 사돈네를 맞을 준비로 부산떨었던 날들도 지났다. 며늘애도 어느 정도 익숙할 것이다. 어쩌다 애들이 오는 때면 다소 치워 놓기도 하니까 잘 모르기도 할 것이다. 알아도 할 수 없다.

 

오월엔 오후가 길어진다. 저녁 준비는 아직 멀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바느질감을 집어 든다. 뜨개질보다는 바느질이 더 편하다. 뜨개질은 멈추어두었던 상황을 계산하느라 시작이 더딘데 비해, 바느질은 바늘이 멈추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냥 계속하면 된다. 아무 데서나 멈추고 아무 때나 시작하는 것이 좋다. 설사 잘 못 되어도 곧 뜯고 고치기도 쉽다.

그이는 바느질감을 그냥 두고 일어서곤 하는 내게 늘 염려의 눈길을 보낸다. 염려인지 핀잔인지, 바늘이 걱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알바늘 하나를 집어준 적도 있다. 나도 위험을 느끼긴 한다. 인형을 만들거나 수를 놓을 때는 실이 푸석하달까 바늘귀 안에 곱게 들어가 있다. 그런데 작은 가방이나 지갑들을 만들다 보면 퀼팅실이란 놈은 동실하고 매끄러워서 바늘귀에서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혼자 남아 도르르 굴러가버린 바늘을 찾으려고 막대자석을 둘, 원형 자석을 하나 그렇게 두고도 잘 찾지 못할 때가 있다. 시아버지 밥에 뉘 들어간다고, 내가 못 찾던 바늘이 남편 눈에 뜨일 게 뭐람.

 

바늘은 아플리케 부분에 멎어 있다. 아플리케는 정답게 여러 모양을 표현하지만, 실을 자주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바늘이 여러 개 필요한 것이다. 필통인데 겉에 다섯 자루 연필들을 아플리케로 붙이는 중이다.

메시지 음, 그이가 늦는다고 알려온다. 아침에 나가면서 늦을 거라 했었는데. 흘려들었나. 남편은 저녁식사에 관해 잘 알려주는 편이다. 그래서 스스로 민주적인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민주주의가 뭔지 보려면 뉴스를 틀어야지. 여론조사 공표를 못 하는 깜깜한 기간에 앞서 마지막 결과들이 뜰 것이다. 아니, 뭐야, 깡패 버금가는 막말후보가 티비 토론을 잘 했다고 지지율이 올랐다고? 천재 교수출신이란 사람은 웬 뚱딴지 자살골을 터뜨리더니 이젠 2위 3위 싸움이라고, 나쁜 패는 아니구나. 어라, 대구 3천여 명 노동자들, 후보들의 노동공약 맹공. 2020년에 1만원은 하나마나한 공약이라고. 알 수 없어. 저건 뭔가, 서울대, 서울대 총학생회 소속 학생들은 지난 27일부터 총장 퇴진과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를……. 쟤네들은 대선 아랑곳없이 밥그릇 싸움 아냐! 강남 도로에서 부탄가스 트럭 화재, 2천여 개 가스통 연쇄 폭발…… 언제고 안전사고지. 저런, 또 크레인 사고? 50∼60미터 길이 32톤 크레인, 넘어지면 어떻게 해, 다섯 명이나 사…….

 

밥맛 떨어지는 뉴스다. 꽃 지는 저녁에도 배는 고파라 했던가.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였나. 햇반을 하나 데워서 식탁에 앉는다. 접시 하나에 김치며 두어 가지를 담고, 계란도 하나 익혀 얹었다. 다이어트 어쩌고 이유로 밥을 거르는 일은 없다. 시댁에 혼자 가곤 했을 때면 유난히 밥 챙겨주는 데 인색했던 시어머니가 떠오른다.

집에 가서 먹어라……, 그 말을 처음 듣던 날이 안 잊힌다. 수 십 년이 지나도 안 잊힌다. 남편은 미국에 나가있던 때였다. 그땐 대학에 남을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낯선 데 가서 유학생 아내로 머저리처럼 지내기는 싫어서 남아 있기로 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힘든 상황에 빠지신 것도 내가 남는 데 작용했을지 모른다.

한번은 이틀을 불려가서 김장을 했는데, 첫날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아침나절엔 배추를 절였고, 비벼낼 양념 준비한다고 칼질만 하다가 오밤중이 된 거다. 열시면 겨울엔 오밤중인데, 야야, 가서 자고 온나, 다섯 시면 차 다닌다, 일찍 오니라! 기가 찼다. 난 당연히 잘 것으로 알고 옷가지랑 싸 갔었다. 시댁에 잠 잘 생각으로 갔던 내가 바보였나. 작은 트렁크를 들고 갔으니까 다 아셨을 텐데. 오밤중에 길을 나서는데 깜깜하니 무섭기도 하고, 버스 끊어졌을까 걱정도 되고. 김장을 끝낸 날은 저녁시간을 지나쳤는데 밥 먹고 가라고도 안하시고, 김치 한쪽을 안 넣어 줬다. 느그는 언제 할래? 니가 이틀 도와줬으니, 나도 가서 도와주마. 시어머니가 어떻게 그런가. 김장 날 끓여 먹겠지 싶어서 사들고 간 동태는 먹어보지도 못했다. 힘들게 사시는 것도 아닌데 인색했다. 결혼 첨엔 몰랐는데, 울 아버지가 그렇게 되신 뒤로 갑자기 인색해지셨다. 내가 자격지심에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원래 인색했는데 원래대로 다시 인색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욕하면서 배운다? 가깝고도 먼 거리에서 살아온 동안 나도 인색한 사람으로 변했을지 겁난다.

 

아버지가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해외여행을 떠날 때 그것은 온통 자랑거리였다. 다녀와서도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선물은 또. 어머니는 자수정 목걸이세트를 받아들고 너무 좋아하셨다. 어때, 남이야, 도희야, 엄만 이 보라색이 참 어울리지? 엄마 살빛이 흰 편이지? 시댁에 선물도 가짓수로는 이바지 때를 방불케 했다. 시어머니에게는 실크머플러와 영양크림, 친척 여자들에겐 립스틱세트나 콤팩트 그런 것들을 수대로 챙겨 보냈다. 아이들에겐 목이 움직이는 인형이랑 초콜릿 상자 아니면 색연필이 들어있는 필통이 돌아갔다. 우리들은 예쁜 볼펜세트에서 하나씩 골랐다.

너희 아빤 자상도 하시지, 어머니의 만족한 멘트였다.

뭘 이정도로…… 실은 돌아오는 비행기 편에서 쫙 다 산 거요, 당신이랑 새 사돈 거 머플러만 빼고. 첨엔 그것만 사고 별 생각 없었는데, 일행들이 비행기 안에서 엄청 뭘 사더라고요. 그 자수정 그건 진주하고 둘 중에서 망설였는데, 당신 좋아하니 좋구려. 내가 첨엔 진주를 골랐어요, 우아한 우유 빛에. 그런데 임본부장 말이 진주는 눈물이라 해서 얼른 놓아버렸소.

 

그렇게 화기애애하고 행복했던 해외여행이 불법이었다니. 5년짜리 상용복수여권을 만든 것이 파면될 죄목이었다니. 누구를 해친 것도 누구에게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단 한 번의 해외여행으로 파면이 되신 것은 정말 날벼락이었다. 상용여권은 유력한 회사와 상사 임직원들에게만 엄격한 추천제로 발급되었었는데, 제약이 막 누그러지는 때 쉽게 상사 임원으로 발급받은 것이 화근이었다고. 그리 옛날도 아닌 옛날에 그런 제약이 있었다니. 그것이 파면에 해당되는 죄였다니. 차별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상용여권 가진 사람만 사람일 때.

아버지의 파면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장 큰 아픔은 아버지를 잃은 거였다. 아버지는 그 일을 이겨내지 못하셨다. 갑작스런 병, 갑작스런 죽음이 답이었다.

 

파면이었어요!

앗, 낮의 그 여자.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자마자 파면이라는 날벼락을 맞는 그 여자는? 그 여자는 어찌 살아왔을까. 그 여자는 말을 멈추고 사라졌고, 내 귓속에 살아 있다가 불쑥 튀어나온다. 이 여자를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두어야 할까. 고개를 저어본다. 귓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나. (8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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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단편 「파면」, 『소설시대』 통권20호, 265~287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10. 7. 01:11

2017. 9.8.

 

창작 노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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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나의 심장에서 이웃들의 심장에서 일렁이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왜 우리는 저 혼자서 제 삶을 생경해하는 것일까. 가을 비 차갑게 내리면 더욱.

 

                                              

                                                  *

 

아침에 서평/논문에 대한 페친의 글을 읽다가 글쓰기와 서평/논문의 관계가 생각나서 옛날에 썼던 글을 올린다. 2004년 『한국소설』 11월호(64호)에 단편 「건들장마」를 발표할 때 함께 쓴 글이다. 그때는 ‘창작 노트’를 따로 써달라고 했다.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몇 해 안 되는 때로, 만나는 사람마다 안정된 교수직에서 왜 느닷없는 소설 쓰기로 곁눈질인가 하는 질문을, 최소한 그런 눈초리를 보내던 때였다. 나는 분명 다른 사람들의 소설 파먹고 사는 일에 지쳐 있었다. 결국 정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강단을 떠났다.

지금은 그럼 행복하냐고? 또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슬쩍 비웃으면서. 왜냐하면 여태 완전 무명이니까.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일에서 완전 무명이라는 것을 참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이 오니까 그렇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다.

내리는 비는 맞는다는 것, 오명만도 못한 무명의 비라 할지라도 내리면 맞는 것이다. 또 영영 그치지 않는 비는 없으려니.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8. 8. 00:19

서술자 한금실 사소한 사건들 언어화

서용좌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 나와

 

광남일보 http://www.gwangnam.co.kr/

2017. 08.02(수) 16:26 확대축소

독문학자이며 소설가인 서용좌의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가 푸른사상 소설선 14번째 권으로 출간됐다.

지방대학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서술자 한금실을 통해 그녀가 만나는 우울한 군상과 암울한 일상, 그 속에서도 숨은 해를 찾아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추적한다.

특히 이번 이야기는 장편 ‘표현형’에서 나 한금실이 ‘동반자를 구한다’는 남자를 만나러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다가 거의 마지막 장소와 마지막 순간에 물에 빠졌던 이야기에서 이어진다.

‘표현형’에서 세계 도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유전자의 표현형을 추구하던 그녀는 말미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쫓아 물에 빠져 익사 지경의 모습으로 사라졌었다. ‘흐릿한 하늘의 해’는 한금실이 의식이 돌아오면서 더 깊었던 물에 대한 기억으로 다시 생의 갈피를 잡아내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의식 저 아래 깊이 가라앉았던 백두산 천지의 기억과 더불어 멀고 가까운 과거가 불려나오고, 그로 인해 오늘을 있게 하고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돈은 없으나 시간은 넉넉한 비정규직 강사로서 현실을 살고 있다. 하여 단조로운 일상은 삶의 순간들을 천착하는 계기가 된다.

한금실은 등장인물이자 서술자로서, 자신과 이웃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소한 사건들을 언어화하고 있다.

서용좌씨는 광주 출생으로 독문학자를 거쳐 늦깎이 소설가로 데뷔했다.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 연작소설 ‘희미한 인(생)’,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펴냈다. 이화문학상과 광주문학상, 국제PEN문학활동상 등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11. 23:54


‘글쓰기’ 절실해 떠난 강단 …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할 뿐”

 

퇴임교수가 사는 법_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출간한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

2017년 07월 10일 (월) 15:44:18 김홍근 기자 mong@kyosu.net

 

   
     
 

때로는 한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냉철하고도 날카롭게, 때로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이 나라, 이 사회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교수가 있다. 현재 <교수신문>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을 연재하고 있는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다.

독문학자이지만 우리말로 글을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이 행복하다는 서 명예교수는 어느 날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유는 ‘소설가’로서 좀 더 매진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2001년 『열하나 조각그림』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첫 발을 내딛은 후 이화문학상(2004년), 제6회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2013년), 제30회 PEN문학상 문학활동상(2014년) 등 다양한 수상경력 또한 갖고 있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 교수는 본인의 소설 작품 끝에 실었던 ‘작가의 말’ 한 구절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퇴임 이후 소설가로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서용좌 명예교수를 서면으로 만나봤다.

 

 

△중학생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소설가를 꿈꾼 배경이나 계기가 궁금하다.

 

“소설가?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다기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그리됐다. 2001년 얼결에 『열하나 조각그림』이라는 장편을 발표한 것이 문단에 디딘 첫 발이었다. 독문과 졸업한 제자들 가운데 출판사를 차렸다고, 글 좀 내자고, 수필이라도 출판하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비밀이 터져나와버렸다. 수필은 말고, 소설이라면 끼적거리고 있노라고. ‘막고 품는다’는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둑을 막고 물을 모조리 퍼내면 고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쓰는 말이다. 옛날에는 부족한 실력으로 교수가 되고 했으니, 무조건 뿌리째 또는 송두리째, 중요성의 경중을 따지기 이전에 모조리 공부하는 방식이라서 시간을 많이 써야 했다. 전공이 독일소설이었는데, 공부를 하다하다 지치면 나도 모르게 ‘소설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소설쓰기가 무엇인지 배워 본 적도 없이. 무엇보다 외국어에 매달려 살면서 그 반작용으로 우리말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제목에서와 같이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자 했나.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이다. 유토피아란 아무데도 없는 곳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에. 더구나 오늘 이 땅의 삶이 점점 녹록치가 않다. 국민총생산이니 하는 지표의 성장과는 무관하다. 한 겨울에도 집이 따뜻하다 못해 반쯤 벗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라고는 하나, 우리들 마음속 어디에도 온기라고는 없다. 사회라는 궤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뇌세포는 주판알 굴리는 상처로 피범벅이다. 특히 지식을 환전하지 못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느끼면서 애달파 하다 보니, 그들을 위해 글을 쓰게 됐다.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픔을 보듬고 살아간다. 그런 것들을 확인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동료애, 인류애 같은 것을 되살려 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유명한 시인의 시구이지만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는 담쟁이넝쿨의 이미지를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다.”


 

△퇴임 이후의 삶은 어떤가. 강단에 있을 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졌을 듯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퇴임’이란 단어는 생소하다. 곧 다가올 정년을 기다리지 못하고‘명퇴’를 한 것은 충동이자 절실한 선택이었다. 강의하던 것을 정리해서 『도이칠란트. 도이치 문학』으로 내놓고는 회의가 깊어졌었다. 평생 공부한 것이 이 부끄러운 수준이구나, 해도 해도 잘 안 되는 것 그만 하자, 교수라면 객관적으로 책임이 막중하지만 글 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겠지……. 그래서 교단을 떠났다. 소설로 등단은 했었지만 여전히 무명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렇고, 그래도 무작정 한 가지 일에 몰입하련다는 심정이었다. 그때로서는 내 소설에 독자를 얻을 일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쓸 일이 절실했었다. 또 다른 고통이 밀려올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로. 선택, 그러니까 앞서 말 한대로 하이에나처럼 사는 일을 그만두고서, 그럼 만족하느냐? 최소한 문학작품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일차적 작품을 쓰는 일이 그리 좋으냐?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글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뭔지 모를 행복감을 느낀다. 소설가로서의 불발은 행복한 고민에 속할 것이다.”

 

△이번 소설에는 “나는 글을 쓴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라고 선언한 크리스타 볼프의 말이 등장한다. 소설가로서 생각하는 어떤 ‘신조’ 같은 건가?

 

“‘…… 그러므로 살아있다’라는 명구에는 숱한 변형들이 있다. 글 쓰는 사람들의 경우 누구에게나, 글을 쓰느라고 살아있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밀도가 강하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도 신조 같은 것은 정립해놓고 살지는 못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하는 것, 그것으로도 벅차다. 오늘 살 수 있다면 공들여 살 것이고, 오늘 쓸 수 있다면 정성들여 쓰는 것뿐이다.”

 

   
  ▲ 1997년 10월 추월산에서  
 

△후배 교수들에게, 혹은 학문후속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후배 교수들, 특히 인문학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뭔가 말해도 된다면, 자긍심을 가지고 현실을 버티자는 것이다. 늦게라도 다른 현실이 필연코 닥친다. 학자들에게는 그렇게 만들 책임도 있다. 문학과 문학연구를 포함해서 인문학은 사람에 관한 학문이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사람의 도구에 관한 학문들이 사람에 관한 학문을 추월하여 학계를 주도하고 ‘자본주의의 돈’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이 현실이 영원할 리는 없다. 진자운동을 생각한다. 인류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진자운동 같아서, 감성과 이성이 주도하는 시대상이 번갈아 나타난다. 합리적 계산의 과학이 그네의 최고점에 다다르면 그만 내려오고, 그네는 다시 우아하게 다른 쪽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틀림없이 멋진 호의 곡선을 그리며.”

 

김홍근 기자 mong@kyosu.net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6. 10:31
서용좌 3년 만의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  

2017년 07월 06일(목) 00:00

 

 

 

 

 

 

소설가 서용좌(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사진) 교수가 신작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푸른 사상)를 펴냈다.

2014년 ‘표현형’ 출간 이후 3년 만에 펴낸 작품에서 작가는 우리사회 대표적인 비정규직 중 하나인 시간강사의 삶을 들여다본다.

소설은 공부를 잘해 외국 유학까지 갔다 왔지만, 현실은 ‘지방시’(지방대학 시간강사)를 전전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인공이 저자의 전작 ‘표현형’의 서술자 한금실이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 ‘흐릿한 하늘의 해’에선 한금실의 의식이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가진 것은 없고 시간은 넘쳐나는 비정규직 강사의 현실은 막막하고 고달프다.

어느 순간 한금실은 일상의 순간들을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등장인물이자 서술자로서, 자신과 이웃의 사소한 사건들을 언어화한다. 소설 전편에는 소외되고 배제된 이웃들에 대한 애잔한 시선이 깔려 있다.

저자는 한금실이라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려 “글을 쓴다는 것은 인생을 그렇게 어설프게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리라”면서 “그러므로 나의 이야기는 다만 근저에 놓인 사건들의 주관적 변형에 불과한 것임을 안다”고 밝혔다.

/박성천기자 skypark@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5. 02:16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336쪽, 푸른사상사 2017.6.20.

 

표지는 아들 - 캘리그라피는 손녀 - 이만한 뿌듯함이 크다.
OK 내고서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하는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5. 02:13

 

 

다른 사람의 죽음

-페트라 켈리를 기억하기 위해서 -

 

효주 전 의원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뉴스속보가 방송마다 떴다. 3월 중순, 20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이라는 화두가 온 나라를 삼키고 있던 때였다. 날마다 사건사고이지만 그래도 큰 건에 속했나 보다. 온 나라는 잠시 연효주라는 이름 석 자를 불쏘시개로 하여 뜨거운 가마솥 같은 열기와 연기에 휩싸였다.

혼자서? - 그럼 혼자서지, 독신인데.

아무도 없었을라고? 케미라도! - 아무도 없었대.

그래도 죽을 이유가 없으……. 아서.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4월 들어 본격적으로 선거가 다가오면서는 선거증후군치고도 상상을 절한, 시쳇말로 멘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날마다 더 지독한 단어들이 황사와 미세먼지에 섞여서 뱃속으로 침투되고 있었다. 엉뚱한 문자가 날아들었다.

한금실, 갑작스레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통화하자. 여고, 손경화.

우리 의원님이었어,

그 비보.

늦은 밤이었다. 깨어있어서 바로 들여다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우리 의원님이라니? 이름을 쓰고 나서 덧대어 쓴 것으로 보아 의미심장한 내용 같았다. 가만, 의원님이라면…… 설마 저 뉴스에 나왔던?

 

손경화를 생각해 보았다. 상냥함에 예쁘기까지 한 경화는 아나운서가 되겠다며 신방과를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반이었지만, 서로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경화가 웬일로 나를?

아니, 언젠가 꿈에서 내가 국회위원 보좌관일 때, 그것도 남자일 때, 딱 한번 경화를 만났다. 나는 우습게도 급한 연설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는데, 늘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옆방의 보좌관이 날 불러 세웠다. 소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보니 그 애가 바로 경화였다. 실제로 보좌관이 된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특별히 정치적 야심 때문이 아니라 집안의 배려로 의원실에 발탁되었다고들 했다. 느닷없이 꿈속에서 ‘금실아’ 하고 나타나더니, 또 느닷없이 현실에서 문자를?

어처구니없다. 경화가 내려오겠다고 했다. 우리대학의 김경래 교수를 만나러 오는데, 나더러 함께 가자는 부탁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연약했던 본성이 나오는가, 국회의원 보좌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행보이지만 약속을 했다. 전달할 물건이 있는데……, 경화의 말이었다.

 

김경래 교수는 현직이 아닌 명예교수였다. 과실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느닷없는 내 전화에도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연효주 의원님 돕던 제 친구가 교수님을 찾아뵙고 전할 것이……’라고 할 때도 크게 동하지 않았다. 다만 약속 당일에 시간이 임박해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나더러 이왕 다리가 되었으니 전할 물건만 받아 두라고, 다음에 연락하겠다고만 했다. 난감했다.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경화가 들고 온 것은 연의원의 아이패드였다. 김 교수님 앞으로 남겨진 아이패드. 그것을 가져온 경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놓고 가는 일이 중요했다. 유품보관소도 아닌 내 좁은 원룸에서 헝겊 가방에 덮인 그 아이패드는 죽은 듯 며칠을 그러고 있었다.

과실 강사용 우편함에 한금실 선생 앞이라고 쓰인, 작고 두꺼운 샛노란 봉투에 비뚤한 부피감이 있는 우편물이 있었다. 봉투를 열자 학교 사진이 들어있는 옛날 그림엽서가 나왔다.

최근의 현실을 맞닥뜨리기에는 뇌도 마음도 상했소. 이 또한 그 물건과 함께 있어야할 것이라서 보냅니다. 비겁하게 도망친 나를 찾는 대신 모두를 열어보아도 좋소. 그 다음은 알아서 하시오.

 

유에스비가 함께 있었다. 난생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물건을 받다니. 해골이 흔들릴 일이다. 조만간 그에게 전해져야 할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에게서 내게 무엇이 오다니. 생판 남의 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도 해와 달은 운행을 쉬지 않았고, 어김없이 선거일이 닥쳤다. 필연도 이변도 뒤범벅으로 새 판이 짜였다. 사람들이 한국이 어찌 되건, 지구는 아픔의 고통을 모르는 듯 했다. 아이패드와 유에스비가 나란히 놓인 책상 한쪽에 신경이 쓰여서 요새는 강의 준비에도 집중이 흩어졌다. 치워놓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마땅히 분류해서 치울 카테고리가 없다. 연효주를 검색해보았더니, 어디나 벌써 1964-2016이라고 고인 취급이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된다고만 간단히 실려 있다. 김경래 교수도 찾아보았다. 1943년 생, 미국 워싱턴대학 박사학위, 그 뒤 굴곡지긴 했지만 경제학과 교수직을 정년까지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어찌된 것일까? 두 사람은 지인이기 보다는 부녀 쪽에 더 가까울 정도로 다른 세대에 속했다. 어떤 자석의 힘이 두 물건을 이 책상으로 끌어당겼을까. 호기심이 인간의 저열한 특성인 것을 모르진 않지만, 나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우선 하나라도 열어보는 일이었다. 간단한 유에스비가 먼저였다.

무의식적으로 예상했던 대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거의 연대기 형식이었다.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을 하면서 정리를 하기로 했다. 정독을 해야 그 다음 행동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경래는 태평양전쟁의 틈에 태어나 해방 후 유년기를 거쳤다. 받아 마땅한 애정을 받을 길 없이 자라기는 동년배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해방 후 뒤숭숭한 정치와 한국전쟁을 다 몸으로 부대끼면서 통과했고, 게다가 그때는 드물지 않았던 소아마비를 앓아 가볍게 다리를 전다. 운동성이 떨어진 사람들이 그러듯 책을 가까이 했고, 성적은 늘 우수했다. 장학제도는 인색했지만 최소한의 영재들에게는 기회가 있었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학비 걱정은 없었다. 집안도 극빈한 상황은 아니라서 병신치고는 훌륭하게 자랐다. 물론 장애는 늘 장애였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그가 혐오하는 군대를 면케 해주는 깜짝 귀여운 역할을 해냈다. 그가 군대를 혐오하게 된 것은 부실한 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공부를 제대로 하다보면 사람은 반전주의자가 되기 십상인 모양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장학금으로 워싱턴에 입성했다. 세상은 책 속의 간접 경험으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넓고 다양했다. 1966년은 학생의 해였다. 페트라 켈리를 만났다. 입학도 전에 벌써 ‘우리 세대는 달라’라는 시를 써서 유명해져 있었다. ‘이번 세기 숱한 전쟁을 일으킨 모든 세력들 / 그러나 아무리 극성스런 악의 세력도 / 사랑의 힘만은 꺾을 수 없어 / 그 놀라운 힘 우리 안에서 / 66학번 우리 친구들의 힘이 되어 / 세상 밝히는 빛이 되리라.’

글짓기나 웅변대회를 휩쓸 정도였다는 이 유명한 여자는 놀랍게도 미국 태생이 아니었다. 전후 독일에서 태어난 페트라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 아버지를 만났다. 그가 본국으로 전근되었을 때, 페트라는 열 살 남짓 나이로 모국어를 떠나 영어로 살게 되었다.

외롭게 느끼면 더욱 열심히 하게 되는 거야……. 그는 자신의 이야기인지 그녀의 이야기인지 구분 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김경래가 유학 시절에 받은 가장 큰 충격은 행동하는 세대들의 태동을 몸으로 목격한 것이었다. ‘우리 흑인이 자유를 갈망한다고 해서 증오의 잔으로 자유를 마실 수는 없다.’고 했던 킹 목사를 눈으로 보았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타는가 했더니 곧 이어 암살당했고, 애도가 폭동으로 변질될 지경인 것을 가까이서 체감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 몇 번씩 투옥되고 집은 불타고 또 불타고…… 그런 박해를 겪고도 말하다니. ‘주님을 믿을 때 고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내 개인적인 불행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킹 목사가 암살되기 2주 전 집회에서 했던 말을 그는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 우리의 투쟁은 진짜 평등을, 그러니까 경제적 평등을 위한 것입니다. 점심을 통합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햄버거를 살 돈이 충분하지 않은데 통합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득이 됩니까?’

그래 진짜 평등은 경제적 평등이야.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금의환향의 시절, 그는 실은 귀국 예정에서 조금 뒤쳐졌다. 국내에서 받아서 나갔던 장학금은 끊겼지만, 미국은 잘 비비면 비빌 구석이 있었다. 그 당시 남한은 약체 신생국으로 간주되어서 보호의 대상이라는 분위기였다. 친절과 동정 사이 애매한 관심을 받는 미미한 나라의 미미한 학생은 조용히 공부에 매진했다. 페트라 같은 엄청난 에너지에 감격했지만, 어찌 보면 페트라를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그녀는 국제정치학, 그는 경제학으로 전공도 달랐다. 다만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 간 뒤에야 터득했는데, 그것이 그녀의 영향이었는지, 공부의 지향점과 맞아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두 사람 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떠났고, 그리고는 실은 그녀를 잊었다.

 

페트라 켈리가 그의 뇌리 속에 되살아 난 것은 1980년 초였다. 독일 녹색당이 창당되고 대변인으로 우뚝 선 페트라가 뉴스의 중심에 섰다. 그렇구나, 여자가 독하게 일어서는구나……. 그때부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독일의 녹색당과 페트라 켈리를 뉴스의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다.

그해 한국은 봄부터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시위로 시작하더니, 오월 광주의 엄청난 민중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변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항쟁은 피로 좌절되었고,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진 하 세월이 걸렸다. 여름이 되면서 연좌제는 폐지한다면서 삼청교육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몰려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이 시작되는 것과 거의 맞물려 대통령은 오월항쟁 등의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숨도 쉴 틈 없이 새로운 대통령이 등극했다. 그제야 100일 넘게 문을 닫았던 대학의 휴교령이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대학이 문을 닫은 동안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그 세월을 우리는 그저 가만히 살고 있었다.

가만히, 다들 가만히 살았다.

광주 오월 비극의 그해 8월 초,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의 사태에 대해 뒷북치는 입장을 밝혔다. 누구라도 한국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한국의 안보가 유지된다면 이를 한국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특히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복종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진단까지 내렸다. 그의 말에 분노했지만, 그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뜬구름이었다. 장군이 군복을 벗더니만 대통령이 되는 나라였다. 80년 5월 17일의 계엄령은 8월 27에 새 대통령을 낳는 웅대한 막으로 대단원을 장식했다. 석 달 열흘이면 세상이 평정된다. 어쩌면 순진한 광주가 어딘가 타깃이 필요한 작전에 스스로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도 없는 채로. 그렇게 통곡하는 광주는 도처에서 다시 통증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김 교수의 말로 정리를 해야겠다, 내가 왜곡하느니.

1983년 그때 연효주는 새내기 대학생이었다. 내가 지도교수를 맡은 학생인데, 한 학기를 채 마치지 않고서 돌연 자퇴를 상담하러 왔던 그녀를 기억한다. 경영대는 자신과는 너무 맞지 않다고, 경제면의 기사들을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마인드로 어떻게 전공책을 읽느냐고.

무슨 책을 못 읽는다고……?

『경영학적 OO의 틀』, 교수님이 기본 필독서라 하셨잖아요.

김교수로서는 자신보다 한발 앞서 도미해서 유펜에서 학위를 한 S대 O교수의 책을 신입생들에게 추천했다. 당시 미국은 가히 경영의 시대라는 화두가 각광이었다. 변호사나 정부관리가 유망 직종이었다가 70년대를 거쳐 기업경영의 시대가 되면서 경영학 석사과정이 최고의 주류를 이루었다. 미국 따라쟁이 우리 유학생들도 그런 분위기였다. O교수도 원래 독문학 전공이었다. 그렇게 다른 전공에서 경영학 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경영학과에 여학생들은 여전히 적었다. 그런데 똘똘해 보이던 여학생 하나가 시작서부터 이제 그만 두겠단다.

 

그 여학생이 재수 끝에 서울 소재 모 대학에 합격했다고 인사를 왔다.

하필 독문학을?

예. 독문학에서 출발해서 경영학자로 대성하신 분이 있으면, 경영학 시도하다가 독문학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하죠.

참 청개구리 심보네요.

그런 것만은 아녜요. 교수님은 우리가 입학하자마자 왜 독일 녹색당의 페트라 켈리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그 봄, 지지율 겨우 5.5%로 독일연방의회에 의석 27석을 확보해낸 젊은 여성이, 유학 시절에 워싱턴에서 만났던 여학생이 독일 사회를 흔들어 놓고 있다고. 이런 비슷한 말 기억하세요? 저는 다 외우는데요! 귀농을 꿈꾸는 자연주의자, 반체제 철학자, 젊은 무정부주의자, 고집스런 동물애호가, 마당을 잘 가꾸는 할머니로 구성돼 있는 오합지졸 국회의원들 이야기를.

그랬었나요, 내가?

그런 다음에도 연은 - 성만 불러야겠다 - 계속 연락을 해왔다. 방학에 고향에 내려오면 연구실에 자주 들렀다. 이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연의 고향 사람들은 북대보다는 이쪽으로 진학을 많이 했다. 그래서 처음에 우리대학에 진학했었던 것이고. 페트라 켈리의 근황에 대해서도 묻곤 했다. 연이 독일을 기억하는 코드는 오직 페트라 켈리였다. 동독의 수반 에리히 호네커가 그들을 대화에 초청한 내막이며, 녹색당은 나토의 결정에도 반대할 수 있는 정당이라고도. 의회 내 중점 사업은 평화정책, 인권 그리고 소수민족에 관한 것들이라고도 말해줬다. 돌이켜보면 나는 결국 연의 대화에 이끌려가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 역시 역사의 한 부분을 제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1985년이었다. 오월만 되면 대학생들은 광주의 오월을 실감했다. 그때는 ‘삼민투’가 결성된 직후였다. ‘민추위’ 산하 ‘민주화투쟁위원회’ 계열과 ‘주도세력’ 계열의 절충으로서 반쯤은 공개적인 투쟁조직이었다. 그들의 주도로 서울에서 70여명의 학생들이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광주에서는 80년 당시에 이미, 그러니까 그해 마지막 가는 12월에 벌써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고, 이태 뒤 부산에서는 사망사고까지 부른 방화사건이 크게 터졌었다. 무고한 한 학생이 연기 질식으로 사망했고, 주동자들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니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5개 대학 삼민투 위원장 중에 연의 고향 동기가 있었다. 고향 동기는 금서가 된 독일어 책 부분 복사물을 들고 그녀를 찾곤 했다. 독일어를 아는 건 당시 ‘금서’를 읽는 큰 장점이었다. 다른 대학의 삼민투 위원장들도 만나게 되었다. 미국문화원 농성 사건 뒤 체포된 73명 중 몇몇 사람은 연에게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건너서 언뜻 스치거나 했던 존경스런 인물 중에는 앞선 방화사건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아 복역 중인 놀라운 선배들도 있었다. 막연히 그녀의 가슴 속에 살기 시작한 누군가도 거기 있었단다.

연이 한 번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그 누군가’는 타 대학의 삼민투 위원장이었고, 당연히 구속되었다. 구속자 가족이 이루어낸 민가협에서 활동하는 그의 부친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더란다. 대개는 어머니들인 단체에서 혼자만 아버지여서 혹시 어머니가 안 계신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고. 물론 생각뿐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간헐적으로 내게 쏟아내는 연에게는 더는 가까운 사람이 없었을까. 젊은 그녀에게 설마 했지만 그래 보였다. 연은 미국문화원 안에 들어간 73명 속에도, 후에 수배당하거나 구속된 속에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한 지근거리에서 삼민투의 투쟁방식을 지켜보았다.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 그 어느 것도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통한의 아픔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이 흘렀다. 연은 졸업을 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막상 독일에서는 독문학 전공이외에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해서 조금은 놀랐다. 이메일이 가능해진 때였고, 가끔 씩 소식들이 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페트라의 소식을 먼저 알려주었다.

근년에는 티베트 문제에 개입해서, 독일 의회에서 티베트 문제가 언급되도록 했더군요.

그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들의 생명보호에까지 관심을 가졌더라고요.

녹색당 선거구호 들어보실래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 또한 보호할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인식한다……’ 어쩌고.

이번엔 ‘사회적 보호연맹’이란 것을 만들어 창립의장이 되었는데, 어째 녹색당과는 오히려 삐걱거린다네요. 현저히 영향력도 상실하고.

<12시 5분전>이라는 환경보호 시리즈를 낼 것이라고 하네요.

맙소사, 비보예요, 들으셨지요? 이 가을 시신으로 발견된 페트라 켈리, 게다가 추정하건대 사후 이삼주 후에야 발견되었다니요!

그랬다. 페트라 켈리가 ‘돌연’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1992년 가을이었다. 독일 신문 방송에서도 열 띤 보도들이 있었다. 총성에 얽힌 추측성 기사들도 난무했다. 자살, 타살과 자살, 타살…… 음모론까지 잠시 혼선이었다.

 

연은 자초지종 기사를 요약해서, 더러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이후 페트라의 일생 전체를 요약해서 알려왔다.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못하고 내버려 뒀다.

워싱턴의 미국 사람 - 그때는 그랬다 - 페트라는 우선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유럽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1972년부터 10여 년간 브뤼셀의 유럽공동체에서 일했다. 유럽공동체 경제사회위원회 행정사무관. 그러면서 독일 사민당 당원이었다. 1979년에는 사민당 슈미트 총리에게 공개서한을 쓰고 탈퇴했다니 거창했다. ‘다른 형식의 정치적 대표’를 모색하겠노라고, 생의 보호와 평화만이 우선이 아니라 남녀평등권의 원칙이 중요한 그런 단체를.

유럽공동체 본부가 있는 베를레몽 건물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세상은 남성의 것이라는 편견뿐이었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던 여성해방운동의 기치를 뼈저리게 느끼고 실천하려 했던 일벌레의 눈은 만족하지 못 했다. 성공한 여성은 남성의 배려(?)의 결과일 뿐, 양념처럼 빛나는 존재일 뿐, 핵심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너무 재미있어, 하인리히 뵐 등이 함께 했다는 유럽의회 진출을 모색하던 당시 그 이름말이다. ‘여타 정치연합 녹색’ 그게 뭔가. 그녀가 의미하는 ‘정당 반대당’ 바로 그것이었다니. 그녀 자신 앞으로 가지게 될 정치적 영향력을 상상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은 시비꾼, 잘해야 시민운동가쯤이라고 느꼈다는 그녀.

 

하지만 주변에서 볼 때는 처음부터 스타 이미지를 가졌다. 요제프 보이스나, 대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 등 눈부신 인물들과 나란히. 27명의 ‘여타 정치연합’으로서 출발했던 녹색당의 결과물은 다시 말해도 찬란한 성과였다. 생태주의와 사회적 책임, 풀뿌리민주주의와 비폭력에 관심을 집중한 녹색당은 시민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원자력발전소 건립반대에 그녀가 그토록 열심이었던 것은 어린 여동생의 암 발병과 죽음의 원인을 거기서 봤다는 개인적 경험도 크게 작용했었다. 여동생의 아버지인 미군장교는 일본의 원폭 투하 때 일본에 주둔했었다고.

연은 잔뜩 써 보냈다.

 

소설 같은 사생활도 기사화되어요. 보세요!

1947년, 전후 독일의 절대빈곤기에 태어난 페트라 카린 레만의 ‘새 생활’은 곤곤했다. 아버지 레만은 동독출신 나치병사로 바이에른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그곳에 정착했지만 일찍 집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새아버지 미군 중령 존 E. 켈리를 따라 1960년에 미국으로 갔다. 그래서 켈리다.

워싱턴 대학 재학시절엔 교수님도 만났다 하셨잖아요. 교수님 말씀과 똑 같아요. 페트라 켈리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활동들, 그리고 죽음, 그의 비폭력 원칙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요. 독일의 현대사와 전쟁의 잔혹함을 깊게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고. 여기까진 교수님이 가끔 말씀해 주셨던 이야기죠. 그리고는 교수님이 말해주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아예 사생활. 유럽공동체의 행정사무관으로 일할 때 위원장이었던 그는 페트라로서는 ‘세 번째 아버지’같은 연인이었다고. 그와는 석 달 열흘을 못 간 것이, 40살 가까운 나이 차이 보다 사고의 낙차가 컸을 것이라고. 비효율적 농민을 이농하도록 권유한 ‘농업 1980’을 기획해낸 장본이었으니까. ‘네 번째 아버지’ 같았다는 연인인 20세 연상의 운송노조 위원장에게서는 아이를 갖는 특별한 경험을 했지만 헛일이었다. 가톨릭교도이자 아일랜드인인 그로서 이혼은 상상 불가였고, 설상가상으로 페트라의 건강도 심각했다. 의사는 중절을 권고했고, ‘매우 고통스러웠던’ 그 일로 모든 것은 끝났다.

 

마지막 동반자이자 ‘마지막 아버지’였다고 하는 G.장군과의 십여 년은 그녀의 일생 전부였다. 24년간 서독의 연방군 복무로 기갑사단 사령관이었던 그는 1979년 나토의 퍼싱II 유럽배치 계획과 관련하여 180도 방향을 바꾸어 재무장 반대로 돌아섰다. 1980년에는 재무장 반대와 평화를 요청하는 크레스펠트 선언문을 기초했고, 일 년 뒤 이백만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모스크바의 돈을 받았다거나 동독의 사주를 받았다고, 그렇게 간주되거나 모함되었다. 몇 번의 연좌데모 때마다 벌금형도 받았다. 전향한 장군과 생래적인 이상주의자의 결합은 스물 네 살의 나이를 뛰어넘어 눈부시게 출발했다. 때늦게 정치에 뛰어든 노장군에게 페트라는 ‘반은 수호천사요 반은 맹도견’이라 불렸다. 그렇게 무기 없는 평화를 외쳐대는 그들이 1983년에는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상상이 간다. 연방의회 중에 뜨개질하고 있는 녹색당 의원 사진이 뉴스에 나왔었지. 구겨진 바지로 자전거 출근은 기본, 후훗. 녹색당 초창기엔 퇴역 장군의 정치적 무게도 컸고 켈리의 녹색당 창립자로서의 이미지도 대단했지. 왜 노선 투쟁에서 영향력을 상실해갔을지. 하긴, 이상주의자가 이해하는 녹색당은 사상을 내놓더라도 권력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 여전히 원외야당의 성격을 고수하고 있었으니 정치에선 안 통했겠지. 녹색당은 정당이 되어갔고, 켈리는 녹색 이상으로 남은 거야.

 

티베트 까지 걱정, 아니 세상 전체를 개혁하려고 사방에 부딪혀갔지요. 산더미 같은 일 속에 살아가니까 주위의 걱정을 들었나 봐요.

‘사람들의 곤경과 자신을 선을 그을 필터가 결여되었지요.’

‘병참술도 없이 세계정치를 했지요.’

이상하죠, 통일의 열매는 사민당이 아닌 기민당의 것이네요, 참.

통일이후 총선에서는 녹색당이 오히려 참패했어요.

페트라 켈리는 지고한 요청과 엄격한 도덕으로, 체르노빌, 소아암 ……끝없는 테마에 매진했네요. 세상은 그들을 잊어가기 시작하는데.

그러다가요, 갑자기. 갑자기 그렇게.

 

 

다음 다음해 연이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는 담담하게 페트라 켈리를 일축했다. 모교에서 시간을 얻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한참을 빈둥대고 있었다. 내게 와서 하는 말로 미루어, 옛 동아리 사람들을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막상 정치 일선에…….

그들 중 마음을 보냈었다고 나중에 살짝 흘린, ‘그 누군가’를 여전히 멍하니 보는 느낌이었다.

일단 조치원 캠퍼스에 강의는 얻었어요. 학위하고 온 사람들 줄줄이 밀려 있어서 겨우…….

90년대 중반은 박사들 정체가 폭죽처럼 불어난 때였고, 인문학 특히 문학은 학생 정원의 축소로 신규전임에 임용되는 기회가 극히 줄고 있었다. 결혼은 충격적으로 멈칫하고 나더니 잊은 듯 했다. 해라, 안 한다, 그 일로 어머니와 심각한 지경에 갔었다 했다. 오히려 15대, 16대 총선을 치르는 동안 직접은 아니나 ‘그 누군가’를 지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에서, 그 다음엔 고향에서 무소속을 고집하던 ‘그 누군가’는 계속 고배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상대는 여당에서 고위직을 지낸 노장이었으니 고배를 마실밖에. 정당까지 바꾸어가면서 계속 당선되는 상대를 어쩌랴.

교수님, 이건 좀 너무 심한 경우 아녜요? 이 당에서 장관하고 국회의원하고, 대통령 바뀌니까 또 당 바꾸어서 국회의원 하고.

정치 현실에 ‘너무’ 라는 게 어디 있기나 하던가?

 

 

세월은 또 흘렀다. 세기가 바뀌었다.

연은 십년이 넘어도 ‘시간’ 꼬리를 떼지 못 했다.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비례대표에 넣으시겠다고요!

뭐, 비례대표라?

예, 저를 18대에. 아버지가 이루지 못하신 꿈이고, 다른 형제가 없으니까. 또 어머니가 아프셔요. 가업은 사촌 오빠에게 일임했고요. 제 미래를 보증해놓고 나서야 편히……. 결혼하는 걸 기다리느니 그것이 더 빠르겠다고! 마침 정치학도 부전공으로 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그렇게 그녀는 의원이 되었다. 마흔 다섯이었다. 상향공천을 시도하는 정당이라고 했지만 예외란 늘 있는 법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 무리수였을 외동딸 의원 만들기에 성공하시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말 그대로 혼자가 되었다. 그때도 그녀의 ‘그 사람’은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아니, 지방방단체장 선거에서까지 낙선한 후유증으로 아예 총선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했다.

나와 급격히 가까워진 시기는 바로 그 시기였다. 대화 상대가 그만큼 더 절실할 때였는가 보다. 물론 젊은 시절 소위 운동권에서 만났던 선후배들과도 다시 국회에서 또는 외부에서 접촉이 잦아졌겠지. 이상하게 통증을 호소하곤 했다. 삼민투 투쟁 선봉의 몇 사람이 전향하는 과정에서 연은 많이 놀라워했다. 서울 미국문화원 농성 사건뿐 아니라 부산문화원 방화사건 주동자들 중에서도 180도에 가까운 전향을 보일 때, 연은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녀가 존경스럽다고 여겼던 사람들, 제 몸을 던져 이웃을 민족을 위해 변화에 목숨 걸었던 사람들이 변할 때의 어리둥절함을 또래들에게는 토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아시잖아요. 그 선배는 ‘민족을 학살하고 그 피 위에 선 정권이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 할 수 있냐’고 항변하며 사형선고를 받았죠. 어떻게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그 신문을 대변하는 양 기사를 써요? 심지어 그 대통령후보를 지지할 수가 있는 거예요?

사형선고까지 당해 봤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연의원. 대한민국이 자유국가임을 명증하는 또 다른 사건이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의식을 바꿀 수도 있고 그것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좋은 나라.

연의원은 예상과 다르게 국방위원회에 들어갔다. ‘그 누군가’를 대신하는 심정인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라고도 했다. 다음 지역구 출마와 연계가 멀어서 그렇다고도 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가. 연 의원은 군복무 가산점제도를 들고서 내게 열변을 토한 적이 있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군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 복무 년 수만큼 혜택이든 가산점이든 너무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겨우 동등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여대 졸업생들과 장애 남성의 헌법소원으로 위헌 판결이 나왔지만, 현실을 보라는 것이었다. 누구는 말 그대로 청춘을 나라를 위해 저당 잡혔는데, 몸과 맘을 위험스레. 누구는 부자 모두가 병역기피를 하고도 떳떳한 나라꼴이라뇨.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에 이어 ‘사람의 아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로 나뉜 팔자타령이 몇 십 년이 가도 그대로인거예요.

 

그러던 연이 돌연 번아웃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번아웃 - 일을 집착적으로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다 타버린 연료처럼 무기력해지는 일이라니!

연이 의원이 적성에 맞았을까? 그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맡은 일이면 그 일과 삶에 보람을 느끼고 충실감에 젖어 있는 편이었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그리도 그 보람을 잃고 돌연히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인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가 극도로 쌓였겠다. 국회 안에서 밖의 그를 기다리는 일이라니.

 

2012년이 되었다. 연의원은 의원실을 비울 준비를 했다. 지역구 경쟁은 처음부터 관심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사람의’ 지역구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예 당을 선택해보려던 그가 고등학교 한참 후배에게 밀렸을 때의 심정을 나도 알 것 같았다. 연은 입을 다물었다.

대학으로 돌아가려고?

강사 자리는 여전히 밀려들어오는 박사들로 넘치고 있죠.

그럼 무슨 연구소 내고?

아니에요. 우선 쉬고요. 참, 우리나라에도 녹색당이 태동이 될 것 같아요.

무슨 소리, 소속 당을 대표하던 의원님이 엉뚱한 이야기를.

교수님이 거기 동참하시는 건 어때요?

내가 무슨. 무슨 정치를.

페트라 켈리를 제 머리 속에 심으신 게 누군데요. 독일을, 독일의 녹색당을, 녹색의 가치를 심으신 게.

 

연은 녹색당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녹색당은 당명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뭘 하고 지낼까. 잠시 소통에서 잠적했지만, 어쩜 환영할 일인 것도 같았다. 그 나름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시점이니 분주할 터였다.

 

해가 바뀌더니 한 두 마디 코멘트를 해왔다.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방글라데시가 그 정도일까요? 건물이 무너져 3,000명이 죽어요?

어머, 싱가포르에도 폭동이라는 단어가 있나 보네요. 44년 만이라네요! 하긴 외국인 노동자들의 분노이니까, 내국인은 여전히 얌전한 나라. 얌전한 게 뭐죠?

 

해가 또 바뀌었다.

쾌거예요. 드디어 녹색당이 이름을 찾았어요, 녹색당. 아직도 망설이세요?

이 시대에도 합병이 이루어지다니요,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 말이어요.

새정치민주연합 탄생이라, 민주당은 역사 속으로 묻히는가요?

군부대 내 구타 사망사건이 터졌네요. 곪은 게 터진 거죠!

그것이 2014년 4월 초였다. 곧 이어 더 끔찍한 비극이 우리를 통째로 잠식해버린 이래…… 돌이켜 보니 우린 거의 소통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소속을 고집하는 묘한 그 사람을, 선거마다 낙선하는 그 사람을 외부에서 해바라기하는 일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또 한 번의 낙선을 더는 지켜볼 수 없는 심장은 미리 저절로 터져버리는 것일까. 내가 아는 한 연의 ‘그 누군가’는 이번에도 고전을 했다. 현역의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끝내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연은 떠났다. 아이패드에는 남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보낸 어느 것도 열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다. 가장 큰 배신은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연은 누구였을까.

 

 

기록 거기에서 돌연 멎어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머지 하나, 미지의 아이패드를 열어야 할지 그저 멍한 심정이 된다. 나는 아이패드의 주인 너머로 뜬금없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있다. 주검이 아니라 죽음이다.

일흔 살 남자와 마흔 다섯 살의 여자가 몇 분 간격으로 죽는다. 사는 집에서. 조그만 테라스가 있는 막다른 골목집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여자는 타살된다. 남자는……

 

아니, 다시.

그들은 베를린에서 본으로, 본 시내에서 북서쪽 타넨부쉬의 후미진 골목집으로 돌아온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도착하여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아침 남자가 일찍 일어난다. 나이든 사람 특히 장군의 이력으로 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은 상례다. 타이프라이터에 앉은 그는 뮌헨의 아내에게 일상적인 편지를 쓴다. 두 번째 편지지를 타이프라이터에 끼운다. 주어 다음 동사 ‘해야한다’의 철자 중간에 일어선다. 타자기 전원은 켜져 있다. 침실에서 잠들어 있는 젊은 연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동반자, 녹색의 아이돌. 장군 출신답지 않게 퍼싱II 서독 배치 정책에 반대하며 돌아선 그의 이력은 녹색당에서 이 아이돌과 함께 빛났다, 빛났었다. 선제공격을 염두에 둔 미사일 배치는 유럽 내 군사 균형을 깨뜨린다. - 라고 사직서를 썼던 그 손으로, 조금 전에 편지를 쓰던 그 손으로 피스톨을 든다. 자신을 쏘기 전에, 잠들어 있는 연인을 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우리가 행하지 않고 놔두면, 우리는 생각도 못했던 일을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 라고 말했던 연인의 입은 영원히 닫힌다. 희망을 위해 투쟁 - 이라고도 썼던 그녀의 손은 썩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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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들, 47호 (2017년 봄호)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6. 12. 18. 23:22

산의 소리

 

봄날이었다. 온도 차가 요동을 부리는 사이, 따뜻한, 봄날 같은 봄날에 대한 기대가 일렁였다. 대학의 봄은 구성원들 따라 다르게 온다. 새내기의 봄과 고학년의 봄이 다르듯이, 정규와 비정규는 칼로 에듯 다른 모양으로 봄을 맞는다. 학기가 모양새를 잡아가기도 전에 뒤숭숭한 소식들이 쏟아졌다. 주로 이메일을 통해서 밀려오는 걱정들이다. 그것들은 문자로 왔지만,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그것들을 재연하느라 귀가 아렸다.

전국강사투본 입장으론 연구강의교수 제도가 오히려 비정규트랙 강화라고 단언하네요.

그도 재계약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김OO 남OO 선생이 우리의 내일이지 뭐.

15년 강의 잘 하다가 대우교수인데도 잘리고는 15년 투쟁 중이고, 10년 넘게 강의 하면서 우수강의에 몇 차례씩 뽑혀도 어느 날 순간에 해고되고, 것도 이메일로요.

이메일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남OO 선생 이야기가 나오면 난 더욱 기가 죽었다. 같은 프랑스어과에, 또 비슷하게도 여자대학교다. 프랑스에서 13년이나 공부를 했다는 학구파로, 나보다 훨씬 선배이지만 같은 시기에 대학 강단에 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난 상황에 밀려서 스스로 자리를 뺀 경우였고, 그 선배는 우수강의 상을 받으면서 여전히 희망을 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해고당했단다. 나도 계속 모교에 얼쩡거리고 있었더라면 게서도 잘렸을까. 온 몸의 피부가 얼음인지 마그마인지 모를 강렬한 자극으로 움츠러들곤 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실은 겨울로 들어 뭔가 더 심한 내리막 곡선을 느꼈었다. 설 며칠을 맘 편하게 지내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을지. 보퉁이보퉁이 먹을 것을 챙겨 싸주신 어머니, 3월 살 일 걱정하시며 미리 가만히 용돈을 넣어주신 아버지 생각을 떨칠 수 없어 무거운 나날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모처럼 집에 와서 일 없이 쌍용차 굴뚝농성을 걱정하는 딸이 더 걱정되었을 것이지만, 딸은 어머니 아버지의 딸 걱정을 모르지 않으니 누구의 가슴이 더 무거울까.

연인들이 사랑보다 사탕을 나누는 화이트데이가 찾아 왔지만 모두에게는 아니었다. 그날 평택공장 정문에 몇 백 명 사람들이 모여들어 철조망에 자물쇠를 거는 행사를 가졌다는 보도가 쪼그맣게 실렸다. 사탕 같은 빨강 하트 파란 하트, 각양각색의 자물쇠는 더 이상 상징적일 수 없었다. ‘힘내세요’, ‘이긴다’, ‘전원 복직’ 글귀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써서 연대의 의미를 새기는 사람들, ㅎ중공업 사람들, ㅁ송전탑 반대 할매들도 모였다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70미터 높이의 굴뚝에서 외로운 농성을 택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땅을 밟았지만,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는 때였다.

그러다가 ‘말이 씨가 된다고’, 오히려 굴뚝농성 관련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아버지가 꺼내셨던 70년대 ‘똥물 사건’의 먼 후유증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이야. 어떤 도록에 서사와 편집 일감을 소개받아 찾아간 시골 마을에서였다. 마을 가운데 정자에 덩그러니 혼자 앉은 앙상한 몰골의 노인네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외약손 이리 내놔 봐. 시상에, 얼매나 아펐을겨. 나를 어느 순간 ‘사건’의 후유증을 앓다가 죽은 여동생으로 알았는지, 재봉틀 속에 딸려가서 병신 된 손을 내놓으라고 달래던 할머니. 나는 이 순간에도 왼손이 저려오는 것은 느낀다. 졸음 사이로 엄지와 검지 사이로 재봉틀의 바늘이 달려와 꽂힌다. 타이밍, 아아, 약 먹는 것을 잊었구나. 으아악!

지난해, 그렇게 봄이 왔다가 갔다. 여름가을겨울도 왔다가 갔다. 여름방학엔 메르스로 놀란 평택 집에서 아예 귀향을 금하셨다. 이곳은 청정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대회도 치르고 아시아 단위 문화전당도 개점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는 이 도시의 생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원룸에 박힌 날들이 더 늘었다. 강의 없는 겨울에도 세배만 겨우 하고 내려왔다. 서로 대화를 피했다는 것이 맞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날이 다시 왔다. 이번엔 쌍용 굴뚝이 조용했다. 마지막 굴뚝새마저 굴뚝을 내려와서 투항한 지 오래고, 변화는 사전 속에 죽어 널브러진 단어에 불과했다. 총선이라는 칼바람마저 불어댔으니, 봄날 같은 따뜻한 봄날에 대한 기대는 사치였다. 학기가 시작되어 모여든 이들은 뒤숭숭하다 못해 외계어같은 소리들을 쏟아냈다. 뭐가 뭔지 모를 ‘정견’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이메일을 통해서는 언제나처럼 우리 비정규의 단결을 촉구하는 소식들이 밀려왔다. 그것들은 늘 문자로 왔지만,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그 소식들을 곱씹느라 입과 귀가 아팠다.

대학교육협의회 농간 좀 봐요, 오히려 강사법을 폐기해서 교원신분 회복을 없던 일로…….

어떻게 임상강사만 인정하고 일반 강사는 교원지위 건에서 제외시키려 하니.

1년계약과 4대보험 덧붙여 퇴직금까지만 보증해줘도 언감생심…….

평생을 강사로 늙어가기도 어렵게 된…….

그러게, 부산OOO대 대선배님 말이요, 그 정도로 인정받는 학자가 그리 되실 줄이야.

훔볼트 대학 근대서양철학 전공이셨대죠 아마.

나름 유명했지요, ‘성과 사랑’이라거나 ‘차별과 차이’는 학내 최고 인기 과목이었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일반대중 상대로 ‘인간학’, 뭐, ‘행복의 조건’ 그런 강의로 호응 좋았대요.

무슨 소용.

자살이라니, 자살. 아무리 자살률 높은 나라라고 하지만 참.

작년엔가 일 년이면 1만 4천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던 걸. 하루 거의 40명이라고요.

거야, 한국사람들이 유독 우울증 치료를 꺼려서 그렇다고도 하고.

그 말은 안 맞아요. 우울증은 여성이 취약하다는데, 자살은 남자가 여자 두 배 더 넘으니. 사회적 원인이 더 큰 거네 뭐.

인정받는 학자 생활 만년에 빈곤으로 자살이라니.

빈곤, 그래요. 여기 서OO 샘, 그 왜, 논문 54편 대필했다고 유서 남기고 간 사람, 본인이 스트레스성 자살이라고 규정했었다지만, 빈곤 역시…….

그런데도 문제의 지도교수는 잘도 정년퇴임까지 갔다는 걸 보면, 참.

그 교수가 자신이 안 썼다고 실토를 했는데도, 대학조사위에선 그걸 공동연구니 관행이니 그랬다면서요. 그러니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아니, 사회 전체가 그냥 용인하는 겁니다요.

공동연구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것 아닌감? 다분히 창의적인 해석을 전제로 하는 인문학에서는.

아, 우리 이번 주말 무등산에나 가봅시다려!

견디다 못한 누군가가 엉뚱한 소리로 숨통을 텄다.

그랬다. 우리 모두는 살고 죽는 소리 아닌 다른 평이한 소리들을 그리워했다.

 

털고 싶다. 다 털고 싶다. 사람의 소리들을 털고 싶다. 그래, 무등산 팀에 슬쩍 끼어보자. 몸도 맘도 가볍게 원룸의 계단을 내려간다.

1187번 버스를 타면 되거든! 신안사거리에서 광주역 방향으로, 방향 틀리면 안 되고!

나를 인도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소리다. 나를 외지인 취급하는 신 선생의 말투를 떠올리며, 내가 광주사람은 아님을 실감한다. 이 시대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의 방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생각으로는 번지수가 사뭇 틀린 분개한 목소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도 그렇다. 민주의 성지에서 제 당을 버린 인사들을 옹호하다니! 난 물론 정치적 감각은 꽝이니까.

어디서 돌아오는지 모르겠지만, 신안사거리에서 탈 때도 버스엔 거의 빈 좌석이 없었다.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창밖으로 나는 벌써 보이지 않는 산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자연이라고 하면 대지를 흙을 말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산이 자연이다. 높은 산은 그대로 거대한 자연의 품일 것 같은 상상으로 자랐다. 고향 팽성에는 산이라고야 백 미터 남짓 되는 것들뿐, 동네에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리는 부용산은 정말 나지막한 언덕에 불과하다. 평택 이름이 그렇지, 조선 초기 어느 문신이 지은 시에 ‘물은 천천히 흐르고 산은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골골마다 밭갈이를 일삼노라.’ 했다는 곳 아닌가. 그래서인지 산은 내게 늘 꿈의 장소였다.

파리 생활 첫해에 여행이랍시고 국경을 넘은 곳이 다보스였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으면서 동경하던 산, 마의 산이 그곳이었으니까. 베르니나 특급 등 접근성도 좋지만, 누가 스위스에 갈 기회에 다보스를 놓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천 년 묵은 전나무들…… 오래 묵는 사람들은 스키를 즐기기도 하겠지만, 잠시 방문한 여행자들에겐 산 자체가 온 정신을 빼앗아버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게 하는 그곳. 그저 산만을 바라보고 산을 숨 쉬라고 말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폐결핵요양소, 병약한 유럽 시민계층의 집합소인 그곳으로 사촌을 방문한 주인공 또한 병이 들어서…… 병과 죽음이 여전히 정신적일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었다, 그때는. 정신이 육신의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으니까.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다르다. 몸과 맘의 길항작용은 효력을 잃었다. 미국에서는 휘트먼쯤부터는 알았다. ‘영혼은 몸보다 더한 것이 아니고, 몸은 영혼보다 더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신도 그 어떤 것도 누군가의 영혼 보다 더한 것은 아니다.’라고. 몸과 맘은 하나다. 그만큼 확실한 사실이 산은 인간보다 거대하다는 것이다. 오늘 산에 이르면 잠시라도 산의 소리에 취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인간의 소리를 잊으며.

버스는 시내 길을 한 삼십 분 가더니 산길을 한참 돌아 종점 원효사에 도착한다. 버스 실황정보를 볼 생각도 않고 집을 나선 탓에 정류장에서 기다린 시간까지 하면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기분은 시쳇말로 째지게 좋았다. 얼마 만인가. 산의 정상은 아니라 해도 정상 같은 느낌을 받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높은 곳에도 절이 있고, 또 이 엄청난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이라니. 버스도 둘이나 정류소에 쉬고 있었다. 아래 너른 주차장도 차들로 거의 빈 데가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이 산 속으로 흡입되었을지, 새삼 놀랍기도 하고, 그 중의 일원이 되었다는 뿌듯함도 든다.

여기야, 한샘, 빨리 오네! 벤치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드는 쪽에서 나는 소리다.

산에서 나를 반기는 것도 우선 사람의 소리다.

아, 신샘, 더 빨리 왔네! 난 잘 모르니까 미리 온다고 온 건데.

누가 늦었대나!

우리는 저절로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자연에서 만나면야 어중간한 상표 떼고 친구다 싶다. 중요한 건 3월이 가기 전에, 그러니까 더운 기운 나기 전에 무등산을 만나는 일이다. 아니 이미 만났다. 첫 모습은 버스정류장의 형태로서. 벤치 주변에는 깡통이나 휴지들이 뒹굴고 있어 조금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절이 참 높은 곳에 있네.

그래, 원효사, 엄청 유서 깊은 절이야. 6세기엔가 지었대. 지증왕인가 법흥왕 때라고 하니까.

우와, 그런데 웬 지증 법흥이야? 그때 설마 여기가 신라의 땅이었나?

절의 역사란 것이, 아니 역사란 것이 원래 우물쭈물 아닌가.

뭐야, 큰일 날 소리. 역사를 우물쭈물 써도 된다는 말로 들리네. 암튼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절이라면 역사 속의 전화들은 피했겠네.

웬걸. 임진왜란 땐가 정유재란 땐가 다 탔고, 동란 때도 또 탔다던데. 그 후 제대로 지은 것이 지금 모습이래.

이 높은 산 위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전쟁인가. 그래도 짓고 또 짓고…….

어, 유민샘이네.

어, 박샘이랑 같이 오네.

어, 두 사람 썸타?

글쎄, 두고 볼 일. 후훗.

 

절로 가는 길 - 재미있는 이름의 찻집인지 밥집인지가 웅장한 일주문 옆에 있었고, 우리는 절로 가는 길을 따라 절로 갔다. 곧 나타나는 건 작은 성벽처럼 늘어선 축대 위에 한 칸짜리 사모지붕의 범종각이다. 내가 정말 오랜 만에 이런 풍경들을 보는지, 이어지는 한 줄 6개 기둥의 회암루 대청마루에서만 한나절 쉬어가도 좋겠다 싶어졌다. 그래도 숙제처럼 절 마당에서 서있는 보살상과 금강역사상을 돌아, 너무 인공적이다 싶은 감로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샘,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약수 한 쪽박 마시고……. 원효대사의 진영을 모신 개산조당, 말끔한 느낌의 굽은 담장 너머에는 무등선원이라는 수행의 집도 얼핏 건너다보고서야 절을 나왔다. 절의 소리, 불경소리는 내가 고대하는 산의 소리는 아닐 터.

곧 등산객 수를 수집하는 계산기 앞을 통과하고 나니 비로소 산길이 나온다. 나는 공식적인 숫자가 되어 산에 발을 들여놓았고, 산은 나를 하나의 숫자로 기억할 모양이었다. 어딜 가나 겨우 숫자로서 존재한다는 공포심이 잠시 되살아났다. 세계인구, 한국인, 여자, 미혼, 비정규…….

산행이 시작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아스팔트길이다. 하지만 좌우가 숲이니까, 숲의 나무들이 엄청 높아서 산길이 맞나 보다. 산길은 놀랍게도 나뭇가지 끝에 어른거리는 연보랏빛으로 사람을 맞는다. 상식적으로 연둣빛을 기대하던 내 눈에 불그스레한 보랏빛은 의아했다.

어, 웬 보랏빛이네. 분홍빛. 이게 무슨 나무들이야, 꽃부터 피는 나문가?

에이, 한샘 꽝이네. 이파리들이 움트는 자리지. 이파리를 틔워내는 껍질들, 그게 나중에 갈색으로 붙어있을 받침들이지.

난 또.

유민샘의 직답에 시원하면서도 머쓱해졌다.

보랏빛이든 연둣빛이든 빛의 변화, 그게 봄 색깔 아냐? 그리 생각하려다가 문득, 봄빛은 나뭇가지의 목을 분지른다, 라던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들이었다, 그 시인의 시는. 시란 본디 어려운 글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까. 나뭇가지들이 봄빛에 닿아서 분질러지는가, 정말로. 버거운 양의 눈도 버텨내고 있다가 하필이면 봄빛에 닿아서 분질러질까. 툭 끊어져 죽어버리지 않고 되살아나려는 이 늙은 가지들에 피어나는 여린 숨이 추악하다고? 가지들을 올려다보는 내 목이 먼저 분질러질 참이다.

뭐해, 한샘, 벌써 지치는 거야?

저만치 앞서던 신 선생이 뒤를 돌아 소리친다.

으응.

으응, 뭐?

간다고!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린가. 아주머니 둘을 앞질렀더니 계속 소리가 따라온다.

딸년이 아니라 빨대지, 완전 빨대.

빨대라니. 댑다 뭔 말이래?

정금이 말이여, 딸년이 아조 대놓고 지가 엄마 빨대라 그란다네. 젙에서 봐도 그래. 즈그 엄마한테 빨대질 맞더라고. 직장조까 댕긴다고 저 치장허고 나갈라, 꼬맹이덜 학교다 어린이집이다 보낼라, 신랑 밥도 못해준다고 아예 꼭두새벽부터 엄말 불러댄다더라고.

요새 아덜이 죄 그라제 뭐. 그라도 시집이라도 갔응게 낫제. 다 큰 아덜 틀어 안고 사는 집 어디 한 둘이당가.

맞어, 아예 처녀총각 귀신나게 생겨서는, 돈 벌로 안 나가는 아덜도 쌔았다고 하데 뭐. 참, 명숙이 아들은 미국서 졸업장 땄어도 도로 왔다잖은가. 거그도 취직이 안 된갑제.

미국이라고 대졸이라고 다 취업이 되겄어. 세상이 취업 전쟁턴가 벼. 인구가 많어 그러겄제. 묵을 입은 많고 일자린 없고. 자동환가 뭔가 기계가 사람보다 낫으니까 사람 들어갈 자리가 줄제. 알파곤가 멋인가 좀 보소. 한판은 어쩌고 이겼다 해도……

사람 암 것도 아녀 참. 기계가 사람 일 다 해중께 편한 세상 왔다고 했는디, 그럼 인자 더 좋은 세상은 없겄네. 참, 세탁기 첨 나왔을 때 얼마나 좋았는가잉. 나넌 유난시레 손등이 까지고 그랬는디…….

좋은 일도 다 도가 있는 거여. 달도 차면 기웅께.

두 사람의 끈질긴 넋두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하필 보속이 비슷한지 소리는 계속 뒤를 따라온다.

그란디 희자 있잖여, 에지간히 희희낙락거리더만은.

먼 말?

아들 고시 합격했을 때도 그랬제만 연수원 졸업허기도 전에 재벌 집 사우 돼 갔잖어. 금방 또 판사로 발령 났고. 그땐 쪼까 뻐겼제. 근디 당아도 즈그 사는 집에 어메아밸 오락허덜 않은다잖어. 잘나도 병 아녀.

잘나믄 내 아덜 아녀, 나라 것이고 장모 것이제.

그나 무장 부모자석 간에도 잇속인지, 멋이나 써먹해지니께…….

못 살겠다. 일정하게 뒤따라오는 푸념들은 머리를 돌게 했다. 더러 옳은 소리도, 그 나름대로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 귀에는 다만 소음이었다. 목청들은 또 왜 그리 큰지. 툭 터진 공간에 나오니까 소리가 흩어지리라는 본능이 소리를 더 크게 내지르게 하는지도 몰랐다.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예사롭지 않게 주시했지만 소용없었다. 좀 시끄럽소, 라는 내 눈짓에 영향 받을 사람들도 정황도 아니었다. 순간 그들에게는 세상에 친한 둘만 있었다. 아무래도 미리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아서 벤치로 피했다. 이만 허면, 머시 어짜고…… 다행히 그런대로 소리가 앞서며 먼저 길을 오른다.

저들은 얼핏 보아도 울 어머니 또래다. 어머니도 친구랑 산 나들이라도 하실까. 가만, 팽성엔 산다운 산이 없지. 안성의 고성산도 300미터도 안 된다. 산책이라도 가실까. 어디로 가실까. 평택대학교 캠퍼스로 벚꽃 구경이라도 가실까. 나들이 길에 친구하고 우리들 이야기를 하실까. 큰애는 프랑스서 박사 해 와서도 교수되긴 어렵나 봐, 시집도 안가고 큰일이다. 막내는 미국 보냈더니 - 옥실은 일찍 미국에 정착한 큰아버지의 양녀가 되었다 - 미국 사람하고 결혼해서 미국서 살아버리네. 조금 덜 쌩쌩한 둘째 하나가 결혼해 애들 낳고 가까이 살 뿐인데……. 아들이 없어 한탄이라도 하실까.

 

아서라, 일 떠나 집 떠나 산에 왔으니 집 생각일랑 집에 두자. 정말 산의 소리가 그리워 숲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새소리 벌레소리 하나 없다. 당연히 바람소리도 없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발성난청으로 고생하셨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는 오히려 파도소리 비슷한 소리들이 들리셨다지. 그러니 이런 무음은 난청은 아냐. 이 조용함은…….

눈을 슬며시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산의 공기라도 느끼고자 했다. 공기 속에 황사 섞이듯 소리 가루 같은 것이 섞이지 않을까? 순간 엄청난 노래방이 통째로 다가오는 착각에 빠졌다. 쿵짝쿵짝 반주에 맞춰 대형 마이크를 통해 울려나오는 소음이었다. 그것이 하필 바로 코앞에서 울려댄다. 아뿔싸.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일어서니, 노란 통실한 배낭과 노란 통실한 사람이 옆 벤치에 한데 멎어있고, 소음은 거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친 놈.

깜짝 놀랐다. 내 입술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와 버렸다. 소리가 작았는지, 상대가 천둥 같은 기계음 소리에 휩싸여 못 들었는지, 칼부림은 나지 않았다.

못 말리는 인간이네.

내가 어처구니없어서 벤치에서 물러서려는 사이에 신 선생이 다가와 속삭인다.

그러게, 앞뒤가 안 맞는 인간이야. 자연사랑 산악회 노란 리본을 펄럭이지 말든지 공해물질을 유발하지 말든지.

저렇게 노래 크게 들으려면 산엘 왜 와.

우리가 된통 큰소리로 두런거려도 노래방 인간은 못 듣는 모양새였다.

와 여 섰노. 퍼뜩 가자.

다른 노란 리본이 노란 노래방을 채근하며 지나간다.

가만있어 보래이.

신 선생이 거기다 비꼬아 뭐라 큰 소리를 내질러보아야 어림없다. 그저 서둘러 기계의 소음에서 도망칠밖에. 휴우, 숨을 몰아쉬며 빨리 자리에서 멀어져야 했다. 이럴 땐 다행으로 오르막인데도 경사가 거의 없다. 오른쪽으로 한 번 굽는 삼거리에 쉼터가 나온다. 늦재라더니 만치정이라 쓰여 있다. 원효가 팔경으로 헤아렸다는 이곳 나무 벤치에 앉아 만치초적을 상상해본다. 해질 무렵 나무꾼들이 부는 풀피리 소리, 문득 그 소리가 그리워진다. 무엇이든 발전하는데, 있었던 것은 왜 사라지나. 발전이란 확장이 아니고 대체련가. 풀피리 소리는커녕 무리지어 떠들어대는 사람들 소리에 떠밀려 일어선다.

가자고, 더 쉴 것 없어. 계속 이 높이야.

산길이 아니네, 정말, 여기 무등산 이름은 이렇게 평평하고 가파르지 않는 산이란 뜻이라지?

아, 그건 아니고. 광주의 원래의 이름 무진과 무등이 같은 어원이라는 설.

어떻게?

‘무진(武珍)’이 원래 한자어가 아니라 차자표기니까. 그 ‘진’자의 한자 새김이 ‘들’에 가깝고. 그래, 실은 ‘무들’이나 ‘물들’에 가까운 소리라고. 물이 많은 들판. 무등도 무들에 가깝잖아, 그래 물이 많은 들판에 있는 산, 뭐 그런 것.

물이 많은 들판이면, 예부터 농사는 잘 되었겠네.

그렇지. 마한고분군이 나주에서 발견된 걸로 보아서는 저 아래 나주평야만은 못했겠지만. 하긴 그보다는 무등산 이름이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걸랑.

놀리지 마. 무등산은 이름 그대로 계급이 없음을 상징한다고, 광주사람 아닌 나도 아는데. 광주 오기 전부터도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그런 시 정도는 아는데 왜.

맞아, 슬픈 현대사와 맞물려 보통은 계급이 없다는 식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정치구호쯤으로 알려져 있지. 헌데 원래는, 그니까 예전에는 오히려 등급이 없는 최선, 절대 선의 의미였다고 하거든. 불교가 전래된 담에, 부처란 세상 모든 중생과 견줄 수 없이 우뚝하다는 존칭으로 무등산이라 불렀다는 이론이야. 고려 때는 여기 300개가 넘는 암자가 있었을 만큼 속세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고 하거든.

어, 그런가.

가자고.

거기서 바람재까지는 완전한 평지였다. 제대로 갖춰 입은 등산복이며 장비들이 무안하리만치 그냥 평범한 길이다. 왼쪽 언덕으로 건물들 대신 산철쭉이 다를 뿐.

갑자기 새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산의 소리다. 참새보다는 꼬리도 길고 큰 새, 설마 날씨로 보아 굴뚝새는 아닌, 별로 예쁘지는 않은 새 한 마리가 앞장서듯 날아간다. 어디선가 보았던 새였나? 바람재 470미터라 쓰인 표석을 안고 인증사진 한 장. 원효사가 해발 450미터였으니까 높이로는 겨우 20미터를 오른 것이다. 새는 건너편 가지에 앉아 있다. 더는 울지 않는다.

새 소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재생이 안 된다. 기호화되지 않아서 기억도 재생도 안 되는가? 뭐야, 그럼 그리운 산의 소리라는 것을 결국은 담아가지 못하는가? 기호를 모르니 표기할 수 없고, 표기할 수 없으니 저장이 될 리 없다. 언어라는 것, 인간의 언어로 표기하지 못하는 것들은 저장되지 않는다니. 기호화 되지 않은 소리는 소리에 불과하다. 아름답게 느꼈더라도 그저 아름다운 소리에 불과하다. 정체를 기록할 수 없다. 정체를 모른다. 정체가 없다.

 

여기선 밥을 못 먹어.

밥 소리가 유의미하게 들린다. 밥이라는 소리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워낙 드나들어.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한적한 곳이 있는데. 저쪽 중머리재 쪽으로.

너무 멀지!

아니 게까진 아니고, 조금 가면 토끼등, 게서 조금만 가면. 살짝 가파르긴 해도 조금만 가면 된다고.

아까 철쭉쉼터 덕산정으로 돌아가지.

인생에 되돌이는 없어. 험지라도 그냥 앞으로 내닫는 거지.

산에 올라서도 철학하시네, 휴우.

설왕설래 중에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나는 큰 숨만 내쉴밖에. 결국 여전히 평평한 길을 따라 소리정에 이른다. 정자마다 이름이 있지만 소리정이라니. 흩어지는 일행을 불러 모으기엔 참 좋겠다 싶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고 있어서 나쁠 것도 없고. 그런데 웬 소릴까. 여기에선 정말 산의 소리를 들을까. 그건 아니었다. 저 아래 쪽에서 뭉클뭉클 사람들이 쑥쑥 올라왔다.

아, 그쪽이 증심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라서 그래. 그냥 이리로 와!

갑자기 가파른 울퉁불퉁 길이 나타난다. 잠시 헉헉대는데 백운암처라는 작은 정자가 나온다. 크기는 작아도 이곳 오기가 힘들어서인지 빈 나무 탁자들이 남아있다. 시간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편이다.

그런데 아까 저 아래는 왜 소리정? 거기만 소리가 특별할까? 다를까?

거참, 우선 밥 먹읍시다요. 어, 배고파.

이것저것 어울릴 리 없이 아무렇게나 꺼내 놓은 밥들은 보기보다 훨씬 꿀맛이었다. 그러다가…….

밥맛 좋으요. 다 이리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트레스성 자살이란 유언을 남긴다냐.

그러게. 고등교육법에서는 교원이 아니고, 근로기준법에도 지위가 없으니, 우리는 유령이란 말이지.

일용직 노동자지 뭐.

일용직도 사람이다 그 말요.

우리는 밥만 먹으면 그 문자들 그 소리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재삼 확인해야 했다. 물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외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냉철히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 뭔가 유의미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 아님 누구라도 먼저 힘이 약해지면 그만 움켜쥔 손을 스르르 놓고 말 것이다. 54편의 논문을 쓸 수 있기도 전에 손을 놓아버릴 것이다. 책상에 쌓아놓고 온 벙어리 문자들이 천 톤의 무게로 짓눌러왔다. 산 위의 나를 아래로아래로 끌어당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내려오는 길로 접어들었다. 해발 500미터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반도 못 올라왔지만, 오르는 일에 매력이 있을 리 없다. 생이 내리막인데. 이리 젊어서 벌써 내리막인데.

모든 내리막처럼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박 선생은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더니 언제부터 흔적도 없다. 일행을 따르자니 나무를 올려볼 틈이 없다. 상수리나무들은 겨울이 되어도 바싹 마른 잎들이 더러 매달려 있다더라, 봄엔 어떨까. 눈에 보이는 건 땅에 떨어져 깔려있는 침엽수들이다. 앞서 내려가던 사람들이 낮은 바위 아무 데나 앉아 기다리고 있다. 할 말들이 없어져서 입을 꽉 다물고들 앉아있다. 곁에 주저앉으면서야 침엽수들이 떨어져온 가지들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죽은 가지들은 부러져 떨어져버려야 추악하지 않다니. 낙오자가 되었으니 툭 부러져 떨어져버려라? 추하게 생에 매달리지 말고? 모르겠다. 식물학적으로는 그 시인의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식물학적으로 ‘죽어 있는 가지들은’ 새순을 내지 못하겠지.

서른도 안 되어 죽어버릴 거면서 하필 「노인들」을 읊은 그 젊은 시인은 죽은 가지 툭툭 부러지지는 봄 소리를 들었구나. 그래도 죽어 보이는 그런 앙상한 가지에서 연초록 새순들이 나오지 않은가. 나무들의 생존 전략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말라 비틀어져도, 더 말라 거의 죽어 있어 보여도, 마지막 숨을 놓지 않았다가 새 순을 내는 너희들. 한껏 소리를 질렀더냐?

그래, 나무의 생존전략은 그런 것이다. 어떤 동물들 보다 오랜 억겁의 진화를 거치는 동안 생성된 식물의 생존 방식이다. 생존 방식이란 그것이 어떻다 해도 추악할 리 없다. 생명은 생명으로 아름다울 권리를 가져 마땅하다.

문제는 이 우월한 지구상에서 살 수 없음을 절감하는 저열한 사람들이다. 우리들 또한 벌써 아름다움을 잃었다. 다른 사람의 넋두리는커녕 시마저 못 읽어낸다. 코앞의 생존에 매달려 다른 사람에 귀 기울일 틈이 없다. 겨우 끼리끼리 말한다, 우리들끼리, 비정규끼리. 급하면 서로도 외면한다. 모교에서의 뼈아픈 기억을 되새긴다. 은사님이 정년 하시면 당연히 내 차례려니 믿어왔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된 건 순간이었다. 추월에는 예고가 없었다. 결과는 지방시 신세다, 지방대학시간강사.

그래, 출세가 대수냐. 내가 공부한 대로라면 루소는 그렇게 말했었다. 작가란 출세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생계를 위해 사고하는 사람이 고상한 생각을 하기는 힘든 법이라고. 나는 그런 위대한 작가와는 다른 차원을 살고 있다. 그저 공부를 더 하면서 작은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생필품이 필요한 왜소한 존재일 뿐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잊었나 싶으면 떠오르는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사르트르 계열, 전후독일의 하인리히 뵐이었다. ‘어릿광대’ 비슷한 제목의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밖’은 실존철학적 의미로, 지금처럼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전쟁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잠깐, 웬 거장들 타령이냐. 전설이 된 그들은 이곳 산이 아니라 책상에 붙어서 날 노려보고 있음만으로 족하다. 그들은 나의, 내 생활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혼자임을 애석해하지 않으니 그들의 조언이 불필요하다. 혼자임은 생물체의 근본 속성이다. 타인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다. 나의 정서를 위해서, 오늘은 오직 산의 소리가 간절히 필요했을 뿐이다. 여기 어딘가에 분명 산의 소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표기할 수 있건 말건 소리는 있어야 한다. 있어 마땅하다. 생각을 접고 감각을 집중해서, 산 냄새를 느끼고 산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산에 침입한 인간들 아닌, 어떤 본래적 산의 존재가 토로해내는 소리를. 하지만 걱정의 소리들을 가득 품고 산에 들면서 산에서 온전히 산의 소리만을 탐한다면 그것은 욕심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들어섬으로 인해 이미 손상된 산은 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니, 산은 소리를 내고 있지만, 소리를 기호화해서 듣고 기억하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죽은 나뭇가지 분질러지는 소리, 마른 가지 껍질을 뚫고 움을 트는 소리를……. 아니, 나는 다만 내 울음소리만을 듣느라, 산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산은 산 높이가 아니라 별자리까지 가 닿을 머나먼 거리로 내게서 떨어져 있다.

밥 먹다 말고 집단 우울증에 빠져서 서둘러 내려가는 이 길에서 싱겁게 산 나들이가 저무는 모양이다. 그저 고통스러운 문자들의 아우성을 잠시 피했다는 안도감은 원룸의 방문을 여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농아들의 전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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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단편 「산의 소리」, 『햇빛에 취하다』, 시누대, 예원, 20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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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