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2. 12. 19. 10:24

파도소리

  어머니이, 아버지!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시는 모양이 이른 저녁준비 중이셨나 보다.

  어떻더냐? 그래, 김 서방은 어떻더냐고?

  그게요, 아직 잘 모르죠. 검사다 뭐다.

  웬 검사? 몸이 부실해서 링건가 맞는다며? 은실이 어쩌고 있을꼬!

  그냥, 입원한 김에. 암튼 염려 마세요, 별일 없겠죠.

 

  아버지는 그날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5년째, 아버지는 은퇴생활에도 집에서 느긋하게 쉬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일을 본격적으로 하시는 것도 아니다.

 

  아버진 어디 가셨나 봐요.

  늘 그러시지. 요사인 부쩍 정문리엘 가시는구나. 차로 가믄 사오십분이면 너끈할 걸 기어코 버스를 타고 가시니. 오산까지 올라갔다가 게서 또 내려가는 길을 왜 우기시는지. 뭔 볼 일은 그리 있으신지.

  아버진 정문리 좋아하시죠. 어머니가 밀양 박 씨인 것도 얼마나 자랑하시는데 그러세요.

  밀양 박은 다 열년가, 네 아부지도 참.

  열녀라서 그러나요, 일단 청주 한 씨와 밀양 박 씨 하면 뭔지 어울리는 건 사실이죠 뭐.

  밀양 박은 빼고, 한 박사나 들어가서 쉬려무나. 아니, 점심은 먹은 거야?

  예, 먹었지요. 시간이 언젠데요.

  그럼 어서 들어 가 쉬어. 네 아부지 오시려면 멀었다.

 

  어려서 ‘아빠 방’이라고 불렀던 건넌방은 언제 보아도 먼지 냄새 느낌이었다. 지금은 내 책상도 거기에 끼어 있다. 한국 떠난 4년 반, 돌아와서 보니 내 물건들이 건넌방 한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내가 프랑스로 떠난 뒤 은실이 결혼을 하게 되자 우리 자매들이 함께 쓰던 부엌 옆 상하방에 자연스레 신혼살림을 차렸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또 그 사이 더 큰 변화라면, 막내 옥실이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 바로 위가 우리가 서울 나가 살던 곳 고모이시고, 그 위 셋째 큰아버지가 일찍이 미국에 가서 정착하셨는데, 다 함께 회갑에 초청받아 갔다가 옥실이 거기 남은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설마 하면서 옥실을 남겨두고 오셨다 했다. 큰아버지가 너무도 간절히 원했고, 옥실도 스스럼없이 남겠다고 했더란다. 결국 버티어 냈고.

 

  아차, 그러니까 아버지는 한 해에 딸자식 셋을 다 어딘가로 떠나보내셨구나!

늦은 봄에는 내가 떠났고, 여름엔 옥실을 두고 오시고, 그리고 그 겨울 은실이 결혼을 했으니까. 은실이 결혼해서도 함께 지낸 것이 얼마나 위인이 되셨을까. 새삼스레 제부가 고맙다. 어서 퇴원을 해야 할 텐데.

 

  내 책상은 짐짝처럼 올려진 책들로 빼곡하다. 노트북을 올려놓으면 남는 공간도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질서정연한 아버지의 책장에 얹어둘 수도 없다. 오늘 따라 책장 맨 위, 먼지가 누렇게 깃든 족보로 눈이 간다.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마을에서 유래한 청주 한 씨 후손들은 양절공파에 속한다던가. 아버지는 은근히 정문리 충렬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신 편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상주목사 한 씨를 따라 자결로서 정절을 지킨 부인 밀양 박 씨를 기리는 충렬문이다.

 

  난 물론 요즈음엔 자주 집에 오지 않는 편이다. 아버지 보기가 어째도 늘 면목이 없다. 우리 셋 중 하나라도 아들이 되어드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다. 아버지는 실제로 첫째인 내게 기대를 걸으셨던 것 같다. 더구나 은실이 대학을 포기했고, 옥실인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니까. 초등에서 시작하여 중등으로 옮기시는 동안 힘드신 기억들을 떨치고, 딸애는 보다 확고하고 늠름한 학교에 남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한때는 아버지 은퇴 전에 내가 자리를 잡게 되리라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런 희망을 아예 접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책상 위에 덜렁 공책 한 권이 놓여있다. 읽다 둔 책처럼 종이가 끼워져 있다. 아버지가 책갈피로 쓰시는 종이들은 다양하다. 약간 두께가 느껴지는 종이들을 버리지 않고 적당히 오려두신다. 이를테면 광고지도 거기에 해당된다. 사용된 봉투들도 마찬가지다. 거기 노란 봉투를 잘라낸 종이가 끼워져 있는 공책. 나는 겨우 노트북을 올려놓았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 아버지의 공책 쪽으로 간다. 내 책상과의 경계 쪽에 놓여서 열어주기를 재촉하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나는 유혹에 굴하고 만다.

 

*

 

  파도소리는 그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은실이 대입에 실패하고 집에 처박힌 겨울을 뒤로하고, 3월엔 다시 기지개를 켜게 하려고 탐색 차 서울에 나갔던 차였다. 은실을 데리고 개학 전에 입시학원 등록도 하고, 아무튼 다시 서울로 나갈 수 있게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양재동 누님도 은실일 그렇게나 챙기셨다. 서초동까지만 가면 좋은 학원들이 엄청 많다고. 그날 은실인 어디서도 건성만 같아 보였다.

 

  갑자기 새로 완공되어가고 있다는 그 다리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은실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새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아무튼 잊을 건 잊고 털 것은 털도록. 과거는 과거의 그 자리에 두어야 쉽게 잊힌다 싶었고.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8분경.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 붕괴. 우리 아이들이 그보다 15분 쯤 늦게 8시를 막 지나서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10분 15분의 간격은 찰나에 비하면 영겁이지만, 영겁에 비하면 찰나다. 은실인 지각하더라도 언니와 재잘거리며 같이 가려고 늑장을 부린 통에 살아남았다. 꾸물대다가 지각을 자주 했다는 은실이 고맙고 아슬아슬하다. 은실이 지각하지 않게 언니인 네가 함께 서두르라고, 늘 큰애를 다그쳤던 일이 생각나서 바지를 적실 뻔 했다. 녀석은 결국 고등학교 시절 내내, 아니 그 다음에도 울렁증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아니, 고등학교를 미리 서울로 내보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금실인 아무 일 없이 대학엘 들어가지 않았나. 큰애 혼자 내보내느니, 아무리 누님 댁이라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누님도 이상하게 은실이랑 함께 보내라고 극성을 떠셨다. 하긴 뚱하다 싶은 큰애만 보내놓으면 혼자 사시는 누님이 아무 재미도 없으실 것 같기도 했었다. 후회가 무슨 소용, 은실이 고등학교 생활을 망친 건 아무래도 이 애비 탓이렷다.

 

  다시 찾아본 다리, 새 다리는 교하 공간이 넓어서인지 미완성인 그 자체로 광활한 한강수면에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물은 여전했다. 아니 여전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날의 피를 삼킨 물은 아닐 터. 무심한 강물.

 

  파도소리는 그 강물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날의 강물이 씻기고 씻기어 내려난 천 날의 시간들. 밤낮으로 우는 탄식 소리가 어디로 흘러들었겠는가. 이제는 먼 바다에 흩어져 먼지만큼도 핏방울을 지니지 못한 채 흩뿌려졌더라도. 핏빛 물소리는 지금도 거슬러 올라와 강가의 아비어미의 귓전을 때리리라. 그날이면 그곳을 찾아 목이 찢어지게 뿜어내는 통곡도 눈이 찢어지게 흘리는 눈물도 다시 강물에 섞이어 뒤따라갈까?

 

  등 뒤로 학원들의 안내장을 힘없이 쥐고 있는 은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딸이, 여기 내 곁에 서있는 내 딸의 모습이. 우리는 뒤돌아서 서둘렀다. 계획으로는 뭔가 맛있는 것이라도 사 먹일 양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쫒기는 듯 집으로 내달았다. 파도소리가 뒤따라왔다. 한강물이 파도쳐 넘실거릴 리가 없는데, 그것은 분명 파도소리였다. 파도소리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바람 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밤새, 그 이튿날도 파도소리가 멎질 않았다. 온 세상이 파도소리로 뒤덮였다. 소리를 막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돌발성난청입니다.

  동네 이비인후과의 나이든 의사의 말이었다.

  보통 한쪽 귀에 이런 일이 오는데, 돌발성난청입니다. 큰 병원에 가셔서, 입원치료를 시작하세요. 응급상황입니다.

  의사는 밀려든 다른 감기환자 치료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큰 병원에 가는 날엔 두 애들이 다 따라나섰다.

  큰 병원에서도 단 한 가지 검사, 그 흔해 빠진 청력검사 하나를 했을 뿐인데, 약간 애송이로 보이는 초진의사 말도 이 질병은 바로 이비인후과의 응급상황이란다, ‘물론 죽고 사는 일’과는 무관하지만. 이런 증상이 언제부터냐, 혹시 다른 병원에서 대강 치료받은 적이 없냐는 등을 두어 번씩 묻고 다짐받고서 그가 하는 말이 진지했다. 돌발성난청은 거의 대부분 노년과 관계없이 이유 없이 찾아들고, 결국 문제는 스트레스일 가능성이 높지만 심지어 1/100 쯤은 뇌종양의 가능성도 있고 또……. 이유야 어떻든 간에 치유되는 확률은 발병 일주일 이내에 시작했을 때에도 1/3 수준이라는 것. ‘난청’이란 듣기 좋은 말이고, ‘청력상실’ 그러니까 귀먹을 확률이 더 높은 질병이란다.

 

  질병이란 단어가 내 남은 귀를 의심케 했다. 내 의식을 흠집 냈다. 또 질병이라면서 치료해도 별 소용없을 수 있다는 말도 이상했다. 절대로 죽을병도 아니면서 치료확률이 절반도 안 되는 질병이라니 진짜 웃겼다.

치료방법은 입원해서 일정기간 강도 높은 스테로이드 주입식이 최선, 다음이 통원치료로서 일정 시간에 귓속에 직접 소량의 스테로이드를 주입하는 방식이란다.

  최선은 지금 입원 하시는 방식입니다!

 

  입원? 방학 잘 지내놓고서 신학년도 개학 첫날 입원하겠다는 말이 나올까? 안 된다, 못한다. 또 갑자기 2주일을 쉬게 되면 담임이며 수업은 어떻게 되는가? 요즈음은 고2도 이미 입시 체제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학기 초 2주 병가는 마음 무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귓속에 약물을 주입하고서 비뚤게 누웠다. 아마 약물이 잘 들어가도록 하는 조치 같았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 느낌이 문제였다.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애들은 입원치료가 마땅한 것이라고 종알거렸다. 은실이 더욱 졸라댔다.

 

  밤이 깊어갈 수록 치료받은 귓속에서 버걱대는 소리는 무서웠다. 파도소리를 넘어 날개달린 벌레가 파닥거리는 소리였다. 바퀴벌레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는가? 겁이 났다. 어색한 미봉책을 다 참고 입원을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입원하러 가는 환자라지만 멀쩡한 사지육신이라 어딘지 어색했다. 아내 보기도 그렇고. 아무튼 보호자가 필요 없는 환자였으니까.

 

  병실은 식구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남게 되자 오히려 호젓함으로 편안했다. 앞 침대의 환자나 병실에 들락거리는 인력들은 관계가 아니어서 편했을까? 방해받는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그보다는 오른 쪽 세상, 내 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상이 방해였다. 온갖 소리를 섞어서 몇 성부의 음악일는지.

 

  노트북 앞에 앉아 보았다. 학교랑 연결은 되어야지 싶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담임을 떠맡게 된 동료선생님에게도 인사라도 쓰고. 아니, 인터넷이 안 된다. 치료 장비들에 대한 보호라는 미명에 노트북을 쓸 수 없다니. 복도 한 켠 휴게실 구석에 동전 넣고 쓰는 컴퓨터에선 가능하단다. 각종 질병과 환자들로 뒤범벅된 병원에서 공동으로 컴퓨터를 쓰라고? 그래도 이메일 정도는 확인해야겠다 싶어서 컴퓨터 쪽을 기웃거렸더니 두 대 다 젊은이들의 차지였다. 온 세상은 붕붕거리고 머릿속은 혼란하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려 한 시간여를 들락날락하다가 드디어 한 쪽 컴퓨터에 않았지만 웬걸, OO학교를 치려는데 ‘교’자에서 ‘ㅛ’가 들어가지를 않았다. 어찌어찌 홈페이지엔 접속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로그인 이름자에서 ‘ㅗ’자가 먹지를 않았다. 시간은 6분, 7분이 지나는 데도 끄떡없다. 하릴없이 10분이 넘어가자 분통이 터졌다. 사방이 분통 나는 세상이다.

 

  밤이 늦었다 싶었는데 담당의가 간호사실로 불러낸다. 엠아르아이 결과 내 뇌 속은 깨끗하다고 했다. 살았다. 뇌와 혈관이 나이에 비해서 젊다면 젊은 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는 뇌졸중의 위험은 낮은 사람이다. 혈당이 올라도 혈압은 오르지 않고, 그러니 심근경색으로 죽을 확률도 낮다. 복장이 터져서 복막염 수술을 하게 된다면 몰라도.

 

  치료방식에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을 한다. 스테로이드요법이란, 처음 4일간을 하루 한 번 80mg씩 투여하다가 차츰 줄여나가는 방식이란다. 스테로이드? 그건 간혹 욕심내는 운동선수들의 치팅용 약물 아닌가?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이 끄덕이고 있다가 들어오는데 오른 쪽 세상의 소리는 더욱 자지러진다.

 

 

  진단서를 들여다본다. 그 사이 첫날의 패닉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벌써 며칠 째인가. 진단서가 꼭 필요해서 발급받은 것이다. 정식 병가서류에 첨부해 제출해야하는 서류다.

 

  우측돌발성감각신경성난청. 한국질병번호 H91.2 - 뭐? 91.2 메가헤르츠로 들리네.

  상기환자 상기병증으로 1997년 3월 4일부터 3월 14일까지 입원치료 요함.

  의사 아무개. 동그란 도장/싸인. 네모다란 큰 병원 직인.

 

  나는 그러니까 천천히 주로 왼쪽 귀로 찾아오는 노인성 난청이 아닌, 특수한 난청의 습격으로 입원치료를 요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스테로이드를 팍팍 근육주사로 집어넣는 것은 ‘기’를 올리는 방식이란다. 이명과 관련해서는 타마민이라는 약물을 하루 2회 한 앰플 씩 생리식염수에 혼합하여 혈관에 주사한다. 전에는 피검사나 혈관주사를 맞아야할 때 팔의 혈관이 잡히지 않아 무진 애를 썼는데, 요사인 조금 좋아졌나 보다. 팔에서도 곧잘, 또 여러 번 찌르다보면 손등에 바늘이 꼽힌다. 또 타마민을 주사하는 바늘은 아예 팔 어느 한곳에 심어놓는다. 3일 동안은 그대로 바꾸지 않기 때문에 팔을 뚫리는 고통은 훨씬 줄었다.

 

  물론 주사요법이 만능은 아니다. 약물마다 병발하는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 스테로이드만 해도 평소 혈당이 높은 환자에게서는 혈당이 급격히 높아지는 문제가 병발한단다. 그것을 인슐린주사로 컨트롤해야하기 때문에 입원이 불가피하단다. 또 1/100 확률이긴 하지만 엠아르아이 검사를 해야 했다고. 왜냐고? 뇌 속의 청신경 주변의 작은 종양이 이러한 돌발성난청을 유발하기도 하는 거란다. 무섭다.

 

  하기는 그 어디에 속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입술에 조금 묻힌 만큼만 손상을 입은 것이다. 조금 우습게 보이면 어떠랴. 행동거지가 너무 바보 같다면 정년을 앞당기면 그만이다.

이제 입원 후의 내 몸은 내가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나는 그저 낮에도 침대에 누운 채 과거의 파편들을 다른 사람 이야기를 읽듯이 되돌아보고 있다. 썩 괜찮은 일들도 많았다.

 

 

  수돗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 있는 것 같은 공동 수돗가였다. 수학여행 중이었다. 화장실은 남녀가 있었지만 세면실은 그렇게 수도꼭지가 앞뒤로 여남은 개 씩 달린 공동수돗가였다. 여중학교에서 남교사들은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그때는 한참 젊을 때였고 교장선생님부터 여자인 교정에서 늘 어색한 기를 못 펴던 때였다. 젊은 수학교사는 담임 우선순위에 들기 때문에 담임을 맡게 되고, 또 담임을 맡다보면 수학여행이 따른다. 그날도 그렇게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입에는 칫솔을 문 채 수돗가 빈자리를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선뜻 내주지는 않는다. 여학생들은 남선생님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줄줄이 세수를 하는 광경은 어찌 보면 너무 적나라했다. 목이며 발이며를 드러내놓고 문질러대는 장면은 자칫 외설스럽기까지 했다. 가능하면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저 끝 수돗가 여자의 동작에 시선이 빨려갔다. 귀를 씻고 있었다. 귀를, 한참 동안을 귀만 문지르고 있었다.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다시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귀를 만졌다. 귀로 손이 갔다고 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귀, 귀가 어때서 저리 빡빡 문지르나?

 

  귀가 어때서? 물론 귀도 코만큼은 아니라 해도 돌출부분이니 대충 씻다보면 손에 걸리고 그러면 씻긴다. 하지만 저리 공을 들여서?

 

  귀를 한정 없이 씻던 여자는 얼굴에 비누거품을 내어 박박 문지르기를 한참 하더니 이내 목으로 내려갔다. 가을이라지만 산간의 아침, 추운 공기에 노출되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얄따란 스웨터가 젖어드는지도 모르고 세수에 열중한 여자. 여자의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깨끗함 그 자체였다.

 

  상대적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세계는 더러웠단 말인가! 그랬다, 나는 귓바퀴를 잘 씻지 않고 아내와 함께 잠들었을 나날들이 부끄러워졌다. 그 수학여행 이래로 나는 정말 잘 씻기 시작했다. 귓바퀴만이 아니라 온 얼굴에서 후미진 곳을 찾았다. 팔다리로 나오면 팔꿈치 안쪽, 팔목, 손등, 손가락들 사이, 발가락들 사이, 발가락과 발바닥이 붙는 곳, 발뒤꿈치, 발바닥 움푹한 자리, 복숭아 뼈 아래, 몸속에도 움푹하거나 으슥한 곳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갑자기 온 몸을 후벼 씻는 내가 아내에겐 이상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피우고 들어온 남편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늘 씻어댄다는, 그런 속설? 아내는 의심을 키워 갔을까? 의심이 100%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욕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산간 수도꼭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교무실에서는 오른 쪽 비껴 옆으로만 보이는 그녀의 자리를 향하느라 고개가 삘 지경이었고, 운동장 조회시간이면 어떻게든 그녀가 서는 자리가 잘 보이는 곳으로 내 자리를 잡았다.

 

  그 동안에는 왜 한 번도 그녀가 눈에 띄지 않았을까? 미녀도 아닐뿐더러 젊지도 않았고, 여자냄새 없는 그냥 보통 사람 같은, 조금 깐깐해 보이는 것 이상으로는 별다른 특징 없는 아줌마교사. 그녀가 내 눈에 띄었을 리가 없다. 결국 평상시에 단 한 번도 따로는 쳐다보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은 그날 새벽 산간의 수도꼭지 아래에서 내 망막에 입력되고 말았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떨림과 불안과 환희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동 학년을 맡은 ‘우리’는 가끔 가까이 만날 기회가 생겼다. 교무실 내에서의 무심한 접촉 하나에도 전기가 일 줄을 누가 알랴. 무신경해보였던 그녀에게서 감춰진 섬세한 감각을 발견하고서는 얼마나 떨렸던가. 담임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예정이 발표된 그날부터 막혀오는 숨을 고르기가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이상한 행복을 수반했다. 방향이 달라서 택시도 한번 함께 탈 수 없었던 나날들. 무슨 일이었는지, 학기말 성찬이 끝나고 동료들이 하나 둘 술이 취해서 흩어진 어느 날 밤. 추운 겨울 밤. 어려서 한 방에 들 수 없었던 오누이마냥, 어디 한 데 참새구이 집으로 유인한 나를 따라나서 준 그녀. 내 평생 알고 있는 멋진 위인들 인용을 죄다 끌어내어 멋있어 보이고자 했던 처절한 짧은 시간. 그녀는 그렇게 함께 택시를 타고 오고간 시간만을 허락했다. 그녀의 집께 이르러 따라 내리려는 나를 말리며 잠시 내 손등에 얹어준 그녀의 손가락, 다섯 아닌 넷. 아니 짧아서 미처 못 닿은 새끼손가락 빼고 셋. 겨울이어서 차가왔을까? 오싹하리만치 얼어붙어서 꼼짝할 수 없었던 순간. 차가운 그 손가락을 마주잡지 못한 나. 그때부터 나는 내 오른 손 등을 철저히 씻어야할 몸에 넣을 것인지 아닌지 혼란 속에 살게 되었다. 나는 어느 새 오른 손을 덜 쓰는 양손잡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앙상한 손. 밖으로 뻗친 너무 짧은 새끼손가락. 완벽한 샤워. 비누칠이 아까운 오른 손 손등.

 

  그것은 참 길고도 오랜 어쩌면 영원한 이야기가 되었다. 생애에서 어떤 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 영원으로 변해있다고 깨닫게 되면서 나는 가끔씩 감정의 발작을 경험했다. 그해 겨울을 나면서 지독한 열감기에 시달리다 못해 봄방학에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녀가 타교로 전출되던 시기였다.

 

 

  소문은 멀리 빙빙 돌아서야 내게 이르렀다.

  수돗가 선생님이 다른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난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설악산 모퉁이에 이은 참새구이집 기억에 사로잡힌 내가 세상 물정과 담을 쌓고 멍하니 집과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는 진정한 진통의 시절로 들어가고 있었다. 교원이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지 못한, 대부분 타성에 젖었던 우리와 달리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첫 단추에 끼이지 못했고, 조금은 미안한 느낌과 죄스런 마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고칠 것이 기본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진단 부분에는 동감했지만, 그것이 노조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천지가 그러거늘,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도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그런 우리는 그 조그만 생활안정으로 마치 기득권 세력에 속한 양, 꼭 그런 붙박이형은 아니라 해도 세상을 뒤바꿀 꿈 따위를 꾸어본 적이 없었던 셈이었다. 좀 더 열심히 좀 더 양심적으로 잘 가르쳐 보자는 것. 입시위주 공부만이 아닌 무엇인가를 더 심어주어야 하리라는 막연한 생각.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자는 정도. 무엇 보다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한다면! 그런 변명으로 안이해져 버린 세월이었다.

 

  비겁했다. 그 동안 교육현장이 들끓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면 나는 비겁했다. 처음 전교조 결성 과정의 파장에 이어 이듬해 가을에는 조합원 교사들이 천 여 명씩 해직되었다. 그때도 가슴 아픈 한 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외면 한 것이 사실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몇 번씩 오고 가는 동안, 학교 한번 이동하고 거기에 적응하고 하다보면 생이라거나 교육이라거나 원래의 의미 같은 것에 골몰할 시간도 틈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듬해, 해직교사 거의 전원의 복직신청 뉴스와 물려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흘렸다, 나의 그녀인 것을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 새침데기 선생도 복귀했다는군요!

  누가, 그 새침데기 선생이 언제 해직되었더랬소?

  그걸 몰랐어요, 열성당원이었다던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그 꽁한 성격으로 어찌!

  성격하고 전교조하고 무슨 상관이요! 외려 꽁한 사람들이 거기 많으면 많았지.

  하기는.

  그러니까 삼년을 넘게 해직?

  그랬대요, 그게 공동운명체 아뇨!

  아니, 가정과에서 따로 무슨 참교육을 한다고!

  하기는.

  하기는 말고는 뭔 말이 없소? 아, 고로켄가 카스텔란가 그런 것 안 만들고 이밥에 쇠고깃국 맛있게 끓이는 법 가르치면 안 되겠소!

  이 양반들이, 빈정대기는. 하기는 여자가 시집가믄 밥 맛 좋게 짓는 것이 제일로 중하제요.

  아 거기선 어디 여자더러만 밥을 지으라 하는가요! 남녀평등하고 역할구분도 안하려 드니까 문제지.

  밥이 꼭 역할구분과 관련은 안 되지요, 전 혼자서 밥 잘 짓습니다.

  노총각 박샘이사 욕심에서 그리된 것뿐이고.

  욕심요?

  각시 벌어 먹이자믄 아까워서 혼자 살고.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 일로 이혼까지 갔다니까 그렇죠.

  누가? 아까 그 새침선생말여요?

  암튼, 그것도 시작하면 신앙이 될 거요.

  아무리 그것이 이혼사유가 될까요?

  것도 어찌 보면 이데올로기인데.

  그래요, 살을 섞어도 머리를 섞지 못하면 비극인거라…….

  맘 다른 사람하고 이혼 하지 않고 살면 뭐 하겠소. 더 끔찍하지.

  거 무섭네요.

  그만들 둡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가지고.

 

  1990년대 만해도 이혼율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으니 이혼이 화제감은 되었다. 그 여자가 이혼을 했다고? 이혼을 했구나! 그럼 더구나 복직이 되어야 했겠구나. 그제야 나는 전교조 관련 뉴스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이유에서. 대개 학교마다에 전교조 가입교사들이 있었으니, 조금 관심을 가지면 열성 노조원인 그 여자의 소식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전교조 탈퇴확인서를 쓰라는 정부에 맞서 위원장은 공무원법 준수 각서로 대체하는 조건에서 정부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단안을 내렸고, 교사들은 돌아왔다, 물론 나의 그녀도 함께.

 

  그러나 다시 한 번 같은 학교에서 근무 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았다. 내가 우선 여학교 발령을 원칙적으로 선호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돗가 사건 이후 그녀가 먼저 전근했고, 한 해를 더 근무하고 내가 전근신청을 할 시기부터는 단연 남학교를 택했다. 남자에게 편한 성은 역시 남성임을 절감하면서. 녀석들하고는 수학여행을 떠나도 수돗가에서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고, 경이로운 어떤 장면들을 보게 될 일도 없으니 편했다. 삶이 무엇인가, 편한 것이 편한 삶이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제 다시 그녀의 해직과 복직이 화두로 떠돌 때에 이르러서야 잠복성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기에 들어갔다. 또 다시 열심히 박박 문질러 씻기가 도졌다. 난 늘 그 수돗물 소리를 듣는다.

 

 

  강박증이 나를 삼켰다. 갑자기 내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지나 않을까 겁이 났다. 가슴통증 때문에 순환기내과를 찾았을 때, 내과의사는 정신신경과를 권했다.

 

  나에게는 어떤 더러운 것에 대한 억압된 생각, 감정 또는 충동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끈덕지게 되풀이하여 의식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경우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책상서랍에 열쇠를 채우고 퇴근하는 길인지 몰라서 다시 교무실에 들르곤 했다는 고백은 나를 강박신경증적 소질이 있는 소심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강박관념에 불안이나 공포가 따르는 것은 병은 아니라는 전제에서도, 나의 경우 남자가 살갗이 벗겨질 정도까지 씻어댄다면 분명 어떤 지우고 싶은, 잊고 싶은 불편한 기억의 방해라는 진단이었다.

 

  천만의 말씀. 나는 사실 내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녀와 비교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녀와 비교해서. 상상 속의 그녀와 비교해서. 의사의 말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적 강박증보다는 순한 놈이라고, 다만 나의 경우는 보통 손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신경증과는 달리 온 몸을 씻어대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느냐고.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은 완전한 청결을 유지할 수 없다는 대 전제를 나에게 인식시키고자 오랜 정기적인 상담을 권했다.

 

  그런 주인공들을 문학작품들에서 볼 수 있으셨겠지요?

  무슨?

  강박신경증적 행동의 주인공들 말입니다. 손을 너무 자주 씻는 사람, 또는 문은 제대로 잠갔는지 물은 잘 잠갔는지 나가다가 다시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강박신경증 때문에 신경정신과에서 예컨대 그로민을 아침엔 25mg, 저녁엔 60mg 정도는 처방받아 복용중인 사람 말입니다.

  약물처방만 빼고는 제가 바로 그런데요. 남이 봤을 땐 우스워 보이지만 저로선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인도를 걷다보면 제가 무심코 빗금 선을 밟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이런 행동들이 본인 스스로도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행동이라고 인지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중지하려고 하면 심한 불안감을 경험하게 되신다는 거죠!

  예, 제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초조해지기 때문에…….

  네, 그렇습니다. 그 정도가 생활에 장애가 된다고 느끼셔서 진료상담을 받으러 오신 게지요. 본인 스스로 인지한 것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판단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비이성적, 그래요, 비이성적 행동인 줄을 알기에 이렇게.

  그렇다면 그런 비이성적 행동을 무시하는 연습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조금 쉽게 해보는 방법으로, 머릿속으로 자신의 다른 자아를 설정해놓고, 이 다른 자아를 진정한 자아라고 간주하시고, 원래의 자아를 별개의 자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이성적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너는 참 이성적인, 비합리적인 녀석이다.”라고 큰소리로 외쳐보는 것입니다. “이런 멍청이야, 너 지금 뭘 하고 있어!” 이렇게 욕을 해보시거나.

  예, 바보 멍청이죠. (단 한 순간도 이 떨림을 말해보지 않은 너. 꿈에도 생각도 해보지 않은 너. 가슴앓이는 당연지사라고 믿고, 뭔가 낌새를 들키는 짓일랑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나서 가장 못난 짓, 몹쓸 짓이라 규정해버린 너. 거짓 평화가 최선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너…….)

  더 심한 모욕도 좋습니다. 만일 효과가 있으려면…….

  네? 꿈의 효과요?

  꿈이라뇨! 꿈 이야기는 드린 적이 없는데요. 선생께선 꿈속에서 불안감이 가중되시는 건가요?

  (아니, 꿈이라면……. 나의 꿈은 무엇이련가!)

  일반인들 가운데 유병률은 2~3%나 되니까 극히 드문 장애는 아니십니다.

  그건 그리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닌데요.

  아니 위안이란 이 경우 본인 스스로……. 그보다 발병 시기가 보통의 경우에 비해서 좀 늦게 나타나신 경우인데…….

  어른들이 걸리는 확률이 낮다 말씀이십니까? 확률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가 만일 강박신경증 환자군에 분류된다면 그건 1/2 확률이지요, 이다, 아니다.

  사실 이 경우 환자들은 대개 학력이나 지능이 높은 수준일 때가 더 많지요.

  지능이 높아서 걸리다니요? 지능을 감별하는 바이러스라?

  선생님도. 바이러스 감염이 아닌 것은 잘 아시면서. 차라리 유전성이라거나 가족성 발병 경향이 높은 셈이죠. 그러니까 가족력으로 미루어 우울증이나 대인공포증 등과 같은 정신과적인 질병이 공존하든가?…….

  그러면 저는…….

  선생께선 안정된 직장이 있으시고, 교사라는 직업 상 아무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실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분석정신치료로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환경 여건에서 오는 자신의 증세 악화를 인정하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참 그런데 감정표현은 잘 하시는 편인가요?

  실은 그것이…….

  감정 표현을 스스로 억제하려는 것, 전형적으로 가부장제 하의 가장증후군입니다.

  가장증후군요?

  하하 농담입니다. 출세지향형이 아니라 해도, 이 시대 가장들께서 흔히 붙들려 계시는 군자삼락 말입니다.

  삼락? 우선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라지만, 어디 양친도 형제도 마음대로…….

  그것도 실은 자괴감을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불효로 돌아가신 것만 같고, 우애를 다하지 못함도 불효인 것만 같고. 그런데 이 시대에 효다 우애다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지요.

  예? 우애요? (아차, 내겐 유난히 나를 따르던 사촌이 있었지. 친 동기간은 아니라 해도 유일한 동생. 밭둑을 지나다가 무도 쓰윽 뽑아 그냥 옷에다 쓱싹 문지르고 먹던 녀석.)

  남자들이 터놓고 말을 못해 그렇지, 가부장제는 안팎으로 협공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근거도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 게다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니 힘에 부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마지막 즐거움은 저절로 누리시겠지만.

  무엇인가 전도된 느낌이었다. 소위 정신과의사 자신이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라 할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정신과의사나 상담치료사는 자신이 말하기보다는 환자의 입을 마음을 열게 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사는 내가 사내 살갗이 닳도록 씻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병을 고쳐줄 뜻이 없어 보였다.

  다른 강박적 행동들을 수반하지 않고, 다만 강박적 씻기라면 중년남자들에게서는 흔치 않습니다. 능욕을 당한 처녀들에게서나 흔히 보이는 과민반응이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서는 병적 증후와 연관될 트라우마가 발견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원인이 이렇듯 애매하다면…….

  숨겨진 원인이 꼭 있어야 합니까?

  원인이 될 수 있을 심적 타격 등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대응기제를 찾아가기가 어렵다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는 혹시 마음속에 멀리…….

 

  중년남자가 혹시 ‘몸을 더럽힌’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눈빛에는 이상하게도 어스름 물기가 아닌 붉은 기름기가 번져 나오는 듯 했다. ‘마음이 더럽게’ 흔들렸으되 몸을 더럽힌 적이 없는 남자는 이곳에서 치유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남자의 마음 흔들림을 상상하지 못하는 남자 의사라!

 

  선생께선 반복적인 손 씻기 이외에도 강박적 행동이 발견되시는지. 예컨대 물건 정돈은 어떠십니까? 정리정돈에 억매이시나요? 대문을 닫고서 의심하고 다시 올라간다거나, 아니, 책의 읽은 부분을 다시 읽고 확인하려는 것, 것보다 과거에는 어떠셨습니까? 학생 시절 시험답안지 같은 것을 제출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확인 또 확인해야…….

  지난 시절에까지 거슬러서요?

  아니, 뭐. 청소년 시절 손톱 물어뜯기 등도 강박행동에 속합니다만. 앞날에 대한 지나친 걱정, 걱정을 이미 걱정하신다거나?

  저는 그러니까 뭐랄까 다른 증상은, 아니 저는 실상 고민이 될 일이……. 그러니까 말씀드릴만한 일이. 해서 이만…….

  아니, 치료를 거부하실 의향이시라면…….

  아니, 제가 급한 다른 일이 생각이 나서. 그럼…….

 

 

 아차, 그럼 그 파도소리는 서러운 강물의 울음이 아니라 귀를 씻는 수돗물 소리였을까? 아니다, 지금은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는 대신에 내일을 생각하려고 한다. 나에게는 어쨌거나 내일이 있다. 아직은 병원에서 맞을 아침이겠지만. 언젠가는 새소리도 들려올 것이다. 어쩌면 벌레소리도.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복도 끝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커피봉지를 쏟아놓고 앉은 참이었다. 어느 녀석이 전화라도 하려나? 휴대전화를 살아있는 귀 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미미한 삐이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이명이거니 했다. 기다리자, 어제 오늘은 이명도 가만히 참고 있으면 더 빨리 잦아든다. 아니? 청각검사실에서 들려준 쇳소리인데 착각인가? 아니다. 그 미세한 불규칙한 것은 쇳소리가 아니라 분명 벌레 우는 소리였다. 살아있어서 불규칙하다. 아직 추운 3월 어느 아침, 내가 아직 벌레소리를 듣는다! 경이에 가까웠다. 1/6 확률을 뚫고 내 귀가 회복되어간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저 벌레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어라? 벌레소리를 따라 무심코 따라간 눈. 그곳엔 수풀도 동산도 아닌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시멘트벽사이에 난 나무문. 그 너머엔 길고긴 복도밖에 없는 병실건물. 벌레소리를 따라 병원복도로 향한 내 엉뚱함은 코미디였다. 청각 따라 방향감각을 잃게 되는가. 더 또 무엇을 잃어갈까.

 

  정말이었다. 내 고개는 창밖이 아닌 복도 쪽 닫힌 문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 쪽 귀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창밖의 나무는 오른 쪽인데, 벌레는 그냥 왼쪽 귀에서 울고 있었다. 내 세상은 이제 모두 왼편이다. 오른 쪽에 몸담고 왼쪽을 동경해온 삶의 귀결이런가. 내 오른 쪽 귀는 더 이상은 오른 쪽 말을 듣지 말라한다. 새가 울어도 벌레가 울어도 그것은 왼쪽 세상이라 한다. 왼쪽 온 세상. 반쪽 온 세상.

 

*

 

  아버지의 공책은 거기서부터는 하얀 여백으로 멈춰 있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남은 귀 하나로 무서움을 타시는 구나. 회갑이란 그런 것인가. 정년이란 그런 것인가. 늙으신 아버지에게 변변한 자식도 없으니…….

 

  드르륵, 어머니가 방문을 여신다.

  어둡지 않아? 불이나 켜고 있지. 아버진 아예 늦으신단다. 건너 온, 저녁 먹자.

  승연이 승주는요?

  빨리도 챙긴다. 아까 승연이가 방문을 열어도 모르고 있더니. 애들은 벌써 먹였지, 시간이 몇 신데.

 

  밥상은 늘 소박하다.

  엄마, 아버진 정문리 가심 맨날 늦으세요?

  낸들 알아. 윤달 앞두고 뭘 궁리하시는지. 느닷없이 부산삼촌 이야길 하시질 않나, 원.

  부산삼촌요?

  그래, 그 왜 부산에서……. 관둬라, 너흰 잘 모른다.

  어머닌 그 이야기를 접으신다. 그리고는 관심의 화살을 내게로 정조준하신다.

  그런데 넌 여태도 달랑 혼자서…….

  엄마, 엄마 나물들 언제나 맛있어요. 나물 맛이 어쩜…….

  나는 부지런히 밥을 먹는 척, 엄마의 화살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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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국제펜광주』 제10호, 2012, 238-26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12. 4. 01:55

 

편지

 

 

                                     베케트의 <행복한 나날들> 중에서 :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 말해버리지요. 할 수 있는 전부를.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죠.”

가을은 은행잎으로 가을입니다.

비가 오거나 아니 오거나.

연구실은 춥지 않으신가요.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을에. 이런 편지를 엿보게 된 나는 궁금증에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대 밖에서 진부하게라도 이야기를 꾸며봅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자신의 말 대신 명작의 인용 뒤로 숨습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춥지 않은지 가벼운 안부가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신은 연구실이 있는 사람이며, 연구실이 추울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사람이며, 그래서 당신을 잃었고,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또 한 가지 사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편지는 아니며 흔히 지금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메일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과 그 사람은 이메일주소를 아직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두 사람에게 남아있을 뭔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구실이 있는 사람의 이메일주소라면 그것은 감추고자 하더라도 감춰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의 이메일주소 노출 정도가 관계의 정도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면 정정하렵니다. 그러나 얼마나 먼 관계인가, 얼마나 사무적인 관계인가, 그런 말을 하고자 할 때도 써야 하는 단어가 ‘관계’인 점을 강조하렵니다. 그러면 오해는 풀릴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편지에 답을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봅시다. 당신은 이런 편지를 곧 바로 지워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답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시작하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런 편지를 아예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보낸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난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는 진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편지의 성격 상 열려버리기도 합니다, 사소한 잘못으로. 여러 개의 편지들 중에서 하필 하나만 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방심한 순간에 마우스의 작동으로 열려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이 편지는 그래서 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열고 보니 당신의 가슴이 조금 찡합니다. 평상시의 당신의 태도로 보아서 당신이 답을 쓸 리 없음을 아는 사람이 이런 편지를 쓰다니.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묻어나는 편지를 쓰다니. 한 순간, 아주 짧은 한 순간 마음이 닿았더라도, 스쳤더라도, 만남은 만남인 것을. 당신은 그것마저 부인할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만남은 순간이며, 특히 괘도가 다른 직선의 만남은 순간 중의 순간일 뿐임을 누군들 부정합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순간이 정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동서고금 남녀노소의 일입니다. 만일 아름다운 순간이 허락된다면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당신과 같이 이성적이고, 많이 이성적이고, 최고로 이성적인 사람으로서는.

 

   그러므로 당신은 회신이라는 간단한 장치를 뚫어지게 봅니다. 절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답을 쓸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읽지도 않고 지우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음에 스스로 뿌듯해할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동안에도 매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이 편지를 더 이상 거기 아이티 세상에 살려두지 않을 만큼 이성적입니다. 간단합니다.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서 편지는 휴지통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전에 어쩌다가 우연히 나의 편지함으로 ‘전달’되어버린 것을. 방해꾼은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휴지통에 쌓인 수많은 쓰레기들 중에 섞여 얼마를 더 연명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당신의 눈앞에 다시 존재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꿈을 꾸는 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편지는 게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꿀 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고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러나 아무 소용없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끝나지 않아도 희망은 끝납니다. 어느 날엔가는 당신이 휴지통을 말끔히 청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편지를 쓴 사람과는 참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잊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비이성적인 순간이 있었음을. 하늘과 바다가 맞닿고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절해의 고도. 상상의 자리에서는 당신도 마그마처럼 끓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당신이 이성적인 것은 지나간 순간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서입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훌륭하게도 이성적입니다.

   만일, 만일에 훌륭하게도 이성적인 당신이 조금 흐트러질,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시간이 올까요? 아무리 이성적인 당신도 사람이고, 사람이면 조금 흐트러지는 때가 왜 없을까요? 그래서 당신도 아주 드물게라도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해 봅시다. 물론 이 편지와 관련해서는 이미 편지는 죽어버렸을 때입니다. 그저 전혀 다른 계기로 당신의 몸속에 알코올 성분이 많아졌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인위적으로 이성의 자리를 감성이 꿰찬 겁니다. 아니, 감성이 당신을 송두리째 꿰찼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지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조금 상스럽게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고쳐봅시다, 감성이 우위를 점한 때.

   당신에게서 감성이 우위를 점할 때는 드문 일입니다. 그래도 가능한 일입니다. 당신도 사람이니까요. 원래도 감성을 이성으로 누른, 실은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사람이고 보니, 어느 날엔가는 감성이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니까요.

 

   그럼 이제 한번 편지를 쓴 사람을 떠올려 보시지요.

   그(녀)는 - 이렇게 굳이 괄호 속에 (녀)를 쓰는 이유는 누구의 성별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소심 때문이니, 당신도 또는 독자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로 왔습니까? 이 표현은 다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왔다는 말은 옳지 않겠지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오게 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의지가 없었을 때 그(녀)가 당신에게로 왔을 리가 없는 이유는 압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오는 것을 그냥 허용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혹은 그 순간, 당신이 찰나에 감상적이 된 때문이었겠지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무래도 어떤 외부적인 힘이 작용했겠지요? 말하자면 있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야 마는 자연 법칙 같은 것. 우리가 잊거나 잊으려 한다고 해도 한번 태어난 것은 사라지지 않지요. 우리가, 생명체가 한번 태어나면 그것이 죽어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성분은 어떤 형태든 모양이든 찌그러들 대로 찌그러들어도 썩어서도 어딘가에 남아있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예컨대 한 겨울 바닷가의 눈물 같은 것도 볼의 열기 때문에, 닦아준 손수건에 적셔져서, 또는 덮어버린 입술에 묻혀서, 아무튼 어떻게든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 녹아들어 남게 되지요.

 

   나는 이제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녀)가 갔습니다. 떠났다는 말입니다. 겨울은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하더니, 그때 정말 겨울에 떠났습니다. 유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겠죠. 물론 지병으로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들이 아닌 바에야 누가 얼마나 유언을 남기나요? 어쨌거나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자에 <미리 쓰는 묘비명> 비슷한 코너에 보낸 글이 남았습니다. 물론 보낸 것 보다 더 길게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답니다. 연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여기에 마저 그 편지의 계속이라고 치부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마그마를 향하여

 

   은행잎 우수수 지는 어느 늦은 오후.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라는 문자를 보내 왔다. 선배 문우께서.

   아, 그런 오후이면 잠들기 좋은 시간 아닌가.

   비가 내린다면 빗물에 젖은 은행잎 따라 흘러가기 좋을 것이다.

   발길에 찢기어도 여전히 노란 은행잎 부스러기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들기 좋을 것이다.

   그들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아래로 아래로 어디까지 가는가.

   우리는 지표를 뚫고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 것이다.

   몸과 맘 모든 속성들을 끌고 아래로 아래로 간다.

   속성들은 원자와 분자가 되어 밀고 당기고 마그마에 섞일 것이다.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마그마 속에 한데 섞이어

   몸도 맘도 초월한 마그마가 되어 흐를 것이다.

 

 

   마그마 - 얼마나 뜨거우면 돌덩이가 녹을까.

   얼마나 녹아서 ‘돌물’이 되어 흐를까.

   지각 바로 아래 외핵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암석층 맨틀에 이르기는 할까.

   아니, 맨틀 최상부의 섭씨 100도를 견디기나 할까.

   맨틀의 대류는 혼돈 과정. 내핵은 고체이고, 외핵은 액체이며, 맨틀은 가소성 고체라.

   지구 표면에서는 낮은 온도로 고체이던 광물질들이 마그마에 이르면 소용없다.

   암석 농축액 마그마, 그 속에 섞인 은행잎 부스러기들은 설마 불순물일까.

   마그마에 섞여 녹으면 지표면의 일들을 기억이나 할까.

   몸을 기억하지 못해도 맘도 잊을까.

   몸은 형체가 사라진다.

   맘은 무엇이 사라질까.

 

 

   몸은 실존의 현장이었다, 인간이면 예외 없이.

   겨울의 나무 - 길고 부실한 몸은 용적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첫아이라서 아이는 버리고 태만 주어다 길렀나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났다.

   좋아하는 움직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것들…… 있었을까?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탐한 적이 있었을까?

 

 

   단연 아니었다.

   손을 뻗치면 무엇이건 다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바보같이.

   준비성 만점의 (외)할머니는 욕구의 싹이 자랄 틈을 내주시지 않았나 보다.

   할머니가 엄마였다. 어머니는 우리랑 함께 할머니의 딸이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일찍 학교에 보냈다.

   네 살 때 벌써 문전옥답 값으로 가죽 란도셀 가방과 호랑이(?) 모피코트를 준비해놓으셨다 했다.

   그것들을 맸거나 입었던 기억은 없어도 작은 모피코트가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천리 길 먼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가 부모자리가 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할머니의 아기였다.

 

 

   맘은 늘 아기는 아니었다.

   물병자리 B형. 천성적으로 집단과 강요에 약한 고립적 고집적 마음의 소유자.

   체육시간 내내 벤치에 머물며, 소외되어, 마음은 오히려 일찍 성장했다.

   성장? 한껏 조숙하여 개똥철학에 기울었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시를 썼다. 첫 발표는 「무제」.

   가소롭게도 인생은 주제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표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건방짐이 오래 갔다.

  

 

   농축된 시를 쓸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유트릴로의 하늘을 따라 그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절대음감으로 피아노를 두드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책 속에 정신이 있다고 믿었다. 재능과 달리 읽으면 되는 것이 책이라고.

   책이 유일무이한 벗이었다.

   책들은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거기에 존재했고, 나는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그들과 노닐었다.

   단조로움 속에 단정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희로애락은 장신구일 터였다.

   장신구는 있어 좋기도 하고 있으면 불편하기도 한 존재가 아닌가.

 

 

   정신에 집중하기를 소망했다.

   육신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그 둘이 똑같은 비율로 섞이지 않을 것이므로.

   더 정신으로 뭉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까.

   정신은 날개 없이도 한없이 날 수 있을 것이니까.

   어디로? 목적은 없었다.

   목적을 초월할 수 있음을 우수한 자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구체적 목적에 들린 삶을 조금은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목표지향적 삶을, 욕망이 많은 삶을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조금 안쓰러워했다. 건방지게.

 

 

   내 맘은 내 정신은 강했다고 믿었다.

   내 맘은 내 정신은 상처입지 않았다고 믿었다.

   내 상처를 두려워하여 행여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겁을 먹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구나.

 

 

   예 - 참 어려운 단어였다.

   함께 가자 하면, 예 하고 서두르지 못했다.

   확신이 안 선다는 생각에 더듬거리기만 했다.

   효, 우애, 우정과 사랑의 이름으로도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니, 애국애족은 언감생심.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엉터리 산수를 믿지 않았다.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둘이 정직한 답이다.

   아니 넷일 수 있다는 상상을 더 신뢰했다.

   왜? 원래 하나의 마음도 늘 하나가 아니니까, 적어도 둘씩이니까.

  

   마음은 늘 갈래였다. 누구의 마음인들 그러지 않았을까. 동시에 둘을 원하기는 오히려 어려웠다. 직장을 쉬이 갈아 치운 것만 보아도 드러난다.

   한번은 다 놓고 소설만을 쓰겠다고 작정하기도 했다.

   그랬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문학작품들을 파먹고 산 세월 동안, 손가락이 하이에나의 그것들처럼 넷으로 변하고 꼬리가 돋는 기분에 소스라쳐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여러 주제를 섞어 담은 장편 출판을 계기로 어정쩡 소설가가 되었다. 시를 쓰는 젊은 선배는 소설 다섯 편을 쓸 이야기를 한 데 엮어 넣었다고 ‘비경제성’을 탓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적어도 한참 동안 무엇인가로 쏠렸다. 다른 것들을 다 잊었다. 그러다 식었다. 다른 무엇인가로 한참동안 쏠렸다. 그러다 식었다. 오래 식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식을 것이다. 아니, 이제는 시간이 없다.

 

 

   아니오 - 참 어려운 단어였다.

   비가 내리면, 아니오 하고 우산을 쓰거나 집안으로 뛰어들 만큼 신속하지 못했다. 비는 내리면 맞는 법. 사람의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오는 색으로 맞는 법. 비도,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자연을 신앙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아래로 아래로 간다.

   마그마를 향하여 간다.

   뜨거운 돌물은 나의 레테의 강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남아 있던 글입니다.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그(녀)에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으니,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묘비명이란 단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터, 무명 소설가에게는 사치스러운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인간적으로 문학적으로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문자를 받았더랍니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답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그(녀)는 왠지 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막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진다고. 그(녀)는 ‘너절한 연습’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는, 만나고 싶은 마음들이라면, 대기 속 보다는 땅속을 꿈꾸는 것이 소박할 것이라고.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하늘보다는 땅의 그런 이미지가 우리의 미래(?)에 어울린다.

 

 

   마지막 인터뷰

 

   어떻습니까? 이 묘비명의 어딘가에 편지처럼 당신에게로 뻗는 촉수가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조금은 부담이 되시려는지요? 아니, 그거야 모를 일입니다. 책임이 없다면 누구는 어떤 일에서든 자유로울 수 있는 법입니다. 꿈을 꾸는 건 꿈꾸는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꿈의 대상은 억울할까요? 예,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억울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아는 한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언뜻 무뚝뚝했습니다.

   - 어떤 때에는 타협이 어려웠고요.

   - 많이 정직한 편이었어요.

   - 보기보다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수식어를 줄이고 말해봅시다.

   - 무뚝뚝했습니다.

   - 타협이 어려웠고요.

   - 정직한 편이었어요.

   -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덧붙일 말이 떠오르겠지요?

   - 괴팍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 타고난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정말 그뿐입니까?

   - 순수? 바보처럼 늘 뭔가에 골몰했던 것 같아요. 그만 하시죠.

 

   아니, 하나만 더. 미안합니다. 제가 좀이 쑤셔서 그만. 골몰했다 하시면 집착 같은 것입니까?

   - 표현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굳이 말하면 긍정적인 집착, 적어도 타인에게는 긍정적인 집착으로 나타났지요. 그게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편이었지요. 자신의 잘못, 부족함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매달렸으니까요. 상대가 무슨 말을 못했지요.

 

   마지막으로, 당신과 그(녀)의 벤다이어그램을 상정한다면 어떤 형식이었나요?

   - 벤다이어그램? 참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집합이라, 합집합의 크기가 커지려면 교집합은 작을수록, 아니, 합집합을 생각할 게제는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교집합을 키웠나? 그것은 더욱 어불성설, 두 개의 자아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인 것을.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 아니, 나는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을 잘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희망했습니다. 그(녀)가 상대적으로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왜들 가벼움을 탓하나요? 이 지상의 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존재가 왜 무거워야 합니까? 가벼울수록, 깃털처럼 가벼울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부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당신의 위트와 유머와 센스와 아이러니와 패러디와 리듬과 심지어 즐겨 쓰시는 모순어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느꼈습니다. 지금도 느낍니다. 수사학에서 탁월한 당신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여 ‘달콤한 이별’이라 하시렵니까? 아예 오비디우스를 빗대어 ‘이 충만이 나를 가난케 하였도다!’라고 응수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인가 감정이 충만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은 이성의 가난이었나요?

 

   당신 : 바람 불면 은행잎 우수수 져서

   그(녀) : 당신이 스틱스 강을 말할 때에도

   당신 : 어딘 가로 씻겨 내려갈 것 아니오?

   그(녀) : 나는 그것을 암호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 내려가다 썩든가

   그(녀) : 나는 차라리 레테의 강을 믿습니다.

   당신 : 썩은 물이 어딘 가로 흘러 들어가

   그(녀) : 많은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당신 : 스며들어가

   그(녀) :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들이

   당신 : 지구 복판의 마그마가 끓고 있는 곳에서

   그(녀) : 무엇인가가 지나면

   당신 : 한 조각 성분이 되어서라도

   그(녀) : 그 끝이 좋았던 고통스러웠던

   당신 : 그렇게라도 만날 것 아니오?

   그(녀) : 언젠가는 거의 잊혀진다고.

 

 

   벌써 끝나가는 이야기이군요.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했습니다그려. 늘 그랬습니까?

   -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제 말만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당신은 추억에 잠깁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밤을 지새우던 때를 불러봅니다.

   어느 바닷가. 둥지 틀고 사는 곳에서 260km 또는 450km 쯤 움직인 곳.

   싸구려 불빛에 드러난 군상. 따닥따닥 붙어있는 횟집과 손님을 불러대는 아주머니의 앞치마. 부엌의 행주치마가 아닌 돈주머니. 돈주머니들은 제법 불룩하다. 임신하기에는 늙은 여자들의 부풀어 오른 배 위에서 더 부풀러 보이는 돈주머니 앞치마. 앞서 지나간 손님들의 때 묻는 돈, 그 때 묻은 돈에서 옮겨간 인생의 때로 뒤범벅되어 갑옷처럼 무장된 돈 통.

   일행은 예닐곱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한다. 중요하지도 않은 말들만.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 중요하다. 적당한 간격의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시간을 죽이려고 할 때.

   왜 시간을 죽여야 하는가. 공적인 일들이 끝나면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 푹푹 씻고 건강한 잠을 자면 그만인 것을. 그 편이 다음날의 진행에도 합당하다. 그런데 왜 바닷가를 서성이며 시간을 죽이려드는가. 할 말도 없으니 말을 못하고, 할 말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누구도 누구에게서라도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바닷가 부둣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내가 이전에 여기 유명한 어시장을 갔더랬어요. 어부인이 워낙 생선을 좋아하니까 사가지고 갈까 했었지요. 아니, 아예 돌아오는 길에 어시장엘 다녀오라는 엄명이 떨어졌지요. 해서 시장을 갔었죠. 그런데 아짐씨들이 앉아서 영락없이 붓칠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아예 노란 페인트칠을, 생선에다가. 멍하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아짐씨 말이 뭐랬는지 참.

   뭘 보냐고 퉁이나 맞으셨지요?

   퉁만 맞은 게 아니라 혼이 났지요. 아자씨, 집에 아지메는 화장 안하나? 야들도 화장을 곱게 해야 시집을 잘 가는 기지, 이러는 겁니다. 노오란 물색으로 맛있어 보이는 조기가 화장발이라니. 그 다음부터는 조기매운탕 맛이 확 가버리더군요.

   참 섬세하시기는. 그게 어디 오늘 하루 이틀 일이던가요.

   조기 장사는 조기를 속이고, 고춧가루 장사는 고춧가루를 속이지요. 일가 형님이 시골서 그대로 터 잡고 사는데, 글쎄 고추 다듬고 밭두둑에 아무렇게나 버려둔 고추꼭지를 밤 새 실어 가버린다고 합디다. 그걸 어디에다 쓸 것이요, 참. 그러니 누가 고춧가루를 믿고 사 먹을 수 있나요. 그러다 중국물건이 싸고 이문이 난다 싶으니까, 깨 있지요? 야무진 주부들이 시골에 가서 깨를 사가지고 와서 의기양양 하는 것도 다 헛것이라.

   직접 시골에 가서 사도?

   그러니까 깨를 털기 전에, 깨를 터는 것이 무엇인지나 아시오? 깨를 털기 전에 아예 덕석 에다 중국산을 쫘악 깔아놓고 그 위에서 깻대를 턴다는데 말 다했지요. 온 동네가, 다시 말하면 온 나라가 그러는데, 혼자서 순수히 자기 밭에서 난 깨만 팔고 있으면 바보 되는 느낌이라서 별 수 없다지 않소. 불 보듯 뻔한 손해인데다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농촌 사람 야단 못하지요.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인데. 요즈음엔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흔치 않다가 가을걷이할 때나 더러 드나든다는군요, 쌀도 실어가고 뭐 그런 정도. 헌데 시골 노인들이 다른 집 자식들을 알고 지내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긴다더라고요. 옛날엔 뉘 집 자식 할 것 없이 누가 하나라도 오면 온 동네가 다 나서서 반겼고, 또 젊은이들도 으레 동네 인사 할 줄 알고 그랬는데. 아무튼 형님네 시골에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가을걷이해서 쌓아둔 나락가마니를 통째로 실어 가버렸다지 뭐요. 저쪽에 젊은이가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 싣는 것을 노인정에 앉아서 먼발치로 본 노인이 있었다지만, 그 노인 생각으로 저리 천연스럽게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를 실어내니까 그 집 자식이나 되나보다 그랬다지 뭡니까.

   아무리 그런다고 참 노인네도! 어르신이라요, 할머니라요?

물어보나 마나지요. 할머니들이 혼자 노인정에 앉아있기를 하나요? 잔손가는 일이든 어디로든 몰려다니지. 칠십 줄 안 넘은 할아버지가 그랬답니다. 아파서, 병중이라 시들시들하기도 했더래요. 요즘 시골에도 암환자들이 많은 걸 보면 공기 좋은 시골이 별 노릇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시골도 음식들이 개화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아니,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요. 한번은 사라질.

 

 

   그렇게 당신은 그 밤의 대화에 끼었습니다.

   한번은 사라질.

   마치 생사의 암투에서 해방된 초연한 느낌을 주며 좌중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좌중이라야 어느새 대여섯으로 줄었습니다만. 이제 모두들 당신의 입만 쳐다봅니다. 당신의 개입으로 진부한 어시장 놀음이나 가을걷이 도둑 이야기에서 삶과 죽음으로 이야기의 차원이 바뀌었으니까요. 당신은 처음엔 모르는 척 입을 다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실은 언제나 철학을 시작하곤 하는 당신을 알아보고 있었으니까요. 해서 당신은 그날 밤의 강연(?)을 하게 됩니다.

 

 

   오늘 그것을 되풀이하실 의향은 없으신 거지요? 간략하게라도?

   - 그럼요. 기억도 못합니다. 강연이라니, 그저 알코올 기운에 떠들어댄 개똥철학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날 밤의 강연(?)에서 당신의 영혼과 그(녀) 그것이 불꽃 튀는 접속을…….

   - 그만, 그만 하시죠. 순간은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때는 순간은 영원이 되어버린다고도 했고. 늘 말이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매 순간의 영원성 운운하면, 헤세가 쓴 『싯달타』에서도 나왔던 말 같습니다만. 삶마다의 불멸성과 더불어.

   - 예,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전히 새 말을 합니까? 세상 어디에 새로운 주제가 있답니까? 쪽지 한 장에 매달리시는 댁은…….

   죄송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제가 하는 쪽이라서. 제 역할이 질문 쪽이라서…….

   - 예, 뭐. 그렇다고 제가 답변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죄송하지만 처음 주제에 한해서만큼은.

   - 주제가 있었나요? 도대체 인생에 주제가…….

   자 그럼, 그(녀)는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서 떠났습니까? 이 표현은 정말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떠났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버렸습니다.

   - (침묵)

   그럼 당신은 왜 그(녀)를 단호하게 자르셨습니까?

   - (침묵)

   당신이 침묵하더라도, 몇 백 년을 침묵하더라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녀)가 이 편지에 쓴 대로,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는데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물론 당신의 침묵이 그(녀)를 질식시켜서 스스로 단념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 (침묵)

   하긴 다시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그 단념이라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군요.

   - (침묵)

   예, 이 편지의 답이 침묵인 것을 알았습니다. 진즉에 알고서도 궁금했습니다. 가펑클의 노래를 들어 ‘침묵의 소리’를 실현하시는 군요.

 

 

 

   여기까지입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이 편지와 관련해서 뭔가 의미심장한 주제를 끌어내볼까 혹했던 나는 여기서 단념했습니다. 그러면서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 무기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빼앗겼거나, 아니 조금이라도 설레었거나 하는 정도만으로도 마음 졸이는 상대였다면 그런 무기가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았으리라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편지의 수인인은 참으로 말을 아끼는 수준 높은 인격자였습니다. 그것이 내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고백하건대, 이야기를 창작하는 대신 누군가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 애초에 틀렸습니다. 편지 한 마디를 실마리로 하여 쉽게 정신적 투쟁의 흔적 같은 것을 꺼내보려고 했으니. 본격적인 글쟁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음을 느낍니다.

   대신에 조금이나마 배운 것도 있습니다. 물론 사전적으로야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더이다. 거기까진 통상 알고 있는 것이지만, 유독 그것을 가리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할 때 늘 고개가 기웃거려졌지요. 그 의심을 이제 확신해도 될 듯합니다. ‘감성’이 ‘이성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고 정의되면, 처음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감성과 이성의 대응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립개념이 아니라 충돌개념이라는 것. 두 단어를 함께 쓰는 일에는 뭐랄까 물리적 이항이 아니라 화학적인 얽힘으로 폭발성이 내재되어 있으리라는 것. 비슷하게 감성과 이성을 나누어 가졌을 두 사람의 경우에도 어떤 쏠림 현상 때문에 한 사람은 폭발해 버릴 수도, 다른 한 사람은 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 미션이 가득한 영화에서, 폭발 직전 몇 초를 남기고 뇌관이 제거되는 폭약처럼. 그러니까 폭발 여부는 순전히 에이전트의 활약 덕택입니다. 이 때 에이전트의 이름은 언제나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최후의 보루는 이성이다? 그러한가 봅니다. 그런 것을 배웠습니다.

 

   아차, 덧붙일 말이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도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을 강조한 책을 공유합니다. 아까 당신이라고 지칭된 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서가를 슬쩍 훔쳐보았거든요. 그리고 편지를 쓴 그(녀)의 다른 노트에서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이란 지적 정체성과 변화의 요구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메모를 본 적이 있었답니다. 그 책이 출간되었던 1996년에 - 아니, 훨씬 이후라야 되겠지요, 여태껏 그런 마음이 지속될 리는 없을 테니까요 - 누군가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했음직하다. 어쩌면 ‘당신’ 쪽이. 간접적 이별의 통고로서. 감성 따위를 극복하련다는 통고 같은 것. 그런 경우 이성은 잔인성의 비슷한말이 되겠습니다그려. 호모 사피엔스의 독재. 물론, ‘당신’ 쪽의 철학에 얼마만큼 동조할 것인지는 좀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편지가 영영 사라져버린 데 대한 쓸쓸함을 반추할 길은 없으면서 여전히 자꾸 그쪽으로 내 마음이 적시어지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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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세계』 통권 221호, 도서출판 천우, 2012.12.1. 211-226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2. 28. 16:12


파리하고 세상사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인 그대 - 마그마로!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내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어느 가을날 문자를 받았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나는 왠지 늦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어느 늦가을,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아니면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

<문학에스프리> 2012 봄 창간호,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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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nglish2012. 2. 14. 01:40


Why Hesse again, and of all books Siddhartha?


Hermann Hesse (1877~1962):

 

 

 

 

                                            Text: Siddhartha by Hermann Hesse, 
                                                     translated by Hila Rosner, 
                                                     MJF Books, New York 1951.


- a German-Swiss poet, novelist, and painter

- grew up in a household steeped in Pietism

- began his career as a bookshop apprenticeship

- a 14-month mechanic apprenticeship at a clock factory

- a new apprenticeship with a bookseller

- began to write poems and later also novels
- received Nobel Prize in Literature (1946)

Siddhartha (1922):

- reveals his love for Indian culture and Buddhist philosophy
- is composed of 2 parts

        Part One          Part Two
   The Brahmin's Son

  With the Samanas

  Gotama

  Awakening



   Kamala

  Amongst People

  By the River

  The Ferryman

  The Son

  Om

  Govinda


* Siddhartha
: he who has achieved self-realization 

* four "varnas" [or classes]:
                the Brahmins, the Kshatriyas, the Vaishyas, and Shudras
.
* Samana : Hidu ascetic

..................................

Why Hesse again, and of all books Siddhartha?

I came across the book unexpectedly. I read Hesse's Siddhartha for the third time recently. In English this time. First time was in Korean when I was a teenager in high school, then in German as a college student. Why in English now? As long as I teach 'Korean as Foreign Language' to foreign students at CNU, I believe having a better command of the English language would serve me to communicate better with students from other countries. The English version that my English teacher Michael S. showed me, originally published in 1951, has this amazing antique quality to itself. Reading Siddhartha after all these years since I first attempted to decipher its wisdom, I felt that it was no coincidence that the book came to me again. I now feel almost obligated to deliver some messages of the book to young people today, through my own prism of trail and errors in understanding these elusive messages.

Hermann Hesse (1877-1962) was a German-Swiss poet, novelist, and painter, was born in Calw, Germany. Both of his parents served in India at a mission, a Protestant Christian missionary society. He grew up in a household steeped in Pietism, a movement within Lutheranism, but he showed his rebellious character in early days, and, in one instance, he fled from the seminary and was found in a field a day later. After schooling he started a bookshop apprenticeship, but he quit after three days. Following a 14-month mechanic apprenticeship at a clock tower factory, he began a new apprenticeship with a bookseller, and he spent his Sundays with books rather than friends. Pretty soon, he began to write poems and later also novels.

Through his parent's experience in India, Hesse's interest in Buddhism probably came relatively naturally. Schopenhauer and theosophy renewed his interest in India. Through Siddhartha (1922), he showed his love for Indian culture and Buddhist philosophy that had already been developed in his earlier life.

Siddhartha is composed of 2 parts. Part One: The Brahmin's Son, With the Samanas, Gotama, and Awakening, and Part Two: Kamala, Amongst People, By the River, The Ferryman, The Son, Om, and Govinda.

The story begins with a young Indian named Siddhartha, who seeks spiritual enlightenment. By the way, in Sanskrit, the name Siddhartha means he who has achieved self-realization. Young Siddhartha was a perfect son of the Brahmin, the highest varna (or the class) - in the Hindu law "Smriti," which decreed four "varnas": the Brahmins, the Kshatriyas, the Vaishyas, and Shudras. He was intelligent, with a seemingly insatiable thirst for knowledge. He left home and lived for a while as a Hindu ascetic among the Samanas, with his friend Govinda.

After seeing the limitation of asceticism, however, the two left the Samanas three years later, to meet Gotama who has claimed to have achieved spiritual perfection. Gotama Buddha talked about the human suffering, the origin of suffering, the way to release from suffering: Life was pain, the world was full of suffering, but the path to release from suffering had been found. Govinda was immediately impressed and joined the community of Gotama's followers.

Siddhartha, however, felt that he could not find salvation through teachings of another. Leaving the groves of Gotama, he felt he had also left his former life behind him. Siddhartha realized that he had been afraid of himself. He was newly born, and finally awakened. Upon this awakening, the world was transformed in his eyes. All things had been regarded with distrust before, because the reality lay on the other side of the visible. But now his eyes lingered on this side, his goal no longer on the other side.

He next sampled the pleasures of materialism. Not only the thoughts but also the senses were fine things, behind both of which lay hidden the ultimate meaning of life. In the groves of Kamala, the well-known courtesan, and Kamaswani, the richest merchant, opened him a simple and easy life amongst people. The more he became like them, the more he envied them and the sense of importance, with which they lived their lives. They seem perpetually in love with themselves. His face assumed the expectation of discontent, of sickness, of displeasure, of idleness of loveliness. Suddenly he realized that all this pleasure only degraded him and how passion was closely related to death. He felt as if something inside him had died. He left this material garden and never returned.

Siddhartha wandered into the forest, and when he reached a meandering river in the woods, fatigue and hunger had weakened him, until he heard a sound Om, the perfect sound of all. Then he suddenly awakened and realized the folly of his previous actions. After long sleep under the tree, it seemed to him as if ten years has passed. He looked at the world like a new man. Now he again stood empty and naked and ignorant without any preconceived knowledge in the world. He changed from a man into a child, from a thinker with worldly knowledge into an ordinary being. He had to have experienced so much stupidity, so many vices, so many errors, just in order to become a child, again and again beginning anew.

Vasudeva, the ferryman knew how to listen. Siddhartha also learned from the river how to listen, to listen with a still heart, with a waiting, open soul, without passion, without desire, without judgment, without opinion.

He realized that nothing was, nothing will be, and everything has reality and presence.

Many years passed and he met Kamala, who was dying. To Siddhartha she introduced her son, who she had named Siddhartha after his father.

In this hour he felt more acutely the indestructibleness of every life, the eternity of every moment. After the burial, Siddhartha wanted to raise his newfound son in this simple life, but the eleven-year-old child was a spoilt mother's boy. A day came when the young Siddhartha openly turned against his father and returned to the city. Even so he felt a deep love for the runaway boy, like a wound that won't heal. The wound lasted for a long time. Siddhartha began to envy other people who were living with a son or a daughter, he felt the sorrow of the lost love for his son, and he felt these ordinary people were his brothers. Their vanities, desires and trivialities no longer seemed absurd to him.

Still, Siddhartha grew slowly and began to understand the knowledge of what wisdom really was. Siddhartha continued to listen to the river. One day he felt his wound healing and his pain was dissipating. He ceased to fight against his destiny. He discovered that the river is all life flowing toward a goal. It sings the great song of the thousand voices, which consists of this word, Om-perfection. Siddhartha heard it and he smiled. Siddhartha's 'Self' had flown into oneness, and he achieved enlightenment. Vasudeva heard the same sound in the same way, and he also achieved nirvana. At that moment Vasudeva said farewell and went into the woods, into the unity of all things.

Meanwhile Govinda was also regarded with respect for his age and modesty, but there was still restlessness in his heart and his seeking was unsatisfied. Govinda heard talk of an old ferryman and went to meet him. When Govinda asked for advice, Siddhartha, who had remained as the ferryman after Vasudeva's departure, answered, "You seek too much that as a result you cannot find it. It happens quite easily that you only see the thing that you are seeking, that you are unable to find anything, unable to absorb anything, because you have a goal, because you are obsessed with your goal." Seeking means to have a goal, but finding means to be free, to be receiptable and to have no goal.

Govinda was pleased to see his friend of youth again. They talked about the doctrines, beliefs and knowledge. What they found in each other's discoveries were:

- Knowledge can be communicated, but wisdom may be incommunicable. The wisdom, even coming from a wise man always sounds foolish to others who have not attained it themselves.

- Everything that is thought and expressed in words is one-sided, only half the truth. It all lacks totality, completeness and unity. But the world itself is never one-sided. Never is a man wholly a saint or a sinner.

- Time is not real. The dividing line that seems to lie between this world and eternity is also an illusion. The potential Buddha already exists in the sinner, his future is already there. Therefore, everything that exists is good - death as well as life, sin as well as holiness, wisdom as well as folly. Leave it as it is, love it and be glad to belong to it.

- One can love things, but one cannot love words. Therefore teachings are of no use. Nirvana may be a thought, but there is not very much difference between thoughts and words.

Govinda saw no longer the face of his friend Siddhartha. Instead he saw other faces, many faces, a long stream of faces, and Siddhartha's peaceful face had just been the stage of all present and future forms: Nirvana.

What the whole text tries to tell might be: Experience is the aggregate of conscious events that demand participation, learning and knowledge. We should not believe in words or lessons but in actions and in observing the "things" of the world as they are. According to Hesse, these individual events bring about more Samsara [circle of life or suffering], but they are not a kind of hinderance or obstacle, because these experiences only could lead Siddhartha to attain understanding, deep comprehension of what life is. In most Indian religions, life is not considered to begin with birth and end in death, but as a continuous existence in the present lifetime of the organism and extending beyond.

In our post-modern capitalist society where the excessive competition rules supreme, this seemingly aimless type of mindset might appear outdated and of no use. What is then the usefulness of human being? How dangerous it is, if we would judge people mainly by efficiency and productivity! Are humans to be measured against working machines? Have we replaced humanity with calculating meritocracies in the name of fairness and progress?

In that respect, Hesse is still worth reading, leaving aside the fact that the hippies in 1960s and 1970s worshiped this book. Siddhartha gives us a rarely-found yet well-deserved pause to think about our life, about ourselves, whether we know where to go and how we might get there. Or is there?

........................................................................

Text: Siddhartha by Hermann Hesse, translated by Hila Rosner, MJF Books, New York 1951.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1. 12. 31. 16:47


고아가 되었다.
올 봄.
나의 어머니는 당신 나이 이른 다섯에 고아가 되시더니만, 우리더러는 더 일찍 고아가 되라시며 떠나셨다. 막둥이는 1963년생, 겨우 마흔 아홉이다.

피를 나누어주거나 물려준 후손 27명, 법으로 후손이 된 14명을 더하면 41명의 후손을 남기셨다. 그 중에서 참석자는 29명. 290명이 훨씬 넘었을 조문객을 생각하면 불참 수가 부끄럽다. 어머니 앞선 불효녀는 어쩔 수 없다. 머나먼 외국에 아기들이랑 사는 경우도 어쩌랴. 그래도 불참이 많다. 누구도 예상 못할, 설마 하던 불참도 있었다.

*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월은 저 뒤편에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슬하를 떠난 셈이다. 대학시절은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서울 살이. 젊디젊은 ‘엄마’는 서울나들이를 즐기셨다. 우리들 -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함께 이화캠퍼스를 누볐다. ‘누볐다’는 물론 엄마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대 앞과 명동을 누빈 것은 엄마였다.

어머니는 이대 앞과 명동만이 아니라, 설악산과 제주도를, 전국을, 나아가서 가히 세계를 누비셨다. 어머니가 빠진 저녁밥상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던 세월. 불평도 별로 없는 집안에서 나 혼자 불평분자였다.

왜 엄마는 빨리 안 들어오셔요?
우리 학교에 가면 빨리 나갔다가, 우리 돌아오기 전에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

외할머니가 할머니였다. 외할머니가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지어주거나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등록금을 함께 걱정해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집에는 다른 여러 엄마가 있었다. 물론 엄마도 엄마 노릇을 하긴 했다. 소질이 없어도 피아노다 미술공부다 시켜서 소질을 ‘계발’해내는 극성 엄마였고, 또 엄마의 유일한 자랑인 ‘밤 채’ 솜씨 덕분에 늘 예쁜 김장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엄마의 부재를 못 참았다. 엄마를 엄마답지 않다고 볶아댔다.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도 엄마를 닮지 않고 불평만 해대니까, 집안에선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고까지 놀렸다. 연속극을 보면 더러 첫아이는 누가 낳아놓고 죽던가 도망가지 않던가. 대체로 나는 비판적인, 회의적인 인간이었다. 속으로 진단하기를, 일찍이 엄마에게 불만이 많아서 나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참 어려운 것이었다. 참 어려운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 의사의 손에 거꾸로 매달려 자두 빛보다 더 붉어진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었을 때, 나는 기절을 했다. 산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는 포대기가 옆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생명체가 밖으로 나온 것이란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다. 입은 뭔가를 향해 움질거린다. 내 아기, 내 젖을 탐하고 나와의 관계를 탐하는 아기. 어렵게 어렵게 겁을 잔뜩 먹고 만져본 손가락. 작은 손가락들이 무엇이라고 종알거린다. 이것은 대체 어떤 암호인가.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 - 그것을 남성 화가가 어떻게 알았을까? 짐작이나 했을까? 새삼스레 위대했다. 아담의 손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그림의 발상이 이 진자리가 아니고 어디였겠는가?

그렇게 나는 기절과 함께 새로이 태어났다. 그 어려운 엄마가 되었다. 불평을 하는 자식이 아니라 불평을 받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들은 어떤 불평을 할까, 별안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나는 계속 괜찮은 딸이었고, 엄마는 나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엄마는 부족했다. 물론 불평의 말이 단번에 줄었다. 불평의 마음은 한 치 변함없이 여전했다. 반면 나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엄마이리라고 착각했고, 애들은 정말 괜찮았다. 제 엄마에게 불평을 해대지 않았다. 적어도 대놓고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유전자가 더 좋아져서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죽을힘을 다하고 조금 얻어도 행복해 했다. 나는 내가 인내심이 많아진 줄 알았다.

*

어머니가 떠나셨다. 조문객들이 무슨 소용. 41명의 후손 중에서 29명만 참석한 장례식장. 어쩌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불참 속에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면 다 똑같이 아프다고 하셨다. 당연하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네 언니는 참 쌀쌀해야. 동생들이 그 말을 전해주어도 당연하다 느꼈다. 나는 내 불평소리가 줄었더라도 어머니가 내가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랐다. 사실이니까. 인생관이 다른 것을 어쩌라고.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는 단 한 톨의 인내심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딸년의 부당한 불평을 감내하시던 어머니. 겉으로만 화려했던 어머니가 떠나셨다.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했을꼬.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고 없다. 머리에 꼽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단 하나 지지대가 무너져버린 지금.
처음으로 처연히 외로운 순간을 맞는다.

.............................................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첫 클릭클릭』, 이대동창문인회, 2011, 8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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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nglish2011. 12. 23. 01:31


Three Days

 

On a Wednesday, in April.

While hurrying out the door, neither one of the two sisters realizes it would be the beginning of the first day. The older sister looks back repeatedly, her husband alone at home weighing on her mind. Even on a day when she knows he will go out to meet his friends for lunch, her instinct forces her to worry about his lunch. He is probably one of those men who still cannot bear to eat alone, let alone fixing one for himself. Probably he can, but then he might become sad, she utters to herself. The idea of cooking own meals has become the anathematic source of sorrow and disgrace, for Korean men. Her brother-in-law appears considerate enough, to let his wife stay with her for a couple of days. Her house is near the hospital, where his mother-in-law, her mother, lies dying.


From the entrance of hospital the two are almost running. A nurse remembers them and smiles at them.

No need to rush! Your mother has been getting better through the night!

Getting better through the night?

Getting better? It seems impossible. But the nurse's insistent tone gives her a faint pause. The two stop to take a breath and move toward their mother's sickroom.


They greet.

Mother, Mom!

Her mother's condition looks unchanged. Stunned by the news that Mom's health took a sudden turn for the worse, her siblings came gathered at the hospital. And some remained and monitored Mom all through the night.


Mother, Mom!

How are you? Are you still very sick?

It's been a couple of days since her mother has said anything. Now Mom just greets her with an expressionless face. Is it a greeting? Can Mom hear anything at all?



She leaves the room to run an errand. Her sister comes out with her.

Do you mind, if I...?

No worries, unni - big sis. I heard our brothers are on their way back here too.

See, I still need to finish something that should have been done yesterday.

I know, something that should be done needs to be done. It's just what if it happens....

No way, it cannot happen today.



After a lunch break, she's back with her sister, and their mom.

How come you are by yourself?

No, yes. Our brothers were here earlier, but I told them to go, because you would be coming soon. We have to take turns somehow.

See, you should go home today.

I know I should. Anyway, the youngest will come around 7 from work. Till then, can you stay here until then?

OK, no problem.

Mom, I have to go home today, and see you tomorrow. Unni will be here.


She thinks she hears Mom answering, "Uh-huh." Perhaps not a definite word, but some murmuring sound, a faint acknowledgement, she imagines.

She remains alone. Alone with Mom.



*



I keep a vigil at my mom's sickbed just like I am on some duty to maintain daily logs. Mean as ever, I catch myself. Her breathing seems even but a little heavier than in the morning. Her feet and legs are swollen up as before, but for a moment I sense some bluish color on her pale feet. The hands on the abdomen just fall to the side every time I put them back up. Maybe I should just leave her hands down. Her eyes are closed. Sleeping?


Mother!

....

Mother!

No movements in her eyes. Even in her better conditions, she did not talk to me that much. She seems to have slight fever. Her blood pressure is low, so says the nurse. I know it's one of the traits in my family. Anyway, there are no changes, no response.

What next? I wish I had brought something to do, knitting or....



Around 4 in the afternoon.

A relative, the wife of my late father's elder brother, comes by the hospital, herself leaning on a cane. A cousin arrives with her, assisting her visit.

I have had bad dreams for several days.

But, thank you for coming all this way, aunt!

Your mother, no longer recognizes me, does she?

I can't tell. Mom doesn't say anything. It's been a couple of days.

Well fit and energetic, since her youth - spend money freely. Until recently, she was a healthy senior....

You take a good care of yourself, aunt!

I should die first, me going senile, as good as dead.

Don't say that!

The aunt leaves after it's clear that Mom no longer can communicate. Only the sound of her walking stick remains in the hallways outside. And that remnant calls out the past in my mind.



Mother has lived it up. In every sense of that phrase. Still, why did I complain so vehemently about every single thing she did? Did she feel hurt because of me, with my cold, piercing disapproval? Or was she hurt because of the eldest son who had disappointed her? The son whose opulent lifestyle that partly benefitted from his betrayal of his own mother?

Mother refused to accept the traditional housewife's role from the beginning. Instead of the mundane, household chores, the bright-red manicured nails served as the ironic coat-of-arms for her freedom as a woman. Yeah, I just couldn't forgive her for that. No, I just wanted a mother, a normal mom, whenever she was not around. She was nowhere close to being a feminist nor did her life seem like the culmination of the empowered women. She was just not around. She just did not care for the banality of daily life. Images of buying tofu and bean sprouts and sweeping the floors simply did not exist in her life. I always felt guilty about her extravagant style, at that time when I was young, knowing some of my friends' mothers sometimes skipped meals to feed their children. I imagine the old woman lying next to Mom in her own sickbed may be one of those starving mothers. The woman's bony, leathery hands put me to shame. Sitting in a small chair next to Mom's bed, I get lost in thought, deeply, more and more.



So, when was it? I recall a dark room, where there was a photo inside of a drawer. Why did I enter the room? It was not Mom's room. But that of my younger siblings, near the well in the backyard. It must have been before we got running water in the house because the well was the source of our drinking water. Perhaps after washing my face with cold water, - It certainly was on a hot summer day. - I absentmindedly sat on the room's entrance and then.... Why was the photo there in that drawer? That curious photo! The woman's face turned away. If I think about it now, could it be a pose for a nude picture? And the model was my Mom? That ring with a big jewel on the model's finger, unmistakably belonging to Mom. It was Mom. She knew a lot of people, unlike other normal mothers. Was there an artist among her acquaintances? I couldn't fathom such things at that time. Was (or is) it easier to grasp, if I imagine that it was an artistic endeavor? Surely it was a work of art! Who took that photo? That question still haunts me. An unknown photographer's artistic photo whose object of adulation was also the object of my hatred. And it only grew bigger from then on.


Why are you late?

See, I was out only for a while.

You should go out earlier and come home earlier than us children. Why do you come home only now, this late!

What time is it now? What's the big deal? I told you, I went out a little while ago. Was the dinner OK, eh?

What dinner? Is it all OK to you, just because we have regular meals? What a sweet home where Mom comes home late every evening! From socializing!

Who talks like this to her mom? My dear ice princess! Your siblings don't' seem to mind, do they?

Other daughters come home late and make troubles, not their moms. What kind of home is this! I hate my life.


Every single day I talked back to Mom. An outgoing mother, and a nagging daughter. In a society, where talking back to your elders is frowned upon, we had a surreal relationship. We were trapped in a vicious circle, each with no discernible way out. With deep-seated distrust of my mom, and by extension, of the entire world, I was depressed for many years. I hated my life, really. Nobody knows other person's life, because everyone exists outside of those of the others. Mom's was an outgoing personality - what's this? why I am using the past tense? - while I usually avoid people. Among hundreds of guests who came to my wedding, there were only four people I knew: one married couple and two classmates. The rest came to see my mother's first daughter getting married. I wanted to be a mother who would focus on home. I did not want to be berated by my own daughter someday. Succeeded, a little?



It's 10 to 7.

My eyes look up at the clock on the wall. Mother is alive, the only sign being her regular breathing. I tremble with guilty about using past tense while thinking about Mom. No facial expressions on her. Fortunately, don't see a pained look on her face. It's calm, even when the nurse feeds her some porridge using a tube through her nose.

I'm anxious about the dinner at home. Nothing is prepared, because I hurried out in the morning when I left the house. My cell-phone rings.


Unni, how is Mom? I'm at the bus terminal. Don't wait for me and go home now. Soon I'll be at the hospital.

Oh, yeah, well, not yet. No need to rush.

Don't worry. I am almost here.

Yeah, you have the entire night shift coming up for you.

Don't worry about me, you know, oppa - big brother - is coming too, I hear.


Oppa's coming, really? I check on Mom while wondering. How desperately has she been waiting for her first child, first son? After seven months in the hospital she seemed to give up the hope. She gave up, at least according to her own words.


You want call him?

...

You want call him?

Leave him be.

Shall I call him?


Mom turned without a word, so said the younger sister. Mom surely knows that her son obviously doesn't want to talk about all the things that followed that incident. Besides, like well-ripe mung beans' shells in summer days - they burst hardly before you touch them - he easily storms up a temper. No one dares to, wants to talk to him anymore.


Is big brother coming?

Anyway it's time for me to leave. I hesitate; look at Mother's face, then at the clock. Still a couple of minutes left to seven o'clock. The nurse says to me, "just go, go ahead." Two nurses are always around the patient. Does that mean it could be a dangerous moment, soon? Who knows? The youngest sister will arrive soon. 


I stepped toward the car. A blinking sign on the dashboard - the gas is almost out. It was blinking since yesterday. I drop by at a gas station, feeling anxious. The youngest sister calls already from the hospital.

I'm with Mom now. Don't worry. You'd better rest easy.

Rest easy?

We - her children - won't let her die alone. To be with dying parents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lial piety - a Confucius virtue to show one's respect for one's parents. It's our custom. Even a prodigal son will be forgiven, if he stands by dying parents. But Mom is still breathing. So maybe she will be fine. But I recall, she cannot even swallow, even fluids since lunchtime. The dinnertime meal was fed through a rubber hose directly in to the stomach. A tube supply feeding is necessary and not necessarily dangerous, so said the nurse. "Some people go on in such a state for several months ...." Thinking back and forth I arrive home, late.




Mom is not so good. On top of it, I had to stop by to get gas.

Nobody blames me for being late, but I murmur something by myself, an inaudible excuse to an unspoken accusation. Meanwhile, I put the rice into the pot. The soaked rice begins to boil soon. Now I let the rice settle in its own steam and prepare side dishes. I cut the Kimchi fresh each time - a simple, traditional trick to liven up its tangy flavor. Otherwise, he won't touch a single piece of Kimchi. My ears are focused the phone. That couldn't be happen yet, but....



The telephone starts ringing. I can't quite pick it up quickly. The sudden finality of it also surrounds me. I run to the phone. It happened, I am told. Is that what I waited for? To end the battle that had no hopes? After all, Mom was critically sick. The doctors try to console me, "She passed away without any acute pains, and it's almost like a miracle."  Even so, I realize that it hasn't been even a half hour after leaving the Mother's bedside.  By a half an hour, I missed being at Mom's deathbed. Is it acceptable because I had to prepare a supper meal for my own family?


Your older sister is really cold.

It was Mother's last word the other day, according to my younger sister. She probably meant to say I was judgmental. It is stuck not only in my ears but also in my heart now. I have no opportunity to stop being icy cold to my mom. Mom passed away.

And I was not around.




Mom's offspring - children and grandchildren - came home from everywhere and all seemed surprised at her death. Wasn't it a predicted result, the end of an incurable patient, and what else then? Sooner or later, it would have come true. But it still astounds. The fact that there isn't Mom in the world, an unrecoverable loss. The one who believed in her children, come what may. Who believed in them - us - even in some exaggerated ways. The "icy cold" one, the "sweet" one, even the one that betrayed her.... To her, all her children were a poignant reminder of life, with all of their weaknesses, including those she chose to ignore.


It was good that the youngest child, short on sweetness but with solid grasp of reality, stayed by Mom's deathbed. It was said to be a kind of peaceful death, without a single word, single sound.

She's not breathing.

The nurse, standing and watching the patient together, said, and just like that Mom was breathless. Not a single word.

You want call him? - Leave him be.

Those were her last words. Mom died without a will.


It's not true. There used to be her will, long time ago. Mom had to handle the family's properties when my father passed away - I cried and cried and thought that my father died because he couldn't stand Mom's bright-red manicures on her nails any more. The hatred against Mom grew exponentially. To her sons, she divided and gave them some property. She also announced that the remaining property - a large commercial building - is going to be fully her daughters' after her death. Over the years, the circumstances were changing, and my mom lost that building. She had to hand it over to a creditor, because of the loan payments, unpaid by her first son, my Oppa. Mother seemed to be embarrassed about that, especially in front of her daughters. She no longer could take pride in herself for being equally generous to all of her children regardless of their gender, as she used to brag.


Even then, it was her first son, - no, his wife to be exact, - showed anger to Mom for losing the property. Her first-daughter-in-law couldn't, wouldn't forgive Mom even though she had promised the building would be bequeathed to her daughters. Regardless of Mother's will, perhaps the daughter-in-law thought it would be hers one day? No way. When Mom lost the last property, she also lost the first son. In recent years, Mom's fortunes have been waning. Imagine, Mom did sometimes her own cooking!  But she never went buying tofu and bean sprouts, ever. It was simply not in her repertoire. Now I realize it was rather good for her, if it could keep her dignity in her own way. Perhaps that vane pride she wore outside turned inward and became cancer cells, when she no longer could bear the discord between her plentiful past and her increasingly diminishing present.




"The fact is" Mother passed away. And she did not get to see her first son. But now we have to think about the funeral. A big funeral hearse arrives and takes Mom from the hospital. Ah, that's the last moment. It hits me again, from now on, Mother doesn't exist. Now we're orphans. We don't have our Mom any more who loved us, even if so judgmental, so disloyal we might have been. But my mother's mitochondria, like the powerhouse of our bodies' cells, will live in me, who didn't know how to love Mom. Not in his loved first son, because only daughters carry on the mitochondrial lineage.


What now? Funeral must be held. We still debate whether to contact the big brother or not. Who decides it? The second son is responsible, of course. Basically the phrase 'will he attend or not' at the funeral of one's own mother doesn't make sense. We all agree that he should be told. We all are equally capable of good and evil, so someone among us, even the betrayer deserves to have a chance to make up.


Will he come?

Well, once it is informed.

Has he answered the phone?

Yes, he picked up the phone, amazingly.


Any news?

He said he will.

When?

Well, he said he will and is on his way.

I doubt he'll show up.

You don't really mean it.

Everyone's still talking about whether he is coming or not at the funeral.

Any news?

Nothing new, but he said he will.

When?

Well, and his son told me, he'll come too, with his father.

Mom loved my niece. I recall she ordered to install extra window-casting when he was born.


Then, shall we postpone the casketing?

How?

But he comes and can't see Mother's face?

But how can we...?

Yeah, though we should put on our mourning vests.


We cannot wait any longer and attend the prearranged casketing ceremony. Shrouded and dressed in powder pink and pale blue clothes that she had prepared long time ago, Mother looks like a woman from the royal court centuries ago. Too beautiful to be in a coffin, I am thinking, just like sleeping, even beautiful. - Curious, I've never thought that my Mother was beautiful. Shortly, they place the body in the coffin and close nails it shut. It's the end.


Can we pull out the nails? Someone asked hesitantly.

What nails?

Say, the casketing is over, but. What if he'd persist stubbornly to see Mom later?

Gee, I don??t know.

Will he come?

He said he will.


We all together wonder in silence why someone asked that silly question. An image of that snarling face might have struck him, what a casketing without the main mourner! All keep glancing toward the front door. So the second day was over.



The next morning, the funeral takes place.

The funeral cortege leaves the funeral home at 10 a.m. Unlike the loud crowd of mourners from yesterday, only the calm, even chilly, atmosphere sets in the room. We avoid each other, making sure we make no direct eye contacts. Nobody asks the question from yesterday. The second eldest brother looks tense, holding extra armband for in his hand. His hand is poised to give it to his big brother if needs be. The clock is ticking away.


It rains all day long. In the corner of the open field, all in light green, a group of white vinyl raincoats flutters. The evening shadows are beginning to fall. So the third day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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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h Yong-Jwa is a Korean novelist, Prof. Emeritus, Dept. of German Language & Literatur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nd Instructor of Korean as Foreign Language at CNU. Prizewinner of Ewha Literature Award (2004) and PEN-Gwangju Literature Award (2010). Published 3 Novels: Eleven Pieces of Jigsaw (2001), A Dim Life (2004) and Antonym ․ Synonym (2010) and many other books including Germany and German Literature (2008).

 

「3일 Three Days」, 『펜광주』 9호, 2011.12.12. 19-32, 33-5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2. 13. 00:13

 

3일


 

4월의 어느 수요일.

자매는 서둘러 집을 나서면서 둘 다 그것이 그 첫 날의 시작인 줄은 몰랐다. 언니는 자꾸 집을 돌아본다. 혼자 있는 남편이 마음에 걸려서다. 오늘은 그가 외출하는 날이니 점심 염려는 없는데도 본능적으로 점심 걱정이다. 혼자서는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남자인 셈. 챙겨먹지 못하기야 할까만, 그러면 슬퍼지는 남자니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손수 제 식사준비란 한국남자들에겐 치명적인 설움이요 수치의 근거였다. 동생의 남편은 하루쯤 아내를 언니 집에 두고 갈 만큼은 속이 넓다. 언니 집은 병원 가까이 있으니까, 게서 장모님이 오늘내일 하는 터에.


병원 입구부터 둘은 종종걸음이다. 간호사가 알아보고 웃는다.

뛰지 마세요, 밤새 많이 좋아지셨어요!

밤새 좋아지셔요?

좋아진다니? 불가능한 단어다. 그래도 간호사의 단호한 어조에 작은 안도를 느낀다. 둘은 숨을 돌리며 어머니의 병실로 향한다.


아침 인사.

어머니, 엄마!

그대로다. 급격히 악화된 상태라는 통에 자식들이 밀물처럼 닥쳤다. 몇은 남아서 밤새 곁을 지켰다.


어머니, 엄마!

좀 어떠셔요? 많이 아프셔요?

말을 끊다시피 한 것이 하루 이틀. 다만 무표정의 인사. 인사도 아니다. 듣기는 하실까?


언니가 서둘러 병실을 나간다, 일 때문에. 동생이 따라 나간다.

혼자 괜찮겠어?

걱정 마, 언니. 이따가 또 오빠랑 동생도 다시 들른다는데.

그래, 난 어제 해 줘야 할 일을 못해서.

알고 있어, 해 줄 일은 해 줘야지. 뭔만 안 나면…….

설마 뭔 일이야, 오늘은 아닐 거야.


점심시간이 지났다. 다시 언니와 동생이다, 어머니랑 함께.

어머, 혼자 있어?

아니, 응. 다들 다시 왔었는데, 언니 올 거라고 가라 그랬어. 교대해야지 어떻게.

그래, 너도 오늘은 집에 가 봐.

그래야지. 참 막내가 퇴근해서 오면 7시에는 온다네. 그때까지는, 그때까진 있겠지?

그럼, 당연하지.

엄마, 저 오늘은 집에 다녀와요, 낼 뵈어요. 언니랑 계셔요.


어머니가 뭐라 대답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으응. 그렇게까지 정확한 단어는 아니지만, 무슨 웅얼거리는 소리, 희미하게나마 알아듣는 척하는 소리인 것 같다.


*


나는 당번이 되어 일지를 쓰는 기분으로 어머니의 병상을 지킨다. 내가 원래 그 모양이다. 숨소리는 고르다, 다만 아침 보다 조금 커진 것 같다. 두 발과 다리는 여전히 부어있고, 가만, 창백한 발이 어쩐지 푸르스름하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은 자꾸 미끄러진다. 아예 내려놓는 것이 나을 듯싶다. 두 눈은 감겨있다. 주무시는 걸까?


어머니!

…….

어머니!

눈을 뜨시지도 않는다. 더 좋으실 때에도 나랑은 별 말씀이 없으셨다. 미열이 있는 듯. 혈압은 낮다고, 간호사가 그런다. 원래도 그런 것이, 집안 내력 중 하나인 걸 안다. 어쨌거나 무변화, 무반응.

뭘 하지, 뭔가 뜨개질거리라도 가져올걸 그랬다 싶다.



네 시경.

주렁을 집으신 백모님이 들어오신다. 사촌이 모시고 왔다.

꿈자리가 며칠 너무 안 좋아서야.

그렇다고 고맙게도 어떻게 걸음발을 하셨어요, 큰엄니!

느그 어무니 영 사람 못 알아보는 갑다.

글쎄요. 어째 말씀이 없으시네요, 어제 오늘.

젊어 이래 육덕 좋아, 기운 좋아, 멋대로 쓰며 살더니만. 나이 들어서도 펄펄 날고 다니던 사람이…….

큰엄니라도 건강하셔야 해요!

나가 먼저 가야하는디. 이 망령, 산송장이.

뭔 말씀을.

결국 어머니가 아무런 소리도 못 알아듣는다 싶으니 그냥 나가신다. 멀리 주렁의 여운만 남는다. 여운은 내 마음에 과거를 불러낸다.



어머니야 신나게 사셨지. 문자 그대로. 그렇다고 그렇게나 사사건건 어머니한테 대들었을 건 뭔가. 쌀쌀맞은 큰딸이 서운했을까, 콕콕 찔러대는 불평이? 어머니를 실망시킨 큰아들이 더 서운했을까? 어쩌면 그 배신의 대가로 더 잘 먹고 잘 사는 아들이? 

어머니는 전통적 가정부인의 삶을 일찍이 거부했다. 진부한 집안일 대신 새빨간 매니큐어가 자유부인의 상징이었다. 그래, 난 그냥 어머니를 용서 못했지. 아니, 어머니를, 정상적인 어머니를 원했을 뿐이다. 어머니가 없는 순간에. 어머니는 그렇다고 여성해방론자들과 가깝지도 않았고, 어머니의 삶은 자율권을 가진 여성의 정점에 이른 것 같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냥 없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냥 삶의 진부함을 잊는 것. 두부와 콩나물을 사고 마루를 훔치는 이미지를 간단히 버렸다. 너무 멋진 어머니는 늘 죄스러웠다, 내가 어렸던 그 시대에는. 난 알고 있었다, 다른 어머니들은 더러 굶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서. 젊어서 더러 굶었을 어느 어머니가 옆 침대에 누워있다. 그런 상상에, 저 새까맣게 말라빠진 저 손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간병 의자에 앉아서 멍한 상념에 빠진다, 점점 더 깊이.



그래, 언제였을까? 희미한 방, 서랍 속의 사진. 왜 그 방에를 갔을까? 그곳이 어머니의 방은 아니었다. 뜰의 샘가에서 가까운 동생들의 방. 집에 수도가 들어오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 때 우물이 식수의 유일한 원천이었으니까. 샘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어쩌고 - 분명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 무심코 그 방문턱에 앉았다가……. 그게 왜 그 서랍에서 나왔을까? 이상한 사진 한 장. 얼굴을 뒤로 한, 지금 생각하면 누드화의 모델 포즈? 피사체는 어머니? 그 반지, 보석 알이 큰 반지는 분명 어머니임을 알아보게 했다. 분명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다른 보통 어머니답지 않게 발이 넓었다. 어머니에게 화가 친구도 있었을까? 어린 마음에 화가 생각은 못했다. 예술적 시도라고 상상했다면 더 이해하기가 쉬웠을까? 분명 예술작품이었다! 사진을 누가 찍었을까? 그 의문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누가 찍었는지 모를 사진. 사진이 찬미하는 대상은 곧 나의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미움은 더욱 자라나기만 했다.


왜 지금 와요?

응, 조금 전에 나갔다.

미리 나갔다가 우리들보다 먼저 오지 왜. 왜 이제야 오느냐고, 이리 늦게!

몇 신데 그래? 무슨 일인데? 조금 전에 나갔다니까. 저녁들 잘 먹었지, 응?

저녁? 제때 밥이면 다야? 엄마가 날마다 늦게 오는 집이 어딨어! 놀다가!

다른 집 딸들도 이런다냐, 제 엄마한테. 이 쌀쌀아. 오빠동생들도 조용하고만.

다른 집은 딸들이 늦어 야단이지, 뭐 이런 집이 다 있어. 이렇게 사는 것 싫어.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를 할퀴어댔다. 어머니 나들이에 잔소리를 하는 딸. 어른들에게 말대꾸는 영 버릇없다는 사회에서, 아주 이상한 관계. 출구를 모를 악순환이었다. 엄마에 대한, 그러므로 온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우울한 세월이었다. 나는 내 삶이 정말로 싫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모른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존재하니까. 어머니는 발이 넓었다. - 아차, 이게 뭐야?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왜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지? - 반대로 나는 사람들을 피하는 편이다. 내 결혼식에 온 수백 명 손님 중에 내 손님은 단 네 명이었으니, 한 신혼부부와 두 동창생. 나는 집에 집중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 딸에게 질책당하는 엄마가 되는 것은 싫었다. 어느 정도 성공했을까?



7시 10분 전.

내 눈은 벽시계로 간다. 어머니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으로 살아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과거형으로 말했던 죄책감에 떤다. 어머니는 무표정. 다행하게도 고통스러운 표정은 아니다. 간호사가 고무호스로 코로 죽을 집어넣는 순간마저도 아주 조용하다.

은근히 집 저녁 걱정이 인다. 아침에 서둘러 나오느라고 아무런 준비도 안 해 놓았다. 휴대전화 벨 소리.


언니, 어머닌 어떠셔? 나 터미널에 도착했어. 나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 봐. 곧 병원이야.

응 그래, 뭐 아직은. 서둘지 마.

염려는. 다 왔다니까.

그래, 그럼 밤새 고생 하겠구나.

아니 걱정 마, 큰오빠도 올 거라 그러던걸. 



큰오빠도 올 거라니, 정말? 의아해 하면서 어머니를 바라본다. 오빠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꼬. 병실 생활 7개월째를 접어들면서는 포기하신 줄 알았다. 적어도 말씀으로 그러셨다.


연락할까요? 

…….

연락할까요?

관 둬라.

연락해야죠?


묵묵히 고개만 가볍게 돌리시더란다, 동생 말이었다. 어머니는 오빠가 그 사건이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줄 다 아시는 게다. 게다가 오뉴월 녹두 깝대기 터지듯 하니, 큰오빠에겐 사실 누가 말을 붙이지도 못한다, 하고 싶지도 않고.


오빠가 온다고?

아무튼 갈 시간이다. 나가려다 말고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또 시계를 본다. 아직 2, 3분이 남았다. 간호사가 그냥 가란다. 하긴 간호사 둘이 번갈아 붙어있다. 그걸 보면 위험하신 상황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막내가 곧 도착한다지 않은가. 


차로 향한다. 계기판에 표시등이 들어온다. - 기름이 바닥이다. 아차, 어제부터였지. 주유소까지 들리다 보니 마음이 더 바쁘다. 막내는 벌써 병원에서 전화다.

엄마 병실에 도착했어. 걱정 말고, 언니나 안심 해.

안심? 

최소한 아무도 없이 운명하시게 놔 둘 수는 없다는 뜻에 불과하다. 임종 자식이 효자다, 뭣보다 우선하는 효다. 유교에선 부모에 표시하는 최고의 존경이다. 관습이 그렇다. 어떤 탕자도 임종 시에는 용서된다. 아무튼 어머닌 숨을 규칙적으로 쉬고 계시는데. 큰 염려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심때부터는 삼키는 기능도 떨어졌다는 생각이 난다. 저녁식사는 호스로 직접 위에다 공급했지 않은가. 간호사는 그랬다, 호스공급은 필요하고 또 꼭 위험하지도 않다고. 그러고도 보통 몇 달을 가는 환자들도……. 왔다갔다 상념 속에 집에 이른다. 늦었다.



어머닌 참 안 좋으시네요. 하필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까지 들르느라고.

누가 늦었다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 중얼거린다, 무언의 고발에 대한 보이지 않은 변명처럼. 그러면서 서둘러 쌀을 앉힌다. 불린 쌀이라 금방 끓어오르고, 뜸이 드는 동안 반찬들을 챙긴다. 김치만큼은 매번 새로 썬다. 간단하면서 전통적 맛내기 방식이다, 톡 쏘는 풍미를 살리려면. 또 그인 그래야 한 젓가락 먹을 것이다. 귀는 전화 쪽으로 향해 있다. 설마 하면서도.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따르릉. 차분하게 전화를 잡을 수가 없다. 갑작스럽게 종점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전화 쪽으로 내닫는다. 올 것이 왔단다. 기다리던 것이었을까? 희망 없는 싸움을 끝내는 것.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심각하게 아프셨다. 어머니는 그간 특별한 고통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기적이나 같죠, 의사들이 우릴 위로했다. 그렇다고 그건 어머니 병실을 나선지 겨우 30분만이라는 생각이 났다. 그 30분으로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놓쳤다. 제 식구 저녁식사 준비하느라. 말이나 되는 소린가?


니 언니는 참 쌀쌀해야.

불과 며칠 전 겨우 말하실 때 그러시더라는 동생의 말. 내가 늘 어머닐 비난만 했다는 말씀이시렸다. 그 말이 이젠 귀가 아니라 가슴에 박힌다. 쌀쌀함을 그만 둘 기회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난 거기에 없었다.



다시 서둘러 사방에서 모여든 자식 손자들은 다들 놀라는 것 같았다.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나? 회복불능 환자의 끝은 예견되던 것이었을 뿐인데, 아니면? 빠르건 조금 느리건 다가온 일. 그래도 놀라웠다. 세상에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 그것은 진정 회복불능의 손실이었다. 아무렇더라도 자식들을 믿어준 존재. 자식들을 어쩌면 과장해서 믿어준 존재. 쌀쌀맞은 놈도, 살가운 놈도, 배신 때린 놈까지도……. 어머니에게는 다 같이 가슴 아픈 암시였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만 보여서. 어머니가 무시하고 싶었던 부분까지를 더해서.

 

다행이다. 살갑지는 않아도 도리를 잘 알던 막내가 있어 임종을 지켰다니. 임종이라야 평화스러운 끝이란다, 말씀 한마디 없고 소리 한 토막 없이 그냥 끝.

숨 안 쉬시네요.

함께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말했는데, 정말 숨이 그치셨더란다. 어쩌면 단 한 마디도.

큰오빠 연락할까요? - 관 둬라.

며칠 전 그것이 마지막 대화셨다. 유언은 없었던 셈.


아니, 유언이 있었다, 오래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큰살림을 정리하시던 무렵. 나는 그때 울고 또 울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새빨간 손톱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다. 어머닌 아들들에겐 그때 벌써 상당한 유산을 분배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재산 - 상당한 큰 건물은 어머니 사후 전적으로 딸들 몫이라고 공언하셨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황은 바뀌어 어머니는 건물을 남기시지 못했다. 대부금 상환 때문, 큰아들 때문에 건물은 넘어갔다. 어머니는 난처해하시는 것 같았다, 특히 딸들 앞에서는. 아들 딸 차별 않는 관대함을 노래를 하셨던 평상시의 유세를 못 떨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딸들이 아니라 정작 큰오빠가, 정확히는 큰며느리가 어머니가 재산 잃은 것에 분기탱천했다. 분명 딸들의 몫이라고 천명했던 건물이었지만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용서할 수도 용서되지도 않았을까. 어머니의 유지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자신의 몫이라고 기대했던 터여서? 웃겼다. 그렇게 어머니는 마지막 건물과 더불어 큰아들을 잃었다. 어머니에겐 마지막 몇 년은 행운이 저물어 갔다. 더구나 상상해 보라, 어머니가 가끔은 손수 밥을 지으셨으니! 단 몇 번이라도! 그렇지만 어머니는 결코 두부나 콩나물을 사러 나가지는 않았다, 결코. 그런 건 어머니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시길 잘 했다. 어차피 그렇게 어머니 나름의 자존심을 지니셨기를. 밖으로 향한 허영심이 어머니 몸속으로 들어가서 암세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려했던 과거와 점차로 고갈되어가는 현재의 불협화음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분명한 것 하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큰오빠를 못 보고. 하지만 이제 장례절차를 생각해야 한다. 장례식장에서 차가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문을 나선다. 아, 이젠 정말 끝이다. 다시금 아득하다. 이제는 세상에 어머니가 안 계신다. 이제 우리는 고아다. 쌀쌀맞아도, 배신 때려도 사랑해준 어머니가 없다. 다만 어머니의 미토콘드리아, 세포의 발전소나 같은 그것은 어머니를 사랑할 줄 몰랐던 딸에게도 남아서 살아갈 것이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큰아들에게서가 아니라, 그는 미토콘드리아를 나르는 딸의 계보가 아니니까.


그런데 어쩐다? 몸을 버리는 절차가 남았다. 우리는 갑론을박, 큰오빠에게 연락을 해? 말아? 누가 결정하는가? 작은 오빠 책임이야, 당연히. 원칙적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 여부라는 단어는 어불성설이다. 만장일치로 알려야 한다는 쪽이었다. 우리 모두 선할 수도 악할 수도 다 가능하니까, 누군가가 흘렸다. 배신 때린 자식이라 해도 마지막 이별의 자리에서 용서를 빌 시간은 있어야 한다는 것.


온대?

글쎄, 일단 알리기는 했으니까.

전화를 받긴 했어?

그러게, 어떻게 어젠 전화를 받데.


소식 있어?

응, 온다고는.

언제?

글쎄, 오겠다고 했으니 오겠지.

설마 싶은데.

설마 안 올까.

다음 하루 종일 화제는 문제의 아들이 초상마당에 오는가 아닌가에 집중된다.


소식 있어?

응, 온다고 했다니까.

언제?

글쎄, 조카 말이 아버지 모시고 온다 했다니까.

어머닌 맏손자를 무척 좋아하셨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이렇다 할 아파트에 새시까지 새로이 해주셨다던 생각이 난다.


그럼 입관 시간을 미룰까?

어떻게 그래?

그래도 와서 어머니 얼굴도 못 보면?

그렇다고 입관 시간을?

하긴 상복을 입으려면 미룰 수도 없고.


얼떨결에 입관 시간이 닥쳤다. 곱게 화장하신 얼굴에 평소에 준비해둔 연분홍과 연하늘의 수의를 입으신 모습은 옛날 궁중의 여인 같았다. 관속으로 내려가기에는 아까운 모습이다, 잠을 자는 듯, 아름답기까지. - 이상하다. 나는 평생 한 번도 어머니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곧 몸이 관 속에 내려진다. 그리고는 못들이 박힌다. 정말 끝이다.


못을 다시 뽑을 수도 있는 거야? 그때 누군가 자신 없이 물었다. 

무슨 못?

아니, 입관 식을 해버려서. 나중에 어머닐 보겠다고 우기면?

글쎄 뭐.

오긴 올까?

온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말없이 그 애가 왜 그런 엉뚱한 질문을 했는가를 느꼈다. 상주가 오기 전에 입관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호통 칠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다. 다들 슬슬 출입문 쪽을 힐끔거렸다. 그렇게 이틀째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 발인 식.

장례행렬은 10시에 장례식장을 출발할 예정이다. 조객들로 북적대던 어제에 비해 텅 빈 공간에는 조용하다 못해 썰렁한 기운이 감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피한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아무도 어제의 그 질문을 꺼내는 사람은 없다. 둘째오빠가 여전히 두 줄짜리 완장을 여벌로 손에 들고 안절부절못한다. 여차하는 순간에 형의 팔에 끼울 태세다. 시계는 똑딱똑딱 잘도 간다.


종일 비가 내린다. 무심한 봄 녘. 여린 초록빛 너른 들판 한 구석에 두루마기 대신 허연 비닐 비옷들이 춤을 춘다.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그렇게 셋째 날 하루도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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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Three Days」, 『펜광주』 9호, 2011.12.12. 19-32, 33-5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1. 17. 21:27

그들의 고통과 우리들의 당혹감 - 서용좌, <배달민족> 
                               
                                                                                     장두영
        

 

서용좌의 중편 <배달민족>은 개인사적 고통이 민족사적 혹은 세계사적 고통과 맟닿아 있도록 조직되어 있어 고통의 무게가 육중하다. ‘아비 찾기’라는 전통적인 모티브를 활용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걸쳐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굵직한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독일 남자와 한국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배요한의 아비 찾기와 배요한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의 아비 찾기라는 두 개의 임무를 겹쳐 놓는 자리에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배요한과 요하네스의 아비 찾기는 고스란히 배요한의 동생 배승한이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남긴 메모에 담기고, 형식상으로 서술자의 역할을 떠맡은 지방대 불문과 강사는 배승한의 메모를 받아 적은 필사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작가의 권위를 단순히 메모를 옮겨 적는 역할에만 충실한 필사자에게로 넘긴 마당에서 작품은 저자의 죽음을 외치던 롤랑 바르트를 연상하게 한다. 더욱이 배승한이 수집한 여러 인물의 회고와 기억의 파편들은 통해 20세기 독일 역사를 재구성하고, 산업화 이후의 한국 역사를 기록한다는 기획 역시 기억을 통한 역사의 구성이라는 포스트모던적인 발상을 따라가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총체라는 권위적 언설 대신 개인적 기억의 단편들의 얽어놓은 과정에서 진실을 복원시키기 위해 한 발짝 다가서려는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얼핏 ‘배달민족’이라는 고릿적 냄새가 나는 표제와는 달리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관통하면서 흐르는 혈통에 대한 관념에 대한 통찰이 빛나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요하네스의 경우 자신의 아버지가 유대인의 핏줄과 아리안 핏줄 사이의 흔적을 지우려던 모습에서 유럽 문명의 저변에 존재하던 인종적 편견을 건드리고 있다. 나치스 협력, 친미, 사회주의의 선택 등 요하네스의 아버지가 보여준 복잡한 행적을 통해서 독일 역사에 대한 지식이 펼쳐진다. 한편 배요한의 경우 배오한의 아버지 요하네스에 대한 추적을 통해서 독일 역사 속에 내재되어 있던 고통을 한국의 역사와 결부시키고 있다. 배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설정된 파독 노동자의 외화벌이는 곧 다문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향한 일종의 거울로 작용한다.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배요한의 부모들은 이제 이주노동자들을 수용하여 부리는 지위가 되었고, 과거의 유대인이나 한국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처지를 망각하게 되었다. 요하네스의 아버지, 요하네스, 배요한 세 사람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여전히 유럽을 떠도는 인물들이며, 그들의 행적은 고스란히 아직까지 크게 흔들리지 않은 ‘배달민족’의 신화에 대해 의미심장한 문제 제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작품은 당혹감에서 시작하여 당혹감으로 끝난다. 문득 배승한이 보낸 메모들을 받게 된 ‘나’가 “그것을 머릿속에서 정렬해야 하는 숙제를 안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배승한은 어떠한 의도에서 메모 뭉치를 보냈을까. 당혹감에도 불구하도 ‘나’는 숙제를 시작한다. 메모가 하나씩 정리되는 동안 계속해서 당혹감은 밀려온다. 입양아로 여겨지던 배요한이 사실은 배승한의 친형이었다는 것을 예감한 배승한의 당혹감, 독일 혈통으로 알려졌던 요하네스의 아비가 유대혈통을 버리고 숨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요하네스의 당혹감, 그리고 배달민족이라는 정체성의 신회가 나치의 정통성으로의 강조와 닮아있다는 사실은 알게 된 독자들의 당혹감, 나아가 그러한 ‘상상된 공동체’를 향한 신화에 침윤되어 있던 우리들이 앞으로 받아들이게 될 이방인들에 대한 태도의 준비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 우리 스스로를 향한 당혹감 등이다. 근대적 분류 체계에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들의 관념에서 혈통 문제에 관한 그들의 고통이 너무나도 소홀히 취급되어왔음을,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고통으로만 남겨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 느끼는 당혹감은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공백은 너무 길었다.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갑자기 전기가 나간 것처럼 내 손가락의 작동이 멈췄다. 애초에 이 기록은 뿌리 없는 나무에 물 주기였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구상도, 가닥도 없이. 흩어진 메모조각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리기. 나는 무슨 알갱이를 향해서 이 종이부스러기를 헤집고 있었을까. 벌써 스산한 계절의 축축함이 벤다.(252면)

작품의 서술을 마무리하는 대목에 삽입된 ‘나’의 고백은 작품을 다 읽은 독자가 느끼는 당혹감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의 치열한 삶의 흔적을 읽은 듯하면서도 한 편의 묵직한 역사서를 완독한 느낌이 곧 둔중한 무게로 머리 한 부분을 짓누른다. 기억의 파편을 모으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당혹감을 통해 목직한 여운을 감기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우리가 쉽게 해결하기 힘든 거대한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던진 화두에 대해 명쾌한 답안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바람에 불과하다. 개인사적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민족사적, 세계사적 고통에 대한 이해로 발전될 수 있다는 ‘당혹감’을 선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였음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한 당혹감은 곧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개인사적 고통을 집단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능숙한 필치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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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11월호 (통권 148호), 292~295,
                    장두영, 월평 : '고통의 상상력', 285~295 중에서.

* 장두영 : 2009년 <문학사상> 평론 부문 신인상 당선 등단.

           현재 서울대 기초교육원 전임대우 강의교수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0. 24. 22:56

        배달민족          
 


한 선생님!

…….

아홉 명입니다, 아홉.


가볍게 젖은 어깨를 털며 들어선 나에게 언어교육원 직원이 걱정부터 터뜨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쪽 책상에 앉아있던 그 남자는 괜스레 조금 허둥대고 있어 보였다. 그가 미안해 할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 미안해 할 일이 전혀 없다. 영어 세상에서 소외된 같은 제2외국어 권이라 해도, 일단 언어가 다르면 전공이 다른 것이다. 전공이 다르면 다른 쪽의 불행(?)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수 없다. 전공이 같아도 마찬가지다. 학계에서 살아남고 아니고는 도통 운수소관이었다. 그는 다만 소문만으로도 나를 안 되었다 싶어 하는 것이리라.


나에 관한 소문은 좀 초라하게 났을 것이다. 모교에서 버림받은, 한 때의 유망주면 뭣하나. 서울의 적당한 모 여자대학의 1회 졸업생. 외국 유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모교 강단으로 강사가 되어 돌아왔다. 8년 전 일이다. 그 당시 한참 돌아오던 해외파 박사들 틈에서 혜성처럼은 아니라 해도 충분히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인 줄로 알았다. 더구나 어느 대학이건 1회 졸업생은 유리한 고지를 반쯤은 점령한다는 통념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우수 대학들의 우수죽순격인 잘난 박사들보다, 사람들은 오히려 나의 밝은 미래를 점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은사님들이 연이어 정년이 다가왔다.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동안 저 아래 후배 하나가 역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 세대는 지성과 미모를 한 데 갖추는 세대였는지, 나의 비위로는 너무 여자 같아 보였다. 필시 학자적으로 부족할거라 단정하고 미리 얕잡아 생각했었나 보다. 선거는 마지막 한 표까지 개표가 끝나봐야 알고,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고 했다. 경력으로나 학자적 줏대로나 앞섰다고 자만했던 내가 후배에게 패했다. 이태 전 일이었다. 그제야 모교를 떠나고자 다른 대학의 문을 두드릴 생각을 해보니 학력에서 밀렸다, 유수한 대학들의 이름에 눌려서. 일단 서울을 떠날 요량으로 지방대학을 기웃거렸다. 안쓰러워하는 눈길들을 도망쳐 나오는 데는 성공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오늘 이렇게 참담하다. 봄비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에서 쉰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실내조차 축축해진다.


한 선생님, 아홉 명입니다. 벌써 네 시가 넘었는데요.


직원은 다시 말했고,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홉 명이면 폐강인 것을 누가 몰라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인문학 중에서도 그래도 외국어 강의는 도구과목으로 조금 쓰이고 있다 했지만, 그것도 나라 나름이다. 그러니 전국의 대학에 OO정보통신영어대학교 라는 간판을 갈아붙여야 할 지경 아닌가. 영어 일변도에다 최근에는 협력 수완으로 중국어와 근동의 언어들이 외려 주목을 받는다. 나는 점점 굳어지려는 입을 여는 대신에 눈을 들어 시계 쪽을 향한다. 무정한 시계는 멈추지 않고, 더 이상 사람은 올 것 같지 않다.


방법이 있어요, 궁여지책이지만. 우물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그가 등록을 했다, 엉뚱한 과목에 아주 엉뚱한 방식으로.


사무직원과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그가 제2외국어 팀장 배 교수였다. 오해하지 말라거나, 무안해 하지 말라거나, 그런 언급도 없었다. 이 엉뚱한 일을 호의로 해석한다? 강의 담당자가 속수무책이므로, 팀장이 책임진다? 규칙에 따르자면 폐강일 것을 면하는 일, 제2외국어 팀장이 그 일을 했다. 그것을 호의라 보면 호의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치명적인 모욕감을 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왔다. 밴댕이 소갈머리가 뒤틀렸다. 이튿날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서 폐강신청 절차를 밟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밤사이 구세주가 생겼나 보다.


한 선생님, 괜찮게 되었어요. 다 저녁에 등록을 하신 분이…… 컴퓨터로요. 바로 입금까지도 끝냈고요.

…….

열 한 명이 되었다니까요. 괜찮아요, 제2외국어 쪽은 보통 늘 그래왔어요. 이만한 수로 설강하는 대학도 드물 거예요.

그래도 이건.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마음 쓰지 마셔요, 배 교수님이 좀 고지식하세요. 아직 경험도 적으시고. 일단 폐강을 막는 것을 책임으로 아셔서 그러시는 거죠.

그럼 다시 명단에서 빼셔요. 당분간 얼굴 마주칠 일은…….

얼굴 마주치지 않으면?


그렇게 시작된 그와의 만남은, 어찌 보면 호의요 다른 한편 모욕이라는 이율배반으로 시작되었다. 애초 큰 규모의 조직체 안에서 데면데면 지낼 인연이었다. 도무지 인간과는 관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부만을 한답시고 살아버린 청춘이 이제와 안쓰럽게 돌아올 리도 없고.


나는 겨우 일 년을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드디어 겨울 강의가 펑크가 났다. 여름이면 저녁 시간이 겨울 들어서는 오밤중이 된다. 무슨 억척으로 늦은 시간 제2외국어 강의에 나방이가 꼬인단 말인가. 매번 폐강이 될까 말까를 애태우며, 불안정한 수입에 매달려 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도 불쌍했다. 나는 아예 그만 둘 생각으로 담당인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 송구영신. 이렇게 옛날사람이 되어갑니다. 다른 곳을 향해서 걷는 느낌이면서…….

받은 문자함에 메시지가 떴다. - 지상의 삶은 또 다른 별에서 만날 인연… 추위에 건강…

받은 문자함의 답은 반쪽짜리 줄임표까지 합쳐도 겨우 54자. 간단한 말로는, 이제 다른 별에서나 봅시다. 옳은 말이다. 이승에서 더는 볼 일은 없다! 지나간 인연은 지나간 인연이다, 악연이든 아니든. 악연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 일도 없지만, 좋은 인연이라고 해서 늘이려고 하면 그 성격이 변하고 만다. 짧을수록 좋은 것은 미니스커트와 연설이라더니, 거기에 인연을 더해야 할 것 같다.


그렇습니다. 옛사람은 지나가는 겁니다.

눈으로만 문자를 쓴다.

다른 별에서나 만날, 이승에선 다시는 볼 일 없을 사람에게 건강은 무슨.

건강은 무슨. 그런데 이렇게 예의바른 민족이 우리민족이다. 배달민족.

그리고 갑자기 화두가 떠올랐다. 내가 만일 소설을 쓴다면 첫 소설의 화두는 바로 배달민족일수도 있겠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일 테니까.

웬 소설? 혼자 쓸쓸히 웃는다.

소설을 아무나 쓰나.

하지만 평생 소설에 관해서 매달리어 온 것이 전부인데, 달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옮겨가고 싶은 고장도, 눌러 있고 싶은 생각도 정리가 안 된 채.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책장이 붙은 책상 하나가 전부인 원룸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불 하나를 끄면 암흑이다.


그렇게 세월이 가던 봄날이었다. 6년간의 모교 강단이 아리게 어른거렸다. 분홍 빛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었구나. 지방대학의 시간은 부질없었다. 아예 강의를 잃은 봄은 말 그래도 나른했다. 잔인한 사월? 사실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습관처럼 이메일 박스를 열다 눈에 띈 그의 이름. 그에게 무슨 일이? 결혼 소식? ‘배승한’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에서 상상되는 것은 그에 관한 어떤 소식일까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설마? 다행스럽게도 - 다행스럽게도? - 그것은 그에 관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의 결혼 소식도, 사고 소식도. 실망스럽게도 또한 - 물론 내가 그로부터 편지를 기다린 적은 없다 - 그것은 그의 편지도 아니었다. 편지글이라면 있어야 할 서두조차 없는 글. 어떤 의미에선 그것들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확증도 없었다. 우편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 문자 메시지가 이렇게 짧을까? 메시지보다도 짧은 이메일.

그리고 우편물이 도착했다. 가끔은 수첩에, 가끔은 작은 노트에. 다만 메모조각들. 담화표지를 완전히 무시한 글. 글이라고 할 수도 없는 메모. 메모의 연속. 혼란된 메모 조각들. 왜 이것들을 나에게? 그러나 나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정렬해야 하는 숙제를 안은 느낌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정리한 것은 그의 메모 순서가 아니다. 메모에 날짜가 불분명했다. 날짜는 대개 있는 편인데, 가끔 연도가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순서를 덜 헷갈리게 하려고 애를 쓴다. 가능하면 시대 순으로. 그의 아버지의 과거에서부터 그의 현재를.


*


아버지, 파독광부


그는 독일 태생이었다. 그가 독일에서 태어나게 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1970년대 한국판 엑서더스, 노동 엑서더스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해외파견노동자 일세대로 독일에 나갔다가, 아내와 아들(?) 둘 사이에서 줄타기 삶을 살았다.


그의 메모에는 객관적인 자료들로 넘쳐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자료들과 아버지의 삶 사이에서 무엇을 찾으라는지. 해외파견노동자라면 대개 사우디에 파견된 건설노동자들을 생각하지만, 최초의 해외건설사업은 1965년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에 진출한 것이 시초였다. 그보다 앞서 1963년 12월 20일에 이름 하여 서독광부 파견을 위한 결단식을 치른 250명의 대한민국 국적의 남자들이 선발대였다.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뽑힌 젊은 광부들은 서독의 채탄기술을 배워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이튿날 1진 120여 명이 서독으로 출발했다. 그러니까 1963년 12월 21일, 중학교 책에서 들어봤던 루르탄광지대를 향해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에어프랑스 기내에는 123명의 광부들이 타고 있었다. 월급이 162달러 50센트로 계약이 되어 있으니 두려움은 설렘에 녹았다. 지엔피가 80달러 이쪽저쪽일 때였으니 기가 막히는 수입이었다. 그때 1달러가 한국 돈 250원인가 260원 정도였으니 어땠겠는가. 한국은 여전히 열에 세 명은 실업이었고, 통계가 그렇지 사방에 널린 것이 실업자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0년대에 수천 명의 우리나라 광부들이 서독으로 진출했다. 1967년 이른바 서독 간첩사건으로 서독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광부파견이 중단됐지만, 이후 70년대에도 우리나라 광부 수천 명이 서독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 배 아무개 씨는 1971년에 스물 네 살의 나이로 독일의 탄광으로 흘러 들어갔다. 첫 지망을 망설이고 소위로 못 박았던 형이 5000원도 못 받는 월급을 한탄했던 일을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그때 군 동기 중에 서독광부로 간 친구는 근 열 배의 월급을 받는다던 형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었다. 그뿐이 아니다. 1965년 10월 그 이름도 용맹한 육군 맹호부대 파병에 자원했던 형은 그곳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긴 긴 일 년이 지나고 어느 날 106 후송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고 전갈이 왔다. 그러니까 1967년 4월 중순 경 치탄의 308고지에서 의식을 잃고 후송된 것이 마지막 행적이었다. 행불자가 된 것보다는 낫다고…… 보고된 것이 전부였다. 행불자라면 시신을 수습하거나 확인하지 못한 미 귀대병을 말한다고 했다. 더욱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을 수도 있었으니. 그러나 얼마 뒤 두코전투의 주역이었던 같은 맹호부대 기갑연대 x중대 y소대장은 복부 관통상과 머리, 팔 등 엄청난 총상을 입고 전장에서 의식을 잃었지만 몇 주 후에 의무중대로 살아 돌아왔다는 기적 같은 소식도 있었다. 목숨만 붙어 들어오면 반드시 살려낸다는 미군 이동외과 병원 덕택이었다고. 운명의 여신의 심사를 누가 알랴. 그때는 형이 미군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했던 것이 한이었다. 미군은, 형의 편지에 보면, 적의 시체들도 한 데 모아 덮어서 장사를 지내준다고도 했었다. 다른 증언들에 따르면 더러운 짓도 했다지만.

어쨌거나 집은 형의 죽음만 빼면 다른 것은 더 나아졌다. 미국은 한국군을 차출하기는 2차 대전의 일본과 마찬가지였지만, 대우에서는 크게 다른 나라라고 여겨졌다. 일제 때의 초근목피 대신 미국과 관련해서는 곁에 가면 떡고물이 있었다. 형은 죽고 떡고물이 남았다. 그가 대학 문턱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형의 떡고물, 형의 죽음이 가져온 떡고물 덕이었다. 문제는 형의 죽음을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폐인처럼 몰골이 변해갔다. 형의 죽음 값으로 산 논밭을 어찌 벌어먹느냐고, 건사를 못하시더니, 결국 아무렇게나 다 넘겨버렸다. 가세는 다시 기울었다. 그래서 그가 떠났다. 1971년 독일로 떠났던 그가 1976년 말 돌아올 때만 해도 환율이 500원쯤이었으니 일단 그 돈은 대단한 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


이역만리에서 한국 남녀들은 그나마 동포끼리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교회의 선교활동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게 독일교회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보는 곳에서 나는 아내를 만났다. 저녁이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촐한 한식식사가 우리들 마음을 녹여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유난히 영이 순이의 얼굴이라서 눈에 띄었다. 내 눈에 띄었다. 아내 옆의 여자가 고급공무원 중에서도 지원해서 서독간호원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강조했다. 첫 파견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아내도 그 대단한 분 이야기를 지금도 심심찮게 한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그 양반은 지금도 한의약박물관에 자원봉사를 나가 안내를 한대요. 자원봉사 경력은 무려 20년도 넘고, 봉사시간만 따져도 3만 시간이 넘어서 ‘서울을 빛낸 인물 600명’인가 그런 어마어마한 기록에 들어 있다더라고요. 기네스북보다 나은 것이, 남산 서울타워 아래 타임캡슐로 보존된다나요. 텔레비전에도 나왔고요. 암튼 첨에 간호고등 나와서 동두천의 외국사람, 미국은 아니고 어디 외국사람 야전병원에 취직해서 서양말을 배웠다느만요.

누가 뭐래요, 능력이야 타고 나는 것이제.

아니, 의사들이 영어를 쓰니까 저절로 배웠기도 허겄지요.

암튼 공부를 더 해가지고 나라에서 필리핀인가 어딘가로 유학을 보내주어 또 공부를 하고 그러다보니 보건부라던가 그런 데서 공무원이 되었대요. 그런데 여보 들어요?

그래 내 가만 들을 테니 마저 해봐요.

그런데도 서독에 젤로 먼저 갔더래요. 일단 돈을 더 받으니까. 그 양반 참 대단한 것이, 결혼도 했는데 갔더래요. 아무리 서양말이라도 다 같은 건 아닐 테니 고생했겠지만, 어디 아예 외국말 깜깜한 우리하고야 같았겄어요.

당신은 어쩌다가 ……, 그래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나는 지쳐서 떠났다니까요. 어디에서도 지쳤더랬어요. 워낙 시골이다 보니까 곰수리에서 대처로 나와 고등학교 공부했으니, 것도 대단 했죠. 그래도 중고등 6년을 자취하면서 다녀 봐요, 늘 지쳐있었다니까. 빨래와 밥해 먹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된장까지 직접 담가 먹어봤나요?


첨에는 아내의 이야기 중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더러 있었다. 어린 나이에 살림을……. 나중에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나는 진짜로 날 낳아준 엄니가 다른 식구들 눈치봐가며 꾹꾹 눌러주는 밥을 먹고 자랐으니까.


난 일찍부터 독립한 거요, 쌀만 가져다 묵었제. 자취할 때 한 방 쓴 친구도 일가는 일가였어요, 같은 고향. 부락은 달라도 같은 성씨에 같은 고향이었죠. 그런데 제 외사촌언니 자랑이 시끌벅적했어요. 그 언니가 외국에서 돈을 번다고요. 서독이라는 나라에 간호사로 취직했다니.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귀가 번쩍 했다니까요. 서독이 뭐예요. 독일, 독일, 라인 강의 기적 독일. 아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외국 아녀요? 일본도 중국도 아닌 진짜 외국? 정말 아무나 무엇이 되는구나. 당시는 신문에 서독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와 간호보조사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매일 실렸어요. 그때는 큰 병원의 정식 간호사들도 대우가 좋다는 소식에 독일 취업을 신청하는 분위기였고, 막 고등학교 교련교사 발령을 받았는데 우리가 탄 비행기에 함께 타고 간 선생도 있었다니까 그래요.

그래 누가 뭐라요.

아내는 허리를 세우는 척 하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는 것이리라.



어머니 


유순한 사람이 되라고 붙여준 이름을 가진 유순은 유순했다. 그 또래의 고향 여자아이들은 다 유순했다. 사촌들이 일찍 대처로 나가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유순 또한 일찍 중학교 시절부터 대처로 나와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만, 이번에는 사촌들처럼 서울까지는 따라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유순을 다시 고향으로 유혹하는 것은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찾은 돌파구는 바로 서독 행이었다. 간호원양성소를 수료한 후 서울에 있는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서독병원 취업을 지원했다. 그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병원 측에서 취업허가가 나오면 독일취업비자를 신청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석 달이나 독일어를 배워야했다. 지방의 여고에서 독일어를 2년이나 배웠다는 사실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독어공부는 뒷전이었었다. 1, 2학년 때에는 서독 간호원 생각을 미처 하지 않은 때였고, 영어 다음에 또 배우는 외국어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때 열심히 따라하지 않았던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단어나 문장들이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라도 있었다. 생판 독일어를 모르는 다른 이들을 보면서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구텐 타크, 이히 코메 아우스 코레아. 이히 프로이에…….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만나서……. 다른 사람들은 ‘코레아’란 발음도 틀렸다.



어머니의 이야기


1972년 11월 30일이었다. 그때는 김포공항에 가보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나 같았다. 우리 마을에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떠나 본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전세비행기라 했다. 비행기에도 전세가 있나? 어쨌거나 전셋집이 그냥 집만 못한 것처럼, 전세비행기는 그냥 비행기만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만 비행기가 어쩌면 좋은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전세라면 온통 우리만 탄다는 것이란다. 그런데 우리나라 비행기가 아니고 일본 비행기였다. 일본비행기라면 더 나은가? 그땐 분명 뭐든 한제보다는 일제가 더 나았다. 비행장은 북새통이었다. 우리 같은 간호보조사와 진짜 간호사를 합쳐서 250명이 타고 갈 비행기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이 두 배는 넘었다. 우리 식구들은 없었다. 3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나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큰집에 계시는 할머니께는 인사를 갔지만, 3년 그런 소리는 잘 못 알아들으실 만큼 귀가 먹었으니까. 어머니, 동생들의 어머니한테는 3년 뒤에 오겠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3년 뒤에 오는 것은 나도 잘 몰랐다.

버스 보다 몇 배나 커 보이는 비행기에 질렸다. 지레 겁이 났다고 해야 맞다. 가벼운 연도 가끔은 곧장 가라앉는데, 이 무거운 것이 어떻게 뜰까? 그런 염려를 뒤로하고 비행기는 구름 속으로 둥실 떠올라 들어갔다. 비행기는 정말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물리시간에 배운 무엇인가를 실제로 경험하기 위해서 용을 쓰고 느낌을 갖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북극이다. 알래스카. 어쩌면 내가 북극에 오다니. 밖으로만 내다 본 북극이 아쉬웠다. 그 매서운 공기를, 북극의 겨울 공기를 꼭 만져보고 싶었는데. 그냥 쉬기만 한 비행기는 다시 이륙하여 마침내 12월 1일 드디어 독일 땅에 착륙했다. 그곳은 이름이 프랑크푸르트, 지금도 유업의 돈이 넘실대는 곳이지만, 그 때는 세상의 중심인 듯 했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어딘가로 흩어질 모양이었다. 또 한 번 어수선한 수속을 마치고 모두 쌕쌕한 짐 가방을 들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온 데 서독 지역 병원에서 온 버스며 승합차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들 몇은 당나귀 음악대로 유명한 곳 브레멘으로 갈 것이었다. 버림받은 당나귀, 개, 고양이 그리고 수탉의 처량했던 출발을 상상하며, 또 멋진 결말을 우리 것인 양 상상하며, 의기양양하게 승합차에 올랐다. 정확히는 우리가 브레멘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브레멘까지 가기 전에 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못 미친 빌데스하우젠이라는 도시에서 멈췄다. 한 번 멈췄던 시간을 빼고도 다섯 시간 이상을 달린 뒤였다. 산간과 숲에 둘러싸인 곳으로, 가보지도 않은 강원도 어디 쯤 같은 곳이리라 느껴졌다. 그러나 초가집이나 판잣집 대신 어딜 가나 빨간 지붕들이 초록빛 나무들 사이에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누군가의 집이 불쑥 커서 뒷집의 햇빛을 몽땅 빼앗아버리거나 그러는 일이 없어보였다. 희한했다. 일곱 난장이들처럼 똑 같이 작달만한 키의 집들이 일곱 여덟 씩 있었다. 바깥 창틀도 약속이나 한 듯이 동네마다 밤색이면 밤색 흰색이면 흰색이었다. 그건 참 신기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보름 전쯤 시간당 200킬로미터가 넘는 태풍이 몰려와 건물이며 차량이며 완전히 망가진 일들이 널렸더란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태들을 알지 못했다. 기숙사에 갇혀서? 그랬다. 기숙사에서 단 하루를 쉬고 월요일부터 근무에 들어갔다. 1972년 12월 4일 월요일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시간이 늦게 간다고. 이상한 체험이었다. 물리 시간에 배운 그대로, 고향의 할머니는 벌써 오후 곁두리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서둘러 일어났다. 사실을 거의 밤을 새웠는데, 그게 시차랬다. 그리고는 새로운 시간에 새로운 공간에 갇혔다. 그냥 부품나사처럼 시계추처럼 건물 안에서 건물 안으로만 이동했다. 뉴스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컬러텔레비전이라는 것이 나온 지 몇 년이 안 되었고 참 신기한 것을 틀림없었지만,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구텐 타크’, 그건 별 소용이 안 되는 독일어였다. ‘구은 타, 타’ - 그렇게 여기에 와서 배운 독일어가 더 유용했다. 아니, 아예 어색한 웃음기가 더 잘 통했다. 검은 머리의 우리는 백의의 천사였다. 미소는 사람을 천사로 만들어주니까. 사람들, 독일 사람들은 천사에겐 슬픔도 고통도 없는 것이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슬픔이나 고통 같은 무거운 감정들은 없는 인형 취급을 받았다.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부지런한 인형.

때로는 인형이 복도 터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일가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독일할머니가 죽었는데, 침대 머리맡에 넣어둔 종이돈 다발을 몽땅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그냥 슬쩍 갖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병상의 할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뭐라고 하던 말 중에, 우린 몰랐지만, 미리 옆자리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더란다. 자기가 죽으면 아무개 간호원 주라고, 평생 처음 손톱발톱 깎아주는 젊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고. 실제로 서양 노인들은 너무나 뚱뚱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러면 자신의 발을 만질 수가 없었다. 영락 그림책에 나오는 마귀할머니 몰골이 되어있는 손톱 발톱을 깎아 주는 일은 우리들에겐 어렵지 않았다. 나도 할머니한테 가면 늘 손톱발톱을 깎아드렸었다. 그만 한 일에도 이 할머니들은 ‘당크 당크 힙시 힙시’ 그렇게 우물거렸는데, 고맙고 예쁘다 그런 말인 것은 나중에야 알아들었다.

물론 그런 일들은 한 참 뒤에 병실에 배속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처음에 우리들 간호사도 아닌 간호보조사에게 돌아온 일은 응급실과 영안실 사이 심부름이었다. 일이 별로 없는 날에는 응급실과 영안실의 깨끗한 의료집기들을 다시 닦는, 해도 안 해도 되는 일을 할 때도 있었다. 다 씻은 식기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제거하는 일 같은 것은 너무 쉬웠다. 이런 일 시키려고 비행기 태워서 사람을 사오는지, 그 부자 나라가 한심하기도 했다. 물론 알코올 솜으로 시체 닦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쉽고 편했으니 오지기만 했다. 나중에 병실에 배속되었을 때에도 간호보조사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간호사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병실을 찾아가 장갑을 끼고 환자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일은 그 중 일다운 일이었다. 양국에서 병실로 약을 가져다주는 일, 변기를 대주는 일, 변기를 빼내는 일, 환자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일, 식사를 거두어들이는 일. 아, 나중에 들으니 전설적인 아줌마 간호사들도 독일에서 일했다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여섯 모두 처녀들이었다. 어쨌거나 꿈 많은 처녀들. 우리는 말썽 없이, 사랑까지는 아니라도 귀여움을 받을 만큼은 열심히 일했다.


정말 어색했던 일은 우리가 그 나라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일이었다. 열흘 쯤 되었을까, 아무튼 얼마 만에 우리 여섯을 한 곳으로 부른 병원관계자는 우리에게 서양식 이름을 하나씩 지으라고 했다. 환자들은 물론 병원 사람들이 우리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제대로 부를 수도 없다고 불평을 하기 때문이라 했다. 성을 갈라는 말은 다행히 아니었지만, 우리는 저마다 아는 독일이름을 생각해내야 했다. 나는 생각나는 이름이 성모 마리아밖에 없어서 마리아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리아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할 수 없이 언니뻘에게 양보를 하고서 메리라고 하려다가 사람들을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그게 그것이랬다. 아무튼 독일소설 어딘가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떠올라서 그냥 루이제가 되기로 했다. 마리아, 루이제, 사라, 엘리, 주잔, 로테. 이 무슨 이름들인가, 누런 얼굴에 물고기 눈을 한 검은머리의 처녀들이. 하긴, 여기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어차피 서양식 이름으로 따라야 했다. 그건 그랬다. 고향 친구 중 언니 하나가 한국에서도 유난히 그런 서양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았다.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서 루이제였다.


최근 들어서는 그 독일에서 외국인 거주자들을 아주 색안경으로 보는 풍조가 생겼다 해서 놀랐다. 참 웃긴다 싶다. 그때는 아쉬워서 데려가 놓고, 이름까지 저희들 식으로 고쳐 불러놓고서, 거기 뿌리 내리면 미워하다니. 우리들 중에는 그곳에 남아서 출세한 사람도 있다. 또 가끔은, 아주 가끔은 늦은 나이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열성파들이 있고, 그렇게 해도 성공하기도 했다. 아무튼 성공한 경우라면 꽤 유명한 화가가 된 사람도 있으니까, 물론 독일이름으로. 독일이름이란 독일남자와 결혼해서 생긴 이름이다. 연애가 상당히 인생을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이 독일남자와 연애를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연애 - 우리는 물론 사랑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싶지만, 사람들은 그냥 연애라 그랬다. 마리아, 루이제, 사라, 엘리, 주잔, 로테가 모두 연애를 했다면 그 말은 틀렸다. 누가 연애를 하는지는 금세 드러났지만,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내밀하게 알지도 못하니까 말할 수도 없다. 독일남자 조심해라, 연애로 끝나고 마니까! 그것이 우리들에게 내려진 금기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용돈이 많이 들고, 용돈을 아껴서 고향에 보내려고 타국에 온 그 목적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독일병원에 취업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들어간 돈부터 갚아야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돌아가신 집안은 누군가가 일으켜야 했다. 그때 돈 400마르크씩은 누구나 집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용돈으로 50마르크 정도를 남겨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아껴서 현금이 불어났다. 돈을 쓸 일이 없었다. 고사리를 뜯어 말리다 냄새 때문에 혼이 나기도 했지만, 우리는 억척스레 먹을 것도 아꼈다. 병원식당에서 먹을 때 많이 먹어둠으로서. 그렇게 1년 쯤 지나자 고향집에 텔레비전을 사드릴 수 있었다. 누구나 대개 그랬다. 딸을 독일 간호원으로 보낸 고향집은 활발해진다는 것이었다. 정신을 다잡고, 연애 같은 것은 말아야 했다.


그래도 3년 째 되던 해 여름, 우리도 독일 간호원들처럼 난생 처음 휴가라는 것을 떠나보기로 했다. 말하자면 유럽여행이었다. 하필이면 우리는 독일의 북쪽에 쳐 박혔으므로, 독일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남쪽을 향하기에는 돈이 빠듯했다. 그래도 여행에는 흐름이 있었다. 다들 남쪽으로 떠나는 것이 휴가인 줄 알았다. 우리도 그런 때도 있었다는 말이다. 돈이 중했지만 한번쯤은 숨통을 터야 살았다.



다시, 어머니


정작 3년간의 계약이 끝났을 때 유순은 브레멘의 다른 병원에 계약을 했다. 왜 꼭 브레멘에 가고 싶었을까? 여전히 그림동화에서의 브레멘 음악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낭만적이기는 틀린 나이였는데도. 게다가 취업할 수 있는 병원은 많지 않았고, 정신병원에 일을 얻었다.

인구 50만이나 될까, 유순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한국의 지방도시의 인구정도였지만, 면적은 엄청났다. 사실 브레멘의 면적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6년간 학창시절을 보낸 중소도시에는 고작 시내를 가르는 하천이 있었을 뿐이나, 브레멘은 가도 가도 끝없는 강을 끼고 양쪽으로 도시가 뻗어 있었다. 강을 몸으로 치면 정강이 까지는 작은 배들이 올라 다니는 항구였다. 환자들을 보며 차츰 알게 된 일이었지만 사실 순 백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강산업 등 노동자들이 많아 다른 인종들도 섞이어 있었다. 그곳의 외지인이라 해도 물론 우리 같은 동양인이 아니라 얼굴선이 날카로운 중동인들, 그러니까 중간쯤 되는 사람들이었다. 저절로 숙연해지는 역사를 자랑하는 시청건물은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때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다고 들었다. 복음교회라나, 우리나라 말로는 개신교들이 대부분이라는데도 성당 같은 건물들은 여전히 많이 보였다. 유순은 기독교신자가 된다면 성당 때문만으로도 가톨릭이 되고 싶을 것 같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할 때 쯤 그러니까 76년 봄, 브레멘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한인 천주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렸다. 계속 독일에 남아있었더라면 혹시 모를 일이었다. 다만 성당 속에 들어가 앉아있기 위해서라도 그곳에 가게 되었을지. 그때 유순은 무엇인가를 약속하기 위해서라도 신앙심이 절실한 때이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


네 어머닌 우리가 독일에 도착할 무렵 벌써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미국으로 떠난 한국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더구나. 미국에서는 그때 한국의 간호원자격등을 그대로 사용하여 취업할 수 있었다 했고, 한 번 서독에서 살아본 사람들이라 미국이라고 별 다르겠냐고 그런 생각들이라 했다. 똑똑한 누군가는 미국에 가서 대학에서 장학금 받고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 미국에는 간호원이면서 암에 관련된 공부를 하면 장학금을 주는 대학도 있었다고 하더라. 실행은 못해도 그런 꿈들을 꾸었더래.

물론 네 어머닌 그런 꿈을 꿀 위인은 아니었지. 네 어머니가 맡게 된, 결국 내가 맡아야 할 네 형 요한의 문제도 컸다면 컸다. 형은 네 어머니의 죽은 언니가 남긴 아들이었다. 친언니는 아니지만 여기 와서 외로운 생활들 견디면서 동기간 같아진 사람. 그 언니가 벌써 오래 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라.

그 언니는 내나 네 어머니랑 비슷한 운명으로 외국에 돈벌이 나간 신세. 그 언니의 이야기라 해서 네 어머니 이야기와 다를 바 있겠느냐. 독일에서 일했던 한국인 간호사에게 그 사회에서 개성이라거나 감정이 무슨 작용을 했겠냐 말이다. 문제는 그 연애였제.


아버지가 들려준 어머니의 언니뻘 간호사의 연애는 처음부터 암담하게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환자로 맞닥뜨린 남자, 그 백인 남자의 모습은 예수 같았더란다. 영화에서 본 예수. 독일에 처음 만나본, 주위에 흔한 아주 희멀건 뚱보들 사이에서, 그는 오히려 눈에 띄었다. 조금 짙은 머리카락에 다소 가라앉은 얼굴색을 한,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그럼, 첨엔 다 똑 같더라, 독일이나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나. 다 어려운 독일말 멋들어지게 하고. 한국처녀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나라 오스트리아라면 무조건 감탄의 대상이었겠지. 네 어머니라도 그랬을 것이야. 그럼, 그 사람이 조금은 덜 서양 사람처럼 생겼다 했제, 그러면서 키는 훤칠하고. 아무튼 그런 인상을 다들 다정함으로, 고향의 느낌으로 느꼈더래. 거기까진 아름답지. 다음은 비극적인 연애의 시작이었지, 다른 한쪽은 일탈의 시작이었고.


연애? 시작은 허망했다더라. 아버지는 말을 쉬이 잇지 못하셨다.

요하네스라는 이름의 독일남자는 오른쪽 팔다리가 다 부러져 들어온 환자였더래. 난생 처음 만난 제 누이와 더불어 여행 중이었더래. 누이랑 어떻게 난생 처음으로 만났냐고? 그거야 거기 서양 사람들한테는 흔한 일이기도 하지. 아, 동서독도 우리 남북처럼 갈려 사니까 더더욱. 암튼 둘은 시인이었다는 저들의 아버지가 태어난 도시까지 가려다가. 운전은 누이가 했고. 이 독일이란 나라가 제한속도가 없는 나라지 않냐. 둘 다 초행길이었고. 그렇게 해서 병원에 실려 온 것이었지. 누인 곧 떠나고. 어디로? 제 자리겠지.


연애? 결과는 참담했지 뭐. 그 남자는 일단 빈으로 돌아갔고.

그럼 빈 사람?

그가 빈 사람은 아니고, 동독에서 빈으로 유학 나온 사람이었더래. 제 아버지 고향 빈에 가서 누이를 찾아 나선 것인데, 처음 만난 것이었대. 아무튼 언니는 독일을 떠나 빈으로 직장을 옮길 수가 없었다더구나. 당연하지, 계약은 독일 계약이고. 오스트리아가 좀 복잡한 나라냐. 그때도 파리에도 그냥 가는데 오스트리아는 통과만 하려해도 비자 받아야 하고 어쩌고, 중립국 아니냐. 물론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일은 계속하는데, 뱃속에 아기의 생명을 의식하자 어쩔 줄 몰라 했겠지. 곧 배가 불러왔고, 그것이 직장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람인 언니는 미혼모가 될 예정이었기에 수치심이 어쨌겠어? 아기를 낳고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을 때 요하네스는 어느 새 베를린에 있었다던가. 그러다가 더 멀리 동독으로 돌아갔겠지. 원래 왔던 곳으로. 그것 까지여.


동독 - 동독이 어디냐. 그곳이라면 그 언니가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도 죽어도 갈 수 없는 땅, 공산주의 나라로 돌아간 것 아니냐. 그때 언니는 삶을 포기했다는구나. 자살? 그런 건 아니지. 나는 어쨌거나 잘은 모른다. 산후에 그냥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앓아누웠는데, 병원에 함께 있던 한국 간호원들이 아기 요한을 돌보았지. 아기 이름은 따로 지었다기보다는 아기 아버지 요하네스를 줄여서 부른 이름 그대로였대. 아기와 아버지가 무슨 차이가 있었겠어, 애 엄마에게는. 아이 엄마가 막상 그렇게 죽어가는 중에 네 어머니가 계속 내 얼굴만 보더구나. 네 어머니랑 내가 미래를 기약할 만큼 가까이 의지하고 지내던 때였으니. 요한은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게 되었지. 절차가 간단하지만은 않았지만, 어쨌거나 한국 여자가 낳은 아이를 한국 부부가 키우겠다니 일이 쉬었지. 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따라갔는지 모를 일이야. 암튼 그 덕택에 결혼이 급물살을 탔지. 결혼 하나는 독일이 간단하더구나.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 제대로 하자고 하고, 그냥 한국교회 목사님에게 갔어. 결혼이 성립되니까 입양은 아주 쉬웠고. 어쨌거나 우린 곧 귀국을 서둘렀지. 최소한 한 달을 남겨두고는 그만둔다고 말해야 하더구나.



형을 찾아서


그러니까 내가 독일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결국 형을 뒤따라간 여정이었다. 형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군대에 들어갔다. 한국인 남자에게 군필은 유학의 필수 조건이었으니까. 그리고는 제대하자마자 서둘러 독일로 떠났다. 한국에서 자란 청년답게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서. 여권에도 분명한 한국인 배요한이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나 오래 동안.


형 요한은 자신의 처지와 친부의 존재를 일찍 알게 되었다. 서양 남자였던 친부보다도 더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한 눈에 동생인 나의 비릿한 모습과는 대조되었다.


큰 아는 참 다르게 생겼네여.

글쎄, 어메 아배가 서양밥 묵다가 낳아서 그렇겄제.

아니, 영판 달라.

둘짼 여기 와서 낳았으니까 다른 거지, 뭘 그래.

그래도.

조용 혀, 한 날 한 시에 난 손가락도 길고 짧은디 뭘 그러나.


두 살 가까운 터울의 두 아들을 흔적 없이 키우려던 부모님의 소망은 일찍 깨졌다. 독일에서 낳았으니까, 독일에서 독일 소시지 먹고 낳았으니까,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배달민족에 다른 피가 섞이면 사뭇 다르게 나왔다. 그렇다고 형이 크게 말썽부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형이 형이라고 큰 소리 한번 치지 않은 것이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었다.

형은 초등학교 졸업 쯤 해서 독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국인 어머니의 이야기도 함께였을지? 그때 어머니는 요하네스라는 본명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요하네스라고 부르는 일은 없었다. 요한과 승한 사이에서 이름이 변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우리를 차별하지 않았다. 크게 배운 것 없는 어머니지만 참 너그러웠다. 직업이 백의의 천사였으니까 뭐. 어머니는 젊은 시절 그렇게 고생해서 모은 경험과 돈을 가지고도 그대로 시골에 살았다. 아버지의 고향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왜 어머니의 고향이었을까, 진짜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안 계신 고장인데? 그 생각엔 곧 답이 나왔다. 아버지의 고향에서라면 형과 나와 다른 얼굴로 살아가기가 더 수월하지 않았을 것임을. 물론 아버지의 고향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농부이자 목수이며 모든 것을, 어머니는 온 동네 의사와 간호사를 겸하면서 부지런히 사셨다. 키위라는 이상한 종의 식물재배에도 성공했고, 오리농사로 질 좋은 쌀 생산을 들여와 동네는 전체로 넉넉해졌다. 그래서 형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입대를 서둘렀을 때 많이 서운해 하셨다. 그렇지만 어서 군대를 마치고 독일로 유학 가겠다는 설명에 걱정 반 희망 반으로 그런 승낙을 하신 것이다.


형은, 요하네스 베르너는 배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뮌헨의 괴테어학원에 등록을 하고 떠났다. 그러니까 처음 기착지가 뮌헨이었다. 자신의 출생지 브레멘이 아니라 뮌헨을 선택했을 때, 괴테어학원 본부가 있는 곳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형이 일부러 뮌헨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을 알았다. 형의 아버지가 당신의 누님을 만나서 지진과도 같은 충격에 쌓였다던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남은 우리 모두는 형이 브레멘이고 어디고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을 것임을 안다. 내가 형이라도 그랬을 것이니까. 내가 대학 일학년 때의 일이었다.

형으로부터 소식은 점점 느려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드물었다. 그러다가 뚝 끊겼다. 나도 곧 군대에 입대했으므로 어머니는 두 아들의 편지를 바라느라 야위어 갔을 것이다. 휴가 때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놀랍게 초췌해 갔다. 한번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란 군대 동기생들 누구라도 어색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시대가 그랬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는 일도 창피한 일에 속했다. 그래도 가끔 씩 어머니는 편지를 보내셨다. 형 때도 그랬고, 군대에 면화를 오시거나 그런 부모님은 아니셨다. 우리고향에선 아들 군대 면회 다니고 그런 집은 없었다. 그러니 궁금한 마음에 편지를 쓰셨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어머니가 쓰시는 편지는 형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어머니는 형의 소식이 더 궁금한 것이다. 그런데 형으로부터는 소식이 거의 없었으니까 내게 편지를 쓰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형하고는 주소조차 끊긴지 한참이 지나있었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의 일상은 전방에서 보낸 군대 때보다 더 전투 같았다. 나는 어쨌거나 형의 흔적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장학금을 받아서 독일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독일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지역 통틀어서 한두 명 뽑는 선발시험에 어찌 붙는단 말인가. 그래도 전력투구를 감행했다. 졸업 전에 시도한 시험에서 한 번 떨어졌다.


한 번의 실패는…….

아서라, 우선 떠나거라.


아버지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네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고요? 어디가 특별히 안 좋으세요?

보면 모르겠냐. 어디가 한참 안 좋다. 통 밥을 못 드신다. 네 형이 시작했던 어학원부터 가서……. 요하네스 베르너, 거기서부터 살펴라. 그 사람 아버지는 시인인가 그랬다더라.


그 정도의 말씀에 일 년을 더 시험 준비로 보낼 수는 없었다. 형과 같은 코스로 뮌헨의 괴테어학원을 목적지로 일단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는 앙상해진 손으로 봉투를 쥐어 주셨다. 아버지 모르게. 정 막히거던, 정 어렵거던 그때 펴 보거라.


그런 부탁을 정 어려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나는 그래도 여정을 꾸려 출발할 때까지 봉투를 열지 않았다. 네덜란드항공사 비행기가 암스테르담으로 도착해서 거기서 독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서, 나는 가장 싼 요금의 그 노선을 탔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쾰른 행 비행기는 오싹했다. 자동차로 말하면, 참 미안한 말이지만, 장갑 끼고 모퉁이 돈다는 프라이드 같은 것. 여남은 명이 타자 이륙한 비행기엔 좌석이 스물이 될까 말까 싶었다. 그 요동치는 몇 십 분을 참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그 정신에도 어머니의 편지를 찾았다. 손에 드는 가방 안에 여권 가까이 두었으니까. 어머니의 편지를 보지 못하고 비행기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봉투를 손에 쥔 순간 다시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게 겁이 났다. 찢는 손이 떨렸다.


형은 바로 네 형이…….

무슨 말인가. 형이 나의 형이라니. 형이 형이지 그러면?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것인가? 설마……. 그것은 설마여야 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설마는 설마다.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며 깨어났다. 다음을 읽으려고.


그 순간 도착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다시 비행기가 떨어질 것이라는 환상 때문에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서둘러 몸을 사렸다. 비행기는 쾰른 땅에 무사히 내렸다.


쾰른에서 처음 계획은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가서 짐을 푸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남쪽으로 갔다가 브레멘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브레멘은 코앞이다. 비행기로 그 창공을 건너 왔을 것이다. 물론 어학코스 시작 날이 빠듯하기는 했다. 그래도 역의 보관소에 큰 짐을 맡겨놓고 형의 출생지로 먼저 향하기로 했다. 출생지에서 무엇을 건질 것인가, 생각에 미치자 멍해졌다. 서독파견 동양인노무자의 아들이 형이 태어난 병원에 가서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아는 것이라고는 형의 출생연도와 이름 뿐. 찾으면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형의 출생기록을 찾아서 무엇을 하려고? 형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는 그 이름으로 기록에 남았을까? 혼외자에게도 생부의 이름이 적히는가? 독일의 출생신고 제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의문만 떠돌았다. 기록에 있다고 치자. 그러면 기껏 생년월일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소라면 늘 바뀌는 것이니까. 경찰 신분도 아닌, 더구나 외국인이 독일인 누군가의 행방을 합법적으로 문의할 수나 있는 것일까? 또 기차 속에서 발견한 일인데, 어머니의 편지가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손에 들고 있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이를 어쩐다?


어쨌거나 형의 흔적을 찾는 것이 한강에서 바늘 찾기였다. 형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결국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의 그림자를 쫒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편이 더 수월했다. 실마리라도 있으니까.



독일남자, 요하네스 베르너


예상대로 나는 독일남자의 입원 기록 같은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 독일남자를 찾을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에. 독일남자 요하네스 베르너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거기에 없었다. 다행히 오래 전에 간호사 일을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간 한국인 간호사에 대해 이름만 겨우 얻어 들었다. 한국식당을 한다고 들었으니 찾기 쉬울 것이라고. 어머니 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말 그래도 뚱뚱한 직원이었다. 간호사이신지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경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옛날 한국 간호사들을 기억하시나요?

아, 베를린으로 가 볼 것이면, 그 사람은 어쩌면 그 이야기를 알지도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몇 년 전에도 똑 같은 사람을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으니까 생각이 더욱 또렷하네요. 


베를린. 나는 뮌헨을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개강 날짜에 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목적을 잊지 말자. 어머니는 한시 바삐 형의 소식을 기다린다. 개강에 늦으면 대순가.

베를린 행 기차는 급행이었다. 베를린에서 한국식당 찾기는 쉬울까? 염려보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에 한국식당이 있었다. 우리 같으면 서울 명동 비슷한 거리에서 발견한 한국식당에서는 그동안 벌써 그리워진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브레멘에서 온 분들이 아니었다.


브레멘에서 온 이 아무개라는 분을 혹시 아십니까?

주인아주머니는 아예 내 앞 걸상에 앉았다. 또 박 아무개 씨? 아니, 이 아무개 씨를! 아, 그게 그거라 혼란스럽죠? 여긴 아예 남편 성 하나로 통하니까, 헤어 리, 프라우 리, 헤어 박, 프라우 박. 우리 여자들은 독일 와서 결혼하면 성은 아예 잃어버린다니까요. 참 그건 그렇고. 그런데 이상타. 몇 해 전에도 꼭 당신만한 젊은이가 그 사람을 찾더니만.


그러니까 이곳 한국인들이 남편 성을 써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이 아무개라는 분은 박 아무개가 되어 있었고, 형도 그 사람까지를 찾아냈다. 나는 형의 뒤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

박 아무개 아줌마는 식당을 하는 것이 아니라 - 첨엔 그럴 생각이었다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했다 - 한 나절 한국식품점을 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조금 더 알고 있었다.


그 나쁜 사람은 꼭 봉함엽서를 보냈는데, 발신자 주소는 없었어요. 첨엔 빈, 다음엔 베를린. 우편소인으로 보아서 빈인지 베를린인지 알 뿐이었어요. 모르지요, 속에다는 썼겠지요. 우리들이 겉봉만 보고 속닥거린 말들이죠. 우리 모두 다 가슴 졸이며 편지를 기다렸어요. 아기 엄마 운명이 우리 운명이었으니까. 그 나쁜 사람이 나중에는, 그러니까 그 아기 데리고 부부가 한국에 돌아가 버린 다음에, 그땐 동독 소인이 찍힌 봉함엽서가 왔는데, 참 우린 그것을 한국에 보낼 수 도 안 보낼 수도 없었어요. 한국 가서 아들을 또 낳았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그래도 소식을 전해…….

그래 말이에요. 다들 어쩔 줄 몰라서. 그런데 바로 형이라고요, 그러니까? 접 때 먼저 날 찾은 젊은이가? 참 잘생기기는 했다만. 똑 같이 이레 이야기 해 줬어요. 나도 그 때 결혼 직전에 깨져가지고 상심했던 때이고. 또 학생, 학생이라고 불러도 되죠? 난 그때 학생 엄마가 차라리 부러웠을 때라서. 어찌되었건 아들 데리고, 뭣 보다 탄탄히 벌어 귀국했는데, 잘 살라고 두지 뭣 하러……. 다 소용 없어, 친부모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따 같은 사람들끼리, 아따 한민족 공동체, 아따 배달민족 안 있나, 그런 것이 중요하니까는. 형은 참 섞어져서 잘 생기긴 했더니만. 그러니까 형이 제 아버지를 찾더구먼, 그것이…… 암튼 학생 아버지 같은 분은 세상에 없을걸. 다른 남자 아이를, 것도 서양사람 아이를. 한국남자 치고 누가 그런 것을…….


한국남자 치고? - 말끝이 이상하긴 했지만, 조선식 사고방식의 한국 사람들은 입양 자체를 꺼리는 편이었고, 더구나 서양사람 핏줄의 아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선뜻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는 백퍼센트 동감한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없어 뮌헨으로 어학원 시작에 대어 가야했다.



베를린


괴테문화원 어학코스는 2개월 단위였다. 그 2개월 단위의 코스 사이, 외국학생들은 우선 프랑스나 이탈리아 여행을 선호한다. 물론 나는 베를린이 급 선무였다. 그 일주일 동안에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지만, 나는 베를린엘 다녀왔다. 당연히 대학 등록 준비도 베를린을 향했다. 물론 원래의 베를린대학, 그러니까 동쪽의 훔볼트대학이었다. 어딘가 그쪽이 더 가까울 것 같은 이유로.

어학코스에서는 중급에 합격해야 대학진학이 가능한데, 말하기가 마음에 걸렸다. 좋지 않은 점수를 걱정했지만, 평점에서는 중급에 겨우 우를 받아서 대학진학이 가능했다.


21세기의 베를린, 더 이상 분단이라는 단어가 없는 곳. 그러나 사실 여전히 무엇인가가 들끓고 있는 베를린이 좀 불편한 도시인가. 몇 년 전에 시장이 되었다는 이 도시의 수장은 사회민주당의 진보인사인줄로만 알았더니, 웬걸, 게이를 표방하고도 당선된 사람이었다. 꼭 100년 전에도 베를린은 게이의 수도라고 했다. 그러니 한편 또 얼마나 편한 도시인가. 1977년 생 한국 남자는 이곳에서 그리 눈에 띄는 인종은 아니었다. 통일 후에 두 배로 불어났다는 4만 명 정도의 재학생 중 나는 4500명이 조금 넘는 외국인 학생 중에 하나. 열 명에 한 명 이상은 외국인 학생이다. 다른 쪽 자유대학엔 외국인이 더 많다고 했다. 밖에 나가도 외국인이 많았다. 꽤나 열린 도시다.

내가 전공하려는 과목은 무심코 문학이었다. 철학이나 문학은 보통 그저 수리에 약하고 실리에도 덜떨어진 경우에 선택하게 되는 과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었다. 독일을, 독일 사람을, 독일남자를, 독일남자시인을 찾는, 그를 이해하는 방편이었다. 어찌 보면 선택이라기보다는 그리로 밀렸다. 그러는 몇 년 동안에도 형은 감감 소식이었다. 대신에 나는 현대문학의 황금기 언저리에서 놀라운 인물을 발견했다. 카스파 에스 베르너 -


카스파 살로모 베르너의 이름에서 멈춰버린 이상한 경험에서 나는 1920년대 표현주의 작가들 연구를 논문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느낀 의문점들로 보아도 독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어 냈다고 하는 그들에 대한 연구는 나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 마디로 같은 출발점에서 국수주의 문학과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극단적 결과가 나온 뿌리이니까. 식물로 말하면 전혀 다른 꽃을 피우는 하나의 줄기라고나 할까. 여기서 내 연구와 관련된 이야기는 접어두어야 한다. 카스파 에스 베르너가 직접 연구대상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가 내가 찾는 요하네스 베르너의 아버지인 것은 확실했다. 그가 시인이 아니라 극작가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독일어에서 ‘디히터’는 시인이요, 작가요, 뭐 그런 것을 다 포함하니까. 그것보다는 베르너라는 이름이면 충분했다. 또 1902년이라는 출생연도가 아버지이기에는 딱 떨어지게 맞지는 않지만, 아들을 낳는 나이가 어디 딱 떨어지는가. 그가 그의 아버지인 것은 거의 확실했다. 다음이 내가 조사한 것이다.



요하네스의 아버지


요하네스는 분단독일의 냉전 분위기 속에서도 압박 없이 자란 세대에 속했다. 아버지 카스파 베르너가 어쨌거나 전후 서구사회를 버리고 동독 사회주의공동체를 선택한 이상 아들은 우수한 출신성분을 가진 셈이었으므로. 또한 부계 혈통이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상대적인 특권을 누리며 동독의 철조망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했다. 특히 1971년 울브리히트에 이어 호네커가 권력을 승계했을 때는 동서독 관계 전체가 푸른 신호등을 만났다. 교조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시대가 간 것이었으니까. 울브리히터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벌써 공산당 베를린지구 서기였고, 나치스 집권 후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전쟁 중에는 소련군으로 복무했다가 전후 귀국하여 도이칠란트 통일사회당을 설립한 골수 공산주의자로, 집권 이래 독재자적 면모를 의심받았다. 새로운 주역 호네커는 나치스 12년 지배 동안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확고한 반 나치주의자로,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권좌에 오르자 무언가 젊은이들은 무언가 봄바람이 느껴진다고 믿었다. 그곳에서 보기에 저쪽 - 서독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전설 브란트가 집권해 있었다. 70년대 벽두엔 동독의 문단에서도 상당히 정치적일 수 있는 주제들이 나왔다고 한다. 김나지움 독서목록에 주인공 젊은이의 “새로운 슬픔”의 원인을 권위적 교육자와 그 비슷한 어른들에 돌리는 등, 규범에 대한 적대감, 모범적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작품들이 들어있었다. 더러는 통상적인 삼각관계의 구도 속에서 실제로는 순응메커니즘, 허위, 모순들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들. 사회주의 사회에서 왜 개인들은 사적인 행복을 방해받고 있는가 의심하는 책들마저 나오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빈을 향한 것은 순전히 뿌리가 그리운 회귀본능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늦둥이인 그에게 아버지는 이름으로만 남았다. 청소년기를 반 나치스 사회주의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랐던 그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서쪽으로 향했다. 온전한 사회주의의 아들로서, 그는 빈 대학으로 유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흔적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은 그를 오스트리아 깊숙이 아버지의 고향을 찾게 했다. 이복누이가 있단다, 거기까지가 어머니가 일러준 아버지의 흔적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을 향했던 요하네스는 이복누이가 빈 근교에 있지 않고 벌써 뮌헨 대학에 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뮌헨의 이복누이와 연락을 시도했다. 뮌헨에서 누이를 만났다.

클라라 브레너, 나이 차이가 한참 되는 누이였다. 우리나라 말로 띠동갑도 넘는. 그러니까 남매는 전혀 다른 아버지 이미지를 가진 채 서구와 동구에서 살아왔다. 딸은 진작 오스트리아를 떠나 뮌헨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출판사에서 원고감사원으로 일하며 제 글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의 재능이 딸에게서도 확인될 법 했다. 다만 이번 세대에는 드라마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소설은 주목할 만한 영웅 대신 설명이 필요한 시대를 담기에 더 적합한지도 몰랐다. 그 자신은 손위 누이와 달리, 또 자라난 동독사회의 영향이었을지, 글쟁이의 유업을 이어갈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화학을 전공하는 그는 염료라거나 페인트 등 응용화학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잘 나가던 작가였던 시절에 대한 관심은 당연했다. 누이가 그 길을 보여줄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진짜 고향에 가 보자.

진짜 고향?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곳.

할아버지들?

넌 그걸 몰랐던 거야? 우리에겐 할아버지가 둘이야.


이른 문명, 출생 서류 정정, 결혼, ‘이상한’ 관계 - 아내 자살, 아카데미 퇴출 - 재혼 - 친자관계 소송 - 아카데미 재 입회 - 재 퇴출 - 레지스탕스 - 이혼 - 동베를린 행.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이와 더불어 아버지의 원래의 고향 슐레지엔을 향하는 중이었다. 느닷없는 비밀이 그를 강타했다. 요하네스는 까무러쳤다. 누이의 이야기는 까무러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뿌리 이야기. 그에게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둘 있었다고. 정확히는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버지가? 그가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히틀러 집권 이전에 이미 성공한 극작가였다는 사실 뿐이었다. 비밀은 엄청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밀. 혈통의 문제, 아버지가 1/2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유대인이 아닐 수 있었는가?



카스파 베르너 - 베른슈타인


문학사전? 여기에서 나는 인물사전이나 문학사전 등을 찾아보았다. 일단 카스파 베르너 - 재미있는, 아니 슬픈 일이다. 보통 카스파 에스 베르너라고 불리는 카스파 살로모 베르너의 출신 란에는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입양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항목에서는 카스파 베르너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입양자?


카스파 베르너(카스파 살로모 베른슈타인의 예명)는 유대인인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과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1920년대의 벽두에 표현주의에서 출발한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집권 이전에 이미 문명을 날렸던 것. 무슨 예감이었을까. 정확히 1929년에 그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출생에 관한 ‘이상한’ 증명을 받아두었다. 예명으로 썼던 베르너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나, 그가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친자가 아니라는 증명서였다. 나치스 이전에도 유대인은 개종만이 유럽문화에의 입장권을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 세기를 풍미했던 시인이자 독설가 하이네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카스파 베르너는 히틀러 집권 전에 벌써 1/2 유대인의 피를 부인하는 서류를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순 독일인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의 희망에 따라 아들을 유대인 핏줄에서 보호해야 했다. 아들의 생부를 순 독일인 누군가로 지목했으니, 자신이 혼외자를 데리고 유대인과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미 나치스 집권 직후에 프로이센 아카데미에서 축출 당했어야 할 위인이었지만 ‘이상한’ 친분이 그를 구하고 있었다는데. 카스파 베르너의 특별한 아내는 소문에 의하면 나치스 복판의 권력자와 3각 관계였었다고.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내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곧 이어 그가 재혼했을 때가 1937년. 곧 이은 오스트리아 합병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에게는 위험 그 자체의 환경이 되었다. 그는 유대혈통의 교사이자 작가였던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에게 친자포기 소송을 내었다. 결국 이삼년을 끈 소송 끝에 아버지는 아들이 완전한 아리안임을 서류상으로 확인해 주었다. 곧,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은 아들에게 패소하여 부권을 영원히 상실했고, 입양자 아들은 예명 베르너로 개명이 확정되었다. 물론 독일인 신교목사의 친자확인 증언 하에서다. 한 젊은이의 목숨이 달려있다 하더라도 그 신교목사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태 독일여자와 유대남자의 아들이던 젊은이가 새삼스럽게 독일인 신교목사의 혼외자라는 설에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런 일이 조작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것이 성공했기에 아들이, 요하네스의 아버지가, 나치스 시대를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짐승이고, 벌레고, 벌레만도 못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증명서가 있었으니까.

다시금 프로이센 아카데미에 받아들여진 것도 잠시 후 출판금지와 재 퇴출을 경험해야했던 카스파 베르너. 그토록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졌던 그는 두 번째 아내, 전형적인 합스부르크 백성이던 아내와 더불어 전쟁을 살아남았다. 물론 마지막을 향하던 1944년의 어느 날엔 레지스탕스에 관련하여 반 군사적 행동으로 체포되는 운명을 겪었다. 감옥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그를 구해냈고, 그것이 전후에 그를 구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아카데미 퇴출이나 출판금지 보다는 이 레지스탕스 관련 행동이 부각되었다. 더구나 그의 영어 실력은 나치스 초기의 협력이라는 문제점을 넘어서 그를 구해내었다. 과거의 나치스 시절의 경력보다도 영어 실력이 중요시 된 것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과거를 정당화 하는 노력이 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요약해서 오른 쪽 왼쪽을 구분해 보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그의 이력이었다.

결국 아내는 그를 떠났다. 현실적으로는 그가 아내를 떠난 것일까. 순 독일 혈통의 어머니도, 순 독일 혈통의 아내들도 더 이상은 그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아내는 세상 자체를 버리더니, 다른 아내는 그를 버렸다. 그는 모색했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다른 곳에서! 옛날의 동지들, 표현주의 시절의 동지들, 나치의 집권으로 흩어지기 전의 동지들이 아직 다른 곳에 건재했다. 소련군 점령지였다. 미국 점령지에서 앞장섰던 정치경력을 가지고서도 그는 대담하게 그쪽으로 건너갔다. 물론 옛 동지들, 바이마르 시대의 동지들과 접촉한 다음이었다. 그곳에 다른 국가가 생겨난 다음이었다. 그때 벌써 독일은 반쪽으로 나뉜 둘이었다. 그길로 오스트리아에 남은 아내와 두 딸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으로 남아서만은 아니었다. 동 베를린에 정착했을 때는 이미 오십을 넘긴 나이였지만, 새 출발은 새 출발이었다. 옛 동지들 덕에 사회주의국가건설 이데올로기에 동참하는 지식인 계열로 분류되었다. 나치스 시절에 다소 핍박을 받은 극작가 이미지가 한몫을 했다. 정작 작품 활동을 하기에는 그의 공산주의 사상은 분명하지가 않았다. 역시 다행히도(?) 문화연맹은 함께 표현주의에서 출발했던 작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또 무슨 매력이 남았을까? 그는 문화연맹의 사무직으로 있던 젊은 작가지망생과 다시 한 번 결혼했다. 아들 요하네스를 보았다. 그러다가 아들이 세 살이 지났을 무렵 맹장염으로 사망했다. 1956년 말.


여기까지다. 서양에서 맹장염?


또 다른 사이트다. 다시 카스파 베르너의 이야기. 그는 순 독일인 증명 덕택에 나치스시절을 살아남았다. 그러나 출판은 여전히 난관에 부딪쳤고, 제국작가연맹에서는 그를 재차 탈퇴시켰다. 여기까지는 일치한다.


요하네스가 들어 알게 된 또 다른 충격적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어머니 이전에 두 명의 아내가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는 당연히 아버지의 오스트리아인 아내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복누이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한창 나치시절에 짧았던 결혼이 더 있었던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떻게, 순 독일혈통과 결혼했었구나, 매번.

누이는 상당히 정확하게 첫 번째 결혼의 화려함과 수치를 함께 이야기 해주었다. 일찍 성공한 극작가와 극단배우 지망생. 오스트리아 문학은 독일문학과 경계를 나눈 적이 없었지만, 국경은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찍 성공한 오스트리아 출신 극작가와 순 독일 태생 극단배우 지망생의 관계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모의 아내와 나치 실력자와의 공생관계는 …….


그만, 그만. 그는 갑작스러운 정보들에 눌렸다. 아버지 상이 일시에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문화연맹에 전설적으로 남은 일 세대 작가들과의 동일선 상에서 아버지를 이해했던 그에겐 날벼락이었다. 아버지가 사상적으로 다소 의심을 받았던 부분, 나치와의 일시적 공생관계, 그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유대인 아버지를 부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청천병력이었다. 결혼마저도 안전을 위한 것 이상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 아니면 어떻게 아내를 나눈다는 말인가, 비록 그것이 수군대는 말에 불과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 미모의 젊은 아내가 자살을 택하는가? 누이의 어머니는 또? 전쟁을 살아남은 뒤에는 순 독일 혈통이 의미가 없었는가? 아니지. 자신의 어머니도 순 독일 혈통이다. 그럼 아버지의 순 독일 혈통에 대한 파격적인 선호는?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유대혈통에 대한 반작용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유대혈통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믿어졌다.

그리고선 여행목적지가 바뀌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첫 번째 아내를 만났다는 함부르크, ‘독일극장’을 향해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브레멘 못 미쳤을 때.



백인 남자, 백인으로 보였던 남자


그러니까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혈통으로는 반의반쯤 유대인이었어.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이 서양인들의 눈에 그것이 그것이듯, 우리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것이었지.

앵글로 색슨인지 아리안인지 유대인인지는 참 알아 보기 힘든 구별?


서유럽 유대인 남자와 동양 여자가 낳은 아이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에 앞서 그는, 승한은 형 요한의 아버지였다는 서유럽 태생의 1/4 유대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용없었다. 알다 가도 모를 일, 아니 아예 모를 일이었으니까. 유대인보다 저열하다고 간주되는 동양인, 그것이 편해서였을까. 강자 앞에서 굴하는 사람이 약자에게 더 세다고 하는 법칙의. 저열한 법칙의 소산?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알 수 없었던 사실은 요양 중이던 요하네스의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는 으스러졌던 어깨뼈가 다 낳고도 요양병동 신세를 져야 했다. 뇌 손상은 전혀 없었지만 불안초조에 몽유병 증상까지 남아서 몇 달을 그렇게 허송해야 했다. 그에게는 실존적 의미의 공황상태에서 하필 사고를 당한 것이었으니 이해도 된다. 사랑 같은 감정이 호사일 만큼 정신이 나갔을 때. 그러니까 사고는 누이를 만난 뒤의 충격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정치적 변절은 아주 가끔은 용서될만한 변명거리를 발견한다. 다른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친부를 부인했던 아버지 상은 ‘도덕적인’ 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후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동독의 청소년들이 반파쇼 교육의 효과로서 나치스를 악으로 규정지으며 성장했을지라도, 그것이 곧 유대인에 대한 연민과 미화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런 것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유대혈통을 간단히 받아들일 유럽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니,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에 완강하게 저항하여 당대에 시대적 대표자로 불렸던 지드 같은 사람도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프랑스 어로 작품을 쓰는 것을 통탄했었다. 프랑스 인에게 충분한 실력이 없어지는 날, 누군가가 특질적인 인간이 프랑스인의 이름으로, 프랑스 인 대신에 그 역할을 하도록 허용하기 보다는, 프랑스 인이 사라져버리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라고. 유대인으로 하여 프랑스 문학이 발전하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편이 좋다니! 유대인은 유럽의 군중 속으로 섞이어 들어갈 수 없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피로 인한, 이 민족적인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핏줄


무서운 핏줄의 비밀이 드러난 후. 요하네스 베르너의 절망을 상상해 본다.

나의 아버지가 절반 유대인? 유대인? 어불성설. 아버지는 반유대적, 아니, 아리안 예찬, 초인적 인간의지에 대한 소신으로 문명을 얻은 분 아니었던가. 프로이센 아카데미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분.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였지만, 남겨두고 간 족보는 확실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엄연한 신교목사였다. 작가들 중 상당수가 목사의 아들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동독에서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설명으로는 아버지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흐를 수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사요 극작가였다는 유대인 할아버지? 그렇담 절반의 유대 피를 가진 아버지?

아버지의 청년기 문제작이었다는 『살의』의 내용에 치가 떨렸다. 그러면 그것이 픽션이 아니었단 말인가? 상징적 의미로,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껍질 벗기로서의 아버지 살해가 아니라, 실제 아버지를 살해하고픈 충동이었다? 물론 극에서도 아버지 살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들의 확고부동한 살의에 질식한 아버지가 저절로 쓰러져버리기 때문이다. 아버지 스스로 아버지임을 포기하라고 종용한 극이었나? 몸서리 쳤을 것이다.

그리고 무너졌다. 이번에는 작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 무너졌다. 그 아버지의 ‘살의’에 질려서. 살의는 다름 아닌 핏줄의 거부였다. 핏줄을 거부하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태어난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그 아버지를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


나는 갑자기 그의 메모들의 무더기를 배열하거나 발췌하는 작업을 덮었다. 이게 뭘까? 민족의 문제가 보통 예민한 것이 아니구나. 가해자 그룹 아리안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서 피해자 유대인 피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것은 그때의 가해자가 그 한 때의 과오를 덮고서 여전히 우월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때의 피해자는 지금도 무언지 모르게 배척당하는 느낌에 서늘해진다는 사실이다.


피. 핏줄? 최근의 유전자 표지 조사다 뭐다 해서 밝혀진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면, 인류의 모든 디엔에이가 아프리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모든 남자에게서 발견되는 와이 염색체, 모든 여자에게서 발견되는 미토콘드리아 - 그렇게 해서 15만 년 전 모두 하나의 뿌리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이렇게나 원수처럼 갈리어서. 세렝게티의 호모 사피엔스. 이제는 원수처럼 갈라선 민족, 민족들.


그 중 유대인은? 신의 부름에 답한 아브라함은 누구이며, 무엇이 유대인들의 운명을 전 세계로 흩뜨려 놓았나. 디아스포라 - 그 끝없는 이산의 시작. 그 피가 그의 형에게? 형에게는 1/2 유대인 할아버지와 순 독일인 할머니가 있다. 그러니까 형의 아버지는 1/4 유대인, 3/4 독일인. 형은 어떤가. 분명한 1/2 한국인, 나머지 1/2 중에 유대 핏줄로 말하면 1/8. 다시 해 보자, 1/2 한국인, 3/8 독일인, 1/8 유대인. 그의 형은 나치스 시절이라면 수용소 행인가? 그렇다. 나치스 시절에는 1/8까지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나치스 시절이 지나서 천만다행이다.

지금은 어떤가? 일반적으로 부계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다. 그 보다는 시너고그에 참석하는 정도가 유대인을 결정한다. 유명하기로는 마릴린 먼로가 아서 밀러와 결혼하기 위해서 유대인으로 개종했을 때도 그랬고, 바렌보임과 결혼하면서 개종한 첼리스트도, 이름이 뭐였더라,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면 혈통이 그리 대순가?

다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이스라엘민족과 아랍민족으로 나뉘어 적대하기를 수 천 년. 왜 유독 이스라엘민족만이 국가를 잃고 흩어지는 운명을 겪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을 운명, 동화를 통해서, 아니면 그 나름대로의 시너고그 공동체를 통해서 배타적으로. 중부유럽의 유대인 - 그들은 최근 이론에 의하면 혈통으로는 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동남부 러시아지역에 있었던 카자르왕국의 후예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중부유럽 유대인들의 혈통은 그러니까 터키계 백인의 혼합 유목민족이다. 그래야 그들 아슈케나짐 계통의 유대인들의 애매한 모습들이 설명되기도 한다. 그들은 원래의 셈족에서 유래한 지중해 계의 유대인 세파라딤의 외모가 아랍 족과 비슷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유대인은 인종 분류에서 코카소이드가 아니던가.

게다가 오늘날엔 세계의 경제권을 장악한 그들을 오히려 배우려 한다. 물론 경원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대인들의 지혜의 서 탈무드는 스테디셀러에 속한다. 우리는 - 한국인들만 말고 어쩌면 온 세상 사람들이 - 지금 눈부시게 잘 나가는 유대인들을 흠모한다. 그들이 성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니까. 성공하는 법, 부자 되는 법! 그 첫 번째 롤모델들이 모두 유대인이다. 법칙 하나, 날아오른 새에게는 국경이 없다 - 그들의 국가 초월적 적응을 일컫는 말이다. 법칙 둘, 영감을 무한 리필하기 - 쉬운 말인가. 아무도 믿지 않는 카산드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 인텔인가 무슨 회장 아무개는 그 말로서 유명하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그 콧대 높다는 프랑스인들이 선출한 대통령도 유대계다. 그가 비록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전후 프랑스로 이민 온 헝가리 귀족 출신 부친과 그리스계 유대인 - 세파라딤 - 모친 사이의 자녀이므로 절반은 유대인이다. 어머니가 유대인일 뿐 아니라, 이른 부모의 이혼으로 외할아버지에게서 성장했으니 유대인 아니고 뭔가.

성공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수 백 개의 논문이 필요할 것이다. 수백 사례를 분석해야 하니까. 내 말은, 어찌하여 유대혈통을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하는 부분에 대한 나의 이해 부족이다.



배달민족


잠깐, 유대인 타령이 지금 무슨 이야기인가? 유대인 핏줄이 섞인 형을 찾아 잠적한 배 교수는 누군가? 그 길을 따라 적고 있는 나는? 그럼 우리 민족은? 나의 처음이자 궁극적 관심인 배달민족은? 나는 갑작스레 인터넷을 뒤적였다.


오늘날 지구상의 인종은 피부 색깔, 머리의 모양, 머리카락의 색깔과 조직 등 형질적 특징에 따라 몽골로이드, 코카소이드 그리고 니그로이드 등 세 인종으로 분류된다. 흔히 유럽에서 건너간 미국의 백인들이 코카소이드이다. 그래서 유대인도 백인이구나. 그리고 같은 조상 아브라함을 가진 아랍인들도 당연히 그들에 속한다. 여기에 이르면 혼란스럽다. 노아의 아들 셈은 아브라함에 이르러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갈라놓더니, 다시 다윗왕의 후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독교인 갈래를 만들어 냈다. 유전자인지 계보인지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하나의 핏줄이다. 노아가 누구인가. 그의 직계조상 셋은 카인과 아벨과 함께 아담의 아들이고 보면,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전체가 아담의 자손들이 갈라서 숭상하는 종교이다. 많은 순서로 말하자면 10억이 넘는 가톨릭과 그 절반이 안 되는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와 성공회 등을 다 합친 기독교가 20억 인구에 못 미치며, 이슬람이 14억 정도로 다음을 따른다. 다음이 힌두교도로 10억, 불교신자는 4천만 정도라고 하는데, 크게 보면 힌두교 권이 아니던가. 유대교인은 실상은 단 1500만 정도라고 하니, 그 목소리에 비하면 수는 적다. 그 또한 기독교로 변화 확장 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이렇게 기독교(유대교) 20억, 이슬람 14억, 힌두교(불교) 10억에, 물론 공공연히 종교를 부정하는 10억 인구를 제하고 나면 무엇이 얼마나 남는가? 당연히 그들 모두 인종 분류로는 대부분 코카소이드. 아리안에 속하는 게르만인들이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일은 형제의 난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는?

세상에 그 나머지는 많지 않다. 아니, 지금 종교가 문제가 아니다. 인종의 갈래가 궁금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라.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는 나라에서 기독교인과 불교도의 구별은 인종과 무관하다. 우린 기본적으로 한 핏줄이다. 어쨌거나 우리민족은 몽골로이드, 몽골 인종에 속한다. 몽골 인종은 가장 최후에 인류의 계통수에서 지분되었다고 하니 언제쯤이었나. 아무튼 그 이름이 유래하는 몽골인 외에 이뉴잇, 아메리카 인디언, 말레이인도 모두 몽골 인종이다. 몽골 인종 중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배달민족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란다.


함께 강사실을 사용하던 이박 생각이 난다. 역사철학 전공인데, 전공과는 달리 한국통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자의식을 가진 한국인으로, 그 부분에서는 늘 열을 낸다.


『환단고기』에 보면 고조선보다도 더 일찍 배달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니까요.

거야, 현재 사학계에선 실증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게 바로 식민사관이죠. 백산과 흑수 사이 위치까지 나왔는데, 지금의 백두산과 흑룡강 중간 지역이죠.

흑룡강이라면, 그러니까 아무르 강까지? 설마, 그렇게 추정하는 거겠지요.

추정이라니. 수도로 알려진 신시의 역사를 쓴 「신시역대기」에 보면 18대를 내려가면서 환웅이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 넘어요. 어찌 이것이 픽션이겠어요? 14대쯤엔 철제무기로 중원까지 정복했다고 하면? 또 조선시대에 황해도 구월산에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사의 존재가 허구라고요? 27대 500년의 조선은 믿으면서?

환웅이 그럼 왕의 개념?

그런 셈이지요. 18대를 이어간 왕의 계보가 분명한 국가였다니까요.


저는 그 이름 ‘배달’이 궁금한데요. 왜 배달이죠?

거야 국조 단군과 관계있는 박달나무의 어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곧 박달나무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을 말하죠.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입니다.

우와, 그걸 외우세요?

외울 것이 뭐. 어쨌거나, 아니, 그러므로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라는 것이죠. ‘밝달’민족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빛의 산을 말하기도 하지만.

아, 된 것 같아요. 됐습니다. 정말 입력이 안 되는데요.

그게, 객관적으로 우리는 이웃 중국에서 동이족으로 불립니다. 말 타고 활잘 쏘는 동이족은 단군 통치이래로 동방 조선의 구이를 모두 한 겨레로 일컫는 말이죠. 말갈 여진도, 일본 왜이족도 다 포함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만주족과 일본족을 뺀 한민족이 배달민족의 원형으로 남아있는 것이고요.

일본족도 동이족이라고요? 처음 듣는…….

거참, 중앙아시아 지방으로부터 구석기시대를 전후하여 몽골과 만주지방에까지 이동해왔다가, 후에 일부가 일본으로 옮겨가서 일본족의……. 거참, 일본에 한국인 디엔에이를 가진 분포가 주민의 25% 정도는 된다는 보고가…….

그만 하시죠, 정말.

아니, 잠깐만. 신라의 엉거주춤한 통일이 배달민족을 갈라놓았지요. 통일국가에 소속될 수 없는 나머지 배달민족이 고구려의 땅을 포함해서 만주 등까지 정착했으니. 어찌 보면 북쪽 경계는 무너졌다기보다는 확장되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싶다. 배달민족은 만주 벌판에도 뿌리내렸다. 오늘날 한민족은 한반도 밖으로도 중국 조선족 약 270만 명, 러시아 지역의 고려인 약 50만여 명을 포함하여 미국 등 전 세계에 7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단다. 8000만 명이 넘는다. 가만, 그의 형은 1/8만 한민족이므로 이 숫자에 포함이 안 되나? 아니, 그는 포함된다. 법적으로 한국인 배요한으로 등록된 한민족의 일원이다. 그러면 남쪽 인구에 포함된 외국인 100만 명은 여기서 빼내야 하나? 아, 그만두자. 인구통계를 뭐하는데 쓸 것인가.


나는 아직 시각이 없다. 나를,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설프게 외국문학 전공을 하고보니 서양문화 중심으로 문화를 판별한다. 개인주의냐 집단주의냐 - 그러면 나는 우리 민족의 집단주의적 사고가 저열하다고 느낀다. 내부집단에 충성을 보이는 이 나라가 싫다. 이런 마음 때문에 안정된 직업을 못 가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이 들켜서. 이런 마을을 들키면 누가, 어느 조직이 좋아하겠는가.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성이 지독하게 강한 결과 나타나는 초조와 불안 - 이것이 바로 우리 고맥락 사회의 특징이다. 조바심에서 오는 우리의 부지런은 발악이다. 이것이 도태된 자의 변명일까. 선악의 구별은 또 얼마나 혹독한지. 성공이 선이다. 그런대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난 몸살 나게 초조하다. 이렇게 불안하게 사는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글은 쓸 수나 있을까? 누군가가 인쇄하겠다고, 읽겠다고 할 글을? 


나는 다시 슬며시 그의 메모 쪽지로 눈을 돌린다. 지금은 그의 메모에 따른 습작일 뿐이다. 내가 쓰고 싶은 배달민족 이야기는 아직 멀다. 준비도 되지 않았다. 눈앞의 메모쪽지들이나 잘 정리할 일이다.


*


병원 생활


메모는 요하네스의 의혹 부분에 오래 멈춰 있다. 한없이 편해 보이는 천사들 사이에서, 그러나 병상의 그는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 양으로 적혀있다.


그 때 아버지는 자신의 유대성분을 알고 있었을까? 나치집권 이전에도, 집권초기에도 분명히 나치 찬양적 작품을 썼다. 왜 유대성분의 부정을 시도했을까? 그것 자체가 너무도 확실한 유대인의 피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긴 빈은 특별한 곳이다. 다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유명한 독설가 카를 크라우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유대인 프로이트에 대한 폄하의 의미에서 정신분석이야 말로 새로운 유대인의 질병이다 라고까지 했으니까.

친 나치적인 작품으로 성공한 아버지가 어쩌다 나치의 금서목록에 올라갔을까? 아버지의 의심스러운 혈통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이 금서 이력 때문에 나중에 반 나치의 공적이 부각되었다니. 인생은 아이러니다. 더구나 문단 일선에서 후퇴하자, 오스트리아 쪽의 저항단체와도 은밀한 작업을 시도했었던 정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동독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마침 옛 동지들 덕택으로 그 유명한 ‘베를린 앙상블’에서 일할 수 있었으니까. 그만하면 당당한 이력을 가진 아버지인데, 아버지의 생부가 ……. 아니, 아버지를 배반한 아버지라니.

용서하자 그를, 아버지를. 아니, 사람이라면 못할 짓이다. 무슨 소리,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 파시즘 시기에 그 진영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배신한 아버지. 생부이면서 양부라는 증명을 내준 할아버지 또한 극작가였다는 사실은 뭔가. 글쟁이 디엔에이까지 물려받고도 제 아비를 팔아치운 아버지의 상은 나치스만도 못한 것 같았을 것이다. 나치스는 적어도 아리안의 피를 지키련다는 명목으로 방계 유대 피를 말살하려는 범죄를 저지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아버지의 존재 자체에 대한 말살은?


그런 어두운 상황의 환자와 무심한 간호원의 관계는 한시적이고 잠정적일 운명 아니었던가. 요하네스는 학생 때 참여했던 연극이야기를 자주 되뇌었다 했다. 연극 같은 것은 알 수도 없었던 한국의 간호원들. 교대시간이 끝나고 그의 병상을 찾으면 정원으로 나가서 들려주던 이야기라 했다. 주인공 이름도 극의 제목과 비슷한데, 극이 안도라면 주인공은 안드리, 아니면 그 반대이던가 하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마을의 덕망 있는 교사였는데,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아들을 부정했더란 말이오. 이웃해 있는 적국의 여자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니 혼외자였던 것.

혼외자? 밖에서 낳은 아들?

응, 바람을 피워서 밖에서 낳은 아들. 그 아들을 마치 선심에서 주워온 아이인 양, 유대아이로 키웠더래요. 멀쩡한 독일 핏줄을 유대인이라 하여 ‘다름’을 차별해서 기른 것.

불쌍하게도. 

그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선입견에서 그렇게 자라나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지. 마침내, 마침내 숱한 유대인의 운명처럼 죄인이라는 숙명을 안고 죄 없이 죽어갈 때까지.

죽어갈 때까지?

마지막 순간에도 친아버지는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죠. 모두의 죽음을 대가로 한 종말.

…….

명예를 지키려고 혼외자를 부정하는 아버지들은 이 연극 말고도 더러 있겠지.

그래도.

뭐가 그래도?

우리나라에선 밖에서 아이 낳아서 데려오는 일이 더러 있는데…….

제 아이라 하고서?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입양이 드물고.

희한한 나라네. 밖에서 낳아온 아들을 받아주는 아내들?

예. 

그렇다 쳐. 여기 아들을 부정한 아비는 아비를 부정한 아들보다 나은 걸까 아닐까?

누가 아버지를 부정해? 아버지를 어떻게 부정해?

아, 모르는 소리.

요하네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한국 간호원 유순은 눈만 크게 떴을 것이다.


누이의 변명이자 이론은 아버지라는 권위가 나치스의 권위로 대체되어 그 권위에 속박당한 것이 아버지 세대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치스가 희망이었을 때. 세계대공황 직후에는 나치스가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치스가 다수당이 되었고 - 나치스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고자 했던 야심찬 작가라면 유대인 아버지를 버려야만 했을 것이라는 해석. 용서인가 동정인가? 누이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가? 더구나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아버지를?


아, 모르는 소리. 세상에는 아버지를 부정한 아들도 있지.

설마.

있다니까.

아들이 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면, 그럼 누구의 아들?

그러게, 유순.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오, 아버지. 그럼 나는 누구의 아들일까?

요하네스, 오늘은 너무 엉뚱한 말만 하네. 그만 들어가 누워야겠어. 잠을 잘 못잔 것 아냐?


요하네스는 몸과 마음이 겉돌았다. 그는 직감했다, 누나가 잘 못 생각했다고. 아니면 미화한다고. 아버지는 그 이전에 벌써 친부확인 서류를 어머니로부터 받아낸 뒤였으니까. 이 말을 누이에게 하지는 않았다. 할 겨를도 없었다, 곧 사고 속으로 내던져졌으니까. 말을 했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말이 어떤 사실도 바꾸어 주지 않으니까.

나치스란 동독에서는 죄악 그 자체로 배웠다. 서방세계에 나와 보니까 -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 나치스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런 식. 나치스는 물론 나쁜 것이었지만,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주도적이었다.

또 다른 버전도 가능하다. 나치스에 동조한 것을 살아남기 위한 행위로서 용서한다고 치자. 남은 하나, 혈통 말이다. 유대혈통이 용서되는가. 나에게 물려준 유대의 피. 유럽에서 유대인으로 살기. 이 피는 어느 세월에 희석이 되어 사라지는가. 동화유대인. 기독교인이 되어도 조금도 묽어지지 않는 피의 성분. 그는 숙명의 피에 발광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종적


이제는 베를린이었다. 동서가 합쳐져서 정말 대도시가 된 곳. 어느 곳에서 형의 종적을 볼 수 있을까. 베를린 대학에 재학 내내 형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그가, 승한이 60년대 말, 70년대의 주거공동체에 눈을 돌린 것은 우연이었다. 절필한 68세대 대학생들의 온상에서 형의 아버지 세대를 갑자기 느낀 때문이었다. 약물과용으로 요절한 한 젊은 작가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미완성 작품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아버지가 나치 어용작가였다는 짐으로 받은 고통 - 그 대목에서 형의 아버지 요하네스를 괴롭혔을 비슷한 과거의 부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공동체는 특히 스스로를 코뮌이라고 부르던 일단의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그 곳을 거쳐 간 사람들에게서 그에 관한 실마리가 나올까? 일단 어디에서부터 수소문할지도 문제였다. 지금은 더러는 이른 죽음으로 더러는 독일을 떠나버린 사연들 때문에 그들의 종적이 묘연할 것 같았다. 그러나 헨젤의 조약돌처럼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시대를 격동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들과도 접촉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서 감옥에 수감되었던 한 오프셋기술자가 그랬다. 분명 이름이 같은 사람의 소설이 출판되어 있었다, 『우리들』. 오프셋기술자가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오프셋인쇄의 수요가 감소하며 디지털인쇄가 선호되는 세상에서야. 또한 7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번성한 자전적 성장소설 작가들 반열에 이 오프셋기술자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가 이제는 또 느닷없이 사진작가가 되어 늘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일정을 따라 만나보기가 수월찮았다.


이번에는 또 누구요?

저는 ……. 그럼 또 누가? 그럼 혹시?


여전히 깡말라서 다른 독일인들과 쉽게 구별되는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는 대뜸 ‘또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형도 이 작가를 찾아냈구나.


아, 예. 형이었군요. 제가 궁금한 것은 형의 행적이지만, 일단 형에게 들려주셨을 형의 아버지에 대해서 좀…….

형? 형의 아버지라?

예, 제 형입니다. 형은 아버지를…….

그런데 당신이 형제라면? 그럼 당신은?

예, 형의 동생이지요, 얼굴은 좀 달라도. 형을 기억하시나요? 제가 찾는 건 물론 형입니다.

아, 그러니까 형.

예, 제 형이 아버지를 찾아서.

형, 그 아버지의 아들이 찾아온 건 몇 년 전 초여름이었지요, 아마. 아버지에 관해서는 그에게 이미 들려준 이야기인 걸, 또…….

형의 아버지가 제게는 힌트입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오프셋기술자-소설가-사진가의 이야기


요하네스를 어떻게 만났느냐고요? 당신이 알고 왔다시피, 이곳 서베를린의 코민, 주거공동체에서 만났지요. 1970년대에는 주거공동체가 이곳 서베를린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생활방식 속에 그 나름대로 퍼져 있었지요. 우리는 대개 어디선가 모여들었어요. 서독 본토에선 진작부터 군복무를 피하는 손쉬운 길이기도 했고, 동독 출신의 요하네스라고 특히 이상할 것도 없었어요. 처음엔 출신도 밝히지 않았지만요. 우린 출신도 배경도 서로 따지지 않았어요. 부르주아 도덕에서 볼 때 무질서, 무분별은 오히려 우리의 정체성이었죠. 시민사회의 가족 개념이 송두리째 깨진 이곳 공동체에선 인간애면 그만이었죠, 누구이건 무엇을 하건. 마약이라는 부작용도, 예 뭐, 인정할 건 해야죠, 어쨌거나 우리의 폭풍 같았던 혁명의 대상은 우리의 무작정 건강한 몸도 포함되었으니까요. 건강해서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을 착복하여 얻은 건강이라면?

무엇보다 요하네스는 정말 앤리헤 베그리페 - 동류항이란 말 어려운 말이라서 나중에야 알았다 - 딱 제 친구를 만났지요, 역시 유명 나치작가의 아들을. 그러니까 요하네스는 어떻게 이 작가 친구를 뒤따라 우리에게 온 것인데, 어떻게 만난 것인지는 몰랐어요. 과거에 관심을 안두는 것이 우리들의 방식이기도 했다니까요.

그 친구는 나치시절의 막강한 실력의 소설가를 아버지로 두었지요. 엄청 힘든 과거의 덫을 쓰고 있었던 거죠. 아니 물론 어떤 아버지의 아들들도 어느 점에선 비슷하겠지만요. 예컨대 내 아버지는 출전 3일 만에, 그러니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전사해서 부도덕할 틈도 없었지만, 과거의 짐은 마찬가지였죠. 나중에야 알았지만, 요하네스도 작가를 아버지로 두었더군요. 해서 그가 그에게 집착을 보였던 것이죠. 그것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요하네스에게 절반의 유대인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도 쉬운 건 아니었죠. 암튼 작가의 아들들 - 우리 독일의 경우 작가의 아들들은 무서운 심적 부담에 시달리죠. 특히 이 친구는 …… 우선 그 자신이 벌써 글을 발표하는 수준의 작가였고, 굳이 비교하자면 요하네스는 글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또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던 것도 요하네스완 달랐지요. 확신에 찬 나치였던 그 아버지는 벌써 나치의 정권창출 이전에 『용맹스러운 민족』이던가 그 비슷한 종류의 인종주의적 작품들로 유명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은 건전하고 밝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외다. 그렇지만 나치는 곧 패망했고, 시골로 은퇴한, 그러나 여전히 강한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아버지 밑에서 그 나름 힘들었답니다. 또 상상해 봐요, 공부를 하다가 이율배반적으로 깨달았을 아버지의 상을. 신들린 듯 분서갱유의 앞잡이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소화해 내기는 힘들었을 것 아니요. 다 같이 무엇인가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세대라고 분노했던 우리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훨씬 불행했던 거죠. 그러한 분열은 젊은이를 정말로 피폐하게 만드는 거죠, 나락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길은 약물이었을까요? 아니, 우리들 모두 알 수 없는 분노와 절망에 많이들 그 유혹에 들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해방은 새로운 감옥의 문턱이었다 싶기도 해요.

자, 요하네스의 이야기. 우리 코뮌에는 요하네스와 그 유명 작가의 아들 이외에 그의 여자 친구인 목사의 딸, 절필한 시인 그리고 필하모니에서 나와서 전자회사에 다니던 친구랑 나, 그렇게 함께 살았어요. 우리들과 함께 살면서 그는 많은 것을 의아해 했어요. 우선 내가 혼자서 미니출판사를 차려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제일 의아해 하더라고요, 불법이었으니까요. 동독 젊은이들이 원하는 온갖 자유를 여기서는 이미 누리면서도, 심지어 군복무면제의 자유까지를 누리면서 이런 불법 인쇄물들을 통해서 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카뮈의 부조리성의 문제』 비슷한 학위를 하고서도 사회주의대학생연맹에서 맹활약을 하는 친구도 이상하다는 거죠. 뭔가 이율베ㅐ반적이라고. 또 어떻게 카라얀의 필하모니를 자발적으로 떠날 수 있는지, 그가 클라리넷을 버리고 하는 일은 지멘스의 수위라니. 게다가 사회주의대학생연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할수록 사회민주당을 저주하게 되었다는 시인이자 가수가 우리 집엘 자주 왔었는데, 그 모든 것을 요하네스는 첨엔 정말 이해 못하더라고요.

그는 너무 깊이 서독의 폐해 속으로 들어와 버린 셈이었죠. 처녀림과도 같은 동독사회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오염에 노출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대도 그는 서베를린에서의 느낌을, 그 적응과정을 기록하는 대신, 동독에서의 체험을 회고적으로 메모해두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하더군요. 동독의 청소년답게 자유도이칠란트청년단에서 길러졌으니. 그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6살에서 10살까지는 푸른 목수건을, 그 다음에는 붉은 목수건을 두르고 자라났겠지요. 히틀러 청소년단과 다른 것이 있다면 목수건의 색깔이 갈색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인사말이 ‘히틀러 만세!’에서 ‘우정!’으로 바뀐 것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고. 기관지《젊은 세계》는 물론, 아예 독서의 나라 동독을 경험하면서, 그는 홀어머니의 아주 모범적 아들은 아니었다고 했어요. 어머니의 소원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작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자신은 지치도록 의무독서를 하다 보니 직업으로 글을 읽거나 쓰고 싶지 않았었다고. 반파시즘 망명문학들이 그곳 고전이었지만, 『제7의 십자가』나 『벌거벗은 채 늑대들 사이에서』같은 소설들이나 영화는 정답이 있는 수식처럼 재미가 없었더래요. 인간은 파시스트 늑대보다 더 강하다! 이렇게 뻔한 답을 위해 우회가 심했을 뿐이라고.

독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재미있어 했어요. 동독에서 권장되었던 작가들 보다는 듣도 보지도 못했던 조이스나 프루스트, 아참, 카프카도 물론, 또한 베케트나 지드 등, 동독에서 시민사회의 퇴폐주의라고 혹독하게 비판되었던 작가들의 호기심 가는 읽을거리가 여긴 넘쳤으니까요. 물론 우린 그 반대로 그런 작가들을 부정하고 있었는걸요, 그런 무기력한 퇴폐성을 왜 읽는답니까. 보니까, 청소년기가 상당히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더라고요. 문제는 그가 책 읽는 일에 경직되어 있었던 점인데. 동독에서 독서나 글쓰기는 그에게는 공식외우기 같았다고 그러더군요. 작가가 되는 것도 라이프치히에 가서 문학원에 들어가면 쉽게 될 수 있었다나. 그라면, 나치에게 박해받은, 혈통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망정, 일단 나치의 박해를 받은 작가의 아들로서, 그라면 우선순위로 발탁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거기 문학원에 간 그의 친구는 문학사, 문학이론,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창작의 실제를 배운다고 했다던가. 그가 빈 대학으로 나오기 전까지 못해도 백 명 정도는 새로운 공화국에서 작가들이 생산(?)되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생산이란 그에게는 특별한 염료나 그에 따른 새로운 기술들이었고. 그래서 우선 고향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나왔을 때도, 어차피 베를린대학으로 옮길 심산이었대요. 프러시안블루 - 300년 전 그 전설의 감청색의 산실이 이곳 베를린 아니던가요.


저, 그분이 그 다음에…….

아, 우선 들어봐요.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요. 우리 중에 작가가 있었다고 했지요, 그 친구의 깡마른 여자 친구가 아들을 낳게 되었어요. 그러자 아이는 공동의 아이였지요. 저쪽에서는 일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유아기 아동들을 위한 킨더가르텐이 완벽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작 집에서 공동육아라니. 요하네스가 그렇게 섣불리 내뱉는 말에 다들 웃었지요. 전통적으로 현모양처인 여성이 육아를 담당한다는 식의 시민사회의 방식은 우리들이 가장 혐오했던 것이었으니. 어떻든 우리 중 요하네스가 유난히 아기를 잘 돌보았어요.


아기를 잘 돋보아요?

예, 아기 돌보는 데 남녀노소 구별은 없었다니까요, 이곳에선. 우린 그가 시간이 많아서 아기에 열중한다고 생각했었지요. 직업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라서. 그는 대학에 등록은 했었는데, 공부에 열을 올리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그러니까 그때 요하네스에게서 서독 어딘가에 아이가 태어나 있었을 것이라고요? 댁의 형이란 사람은 그런 이야긴 없었는데. 참 듣도 보도 못한 말이군요. 그가 알기나 했을까요? 아이의 존재를요, 미안합니다. 하긴 그렇게 유난히도 아기를 돌보는 이유가…… 뭐 이유까진 아니라 해도 켕기는 뭔가가 있었을까요?


그냥, 그 분 이야기를 마저…….

우리들이, 일은 점점 더 꼬였어요. 우리 코뮌의 유일한 여성이자 아이의 어머니가 정작 집을 떠났거든요. 아기를 놔 둔 채로요. 그것도 다른 남자친구에게로. 아이를 떠나는 엄마의 부도덕성을 상상도 할 수 없어하던 요하네스는 촌놈이라는 눈총을 받았어요. 애 아버지조차도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애 아버지가 점 점 더 약물에 의존해 갔어요. 떠난 여자친구는 더 큰 이상을 위해서 사생활을, 아이까지를 버렸다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었어요, 요하네스만 몰랐죠. 그는 도대체 우리들의 대안모색을…….

대안이라면 이 사회가 썩어문드러졌다는 말인가요? 단 한 번도 독일이, 그때의 서독이 썩어문드러진 사회였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걸요.

부패하지 않은 사회라면 이상향이었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니었죠. 독재자의 독재는 아니었지만, 자본과 정치, 게다가 교회까지 합세한 삼위일체의 교묘한 군림이었죠. 민중은 언제나 어리석죠, 빵과 서커스만 주면 만사형통이라던 히틀러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배부르면 진실 따윈 눈감으니까. 아이 엄마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사건들의 주인공이 되어갔어요. 새로운 남자친구와 함께 테러사건들에 휩쓸린 뉴스가 나오고, 그들은 온 나라를 문자 그대로 충격의 도가니로 내몰았죠, 체포와 구금과…… 말로는 다 못하죠, 왜 학생도 뭐 다 알겠지요, 이 나라 70년대의 소용돌이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고 깨어나지 못했어요. 그는 응급실로 이송되고 요양병원에 보내졌지요. 이어서 사회복지센터 사람들이 아직 우유에 의존한 아기를 아동보호소에 위탁해버린 사단이 났어요. 그 즈음에 요하네스는 더욱 넋을 놓았던 것 같아요. 아기의 운명이 그에게 그렇게 충격인 것은 그땐 몰랐어요. 다만 그 후로…….


그 후로?

아무튼 나도 잡지사건 뿐 아니라 격한 데모현장에서의 불법선전물 문제로 경찰과 마찰이 있었죠.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총격사건까지 발생했으니, 결국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지요. 처음 몇 달 동안 감옥으로 몇 번 면회를 온 것이 내가 그를 만난 마지막이었어요. 그가 코뮌을 나갔다고 다른 친구가 말해주었어요, 서베를린을 떠나려 한다고. 그리고는 연락이 끊겼죠. 난 6년 동안 그렇게 들어앉아 있었으니. 그 동안 우리의 체험을, 우리의 좌절을 반성 겸 쓴 것이 소설로 팔려 나갔어요, 채 출감도 하기 전이었죠. 얼떨결에 작가가 된 거죠. 우리들 중에 진짜 잘 쓸 수 있었던 친구는 영 떠나버렸는데. 그 친구는 요양병원에서 수면제에 또 뭐에 잔득 삼키고서는 깨어나지 못했다지요. 내 서툰 책은 단기간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지요. 오래 감옥에 있는 상황이 선동적이었을지. 어떤 의미로든 좌절한 젊은이들이 우리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읽었기 때문이겠죠.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

예. 나 스스로는 소설가라는 느낌이 없어요. 나는 그저 전무후무한 경험의 내용만으로 소설가라고 떠밀린 것이죠. 심상도, 의지도,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한 뼈를 깎는 고민도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후속 작품들에선 실패했고요.


그럼 지금은?

사실 우린 뭔가 뿌리를 잃은 거죠. 우리의 투쟁이 - 사실 우린 삶이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세대니까요. 이 나라가 생경해져서 밖으로 떠돌기도 했어요. 그래도 댁의 형이 - 요하네스의 아들이라고요? -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출판사를 거쳐서라면 누구라도 나와는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때문이었지요. 학생도 마찬가지고.


그럼 지금은 그분은 혹시…….

하지만 이젠 내 책들은 거의 팔리지 않아요. 책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던 시대는 끝난 거죠. 언어는 소통의 기능을 잃었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지요.

소통 부재라고요?

예. 동서의 대치도, 좌우의 대립도 무너져버린 유럽이 답이오. 여전히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외치는 교육자적 작가는 시대착오. 독서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보다는, 그 분은 오스트리아로 가셨을까요? 바로 동베를린으로 가셨을까요?

모를 일. 어디로 향했던 지금 그의 아들이 한 가닥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어디든 찾지 않을까요?

도이치의 울림?

보르헤스를 아는가요?

…….

독서는 다른 낯선 두뇌를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예찬했던 작가지요.

아, 예.

독서에 관해서라면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겠소?

…….

앞을 거의 못 보았으니. 80만권의 책과 어둠을 동시에 가져다 준 신의 절묘한 아이러니라고 그랬다던가. 그래서 더 울림이 중요했던 것인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울림이 그득한 언어는 도이치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하필?

그냥 해보는 말이오. 지금은 동서남북 자유로이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그가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지 않겠나 그 말이오.


자유로이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


여기까지, 그의 뒤죽박죽 메모는 베를린에서 멈춰 있었다. 그가 아직 공부하고 있었던 시절에서 멈춘 것. 그가 보낸 것은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공백은 너무 길었다.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갑자기 전기가 나간 것처럼 내 손가락의 작동이 멈췄다. 애초에 이 기록은 뿌리 없는 나무에 물주기였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구상도, 가닥도 없이. 흩어진 메모조각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리기. 나는 무슨 알갱이를 향해서 이 종이부스러기를 헤집고 있었을까. 벌써 스산한 계절의 축축함이 벤다.

그해 겨울도 점점 깊어만 갔다. 그에게서 더는 소식이 없이. 정적 속에서 자판도 쉬고 있었다.



다시 봄이 꿈틀거린다. 언어교육원에서 연락이 왔다. 프랑스어 강의도 다시 강화해보련다는 전갈이었다. 제2외국어 담당은 그가 아니었다. 사무직원은 그대로였다.


한 선생님! 이번에도 고생 좀 하시겠어요.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수준을 세분해서 나누지 않아서요.

…….

배 교수님은 다시 독일에 가셨답니다.

예.

안 놀라시네! 다들 놀라시던데요. 벌써 지난봄에요, 갑자기.


묻지도 않았는데 직원은 그의 이야기를 흘렸다.

개인적인 일이라고. 사람들 말이, 모르죠, 독일에 두고 온 애인이 있었다든가, 암튼 누군가를 찾으러 갔다고, 추측들만 성하죠. 정말 그랬을까요?


그랬구나. 

나는 확신한다. 그가 다시 한 번 형을 찾아 나섰다고.

왜 그는 100% 핏줄도 아닌 형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동포의 끈? 배달민족의 품도 아니질 않는가? 생물체를 조직하는 미세한 원형질이 같음? 최소한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그가 암스테르담에서 쾰른 사이 비행 중에 놓쳐버린 어머니의 편지에는 네 형은 네 형이다, 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상상이 맞을 것임을 느낀다. 무엇인가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가 편할 수 없음을 느낀다. 베를린 다음은 어디메 일까.

어느 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내게 보낼 것임을 믿는다. 한번 흘린 비밀은 쏟아진 물이나 같으니까. 움켜쥔 손이 아프면 그는 또 놓을 것이다. 나는 가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흘려놓은 물에 덩달아 적시어진 채로.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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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2011년 10월호 (147호) 196~253쪽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1. 8. 26. 23:12

<그리운 친구여. 카프카의 편지 100선> 번역이 출판되었다. 
                                                          - 아인북스 411쪽.( 2011. 8. 15.)

얼마나 공을 들였나, 100편을 선정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다.
번역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만큼 점점 더 공을 드리게 되었다, 원고지 1400장.
출판사가 믿음직스러웠다, 꼼꼼한 교정과정에서 참으로 신뢰감이 무르익었다.

표지를 여기에 올리고 싶지 않다. 사실은 울고 싶었다. 조금 울었다. 억울하다.
표지보다 무거운 알찬 내용을 자부심으로 느끼기에는 표지가 너무 가볍다.
나는 중 2 때도 무거운 책들만 읽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다.
이렇게 가벼운 표지에 내 이름이, 그것보다 카프카의 이름이 들어있다.
아이러니다. 아니, 수치다.
젊은 출판인에게 울고싶었다고 말했다. 그 다음은 할 말을 잃었다.
젊은이는 젊은이다. 늙은이는 늙은이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