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7. 7. 22. 01:44

제목: 대단원을 지나서 다시 한글

 

                                        이글은 192015년 9월 세계한글작가대회에 맞춰 발간된 

                                        문집에 있었고, 이제 생각이 나서 올려둔다.

 

 

다행스럽게도 일제 치하가 아닌 세상에서 이 땅에 태어난 나는 한글전용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았다. 지금 쓰는 용어인 문법은 말본이었고, 실제로 교과서 제목이 그랬다. 심지어는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모교는 배꽃큰애기배움터라야 한다고까지 한글 사랑에 목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말 우리글은 공부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면서 자랐기에 우리 음악도 당연히 7음계라 믿어버렸다, 제법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러니 우리 것은 모두 그냥 저절로 있는 것이고, 뭔가 낯설고 어려운 것이 학문의 대상이리라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 살았을 뻔 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연구논문을 쓰면서 오직 갈수록 멀어지는 그것들을 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순간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른나라다른사람들의소설들을파먹느라자판위를달리는손가락들이하이에나의발가락처럼넷씩으로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이런고백과함께나는소설을쓰기시작했다.

하지만 소설 쓰기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 글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하려니 내가 소설은커녕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글쓰기를 배워 본 적도 없이 논문이라는 이름의 글들을 써 댔다니.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번갯불에 콩 볶는 심정으로 남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서 처음 한 일은 한글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다 살고서 무슨 짓이람, 이라고 핀잔할 지경인데도.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계속 외국어만 파던 대학의 언어교육원 어딘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교사가 된다는 상상은 어색했지만, 분명 국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때까지도 국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따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국어는 다만 나라말인 것을, 한국어라야 고유의 우리 언어를 국제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가며 부끄러움 속에서 단기간이나마 (한)국어를 배웠다. 내친 김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룹 스터디도 하고 혼자 날밤도 샜다. 과락은 면했던지 2차 시험을 보러 갔을 때에는 한참 젊은 면접관들 앞에서 얼얼했지만, 막상 자격증을 손에 쥐자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일진대, 무턱대고 평생 써댄 글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게로 치면 어떤 것은 1킬로그램을 어떤 것은 2킬로그램을 넘는 것들이었으니 이들을 어쩐다?

기억을 왜곡하기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고는 새로운 한글로, 내게는 새로운 한글로 글을 쓴다. 새로 쓰는 글들이 많아지면 잘 못 썼던 글들이 덮이기라도 하는 양. 덮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님을 알지만 모른 체하기로 한다. 어차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라고 위로를 한다. 나의, 우리의 한글로 글을 쓰면서 외국어 공부할 때만큼 사전을 찾는다. 글의 맞춤법 검사에도 넣어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서 살핀다. 잘은 아니더라도 틀리지는 말자고, 잘 쓰는 건 타고나거나 어떤 은총의 문제이려니 틀리게 쓰는 일이나 말자고 애를 쓴다. 물론 세상 일이 애 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알만큼은 살았다. 그래도 다른 묘수가 없다. 다만 한글을 다시 배우게 된 것이 기쁠 뿐이다. 내 말을, 우리의 말을 늦게라도 다시 찾은 것이 의미라면 의미다. 한편의 연극일 인생의 대단원을 지난 오늘에서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니, 의미를 떠나 나는 그냥 한글에 파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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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문학을 노래하다, 세계한글작가대회 기념문집 - 산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2015.9.7.

238~240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11. 23:32

상대를 혐오하는 말과 글들의 폭포수 … 
                                   할 말 다하는 자유에 ‘갸우뚱’하는 이유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30. 신념
2017년 07월 07일 (금) 19:36:1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믿음은 믿는 마음이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의 심리가 믿음이다. 그것이 정치나 사회 또는 철학적 가치와 관련될 때는 신념이라고 주로 한자어로 쓰게 되며, 뭔가 객관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건 신념이건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벤-오일러의 다이어그램에 따르면 진실과 신념의 교집합은 그래서 ‘형편없이 당연시 된 참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형편없이 당연시 된 참 신념’ 중에 조건이 확실한 경우에 겨우 ‘참 신념’이 가능하고,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가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무한대의 우주! 이런 신념에도 오래 전에 클레임이 걸렸다. 우주를 모래알로 채운다면 10의 63승보다 작을 것이라는 아르키메데스의 신념!

 

사실 그 옛날에는 고교 수학책에 집합이라는 단원이 없었다면 놀랄 것이다. 수학에서의 집합을 모르는 채로 졸업을 했던 나는 유난히 집합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생의 수학 책에서 독학으로 집합 단원을 공부했을 때의 신기함이라니!

 

물론 오늘은 집합 예찬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것의 정체를 생각하면서 깊은 회의가 드는 일을 말하고자 함이다. 다 같이 신 또는 신들을 믿으면서도, 다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와 박해를 일삼아 온 종교적 반목이 그 첫째요. 다같이 이념들을 신앙하면서도 그 이념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반목의 극치를 달리는 정치가 그 둘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목격자가 둘이면 그 증언은 두 가지라고 한다. 한 쪽이 거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기억이 두 가지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투표권을 가진 인구수가 4천235만7천906명(19대 대선)이라니, 사람들의 각양각색은 4천만 가지 이상이리라. 정당으로 크게 나누어 말하더라도 여러 신념들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팩트로 드러난 사건을 두고서도 전혀 다른 신념에 입각해서 말을 한다면, 몰라서일까 알고서도 당략 때문일까.

 

말의 진정성은 무엇으로 가늠해야 할까. 예컨대 ‘지겟작대기’는 긍정적인 표현일까 그 반대일까. ‘선거 때는 지겟작대기도 필요하다’라고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지겟작대기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필요로 해준다니 고마울까, 그렇게 무가치하다는 표현에 분노할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고마워하리라고 예상하고 말했을까, 분노하라고 말했을까, 그도 저도 아닌 시선끌기 용이었을까, 아님 또 다른 고단수의….

노련한 정치가가 아닌 평범한 대중들은 그 높은 뜻을 읽지 못하니 답답하다. 다만 최근에 방송에 나오는 말들은 많이 거칠다는 느낌은 확실하다. 신념이 다르면 상대를 혐오스런 곤충에 빗대기도 하니, 인간에 대한 미미한 존중도 없다.

 

예로부터 신언서판이라고, 그것이 비단 관리 등용의 기준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신체가 미남미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듯이, 특히 말은 ‘비단 혀’가 아니라 그 뜻을 지칭하는 것이고, 글 또한 미려한 서체가 아니라 문필력을 지칭한다. 말(言)과 글(書)은 판단력(判)으로 모아지니, 말과 글의 이치가 우아하고 뛰어난 것을 높이 산다는 뜻이었다. 말과 글이 요즈음처럼 폭포수로 쏟아지면서 게다가 거의 경박한 수준으로 타락하고서야 어찌 바른 판단력을 기대할까. 자신의 판단과 주장만이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신념은, 그런 마음의 상태는 참이 아닐밖에.

 

신념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사르트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했던 체 게바라가 떠오른다. 흔히 신념을 실천한 휴머니스트라 불리는 그에게 신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여행은 산 경험들을, 꾸준한 독서는 죽은 경험들을 넣어주었고, 그것들을 통해서 사상과 신념이 정립됐고, 그러한 신념에 실천이 따랐다고 평전은 말한다. 그렇다면 성공한 혁명의 열매를 누리는 대신 미련 없이 다시 떠나는 신념, 그것은 또 어떻게 생긴 것일까. 그것은 혁명 후 쿠바사회에 대한 회의였을 것이다. 혁명의 높은 완성도를 위해 부활된 사형제도 등 다른 신념을 박해해야 하는 과업이 회의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혁명이 아니라 해도,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서라 해도, 이념이 전과 다른 정치체제가 됐을 때는 그런 회의가 병행돼야 하지 않을까.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사에 관해서는 물론 일반 정치에도 문외한인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말과 글이 경박해진 이 시대를 사는 때문이라고 변명이 될는지.

 

사실 반세기 전만 해도 할 말하고 사는 사람이 적었었다. 개인의 신념은 사치이고, 가치는 주어진 것들을 신봉하면 되었다. 그래서 말과 글로 다툼도 적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할 말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 자유를 누리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그러나 그 신념이 문제다. 어떤 신념에서 어떤 식으로 말을 하더라도, 논리적 정당성까지는 못 갖추더라도, 말로서 누군가에게 모멸감을 주거나 상처가 되지나 않을까 최소한 그런 염려는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신념에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불행에 빠뜨리게 되지나 않을까 최소한 그런 배려는 해야 할 것 같다.

 

예컨대 로미오와 줄리엣 버금가는 두 앙숙 집안이 있었다고 치자. 옛날이라면 산 넘어 두 집안 간에 만석꾼인가 천석꾼인가를 다투었다고 치자. 두 집안에 공교롭게도 자식이 귀하더니, 어느 한 집안에서 옥동자가 태어났겠다. 그럼 다른 집안은 그 자식농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걸음발도 떼기 전부터 걷지도 못할 아이라고 저주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정서였었다.

 

강보에 쌓여있을 때부터 새 정부를 옭아매면 어떻게 할지, 이제 첫걸음을 내딛는 상대에게는 일단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적이라 할지라도 세워놓고 맞싸워야 떳떳한 것 아닌가.

 

신념이 표현되는 말이라고 해서 사회적 함의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지어 옳건 그르건 신념조차 수반되지 않은 허구도 남발하는 오늘날, 할말 다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자유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 같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사람들을 나누어 편 가르는 나라 … 사람이 만들어 완벽한 체제는 없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9) 둥지를 더럽히는 작가들

2017년 06월 19일 (월) 12:18:4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국제PEN한국본부 울타리 안에서 매년 6월이면 영호남문학인 교류대회가 열린다. 국제PEN부산지부와 국제PEN광주지부가 번갈아 주관하는 행사다. 올해는 여수 1박2일의 일정에 덤으로 향일암 코스가 들어었었다. 향일암, 그곳 일출을 보는 것은 설레는 버킷리스트 중에 넣어야 할 아름다운 곳이다. 그 오르는 계단의 높이와 가파름 때문에 몸의 허락을 받은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렷다.

 

첫날의 메인 행사 중에는 본격 학술강의는 아니나 특강 형식의 프로그램이 있었고, 그 중 ‘둥지를 더럽히는 작가들’이란 강연이 있었다. 중심 내용은 독일 나치시대의 문화 억압과 작가들의 고군분투에 관해서였는데, 문화를 억압하는 정권의 말로에 포커스를 둔 것 같았다.

중세 후기부터 사용된 ‘둥지를 더럽히는 짓’이란 개념은 주로 가족이나 공동체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행위를 지칭했으나, 현대적 의미에서 ‘둥지를 더럽히는 자’라고 할 때는 사회 경제 정치적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실제로 뭔가를 더럽히는 ‘행동’ 그 자체를 지칭했던 말이 그러한 더러운 행동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언동’을 가리키게 됐다니, 말의 변천은 놀랍다.

 

   
 

buecherverbrennung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사진출처= 독일연방자료실

 
 

나치는 가장 우월한 종족인 국민 전체가 나치식 사고를 갖도록 도덕교육을 중시했다. 따라서 나치정권에서 둥지를 더럽히는 사람들은 단연 유대혈통이었다. 또 저항하는 작가들은 ‘퇴폐’의 범주로서 낙인찍혔다. 그때 ‘퇴폐(entartet)’라는 단어는 원래 ‘같은 종족과는 다른’ 혹은 ‘별종’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이 나치시대에는 엉뚱하게도 정통을 벗어난 현대미술 전반에 대한 공격의 신호탄이 됐고, 음악과 문학 분야에도 적용됐다.

나치로서는 무엇보다 둥지를 더럽히는 퇴폐문학을 불태우는 일이 급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 첫해 4월부터 ‘소각해야할 도서목록’이 신문에 실리더니, 며칠 후에는 공식적인 리스트가 공표됐다. 5월 10일에는 독일 전역에서 유례없던 대규모 분서 의식이 치러졌다. 당일에만 전국의 22개 대학도시에서 같은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일시에 이른바 ‘비독일적인 책들’이 불태워졌다. 민중들의 무계획적인 자연발생의 성격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조종되고 조직적으로 정확히 계획된 캠페인’(한스-알베르트 발터)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도시에서 동시에 유대혈통, 평화주의자, 좌파 또는 나치의 복안에 맞지 않은 작가들의 책들이 불타올랐다. 베를린의 경우에는 약 7만 명이 참여했고, 훔볼트대학 도서관에서 책들을 꺼내서 황소가 끄는 수레로 오페라광장 장작더미로 실어 날랐다. 불타는 책들 속에는 마르크스, 투홀스키 등 소위 불온서적과, 프로이트 등 학문서, 하이네, 하인리히 만 등 순수문학 서적들이 포함됐다. 헤밍웨이, 에밀 졸라, 고리키 등 외국작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일 베를린에서 책이 소각된 작가들은 94명이었다고 한다. 이슬비 내리는 밤 11시의 풍경이었다.

 

나치정권의 블랙리스트 대상을 정리하자면 ①공산주의 서적 ②전선 병사 체험을 저속하게 그리는 작품 ③민족의 도덕적 종교적 근간을 파괴하는 작품 ④바이마르공화국을 찬미하는 서적 ⑤민족진영의 정당한 자의식을 훼손하는 서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불태울 책의 목록, 블랙리스트를 나치정권의 민족계몽선전부에서 직접 작성했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전적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생조합(학생회) 주축으로 작성됐다고 한다. 

 

그 수량은 어떠했을까. 첫 분서대상 리스트는 순수문학, 역사서, 정치 및 국가학 등에 국한됐고, 총 299명이 이에 해당했다. 종교, 철학, 교육학 서적은 첫 분서 때에는 아직 작성되지 않았다. 또 하나 중요한 금서목록인 ‘헤르만 문서’는 확신에 찬 나치 사서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도서대출 금지 목록인데, 모든 도서관과 서점에서 추방해야할 작가들을 망라한 ‘수치스럽고 달갑지 않은 작가명단’은 149명 1만2천400종의 서적에 이르렀다. 다른 출처에 보면 나치시대 블랙리스트는 최종적으로 267명을 기록한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치의 그 악명에 비추어 고작 300명도 안 되는 블랙리스트? 그래서인지 정말 신랄한 일화가 있다. 2월말 국회의사당 화재 이후 무차별 체포를 피해 잠적한 작가들이 숱했다. 오스트리아로 피신해 있던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는 5월 10일의 분서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없자 그에 반발해서, 이틀 후 빈의 <노동자신문>에 공개서한을 실었다. ‘나를불태우라! 나의 삶 전부와 나의 저술활동 전부에 의거해서 나는 권리가 있다. 내책들을 장작더미의 순정한 불길에 넘기라고 요구할 권리, 갈색 살인도당의 피에 젖은 손과 썩은 두뇌에 바치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갈색은 잘 알려지다시피 나치스 돌격대의 제복이었다. 이어지는 분서 리스트에는 그라프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듬해 뮌헨대학 교정에서는 그의 요청(?)대로 성대한 분서식이 있었고, 독일 내 완전 출판금지며 국적 박탈이 이어졌다. 브레히트의 시 「분서」는 그라프의 서한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나치의 블랙리스트가 300명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인류 역사에서 악의 최정상을 실현했다고 하는 나치시대에도 ‘고작’ 그 숫자였다니. 실제로 사람들까지 불태웠던 정권치고는 그들 판단에 ‘극도로 위험한’ 최소정예만 골라서 금지시킨 것이다. 

우리는 그에 비하면 상상을 절하는 블랙리스트의 나라다. 당시 청와대가 문화체육관광부에 내려 보냈다는 A4용지 100장 이상의 그 문건에는 놀랍게도 문화예술계 인사 9천473명이 기재됐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444건의 지원배제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제 와서 화이트리스트로 둔갑한다면 그 역시 못 믿을 사회가 되는 것이리라. 

 

사람들을 나누어 편 가르는 나라라면 여전히 불안한 나라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사람이 만들어서 완벽한 체제란 없다. 둥지를 더럽히는 작가들은 사회의 균형으로서 늘 있어야 한다. 오른발이 너무 나가서 미끄러지는 순간 뇌진탕을 막아주는 것은 왼손이고, 왼발이면 오른손이다. 우습게도 그날 강연자는 왼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자멸의 길 앞당기는 비이성적 반목 … 무차별 테러 속 인간의 미래는?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8. 테러에 갇힌 호모 사피엔스
2017년 06월 05일 (월) 13:48:0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여전히 아름다운 신록의 푸르름도 슬픔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이렇게 좋은 계절, 아직 인류에게 온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지구상에서 무차별 살인이 난무하고 있다. 맨체스터 팝 공연장 테러는 무해한 청소년들을 겨냥했고, 카블 외교단지는 라마단인데도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외침으로 피로 물들었다.

 

역사책에서 ‘테러’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프랑스대혁명의 ‘공포’정치였던 것 같다. 혁명이 9월의 학살과 더불어 폭력으로 치달았을 때, 이 국가적 테러에 직면해서 혁명에 대한 유럽의 전반적인 공감대는 수그러들었다고 배웠다.

 

일반적으로 테러는 특정 목적을 지니고 특정 목표인물에 한정돼 왔다. 기원 후 1세기 유대인 저항집단은 로마군의 주둔에 반발해 대제사장 요나단을 암살하는 등 단검 공격을 자행했고, 그래서 시카리(shikari)라고 불렸다. ‘자객’이라는 뜻이다. 중세 페르시아 지방의 이슬람 종교단체들은 ‘암살자’를 고용해 종교적 목적달성을 꾀했으니, 테러는 중동지역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 속에서 오랜 역사를 지녀왔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가 전 세계로 확산됐다. 정치사회적으로 혁명적 변화의 효과적 달성을 위해 유력 정치인을 암살하는 방식이었고, 예컨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은 제1차 세계대전을 유발했다.

 

   
  ▲ 멘체스터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문객이 든 글귀가 인상적이다. 출처: www.hindustantimes.com  
 

 

테러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그 범위를 놓고 의미심장한 논쟁이 있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결별이 5막극 『정의의 사람들 Les justes』(1949) 때문이었다. 카뮈는 이 작품에서 1905년 러시아 사회혁명당 소속 테러단에 의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사건을 다루었다. 볼쇼이극장 앞에 내리는 목표물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는 계획은 실패한다. 행동대원 칼리아예프가 순간 망설임으로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아니, 대공비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함께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계획을 거둔 것이다.

 

작품의 의미내용은 ‘망설임’에 있었다. 카뮈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혁명가들과는 달리 폭군을 암살하는 경우에도 아이들과 같은 죄 없는 사람이 말려들 위험이 있으면 그 행동을 단념하는 망설임을 변호했다. 사르트르 측은 ‘반항적 태도’란 자기기만이며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했고, 카뮈는 정치철학적 에세이 『반항인 L’ Homme revolte』(1951)에서 사르트르의 ‘혁명적 인간’과 대립되는 ‘반항적 인간’을 제시함으로써 10년 가까운 우정에 파탄이 갔다. 카뮈가 옹호하는 것은 혁명적인 행동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반항이었다. 극좌와 극우의 절대주의에 굴하지 않고, 폭력을 부정하며 중용을 터득한 수단을 사용하는 끈질긴 저항 말이다. 카뮈에게는 내일의 정의를 위해서 오늘의 불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자본주의의 억압성과 폐해가 확인되면서 마르쿠제나 사르트르의 입장은 제3세계에서 민중의 저항을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한 폭력’이라는 의미로 정당화하는 쪽이었다. 화약고는 여전히 중동지역이었고, 서구 열강의 책임을 지적하는 논리도 있었다. 중세 십자군의 부활과도 같이 산업혁명을 통해 강력해진 서구 열강들이 중동지역을 분할 지배하는 구조가 갈등의 발단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격화는 6일전쟁·6월전쟁의 충격적 결과로 이어졌고, 고향땅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테러행위 뿐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은 뒤에도 반목과 테러는 확산 일로에 있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테러는 인간성의 ‘ㅇ’자도 언급할 수 없을 악의 수준에 달했다. 아니, 오늘의 종교적 정치적 반목은 전면전도 불사하는 양태로 발전돼, 테러는 대리전쟁 또는 보이지 않는 전쟁 수준으로 변모했으니, 미증유의 9·11 테러사건은 전쟁 그 자체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운집하는 비정치적 공간에 무차별 테러를 감행해 무엇을 노릴까. 무슨 이득을 얻어낼까. 성서와 코란의 가르침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우위를 점령하라 이르는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탈바꿈 과정에서 인간의 신체적 능력은 용도 폐기 직전으로 몰락했고,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총아가 아닌 듯 했다. 다행하게도 인간에게 남은 인지능력으로 새로운 직업군이 생겨났고, 인간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효용성을 증명해 보였다. 인간이 신의 가장 특별한 창조물이로서의 자부심을 가까스로 지닐 수 있었던 동안, 성서와 코란은 위안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라는 전대미문의 기술은 인간의 인지능력마저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내동댕이쳤다. 최근 불패의 기록으로 은퇴한 알파고를 보라. 모든 영역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앞지르고 있다.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닥터 왓슨(Watson for Oncology)’은 미국 유명 암센터 전문의가 진료한 1천명의 환자 기록을 분석해 30%의 환자에서 의사들이 놓친 치료방법을 찾아냈다고 알려져 있다. 날마다 업데이트 되는 닥터왓슨의 정보량을 어떤 인간의사가 따라가겠는가. 정보라면 그 범위는 무한대다. 어떤 펀드매니저가 인공지능을 추월한 금융지식을 갖겠는가.

 

그래도 예술의 영역을 말하겠는가. 그것도 희망사항일 뿐이다. 완벽한 연주는 물론 특정 생물학적 패턴과 수학적 패턴의 조합이면 작곡이 가능하며, 주제어의 입력만으로 미문을 만들어 낼 알고리즘이 탄생되고 있다.

유발 노아 하라리의 최신작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에는 ‘신과는 별 관계없고 기술과 관계있는,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나고 있는 용감한 신흥종교… 데이터敎’가 등장한다. 인지능력을 추월당한 호모 사피엔스를 용도폐기할지 말지, 이 새로운 신이 심판할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이건 이슬람 원리주의이건 또 무엇이건 우리가 가진 모든 가치와 모든 능력을 동원해 합심해서 총력으로 대비해도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새로운 신에 맞서지 못한다. 주어진 현상을 논리적으로 질서 짓는 자연 인식을 넘어 의미-인식(Sinn-Erkenntniß)이 가능했던 ‘멋진’ 호모 사피엔스는 이쯤해서 끝이 날 모양이다. 닥터 왓슨도 우리의 분노를 치유하지는 못할 텐데, 인간은 비이성적 반목과 불특정 테러 속에서 스스로 자멸의 길을 앞당기고 있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개인의 절망적 상황이 해소되는 ‘기회의 평등’을 기대하고 싶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7.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2017년 05월 22일 (월) 11:27:51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장미가 피어나고, 장미대선도 치렀다. 마침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왔다. 누가 신록의 5월을 사랑하지 않으랴. 긴 겨울을 이겨낸 인동초의 현란한 꽃잎들 앞에서 마음 흔들리지 않을 사람 있으랴. 풀 속의 낮달맞이꽃 앞에서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으랴. 병꽃나무의 늘어진 꽃송이들은 과거급제한 이의 모자에 꽂힌 화려한 어사화 다름 아니지.

 

5월을 노래한 시인들은 너무도 많다. 「로렐라이」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5월을 감탄해 마지않은 시인들 중 하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나의 마음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었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새들 노래할 때/ 나의 불타는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김광규 역)

 

 

 

 
     
 

 

그가 젊어서 발표한 『노래의 책』에 들어있는 수많은 사랑의 시들을 배웠을 때, 그러니까 옛날에 내가 아직 대학 초년생일 때, 사랑 같은 것을 폄하했던 건방진 나는 하이네를 지나치기로 작정해 버렸다. 어렴풋이 자유 같은 개념에 취한 풋내기 문학도에게 문학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막연하게나마 무엇인가 저항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른바 ‘열공(열심히 공부함)’을 할 때서야 하이네가 쓴 많은 다른 시들은 전혀 다른 성격임을 알게 됐다.

 

침침한 두 눈엔 눈물조차 말랐구나/ 베틀에 앉아서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짜노라/ 우리는 그 안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으리/ 우리는 베를 짠다, 베를 짠다! (필자 역)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의 첫번째 연이다. 이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에게 또 한 겹의 저주를, 가난한 자들을 도외시하고 오직 부자들의 권익만을 보호하는 왕에게 또 한 겹의 저주를, 그리하여 오욕과 치욕만이 번성하는 조국에다 또 한 겹의 저주를 퍼붓는다. 젊은이의 가슴에 불타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했던 그 시인이 절절한 마음으로 노동자의 봉기에 참여하는 독설가로 변모한 것이다.

 

실제로 1844년 슐레지엔 지방에서는 직조공들의 봉기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자 기계화로 값싼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공장주들은 수많은 직조공들을 해고했고, 배고픈 직조공들은 공장주들에게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진압과정을 설명해서 무엇하리. 위정자들을 공격하기는커녕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문재인 대통령 격려사) 일어섰을 뿐임에도 무자비하게 총칼에 짓밟힌 광주의 5월을 겪은 우리가.

 

무엇이 이 시인을 서정시를 버리고 참여시를 쓰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 때문 아니었겠는가. 시인이 시를 쓸 수 없게 하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독일은 연방으로 탄생했지만 개개 왕국과 공국이 유지되었고, 프랑스는 물론 나폴리와 에스파냐가 옛 왕가의 복위를 맞았을 정도로 유럽은 반동보수의 시대로 들어갔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을 도화선으로 다시 유럽에 혁명의 기운이 살아나기까지, 문화는 다시 왕궁의 시녀역할에 머물게 되었다. 새 시대를 요청하는 젊은 목소리들은 탄압됐고, 하이네 또한 당국의 분서처분 대상자들에 포함됐던 것이다. ‘책들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에는 인간들도 불태우는 법이다.’(1821)라던 그는 망명 아닌 망명으로 나머지 평생을 파리에 가서 살면서 짝사랑 조국애로 애태우는 시들을 노래해야 했다.

 

우리나라에도 문화 예술을 탄압하는 블랙리스트의 시대가 저물었다. 시인은 마음 놓고 사랑의 시를 읊어도 될 것이라 믿는다. 실제로 시민들은 원하는 노래를 원하는 장소에서 불러도 된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말이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분개하지만, 최소한 더 이상은 제나라의 군인들이 총칼로 시민들을 짓밟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권력자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 나라가 된 것이라 믿는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련다는 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선언이다. 기회의 평등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존 스튜워트 밀이 주장한 자유경쟁원리는 ‘기회는 평등하게 주되 결과마저 평등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는 복잡 애매한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실천적 개혁프로그램에 있어 기회평등을 이루어 내는 일은 개인의 에너지를 발휘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해소하는 일이 전제돼야만 한다.

 

개인의 절망적인 상황 해소란 결코 녹록치 않은 과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인보다는 전체에, 특히 힘 있는 다수에 방점이 찍히다 보니, 힘없는 소수는 보호는커녕 백안시 된다. 과거의 왕족과 양반 대신에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서열과 계급이 생겨난다. 여전히 그러하다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왔더라도 사랑 노래만을 부르기는 어려우리라.

 

마침 아파트가 새 단장을 하려고 아름다운 페인트 색칠을 준비 중이다. 출입구마다 푸르스름 계열과 누르스름 계열의 두 가지 최종 안을 이미지로 올려두고 찬성 쪽에 꼬마 스티커를 붙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외벽에는 벌써 스파이더맨 여럿이 물줄기를 쏘아대며 줄에 매달려 있다. 페인트칠에 앞서 먼저 불순물을 제거하는 ‘세척’이라는 공정이란다. 나라도 새 단장을 하려면 오염된 구석부터 씻어내야 하리라. 기회에서부터 평등을 저해해왔던 개인의 절망적 상황을 해소하는 그 일을 새 정부에 기대한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부디, 어른들의 나태와 무능·오만까지 끌어안길”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6. 부활
2017년 04월 17일 (월) 11:06:1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어제가 부활절이었다. 올해의 부활절은 세월호 3주기 추모행사에 맞춰 왔다. 세월호의 부활을 의미하는 듯, 마치 하늘이 있어 그들을 다시 살리는 듯, 최후의 그들을 뭍에 올려놓고 왔다. 올 봄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인 물리적 하늘 그 이상으로 느껴진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에게도 이 부활절은 뭔가 뭉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활이란 영원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끔찍하고 놀랍도록 두려운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그 비슷한 말이 맴돈다.


 

긴 겨울 동안 사람은 확실히 환경의 동물임을 실감했다. 눈만 뜨면 텔레비전 화면을 켜는 행동에 굴하면서, 아차, 태양열로 반응하는 흔들인형(flip-flap)처럼 인파만 보이면 저절로 손을 흔드는 맹목과 무엇이 다르랴 반성했다. 4월이 되자 나는 일부러 엇박자를 내어 최근의 뉴스지향 습관을 털어내고 일상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 나라 안팎의 세상일을 어차피 잘 모르던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리웠다.


그래, 내려갈 사람은 내려갔고, 올라올 배는 올라왔으니 됐다! 그리고는 모처럼 평온이 찾아왔다. 이제 그 나머지는 스스로 귀결되리라.

 

   
  ▲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http://blog.naver.com/nabca)  
 

대선을 앞두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두가 몰입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담보해내야 한다는 열정이 옳겠다 싶기도 하다. 벌써부터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또 다시 막강한 배후가 염려된다거나 어제의 재림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선거도 하고 다른 준비도 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것이다. 결과는 알 수 없을 일이로되, 설마하니 지난 번 같은 불가해한 샴의 쌍둥이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확률적으로 보아도 그런 일은 가까운 장래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 아무래도 지난 몇 해는 온 나라가 판타지나 공상과학영화 속에서 살았나 보다.

 

그렇게 4월이 왔고 부활절이 됐다. 그러자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막연한 죄의식이 다시 일렁였다. ‘우리가 죽인 300여 희생자들에게’(고경일) 바친 만화 한 장, 동생의 무사귀한을 위해 놓아둔 팽목항의 운동화 한 짝, 그 사진을 슬쩍 본 기억은 영원하리라. 신나게 수학여행을 떠나서 돌아올 줄 모르는 자식을 어찌 잊으며, 더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 팽목항에서 보낸 3년의 연옥을 어찌 잊으라 하겠는가. 아침에 눈을 떠도 마음의 달력은 영원히 그날 2014년 4월 16일에 갇혀있을 그들의 삶을 그들 아닌 우리가 이해한다는 말은 감히 하지 말자.

 

‘눈을 뜨면 다시 어제 아침’이라는 모티브의 코미디-판타지 영화가 있었다. 미국영화인데, 다람쥐 비슷한 마멋이 제 그림자를 보면 다시 동면에 들어가 봄이 늦는다고, 그렇게 봄이 오는 것은 점친다는 성촉절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맨스까지 곁들인 그 영화는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자 어제 아침으로 깨어나는 악몽을 털고 내일을 맞게 된다는 해피엔딩이었지만, 팽목항은 영화가 아니었다. 아직 어둑한 새벽을 뚫고 물 밖으로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1073일, 뭍으로 올라와 안착하기까지 또 숱한 날들, 마음속에 멈춰있는 달력과 함께 정지되어버린 삶을 이승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을 잃고 느닷없이 서로 이웃이 되어 살아온 미수습자 가족들이 세월호를 맞으러 목포신항으로 옮길 차비를 하는 장면들을 보게 됐을 때의 부끄러움, 그것은 차라리 쓰라림이었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무슨 죄였을까만 그 긴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는 성소를 마련해 그들을 위로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가족들이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 길을 소형선박에 타고 뒤따른다는 뉴스에는 또 한 번 가슴을 졸여야 했다. 세월호가 오다가 맘 바꿔 다시 돌아가려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뒤에서 지키면서 달래려는 듯 조용히 뒤따른 그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감옥에서 탈출시도를 하는 것은 석방이 얼마 남지 않은 죄수들이라던 말이 생각났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늘 합리적이기만 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자식을 따라 가족을 따라 바닷물에 뛰어들고픈 자포자기의 유혹이 일면 어쩌나. 마침내 뭍에 오른 유령 배, 그 뼈다귀를 넋 없이 바라보며 영원히 자식을 가족을 삼켜버린 바다를 원망하며 이 마지막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있을 그들을, 아픔을 딛고 일어나야 하는 그 찢어진 가슴을 다독이고 싶다. 부활을 믿으세요!

 

물론 부활이나 영생은 호모 파버의 과학하는 두뇌로는 믿기 어려운 함수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는 간단하기도 하다. 우리가 부모님의 산소를 찾으면 거기 앉아서는 누구나 마음속으로 대화를 한다. 돌아내려오는 길에는 소통의 후련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살아있으면 부활이요, 영생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꽃다운 나이에 꿈에 부푼 시절에 스러진 영혼들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갑자기 나는 그간의 무작정 독서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플라톤의 프시케(Psyche)를 이제야 설핏 이해할 것 같다. 프시케는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영혼이라는 의미이며, 죽음에 의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된 이 영혼은 오히려 강한 존재가 된다. 육체를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사색이 가능해지므로, 영혼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보다 좋은 상태로 상승한다. 어쩌면 신의 영역 가까이로. 그 비슷한 이해를 이 봄에 함께 부활했을 젊은 넋들의 존재에서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담쟁이처럼 손에 손을 잡고 다 같이 함께 부활했을 너희들의 넋!

 

너희들의 넋은 이 땅에서 영원하리라. 어른들의 나태와 무능과 나아가서 오만까지를 해맑은 가슴으로 끌어안고, 세상의 온갖 나약함과 비겁함을 어루만지며, 더는 그러한 비극은 없을 것이라고 오히려 위로하면서. 너희는 아마 늘 헤매는 우리의 나침반이 되려는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4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 친구란 무엇일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5. 친구
2017년 04월 03일 (월) 13:18:18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요즈음 한국에서 뉴스 채널을 외면하고 살기는 면벽수도를 실행하고 있는 이가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 같다. 엄청난 뉴스들이 토네이도처럼 솟구쳐 오르니 피할 도리가 없다. 무엇보다 세월호가 올라와서다. 1073일 만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다시 한 번 텔레비전 화면에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고정시키고 있다. 제발 무사히 이제라도 무사히 오너라, 와서 비밀을 열자! 

그 사이사이 탄핵으로 파면돼 마침내 구속되기에 이른 전직 대통령 관련 소식들과 새 대통령직을 향한 열기들이 점멸한다. 무엇인가 먼저 해야 할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소심한 사람인지라, 내 머리는 아직 벌건 상처를 드러내고 있는 어제로 향한다. 세월호의 아픔과 반비례 곡선으로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또 하나 비선이라는 이름의 ‘40년 지기’ 관계가 그것이다.

 

계산하지 않았던 그 시절 친구 사이

 

친구가 뭘까. 근묵자흑이려니, 친구를 사귀려면 너보다 뭐라도 더 나은 사람을 사귀어라! 옛날 우리가 어려서 듣던 충고다. 나는 좀 괴팍했는지, 어린 심보에도 반항을 했다. 누구나 다 더 나은 친구들을 사귀고자 해 화살표가 계속 한쪽으로만 가면 어떻게 마주보며 손뼉을 치는 친구를 만나겠는가, 라고. 큐피드의 화살은 상호 조응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방통행으로 쏘아댄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예외인 셈이다.


 

   
 

한때는 피검사로 처음 알게 된 혈액형에 관심들이 많았다. A형은 돌다리도 두드리지만 답답하고, B형은 진취적이나 흔들리고, AB형은 천재형이라지만 가볍고, O형은 진중하지만 속내를 모르고…. 이 모든 멋대로 얻어들은 허튼 정보들을 가지고서 모이고 흩어지고를 되풀이하곤 했다. 물론 그 시절 우정에도 요즈음 말로 썸타기와 밀당이 있었다.

마음이 가는 친구 앞에서 부러 토라지거나, 며칠간 말도 걸지 않는다. 주의를 끌려는, 유치하지만 애교 있는 행동들이었다.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친구 사이 유불리를 따지는 계산들은 없었다.

 

친구라고 하면 가슴 아프게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떠오른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런던과 파리를 오가면서 서술된 다른 명문들은 차치하고,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대신해 목숨을 내던진다는 뭉클한 이야기였다.

 

프랑스 귀족 청년 다네이는 폭풍의 파리를 떠나 이제는 루시와 결혼한 몸으로 런던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운명적으로 다시 파리의 감옥에 갇힌다. 루시를 혼자서 흠모하던 영국인 변호사가 그녀를 위해 다네이를 구출해 내고자 파리로 간다. 그는 마침 닮은 몸을 빌미로 죄수와 자신을 바꿔치기에 성공한다. 다네이는 술에 떡이 된 채로 감옥 밖에서 정신을 차린다. 친구 일행의 무사 탈출을 확인하면서 단두대에 설 수 있는 용기와 사랑, 그 비장감에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고등학생이 소화하기에는 벅찬 내용이었지만, 작은 도서관에는 책들이 많지 않았고, 소설책들은 무턱대고 읽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이 봄까지 우리의 일상을 앗아가다시피 한 저 두 사람(박근혜·최순실) 40년 지기는 어떤 사이일까. 그들의 엄청난 계획과 추진력과 성과물(?)들을 보면 팀워크가 아주 빼어난 공동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의 적법성이 문제가 되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러 ‘시녀 같은’ 사람이라 규정했으니, 자신은 여왕이라는 전제였을까. 그 말처럼 단순하게 여왕과 시녀 사이인지, 실은 시녀 역이 제작 감독하고 여왕 역은 다만 주연을 맡은 연극인지 누가 알랴. 어떻게도 이해가 되지 않은 끈적끈적한 관계다. 오죽하면 ‘피보다 진한 물’이라고 표현됐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관계 자체를 넘어서 재판에 임하는 태도다. ‘시녀 같은’ 사람은 무례하다시피 항변하면서 자신과 여왕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여왕은 시치미를 떼고서 시녀에게 그 모든 잘못의 책임을 미루는 분위기다. 물론 일심동체란 말은 부부사이에도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하물며 여왕과 시녀 사이에야. 하긴 또 어딘가에 복병이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돈과 몸을 가진, 그러니까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머리도 체력도 우수한 그들이다. 일단 여왕역이 살아남아서 곧 다시 권력을 쥐고, 곧 시녀역을 구한다는 시나리오일까? 시녀께서 그 동안 쓴 시나리오는 상상을 절하니까, 다음 속편을 누가 짐작하랴. 

 

재미없다. 여왕이 스스로 내뱉은 단어라서 사용해보았지만, ‘시녀’ 버전은 여왕의 비인간성마저 드러내는 마중물에 가깝다. 공공의 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어렵다 못해 위험한 과제다.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이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가 돼 애꿎은 개구리를 맞추지나 않을까 사려야 한다. 탄핵 전후로 멀쩡한 학벌에 빛나는 지위에 있지만 골 빈 사람들이 내뱉는 사극 버전들은 또 어떻게 이해할까. 세상을 통째로 이해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괴롭다.

 

손상된 자아가 잉태한 비극

 

원론적으로 회의가 든다. 친구란 무엇인가. 진정한 친구에게라면 내 생각을 지배하게 내버려둘 수 있는가. 아니, 친구란 그저 함께 걷는 동행일 뿐이다. 함께 걸어서 좋은 동행이다. 오늘 이 순간을 늘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좋은 동행을 만나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는 않기에 행운이라 부르고 싶다. 

 

다만 자본집중이 가속화되는 이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맺는 관계는 우리가 어려서 철없이 지냈던, 유불리를 모르던 시절만 못하게 됐다. 마르틴 부버는 그것을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로 구분했는데, 친구를 ‘그것’ 즉 객체화한 이용가치로서 대한다면 진정한 인격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멀어질 따름이다. 

 

우리가 부지중에 바라게 되는 지고지순의 친구, 염화시중의 관계라 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완전한 평등을 전제로 해야 하리라. 진정한 ‘나와 너’의 관계란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건 지배 또는 의존관계가 시작되면 자아는 손상을 입게 되고, 손상된 자아는 비극을 잉태한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이 작은 개념, 형체도 없는 것 하나, 왜소한 자아를 유지하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비록 세상살이에 거치적거리더라도 그것만큼은 내어줄 수 없는 마지막의 것, 자아를. 하여 두 건강한 자아가 만나진다면, 비로소 그때 서로를 친구라 부를 수 있으리라.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타인들의 존재를 믿는 첫걸음이 되리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4

 

 

“서로에게 ‘사과’ 를 한 알 내밀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4. 사과 같은 사과
2017년 03월 20일 (월) 11:22:50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겨울을 지나 봄을 맞는 일은 늘 어렵다. 새싹이 돋으려면 얼마나 무진 애를 써서 무거운 흙의 틈새를, 마른 가지의 껍질을 뚫어야 하는지.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우리에게 허가해 준 봄날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그 일’을 보도했고 또 알고서 분노했던 많은 국민들을 엄벌하고 말았을 것을, 이번에는 ‘그 일’을 책임져야 할 주역이 파면됐다. 

당위성이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냈음이다. 물론 국론의 양분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100명 중 92명이 정당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절대다수가 극소수를 폄하할 수도 없다. 생뚱맞은 말 같지만, 우리 서로에게 사과를 한 알 내밀자! 

 

 

아버지가 사다주신 紅玉

   
 


 

말장난도 가끔은 쓸모가 있다. 사과를 해야 마땅하지만 어색할 때, 상큼한 사과를 내민다는 것이다. 나도 실제로 사과로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지난 신록의 계절 5월 끝자락에 사소한 일로 선배에게 밴댕이 속을 내비쳤었던 일이 있었는데, 평소에 친밀감을 느끼던 사이라서 가슴 아팠다. 그래 놓고 연말을 맞으니 해묵힐 일은 아니다 싶어졌다. 심성 넉넉한 친구가 선배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때 슬쩍 사과상자를 들고 찾아갔다. 명절 돌아오니까요…… 우물쭈물…… 지난 일에 관해서는 한마디 없는 채로 끊어졌던 연줄이 이어졌다. 사과는, 사과의 효력이란 신기하다.

 

하고많은 과일들 중에서도 보통 사과를 으뜸으로 친다. 사과가 제일 맛있었던 기억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늦은 저녁에 사 들고 오시는 빨간 홍옥의 맛이었다. 할머니가 대청에 쌓아둔 국광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큼한 빨간 사과를 베어 물고서, 상기된 우리는 백설공주가 깨문 사과에 독이 빨간 쪽 푸른 쪽 어디에 숨겨졌을까 서로 우기며 재잘거렸다.


한번은 아버지가 제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쏘아 맞춰야 하는 벌을 받은 명사수 이야기도 함께 해주셨다. 우리는 오들오들 떨면서 귀를 기울였는데, 대부분의 옛날이야기가 그렇듯 해피엔딩이었다. 명사수는 한 치의 착오 없이 사과를 쏘았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감춰둔 두 번째 화살로 결국 폭군을 끌어내린다는 줄거리였다. 다 자라서야 독일문학의 고전기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빌헬름 텔』에서 그것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 스위스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임을 알게 되었다. 전설에서도 압제자는 결국 내려온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역사에 태초부터 사과가 등장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 있으랴. 금기의 사과를 따먹은 인간이 신에 버금가는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이브의 덕이다.


먼 옛날 트로이 전쟁도 황금사과 한 알이 시작이었다. 브레드가 <만일 If>에서 노래하는 ‘수천의 배를 진수시킬 수 있는 얼굴’은 파리스 왕자가 황금사과 한 알로 얻은 헬레나이자, 그녀가 불러들인 그리스 연합함대를 말한다. 사과는 그리스로마신화의 단골 메뉴다. 달리기의 명수 아탈란테 이야기의 전환점도 사과다. 아름다운 이 처녀를 얻고자 달리기시합에 참가한 많은 청년들이 죽어나가자 마침내 심판 멜라니온(또는 히포마네스)가 직접 시합에 나섰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서 받은 사과들을 던지며 그때마다 흠칫 흠칫 머뭇거리던 아탈란테를 겨우 이겼다고 하니까.

 

그렇게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사과는 과일의 중심이었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심겠다는 나무가 사과나무였다. 왜 하필 사과나무였을까. 이 무한 긍정, 삶은 다만 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인식은 합리적 이성의 방식이다. 그뿐인가. 뉴턴의 사과 한 알은 만유인력에 대한 깨달음을 선물하지 않았는가. 사과의 덕택으로 지혜를 얻었던 호모 사피엔스는 멍청한 감성으로 전쟁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이성에 더해 첨예한 과학을 하는 뇌까지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태초에 사과 이야기는 없는 듯하다. 자생하는 능금에 관한 이야기가 ‘계림유사’(1103년)에 등장하며, 조선에 이르러서는 종묘제사용으로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본격적으로는 광무10년(1906년)에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설치하고 여러 나라에서 과수의 품종들을 도입할 때 사과나무도 들어왔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1978년에는 대덕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정원에 바로 그 영국에 있던 ‘뉴턴의 사과나무’ 3대손이 이식되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뉴턴이 그 아래에서 명상을 했다던 ‘사과가 떨어진 나무’는 표지를 세워놓았지만 애석하게도 죽어버렸는데, 덜 죽은 곁가지 하나가 과수연구소로 보내져 생명을 회복했고, 후손들이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는 중에 그예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옛날엔, 내가 어렸던 시절엔, 사과는 달걀꾸러미 또는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토종닭 한 마리와 함께 정을 나누는 선물의 대명사였다. 지금은 퍼덕거리는 닭을 보자기에 싸 들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짚으로 엮은 달걀꾸러미도 사라졌지만, 사과는 여전히 제수용 배와 더불어 명절 선물로 꼽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과궤짝이 더러운 지폐의 이동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치 흑역사의 상징적 장면이었던 2002년 대선의 ‘차떼기 사건’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무려 150억 원이 숨겨진 사과상자들이 트럭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OO당에게 전달된 장면은 첩보영화에서나 봄 직한 장면이었다.

 

모든 오명과 변칙에도 불구하고 사과는 상큼하고 맛있는 과일의 으뜸이다. 게다가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사과 한 알로 가능하니 얼마나 유용한가. 스스로 잘못이 느껴질 때도 사과를 한입 베어 물자. 이 봄에도 어김없이 사과 꽃들이 필 것이다. 사시사철 신선도를 유지한 사과를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대다수 국민들의 뜻과 헌법재판소의 법이 일치하는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5:04

 

“봄은 멀고 다리 밑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3. 다리 밑
2017년 03월 06일 (월) 14:49:0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밤새 또 다리 밑에서 얼어죽은 사람이 있었구나, 쯧쯧.”

아침 일찍 신문을 보신 아버지가 아침 밥상에서 한마디 하셨다. 어쩌다가 장독대에 쌓인 하얀 눈 틈새로 얼어죽은 까치를 발견해서 놀란 것과는 또 다른 무서운 전율이 일었다. 밥알은 모래알이 되었다. 밥알을 씹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만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다리 밑’이 참으로 무서운 화두였다. 고집이 센 아이에겐 으레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애라서 그런다고 겁박하거나, 다리 밑에 모여 사는 집 없는 거지들은 아이들이라도 잡아먹는다고 위협을 했다. 그래도 가장 무서운 말은 다리 밑에서 누군가 얼어죽었다는 신문기사였다.

어린 나름대로 철학을 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인간의 입을 창조했을까. 왜 날마다 똑같은 일, 먹어야 하는 일을 시켰을까. 입 때문에 사람이 싸우고 죽고 그럴 것을 몰랐단 말인가. 공짜인 햇빛과 물만 먹고 살아가는 식물들은 좋겠다. 동물은 공짜인 산소 말고도 먹이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동물인 인간에게도 먹이가 필수적이다.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 식물을 먹이로 하는 것으로 모자라 움직이는 동물까지를 먹이로 삼는다. 너무 어려운 일, 불공평하다. 나는 식물이고 싶다. 아니 풀만 먹는 토끼이고 싶다….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고귀하다는 의미를 알 수 없던 어린 시절이었다.

 

내 땅에 심은 곡식으로 내 식구가 연명하던 옛날에는 한반도만 하더라도 같은 땅에 훨씬 적은 인구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농사법을 몰랐던 탓이라 했다. 분업의 세상이 와서 농경은 농경대로 축산은 축산대로 전문 경영이 가능하다보니, 이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게 되었다. 아니, 언제부턴가는 건강상의 이유로 식욕보다 섭취를 줄이려는 어긋난 세상이 됐다. 뭔가 어긋났다는 말은, 여전히 넉넉지 못한 가계로 아사 직전에 이르는 경우를 전하는 충격적 뉴스들 때문이다. 못다 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의 요절 소식을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비슷한 참상이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돈이 돈을 낳아 무한축적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졌거나 이 험난한 인생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다. 직업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판검사나 변호사는 올곧은 심성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도 편견이고, 누군가를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단언하는 판검사나 변호사가 있어서도 아니 된다. 그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재벌 3세로 태어났다면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지칭될 확률이 없었을 것 아닌가. 경찰도 자신이 단속을 받아 불리하면 신분을 속이고, 성직자나 교직자들도 파렴치한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동전까지 털어서 소방서에 기부하는 풀빵장사를 보라. 소유와 기부도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나로서 겨우 조금 더 아는 이야기를 하자면, 하인리히 뵐의 전후 작품 중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로 번역된 소설이 있다. 루르 탄광지대의 부유한 갈탄재벌의 아들이 전쟁 중에 돈과 권력의 결탁을 보면서 자라난다. 통장에 쓰인 어마어마한 숫자와는 상관없이 인색하게도 음식물을 아끼는 어머니, 심지어 바깥 애인에게조차 돈을 아끼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정상적인 교육의 기회를 버리고 어릿광대가 된다. ‘추상적인 돈’을 버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인과 군상』에서도 독특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 말기에 연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생필품(때로는 고급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 유산으로 받은 집을 저당 잡혀서 살아가는 그녀에겐 인플레 내구성을 지닌 잠정적 자산을 지불하고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다.

 

자산은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과는 무관하므로 무의미한 추상적 돈일뿐이다. 돈을 생계유지와 무관하게 무한정으로 축적하는 일, 더구나 그것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돈이 돈을 낳는 식의, 놀고먹으면서 부를 축적하는 일이라면 추악함을 넘어서 죄가 되는 일이리라.

놀고먹는 재벌이 있을까만은, 사람들은 재벌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요술과 마술을 행사하는 우수한 두뇌들이 고용되어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양분화를 고착시킨다고 믿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언어에도 없는 한국적 의미의 재벌은 영어로는 겨우 사업집성체(business conglomerate)쯤으로 소개된다.

신화적인 추진력과 성실함으로 부를 일궈낸 일세대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면서도, 가족이나 친인척 중심으로 출자한 지주회사를 핵심으로 여러 자회사들을 지배하는 현재의 재벌구조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적은 지분을 가지고서도 경영권을 독단으로 행사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재벌가의 의지가 최근 국정농단의 사태에서도 무거운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다리 밑 지키는 딱한 소수는 여전히 존재한다

 

왜들 다 쓰고 죽지도 못할 엄청난 양의 돈을 원할까. ‘자손대대로 물려줄 자산이니 잘 관리하라’고 했다는 자산이 어디 한 두 군데인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서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고, 둘 사이 격차가 클수록 부의 불평등 구조가 증폭된다.’는 피케티의 주장에 자본가들은 귀를 기우려야 할 때다. 죄까지는 아닐지라도 돈만을 추구하는 일은 너무 허망한 일이다. ‘일생을 돈 벌기에 매달리는 것은 야망의 빈곤이요, 자신에게 너무 시시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오바마의 말이 신선하다. 우리는 돈 자체보다는 조금 더 나은 존재이니까.

사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그 밥을 벌기 위해서 많은 좋고 나쁜 일들을 해야 하는 숙명이지만, 그 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칫하면 낙오자가 될 상황이니까. 몰락은 의외로 쉽게 오나 보다. 오늘도 천변 산책로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혹시 다리 밑 사람들이 간밤에 이부자리로 썼을 쓰레기 버금한 물건들에 마주치면 가슴 쓰려 어쩌나. 옛날에는 다 같이 주렸다지만, 지금은 더러는 건강과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로 안간힘을 쓰는 세상이 되었건만. 이 딱한 소수는 어쩌다가 다리 밑으로 밀려났을까. 촛불에서 십분 거리, 봄은 멀고 여전히 춥고 배고픈 다리 밑을 어쩌나.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54

 

말 아닌 ‘소리들’만 넘쳐나 … ‘하얀 돛’ 만날 그날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2. 테세우스의 돛
2017년 02월 20일 (월) 10:30:4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제발 하얀 돛을 달고 돌아와다오!

고대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무찌르기 위해서 크레타 섬으로 떠난 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운명은 야속하여 승리의 기쁨 속에 생환하는 테세우스의 배에 검은 돛이 나부끼고,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기에 앞서 왕은 절벽 아래 푸른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푸른 에게해의 전설이다.

 

탄핵소추의 배는 어떤 색깔의 돛을 달고 돌아오려나. 제발 하얀 돛을 달고 와다오! 살아오면서 검은 돛을 달지는 말아다오!

 

특검이다 헌재다 하는 비일상적인 단어들이 일상이 돼버린 오늘, 우리의 삶은 뒤바뀌고 오리무중인 것들로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특히 말이 의미내용을 담지 않고 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니, 말과 소리의 구별이 참으로 어렵게 됐다. 그런데도 말을 귀에 담고자 뉴스에 신경이 꽂힌 나날이다. 민낯이 다 들어났는가 싶으면 또 터지는 끝이 없는 진창 속, 그 속을 그만 보고 싶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까 봐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아이의 심정이다. 물론 아이도 손가락 사이를 엉성하게 벌려서 볼 것을 어차피 본다.

그래서 아프다. 많이 아프다. 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산더미로 드러나는 가운데, 유독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이 눈에 띈다. 2014년 잔인한 4월 그날, 바닷물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가능하면 회피해왔던 주제, 세월호 그날. 

 

   
  ▲ 사진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그날 저는 정상적으로 이 참사, 이 사건이 터졌다 하는 것을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어요. 보고를 받아가면서.”

 

이 문장을 외다시피 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주어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다. 보고를 받아가면서. 끝. 여기에 주어의 행동은 없다. ‘보고 받는다’는 행동이 아니다. 보고를 받고 나서 취하는 행동, 그것이 행동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거의 종일을 행동은커녕 반응도 내지 않으신 우리 대통령은 어물쩍 오보 탓을 하신다.

 

“그날 참 안타까웠던 일 중의 하나가 ‘전원이 구조됐다’ 하는 오보가 있었어요. (중략) 전원이 구조됐다 그래 갖고 너무 기뻐서, 아주 그냥 마음이 아주 안심이 되고, 이렇게 잘 될 수가 있나, 너무 걱정을 했는데, 그러고 있었는데 또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그게 오보였다 그래 갖고 너무 놀랐어요.” 

 

대통령은 오보가 있어서 아주 안심이 되었고,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오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단다. 정상적으로 보고를 받아가면서 안심했다가 놀랐다. 그것이 골자다. 보고를 받는 것이 행동이 아니듯, 놀랐다는 것도 행동은 아니다. 

그날 아침 9시 19분 ‘500명 탄 여객선 조난 신고’라는 긴급속보가 떴던 그날, 오장육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텔레비전에서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11시 좀 지나서 학생들 전원구조라는 보도에 안도하다가 곧 다시금 지옥으로 빠졌다.

 

그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청와대는 해경본청과의 교신으로 정보가 정확하고 빨랐다. 11시 29분 청와대는 해경에 말했다. “(구조인원이) 161명이면 나머지…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거 아닙니까. 바깥으로 떠 있는 게 없으니까.” 사고의 실체를 청와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 대통령은?

오보라는 단어는 도피의 함정이자, 말이 아닌 소리에 불과하다. 그날 그 참사에도 불구하고, 오보 때문에 점심도 편하게 드시고, 오보 때문에 판단이 늦었을 뿐, 재택근무를 하며 ‘정상적으로’ ‘보고 받으면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는 소리에….

 

갑자기 오리털 이불에 난 구멍에 얽힌 우화가 생각난다. 옛날 서양 이야기다. 부지런한 할머니들은 날마다 오리털 이불을 창틀에 걸쳐놓고 빗자루 같은 긴 막대로 두들긴다. 밤사이의 먼지도 털어내고 오리깃털에 공기가 다시 들어가서 보송보송해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두들길 때마다 구멍으로 오리깃털들이 날아올랐다. 할머니는 구멍을 찾아냈다. 이를 어쩌나! 어떻게 이 구멍을 없애나! 할머니는 궁리 끝에 구멍을 잘라버리기로 했다. 큰 가위를 들고 와서 구멍을 싹둑. 그런데….

 

구멍은 자를수록 더 커진다. 잘못도 변명할수록 더 커진다. 그날의 행적정리에 따르면, “공식 일정도 없고 신체 컨디션도 좋지 않았기에” 관저에 있었다는데. 만일 대통령이 재택근무가 아닌 출근근무를 했더라면….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바라건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됐을까. 아니, 선원들만 구조한 ‘나쁜’ 해경들 때문에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수장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행적정리에는 참상을 인지한 직후에 어떤 조처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빈자리에서 괴소문들이 자라는 것이다. 그 괴상한 단어들을 어찌 차마 입에 올려서 스스로 인격이며 국격을 송두리째 내동댕이칠 수 있는지. 그날, 11시 29분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것’을 해경에게 확인한 ‘청와대’의 입은 누구의 입인가. 청와대가, 곧 대통령이, 그것을 알고도 즉시 마땅한 적극적인 행동을 서두르지 않은 죄 그것 하나, 결과와 상관없이 부작위의 죄 그것 하나가 문제다.

 

그날, 하필 그날에는 ‘컨펌’을 빨리 못 받았을까. 누군가에게서 컨펌을 받는 국가원수라는 이미지는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명목상 여전히 국가원수이면서 공영방송도 아닌 일인매체로 국민을 만나려는 처사(處事)는 국어사전에서 죄의식 또는 품격이라는 단어가 증발해버렸는가 의심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품격은커녕 논리도 없는 변론들은 말이 아닌 소리들로 넘쳐나니, 최고 수준의 지성과 판단력을 갖추었을 대리인단의 심사(心思) 또한 의아할 뿐이다.

 

눈이 그치듯, 언젠가는 비바람도 그칠 것이다. 우리는 곧 기다리는 하얀 돛을 보리라. 예전에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 “시인이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그런 날을 위해서, 하얀 돛이여, 어서 오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