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2. 12. 19. 10:25

 

 

 

  만일 여러분이 기자가 된다면 누구를 인터뷰하고 싶나요? 인터뷰할 대상을 정한 후 질문 목록을 작성해보는 것이 오늘의 숙제입니다. 왜 그 사람을 대상으로 정했는지 그 이유도 함께 적어서 보내세요, 이메일로!

 

  사실 이메일 숙제는 편한 작업은 아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외국인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말하기’는 물론 ‘쓰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때문이다. 일일이 고쳐줘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다. 무심코 쓰던 문장이었다가도 학생들의 표현에서는 갑자기 자신이 흔들려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는다. 그 버릇은 간단한 글을 쓸 때도 여전해서 이젠 마음 놓고 글 한줄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도 그럴 것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라고 열심히 외웠던 ‘뿌리 깊은’ 기억과 아무 상관없이 이제와 표준어는 ‘나라말’이라니 말이다.

 

  그동안 표준어는 ‘만날’인데 입에서는 맨날 맨날이라고 움찔거리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것 또한 표준어란다. 이런 조변석개를 두고 반갑다고 해야 할지, 요새 아이들 말로 ‘멘붕’이다. 국적이 불명한 멘탈붕괴의 약자로, 말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란다. 어떤 상황이나 말에 의해 평정심을 잃고 ‘정신이 나갔다’, ‘자포자기’ 또는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식의 뜻이란다. 누리꾼들의 장난이다.

 

  - 어땠어? 쌔끈?

  - 말도 마. 폭탄이었어! 얼큰이었다고.

  소개팅에 나가서 섹시하고 멋있는 - ‘쌔끈’ - 상대를 만났냐는 질문에, 소개받은 사람이 외모나 성격 등이 마음에 안들 때 쓰는 ‘폭탄’이란 답을 보낸다. ‘얼굴이 큰 사람’이었다고!

 

  은어를 피하면 돌아오는 것은 ‘은따’ - 은근한 따돌림이다. ‘리하이’라는 예법을 몰라도 당근 은따. 대화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인사는 그냥 ‘하이’면 부족하다. ‘re-’를 붙여야 예의(?)란다.

 

  음절 줄이기는 귀여운 부류에 속한다. 게임은 ‘겜’, 서울은 ‘설’, 애인은 ‘앤’, 어서 오세요는 ‘어솨요’로 줄인다. ‘아뒤’를 멋진 프랑스식 인사말인줄 알고 대꾸했다가는 혼난다, 곧 ‘강추’다. 그것은 강력 추천일 때도 있으나 강력 추방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아뒤’는 누리꾼들에게는 아이디의 준말이다.

 

  제일 따라가기 어려운 말들은 모음 비틀기다. ‘다덜, 모냐, 알쥐, 안뇽, 안냥하세엽, 화났나여? 넵’은 ‘다들, 뭐냐, 알지, 안녕, 안녕하세요, 화났나요? 네’의 비틀기다. 비트는 데 시간이 더 걸려도 비튼다. 왜? 모른다.

 

  ‘절친’에게서 문자가 날아온다.

  - 열공중? 반반무, 반반무마니 시켜노코 ㄱㄷ!

  - ‘베프, 방가방가. 냉무 아니쥐?’

 

  베프는 물론 베스트 프렌드의 준말이다. 영어도 막 줄인다. 한국어가 재미가 쏠쏠해 보인다. 그러나 신세대 누리꾼들이 아니고서는 불행하다.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야? ‘후라이드 치킨 반 마리, 양념 치킨 반 마리, 무 많이’ 시켜놓고 기다릴게! - 이것을 알아듣는 ‘사오정’이 몇이나 있을까. 실세(?)에서 물러난 것은 기정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가상세계에서는 아예 출입금지다. 어디에 살꼬?

 

  본론을 잊고 있었다. 이메일을 열어 숙제를 점검해야 한다.

이들이 인터뷰하고 싶은 대상이 누구일까? 에임 하이! 그렇게 권장 받으며 자란 대학생들임이 드러난다. 중국 학생이 버락 오바마를, 안젤리나 졸리를 인터뷰하고 싶단다. 셀레브리티에겐 이미 국경은 없다.

 

  독특한 것은 중국의 성전환 무용가가 여러 학생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진성 - 중국식 발음이 그러하지만 조선족이니 김성이라 불러도 되겠다. 1968년 조선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가족의 뜻과는 달리 인민해방군에 합류하여 무용과 군사훈련을 받고 청소년 무용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곧 현대무용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이어서 로마에서는 무용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세계적 무용수가 26세에 고국으로 돌아가 28세가 되던 1996년에 ‘성확정’ 수술을 받았단다. 그러니까 본래 여성적이었던 그가 그녀가 되었다, 용감하게도. 세상은 그녀를 더욱 반겼고, 2004년의 <상해 탱고>는 유럽 순회공연에서 “우리의 현대무용이 어디로 발전할지 망설일 때 동방에서 온 무용예술가가 우리에게 방향을 잡아주었다.”라는 찬사를 들었을 정도. 이미 아들을 입양했던 그녀는 38세가 되던 2005년에 독일인 남성과 결혼하여 현재 3명의 입양아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산단다. 무용의 열정은 더해서, 지난해 2월에도 이탈리아의 로마공원극장에서 <제일 가까운 것과 제일 먼 것>을 공연하여 극찬을 받았다고.

 

  내가 왜 이리 긴 이력을 말하는가. 그냥 놀라워서다. 말로는 다 못할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이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일까. 말로서 표현한 것은 진실인가. 말은 진실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혹은.

 

  학생들이 뽑은 인터뷰 상대가 점점 놀랍다. 터키에서 온 여학생은 신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단다. “왜 세상은 힘들고, 왜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않고, 세계를(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주(시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물론 서툰 표현이다.

 

  갑자기 전혀 다른 유창한 말이 떠오른다.

  정말 결혼을 잘 한 것 같아요! - 30년 넘은 결혼 생활 후에 남편의 면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말. 다른 남편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나는 믿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줄 모른다, 라는 생각에 압도되며.

 

  발이 시린 여름밤이 깊어간다.

  발이 시리면 맘도, 맘이 시리면 말도 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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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빛깔』, 이화동창문인회 2012, 142-145.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2. 7. 22:56

 

마지막 책

 

 

  오래 살았다, 라고 말해야 옳다. 그러면서도 지난 세월의 무게가 두께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늘 지나가기 때문일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일이 무엇일까. 과거를 반추하는 일을 시작해보려 해도 화면은 현재에 멈추어 있다. 너무 아득해서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한 기억이라해도 너무 멀리 와서는 희미하다. 내 머리는 아마 현재밖에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녹슬었는지도 모른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라고 누가 그랬던가.

  헤르만 헤세가 중년의 대작들인 『데미안』과 『싯다르타』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쓰기에 앞서 쓴, 어찌 보면 가벼운 단편 제목이 그것이다.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내었을 때가 40을 바라보는 나이. 이미 청년이 아니었다. 부친의 사망, 갓 세 살 난 막내아들의 뇌수막염, 아내와의 파경이 드러나던 무렵이다. 아내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 자신도 청소년기에 정신요양원 신세를 진 경험이 있었다. 기숙신학교를 탈출해 짝사랑의 절망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결과였다. 일반 김나지움으로 옮겨서도 학교는 망쳤다. 그의 청춘은 일상에서의 탈출로 점철된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자전적인 『황야의 이리』에서도 주인공의 우울과 분열의 원인은 청소년의 ‘의지의 분쇄’를 기본으로 하는 교육 탓이다. 작품마다 아팠던 청춘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청춘에 대한 그리움은 원초적 인간본능의 하나일까.

 

  현대문명은, 물론 교육을 포함하여, 자연과 유리될수록 성공적이라 간주되고 있다. 개인은 거대 문명의 주변인으로 밀려나서 소외는 점정에 이르렀다. 어찌 제정신으로 살랴. 멘붕의 시대 - 우울과 정신적 불안 속에서 청춘은 아름답다고 외치면서도 헤세는 놀랍게도 노년에 이르는 삶을 누렸다. 생애 후반에 더욱 빛나는 책들을 썼고, 충분히 인식되고.

 

  왼손에 책을 펼쳐든 채로 고꾸라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섬뜩하다. 그래서 잊지 못하는 것 목록에 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책 가운데에서도 하필 『고백록』이라니.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오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할 수 없나이다.’ - 이 구절 때문에? 평생 달아나고자 했던 신앙으로? 아이러니다.

 

  책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들. 우연히 마지막 밤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할애했을까. 헤세에게 가장 잊지 못할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고 가정한다면, 나에게는 누구일까, 어떤 책이 될까, 마지막으로 읽게 될 것이. 혹은 쓰게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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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그가 있다』, 한국여성문학인회, 2012, 책만드는집, 196-197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1. 19. 00:04

 

 

등돌림의 문학

 

 

문학이란 무엇일까 - 늘 있어 왔고 여전히 의심쩍은 이 질문과 더불어 살아가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어른들이 말리는 말씀에 속으로 토를 달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른이 되어 정말 옛 어른들 말씀대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

 

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축제가 있어, 세상 각처에서 모여들어 함께 하는 콩그레스가 9월 우리나라 경주에서 열린다. 이름 하여 ‘제78차 국제 PEN 경주대회’ - 세계 최대 문학축제인 이번 대회는 전 세계 102개국 회원국에서 해외 문인들만 해도 30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이다.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 터키의 오르한 파묵 등 혁혁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도 참가하여 대회의 위상을 높인다. 더러는 펜은 칼보다 강함을 역설해 낸 사람들이다. 강함에는 부와 명예가 따르고. 이 대회는 이들에게 경주라는 역사적 도시를 배경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기회도 될 것이다.

 

경주대회 참가를 앞두고, 개인적으로는 소잉카를 직접 만나는 일에 조금 설렌다. 다는 몰라도 우리는 비아프라의 내전을 기억한다. 한때 누군가가 영양실조에 걸리다시피 마르면 비아프라 사람 같다고들 놀렸다. 그 비아프라 독립전쟁을 막고 싶었던 젊은이, 그 일로 오히려 투옥되고 감시받고……. 그는 늘 급진적인 글들로 나이지리아 정부와 빈번히 충돌하고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자의적인 사실상 망명 중에 궐석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독재자가 사망하고서야 귀국이 가능했던 소잉카.

 

그의 경우 흥미로운 것은 종교적 혼재와 상이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서 서양문학에 정통한 그가 아프리카의 전통과 가치를 어떻게 조화 속에서 지켜내고자 했는가 하는 과정과 답에 있다. 세네갈의 시인 대통령 셍고르로 대표되는 네그리튀드 - 공통의 흑인 전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한 네그리튀드 운동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만이 프랑스의 정치적이며 지능적인 패권과 지배에 반대하는 싸움에 있어 최고의 도구라고 믿었던 문화운동이었다. 그러나 소잉카는 네그리튀드에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흑인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이자 무분별한 찬미일 뿐으로, 근대화의 잠재적 혜택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한민족은 한민족이어야 하되, 가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민족주의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잉카가 “인간의 첫째 조건은 문화이고, 메아리 없는 예술은 독백일 뿐”이라고 말할 때, 문화는 대결이 아니라 그저 인간다움의 본태다. 문화를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을 모독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문화 예술의 본질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 타협보다는 저항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고.

 

예술은 곧 자유다. - 이런 생각은 70년대 국제 PEN 회장이었던 하인리히 뵐의 주장에서도 분명했다. 예술은 자유로움 이전으로, 자유 그 자체이다. “예술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유이니까.” 그러므로 문학을 예술로서 이해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곧 표현의 자유이다. 어떤 가치를 표현하는가?

 

그러나 세상의 가치들은 부유하는 구름 같기 마련이다. 세상이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늘 변화무쌍해서 종잡을 수 없다.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 오늘의 가치들 속에 분명 가난은 퇴물이다. 가난한 아빠는 아빠도 아니기에 『부자 아빠 되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부자에게도 인생은 공평하게 덧없다. 아무리 뜨거운 해라도 곧 있어 지평선 너머로 지듯이, 아무리 빛나는 왕후장상의 인생이라도 저물기 마련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히포크라테스의 이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유한한 인간은 의식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해 내는 예술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한다. 빛과 모양과 소리와 글 등으로 인생을 재창조하는 일에 심취한다. 문학은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 말과 글, 곧 언어로서 나타내는 예술이다. 문학을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이 예술은 분명 언어 안에서 시작되고 언어 안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언어는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음성적 기호의 체계를 넘어선다.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기호체계인 언어를 조직하여 만든 문학은 ‘기호의 기호’라는 특성을 지닌다. 메타언어일 수밖에 없는 이 추상적인 속성은 문학의 이념적ㆍ실천적 기능을 증대시켜 준다. 인류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넘어서 문학이라는 상징의 언어로서 공간과 시대를 넘어 교감하며, 총체적인 문화유산을 집적하는 것이다.

 

예술은 학문과 달리 세계를 탐구하고 수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주관적 감수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 특징이다. 이성이, 계산적 머리가 각광받는 이 시대가 살만한가, 우리는 고개를 젓게 된다. 감수성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줄 마지막 보루를 염원할 일이다. 초인간적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적 부족함이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최강 인공지능의 로봇은 나노 수준의 오차로도 작동을 멈춰 버리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집을 향해 걸을 수 있는 내가 인간이다. 인간인 나는 해야 할 일을 못하기도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을 안 할 줄도 안다.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우수한 결심 아닌가.

 

지능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문학 - 문학에서는 픽션일수록 진실하며 진실할수록 픽션이라는 모순이 가능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인간을 현실적 존재에서 초월적 존재로 승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문학의 변용된 세계가 현실의 파괴를 전제로 하지 않고 비판과 개선을 지향하는 한에서 그것은 유희가 아닌 자유정신이다. 반어와 풍자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이다.

 

더구나 문학텍스트는 혼자말로서 존재하지 않고 ‘누구에겐가 말하려는’ 의지를 갖기 때문에, 형상화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인하며 심리적 공감을 소망한다. 그러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가치로의 이입을 꿈꾼다. 유의미한 문학은 독자의 인생에 역시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독자는 예술미의 형태로서의 문학 감상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유추를 지닌 간접적이고 상상 가능한 경험을 얻음으로써 문학의 기능을 완성한다. 이 간접경험이 인생에 대한 성숙된 평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한 청소년의 문학 독서가 그의 인식의 틀을 형성하며 지적인 발달을 돕고, 개인의 정신세계는 사회의 정신세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시대사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인류의 정신사에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혁명적 전향에 문학의 힘이 절대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이상한 힘이 인류의 역사에 작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밥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밥만으로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만찬장에서 음식을 토해내는 도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계속 먹는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누군가 그렇게 밥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생을 산다고 해서 그에게 조화의 감정까지 지속적이지는 않다. 어떤 행복한 인간도, 어떤 조건에 있는 인간도, 완벽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E. 블로흐가 말했던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특질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을 느끼며, 여기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육체적 유형의 결핍보다는 정신적-영적 유형의 결핍에 예민한 것이 인간이다. 상대적 박탈감이 그 뚜렷한 증거이다. 이 결핍은 문학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힘으로 줄거리를 전개시키는 힘이다. 이 힘은 문학을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나 모사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잠재적 비판으로 존재하게 한다. 현실에 개입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매체로서, 나아가서는 현실에서 이탈하는 경험의 매체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문학은 현실에 등을 돌리는 경우에조차 여전히 현실과의 관계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등돌림은 강한 반발이며 부정으로서, 가장 강력한 현실비판 중의 하나로 작용할 수 있다. R. 무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문학은 “다른 상황”에 대한 꿈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존재이유도 존재할 공간도 없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렇게 썼다, 친구에게.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언감생심,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쓰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렷다. 누구에게나 허용된 시간도 유한하다.

 

 

등돌림의 문학 - 오늘 그 일을 시작하고프다, 글을 쓰는 것이 숙명이라면. 빛과 그림자가 어울림을 넘어 대결하면 그림자를 향할 일. ‘앞으로 나란히!’ 하고 외치는 경쟁문화가 살인적이라면 뒤돌아서서 살인에 동참하지 않을 일. 또는 강물의 물줄기가 인위적으로 왜곡되면 아무리 더워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을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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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프리즘』 2012 Vol.2,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52-55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6. 13. 16:35

 

무거운 책들


  뭘 많이 들고 다니시네요, 무겁게!

  머리가 가벼우면 책이라도 무겁게 들고 다녀야지요.

 

  남보다 느린 걸음으로 늘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오갈 때면 주고받는 인사말이었다. 그런 나날, 겨울이었다. 12월 중순 들어서야 시험지 보퉁이를 끌어안고 연구동 층계를 내려오는 늦은 오후, 해지는 저녁. 나는 그날 퇴근길에, 바로 그 층계참에서부터 퇴직을 결심했다. 아무 쓸모없다는 문학수업을 해놓고서 또 아무 쓸모없을 등급으로 나누는 작업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고, 아니, 그만 하겠다고.

 

  해방은 이렇게 아주 급격한 염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염증이란 순간에 도를 넘는다. 펌프로 물을 길어 물탱크에 채우는 것을 바라보던 아이. 그렇게 저 만치 아래에서 천천히 조바심 나게 높아지던 물은 찰랑찰랑 가장자리에 차오르는가 하면 어느 순간 밖으로 넘칠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탱크를 넘치게 할 생각이 없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슬아슬하게 물이 넘치는 순간, 그 순간을 기다리던 심정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물이 입 속에까지 차올라와 익사당하기 전에 성큼 일어나 물 밖으로 나와 버렸다. 설마 하던 학과 식구들은 평상시 내 분별없는 고집을 떠올렸는지 곧 퇴직을 기정사실화했다. 한 겨울 숨 막히게 애쓴 제자들 중심의 간행위원회에선 내게 두 권의 책을 선물했다. 이름 하여 『창작과 사실. 양심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고찰 1983-2009』라는 논문집과 『반대말 ․ 비슷한말』이란 소설집이다. 여러 의미로 양장도 사양하고 흑백을 고집했더니, 책들은 내용 어슷하게 외형도 왜소하다. 표지만큼은 미술전공의 둘째아들이 많은 시간 공들여 만들어준 예술품이다.

 

  나는 3월 한 달을 그 간행위에 참여한 78인에게 각각 책 두 권에 사인을 해서 보내는 일로 살았다. 이름마다 - 더러 동료도 섞이었지만 - 생각해 보았다, 이 젊은이들을 밥벌이 못하는 무능력자로 키워낼 뿐이라는 오명을 듣는데 지친 우리는 인문학을 송두리째 버려야한단 말인가. 인류의 원천적인 무엇, 시공간을 초월한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하리라는 믿음을. 인간을 효용성의 수치로 파악하려는 시대의 어리석음에 그리 쉽게 굴복해버리기에는 청춘이란, 아니, 생이란 너무 아까운 것임을.

 

  책을 나누는 일은 대강 마무리되었지만 새로 서가 정리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한다. 다 버리고 온 것 같았는데 널부러진 짐짝인 채로 불어난 서가를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무소유의 가치가 다시 우리를 일깨운 즈음에 더욱. 누군가 신문에 ‘목침용으로도 쓸모 있을 것’이라 평을 한 1296g짜리 번역서나 그 두 배에 육박하는 양으로 써낸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 더욱. 이렇게 별 쓸모도 없이 무거운 책들은 기껏 지나온 세월의 나를 나타내주는 이정표에 불과하리라. 나는 이 시간을 살고 있고, 내일을 살고 싶다. 아직 꿈이 꿈틀대는 내일을. 제대로 교수도 소설가도 아닌 박쥐인생을 이제는 털고 동굴 밖으로 나가고 싶다. 아무튼 박쥐에게도 날개는 있으니까. 마음은 벌써 알 수 없는 자유로움과 환희와도 같은 떨림을 느낀다.

 

- 『아름다운 인연』,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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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학기가 끝났다. 시험지 채점에 성적 처리를 앞두고 책 정리를 시작했다. 성적 시즌이 되면 다른 일을 더 한다. 그만큼 성적 내는 일이 싫다. 내가 이 한국어 수업도 또 그만둔다면 그건 순전히 성적처리 때문이다.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하는 작은 책자에 수필을 썼던 기억이 났다.

수필이 본령이 아니고, 드러나는 '나' 때문에 저어되는 장르이다. 그러나 쓴 글은 쓴 글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6. 13. 16:28

 


채 알기도 전에 떠난 선배소설가

  채 알기도 전에, 첫눈에 소설가 같았던 소설가가 떠났다. 나눈 말을, 한 말과 들은 말 조각들을 다 합쳐도 5분도 채 되지 않은 채로.

 

  그를 처음 보게 된 자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감하게 단 한 사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소설가들을 보는 자리였다. 내가 찾아본 한 분도 이메일이라는 통신 수단으로 두어 번 연락이 있었을 뿐인, 그러나 매우 고마운 분이었다. 소설책을 내어 펜 사인회를 하는, (초짜가 생각하기론) 정말 대단한 사건의 뒤풀이 자리. 난 그때 소설가라는 신분의 사람들과는 대면한 적이 없었던 진짜 새내기였다. 그것도 늦깎이.

 

  나는 소설 같은 황당한 세계보다는 교양 있어 보이는 학문의 세계를 탐했다. 어린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선 어린 나이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한다. 물론 반전과 돌발을 시행하는 천재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세대의 여자들에게 반전이나 돌발, 더구나 천재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다 참다 참다 못해 글도 되도 않은 글을 들고 소설가들의 세계를 기웃거렸을 때.

 

  나는 지금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난여름, 아니 벌써 몇 해 전 여름이었나, 아무튼 어떤 여름,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여름 날.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조금 어색한 채로 그와 둘이서 사진을 찍었다. 옛 성벽을 바탕으로. 50㎝쯤 서로 떨어져서 50㎝쯤 엉거주춤, 붉은 셔츠에 어두운 등산조끼는 그의 얼굴을 더 검게 했나보다. 하필 여학생처럼 하얀 반소매의 버튼다운 와이셔츠를 입은 내 꼴은 얼굴과는 부조화로 어려보이기만 한다. 어린, 그러니까 어리석은.

 

  어리석게도, 왜 부끄러운 줄 몰랐을까? 왜 둘이서 사진을 찍으라 했을까? 그건 아마 소설가들의 행사에 잘 참석하지 못하는 내가 언젠가 영민하고 내게 참 친절한 후배 소설가에게 “그를 만나면 안부를 전해달라고!” 깜짝 놀랄 부탁을 한 일 때문이었나 싶다. 그 사이 소문이라도? 설마. 소문날 건더기가 있어야 말이지. “만나보고 싶은 사람 없어요?”라고 짓궂게 묻는 친절한 말에 그만 덥석.

 

  부끄러울 일은 없다. 평생 다해서 3, 4분쯤 말을 나누고 무엇이 부끄러울까.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부끄럽다. 처음 그렇게 여럿이서 이름도 성도 모르게 이렇게 저렇게 끼어서 만났던 그날 이후, 뜻밖에 상, 하권짜리 정말 무게있는 그의 소설작품이 내게 우송되었다. 신분을 뛰어 넘는, 격동기의 사랑이랄 수도 없는 사랑. 어설픈 한 주인공의 내면의 이야기나 겨우 끄적거리기 시작한 내게 무등산보다 더 크게 짓눌러오던 그 작품의 무게. 기억하건대 작품보다는 훨씬 가벼운 몸무게. 길고 마르고 어두운 얼굴. 옆에 있으면 소설 쓰는 비법이라도 전달될 것 같았던……. 그런 말은 내색해볼 기회도 숫기도 없었던 몇 해. 그 비겁함이 부끄럽다.

 

  비겁한 나는 더는 누구에게도 그의 안부를 묻지 않았고, 굳이 말하자면 나는 평생 성취원칙의 노예가 되어 일중독에 들려 있었다. 난 일을 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니라고는 말 못한다. 누군가에게 나를, 내 미미한 능력을 증거해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일에 파묻혀 잘 지낸다는 역설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온전하다.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이성보다는 양심을 키우며 살아가는 지성인이고자 하는 자기암시에 들린. 인문학이 학문의 중심이고, 모든 분야에 영향한다는 믿음으로. 오랫동안 뭔가를 쌓아올려야 했지만, 세계수준은커녕 국내수준에도 못 미쳤다. 타인의 눈으로 그 나름대로 모든 것을 이룬 어떤 물리학자가 “더 이상 목표를 믿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피 속에 개미가 있는 것처럼 계속 일만 하는 것은 모종의 비극이다.”라고 외쳤던 말이 떠오른다. 개미처럼, 아니면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일만하면서, 나는 그가 깊은 병으로 앓고 있었던 줄도 모른 채로, 그를 채 알기도 전에 잃었다. 앓고 있음을 알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병문안을 가서 가장 존경하는 소설가라고 말했을까? 그것이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그에게 눈곱만치의 위안이 되었을까? 어림없다. 설사 존경을 더해 흠모하는 소설가 상이라고 했더라도 그에게 티끌만치의 위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엇갈림이 운명의 실체다.

  나는 이렇게 그의 뒤통수도 볼 수 없는 지금 책상에 앉아서 비겁하게도 뒷북을 치고 있다.

 

- 『아름다운 인연』,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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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2. 28. 16:12


파리하고 세상사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인 그대 - 마그마로!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내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어느 가을날 문자를 받았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나는 왠지 늦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어느 늦가을,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아니면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

<문학에스프리> 2012 봄 창간호,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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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1. 12. 31. 16:47


고아가 되었다.
올 봄.
나의 어머니는 당신 나이 이른 다섯에 고아가 되시더니만, 우리더러는 더 일찍 고아가 되라시며 떠나셨다. 막둥이는 1963년생, 겨우 마흔 아홉이다.

피를 나누어주거나 물려준 후손 27명, 법으로 후손이 된 14명을 더하면 41명의 후손을 남기셨다. 그 중에서 참석자는 29명. 290명이 훨씬 넘었을 조문객을 생각하면 불참 수가 부끄럽다. 어머니 앞선 불효녀는 어쩔 수 없다. 머나먼 외국에 아기들이랑 사는 경우도 어쩌랴. 그래도 불참이 많다. 누구도 예상 못할, 설마 하던 불참도 있었다.

*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월은 저 뒤편에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슬하를 떠난 셈이다. 대학시절은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서울 살이. 젊디젊은 ‘엄마’는 서울나들이를 즐기셨다. 우리들 -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함께 이화캠퍼스를 누볐다. ‘누볐다’는 물론 엄마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대 앞과 명동을 누빈 것은 엄마였다.

어머니는 이대 앞과 명동만이 아니라, 설악산과 제주도를, 전국을, 나아가서 가히 세계를 누비셨다. 어머니가 빠진 저녁밥상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던 세월. 불평도 별로 없는 집안에서 나 혼자 불평분자였다.

왜 엄마는 빨리 안 들어오셔요?
우리 학교에 가면 빨리 나갔다가, 우리 돌아오기 전에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

외할머니가 할머니였다. 외할머니가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지어주거나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등록금을 함께 걱정해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집에는 다른 여러 엄마가 있었다. 물론 엄마도 엄마 노릇을 하긴 했다. 소질이 없어도 피아노다 미술공부다 시켜서 소질을 ‘계발’해내는 극성 엄마였고, 또 엄마의 유일한 자랑인 ‘밤 채’ 솜씨 덕분에 늘 예쁜 김장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엄마의 부재를 못 참았다. 엄마를 엄마답지 않다고 볶아댔다.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도 엄마를 닮지 않고 불평만 해대니까, 집안에선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고까지 놀렸다. 연속극을 보면 더러 첫아이는 누가 낳아놓고 죽던가 도망가지 않던가. 대체로 나는 비판적인, 회의적인 인간이었다. 속으로 진단하기를, 일찍이 엄마에게 불만이 많아서 나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참 어려운 것이었다. 참 어려운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 의사의 손에 거꾸로 매달려 자두 빛보다 더 붉어진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었을 때, 나는 기절을 했다. 산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는 포대기가 옆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생명체가 밖으로 나온 것이란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다. 입은 뭔가를 향해 움질거린다. 내 아기, 내 젖을 탐하고 나와의 관계를 탐하는 아기. 어렵게 어렵게 겁을 잔뜩 먹고 만져본 손가락. 작은 손가락들이 무엇이라고 종알거린다. 이것은 대체 어떤 암호인가.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 - 그것을 남성 화가가 어떻게 알았을까? 짐작이나 했을까? 새삼스레 위대했다. 아담의 손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그림의 발상이 이 진자리가 아니고 어디였겠는가?

그렇게 나는 기절과 함께 새로이 태어났다. 그 어려운 엄마가 되었다. 불평을 하는 자식이 아니라 불평을 받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들은 어떤 불평을 할까, 별안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나는 계속 괜찮은 딸이었고, 엄마는 나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엄마는 부족했다. 물론 불평의 말이 단번에 줄었다. 불평의 마음은 한 치 변함없이 여전했다. 반면 나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엄마이리라고 착각했고, 애들은 정말 괜찮았다. 제 엄마에게 불평을 해대지 않았다. 적어도 대놓고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유전자가 더 좋아져서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죽을힘을 다하고 조금 얻어도 행복해 했다. 나는 내가 인내심이 많아진 줄 알았다.

*

어머니가 떠나셨다. 조문객들이 무슨 소용. 41명의 후손 중에서 29명만 참석한 장례식장. 어쩌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불참 속에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면 다 똑같이 아프다고 하셨다. 당연하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네 언니는 참 쌀쌀해야. 동생들이 그 말을 전해주어도 당연하다 느꼈다. 나는 내 불평소리가 줄었더라도 어머니가 내가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랐다. 사실이니까. 인생관이 다른 것을 어쩌라고.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는 단 한 톨의 인내심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딸년의 부당한 불평을 감내하시던 어머니. 겉으로만 화려했던 어머니가 떠나셨다.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했을꼬.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고 없다. 머리에 꼽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단 하나 지지대가 무너져버린 지금.
처음으로 처연히 외로운 순간을 맞는다.

.............................................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첫 클릭클릭』, 이대동창문인회, 2011, 8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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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1. 3. 1. 22:00
                                                                        
                                                                           중독

 

건강한 사람들은 늘 환한 꿈을 꾼다. 꿈은 꾸는 사람은 열정에 사로잡히고, 꿈을 실현하려는 욕망에 밤낮을 잊는다. 나태는 물론 잠조차 죄악일 것만 같아서 제대로 편안한 잠에 들지도 못한다. 더러는 생의 무의미 때문에, 생각을 하는 대신 일만을 택하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말로 일중독이라고 걱정했을 때조차 나는 그것을 다만 하나의 특징, 그것도 부지런하고 일에 정직한 특성인 줄로 알았다. 중독은 나쁜 것에 중독일 때가 문제라고 믿었다. 자신의 육신을 조금 홀대하면서 그저 조금이라도 더 일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랴. 그렇게 미련스럽게 된 데는 선친의 말씀에도 원인이 있었다. 무슨 일에 몸을 사리는 것을 저열한 짓이라고 하시던 말씀 중에, 편하게 살고서 보람을 찾는 것은 도둑심보라셨다. 그러다보니 선택의 갈림길에서는 늘 덜 편한 길이 마음에 더 편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면 무엇이든 탈이다.

이태 전 여름의 끝자락, 방학이 끝나는 주말이었다. 힘든 외출 끝에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온통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넘실거리는 이상한 현상에 들렸다. 가스가 새는 소리도 수돗물이 흐르는 소리도 아닌데 세상천지가 알 수 없는 소리로 그득했다. 샤워를 하고 진정을 해봐도 소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이상하게도 걸려오는 전화마다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만큼 아득했다. 그날따라 전화도 많았다. 월요일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전화기 고치러가야 할 일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다른 일의 시작이었다. 월요일 새벽에는 전화소리가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으므로 전화통 문제는 간단히 끝난 것 같았다. 아니, 통한 것은 잠결에 왼손으로 받은 전화였고, 일상 오른손으로 든 전화는 거의 불통이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토요일 오후부터 고장이 난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내 오른쪽 귀였다.

그렇게 해서 대학병원을 찾게 되었다. 안과나 이비인후과 등은 1차 진료병원을 거치지 않고서도 대학병원에서 진료가 가능하다는 상식(?)덕택이었다. 당장 개학이고 화요일 오전부터 강의가 있는 입장이라 치료가 급했다. 수십 년을 강의하면서도 강의 전날이면 늘 안절부절못하는 나로서는 진료대기 중에도 첫 시간 매력 있는 강의를 위해서는 준비내용을 다시 점검해야 할 일만 걱정하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러셨나요?”

“엊그제요, 갑자기 귀에서 파도소리가…… 전화소리도 통 못 알아듣고.”

“저, 이 병은 응급상황입니다.”

“병이요? 응급상황이라뇨?”

이해할 수 없기는 이렇게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을 두고 병이라는 말도 그랬지만, 응급상황이라니! 젊은 의사의 친절한 설명은 이어졌다. “이 상태에서 별 일 아니겠지 하고서 두어 주 지난 다음에야 병원을 찾으면 복구가 거의 불가능한 병입니다. 돌발성난청이라고, 병이 오는 것도 돌발적이지만 치료도 그만큼 즉각 대처해야 합니다. 바로 입원해서 12일간 스케줄 따라 스테로이드 주사요법을 쓰고, 그렇게 해도 1/3 정도만 완치 가능성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일 첫 시간 강의를 어떻게 하고! 그래서 입원치료 대신 제2의 방법을 택했다. 열흘간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귓속에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 방식. 그런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막을 통해서? 그런 전문적인 것은 잘 몰랐지만, 귓속에서 나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성화도 거셌다. 울며 겨자 먹기로 화요일 아침엔 학교를 포기하고 병원으로 짐을 쌌다.

그렇게 개강 첫 2주간을 희생하고 입원치료를 감행했지만 쉽지 않은 병원생활이었다. 우선 몸은 멀쩡한데 환자로 적응하기는 중증환자이면서 포기해야할 때보다 더 나빴다. 한밤중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들을 실제인지 이명인지 환청인지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내가 이러다가 미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불안에, 소리의 진원지를 알기 위해서 몽유병환자처럼 병실 안팎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밤 근무 간호사선생님이라도 마주쳐 숨으면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밤새 분한 마음에 떨었다. 내가 왜? 마치 선한 의지로 살면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무구한 옛날사람들처럼 천지신명을 한탄했다. 부지중에 지었을 죄를 생각해내며 손가락으로 세어보기도…….

돌발성난청이라는 부분청력상실은 나에게 큰 위기가 될 수 있었지만, 전남대학교병원은 내 청력을 70, 80% 회복시켜냈다. 병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결국 나는 평생의 일을 놓게 되었다. 그 학기말시험지 보퉁이들을 안고 어둑어둑해진 연구실계단을 내려오면서 퇴직을 결심한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강박중독을 벗으면 훨씬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사람이 나이 들면서 현명해진다는 말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일상에서 내팽개쳐진 병중의 성찰이 그에 한발 다가가는 것이리라. 굳이 병이 나서 입원을 하지 않더라도 템플스테이나 어디 한적한 곳으로 한 일주일 정도의 혼자만의 휴식여행 같은, 생의 중독을 깨닫는 계기가 필요하다. 건강할 때 사람들은 환한 꿈에 중독되어 그늘을 망각한다. 하지만 빛은 늘 그늘을 드리우고, 그늘도 때로는 그윽하다.


* <푸른 무등>, 2011년 봄호 (통권 165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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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0. 12. 31. 16:46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남자는 첫사랑이지만 여자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 그렇게 남자들이 말해놓고서 여자들의 망각의 묘기를 비웃곤 합니다. 망각은 양심을 접는 것과 같은 의미일 때가 많아서, 여자들은 양심이 덜한 족속으로 폄하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바닷물 한 움큼만큼,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라 해도 파도가 밀려오다 빠져 나가듯이 어느 때는 코앞에 다가와 눈을 떠도 감아도 그 자리에 있다가는, 또 언젠가는 슬며시 핏속으로 숨어드는 것이겠지요. 게다가 내가 잊을 수 없는 것들은 당신에겐 아무렇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도 걸러내는 기억들은 제 나름일 테니 말입니다. 고운 차 거르는 체 마냥 촘촘하며 일정한 그물망이라 해도 우리의 기억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누가 들으면 웃을까. 늘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는 것은 이를테면 아무렇지도 않은 산자락 성긴 돌 틈으로 삐져나온 연초록 풀들 같은 하찮은 것들입니다. 또는 여름이 시작되고 2층 창밖으로 짙푸른 나뭇잎들이 무성해지는 이맘때면, 바로 이맘때 만났던 새 새끼들이 되살아납니다. 정확하게 큰 아이가 약혼식을 위해 잠시 집에 머물었다가 간 다음날이었습니다. 무심코 아이들 방 창 너머를 바라보다가 발견한 것인데, 날렵한 동작으로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이상한 일이었죠. 어느 결에 둥지를 튼 놈들은 놀랍게도 알을 낳았던 것입니다. 아파트 나뭇가지에. 스무날? 한 달 정도? 유난히 맑은 여름날을 뒤 베란다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그놈들 사는 양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새보다는 큰 것이 그래도 참새 모양이라 참새목 되새과 혹은 멧새과 쯤에 드는 새이리라 추측했답니다. 그렇게 흔한 새이지만 아무도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뒤적여보았던 백과사전에서 일러준 대로라면 3~5개의 알을 낳는다더니만 정말 딱 4개의 알을 낳았더이다. 그 다음은 누군가 정성들여 관찰해서 TV에 올려주는 그런 과정들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신기한 것은 그것을 덜 화려한 색깔로지만 프레임이 없는 실 공간으로 바라다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침조석(!)으로 뒤 베란다 나가기를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하는 재미라니, 방안 퉁소 서생으로 살던 터에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사람들은 앉은 자리 뭉개지도록 눌러 앉아있기만 하던 사람이 왼 종일 촐랑대던 일로 즐거워했고, 더러는 놀렸답니다. 하여 그 여름은 더위라거나 짜증 같은 아름답지 않은 단어는 우리 집에서 사라졌더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늘 아름다울 수는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정말 상쾌하리만치 서늘한 날 아침 밥상. 밥상이라야 가볍게 풀 썰어놓고 빵 뜯어먹고 그랬을까요? 아님 그날따라 젓가락을 들었던 감촉이 살아납니다. 밖에서 자지러질 듯 하는 새 소리 사이로 알 수 없는 요란한 소리들이 날아와서 우리 모두는 기겁을 했습니다. 후다닥 튀어 일어나서 뒤 베란다로 내달은 나는 정말 기절할 것 같은 광경에 시간이 정지했다고 느꼈습니다. 저쪽 새둥지에서 두 나무 째를 건너온 바로 코앞이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그 네 마리 새끼들이 첫 비행을 하면서 그것이 곧 둥지를 떠나는 날인 줄 그때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누가 예전에 야생의 새를 키워보기나 했어야 말이지요. 그런데 한 마리씩 한 가지씩 날아오르려는 새끼 새들에게 저승사자가 나타난 것 때문에 어미아비 새들이 단말마의 울음을 울었던 것입니다. 주차된 차량들 사이를, 더러는 벌써 움직이는 차바퀴도 겁내지 않고 기식하던 주인 없는 고양이가 곧 영양식을 발견한 것이지요. 새끼들의 추락을 기다리는, 아니 소리로서 겁을 주어 추락을 유도하려는 고양이와 어미아비 새의 대결장이었습니다.

아아 안 된다, 아가 힘 내거라, 어서.

이 몹쓸 도둑고양이, 악마! 사라지지 않음 내가 쪼아 줄 테다.

네롱~ 하면서 달콤한 먹이를 향해 불을 뿜는 고양이도 질 기세는 아니었지요. 글로 쓰자니 여러 줄이지만 사건은 불과 몇 초였을까요? 어쩌자고 나는 젓가락을 든 채로 아파트 계단을 내달렸습니다. 아무 신이나 끌고 화단에 내려서선 고양이를 내쫒았지요. 평소라면 기분이나 나빠할 뿐 눈도 주지 않으려했던 그 고양이놈을. 상황이 너무도 아슬아슬했지만, 얕은 가지로 출렁이던 새끼와 뛰어 오르려던 고양이의 서커스가 원안대로 끝나고 상황이 종료되자, 난 그만 털썩 주저 않았지요. 흙에 앉아서 올려다보니까, 마지막 한 놈이 맨 윗가지를 정말로 날아오르더니 저만치 떨어진 큰 나뭇가지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없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젓가락 한 짝만 들고 계단을 기어올라 들어온 나를 식구들은 더욱 놀려댔습니다. 내가 뛰어나간 뒤로는 내 소리까지 가세해서 정말 한판 굿이었다는군요. 새 소리 고양이 소리야 비록 생사의 투쟁이었다고 하지만 자연의 소리였겠죠. 그러면 내 목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소프라노로 분류되는 목소리로 정말 무진 악을 다 썼더랍니다. 교양? 평소에 목소리 크다는 이야길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다 새침이었던 게지요. 급하니까 정신이 없더랍니다. 알 수 없는 나라 말로 새 새끼들에게 주문을 거는가, 했더랍니다.

그런데 이 새란 놈들은 진정 그들이 태어난 자리를 기억할까요? 그해 여름 어느 날엔 뜬금없이 앞 베란다의 가녀린 창살에 한 놈이 턱 앉아 있었다는 일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 놈이 그놈일 거라고 수선을 떨며 좋아했답니다. 그런데 저만치 담장 쪽에 앉은 놈들도 꼭 우리 집 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기색이었단 말입니다. 더구나 이듬해에도 때로는 해를 걸러서도 심심치 않게 그 예쁘지도 않은 소리로 찌이찌이 울어대는 새들이 우리 집 주변을 날아와 앉곤 한답니다. 창살 안쪽의 꽃잎을 한참 동안이나 쪼고 있을 때도 있답니다. 그러니 그놈들을 잊을 새가 있겠냐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을 새록새록 불러내주지 않더라도 물론 잊지 못할 일들이 늘 있지요. “언어란 꿀이 빠져버린 벌집처럼 거죽뿐인 줄을 알면서도 그 안에 어느 한 순간의 제 마음이라도 담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렵니다.” (오자 포함, 어느 작품의 인용입니다) 같은 쪽지 글을, 아니면 지구 속 마그마로 녹아들고 싶다는 마성적인 언어를. 아니,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요 진실은 언어 이상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던 순간들을. 순간들은 부서지기도 녹기도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순간들을 잠시 버릴 뿐입니다.

......................................

「온 바닷물을 다 켜야 맛인가요」, 『사랑에 세든 사람』, 이대동창문인회, 2010, 200-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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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0. 12. 1. 23:30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입니다.

작가가, 소설가가 작품을 쓰는 일은 일종의 도마뱀 꼬리자르기라고, 한 덜떨어진 소설가가 내게 말했다.

뭡니까?

절체절명의 순간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그 피투성이 기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입니다. 몸통을 살려낸 도마뱀은 꼬리만을 물고 허탈해하는 독사에 대해 승리감을 가질 것이고. 꼬리를 자른 선택에 관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도마뱀에게라면 위기 탈출이 절대적 선택이겠지만.

겠지만? 그 이상입니다. 천적을 만났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건 분명 비장의 무기이고, 예컨대 살모사가 아직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틈을 타 도마뱀은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되었지요. 이제 거기에 그 경험을 잘 다듬어서.

다듬어요? 죽다가 살아온 경험을 쓰면 문학작품이라는 말씀이오?

일단 꼬리 잘린 도마뱀은 특별한 경험을 했고, 그런 처절한 경험이 없는 다른 도마뱀들에 비해. 더구나 잘라진 꼬리는 나중에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까요.

그건 좀 다른 문젭니다, 제 생각엔.

다른?

도마뱀을 노리는 적이 주변에 많을수록 꼬리를 재빨리 자르고 도망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그럼 되었지 뭐 또. 게다가 그것을 가공하여.

그래도 꼬리를 자르는 건 도마뱀에게 큰 부담입니다. 꼬리가 없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그 험한 경험을 작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해도 일단 잡아먹힐 위험이 커집니다. 새 꼬리를 만드는 동안에는 몸통 자체도 자라지 못합니다. 동작도 굼떠지고,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도 떨어집니다. 어차피 소설가의 지위야 꼬리 잘린 도마뱀 수준이지만요. 더구나 이제 그 새 꼬리라는 놈은 더 이상 자를 수가 없답니다.

뭐요? 도마뱀 박사가 따로 없으시군요.

게다가 새로 돋아나는 꼬리는 척추가 아닌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다시는 자르지 못한답니다. 소설 한 권 떴다가도 평생 타작만 내놓는 소설가와 다름없지요. 도마뱀으로서도 평생 꼬리 잘라먹은 놈이라는 꼬리표를 함께 달고 사는 것이겠지요. 새 꼬리는 원래 것보다 색깔도 안 예쁘답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 하겠습니까? 소설작품은 취소하고라도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저는 꼬리 자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꼬리를 조금만 물려도 그게 독사라면 금방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잘라야겠지요, 싹둑.

아니 작가님, 뭐 싹둑 잘라낼 원망 같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따라서 해보는 소립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그 독으로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일부를, 이를테면 마음, 심장, 가슴 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을 잘라내고도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가공하여 작품화하는 강심장을 가질 수 있을지, 그건 꽤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니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입니다.

그냥 죽거나 그것을 쓰거나?

예, 실존과 방법의 갈림길입니다. 삶의 내용인가 글쓰기인가 하는 갈림길.

도마뱀과 갈림길이라. 우린 오늘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군요.

그와 내가 구동성으로 말했다. 그와 나는 늘 하나이면서 둘인, 둘이면서 하나인 도마뱀이다. 왜 쓰지도 안 쓰지도 못하는지 언제나 답을 모른다. (문학공간 2010.12월호 통권 253호 4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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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