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4. 11. 15. 21:34

 

라인


                                                                『그대 안의 풍경』2004 (이화에세이)        

 

 

아직도 내겐 아파트 입구 편지함을 둘러보는 버릇이 남아있다. 그러나 건져오는 것은 고지서나 광고성 안내장이기가 쉽다. 하긴 편지가 기이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주고받는 명함에도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로만 표기된 것이 흔하다. 세상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추월한 지 오래다.


이메일의 편리함은 말해 무엇 하리. 우선 글을 쓰다가 지우거나 구겨버리곤 하던 편지지와 달리, 매번 글자를 고쳐놓는 일이 쉽다. 마음이 변하면 강도도 조절하고 뉘앙스 다른 어휘를 고르면 된다. 상대가 읽었을까 마음 조릴 필요도 없는 것이, “읽음 확인 메일”을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로, 빠르고 정확한 모든 장점 위에, 가장 중요한 배달사고가 없다. 간직하고 싶다면 보관함에, 그것도 안심이 안 된다면, <내문서>에 옮겨서 다시 <A 플라피>로 옮겨놓으면 거의 영구하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엽서 하나 손수 써 보내는 일도 드물다. 하물며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드물다. 손으로 줄은 친 듯한 편지지에 쓴 편지 하나와 그보다 앞서 그냥 종이에 세로로 쓴 편지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나는 기념사진 한 장과 예스런 학자의 고결함이 베인, 하나는 인간미가 뚝뚝 묻어나는 선배의 글이었다. 두 분의 편지글에 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틀렸다. 실은 두 분께 전화로 답을 해야 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화의 편리성을 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전화가 어렵다.


“안녕하셔요, 저 아무갭니다. 선생님, 사진까지 일부러 보내주시고. 그런데 지난 번 뵈었을 때…….”


그러면 저쪽에서 말씀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 먼 데를 일부러 올라와서 고마워요. 거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잘 내려갔는지 걱정되었고, 그리고 부군도 잘 계시는지…….”


그러면 또 언제 무슨 말로 대답을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팥으로 메주를 쑵니다…… 라고 했더라도, 아 그래! 하고 믿어주셨던 은사님을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몇 번이나 뵈었던가. 겨우 산수(傘壽)연에 다녀온 것을 칭찬하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이고, 대학생활 전체가 테트리스 조각처럼 한 순간에 내려와 쌓이는 바람에 꼭 드려야 할 말을 놓치고 만다.


선배님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초록빛 바다색 아니면 비취색 하늘거리는 가운데 단아한 얼굴모습에 압도당하던 느낌을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혹시 모를 내 작은 잘못에, 음색만으로는 조금 노여워하시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주시려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순간 어떤 반응도 멈춰 버리는 것이 순발력 없는 내 본바닥이다.


전화보다는 이메일을, 이메일보다는 편지를 선호하는 내 마음 바닥에는 서툰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내가 어느 결에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 때의 내 자신이 문제학생 사례연구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인데, 중 2때 나는 어떤 선생님께 집중적으로 불려가곤 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결석이 좀 잦은 것을 제외하고는,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공납금도 아무 문제없던 내가 왜 문제학생이었을까? 편모, 편부도 아닌, 계모, 의부도 아닌, 정상적인 대가족의 맏이가 무슨 문제를 가졌다고 비쳤을까?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지배성, 도덕성, 사회성 등 무슨 인성들을 수치로 조사하면서, 모든 성질에서 25~75% 안에 들어가기를 중용의 인간이라고 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회성 불량으로, 뭔가 15% 미만임을 추궁 당했던 기억이 늦게 서야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사회성 문제아였구나!


그러니까 우선 부모님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달한 어머니를 이해하기엔 어렸고, 나는 소설 속의 전통적 어머니상을 그렸다. 어머니에겐 모든 어머니들의 착각처럼 자식들은 최고가 될 소질이 보였을 것이고, 피아노와 미술은 기본으로, 남자애들은 웅변술까지 과외를 시켰으니, 그때 원조 치맛바람은 우리를 수소풍선처럼 띄워 올렸다. 아마 중학교의 자유는 어머니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 금지된 장난을 골라서, 부러 내리막길을 달렸던 시절이다. 실습지 토끼장의 토끼를 풀밭에 놓아주긴 쉬웠지만, 오디를 따먹으려면 날쌘 친구가 나섰다. 선생님들 눈밖에 난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기는 쉬었다. 토끼들이 토끼장에서 사라지면 범인(?)들은 토끼를 다 몰아넣기 전까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렸다. 허리까지 자란 풀밭에서 털썩 누워버리면 하늘은 풀밭과 맞닿게 내려앉고, 우리는 하늘 속에 누었다. 주머니를 함께 털어서 싸구려 꽈배기를 사먹었다. 그 순간에는 네 것 내 것 없는 완전한 공동체가 실현되었다. 불량꽈배기의 밀가루와 기름은 양분인 것이 틀림없으니, 나는 자꾸 쓰러지는 약골로 자랐지만 키가 클 대로 컸다. 가끔은 상표도 없는 아이스케이크도, 어머니가 양잿물이라고 했던 삼각 비닐주머니 속의 색소와 사카린으로 만든 물도 먹었다. 어머니의 금기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없이 금기를 내놓으셨다. 금기에 대항하느라고, 책가위를 누구보다 가장 예쁘고 깔끔하게 싸주신, 연필 다섯 자루를 저녁마다 깎아서 키대로 나란히 필통에 넣어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책과 필통은 사랑스러웠지만, 학교에는 어머니를 대신할 여선생님들이 많았다. 요구와 간섭은 어머니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담을 쌓았고, 사회성이 전현 없는 문제아라고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니 그건 변명이다. 지금도 함께 생활하는 직장동아리에 80가까운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연구생활을 하는데, 그중 얼굴과 이름을 다 알 수 있는 경우는 반이 될까 말까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데, 간섭 때문에 사람을 기피한다는 변명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것 - 그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공부를 해도 해도 그것은 어렵고,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그것은 어렵다고. 마주쳐서는 말이 안 떨어지면 목례라도 무슨 몸짓이라도 하는데,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은 전화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에다 대고, 처음 무슨 단어로 말문을 열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고.


그래서 편지가 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메일이건 종이편지이건. 그 중에서도 쉽게 PC에 저장되어 무생물 같아지는 이메일보다는, 여간 간직하지 않고서는 곧 사라지는 종이편지가 부담이 없어 좋다. 문제는 여전히 덜떨어진 사회성이다. 더구나 이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아본 후에는, 아마 누구도 쉽게 편지지를 펼치지 못하리라. 아니 어떤 단어로도 그 시작을 찾지 못하리라. 나는 그저 저물어가는 오프라인 시대의 추억에 잠긴다.

 

 

튼튼한 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튼튼한 정신이 좋습니다.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선

당신의 젊은 정신이 좋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정신의 튼튼함이 당신의 육체를 병들게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몸 생각해서 정신을 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웃는 부드러운 입매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엄격한 입매가 좋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굳은 입매가 싫다고,

당신을 멀리한다면

나는 참 기뻐할 겁니다.

그만큼 당신은 제 것이 될 테니까요.


                                                                       200x년 1월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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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04. 11. 4. 21:41

, 상상력의 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2004. 11.4.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왜 어른들은 자라는 청소년이 이야기에 빠지는 것을 저어했을까?

아침형 인간이 떠오르는 건전한 세계 속에서

   - 밤새 책을 쓰거나 읽는 비생산적인 인간의 무용성

   - 순수문화 영역의 자생력 상실


궁핍의 시대의 시인들

“어찌하여 시인은 궁핍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 wozu Dichter in dürftiger Zeit? - 횔덜린의 「빵과 포도주」7연

  [직역] 궁핍의 시대에 시인은 무슨 목적/필요가 있는가?

 

화평이 깨어지고 정신이 퇴락하는 시대를 궁핍한 시대라 했고, 그때 시인은 “영웅들이 강심장으로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시인은 차라리 잠을 자고 싶다는, 어떤 행동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인의 곤혹스러운 입장, 다만 성스러운 밤을 떠돌았던 주신 디오니소스의 성스러운 사제들일 것”

이라고 정의. 횔덜린은 사회 변화와 경제 발전에 따른 전통 가치의 와해를 퇴행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회의 도덕적 가치의 재건이 시급하다고 보았다.[복고적]

횔덜린이 추구한 근원적 의지는 생과 자연의 합일이며 영혼의 순수함을 구하는 데 있고, 기독교의

유일신과 그리스의 다신론을 총괄하는 신의 세계이다. 


“이 끝없이 풍요로울 것 같은 세상에서 시인은 얼마나 더 궁핍해야 하는가?”

삶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바로 궁핍.

인간에게서 조화의 감정은 지속이 아니다. 부단히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1904년 - 100년 전에 비해 우리는 분명 잘 살고 있다.

가히 전무후무한 풍요의 시대, 빈곤으로부터 상대적인 해방, 진정으로 잘 살고 있는가?

얼핏 보아서 개인과 사회의 욕망은 오래 전에 비인문적 방향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 같다.

무한의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로서의 인간은 한계 앞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하고

-- 범세계적으로 인문주의 정신의 부활을 논하는 것. 인간의 자기치유 능력?


왜 쓰는가?

조정래 - 자본주의의 자기 최면 속,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적으로 가치있는 삶을 쓴다.

          문학성: 감동, 영혼의 떨림. 민족통일에 문학이 기여할 수 있다.

서정인 -  세상은 혼돈 … 캄캄한 미로 벗어나기 위해 쓴다.

“나는 지금도 욕심이 목에까지 꽉 차서 동서남북 천지현황을 모른다. 이 세상은 나에게 혼돈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결코 그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거기에 분명히 있을 원칙도 질서도

정의도 볼 수 없다. 한 사건과 딴 사건 사이의 관계가 내게는 안 보인다. 틀림없이 별들의

운행처럼 필연일 많은 일들이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이다.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과

같다.”


카프카: 갑충으로 변한 현대인의 자화상.

「단식 광대」(1924): 단식하는 광대에서 예술의 정신성, 비생산성, 인간의 무능력.


괴테 『파우스트』:

인간으로서 모든 한계를 지닌 자,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절대적 진리”를 찾아...

“파우스트적 충동” : 다양한 인생을 편력, 체험하면서 자기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 대하려는

 충동. 영원의 여성에 의해 이상의 궁극으로 향상하려는 욕망.
 집필원칙: “모순들을 통합하는 대신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겠다.”


독서의 나라 동독

- 괴테에게로 전진 Vorwärts zu Goethe!(J. Becher)

-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에게 진리에 충실하고, 현실의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표현을

  그 혁명적 발전 속에서 하도록 요구, 노동자들의 이념적인 변형을 위한 기여와 이들을

  사회주의의 궤도 속에서 교육해야 하는 과업을 함께.

- 문화연맹 / 국민 Nation 개념, 사회주의적 독일 국민문화 Nationalkultur

- 형식주의 반대운동: Inhalt, Idee, Gedanke 중시

                     데카당스, 세계시민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 형식주의 거부

- SED 인민재판: 모더니즘, 회의주의,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자유주의, 외설 추방


① 패러다임의 변화

- 테마도 아닌 테마 Un-Thema 서방 도주, 자살기도 : Ch. Wolf

- 의미내용, 서술방식에서 무정부주의 요구: F. R. Fries

- 예술의 자율성 요구: G. Kunert

- 시의 실험적 성격을 고집하면서, 신경제체제의 문화정책에서 요구했던 직접적인 사회적

   유용성에 거부하는 자세: V. Braun


*고전주의, 특히 괴테의 상을 반대, 특히 낭만주의자들에게로 방향 선회 →패러다임의 변화

- 신화수용 변화: 아폴론, 아프로디테, 프로메테우스, 헤라클레스

                → 마르시아스와 오르페우스, 다이달로스, 이카루스, 카산드라, 니오베...

- 다른 해석:

『필록테투스』 H. Müller (58년에서 64년 사이에 집필, 77년에야 동독에서 상연됨)

오디세우스를 영웅도 명장도 아닌, 거짓 술수에 능한 마키아벨리 같은 현실정치가로서 그려냄

으로써, 스탈린주의에서 정점을 이룬 공산주의의 실제 역사를 전술과 테러의 역사로, 휴머니즘의

몰락에 대한 암호로

『카산드라 Kassandra』Ch. Wolf (1983)

그리스 문명의 남성적, 전투적, 합목적적 성격 고발.

“카산드라의 운명은 그 후 삼천년간 여성들에게 일어날 것을 미리 마련하고 있다. 즉 여인은

 대상으로 되고 만다는 것... 여성들의 내면적 역사는 자율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② 상상력/환상을 권좌로!

70년대 문학의 구호: “상상력을 권좌로! Phantasie an die Macht!”

     남성지배, 폭력, 전쟁, 오로지 기술적 합리성에서 나온 공포의 연합에 대항하여,

     생생한 상상력과 비유적 사고의 새로운 결실들이 등장 한 것.


“삶의 무한정 뒤얽힌 평면”(Musil)인 사회의 실제적 조직관계 속으로 들어온 문학 -

유일하게 유용하고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이라고 주장하는 도구적 이성의 독재에 대한 저항.

일차적인, 이미 규정된 현실 →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로 설정

(Adorno)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Bloch): 다른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가없다.


가능성감각

“가능성감각이란 마찬가지로 좋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가능성감각, 존재하는 것을 존재

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는 것.”  “정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 어떤 결론

에도 도달하지 않는, 샘솟아나고 꽃피어나는 그 무엇으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간다.”(Musil)


전면만을 그린 그림에서 나무 전체를, 아예 푸르름으로만 그려진 화폭에서 숲 전체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을,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는 바위와 돌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게

하는 것 - 상상력

기록된 숲 - 비문학

 

※ 독일의 (철저)자연주의는 “하나의 막간극 (H. Bahr)

“최초의 현대 modern” 또는 “문학 혁명”

종족, 환경, 계기가 예술작품을 결정한다.(Taine)

3E: 타고난 천성이란 상속된 것, 교육이란 학습된 것, 생활이란 체험된 것(Scherer)

인간 역시 물질적, 육체적인 현상이므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은 생리적으로 이해

      →“신경과민의 낭만주의, 신경의 신비주의에 의해서 자연주의 극복"(Bahr, 1891)

          비일상적인 것, 비밀스러운, 매직, 경이로운 것 등장. 

 

문학이란 실증될 수 없었던 것,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듯이 구상하는 것. 허구 또는

가구(架構). 픽션은 흔히 산문으로 된 소설·이야기 등. 작가는 대상을 보고 분석하는데, 원칙적

으로는 그 중에서 우연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한편 문학의 개연성이나 논리성을 강조하는 견해. 철학과 문화 즉 과학과 문학을 구별하여 시의

독자성을 제시했을 때에도, 문학은 진실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가는 사실을 진실로서 기술

하지만) 시인은 진실처럼 보이게 모방한다. 소설이 사회의 거울이요 시대의 그림이라 하여 대상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이론: 현실과 시대의 반영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 소설이 현실의 복사이거나

시대의 기록일 수는 없다.

 

독자 여러분! 소설이란 큰 길을 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비치는 거울이라 볼 수 없을까. 여러분은

거울 속에서 푸른 하늘이라든가 혹은 진흙탕 등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런 거울을 들고

니는 사람들은 여러분으로부터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거울은 진흙탕을 비친다.

그래서 여러분은 거울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라리 진흙탕이 된 한길을 비난해야,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진흙탕 그래도 내버려둔 도로 감독을 비난해야 마땅하다.  --  스땅달


소설은 진흙탕이라는 사실(fact) 그 자체가 아닌, 인간성의 진실(truth)을 그리는 것이 목적.

리얼리티(실재성)는 실은 논리성이고 논리성으로 하여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작품은 설득

력이 있고, 만들어진 가공의 세계이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작품, 상상의 세계

실재성은 작품의 존재가치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것의 작가가 창조해낸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상상의 세계일뿐이다. 상상의 세계, 즉 작가에 의해 해석된 세계에는 그 밑바닥에 욕망(꿈)

이 자리한다. 현실 원칙에 억압받은 내면의 욕망은 창작할 때 작용을 한다. 외부의 현실세계와

내부의 욕망과의 갈등의 폭에 따라서 순응적 혹은 혁명적 세계가 창조된다.

 

소설 속에는 세 개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하나는 소설가의 욕망이다. 소설가의 욕망은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욕망이다. 자기 욕망의 소리에 따라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고 소설가는

애를 쓴다. 두 번째의 욕망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욕망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 역시 소설가의

욕망에 따라, 혹은 그 욕망에 반대하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하려 한다. 주인공, 아니 인물들의 욕망은 서로 부딪쳐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의 욕망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욕망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슨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나아가 소설가의 욕망까지를 느낀다.

독자의 무의식적인 욕망은 그 욕망들과 부딪쳐,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부인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부인하기도 하고,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빠져 그들을 모방하려 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모방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 자기가 세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려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 괴로움은 나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왜 즐거워하는가, 그 즐거움에 나도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들을

따지는 것이 독자가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이다.

그 질문은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이 세계의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다. 그 질문을 통해, 여기 내 욕망이 만든 세계가 있다는 소설가의

존재론(存在論)이,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하는 읽는 사람의 윤리학과 겹쳐진다.

소설은 소설가의 욕망의 존재론이 읽는 사람의 욕망의 윤리학과 만나는 자리이다.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한다. 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 김현 『분석과 해석.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중에서

                           김현문학전집 제7권, 문학과 지성사, 1993년.

 

 상상력

여기에서 이 가공의 세계, 다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주는 것”.

상상력은 Imagenation 그리스어 Fantasia와 관련. 공상 Fancy에서 유래, 공상이 곧 상상력은

아니다. 예술적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이다.(Coleridge) 일상적인 인식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차원으로 승화된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 예술적

독립은 콜리지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중요한 주장. 이 독립된 세계, 제 2의 세계는 그러니까

상상력이 창조한 세계.


상상력: “의식의 개념과 지각을 매개하는 작용”[사전적]

의식이 대상을 개념적으로 취하는 작용/ 지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 사이 매개 작용(Sartre)

‘비실재물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가까이 끌어당기는 능력 * 가능성감각


칸트: ‘아름다움’,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다양한 표상들을 만들어내도록

상상력을 촉발함으로써 주관으로 하여금 연상법칙들에서 풀려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표상들, 즉 미적 이념(asthetische Idee)은 특정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지니게 되고, 주관은 그러한 표상들을 통해 “언표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미전개된”

방식으로지만 사유하면서 인식능력의 활기를 얻는다.[판단력비판]


사르트르:- 상상력의 본질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고 함으로써 현실에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의식에서 보충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선험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확장?

“아시아의 별 보아”의 인터뷰:

여가 시간에 “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냉정과 열정 사이』, 『향수』

학교라는 울타리 바깥에도 공부할 것이 정말 많았다고,

소설책과 영화는 학교 이외에서 배우는 것....

학교는 상상력을 죽이는 곳이라고 하는 역설이 가능?


마녀의 이야기

인류가 가진 신화와 모든 문학작품을 통틀어서 최고의 악녀로 각인된 메데이아 이야기 -

Euripides: Medea

Obid: Medea (분실)

Seneca: Medea

Pierre Corneille: Medée  (1634~5)

Franz Grillparzer: Medea (1821)

Hans Henny Jahnn: Medea (1926, 1959)

Jean Anouilh: Médée (1821)

Christa Wolf: Medea: Stimmen (1996)

Heiner Müller: Verkommenes Ufer. Medeamaterial. Landschaft mit Argonauten


메데이아 신화:

가을하늘에 반짝이는 별자리, 양자리가 생긴 신화에서부터 시작. 황금 양피를 가진 숫양은

테살리아의 왕자 프릭소스를 흑해변의 코르키스까지 도피시켰고, 프릭소스는 제우스 신전에

양을 바쳤고, 제우스는 양을 기리고자 양자리를 만들었고, 황금양피는 코르키스의 왕에게

선물로. 왕은 황금양피를 신성한 숲 속에서 잠을 모르는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을 만큼의

보물이었는데....

테살리아의 이웃 이올코스의 왕 펠리아스는 적통의 이아손이 왕위의 반환을 요구하게 되자,

황금 양피를 찾아오라는 영광스러운 모험을 권유했고, 이 제안에 따라 유명한 아르고호의

용사들이 신화에 등장. 50여명의 대선단의 무용담은 간담을 서늘하게. 코르키스에 당도하여

황금 양피의 반환을 요구하는 이아손에게는 다시 엄청난 시험이. 그러나 마력을 지닌 공주

메데이아 - 우리의 낙랑공주처럼 - 의 도움으로 이아손은 황금양피를 찾아 고향으로.

이 과정에서 메데아의 동생살해라는 악명이 시작된다.

이올코스에서도 비극: 원정 동안 일가족이 모두 죽은 것을 알게 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

으로 왕에게 복수. 펠리아스가 죽은 뒤 이아손은 아버지의 왕국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펠리아스의 아들 아카스토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코린토스로 망명의 길: 이아손과 크레온 왕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메데이아의 유명한 복수가 시작된다. 그 결혼을 저지시키고자 크레온과

글라우케 모녀를 불태워 죽이고, 이아손에 대한 복수로(?) 둘 사이 태어난 자식들까지 죽인 후,

날개가 달린 용(뱀)이 끄는 수레를 타고 아테네로 도망쳤다는.


에우리피데스: 흔히 민주적 시민 사회라고 알려진 폴리스에서 행해진 사회적 차별, 즉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구분은 물론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서도 존재했던 차별을 드러내

준다. 차별이 원한이 되어 복수의 회신이 된다.(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

세네카: 스토아 철학자로서 세네카가 가졌던 여성 일반에 대한 인식?

당시 로마 사회의 분위기가 여권 옹호의 풍토와는 거리가 있었는지?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으로 그리스 반도의 이올코스에서 군주 살해까지 저지르고 피신한

정치적 곤혹성, 이방인과의 결혼의 합법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자신의 딸을 이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그리스인 이아손의 목숨을

보전하는 한편,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 메데이아를 추방한다.

꼬르네이유: 1630년대의 파리 무대에서는 잔혹한 장면이 다수 등장, 꼬르네이유는 세네카

류의 잔혹 비극(tragédie de la cruauté) 시도. 여성 옹호적인 메시지가 없고, 이후 발표되는

꼬르네이유 비극의 일반적 경향이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으로, 감정에 대하여 이성을

중시하는 남성적, 극기주의를 강조하는 영웅주의를 옹호.


아버지를 배신, 사랑을 택했던 메데이아는 그 사랑의 배신 때문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제

아들들을 살해하여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 이 이야기는 많은 허구에 의해서 덮여 있다

하더라도 그 근저에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믿게 하는 이유를 가짐.

신화들의 매력은 “전혀 다른 환경 하에서 같은 것들이 되풀이된다는 것. 그럼으로써 역시

같은 것의 되풀이가 아주 다른 것으로 된다는 점.” (H. Müller)

신화의 가공작업에서는 배제되고 청산되지 못한, 단지 미뤄지기만 한 상처의 회귀가 표명

된다.(Hans Blumenberg)

       지상의 행복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그림자!

       지상의 명성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꿈!

       그림자를 꿈꾸었던 너 가엾은 자여!

       꿈은 사라졌노라. 밤만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Was ist der Erde Glück? - Schatten!

Was ist der Erde Ruhm? - Ein Traum!

Du Armer! der von Schatten du geträumt!

Der Traum ist aus, allein die Nacht noch nicht. 

                                         -- Grillparzer


비더마이어의 염세주의적 사상, 바로크 시대의 현세거부를 연상하게.

그러나 부단히 꿈을 쫒는 인간족속의 운명은 오늘 날에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하인리히 뵐은 현대사회를 “소비가 자유를 주노라”는 현판을 내건 거대한 수용소에 비유.

경쟁적으로 성취업적을 만들어 내야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 창살 없는 감옥?

“인간은, 이 말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인간일 때에만 놀 수 있으며, 놀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Schiller)

그리고 통독 이후에도 계속되는 악녀 메데이아 소재의 작품들 - 크리스타 볼프는 아예

메데이아의 혈육살애, 군주살해, 이어지는 자식살해 등을 ‘뼈를 깍는 아픔의’ 정치적 사회적

희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시대에 따라 작가 자신의 시대적 문제점에 따라 같은 신화를 재해석해내는 것 - 여기에,

작가의 욕망은 사회적 산물이며, 그렇다면 상상력의 무궁한 힘이라는 것도 욕망의 사회적

필요요, 토로하고자하는 그 내면에 의존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이른다.

무엇이 결핍되었는가?


결핍의 토로

그래서 문학을 보는 표현론적 관점의 출발은, 문학이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창조적으로

표현한다는 입장. 한편의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의 구현. 이것은 문학을, 한편의 시를

거울이라고 보는 모방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시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등불이 된다.

- 시인이란 신령한 힘에 접신된 상태에서 말하는, 시를 토해내는 것이다. (플라톤)

- 우주의 근본적 창조 정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예술이다. (Schelling)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가? 그의 내면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창조적 개성, 독창성 등의 자유분방한 낭만주의와 더불어 다른 한편 민족의식, 사회의식이

성장했다. 문학을 한 시대의 정신과 한 민족의 성격을 표현하는 가장 뚜렷하고도 특출한

산물로 생각하여 문학의 사회 표현성이 강조됨. 개인이건 민족이건, 결핍에 반응하는 태도,

그것이 정신의 반영이라는 부분. 최소한 문제적 개인의 자기실현. 인간의 내면이 상상력으로

확장되어 반영된 것. 상상력의 진정한 힘은 인간의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

내면이 깊을수록 상상력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될 것.

-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Heidegger)

 

한국문학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何)오」(1917) :

“특정한 형식 하에 인(人)의 사상과 감정을 발표한 자”

“문학은 정(情)의 기초 상에 입(立)하였나니...”


리터래처 - 하면 학문과 문장력을 의미했듯이, 글월文 - 하면 한문을 연상했던 전통.

영어의 novel이나 불어의 roman과 같은, 근대문학의 한 양식으로서의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나 당대의 이야기나 작자가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야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작자가 전제되며, 작자가 없는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


내면의 교감

특히 우리의 근대문학이란 내면을 근거로 해서 예술적 가치를 주장. 엄정한 시학의 규칙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진자운동과도 같은 시간들을 통해서 형성된 서양문학에 비해,

20세기 초 모든 사조를 한꺼번에 경험한 우리의 경우 문학은 정적이고 내적인 인간을 발견

함으로써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문학에서 개인: 고유한 사연과 정신을 간직한 존재,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드러내는 존재

문학에서라면 누군가와 완전한 교감을? 내면을 노출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의 결핍과 외향적인 현실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에서는 보도와 평가를 위한 글쓰기에서처럼 이성의 논리가 중요

하지 않다. 이해와 공감을 꾀하는 문학의 글쓰기는 내면의 토로에서 비롯된다. 자신조차도

공감하기 어려운 내면을 있을 수 있는 개연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우연과 혼돈을 필연성으로 대체해서 제공하므로, 작품세계는 진정한 현실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외면세계의 고통은 내면세계를 더욱 깊어지게 할 것이다. 이 내면을 끌어내는 것,

그것은 상상력의 힘으로서만 가능하다. 문학의 현상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인생 또한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확산된 저 너머 유토피아를 꿈꿀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를 읽는가?

언론의 자유, 결사에 관한 법, 선거조사의 문제 대신 “먹고 사는 빵문제”를 거론했던 뷔히너를,

감히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 근로․채식·금주·금연을 표방하고

간소한 생활의 영위와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를 지향했던 톨스토이를,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집단에 참가하여 러시아정교회 비판에 동참했다가 총살형을 언도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를,

노골적인 묘사 때문에 풍속문란죄로 기소되었던 플로베르를,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재심파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에밀 졸라를 - 하필 그들을 우리는 읽는다.

예술가의, 글쓰는 이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문학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더 이상 우리의 깊은 내면의 샘을

퍼 올리지 못할 때, 그때가 파국이다. 문학의 파국 - 우리를 꿈꾸게 하는, 다른 상황을 상상하는

문학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만의 현실은 우리를 질식하게 하거나 기계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문학을 놓지 마시오. 읽건 쓰건, 그 차이는 그림자를

앞에 두는가 뒤에 두는가 그 차이일 뿐이다. 


무용지용

우리가 문학을 여전히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 중의 하나로 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망이다.

이때 행여 우리는 문학의 효용성 논란에 풀이 죽어서는 안된다. 고띠에 등의 예술지상주의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쓸데 있고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을

성현의 말들을 빌어서 하고 싶을 뿐이다. 노자 제 11장의 무용(無用)은 말해준다. “있는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고. 장자는 혜자에게, “땅이라는 것은 턱없이

넓고 크지만 사람이 걸을 때 소용되는 곳이란 기껏해야 발이 닿는 지면뿐이요,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재어 가지고 그 둘레를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 버린다면 사람들에게 그래도

쓸모가 있겠소?”라고 했다.


디디고 선 땅을 디디고 설 수 있기 위해 무수한 땅이 필요하듯이, 우리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 없이는 현실의 삶을 ‘아마도’ 살아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밥 먹여 주지 않으므로 쓸모없는 이야기여!

세상에 쓸모있는 것들로 하여금 조금만 부끄럽게 하라!

Posted by 서용좌
소설2004. 11. 1. 21:36

건들장마
한국소설 64호

                                                                         

  - 작가의 말 -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나의 심장에서 이웃들의 심장에서 일렁이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왜 우리는 저 혼자서 제 삶을 생경해하는 것일까. 가을 비 차갑게 내리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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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