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4. 5. 15. 21:53

희 미 한 인(생) 
글 서용좌, 그림 조윤기/도서출판 이유, 256쪽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교집합을 갖게 되는
마지막 하나 남은 공간을 상정한다면
그것은 가정이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특별할 리 없는 6인 핵가족이다.
희미한 인물들의 희미한 인생이 펼쳐진다.
이상한 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웬지 이 가족이 실재하는 느낌이 드는 일이었다.

- 작가수첩 중에서-
 


시놉시스 (혹은 초상)


나이 스물다섯, 연말 분위기에 나이를 의식하는 것을 보면 벌써 노처녀인가. 아직 개밥을 마구 퍼주지는 않는다. 우선은 퍼줄 개가 없다. 우리는 대부분의 도시인들처럼 아파트 닭장에서 산다.


우리 식구는, 곧 알게 되겠지만, 이야기를 내놓으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남동생 다시 여동생 해서 6인 가족이다. 아버지의 고향인 섬에는 아직 할머니가, 우리랑 같은 도시에는 외할머니가 계시지만 우리 애들이랑은 잘 소통하지는 않는다.


이야기 중에 아버지는 남선생님, 어머니는 여여사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남씨인지 여씨인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누차 말하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이시다. 성이 그렇게 우연이라면 이름은 어떨까? 아버지는 우리를 수희, 수미, 수한, 수인으로 지으셨다. 그것도 우연이었으면 좋겠다. 우연히 - ‘우연’이라는 단어를 너무 자주 쓰면 아버지가 화 내실지도 모르겠다, 젊은 애들은 필연을 믿어야 한다고, 우연이란 다 살아버린 사람들의 푸념이라고 - 정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들의 이름을 한 줄로 부르면 “희미한인”이 된다. 아직도 감이 오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풀어 쓰자면, “희미한 인(생)”에서 하나가 부족할 뿐이다. 나는 아버지가 설마 우리들의 인생에서 희미한 인생을 미리 보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연히도 - 나는 정말 이 우연을 너무 자주 쓰는가 보다 - 우리들의 인생은 아직 시작단계이지만 희미하다. 아니면 모든 인생이란 것이 희미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딸 둘 아들 하나 적당한 터울로 태어났지만 그저 그렇게 자랐고, 신동하나 없이 지방대학이나 겨우 들어갔거나 그것도 못해서 수한은 재수하고서도 별 기대가 안 되는 모양이다. 꼬맹이 수인은 아직은 상류가 될 희망은 있지만, 내가 추측하기에는 그 애 또한 그저 그럴 것이다. 특출한 과외라곤 없는 가정에서 신동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21세기 한국의 정답이니까.


아버지는 사람들이 그냥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사이시다. 섬에서 중학은 뭍에서 고등학교를, 아슬아슬하게 2년제 교육대학에, 그러다가 4년제 대학에 편입해서 국어교사에 이르신 입지전적인 분이다. 물론 중등학교 국어교사가 입지전적 인물이냐 웃을 사람이 있어도 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는 적어도 고향 섬에서는 특출 난 분이시다.


어머니는 원래는 사람들이 여사라 부르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실제로 누가 여사라고 부를 일도 없는 분이다. 다만 존중해서 부를 따로 다른 이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딸들까지는 대학진학이 어려운 상황에 따라” 서울로 직장을 찾아갔다면 직종은 물을 것이 없다. 단순노동이지만 정직한 노동에서 착실히 저축을 했던 70년대의 처녀들을 생각하면 된다. 어머니의 손은 그 시절부터 마법의 손이다. 들어가는 것은 적은 데 나오는 것은 많다. 나는 어머니 보다 더 많이 배운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요즘 세상에 딸들이 대학진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상처일게 분명했다. 좋지 않은 대학, 잘 나갈 것 같지 않는 학과의 입학이지만, 입학식 때 어머니의 눈에 묻어나던 눈물을 난 잊을 수 없다, 잊어서도 안 된다. 영문과로 전과에 실패했을 때, 그때도 어머니는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 일년간의 호주 영어 연수, 어머니로서는 출혈이셨음을 안다. 그런데…….


식만 남은 졸업을 앞두고 나는 가슴이 무겁다. 설마 영어가 좀 되니까 취업이야 되겠지만,  이렇게 세상이 불안한지. 하필 조촐한 사은회 때의 교수님말씀도 격려가 아니라 겁으로 다가왔다. “여러분 앞에 펼쳐져있는 인생은 하얀 도화지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도화지에 색칠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이후 줄곧 나는 마땅한 색연필 하나 갖추지 못했다는 느낌이었다. 겨우 일년 몇 개월 차이 나는 수미랑은 곧잘 수다를 떨기도 했었는데. 이게 그냥 달라졌다. 수희가 통 말을 끊은 것이다. 뭔가 궁리하는 표정에서, 그래 너라도 잘 나가 봐라, 하는 마음과, 언니로서 켕기는 마음, 그런 두 가지 마음으로 소원해진다. 수한이 - 그 앤 도통 엄마가 챙긴다. 재수생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막내는 한참 어리다. 처음에 그 애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인형 같았다. 정말 인형 같은 꼬맹이다. 엄마는 그래서 다른 엄마들 보다 젊은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퍼진 몸매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이 같은 순진한 구석이 많다. 어찌 보면 유치하달까, 세상 물정에 조금은 느리게 반응한다. 이것이 계미년 우리들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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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평2004. 5. 3. 23:05

표현의 능청·부드러운 빈정거림… 카프카의 세계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카프카의 편지 1900∼1924
프란츠 카프카 지음 / 서용좌 옮김 / 솔


 

 

 

“나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뒤에서 그림책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같았지. 이따금 그 아이는 창 틈으로 길거리를 언뜻 보고, 그러고는 곧 그 귀중한 그림책들에 되돌아가는 것이야.”

 

카프카<사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적으로 생각하고 느낄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의 글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지만 이들 작가와 대부분의 많은 작가들의 글이 보다 보편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해에 기대어 또 다른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데 비해 카프카의 글은 보편적인 것들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 그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 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허물고 무효로 만드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와 이미지와 문장 속에는 최종적인 해석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또 다른 비유로만 파악하고자 할 수는 있지만 끝내 파악할 수 없는 암시와 비의들로 넘쳐나는데 그것들 또한 붙들려고 할수록 우리의 이해로부터 빠져나간다.


“트리시 사람들은 묘하게들 살아가고 있어, 그러니 내가 오늘 나의 지구본 위에서 트리시의 대략적 위치에다가 붉은 점을 표시해 놓았다 해도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오.”

그 점에 있어 카프카의 세계는 그것을 포착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 스스로가 현현하는 식으로, 카프카적인 비유를 들자면, 어떤 거실의 어둠 속에 서 있던 날개를 펼친 공작이 어떤 조명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듯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공식처럼 얘기되는 불안·소외·부조리 등의 코드를 지참하고 그의 작품에 다가서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의 핵심으로부터 비껴가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카프카가 자신과 주위 사물과 세계와의 때로는 불편하거나 무안하거나 절망적이거나 유쾌한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묘사한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서, 가령 그가 늘어놓는 종기와 류머티즘과 삔 엄지발가락에 대한 불평 속에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엄살 속에서, 동생 엘리에게 보낸 편지에 실린 “내 행복이 마음에 걸리거든 이제 만족해도 좋을 거야”라는 표현의 능청 속에서, 그리고 부드러운 빈정거림과 귀여운 심술 속에서 관념을 넘어서 있거나, 관념의 이전에 있는 그의 세계의 핵심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이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로부터 끝없이 이탈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형식의 편지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의 편지들은 카프카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카프카는 거의 광적인 편지 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습작을 했으며, 1900년과 1924년 사이에 주로 친구 막스 브로트와 주변 사람들에게 쓴 편지의 많은 부분들이 장차 쓰여지게 될 그의 소설의 소묘로 읽힐 수 있다. 우리는 그 특성상 내밀할 수밖에 없는 그의 편지를 통해 그의 소설의 바탕이 되는 그의 일상적인 사고 작용의 기제와 그의 문체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그의 기질적인 특성을 확인할 수 있고, 그를 인간적으로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잠시 졸도해서 의사에게 소리 지르는 기쁨도 잃은 채, 그의 소파에 누워야 했고, 그리고 그동안-그건 매우 이상한 느낌이었다네-마치 손가락으로 치마를 아래로 잡아당기려는 한 소녀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니까.”

여전히 카프카의 세계는 이와 같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 무한한 용적으로 매장되어 있으며, 누군가의 손에 의해 채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여름 대낮에 낮잠을 잘 때 퇴침으로 쓰기에 알맞은 부피의 이 번역서를 내는 데 가담했을 모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해 마땅한 이 두꺼운 책을 읽은 후면 카프카가 이 편지 속에서 묘사한, 어느 짧은 낮잠 후 눈을 떴을 때 그의 어머니가 정원에 있는 한 여인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정원에서 간식을 들고 있는 중이어요”라는 대답을 들으며 느끼는 삶의 낯설음이 주는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영문·소설가)

입력 : 2004.04.23 19:06 26' / 수정 : 2004.04.23 19:12 03'
Posted by 서용좌
서평2004. 4. 30. 00:07

 출판- “책이란… 도끼여야만 해”
                                                                     [한겨레21 2004-04-29 05:07]

 

 

부조리한 어리광을 담은 카프카의 편지모음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권혁란/ <이프> 전 편집장

새벽녘에 내린 프라하 중앙역. 허름하고 음침한 역엔 ‘빨간 그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우중충한 도시에 비마저 내려 ‘프라하의 봄’으로 유명한 바츨라프 광장이 젖고 있었다. 밑천을 드러낸 영어실력으로 믿을 것이라곤 오로지 <론니 플래닛>을 닮은 짝퉁 여행 안내서뿐. 광장에는 비에도 꺼지지 않은 작은 촛불 하나가 죽은 청년의 사진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세상에. 비가 촛불의 심지를 피해가다니! 그 거리 끝에서 투어버스를 발견한 난 무심코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의 독어와 영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이윽고 버스는 나를 카프카의 생가 앞에 내려놓았다.

‘불안과 고독, 소외와 부조리, 실존의 비의와 역설’이라는 카프카 문학의 테마를 내가 제대로 알고나 있었던가. <변신>? <단식하는 광대>? <성>? 읽었던 듯도 하다. 눈썹과 눈이 바로 이어붙은, 그래서 더욱 깊어 보이고 불안해 보이는 그의 눈빛과 얼굴만이 익숙했을 뿐. 체코. 프라하. 카프카. 문자 그대로 중세의 향기만이 간당간당 휘돌다 사라지던 그 여행을 끝낸 지 벌써 2년, 오늘 카프카의 편지모음을 만났다.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솔 펴냄). 제목부터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이른바 ‘카프카적’이다.

사실 카프카의 편지글이 처음은 아니다.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카프카의 엽서> <카프카의 편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등이 이미 나왔다. 외롭고 수줍고 병약한 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외로움과 마주하고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기대하며 편지를 써왔는지를 알 수 있는데, 기막히게도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1088페이지로 마감하는 엄청나게 두꺼운 편지모음이다. 누워서 들고 읽다가 졸기라도 하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두께다. 편지는 거의 그의 편집자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것인데, 연인과 친구에게 보낸 것도 꽤 된다. “많은 책들은 자신의 성 안에 있는 어떤 낯선 방들에 들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네”라던 카프카는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할 게야.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곤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게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만 야행성 동물로 살아가야만 한다네. 그렇지만 기꺼이 자네를 다시 한번, 그러니까 어느 저녁에 보고 싶으이. 내일 수요일이나 그 밖에 자네가 좋아하는 어느 때라도.’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과 소외와 불길한 꿈을 쓴 카프카의 이런 앙탈 같은, 애교 같은, 어리광 같은, 끝내는 ‘오프라인’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그의 편지를 읽는 재미는 꽤나 오졌지만, 나는 중간에 책을 덮었다. 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선 말을 말겠다던 혼자만의 계율을 깬 까닭은 무진장 두꺼운 책의 분량도 한몫했지만 그것보다는 25년의 세월 동안 골방에서 숲에서 거리에서 쓴 그의 절절한 영혼의 편지를 하루나 이틀 만에 읽고 치워버리고 싶진 않아서였다. 곁에 두고 자주, 천천히 펼쳐볼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