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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01 무거운 책들
  2. 2009.12.12 평행선
  3. 2009.03.28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4. 2008.11.20 눈이 있었던 것
  5. 2007.12.01 구멍 난 옷
  6. 2006.12.03 내적 자유
  7. 2006.09.20 움직이는 긴 그림자 - <문학공간>
  8. 2005.11.03 내 딸의 어머니
  9. 2005.10.15 교집합과 합집합 - <문학사상>
  10. 2004.11.15 오프라인
수필-기고2010. 4. 1. 23:00

무거운 책들


뭘 많이 들고 다니시네요, 무겁게!

머리가 가벼우면 책이라도 무겁게 들고 다녀야지요.

남보다 느린 걸음으로 늘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오갈 때면 주고받는 인사말이었다. 그런 나날, 겨울이었다. 12월 중순 들어서야 시험지 보퉁이를 끌어안고 연구동 층계를 내려오는 늦은 오후, 해지는 저녁. 나는 그날 퇴근길에, 바로 그 층계참에서부터 퇴직을 결심했다. 아무 쓸모없다는 문학수업을 해놓고서 또 아무 쓸모없을 등급으로 나누는 작업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고, 아니, 그만 하겠다고.

해방은 이렇게 아주 급격한 염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염증이란 순간에 도를 넘는다. 펌프로 물을 길어 물탱크에 채우는 것을 바라보던 아이. 그렇게 저 만치 아래에서 천천히 조바심 나게 높아지던 물은 찰랑찰랑 가장자리에 차오르는가 하면 어느 순간 밖으로 넘칠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탱크를 넘치게 할 생각이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슬아슬하게 물이 넘치는 순간, 그 순간을 기다리던 심정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물이 입 속에까지 차올라와 익사당하기 전에 성큼 일어나 물 밖으로 나와 버렸다. 설마 하던 학과 식구들은 평상시 내 분별없는 고집을 떠올렸는지 곧 퇴직을 기정사실화했다. 한 겨울 숨 막히게 애쓴 제자들 중심의 간행위원회에선 내게 두 권의 책을 선물했다. 이름 하여 『창작과 사실. 양심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고찰 1983-2009』라는 논문집과 『반대말 ․ 비슷한말』이란 소설집이다. 여러 의미로 양장도 사양하고 흑백을 고집했더니, 책들은 내용 어슷하게 외형도 왜소하다. 표지만큼은 미술전공의 둘째아들이 많은 시간 공들여 만들어준 예술품이다.

나는 3월 한 달을 그 간행위에 참여한 78인에게 각각 책 두 권에 사인을 해서 보내는 일로 살았다. 이름마다 - 더러 동료도 섞이었지만 - 생각해 보았다, 이 젊은이들을 밥벌이 못하는 무능력자로 키워낼 뿐이라는 오명을 듣는데 지친 우리는 인문학을 송두리째 버려야한단 말인가. 인류의 원천적인 무엇, 시공간을 초월한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인간을 효용성의 수치로 파악하려는 시대의 어리석음에 그리 쉽게 굴복해버리기에는 청춘이란, 아니, 생이란 너무 아까운 것임을.

책을 나누는 일은 대강 마무리되었지만 새로 서가 정리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한다. 다 버리고 온 것 같았는데 널부러진 짐짝인 채로 불어난 서가를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무소유의 가치가 다시 우리를 일깨운 즈음에 더욱. 누군가 신문에 ‘목침용으로도 쓸모 있을 것’이라 평을 한 1296g짜리 번역서나 그 두 배에 육박하는 양으로 써낸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 더욱. 이렇게 별 쓸모도 없이 무거운 책들은 기껏 지나온 세월의 나를 나타내주는 이정표에 불과하리라. 나는 이 시간을 살고 있고, 내일을 살고 싶다. 아직 꿈이 꿈틀대는 내일을. 제대로 교수도 소설가도 아닌 박쥐인생을 이제는 털고 동굴 밖으로 나가고 싶다. 아무튼 박쥐에게도 날개는 있으니까. 마음은 벌써 알 수 없는 자유로움과 환희와도 같은 떨림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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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연>에서 청탁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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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9. 12. 12. 02:51

 

평행선

                                                    『사랑은 아무나 한다』2009 (이화에세이)

 

 

사랑을 주제로 받은 순간 평행선이 떠올랐다. 평행선을 화두로 삼을 량이면 그건 이미 시시한 시작이리라. 그렇다. 하지만 “종교적인 긍휼”이라거나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같은 보편적 사랑이 아닌, “남녀가 서로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려는데 대뜸 평행선이 떠오른 것을 어쩌랴. 심장도 머리도 둘인 두 개체 간의 사랑이라면 서로 다른 선의 만남을 의미할 터인데, 그것이 잠시라도 우연이라 해도 평행선이 되어야 서로를 건네다 볼 수 있고 사랑 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말이다. 서로를 향해 질주하는 선은 질풍노도처럼 만났다하더라도 곧 비껴가버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물론 이러한 염세적인 견해는 한 개체가 그리는 선이 곡선이라기보다는 직선 쪽에 가깝다고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 만일 길가다 동무를 만나서 한 눈 팔 량으로 멈칫거리거나 굽어져 어울릴 수 있다면 사랑의 감정도 보듬고 어우러져 다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으련만, 어쩐지 그것은 희망이나 꿈같은 말로 들린다. 태어나면서 손발을 버둥대던 우리는 늘 어딘가로 버둥대면서 나아가고 그래서 그 길이 우리의 인생이 된다. 기껏 잘해야 비슷한 각도로 움직이고 있는 다른 길손을 동무 삼을 수 있으면 그게 낙일 것이다. 어쩌다 불꽃이 튀어 한데 어우러진 두 길이 있어, 다시 서로에게서 영 멀어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주변에서 서성대며 길을 간다면 그것 역시 축복 아닐까. 함께 세상에 새로운 길손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그 또한 잊히지 않아 더욱 버벅대고 주저앉아 그렇게 살아가는 삶. 사랑은 제 본디를 깨닫게 하는 일에도, 길을 계속 가게 하는 일에도 무르다. 사랑은 사람을 물러터지게 하고도 그것에 만족하게 한다. 사랑은 허술하고 바보스럽다. “현명한 이가 말하길,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법이라 했지”라던 노랫말이 진리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무슨 그런 평생을 갈 중증의 바이러스에 옮는단 말인가.

이 병은 『폭풍의 언덕』 같은 중독된 사랑이나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치명적 사랑으로 소설 속에나 파묻혀 영생한다. 이 병은 실 인생에서는 애절하게 끝날 때가 많다. 중세 철학자 아벨라르와 제자 엘루아즈처럼 사랑 속에 결혼하여 아들을 두고도 생이별하는 연인들. 문중의 간섭으로 각각 수도생활에 들어갔으니, 그들의 “사랑의 서간”이 수백 년을 넘어서까지 세상의 연인들을 감동시키면 무엇 하리. 더러는 공권력도 사랑을 죽이는 변수다. 2차 대전 후, 보통 사람들처럼 십대에 만나서 몇 년 후 결혼하고 아들 둘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느닷없이 원자무기 비밀을 소련에 건넨 스파이혐의로 체포되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한 로젠버그부부. 폭력은 사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흑인이면서 명 쿼터백으로 이제 은퇴한, 네 아들의 아버지이자 멀쩡한 남편. 자선활동에서까지 돋보인 남부러울 것 없던 그가 별장에서 잠든 사이 갓 스물을 넘긴 여친에게서 네발의 총격을 받는다. 순수했던 첫 사랑을 접고 명사와의 인생을 꿈꾸었던 여자의 종말, 참혹한 비극. 허황한 것이 사랑일까. 사랑은 치기다. 사랑은 없다.

아니, 동서고금 세기적 스캔들을 뿌려댄 이들의 숨 막히는 열정들을 생각하면 사랑은 그 무엇인 것 같기도 하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끔은 가까이 이웃에서도 힘든 길을 선택한 대단한(?) 사랑도 없진 않다. 기어코 첫 연인을 기다렸다가 그녀가 아이 둘 데리고 고향 내려오는 기차간에서 훔쳐 달아난 집안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 아이들 둘하고 나중에 낳은 아이들 둘, 해서 네 자녀를 흠 없이 길러냈고, 아내의 조금 이른 임종까지 잘 지켜낸 오라버니. 더 기막힌 쪽도 있었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대처에 나와서 대학에 다니던 남자가 처녀 유치원선생님에게 반했다. 유치원선생님은 유부남의 구애에 발끈하여 보란 듯이 서울로 시집을 가더니만, 딸 하나를 낳았다는 소문과 더불어 곧 다시 낙향했다. 결국 각각 아들과 딸을 버리고서야 두 사람이 결합하더니 네 자식을 더 낳아서 남달리 유별나게 키워냈다. 70대, 80대 할아버지들의 청춘시절 이야기다 참. 그런 형질은 드물게 유전되는지, 속 좁은 내겐 불가사의다.

베란다 쇠창살을 저 너머로 바라보며 일요일의 늦은 아침을 먹는다. 조밀한 영국식 화단엔 이름 모를 푸르름이 가득하다. 창살 밖으로 선반에 내어놓은 몇 화분들에도 초록이 어우러져 있다. 그 밖으로는 짙푸른 나뭇가지들이 무겁게 흔들린다. 이십년도 넘은 낡은 닭장 아파트 2층에 앉아서 쇠창살 사이로 건너다보는 하늘도 하늘이다. 그런데 쇠창살 너머로 여름을 맞은 건 처음이다. 작년 추석에 다니러온 아이들의 걱정에 그제서 창살을 두른 것이다. 여름을 유난히 타느라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두고서야 잠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는 아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숨을 쉰다니까요, 아버님 어머님 걱정에!”라던 며늘애 말이 주효했다. 원래 학교가 있었던 터에 지은 아파트라서 고목들이 즐비하고, 창살은커녕 창밖으로 너울거리는 푸른 나뭇잎은 성냥갑 아파트인 것을 못 느끼게 했다. 바로 창밖에 새들까지 집을 지어 새끼를 낳고 길러가지고 함께 날아간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꼭 네 마리를 낳아 데리고 날아갔는데,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항상 같은 울음소리의 그 새들이 날아든다. 베란다 바깥으로 내어단 화분 턱에 내어놓은 춘백 꽃잎을 갉아먹으러 와 앉는 놈들도 꼭 그런 꼬마들이다. 모양새도 목소리도 안 예쁜 놈들이 왜 예쁘기만 할까. 새들이고 사람이고 꼭 예쁠 필요가 없다 싶다. 어디 예쁜 사람들만 사랑을 하고 그러는가. 창살 속에 들어앉아 바라보는 새도 화초도 하늘도 뭐 다 괜찮다. 섬세한 감각들이 나이 따라 누그러진 탓도 있겠지만, 애들 사랑에 못 이겨 해 붙인 것이라서 창살도 답답치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아마도 창살에 갇힌 채로 적응하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기 시작하면 그렇게 창살 속에서도 갇힘을 모른다. 신기하게도 새 생명들이 태어나면 아예 바깥세상은 바라다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현혹되어 산다. 그때부턴 그리 많이 흔들리지 않고 평행선을 이루어, 왼쪽에서 오른 쪽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따라가며 산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우리를 걱정할 만큼 더 커버렸는데도, 우린 그저 그들을 뒤쫓느라 ‘거의 반듯이’ 평행선을 그리며 산다. 아주 엇갈리지 않으려면 조심히 평행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 서로에게 끌려 들어가면, 그 각도로 조금 더 내달으면, 그만 상대를 뚫고 지나가버리게 되니까. 그래서 조금 비겁한 채로 평행선을 따라 산다. 혹시 우리들의 가슴 한 편에 묻힌 작은 파편 같은 추억 하나도 진정 어떤 사랑의 증거가 되기엔 미미하다. 그건 그저 잠시 호수에 비친 구름의 그림자이거나 아예 호수 저 혼자의 일렁임이거나.

복숭아 껍질을 벗긴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따 들인 것들이라 당도도 높고 무엇보다 벗겨 드러난 속살에서 물기가 둑 둑 듣는다. 두 개를 벗길 양이면 늘 어느 하나가 더 먹음직스럽다. 너무도 당연히 더 맛있어 보이는 쪽을 당신의 접시에 올려놓으면서 느낀다, 누군가에게 더 맛있어 보이는 것을 내밀면 그것이 사랑일 것. 나란한 두 베게 깃을 새로 갈아놓으면서 풀기 더 고슬고슬한 쪽을 그리로 밀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 이 시시한 진부한 존중이 어우러져 나란히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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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9. 3. 28. 23:30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소설시대 15호


개성을 방문하기 위한 10월 그믐께, 가을 내내 기다렸던 비가 하필이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지만 불평을 못한다. 해갈을 기다리는 푸른 잎채소들, 그 걱정에 사로잡힌 농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마음이 되어서. 들었다 놓았다 가벼운 우산을 꿍쳐 넣고 여차하면 요량으로 반 자락 비옷도 밀어 넣다보니 1박2일 봇짐이 커진다.


전날을 ‘통일’이라는 글자와 관련된 행사를 빌미로 서울에서 보낸 우리 일행은 이튿날 개성나들이를 위해 일찍 잠을 청하게 되었다. 덜렁 텔레비전 밖에는 없는 방에서 종이 한 장 글자 써진 것을 챙겨 넣지 않은 터라 심심하다. 불온한 문서라 분류되는 것, 수상쩍은 것은 집어넣지 않기로 작정했다. 언젠가 요상한 꿈에서도 분명 북한 땅을 떠나오기로 작정은 했었지만 그 끝이 불분명했고, 그 꿈을 꾸고 일년도 넘은 시점에서 느닷없는 개성행이라니 조금 켕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일을 누가 알랴! 돌아온 직후에 있을 사무(의무적인 일이자 나에게 보다 수십 명에게 중요한 것)를 미리 컴에 저장해 놓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뒤척이다 생각해보니 컴에 저장되어 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남겨놓고 오지 않았으니 무슨 소용이랴 싶어 허망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꼭 돌아가야 한다. 또 정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알람을 켜두고 잠을 청하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낭패다. 다른 날은 몰라도 단 하루의 개성방문인데 잠을 못자두면 어쩌나. 그러저러 두어 시까지 시계를 본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지,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깬다. 5시 정각이다. 그로부터 10분 간격으로 깨우는 벨소리에 버스출발 50분 정각에는 승차할 수 있었다. 어제의 그 버스이기 때문에 자리는 남아있다. 우등고속으로 말해서 4번 좌석. 둘째 줄 복도 쪽 자리다. 어제는 종일 멀미약 탓으로 졸기만 하느라, 대한민국 명 정치가의 달변 중에도 고개를 쳐 박곤 했다. 오늘은 양을 반으로 줄인다. 평생처음 분단의 선을 넘는 나들이 길에 졸아서야…….


임진각 - 서울에서 임진각까지는 채 50㎞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며칠 전 어느 신문사 주최로 ‘꿈나무통일레이스’가 펼쳐지기도 한 거리이다. 버스 이동은 못다 잔 잠을 청하려다마니 금방이다. 우리 일행은 28인승 버스 둘로 움직이는데, 50명이 채 못 된다 했다. 이제부터 비상이다. 다른 짐들과 함께 우선 핸드폰들을 놓아두고 가야한다. 갈아탄 셔틀버스는 남북출입사무소까지 우리를 실어간다. 누구나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출경과 입경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대한민국 국적이건 아니건, 방문자나 현대 아산측 안내원이나, 심지어 개성근로자이거나 입출입 때 마다 입출경 수속을 해야 한단다. 출경이란 출국의 다른 말로서, 어쨌거나 남북한이 각각을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 데에서 온 해결책이란다. 수속은 일반 외국여행 때의 수속과 같은 2단계를 거친다. 짐을 X레이로 통과시켜놓고 신체만 통과한다. 배율을 확인받은 디카만 허용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보이기 위해서 따로 들고 섰으랴, 다소 얼떨떨한 가운데 ‘녀자출구’에 줄을 섰는데 남자들도 섞이어 있다. 주황색 현대직원복을 찾아 물으니 괜찮단다. 여권에 해당하는 관광증에 사증을 찍는 절차는 배당된 차량번호와 일치하는 창구로 가야한단다. 그렇게 사증을 받아 통과했으니 북측인가? 아직 아니다. 정말 번호표가 붙은 차량이 즐비하다. 우리가 10호라 했는데 모두 ‘10-’으로 시작해 이상했다. 그게 총 10대 중 몇 호차라는 신호인가 보다. 그러니까 10호란 10-10호다. 서둘러 승차하고 나니 우리 차 담당 안내원이 오른다. 8시 정각을 조금 넘긴 시간이다.


이제 출발이로구나. 그게 아니었다. 8시 정각 군사분계선 통과 예정과는 다르게 군사분계선 통과 승인을 위한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안내의 말로는 통상 서쪽의 통신장비가 동쪽만 못해서 일어나는 지연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한 차량과 방문객들이 북측 입경을 못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으니 안심하고 다시 내려서 자유로이 기다리라는 안내다. 차량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서울-개성 표지판이며 남북출입사무소 입간판이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름에 다른 용도로 구입했다가 겨우 몇 장 찍어본 솜씨로 거리조절이니 뭐니 그냥 자동에 놓고 눌러보았다. 이제부터 증명사진을 찍을 양인데 눈에 들어오는 우리 일행은 없다. 어디선가 서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서 첫 증명사진을 찍었다. 입간판들을 증거로 하고서.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최소한 남북출입소까지는 다녀온 증명이 되어 줄 것이다.


정말 다들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을까? 서둘러 “온리 설렁탕” - 젊은 사장, 우리일행을 인솔하는 여행사 사장의 말대로 - 설렁탕을 먹고 내려왔던 그 곳으로? 하긴 해가 돋기 시작하니까 껴입은 옷이 불편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순간의 선택이 필요했다. 배낭의 짐이 부풀더라도 위아래 한 겹씩을 벗어 넣기로 작정하니 사무소 건물로 들어갈밖에. 화장실을 나서는 배낭은 정말 불룩 이가 되었다. 저만치 삼삼오오 모여선 일행들이 보였지만 끼이고 싶은 자린 없었다. 골라서가 아니라 전체로 무조건 없었다. 그것이 나이다. 어제저녁 공들였을 뷔페식 저녁 식사 후 색소폰 연주자까지 끼인 여흥시간, 그때에도 나이가 문제였다. 섞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섞이지 말아야 하는 세대의 의무다. 노래를 청하는 사회자의 마이크를 받아 대꾸한 내용이 그랬다. 듣기만 해야 하는 세대의 의무가 있노라고! 내심의 논리가 이랬다. 사람이 열 살까지는 벗을 할 수 있다 했다. 그런데 열 살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싶은 상황에서는 벗을 하지 말아야 미덕이다. 고조된 분위기를 깨느니 그냥 한 곡 부르다 말아도 될 일이지만 그것이 안 되었다. 약간의 취기에 실은 뭔가 노래 부르고 싶은 기분이 왜 아니었으랴.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이 아침도 딱 그런 이치였다. 어디에 끼어든단 말인가. 먼데 벽 쪽으로 의자가 연이어 있었다. 마침 고생하고 있는 다리를 위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천천히 세상이 사려져 갔다. 혼자 있는 느낌이 되니 그 꿈이 되살아났다. 고층 아파트 위에 또 그만큼 높이의 아파트를 지어서 분배해주겠다는 북한상황의 꿈이. 고개를 흔들다보니 나도 모르게 목운동이 되고, 이어서 어깨운동도 되고 있었다.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쳤다. 꿈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회랑을 울리는 안내목소리와 더불어 서둘러 다시 버스 쪽으로 움직이는 발자국소리들에 천천히 눈을 떴다. 시계가 8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을 향해서, 곧 북쪽으로 선회하겠지. 10여분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했지만, 다시 북측 입경 수속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주의사항과 일정에 관한 안내가 꼼꼼하다. 그러기도 하겠지. 마침내 9시 7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다시 움직였고 널찍한 돌에 “평화를 다지는 길……”이라고 새겨진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무장지대. 1953년 7월에 확정된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에 따라 남북으로 각각 2㎞씩을 포함한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출입할 수 없다던 그곳에 들어서는 것이다. 248㎞ 중 훼손하는 넓이는 버스의 넓이다. 군사분계선이 옛 베를린장벽 같은 담장이나 철조망이 아니라 200m 간격으로 황색 표지의 블록이 있을 뿐이라는 안내의 말이 생소했다. 그런 그것이 그런 위력을 지녔다니. 9시 10분, 그러니까 경계를 지나자마자 곧 ‘개성’이라는 간판이 초록색 바탕에 흰 글씨로 나타난다. 순간 등장한 인민군 초소와 마침 지나던 초병은 표정도 읽을 사이 없이 스쳐가고 만다.


그렇게 한 이십분 달리고 버스가 서자 북측 안내원 세 사람이 승차한다. 버스엔 처음부터 북측안내원 자리가 노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고, 셋이 타게 되면 맨 뒷좌석 가운데에 앉는단다. 이제 드디어 북측의 안내를 받게 된 것이다. 달변의 안내원은 하루 일정 등에 관한 ‘안내사업’을 시작한다. 처음 보이는 철길 경의선 봉동 역에서부터 봉동리 일대 개성공단에 관한 소개가 길다. 총 200만평 개발계획 중 1단계 사업으로 100만평이 개발되어 피복, 시계 등 70개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고. 놀라운 수치다. 설마 부풀릴 리는 없는데, 그동안 나의 무식함이라니. 패밀리마트 등 편의시설도 들어와 있고, 기술교육센터가 보였고, 그곳에서는 기술적인 용어들의 상이한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파트형 생산업체며 35000명 개성시 근무자들을 위한 푸른 버스도 출퇴근 보장용으로 운영되고 있단다.


약 40분쯤을 달려서 우리 버스가 개성시로 들어서자 정말 자그마한 몸집의 버스에 56번 번호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정지해 있는. 개성은 우리에게도 흔히 개성상인이란 말로 익숙하다. 북에선 개성깍쟁이라는데 남에선 서울깍쟁이라고! 깍쟁이의 유래를 북에선 ‘가게 방을 가진 사람, 가게 쟁이’에서 ‘각쟁이’로 줄다가 다시 된소리화한 것이 깍쟁이라 한다. 글쎄, 우린 그런 해설은 처음이다. 아무튼 개성 소개는 일품이다. 천년 전 고려 때 벌써 인구 10만이었다니, 유서 깊은 도시임엔 틀림없다. 주민들이 사는 마을들이 시작되고, 그 이름은 ‘해선동’. 38선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으로 그렇단다. 그런데 해방은 되었을지 모르나 푸르른 파주 땅을 지나 개성에 들어선 순간 차창의 푸르름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산들은 거의 민둥산이었다.


시내 쪽으로 오면서 이제 곧 심었을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보였다. 안내의 말로는 역병이 들어 완전 벌채를 하고 다시 심고 있는 중이란다. 개성시민은 적어도 산의 나무들을 몰래 베어다 불을 때는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다. 두문동 72인을 낳은 고장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차창 밖의 주민지구, 그러니까 주택지의 집들은 이삼층 공동주책이거나 5층 정도의 아파트이거나 파르르 얇은 종이 같은 인상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창문으로 미루어 보이는 벽의 두께는 마분지 정도. 그것은 스쳐가는 사물에 대한 편견이었을까? 편견이었기를 기도한다, 기도할 데가 있다면. 내가 본 것은 큰 오해이고, 집은 훨씬 더 두꺼운 벽을 하고 훨씬 더 따뜻한 방을 품고 있었어야 한다. 창문 안으로 움직임을 알아보기는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가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을 받기엔 스쳐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방에는 분명 학교에 가기 이른 대여섯 살 꼬마가 통탕거리고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창문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주 난방은 구들난방이고 고층아파트는 온수난방이라는데 설마 사람들이 살지 않으려고? 그러나 거리엔 속도감을 주는 운동이 없었다. 그러니까 차가 없었다. 온 종일 가늘 길에 검은 승용차 한 대, 오는 길에 흰 색 승용차 한대를 보았을 분이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정차해 있을 때만. 질리도록 매연 속의 차량들과 불과 한 두 시간 이별한 후에 이 적막강산이라니. 가치평가의 뇌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시가지에서 60리, 박연포가 있는 박연지구로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이제는 명물 송악산도 잘 보인다. ‘만삭의 여인이 바다 쪽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을 가슴위에 가지런히 얹고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어머니산’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산은 지금은 바위산처럼 보인다. 이 도로로 계속 달리면 평양까지 2시간이면 간단다. 박연폭포에 대하 소상한 설명을 하던 안내원은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고는 잠시 마이크를 놓는다.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이라고 불린다는 박연폭포는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북한 땅을 처음 밟은 지점이 그곳이기 때문이리라.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란다. 10여 미터 왼쪽으로 시작된 건물이 위생실(화장실)이다. 거기까지 그렇다 쳐도 사람들은 방문객들뿐인가? 10대의 버스에서 내린 울긋불긋한 사람들 말고는 짙은 감청색 차림의 북측 안내원 아니면 주황색 배색의 현대아산 안내원뿐이다. 평일이라 그렇다 쳐도 북한 사람들은 정말 관광지보다는 일터에서 열심인 듯 했다. 아까 시가지를 지나면서 보이던 사람들도 그리 열심히도 아닌 보통 걸음걸이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고, 더러 자전거를 가지고서도 타기보다는 짐을 실어 나르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무슨 색 복장의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걷는다는 인상이었다. 물론 멀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겠지만, 걷는 속도로 보아 아예 소리가 없을 걸음걸이였다. 그러니 언제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겠나?


올라가는 돌계단은 작은 돌들을 일정하게 사각형 블록으로 찍어내어 계단길로 만들어 둔 것이다. 은행나무와 참나무 낙엽 사이로 돌멩이 하나 구르지 않는 완벽한 청소에 감탄한다. 어디든 가면 돌 한 조각을 탐내는 남편의 선물을 위해 유심히 들여다보아도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없다. 그렇다고 정해진 길 밖의 흙길로 나설 수는 없는 일. 물이 넘치면 폭포의 폭이 7,8m라 했는데, 지금은 갈수기라서 한자나 되는 폭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 폭포는 천마산 기슭에서 37m의 낙차로 그 아래 투명한 고모담(姑母潭)이라는 연못으로 떨어져 내린다. 박진사란 사람이 폭포에 놀러왔다가 못 속의 용녀에 홀려 결혼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자 진사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못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박연폭포와 고모담의 이름이 유래한다 했다.


폭포 곁을 돌아 오르니 주변에는 험준한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10㎞ 정도 길이로 고려시대에 쌓은 대흥산성이 있고 그 안에 조선시대 규모를 확장하고 17세기에 개축했다는, 조형미가 뛰어난 관음사가 있다고 하는데, 지난 홍수 이후 도로가 유실되어 관광이 불가능하단다. 대신 폭포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아슬아슬 올라가 볼 수 있었다. 박진사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더 위대한 어머니가 계시다는 가르침으로(?) 큰 바위벽에 새겨둔 강반석 조선의 어머니 예찬시보다 신기한 것은 범사정이란 얇은 바위가 있는 지점이다. 고모담에 떠있는 바위들을 그 곳에서 내려다보면 말 그대로 ‘뗏목이 떠있는(범사)’ 광경이 맞다. 개성 모약과 여남 개 담은 비닐 도시락에 두 달러, 인삼차 안 잔에 한 달러, 생수는 두 병에 한 달러란다. 그렇게 네 달러를 쓰고 차오른 숨을 달래고 내려와 보니 위에선 보이지 않던 고모담 안의 널찍한 바위 위에 황진이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거기까지 다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디카에 증명사진만 부탁하고서 들여다보니 알 수가 없다. 황진이가 폭포자락에 반해 머리를 풀어헤쳐 먹물을 묻혀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시구를 나중에 석공들이 파놓을 것이란다. 대충 ‘삼천 척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밤하늘 은하수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하누나.’ 정도의 뜻이란다. 버스들이 주차된 곳에 다시 모인 시간은 11시 40분. 올라갈 때 무심코 지나쳤는지 그 사이에 형성된 것인지 간이 판매소들이 보인다. 유난히 용머리를 조각한 나무지팡이들이 보여서 구경하고 있는데, 설명이 재미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용대가리’란다. 북쪽에서는 사람은 머리라 하지만 동물은 대가리라고 하고 그것이 비속어가 아니란다. 열 달러. 이제 관광 시작인데 짐이 될까 싶어 그냥 물러난다. 그보다도 단체사진 찍는다는 부름 때문에 서둘러 어딘가에 끼워 앉을 곳으로 행했다.


그렇게 조금은 싱겁게 오전관광이 끝나고 11첩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점심상을 들러 가는 길이다. 정오를 지나며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들어오고, 그새 친근해진 안내원에게 이것저것 묻는 일행 덕에 들은풍월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산들이 바위산인 것은 10년 전 소나무 역병 때문에 그리 되었고 지금은 식목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며, 박연지구 쪽으로는 잣나무들이 그 나름대로 싱싱하다. 학교제도는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이 의무무료교육이고, 전문학교 2년과 대학 4~5년은 전체 학생이 국가장학생이란다. 결혼은 부모들의 중매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녀자는 24~6세, 남자는 26~8세에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문화어(표준어)에서 얼음보송이가 빠져 있는데 (우리 일행 중 국어학자의 말),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얼음보송이라 쓰고 있고, 아까 용대가리에서 대가리가 비속어가 아닌 것처럼 늙은이도 비속어가 아니라 한다. 오히려 아가씨, 아줌마가 비속어라 느껴진단다. 처녀는 처녀라 하고 결혼한 여자는 아주머니라 부른단다. 한편 남측 여행객들, 특히 처녀들의 옷차림새는 가끔 ‘나체화’라 싶어 눈살이 찌푸려진단다.


점심시간일 이 시간에도 도로근로사업에 부역 나온 사람들이 도로가에 쪼그리고 앉은 동작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멀리라서, 또 특별히 녀자라고 색깔 옷이나 짧은 치마를 입을 것도 아니니까 남녀의 구별이 안 된다. 소년학생궁전이 보이는데, 그것에선 방과 후 다과목 소조로 나뉘어 악기나 체육 등 소질을 연마하고 발표하곤 한단다. 그러는 동안 11첩(?)반상이 기다리고 있는 ‘통일관’에 도착한다. 화려한, 너무 화려해서 억지 같은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 안내원들의 안내를 바고 들어선 대 연회장. 둥근 식탁마다 10인조 11첩반상이 차려져 있다. 반짝이면서도 은근한 빛을 발하는 놋그릇에 뚜껑이 얌전히 덮여있는 10인의 11첩반상 차림을 보라! 버스에서 간단히 내려오면서 카메라를 놓쳤다. 서둘러 뛰어 갔지만 버스 문이 잠겼다니! 이런 곳에 누가 범한다고? 터덜거리며 돌아서는데 현대아산 안내원이 보인다. 그는 손쉽게 꽃혀 있는 열쇄를 돌려 버스 문을 열어준다. 배낭에서 카메라 찾는 시간이 미안하니 그냥 배낭 채 들고 내려온다. 다른 일행들은 벌써 놋그릇 뚜껑을 열고 시작하고 있었다. 열린 곳은? 일단 내 밥상을 뚜껑 덮여있는 모양으로 한 컷, 반찬그릇 열한 개와 밥그릇 국그릇 그리고 덤으로 나온 약식뚜껑까지 열자니 14개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펼쳐진 그림은 처음만 못했다. 대충 배운 대로 하더라도 김치류 셋, 장류 셋, 찌개 둘, 찜 하나, 전골 하나를 기본으로 두고서 비로소 생채, 숙채, 구이, 조림, 전, 마른반찬, 장과, 젓갈 회 또는 편육을 세어야 양반상 9첩이 될 터인데, 통일관의 점심상에서는 밥과 국을 제외한 모두를 세어서 11첩반상이란 것이 우선 셈이 달랐다. 왼쪽 줄은 숙주나물과 가지나물과 오이나물 등 숙채 일색이고, 앞줄의 묵무침과 가운데 어딘가의 계란찜 조각 그리고 감자와 고기의 조림, 다 마른 생선구이 조각 등으로는 7첩에도 미치지 못했고, 더구나 김치류라고는 향초를 담가서 다들 익숙해하지 않는 물김치 하나에 불과했다. 김치류가 11첩반상에 통틀어 물김치 하나라니! 오래 가물었다 하더니 김치감도 부족한가? 장난감 크기의 술잔에 부어주는 맑은 술이 아니었담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점심상이었다. 최고의 점심상을 이렇게 차려 내놓는다면……


점심으로 한 시간이 할당되었는지 1시 20분까지 승차하면 되고, 그 사이 길 아래로 남대문과 약간 언덕길 위 저만치에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주석의 금빛 동상이 서있다. 의례가 강요되거나 사진촬영이 금지되거나 하는 극단적 제약은 없었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동상이 일부분 가려지거나 잘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가 따랐다. (누군가는 사진 속의 동상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이유만으로 북측 출입소에서 그 사진을 삭제 당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이번 일핸 10대의 버스에서 내란 사람들은 그 동상께로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있는 것을 찍는 것이 뭐가 문제될까 싶어서, 북측안내원에게 나쁘지 않게 찍어달라고 할까 보다라고 혼잣말처럼 하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듣고 말렸다. 긁어 부스럼을 말라고! 그런데 북측안내원에게 사진 부탁할 생각은 왜 하게 되었냐면, 이미 남대문을 그가 찍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남대문이 멀리 보이는 길 아래엔 드문드문 양쪽 안내원이 서있었고, 그 내부에선 앞의 나무에까지 가려서 남대문이 보이질 않았고, 우리 측 안내원의 발끝에 내 발끝을 대고서 길이를 벌어서 애써 그걸 찍으려던 내 모습을 본 북측안내원이 자진해서 자신이 찍어다 준다고 여남 걸음 나가서 찍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아산 직원은 넘을 수 없는 그 ‘경계’를 북측안내원은 넘어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은 그곳 소속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구한 남대문은 북안동에 있는 개성성 내성의 남문으로 국보급 유산이라 한다. 내성을 쌓았던 1391~1393년경에 함께 지은 것으로, 축대 위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고려사』에 보면 개성성을 쌓는데 목공 35만 명, 장정 24만 명, 기술자 8천 5백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정말 유명한 것은 한석봉의 친필로 쓰인 현판이라는데,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오후의 관광은 첫 코스가 선죽교이다.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 거리 선죽동에 있는 국보유적 159호라나. 이 돌다리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랑물 같은 노계천에 걸쳐있는 이 돌다리는 그 명만큼은 우선 크기에서 사뭇 작다. 길이 6.67m 정도는 홀딱 건너뛸 수 있는 느낌이고, 다리 난간의 너비 2.54m는 양팔을 벌려 품을 만하다. 원래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다는데,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 알려지지 않은 다리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1392년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해 「단심가」로 대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보낸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야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름이 선죽교가 된 것은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것인데, 물론 대나무가 이 개성의 기후에서 지금 자라고 있을 리는 없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하여가」와 「단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쨌거나 지금의 다리는 사람이 건널 수 없이 난간으로 둘러있는데, 이것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를 세워 보호한 때문이란다. 돌다리 동쪽에는 한석봉의 글씨로 ‘선죽교’라는 세 글자가 뚜렷한 비석이 있고, 돌다리 서쪽에는 비각 안에 1740년 영조의 어제어필의 포충비(褒忠碑)와 1872년 고종의 어제어필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그 안에 암수 돌거북을 두고 (아들 얻기를 비는) 소원을 빌었다는 그 너머까지는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들어갈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늘에서 올려다본 은행나무는 유수한 세월을 증거하고 있었다. 매년 가을이면 노랗게 물이 들면서, 선죽교의 불그스레한 핏자국과 조화를 이루며.


다음에 들린 곳은 4차선 시멘트 길가 주차장에서 빙 돌아 올라간 숭양서원은 조선 중기 1573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함께 정몽주의 충절과 서경덕의 학덕을 흠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곧 이어 ‘숭양(崧陽)’이라는 칭호를 내려받았고,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 되었다 한다. 후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견디어 낸 마흔 몇 개의 서원 중에 속한다 한다. 그런데 그 입구에는 개인지 원숭이인지가 부각된 1m 정육면체는 안내가 없었다. 일행들의 추측으로는 말에서 내리기위한 발판으로 쓰인 것일 거란다. 글쎄.


두시 반. 숭양서원을 떠나서 버스는 마지막 코스로 고려박물관으로 향한다. 고려박물관 터의 성균관은 부산동에 자리 잡아 고려 초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고쳐지은 교육기관으로, 1089년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1304년 국자감에 대성전과 기타 건물들을 세우며 국자감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1310년 이름을 성균관으로 고쳤다. 지금의 건물은 1602~1610년경에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란다. 1호관부터 번호를 따라 박물관을 관람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할 듯 하다. 여러 가지 놀라운 자료들 가운데도 적나라한 도표가 하나 있었다. 고려시대 「노비를 팔고 사는 값」이다. 어른 녀자종 (15세~50세)은 120필, 남자종은 100필에, 노령이나 어린 녀자종은 60필 50필이다. 녀자종이 값이 더 나가는 이유를 두고 양단으로 한복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은 안내원은 녀자가 더 많은 노비를 생산할 수 있어서란다. 우리 일행은 아니나 군집한 사람들 중 누군가 남자 목소리가 킥킥거린다, 녀자는 밤낮으로 부리니까 그렇다고! 정말 웃을 일은 그게 아니었다. 그에 나란히 올라간 막대그라프에서 가장 높은 막대는 400필 값의 소 한 마리였다. 소만도 못한 노비의 인생이여. 누군가에게 어떤 형태로는 자유를 잠식당하고 산다면 인간은 소만 못한 존재이리라!


이어지는 토기와 자기의 전시실도 볼 만 했다. 처녀청자나 총각청자 등의 자태는 물론 일반적으로 고려청자야 너무도 유명하지만, 토기의 경우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욱 놀라웠다.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우리 남한 땅에서 출토되어 진열되는 토기들의 모양과 너무 비슷한 때문이었다. 청동거울 등 철제문화도 인상적이었다. 개성은 일찍이 형성된 도시임이 틀림없었다. 간다라 미술의 청동불상이 모셔진 작은 전시실을 뒤로하고 나서니 야외로 통한다.


야외박물관은 문자 그대로 야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여준다. 눈에 먼저 띄는 것은 현화사 7층탑이다. 1020년에 지어졌다는 탑은 높이는 8.64m로 큰 편에 속한다. 탑신마다 불상과 연꽃을 조각했던 모양인데 조금은 훼손되었고, 기단부에 돌을 마치 벽돌처럼 쌓은 것이 특이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흥국사탑도 눈에 들어온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탑은 불일사 5층탑이다. 광종이 그의 모후를 위해 951년에 보봉산 기슭에 지었다는 불일사에 세워진 것이나, 1960년에 야외박물관으로 옮겼나보다. 나중에 붙여 올려 조금 어색한 상륜부를 제외하고도 높이는 7.94m라는데, 올려 바라보자니 참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이다. 역광이 되는 해가 들었다 났다 하는 날씨에 서둘러 정원을 돌아 나오는 곳에 개국사 돌등이 서있다. 개국사는 말 그대로 935년 고려 초에 세운 사찰로 고려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나 조선시대에 몰락했고, 높이 4m의 이 돌등은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아직 우표전시관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시간이 없다. 마지막 남은 관광코스. 북한의 풍물을 조금은 사가지고 가는 일이다. 큰 건물이 두 칸인데, 우선 들어간 곳의 입구에 뽕나무 버섯과 고사리 등 말린 식물을 파는 쪽이 붐빈다. 뽕나무 버섯 한 봉지에 24달러, 고사리는 8달러, 조각호두가 9달러 그리고 잣 한 봉지에 역시 9달러이다. 한국에 비해 싸고 안 싸고는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북한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사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루관광에서 허용된 달러는 200. 박연폭포에서 산 개성 모약과는 그저 양념에 불과하다. 노년의 건강챙기기가 주부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과제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챙기니까 양이 많아진다. 그러나 내심 진짜 표적이 있었다. 청심환 종류 하나. 연전에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북한산 물품판매소가 있었고, 거기서 구입한 청심환이 괜찮은 것 같았다. 양도 적고 다 합쳐 200달러 안에서 쓰기도 마땅하다. 우스운 말이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일 것 같다. 아서라, 남의 사정 봐주려다가 애 들어설라! - 어려서부터 들은 말인데 어려선 그 뜻도 몰랐다. 제 사정을 망각한 현명치 못한 철부지 행동에 대한 경계였으리라, 다소 성적인 버전으로.


아무튼 버스에 돌아와서는 미리 준비해간 편치는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더니 들기에 만만한 크기가 되었다. 오늘의 소비행태를 자아비판하자면 재산 상태에 비해 조금 많이 쓴 것 같지만 어쩌랴. 근년 들어 사적인 용도로 물품사기에 더욱 검소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상쇄가 될 듯 하다. 물론 아직도 멀었다. 슬쩍 스쳐간 텔레비전에서 프랑스라고 기억되는 젊은 여성들의 소비철학에 가슴이 뜨끔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자녀들에게 폐지로 만든 공책만 사주는 데도, 그 아이들이 “우리가 새 공책을 사면 나무들이 죽어서 종이가 되어야 되잖아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 젊은 어머니는 “속옷만 빼고는” 새 옷을 사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있었는데…….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들 시간이 없이 버스는 덜컹거리며 시가지를 지난다. 멀리에서 아이들의 하교시간인지 한 무리가 걸어 나오고 있다. 거무스레한 복장들에 검붉은 스카프들만 눈에 띄게 펄럭인다. 아이들은 목에 나라를 걸고 다닌다. 지나는 사람들도 아침보다 더 늘었다. 운동장으로 보이던 곳에 축구하는 아이들과 곧 이어 다른 운동장엔 네트를 중심으로 갈라서서 배드민턴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조금 더 큰 학생들이 보인다. 자유로운 놀이는 절대로 아닌 것이, 놀이의 낄낄대는 짓궂음이 아닌 훈련의 진지함이 하늘까지 굳게 하는 듯 했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저무는 해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님 내 선입견이 문제였는지.


‘식료품상점’, ‘과실남새상점’, ‘전기기구수리’ 등 상호가 눈에 띄는데, 그것도 독특하다. ‘닭곰집’ 같은 독특한 표현 때문이 아니라 도무지 상호에 고유명사가 없다. 평화식품점이나 개성식품점이 아니라, 그냥 식료품상점인 것이다. 아 하나의 변형이 있었다. ‘결혼식 사진관’과 ‘천연색 예술사진’. 이 두 사진관 간판은 나를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적어도 사진을 잘 찍고 살구나. 추억해야할 일들이 생긴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판자에 쓰인 ‘종합편의’나 ‘아동백화점’ 입구에도 사실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주택 지구에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던 내 눈 탓일까? 작은 글씨가 안보이면 급한 김에 돋보기를 두 개 겹쳐서도 보는 내 눈이 눈이랴! 집들의 하얀 칠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회색의 그림자 인상과 미동도 없어 보이는 정적의 흔적은 내 눈 탓이다. 그래서 렌즈가 중요하다. 특히 미지의 미래의 인생을 분홍빛으로 보는 긍정적인 사람과 불안의 잿빛으로 느끼는 못난이들의 차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이 회색 안경의 개성방문기가 순 거짓이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개성공단 내 지역을 버스를 탄 채 설명과 함께 돌아본 우리는 로만손시계나 GS용인전자 등 우리가 흔히 보던 간판의 공장에 가슴이 찡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양쪽 동포들의 땀방울이 어느 공장에서보다 의미있게 다가오면서. 수박 겉핥기라도 개성공단을 돌아보는 것은 좋았다. 어쨌거나 버스는 다시 군사분계선으로 향하고, 그 동안 친숙해진 북쪽 안내원과 우리 측 순수한 한 일행 사이에 주체사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게 되자 깜짝 놀랐다. 문제가 되어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하나다!」라는 대형 플래카드에 대해서인지 - 그건 올 때나 갈 때나 아주 크게 보이는 길목에 걸어두고 있었다 - 동포로서 뭐 좋다! 라는 응수 한 마디를 빌미로, 안내원은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이라고 늦게나마 자신의 할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평소에 명민한 분이라 곧 다른 화두로 빠져나왔지만, 아무튼 우리 일행이 어떤 계급(?)인줄 알면서도 기어코 주체사상을 입에 담은 안내원. 아마 그의 하루 자아비판은 조금 가벼워 졌으리라!


북측 안내원들이 처음 승차 때와 같이 예의를 갖춰 하차하고 나자 곧 버스 기사가 한 마디 했다. 오늘의 안내원은 거짓말 별로 안 했다고. 버스의 일행 구성을 보아서 “거짓말로” 막 해댈 때도 있단다. 그것만 보아도 그렇다. 안내원은 안내원대로 보조임무가 있을 것이다. 체제선전은 모든 체제의 주요사업 중 하나이니까.


우스운 에피소드. 북측 안내원들을 따라 버스기사가 내리지 않았을 때, 그 주체사상 단어에 노출된 일행은 왜 기사님은 왜 안 내리는 거냐고 되물어서 우리 모두를 까르르 웃겼다. 다시 한번 순수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런 날 북측 남측 구별에 대해 무방비? 그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심오한 학문을 하는 분인데.


마이크를 다시 잡은 현대아산 측 안내로는 문상-개성간 철도 운항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었다. 수송해야할 물자가 있건 없건 날마다 정한 시간에 열차를 운행한단다, 철길이 끊기지 말라고, 조금 씩 조금 씩 더 길게 이어질 꿈을 담아서.


비무장지대 안의 풍경은 교과서처럼 판에 박힌 그대로였다. 다만 이번에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하얗게 반짝이는 바라크 판문점과 그 판문점을 두고 대치한 높은 깃대들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얼핏 보아도 더 높은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쪽이 북이다. 귀성동, 일명 평화의 마을에 자리한 붉은 인공기의 높이는 자그마치 165m에 달한다고 한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에 위치한 태극기의 높이는 100m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 측은 그럼 그렇게 높은 깃발을 달 능력이 안 되는가? 설명에 따르면 첨엔 며칠 자고나면 북쪽에서 또 며칠 자고나면 남쪽에서 깃발 높이 올리기 경주가 벌어지곤 했더란다. 그것을 어느 날 우리 측에서 멈춘 것이 이 상황이란다. 웃지 못 할 사실 하나 더. 그렇게 높은 인공기를 게양하고 내리는 작업에 북측 인원은 얼마나 동원이 되어야 할까? 태극기 게양에 필요한 인원이 2명이면…… 그러나 아무도 맞추지 못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그 열배인 스무 명도 아닌 사십 명이 아침 조석으로 인공기 게양에 동원된단다. 하늘의 압력이 그런 것인가? 믿지 못할 숫자이지만 가장 믿음직한 소식통이 아닌가.


마지막 북측과의 접촉은 왼쪽으로 보이는 언덕의 인민군 초소이다. 초소로 들어가려는 걸음걸이의 군인을 만나 버스 속 사람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었지만 허무한 짝사랑. 노무현 대통령이 도보로 건너갔던 샛노란 횡단선. 그것은 페인트가 태워진 채 거무스름한 선으로 변해있다. 곧 이어 반가운 파주시 이정표가 다가온다. 5시 정각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시간이다. 실제로는 북측 용어로 통행검사소 - 우리 측 용어로 남북한출입소를 통과하면서 개성방문은 끝이 나는가 보다.


입경장에서는 카메라를 소지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줄을 구분한다. 짐들을 X레이로 투사하는 과정을 똑 같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카메라들을 북측 요원이 받아들고서 하나하나 촬영된 화면을 검사했다. 내 디카도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 걸린 것은 없었다. 귀 달린 도기병 등 몇 가지 박물관 내부를 찍은 사진이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첨엔 모르고 몇 장을 찍었는데, 실내는 촬영금지라 해서 그만두었었다. 그 보다는 아무렇게나 잡동사니 속에 밀어 넣어둔 박연폭포의 돌멩이 하나가 X레이에 걸리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개성모약과보다도 우황청심환보다도 내심 기다릴 개성돌멩이. 은행잎과 다른 낙엽들 집으면서 하나 겨우 집어든 못난 돌멩이. 일행 중에는 분명 반입금지 품목에 적힌 기준에 맞는데도 아무튼 반입불가 품목으로 분류되어 압류되었던 소니SR12 카메라도, 종교 관련 물품이라 해서 자진해서 맡긴 묵주도 당연히 돌려받는다. 종교도 정치만큼 위력을 갖는다? 사실 우연히 선물 받은 물건에라도 십자가 등이 새겨져 있음 곤란하다는 처음 안내에 많이 마음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서울 쪽으로의 검역은 마른 고사리 등 식물과 관련된 물품들이 해당된다고 한다. 물론 거의 형식적이다. 한 두 시간 전에 산 물건을 한 두 시간 후에 압류하고서야 개성관광이 유지되겠는가. 어둑한 사무소를 빠져나온 우리들은 다시 임진각행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 걸터앉을 데도 없이 서성거리는 몇 분, 몇 사람과 말을 섞게 되니 조금 후회스럽게 된다. 주거니 받거니, 농담조의 언사들이 다만 상대가 아니라는 자괴감 때문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물론 얼굴은 사회적 표정을 띠고 있었기를 희망한다. 부질없더라도.


정말 해괴한 그 꿈은 다만 일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북한을 다녀온다는 예고에 불과했을까? 형제들을 다 모아 월북을 해서는 난민촌의 덜 지은 창고 같은 시멘트 반쪽 건물에 배당되었데…… 방도 아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샘가와도 같은 축축한 바닥에 어정어정 안고 선 우리 형제들. 하이힐로 종종거리며 뒤따라오던 한 녀석이 반짝이는 지갑을 팔에 낀 채 산들거리는 원피스 치마 자락을 날리며 뒷걸음질을 한다. “언니. 난 안 되겠어. 난 이런 덴 못 살아…….” 나는 어쩜 그리 냉정하고 단호했을까? 그래, 이런 문제는 형제라 해도 강요 못하지, 각자가 결정 하는 거다. 그래 할 수 없다. 뭐 그런 짧음 랄로서 우리는 이별을 했다. (사실 우리는 연초에 오래 누워있던 그 아이와 영영 이별을 한 터였다.) 문제는 꿈이 거기서 중단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난민촌 같은 숙소 저 앞에 검붉은 벽돌로 육중하면서도 높은 아파트 건물이 여러 동 있다. 그런데 책임자인지 담당자인지가 와서 하는 말이, 저 고층 아파트 위에 꼭 저만한 높이의 고층아파트를 또 올릴 계획인데, 그것이 완공되면 우리가 그리고 배치되는 것이라고. 물론 무엇인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도 없이 정지된 그림인데. 성냥갑 위에 또 하나 이런 성냥갑을 얹어서? 그러한 공법을 물론 아는 바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시멘트바닥의 냉기는 그때 계정이 무엇이었던 간에 황량함 그 자체이고 비전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월북을 감행했는가? 전후 사정은 모르나, 순간 나에게 깊은 후회가 일었다. 평상시에 스스로 기회주의적인 면이 없다 믿었던 내가 - 꿈에서도 그랬다 - 다른 형제들에 대한 책임의식까지 발동하여 넌지시 생각을 바꿨다. 사실 이 엄청난 행보를 학교에서 아직 모른다. 그러니 우리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어때? 어떻게 결정할까? 너희들 결정하는 대로……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 꿈이라지만 너무했다. 형제들이 온통 함께 월북을 했는데 재직 학교에서 그걸 여태 모른다? 다시 돌아 올 수가 있다?


참 꿈은 꿈이다. 그리고 꿈처럼 나는 다시 돌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버스 내부는 활기에 넘쳤다 서태지가 어떻게 데려왔는지 로열필하모니와 협연하는 온 시간 내내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한 소설의 노래도 따라 부를 수도 없었던 내 목이 잠긴 건 버스 안의 열기와 실제 에어컨의 냉기가 범벅되어 내 신경을 자극한 탓이리라. 나는 어떤 온도에 반응해야 하는가를 몰라서 저항력을 잃고 무너진다. 나는 목소리를 잃고 그 대신 지금 글을 쓴다. 꿈만 같은 개성 방문기를. 그림자의 도시 개성을 떠올리며.

 


소설시대 15호, 2009. 3월 186-2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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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8. 11. 20. 23:30

 

이 있었던 것

                                                     맛, 멋, 그리고 향기』2008 (이화에세이)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 파니는 “눈이 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눈 말이다. 눈이 있었던 것은 살아있었던 것이고, 그러니까 파니는 살아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 살아 있었던 것(과거완료)은 지금은 죽은 것(현재완료)을 의미한다. 파니는 살아있었다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을 먹지 않는다.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파니 뿐이 아니다. 가녀린 체구로 강인한 여러 일들을 해내는 동료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젊긴 하지만 그 무궁한 에너지가 순 식물성에서 나온다.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엄마노릇을 잘 해내면서도, 고기를 멀리 하기 몇 년, 꾀나 공격적이었을 더 젊은 날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 지금의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마르고 부드럽고. 얼핏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지만, 바람처럼 가볍게 걷고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할 일은 누구보다도 야무지다. 어디에서 힘이 나올까. 아니 잡식성 동료들의 저녁자리에 끼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디에서 인내가 나올까.


*


2008년, 운하와 쇠고기로 들끓는 여름을 보낸다. 운하반대모임에 서명을 하고보니 그 동료가 적극적이었다. 원래 환경론자인 것은 알았다. “인간은 자연을 너무나 학대하고 있어요. 《불편한 진실》 보셨나요? 지구온난화 때문에 근년 들어 빙하며 킬리만자로나 알프스 만년설이 엄청 녹아내리죠. 온난화란 게 말뿐 아니라 그 진행속도가 심각해요. 인간의 소비행태가 CO₂를 증가시켜 북극 빙하를 1년에 1% 정도 녹여내는데, 반세기 안에 플로리다, 상하이 등 해변도시들 40% 이상이 물에 잠기고, 네덜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우린 사실 날마다 샤워도 해선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우린 이 지구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그런 판에 우리나라에선 잘 있는 물길 놔두고 인공운하라니. 그렇게 확실히 발언하는 그녀는 순 식물성 체력만으로도 어렵고 무거운 일들에 거뜬하다. 운하문제와 쇠고기수입문제의 경중은 나름대로 판단한 것 같았다. 자신이 쇠고기와 관련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총론과 각론의 관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운하문제에 지론을 폈다. 우리의 4대강을 인위적으로 손질한다는 한반도 운하계획은 잘 될 이유보다도 안 될 이유가 너무나 많다고. 청계천 공사도 말이 “복원”이었지 자연하천이 아닌 인위적 이벤트 하천으로 개조됨으로써 원래의 목적이던 청계천 복원이 영원히 무산된 것 아니냐고. 지금의 청계천이 잠시 위락시설이 될지는 모르지만 낙동강이나 섬진강이 갖는 자연에 비교가 되느냐고. 혹여 대운하의 경제적 효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자락이 살아있는 한반도를 지켜온 우리 삶과의 의미관계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수 억 년의 지형형성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4대강과 샛강들이 운하로 인해서 수리체계가 단절된다면 강유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형교란과 배수기능의 교란 그리고 생태교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고.


나는 사실 운하반대 서명을 하면서도 이론적 배경은 없었다. 놀이시설처럼 도구로 추락한 청계천과, 그것도 모범이라고 본을 따서 우리 고향에서도 유치찬란한 하천 외부정비에 혈세를 퍼붓는 행정에 놀라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 가녀린 동료의 실팍한 이론과 행동을 보고서야 날이 선 지식인의 비판의식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특별한 음식습관에 관심이 갔다. 주지육림에 빠져서는 명철한 사고를 정립하지 못하듯이, 이렇듯 명료한 사고방식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녀가 섭취하는 음식물과 생활습관이 큰 몫을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차 채식의 장점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자칫 가난한 농민들이 밥과 김치를 주식으로 채식에 의존하고 부자양반들은 산해진미를 향유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류의 음식사를 보자면 채식은 유목문화에 이어 농경문화가 발달된 후에야 가능했던, 다시 말해서 한층 진화된 섭생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진화의 초기단계부터 정글의 법칙 속에서 육식을 했고, 구석기시대에는 채집수렵에 의존해야 했으니까, 채식 습관은 인류사에서 진화로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인간이 먹는다! 피가 살아 끓고 있는 생명체를 도살하는 잔혹행위, 그러한 잔혹행위를 일상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단말마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동물은 잔혹성을 심어놓는다. 잔혹성은 동물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동종인 인간 사이에 작용하여 작게는 드잡이와 싸움질, 크게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게 한다. 만물이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사고 또한 친자연적이 아닌 친인간적 사고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고의 틀에서 바라볼 때 친인간적이라는 것은 배타적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 주는 만큼만 자연에서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서 얻은 결론이다. 완전한 채식주의 - 그것이 비밀이었다. 그녀에게서 채식주의는 완벽한 수위다. 유제품마저 섭취대상에서 제외하는 것. 물론 그것은 심각한 불편을 야기한다. 하얀 밥을 지어놓고 그녀와 한 끼 밥을 먹으려던 계획도 무산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숟가락에 얹어 먹을 김치랑, 매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여린 고추무름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김치에는 젓갈류가 무름에는 멸치 몇 마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샐러드에 드레싱을 해놓았다가는 망한다. 계란 일부가 드레싱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마르고 왜소해지면서 정신이 강해지는 경우를 보통은 고행에서 본다. 그래서 속으로 그 작은 동료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내부에서 자연스러웠던 것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유년시절 샘가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죽은 “새”의 털을 뽑고 있던 것을 보았던 기억과, 별식으로 상에 오른 영계백숙을 그 기억 때문에 토해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유년시절의 고민은 무엇인가 뭉클한 그런 것을 씹어야하는 일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었던가.


어린이는 보다 더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그렇게 생각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을 고려한다고 해서 제 살과 비슷한 동물성 음식을 일부러 길들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원래 채식성 엄마를 두고도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잘한 일일까? 내 아이를 기를 즈음 나는 발언권이 별로 없는 엄마였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세뇌된 자신 없는 엄마였다. 다시 아이를 갖는다면 내가 어려웠던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호박 하나만 해도, 애호박과 농익은 호박 그리고 말린 호박…… 자연 속에 널려 있는 열매들과 푸성귀들에서 자연친화적 섭생의 보고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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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7. 12. 1. 01:55

 

멍난 옷

                                            내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2007 (이화에세이)

 

 

구멍이, 저기 이 옷에 구멍이 나버려서……


저물녘에 세탁소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초인종을 누르고서 어물거린다. 예고 없이 오가지 않는 것이 수년 간 이 세탁소와의 자연스런 일상인 터라 의아했다. 손에는 종이 가방을 꼬옥 움켜쥐고 있다. 부뚜막에는 국이 얹어져 있어서 나는 조금 성가셨다. 더듬거리는 말로는 옷에 아예 구멍이 나서 못쓰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 때서야 꺼낸 옷은 내 하얀 블라우스다.


그제야 감이 잡히면서 난감해졌다.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정도는 세탁소에 보내지 않은 내가 하필 처음 보는 천이라서 드라이를 맡겼던 옷이다. 면섬유인줄 알고 샀는데, 그것도 상황 때문에 어쩌다 ‘비싼’ 옷 집에서 구입한 것인데, 잘 보니 순면이 아니라 뭔가가 코팅되어 재킷 대용으로도 될까 싶은, 아무튼 얼른 보아도 복잡한 천이라서 자신이 없어 세탁소에 보낸 것이다.


여자는 계속 중얼거렸다. 다른 집 와이셔츠들 다리고 나서 같은 것인 줄 알고 다리렸는데, 다리미 대자마자 눌어가지고 그만. 보니까 새 옷 같아서…… 대신 사보려고…… 그래서 텍에 붙은 전화번호를 돌렸는데. 그런데 폐업이라니까……


처음 빨아야 했던 블라우스가 어찌하여 폐업이 된 상표인가의 내력은 좀 그렇다. 단벌을 샀기 때문에 적당히 맞춰 입기도 그랬고, 또 일터에 나다니는 경우엔 모양만 갖춘 단출한 옷들을 입기 때문에 구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선뜻 입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몇 년 사이 폐업이라니 의아했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올 봄에는 아예 누렇게 헌 옷이 되는가 싶어서 몇 번 살짝 입은 것이다.


눋다 못해 구멍이 뻥 뚫려버린 옷을 받아들고 보니 짜증이 난다. 그러기에 과하게 비싼 옷은 내 것이 아니로구나! 부엌 쪽에서는 국물 냄새가 진동한다. 끓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럼 불이라도 줄여야 하는데……. 가만, 교양 있게 굴자. 이까짓 블라우스 하나가 뭔가. 나에게나 비싼 옷이지, 남편의 와이셔츠들을 줄줄이 세탁소에 보내는 여자들의 옷들에 견주면 이게 대술까. 기껏 블라우스는 블라우스지. 진정하자, 진정 해. 2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에서 이깟 일로 속보이면 되나…….


제가 지금 얼떨떨하네요. 일단 주세요, 주고 가세요. 불에 뭘 얹어 놓았고…… 좀 생각해볼게요.


다른 것으로 사시기라도 하라고……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요. 뭘 어쩌겠어요. 일단 주고 가시라니까요.


빼앗다시피 옷을 들여오고 여자를 내몰았지만 마음은 양편으로 무겁다.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비싼 블라우스를 망친 내가 밉고, 저자세로 굽실거리는 여자가 밉다. 국은 벌써 끓어 넘치고 있다. 넘친다, 넘친다…… 그때 생각이 났다. 내 그릇에 넘치는 복은 됫박을 넘치면 굴러버리는 콩되모양 넘치게 마련이다. 이건 내 옷이 아니다. 저 여자는 하필 나 때문에 저자세가 되었다. 평생 해온 세탁 보조가 느닷없이 엉뚱한 실수를 한 건 보조 탓이 아니라 옷 주인 탓이다. 그러다 짜증이 일면 또 다른 이유를 댄다. 그런 것 때문에 옹졸함을 보인다면 자신이 짜잔해져서 안 된다. 애써 좋은 마음으로 생각하려니 그런대로 별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세탁소여자의 처지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명에서 궂은 역할을 내가 아니라 그 여자가 맡아 간 것이다.


*


엄마, 제가 꼭 S.대학을 들어가게 되면 우리나라 누군가 한 사람은 S.대학에 못 가게 되는 거네요! 큰 아이가 중 3 적에 했던 말이다. ― 아니 뭐, 숫자로 따지면 그렇기는 하다만, 그럼 넌 그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S.대학을 갈 수 있어도 포기해야 된다 그 말? ― 아니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 너 그렇게 이타적인 건 좋다만, 매사를 그렇게 살자면 무진장 힘이 들게다. ― 엄마, 그게요, 이 세상에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을 드물걸요. 이타적 행동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이기적인 셈이지요 뭐.


기술시간의 숙제라나? 나무판자로 작은 책꽂이를 완성해 가는 숙제를 하느라 페이퍼 질에 팔려있던 아이는 대충 해가라는 이 어미의 말에 웃음기를 띠고 정색했다. 누가 알아요, 또 목수를 해먹고 살아야 될지도 모르니 미리 잘 배워둬야지요! 그것은 아이의 상투어였다. 누가 알아요, 또 양복장이를 해야 될지도 모르니 가위질도 잘 해야지요! 누가 알아요, 또……


아이들은 대강 물렁하게 자랐다. 남을 때리고 들어오면 나쁜 사람이고, 남에게 얻어맞고 오면 바보다! 나쁜 사람과 바보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형제간이라고 다툴 수도 없었겠다. 그래 겉보기엔 별 탈 없이 자랐다. 속으론 그렇게 한 말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그런 걸 꼭 마음에 담아두어서라기 보다는 천성이 좀 무를 것이다. 해서 특별히 똑똑하게 자라진 못했지만, 이기적, 투쟁적으로 자라진 않았다. 어미인 내가 늙어간다고 자제심을 잃고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선 안 된다. 애들 보기 민망할 일이다.


*


세탁소 아주머니의 당황함에 빨리 면죄부를 주지 못하고 덩달아 곤혹스러워했던 몇 분간이 부끄러워진다. 서둘러 싱크대 아래 여닫이문을 열어본다. 거기 과일가게 전화 옆에 세탁소 전화 스티커가 붙어있다. 저 201홉니다. 지금 막……. ― 아 예……. 저쪽은 말을 잇지 못한다. 뭔가 호령을 기다리는 듯 숨마저 죽인다. 저, 그 옷 일 잊어버리시라고요. 생각 말고 편안히 주무세요. 그냥 걱정 마시라고요. ― 그래도 …….


아예 말을 잇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되풀이해서 걱정 말라고 말하고 나니까 내 맘이 비로소 편했다. 그런 일은 십여 분을 애탈 일이 아니다. 집에 처음 왔을 때 선뜻 걱정 말라 말하지 못한 내가 옹졸했다. 배웠다는 여자가 치졸했다. 다음 세상에 세탁소여자로 태어나서 다림질을 잘 못해서 누군가의 문간에서 고개를 숙이는 벌을 받을 일이다.


사실 누구라도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내 경우엔 이제 몇 번 입지 않은 새 옷은 오래 입어 내게 친숙한 그저 그런 옷보다 오히려 덜 아깝다. 작은 장신구 하나라도, 장신구라면 거창하지만, 실오라기로 짠 팔찌가 내게 소중한 만큼 진주귀걸이가 귀하지는 않다. 둘 다 각각 여행 기념으로 샀던 소품이긴 하지만, 특히 실오라기 팔찌는 해변의 포장집에서 산 싸구려 중에 싸구려다. 하지만 그 짙푸른 바닷물을 기억하며, 소금기 젖은 손과 입으로 ‘겨자’가 영어로 생각이 나질 않아서 순간 ‘섬씽 옐로’를 달라고 해서 핫도그를 사먹던 일을 추억한다. 나중에 특급호텔의 비치로비에서 마신 알 수 없는 음료와는 또 다른 맛을. 바가지나 쓰는 관광객이 아니라는 자존심과 굳이 핫도그를 들고 청승을 떠는 합리성의 속내에 대한 한심을.  


멀쩡한 블라우스가 못쓰게 되었지만 미련은 없다. 아무런 추억하나 없는 헝겊의 모임. 내가 좋아하는 연한 청록색의 한 줄 장식이 조금 아깝기는 하다. 소매 부분에 구멍이 났다면 반팔로 자르기라도 하지 싶다. 하지만 등 한 쪽이 아기 손 크기만큼이나 눌어붙고 아예 손바닥만큼은 구멍이니, 이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기회가 온 것 같다. 너절한 옷걸이들이나 삼층장 속을 뒤져서 쓰레기들을 분류해 낼 일이다.


고등학교 때 가정과 선생님 한 분이 3년 째 입지 않는 옷은 죄다 버리라고 하셨다. 20년 넘게 같은 곳에서 사는 나는 이사 때면 저절로 살림이 정리되는 기회도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데이트 때 받은 스카프, 청혼 무렵 받은 머플러, 출장 다녀올 때 선물해준 핸드백들…… 30년에 몇 번 썼을까 말까 하는 소품들을 그냥 넣어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선물한 것들은 더욱 못 버린다. 유치원 때 만들어준 목걸이, 처음으로 접어준 여러 마리 종이학, 머리핀 세트, 손수건, 향수…… 손수건은 잃어버릴까 쓰지도 않고 보관하고, 향수는 빈 병이 되어도 포장지까지 간직한다. 합리적인 눈으로 보자면 포장지 정도는 이제는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성장하여 갈수록 (정신적으로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 내가 꼭 그랬으니까 ―, 작은 추억거리는 눈물겹게 귀하다. 이제는 여기저기 쌓이는 사진들까지, 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내게는 그렇게나 소중한 것들로 넘친다. 어떤 우아한 옷을, 훌륭한 장신구를 걸쳐도 더 이상은 멋이 나올 수 없는 몸에게 이제 어떤 물건도 소중치 않다. 몸을 위한 물건들보다는 맘을 위한 추억들이 귀하다. 구멍 난 옷을 버려야 하듯이, 옷가지들 등속은 좀 솎아 내야겠다. 물건들이 비워진 자리에 더 소중한 추억들이 들어올 수 있게시리. 길어 내도 길어 내도 줄지 않는 샘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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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6. 12. 3. 20:43

 

내적 자유

                                                                                    『 만남』2006 (이화에세이)

 

 

 

“자유로” -

 이것이 올해의 에세이 주제로 추천된 단어이다. 그 동안의 특정 주제 “모교” 또는 “어머니” 등에 비해, 자유로운 주제에 대해서 첫 순간 자유를 느낀다. 자유는 사전적인 의미로,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피상적으로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나 자유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권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자유선거도 하고, 자유언론을 누린다. 자유교육을 받았고, 자유연애를 통한 자유결혼에 이르렀으니 사적으로도 자유로워 마땅하다. 나는 내적 자유에 따라 글을 시작하면 된다.


 

그럼 나의 내적인 자유 지수는 어떠한가. ‘정신이나 마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말하자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다. 예컨대 국공립학교의 교원은 학문연구와 강의에서 원칙적으로 자유롭다. 정치범 혹은 파렴치범이 아닌 다음에야 퇴출될 일이 없으니까. 사적으로도 느긋한 가족 구성원들 덕택에 자유를 제한당할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무엇인가가 나를 옥죈다. 조금 더 많이 연구하고, 조금 더 잘 가르치고, 조금 더 신망을 얻고, 조금 더 사랑받기 위해서 부단히 내 자유를 감춘다. 쉬고 싶은, 잠자리에 들고 싶은 유혹마저 뿌리치면서 책상에 앉아 있게 되지만,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누가 꼭 그만큼을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탈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일탈을 꿈꾸지만, 꿈은 늘 추상적인 안개에 다름 아니다. 인간관계의 역할강제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 또한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자유의 대단한 능력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 목욕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의 목욕 준비에 빠진 것이 많기도 하고, 또 이메일만 보고 가려다가 혹시나 학내문서까지 체크를 하려니 여러 번 들락날락 하다가 정말 집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면 큰길이다. 벌써 골목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친다. 그때 손 안에 진동이 온다. 마지막 순간에 집어 들고 나오느라 전화기가 아직 손 안에 있었나 보다. 아차, 어제 이맘때 출근길에 받았던, 같은 이의 전화다. 두어 번 만난 소설가로, 누군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물었는데,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저장된 때문에 말해주기가 불가능했었다. 저녁에 전화해 주기로 했었는데…….

“아 네에, 안녕하세요. 저 오늘은 마침 집입니다.”

거짓말이 술술 나오다니 스스로 놀란다. 순전히 답전화를 하지 못했던 미안함 때문이다.

“저 지금 컴퓨터를 켜놓지 않아서요, 제가 지금 열어 보고 곧 전화 드릴게요.”

이 말은 참말이다. 거짓말에 근거한 참말.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의 발걸음으로 집안으로 쫒아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최근 들어 작동이 늦어진 컴퓨터가 안타깝다. 저쪽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으레 전화 담당은 나지만, 마음이 급한 김에 그냥 있어 본다. 남편의 목소리가 받는다. 이쪽에서는 누님에게 느린 위로의 변이다. 누님에게 단 하나 혈육이 미국에서 다니러 왔다가 다시 떠난 하루 이틀째 시간이었다. 이야기 끝에 나를 찾으시나 보다.

“집사람? 목욕을 가는가 싶던데요…….”

나로서는 그냥 숨죽이고 이 급한 일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다. 거실 전화에 신경을 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바보는 손을 번쩍 들고 거실로 나간다.

“저 여기 있어요, 아직 안 갔어요.”

무슨 자랑인가.

“아니 여태 안 나갔소?”

그러고서 달려가 전화를 받으니, 딸이 미국 제자리에 도착할 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없으니, 그쪽에 전화를 해보라는 당부이시다.

“제 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으니, 본원에다 전화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꼬부랑말을 알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자네가 좀…….”

“예, 예, 그런데 제가 지금 급히 하던 일이 있으니 잠시 후 다시 전화 드릴게요.”

사실 본원의 전화번호를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여차여차해서 도착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쯤인가도 미리 알고서 전화를 해야 하니.

그러고서 서재로 달려와 컴퓨터에서 전화와 이메일주소를 찾아서 답전화를 한다. 내 급한 사정과 팔순 노인네의 더 급한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녀에게, 가능하면 바쁜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 축하 말까지를 잊지 않는다. 작가가 책을 내는 일을 산고에 비하면 산모에게 모독이 될까? 어쨌거나 축하를 받아 마땅한 그녀였으니까.

그러고서 다시 누님에게서 미국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뇌의 코드를 얼른 바꾸고 혀를 꼬부려서 여전히 부자연스런 통화를 시도한다. “프롬 코리어”라는 키워드에 금방 느리고 똑똑해지는 친절한 상대 덕에, 누님의 외동딸이 “아직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지금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상황을 듣고 전해드릴 수 있게 되기까지. 숨을 적게 쉬면서 서둘렀지만, 목욕바구니를 들고 회항을 한 시점에서부터 쉬이 2,30분이 지나갔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던 이마에 어느새 미세한 땀이 배어나 있다. 이 땀만 아니라면, 그냥 바구니를 풀고 싶다. 다시 일어서서 대문을 나가거나 아니면 주저앉거나, 이 작은 망설임에 갑자기 자유의지가 멍해진다. 어느 쪽을 내가 원하는가.


살아간다는 것은 크고 작은 갈림길의 순간순간의 합계이다. 가도 안 가도 좋을 목욕이었으니 가도 안 가도 괜찮지만, 가다가 핸드폰에 돌아온 일, 와서도 그냥 있으면 없는 줄 알 것을 있다고 설쳐서 기어코 집 전화를 받은 일, 그런 순간의 선택이 하루아침을 숨차게 만들었다. 길에 서서 집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집으로 내달려야 했고, 그 3,4분의 속도를 낸 것만으로 내 심장은 한참을 쉬기를 주장한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 ― 그 이후로는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자유의지가 작용한다고 믿는다. 필요한 일도 하지만 괜스런 일도 하고, 잘한 선택도 있지만 후회스런 경우도 많다.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면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더구나 후회스런 경우들은 꼭 기억에 남아서 다음의 선택들을 무겁게 하고, 그 때문에 또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정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하지 않아야 했던,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하지 않았던, 했어야 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그날 아침의 혼란스럽지만 나름대로 친절한 일들은 어쩌면 과잉이었다. 가던 길을 돌아와서까지 전화번호를 그 시간에 꼭 알려주어야 할 만큼 급박한 이유는 없었고, 시누의의 전화를 꼭 그 순간 자청해서 받을 일도 아니었다. 누님의 외동딸은 한 시간 남짓 지나 도착했다는 전화가 온 모양이다. 그럴 걸,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며,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줄로 알고 산다. 그러니까 그 과잉은 옛날에 했어야 했던, 그러나 하지 않았던 어떤 일에 대한 평생의 보상 심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리라.


과거의 시간들이 기억으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현재의 시간에 자유의 공간이 줄어든다. 미래의 시간이 기대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그 또한 자유의 공간을 줄인다. 과거 때문에도 미래 때문에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 존재가 여기에 있다. 나의 내적 자유여 ― 자판 위를 열에 들떠 떠도는 열 손가락들은 한 조각 자유를 토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이름 석자의 피복 속에서 자유를 꾸며대고 있을까?

그렇다고 자유의지대로 되는 일도 썩 없다. 특히 창작의 경우, 그 노력과 고통만큼의 결과는 미지수다. 사람이 예술과 학문에서 완전한 독창적인 자유로 창작을 할 수는 없다던 에.테.아. 호프만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영감이란, 그 영감 속에서만이 창작이 가능한 법인데,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보다 높은 원칙의 영향”이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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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6. 9. 20. 20:52

직이는 림자

 

<문학공간> 2006, 9월호 (202호)


“너는 왜 쓰는가? 너는 왜 쓰지 않을 수 없는가?” ― 젊어서든 아니든, 글을 쓰는 세계로 ‘떨어진’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첫 질문이다. “글이 밥 먹여 주느냐? 글이라는 것이 대체 인간사에 무엇이냐?” 말로 하지 않더라도, 의심은 눈길에서 눈길로 아프게 찔러온다. 선뜻 대꾸할 말이 없다. 곰곰 생각해 봐도 없다. 정말 아무 것도 ‘들여놓는’ 것이 없어 보인다. 글은 홍수로 고립된 계곡 마을에 식수 하나 건네지 못한다. 쓸려 무더기진 쓰레기더밀랑 까딱도 못한다. 커피잔 늘어놓고 줄담배 입에 물고서 책상에 죽치고 있는 문사들이라니, 장맛비 피해를 외면하고 골프나 친 위인들보다 한 치도 더 낫지 않다.

그런데 왜? 인류가 있고 문자가 아직 없던 시대까지 거슬러 가도 ‘문학’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리고 다시 휴머니즘 ― 도도히 흐르는 인류의 정신사 어느 시대에도 문학은 우리를 동반했다. 제대로 학문도 아닌 그것이, 제대로 예술도 아닌 그것이.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문학이 현실과 꿈 사이의 매개체와도 같은 존재인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고달팠고 여전히 고달프다. 방탕에 이르는 부패한 황제 아래서도 고달팠고, 금욕적 수도사가 지배하는 신정정치 아래에서는 신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에도 고달팠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기치 아래 신분제가 철폐되었어도 고달프다.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귀족들. 혈통귀족 양반님네가 사라지기도 전에 돈귀족이 새 양반님 행세다. 지배하는 일부가 있는 한 지배당하는 일부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결핍으로 고통당하는 일부가.

그러나 결핍은 외부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는 본래 다양한 개성의 인간을 위축시켰다. 개인은 인류역사의 진보를 위해 본성의 충족을 포기(당)해왔다. 그래서 내면은 늘 ‘다른 현실’을 꿈꾼다. 이 꿈이 언어예술작품으로 빚어나온 것, 그것이 문학작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지리 밥도 못 먹여주는” 문학이 이 첨단과학의 세상에서 명줄이나마 보전하겠는가?

이때 행여 우리는 문학의 효용성 논란에 풀이 죽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쓸데 있고 없는 것이 따로 없음을 성현들은 벌써 알았다. “있는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 혹은 “땅이라는 것은 턱없이 넓고 크지만 사람이 걸을 때 소용되는 곳이란 기껏해야 발이 닿는 지면뿐이요,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재어가지고 그 둘레는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 버린다면 사람들에게 그 땅이 그래도 쓸모가 있겠소?”라고. 디디고 선 땅을 디디고 설 수 있기 위해 무수한 땅이 필요하듯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에겐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 절실하다. 아니면 우리는 질식하거나 로봇으로 전락할 것이다. 결핍과 갈등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더욱 깊어지게 하고, 이 내면을 끌어내는 것은 상상력의 힘으로서만 가능하다. 상상력은 자신조차도 공감하기 어려운 내면을 개연성으로 설명해낼 줄 아는 힘이다. 상상력이 우연과 혼돈을 필연성으로 바꿔낼 때, 작품세계는 리얼리티를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나, 문학에게 이 시대는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글쓰는 이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문학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더 이상 깊은 내면의 샘을 퍼 올리지 못할 때, 그 파국이다. 상상력은 꼬마아이가 움직이는 긴 제 그림자를 발견하고서 신명이 났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문학을 놓아선 안 된다. 읽건 쓰건, 그 차이는 그림자를 몸 앞에 두는가 뒤에 두는가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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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5. 11. 3. 22:45

내 딸의 어머니


                                                                『눈물향기의 어머니』2005 (이화에세이)

 

 

내 가능한 딸에겐 내가 어머니일 것이다.

내 딸의 어머니에게도 물론 어머니가 계신다.

그 어머니에게도 또 어머니가....... 

                                                                     ※


누구나 사춘기에는 자신의 평판에 예민하다. 그 시절 평판의 첫 가름은 얼굴 생김새다. 그녀는 천하미인 소리를 듣는 예쁜 여동생과 짧은 터울로 고민이었다. 겉으로는 평온을 가장할 수 있고 말 수 적은 표정으로 넘기며 할 일없이 책상에나 붙어 지냈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불공평했다. 물오리란 별명을 들으리만큼 씻고 또 씻는 습성에도 돋아난 여드름은 참을성을 폭발시켰다. 예쁜 여동생은 정말이지 상대적으로 말하면 잘 씻지도 않지만, 그 매끈한 피부마저도 동네는 물론 학교에서도 제일을 뽐냈다. 여드름이 이마에만 송기송기 돋을 때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이마에 나는 여드름은 누군가가 당신을 좋아하는 증거다 하는 속설 때문에. 하지만 볼에까지 빨간 뾰루지가 돋기 시작했을 때는 심각했다. 게다가 예쁜 여동생은, 어마, 언니도 누굴 좋아하는 거야, 그러네, 하면서 예쁘고 까만 눈을 흘겼다. 그런 어느 날 그녀는 유난히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어머니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어머닌 정말, 첫째는 조물주 실패작품을 낳았더니만 둘째는 예술작품을 낳았어요?


조물주 실패작품?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한참을 더 자라서 어머니가 되어서야 느낀 것이지만, 어느 어미가 제 자식을 낳아놓고 실패작품이라 느끼랴?


그녀의 첫 아기도 갓 때어났을 때 도저히 미남이 아니었다. 포도같이 검고 호수같이 깊은 눈동자를 지닌 둘째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작은 눈에 남달리 푸른 눈매가 오히려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려나, 아이들은 제 어미를 힐난할 좀생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아들들은 딸들에 비해 적어도 자신의 외모에는 관대한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일반론보다는, 아이들이 제 어미보다 좀 더 관대한 품성을 지닌 것이리라.


어머니 ―

첫 아이 실패작품을 낳았냐는 딸의 공박에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의외로 당당하셨다. 너희들 시집가서 나만큼만 아이들 반듯하게 낳아 보거라! 어머니로서 큰소리 치실만큼 어려선 제법이었던 자식들이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훨씬 넘긴 지금. 자식들 모두 제 아이들이야 어떻건 사는 형편들이 어머니처럼 큰소리 낼 계제가 못된다. 물질의 권능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기를 보낸 아이들은 자라서는 분명 그 물질에 굴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물질의 중요성을 너무도 늦게 깨닫거나,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산다. 농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세상이 바뀌었으되, 사업공식에 접근하지 못하고 유아적 신뢰로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건지는 것이 없다. 철없는, 더러는 기고만장하던 자식들이 재력의 손상과 함께 권위는커녕 자칫 품위도 상실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어머니. 그 아린 가슴에도 습관은 추억을 버리지 못하시는.


소도시에서 방학을 맞은 딸이 어머닐 뵈러 올라온 날이다. 실패작품과 예술작품 다음으로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 낳으시고 얻은 셋째다.

어머니 좋아하시는 맛있는 데 가서 점심이나 하시지요.

점심은 무슨, 맨 날 먹는 것이 밥 아니냐.

그래도 어머니.......

누가 운전이나 하면 어디 물가에나 다녀왔음 싶구나.


물가.

그렇다. 물가에도 가지 않고 여름을 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어머니다. 젊은 시절, 어린 아이들 살필 사람 많으니 봄가을 몇 차례씩 설악산으로 제주도로 관광 일 세대를 자랑하시던 가락이 여전하신 것. 해외여행 붐이 터지자 관광 목적지는 넓어갔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꼭 이민 가서 살겠더라!” 뉴질랜드의 경관에 감탄하신 것이 칠순 무렵이시니, 정신적인 에너지는 차치하고 건강 또한 그만하면 되신다. 그런데 팔순을 넘기신 지금, 이 근년에는 사정이 다르시다.


특히 올여름은 실패작품 큰 딸네도 고장이 나 있다. 모처럼 막둥이 생일을 핑계 삼아 모두들 며칠 쉬자는 ―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며칠 사는 것처럼 살자는 ― 땅 끝 콘도 예약도 틀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며칠 전 다녀온 예술작품 둘째네 전원생활의 품은 양에 차지 않으신 것이다.


썬 크림도 안 바르는 여자가 어디 있다더냐!

어머니는 둘째네 도자기골을 가실 때마다 썬 크림을 사들고 가시지만 매번 퇴짜다.


그렇게 예쁜 딸을 낳아서 그렇게 예쁘게 길러서 ― 이 예술작품도 이화인이다 ― 시집보내 놓으니, 이제 와 시골생활이라니. 시커먼 고무신에 그보다 더 시커멓게 탄 발등을 하고, 뭣이 좋아서 저 아줌마들하고 종일 살거나. 다른 자식들에게 푸념이시다.

그 아주머니들 단체로 난생 처음 제주도 여행도 데려 갔대요. 제 신랑 말이 “몽강리 여자주민 탐라국원정대” 대장노릇 했다나요?

참 할 일도 없구나.


어머니는 “제주도”라는 지점에서 특히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어느 자식 하나 어머니모시고제주도 다녀올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핑계라면, 자식들 누구도 어머니는 젊어서 충분히 제주도를 가셨다는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터다.


어쨌거나 시커먼 얼굴로 흙 속에서 살아가는 예쁜 딸이 일본식 미인 기준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로서는 통탄할 일이다. 어머니는 항상 “살빛 그을린다고” 한여름에도 얇은 긴팔만을 고집하셨다. 그렇지만 이제 팔순도 넘기시지 않았나! 그것은 딸들의 착각이다. 지금도 차라리 덥고 말지 반팔을 못 입으신다. 지난 번 집에 잠깐 오실 때 과일가게에 들려 수박짐 뒤따라 몇 발 걸으시며 땀을 흘리셨기에, 더운데 좀 짧은 팔 입고 다니시라했더니 답은 의외였다. “팔꿈치가 다 늙어서야.......” 어머니도 참. 누가 어머니 팔꿈치 보고 다닐까 봐서요? 제 나이도 밖에 나가면 아무도 안 쳐다보는걸요.


그때도 어머니는 마음이 상하셨을까? 가까운 냇가에라도 드라이브를 하려던 그날, 어머니는 “지나치게 꼼꼼하게” 화장을 하시더란다. 파운데이션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 그 앞인지 뒤인지 또 썬 크림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 드라이브 다녀와서 해 안에 다시 소도시로 내려가야 하는 딸의 입장에선 바쁘기도 하고, 해서 튀어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그냥 대충대충 하세요, 누가 본다고요!” 어머니는 막 바르려던 립스틱을 홱 던져버리시더란다. 며칠 전 큰애가 했던 말이 생각나셨을까?


저녁 늦게 멀리 전화로 후일담을 나누던 두 딸은 웃고 말았다. “우리도 나이 들면 더 열심히 단속을 하게 될지 알겠어? 또 깔끔한 것이 백번이나 낫지 뭐.” 허나 웃음은 곧 썰렁함으로 바뀌었다. 화려함의 끝에 서있는 어머니의 삶이 걱정이었다. 그렇게 파운데이션을 꼼꼼하게 펴 바르고도 외출할 곳이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 세상은 바뀌어 전체가 업그레이드다. 그냥 멈춰선 자리매김에 혼돈스러워 추억 속에서나 자신감을 붙들고 계시는 어머니가 안타깝기만 하다.


아카시아 향기 ― 어머니는 라일락 향이라고 하시지만 ― 그 아련한 어머니의 체취가 특정 화장품을 평생 고집한 덕택인 것을, 그녀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어쩌다 아이들이 용돈 모아 선물한 이상한 크림일랑 뚜껑도 열지 않으신 결과인 것을. 그런데 그녀는 모든 브랜드를 무시하고 먼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로션을 집어 든다. 나중에 제 아이들이 선물할 모든 화장품을 쓰겠다는 시위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머니에게 화장품을 선물하고 싶어 하거나 예쁘게 낳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딸이 없다. 딸의 귀감이 되어야할 의무가 면제된 삶은 한편 자유스러웠다. 하지만 딸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은 삶에는 비판의 시금석이 빠졌을까 겁도 난다. 그 딸의 어머니로서, 딸아이가 제 어머니와 공통분모를 찾아 분석하는 일이 이제서 궁금하지만 그건 꿈이다. 사람은 꿈속에서도 논리를 지닐 수 있을까? 가능한 딸의 분석에 평균점은 되는 어머니고 싶은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듯, 큰 부채로 손을 뻗는다. 바랜 창호지 부채살이 몰고 오는 시원한 바람에 상념은 더 높이 난다.(200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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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5. 10. 15. 23:30

 

교집합과 합집합  

 

<문학사상> 2005년 11월호


 

“수학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형은…….”

첫 강의시간에 운을 떼자마자 학생들의 얼굴이 굳어지려 한다.

봄이, 가을이 올 때마다 우리 선생들은 새 학생들과 만난다. 학생들과 세대간 거리가 더해갈수록 앞으로의 상호이해에 대한 불안감은 커지기만 한다. 강단에 선 사람은 소통을 터야할 의무를 갖지만, 시작은 항상 이렇게 어렵다. 첫 시간의 단골메뉴가 하필 수학에서 차용된 것들이라 더욱 낭패다.

수학은 성년이 된 이들에게는 학창 시절 골치만 아픈 존재였다고 기억되곤 한다. 졸업 후 바로 실 인생에 뛰어든 경우도 그렇지만, 인문계열에 진학을 해 보아도 수학은 쓰임새가 없다.

아예 인문계열에 수학을, 자연계열에는 국어를 면제하고, 영어만을 공통입시과목으로 택하는 대학도 있다. 대한민국은 가히 영어-정보화 대학들로 넘쳐있다. 그에 걸맞게 동영상으로 맞이해야할 젊은이들에게 분필로 그리는 삼각형이라니. 그것도 밑변에 해당되는 선분 하나만 달랑 그려놓고 잔소리에 들어간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이 밑변을 그리는 시기에 있습니다…….”

밑변을 최대한 넓히는데 힘쓰라는 당부를 위해, 카프카의 빈둥거리기 예찬까지 들먹인다.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참 안 되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 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아 확고한 성취동기로 무장하고 앉은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찬물을 끼얹어야 할까. 산학연계 학습과정을 개발하라는 사회적 독촉에도 어긋나고……. 해서 그것이 요즈음엔 점점 벤다이어그램 쪽으로 기운다. 교집합과 합집합을 인간관계에 비유해 설명하기 위해서다.

교집합은 쉬운 말로 공통의 원소를 가지는 집합이다. {김, 이, 박, 최, 정}과 {최, 정, 강, 조, 윤}이라는 두 집단이 있을 때, 교집합은 {최, 정} 두 사람으로 좁혀진다. 그러나 합집합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으로 여덟 사람이 된다. 여기에 성씨 대신 나의 특성과 타인의 특성을 대입하면, 교집합은 공통점을, 합집합은 두 사람의 합을 드러낸다. 합집합의 크기는 교집합과 반비례하므로, 큰 합집합을 위해서는 교집합이 작아야 한다. 물론 가장 큰 합집합을 위해서는 교집합이 없어야겠지만, 그것은 무의미하다.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교집합은 필수적이니까. 장황한 설명보다도 동그랗게 원 두 개로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면 모두에게 순간 확연해진다. 땅 따먹기라 해도 합집합을 늘리기 위해선 교집합을 줄여야 함이.

수 개념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출발을 결정한다. 그 중요하다는 영어를 배울 때의 어려움 중 하나도 단수 복수 구별이었다. 물질은 셀 수 없기 때문에 많아도 단수다. 하나 둘, 세어지는 사물은 둘 이상이면 복수다. 거기에 또 집합적 단수. 얼마나 힘든 개념이었던가. 개와 고양이는 합쳐서 말하면 ‘동물들’이고 복수로 ‘데이 아’인데, 여러 ‘사람들’인 가족은 복수가 아니라 집합적 단수라 했다. 우린 참 형제자매가 많은 가족이었으니 더 혼란스러웠을까.

그래 우리가 영어나 독일어로 말하면서 복수 쓰기를 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말에서 ‘우리’와 ‘우리들’을 굳이 구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심지어 내 고향에서는 “나는 매운 것을 무척 좋아해서”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운 것을 원칸 좋아해서”라고 하는 일이 허다하다. “우리는 도통 요새 영화는 범벅이요”라고 하면, “나는 요즈음의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무남독녀인 우리 어머니도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라 하신다. 서울 중심의 사람들이 쓴다는 표준어에서도 ‘나의’ 아버지 대신 ‘우리’ 아버지다. 심지어 ‘우리(!) 집사람’임에랴.

왜 ‘나’ 대신 ‘우리’를 즐겨 사용할까? 언어에서 연원하는 문학을 전업으로 사노라니, 진작 언어 일반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소홀히 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소설가 ‘ㅂ’이 한껏 조롱한 늙은 교수들에 속하게 되었다. “명성이라는 더러운 스타킹을 뒤집어쓴 부패한 관료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물론 그 명성도 없이. 그러면 차라리 학생들도 그 소설책에서처럼 모두 “독학자”가 되겠다고 캠퍼스를 버리는 상상을 한다.

첫 강의를 마친 저녁에 낯선 이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실명대신 별명으로도 스팸메일을 걸러내는 전산시스템에 통과된 것이다.

‘1학년에겐 점수를 잘 안 주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알고 계시느냐. 또 첫인상으로 보아 자기주장이 강하신 교수님 같은데, 하고 싶은 말 있어도 못하게 되면 어떡할지, 이것들이 괜한 걱정임을 밝혀주셨음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빠른 반응에 대한 기쁨 한편으로 숨이 막혀 왔다. 그러나 숨 막힘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인상을 여태 못 벗어났단 말인가?

실은 지루한 강의 사이에 우스갯소리를 그리워하는 학생들을 내 나름대로 이해한다. 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학생들은 결석할 자유가 있어서 좋겠소!” 정도다. 일단 학생들은 웃는다, 출결석에 까다롭지 않은 교수를 만나서 다행일까 하는 기대로.

말을 이어가자면, 자유시장경제에서 살고 자유결혼도 해봤지만 그리 자유로울 것이 없는 것이 삶인데, 한 학기 한두 번 결석조차 못할까 보냐! 그쯤에 이르면 웃음을 거둔다. 거 봐요, 이 사람은 우스갯소리 해보아야 썰렁해지니 아예 기대하지 마시오!

결석할 자유, 졸업하지 않을 자유! 이론상으로 인간에겐 자신의 진리를 고안해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자유는 우리를 미결정의 상태로 놓아둔다. 자유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자유는 변화를 갈구하는 프로메테우스적 본성이다. 모든 것을 알고자 언제나 다시 새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충동이다. 자연으로, 곧 너의 본성 안으로 돌아가라! 너에겐 너의 진리를 고안해낼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보편화하고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관철시키려 하지 않는 한, 이 자유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다치지 않아도 될 아주 작은 자유를 꿈꾸는 나는, 그러니까 소인배였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인간을, 인류를 사랑하고 그래서 선의를 행동하려는 역동적인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들을 사회에 적용시켜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삶에도 영향 주고 싶어 한다. 사회적인 장치가 인간의 본성에 합당하게 조직되지 못했다는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과감히 새로운 원리를 들고, 특히 소외된 계층의 구원이라는 입장에서 소유의 평등한 분배를 향해 사회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이론적으로는 정치가나 사회운동가나 참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차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합일에 대한 소망은 참담한 결과를 부르기도 한다. 사회가 공감으로 채워져 있는 공동체로 변화하는 루소의 꿈을 멋대로 끌어들이면 로베스피에르의 ‘덕에 의한 테러리즘’으로 왜곡되기도 했으니.

그런가 하면 소유의 분배 이전에 아예 소유를 초월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산업사회의 소비주의를 탄식하며 소유가 아닌 존재를 지향하는 삶을 꿈꾼다. 인간에게 소유욕으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주어서 본래적 존재로 되돌려 놓을 사명을 지닌 듯하다.

본래적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여러 단수의 복수들인 인간에게라면 이 본래적 존재 또한 무수한 변형으로 파악불능에 이른다. 인간을 집합적 단수로 볼 때라야 그들의 사명이 실현 가능해 보인다. 위대한 진리들로 인간을 치유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여러 이론들은 매번 교집합의 확대를 꿈꾼다.

혼란스러운 단수와 복수. ‘나’와 ‘우리’의 조화는 뫼비우스의 띠를 맴돈다. 그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정작 분열적 환상에 시달린 사람들은 자기 안에 서로 다른 집합들을 가진 경우다.

나 역시 뭔가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남의 글들을 공부할 때, 자판 위를 날아다니는 손가락들이 먹다 남은 먹이를 파헤치는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으로 변하는 환상에 떨 때가 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나머지 손가락 하나씩을 위한 나의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글 공부와 글쓰기 ― 두 성분은 필연적인 분리를 지향한다. 궁극적 확장을 위해서 파괴되기 직전까지의 분리를 향하여. 미쳐버린 렌츠와 횔덜린에 이르지 않을 만큼만. 자신과 타인 사이, 자신과 사회 사이, 아니 제 자아들 사이에서 한 점 교집합이 없이 터져버린 이 영혼들을 새삼 보듬고 싶어진다.

교집합을 동경하면서 합집합의 확장을 꿈꾸는 모순이 먹안개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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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11. 15. 21:34

 

라인


                                                                『그대 안의 풍경』2004 (이화에세이)        

 

 

아직도 내겐 아파트 입구 편지함을 둘러보는 버릇이 남아있다. 그러나 건져오는 것은 고지서나 광고성 안내장이기가 쉽다. 하긴 편지가 기이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주고받는 명함에도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로만 표기된 것이 흔하다. 세상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추월한 지 오래다.


이메일의 편리함은 말해 무엇 하리. 우선 글을 쓰다가 지우거나 구겨버리곤 하던 편지지와 달리, 매번 글자를 고쳐놓는 일이 쉽다. 마음이 변하면 강도도 조절하고 뉘앙스 다른 어휘를 고르면 된다. 상대가 읽었을까 마음 조릴 필요도 없는 것이, “읽음 확인 메일”을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로, 빠르고 정확한 모든 장점 위에, 가장 중요한 배달사고가 없다. 간직하고 싶다면 보관함에, 그것도 안심이 안 된다면, <내문서>에 옮겨서 다시 <A 플라피>로 옮겨놓으면 거의 영구하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엽서 하나 손수 써 보내는 일도 드물다. 하물며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드물다. 손으로 줄은 친 듯한 편지지에 쓴 편지 하나와 그보다 앞서 그냥 종이에 세로로 쓴 편지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나는 기념사진 한 장과 예스런 학자의 고결함이 베인, 하나는 인간미가 뚝뚝 묻어나는 선배의 글이었다. 두 분의 편지글에 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틀렸다. 실은 두 분께 전화로 답을 해야 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화의 편리성을 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전화가 어렵다.


“안녕하셔요, 저 아무갭니다. 선생님, 사진까지 일부러 보내주시고. 그런데 지난 번 뵈었을 때…….”


그러면 저쪽에서 말씀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 먼 데를 일부러 올라와서 고마워요. 거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잘 내려갔는지 걱정되었고, 그리고 부군도 잘 계시는지…….”


그러면 또 언제 무슨 말로 대답을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팥으로 메주를 쑵니다…… 라고 했더라도, 아 그래! 하고 믿어주셨던 은사님을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몇 번이나 뵈었던가. 겨우 산수(傘壽)연에 다녀온 것을 칭찬하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이고, 대학생활 전체가 테트리스 조각처럼 한 순간에 내려와 쌓이는 바람에 꼭 드려야 할 말을 놓치고 만다.


선배님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초록빛 바다색 아니면 비취색 하늘거리는 가운데 단아한 얼굴모습에 압도당하던 느낌을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혹시 모를 내 작은 잘못에, 음색만으로는 조금 노여워하시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주시려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순간 어떤 반응도 멈춰 버리는 것이 순발력 없는 내 본바닥이다.


전화보다는 이메일을, 이메일보다는 편지를 선호하는 내 마음 바닥에는 서툰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내가 어느 결에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 때의 내 자신이 문제학생 사례연구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인데, 중 2때 나는 어떤 선생님께 집중적으로 불려가곤 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결석이 좀 잦은 것을 제외하고는,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공납금도 아무 문제없던 내가 왜 문제학생이었을까? 편모, 편부도 아닌, 계모, 의부도 아닌, 정상적인 대가족의 맏이가 무슨 문제를 가졌다고 비쳤을까?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지배성, 도덕성, 사회성 등 무슨 인성들을 수치로 조사하면서, 모든 성질에서 25~75% 안에 들어가기를 중용의 인간이라고 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회성 불량으로, 뭔가 15% 미만임을 추궁 당했던 기억이 늦게 서야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사회성 문제아였구나!


그러니까 우선 부모님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달한 어머니를 이해하기엔 어렸고, 나는 소설 속의 전통적 어머니상을 그렸다. 어머니에겐 모든 어머니들의 착각처럼 자식들은 최고가 될 소질이 보였을 것이고, 피아노와 미술은 기본으로, 남자애들은 웅변술까지 과외를 시켰으니, 그때 원조 치맛바람은 우리를 수소풍선처럼 띄워 올렸다. 아마 중학교의 자유는 어머니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 금지된 장난을 골라서, 부러 내리막길을 달렸던 시절이다. 실습지 토끼장의 토끼를 풀밭에 놓아주긴 쉬웠지만, 오디를 따먹으려면 날쌘 친구가 나섰다. 선생님들 눈밖에 난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기는 쉬었다. 토끼들이 토끼장에서 사라지면 범인(?)들은 토끼를 다 몰아넣기 전까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렸다. 허리까지 자란 풀밭에서 털썩 누워버리면 하늘은 풀밭과 맞닿게 내려앉고, 우리는 하늘 속에 누었다. 주머니를 함께 털어서 싸구려 꽈배기를 사먹었다. 그 순간에는 네 것 내 것 없는 완전한 공동체가 실현되었다. 불량꽈배기의 밀가루와 기름은 양분인 것이 틀림없으니, 나는 자꾸 쓰러지는 약골로 자랐지만 키가 클 대로 컸다. 가끔은 상표도 없는 아이스케이크도, 어머니가 양잿물이라고 했던 삼각 비닐주머니 속의 색소와 사카린으로 만든 물도 먹었다. 어머니의 금기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없이 금기를 내놓으셨다. 금기에 대항하느라고, 책가위를 누구보다 가장 예쁘고 깔끔하게 싸주신, 연필 다섯 자루를 저녁마다 깎아서 키대로 나란히 필통에 넣어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책과 필통은 사랑스러웠지만, 학교에는 어머니를 대신할 여선생님들이 많았다. 요구와 간섭은 어머니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담을 쌓았고, 사회성이 전현 없는 문제아라고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니 그건 변명이다. 지금도 함께 생활하는 직장동아리에 80가까운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연구생활을 하는데, 그중 얼굴과 이름을 다 알 수 있는 경우는 반이 될까 말까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데, 간섭 때문에 사람을 기피한다는 변명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것 - 그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공부를 해도 해도 그것은 어렵고,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그것은 어렵다고. 마주쳐서는 말이 안 떨어지면 목례라도 무슨 몸짓이라도 하는데,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은 전화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에다 대고, 처음 무슨 단어로 말문을 열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고.


그래서 편지가 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메일이건 종이편지이건. 그 중에서도 쉽게 PC에 저장되어 무생물 같아지는 이메일보다는, 여간 간직하지 않고서는 곧 사라지는 종이편지가 부담이 없어 좋다. 문제는 여전히 덜떨어진 사회성이다. 더구나 이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아본 후에는, 아마 누구도 쉽게 편지지를 펼치지 못하리라. 아니 어떤 단어로도 그 시작을 찾지 못하리라. 나는 그저 저물어가는 오프라인 시대의 추억에 잠긴다.

 

 

튼튼한 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튼튼한 정신이 좋습니다.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선

당신의 젊은 정신이 좋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정신의 튼튼함이 당신의 육체를 병들게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몸 생각해서 정신을 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웃는 부드러운 입매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엄격한 입매가 좋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굳은 입매가 싫다고,

당신을 멀리한다면

나는 참 기뻐할 겁니다.

그만큼 당신은 제 것이 될 테니까요.


                                                                       200x년 1월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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