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4. 6. 9. 23:52

장편소설 『표현형』 

 

푸른사상사, 2014. 5. 31. 발행

변형국판 352쪽, 값 15,000원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 등장인물이면서 써나가는  느슨한 연결의 장편.

    한 꼭지 씩 따로 읽어도 되는......

   

- 차례 -

배달민족

한국어

일기

은실

파도소리

초혼장

포이동 266번지

쥐도 인간이다

삼포세대

표현형

 

 

  추신: 내용보다 멋진, 표지 전체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넘쳐나는 표지는

          아들 조윤기의 작품. 매달린 박쥐가 일품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51

「청출어람」

배우는 것은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 순자 『권학』에서

 

 

강의가 달랑 하나로 줄어든 지난 해 봄이었다.

3월 한 달을 애매한 마음으로 보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에 대한 구상이 일렁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순간. 그냥 집으로 기어들었다. 마침 시향제를 앞두고 부산하여 아버지랑은 정색으로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내가 풀이 죽어 온 것을 알아차리신 눈치였다. 이런 저런 준비로 대청소에 음식 장만에 신경을 쏟는 중에도 곁을 살피셨다.

그렇게 일요일 늦은 오후가 되었다. 산에서 함께 왔던 친척들도 다들 떠나고, 집엔 산에서 묻혀 나른 마른 잔디 부스러기들이 뒹군다. 보이지 않게는 얼마나 먼지들이 일고 있을지. 크지도 않은 대청마루와 부엌 바닥을 훔치는데도 숨이 찬다. 시계를 또 쳐다본다. 그날 저녁 꼭 보고 싶은 8시 다큐프로그램 생각을 한다.

금실이 피곤하지. 네가 와서 난 좋았다만. 우리 찜질방 다녀와서 저녁 먹자. 아버지 시장타 안 하실 거다. 은실이랑 애들이랑 다 함께 가자.

어머니가 평소에 안 하시던 말씀을 하신다. 모처럼의 말씀이라 아니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애들은 말고요……, 하려다가 그것도 만다. 조카들까지 함께 갈 생각은 없지만, 속 좁은 노처녀 이모 소리 들을 건 없다 싶어 삼킨다.

그렇게 저녁이 늦어지고, 아무래도 부엌 정리도 평소와 같지 않고 늘어지기만 한다. 아버지는 벌써 9시뉴스를 보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9시뉴스를 본다. 한국인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약 3시간이란 통계를 본 적이 있었다. 일 년이면 1,095시간, 그러니까 45일 이상을 텔레비전 앞에서 산다. 평균수명 80세를 생각하면 10년을 그렇게 산다. 물론 나도 그렇다. 뉴스 아닌 픽션, 드라마를 본다. 중간부터 봐도 괜찮고, 중간만 봐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은 단편이다. 어제는 지나가버렸고 내일은 미지수다. 요즘엔 머리가 멍할 때면 아무거나 어수선한 드라마 조각들을 보며 앉아 있곤 한다.

그래도 그날은 머리를 깨우는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었다. <KBS 스페셜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 카프카의 말로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들’ 비슷한 것 말이다. 그런데 시간을 놓쳤다. 다시보기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에 ‘의궤’라는 것에 대해 조금 공부해둘 시간을 벌기도 한다.

 

의궤 - 발음도 어려운 ‘의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예전에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왜 학교에서 들어보지 못 했나 의아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내가 다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궤는 조선 건국 당시 태조 때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는데,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 1601년(선조 31년) 의인왕후의 장례 기록인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라고 한다. 보통 필사하여 소량을 제작했고, 특별히 제작된 한 권은 어람용이고 나머지는 관련기관과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고.

이 스페셜 프로그램에서 다룬 의궤는 조선왕실의 귀한 기록문서라는 뜻 그 이상이다. 그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도서 300여 권을 꼬집어서 일컫는다. 사실 프랑스 뿐 아니라 일본 궁내청도 조선왕조 의궤를 81종 167책이나 소장하고 있고, 그밖에 『진봉황귀비의궤』, 『책봉의궤』 2종,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 『화성성역의궤』 등 5종이 새로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만하면 의궤에 관한 기초자료는 공부했다.

프로그램에는 결정적인 인물 박병선이 등장한단다. 박병선 - 인물검색을 한다.

사학자. 1929~2011. 서울대학교 학사, 파리 제7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박사과정 수료. 논문은 「버림받은 공주와 민속 신앙에 대한 고찰」로, ‘트레비엔’ 평점을 받았다.

무엇보다 1955년 스물일곱에 (어딘가 자료에는 서른셋이라고 했지만 그건 계산이 틀리다.) 유학길에 올랐다. 동란 후 아직 어수선한 세상에서 최고의 지성과 자유의 상징인 프랑스로 향했다. 스승 이병도 교수는 게 가거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들이 어딘가에 있을 테니 꼭 찾아 보거라, 라는 당부를 하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합리적이었지만, 어디쯤에 있는지,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오리무중 상태의 도서에 관한 당부를 평생 간직했던 제자가 기특할 따름이다. 그는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있으며, 틈틈이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과 고서점 등을 기웃거렸다. 1890년대에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이 펴낸 『한국서지』 - 고려시대의 『상정고금예문』에서 한말의 『한성순보』까지 3800종 이상의 책을 소개한 목록해설서 - 는 프랑스 내 어딘가에 의궤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에 사실성을 더해주었다.

 

청출어람 - 스승 두계(斗溪) 이병도에게서 ‘더 푸른’ 박병선이 나왔다. 이병도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이건, 식민사관의 대부이건 그게 여기서 중요하진 않다. 진단학회, 분명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지만, 한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한국근대사학 성립에 기여한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것이 친 체제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실제로 같은 강점기에도 신채호와 박은식 등의 민족주의 계열의 사학이나 백남운 등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강한 정치적 의지와 현실 참여를 바탕으로 반식민주의 사학의 성격을 지녔지 않은가. 시대가 학자에게 변명의 빌미가 되어줄 리 없다. 그렇다고 이병도를 예서 평가해서 뭘 하겠나. 나는 사학자도 아니다.

그 이병도 교수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한 제자에게 일렀다. 프랑스인들이 ‘훔쳐간’ 우리 것들을 꼭 찾아보라고. 푸른 대나무 조각을 쪼개어 묶어 역사를 기록한 데에서 온 청사라는 말, ‘푸른 역사’의 스승과 제자다웠다.

나도 모르게 이병도를 변호하는 글들을 찾아 읽어본다. 결정적으로 그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군사적 기구가 아니라, 다만 가야와 왜 간의 무역 담당기구였다고 주장했다. 또 식민사관에서는 고조선의 준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된 위만을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여 위만조선에서 한국사의 단절을 강조했지만, 이병도는 『사서』에 기록된 위만의 상투 튼 머리 모양과 복식으로 보아 그가 원래 고조선 유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순간 이병도는 ‘더 푸른’ 제자 때문에 긍정적 평가 쪽으로 저울이 기운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른들, 쪽이 있어 근원이 되었음 아닌가. 어쨌거나 학불가이이(學不可以已), 학문은 그쳐서는 아니 된다는 순자의 권학 말씀이 옳거니.

 

 

다시보기 - 월요일 아침 일찌감치 컴퓨터를 켰다. KBS를 찾아 아이디를 넣고 비밀번호를 넣는다. 서둘다가 한두 번 틀린다.

부욱 하고 휴대전화가 미끄러진다. 속세를 떠나 절로 들어가련다는 선배의 문자메시지에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그 절 이름은 만우절이라고 할 때서야 쿡쿡 웃었다. 이젠 어제의 프로그램은 다시보기가 안 된다는 메시지가 뜨더라도 만우절이라 놀라지 않으리다. 뜬다. <스페셜 프로그램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광고방송이 가볍게 두 번 지나가고 어스름 화면이 시작된다.

1975년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바깥의 화려한 세상과 대조되는 장면 - 적막한 밤을 밝히는 작은 손전등을 든 손이 먼지가 수북이 쌓여 날리는 책을 쓰다듬는다. 효과도 멋지다. 프랑스국립도서관 베르사유분관의 파손 도서 보관실에서였다.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초월한 듯, 그저 진지한 인간의 얼굴, 그 입에서 유창한 프랑스어가 흘러나온다. 박병선 박사 만년의 모습이다. ‘처음 의궤를 발견했을 때 너무 감동해서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어요.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20년 동안을 한 우물을 파다가 마침내 그 대상을 만났다는 것이 믿어졌겠는가. 중국도서 번호를 지니고 있던 우리 것. 한 사람 사학자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보물을 알아본 것이니.

그러나 그것은 시작의 순간에 불과했다. 1978년 10월에는 한국에서 의궤 발견 기사가 떴다. ‘강화도사고문서 파리서 발견’이라는 제하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약탈해간 필사본 등 130종 345권이 112년 만에 발견되었다는 뉴스였다. 더구나 한국에 없는 책들도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보도되었다. 이런 보도에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은 곤란해 했고, 냉대는 극에 달했다. 그쪽 입장에서야 내부인인 사서가 ‘여기 우리’ 도서관 분관 창고에 약탈된 도서가 있노라고 그 해당국에 알린 정황으로 해석될 밖에. 결국 권고사직의 형식으로 도서관을 그만 두고, 우리 대사관 한 구석에 마련해준 연구실에서 홀로 의궤 연구에 들어갔지만, 정작 도서관에서는 열람자 신분의 출입마저 제한했다고 한다. 굴하지 않고 매일 도서관을 찾은 그에게 계절이 바뀌고서야 출입이 허락되었지만, 하루 단 한 권의 열람이 조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곧 바로 책을 반환하라고 할까봐서 점심 거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고 했다.

날마다 점심을 거르고? 먹으려고 사는 세상에서? 이건 아이러니가 아니라 결과적인 철학이다. 결국 오늘 하루 잘 살아서 무엇을 위함인가, 다시 내일 잘 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게 종일 먹지도 못하고 의궤에 매달리기 10년여 세월이 흘렀다. 『조선조의 의궤 - 파리 소장본과 국내 소장본의 서지학적 비교검토』라는 책을 써냈다. 제목과 주요내용은 말할 것 없고, 제작 년도를 분류하여 정리했고, 특히 외규장각 의궤와 한국에 남아있는 의궤 사이의 특징을 비교 설명해 놓은 역작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동영상의 목소리. 그 세월 동안 그는 한국에 의궤를 알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금실아, 아버지 나가신다.

어머니가 부르시는 소리에 화면정지를 눌러 놓고 내다본다.

아버지, 어디 가셔요?

글쎄다. 그런데 넌 오늘 안 내려 가냐?

가야죠. 이따 오후에. 저 화‧목 수업이에요.

화요일 목요일 이틀만 해?

예.

그럼 나랑 산책할까?

산책을요? 어제 피곤하실 텐데요.

산책이야 늘 다니시지. 언제는 피어선학교, 아니 지금은 평택대학교지, 게까지도 가셨더란다. 이십 리 길이니 가시는 데만 두 시간도 넘는데.

어머니가 거드신다.

거길 왜요?

그냥 걷다 보니 거기까지 갔더라. 올 땐 버스 탔지. 헌데 그 대학이 성경학원 때부터면 백년 넘은 역사니까 대단할까 싶었는데, 왜 거긴 미국, 중국, 일본학과만 있는지 모르겠더라.

…….

거긴 원래 신학대학이잖아요.

내가 암말 않고 있자 또 어머니가 거드신다.

아버진 별 공부도 안한 성 싶은데 교수도 되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실 것이 뻔하다. 아버지 기준으로는 확실한 선진국에 유학해서 박사가 되어온 딸 정도라야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런 딸이 시간도 제대로 못하는 거의 백수 신세니.

아버지, 오늘 좀 추운데 나가시게요?

춥나? 젊은 애가?

하늘이 비도 올 것 같네요.

핑계는. 너랑 코앞의 평택호에 가본지도 오래다. 여기 서해대교에도 안 가보았지?

거긴 개통된 지 얼마 안 되니까요.

얼마 안 된다고? 십년도 넘은 게 얼마 안 된 세월이냐. 7,000미터가 넘으니 장관이지. 나들이 좋아하지 않는 네 어머니도 다녀왔지 벌써. 그러고 보니 평택이 징검다리네. 아산과 이어 평택호 만들었지, 당진과 연결해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었지. 넌 이곳 팽성을 땅끝이라 여기는 사람 같아. 바다 쪽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으니.

바다요? 바다라는 게 제겐 좀 상징적일 뿐, 바다라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바다…… 뭣보다 여기 바다는 뭐랄까, 막힌 느낌이죠.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남쪽 섬을 생각했다. 섬이라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일 텐데. 그런 느낌은 뭐랄까 신천지에 대한 발상처럼 다가왔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고서도 바다를 바라본 적이 없이 내륙으로 내륙으로 향해서 살아왔다. 이제 난데없이 다른 사람의 섬을 생각하다니. 이건 무슨 억하심정은 아닐 테고. 방향 상실일까.

놔둬라. 혼자 다녀오마.

그렇게 아버지가 나가시고 난 뒤에도 어머니는 눈으로 나를 붙들고 계셨다.

어머니, 왜요?

아버지 말이다.

아버지가 왜요?

아버진 이럴 때 며칠은 정말 우울해 하신다.

거야, 어차피 늘.

잘나가는 청주 한 씨들이 좀 많으냐. 왜 우리 집안만 손들이 귀해가지고. 하긴 아들들 있어도 시제에 소용 없더라만.

설마요.

이 어미가 없는 소릴 하냐. 너희 어려서랑은 시제 음식 도맡아서 장만하던 정문리 당숙모 알지? 당장 그 집 며느리들 둘 다 교회 다니면서는 손 거들어 주기는커녕 참석도 안 해. 조상 숭배하고 하느님 숭배가 상충이라는데, 어디 같은 거라야 상충이 되고 말고 하지.

꼭 그래서가 아니고, 하는 집들도 요즘 간소화 추세라서 그렇죠. 어머니도 좀 간소…….

간소하게 하고 말 게 뭐 있냐. 사람들 모이면 밥은 먹게 해야지.

음복이라는 것도 참석자만 하면 안 될까, 엄마? 다 챙겨서 싸주고 하려니까 엄마가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미래, 그래. 내가 딸만 낳아놓고 무슨 입을 뗀다고.

어머닌 또!

안다 알아. 요즘엔 아들들도 집안 대소사도 나 몰라라 한다는 판국에. 한국도 미국이다 요샌.

어머니, 너무 괘념 마세요. 세상이 바뀐 걸 어떡해요. 미래만 보고 달려도 살아남을까 말까, 과거로 눈 돌릴 틈이 있어야 말이죠. 변명이 아니라 당장 내일 일도.

그도 그렇다. 잘 배우면 잘 배운 대로, 덜 배우면 덜 배운 대로.

어머니, 전 아무래도 너무 배운 것 같아요.

이 말은 내뱉지는 않았다. 내뱉지 못했다. 힘들여 공부 뒷바라지 해 놓으니 너무 배워서 불통이라는 뻔뻔한 말을 어찌 풀어낸단 말인가. 그렇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 루소가 뭐냔 말이다. 아니 애당초 그런 공부를 하겠다고 작정하기까지 난 도대체 무엇에 씌었을까.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동서양의 진리들을 동등하게 모두 공부해야한다는 원칙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너무 적게 배웠다. 한국과 프랑스가 우리에게 대등할 리 없는데 대등한 것으로, 심지어 석학들이 더 많은 - 더 많이 소개된 - 서양 나라들이 더 위대한 것으로 주입되었다.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

어머니, 저 컴퓨터 보고 있던 게 있어서.

그래라.

 

나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박병선 박사를 떠올렸다. 같은 파리의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 평생을 바쳐온 그와 남의 것을 겉돌다가 중도하차한 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어떤 갈림길에서 인생이 달라진 것일까. 힘이 빠진 채 까만 화면을 다시 불러낸다.

재생 화면을 누른다는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다. 어스름 화면. 1975년 - 어머나, 내가 태어난 해였네! -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막대를 옮겨 아까 멈췄던 곳을 찾아간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프랑스의 한국 보물들 - 그 종류와 가치>란 제목으로 의궤 사본 297권, 인쇄본 45권, 두루마리 8권의 목록을 밝혔고, 책 15권과 두루마리 1권은 분실된 상태임을 알렸다. 그렇지만 반환은 꿈도 못 꾸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서울대학교 규장각 팀에서 콜레주드프랑스와 공동발행으로 의궤 관련 책을 출판했다. 프랑스어 판으로, 저자는 박병선 박사.

콜레주드프랑스는 16세기 이래 유서 깊은 개방대학이다. 파리에 머물던 4년 동안 라틴구에서 만날 바라보던 그곳이 떠오른다. 아련히, 아픔처럼. 롤랑 바르트도 미셀 푸코도, 움베르토 에코까지도 강의를 했던 곳. 콜레주드프랑스의 관심은 당연히 프랑스 석학들에게 의궤의 중요성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의궤 발견으로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뜻하지 않게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1993년 9월, 고속철 테제베의 한국도입과 관련해서 프랑스 측이 한국에 공을 들이는 시기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선물로 들고 왔다. 분명히 반환의 제스처였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코 흘러만 갔다.

한국 내에서 반환운동이 일자 프랑스도서관 측은 의궤 전체를 폐물창고에서 본관으로 이전하고 수선과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에는 반환 반대여론이 정점에 이르렀다. 예술분야 전문 일간지 <라 트리뷰드 아트>는 리크네 편집장을 앞세워 아주 강경했다. 프랑스법에 국외문화재 반환 의무가 없으므로, 비록 국제법에서 반환을 요구하더라도 반환할 의무가 없다는, 자구적인 고집이었다.

그런 명석함은 명석함이 아니라 천착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여론몰이에는 그런 말들이 효력이 있다. 다른 곳을 검색해보니 미테랑 대통령이 의궤 한 권을 우리 측에 선물했을 때 파리국립도서관의 어떤 사서는 자리를 내던지며 맞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작 의궤반환 합의 때에는 사서들 272명이 연대해서 반대성명을 냈다고.

이렇게 의궤 반환에 대한 반발성 기사와 탄원서가 넘치며 반대시위가 일고 있던 상황에서도 참 지식인들은 진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우선 문화부장관 자크 랑이었다. 그는 법적으로는 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재산임이 맞지만, 정신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의궤의 주인은 한국이라고 했다. 파리 제7대학, 제13대학의 교수들도 합세했다. 13대학의 살즈만 총장은 국외 문화재란 거의 군사적 침입이거나 정부 간 협상 없이 가져온 것들이며, 그렇다면 현재의 소유국에서 원래의 소유국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소유국에서 대중에게 전시도 하지 않으면서 타국의 문화재를 계속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참으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인류의 문화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런 뜻에서 당시 문화부장관은 박병선을 가리켜 아름다운 한국국민이자 세계국민이라고, 그의 투지와 용기, 그리고 집념을 온 나라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 - 그것은 결국 드러난다. 세상에는 늘 공평무사한 지식인들이 있어온 때문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아버지가 한번은 어느 노령의 일본인 교사가 공개한 일본 고지도들 이야기를 하셨다. 1880년엔가 발간된 <대일본국전도>와 일본문부성이 발행한 1900년쯤의 <수정 소학일본지도>에는 일본영토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아예 들어있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분명히 알았다는 증거가 되는데, 그럼 지도들을 공개한 그가 매국노인가.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진실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이익과 불이익을 초월하여 진실을 인정하는 자질로서만 평가된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말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진실임을 믿어야 한다. 그런 글을 최근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화면을 멈춰놓고 그 책을 찾는다. 어느 독문학 연구서다. 프랑스문학 관련 독서도 현대문학 쪽을 살필 여력이 없던 내가 독문학 서적이라니. 희망 찬 모교 강사시절 유럽문화연구소에서 독문과 강사들과 교류하던 덕이다. 아니, 지금의 지방대학에서 만난 배 아무개 교수 탓일지. 지방대학이라지만 나와 엇비슷한, 어쩌면 더 젊은 나이에 전임이 된, 정말 부러운 위치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가족사에 관련된 흔적을 찾아 독일로 잠적하다시피 날아갔는데, 그 뒤로 뭔가 얽혀들게 된 것이다. 얽혀들었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그가 나에게 간헐적으로 개인적인(?) 자료를 보내왔는데, 거기에 나치시대의 유명작가가 깊이 관련되어 있던 것이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때문이었다.

찾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의 후예인 서독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에 관한 연구서였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질보다도 살인보다도 더 가공할 죄를 짓는다. 강도나 살인에 대해서는 명시된 법조항이 있고, 일단 언도받은 죄수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터준다. […] 그러나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 불문율 앞에 내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이 법은 불문율이며, 그 점이 그의 예술, 그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다. 그에게는 어느 하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 그가 그 순간 제공할 수 있는 전체를 주거나 - 아니면 무 - 그러니까 침묵이다. 그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 16쪽의 글이다.

언젠가 같은 작가의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이라는 소설에서도 전범국 독일의 청소년의 심리를 가슴 아프게 따라가며 조금 놀랐던 기억도 있다. 이 연구서에는 제목을 ‘고백’이 아닌 ‘견해’라고 했는데 직역인가 보다. 유년시절에 나치를 경험한 어릿광대는 새 인생에 적응하고자 ‘견해’를 바꾼 어른들의 처사에 울분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경악의 비밀이 상세한 작은 일에 있음을 모른다고. 모른 척 한다고. 큰일을 후회하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다. 정치적 과오, 간음, 살인, 반유대주의 등을. 그러나 상세한 -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사실들을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그가 공연을 위해 ‘모으는’ 순간들은 순간적 작은 진실의 총체이며, 이것이 위대한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고. 순간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 그래.

나는 또 옆길로 샌다. 책을 덮자. 유럽 지향으로 굳어버린 내 머리를 다시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돌린다.

 

직지 - 그런 이름의 책은 경이 그 자체다. 존경해 마땅할 스승과 제자의 집념은 전대미문의 성과를 낳았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의 주인공이 한국이라는 증표라니. 오매불망 고서적들을 뒤지던 박병선 박사에게 프랑스인 동료사서가 ‘아주 오래된 동양책’이 있다고 알려준 덕이었다. 『직지』라고 한자로 쓰인 먼지투성이의 책은 선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정식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주제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그 비슷한 뜻이란다.

발견된 책자는 전 2권 중 하권뿐이었고, 하권은 39장이지만 그나마 제1장은 유실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1377년(우왕 3년)에 흥덕사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과, 주자인시(鑄字印施)라는, 쇠를 부어 만든 글자를 찍어서 배포했다는 기록까지 완벽한 물증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떨렸을까. 조선도 아닌 고려 말기에 금속활자본이라니.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1455년을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이는 그보다 근 한 세기를 앞섰다. 확산도 면에서 구텐베르크의 『성서』 배포에 밀렸다지만, 그게 대순가. 1972년 파리의 <유네스코 세계도서의 해 기념도서전>에 『직지』를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노력 끝에 2001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까지, 박병선의 꿈의 한쪽 날개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직지』라는 이름의 책을, 아니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학문이란 것이 얼마나 뾰족한 것인지, 옆의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파리의 하늘에서 그런 위대한 발견이 있었던 사실도 모른 채. 여전히 유일한 그 금속활자본이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음도, 왜 프랑스에 영구 보관될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 채.

내용인 즉, 한말 주한프랑스대리공사였던 플랑시라는 인물이 구입해서(?) 귀국 때 가져간 것을 나중에 골동품수집가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했고, 그가 1950년에 사망한 뒤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기 때문에 소유주가 분명한 셈이란다.

또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된 『직지』는 목판본이라는 것도 모른 채. ‘흥덕사자’라고 명명된 그 금속활자 자체의 흔적은 아직 오리무중이라는 사실도 알 리 없이. 나는 21세기를 맞는 파리에서 오직 남의 정신만을 파먹고 살았다.

언제라도 흥덕사지엘 가보고 싶어진다. 고인쇄박물관이 있다는 그곳에. 네이버 길찾기에서는 평택과 청주 사이라면 버스로 한 시간이라는 정보가 뜬다. 각각 터미널까지 오가는 길을 더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리라. 성남으로 향할까 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있다는 곳. 자동차라면 청주가기보다 더 가까울 것이나 대중교통으로는 세 시간 반이 걸린다고 뜬다. 아서라, 뒷북이다. 아니, 뒷북이라도 무관심보단 나으려나. 방학 때 집에 오면 들러볼 마음을 묻어둔다.

오디세이 - 다시 <의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끄기 위해서다. 어젯밤 찾아본 기록들로는 1975년의 『의궤』 발견도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반환과정도 오디세이의 귀향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직지』의 사정보단 나았지만, 약탈의 증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의궤』의 오디세이는 그 시작이 병인양요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린 양요들, 병인양요 - 기록들을 찾아본다.

1866년 초 병인박해로 천주교신자 수천이 학살되었고, 프랑스인 선교사 9명도 처형되었다. 화를 면한 3인 중 리델이라는 신부가 청나라로 탈출해서 프랑스극동함대 로즈 사령관에게 응징을 요청했다. 함대는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노라.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우리는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10월 16일의 일이었다.

1,000배로 갚아주겠다고? 대단한 복수심이었구나.

강화도엔 왕실의 전적을 보관하는 두 개의 사고가 있었는데, 강화성 내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과 강화읍 남쪽 정족산성 내 전등사 근처의 장사각이었다. 서양인들의 눈으로는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화려한 장정의 신비한 서책에 뜻도 모르고 반할만도 했겠다.

로즈 사령관은 장교들에게 목록까지 만들게 해서 완전한 노략질을 자행했는데, 11월 9일 조선의 정족산성 승첩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를 철수하면서 이들 서책들을 가져갔다.

어쩌면 전쟁기념물 쯤으로 주장될 수 있었을 도서의 약탈 사실은 사령관이 해군성장관에게 보낸 서찰 때문에 폭로되었다. 필요한 책들은 배에 싣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태웠다는 보고내용이 자충수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 계셨던 최석우 신부님이 밝혀냈다. 그분으로서는 병인양요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프랑스인 선교사들 처형 등에 관한 교난 연구가 주목적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의궤 반환의 꼬투리를 찾아주었다.

다시 화면을 본다. 2011년 5월 마침내 의궤 297권 모두가 돌아왔다. 비록 영구임대 형식을 빌려서라지만 어떠랴. 외규장각을 떠난 지 145년이 지나서야 참으로 긴 오디세이를 마쳤다. 그러니까 처음 먼지투성이 의궤를 발견하고 박병선 박사가 마비증상을 느꼈던 그 감동의 순간에서 36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흔적을 찾아 헤맸던 56년만의 일이었다. 56년. 더러는 그 세월을 통틀어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80대 노령에 암 투병으로 휠체어에 앉은 박병선 박사 - 과제의 완벽한 수행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 가을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사람. 그 모습이 처절하리만치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자크 랑, 『의궤』 반환 당시의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말문을 연다. 박병선 박사의 집념,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의궤 환수라는 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다큐멘터리 편을 보았을 뿐으로 나는 멍한 채로 깊은 상념에 든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이 살아있는 사회, 프랑스이므로 반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세계대전 직후에는 나치에 협력했던 비씨 정부의 잔재를 매섭게 단죄했던 그들이다, 평화 시에는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에 혼외자가 참석해도 소동이 일지 않는다. 대통령이 이혼을 반복하거나 미혼의 여성장관이 혼외자를 출산해도 사생활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그런 나라.

하지만 나의 지난 시절은 나에게 무엇인가. 그런 프랑스에 매료되어, 프랑스의 지성에 매료되어, 루소에 심취하여, 프랑스의 혁명적 철학에 몰입했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이 정말 있었던가. 있었던들 무슨 소용인가.

가지를 늘려 그늘을 크게 키우라 시던 나의 어느 날의 스승님은 뿌리를 단속하라는 말씀을 잊으셨다. 이 바보 같은 제자는 뿌리가 마르면 가지도 그늘도 없다는 단순한 지식을 몰랐다. 스승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생득적으로 간직해야 할 보편 진리를 몰랐다. 괜찮은 제자도 못된 나는 스승이 된 적도 제자를 둔 적도 없다. 십여 년의 계약직 강사 이력이 전부일 뿐이다. 내 지식의 계보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나려나 보다.

점심 - 점심 먹자, 아버지도 진작 들어오셨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고 곧 바로 오셨구나. 넌 뭘 들여다보느라 그렇게…….

어머니는 고개만 내밀고 다시 나가신다.

밖엔 제법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빗물에 적신 초록이 봄을 피워낼 것이다.

얌전히 점심을 먹고 얌전히 인사를 하고 기차를 탈 것이다. 내리면 저녁 때. 아직은 남아있는 강의 준비로 밤을 새울 것이다. 해도 해도 모자라는 공부는 해도 해도 별 들여오는 것이 없지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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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그늘』, 제2호, 시더나무문학회, 85-106쪽.

 

 


 

 

이 감점이라니. 환경정리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우리 반 점수가 이게 뭐예요.

생기신 덩치와는 다르게 평소 수줍게 말씀하시는 담임선생님이 그날은 분통을 터뜨리셨다. 중2 때였고, 그때는 환경점리 심사표에 교탁에 꽃을 꽂아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꽃병을 뺀 것은 학급비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급우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이 당연했다.

저, 그것이…… 선생님, 왜 살아있는 꽃을 죽여서 갖다 놓으라고 하는데요?

뭐시여? 꽃을 죽여? 그니까 까먹은 거이 아니고 일부러 꽃병을 안 갖다 놓았다고? 지시사항을 학생 맘대로 어겨요?

선생님은 급하니까 사투리를 해가며 나무라시다가 가죽 표지의 긴 출석부를 탁 덮으셨다. 다들 숨을 죽였다. 더 대들다가는 출석부로 탁 때려분질랑께, 라고 하실 차례였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갑자기 혼이 나면 간경 뒤집힐지 모른다고 염려하셔서, 출석부로 머리를 탁 치시기 전에 꼭 경고를 주시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가셨다.

을, 꽃다발을 볼 때마다 나는 중2 때 담임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은 담당이 농업이셨다. 실습장에서 감자를 ― 고구마였는데 그땐 고구마도 감자라고 했다. ― 캐는 날이면 굵은 알들은 골라서 근로장학금에 내놓는다 했고, 못생기고 작은 놈들은 가사실습실 가마솥에 쪄서 나누어 먹게 하셨다.

주번, 감자 익었는가 가서 보고 와요.

(다녀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솥뚜껑을 열어 봤는데 연기만 났어요.

연기가 뭐예요, 김이지. 또 김만 보고 오면 어쩐데요. 요렇게 꼬챙이를 만들어 갖고 가서 쿡 쑤셔보고 와야제.

그렇게 무심한 듯 유심한 선생님은 꽃을 죽이기 싫었던 어린 제자의 마음을 받아주셨다. 꽃병에 담긴 꽃은 사람들이 죽인 것이라는 발상은 무심코 불교적 배경에서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착함이 지나치게 강조된 동화책들 속의 착한아이 신드롬 때문이었는지.

생명에 대한 외경심 ― 그런 거창한 개념을 알기에는 어렸던 중학생 시절의 건방진 선택도 찰나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꽃다발을 좋아할 수 없다.

결혼식의 신부가 드는 작은 부케도 사랑의 정점을 상징하지만 한편 곧 사라져버릴 최고의 순간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곧 시들 것이니까. 강남 특급호텔들에서는 식장 장식용 꽃값이 천만 원을 웃돈다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

묘소에 가져가는 꽃들은 우습기까지 하다. 조상님들은 이미 풀꽃들과 함께 사신다. 부족하다고 느끼면 꽃나무를 더 심어드리면 될 일 아닌가.

그래도 외할머니 묘소에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상여를, 그러니까 장례차를 생화로 장식해 달라시던 외할머니의 평상시의 유언을 꺽은 것이 그랬다. 할머니, 꽃 몇 백송이 목숨을 꺾어서 함께 데려가시게요? 사치스러운 할머니도 그 말에 꺾이셨다, 차 전체는 말고야…….

하물며 관행처럼 되어버린 (별 볼일 없는) 문학상 수상 같은 자리에서 느닷없이 받게 되는 꽃다발들은 더 없이 곤혹스럽다. 꽃다발을 받으면 미소를 짓는다, 지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말해야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이고, 되갚을 기회를 놓쳐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또 정말로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은 그렇게 내 삶의 환경정리에서 마지막 순위로 밀려난다. 내게는 명사가 아닌 형용사 같은 것, 내용이 아닌 포장 같은 것이다. 꽃을 생업으로 또는 예술적 작업으로 꺾으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 최고의 것일지언정 좋아하지 않을 자유는 있지 않겠는가. 마침 나는 무명이고 이 글이 실릴 책도 동문들마저 심하면 공해라고 여기고 챙겨가지도 않을 것이니 누가 읽으랴. 꽃 사랑이나 문학 사랑이나 다 제 눈에 안경일 뿐이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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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42

 

 

 

「슬픈 족속」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하얀 세상이 비친다. 하얀 세상, 어딜까? 아니, 낮은 지평선 위, 하늘이어야 할 곳은 검회색 천지다. 검회색, 어디에서 보았던 색깔인가.

첨엔 시원한 물속이었다. 따가운 한 낮의 햇볕 속에서 노란 경계석을 넘나들던 여자아이가 사라진 순간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벌써 발은 물에 젖었다. 허리로 가슴께로 물이 올라오는 것은 순간이었다. 꼬마아이의 옷자락을 잡았다고 느낀 순간 뒤뚱거렸을 뿐인데……. 물속은 상상처럼 푸르지 않고 곧 어두워졌다. 어딘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색은 검다 못해 붉어지고 있었다. 이 깊은 물속, 어쩌면 지구 속 마그마가 흐른다는 중심으로 빠져드는 느낌……. 어디였더라?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호수,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서있다. 비몽사몽간이다. 가볍게, 불과 몇 십 미터를 올라갔던 경사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는 느낌에 뭉클해진다. 깊이는 지구의 중심에까지 뻗히는 인상이다. 얼마나 깊은지 표면은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다시 물속에 빠져든다. 흑수 속으로 깊이.

중국에서 이 영산을 헐어 관광길을 내었다 싶으니 허전하군요.

누군가가 옆에서 불쑥 말을 던졌다.

조약에 따르면 천지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나머지 45.5%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느만요.

저기 저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곳이 북한 땅 백두산 아뇨!

예, 진정한 백두의 임자는 말이 없네요.

진정한 백두의 임자 ― 나는 내 말에 정신이 든다. 지금 무슨 말인가. 몇 년 전 이런 말을 했던 기억과 함께 백두산 천지의 검은 물이 덮쳐왔다. 그랬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지만 난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땐 모교에서 희망적인 상황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보름달 시기에 슬픔은 저만치, 방학은 방학대로 즐겁기만 했었다. 영어학 전공의 동료가 연길에 학술행사에 참석하는 길인데, 이어 백두산 관광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 좌석에 여유가 있다고. 백두산을 내 발로 밟고 천지의 물을 내 눈으로 본다는 상상은 학회가 있는 이틀을 묵힐 것을 감안해도 해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공항에서 만나죠!

동료의 말을 떠올리며 우선 공항 내 은행에서 133.90으로 환전을 하고 시계를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동료가 불러냈다. 서른은 넘고 마흔 명은 안 되는, 소년에서 노년의 집합이었다. 부모 따라, 남편 혹은 아내를 따라 나선 경우가 몇 있어 보였다.

그렇게 탑승수속을 함께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금방 중국이었다. 인천에서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하여 대련에 도착한 것이다. 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에어포트호텔로 향했다. 비행시간은 인천에서 대련까지, 대련에서 연길까지 각각 한 시간 정도라지만, 중간에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사이 시간이었다.

닌 하오, 젠따오 닌 헌 까오싱!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습해 간 한두 마디 중국어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말을 하면 되었고, 인천에서 함께 출발한 가이드가 테이블마다 맥주를 한 두병 가져다 놓았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연예인 같은 젊은 아내를 동반한 남자가 혼자서 맥주를 독차지했다. 꽤 예쁜 얼굴을 하고서 다소곳이 계속 술을 따르는 아내가 신기했다. 술을 따르도록 설계된 안드로이드 같았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광장이나 노상에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걸춤이라고, 조선족 현지 가이드 말로는 이곳에서는 춤이 일상이라 했다.

길거리에서 춤이 추어질까요, 한샘?

즐거움에 겨워 춤을 추는 것이겠죠!

즐거워 보이지도 않은데요. 춤을 추다보면 즐거워지는지. 하긴, 리듬을 타면 누구라도 즐겁지 않겠어요?

정샘, 아예 즐겁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즐겁고 싶어서라면, 그 말은, 즐겁지 않아서 춤을 춘다고요? 왜 꼭 즐거워야 하는지, 삶이란 게 보통 지치고 서럽고 아닌가?

흰소리를 해 가며 돌아온 공항 로비에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쾌찬’이라고 쓰인 곳에 가면 앉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레이프주스를 달라했던 누군가는 파파야주스를 받고 투덜댔다. 대규모 항구도시라지만 중앙과는 다른지, 종업원들의 영어가 시원치 않았다. 셰셰 닌! 우리와 똑같은 얼굴에다 대고 그렇게 말하기도 어색했다. 다음 말도 모르고.

비행기는 놀랍게도 예정시간을 앞질러 출발했다. 목적지 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거리엔 한글과 중국어로 위 아래로 쓰인 간판들이 즐비했다. 비행장에서 곧 바로 향한 곳은 보기에는 중국 식당인데 음식은 퓨전이었다. 맛없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더니, 요리접시는 크고 무겁고 개인용 접시는 콩알만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숙소 ‘바이샨따샤’ ― 백산호텔은 싱글과 트윈 룸을 가리지 않고 하룻밤 100불이 넘는, 중앙당에서 지도공작을 나오는 고위급도 게서 묵는다는 대형 호텔이었다. 마음으론 여전히 불편했다. 외국인지 아닌지 도통 애매했기 때문이었을까. 영락없는 닮은 꼴 얼굴들에서 중국말이 튀어나올지 한국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학술 행사장 ― 행사와 관련 없는 몇몇은 하릴없이 시내관광을 나가자고 부추겼지만, 나는 건물 로비에서 책을 읽기로 했었지. 여행길에 바보같이 무거운 양장본을 챙겼으니 읽기라도 해야 덜 억울할 일이었으니까.

[…]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 […]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은 지식인들의 복수라? 지식인에겐 감성이 없다고? 내 직업이란 것도 해석학 아닌가? 고로 나에게도 감성이 없다? 간단히 며칠 놀자고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어. ‘해석에 반대한다’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지성과 감성의 이분론이 부당했고, 감성 우위론도 근거가 없다. 태어날 때 감성의 풍요 속에서 태어난다지만, 천천히 계발된 지성 또한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이자 특권이다. 원초적인 것이 우월하다니, 그것도 편견이다. 인간에게서 따로 우월한 특성은 없다. 제 알아서 신체가, 신체의 주인이 쏠리는 쪽으로 개성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켕기는 것들을 메모하다가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갔지. 「내용 없는 신앙심」 등 다른 글들도 저자 손태크의 삶의 방식만큼이나 흡습성 독서를 요구했어. 여행지의 독서로는 많이 무거워, 영락없이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기 꼴이었지 뭐.

그렇게 이틀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댄 내게 저녁의 연회는 과분했었지. 처음 보는 버섯단자나 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린 38%의 알코올도 맛이 아련히 떠오른다. 알코올 탓인지 연길 현지의 참석자들도 입을 열었던 것 같아. 1950년대에 태어났다는 어떤 교수는 문화혁명 당시 3년 반 동안을 하방으로 시골로 밀려갔지만, 공장 행을 원치 않고 기어코 공부를 더 하겠다고 고집하던 중, 마침 영어교육에 투입되어 영어가 직업이 되었다고. 기어코 원하는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구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어. 적어도 그때까진 나도 내 인생을, 미래를,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두통 때문에라도 눈을 뜨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마가 긴장되지 않아서 편안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비추이던 세상이 실은 겨우 내 속눈썹 사이로 비친 공간임을 깨닫는다. 눈을 감으니 다시 검회색 세상이 되고, 기억은 검은 호수를 향한다.

마침내 백두산과 천지를 향했지. 8월 초 일요일, 입추라지만 볕은 따가웠다는 기억이야. ‘도로수금소’를 지나니, ‘차굴’이 나왔어. 산삼과 꽃사슴뿐으로, 담비가죽 등을 생업으로 하는 동네를 지나자 어김없이 휴식시간이었어. 40여 분 쉬는 시간에 휴게소는 장사가 짭짤한 모양. 관광버스가 서너 대가 한꺼번에 서있었지 아마.

이어지는 버스 내의 분위기가 뜰밖에. ‘뀀’이라는 꼬치구이에 약술을 한 잔씩을 걸쳤거나, 잘 씻지도 않은 장뇌삼을 질겅질겅 씹은 탓이었나? 현지 안내원은 ‘만경대는 꽃동산, 우리들의 봄동산’이라는 북한 노래는 맛만 보여주고, 순 국산 노래방 수준의 ‘아빠의 청춘’을 감칠 맛나게 뽑았어. 참, 노래 잘하는 사람들…….

반딧불이 억수로 많아요!

안내원의 반딧불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낭만과는 멀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쪽 산에는 ‘피복’이 없단다. 그 민둥산 화전에 웬 반딧불만 유난히 많은데, 알고 보니 파종을 한 뒤 그것을 지키는 주민들의 한숨 섞인 담뱃불이더란다. 파종해 놓은 씨앗, 덜 익은 곡식도 마구 훔쳐가는 인심이라니.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일 년에 달포 정도, 그것도 아침과 낮에만. 파종이나 가을걷이 등, 일을 심하게 해야 할 때나.

마음 가득 애절한 동포애가 스멀거릴 쯤 ‘만경 관광 상품 유한공사’라는 곳에 도착했어. 중국에서 건물을 지어주었지만 운영 주체는 북한이라고. 한 더위에도 긴 통치마에 저고리를 받쳐 입은 접대원동무의 자태가 고왔어. 말씨도 조용하고 고왔지. 텔레비전에서 가끔 듣는 조선중앙방송의 아나운서들처럼 가열찬 목소리가 아니어서 신기했지.

상품은 크게 두 종류, 건강 상품과 자수 작품들. 어느 것 하나 가짜일 것 같은 냄새가 없는, 진지하다 못해 약간은 촌스러운 작품들이었어.

한샘, 여기 봄 와 봐요. ‘지저스 래핑’이라뇨! 웬 예수님에 웬 영어죠? 그러고 보니 상품 모두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것이군요. 봐요, 건강 상품들도 한국에서 열을 내는 것들로, 우황청심환, 상황버섯, 뭐죠 이건?

글쎄요, 아예 값이 한화로 표시되어 있군요.

한국 사람들 물건 사기는 좋아하나 봐요.

남의 나라 사람 말하듯?

누가 유럽관광 다녀와서 구찌 백을 샀다고 자랑삼아 얘기합디다.

그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요?

꼭 샤넬을 사려고 했는데 그 매장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 누가 묻습디다. 어디, 파리에서요? 하니까 그 여자 대답이 가관이어요. 파린가, 어디였지? 도시 이름도 몰라요, 이삼백 짜리 물건을 사고도 그 도시 이름도 모른다니까요.

여긴 그런 명품과는…….

우리 둘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지. 건물 주변으로는 장백산정원이 시작되고, 길가 코스모스와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것이 옛날 어릴 적의 정이 묻어났어. 어머니가 우리들 하얀 러닝셔츠에 물감을 들여 주시던 귀여운 패랭이꽃까지도. 그곳이 정말 중국 땅인가 싶었으니까.

버스에 오르니 연변의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어. 1870년대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족은 초가집과 벼농사를 특징으로 정착했단다. 두만강 아래쪽으로는 조선족이 많고 백두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중국인이 많은데, 지붕 모양을 보고도 구별이 된다고. 사방 기와가 조선족의 집이란다.

기와집 ― 그랬다. 우리 민족은 기와집에서 쌀밥에 고깃국을 탐했었다. 기와집 짓고, 아들 딸 낳아서 쌀밥에 고깃국 먹여 키우는 것, 그것이면 되었었다. 땅 따먹기 놀이처럼 재화를 불리려고 혈안이 되지는 않았었다. 옛날에 우린.

버스는 민송이라는 특별한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계속 달렸어. 소찬에 ― 상마다 삶아져 나온 토종닭도 있긴 했지만 ― 점심을 먹고 나서 막상 백두산 천지를 향할 때는 염려와 달리 하늘이 점점 밝아졌어. 미리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어 녹이는 것을 잊진 않았지. 차편으로 게까지 오른다지만, 고산의 환경을 견딜까 염려스러웠으니까. 어느 만큼에 이르니 모두 하차하여 친환경버스로 바꿔 타야 했지. 거기서부터는 사람 당 두 장의 입장권을 받았을 뿐, 일행의 개념이 없이 숫자대로 태워져서 난감했었지. 번호 붙은 짐짝처럼. 친환경버스로 달리는 시간은 25~30분, 다시 6인승 짚 차로 곡예등정이 20분 정도 소요되었나. 묘기행진에 참가하는 기분으로 흔들거리며 덜컹거렸지. 차창 밖 풍경은 점점 달라졌어. 여러 마리 나란히 서있는 소들의 허리나 엉덩이를 닮은 지형을 지나면서, 구름은 더 걷혀서 안심이었어.

백두산 한 귀퉁이가 갑작스럽게 드러난다. 너무나도 가까이에 솟아 있다. 그 너머가 천지란다. 해는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서, 서너 번의 관광에도 천지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사람들로 빼곡한, 저 불모의 언덕 조각이 백두산이라고?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너무 높게 차로 올라온 탓에 뒷동산보다 미약해 보이는 언덕. 모래와 자갈뿐인 산에서 신성은커녕 생명감마저 느끼려야 느낄 수 없다. 백두산 까마귀도 심지 맛에 산다는 말은 비유일 뿐, 까마귀 한 마리 없다.

아, 천지,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 못해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슴이 아프다. 삼사백 미터 깊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표면이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이 끝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확신이 든다. 마그마가 끓고 있다는 그곳. 천지, 그래 그곳이었구나. 그 높은 곳에서 지구의 핵을 실감했던 자리.

여기 사진 열두 장 4만원. 여기 사진 카메라, 여기 번호 잘 봐두세요 ―

유창하지는 않지만 한국말을 하는 왜소한 청년의 옷에는 006이라는 번호가 크게 붙어있었지. 어딜 가나 신흥 자본주의가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었어. 관광객들이 가진 카메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표면을 찍는다는 전제로, 아예 4만원 한국 돈으로 12장짜리 필름에 사진을 찍어주는 직업, 알바, 장사, 그런 것.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니 더는 볼 것도 없었지. 한 발짝 더 올라가면 좀 더 잘 보이겠으나, 장님 코끼리 보기는 매한가지일 터.

일행들보다 미리 내려와 보니, 간이건물 한편에선 커피 등을 팔고, 한편에선 기념품을 팔고 있었지. 기념품이라야 백두산 관련 사진들과 그 사진을 담은 열쇄 고리 정도. 늑장부리는 팀은 늘 있기 마련, 안내원이 흔들던 노랑 깃발이 그들을 불렀지만 소용없었지. 다시 짚 차, 친환경버스를 거치니까 입구였지. 왠지 허망했어. 멀리 돌아 돌아 백두산 한 조각 밟아보고 돌아서는 일이 마치 중간에 깬 꿈만 같았지. 처량하기까지.

장백폭포조선족 안내원은 기어코 백두폭포라고 하는데 ― 폭포관광은 도보였지. 비껴 옆 입구를 통해 처음엔 느슨한 기울기로 시작되고. 사람들은 벌써 멀리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계곡을 보고 놀라 탄성을 올렸어. ‘백두산에 걸린 두 필의 비단’을 일 년 내내 볼 수 있다지만, 그렇게 은색으로 빛날 줄은 몰랐으니까.

나있는 평길은 가파르지 않지만, 멀리 바라보이는 폭포를 보면 중간에는 가파른 곳이 있어 보였지. 아니나 다를까, 입장료를 낸 다음부턴 길은 갑작스레 가파라졌고, 더 가파른 층계를 오르자 곧 물이 나타났지.

한 여름인데도 발을 담글 수 없이 차가운 물에 살짝 씻어보는 것이 고작이었어.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은 오를 수 없다 ― 라고 그리스인들이 그랬다던가. 나 또한 분명코 이 쏟아져 내려 흘러가는 물에 다시 발을 적시는 일은 없을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어 노천지수영지가 있었지. ‘노’는 ‘이슬 로’자를 썼더군. 더 큰 간판은 한글로 ‘세계 제일의 성산 백두산 자연유황온천수탕’, 그 아래 한자로 ‘세계 제일적 성산 장백산 천연유황온천욕’이라 쓰여 있었지. 83℃. ― 게서 의견이 갈릴밖에. 온천욕을 하자는 그룹과 아니라는 그룹. 아닌 쪽 사람들이 한 시간을 기다려주기로 했는데, 바깥바람이 좀 셌나. 길가에는 조선족 풍미의 냉면 등이 20, 30, 40위완, 쾌찬은 20위안이라는 선전이 즐비했고. 길 건너엔 ‘순 한국식 음식’, ‘원두커피’라는 팻말도 보였어, 한국 어디 시골처럼. 낡은 집과 어울리지 않는 새 문구들.

현지 안내원이 불러서 안으로 들어갔었지. 센 바람은 피한다지만, 로비의 커피숍 자리에는 앉기만 해도 10위완이었어. 피곤이 차츰 내려앉을 무렵, 옆방에서 우리 곡조의 단소 소리가 애처롭게 건너왔었지. 그리운 옛 임이여, 언제나 오려나~. 애처롭다 못해 찔찔 짰어. 영락없는 몇 십 년 전의 한국 풍경. 입욕한 사람들은 약속된 6시가 지나도록 감감했고, 결국 15분 이상 지나서야 슬슬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버스 안이 갑자기 술렁거렸지. ‘저녁에 소를 잡는다’는 행사 때문. 송아지 값이 한국의 1/10, ‘겨우’ 50만원이라나. 버스 한 대 사람 모두가 먹고도 남을 값이라면 합리적이라고.

식사 후 이어지는 파티는 지난밤의 연속이라는데, 우리는 그때 빠졌기 때문에 실력들을 잘 몰랐지. 그때 벌써 마이클 잭슨이니 뭐니 별명을 갖게 된 인사가 있었지, 첫날 아내가 따라주는 낮 맥주를 한 없이 마시던 사내. 이번엔 가곡을 부르겠다더니, 일행들의 선택으로 「명태」를 부르는 품이 대단하긴 했어. 깡마른 작은 체구에서…….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 지라도~.

그 사람 뿐 아니라 다들, 정말 다들, 길고 긴 노래, 어렵고도 어려운 노래들을 잘도 불렀어. 배를 움켜쥐어가면서도 불렀으니까. 어디에 살던 가무에 심취하는 민족이 틀림없는 게지. 즐거움이 많은 민족? 삶의 무게, 삶의 슬픔을 즐거움으로 뱉어내는? 속내를 토하는 말은 접고 가무로 상대하니 더 외로울 것 아닌가? 외로움과 슬픔을 음주 가무로 포장해서, 나는 내 노래를, 너는 네 노래를……. 그렇게 함께 외롭게 밤은 깊어 가는 거다.

식중독 뉴스가 다음날 아침 모두를 놀라게 했었지. 그때 묵은 호텔은 장백산대하. 그곳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라 했는데. 5시에 모닝콜 ― 아침 ‘찬청’에 들어가자 그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밤중에 일행 중 한 부인이 병원에 실려 갔다니 놀랄밖에. 우려했던 식중독이었어. 여럿이 배탈을 호소했고, 아예 아침을 굶거나 버스 안에서 운신을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누구는 간밤의 송아지를 의심했고, 또 누구는 생간을 세 접시나 비웠어도 멀쩡하므로 송아지는 아니라 했지. 갑론을박. 대개 생각이 모아지기로는 점심부터의 식당 물이 주범이라고. 한국인들은 현지인들과 달리 물에 오염에 약하지. 무슨 대가를 치렀든 단 기간에 몸이 위생에 민감한 문명인으로 대단한 발전(?)을 했으니까. 동료와 나는 내가 ‘향수에 젖어’ 잔뜩 사 들고 간 에비앙 덕분에 탈을 면한 듯 했어. 향수 ― 사오년 파리 생활의 향수가 고작 생수에 머물다니 초라하지만, 그래도 좋은 일 한 번 한 셈 아닌가.

한국에서 간 가이드는 환자일행과 미리 연길로 향했으니까, 그제서부터는 현지인이 안내를 독점했지. 안내원 자신은 친정 쪽 고향은 합천이지만 시댁이 부안 뿌리이다 보니 전라도식 조선시대를 사는 편이라고 우겼어. 남편이 밖에서는 한턱 쏘기가 일품이며, 집안에서는 짠돌이라 어떤 도움도 안 주더란다. 전라도 남자들이 다 그런가? 일행 중에 전라도 부부가 있었는지 다들 그쪽을 바라보는데, 나이 들어 보이는 남편은 웃고만 있었지. 그런데 안내원은 이삼년 전 한국에서 경험한 사건이 있어 ― 한 여성국회의원이 공개석상에서 남성의원의 머리통을 ‘쥐알리는’ 것을 보고 ― 이젠 집에서 남편에게 엇서기도 한다며 깔깔댔지. 한국 여성의 위상이라니!

어쨌거나 56개 민족의 다민족 국가 중국에서 여자는 조선족 여자를 제일로 친다고. 가무에 능하지, 성격 깨끗하지, 남자들 시중 잘 들지…… 자화자찬이지만 귀여운 여자였어. 조선족 여자는 조선족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제일로 쳤었지만, 그건 과거사다. 이젠 돈과 권력과 학력을 지닌 중국남자와 결혼하는 예도 생긴단다. 고등 졸업 후 대도시의 한국기업에 취업했다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빈자리를 탈북녀들이 들어와서 메운다는데. 다시금 졸다가…….

두통은 여전하지만 배고픔이 눈을 뜨고 싶게 한다. 성긴 속눈썹으로 무거운 눈 뚜껑을 열기가 힘들다.

눈동자가 움직이네요, 잠에서 깬 거 맞지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긴장을 불러온다. 아, 나는 아직 이쪽이구나. 그러니까 그쪽, 내가 있었던 쪽. 배고픔도 그렇고 그 목소리 또한 증거가 된다. 안도감에 오히려 넋이 나갈 것 같다. 눈을 뜰까 말까……. 깬 줄 알면 질문을 해댈 것이고, 난 적어도 변명이라도……. 아직 자신이 없다. 배고픔을 참고 눈을 감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살그머니 멀미가 인다.

용정을 향한다. 기다려지던 마지막 일정이었지. 처음에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어. 한국에서처럼 호화분묘는 아니어서 대리석이나 화강암 묘석은 아닌 듯 했어. 어쨌거나 나무 말뚝에 페인트로 이름을 남겼더라도 이만 명이 조금 못 되는 조선족은 자신의 문화에 따라 매장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니, 좀 놀라운 일 아닌가. ‘작은 거인’ 등소평이 첫째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해주었고, 둘째, 매장문화를 변혁하는 데 성공했지만 조선족은 예외라고. 그러니까 어떤 중국인도 토장을 금하며, 물론 비석도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데, 그런데도 조선족은 생일제 외에 추석과 청명에 제사를 드려도 된단다. 조선족 차별을 선입견으로 지녔던 우리로선 차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한 점에 감동하며…….

용정 길거리엔 대하극 『토지』에서 보던 인력거가 눈에 띄었는데, 이것은 3등 택시로서 도문과 용정에서만 볼 수 있는 열악한 생존조건이랬다. 시내에서는 거리에 관계없이 ‘일인 일위완’인데, 당시 우리 돈으로는 1400원 정도. 하루에 서른 번을 운행하더라도 점심 값 등을 제하고 나면 20위완 정도의 수입이라고. 난 왜 하필 화폐단위에 민감했었지? 한국에는, 고향에는 절대빈곤이 없다는 인식인가. 위안인가. 외면인가.

용두레 우물이 있던 땅에 ― 그래서 용정이라고 했다 ― 1860년대 함북에서 살길을 찾아 이주한 조선인들이 집을 앉히고 밭을 일구었더란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 오른쪽 산 위에 비암산의 천년수가 있었단다. 이 소나무 아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 의지를 불태우곤 했으니, 독립군의 보금자리를 그냥 둘 일본이 아니었는지라, 산 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시켰다 했다. 그렇게 일송정은 죽어 넘어지고 없고, 용주사마저 문화혁명 때 사찰 탄압 가운데서 사라졌다. 멀리 바라보이는 일송정 터는 왜소하기 그지없고, 「선구자」에 일송정과 함께 나오는 해란강 또한 실망스러웠지.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했어. 건너가는 용문교 또한 한없이 초라한 그냥 다리일 뿐. 이 허탈함이 또 어디였더라?

미라보 다리 ― 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미라보 다리는 그러나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퐁뇌프 다리에 비할 수 없이 초라했었지. 그때의 가슴이 멎은 듯 아렸던 기억이 왜소한 용문교를 건너면서 되살아난 거야. 그래, 전설은 전설이어야 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미라보 다리엘 가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진실은 초라할수록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 아파오네. 배가 고프면 아프다고 느끼는 착각은 나이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설마 소리를 질러 누굴 부를 수도 없겠고. 이 이율배반을 어쩌나, 배는 고프고 눈은 뜨고 싶지 않고.

윤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대성중학 ― 「서시」를 새긴 시비는 ‘사립대성중학교’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구관 건물 앞에 있었지. 1921년에 건립되었고 다 무너졌다가 1994년 금성출판사 김낙준회장이 복원했다는 학교는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있었지. 잔디에는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우릴 반겼어. 웃음이 나게 촌스러운 문구가 정답다 느낄밖에.

바로 구관건물 2층이 기념전시관이었어. 사진, 화보,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지. 용정 출신의 다른 인사들의 역사 또한 전시되어 있고,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물론 철혈광복단의 15만원탈취사건 등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을 들었어. 현재 2,200명 남녀 조선족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설명을 끝으로, 마지막 방은 방문록을 작성하는 곳이었지. 이름 칸 옆에는 장학금 기부 의사를 표명해도 좋다는데, 어느 화폐이건 어느 액수이건 환영이라고. 초라한 봉투를 내민 손이 부끄러운 김에 서둘러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 쪽에서 문득 조그만 입구를 발견했어. 층계참을 이용해서 책을 전시하는 곳 같았지. 대개가 스치고 지나갈 위치에다, 실제로 그곳을 들르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어. 하지만 한적하기 때문에 들러보고 싶은 그런 곳. 아니나 다를까 고작 여남은 권의 책들 중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발견하곤 얼마나 기뻤던지. 손바닥 보다 조금 더 넓은, 두께 또한 왜소한 20위완짜리 소책자. 책장을 확 펼치는데 짧은 시가 눈에 들어왔어. 72쪽, 제목은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것이구나, 우리는. 슬픈 몸을 감추고 떨쳐 일어나는, 이것이 우리의 뿌리였구나! 정신이 버쩍 들었지. 난 이 시집을 찾으려고 여기에 왔음을 직감했어.

버스를 타자마자 책을 폈지. 「서시」는 졸업 직전인 41년 11월에 쓴 것이고, 졸업 기념으로 원래 『병원』이라는 시집을 출판하려던 계획은 「서시」를 쓴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로 제목이 바뀌었지만 출판은 좌절되었다는 것. 도쿄입교대학 영문과에 유학했다가 첫 여름방학에 용정을 방문한 것이 마지막 길이 되었다는 것. 아, 동생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던 당부는 혜안이었어. 1943년 징병영장 발부 와중에 체포되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2002년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발행. 용정의 조선족은 용정 땅에 유골로 돌아와서 묻혀있는 윤동주를 잊었고, 1985년에 연변대학 조문학과 교수와 와세다 대학 교수가 함께 윤동주의 묘를 찾았을 때까지도 그와 그의 문학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지. 다행히 용정중학교의 역사과 교사가 ― 언제나 어떤 한 사람이 중요하다 ― 그를 기억하여, 용정 그리스도교인 묘지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니. 지금은 묘소 뿐 아니라 생가도 복원되어 있고…… 그런데 우리 여행 일정에는 거기까진 포함이 되어있지 않았으니 서운할 뿐.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곰들을 보게 되었지. 반달곰의 수명은 25년쯤인데, 동방곰 사육기지에서 집단으로 사육되고 있었다. 총 1,600마리 규모를 자랑하는데, 태어나서 3~5년 사이에는 백두산에 자연 생육했다가 이곳으로 잡아들인다고. 게서 1년간 주 1회의 쓸개즙을 빼는 의무를 다하면 자연수를 누리며 살게 된단다. 죽을 때까지 쓸개즙을 뽑지 않고 자연수를 누리게 해준다니, 퍽도 인도주의적 발상이겠다!

코앞에서 바라본 거대한 곰들은 몸집이 큰 만큼 눈이 작았어. 하지만 말없이 우릴 바라보는 흐릿한 검은 눈알은 영겁의 물, 천지의 표면과 같은 물기에 젖어있었어. 마치 슬픔이 번져난 눈물처럼. 곰들도 울 거라 생각했어, 포유동물이잖아. 사람처럼 발바닥으로 걷는 모습이라니, 갇혀있는 그들이 지능이 낮은 식민지 인종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다 싶었어.

그렇게 해서 연길로 돌아와서 다시 대련으로, 이번에는 그곳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었지. ‘완다구어지판디엔’ ― 대련만달국제호텔은 23층의 최신식 건물로 객실은 383개나 된다는 대형호텔이었지. 숙박료는 60불 정도. 호텔에 투숙한 시간은 거의 11시였는데, 그 시간에도 밤나들이를 가는 일행들 때문에 복도가 떠들썩했지. 아침에 어쩌려고 그러는지, 세상엔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많음에 놀랐어.

어김없이 5시 반,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동료는 부스럭거리고 짐을 챙기고 있었지. 눈도 잘 떠지지 않은 채 집어 삼킨 아침 식사, 단체가 무섭긴 무섭다 싶었어. 늦잠꾸러기인 내가 단 한 번도 늦질 않았으니.

그래도 한 고비가 더 남았었지. 비행장으로 향하던 버스가 어떤 네거리에서 오랫동안 막혀 서 있게 되자 일행들은 조금 술렁였어. 빨리도 이륙할 수 있는 것이 중국항공 아니던가? 그런 불신도 없진 않았지. 무엇보다 우린, 한민족은 늘 조급해. 오랫동안 없었기에, 없음을 체감했었기에 핏속의 허기가 조급증을 일으키는 것 아닐까. 얼핏 풍요의 외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같을까, 곧 사라질 신기루일까 봐 두려운 것일까.

탑승수속을 마쳤을 땐 8시가 지나있었지. 8시 20분 발 비행기에 빠듯했어. 백두산 한 귀퉁이, 망연히 만져보았던 마른 흙의 느낌을, 검은 물 표면의 뭉클한 기억을 함께 할 작은 시집이 손 안에 있었지. 언젠가 고서점에서 1958년 발행된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을 건졌던 때의 뿌듯함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아픔 같은 느낌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쥐고 있었지. 흰 고무신이……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내 운동화는 나이키.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꿰입은 다리가 조금 민망했어.

이 헐렁하다 못해 벗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힘들게 떠본다. 속눈썹이 성기길 다행이다. 반쯤만 뜨고도 세상이 내어다 보이니까. 창 쪽에 걸린 커튼이 여린 연두색 햇살을 통과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시원한 공기는 초봄이라고 말하지 않고 뭔가 인공의 냄새를 풍긴다. 아래를 보니 넓은 흰 천이 내 슬픈 몸집을 가리고 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노란 경계석이 떠오른다. 나는 그것들을 넘어 물속으로 발을 내딛었던 것 같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거꾸로 곤두박질쳤고……. 나는 아직 기억이 살아있다. 느낌도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나 보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짙푸른 물기가 번진다. 천지에서 퍼 올린 검은 물이 범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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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학』 2014 봄호(통권 70)호, 49~66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3. 25. 23:54

 

「목소리」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졌구나, 라고 느껴졌다. 오늘 아버지와 나누시는 가벼운 대화에서 그랬다.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한다니까요.

빈 밥그릇 국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생소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집으로 가자고 작정한 것은 명절엔 더욱 허전해하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들 없이 딸 셋을 둔 부모님의 얼굴엔 딱히 썰렁함은 아니라 해도 뭔가 어색함이 어른거린다. 애써 괜찮다는 과장으로 포장되어 표피가 평상시의 부드러움을 잃는다. 부드러움을 잃은 주름은 갈라질까 말까 바스락거린다.

 

이번 설에도 막내 옥실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 사는, 미국인이 된, 미국인과 결혼한 옥실인 만일 한국에 온다더라도 설이 아닌 추석에나 올 뿐이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미국의 큰아버지에게로 입양되어 간 옥실을 어머니는 가슴에 두고 사실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지막 미토콘드리아의 전수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머니에게서 딸들로만 유전된다는 미토콘드리아 ― 막내는 정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름도 제이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둘째 은실은 늘 가까이 있다. 바리데기 ― 일곱 번째 얻은 딸은 아니나 부모님 곁을 유일하게 지키는 은실이 바리데기가 맞다. 언니와 막내에 끼어 치인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도 시쳇말로 다 못해서 그렇다. 은실은 고 1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너무 가까이서 겪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대학진학을 접었다. 하지만 일찍 결혼해서, 지금까진 우리들 중 유일하게 손자 손녀를 안겨 드린 효녀다.

 

나 ― 어쩌다 막내서부터 거꾸로 설명이 되었는데 ― 맏이인 나 한금실은 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그러하듯 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일직선으로 나갔다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땐 벌써 은실이 김실이 된 후였으므로, 나는 원래의 금실 대신에 한박사로 불렸다. 더구나 한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엔 어딘가 자랑 비슷한 여운이 깔렸다. 지금도, 그 한박사가 명예도 돈도 별로 들여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건 여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1944년생으로, 요즈음에 말하는 신중년 세대이시다. 일제 강점기 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그들은 일제 때 강제징집당한 146만 한국인의 숫자가 말해주듯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던 세대다. 또한 형제들을 사상의 갈등으로 잃기도 한 세대가 그들이다. 국제평화기금이 들어오던 때에는 갑작스레 경제무대에서 은퇴 당한 신중년 세대의 운명 ― 거기에서 아버진 자유로우시다. 교사는 강제 은퇴는 없었다. 대학 공부는 겨우 열에 하나나 했을 이들 세대에서, 아버지도 사범학교 졸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가 야간대학 과정을 밟아서 대졸에 합류하신 전설적인 분들의 하나이다. 다만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다. 2008년 은퇴하시기 전에는 딸자식이긴 해도 자식인 내가 좋은 자리를 잡을 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박사가 모교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은퇴 후 오륙년의 시간을 우울한 적응기로서 사시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묻지 마라 네 살 터울이시다. 6.25 때 기억은 없다 하시는데, 큰 이모는 엄마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담벼락에 붙어 선 채로 오줌을 줄줄 싸는 세 살짜리 겁쟁이였다고 놀리신다. 물론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겁쟁이란 느낌은 없었다.

 

엄마, 정말이세요?

뭘?

엄마 어려선 무지 겁쟁이셨다고?

느이 엄마 지금도 겁쟁이다.

엄마가 겁쟁이?

그래. 엄마가 뭐 딱히 하는 것 봤냐?

하루 종일 평생 하시는 건 뭐고요?

이런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지. 엄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하고 살다가 죽는 게지.

엄마는.

정말이다, 엄마는 한 것이 없다. 딸 셋 낳은 것 말고는.

우리 키우신 건 다 어떻고요.

키우다니, 그냥 너희가 절로 자란 것이지. 내가 뭘 했냐. 품을 팔아 과외를 시켰냐, 차를 태워 나르기를 했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달라졌다. 무심한 듯 말 속에 심지가 생겼다. 뭘까. 설 명절의 부담 때문일까? 설은 아무래도 세배 문화 때문에 공휴일 상관없이 길어지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떡국상이다. 그러려면 음식 수급도 절묘한 솜씨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어머니가 시장보따리를 여럿 챙기셨다. 내가 유럽에서 가져다드린 낡은 무명 홑겹 가방을 여태도 쓰시며, 그 안에 다른 보자기 가방들을 넣으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추운 체 하면서 어머니의 팔을 꼈다.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외사촌의 전화번호가 떴다. 팔을 풀고, 양손 손가락에 여러 개 시장보따리를 걸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실아, 오빠야.

아이쿠, 웬 일?

너랑 의논할 것이 좀 있어서.

나랑 의논을? 의논을? 어디 있는데?

그렇게 만난 외사촌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따끈한 아메리카노 잔에 손을 굽던 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커피 취향이 바뀌었네! 참, 곤충 연구는 겨울엔 좀 쉬는가?

명색이 학문에 여름 겨울이 있겠어? 금실아, 넌 그런데 왜 결혼 안 하냐?

그러는 오빤 왜 안 하는데?

거야, 나는 남자고.

뭐야, 여름 캠핑장에서랑 똑같은 레퍼토리네. 다른 이유를 대 봐!

외사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환상이 깨진 지 오래였나 봐.

환상이 깨져?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래.

외숙모를? 외숙모가 왜?

그때 왜, 우리 아버지 갑상선 수술 하실 때.

언제 적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술을 앞 둔 날 밤, 어머니는 병원 침상 곁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 주무셨어. 물론 나도 보호자 노릇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수술이……. 기분이 묘했어, 어머니가 고생 덜 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머닌 만일의 사태가 걱정도 안 되셨는지.

그거야, 아버지들이 씩씩하시잖아. 울 아버지 돌발성난청 치료하실 때도 열흘 넘게 아버지 혼자서 병원에 계셨는걸.

그건 좀 다르지, 난청하고 암이 비교나 되나? 또 그 뿐이 아니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하실 때도 좀 거북했어. 아버진 동위원소 캡슐 치료하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 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랬거든. 식구들이 다 같이 동위원소에 노출되느니, 아버지 혼자 계시다 오시는 것이 맞다고. 생수병 둘을 챙겨 호텔로 따라나서는 날 아버지는 말리셨고, 어머닌 화까지 내셨다니까, 나더러 속이 없다고! 그 세월 지나고서도 부부라는 것이 영원한 평행선이고 남남일까, 난 혼란스러웠어.

그만 둬. 외숙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이고. 다 지난 일을 왜 그래. 외삼촌도 건강하시면 되었지. 오늘은 뭔가 다른,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아니었어?

 

외사촌은 더욱 뜸을 들였다.

그게 글쎄.

오빠 뭐? 누구 사귀는 거야? 집에선 반대하고? 아님 선 자리 나온 거야?

그게 글쎄.

글쎄 라니, 어떤 여자인데? 같이 살기라도 해?

살기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신경이 쓰인다는 대상은 …… 외사촌은 아예 더듬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알고 보니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이웃 학과의 연구전임이 된 친구인데, 겨우 한 학기를 멀리서 보고 지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상쾌함과 긴장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단다. 그가 먼저 앉아 있다가 외사촌을 보며 갸웃하고 인사하는 동작, 함께 온 사람이 있더라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앞을 보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사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란다. 해서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판기 커피를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여러 번이었단다. 종이컵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다가 눈을 치뜰 때면 왼쪽 눈썹이 더 올라가고, 미소 또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더 밀려 올라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같은 이공계면 철저히 다름의 매력 그런 것도 아니고.

취민 달라. 나는 사진을 찍으러 숲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그 친구는 사진엔 관심이 없더라고. 대신 영화광이야, 안 보는 영화가 없어.

오빠도 영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난 근년 들어선 뜨악한 편이었어. 그 친구랑 몇이 어울려 꼭 한번 함께 갔었지. <러시: 더 라이벌> ― 에프 원 그랑프리 실화라고, 뜨거운 가슴이 있는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영화라고 부추겨서. 헌데 스크린 속의 무서운 질주나 크리스 헴스워스의 매력 대신 그 친구 옆얼굴만 훔쳐보게 되어 못할 짓이다 싶었어.

병이 깊네.

병이라고? 넌 유럽형 인간 아냐?

유럽이 왜 나와, 여기서?

네가 공부하던 파리는 자유의 심장 아냐?

웬 자유? 평등, 박애까지를 다 말하려면 또 몰라.

그게 아니라, 파리에선 동성애자 시장에, 또 대통령들도 사생활은…….

사르코지나 올랑드? 우리 눈으론 좀 고약하지. 난 성적으로 그렇게 자유분방한 쪽이 못 됩니다요, 오라버니!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석 달 만에 젊은 연예인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 것 쯤 아무도 상관 않았었지, 프랑스 사람들은.

오빠,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어? 20년간 살았던 부부였어, 것도 이미 재혼으로. 그 사이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또 새 여자도 애 엄마고! 아이들 어지럽게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금실이 너 고리타분 맹추구나. 그럼 지금 대통령한텐 더 욕을 해대겠네!

남의 인생에 무슨 욕까지야.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심해. 결혼이 아니고 동거관계라서 그러는 말이 아냐. 애를 넷이나 두고서도 첫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 여잔 사회당 당수였어. 차라리 그 여자나 대통령이 될 일이지. 암튼 따로 애가 셋 있는 두 번째 여잔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있었지, 잠깐. 그러다 또 여배우야? 뇌에서 분비되는 짝짓기 신경물질의 유효기간만 지나면 상대를 갈아치워? 정치적 역량은 역량이고, 난 그런 사람들 너절하다고 생각해. 섹스가 뭔데? 인간사 필수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갈아치우는 게 능사는 아냐. 몸도 맘도 그렇게 둔갑을 한다면 그게 철새지 뭐야.

새는 또 왜!

 

내가 잠깐 실수를 했다. 동물학 전공의 외사촌에게 새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전문가적 지식이 쏟아질 판이 되었다. 나는 커피 잔을 얼른 들어서 식어버린 나머지를 홀짝거렸다.

 

 

갈매기도…….

뭐야, 곤충박사님께선 새를 능멸하는 것에도 분개하시나? 갈매긴 또 뭔데?

분개까진 아니지만, 갈매기도 동성애를 인정받는 세상에…….

동성애? 갈매기가 동성애를?

그래, 갈매기의 동성애.

너무 멀리 간다, 오빠.

아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들 심심찮게 있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둥지를 틀어서는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

알을 낳는다고? 암컷끼리?

아니, 미수정란이나 단위생식 그런 게 아냐.

그럼, 알은?

살림은 암컷 두 마리가 차리지만 짝짓기는 각각 주변의 수컷들을 만나는 방식이지. 어쨌거나 번식에 성공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암컷들의 공동생활이지 무슨 동성애란 이름을 붙여?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오빠, 동성까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 동성애야? 그건 아니지. 암수 간에 사랑해서 살림을 차리고 자식 낳자고 성애와 교접이 따르는 것 아냐? 모르긴 몰라도.

로이와 사일로 이야기도 몰라?

누군데?

맨해튼 동물원의 펭귄들, 만화도 나왔는걸. 그 둘은 암컷 펭귄들일랑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뭐냐, 절정행위도 한대, 목을 감고 그러는 성관계를.

설마 아기도 낳았대?

또 아기 이야기냐! 돌멩이를 알처럼 품으려고 해서 유정란을 넣어주었더니 서른 날 넘게 품어서 알을 깨우고 또 길러냈대. 완전한 입양가족 아냐?

글쎄. 입양가족 쪽은 맞지만 부부도 부모도 아냐, 분명.

부모는 아니지만 동성애 양친!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천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녹청색 계열의 체크 패턴의 무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오빠, 난 이런 무늬가…….

소용없었다. 외사촌은 이야기를 접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다.

 

 

동성애 ― 외사촌의 생각으로 자신은 동성애 성향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데……. 대체 뭐냐, 이건?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외사촌은 아마도 긴 싱글 기간을 보내는 나 또한 그러한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지 탐색하는 눈치였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리에서 한 때 젊음을 보낸 내가 상당히 진보적일 것이라 믿었기에 이해받기를, 뭐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맹꽁이 답답이다. 엄격했다, 그 부분은.

 

외사촌은 알리바이 모양 역사 속 유명인들의 동성애 취향을 꿰고 있었다. 다빈치의 젊은 시절의 ‘불경한’ 행위들, 미켈란젤로가 미소년에 보냈던 소네트며 젊은 귀족에게 헌신했던 만년의 애정, 차이코프스키의 조카에 대한 비뚠 열정. 랭보는 어땠는데? 그건 부정 못할 것이라고 외사촌은 들이댔다. 푸코는 어떻고! 심지어 여자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사포의 레스보스 섬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팅게일도 사촌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거절당해서 전장으로 떠나버렸다는 둥. 외사촌은 마치 공부라도 해 둔 양,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신화며, 소위 그리스 사랑 ― 성인과 소년 간의 사랑 ― 또는 고대 아시리아의 보편적 동성애 문화까지 증거로 들이댔다.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때의 사랑은 분명 우정이 심화된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을 사랑하듯 동료의 철학을, 철학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두고도 갑론을박이었다. 외사촌은 플라톤의 동성애 증거라 했고, 나는 바로 그 말이 동성애가 아닌 정신적 우정에 관한 증거라고 했다. 한 문장이 두 상반된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와 가능한 번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행위는, 그러니까 의사 성행위는 암컷과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결코 성애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몇 명의 잘난, 똑똑한, 개성 있는 유명인들이 동성애를 표방하고 경우에 따라서 결혼예식을 한다고 치자. 사실 파리 시장 들라노에만 해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자임을 표방하고도 당선된 게 맞다. 2,3년 전 파리에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50만 명 시위에 들라노에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며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력한 인사들의 성정체성이니까 특별히 존중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 주장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중에 점점 더 완고해져갔다.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 이게 결혼의 사전적 정의다. 헌법에도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한다고 된 것 같다. 불문율에서도 남녀 양성이 전제다. 남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을 하든, 동거생활을 하든, 흔치는 않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도. 그러나 남녀의 결혼 또는 동거와 동성의 동거를 동일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외사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치 않은 독설에 찔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고?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를 위한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가 이루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의미에서 동성결합을 원하는 생물체는 특이종이다. 어쩌면 불완전하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또는 양성애는 ― 난 그런 이분적인 용어 자체의 도식이 틀렸다고 보는 쪽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것이, 둥근 거울과 네모난 거울 중 어느 것을 살까 하는 소녀의 망설임이라거나, 점심에 설렁탕을 먹을지 순두부를 먹을지 망설이는 직장인의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울은 거울이고 밥은 밥이고, 그런 건 늘 둘 다 똑같은 가치이니까. 하지만 동성애란 ― 성애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암수의 결합이 껄끄럽고 내키지 않은 대신, 동성을 그리워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동성애라고 할 뿐이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 동성애. 뭐라든지 단어는 가능하겠지만, 원래의 성애와는 성격이, 질이 다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생산적 짝짓기를 변호했다. 생물학자 외사촌 앞에서 점점 더 생물학 이야기로 빠졌다. 적진으로.

동성결합은 유전자 복제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복제라는 원초적 욕구를 모르는, 회피한, 버린 생물체들이 벌이는 사랑은 뭔가 자연의 범위를 벗어난다. 키가 병적으로 너무 작아도 커도, 정상 범위를 벗어나도 똑같이, 돈이나 생산성이 많건 적건 똑같이 그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이더라도 인격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최근 교황님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말하는 성 소수자 동등권 운운도 사회적 인격적인 차별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성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의 비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 ― 프랑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때 파리의 동성애자들 시위 때. 어떤 종의 모든 생물체가 동성애 성향이라면 결과는 그 종의 도태다.

 

도태? 그 단어에서 외사촌은 완전히 함구했다.

나는 불확실한 전문용어까지를 동원해가며 개똥철학을 읊어댔다.

밈 ― 문화적 유전자라. 복제 과정에서 진을 살찌운다는 밈이라는 인자, 이 밈의 세력이 대단한 건 증명되었지. 우리가, 수백만 인간들이 예컨대 ‘신’이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처럼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공유하게 된 것들이 그런 작용이라지? 그렇다고 동성애의 밈이 인류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 손해가 나는 방향으로 진화할 리가 없으니까.

 

외사촌은 눈도 껌벅거리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녹음기처럼 지껄였다.

알게 모르게 서양 흉내쟁이인 우리들,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글쎄. 물론 동성 간 혼인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아니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것이 법으로 인정받는 서양 어느 곳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양의 결정이니까 법이니까 옳은 것은 아냐. 옳지 않은 법을 몰라서 그래? 단 기간에 만들어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 전쟁도 법의 이름으로, 인종청소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어. 법 이야긴 접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 ― 소중한 말이지. 정치적 소수의견, 생물학적 약자, 모두 강한 다수가 배려해야할 대상이지.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 그가 그 일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것이 자랑은 아냐. 어쨌거나 프랑스에선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벌금형이 없어졌지, 120년 동안 ‘사회적 장애’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과했던 법이 사라진 거야. 곧 이어 정신병 리스트에서도 동성애가 삭제되었어. 그렇다고 육신이, 정서가 완벽한 건강상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젊고 건강한 암수는 원초적 본능으로 짝짓기를 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넌 뭐야, 넌 왜 이렇게 사는데? 짝짓기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라면서?

침묵하던 외사촌이 내 약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평소에 정리가 된 견해도 아닌 말들을 즉흥적으로 외사촌에게 떠들어대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침묵에 외사촌도 머쓱해졌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빈 커피 잔을 들기도 어색해진 나는 테이블보의 녹색과 짙은 청색 사이에 섞여 짜인 버건디 색상의 가느다란 올에 집중해서 비율을 셈하려고 했다.

 

 

아냐. 아니거든!

건너 편 옆 자리에서 제법 큰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다 같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빠. 아녜요. 쟤네들 좀 봐.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남자애 같은 남자애, 여자애 같은 여자애가 드물어. 유니섹스인지 옷도 저렇게 비슷하게 입고 다니지. 우리 둘 다 쟤네들 쳐다보면서 그게 여자애 목소리라고 느꼈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쪽이 여자애라니까.

그게 뭐.

남자들 입장에선 여자들이 버거워졌을 거란 말이지. 요즘 괜찮은 남자가 되려면 돈이 엄청 많은 집안이거나 빵빵한 직업이 있거나, 그러고도 키가 커야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갖춰? 다 갖췄다고 해도 연인에게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다고들 하지. 바꿔 말해도 그래. 괜찮은 여자란 돈 많은 집 딸이거나 최소한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 있다거나, 그러고도 예뻐야 하는데…… 누가 그래. 다 어렵지. 이성에게 들이댈 자신들이 없어진 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지.

 

오빤 대꾸를 않는다.

아님, 저쪽을 봐. 쟤네들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차렸네. 하지만 뭣들 하고 있나 봐. 각자 휴대폰 들여다보며 뭘 하느냔 말이야. 뭘 하러 만나서는.

우리처럼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음 아저씬가?

그래,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지.

그렇게까지 자조적일 필요는.

자조적이 아니라 현실이 우울하게 하지. 요즘 뉴스 안 봤어? 세계 부유층 85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가진 것과 같다는데 뭐. 1%의 부유층이 50% 빈곤층의 65배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거야. 인구 절반이 버러지야. 절반만 그런가. 아래 절반 보다 나아보았자 상대적 박탈감으로 꼬여있어, 마음들이. 뭔가 자연스러워야 생명력이 넘치고 짝짓기도 하고 싶고 그러지, 후손 번식에 대한 의욕이 솟구칠 것 아냐.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로 위로받고, 가능하다면 유사 성애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부의 불평등 문제까지 가냐! 넌 문학연구가 아니라 사회학 했어?

부의 불평등은 ― 전공과 무슨 상관? ―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부패를 조장한다는 말이 맞아. 부의 완강한 대물림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살 맛 나지 않는 세상이지.

살 맛 나지 않아서, 이성에게 구혼하지도 후손을 구하지 않고 동성 사이에서 안주한다?

뭐,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엔 교육 자체를 포기하고 등 돌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잖아.

그래, 니트라 그러더라. 낫 인 에듀케이션, 엠플로이먼트 오어 트레이닝.

우리나라에선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니트족 통계가 70만 명도 웃돈다고 본 것 같아. 한줄 서기에 아이들이 죽어 가. 옆자리 짝꿍도 경쟁상대로 보라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를 도망치는 거야. 대학에서도 희망이 없어 자퇴하기도 하고. 자괴감이나 대인기피증은 당연, 사회구조 전체에서 비껴서있는 것이지. 가부장제로 받침 되는 건전한 사회조직? 어림없어. 반사회적, 아니, 비사회적인 건 틀림없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거야. 또 교육을 많이 받음 뭐해? 정규직이 안 되는, 못 되는 점에서 우리라고 다른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체제에 들어가? 결혼이 말이나 되냐고. 분업시대 이후론 싫든 좋든 어떤 톱니든 톱니가 되어야 겨우 사는데 말이야.

톱니 인생. 그래 정상적인 톱니만 되어도 다행인 것을.

틈새에도 끼이지 못하니까 다른 돌파구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우린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불어났는데. 밖에 어둠이 내려앉자 커피숍 공간이 살짝 위로 솟은 느낌에 어디선가 스쳐 오는 바람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린 ― 뭔가 위안이 그리운 시대를 사는 것 같아.

그래. 위안이 그리운 세대, 누가 누굴 위로할 줄 모르는 세대.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세대. 간혹 경쟁을 피하게 되면 우정도 사랑이라 믿는…….

 

 

사랑과 우정을 혼동한다고?

외사촌은 눈을 흘겼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구별 못한다는 말에 발끈했나 보았다.

넌 감정의 구분이 확실해서 위안은 그립고 누군가는 필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혼자 버티는데?

혼자, 그래 혼자 잘 지내는 편이야. 하지만 글쎄, 난 요즈음 희한하게 아기를 갖고 싶어. 그건 충동이라기보다는 딸을 낳고 싶은 소망, 낳아야 하리라는 의무감에서. 하지만 수컷이 없네! 암컷 갈매기나 같구나. 하긴 무슨 수로 애를 키워? 나 혼자도 버거운 세상에서. 많이 말고, 그냥 먹고 사는 만큼도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이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아버지 감을 낚겠다고?

감으로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해. 사랑? 가슴이 뭉클하게 아프지는 않아서 사랑은 아니려나? 또 짝짓기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겠지만.

뭐야, 넌 그럼 여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처음 남자가 나빴어. 하필이면 극장 안에서 손을 잡았지 뭐야. 난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손을 잡히긴 싫었어. 그 무렵 어떤 소설을 읽었었는데, 자연 속에서, 이를테면 풀밭에서 햇볕 아래 누워서 혼자 오르가즘을 느낀 소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 그런데 극장은 어둠의 충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어. 사랑은 어둠이어선 안 되는 것 아냐? 암튼 어둠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소름 돋았어.

밝은 사랑?

그래, 밝은 이미지의 남자. 난 분명 남자가 필요해, 내 딸을 위해서.

딸은 무슨. 딸을 낳으라는 보장은 있고?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원한다니 세상 참.

그래, 바로 임신이야.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적 충동은 뭔가 빗나간 것일 게야. 그러니 동성애도……. 맞아, 임신이 좋은 비유야. 임신이란 100%이거나 아니거나 그거야, 누군가 절반만 임신일 수는 없어. 성교도 그래,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교란 반쯤만, 그러니까 성교가 아냐.

생물학자 밥 벌어 먹겠느냐, 어디!

미안해, 공자님 앞에서 문자네 정말. 하지만 사랑은 임신과 같아, 100%이거나 아니거나. 절반만 사랑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야. 사랑에 어떻게 양이 있어. 양이 있는 것이라면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길 가질 거라며!

아길 가지려고 사랑하겠다니까, 온이 사랑할 거야. 만일 누군가를…….

누군가를 만나면? 누군가를? 누구를?

그게 글쎄.

넌 말 다르고…….

아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오빠, 오늘 이야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해 두자. 오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야, 어쩜 나도. 부부가 되려면 팔천 겁의 인연이 필요하댔잖아.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진.

겁?

그래, 겁.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사방 1유순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

유순?

소달구지가 하루 가는 거리라니까 최소 40리라고 하지.

평방 40리?

오빠, 내버려 두자, 단위는 잊고 그냥 시간에 맡겨 두자고. 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설에 또 오기 어려울 텐데 울 아버지 뵙고 가야지.

오늘은…….

가, 가자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쪽은 내내 나였다. 왜 목소리를 높였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소리 뿐, 말에 전혀 자신은 없는 채로.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 자체가 말의 알맹이에 자신이 없다는 신호다. 아니면 진실을 감추려거나.

 

어머니는 요즘 왜 목소리를 높이실까. 혹시 감춰둔 심지가 뭘까? 집을 향하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설을 앞둔 일시적 상황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 만드시면서 짜증스러운 내색을 보이신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늘 그러셨다. 설이래야 수십 명 씩 손님이 오는 대단한 집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북적대고 수선스럽고, 그래도 떠들썩하고 화기 넘치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받쳐주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있는 존재라고 믿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명절이면 딸들과도 다 함께 하지 못하는 허전함에 더해 아들의 부재를 서러워하실까? 민망해 하실까? 아버지에게 미안함 대신, 그 미안함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아들 없이 지내야 할 차례가 다가오면 우리들 몰래 한숨을 쉬시지는 않을까? 그 한숨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극할까? 유전자 복제에 실패하시고서도 한숨도 마음대로 못 내쉬는 울 아버지.

 

 

아버지이, 선준 오빠 왔어요.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 아버진?

내가 느이 아버지 어디 가신 줄 일일이 다 안다니?

어찌할꼬. 어머니의 목소리엔 여전히 싸한 여운이 감돌았다. 울 어머니의 목소리에 심지를 심어 넘은 범인의 정체는 뭘까. 그냥 세월일까. 내 눈으로는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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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문학』 2014. 3,4월호(vol. 119), 국제펜한국본부, 125~14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2. 28. 22:58

2014년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  > 전문예술창작지원

  

광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사업으로

공적으로는 <펜광주> 12호, 개인적으로는 장편소설 발간에 지원했다.

2월초에서 기다리던 2월 말이 되었다.

<펜광주>는 해마다 지원 받아오던 사업이었으므로 걱정이 없었지만.

개인적인 지원은 불안했었는데............. 펜 사무국장의 전화를 받고 뛸듯이 기뻤다.

28일 밤, 늦은 시간의 전화였지만 더없이 기뻤다.

기쁜 마음에 여기 차례를 올려 본다. 원고지 1200 매, 글자수는 20만 자를 넘는다.

 

 

『표현형』

 

  • 배달민족
  • 한국어
  • 일기
  • 은실
  • 파도소리 
  • 초혼장
  • 포이동 266번지
  • 쥐도 인간이다
  • 삼포세대
  • 표현형

 

 

 

글자, 글자들이, 내가 만들어낸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여기저기 폴더에 파일에 숨어서 죽은 듯 쑤셔 박혀 있다. 1975년생인 나는 남들 따라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공부했고, 소위 해외파 박사가 되어 강단에 섰다. 보름달 인생이었다. 하지만 기회의 가능성이 줄자 점점 절망했고, 어차피 컴퓨터에 앉아 옆길로 새며 숨길을 텄다. 하릴없이 동류항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유전자형과 표현형 사이를 의아해하며 감탄하곤 했다.

갑작스레 나는 서둘기로 한다. 죽어 널브러진 글자들을 퍼 내버리자. 이 이상한 대리 역할 -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관해서 어설픈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을 살기를 시작해야 한다. 나의 미토콘드리아가 나에게서 이대로 끝장나리라는 상상이 조금 괴로웠을까.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에게 뭔가 빚을 진 느낌이랄까. 무엇인가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딸을 낳아야 한다. 낳고 싶다. 글을 버리고, 너무 늦기 전에.

- 한금실, 가공의 저자

           

             이것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의 변이다. 주인공이자 글쓴이.

             출판사는 푸른사상사 - 작가교수회 회장 우한용 교수님 덕분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17. 09:03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 - 2013년도 총회

 


 

2013년 12월 14일 빛고을국악전수관 공연장,

총회와 국제펜광주문학상 시상에 이어 펜 한가족의 밤 행사가 있었다.

해마다 비슷한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신임 회장에 선출된 것!

 

 

 

 수락 인사말씀 - 오른 쪽에는 2부 펜문학수장자들 오소후 , 전숙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 회장 수락 인사말씀

 

  오늘 2013년 12월

  광주전남 문단사에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백배나 많은 제가 감히 이 자리에 선출되어 수락인사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국제펜광주광역시위원회는 오늘 『펜광주 11호』 발행이라는 역사를 지니고 있고, 오늘까지 10회에 걸쳐 14분의 국제펜광주문학상 수상자를 내었고, 또 무엇보다 15회의 영호남문학인교류활동을 추진해오고 있는 등, 명실공히 한국 문단에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단체를 문단 경력도 짧고 사회성도 부족한 제가 한 동안 노를 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만 앞섭니다.

  돌이켜 보건대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는 저에게 글쟁이로서의 글을 안내해주고 격려해준 유일무이의 단체였습니다. 서생으로 살던 제가 제 글쓰기에 홀렸을 때 저는 처음 무작정 국제펜에 가입하고 싶었습니다. 글쓰는 사람이면 당연히 국제펜에 가입해야한다고, 연대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서 어떻게든 사회에 작용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소원대로 국제펜한국본부와 국제펜광주광역시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발표는 물론 2012년 가을에는 경주에서 열렸던 국제펜인터내셔널 대회에 일주일간 참석할 수 있었으니, 첫 꿈은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거운 짐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걱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당백으로 애정을 쏟아내어 국제펜광주를 지켜오신 우리 회원 문우 여러분들, 온갖 정열을 다 바쳐 그 기틀을 잡아 올려놓으신 김종 명예회장님과, 전 작품 한영대역이라는 전무후무한 회지를 발간해 오신 김영관 회장님의 혁혁한 활동들을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장담은커녕. 마치 다음 훌륭한 집행부가 성장 중에 있기 때문에 임시로 수렴청정이나 맡아야하는 기분으로, 어제와 내일을 잇는 딱풀의 기능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심정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미래의 집행부가 성숙하면 곧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비겁함을 이겼기에 감히 이 짐보따리를 맡게 될 모양입니다.

  존경하는 회원님들, 문우 여러분들, 부디 여러분의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에 지니신 애정을 속에만 담아두지 마시고 적극 발휘하시어 이 딱풀 집행부가 굳어버리지 않게 감시도 하시고 도와주시면서 내일을 기약하시게요,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잊지 마셔요, 오늘의 집행부와 함께 하셔야 여러분의 내일이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12월 서용좌

 

 

펜문학 수상자 전숙 -

전남여고 42회 후배이자 중학교 시절 내가 잠깐 영어 선생님이었으니 제자이기도.

윤숙희, 김미석, 허만진, 황인미, 전숙..... 김상현, 조숙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12. 22:52

 

서용좌 작가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
광주문인협 내일 시상식

2013년 12월 11일(수) 00:00 광주일보
 

광주문인협회(회장 노창수)가 주최하는 제26회 광주문학상 시상식과

제6회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 시상식이 12일 오후 6시 용산동

삼영웨딩홀에서 열린다.

광주문학상 수상자는 시 부문 조숙형·이춘배 시인이, 시조 부문 김산중 시인이,

수필 부문에는 탁현수 씨가 선정됐다. 그리고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 수상자는

서용좌 작가(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가 선정됐다. 작품은 ‘광주문학’ 66호에

실린 ‘포이동 266번지’.

한편 이날 시상식에는 시낭송 및 광주문학인의 밤 행사도 함께 열린다.

문의 062-227-0811.

 

 

 


제26회 광주문학상 수상자 선정

2013년 12월 11일(수) 무등일보



 

 

 

 

 

 

 

 

 

 

 

 


 

 

 

 

 

 

 

          조숙형·이춘배·탁현수·김산중·서용좌씨

조숙형·이춘배 시인이 제26회 광주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발표됐다.

광주문인협회(회장 노창수)는 10일 올해 광주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두

시인을 선정했다. 수상작은 조숙형 시인의 시집 '붉은 카펫', 이춘배 시인의

시집 '하얀 강 푸른 별이다.
또 수필 부문에 탁현수 수필가의 '조화를 위한 조율', 시조 부문에 김산중

시인의 '무돌길 따라'가 수상작으로 확정됐다.
올해의 작품상에는 소설가 서용좌씨의 '포이동 266번지'로 결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오후 열린다.

 

 

 

 

 

 

 

 

 

 

 

 

 

 

 

 

 

 

 

 

  수상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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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 수상 인사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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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늦어서 죄송합니다. 피치 못한 사정이 하필 오늘에 중복되어 이제야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못 오는 것은 정말로 예가 아니다 사료되어 불참대신 지각을 무릅썼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늘 2013년 12월 12일, 오로지 글쓰는 일에 전념해 오신 동지 여러분들 앞에서 부끄럽게도 가르치기와 글쓰기라는 이중 얼치기 생활을 해왔던 제가 감히 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되어 어리둥절하면서도 한껏 기쁩니다.

  이 상은 아마도 제 글쓰기에 대한 상이 아니라 꼭 써야 할 것을 썼기에 주시는 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문학 2013년 봄호, 통권 66호』에 기고했던 「포이동 266번지」는 사실 저로서는 혼신을 더욱 기울인 작품이었습니다. 포이동 266번지, 지금은 공식적으로 개포4동 1266번지, 속칭 재건마을을 아십니까. 이곳이 주목을 받은 것은 2011년 6월 그곳의 화재 때문이었습니다.

  1981년, 자활근로대란 이름의 45명을 이주시켜 경찰을 지도관으로 두어 통제하던 곳, 나중에는 베트남 참전 상이용사들, 양재천 주변의 넝마주이들을 이주시키면서, 매번 “이곳이 당신들이 살 터전이다.”라고 약속했던 정부와 강남구청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재건마을에 화재가 나서 총 95가구 중 75가구가 전소했지만, 화재 후 몇 달 씩 수거물을 방치해둔 채 임대주택으로 이전을 종용한답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 임시로 보증금 300에 월세 6만원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 누가 어떻게 무슨 돈으로 신축하련다는 임대주택으로 이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떠올렸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대로 문학의 스승격인 독일 작가 고 하인리히 뵐의 외침을 기억해냈습니다. “문학은 분명코 사회에 의해 쓰레기로, 경멸적이라 선언된 것만을 그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던 경구를 잊지 말자고. 사회에 의해 쓰레기로 선언된 것, 또는 경멸적으로 간주된 것을 그 고결성에서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작가의 글쓰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 오늘 이 상의 의미는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 회원들께서 스치고 읽지 않으셨던 포이동 266번지」를 이 상을 계기로 다시 찾아 읽어주신다면, 그것으로 이 상의 의미는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정신하겠습니다.

 

                                                                             2012년 12월 서용좌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9. 00:49

 

 

 

 

 

 

이 작품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제목의 '스파르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테르모필레 전투를 연관지어 보는 사람도 없다.

번역 손을 놓았다가......의무감에서. 

 

 

 

 

 


 

 

 

 

 

길손이시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하인리히 뵐 원작

 

 

  차가 정지했을 때 모터는 잠시 더 돌아갔다. 바깥 어딘가에서 문이 와락 열렸다. 깨진 창유리를 통해 빛이 차 안으로 떨어졌다. 이제 보니 천장의 전구가 찢겨나갔다. 전등의 나사선만 나사입구에 붙어있었다. 유리 파편이 붙어있는 가물거리는 철사 줄 몇 올에 불과했다. 그러다 모터가 멈췄다. 바깥에선 누군가 고함 소리가 들린다. “사망자는 이쪽으로, 사망자들 데려온 거요?”

  “빌어먹을, 여긴 등화관제도 이젠 안하나?” 운전수가 되받았다.

  “등화관제가 뭔 소용이여, 온 도시가 횃불처럼 불타고 있는데.” 그 낯선 목소리가 악을 쓴다. “사망자 있냐고? 묻고 있잖아?”

  “모르오.”

  “사망자는 이쪽으로, 듣고 있소? 다른 자들은 층계 위쪽으로 미술실로, 알겠소?”

  “예, 예.”

  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다른 자들에 속했고, 사람들은 나를 층계 위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희미한 불빛의 긴 복도로 갔는데, 벽에는 녹색 칠이 되어 있었다. 구부러진 검은 색의 옷걸이 못들이 벽에 붙어 있었고, 6에이, 6비라고 쓰인 에나멜 팻말이 붙은 문들이 있었고, 이 문들 사이에 검은 테두리의 유리액자 안에 포이어바흐의 메데이아가 걸려있는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5에이, 5비라고 쓰인 문들, 그 사이에는 가시 뽑는 소년의 상이 신비한, 불그스레 빛나는 사진이 갈색 액자에 들어 있었다.

  층계 입구 앞 중앙에 있는 큰 기둥도 거기 있었고 그 뒤에는 길고 좁게, 기이하게 만들어진 석고로 된 파르테논프리즈 모형이 누렇게 빛을 내고 있었다, 진짜로, 고풍스럽게. 그리고 모든 것은 사필귀정, 고대 그리스의 중장병이 나왔다. 화려하고 위험스럽게, 깃털장식으로 수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계단부 까지도, 이젠 노란 칠이 되어있는 벽에 모두가 순서대로 걸려있었다. 대 선제후들부터 히틀러까지…….

  그리고 거기 좁고 작은 발걸음 중에, 내가 마침내 다시 한두 발짝 들것에 그대로 누워있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특히나 아름다운 특히나 위대한 특히나 화려한 노 프리츠의 사진이 있었다. 담청색 제복을 입고, 빛나는 눈과 크고 황금으로 번쩍이는 가슴에 달린 별모양도.

  다시금 나는 비스듬히 들것에 누운 채 인류의 초상들 사이로 실려 지나갔다. 거기에는 북구의 함장이 독수리눈과 멍한 입을 하고 있었고, 모젤 강 서안의, 약간 마르고 예리한 여인, 양파모양 코를 한 동방의 찡그린 얼굴, 키가 크고 목젖이 튀어나온 산골 배경 영화 프로필, 그 다음엔 다시 복도가 나왔고, 나는 몇 걸음을 다시 들것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운반병들이 두 번째 층계로 오르기 전에 큰 황금 철십자훈장을 위에 붙이고 돌로 된 월계관을 쓴 전몰장병기념비가 보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무겁지 않았고, 운반병들은 서둘렀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나는 열이 높았고, 온 군데가 아팠다. 머리도, 두 팔도, 두 다리도, 그리고 심장은 미친 것처럼 뛰었다. 이런 열 속에서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인류의 초상들을 지나쳐갈 때 이번엔 모든 다른 것들이 나왔다.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셋이 얌전하게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신기한 모조품으로, 완전히 노랗고 진짜처럼, 고대 풍에다 위엄을 갖추고 벽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모퉁이를 돌 때에는 헤르메스 기둥도 나왔다. 복도 맨 뒤쪽에는 - 복도는 이 부분에서는 장밋빛 빨강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 아주 맨 뒤쪽에는 제우스의 찌푸린 얼굴이 미술실 입구 위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제우스 상은 아직 멀었다. 오른 쪽으로는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하늘을 온통 붉었다. 검고 두터운 연기구름이 장엄하게 흘러갔다……

  나는 다시 왼쪽을 보아야 했다, 오1에이와 오1비 문들 위쪽의 현판들을 보았고, 갈색의 곰팡내 나는 문들 사이에서는 황금색 액자에 담긴 니체의 코밑수염과 코끝만을 보았다. 그럴 것이 그림의 나머지 반은 쪽지로 가려져 있었는데, “경상 외과”라고 쓰인 쪽지가……

  만일 지금, 나는 스치듯이 생각했다…… 만일 지금…… 그러나 또 토고의 그림도 있었다. 화려하고 커다란, 오래된 상처처럼 납작한, 화려한 복제품이, 앞쪽으로 식민관사들 앞에 흑인들과 무의미하게 총검을 들고 있는 병사 앞에, 무엇보다도 완전히 자연에 충실하게 그려진 바나나 더미들이 있었다. 왼쪽으로 한 더미가, 오른 쪽으로도 한 더미가, 그리고 오른 쪽 더미의 중간 크기 바나나 위에 거기 뭔가 새겨져 있었는데, 내가 직접 거기에 뭔가를 끄적거려 넣었던 게 틀림없는데……

  그러나 이제 미술실의 문이 확 열리고, 나는 제우스 흉상아래에서 흔들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난 더 이상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술실은 요오드며 오물 냄새에 두더지와 담배 냄새가 났다. 그리고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담배 한 대 입에 물려주세요, 왼쪽 주머니에 있어요.”

나는 어떤 누군가가 내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성냥개비에 불을 붙였고,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렸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증거는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고등학교마다 미술실이 있는 것이고, 초록색과 노란 색으로 칠해진 벽들에 휘어진 낡은 옷걸이 못들이 있는 현관들이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우리 학교에 와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메데이아가 4에이와 4비 사이에 걸려있다고 해도, 니체의 코밑수염이 오1에이와 오1비 사이에 있다고 해도. 틀림없이 어떤 규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그것이 걸려있어야 된다고 지정해 놓은 훈령이. 프로이센 인문계 고등학교를 위한 경영지침이. 즉 메데이아는 4에이와 4비 사이에, 가시 뽑는 소년은 그 자리에,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키케로는 복도에, 니체는 저 위 학생들이 철학을 배우는 그곳에 붙여놓으라고. 파르테논 프리즈, 토고에서 온 현란한 그림도. 가시 뽑는 소년과 파르테논 프리즈는 마침내 훌륭하면서도 낡은, 수 세대를 지나오면서 간직된 학교의 필수소장품이 되었다. 그리고 바나나 그림 위에다 낙서를 하려는 발상을 가졌던 것이 비단 나 하나뿐일 리도 없었다. 토고여 영원하라! 라고.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농담들은 늘 같은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열이 있다는 것, 내가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통증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차 속에서까지는 그게 아직 심했었다. 차가 작게 패인 도로들을 지날 때다마 나는 소리를 질러댔었다. 큰 분화구는 더 나았다. 차는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마치 배가 파도 사이 물고랑을 타듯이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이 깜깜한 곳 어디에선가 내 팔에 들이밀었던 주사가 이제는 듣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바늘이 어떻게 내 피부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지, 저 아래 다리까지 어떻게 뜨겁게 변하는지를 느꼈었다.

  그게 그럴 수는 없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거리를 차가 달려왔을 리가 없다, 거의 30킬로미터를. 무엇보다도 너는 느끼지 못하잖아, 어떤 감정도 네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잖아, 다만 눈이 그럴 뿐, 어떤 감정도 네게 말을 해주지 않잖아, 네가 너희네 학교에 와 있다고, 네가 겨우 석 달 전에 떠났었던 그 학교에 와 있다고. 8년이란 세월은 사소한 게 아니야, 8년을 지내고서 그 모든 것을 겨우 눈으로만 알아보게 되느냐고?

감긴 눈까풀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마치 영화 같았다. 아래 층 복도, 녹색 칠, 층계 올라와서, 노란 칠, 전몰장병기념비, 복도, 층계 올라와서,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 헤르메스, 니체의 코밑수염, 토고, 제우스 흉상……

  나는 담배를 내뱉고 고함을 쳤다. 고함을 지르는 건 늘 좋았다. 그냥 큰 소리로 외치면 되었다. 외침은 장관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누군가가 내 위로 몸을 굽혔을 때도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낯선 숨소리가 느껴졌다, 따뜻하고 그래도 역하게 여송연과 양파 냄새를 풍겼다. 어떤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래, 뭐야?”

  “마실 것을 좀, 그리고 담배 한 대 더, 위에 호주머니에 있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다시 누군가가 호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다시 성냥을 켰다. 누군가가 타들어가는 담배를 내 입 속에 넣어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물었다.

  “벤도르프.”

  “감사합니다.” 내가 말하고는 담배를 빨았다.

  어쨌거나 나는 정말로 벤도르프에 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고향에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전무후무한 고열에 들뜬 것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어떤 인문계 고등학교 건물에 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분명 이곳은 학교였다. 저기 아래 목소리가 소리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른 자들은 미술실로 옮겨!”라고? 나는 다른 자였다. 나는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미술실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라면 내가 왜 잘 못 본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알아보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오직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분들을 다른 종류의 학교 복도에 벽에 세워둘 거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가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다시금 여송연과 양파 냄새가 났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채로 두 눈을 떴다. 거기엔 지치고 늙은,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 소방대원 제복 위로 나와 있었다. 늙은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시게, 전우여!”

  나는 마셨다. 물이었다. 그러나 물이 훌륭하진 못했다. 나는 내 입술 끝에서 냄비의 쇠 냄새를 느꼈다.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들이마시게 될까 느끼는 것은 참 좋았다. 그러나 소방대원은 내 입술에서 냄비를 빼앗더니 가 버렸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친 듯이 어깨만 으쓱하더니 그대로 더 가 버렸다. 내 옆에 누어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소리 질러대 봤자 소용없어. 물이 더는 없거든. 도시가 불타고 있어, 보고 있잖은가.”

  “도시 이름이 뭔데요?” 나는 내 옆에 누어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벤도르프.”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 똑바로 내 앞을 보며 창문들을 응시했고 여러 번 천정을 보았다. 천정은 아직 말짱했다. 하얗고 매끄러운 것이,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채로. 그러나 모든 학교의 미술실에는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천장을 둔다, 적어도 양질의 유서 깊은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다 그렇다. 그건 아무튼 분명하다.

  이제 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벤도르프에 있는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의 미술실 안에 누어있다는 사실을. 벤도르프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셋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 알베르투스-학교 - 그리고 이 말을 꼭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 마지막 것, 세 번째 학교가 아돌프-히틀러-학교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에는 노 프리츠의 상이 특별히 화려하고 특별히 아름답게 특별히 크게 층계참에 걸리지 않았을까? 나는 이 학교에 다녔다, 8년 동안을. 하지만 다른 학교들이라고 해서 이 상이 똑같은 자리에 걸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첫 번째 층계를 오르면 그렇게나 똑똑히 눈에 띠어서 시선을 붙잡으리만치 그렇게?

  밖에서는 무거운 대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말고는 조용했다. 다만 섬광의 침식이 밀려닥칠 뿐이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합각머리벽이 무너져 내렸다. 대포는 조용히 규칙적으로 쏘아댔다. 나는 생각했다, 참 좋은 대포로군!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그런 놈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다. 맙소사, 대포라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것인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지. 어둡고 거칠게, 그러나 부드럽고, 거의 섬세한 오르간 연주였다. 여하튼 품격 있는 연주. 나는 대포라는 것이 뭔가 품격 있는 요소를 지녔다고 느낀다, 쏘아 올라가더라도. 너무도 품위 있는 인상을 준다, 그림책에서는 정확하게 전쟁을 가리키면서…… 그러다가 나는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전몰장병기념비에 등재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더 큰 황금 철십자를 장식하고 더 큰 돌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서 또 다시 기념비 낙성식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갑자기 나는 알게 되었다, 만일 내가 정말로 우리학교에 와 있는 것이라면, 내 이름도 돌 속에 새겨져서 거기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학교 달력에는 내 이름 뒤에 쓰일 것이리라 - “학교에서 전선으로 징집되어 ……를 위하여 전사했노라고……”

  그런데 나는 점선 안에 들어갈 그 무엇을 위해서였나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지금 내가 다녔던 학교에 와 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일을 나는 기필코 알아내고자 했다. 전몰장병기념비에도 특별한 무엇은 없었고,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어디에나 다 있는 그런 것이었다. 마치 기성복 같은 전물장병기념비였다, 그래, 어딘가 중앙에서 받아다 놓은 것일 테니……

  나는 미술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림들은 다 치워버렸고, 구석에 쌓아놓은 의자들만 몇 개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여러 개가 나란히 있는 높고 좁다란 창문들에는 빛이 엄청 쏟아져 들어왔는데, 마치 그런 것이 미술실에 소속된 것 마냥? 내 가슴은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 방에 있었더라면 무엇인가가 내게 말을 해줄 법 아니던가, 팔 년 동안 꽃병을 그렸고 서체를 연습했었던 방이라면? 미술선생님이 앞에 받침대 위에다 세워 놓은 좁장하고 섬세한 신비롭게 모방한 로마식 유리병을 그렸고, 모든 종류의 서체를, 고서체, 로마서체, 이탤릭, 장식체 등을 연습했던 곳이라면? 나는 그 시간을 학교생활을 통틀어 가장 싫어했었다. 시간 내내 지루함을 짓씹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제대로 꽃병을 그리거나 서체를 그려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답답한 칠의 지루한 벽들을 마주하고서 나의 저주 나의 증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속에는 어느 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지웠고, 연필을 깎았고, 지웠고…… 그 뿐 ……

  나는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팔들을 움직일 수 없었고, 오른 쪽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왼쪽 다리만 겨우 움직였다. 나는 사람들이 내 팔들을 몸뚱이에 묶어놓았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꽊 묶어서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두 번째의 담배도 뱉어냈다. 밀짚자루들 사이의 통로에다가. 그리고는 팔들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너무도 아파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속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언제고 좋았다. 팔들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도 났다.

  그러다가 의사가 내 앞에 왔다. 안경을 벗어들고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의사 뒤로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던 소방대원이 서 있었다. 그가 의사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의사는 안경을 다시 썼다. 나는 두꺼운 안경유리 너머로 그의 큰 회색의 눈을, 가볍게 떨리는 동공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너무도 오래 동안이라서 나는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잠시 만요, 곧 당신 차례가 ……”

  그리고서 그들은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를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그들이 가는 쪽을 따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칠판을 떼어서 비스듬히 놓아두었는데, 벽과 칠판 사이에 침대보가 걸려 있었다. 그 뒤에는 밝은 불빛이 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이 다시 옆으로 젖혀지고 아까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가 다시 실려 나왔다. 운반병들은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문으로 끌고나갔다.

  나는 다시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넌 알아내야해, 어떤 부상을 당했는지, 지금 너희네 학교에 와 있는 것인지를.

  모든 것이 참 냉랭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나를 죽음의 도시의 박물관으로 끌어다 놓은 것처럼. 내 눈이 알아보았지만, 오직 내 눈만이 알아보았지만, 무감각하고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던 세상을 지나서. 내가 석 달 전까지 이곳에 앉아있었다는 것, 꽃병을 그리고 서체를 그려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쉬는 시간에 잼과 버터 바른 빵을 들고 내려가, 니체, 헤르메스, 토고,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나서, 메데이아가 걸려있는 아래층 복도를 천천히 지나서, 그리고는 우유를 마시러, 아무리 금지가 되었다 해도 담배를 피우는 모험을 할 수도 있었던 어스름한 작은 방에서 우유를 마시러 관리인에게로, 비르겔러 씨에게로 갔던 것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내 옆에 누어있었던 그를 아래로 데려갔다, 사망자들이 누어있는 곳으로. 아마도 사망자들은 비르겔러의 잿빛 작은 방에 누어있을 것이었다. 따뜻한 우유 냄새가 나는 곳, 먼지 냄새며 비르겔러의 싸구려 여송연 냄새가 나는……

마침내 운반병들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나른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다시 둥둥 떠갔다, 이번에는 문 곁을 지나서. 둥둥 떠 지나가면서 나는 그것마저 일치한다는 것을 보았다. 문 위에는 한 때, 그러니까 아직 학교가 토마스-학교라 불릴 때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떼어냈는데, 거기에는 새로이 어두운 노란색 흠집이 생겨났다. 십자가 모양으로 단단하고 분명하게, 그건 마치 그들이 떼어낸, 낡고 희미한 작은 십자가 자체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십자가의 흔적은 벽의 퇴색한 도료 위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남아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서 벽 전체를 새로이 칠을 했는데,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칠쟁이가 색조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고, 십자가는 갈색조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벽 전체는 장밋빛이었다. 그들은 투덜대었지만 소용없었다. 십자가는 벽의 장밋빛 위에서 갈색으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의 페인트 예산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 십자가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수년 간 회양목 가지들이 걸려있었던 오른 쪽 발코니 위에 분명한 대각선 흔적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직 학교에 십자가를 걸어놓는 것이 허용되었을 때 관리인 비르겔러 씨가 그 뒤에다 걸어놓았던 것인데……

  그 모든 것은 내가 문을 지나서 칠판 뒤로, 눈부신 불빛이 타고 있는 곳으로 들려가는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는 수술대 위에 누어서 내 몸을 아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주 조그맣고, 오그라든 모습으로, 머리 위 조그맣고 하얀 전구의 맑은 유리 안에는 가느다란 두더지 색 꾸러미가 마치 특이하고 섬세한 태아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저 위에 있는 그것이 바로 나였다.

  의사는 나를 등으로 돌려놓더니, 탁자 옆에 서서 거기서 기구들을 헤집어 찾고 있었다. 소방대원은 널찍하고 늙은 모습으로 칠판 앞에 서 있었고 나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는 피곤하고 서글프게 미소를 지었고, 수염 더부룩한 그의 더러운 얼굴은 잠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칠판의 끈적끈적한 이면에서 난 뭔가를 보았다. 내가 이 죽음의 집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내 심장을 느끼게 한 무엇이었다. 내 심장 속 어딘가 비밀스런 방에서 나는 깊이 끔찍하게 놀랐고,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칠판에는 내 글씨가 있었던 것이다. 위쪽 맨 위 줄들이. 나는 내 서체를 안다. 그건 마치 우리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 마냥 더 나빴다, 훨씬 더 분명했다. 그리고 내 서체의 일치성을 의심할만한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모든 다른 것은 증거가 아니었다, 메데이아도 니체도 디나르 시골 배경 영화 프로필도 아니었고, 토고의 바나나 그림도 아니었다. 문 위에 걸린 십자가도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모든 것은 어느 학교에서나 다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학교들에서 내 서체로 칠판에 글을 쓸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거기 그것이, 당시에 우리가 써야만했던 그 명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저주 받은 생에서 겨우 석 달 전으로 되돌아가서 그때.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아, 나는 안다, 칠판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미술선생님은 화를 내셨다. 나더러 제대로 분할을 못했다고, 서체를 너무 크게 잡았다고. 그래놓고서는 선생님 자신도 고개를 갸웃둥거리시며 그 아래에다 똑같은 크기로 따라 적으셨다,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모두 해서 일곱 번 거기 그렇게, 내 서체가 남아있었다. 고서체, 프락투어, 이탤릭체, 로마서체, 이탈리아 서체, 장식체. 그렇게 일곱 번 분명하게 또 가차 없이.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소방대원은 이제 의사의 가벼운 부름에 따라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서 이젠 내가 그때 서체를 너무 큰 것으로, 구두점은 너무 많이 택했기 때문에 약간 훼손된 경구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좌측 상박에 동통을 느꼈을 때 나는 솟구쳐 경련했다. 기대어 억제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내 몸을 온통 감았는데, 내겐 팔들이 더 이상 붙어있지 않았다. 오른 쪽 다리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갑작스레 뒤로 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기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함을 질렀다. 의사와 소방대원은 나를 얼이 빠져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만 주사기의 플라스크를 눌렀다. 플라스크는 천천히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칠판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방대원이 내 곁에 바짝 다가서서 그것을 가렸다. 그는 내 어깨를 꽊 붙잡았다. 나는 헤진 그의 제복의 탄내 나는 더러운 냄새를 맡았고 그의 지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제서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비르겔러였다.

  ‘우유를’이라고 나는 나직이 말했다.

 

주석 ------------------------

1) 메데이아: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그림(1870). 메데이아가 두 아들을 안고서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갈등하고 있는 그림. 원본은 뮌헨의 노이에 피나테크 소장.

2) 가시를 뽑는 소년: 로마에서 발견된 73㎝의 브론즈 상으로, 고대의 유물로 간주됨. 원본은 런던의 영국박물관 소장.

3) 프리즈: 건축물에서 보는 띠 모양의 장식.

4) 선제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 황제 선거는 1198년부터 1806년까지 행해졌다.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국왕의 7인.

5) 노 프리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의 애칭.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로 평가된다.

6) 헤르메스 기둥: 4세기경의 유물로, 86㎝ 석회암 난간모서리 장식. 원본은 파리의 루루브르 박물관 소장.

7) 벤도르프: 라인란트-팔츠 주의 작은 도시, 작품이 발표된 1951년 당시 주민은 13,000명 정도, 현재에도 16,538명이 25㎢ 안에서 거주하는 소도시. (광주 면적의 1/20, 인구는 1/90)

8) 인문계 고등학교 셋: 이것은 허구로, 현재에도 김나지움은 한 곳 뿐.

9) 디나르 족: 유럽 동남부, 발칸 산지 아드리아 해 주변에 거주하는 인종.

10) 제목: 시모니데스의 「테르모필레의 전몰용사의 비」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어가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외친다. “길손이여. 그대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게서 말해주오, 법이 명했던 바대로 우리 여기 쓰러져 있음을 보았노라고. Wanderer, kommst du nach Sparta, erzähle dorten; du habest uns hier liegengesehen, wie das Gesetz es befahl.” 히틀러의 독일이 법의 이름으로 소년들을 징집하고 그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를 외치기 위해 작가 뵐은 레오니다스를 인용했다. 뵐은 그의 작품에서 “전몰, 전사 gafallen : 떨어져 죽다”라는 우회적 표현을 거부하고 기필코 “살해당했다 getötet”는 표현을 고집한다.

11) 프락투어: 옛 독일어 고유의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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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출처: Heinrich Böll: Wanderer, kommst du nach Spa……(195), in: Romane und Erzählungen 1, Hrsg. v. Bernd Balzer. Köln 1977, S. 195~202.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1. 25. 21:23

삼포세대 

 

 

 

 

 

솔직히, 나는 정복한 것보다는 패배한 것이 낫고, 영구적  소유의 독점적 고형성보다는 임시성과 불확정성의 느낌이 좋다. - 에드워드 사이드, 『도전 받는 오리엔탈리즘』 중에서

 

   

  삼포세대라네, 삼포!

  삼천포가 아니고?

  삼천포는 무슨, 삼포라니까. 우리 같은 루저를 삼포세대라요!

  삼포? 어디선가 듣긴 들었는데.

  그래요, 쓰리 포세이큰 제너레이션!

  뭐요, 셋을 포기한 놈들이라고?

   쳇, 영어라야 얼른 소통되는 우린 바로 바나나족이지, 무슨 삼포족. 겉만 누런, 속은 허여니 뼛속은 양놈들이지.

   김박은 삼천포로 빠지는 게 특지지. 뭘 포기해서 삼포냐, 그럴 물어야지요!

   뻔한 것 아뇨.

  이박, 그래도 읊어 봐요!

  입에 담기도, 그게. 그러니까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한 세대란 말이외다.

하나마나 한 소리. 그게 다 직장 문제, 돈 문제 아뇨.

  그래도 그게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청년층’ 그 비슷한 정의가 있어요. 재작년인가, 신문의 취재팀이 만든 신조어이지만 정곡을 찌를 밖에.

 

  우린 그렇게 삼포세대라 낙인찍혔다.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공부 때문에 공부에 심취해서, 그러니까 제법 고상한 삶의 방식 때문에 연애도 안하고 사는 줄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나도 그들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꼼짝없는 삼포세대.

 

 

  평균인 - 평균인은 누굴까.

  그날 저녁도 외주둥이 굶는다고 소보로빵 한 개로 끼니를 때웠다. 소주와 냉수를 1:3으로 타서 음료수 대신 마셨다. 왜소한 저녁상을 물리고 - 상에서 먹은 것도 아니었지만 - 하릴없이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헤아릴 수 없는 아메바들의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나 아메바는 갑자기 이 시대 평균 아메바 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평균치는 수많은 통계에서 찾아보아 골라내면 될 것 아닌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 중에서 평균적 수입을 갖고, 평균적 자녀 수, 평균적 기대 수명, 평균적 학력, 평균적 직업, 평균적 취미활동 …… 등을 고려하여 대표적 가정의 대표적 사람을 꼽는 일이다. 무엇부터 찾을까. 잠시 통계의 무시무시한 망망대해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사는가가 우선일 것이었다. 우선 가족의 평균 수입, 그런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수치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므로 통계를 찾기도 쉽고 평균이나 적절한 대표를 찾기도 분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중소기업을 가정하자! - 사장을 포함한 직원 전체는 70명이고 이들의 총 급여의 합은 2억 1000만원이다. 그러면 이 회사 직원들의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이 통계는 산술평균에 의거한 것으로 결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자. 대부분의 직원들은 월 300만원은 평생 가도 못 만져 볼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한다. 직원 50명이 1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10명의 작업반장들도 겨우 150만원씩 받을 뿐이다. 이들에게 300은 비현실적인 수치이다. 왜 그런 300만원 평균치가 나오는가. 그것은 과장들 3명이 500만원씩을, 부장 5명이 1000만원씩을, 부사장은 2000만원, 사장은 50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70명 중 50명이나 되는 최빈수가 받는 월급은 고작 100만원, 그러므로 대부분의 직원들이 통감하는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70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중앙에 있는 35 또는 36번째 높은 월급을 받는 사람을 대표라고 한다면, 대푯값 역시 100만원에 불과하다. 이 회사의 최빈수와 대푯값은 100만원 월급인데,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나는 초장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열이 났다. 좀처럼 찬물 샤워를 못 하는 내가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왔다. 컴퓨터는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지나쳐서 창 쪽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웠다.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아스팔트의 미세 먼지가 날아오른다. 작은 도로라서 저 아래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도 보인다. 저들이 평균인일까. 운전자가 평균인일까.

 

  다음 순간, 대한민국 평균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을 예감이 들었다. 일을 원론적으로 생각해보려니 한참을 물러서고 만다. 처음 자리가 아니라 마이너스 어딘가로. 도대체 누가 ‘우리’인가. 우리 국민이라 함은 대한민국 국민을 말한다. 그러나 간단하지가 않다.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에서 비롯되어 그 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현 우리나라의 건국은 참 오래 걸렸다. 1945년 광복을 맞았어도 다시 미군정의 주둔시기를 거쳐서 1948년 8월 15일에야 정부 수립이 선포된 나라다. 독립 선포 후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 수립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100,210㎢ 땅에서만. 그러니까 함께 독립선언을 했던 반쪽 123,138㎢를 북에 두고, 이제와 그들의 일인당 국내총생산 1,900달러를 살짝 조롱하면서. 우리는 그들보다 10배 이상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우리를 우리에 한정한다.

  그 한정된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회원국 중에서 수출입 선 순위권에 진입했다고 희희낙락이다. 1961년 우리가 여전히 전후의 비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생한 기구에 30년도 넘게 뒤늦게 합류한 우리가. 하지만 동시에 평균 자살률도 거의 3배나 더 이룩해(?) 냈다. 인구 10만 명 당 11명이 평균인데 우리나라는 서른 명이 넘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경제 위기로 유럽공동체에서 퇴출 위기에 내몰렸다는 그리스는 세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그러니 경제가 행복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국민총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된 것과 자살자의 숫자는 비례하여 증가 일로에 있다.  

  왜?

 

  정말이지 평균 수입을 알아보고자 했던 내 의도는 한 순간에 좌절했다. 대신 여러 경제 지표를 조금 알게 되었다. 국민총생산이란 개념은 어느새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다. 보다 합리적으로 바뀐 것이란다. 국민총생산은 한 국가의 거주자 - 국민 - 가 일정 기간 동안에 생산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마손된 고정자산의 소모분을 포함한 개념이고, 또 예컨대 우리나라 국민이 외국에 진출해서 생산한 것도 모두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의 대외수취소득을 제때에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어,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총생산만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으로 바뀌었단다. 그것이 또 1995년에는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는데,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생산 활동에 참여해서 벌어들인 소득의 합계란다. 실질 국민총소득은 실제 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실제 구매력을 측정하기 위해서 산출한다. 이 지표는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를 보다 잘 반영하기 위해 실질 국내총생산에다 교역조건 변화를 반영한 실질 무역손익을 차감하고 여기에 국외순수취요소소득을 더해서 산출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국민총생산이냐 국민총소득이냐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다. 국민총소득이 2만 달러가 넘어도 왜 이렇게 허한가. 2012년 국민총소득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34위, 오매불망 우리가 모델로 삼는 미국은 5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12위로, 여전히 우리를 훨씬 앞지른다.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는 뒤지지만, 34위라면 대단하다. 물론 2007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21,632달러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3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다고 호들갑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1만 달러대로 떨어졌다가 2010년 2만 달러대에 재진입할 수 있었고, 3년째 2만 달러대 초반에 머물고 있지만 후퇴는 아니라는 것.

 

  문제는 불평등 성장이다. 한은에 따르면 1991에서 2011년까지 20년간 국민총소득이 연평균 9.3% 늘어났는데, 그동안 기업소득의 증가율은 11.4%인데 비해서 가계소득의 증가율은 8.5%에 불과했다고 한다. 개개인의 실질적인 주머니 사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성장의 후퇴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역설해주는 증거가 아닌가.

  또 1인당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에서 기업과 정부 몫을 빼고 개인이 실제로 쓸 수 있는 소득은 얼마일까. 개인의 근로소득과 재산소득을 합쳐서 거기에서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을 뺀 것을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이고 하는데,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가장 밀접한 지표다. 그런데 지난해 1인당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인당 국민총소득의 57.9%에 그쳤다. 한 나라의 소득은 크게 자본에 대한 보수 - 영업 잉여라고도 한다 - 와 노동에 대한 보수 - 피용자 보수라고도 한다 - 로 나뉘는데, 전체 소득 중에서 피용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율, 즉 노동소득분배율이 57.9%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미국은 75.3%로 세계 1위, 왜 그 많은 모순을 안고서도 미국이 제일가는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스페인이나 일본 등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의 평균인 62.3%에도 못 미친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총소득이 별로 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정부와 기업이 가져가는 몫이 전체에서 40%를 넘다 보니, 우리 개개인의 주머니는 허할 수밖에 없는 일. 그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의 61.1%에 비해서도 낮아졌다. 그만큼 근로자 몫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3,148달러 - 그러니까 지난해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실제로 소비에 쓸 수 있는 돈은 (발표 당시 환율 1,126원으로 환산해서) 연간 14,80,457원으로, 대략 월 123만원에 불과했다.

 

  평균급여 - 월 123만원.

이 통계는 나를 울렸다. 마치 경제를 조금은 아는 사람모양, 나라 전체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관한 상심 때문에? 그랬다면 그것은 조금은 사치였다. 수치는 통계 속에서 존재했고, 나는 양심적으로 사고하면서 양심적으로 사고한다는 자존감을 지닐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개인적인 모멸감이었다. 나는 평균 123만원 세대에도 끼이지 못했다. 교양학부의 한국어 강의까지를 내려놓은 지금은 부정기적인 수입이 내 생활을 지탱해 주는 수입의 전부였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세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감히 들춰 읽지 못하는 것도 자격지심이다. 그 책이 처음 나온 2007년까지도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순위 강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인문학에 파묻혀 살았다. 승자독식 게임의 법칙도 예감하지 못한 채. 그러다 곧 닥쳐온 나의 추락은 부끄러움에 무조건 움츠러들게 했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 119만을 20대의 평균 소득비율 74%로 곱한 값이 88만원이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40을 바라보며 88만원 수입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 자리를 비집고 든다 해도 - 아직 가능성은 있다. 국립대학은 매 학기 공채가 있기 때문에. - 동료들 사정을 보면 비정규직 평균임금 수준에 불과하다. 일이 있고, 책상이 있고, 동료가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을, 어쩜 나도 그 속에 다시 끼인다면 나를 지탱해 주는 끈이다. 가족들로부터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소원해지는 세월이다.

  지금까지는 전통적으로 가족이 가족의 복지를 떠맡았다. 대학생들은 FM(아버지 어머니)장학금에 기대고, 결혼까지를 부모에게 의존한다. 부모 세대는 어렵게 마련한 집을 자녀들 대학 뒷바라지와 결혼자금으로 다시 팔아야 한다. 그러고도 둘째나 셋째에겐 더 이상 뒷받침할 여력이 없다. 중산층에서 이미 밀려나 내려앉았다. 이제는 가족의 부담이 한계점을 넘어섰다. 가족은 소리 없는 신음 소리를 낸다. 가족의 구조와 성질이 이 시대 한국의 특별한 온도와 압력에 이르러 다른 상태로 바뀌는 임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일류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면 루저가 되는 세상, 연애는 사치의 극이요, 결혼 또한 비즈니스이다. 딩크족(더블인컴노키즈)은 삼포세대의 로망이다. 너 자신을 알라, 삼포족.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루저인 나 자신을 향해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엉뚱한 곳으로, 정말로 삼천포로 빠졌다. 잠깐, 삼천포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변명이 필요하다. 옛날에 한 장사꾼이 진주장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한산한, 혹은 장날이 아닌 삼천포로 가게 되어 낭패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시발일 뿐, 나는 삼천포에 아무런 유감이 없다. 발길 가본 적도 없으니 좋고 나쁠 수도 없다. 그래도 그 이름 때문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 목록에 든다. 진주이건 삼천포이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종류를 가늠할 수 없는 화가 치민다.

 

 

  화 - 화가 나는 일을 당하여 우리는 주로 화를 참는 것이 인자의 길이요, 인자의 도리를 모르면 화로써 망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주입되었다. 하지만 화를 끓이고만 있으면 병이 된다고도 하질 않는가.

 

  분노는 많은 경우에 백해무익이지만, 사람이 분노해야 하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를 모른다면 더 큰 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도 있다. 2차 세계계대전의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을 대변하는 노익장이 남긴 짧은 글, 바로 『분노하라!』는 글이다. 스테판 에셀. 1917년생이니 90을 넘어서 쓴 글이다. 유명한 1917년생들이 다 떠나고 없는 세상에서. 정치라면 러시아혁명도, 케네디도, 박정희도. 문화라면 윤동주도, 윤이상도, 하인리히 뵐도. 에셀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일찍 파리에 정착해서 거의 한 세기를 살다간 지성인. 그냥이라도 90 노인의 발언은 경청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이고 그림이고 저작자가 죽으면 값이 올라가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노익장의 분노 예찬 발언은 애늙은이들이 대접받는 동양적인 관점에서는 다소 색다를 수 있다. 아니 온 세계가 난공불락의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된 글로벌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분명코 내민 돌에 정 박힐 일이다.

  프랑스의 현실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모양이다. 알제리를 비롯하여 비 코케시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갈수록 산이다. 이건 엊그제의 일이지만 명색 프랑스 하원의원 질 부르둘레라는 인물이 히틀러가 로마족, 그러니까 쉬운 말로 집시족을 충분히 못 죽였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일에는 장-마르크 애로 총리조차 법에 따른 처벌을 운운할 지경에 이르렀다지만. 세상은 금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권력들이 세포분열을 하는 장에 불과하다. 성실한 근로세 납세자는 없다. 바보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갑과 을만 존재한다.

 

  을순이 - 내 이름은 한금실이 아니고 통상 을순이가 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을식이와 을순이들의 하나. 그러므로 거의 무명 씨. 나에게 분노의 여력이 있을까.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첫 발걸음은 관심이다. 반세기 전에, 1960년대 유럽의 사회주의대학생연맹의 여대생들은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외쳤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의 여학생들은, 여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들의 관심은 외모와 이력을 통한 개인적인 성공에 있을 뿐이다. 여자 특유의 외모로서 남성 세계를 공략하거나 남성들과 똑같은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 권력에 이르는 길이다. 그 이외는 무관심하다.

스물 세 명인가 네 명인가, 미스코리아 본선 진출자의 외모 사진들이 똑같다고 세계 여론에서 비웃는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미의 비용」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유수 저널이 한국의 성형수술 풍토를 대서특필했다. 얼굴에 독을 주입하는 것은 일상이고, 가정주부가 심지어 종아리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라고.

 

  그뿐인가. 얼마 전 폴라 비라운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화장품 경찰관(?)이란 별명의 전문가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바로 화장품 종류였단다. 스킨, 로션, 에센스, 아이크림, 영양크림이라는 필수(?) 코스도 모자라서 앰풀, 트리트먼트, 마사지 제품, 기능성 제품의 홍수들을 보고서 하는 말이, 수많은 종류의 기초 스킨케어 제품들이라야 파격적으로 말하자면 보습제 한 종류란다. 수많은 과정의 덧바름은 오히려 모공을 막아 트러블을 일으킬 수도 있고, 과한 영양분은 타고난 피부 루틴을 방해해서 자연스러운 재생력과 유수분 유지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데……. 나처람 단순 무식한 사람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피부도 인체의 일부이라면, ‘소식하면 장수한다!’라는 말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피부나 외모가 아니지만, 나만의 이력에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나 또한 사회적 무관심자에 속했다. 죽어라, 아니 충분히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러고도 갑의 근처는커녕 을의 세상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벌이라면 벌이다. 지식을 생보다 우위에 놓는 죄를 범한 일, 지식에 종사함에 우월감을 가졌던 일에 대한 벌. 이 창살 없는 수감생활 중에 나는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서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 무엇을 분노해야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시작, 모든 새로운 시작은 반성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반성 시작 -

  나는 공부만 했다. 학문이 생을 의미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공부만 했다. 목표를 초월한 학문. 유용성을 생각하는 것은 저열하리라고 믿었다. 쓸모없음 때문에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어쭙잖게 노자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집의 쓰임은 벽이 아닌 빈 공간 때문이라고, 내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은 발바닥 크기의 땅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땅, 내가 밟지 않고 있는 너른 땅 때문이라고.

  나는 사치스러웠다. 욕심을, 특히 물욕을 초월한 삶. 그 무슨 사치였는가. 착각 아니면 거짓말. 세 끼 굶으면 군자 없고,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 없다는데. 취직을 하든지 시집을 가든지 - ‘취집’을 향하여 전진을 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취직을 향한 노력은 적잖이 해왔다. 결과가 없을 뿐이다. 일단 안정된 직장이, 돈이 없으니. 그러면 곧 삼포세대에 속한다. 연애는 무슨. 혹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쳐도 - 그 정도는 생물학적 짝짓기 본능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렷다, 희망하건대. 하지만 결혼에 이르는 것은 사투에 가깝다. 생물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할 것이므로, 남녀 관계라는 것도 다분히 계산적이 될밖에. 생물체의 상호작용에는 다소간 이해의 충돌이 내재한다고, 어디선가 읽었고, 또 동의한다. 자기 복제를 시도하려는 충동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미화되어…….

 

  틀렸다. 나는 반성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정작 중요한 반성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있다. 죽어라 공부하고도 일자리가 없는 것을 내 못난 탓으로만 돌리는 반성은 무의미하다. 부족하다.

  무엇을 더 분노해야 할 것인가. 내 탓은 제 앞가림 못한 데 대한 분노, 제 욕심에서 나온 분노에 불과하다. 애초에 나를, 우리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이 사회. 대학정원을 너무 부풀렸던 이 사회에 분노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이 에셀이 말하는 분노, 진정한 사회참여에서 오는 분노이다.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이름의 한 줄서기를 주입시킨 교육. 살벌한 경쟁심을 자유라는 당의정을 우리에게 먹였던 교육. 제 앞가림에만 매진하라고, 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평생을 달리라고 가르쳤던 교육 말이다. 그것도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 바로잡을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가 독문학을, 프랑스문학을 선택했던 대입에서 어른들 - 그런 곳을 진학하게 권했던 담임선생님이나 그런 학과의 대문을 너무 홀짝 열어놓고 우리를 습인했던 대학들 모두 - 그때 어른들은 우리가 바나나족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

 

  바나나 - 바나나를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바나나는 병문안과 관련된 이미지였다. 아프면 바나나를 사주셨다. 조금 더 자라서는 해괴한 모양이 눈에 들어온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바나나를 먹기는 뭔가 민망한 노릇이었다. 금방 바나나 송이에 꼬이는 하루살이들도 성가셨다. 하필 그 싫은 바나나로 지칭되는 우리들.

가야금과 거문고의 구별도 모르면서 현악기 종류들은 정확히 배워 알았다. 피아노 연습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필수다. 자연 단음계, 화성 단음계, 가락 단음계 구별도 배웠다. 자진머리, 휘머리, 중중머리는 구별할 줄 몰랐다. 조금 알았더라도 엇중머리 라고 하면 멍했다.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한국어교원양성과정 공부하면서야 제대로 알았으니, 지식분야인들 바나나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 분야가 더했다. 개화기에 생산된 신문학은 어땠는가. 신소설, 신체시, 신파극 범주를 통틀어 서구문학과의 관련 양상이 문제가 되었다. 비록 김현과 김윤식의 자생적 근대화론이 정설로 굳었지만, 해방 직후에는 이식문학론도 만만치 않았다. 신문학을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문학의 이식이라고 단언했던 임화의 논의는 그의 정치적 이력으로 묵살되고 만 것이니. 정치는 문학이론 위에 존재한다.

 

  쇼와 시대 이전, 그러니까 1870년대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 개화기의 서양 추종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수입 또는 주입되었다는 견해는 왜 백안시 되었을까. 메이지유신의 이름으로 서구의 자유주의 이론을 통한 근대화는 한 마디로 문명개화의 기치아래 수행되었다지만, 사실 일본의 경우는 무사들의 충성심과 사회적 조화라는 전통적 가치도 여전했거늘. 오히려 수입을 통한 수입에 해당되는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한 동안 망각했었고, 그 기간은 사뭇 길었다.

  예컨대 무당이나 사당패처럼 홀대받던 것이 풍물이었다. 꽹과리, 징, 장구 그리고·북 어느 것도 손데 대면 천하다고 업신여겼다. 그게 사물놀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 난 것이 1978년의 일이었으니, 장구재비 김덕수 패거리가 - 정식명칭 김덕수사물놀이패 -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또 돈을 벌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풍물도 사물도 돈이 되는구나, 성공이 되는구나 하고서 관심을 보였던 셈이다. 우리 고유의 정서라거나 문화의 발흥이어서가 아니라, 돈이, 성공이 되니까. 결국 우리는 우리 가락을 연주는커녕 감상도 할 능력을 잃은 채, 국적불명의 음악에 취해서 산다. 글로벌음악, 글로벌문화.

 

  일찍이 매슈 아널드 같은 고급문화론자들이 세속적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문화’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문화였음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확실히 깨달았다. 벌써 반세기 전에. 그 반세기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되어 왔다. 유럽세계와 아시아세계의 차이에 관한 감각을 더욱 경직화시키는 압력에, 동양이 지닌 (서양과의)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사고에, 학문적으로 동양 위를 억누르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그런 교의에. 그러므로 (서양)문화에 근접할수록 고급문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그뿐인가. 바나나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글로벌문화 창달에 매진하며 산다. 미국 기업과 맞선 우리 기업이 자랑스럽기만 한가. 스마트폰은 주인의 자리를 넘본다. 눈을 뜨면서 스마트폰을 찾고,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든다. 그것도 ‘엘티이’라야 하지, 행여 ‘쓰리지’는 큰일이 난다. 여전히 ‘투지’를 쓰고 있다면 영락없이 비사회적 죄인이 되고 만다. 인간은 가까운 장래에 번호와 기호로 분류된 코드를 팔이거나 뇌 어딘가에 이식받아 글로벌하게 통제되어 살게 될 것이다. 인간로봇, 아니 아예 로봇으로 진보하기 전에 아직은 바보 같아도 사람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세상을 음미해야할 것 같다.

 

 

  음미 - 또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의 몫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도 굶어 죽는다 하질 않는가. 돈을, 성공을 향한 허기는 끝을 모른다. 산비탈을 한번 돌면 사람들 절반이 사라진다는 무서운 동화가 현실이 되어 있다. 한 단계를 지나면 절반이, 다음 단계에선 또 절반이 탈락하고 우량종만 남는다. 우량종들도 피터지게 경쟁하여 궁극에는 일인자만 남는다. 그 한 사람은 무엇을 향해 살리.

  차라리 삼포세대 바닥 헌장으로 삶아 읊어도 좋을 시가 있다. 스물일곱에 요절했다는 천 년 전 당나라의 문인 이하의 작품이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

    서리 맞으면 잡목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비루먹은 개. 이삼십 대 젊은 사람들 거의 절반이 이 무기력에 굴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었다. 어느 온라인 취업포털의 설문에. 이제 사람들을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적응인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자기암시로서 통제하는 적응력. 어찌어찌 결혼에 이른다 해도 출산은 망설인다. 출산율은 2012년 기준으로 1.23명, 사람을 세는 정수로 말하자면 한 명이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란다.

 

  난 그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객관적인 눈으로 삼포세대 일원이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으련다. 쓸 돈, 쓸 수 있는 돈을, 주머니 사정을 잠시 잠깐 망각하는 바보이고 싶다. 미래를 계획하느라 미리 겁에 질리고 싶지 않다. 겁에 질리지 않으면 포기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삶. 신자본주의 이론으로 평가받지 않을 삶도 삶일 것이다. 자본주의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자식이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던 한참 낙천적인 시절에도.

  낙천적이고자? 설마. ‘모든 것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는 인간’에게 어차피 실존은 이유도 종극적인 목적도 없을 것이니. 그냥 살 수밖에, 그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리라, 그래야 한다. 둘이 모여서 여섯을 포기하더라도. 셋이 모여 아홉을 포기하더라도. 허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봄버들이 되는 꿈을 꾸기 위해서라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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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펜문학 2013  Vol.9., 2013.11.20. 29-42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8:07

틈새

 

이 이야기는 실제의 큰 대회에 기대어 썼을 뿐인 완전한 픽션이다.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혹시 어쩔 수 없이 실명으로 거론되는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며, 독자에게는 순전한 픽션으로 읽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1.

유난히 태풍이 무서웠던 여름 끝자락에 경주를 향하고 있었다. 펜 회원이 아니면서 국제펜대회에 참석할 기회는 실로 행운이자 우연이었다. 프랑스어 동시통역 일을 맡게 된 것은 완전히 대타였으니까. 이래저래 작가들 틈새를 기웃거리게 될 행운으로 조금은 들뜬 채, 대회는 9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부터이지만 일요일에는 도착할 양으로 버스터미널로 나갔다. 동서를 가르는 도로는 우리나라의 눈부신 도로 문화에 비하면 턱없이 열악하다. 신라의 고도 경주행 버스는 하루에 고작 두 번뿐이다.

 

경주 - 돌이켜 생각해보니 언젠가 겨울에 이 경주에 왔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차를 처음 사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였다고 기억된다. 인간의 상상을 절하는 석굴암이나 석가탑과 다보탑 등을 보여주시려고 그랬겠지만, 보문단지에서 묵었고 놀이기구가 많더라는 기억이 전부인 걸 보면 어린 시절 유적지 관람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지금도 전혀 앞뒤 연관 없이 세계적인 문단의 거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부담 없는 시간을 미리 즐긴다.

소잉카 - 아프리카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월레 소잉카도 참석한단다. 그가 1986년에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탔다지만, 난 그때 아직 너무 어린애였다. 문학이 다 뭔가! 불문과 학생이 되고나서야 프랑스령을 포함한 프랑스어 문화권에서 프랑스 문화의 독점적 전황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나선 네그리튀드 운동을 처음 들었고, 그 주창자들보다 더 눈에 띤 작가가 그에 비판적인 소잉카였다.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까지 한 셍고르,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의 하나인 마르티니크의 시인 세제르, 역시 프랑스령 기아나의 다마스 등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자행된 인종 차별을 완강히 거부하며, 흑인 공통의 정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하고자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그런데 다음 세대라고는 해도 아프리카이건 카리브 해이건 프랑스에서건 흑인의 정체성을 한 데 모으자는 이 운동에 회의적인 흑인이라? 그 부분이 소잉카에 대한 내 엉뚱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었다.

 

소잉카는 네그리튀드라는 것이 자기도취를 부추기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 지닌 편견을 긍정할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유럽의 이성주의에 대한 아프리카의 감성주의라는 양분적 사고를.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문장이 있었다. “타이거는 타이그리튀드를 외치지 않는다, 다만 행동한다.” 처음에는 ‘타이그리튀드’라는 단어를 몰라서 낑낑댔다. ‘니그로’가 ‘네그리튀드’를 외치는 일에 대한 조롱인 것을 나중에야 알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 코 박고 찾으면 코만 막히는 것은 또 잠깐 잊었었다. 그 일로도 사전 찾지 않고 대충 이해하려고 애쓰는 습관을 기른 것은 맞다.

 

아차, 이렇게 막상 동시통역 일을 상상하자 자신이 무너진다. 정확성, 정확성을 어쩌나.

아니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소잉카는 영국에서 수학했고 미국에서도 아프리카문학을 강의했으니 영어에 능통하다. 내가 통역을 맡은 부분은 프랑스어인 만큼 한국어를 프랑스어로, 또는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참석한다. 그는 한국에 잘 알려진 외국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의 유수한 여자대학에 와서 객원교수로 강의를 하기도 했던 만큼. 그런데 불문학도로서 나는 왜 르 클레지오에게 혹하지 않았을까.

 

대학에서 전공 수업 들어간 첫해 르 클레지오의 이름이 나왔었다. 그 무렵 그는 프랑스 내의 잡지 - <독서>이었던가 -의 설문조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되었다. 강의 시간에 그는 스물다섯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 편으로 국경을 넘어 문단을 강타한 괴테랑 비교되었다. 그러니까 괴테보다 더 이른 나이 스물셋에 혜성같이 나타난 신동에 가깝다고, 르 클레지오에 심취한 교수님께서는 ‘그 괴테보다도 더 이른 나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독문학 개론 시간에서 들은 베르테르는 ‘친애하는 벗이여, 사람의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편지글로 말문을 열며, 당시 인간이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회적 통념을 배척하고서라도 인간 본연의 감정을 예찬했다. 해방된 마음의 고양을, 그 권리를 주장하는 적극적인 정열을 토로했다. 하지만 내게 남아있던 기억은 왜소한 인간이 무궁한 자연에 파묻히는 거대한 느낌뿐이었다. 시작하자마자 반 페이지 넘게 계속되는 자연예찬 - ‘나는 이 현상들의 찬연함의 힘 아래에서 쓰러져 간다.’라던 인상이 강력하게 박힌 탓이었을까? 하긴 편지가 계속되는 동안 불행에 빠진 그는 똑같은 자연 속에서 이젠 ‘영원히 삼키고, 영원히 희구하는 괴물’만을 보게 된다. 감상성의 과다와 감정의 무조건성은 좌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튼 당대의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한 열광으로 베르테르와 같은 옷을 입었고, 또 베르테르적인 유행이 굉장하다 못해 그것이 열병으로 고양된 곳에서는 양식에 맞게 자살도 행해졌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러나 그 시절, 인구가 훨씬 적었을 그 시절에, 이천 명쯤이나 되는 독자가 베르테르의 슬픔에 동조하여 실제로 자살을 했다는 통계는 내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무감동. ‘동조’라니! 그것도 책 속의 주인공을! 나로서는 이십대 청년의 감정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스물세 살짜리 르 클레지오의 첫 작품 『조서』도 자연 속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어쩐지 왜곡된 자연으로, 산 중턱 빈집이었다. 버려진 짐승처럼 살고 있는 젊은이. 탈영병인지, 정신병원 탈출자인지, 그는 하필 이름이 아담이고, 다행히(?) 이름이 이브는 아닌 젊은 여자와 소통할 뿐이다. 아니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르 클레지오의 독창적인 발견이던가? 신문기사 삽입, 찢어진 광고지, 미완성 문장들, 심지어 지워버린 행.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사실성을 해체하는 것이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은 벌써 트렌드였다. 그래도 너무 이른 나이에 첫 작품에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는데 무섭지 않았을까. 이것 역시 독문학개론을 들을 때였는데, 사실주의 시대던가 어느 작가가 첫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는 그 명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일찍이 ‘퇴역작가’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었다. 젊어서 벌써 보름달 인생을 살게 된 천재들에 대한 내 불안감은 차라리 오지랖이었다. 평생 보름달 인생이 되어보지 못할 수많은 군상들을 몰랐단 말인가.

 

르 클레지오의 성공은 전혀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졸업반 때 그의 『황금물고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소개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를 두고 젊은 명성의 후속을 걱정했던 나는 허탈과 안도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30년 넘게도 계속 베스트셀러를 쓰는구나. 그렇다고 대강 소개받은 그 작품에 감동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검은 물고기, 어려서 인신매매 단에 유괴당한 검은 소녀의 파란만장한 삶. 입양된(팔려간) 집에서 신체적 성적 고초를 겪다가, 자라서는 혼자 떠돌며 가진 것이라고는 몸 밖에 없는 젊은 여자의 밑바닥 삶…… 모로코의 사창가, 스페인의 빈민가, 파리의 보헤미안, 마침내 미국 여행, 재즈 싱어가 되는 꿈을 이루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검은 대륙으로 귀향하는 순간 그 검은 물고기가 황금물고기가 된다는 설정. 이런 것은 많고 많았던 동화와 소설들의 세상 어딘가에 늘 존재하지 않던가. 물론 탈 유럽, 탈 서구 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점에서 유럽 순종인 르 클레지오가 돋보였다는 점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이후의 소설들, 소위 누보로망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 우선 너무 어려웠으니까 - 탓이기도 했다. 졸업반 때 나는 그냥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정석이니까 프랑스에 간다는 생각, 어찌 보면 단순했지만 프랑스에 갈 준비만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것이 나를 오늘 경주로 가게 한다.

 

 

2.

현대호텔은 이름만큼 현대식인 보문호반의 호텔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덕에 호텔에서 오후는 한가로움의 극치였다. 국제적인 대회라는 인상은 준비된 플래카드나 안내 표지판들로 넘쳤지만 사람들은 아직 느긋했다. 등록처라고 안내된 지하 1층에는 요원들 수가 더 많았으니 말이다. 프런트에서는 일반 참석자들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탓에 약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이내 방으로 들어서자 갑작스레 자유라는 단어가 온 몸에서 꿈틀거렸다. 사방 벽으로 갇힌 방에서 자유라니. 혼자인 내가 언제 부자유의 구속을 받았는가. 그러나 일상으로부터의 자유 아닌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국제펜 한국회원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했고, 혹시나 사진에서만 보던 소잉카나 르 클레지오, 혹은 터키의 오르한 파묵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셋씩이나 초청한 이 행사를 보면 한국의 위상도 제법인가 싶었다. 국제펜 회장 소울 씨도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언론인 출신답게 수많은 에세이에서 표현의 자유 등을 역설했고, 그것으로 고통 받는 세계 도처의 작가들에 대한 연대 또한 대단해서 마침내 국제펜 회장이 된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문학, 미디어 그리고 인권”이란다.

 

보문호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를 상상했지만 방은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높은 층이라 베란다에 나가보니 둥실 뜬 구름 속만 같았다. 얼마를 거기 의자에 앉아서 하늘 냄새를 느껴보았다. 천천히 짐을 풀고 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벌렁 누어보았다. 나에게는 분명 사치스러운 이 방. 같이 방을 나누어 쓸 사람은 내일 아침 일찍 대회장으로 바로 도착하는 대부분의 일행들과 함께 올 것이다. 밖이 어둑해져서야 뭔가 먹을 것을 구하러 로비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면 호숫가를 산책할 수 있었을 것이나 너무 늦었다.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들어와 먹다보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아직도 나는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거리를 배회함은 옛날 서양에서 모자를 쓰지 않고 나다니는 여자나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로맨스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파리에서 공부만 하다가 청춘을 잃은 것도 그런 가르침을 너무 충실히 따른 탓일까. 아니, 그건 아마 유전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청교도적인 열심. 하는 일 열심히 한답시고 옆길을 쳐다보지 않는 고지식함은 유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즘 세상엔 고지식으로는 밥도 못 빌어먹지만.

 

일찍 씻고 들어앉아 받아온 책자를 열어보니 오후나 저녁 내내 호텔이 조용한 이유를 알았다. 두 개의 선택으로, 불국사며 동리목월문학관 그리고 대릉원이라는 고분군 등에 사전 관광이 있거나, 뮤지컬 관람이 있었으니까 조용했었나 보다. 전체를 살펴보려니, 가방을 가득 채운 A4 그대로 크기의 책자는 두껍기도 했지만, 국어와 영어 쪽이 앞뒤로 겹쳐있으니 내용의 두 배의 두께였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라는 오방색을 상징화 했다는 로고도 참 한국적이었다. 무엇보다 문학포럼 <나의 삶, 나의 문학>에 나올 연사들의 글이 궁금했다. 99쪽을 찾아 열어보니, 좌장, 연사들, 소잉카, 고은, 르 클레지오…… 그런데 고은 씨의 글이 없다. 미리 원고를 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기조연설의 파묵도 프로필뿐이다. 뭐 대순가, 이 정도의 대규모 행사라면 현장에서 통역 원고를 받는 당황함은 설마 겪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일찍 잠을 청했다. 이런 예상들이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빗나가게 될 것을 모르는 채로.

 

 

3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화려한 홀에서 조식뷔페가 제공되었다. 지하층을 기본으로 해서 일층까지를 커버하는 높은 천장이 화려함의 근원지였다. 나는 어쩌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조식 뷔페를 즐긴다. 이런 곳의 빵은 다행이도 내 젊은 시절을 되돌려줄 만큼 맛이 좋았다. 보리밥을 싫어했으면서도 파리에선 왜 검은 빵 맛에 홀렸을까. 맨날 슈퍼에서 사는 토스트 빵이 아닌, 학교 식당에서 자주 나오는 바게트나 크루아상이 아닌 검은 빵, 알곡 빵이라나 뭐 그런 빵을 난 별식으로 즐겼었다. 나는 수많은, 정말 수많은 요리들 사이에서 뚜껑들을 열고 내용물을 살펴보는 시간을 잘 못 참는다. 아침을 그리 무겁게 들 생각도 없었다. 그냥 검은 빵을 두 번 썰고, 유일하게 곁들일 수 있는 동물성인 완숙한 달걀과 살라미를 발견해서 기뻐하면서.

 

저만치 옆자리에 백을 놓고 갈까 말까 엉거주춤 망설이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동양여자였다. 어디선가 스쳤던 인상일까? 그러는 찰나였다. 그때 서양 사람처럼 생긴 서양여자가 서양 사람들에 어울리는 새파란 옷을 입고서 서양사람 같은 미소를 띠고 말을 거는 듯했다. 여기 자리가 어떻고……. 예,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게 여기 제 남편이랑……. 아무래도 합석을 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은지 동양여자가 테이블을 양보하기로 하는 모양이다.

그러자 저쪽에서 그 남편으로 보이는 덜 서양사람 같은 남자가 이미 착석을 하고 서양여자를 부르는 것 같았다. 서양여자는 동양여자에게 정색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 씩 말하면서 자리를 떴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모습이 그랬다. 동양여자도 괜찮아요 같은 말을 여러 번 여러 번 했고, 이제는 음식을 가지러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접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서 앉을 태세였다. 그때 그 자리에는 이미 또 다른, 이번에는 큰 말소리 때문에 한국 사람이 확실한 젊은 남녀가 앉아있었다. 그 여자는 접시를 든 채로 웨이터들을 쳐다보았고, 미안해하는 웨이터를 따라 저만치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나치게 운이 나쁜 분이네 싶었다. 혼자라서 백을 들고 다니니까 빈자리라고 오해받는가보다.

 

쓸데없이 남 걱정을 하다말고 나는 커피를 한 번 더 가져와서 뜨거움과 향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저쪽 편의 아까 그 서양여자가 그 동양여자에게 다가갔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다가 일부러 다시 찾은 모양이었다. 정말 미안했다고 자기의 이름을, 이어서 남편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간곡히 사과를 하는 모양이었다. 참 사과에 열심이구나 싶으면서 남자의 이름이 언뜻 귀에 익었다. 데이비드 맥켄……, 그래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발표자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대회 시작 11시가 가까워 오자 지하1층 컨벤션홀에 마련된 대회장은 만원사례가 되었다. 대회장 밖에 임시로 화장실이 설치될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어느 대회장에서나 늘 그러하듯이, 중앙 앞 쪽은 지정석으로 되어있었다. 연단에 올라갈 임원들이나 기조강연 연사들을 당연하지만, 뭔지 모르게 중요한 인물들, 여기서는 중요한 작가들이 지정석에 이름을 올렸다. 드물게는 이번 행사에 저개발국 회원들을 초청하는 선행(?)을 베푼 분들도 거기에 포함된 듯 했다. 문제는 작가의 중요도라는 것으로, 지정석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 경계에 있는 상황이 애매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만치 바로 그 경계에서 몇 번이고 어색한 장면들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하지만 그것도 지정석에 명사들이 착석한 뒤에는 수그러든다. 우리 측 이사장님, 사진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들, 회장, 그 옆자리엔 노랑머리가 아니라 거의 흰머리의 여성이 보인다. 회장 부인인가 보다. 그러는 사이 오르한 파묵이 예정을 취소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왜 돌연? 그런 이유에 정신을 팔 사이 없이 식이 시작되었다.

 

오프닝은 샌드 애니메이션. 텔레비전에서 한두 번 보았지만 실제로 - 물론 여기서도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 - 보니 더 신기했다. 모래를 확 뿌리는 동작, 그 처음 동작이 나중에 의미를 표시해내는 오묘한 기술보다 더 멋있었다. 한국본부 이사장의 환영사, 소울 회장의 개회사, 축사, 축사, 축사 - 이 모든 과정이 문제없다. 원고는 미리 있었고 (동시)통역은 일사분란. 대회장에는 1번은 한국어, 2번은 영어, 3번은 프랑스어, 4번은 스페인어로 자유스럽게 언어를 선택하는 작은 기계가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외국어 실력 때문에 뭔가를 할 수 없는 세상은 이미 아니다.

기조강연에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분 차례가 왔다. 제목은 <가장 오래된 미래의 길>. 세상사 대조적 현상들을 완벽하게 짜 맞춰 준비해 오신 명 연설임에 틀림없다. 특히 ‘좌-우’에 대한 설명이 좌뇌-우뇌 등을 넘어 한없이 상대적 대조적 개념으로서 제시되었다. 잠든 곰과 포효하는 호랑이를 비유한 판소리, ‘얽어도 장에 가고 굶어도 떡 해먹는 사람들’ - 한국인의 해학과 여유를 충분히 천착하셨다. 강연 내내 인터넷 동영상이나 이미지들도 소문대로 그 분야의 선각자답게 유려하게 사용하시고.

 

그러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로버트 리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스크린에 떠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이름이 두 번씩 흘러나왔다. 너무도 긴장해서 잘 못 들었을지 모른다. 나는 물론 로버트 리 프로스트라고 통역했다. 실은 순전히 내 귀의 착각일 수도 있었나 보다. 나중에도 다른 통역사들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니 말이다. 프루스트는 학부 내내 내겐 트라우마에 가까운 멀고 어려운 대상이었는데, 이렇게 또 나를 혼란케 한다.

그렇게 첫 행사가 끝났다. 갑작스러운 구절들은 많이 없었고, 좌중의 사람들은 작가들 특유의 진지함으로 너무 조용했다. 지정석이 끝난 바로 다음다음 줄에 아침 식당에서 낭패를 당했던 그 동양인이 유난히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혼자서. 대체 누굴까.

 

이어지는 축하공연은 뮤지컬인데, <미소 2 - 신국의 땅 신라>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미소 2’가 무엇일까. ‘미소 1’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춤과 음악을 하는 주체에겐 숫자 2의 의미가 특별하겠지만, 관람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다만 불편한 첨가물이었다. 예상대로 볼륨이 너무 컸다. 예상대로? 공연예술들에 대한 내 인상은 늘 나의 기대보다 훨씬 큰 볼륨이 내용 몰입을 방해했다는 기억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상이 적중했다. 내겐 언제나 볼륨들이 너무 높았다.

 

점심에 통역사들 몇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더러는 함께 일한 적도 있었는지 서로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첫 행사를 마치고난 안도의 마음은 서로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에누리 없이’라던 연사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것 ‘벤또’처럼 일본말 아니냐고. 그러고 보니 그런가?

 

순간 잽싸게 표준국어대사전이 장착된 전자사전을 찾아보던 영어담당이 그건 고유어라고 했다. 한국의 고유어? 그랬군요. 처음 의심을 내놓았던 이가 얼버무린다. 우린 가끔 외래어 노이로제에 시달린다.

 

난 그것보다 갑작스럽게 통역을 더듬거렸던 일이 떠올랐다.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요, 어느 나라 아이들이건 에누리 없이 - 에누리 없이 손가락을 다섯 개로 그립니다.’ - 거기서 ‘에누리 없이’를 ‘값을 깎지 않고’라는 말로 떠올라서 당황했던 순간. ‘가감 없이’ 또는 ‘더도 덜도 아니라’라고 옮겨야한다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동시통역이란 살벌한 일이다. 밥이 먹히질 않았다. 졸지 않으려면 커피는 충분히 마셔두어야 하리라. 첫날부터 지치면 큰일이니까.

오후 스케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서운하게도 파묵이 불참해서다. 그 사이 흘러든 말로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라는 효자 설에 이어 동반자 문제라는 루머도 돌아다녔다. 동반자? 그보다 그의 문학적 대성의 뒤에는 끝까지 글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지원해준 어머니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쪽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섣부른 직업을 갖지 않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호사는 아니다. 아들의 능력을 믿더라도, 환경적으로 허락이 안 되면. 아니면 결과적으로 불발이면.

 

상관없다. 소잉카의 등장엔 그 나름대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허옇거나 대부분 누런 사람들 틈에서 시커먼 얼굴의 그가 돋보이는 분위기. 꼭 노벨상 수상 때문이라기보다 역차별이랄까 흑인으로서의 자존심 하나만으로도 돋보이는 설정이었다.

 

그가 말하는 <마법의 등불>은 다름 아닌 창조성의 마법이었다. 예술적 창조로서의 글쓰기. 권력자들이 민중에게 호기심을 누르라고 명했을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은 혁명이었다. ‘변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광범위하고 원초적인 테러를 상상해보라!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변형적인 마음’이라고 통역했는데, 나중에 한국어판을 보니 ‘변화를 추구하는 지성’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 보편타당성 있게 느껴졌다.

 

이어서 르 클레지오는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이다>라는 제목으로 말했다. 화려한 마야문명은 사원의 화재 이후 책으로 남긴 역사가 없어서 해독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쇄술은 특권의 종말이요 지식을 분배를 뜻했다. 다만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도 식민지에서는 성서에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채찍아래 사는 노예들로 넘쳤다. 고향 모리스 섬에는 문맹이 30%. 현대에 와서 오히려 공부도 일도 않는 ‘니니’들이 생겨났다. 인간의 목소리인 언어만이 추상과 변화와 리듬에 의해 숭고함을 표현한다. 언어로 인해 인간은 완성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책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중에 접근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말문을 닫는다. 여기가 어딘가, 작가들의 잔치자리. 희망이 있구나.

 

첫날이라 긴장되었던지 방에 돌아와 조금 쉰다는 것이 만찬장에 늦었다. 아무렇게나 빈자리에 안내되어 앉고 보니 낯모르는 남성들 사이 불분명한 인종의 여성 하나만 끼어있는 테이블이었다. 그 여성도 나처럼 끼어 앉은 것일까. 까만 머리카락으로 봐서 한국인일까? 그렇지만 저리 큰 눈은? 가볍게 어디 누구라고 서로들 소개하는 틈에 보니 러시아에서 온 한국여자였다. 북소리 공연이 머리를 두둥두둥 울렸다. 큰 소리에는 정말 약하다.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4.

화요일 행사부터는 중복적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이루어진 분과회의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고, 컨벤션홀의 문학포럼의 일환인 <시조>에 참가하면 되었다.

시조 포럼은 21세기 황진이 같은 여성발표자와 하버드 대학의 맥켄 교수 그리고 네팔의 만능 시인 펜다이 회장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유창한 영어의 맥켄 교수, 매력 넘치는 한국어의 홍 시인에 이은 조금 독특한 발음의 네팔인 영어 - 청중들은 미국인 교수의 한국어 ‘청산리 벽계수야……’에 탄복해버렸다. 앙코르에도 만돌린에 맞춰 청산리를 열연하는 그 교수는 참으로 특이한 존재였다. 90세 아버지에게도 영어로 시조를 쓰게 독려했고, 아버지 또한 그것을 즐긴다는 완전한 시조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후에는 평화, 투옥작가, 여성 등에 집중하는 분과회의가 있었지만 통역은 의무가 아니었다. 산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데, 지하층에서 카페를 통과하여 호숫가 산책로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낮 시간에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자가 문 가까이 앉아 있었다. 첫날 아침 식탁에서 이리저리 좌석을 옮겨 다닐 때 보았었고, 오늘 점심 때 합석을 하게 되어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그 한국분이다.

 

점심때는 4인 식탁에 그 사람이 혼자 앉아있었으니까 합석을 하게 되었었다. 앞에 걸고 다니는 이름표로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면서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서 괜히 편했다.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앉다보니, 저쪽 창가에 가까운 식탁에 맥켄 교수 내외가 보였다. 화제는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저기 오늘의 주인공 맥켄 교수네요. 참 독특했죠?

예? 전 너무 놀라서. 뭔가에 그렇게 심취할 수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남의 문화에.

그런데 어제 서로 만나셨죠? 제가 아침에 먼발치에서 본 것 같아요. 좌석 때문에 불편해하실 때.

예?

어제 아침 식사시간에 말입니다. 맥켄 교수부인이랑 좌석 때문에.

아, 뭐 대순가요. 우리가 손님 쪽을 배려해 줘야지요. 그런데 실상 미국이나 유럽 쪽에선 별로 유명 작가들이 오지 않은 것 아녀요?

네, 뭐. 본부 쪽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절반쯤이 초청 케이스라던데요. 86개국인가 참가라면 40개국 가까이가 초청국이라던가 뭐. 외국 참가자들이 한 200명은 된다지요?

그렇게나 많아요. 전 온통 한국 사람들만 보이던 걸요.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상당수가 ‘코리언 센터’ 명패를 걸고 다니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온 교포들이래요. 한국센터 뉴욕지회, 캐나다지회 그런 거라더군요.

그렇구나. 그런데 참, 초청이라니요?

네, 저개발국가의 작가들을 대거 초청했다는.

아, 그래서 서양 사람보다는 아시아나 중동 혹은 검은 모습들이 많았군요.

실제로 오르한 파묵이 오지 않았지만 터키 사람들은 좀 왔다던 걸요. 터키는 참 그 영토로 보자면 90퍼센트 이상 아시아에 속하니까 아시아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우리 보기에는 좀 유럽 사람들 같지요?

파묵 씨 사진을 보면 아예 서양사람 같던 걸요. 사는 것도 서양인이죠. 난 처음에 그가 독일문화 쪽에 가깝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 그랬었는지. 내가 파묵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그게 독일어권 신문과의 인터뷰 내용 때문에 그리 되었으니.

그럼 혹시 독문과? 전 불문과라서 지금 통역으로.

예, 견원지간이네요, 후후. 그래요, 난 독문학을 전공했어요, 끝까지 해내진 못했지만. 건 그렇고, 파묵이 스위스 유명 일간지의 토요판 주간지 <매거진>에 말했던 것 때문에 독일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나 봐요. 그 전엔 몰랐거든요.

주간 매거진에요?

예, 잡지 이름이 <매거진>이었을 겁니다. 3만 명 쿠르드인이 이곳에서 살해되었고, 백만 명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되었다. 그런데 거의 아무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 뭐 그런 정도였죠. 1915년 오토만 아르메니아인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일이 터키에선 잘 감춰진 부분인데, 이제는 과거사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그게 반역죄 비슷한 재판의 빌미가 되어 한동안 떠들썩했지요.

노벨상 수상 전이었던가요?

예. 곧 바로 터키에서는 완전 보수 민족주의자 검사를 앞세워 공화국을 현현적으로 모욕한 터키인은 몇 년인가 징역형에 처한다는 헌법을 도입했어요. 파묵을 옭아 넣으려는 법이었죠. 소위 사후법에 의한 기소라서 더욱 반향이 거셌겠지요. 세계적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연합에선 아예 의문을 제시했어요. 파묵의 케이스를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인지 실험대에 오른 리트머스시험지라고까지 했으니까요.

리트머스 시험지라뇨? 파묵을 그냥 두면 이유에 가입 아니면 불가 뭐 그런 거요?

암튼 그런 분위기였죠. 국제 엠네스티는 파묵은 물론 그 법에 적용을 받게 생긴 다른 몇 명의 고소도 함께 취하하라고, 거의 압력이었죠. 국제펜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국제인권규약 중 자유권 규약을…….

자유권 규약이라고요?

예, 사회권 규약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법률적 효력이 인정되는 것이지만. 국제 규약이라는 것이 늘 권고 수준 아니던가요? 것보다 귄터 그라스다 움베르토 에코다 또 주제 사마라구, 바다 건너 업다이크도, 심지어 남미의 바르가스 요사 후작까지 엄청난 노익장 대가들의 반대성명들이 잇따랐지요.

요사 후작까지요? 그 사람은 페루 대통령에 나오고 그런 사람 아녀요? 하긴 놀랄 일도 아니네요. 작가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실연하고…… 그런 모양새는 이 시대엔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작가들이 반 권력 투쟁을 하다가 권력에 오르기도 하니까요. 돈 권력에도 이르고, 더러는. 아니 유명해진 상당수가.

어쨌거나 파묵은 곧장 비비씨에서 자신의 발언의 근본 취지가 터키 내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의도였을 뿐, 학살 사건 자체가 아니었음을 밝혔어요. 이로써 조국의 과거사와의 한판 승부에서 후퇴하는 듯 했지요. 하지만 곧 이어 그해 가을 스웨덴 아카데미는 파묵에게 영광을 돌렸지요. 앞서거나 뒤서거나 <타임>지에 세상을 흔든 100인에 선정되었고, 소신 발언을 한 영웅과 개척자 부분에.

 

(그랬었구나. 그런 재판과정에서의 소용돌이가 그를 돋보이게 하여…….)

 

난 내 생각을 재빨리 지워야 했다. 2005년 말에서 2006년 사이의 사건에 관해 난 왜 이렇게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일까? 내가 행복했었던 시절, 모교에서 기대주로서 강의에 열중했던 시절에 난 무엇을 더 했던가. 그녀가 계속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이름은 빨강』을 보면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어요. 오래 묵은 책이라 1, 2권을 가져왔는데 헛물 켰죠.

책들을 가져와요? 헛물이라뇨?

예. 사인회에 가져갈까 했죠. 소잉카의 사인회는 지금 바로 가야되어요. 두시부터.

 

 

그렇게 서둘러 식탁을 떠난 그녀를 그날 오후 곧 바로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 겨우 대회 이틀째인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나 자주. 그 순간, 그녀를 처음 본 것이 첫날의 아침 식탁이 아니라 그 전날, 그러니까 여기 도착했던 일요일 저녁때였다는 생각이 났다.

어머, 또 뵙네요. 이렇게나 자주.

참 그러네요. 낮술 들켰나요? 점심이 급했나 어째.

와인이 소화에 좋대죠. 그런데 저 여기 좀…….

예, 뭐. 전 그냥…….

그런데 혹시 대회 전날 오신 거 맞죠? 실은 그날 저녁에 로비 근처에서 뵌 것도 같아서요. 만물상 쪽에서 나오시는 걸.

어머나, 전혀 몰랐어요. 제가 눈도 나쁘고 또 멍하고. 그땐 감기약이 그곳에 있다고 해서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그럼 그 감기는?

예, 아마 버스의 냉방에서 그랬었나 본데, 약이 효과가 좋았는지 괜찮아졌어요. 약 먹기 전에 뜨거운 우동도 한 그릇 다 먹었거든요. 그것도 좋았겠지요.

다행이군요. 어떻게 아까 사인회엔 늦지 않으셨어요?

그럼요. 외려 소잉카가 거의 30분이나 늦게 왔어요. 인터뷰들에 지쳤노라고, 이해는 되었지만, 주최 측에서 하라는 대로 줄을 서있던 우리는 실은 더 지쳤는데도 암말 못했죠. 아니, 사인회용으로 준비된 신간을 살 때 받은 번호표대로 줄을 서라고 해서 좀 떠들긴 했죠. 내가 맨 앞에 서있었지만 들고 있는 표는 4번이었거든요. 세 사람 양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일이 합리적이 아닌 것 같아 언성을 높이게 되었어요. 난 덤으로 『해설자들』을 가져갔기 때문에 마음이 좀 조급했었나 봐요. 그게, 우리가 미리 메모지에 사인을 받고자 하는 이름을 써내는데, 이름과 성을 혼동해서 새로 산 『제로 형제의 시련』에다는 내 이름을 잘 못 쓰더이다, 속상하게. 그게 미안했던지, 황망하게 들이민 『해설자들』 옛 판에는 제대로 쓰더군요.

그럼 오늘 사인은 일단 성공적으로…….

글쎄, 사인이 무슨 의미일 거라고. 암튼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잠깐 인사를 건넸을 때의 인상과는 달랐어요. 피곤한 기색이 너무 심했어요. 내가 네그리튀드와 결부된 그의 유명한 문구를 적어두었지만, 그렇게 사인해줄까 싶어서, 하지만 일별도 하지 않고 내 이름만을 겨우 쓰던걸요.

네그리튀드? 그럼 그 쪽으로도 공부하신 거예요?

아니, 잘 몰라요. 아프리카의 검은 유산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정치적 엘리트주의적 패권과 지배에 대한 투쟁의 도구로 선포한 것이라면 사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도 있는 건지. 난 그것보다 타이거가 짓는 것 보았냐, 직접 행동하지, 그러니 니그로가 니그로의 유산만을 강조하는 구호가 무슨 쓸모냐, 그런 쪽에 의아심을 느꼈어요. 난 기회가 있으면 그 점을 질문하고 싶은데, 여기 운영방식을 보면 청중 측에서 질문이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질문을 준비하셨다고요?

예, 궁금했으니까요. 소잉카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나 무분별한 칭송이 자칫 현대화의 잠정적 이득을 무시하는 생각이라고 비판한 것 맞죠? 외침 대신 행동을 하라는 부분은 공감하지만, 난 그가 말하는 현대화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인지 궁금했어요. 유럽적인, 서양문명적인 변화를 말하는지. 또 그의 말을 확대해석하자면 한국문학의 경우에도 한국적인 것을 외쳐대는 대신 행동을 하라는 것인데…….

내일 저녁 다시 소잉카 발표가 있으니, 그때…….

질문이건 사인이건 참 부질없는 짓이지요. 알죠, 아는데, 여기 참가에 내가 괜히 자잘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나 봐요. 어쨌거나 파묵이 오는 줄 알고 가져온 『내 이름을 빨강』은 더 두꺼운데 두 권이잖아요. 그것들 들고 오느라 무겁기만 했어요. 펜에서도 파묵이 불참하는 것은 마지막에야 알았겠지요. 미리 그런 통보는 없었으니. 그런데 혹시 젊은 인도여자랑 오려고 했을까요? 그래서 그런 말들이…….

인도여자?

예, 인도 출신의 미국작가라던 걸요, 훨씬 훨씬 어린 나이이지만 첫 작품으로 무슨 상들에 빛나는 유망주라나 봐요. 파묵이 뉴욕에서 문예창작 가르칠 때 배웠을까? 서양에선 한 20년 차이는 차이도 아니지만요. 첫 결혼에서 ‘꿈’이라는 이름의 딸도 있다는데, 전 부인도 인텔리라 하던데, 역사학자라던가…… 암튼 이혼한 뒤에 인도여잘 만났나 봐요.

인도여자, 뉴욕…… 파묵에 대해서 꿰고 계시네요.

뭐, 독특한 일을 벌였잖아요. 재판도 그렇고, 필화사건을 겪는 작가들은 많지만, 무엇보다 그 박물관 말이어요. 노벨문학상 받은 뒤로 썼다는 그 『순수의 박물관』에 이르러서는 정말 뭔가 전혀 다른 문학의 콘셉트를, 난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네, 그건 나도 얼핏 들었어요. 소설에 나오는 박물관이 실제로 건립되었다고. 우리나라 어디 출판사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내 친구의 친구의 동생이 거기 파견 차 나갔다왔다고 들었는데. 생각만 해도 멋있던걸요. 189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던데, 벌써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 건물을 사들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박물관을 지을 발칙한(?) 생각은 노벨상 수상 이전의 것이라죠. 그런데 그 박물관 내용은 들어 보셨나요?

아뇨, 뭐 연인의 담배꽁초 등등을 모두 수집해 놓았다고 정도.

그게 3층에 다락까지 있는 건물인데, 1층에서 벌써 4000개가 넘는 담배꽁초가 있고 그것을 일일이 비벼 끄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방문객을 압도한다는군요. 생각해 보세요, 여자가 평생 피웠다는, 피웠을 담배꽁초를 모아서 거기다 날짜를 쓰고…….

…….

2층과 3층엔 소설 전체 83장을 말해주는 83개의 캐비닛에 수천 가지 사진과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락 층에는 서술자 케말이 머물던 공간이라고 해서, 작품의 초고와 박물관 설계도,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판된 『순수 박물관』을 늘어놓은 거예요. 그쯤에 이르면 작가와 등장인물은 하나가 되고 말죠.

…….

퓌순, 그 여자, 퓌순의 귀고리로 대표되는 기념품 가게에선 온갖 잡동사니를 팔고 있고. 일단 박물관에 들어간 사람은 마취에 걸려서 기념품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죠, 자신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가 하는 착각에 빠져서.

슈퍼마켓 계산대 옆에 초콜릿이나 껌 등을 진열해놓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네요. 마지막 순간까지 고객의 푼돈마저 수탈하려는, 강력한 자본주의의 원리가……. 책은 꼼꼼히 읽으셨겠네요!

네, 뭐. 40권인가를 쓴 작가이고 보니 아직도 번뜩이는 말을 어찌 할까 싶은데 대단한 구절들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대부분의 인간에게 삶이란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야할 행복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 압력과 처벌,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말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요즈음 처음으로 느낀다…… 등 등, 무시무시한 진단도 아직 내 뇌리에 박혀 있어요.

말장난 같아도 대가들은 다르군요.

말장난일 리가. 차라리 천재들이죠.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심각한 질병이라고? 뭐 그런 인터뷰도 있었지요, 아마? 그렇게 단언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소설가들에겐 신선한 충격을 주죠. 어중간한 소설가들은 그렇게 단언하지 못해요, 경박하다는 평판이 두려워서라도.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주인공 케말을 긍정적 인물이라고 밀고 나아가는 작가 또한 정신병 아닐까요? 그 말이 심하면 4차원의 두뇌를 지녔다거나.

암튼 독특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탈 경계죠. 소설인지 현실인지. 음악이 춤과 공연과 페스티발로 확대되어 가듯이 문학도 영화로 인터넷으로 이제는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이겠지요.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로 도피했던 문학이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가능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다시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제의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제의? 제의라, 그렇군요. 그런 느낌이 들곤 하더군요.

군중들이 모이기로는 경기장뿐 아니라 음악을 좀 봐요. 거의 광란에 가까운 혼돈 속에서 열광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것이 음악인지 연극인지 원시시대 종교의식인지 알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냥 도취와 마취와의 경계도 없고. 약물에도 의존하는 인공적인 도취상태라면 말입니다.

인공적인 도취상태?

심했나요? 전 그냥 맑은 정신으로 그런 퍼포먼스를 해낼 인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에요. 어떻게 5분 10분이 아니라 한 두 시간을 그런 망아의 경지에서 노래하고 춤 출 수 있죠? 알코올이든 더 강한 무엇이든, 인공적인 자극이 없이 그런 시간을 버틴다? 상상이 안 가서요.

참 별난 생각을 다 하셨군요. 난 그저 취미가 아니면 접어 버리는. 뭔가를 분석할 여지도 없이 덮어버리는 종류죠. 지금쯤이면 많은 것이 버거워서…….

아님, 일종의 경영?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재라는 건 돈과 성공으로 연결되지요. 완전히 창의적인 무엇인가만 살아남을. 이 피 튀기는 경쟁사회, 몇 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싸잡아 대중이죠. 대중은 쓰레기 인생. 주체는커녕 철저히 대상이라는 이름의 쓰레기. 그렇담 문학에도 철저한 마케팅이 필요한 세상이겠지요.

어머나, 젊은 분이라 생각이 다르군요. 천재의 전략쯤으로 본다는 말이죠. 난 그냥 소설 『순수의 박물관』 그 자체에도 질겁했어요. 그런 정도의 집착이라면 무서운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백하자면 내게도 그런 작은 집착이 있었다고 해도 될지…….

네?

이상하네요. 취기도 아니고, 왜 이런 망언이 불쑥 나오는지.

그녀는 조금 남은 잔을 훌쩍 들이켰다.

제가 바로 그 담배꽁초 때문에 타격을 입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건 핑계이고, 어쩌다가 세 마디 꽁초를 내가 가지고 있게 되었어요. 짐 속에 묻혀 있었다고나 할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참 새삼스런 일이라서 그냥 짐 속에 남아 있었는데, 알고서도 못 버리고. 그런데 『순수의 박물관』이 나온 거예요.

『순수 박물관』, ‘의’ 없이, 책 이름은 그렇게 번역되었어요.

예, 『순수 박물관』. 거기 옛 연인의 담배꽁초를 모으는, 아니 그녀와 관련된 모든 사소한 것들을 수집하는 광적인 집착을 자랑처럼 들고 나온 주인공 탓에. 아니, 파묵 탓에 내가 상처를 받았어요, 괜히. 난 그저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더 늙어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게 될까봐. 아니, 사실은 언젠가는 정신이 온전할 때 버려야 할 물건들이었지요.

물건들? 그럼 혹시 그런 것들이 더 있으…….

더 있냐고요? 더 있다면 더 있지요. 혹시 발견이 되어도 아무도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할. 그런데 그 담배꽁초 세 개는…….

꽁초 세 개는…….

그걸 이번 경주행 이전에 버렸답니다.

경주행 이전에요? 왜죠?

왜냐고? 젊은 분이라서 이해를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여행 중엔 죽을 확률이 더 많다는 건 아시죠?

거야.

그거죠. 그래서 남아있을 추한 물품 목록에서 그걸 빼자고 한 거죠.

그럼 그동안 여행일랑은 한 번도?

아뇨, 가끔은 여행을 했지요. 그땐 『순수 박물관』을 생각한 적도 없고 또 꽁초의 존재를 어슴푸레 잊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챙기면서 아차 이건 아니다 싶은 거죠. 꽁초란 것이 너무 적나라하지 않아요? 어쩜 디엔에이마저 그대로 존재할 터이니.

디엔에이요?

내 것인지도,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도. 지금 좀 애매하게 되긴 했지만.

아니 담배를……?

물론 아니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입에 대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장담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나는 상황?

멀리 가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언제부터서는 기억 자체가 의심쩍게 변하죠. 왜곡된다고나, 자의적 기억이라고나. 글쎄. 암튼 누가 디엔에이에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뭔가 흔적이 있는 채로 남아있을 물건이, 온전하기는커녕 일종의 쓰레기인 그런 것이 을씨년스러워서. 아차, 이런 단어일랑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이라서 평생 쓰지 말아야 했었는데 왜 이렇게.

잠깐만,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인 단어들이라고요?

예, 그런 느낌이 드는 단어들이 있죠. 나 문학한다…… 그런 울림의 단어들. 유난히 문학스러운 단어들이랄까 그런 표현들.

에이, 그건 너무 편파적이시다.

편파적이라?

그럼 뭔데요?

내 얘긴 그러니까 딱 보면 문학 냄새를 풍기는 표현들 있잖아요, 이건 굳이 말하면 호불호의 문제인데, 난 냄새나는 건 좀 피하고 싶거든요. 비문을 쓴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문학 냄새나는 문장들은 가까이 하기 싫거든요.

에이, 그렇다고 무슨 단어 하나에.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스산하다, 쓸쓸하다, 그러면 되는데. 을씨년스럽다, 그렇게 말하면 뭔가 내놓고 문학하겠다는…….

재미있으시군요. 문학스러워도 안 된다, 그렇지만 문학이어야 한다.

예, 난 기실은 시인에 대해 외경심이랄까, 시인들을 무서워하는 편이죠.

무섭다면, 좀 이해가 안 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 나을지. 종잡을 수 없어요. 시인이라면 일단은 존경스러운데, 언어의 압축이라는 미에 도달한 사람들이려니 했다가. 그런데 실제로는 가령…… 설명은 어렵군요. 너무도 표피적인, 그러니까 시인에게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서조차 너무 감상적으로 여겨지는 단어들을 직접 그들의 입에서 듣게 되면, 생활에서, 그게 순수인지 정열인지, 아니면 치기인지. 그 경계선은 어디죠? 난 물론 너무 심플하고 너무 드라이하다는 핀잔을 들었지만.

하하, 실례지만 심플하고 드라이하다면 시인이 아니신가 봐요!

시인이 못되는 거죠. 하지만 뭣보다 순수는 상처를 주지 않아야 순수죠.

상처까지야?

괜스레 상처가 되지요. 난 사람을 일반적으로 존중하는 편이예요. 각자 나름대로, 대개는 그리 달갑지도 않은 역할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모두를. 그런데 본능적이랄까, 명과 실의 간극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 혼란은 상처가 되고…….

가볍게 생각하셔요.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 아닌가요?

하긴 그렇군요. 저 그럼 손이나 씻고 저녁 순서에 대비합시다.

 

 

5.

저녁에는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행사가 진행될 것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로비에 늘어선 인파 속에서 설마 다시 그녀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인파에 밀려 밖에 나오니 버스는 여남은 대는 족히 되어 보였다. 표현의 자유를 다루는,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행사였고, 다들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동시 통역기를 받아들고 회장으로 들어갔다. 좌장으로 나온 유명 소설가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이렇게나 친숙한가에 놀랐다. 육안으로는 난생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 책 속표지 여기저기에서 보아온 얼굴이 저기에 있구나, 그 정도였다. 작가 특유의 있을 법한 고약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참 괜찮은 평범한 얼굴이 좋아보였다. 그가 점잖은 좌장 역할만 담당한 것이 안 되었다. 의견 발표의 기회가 없다니!

 

첫 연사인 평론가는 많은 평론가 중에서 경주 출생이라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는 경주 출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통일문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북한문학의 현황과 작가들의 인권에 관해 더 집중하고 있었다. 주체문예론, 선군문학예술에 관하여 객관적 자료들을 들어서 오직 인민군의 활동을 예찬하는 주제의 획일성을 - 예상대로 - 전달해주었다.

 

이어서 민족문제 관련 인사 역시 경북출신이었다. 한국의 필화사건을 시대별로 제시하며, 필화 사건이란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중심에서 김지하 씨의 「오적」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괜히 눈물이 났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감동하면 절대로 안 된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니까.) 지난 70년에 있었던 국제펜한국대회 때 그가 바로 감옥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구속된 문인이 없이 치르는 이 대회야말로 진정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아닐는지.

 

정작 북한의 실상을 다루는 발표들은 상상을 절했다. 탈북 작가들의 ‘참으로 눈물겨운 땅’ 그곳이라는 절절한 증언들은 차라리 그들의 발언이 우리 체제의 선전용이기를 바라는 억하심정을 유발했다. 어찌 사람이 사는 곳이 그 정도일 수가……. 한 여성은 원래 전설적인 무용가 최정희 씨의 직접 제자였다는데, 지도자동지의 은밀한 총애를 받은 무용수 아무개 씨와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던 자신의 생을 회고했다. 만찬 이후 감상할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조작된 누명으로 끌려갔었다는 남성의 경우도 비슷했다. 실명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이런 포럼에도 목적이 아주 없지는 않은 듯, 탈북문인들의 단체가 펜의 일원으로 인준을 받을 예정이란다. 물론 회원국 대표들의 투표에 의해서.

 

『풀하우스』로 한국에 일시에 유명해진 재일동포 유미리 씨는 고상한 한복 차림으로 머리에 한 줄짜리 첩지까지 얹고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한국어로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유창하고 빠른 일어가 튀어나왔다. 이번 포럼에서는 프랑스어가 빠져서 가능하면 영어 버전으로 듣고 있던 나는 당황했다. 얼른 통역기 채널을 한국어로 돌리려다가 그냥 꺼버리고 한국어 발표문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녀의 일본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서 모르는 외국 영화를 - 최근엔 독일어로 하는 <굿바이 레닌>이었던 같다 - 보게 되면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언어를 크게 틀어놓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일단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려면 소리를 들어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통역이란 참 부족한 의사소통행위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간에 쫓겨 떨고 있었다. 순서가 마지막이다 보니, 또 좌장 소설가님이 마음이 독하지 못해서 앞 선 발표자들에게 시간 엄수를 잘 못한 바람에. 아니면 한복을 차려입고서 일어로 말하고 일어로 읽는 부조화에서 도망치는 속도일까.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제한으로 질의와 응답은 형식적이었고, 모두는 서둘러 다음 행사장인 5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두 세대의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기에는 퍽 많은 숫자였다. 전망대는 서늘하다 못해 추웠다. 중앙부에선 경주시장 중심의 주행사가, 양쪽 날개에서는 자유로운 삼삼오오 대화들이 펼쳐졌다. 추위 때문에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여러 칵테일까지 준비된 즉석 바에서 와인 잔을 들고 나오다가 그 소설가를 또 만났다, 역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내가 열심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나, 정말 와인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닌데, 저 원래 소주를 좋아해요. 없으니까 이거라도. 그런데 왜 소주는 없을까요?

어머나, 술꾼이세요?

술꾼이면 다른 독한 칵테일을 마시겠지요. 그냥 뭔가 먹으려면 알코올이 필요해요. 춥기도 하고, 찬 음식은 별로거든요, 특히 고기를 먹어야 하면.

딱히 고기는 아니잖아요? 다른 것들도.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기 케밥 같은 것도…….

예, 뭐. 사실 난 가슴이 아파서 뭘 못 먹을 것 같아요.

안되어요, 뮤지컬이 꽤나 길다던데요.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러니 드셔야죠. 그런데 왜 가슴이. 아, 그 북한의 수용소 어쩌고.

예, 뭐. 아뇨, 난 유미리 씨 때문에 더 울고 싶어졌어요. 대한민국 국적임을 말하려고 한복을 차려입었을까요? 유명하다 해도 아직 젊은 나이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어렸을 때부터 마땅히 있을 장소가 없어서 사는 것 자체가 별로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가…… 매순간이 시련인 현실을 참아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썼다고, 유토피아,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창출해 내는 것이 이야기라고, 그렇게 말하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린 그 얼굴을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어요.

전 뭐 독특하고 똑똑한 젊은 여자 - 뭐 그 정도의 인상이었는걸요. 생각해 보세요, 일본이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개화되었다고는 해도, 어머니가 가출했을 정도의 가정환경이 구김살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유부남의 아이를 가지고서 미혼모 선언을 하는가하면, 헤어졌던 연인이 말기 암이라는 걸 알고선 함께 살다니요! 의지가 확고한 작가 - 그런 인상이었는걸요.

물론 그랬죠, 저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안쓰러움이 일었어요, 나 혼자. 유미리 씨가 들으면 자존심 상하려나? 암튼 정직하기도 외로울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어머, 생각보다 감상적이시네요, 갑자기. 우리가 알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말이에요.

그러게요.

게다가 오늘은 요덕수용소로 눈길을 돌려야 주류에 속하는 것 아닌가요?

주류라뇨?

프리 더 워드 - 이것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언론의 자유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걸요.

정답, 정답. 난 실은 미리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한답니다. 물론 힘든 일이겠지만, 힘들기까지야, 한참 번거로울 것이라서 그냥 이렇게.

관심이 없으세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무섭죠. 그려질 광경이 미리 떠오르기도 해서. 제가 개성엘 다녀왔었거든요. 개성관광이 금지되기 한 달 전쯤이던가, 당일 코스로. 새벽에 임진각에 도착해서 어둑어둑해서 되돌아 왔어요. 물론 종일 해는 떴지만 어둑어둑했단 느낌이지만요. 전체가 그림자 도시 같았거든요. 길에 면한 아파트 창문으로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보였어요. 얇다 못해 세트 같아 보이는 벽은 곧 무너질 것 같았어요. 얇아서가 아니라 꽁꽁 얼어 있다가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갑자기 부서져버릴 것 같은 느낌.

어머나, 겨울이었어요? 차들이 많았나요?

아니 겨울은 아니었고, 늦가을. 차들이란 게, 관광용으로 줄지어 가는 버스들 이외엔 차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죠. 세워진 차 한두 대가 종일 본 전부였거든요. 차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없었어요. 그곳 인구밀도가 그리 낮은 건지. 박연폭포를 향해 걷는 길이 처음 내딛는 북한 땅이었죠.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를 걷는데, 사람들은 남측을 통과해서 온 방문객들뿐이었어요. 평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북한 사람들은 정말 일터에만 열중하는가 싶었어요. 오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본 몇몇 사람들은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다른 색 복장으로 소리도 없이 걷는 인상이었어요.

그런 인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수용소라면 미리…….

그렇죠, 하물며 수용소라면 얼마나 어두운 색깔로 그려질지.

어두움을 싫어하세요? 하긴 어둠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예, 어둠을 싫어해요. 지금까지 외면해온 어둠을 굳이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심정, 비겁하다고 해도 할 수 없죠. 인생을 꼭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어머나, 인생은 어둠이라고 단정해버리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얼마나 밝을까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머나, 한창 인생의 여유로움을 즐기실 차례 아닌가요? 저보단 좀 위이신 것 같은데, 자녀들 다 크고.

한참 위 맞아요, 한샘이 우리 애들 또래로 보여요. 그렇다고 여유로움 같은 건 아직.

그렇게 식은 식사가 끝나고 요덕수용소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소리도 내용도 무대라서 과장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대 위의 극을 견디어냈다. 냉방이 터무니없이 잘되어서 냉기를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1막이 끝나고 휴식 시간, 복도 구석으로 나가서 제자리 달리기를 했다. 마음 뿐 아니라 다리가 통째로 동태가 되었지만, 중간에 돌아갈 궁리는 나지 않았다. 아차, 그 사람은 어쩌고 있을까. 처음부터 아예 돌아가고 싶었다는 그 사람은. 밤은 벌써 어두웠고, 난 어둠 속에서는 유아가 된다. 함께 손을 잡고 있을 걸. 순진하게도 좌석표에 따라 앉은 우리는 각각 따로 얼고 있었다.

 

 

6.

수요일은 오전은 총회장에 있었고, 오후엔 관광이 있어서 한가했다. 저녁엔 본격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중심으로 <나의 삶, 나의 문학>에 관한 발표가 있을 것이었다.

 

어제 나보다 더 얼었을 그 작가가 오늘은 보이질 않았다. 아침 식사에서도, 점심 식사에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닐까? 다른 개인적인 일정이 있는 것일까? 아니 시내관광에 참석했을까?

내 룸메이트는 또래 통역사들과 어울리느라 방에 늘 없다. 관광에 참석했을 수도 있겠다.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워서 천정을 보면서 쉬려는데 이상하게 좀이 쑤셨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름 석 자, 한국인이라는 것. 소설가라는 것. 그 뿐이다.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 그것도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다. 그래, 인터넷을 찾아보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네이버 씨, 아무개를 찾아주세요. 엔터~ 직전에서 멈췄다. 아니다, 이것은 심부름센터 짓과 무엇이 다른가, 직접 들쑤신다는 것만 다를 뿐.

 

프런트의 다이얼을 돌리고, 방을 찾아서 전화연결을 부탁하는 것. 그것이 더 정직할 터였다. 연결이 된다면 쉬고 있는 것을 방해하는 일인데. 대답이 없다면 관광에 참석했을 것이고 쑥스럽기만 할 텐데. 어느 것도 좋은 모양새는 아닐 것이다. 딱히 용건도 없질 않은가. 아니, 어제 공연장이 너무 추웠고, 또 조금 겁을 내고 있었으니 안부 정도는? 나는 벌써 프런트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에 있었다.

 

예에.

저기, 선생님, 저 한금실이예요.

아이쿠, 한샘이 웬일이세요? 관광을 안 갔어요? 왜요?

그냥. 그보다 어제 공연장도 너무 추웠고 해서, 오늘은 어디에서도 안 보이시고 해서. 그러니까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못가신거예요?

아, 그게. 난 오늘 아침 금장대 버스를 타느라 일찍부터 서둘렀어요. 벌써 한 행보를 했으니 지쳤지요.

금장대라뇨? 시낭송회 말이어요?

예. 시낭송회요. 한샘, 이왕 방에서 쉬는 것이면 이리로 올래요? 전화로 이야기하느니.

어머나, 쉬시는데 방해가.

무슨 방해요. 그냥 함께 따로 쉬면 되죠.

네?

오세요. 여기 방에서 보문호가 다 내려다 보여요, 베란다에 의자가 둘 있잖아요.

아예 방문을 빼곡히 열어놓은 그녀는 벌써 베란다에 나가 앉아 있었다.

여기로 와요, 아직 해가 따뜻해요. 냉장고에서 뭐 하나 들고 와요.

아, 예. 괜찮은데요. 그런데 오늘 왜 시낭송 쪽으로 가신 거예요? 금장대를 보러 가셨나요? 「무녀도」의 배경이라서?

그걸 다 아세요? 난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거기 가니까 그런 소개가 다 있더라고요. 금장대 자체는 최근에야 복원했다더군요.

금장대에 가시려던 게 아니라면, 누구 시낭송하시는 분을?

아뇨. 꼭 참석해야 했어요. 나도 할 거니까.

하시다뇨? 시낭송을? 시인이 아니신 걸로…….

예, 일이 그렇게 되었답니다. 시낭송회를 본 적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그게 참 쑥스럽게 된 일이랍니다. 욕심이지 뭐겠어요. 일단 국제펜대회 참가는 망설임 없이 결정했어요. 지난 번 한국 개최 때에는 작가가 아니었고, 다음이라면 살아있을지 의문이고. 살아있더라도 그때까지도 무명이면 못 나서겠죠. 생애 한 번은 국제적인 작가대회에 참가한다 ― 순진한 발상이지만 그냥 그렇게 정했어요. 그런데 공문형식으로 ‘한/영문’으로 시를 집필하여 제출하면 대회장에서 발행되는 책자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왔어요. 첨엔 의아해 했어요, 시인도 아닌 터에. 다음엔 시를 쓸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영어로도 써야한다면 영어로 먼저 써야 운각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도 무지가 용맹이라고 참가한 흔적이라도 남길까 싶어서 시 같은 걸 짜내었죠. 그런데 이번엔 ‘영어로’ 낭송회가 있다는 전갈이 왔어요. 다시 망설였죠, 그러다 에라 내친 김에 - 그렇게 실없는 용맹을 부렸어요. 정말 시인도 아니면서.

잘 하셨네요, 그러면 은근슬쩍 시인으로 등단하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어림없죠. 우리나라 등단은 독특한 문화지요, 아주 엄숙한.

건 그렇고, 오늘 낭송회는 좋았어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던가요?

처음 프로그램 꼭 그대로는 아니지만 조금 변경된 순서가 제시되었고 그대로 진행되었어요. 한국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았고, 특히 경주지역 문인들이 잘 섞이었고, 어떤 언어를 선택하든지 하나의 언어로 진행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조금 무시되기도 하고. 이상하게 말해도 될까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요?

난데없이 웬 비빔밥.

아 그게. 비빔밥을 싫어하는 성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몰라도?

외국 펜 회원들과 한국 펜 회원들이 아무렇게나 섞인 건 좀 수선스럽다고나 할까. 1부는 외국펜, 2부는 한국펜 그런 쪽이 나았을까? 정말 단아한 한국형 미녀이면서 영어가 유창한 아나운서였는데, 아나운서가 마이크로 소개해주는 대로 책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제가 또 느리기고 하고.

아, 그런 말씀이시군요.

암튼 오늘은 일찍부터 수선스러웠어요. 아침을 2층 보문에서 먹고 로비 쪽으로 서두르면서 희한한 풍경을 보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무슨?

멀리 분홍 꽃 재킷에 분홍 바지를 잘 맞춰 입은 여자가 마주오고 있었어요. 이름표를 건 것이 펜 일행이었죠. 깜작이야. 멀찌감치 보아도 우걱우걱 양치질을 하면서 걸어오는 거예요, 복도 한가운데서. 말 그대로 아침 먹은 것이 솟구쳤어요. 틀림없이 한국여자야, 라고 누워서 침 뱉는 욕을 하면서, 피한다는 것이 화장실이었어요. 멍청했죠. 곧 뒤따라온 그 사람의 피 튀기는 열정의 양치질에 기겁해서 도망치다시피 다시 방으로 올라갔어요. 방에서는 룸메이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찍 나왔던 참인데. 그렇게 출발 전부터 엘리베이터를 오르락내리락 했으니 진이 다 빠졌죠. 기러기가 쉬어간다는 금장대 구경이라고 맘먹고 기를 쓰고 올라갔어요. 시낭송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볼 것이라서 꼭 가야만 했으니까요.

그럼 시낭송 스케줄을 다 따라하시려고요.

그게 나도 낭송을 할 양이면 다른 사람의 것도 들어줘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런데 시내관광은 부러 쉬시려고 안 가신 건데 제가 이렇게.

아니 이렇게 느긋하게 ‘초추의 양광’을 즐기는 게 더 쾌적한걸요. ‘정원 한 쪽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떨어지는 해가 아니니까 즐긴들 죄로 갈 리 없겠죠. 그런데 한샘은 왜? 젊은 분이 일단 무엇이건 보고 참여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 아녀요?

저야 늦게 갑자기 참여하게 되어서 큰 관심이랄 게.

난 이만큼의 일정이 빠듯해요. 너무 많아요, 다 참석하기는.

그런데 문무대왕릉엔 가까이 가는 것 아니겠지요?

설마. 그냥 감은사지 석탑이나 둘러보겠죠, 바다 속 왕릉을 어찌.

그렇겠죠. 그때 7세기에 벌써 화장에 수장을 하다니, 그런 걸 보면 화장 개념이 불교에서 온 게 맞는데, 요샌 교인들이 앞장서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요샌 합리적인 사람들이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우리가 전통적이라고 하는 게 무속신앙, 불교에 유교가 섞여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녁에 동국대학교 캠퍼스로 갔다가 늦게 돌아올 예정이라지요? 뭐 따뜻한 걸칠 것을 챙겨가야겠지요?

네,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예, 그럼 이따가.

그날의 대화는 거기쯤에서 끝났다.

 

 

시내의 대학 캠퍼스로 옮겨가려면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었다. 다들 관광을 가고 없으려니 했는데,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설가는 내가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는 로비에 나타나지 않았다. 왜, 나는 또 그녀를 기다린 것일까?

 

호텔을 출발한 여남은 대의 버스는 10킬러미터 남짓이라는 학교까지 근 30분이나 걸렸다. 시작과 꼬리가 길다보니 그럴 것이다. 호텔 팀은 알맞게 도착하였는데, 시내 관광 팀은 늦어지고 있었다. 시내 관광이 지체되어 프로그램 진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과의 변이 전달되고, 그러고도 한참 있어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예정 시각인 6시를 20분도 더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진행자 쪽 무대 한 쪽이 소란해지면서 외국 회원 두어 사람이 본부석 마이크를 행해 돌진했다. 벌써 마이크 대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왁자지껄 수상한 것이…….

사정은 일촉즉발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순간 진땀을 흘려가면서 겨우 그들을 진정시켰다. 오후 관광 코스에 원전폐기물공단이 들어있는 것에 대한 항의인 모양이었다. 이미 돌아오는 버스에서 불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작가들 중에 상당수가 원전에 반대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인데, 특히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에, 한국의 원전은 안전하다는 식의 선전에 분개했더란다. 그러니까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간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나 보다. 다행스럽게 합의가 도출된 모양이었다. 마이크로 그런 내용들이 확산되기 이전에 주최 측에서 간곡히 말린 것이 통했나 보다. 그런 항의를 ‘이해는 하고 또 한편 동감이지만, 항의를 할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주최 측의 고민을 이해해야 했다. 행사지원금을 받은 터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후문이었다. 행사 지원금이라는 것이 늘 말썽이다. 순수한 지원이란 드문 세상이니까.

찰나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연사들이 연단에 올랐다. 말을 해방하라, 프리 더 워드 제 2막에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곤 하는 시인 고은 씨도 함께 <나의 삶, 나의 문학>으로 진행될 것이었다. 객석과 가까워 친밀감을 주는 무대 위에서 좌장 소울 회장의 빨간 양말과 르 클레지오의 하얀 양말이 두드러졌다. 서양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차림새에는 무신경 한 듯. 가운데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전통 복장을 고수했다. 그 헐렁한 원피스 같은 윗도리를 보며 생각했다, 의상은 가리게일 뿐이구나.

 

좌장인 소울 세계회장은 자유언론에 대한 수필과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만해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경주와 친해졌다고 들었다. 그는 앉은 차례대로 먼저 소잉카를 소개한다.

소잉카는 <작가와 의례>라는 제목으로 말할 것이었다. 영어로 보면 제의적 의례라는 말일 것이 분명하다. 그가 쓰는 것들은 의례와 관련된다고 한다. 사회 자체의 표현이 의례요, 사회를 확인하는 것이 의례이고, 계절을 찬미하고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것도 의례라고 한다. 비합리적이 아니다, 미신적이 아니다, 영적인 것을 따르지 않는다 - 그렇게 자처하는 사회 속에서도 의례는 존재하는 것이란다. 의례는 어쩌면 권력과도 통할지 모르는데, 작가는 의례의 남용을 조사하고 비판하고 반대 의례를 창조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어려운 말인데 소잉카의 출발이 희곡 장르이고, 희곡 장르는 그리스 고전극의 의례에서 출발하기 때문일까? 그로서는 살아가는 것이 곧 글쓰는 일이라고 했다.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체험했지만, 그 단선적 교육이란 금기 사항뿐이었고, 그러나 창조성이란 영원한 것이라고.

 

다음 순서인 우리의 호프 고은 시인님은 청중에게 주는 원고 없이 시작했다. ‘푸른 산’과 ‘흰 구름’에 기대어, 노벨상 수상자들은 손님으로서의 흰 구름에, 자신은 주인으로서의 푸른 산에 빗대는 것 같았다. ‘관계가 의미를 만든다.’ - 자신은 구조주의에 가깝다고, 실존주의를 부정했다. 존재한다는 의미를 ‘언제 어디’에 두기 때문에, 우연의 생명체로서의 보편을 믿지 않고, 필연의 존재, 즉 특수성을 믿는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은 함께 존재하느니. 한국전 3년간 청년 1/3이 삶을 중단했다 - 그 결과로서 그가 존재한단다. 그러므로 그들의 중단된 삶이 그의 삶의 의미이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문학을 한단다. 그러므로 그의 시의 본질은 애도의 문학이라고. 우와! 자신의 문학의 본질을 확고히 알 수 있는 작가들이 몇이나 될까. 역시 출중한 분이구나 싶었다. 애도의 필요성에는 100% 공감한다. 옛날에도 그랬다고, 6만 년 전 어린아이 미라 옆에 히아신스 화석이! 장례문화는 곤충에게도 있다고. 5천년 이래의 과거가 오늘의 시가 된다, 시인들은 단명, 요절, 옥사, 자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음을 일깨운다. 겨우 30편 쓰고 죽은 시인이 그의 뮤즈이니, 그의 뮤즈는 과거에 헌신한다고. 그 발언 자체가 서사시다. 산자여 따르라…… 라던 빛고을 광주의 노래가 떠올랐다.

간단한 질문에 답할 때 나온 말, 이웃이 피해를 입을지라도 개인적으로 태풍을, 폭풍을 좋아한다고 - 어쩌나, 사회적 선한 의지만으로 뭉친 것만 같았던 그의 인간성의 다른 면이 드러난 것인가?

 

르 클레지오은 정 반대로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다. 제목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때문에 쓴다.’는 요지다. ‘손으로 씨를 뿌리고 눈으로 수확한다.’는 속담이 고향 모리셔스 섬의 크레올 말인데, 작가는 무슨 싹이 날지도 모르면서 책을 쓰고 독자는 그저 읽는다는 말이란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솔리튀드를 느끼는데, 영-불 사이 부모를 두고 프랑스령 태어나서 2차 대전 상황에서 8살에야 영국군 의사인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 영어를 원한 아버지. 그러나 그는 따뜻한 옛것을 향한 그리움으로 시를 썼고, 나중에는 오케스트라에 심취하다가 코믹을 썼는데 자신의 선생님들을 등장시켰다고. 작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몹시 더운 여름 차일을 내리고 들어박혀서 더위를 피하며 쓰고 출판하고 상 타고 그러나보니 작가가 되어 있었단다. 이어서 많은 여행 속에서 작가는 인류학자라고 느꼈단다. 미국 인디언과 3년 정도 살면서 느낀 것, 문학은 글로 쓰지 않더라도 이미 존재한다는 것.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은 경이, 놀라움이다. 마음은 늘 다른 책들에 사로잡혀 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상황에 대한 갈망이다. 꿈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꿈, 다른 상황에 대한 열망,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현실을 떠남이다?

 

한국어로 들었으면 정확했을 뻔 했다. 그의 목소리도 그가 사용하는 단어도 중요했기에 영어로 들었다가 조금 낭패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시작된 만찬은 다른 어느 때보다 푸짐했다. 와인이 거의 무진장 제공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은 여기 저기 늦게까지 남아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떠들어 댔다. 나도 그렇게 해서 소울 회장의 테이블 가까이로 갈 수 있었다. 그 사이 회장은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고 부인만 내가 찾던 그 소설가랑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전 총독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더 라이트 호노러블’이라는 칭호를 부르는 그녀가 신기했다. 저런 걸 어찌 다 아남!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이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여기에 참석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통역사로서. 나 자신도 누군가의 메모를 정리하다가 한두 편 단편을 발표한 글쟁이에 속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 소설가가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주면서 사진을 부탁하는걸 보니 정말 이 캐나다 여성을 존경하는가 싶었다. 사람들이 또 밀려오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양반을 양보하고 우린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이 여성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되었어요. 지금은 은퇴했으니 파트너 동반여행 자체가 무리는 아니겠지만, 소울 회장보다 한참 연상인데 그럼 칠순도 넘긴 나이겠죠. 어디 동반뿐인가요. 행사마다 동참하잖아요, 걷기도 조금은 불편해보이면서. 홍콩 태생의 중국인이 어려서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건너가서 캐나다에 뿌리를 내렸다 - 것도 모자라서 총독까지 지낼 수 있었다니.

우와, 그 정도이시구나. 그런데 왜 파트너라고 하시는지?

아, 일단 소울 회장과 다른 이름을 쓰고 있고, 클락슨은 첫 결혼의 성이라죠, 아마. 제가 그냥 훑어 본 바로는 둘 사이 오랜 동반자적 관계였다가 클락슨의 총독 취임 시에 거행된 결혼식이니까 그냥.

네, 그렇군요. 그런데 난 고은 선생님 이야기 들으면서 속으로 반론을 펴보았어요, 속으로만. 보편이 없으면 특수라는 개념이 생기는가요? 보편을 향하지 않으면 특수 이익집단을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문화란, 문학도 그 범주에서, 구체적 특수성에서 해방적 관심을 보이면서 동시에 보편주의의 형태를 대변하는 양가적 것이라는 테리 이글턴적 관점에서 하나만을 선택한다는…….

어머나, 이글턴이라면 미적인 것이야 말로 인간의 에너지들을 근본적으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모든 헤게모니적이고 도구주의적인 사고의 적수로 본다 하지 않았나요?

아, 뭐. 꼭 그런 것 같지는 앉지만, 너무 가지는 맙시다.

그래요, 실은 난 공부에서는 손을 떼었답니다.

네 뭐. 준비된 노벨수상후보자 앞에서는 조용해야지요!

내 말에 머쓱해하던 그녀는 ‘증명사진’ 하나 찍어두겠다고 텅 빈 무대에 혼자 올라가 섰다. 우리 둘은 함께 찍지 못했다. 부탁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거의 파장이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그녀는 낡은 책을 따로 들고 있었다.

식사에 책을 가지고 가셨어요?

아, 이거? 난 르 클레지오는 지한파라서 참석했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의 발언이 무척 솔직하여 감동적이었어요. 글쓰기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아팠어요. 내 말을 유명인사가 대신 해주는 것 같아서. 생각하지 못했던 감동에서 저녁식사에 오면서 혹시나 하고 이 책을 가져왔어요. 첫 번역출판본 『조서』 말이어요. 여기에 사인 받았어요, 조금 아까 여기서. 한국에서 첫 출판본이라고 하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80년대 이었으니까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내일은 뵙기 어렵겠지요, 난 종일 총회이고, 선생님은 시낭송회 가실 거라고요?

그래야죠. 잘 자요!

 

 

7.

목요일은 정말이지 종일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총회장에 매어있으면서 나는 왜 그녀를 찾고 있었을까? 시낭송회에 갔을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랬다. 총회는 컨벤션홀에서 종일 계속되었고 시낭송은 근처 제이드홀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점심시간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엔 총회가 끝나자마자 시낭송 홀을 기웃거려 보았다. 그곳은 더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하긴 저녁까지 이어질 인각사 관광을 위해서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인각사는 군위군이라고, 경주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예 경북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한참을 가다가 영천 쪽으로 올라갔다. 거의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린 느낌이었다. 처음 버스가 출발해서 마지막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를 서성이니까 그리 더 길게 느껴진 것일 게다.

 

군위의 동쪽에 있는 인각사는 정확히는 인각사지라고 할까.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다는 때문으로 유명한 곳이고, 명부전과 산령각 이외에 나머지 법당들은 새로 지은 것들이라 했다. 일연스님의 박물관이란 곳은 그 명칭에 걸맞은 자료는 없는듯했다.

 

근처 일연공원의 만찬에도 패션쇼 <삼국유사>에서도 뮤지컬 <삼국유사>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제 좀 과했었나, 여러 가지 의미로? 설마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여기에서 저녁식사 후까지 행사가 계속될 것이니까. 그보다는 ‘천년의 신앙, 천년의 기다림’이라는 부제를 단 도화녀와 비형랑의 뮤지컬 동안에도 그녀가 왔을까를 생각하거나, 무형문화재라는 줄타기 장인의 아슬아슬한 묘기의 순간에도 하늘 위가 아니라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가 우스웠다.

 

안개처럼 부슬거리는 비 때문인지 사람들은 비닐우의를 나누어 받고서도 기분들이 가라앉았다. 외국 회원들은 실망의 표정이 더욱 심했다고 느껴졌다. ‘프리 더 워드’에 꼭 인각사가 알맞은 메시지를 준 것이었는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조금 웅성거리기도 했다. 『삼국유사』를 역사보다는 문학 쪽으로, 기록문학의 의미로 보면 빠지지 않는다고 대꾸하면서도 나도 실은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거나 긴 하루였다. 이제 하루만 더 견디면 된다. 이제 정말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8.

그렇게 금요일이 밝았다. 오전 오후 총회가 있지만, 4시경 폐회가 선언되면 이어서 기자회견으로 일정이 끝난다. 한숨 돌리고 나면 아주 편한 기분으로 환송만찬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마침내 그녀는 시낭송을 했을 것이다. 오전 총회 후 곧장 시낭송회장으로 달려가 보았으니 벌써 끝나고 텅 비어 있었다. 제이드홀 옆 다이아몬홀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는데, 어디에도 사람들은 없었다. 벌써 점심식사 홀로 흩어진 뒤였나 보다. 시낭송회는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 텐데. 숨바꼭질이다, 꼬박 이틀 동안을.

 

어쨌거나 저녁시간 까지는 정리할 것들이 좀 있었다. 일이 끝났으니 간단히 통역사들끼리 정리 겸 마무리인사도 나누었다. 내일 남은 것은 떠나는 일 뿐이다. 조금은 늘어놓았던 짐들도 정리해 넣고, 저녁과 낼 아침에 쓸 것들만 남겼다.

다 저녁에, 갑작스레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벌써 출발해버린 것은 아닐까. 잠시 방에서 쉬다가 그 생각이 들자 좀이 쑤셨다. 우린 전화번호를 주고받는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 대부분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과 눈인사나 하는 정도가 이렇게 무슨 대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환송만찬에 가려다말로 프런트에 들려 보았다. 그녀가 묵는 방은 아니까 혹시 물어나 볼까 하고. 프런트에서는 내 예상대로 체크아웃 했다는 말을 한다. 설마.

 

아, 여기 메모가 있는데, 혹시 한금실 선생님이신가요?

 

그것이 다행하게도 내 이름이었다. 나는 메모를 받아들고, 받아만 들고 그냥 서 있었다. 지나가던 영어담당이 불러 세웠을 때야 만찬장으로 함께 향했다. 만찬은 파장답게 더 편안한 가운데 공연들도 더욱 수준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참 제대로 된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들어본 것이 언제 적이던가. 중창단도 재즈밴드도 몇 년 간의 문화생활을 하룻저녁에 다 맛본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둔 메모는 방에 들어와서야 펴 보았다.

한샘, 저 벼락같이 출발합니다. 허무하게 내 일정을 끝내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졌어요. 오후 총회엔 투표권이 있는 분들만 들어간 대죠? 오후를 어슬렁거리며 환송만찬을 기다리기엔 나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고 싶어져서요, 집에서.

나를 조금 걱정했겠죠, 아마도? 낭송은 조금 떨린 채 시작하니 끝이 나더군요. 몇몇 감동적인 외국 시인들의 낭송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실한 시도 영어도 부끄러웠는데, 끝난 뒤 뜻밖에 동문들 선후배들을 만나서 외롭지는 않았어요.

사족 : 책자에서 잠비아의 니콜라스 카윙가의 「우리 자신들」, 트리에스트의 안토니오 로카의 「아직은」을 읽어보세요.

 

그렇게 사라져버린 소설가 그녀를 생각한다. 시인도 아니면서 시낭송을 하려했다는, 그때까지는 도망가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그녀를. 그리고 도망가 버린 그녀를. 나는 그녀가 부끄러움에 도망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외로움에 사무쳤을 것이라고도 믿는다. 외롭지는 않았다고 쓰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다. 나는 외로운가? 나는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거나 그런 말을 하지도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괜찮다.

 

나도 물론 메모를 썼다.

 

아무개 선생님, 총회 결과를 말씀드릴게요. 레바논과 망명 북한작가 펜 센터 가입안이 통과되었고, 2013년 펜대회 개최예정지는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랍니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학수호 도시래요.

아차, 그녀는 퇴실을 했고, 나는 그녀가 있는 곳을 모른다. 안다고 하더라도 이런 내용을 뭣 때문에 써 보낸단 말인가. 메모를 습관대로 잘게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 일찍 나는 첫날 아침을 먹던 자리로 가서 똑같은 빵에 똑같은 커피를 마셨다. 그날 아침처럼 자리 때문에 어색해하던 그녀는 물론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쪽을, 첫날 아침 그녀가 앉으려다 말다가 옮겨 다니던 테이블들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순간은 반복되지 않는다.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내가 예서 누군가를 만났었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라고 내가 그랬었다. 꼬박 일주일의 작가들 틈새 기웃거리기를 뒤로하고 일상을 향한다. 행여 내 틈새는 새나가지 않았기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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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6.5. 중편 「틈새」,『동리목월』 2013 여름호 (통권 12호), 233-279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