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5. 11. 5. 11:16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한 <제1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중, 한 파트의 참관기를 쓰라는 청탁을 받았다. 빠듯한 일정에 힘들었지만 맡은 부분의 "숙제"는 공부다 치고 열심히 하려고 했다. 2015년 9월15~18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


 

[17일 둘째 마당, 모국어 문학 활약상]

 

이민 현장에 대해서 쓰라뇨?

 

세계한글작가대회를 되새김질하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한글로 글을 쓰는 사람들 - 이민지에서 한글로 글을 쓴다면 그 소속은 어디인가. 그래서 예컨대 국제PEN한국본부 산하에 국제PEN한국본부캐나다지역위원회가 있다. 3년 전 78차 국제PEN대회가 경주에서 열렸을 때 왜 그 많은 교포문인들이 ‘Korean PEN’이란 이름표를 목에 걸고 다니는지, 그땐 의아했었다. 이름표의 주인이 ‘한글로 글을 쓰는 작가’라는 표지인 줄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니까.

이번 세계한글작가대회는 바로 그런 작가들 중심의 대회였고, 특히 ‘모국어 문학 활약상’을 논하던 자리로 돌아가 본다.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이사를 좌장으로, 이중언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민용태 명예교수가 시작을 열며, 자화자찬 같다는 전제로 스페인과 한국에서 종횡무진 시를 쓴 이야기를 했다. ‘하늘에 별들은 너보다 많아 / 땅에 꽃들은 너보다 많아 / 하지만 너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네 이야기 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로 끝나는 자작시를 스페인어로 이어서 한국어로 읊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민자의 고독을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 한글로 글을 쓰면 본국 한국과 접촉하라. 바람직하기는 이중언어로 써라. 더 낫게는 아예 그 나라 언어로, 영어권이라면 ‘여지없이 절대로’ 영어로 써라. - 누구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민용태 교수의 이중언어 제안이란 실제로 어려운 것임을 전제로 시작한 정정호 교수는 비교문학 학계를 이끌었던 경험으로 ‘영어권에서의 한글문학 번역문제’에 집중했다. 영어권의 재외동포재단의 자료집을 기초로 문단의 현실을 방대하게 소개했고, ‘한글문학’이라고 정의할 때의 ‘문학’의 외연을 넓혀서, 문리가 있는 문자로 구성된 모든 것을 모두 문학으로 본 만해 선생의 견해를 지원했다. 이어서 이민1세의 경우에는 한글문학(만)이 가능할지라도, 2세와 3세는 다르다는 견해를 폈다. 영어로 써서 헤밍웨이 상을 받은 이창래 소설의 경우 미국문학 내 소수문학으로 분류된 것으로 미루어서도 그것이 한국문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국에서의 한글문학의 문제란 결국 번역의 문제인데, 문학이란 ‘구체적 보편’이고 보면, 번역만이 평등한 사회로의 진입에 공헌하며, 번역은 모국어가 다른 언어로 거듭나는 정도를 넘어서 세계문학의 생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한글/한국문학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탁월한 최고 수준의 번역’이 없는 때문이라고, 번역에서의 완벽성을 강조했다.

질 메나주가 말했다는 번역에서의 ‘부정한 미녀’보다는 ‘정직한 추녀’를 지지하는 쪽이냐고 묻고 싶은 질문은 발화되지 못했다. 최홍규 시인 등의 열정에 넘치는 설명 조의 질의들에 ‘질의응답’은 어려웠다. 번역을 지원하라는 청중들의 일체감을 전달받은 좌장은 경주의 박목월 시인의 예를 들어 글을 발표할 수 없던 일제시대에 고향에 칩거해서 쓴 시들이 해방 이후 박두진 시인 등에 의해 『청록집』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며 ‘글쓰기’에 집중하는 일이 우선임을 피력하며, 2부 외국에서의 활동상 소개로 차례를 넘겼다.

처음 발언자인 재독 서정희 시인은 구상 시선집 『드레퓌스의 벤치에서』를 시작으로 김남조 시선집 『바람세례』 등 12권을 독역한 경력을 지닌 분이라서 앞서 말한 ‘탁월한 최고 수준의 번역’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심정이 들게 했다. 시인은 한국통상 우호항해조약 이후 1893년 첫 『전래동화』가 독역되기 시작한 이래, 1950년 이전에 겨우 7종이던 사례가 2013년 말을 기준으로 291종에 이른 번역의 현실도 소개했다. 1968년 일본에 최초 노벨상수상자가 난 이후 한국의 현존 작가들을 독일에 소개하고 있는 《Han》과《Hören》문학지도 소개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과 독일의 문화적 차이가 번역에서도 문제점으로 작용하는 점을 들췄다. ‘착한 배달민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쓴 작품들이 경쟁적이고 진취적 독일인들에게 수용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 서부를 대표하여 발표한 LA의 이승희 시인은 올해로 28회째를 연 ‘해변문학제’ 이야기는 접어두고, 오직 이민1세와 2세의 한글문학 계승 문제에 집중했다. 본국에서 초청된 강연자들이 ‘현장에 대해서 써라’고 할 때는 야속했지만, 사실 이민1세대에게는 향수문학이 전부였다고. 30년이 되어도 언어는 멈춰있어 영어문학은 불가능하지만, 문학지와 단체들도 많아지고 안정되어간다고 한다. PEN 연간집은 한글과 영문 50%씩 낼 수 있게 되었단다. 그러나 2세와 3세에게 한글문학의 전수는 어렵고, 이중언어가 가능한 그들이 이민한글문학의 희망이라고, 미주중앙일보에서 ‘미래신인한글문학상’을 제정했는데 응모 열기가 뜨겁다고 했다.

PEN한국본부캐나다 지회장 이정순 시인의 캐나다 현황 소개에 따르면 약 300명 문인들이 PEN과 캐나다한인문인협회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역시 2세의 한글문학 계승은 난제이며, 보다 활발한 번역을 모색하는 점에서 이민사회에서의 한글문학의 고민은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아베마리아’ 선율에 담긴 캐나다 한국문인들의 활약상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는데, 김양식 시인은 캐나다 현지 문인들과의 교류에 대해서 물었고, 100개가 넘는 언어와 150개 인종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마음과는 달리 실제 교류가 어렵다는 답이 되돌아 왔다.

마지막 사례발표는 본론과는 좀 다른 이야기로, 인도네시아 소수부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문자를 가져다가 그들의 말을 표기하는 문제였다. 라틴문자 등이 아니고 왜 한글이었냐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 바우바우 지역의 아비딘 교사는 한국유학 시절에 이호영 서울대언어학과 교수의 추천으로 부족회의를 거쳐서 ‘부족의 문자’로 허가 받은 과정을 사진 자료로 보여주었다. 인구 10만명이 안 되는 찌아찌아족의 언어에는 문자가 없다가 한글자모가 들어간 것인데, 처음 반응들은 한국문화의 혼입에 대한 염려였지만, 부족의 지도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한글이 ‘소리의 기록’에 쉽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학교간판도 ‘세쿨다’ 등으로 쓰는데, 한글을 아는 우리가 소리로 읽을 수는 있지만 뜻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가 한글로 교과서를 써서 최근에 출판했다는 소식에 박수를 쳤지만, 정작 한국어 교육의 산실 세종학당은 철수한 지 몇 해라는 이율배반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질의응답 중에도 이중언어 창작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편파주의의 희생이 될 수 있다는 민 교수의 염려는 이어졌다. 한편 이민2세대가 영어로 쓴 작품들은 미국문학에 속하더라도 한국의 정체성과 혼이 들어 있으므로 한글로 번역되기를 바란다는 정 교수의 발언으로 둘째마당이 끝났다. 필자는 이민자로서 ‘모국어 문학’의 고민은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국내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일 터, 한글 창제의 과학적 우수성에 우쭐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쓰는 한글에 인류가 공유하는 문학어로서의 보편적 문법을 갖추어 작품으로서 문학성이 넘칠 때라야 세계의 독자를 얻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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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PEN한국본부 기고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1. 5. 10:47

교수신문

 

 

역사왜곡의 유불리, 따져나 봤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⑤ 새옹지마
2015년 10월 26일 (월) 13:11:4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나는 사람들이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말할 때마다 싫었다. 매사를 결과적으로 유불리로 따져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내 인생 새옹지마 한 줄기가 떠오른다. 때는 아주 옛날로 거슬러 간다. 

   
  ▲ 일러스트 돈기성  
 

제1공화국 시절, 어떤 포병장교의 졸업식에 오는 대통령을 위해 화동들이 동원됐다. 열 명쯤으로 기억에 남은 여중생 아이들이 꼬까옷 한복을 특별히 차려 입고 큰 군용차를 타고 비행장에 도착했다.

 

[계속]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625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0. 27. 00:28

 

한자 섞어쓰자면서 ‘치맥’은 잘도 쓰는군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④ 나라말 한글
2015년 10월 14일 (수) 17:18:18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한글날이 지났다. 훈민정음 8회갑을 기념해 제정된 ‘가갸날’이 한글날이 돼 지금까지 이어오지만, 정작 한글은 부침을 겪어 왔다. 공교육에서 한글이 통째로 사라졌던 암흑기가 지나고, 우리의 해방은 한글의 해방과도 같은 말이었다. [계속]

 

 

넷, 나라말 한글

 

한글날이 지났다. 훈민정음 8회갑을 기념하여 제정된 ‘가갸날’이 한글날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지만, 정작 한글은 부침을 겪어 왔다. 공교육에서 한글이 통째로 사라졌던 암흑기가 지나고, 우리의 해방은 한글의 해방과도 같은 말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법원에서는 판검사들이 ‘가갸거겨’를 낭송하면서 한글공부를 했다는 일화가 있었듯, 일제 때 최현배 선생이 국어의 문법 체계를 집대성한 『우리말본』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듬해는 최남선의 『신판 조선역사』, 이어서 『큰사전』 첫째 권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1차교육과정기(1959~1963)만 해도 국어공부라면 『우리말본』에 입각해서 쓴 교과서로 임자씨다 풀이씨다 꾸밈씨다 해서 낱말의 갈래부터 배웠다. 하지만 한자옹호론자들의 반론도 드세어서, 학교를 배움집, 비행기를 날틀로 해야 하느냐는 공격이 빗발쳤다고 한다. 정작 배우는 우리들은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말하는 상상만으로도 재미만 있었다. 오늘날 동아리나 새내기 같은 단어들을 만들어내어 정착시키는 언어감각으로 미루어, 말본 시대가 흔들림 없이 갔었더라면 순 한글의 정착이 더 빨랐지 않을까.

한글다운 한글의 사용은 이제 한국 내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난 달 경주에서 열린 ‘세계한글작가대회’는 세계 각처에서 한글로 글을 쓰는 작가들의 대회였다. 해외라면 주로 교포들의 한글문학을 지칭한다. 대회에서는 한글문학/한국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보급과 교육문제에 대한 관심도 주목을 끌었다. 훈민정음의 상형과 가획의 원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함을 갖추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과 한글문학의 세계화는 별자리만큼씩이나 서로 떨어진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류의 보편문법이 내재된 글을 다듬어 쓰는 일, 더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쓰는가, 철학이 관건일 것이다. 아무튼 경주 대회는 궁극적으로 한글문학의 세계적인 수용을 꿈꾸는 잔치였다.

그러나 국내 한글의 현실에서는 초등 한자교육을 지금도 거론하는 퇴행에 가까운 행보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퇴행이라면 단기 3779년 이전으로 물러간다는 말이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서’ 백성을 위해 새로이 스물여덟 글자를 만든 그때를 저버리고, 왜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4348년 오늘, 다시 특권계급의 전유물인 특종 어휘들 때문에 나라말이 계급화되어 간다. 한글은 이미 영어단어 혼용의 시대를 살고 있다. 높은 양반들은 의제는 시시하니 어젠다를 논하시고, 학계에서도 이펙트를 위해 어떤 어프로치가 좋을지 초이스를 따지는 것이 노멀한 일이 되었다. 낮은 양반들은 건강이야 어찌되었건 치맥만 있어도 행복한데, ‘치’는 꿩이나 닭이 아닌 치킨의 ‘치’자다. 영어에서 소외된 그냥 백성은 키친타월을 치킨타올이라 말해서 비웃음 사기 십상이다. 처음 그 물건 만들어 팔 때 종이행주라고 했음 좀 좋아, 이렇게 말하면 속 좁은 늙은이의 속 없는 불평으로 치부된다. 영어를 섞어야 튀고, 튀어야 팔리는데 무슨 소리!

이 스타일리시한 그레이 톤의 아이템을 입어 줘야 폼이……. 머리 좀 쉴까 하고, 산책처럼 운동화라도 꿰 신어야 하는 것 말고 간단히 좀 쉬려고 텔레비전을 틀면, 한글은 토씨뿐일 때도 있다. 영어단어로도 모자라 한자교육에다 중국어단어 혼용까지 나올 참이라. 어쩐다? 우린 우리 식으로 우리 말 좀 하고 살 수 없는지. 지금 사회에서는 어쨌거나 보수층이 대세라는데, 옛 것 좋아하는 대세가 세종의 옛 정신 좀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민주적 의미를 지닌 훈민정음은 물론, 공법(貢法) 제정을 위해 겪어낸 지난했던 민주적 과정을, 그 아래 깔린 민주적 사상의 바탕도 함께 배웠으면 싶다.

사족 한 마디. 누군가는 이 글에서 ‘단기’가 튀어 나와서 보는 눈을 어지럽힌다고 나무랄까. 언젠가 공적인 지면에 단기를 꼭 써보고 싶었다. 오늘 날 무엇인가 병기를 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한글과 한자 병기가 아니라 단기와 서기의 병기다. 우리 하던 대로라면 ‘단기(서기)’로, 세계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서기(단기)’로, 최소한 새 달력에라도 단기 표기가 있었으면 한다. 육십갑자를 표기할 정도로 전통과 옛것을 존중하면서 단기를 망각하다니,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는 우리가 아직 멀었나 보다.

<교수신문> 2015.10.12.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10. 2. 15:52

 

무엇이 우리를 빌어먹게 만들었을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③ 밥 이야기
2015년 09월 25일 (금) 11:40:14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밥이 제일 풍성한 한가위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살고, 그것도 붙박이 교수가 되면 어째도 밥은 먹는다. 20년을 그렇게 살고 나면 노후연금도 받을 수 있으니 철밥통 하나를 꿰찬 셈이 된다. 그래서 비아냥의 대상이 돼도 밥을 먹으니 어쩔 수 없다.

   
  ▲ 일러스트 돈기성  
 

노동 시간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수에게 비호감을 갖는다. 일주일에 아홉 열 시간 강의를 하고 그 월급을 받다니! 가끔 천재적으로 아이큐가 높고 공부 효율성이 좋아서(?) 골프나 여행 같은 시간 많이 드는 취미를 가진 몇몇 교수들 때문에 더더욱 그런 누명을 쓴다.

그건 누명이 맞다. 우선 연구재단 등재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 흘리는 땀을 몰라서다. 등재지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기에도 의무 탈락률이 ...

셋, 밥 이야기

밥이 제일 풍성한 한가위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살고, 그것도 붙박이 교수가 되면 어째도 밥은 먹는다. 20년을 그렇게 살고 나면 노후연금도 받을 수 있으니 철밥통 하나를 꿰찬 셈이 된다. 그래서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도 밥을 먹으니 어쩔 수 없다.

노동 시간과 관련해서 생각하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수에 비호감이 된다. 일주일에 아홉 열 시간 강의를 하고 그 월급을 받다니! 가끔 천재적으로 아이큐가 높고 공부효율성이 좋아서 골프나 여행 같은 시간 많이 드는 취미를 가진 몇몇 교수들 때문에 더더욱 그런 누명을 쓴다.

그건 누명이 맞다. 우선 학진 등재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서 흘리는 땀을 몰라서다. 등재지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기에도 의무 탈락률이 있고 보면, 2000쪽 독서를 하고 초벌 200쪽을 썼다가 예닐곱 번의 수정 과정을 거쳐서 20쪽으로 촘촘하게 써낸 논문도 탈락의 수치를 겪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위 밥을 먹는다. 자유시장경제 사회에서 - 나는 신문의 경제면 이해도가 엉망인 약점이 있으므로 비슷한 뜻으로 읽어주기 바라며 - 태환권을 획득하는 일은 성스럽고도 소중한 일이다. 인간적 굴욕을 가족이나 돌봐야 할 사람들의 밥을 위해서 감내하는 것이야 말로 위대한 일 중 하나다. 상사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는 것은 애교요, 구둣발에 정강이가 까이는 일까지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대학사회라고 아주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에는. 군인들 세상일 때 어딘가 끌려가서 각목을 낀 채 무릎을 꿇리고서 피눈물을 흘렸다는, 지금은 고인이 된 교수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총장직선제를 폐지하라는 압박이나 출석부까지를 감사 대상으로 해서 교수를 모욕하는 일 정도는 그것으로 밥을 먹으니 참아야할 일이라고?

미안한 말이다. 밥이 없으면 죽지만 밥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유럽연합 골칫거리가 된 그리스의 자살률은 100위권을 훨씬 넘고 10대 수출국 중 하나라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2위라니 무슨 말인가. 밥과 자살률은 크게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대중은 빵과 서커스로 통치할 수 있다는 정치권의 유구한 지배논리에도 밥 아닌 뭔가를 안겨주려는 꼼수가 들어 있다. 궁극적으로는 지배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그 두 번째 무엇을 고려했다니! 어떤 변이로서 말해도 물질 아닌 정신적 무엇이다.

정신을 저당 잡히고 - 그렇게는 못 산다. 살더라도 사는 것이 아니다. 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가장 비굴한 자세 가운데도 변명의 숨구멍이 있어야 산다. ‘나라’가 창조경제로 만들어준 밥을 먹고 살지라도, 굴종할 필요는 없다. 밥은 원래 있어야 할 것이었으므로 땅위에 살아가는 사람의 일종의 권리다. 밥에 접근권한이 줄어들어 빌어먹는 기분이라면 권한이 줄어든 과정에 문제가 있다. 거꾸로 말하면, 너무 많은 밥을 제 것으로 갖는 것이 좋은 - 여기서는 ‘선한’ -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있다. 세계 71억 인구 중 8억 이상이 기아상태라는데, 유엔식량기구에 의하면 오늘날의 농업시스템에서 생산되는 총 식량은 120억 인구가 먹고 살 수 있는 양이란다.(장 지글러, 2014) 식량이 거의 절반이나 넘쳐나는데 굶어죽는 사람들이라니! 이해가 안 되기는 국내 사정도 마찬가지다. 창군 1954년도에 불과 30배 차이였던 일병과 4성 장군의 봉급 차이가 50년 지난 오늘날엔 무려 279배로 높아졌단다.(임종인, 2004) 발전되어온 사회라는 표현이 맞는가. ‘열정페이’라는 이름의 노동수탈이 국가가 경영하는 군대 내에서도 자행된다,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교수는 교육이라는 밥값을 해야 한다. 인간은 교육받으려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잘’ 살자는 취지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교육할 필요가 생겼으니까. 그러나 교수는 밥 눈치 보느라 권력자와 자본의 입맛에 맞춰 학생들을 마구 휘어지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돈에 의해서 평가 될 것을 알고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정말 아니니까.

사회는 최고의 가치를 그 구성원인 우리가 선택하도록 열려있는데, 깃발에 새겨진 글자 ‘돈’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펄럭거린다. 밥에 저당 잡혀서 깃발에 다른 바람직한 가치를 적어 넣는 일을 저어하고 있기 때문이다.(끝)

 

 

교수신문 9.25.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9. 22. 22:13

보따리 꽁꽁 봉해버리고 ‘고려장’ 택했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② 보따리장수
2015년 09월 15일 (화) 13:24:5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최근 대학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의실이 ‘취업준비반’으로 변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평가지표들이 강의실을 꽁꽁 옭아맨 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강의현장이 절실한 시점이다. 원로급 교수의 생생했던 강의실 풍경을 재조명해 고등교육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 끊임없는 평가와 경쟁 속에 대학이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돌아본다.

 

   
  ▲ 일러스트 돈기성  
 

여름의 정점에서 산업수요에 맞게 학사구조를 조정하는 대학에 정부가 많게는 300억원까지 지원하겠다는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이 나왔다. 무슨 종합선물세트도 아니고, 명실공히 대학은 취업준비과정이 될 모양이다. ....[계속]

둘, 보따리장수

 

 

여름의 정점에서 산업수요에 맞게 학사구조를 조정하는 대학에 정부가 많게는 300억 원까지를 지원하겠다는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이 나왔다. 무슨 종합선물세트도 아닌 것이, 명실 공히 대학은 취업준비과정이 될 모양이다. 대학생은 취준생의 다른 이름이다. 대학과 교수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기준이란 곧 취준생의 취업률이다.

오늘날 합리적이라는 개념은 같은 일을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강의라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강사는 필히 교수가 되어야 한다. 같은 교수로서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필히 논문을 많이 써야 한다. 성과급에는 돈만이 아니라 자긍심도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저자 문제나 표절 논란이 필히 따른다. 합리적인 교수라면 각각 하나씩 논문이 아니라 둘이서 두 개의 공동논문을 제출하는 것이 좋음 - 원래는 ‘선함’인데 여기서는 ‘유리함’이다 - 을 안다. 보직 또한 이타심과 봉사점수라는 두 개의 염기서열이 ‘창조’해낸 가치 중의 하나다.

그래 보았자 그 성공은 표면적 평가요, 잠정적인 판가름일 뿐이다. 강단에 서는 사람들 마음속 저 깊은 곳에는 허무의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교수란 기껏 보따리장수임을 확인한다. 유용한 첨단지식을 파는 경우라 해도, 토플러의 말마따나 그것들은 어느 시점에서 ‘무용 지식(obsoledge)’이 된다. ‘검색’은 살인적 권위로 지식사회를 뭉개고 말았다. 와중에 문학사나 강의하다 보면 이 낡은 물건짝을 팔러 다니는 신세가 처량해지곤 한다. 그걸로 밥을 먹으니 조용해야 하는가, 그건 다른 문제다.

보따리장수라 하더라도 제 물건이 무엇인가는 알려야 할 것 아닌가. 내 고민은 내가 파는 물건이 외국문학이라는 데 있었다. 문학작품은 인류의 최고의 자산들 중의 하나이고 거기에 시대와 국경은 없습니다. 옳다, 그렇게 강의할 수 있었을 동안은. 시금석이란 변한다고, 학생들이 대들면, 시금석은 불변이므로 시금석이라고 우겼다. 학생들은 점점 (독일)문학이 주는 양분을 흡수하지 못했다. 훌륭한 ‘스펙’을 위해 집어 삼킨 유용한 지식들로 영양과잉 상태에 이른 뒤로는, 문학 같은 것은 ‘갈아 먹여도’ 못 먹었다. 독일문학 작품들을 갈아 먹인다는 말은 번역본으로 읽는 것, 정신만 읽어도 되니까. 한국작품을 전채요리로 맛보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다가 또 꼬인다.

“일본이 그렇게 일찍 망할 줄 몰랐었다”라니, 그게 변명이 됩니까? 영원할 줄 알고 충성했다니, 더 기가 막히죠!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하사 우리의 자랑.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깼다”고 칭송을 바쳐요? 가미카제가 되어 승천하라니!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이 생명파라뇨! 생명이 뭔데요? 그렇게 대드는 학생으로 강의는 그만 삼천포로 빠진다. 그래도 교수를 당황하게 하는 학생들은 훨씬 나았다.

보따리 풀기 사정은 악화일로였다. 1919년 베를린에서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결성 된 이래 ‘프롤레타리아극장’은 노동자의 의식고취를 목적으로 놓고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폴크스뷔네(민중무대)’과 경쟁을 벌였지요. 그 무렵 우리나라에선 ‘카프’라는 약자로 ……. 한국인 독문과 학생들이 카프와 카프카의 구별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은 어떤 정보에도 무감각을 드러냈다. 교수가 풀어놓는 보따리 내용물은 오직 기말고사 답안지 작성에 필요할 뿐임을 그 눈빛들을 보면 안다. 아예 눈빛을 볼 수 없는 시기가 닥쳐왔다. 어떤 보따리를 풀어도 그들의 관심을 돌릴 길이 없었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이 아니라, 턱없는 환상에 젖어있다. 높은 학점, 최고의 스펙, 빠른 취업이 가져다 줄 무한행복에 목을 맸다. 더러는 ‘열공’한답시고 강의를 녹음하는 강도짓도 서슴지 않았다. 세계가 한 뭉텅이로 글로벌스탠더드에 입각해서 글로벌경제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나는 그들의 경제마인드를 어찌할 길이 없었다.

결론은 스스로 보따리 싸는 일, 자발적인 고려장이었다. 사형집행일을 앞둔 사형수들에게도 기어코 ‘미리’ 자살하려는 강한 욕망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많은 자살자들은 사회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느낌 때문에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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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14.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9. 22. 21:50

 

교수신문에 2주에 한 번 연재 칼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가 아니라

늙은 날의 허망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수를 향한 조소 속에도 고민… ‘나는 왜 강단에 서나’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①하이에나
2015년 09월 01일 (화) 11:32:10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최근 대학구조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의실이 ‘취업준비반’으로 변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평가지표들이 강의실을 꽁꽁 옭아맨 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강의현장이 절실한 시점이다. 원로급 교수의 생생했던 강의실 풍경을 재조명해 고등교육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 끊임없는 평가와 경쟁 속에 대학이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돌아본다.

 

   
     

 

 

하나, 하이에나 이야기

 

장례식은 누구의 장례식이거나 슬프다.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가장 잔인하게 짝을 버리는 방식은 죽음으로써 버림이라 하는가. 죽음 앞에서 사람은 진지해진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라도 살아있던 때를 그린다. 그렇게 한 교수의 죽음이 내게 거의 죽어있던 그때 그 대학시절을 떠올려 준다는 건 인생의 흔한 아이러니의 하나일까.

총장직선제 문제가 정말 문제가 되었다. 한 교수가, 시인이 목숨을 내놓고 지키고자 한 것이 어디 그것뿐이었을까 만은 그것이 기폭제가 된 것은 분명하다고들 한다. 그가 지키고자 한 가치는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란 원래의 이름으로 숨은 쉴 수 있을 풍토였을 것이다.

300의 대학들에서 이루어지는 기껏 “대중교육”(이해찬)을 위해 취미생활은커녕 마음 편히 밤잠을 자보는 것이 소원일 대부분의 교수들은 거대 자본의 무한권위 밑에서 어떤 정체성을 지닐까. 학사는 난 이제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석사는 공부를 더 해보니 모르는 게 조금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 박사는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교수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내가 얘기하니까 학생들이 다 믿더라는 위인이라고 놀리는 글이 교수들의 코앞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밖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교수의 생명은 첫째가 공부다. 차원 높은 공부를 위해 연구비를 지원 받는 것은 돈 뿐 아니라 명성의 문제이므로 어떤 재단의 연구비이건 가릴 겨를이 없다. 아니, 만에 하나 의심스러워도 외면할 수밖에 없다, 학문과 재단은 무관하다는 성스러운 원칙을 고수하면 된다 라고. 더구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인문학 전공자들은 연구비 지원에서 밀리고 따라서 명성에서 밀리고, 그렇게 주눅이 들었다. 기업들이 세운 종합대학들의 ‘총장’과 실력자들은 곧 효율성 제고의 이름으로 효용성 낮은 학과들의 통폐합을 추진했다.

해방 후 대학이 설 때에는 쏟아져 들어온 서양문물의 범람 속에서 외국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은 매우 보람된 일로 여겨졌었다. 누군가는 인류보편의 문화가치를 매개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숭배의 대상은 물질로 한정되어갔고, 부의 축적과 무관해 보이는 학문은 차츰 계륵이 되어갔다. 인문학이란, 독문학은 더더욱, 합리적인 판단 기준들에 위축되었지만 모르는 척,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뿐인 나는 그것에 매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몸서리를 쳤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내 손가락들은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했다. 꼬리가 있음직한 자리에 정말 꼬리가 자라나고 수북이 털마저 돋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순간 의자를 튕겨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울었다. 그렇게 미쳐갈 수도 있다는 공포에 떨며 물을 틀어놓고 울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숨 쉴 수 있기 위해서 나는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썼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다시 한 방울의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낄 때까지 꼬리 걱정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서 살아남는 일, 행동이 아닌 비겁한 도망이었다.

행동은 다른 형태다. 말을 해도 말이 아니거나 소통 부재로 숨 막히는 오늘, 명색이 지식인 사회의 본산이자 원점인 대학을 관리 통제하려는 국가(실은 정부)의 권력에 맞선 고 고현철 교수는 행동으로 저항했다.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지키는 ‘주역’이어야 할 교수집단을 무력화하는 과정”(김명환, 창비)에 죽음으로 맞선, 그런 것이 행동이다. 그의 영결식엔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나는 심각한 의혹에 빠진다. 내 글을 쓴다고 해서, 손가락 다섯이 분명하고 꼬리도 없으니까 안심해도 될까. 학문에서 문학으로 내 식탐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 아, 그 ‘표절 사태’ 이후엔 행여 그 생채기에서 흘러나오는 뭔가 부산물 찌꺼기라도 즙이라도 기대하며 침을 흘리는 나는 여전히 하이에나다.

첫사랑 독문학에 꽂혔던 그 하이에나 시절이 오히려 그리운 밤이다. 인간의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는 하이에나 짓거리도 일순간 멈추고 함께 세상을 고민했던 그때가 그립다. 공동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었던 ‘촌스런’ 그 시간들엔 하이에나들도 제법 사람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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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31.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8. 11. 23:02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린다. 국제PEN한국본부 주관, 9월 15~18일 경주.

기념문집을 내는데 6개의 주제 중에서 한 편을 내도록 되어 있다. 

처음 것은 제출 한 것, 나중 것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이다.

 

 

주제: 내게 특별한 우리말

 

대단원을 지나서 다시 한글에

 

다행스럽게도 일제 치하가 아닌 세상에서 이 땅에 태어난 나는 한글전용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았다. 지금 쓰는 용어인 문법은 말본이었고, 실제로 교과서 제목이 그랬다. 심지어는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모교는 배꽃큰애기배움터라야 한다고까지 한글 사랑에 목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말 우리글은 공부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면서 자랐기에 우리 음악도 당연히 7음계라 믿어버렸다, 제법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러니 우리 것은 모두 그냥 저절로 있는 것이고, 뭔가 낯설고 어려운 것이 학문의 대상이리라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 살았을 뻔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연구논문을 쓰면서 오직 갈수록 멀어지는 그것들을 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순간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이런 고백과 함께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설 쓰기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 글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하려니 내가 소설은커녕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글쓰기를 배워 본 적도 없이 논문이라는 이름의 글들을 써댔다니. 우와,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번갯불에 콩 볶는 심정으로 남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서 처음 한 일은 한글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다 살고서 무슨 짓이람, 이라고 핀잔할 지경인데도.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계속 외국어만 파던 대학의 언어교육원 어딘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교사가 된다는 상상은 어색했지만, 분명 국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때까지도 국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따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국어는 다만 나라말인 것을, 한국어라야 고유의 우리 언어를 국제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가며 부끄러움 속에서 단기간이나마 (한)국어를 배웠다. 내친 김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룹 스터디도 하고 혼자 날밤도 샜다. 과락은 면했던지 2차 시험을 보러 갔을 때에는 한참 젊은 면접관들 앞에서 얼얼했지만, 막상 자격증을 손에 쥐자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일진대, 무턱대고 평생 써댄 글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게로 치면 어떤 것은 1킬로그램을 어떤 것은 2킬로그램을 넘는 것들이었으니 이들을 어쩐다?

 

기억을 왜곡하기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고는 새로운 한글로, 내게는 새로운 한글로 글을 쓴다. 새로 쓰는 글들이 많아지면 잘 못 썼던 글들이 덮이기라도 하는 양. 덮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님을 알지만 모른 체하기로 한다. 어차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라고 위로를 한다. 나의, 우리의 한글로 글을 쓰면서 외국어 공부할 때만큼 사전을 찾는다. 글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서 살핀다. 잘은 아니더라도 틀리지는 말자고, 잘 쓰는 건 타고나거나 어떤 은총의 문제이려니 틀리게 쓰는 일이나 말자고 애를 쓴다. 물론 세상 일이 애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알 만큼은 살았다. 그래도 다른 묘수가 없다. 다만 한글을 다시 배우게 된 것이 기쁠 뿐이다. 내 말을, 우리의 말을 늦게라도 다시 찾은 것이 의미라면 의미다. 한 편의 연극일 인생의 대단원을 지난 오늘에서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니, 의미를 떠나 나는 그냥 한글에 파묻혀 있다. 내 글쓰기가 세계를 폭로하는가, 사르트르의 말인데, 그건 그 다음 일이다.

 

주제: 한국적인 정서

제목: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 민족에 알맞고 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정서가 있으리라. 한국인에게도 한국에 알맞고 한국의 특징을 보여 주는 정서가 있어 마땅하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에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세계가 한 뭉텅이로 글로벌스탠더드에 입각해서 글로벌경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우리민족은 새로움에 능하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천재적 감각을 자랑한다. 식민지배의 질곡과 내전의 참상에서 놀라운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낸 것 또한 새로운 가치를 날렵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한 결과라고 한다. 유사 이래 공동체 의식 속에서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자유’가 초고속으로 우리 사회 속으로 이식되었다. 자유연애, 자유결혼,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온통 자유 천지다.

 

거기에 우리는 예부터 우물 안 개구리를 경계하리만치 독선적인 기질이 있다. 사전은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을 독선이라고 푸는데, 독선적인 사람은 자신이 독선적인 줄 모르기 때문에 독선적이 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또한 독선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 독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깊은 개성적 성찰보다는 유행되고 있는 가치들에서 버무려 낸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데 있다. 유행, 다시 말해서 외면적 평가의 기준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독선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자유경쟁으로 얻은 돈의 위력과 자유선거에 의해 잠정적으로 대표가 된 그들의 독선은 대중을 벼랑 끝으로 유치할 수도 있다. 대중의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기 때문에 회의도 주저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훌륭히 성공한’ 그들이 내세운 기치를 추종하다 보면 거의 한 줄 서기를 해서 그리로 달려가게 된다. 그들이 내어 건 깃발에는 ‘자유’가 너풀거린다. 대중은 자유를 향해 죽을 경쟁을 한다. 친구도 형제도 팔꿈치로 제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당위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앞서 달리는 사람들을 좇아 모두가 달려가는 길에서 옆도 뒤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물론 다른 가치나 방식을 거론하면 순간에 낙인찍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큰 소리를 낼 조건이 아닐 때에는 더욱 몸을 사려야 한다.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오늘날 한국에는 정서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에 내어 줄 틈이 없다. 새것에 취한 채, 학문과 예술마저 유행을 좇느라, 정녕 우리의 문화유산의 뿌리 없이도 앞으로만 내달려도 좋을 것인지. 밥이 부족했을 때 서로 양보했던 우리네 인심은 밥이 넘쳐나는데도 나누기는커녕 빼앗는 현실로 바뀌고 말았다. 국민소득 2500불인 나라에서 연극에 예술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병들고 굶어서 죽어가는 불공정 분배를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방치하고도 숨을 쉬며 살아간다. 언제부턴가 목소리 큰 사람이 대접 받는 일이 다반사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목소리 큰 아이가 늘 이겼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공동체도

늘 49%는 51%에 눌려서 소수의견으로 폐기되는 것을 견뎌야 한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은 종말의 시작이다. - 카뮈가 『페스트』 영문판 서문에 썼다는 이 말을 반추해 본다. 대중에게 깃발을 내어 건 위정자들이 이 말을 음미해보면 어떨까.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내건 깃발 만 옳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좇아가는 이 가치 만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이 자유이지 이 경쟁은 공평하지도 않고 심하면 살인적이라고. 나의 자유는 필히 너의 자유를 다소간에 다치게 하는 것이라고. 그 또한 한이 되고 한을 키울 것이라고. 그러니 자유의 천칭 다른 한쪽에 평등을 올려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발언에 별 효력이 없는 한 무명소설가의 부질없는 상상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5. 10. 11:57

 

자유를 증오한다

 

 

자유를 동경했다, 동경했었다.

1997년 겨울, 세 번째 독일에 갔던 그때만 해도 내게 자유는 아름다운 가치였다. 저 남쪽 어느 대학의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일종의 인문학 강좌에서였다. 쾰른에 거주하며 뷔페탈 대학에 오가느라고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코앞의 별다른 과제가 없다 보니 야간의 가벼운 강좌도 기웃거리다 유명한 교수의 이름을 발견하고 갔던 참이었다. 연사였던 그 교수는 자신의 책과 논문들을 읽었다는 이역만리 한국의 시원찮은 독문과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이 기분 좋은 일에 속하겠지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마치 뭣을 구하러 가정과 애들이 있는 나이 든 여자가 외국에 나와 있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실제로 전문자료를 구하게 위해서 독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는 시대였으니까. 또 이미 교수자리에 있는데 - 독일에서는 교수 자리가 대단해서 그랬겠지만 - 뭣 때문에 애써 독문학의 본고장을 쓸쓸히 배회하느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어차피 독일 사람들처럼 독일 정서에 함몰되어 독문학을 완벽하게 체득할 수도 없으면서? 문학이 뭐라고?

 

질문의 저 깊은 회의를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는 자유라는 말을 입술에 달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강의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어쩌면 생 자체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으로, 혹은 학교당국의 연구비로, 연구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를 어찌 예찬하지 않았겠는가.

추상적인 자유는 아름다운 무엇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건배라도 할 일이 있으면 자유를 위하여, 라고 외칠 뻔도 했다. 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성장해온 우리들, 이 아니 자랑스러운가, 라고. 자유시장경제가 자유민주주의와 합심해서 민주주의를 잡아먹고 우리들로부터 온갖 원래적 자유를 침탈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는 막연히 자유를 예찬하고 있었다.

 

시장경제체제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하므로, 다른 말로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기업경제다. 기업경제가 자유를 보장받는다. 이 자유는 상대에게 창끝을 겨눈다. 창끝은 가진 자유가 적은 사람의, 창을 든 손은 가진 자유가 넘치는 사람의 몫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상승해도 노동자의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최악의 경우, 기업이 투자는 미루면서 몇 년 하다가 타산이 안 맞다 하면서 손을 떼어버리면 그만이다. 잘 준비된 시나리오만 있으면, 경영위기를 서류상으로 증명만 하면, 문 닫을 권리가 생긴다. 사람 내쫓는 것도 권리가 된다. 기업의 자유는 노동자들을 단박에 해고할 자유까지를 말한다. 자유가 보장된 세상이 그렇다.

 

이러고서 자유를 예찬해야 하다니. 나는 언젠가부터 자유를 증오한다.

원론적으로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상충이 일어난다.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일치하기가 쉽지 않다.

 

고도성장의 시대에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이라 했다. 상당 수 자수성가를 꿈꾸던 사람들은 계층 상승을 이루어 냈다. 계층 상승을 이루다 - 이 말 자체가 사회에 상존하는 계층의 구분을 인정하는 씁쓸한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준다. 자유 경쟁을 통해서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꿈을. 경쟁할 자유? 그것도 자유인데 경쟁에서 낙오된 것은 낙오된 자의 무능이다, 라고들 한다. 자유 경쟁이란 어불성설이다. 같은 조건이 아닌 자유 경쟁은 자유 경쟁이 아니다.

느닷없는 생각. 내가 자유 경쟁으로 대입을 뚫었지만, 딸을 낳으면 꼭 이화여대에 보내겠다는 우리 어머니의 성화와 딸을 무슨 대학공부 시키냐는 다른 어머니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분명 무심한 어머니의 딸 대신에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나의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를 담보로 하기가 십상이다. 내가 마시는 물과 먹는 쌀은 누군가의 부자유의 대가이다. 쉬고 싶어도 하기 싫어도 물과 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과 그 일의 결과다. 그들이 내게 물과 쌀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과 가족의 생계비를 벌고자 했을 뿐이더라도, 나는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퍼 쓴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의 대가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의 경우는 더 심해진다. 내 자유를 담보로 나와 가족의 생활비를 버는 노력이 그 생활비를 충족하지 못할 때, 나는 내 자유를 다 내어 주고도 먹고 입고 사람답게 살 자유 - 인격을 유지하면서 살 자유 - 를 건지지 못한다. 내 자유는 저당잡힌다,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이 자유시장경제 체제 내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자유를 증오한다. 증오해야만 자유를 누릴 심보를 줄이게 된다.

자유를 누리고픈 심보가 문제다. 나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은커녕 말도 자유롭게 못할게 뭔가, 하지만.

내가 자유를 느낄 때 그 자유가 온전히 내 몫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닐까. 내가 덜 자유로울 때 나 아닌 타인들의 자유가 덜 침해받으리라는 것이 공식이니까. 지구상에 자유의 부피와 무게는 일정한데, 내가 덜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누리는 자유만 해도 73억분의 1, 그 만큼의 자유로 만족하려면 아예 자유를 외면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는 온통 인간들의 소유물만도 아니다. 셀 수 없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의 자유는 인간들의 자유의 희생이 되고 있다. 땅과 물 또한 인간들의 자유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태고의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인간들의 미식의 자유를 위해 커피재배 단지로 변하고, 사육동물들의 죽음의 수용소로 변해간다.

 

자유라는 가치를 생각하다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래서 나는 증오한다, 자유를. 원래는 꿈꾸었던 아름다운 가치,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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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이화문인회에 내는 수필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4. 12. 21. 12:00

어둠의 문화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소모함으로써만 생명을 부지한다. 이 엄연한 자연법칙의 고리 안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소모한다. 꼭 흄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더위와 추위와 배고픔 등 감각의 총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가 기분 좋게 부르고 시간이 생기면 더 나은 무엇을 원하게 된다. 물고기를 찌를 창도 더 보기 좋게 다듬고, 아름다운 무엇인가에 몰두한다. 노국공주가 죽자 그녀가 좋아했던 모란꽃을 비단으로 만들게 하여 바라보았다는 공민왕은 채화 문화를 열었고, 무굴의 한 황제가 일찍 죽은 왕비를 추모하여 20년도 넘은 시간을 바쳐 지었다는 타지마할도 인류의 자산에 속한다.

견디기 힘든 여름 더위가 물러가면 곧 문화의 계절이 온다. 교정에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독문학제가 열리고, 나는 퇴임 후에도 철없이 참석한다. 올 가을엔 그에 앞서 인문대 퇴임교수 간담회가 있었다. 의례적으로나마 반겨주던 현직 교수들의 면면은 갈수록 줄어도 산삼주까지 곁들인 점심은 과분했고, 오후에 준비된 문화 코스는 국립나주박물관이었다.

 

나주시 반남면 고분로 747 - 국립나주박물관은 채 돌이 되지 않은 신선한 외관과 품고 있는 오랜 과거가 독특하게 어우러진 곳이었다. 이천 년 전 우리 땅의 문화유산 마한 고분군과 그 출토물을 함께 보면서 가슴이 떨렸다.

우리 세대는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며 자라면서 우리의 12율명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지금도 교육이 문제다. 존 듀이의 철학을 배워온 초창기 교육 원로들이 우리의 교육원칙을 세워나간 이래, 여전히 우리보다 서양의 가치가 앞선다. 진리로서의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 믿던 전통이 뒤집히고,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도구에 불과해졌다. 열매 많은 것이 곧 진리이고 보니,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4세기까지 경기·충청·전라도 지방 54개 소국 연맹 마한을 우리가 우습게보고 지나쳐 배우지 않았겠는가. 햇볕 따스한 가을날 오후, 마한 고분군의 둥근 능선들을 가슴에 담고 현대적으로 진열된 출토물들의 정교함에 감탄하면서, 인류가 꾸준히 발전한다고 믿는 이론은 환상임을 확인했다. 칼이 아직 흉기가 아니고 다만 유용한 도구일 때 얼마나 아름다운 선으로 갈아 만들어졌는지, 뼈로 만든 낚시 바늘은 얼마나 정교하고, 그물코에 매단 돌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게 깎였는지. 돌들을 만졌던 손의 감촉에 지금도 전율한다.

 

독문학제는 이틀 뒤였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합창에 이어, 베데킨트 작 <사춘기>의 번역공연이었다. 인벤 근처에서는 구운 소시지와 맥주로 독일식 뒤풀이가 이어졌다. 소시지 굽는 냄새에 덮여 주눅 들었을 밀가루 전을 맹물과 함께 뜯어먹으면서 - 이 ‘팔꿈치사회(독일어로 경쟁사회)’에서 이만큼이라도 문학에 음악에 열정을 갖는 젊은이들의 가슴의 순간을 진정 응원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스펙이라는 두뇌의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돌아가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친구들을 젖혀내야만 하는 전쟁이 그들의 삶이다.

한 몸에 다른 가슴과 다른 두뇌를 지닌 젊음을 보고 있었다. 십중팔구 강의 시간에 교수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녹음이라도 할 태세인 이들, 그러니까 A+때문에 창의적 사고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수용적 사고력에 의지하는 이들. 이들에게 나는 마한 고분군을 찬미할 수도, 빈둥거림을 예찬하는 카프카를 차마 인용할 수도 없었다.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라니, 그들이 참 안 됐소.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한시적 낭만의 축제를 빠져나오는 어두운 길에서 더 큰 어둠을 만난다. 태환권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버린 세상에 긴 어둠의 문화가 내린다. 앞으로 내닫느라 뒤를 돌아 반성할 틈 없는 삶, 끊임없는 의욕의 충족 과정에서 불충족을 외면하는 문화는 어둠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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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대학 소식지 2014-제3호 1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4. 7. 6. 16:19

 

 

상품이 된 인간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를 보다가

나도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

변기통의 물을 내리고

씩씩하게 지퍼를 올리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으로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화장실 벽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제일 싼 血 팝니다,

자본주의 만세!

 

화장실이 아니라 미안하게도 쾌적한 책상에 앉아서 시를 읽었다. 1970년생 시인의 절규였다. 그들은 젊은 날 왜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지 않는가, 쓸 수 없는가, 가슴 아파하면서 읽었다.

*

단기 4278년 여름 - 서기 1945년이겠지만 그때는 아직 단기였다 - 세상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세계사에서도 현대의 시작을 제2차세계대전의 종말로 보기도 하니 말이다. 엄청난 심적 물적 혼란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날 하늘에서 해방이 떨어지고, 배달민족은 자유로운 대한민국(임정)의 국민이 되었다.

정말 새 세상이 열렸다. 원수의 왜놈 쪽발이가 가더니 기독교 천사 날개에 실려 서양 문물이 밀려왔다. 아, 그리웠던 자유. 신체의, 사상의, 표현의, 언론의, 양심의, 결사의,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 자유연애, 자유부인, 자유당, 자유주의……. ‘자유’자가 붙으면 무엇이든지 최선의 가치였다. 그렇게 자유를 마시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젊은이들에게 자유를 제대로 넘겨주었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우리는 미국에서 배웠다. 케케묵은 삼강오륜이 낙하하는 속도에 신바람이 났다. 소위 아메리카정신은 청교도정신과 실용주의 그리고 개척정신을 말한다.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신교 신앙과 신의 소명이라는 직업에 따라 성실과 엄격함으로 임하는 경제관은 자본주의를 지원한다. 실용주의는 현실주의, 합리주의, 능력중심을 토대로 해서, 대중적인 것, 편한 것, 실속 있는 것으로 문화코드화 되어 현대 대중사회에 실용적인 ‘글로벌’ 문화로서 전 세계로 확산일로에 있다. 그 둘을 합한 화합물이 개척정신이다. 종교적 열정의 현실체인 미국중심 사고는 영광의 미국과 신의 소명을 받은 미국인으로서의 투지로 연결되어 서부를 개척하고 인디언을 몰아냈으며, 그 후로도 세계 도처로 무한정 진출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 온 세상 저열한 국가들은 미국을 배워나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실용주의 철학, 특히 실용주의 교육이 우리나라 ‘새 교육’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울대 총장 장이욱,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교육계 원로 오천석 등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사상을 들여왔고,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교육의 가치는 작용의 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 나타나는 유효성으로 매김 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결과로서 판단된다고, 오늘날 결과중심주의의 비극이 잉태된 순간이었다. 도덕 교과서에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은 ‘모로 가도 서울(대)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왔다. 사람들은 서울에 서울대에 최소한 그 비슷한 무게의 대학에 가서 성공했다, 돈과 권력의 합작 세상에서. 신화적으로 성공한 모두를 보라, 게으름부리지 않고 노력하면 다 그렇게 성공한다, 라고 믿고 살라고 가르치고 배웠다.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다. 끝나지 않은, 않을, 가난과 엄청난 자살률은 누구의 말대로 ‘민족적 게으름’ 때문만도, 열악한 환경 때문만도 아니라는 것을. 최고의 대학 카이스트에서 줄 이은 학생들과 교수의 자살이라는 비극은 시스템의 죄였다고. 인간을 자원으로만 간주한 결과중심주의의 경쟁시스템이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라는 단어를 ‘팔꿈치사회’라고 쓴다. 팔꿈치로 양 옆 사람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인 사회에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수많은 ‘루저’들이 제 못나서(?) 누리지 못한 몫이 이동된 것들이다.

최근의 통계들은 믿을 수 없는 수치를 믿으라고 한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고 있다.(크레디트스위스) 우리나라도 상위 1%인 50만 명이 전체 토지의 55.2%를 소유하고 있다.(국토교통부) 세계 최상위 부자 85명이 소유한 부가 소득 하위 절반에 달하는 35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다. 세계 부자 상위 1%의 재산은 전 세계 최빈층 절반의 재산을 더한 것보다 무려 65배나 많은 규모다.(옥스팸)

이 수치들은 우리를 슬프다 못해 절망케 한다. 절망타 못해 돌게 만든다. 이 탐욕이라는 이름의 바윗돌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윗돌은 무거운 채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머피의 법칙은 절대적이다. 멈출 수 있는 도를 넘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탐욕의 결과는 행복이 아닌 그 정반대의 참사임을. 진도 앞바다의 비극은 무대극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어느 대학교 교수들은 이번 참사의 근본 원인을 ‘물질적 탐욕에 젖은 나머지 생명의 가치를 내팽개친 황금만능주의, 편법과 탈법의 관행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온 결과중심주의에 있음’이라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를 ‘삶과 생명에 대한 철학 및 성찰이 빈곤한 반인간적 사회’라고 규정했다. 왜? 경쟁적으로 한 줄 서기만을 가르쳐왔으니까. 우리가 가르쳐 낸 것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자원’, 나아가서 품질 좋은 ‘상품’이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설마 ‘상품 인간’이 성장하고 있었다니! 사실이었다.

자유는 처음 황홀하게 맞이하던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단면에 걸쳐 자유와 윤리, 개인과 국가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밀은 『자유론』(1859)에서 ‘다수의 횡포’에 의한 ‘비주류 소수’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경고했다. 다수가 소수에게 여론과 관습을 내세워 ‘대세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1%의 득표율로 오불관 100% 전횡을 휘두를 수 있는 양당 구도에서의 대통령 권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와 연대감이란 소수에 대한 이해’(하인리히 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하는 개인 또는 단체의 자유라 하더라도,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수 있어야 한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사회와 국가의 간섭이, 규제가 있어야 한다.

화두는 어쩔 수 없이 - 아니 당연히 - 다시 참사로 돌아간다. 1,000명이 넘는 재외학자들도 참담한 성명을 발표했고, 제목은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에 울리는 경종’이고, 부제는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와 민주적 책임 결여가 근본적 문제’라고 적시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정철학의 전환이 없이 새로운 대한민국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국가 -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다른 생명을 소모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부여 받았고, 자급자족보다는 공동체 속에서 그 수고로움이나 위험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국가사회를 만들어냈다. 국가는 부여받은 권능으로 욕구의 조정이라는 어려운 역할을 해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어렵사리 끼어든 세계경제 속에서 세계적인 불황이 닥쳤고, 때맞춰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세계 경제가 자본주의로 통합되면서 국제적 경쟁이 가열되자 복지국가들도 흔들렸다. 이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비대해진 재정적자를 비판하면서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에 반대했다. 시장의 기능과 민간(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세력을 얻은 것이다.

곧 그 역기능이 들어났다.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그리고 재산권을 중시하다보니, 개인과 기업의 무한대의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가운데, 빈부 격차는 날로 커갔다.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이라는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미명의 예컨대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이란 곧 시장개방의 압력이었고,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개인 또한 무한대의 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에 내던져진 상태에선 적나라한 투쟁만이 살 길이 되었다. 사람 가치는 땅으로 땅으로 떨어져가더니, 아예 상품이 되고 말았다.

‘일단 내가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다 보니 평소 과잉보호가 있어서…….’ 1990년쯤에 태어났을 한 스타급 젊은이가 공항에서 팬에 대한 불손한 매너로 비난을 받자 반성문과 함께 내놓은 변명이 그랬다. 쭉정이들이야 공손하겠지만 주력 상품이다 보니…… 그런 뜻은 제발 아닐 것이다. 인간이 상품이라는 인식에는 애어른 구별이 없다. 지난 지자체선거에서 중후한 정치인 한 사람도 자당의 후보를 가리켜 ‘그 이상 더 좋은 상품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웠다.(데일리언 5.27.) ‘상품 인간’은 명품이 되어야만 대접을 받는다. 시장만능주의자들에게 노동과 노동자는 상품생산에 과정으로 참여해있는 부품에 불과하다. 온전한 상품이 못된 불량품 인간은 장기라도 부품으로 내다 팔아야 산다.

이 살인적 경쟁사회에서 인류에게 미래가 있을까? 경쟁은 이익과 승리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호배타적이고, 결과 지향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것은 물질과 대상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필요와 욕망의 경계를 망각한 인식의 오류 때문이다. 가치의 혼돈 때문이다. 이제도 우리는 젊은이들을 비싼 상품이 되기 위해서 공부만하라고 내몰아야 하는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한글로 풀어쓴 노자 『늙은이』 20장 첫 말이 떠오른다. ‘써먹기 부터하려는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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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프리즘>에 기고

 

 


 

다른 그러나 같은 PEN 문인들

                                                  2014.6.28.~29.

                               제16회 영호남문학인교류에 다녀와서

 

 

열여섯 번 째 영호남문학인교류 한마당 -

어언 대여섯 번 참가하는 행사이지만, 이번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스멀거리는 것은 기대감이 아니라 아랫입술이었다. 출발 전날부터 흉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이 부산 나들이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처음 이 교류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 1999년이라는데, 그때 무슨 심정에서 이런 행사를 시작한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대가 열렸다고는 하나 신한국당과 민주당 합당으로 태어난 한나라당의 견제 속에 편치 않는 세월 아니었던가. 어쩌면 금강산 관광의 시작으로 남북문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 그때, 요원한 남북통일에 앞서 가능한 동서화합이 더욱 그리웠을까? 아무튼 최소한의 이해의 숨통을 트는 일을 문학이 문학인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이 밑뿌리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PEN부산의 회원들과 문인들이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었다. 6월 28일 토요일 정오가 지나 모인 참가자들을 확인하고 출발 신호를 날렸다. 귀찮을 것을 알고서도 주민등록번호며 주소를 수합하여 여행자보험에도 들었고, 걱정할 일은 없었다. 열성 회원들의 열과 성으로 녹두시루떡도 찰밥도 노랗게 익은 참외도 실렸다. 수육에 머리고기에 결정적으로 알싸한 홍어무침까지 실은 버스는 주암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대충하고 나왔을 참가자들의 기운을 돋우었다. 마침 곡성에서 나오는 소설가 한 분도 함께 합류하여 간식을 즐기고 버스에 오르니 서른다섯 명 예정인원이 꽉 찼다. 늘 그러면서도 외지에 가면 길은 서툴러 해운대 학생수련원을 학생수련관으로 찍은 내비게이션 때문에 엉뚱한 곳에 도착하여 PEN부산 회원들을 오래 지치게 했다.

 

늦었지만 서둘러 상견례를 치른다. 밥보다 금강산이 먼저다. 환영사, 답사, 축사, 축사……. 기념품 교환. 무엇보다 부산의 ‘거리 詩’ 축제에 참여했던 PEN광주 회원들의 시화작품을 전달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동질성 그 이상의 정을 느꼈다. 부산의 시 축제엔 늘 광주의 시인들을 초청하고 있고, 매년 발행되는 『부산펜문학』과 『국제펜광주』에는 상호 문학작품들을 싣는다. 영어로 쓰는 영미문학도 하나로 이해하고 강의하는데, 하물며 같은 한글로 쓰는 영남문학과 호남문학이 얼마나 다를 것인가 말이다. 오늘 <희곡의 이해>를 강의한 김영관 교수(PEN광주 명예회장)도, <김수영 시인과의 추억>을 들려 준 PEN부산의 시인 김철 교수도 한 올만큼도 동과 서를 나누어 말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올해의 행사는 무엇을 막론하고 편히 즐길 수 없는 마음이다. 너도 나도 아픈 가슴으로 그것을 느낀다. 외람된 말이지만 답사에서 오늘을 사는, 살아야 할 인연을 논했다.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유순’ 그 40리 평방의 바위를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물방울이 뚫어내는 시간이 ‘겁’이라는데, 법륜 스님 말씀 가운데, 지구 안의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태어나려면 1,000겁의 인연이, 하루 정도 같은 일을 하려면 2,000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 하더이다. 그런 우리가 만났으니, 통한의 4월, 달력을 넘겨 찢고 또 찢어도 찢어도 아픈 봄을 두고도, 한숨을 내쉬다가 깜빡 들숨을 들이쉼으로써 살기로 결정해버렸으니 살기로 합시다. 그 비슷한 너스레는 편한 시간들을 갖자는 부탁의 다른 변형이었다.

우리는 함께 식판을 들고 섞이어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니 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술이 빠지랴. 술술 넘어가는 술에 술 못하는 모범생들은 분위기를 마신다. 이어지는 멋진 자작시 낭송들, 아름다운 노래도, 다른 장끼자랑도 빠질 수 없다. 전문 음악인을 능가하는 기타리스트를 내놓는 부산, 뒤질세라 전문 성악가를 놀라게 할 가수를 내세우는 광주……. 그렇게 따뜻한 저녁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송정, 밤이 내려앉은 검은 바닷가에선 바다가 없어 늘 바다를 그리는 광주사람도, 바다에 물린 부산사람도 구별이 없었다. 젖은 모래 위에 저녁상에서 남겨온 비닐봉지 속의 안주도, 이름 할 것 없이 섞인, 모래까지 섞여 마시는 술도 달콤하기만 했다. 남자가 부르는 이미자도 명가수의 소프라노도 바리톤도 환영이었다. 기계음에서 해방되어, 파도 소리 반주더러도 ‘시끄러봐’라고 우쭐대면서.

 

날이 밝자 짙은 바다내음의 미역국에 도시락반찬이 울컥 생각나는 계란말이에 아침을 먹고 ‘공부’를 떠났다. 친히, 만기침람의 의미가 아니라 그저 넘치는 친절함으로 광주 버스에 오른 부산 회장은 아뿔싸 안내원이 된다.

 

욜로 가입시더, 욜로 욜로.

부산 회장님이 아저씨, 기사님 하다가 기사 선생님까지를 들먹이며 안내해 간 곳은 수많은 멋진 다리들을 지나 감천문화마을과 부산민주공원이었다.

 

 

감천문화마을 -

얼마나 대단한 문화가 숨 쉬고 있는 곳일까. 부러움 반 호기심 반 찾아간 곳에는 문화가 아니라 아픔이 있었다. 그곳이 간직한 역사는 아픔이었다. 관광 상품으로 알록달록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베어나는 것은 슬픔이었다.

 

옥녀봉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산자락에 빼곡히 늘어선 계단식 집단거주지. 산비탈을 이용하여 절대로 뒷집에 해가 가리지 않도록 지어진 주택들에는 굳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벌써 한 세기 전 1918년 조철제 선생이 증산사상을 기반으로 시작한 태극도 신자들 수천 명이 고개 주변에 집단촌을 이루었던 것이 시발이라고 하니 특수한 종교심에서 서로의 해님을 배려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살아 있는 마을이 전시장이 되었다는 생각은 마음 한편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특이한 모습들이 외지인을 반긴다. 전영진 작가가 올려놓은 <사람 그리고 새>라는 작품은 추녀 끝에 새들인지 사람들인지 고개를 내밀고 앉아있다. 그래, 사람도 때론 날고 싶어……. 주민들은 개성 있는 색채감각으로 집단장을 했고, 멀리서 보면 색종이로 접었거나 고무지우개를 알록달록 맞춰서 가지런히 세워둔 집에서 산다. 가까이에서 보면 빨래 줄에 널린 빨래들 하며 배시시 살아있는 화분들이 삶을 말해준다. 용두산과 도심이며 항구가 다 내려다보이는 <하늘머리> 전망대에 오르니, 아, 따가운 햇살에도 상쾌한 바람이 맞아준다. <한지의 집>에서는 수공예품을 사느라 한눈을 팔고. <평화의 집> 등의 이름을 가진 골목길 프로젝트를 따라 가노라면 몸을 틀어야 통과할 수 있는 길이, 누군가는 정말 통과할 수 없을 길이 나온다. 전체가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때문에 PEN부산 사무국장은 아예 혼자서는 다니지 마라, 끝까지 가보려고 하지마라, 미리 경고를 준다.

 

이어진 부산민주공원 -

공원 입구 비스듬한 잔디광장에는 ‘민족통일대장부’와 ‘민족평화여장부’라는 이름의 장승들이 서있다. 이 장승은 진도군민들이 부산시민의 민주정신을 기리며 만들어 보낸 것이라 하니, 영호남 교류는 여기에도 있구나……. 흐뭇한 마음으로 <추모조형물>을 보러간다. 50미터가 넘는 대형 조형물로, 민주항쟁의 연속성과 현재성을 부각하는 상징물이자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들을 기리며 분향하는 곳이란다. 한참을 더 올라 <민주횃불>이 있는 곳, 그곳엔 수많은 반사 재질의 작디작은 조각들을 내부에 넣어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이름 없는 별들을 형상화 해냈다고 한다.

 

거짓말. 거기엔 가지 못했다. 설명만 들었을 뿐으로, 몇몇은 ‘분수’를 지키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배웠으면 ‘분수’를 아는 것이 사람 도리라고 쿡쿡 핑계대면서. 게까지 올라갈 여력이 없는 몇 회원들을 벗 삼아 힘들다고 아우성인 심장을 쉬게 했다. 일행은 한참 만에 내려왔고, 살며시 음과 식이 그리워질 즈음 버스는 밥집으로 향했다.

 

헤어지는 마당, 건배사 - 초청 측 PEN부산 회장의 건배사에 이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긴장을 풀자고 우스개를 했다. 열여섯 해면 남자 여자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다가도 못살고 헤어지기도 하는 세월인데, 우리는 부디 이혼 생각 말고 끝까지 가봅시다. 갈 데까지 가입시더. 양 도시 문인들의 우정을, 행복을, 무엇보다 문운을…… 여러 건배사가 이어지면서 <초원의 집> 점심이 무르익어 갔다. 실제로 오리고기가 익고 있었다. 그곳은 텔레비전에 ‘대통령들이 다녀간 집’ 소개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다녀갔다고 소개되었다고 한다. 몇몇은 깡소주를 노무현식 건배를 하자고 확 비우고 잔을 머리 위로 털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했는지는 아무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낮술에 취하면 어쩌려고?

 

어이없는 사족 하나.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어떤 휴게소에서 회원들을 놓쳤다. 휴식 후 5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고, 가벼운 식곤증으로 눈을 감던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잠시 후 버스를 따라잡은 검은 차에서 내린 둘은 별 계면쩍음도 없이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금의환향하는 월드컵 선수라도 되는 양 박수로 환영을 하면서 갑작스레 하나가 되어 깔깔댔다. 사고는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는 느닷없는 판소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기가 막히게, 임방울보다도 더 임방울 같은 목청으로 내놓는 ‘김싸부’ 덕택이었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 적막 옥방으 찬 자리어 /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거기까지만. 헤어질 시간이 다 되도록 우리는 배웠다, 불렀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내년에 우리가 부산 문인들을 초청하는 자리에서 이 구절을 합창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우리가 영호남 화합에 눈곱만치라도 기여했을까? 의로운 질문은 접어두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아련히 머릿속에서 도돌이표마냥 되풀이되는 가락은 우리가 정녕 남도사람임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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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에 기고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