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2004. 4. 1. 21:12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솔출판사 1088면, 1296그램


한국의 독어독문학계에서 개별 작가의 연구로 깊이를 더해서 “한국카프카학회”가 구성된 것은 카프카 탄생 100주년 기념인 1983년이었고, 이듬해부터 학회지 『카프카연구』가 발행되었다. 이후 카프카학회의 최우선 과제로 전집번역이 추진되었다.


총 10권으로 계획된 전집 중에서, 원래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한《카프카의 편지 1900~1924》는 한국에서 초역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카프카의 작품들과 연인 또는 약혼자에게의 편지들이 이미 번역되어 있는 것을 최종적으로 완역한다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수신인들은 주로 글쓰는 친구들과 출판 관계 지인들로, 번역의 난관은 이 실존인물들을 파악한 이후에야 한글의 단계별 경칭과 어투를 정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원전은 문우였던 막스 브로트가 펴낸 《프란츠 카프카. 편지 1902~1924》였는데, 1999년 『카프카의 편지 I』비판본이 출판되었다. 완전한 원전은 번역에 커다란 고무가 될 것이었으나, I 권은 1912년까지의 편지만을 포함했고, 나머지 네 권의 출판은 요원했다. 더구나 완전히 새로운 편집으로 인해서 한창 진행 중이던 번역의 체제를 흔드는 일이 되었다. 그밖에 영문판은 브로트판과 날자확인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의 원전은 셋으로 늘어났고, 총 2000페이지를 육박했다. 번역 원고는 80만 글자를 넘어갔다. 


그렇게 해서 여기에 번역된 카프카의 편지들은 620여 통에, 수신인은 50명을 웃돈다. 비판본이 포함하고 있는 1912년까지는 비판본을, 그 이후 1913년부터는 브로트판을 기준으로 번역에 임했고, 심지어는 영문판에서 그 일부 혹은 전체를 번역하는 경우도 생겼다.


기본적으로 독일어 번역에 도움을 준 것은 성균관대의 로스바흐 교수(전남대학의 동료였고, 함께 책을 낼 정도로 형제처럼 일한다), 체코어 발음은 프라하와 뉴욕에서 각각 체코어 사전들을 구해다 외래어 표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그런 체코어 고유명사들을 한글로 손수 적어준 체코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야로슬라흐 바린까 선생님은 2001년 현재 한국에서 국제학술진흥원의 협력으로 세종대왕 등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중이었고, 그 일을 기쁨으로 해주었다.


수신인은 오누이들을 포함한 가족 또는 직장과 출판관련 인사들에게 보내는 몇 장의 편지를 제외하면,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대부분이다. 일상의 단순한 편지왕래라기 보다는 글쓰는 일에 대한 논의요, 실제 쓰는 연습을 포함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연인들에 가려져 잊혀진 첫사랑 헤트비히 바일러와의 교제, 그 외에도 꾸준히 편지왕래를 계속한 여자들과의 관계도 알게 된다. 환자로서 요양소에서 알게 되어 마지막을 동반한 젊은 로베르트 클롭슈톡과의 독특한 우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무엇보다 막스 브로트의 경우, 1902년 만난 두 사람은 2년 후부터 편지왕래를 시작했고, 그것은 1924년 카프카의 생애 마지막까지 20년간 계속되었으니, 250여 통의 편지로 남은 우정을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제목《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카프카가 브로트에 보낸 편지의 일절에서 중에서 골랐다.


하나의 위안은, 카프카의 편지들은 편지들이 줄 수 있을 단순히 정보가 아닌 심오한 감정이입을 동반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기대이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이런 편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 “서신으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서신이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해변 가에 철렁거리는 바닷물과 같은 것이오.”라고 탄식하는 사람... 바로 그곳에 자연인 카프카가 숨쉬고 있으리라.


무수한 도움을 받으면서도 번역에 4년 출판에 2년이 걸린 세월이 보람으로 마무리되길 바란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의 난해함이 이 편지들을 읽음으로써 이해의 첩경이 될 수 있다면, 역자로서 초역으로 인한 오류들을 걱정하면서도 그 의미에 마음을 둘 수 있은 까닭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04. 3. 1. 22:15
부나비

   

 

소설시대 2003 

부나비 한 마리가 겨울밤을 마주하고 있다. 9월에야 성충이 된 이놈은 늦둥이에 속한다. 날개를 길이대로 다 늘여 보아야 3, 4 센티미터. 그것으로는 추위에 얼어붙는 몸을 가릴 만큼 넉넉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일정한 길이도 넓이도 아닌데, 그로서는 안의 사람들이 커튼이라는 아름답고 따뜻한 장치로 여러 겹 추위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그래도 새어나오는 빛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나아간다. 미끄러운 유리창은 얼음처럼 차갑고 아린다. 유리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이제서 알게 되다니, 이러한 지식이 별 소용없음에, 그것으로 슬퍼할 시간도 모자란다.  

 

                                                    *

넌 그 집착 때문에 망할 거야… 꼭 그렇게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는 말한다. 내가 사모하는 그는 통상적인 부류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가 들은 야단이다. 그것은 통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라고 내지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모하는 그에 대한 어떤 것도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의 견해를 의식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러니까 내가 사모하는 그와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 사이에서 몸 둘 바를 모른 채 살고 있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에서이건 몸둘 바를 모른다고 하면 요새 세상에서는 엄살이라고 할 것이다. 모두가 당차게 살아간다.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만 해도 확실히 매사에 단호하며, 말도 엄살도 적다. 사람이 말이 적으면 분명 손해가 적을 것이다. 말이 많으면 써먹을 말이 적다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는데도, 나는 말을 많이 한다. 결코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아요… 라는 표시로서 이런저런 말을 한다. 사실은 신문에 났거나 TV에서 떠도는 말을 또 되풀이하고 있는 얼간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난 그냥 얼간이 편을 택한다. 내가 사모하는 그의 말없음에 상처받아, 보상심리로 말의 홍수 속에서 안정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나와 그 ― '내가 사모하는 그'라는 말을 그냥 '그'로 단축하기 위해서 상용구를 써야 된다고 믿을 사람이 있을까. 상용구란 한 글자를 여러 글자로 나타내기 위한 수단인 것을, 나는 어떻게 된 게 입만 열면 '내가 사모하는 그'가 튀어 나와서 그것을 '그'로 줄이느라 상용구를 써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런데 나와 그는(바로 이곳에서 상용구 단축이 필요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친구('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도 '친구'로 단축한다), 친구는 다만 내가 행여 이번에도 마법에라도 걸린 듯 빠져버릴까 걱정하는 눈치다. 아니 노골적으로 경계한다. 사람이 행여 사람에 빠진다는 것은 친구에겐 실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열아홉 금값일 때 혼이 나갔던 그일 이후 내내 혹독하다. 게다가 이번에도 눈과 입술이 가느다란 남자라면 무정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라고. 우린 이제 서른 하고도 넷을 넘겼으니 ― 그녀는 절대로 다섯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우리 또래 남자들도 이미 다 혼자는 아닐텐데, 잘못하다간 임자까지 있는 덧에 걸리게 되어있단다.

너 이런 병 처음 아니야, 옛날 그 일을 생각해 봐. 완전히 넋빠진 애, 무슨 핑계로 어떻게든 전화라도 하려고 리포트도 안냈고, 너 정말 기말시험도 안쳤잖아? 지금 돌이켜봐도 그는 널 염두에나 두었어? 이것저것 함량미달, 큰 인심으로 변명 기회를 주어도 아무 말 못하고 지나친 어떤 여학생. 그것말고 너를 알기나 해? 그때가 언제야, 그 봄학기, 넌 왜 봄에 약한 거냐?  

그 후 언제였을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영화관에 가서 보던 날, 친구는 갑자기 "너 혜완아" 라고 나를 불러 세웠다. 너 또한 혼자서 가라. 우리, 책을 직접 사서 읽자. 우리가 돈을 주고 소설책을 산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대학을 그만 두고서도 일이년은 몰래 책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했었지만, 그 뒤로는 이런저런 여유가 없어 책을 사 본 적이 희미했다. 그런데 우린 책을 샀고, 친구는 아예 어디에선가 원래의 경전까지를 찾아냈다. 하긴 내가 지쳐 잠든 밤사이 그 애는 컴퓨터에서 밤을 샌다, 뭔가를 쓰거나 찾거나.

숫타니파아타… 한참 열을 올려서 외웠던 옛 구절을 친구는 새삼 다시 꺼낸다. 비밀스럽기도 하고 또 정말 그냥 염불이라 생각해라. 어쩌자고 넌 또 시작이냐구. 날 따라 해 봐, 물속의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 (침묵) ― 어서 ― 물속의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 또한 이미 불이 탄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아니 다시 하자, 좀 더 네가 좋아했던 구절로.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넌 그런데 번뇌를 끊는 가르침 중에서도 바람이니 연꽃이니 나오는 구절은 좀 외우고, 냉철한 단어는 다 잊었구나. 넌 아주 물고기 수준이야.

새대가리는 몰라도 물고긴 아냐. 또 물고기가 왜? 물고기가 자전거도 타는데 뭐. 여자는 물고기가 자전거가 필요한 만큼만 남자를 필요로 한다고 큰 소리하던 여자도 어쨌든 결혼했잖아.  

너, 스타이넘이 이제와 결혼을 했다고 그 인생철학이 바뀐 거라 속단하지는 마. 결코 결혼이 필수가 된 건 아니니까. 남편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고 파트너랬어.

파트너? 무슨 다이 하드 시리즈 경찰이냐?. 남편 아닌 파트너랑 결혼하면 물고기보다 나아?

적어도 체로키족 식으로 했다는 거지. 진정 남녀를 평등하게 대접한다는…

그럼 아무나 체로키가 되냐구? 보호구역 오클라호마에 아니 미 전역을 통틀어 만 명 남짓, 그들의 언어가 살아있기나 해? 200년전 다트머스 대학 설립해준 백인들 교육 덕에 그 문화는 끝장났다며? 그런걸 어떻게 아느냐구? 거야 간단하지, 언젠가 컴퓨터 화면 살리니까 떠있던 걸 뭐. 넌 찾고, 난 심심하면 읽고. 너 맨날 PC 켜놓을 땐 나더러 읽으라고 그렇게 두는 것 아니었어?

그랬다 치자, 그게 결코 노선수정이 아냐. 저번 제주에 왔을 때 인터뷰기사도 못봤어? "자궁이 있는 모든 여성이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명제는 성대를 가진 모든 사람이 오페라 가수가 돼야 한다는 말과 같다"해서 좌중이 웃음바다였다구!

웃음? 대중은 명사에겐 관대해, 논리적 비약에도 웃어주고. 성대가 정말 오페라 하라고 있는 거냐, 말하라고 있는 거지. 성대로는 말하고, 자궁으론 애 낳고, 그러는 거야. 늦기 전에.

뭐야, 네 자궁으로 애를 낳겠다? 그저 그 남자 바라만 보면 자궁에 애가 들어오니? 자궁이 원초적 충동으로 애를 낳고 싶다고 쳐, 그게 그리 쉬운 일이야? 이 시대에 어떤 남자가 애나 낳고 싶어하는 바보에게 애를 낳으라 하냐. 거기까지 상상이나 되는 거야? 어떻게 그의 눈에 띄는가… 어떻게 그 눈길을 받을까… 언제 어떻게 해서 마침내 그가 말을 걸고, 데이트를 신청하고, 고백을, 청혼을 하고. 아니 그런 것 생략하는 신세기 인간들이라고 쳐, 어떻게 그에게 다가가며, 어떻게 그 손을 잡으며, 아니 어떻게 그가 손을 잡게, 입맞추게, 그 생명을 네게 주게 만드는데? 네 입 몇 마디 말로서 되는 일이, 언제 어느 세월에 일어나느냔 말야. 그거 그 옛날에 한번 졸업하지 않았어?

하긴 옛 일이지. 올림픽 전의 한국은 옛날이 맞아. 네 말대로 난 마음을 다 퍼주어 버려서 남아있는 조각도 없는 줄 알았지. 알 수 없는 원망도 슬며시 잦아들 지경이었으니. 이상해,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쿵쾅거리지? 넌 뭐 항상 정답을 가지고 있고, 난 항상 틀렸으니 얘기 해 봐.

뭐 그렇게 빗나갈 일이 아냐. 그때 그 일을 잊진 못하지, 자꾸 거치적거리는 네게 상대는 째진 눈 한번 바로 떠보지 않더라고? 참 희한도 해, 그 연보라빛 편지지에 봉투 묶음 사서 또 쓰고 또 쓴 편지들. 그거 한번 봉투에 넣고 이름이나 적어 봤어? 꼬박 일년은 그렇게 썼을 것이야, 날이나 날마다. 하긴 일년은 안되는 구나, 다음 봄학기 휴학하고는 그냥 접었으니까. 그래도 그 아까운 글들, 지금 같았으면 하드에라도 들어 있겠지. 알다가도 모를 애야, 쳐다보면 피하고, 말을 걸면 아예 대꾸도 없거나 엉뚱한 대답만 하니.

그랬었다. 열아홉 첫 자유의 봄에, 우린 정말 그것이 자유의 봄이라고 믿었다, 우선은 멋있어 보이는 과목만 수강신청을 마쳤다. 영어도 《대학영어》는 얼마나 다른가. 모옴의 수필도 들어있을 지경이니 "달과 육펜스"를 영어로 읽는 느낌에, 거기다 갑자기 승격됨을 만끽하는 《인간과 가치》, 막연한 동경의 《글쓰기 기초》… 얼마나 떨리는 시간이었나. 제목부터 수상쩍은 "악의 꽃"의 시인은 우리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신에게의 상승과 악마에게로의 하강의 기원을 함께 품고있는 인간존재의 영원한 모순, 모순 속의 우울, 파리의 우울… 시인은, 나의 그가 말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고 배운 우리에게 "유용한 인간이란 언제나 무척 야비한 것으로만 보였다"고 말합니다. 유용한 인간, 야비한 인간…

그 시간이면 나도 모르게 쿵쿵거리던 가슴을, 친구는 죄다 안다. 무슨 단어도 그의 목소리로 들으면 아우라에 쌓여 숭고해졌다. 바로 그 아우라 같은 고귀한 단어를 내 가슴에 심어준 그는 그러나 강의가 끝나면 교실 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일자로 째진 입에 자물쇠가 잠긴다. 액자유리 뒤에서 입을 꼭 다무신 아버지나 똑 같다. 일부러 지각을 해서 출석부 고쳐달라며 이름을 각인시키기를 되풀이하고 ― 각인이라는 단어도 그로부터였다 ― 리포트는 기일을 넘겨서 교수실로 간다. 교수실이라야 젊은 강사들이 함께 쓰는 곳, 여고 때 교무실에 비하면 널부러져  쌓인 책들하며 꾀죄죄하기도 했지만, 뭔가 개성적인 바로 이것이 고차원이구나 믿었다. 강인하게 일자로 다물어진 입은 그러나 3cm 정도의 가벼운 고개끄덕임으로 대신했다. 한 페이지가 빠졌노라고 다시 가져간다, 그럼 아무 말 없이 받아 아무 책 위에나 놓는다. 저기요 지난 시간에 01반 리포트… 이번엔 2cm 끄덕임. 한번도, 왜라거나 자꾸 늦으면 안되어요, 그런 핀잔도 없는, 강의실 밖에서는 도통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는 표정으로 빗장을 내걸고 있었다. 바로 그 빗장에 매료되어… 아니 속이 상해서, 나는 달아올랐다. 부글부글 끓었다.

한번은 바싹 지나치는 시도를 감행했다. 검푸른 잉크냄새와 함께 검푸른 바닷물처럼 냉기가 건너왔다. 오싹했다. 차가운 유리 속 아버지 냄새도 그랬다. 어버이날 다음은 스승의 날이었다. 꽃을 보내고 싶었다. 이름을 쓰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5월의 저녁은 알맞게 부드럽다. 카네이션은 무슨, 내 마음은 순 장미였다. 장미 열송이는 큰 모험이었다. 빨강색은 부끄러워서 참았다. 바깥에서 보이는 창문에는 불빛이 별로 없었다. 4, 5층엔 몇 개 켜져 있었지만, 그것이 다 꺼지도록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악 어두워진 복도를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문 앞에 다발을 가만히 놓았다. 아차, 내일 아침 출근길에는 조금 시들겠지. 하지만 지금 직접 부딪친다면 고개를 3cm 끄덕일까, 아님, 장미라니 이게 뭡니까 하고 모처럼의 변형을?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이게 뭡니까? 이게 뭐임?

도망치려던 나는 곧 다시 돌아가 다발을 집어들고는 뛰었다. 크게 흔들리는 통에 꽃잎은 벌써 시들했다. 움켜쥔 왼손바닥에선 풀 냄새가 났다. 오른 손으로 꽃잎을 흩뜨렸다. 부드럽고 촉촉한 온기가 달라붙었다. 열송이 꽃잎을 그렇게 뜯었다. 향기가 서러운 아우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아우라의 독에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몇 시간을 밖에서 서성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갔던 날, 친구는 현관 문지방에서 갑자기 튀어 나왔다. 어찌나 갑자기 들이대는지 둘의 코가 맞닿는 줄 알았다. 그녀의 냉기가 아리도록 내 볼을 때렸다.

친구는 꼬박 일년을 나를 힐난했었다, 마침내 내가 제풀에 꺾일 때까지. 나는 그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젠가 노교수가 된다… 책 속에 묻히면 좀벌레들과 함께 살리라. 아버지의 누런 콘사이스와 몇 권 남은 동아세계문학전집에도 그런 하얀 벌레가 기어다녔다. 0.3mm 샤프로 찍은 점보다도 더 작은 하얀 벌레들이. 축축한 벌레들과 살아가는 그의 이미지에 내 발등이 다 스물거리며 시려왔다. 나는 그를 지웠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그 뒤로도 나를 홀대했고, 그 냉기는 지금도 줄지 않고 나를 채근하며 따라다닌다.

가장 심했을 때는 몇 년 전 유치원에서 한 아이에 빠졌을 때이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아이들 천지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당연히 제일 안움직이는 녀석이다. 반일반 아이들이 더 심하게 딩구는 데 비해, 아이들 절반 이상이 떠나고 난 종일반의 오후는 시무룩해지는 표정이 번지는 게 보통이긴 하다. 그 아인 그런데 아침부터 혼자만 논다. 종이찢기, 마음대로 그리기 시간에는 괜찮다가, 인사하기, 이야기하기, 동시화 외우기 시간에는 입을 다문다. 활발하고 예쁜 달님반 선생님이 달래도 끄덕없다. 달래면 달랠 수록 입만 다무는 게 아니라 아예 긴 눈을 질끈 감는다. 이마가 유난히 넓어서 눈은 얼굴중심 저 아래로 내려간다. 입술과 평행선을 이루며 완강한 수평선 두 개가 그려진다. 눈물이라도 날까 무섭게 질끈 감은 눈에선 정말 파도가 일렁이는 느낌이 온다. 소리내어 울지 않는 아이가 정말 두렵다. 가끔 들르는 외할머니는 손자를 떼놓고 갈 때도 참 교양있지만, 특히 화려한 미소와 알파로 원장을 격려한다. 그땐 내가 아직 보육교사 양성과정에 다니기 전이었고, 그냥 원장의 햇님반 보조였다. 오전 에어로빅에 사우나를 거친 원장이 출근하는 것은 12시 점심식사 시간 직전, 종일반 아이들 식사를 챙기려 온다. 그러나 잦은 점심약속으로 그 또한 내 몫이었다. 그리고 나서 반일반 아이들 물품 정리하는 등 일을 마치면 결국 4시나 되었고, 그때서야 다른 아르바이트를 향하곤 했다. 뒤돌아보면 유리창은 마침 반사되는 빛으로 내부를 비추지 않고 그저 반짝인다. 남겨두고 오는 아이얼굴 아래쪽의 두개의 완강한 직선은 괜히 내 가슴을 두 번 갈라놓는다. 누구의 애일까? 전혀 닮지 않은 외할머니, 그렇담 아빠의 얼굴일까? 혹시 유창한 수사학의 세계에서 갑자기 입을 꼭 다물던 그 선생님?

친구는 그때 내 미친 상상을 어찌나 혹독하게 비난했는지, 난 그만 친구와 이별을 시도했었다.  넌 어떻게 일자 눈만 보면 무조건이야? 조금도 나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친구와 더불어 사는 것은 고문이었다. 이 진드기를 떼어 내려면 내가 죽는 수밖에 없지 싶었다. 아르바이트 카페에서 퇴근 시간을 넘기고 술에 잔뜩 취하기도 했다. 카페가 다 끝나고 주인 언니네가 퇴근할 때서야 나를 데려다 주면 새벽이 다 된다. 놀랍게도 그 시간에 이미 새 날을 시작한 사람들이 거리를 깨우고 있다. 그런 날 초인종을 누르면 어머니는 기겁을 하시는데, 친구는 내색도 없다. 술에 취하면 친구가 나를 상대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취하는 날이 잦아졌다. 난 낮의 일자리를 잃었고, 밤의 카페주방이 전업이 되었다.

순한 영어교사의 딸은 분명 계급하강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나를 달래셨고, 답은 보육교사 양성과정이었다. 어머니의 꿈처럼 멋있는 국어선생도 초등교사도 못된 딸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이었다. 일년 과정을 졸업하고는 겨우 낮생활로 돌아왔다. 그러나 식당보조와 정식교사 사이, 그것이 실제 내 직업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소규모 유치원을 운영할 자격이 되었는데, 그만한 돈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저녁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태도 어림없었다. 게다가 2월 말이면 이동이 잦았다. 폼으로 대학을 다녔던 정식 유아교육과 출신들도 직업 얻기에 관심이 커지자, 양성과정 출신은 밀려나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이런 변화가 왔다. "대우도 못받는" 남의 유치원 보육교사 자리 알아볼 수고말고, 여기 동생네 치과병원 우선 돌보라는… 이모는 원하는 것이면 다 하신다. 동생, 그러니까 이종동생은 모교에 남으려고 "시간만 버렸고", 이제와 개업하는데  진료밖에 모르니 병원 살림을 좀 맡으라고, 이모는 반 강제셨다. 나더러 아예 간호조무사 자격을 따라시며, 후일 산후조리원과 영아원 유치원을 연결하는 비젼 속에 나를 집어 넣으셨다.

아직은 낯선 오피스텔의 아침, 눈을 떴을 때 친구를 발견하지 않은 잠시 순간을 느긋이 즐기고자 난 이불 속으로 더욱 기어 들어간다. 출근이 바빴던 보조 때나 보육교사 시절에도 그랬다. 깨어나지 않아야 친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이 되는 안도감을 느낀다.

우유 한잔 마시자! 친구는 곧 목소리를 높혀 우리의 하루를 시작한다. 제발 흰쌀밥에 조선간장 찍어 김을 덮어먹고 싶어하는 내 기분은 뒷전이다. 요즈음엔 사시사철 구운 김이 있는데도 말이다. 아침부터 간장 된장 김치 같은 무식한 냄새를 풍기면 직장 나가는 여자의 하루는 끝난다는 것이다. 옷에만 베니? 그렇담 갈아입고 나가지. 하지만 머리카락 켜켜에 깊숙이 스며든 냄새는 어쩔 도리가 없어 응?

그렇게 시작하는 잘난 채는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식탁에 놓는 2, 3분 동안에 두서너 가지 뒤따른다. 저런, 그 긴 컵은 안되지, 넌 또 우유처럼 기름진 게 없다고, 아니 우유도 꼭 된장국그릇만큼 씻어야 한다고, 한 나절 컵 씻느라 싱크대 손 담그고 있을 것 아냐! 나는 유리컵이 길고 좁을 수록 예쁘기도 해서 집어 들지만, 좁은 컵에 따라야 우유를 덜 먹을 수 있는 계산이다. 그것을 이젠 잊었나? 엄마 젖꼭지가 우유꼭지로 바뀐 것을 참지 못해 울어대던 그 옛날을?

우유 알레르기에도 내 유년시절은 따뜻한 보호 아래 있었다. 다만 그 시절은 꿈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다. 우유를 치즈를 좋아하고 싫어할 계제가 못되는 웅크린 사춘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사진으로만 남은 아버지는 속수무책이셨다. 천장쯤 높이에, 그것도 유리액자 안에 갇혀있는 아버지 얼굴로는 방바닥의 우리를, 길거리의 우리를, 교실의 우리를 어쩌시지 못했다. 해마다 봄빛을 받아도 후줄근한 살은 여전히 피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친어머니 슬하에서도 질펀한 흙덩이 사이를 바지 가랑이 젖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야하는 계모의 아이들처럼 구부정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우리의 등이 미리 굽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 하셨다. 말끝마다, 아가, 등 좀 펴어라 하셨으니까. 한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에 가난과 수치라는 이상한 쌍둥이가 들어왔다. 이제 가난에 조금씩 적응되는가 싶으니, 수치심이 빠져나간 자리에 상대적 박탈감이 들어왔다. 박탈감보다 무서운 것은 무력감이었다.

하얀 눈 내리는 아름다운 날도 행복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손이 시려 털장갑을 사러 상점을 기웃거리더라도 속없이 백화점까지 가면 안된다. 그 날은 어쩌다 스포츠센터가 있는 백화점 까지 걸어가게 되었고, 장갑 쪽을 기웃거리다보니 매장은 밝기도 했다. 은은한 눈처럼 하얀 목도리 위에 다소곳이 얹힌 하얀 털모자… 장갑까지 있을까? 가까이 들여다보는 내게 점원이 다가왔다, 뭘 찾으세요? 비싸서 안 사는구나 들킬 새라 실눈으로 안보는 척 들여다본 값은 8천원 남짓, 그까짓 나도 살 수 있겠다. 예상보다는 싼 느낌이었다. 용기를 내어서 이거 좀… 하면서 거의 다 살 뻔했을 때였다. 세트 상품이지만 따로도 되거든요, 처음보다 훨씬 친절해진 목소리가 말했다, 목도리만은 5만… 다음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동그라미를 잘 못 본 나는 부끄러움에 달아 그렇게 도망쳤다. 그 뒤로는 하얀 목도리가 아닌 아이보리도 베이지도 무턱대고 밝고 깨끗한 옷가지는 무서워졌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섭다. 연한 빛깔  깨끗한  빛깔은 부이고 선이며, 후줄근한 내 살은 어두운 빛깔 속에서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병원을 처음 둘러보던 날부터 내벽 전체가 하얗게 칠해진 공간은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여기저기 낙서도 있는 알록달록한 유치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드디어 건물 사회 내에 우리병원을 소개하는 날이 왔다. 그런 일은 정서적으로 가까운 피부과 쪽에서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여기에도 동창이라야 통하는지, 동생은 피부과와는 누가 봐도 경쟁관계인 대학 출신이었고, 하긴 같은 대학이라도 치의대와 의대는 그렇고 그렇다나? 동생은 이과에 문외한인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무조건 위아래 층 할 것 없이 문마다 노크했다. 문이 열리면 매번 주춤하는 나. 속으로는 안열리기를 기대하는 나. 그는 바로 그날 청소년연구소인지 심리개발연구소인지 그 쪽 사무실이 줄줄이 붙어 있는 어느 방 하나에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른 나무껍질 같은 어두운 얼굴색에 셔츠도 검게 입은 우울한 어깨너머로 잠깐. 우리를 보고 잠시 일어서는가 했지만, 문까지 인사차 따라 나서지도 않았다. 대개는 그랬다. 졸업하고도 대학병원에 남아서 온갖 경쟁을 겪은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월하게 해 넘기고 있었지만, 거절에 쉽게 상처입는 나는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내가 의사동생을 축하해 줄 수 있는 건 접수창구 유리창 앞에 레이스로 뜬 작은 커튼을 만들어 꾸며준 것이 전부였고, 이제부터 나는 무조건 동생의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울고 웃기도 주인 따라 해야 한다. 몇 층을 그렇게 다니던 동생은 OO여자고등학교 동창회 간판을 보더니, 훗훗, 우리도 여기에 동창회사무실 낼까 언니, 하고 웃었다. 언제적 같은 학교? 속으로 의아해도 겉으로는 얼른 따라 웃었다, 그때 내 앞에는, 들어선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술을 열지도 않고서 냉랭하게, 뭡니까, 네, 알았슴… 정도를 말하던 굳은 얼굴이 다가왔다. 동생을 따라 웃는 내 웃음은 펼친 채 멎어서 한 동안 미키마우스 인상이었을 것이다.

왜, 정말 그러자니까, 여기 치과간판과 나란히. ―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날, 생글거리며 명함집을 들고 서있는 의사동생과 기정떡 쟁반을 들고 서있는 아무 것도 아닌 나말고는 아무도 없는 어스름 복도에서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알 수 없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싸늘함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덩달아 싸늘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 적 기억 끝간데 묻어둔 얼음덩이가 순간 되살아 난 때문일까? 그리고 추우면 사람은 뜨거움을 찾아 갈망한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혼란 가운데 나는 먼 데 기억 속의 차가움과 그때의 혼란을 함께 찾아 헤매며 달아올랐다. 그는 누군가 이기도하고 아니기도 했다. 나는 부지런히 복도들을 기웃거리며, 그의 사무실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뜸한 시간대에 가면 간판은 잘 볼 수 있으나, 대신 안 풍경이 보이지 않아서 긴가민가했다. 처음엔  그의 직업은 출판과 관련되는 무엇이었을 것이다라는 선입견으로 출판사 간판 쪽을 기웃거렸다가, 코너에서의 발걸음 수 등을 생각해서 그 옆의 연구소 쪽이 더 맞다고 생각되었다. 결국 그가 있었던 곳은 무슨 연구소이긴 하지만, 특히 그가 책임자가 아님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는 이 건물 상근은 아니라 했다. 방통대 나간다던가, 어디 겸임이라던가? 나는 미아동캠퍼스와 성수동캠퍼스 싸이트에 들어가 그럴싸한 과목들 교수명을 다 찾아 기웃거렸다. 몇날 밤을 새어도 과목명도 교수명도 모르는 어떤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언젠가부터는 눈을 들면 사방으로 거기에 있는 마른 나무가지 같은 그의 모습이 색유리처럼 내 시야를 가렸다. 병원 접수실 1평방미터 하얀 벽 사방에 그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겨우내 마른 나무 가지는 이제 조금만 껍질을 벗겨내면 아직 살아 물이 흐르는 연녹색으로 드러날 것이다.

초근목피를 이야기해주시던 아버지는 초근과 목피를 직접 보여주시기도 했었다. 칡넝쿨은 지금은 아카시아만큼이나 아니면 더 심한 숲의 원수가 되어 있지만, "그땐 이게 밥이었단다, 이 보아라, 밥칡을." 추석성묘 다녀오는 길의 칡넝쿨은 그냥 너울너울 푸른 잎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꼭 "그땐 이게 밥이었단다" 하셨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사오신 밥칡은 밥이 아니라 칡이었고, 그 자체로서도 그리 깨끗치도 못한 것이 뭔지 상급은 아니었다. 칼로는 잘 안되어 작은 톱으로 살금살금 썰어 놓으면 금새 누렇다 못해 시커멓게 되고, 치마 자락에라도 묻으면 영 버리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단 하나, 흥부의 호박도 이런 톱으로, 물론 대톱으로 켰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어서였다. 칡은 톱으로 아무리 썰어도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여기 저기 밥은 빨아먹고 칡만 뱉어놓은 몰골은 흉하기만 했다. 나중에 아버지는 안계셨지만, 하얀 천에 품어놓은 비밀스런 핏자국이 마르면 칡색깔이 떠올라 더 이상 칡을 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럴 때면 친구는 유난스럽다고 눈을 흘기고는 칡그릇을 제 앞으로 당긴다. 밥이야, 밥. 밥.

밥칡은 밥이라 하는 사람과 칡이라 하는 사람으로 사람을 갈라놓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아버지 딸이면서 아버지의 밥 대신 칡을 택했다. 밥칡을 칡이라고 하는 세계는 엉뚱하게도 이모의 세계였다. 어머니는 이모의 손 위 언니이므로 어머니의 세계 또한 그럴 것이나, 어머니는 부실임을 지켰다. 부실?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부실이라 부르시면 웃음이 나곤 했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제주 부을나의 자손이었다.

아버진 4월 10월 삼성전 앞의 춘추제를 한번 다녀오시고 싶어하셨단다… 나중에 어머닌 왜 그 말을 하셨을까. 잔디로 덮혀 무슨 구멍인지 모를 띄엄띄엄 세 구멍에서 사람 선조가 나오셨다니. 그땐 아버지의 여름방학이었지만 날은 서늘했고, 오른 쪽 구멍 언저리에선 정말 안개 같은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손짓한다는 섬뜩한 기운도 느껴졌다. 나는 하필 원숭이띠인데, 저기 풀 밑에서 신인이 아닌 원숭이가 손을 내미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아빠, 나 저어기 원숭이 안할래, 그거 대신 나비하면 안돼?

아가야, 그래 나비야, 누가 널더러 원숭이 하래? 나는 그 풀 밭에서 유일하게 사랑스런 작은 노랑나비에 빠졌다. 별명이라도 나비가 되어 기뻤다. 실제로는 움직이기를 너무 싫어하는 나는 어떤 양란에 피어난 노오란 꽃잎처럼 줄기 끝에 붙어 흔들거려도 떠오르지 않는 붙박이 나비였다. 그러다 중학교에 가서 난데없이 사전찾기 병에 빠졌을 땐 실망이 너무 컸다. 나비목 불나방과의 곤충. 날개를 편 길이 약 40mm. 온몸에 암갈색 털이 촘촘히 덮여 있으며, 앞날개는 흑갈색, 뒷날개는 오렌지색 바탕에 무늬가 있음. 콩·뽕나무·머위 등의 해충임. 그러니까 부나비는 기분 나쁜 불나방과 똑같이 엄청 나쁜 의미였기 때문이다. 성씨 때문에 나는 화려한 나비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감수성 따라 내 운명에 대한 예감에 무서워 떨었다. 별명을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다 고 2때 인구조사 통계가 발표되었다. 우리 성씨는 인구 8,565명으로, 순위는 274성씨 중에 108위였다. 이런 기억은 순전히 오기로 일기장에 적어둔 덕이다. 나중에 명부의 강 저편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 ― 그게 가능할까 ― 뭔가 중요한 보고라도 될 듯이 난 그렇게 적어 두고 외웠다. 성씨가 운명이면 하는 수 없다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발음만 같을 뿐 아무 상관없이 간쑤성 지방에 살았다는 티베트계 부씨마저도 남 같지 않다.

하긴 부씨말고도 사람은 어디에나 넘쳤다. 막상 아주 대도시로 나온 뒤, 사람들은 어디에고 꽉꽉 들어찼음을 알게 되었다. 어디를 가도 앞쪽은 높은 건물의 연속이고, 삼겹살 냉면집 실내포장마차와 카페들이 가끔 노래방과 섞여 자리한 도시. 거기에 크고 작은 병원 머리방 드물게 목욕탕도 끼어있으니 아무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밤에 조금 어두운 공간이 있으면 그곳은 은행이거나 관청이거나 그랬다.

그런 어느 한 구석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건물은 평범한 현대식 건물답게 고층에 장방형 구조로, 독특한 점은 돌아가는 층계가 한 귀퉁이에 있다는 것 정도이다. 뉴욕 같은 곳을 영화로 볼 때 밖에 나 있는 비상층계를 건물 안에다 넣어서 지은, 그렇게 해서 지그재그가 아닌 계속 타원형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느낌을 준다. 그의 사무실은 몇 개월이 지나서야 우리 치과 층에서 두 층 위 다른 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내가 들어있는 주거용보다는 한참 아래층인데, 5층까지와 6층 이상은 서로 다른 엘리베이터를 쓰기 때문에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 내가 우연히 사무실로 올라가는 그의 뒤를 따라 치과에 가는 척 그 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고 해서, 미리 내리면서 그가 어디에서 내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려야할 치과 층을 지나쳐 더 올라갈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내 주변머리이다. 누구라도 믿지 못해 할지 모르지만, 이론상으로 위층 사람의 정보를 얻기는 어렵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엘리베이터로 사는 형편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 그를 다시 만날까? 사무실 건물의 좁은 복도란 최소한의 이동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층 입주자들이 스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오히려 꼭두새벽에 집을 나선 사람들이  영어학원이나 헬스클럽을 거쳐 황급히 아침을 먹으러 몰리는 지하 음식백화점에서 붐비기 마련이다. 아니면 다시 점심을 먹으러 흩어지는 근처 식당가에서나. 나는 그러나 이런저런 출근행렬과 마주치지 않는다. 건물 중간층 이상은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이라서 나처럼 거주하는 사람도 있지만,  X기획 또는 Y출판사 또는 Z칼라인쇄가 사주 철학원과 함께 섞인, 시체말로 주상복합 퓨전이다보니, 드나드는 사람 또한 각양각색이다. 나이로 어림 잡아도 20대에서 60대가 드나든다. 하기야 조금 낮은 층에 들어선 치과와 피부과에 중국한의원까지를 생각하면 한 현대판 면소재지의 축약과도 흡사하다.

결혼을 할 수 있기까지 얌전히 동생네 병원 살림 맡아서 하다 보면… 그것이 내 노처녀시절에 대한 이모의 현명한 처방이었다. 어머니는 속수 무책으로 이모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심약하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심약'은 그저 정서적으로 쓸 때는 미덕이 될 수도 있는 형태소다. 형태소 같은 단어는 내가 일년간 국문과를 전공한 이래 넓어진 내 어휘에 속한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심약은 신체적 심장의 약함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심장판막증인 채 가정을 가지셨지만, 남들 보다 성큼 큰 키로 미국사람이나 되는 듯이 멋진 영어선생님을 하셨다는 아버지. 아버지의 영어는 기억할 수 없지만, 긴 그림자는 기억의 끝에서 아물거린다. 겨우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설까 말까, 그렇게 일찍부터 어머닌 미망인답게 겸손했다. 겸손은 외할아버지의 미덕이었고, 어머닌 다른 방도를 모르는 분이다.

어머니 손아래 이모는 당차고 밝아서, 의대생과 연애라는 어려운 관문을 뚫고 결혼에 돌입하시고, 그래도 처음엔 너무도 조촐한 시댁 살림 탓에 고생도 많으셨다 했다. 그러나 이재에도 훤해서 대처에 자리잡자마자 적당한 크기의 종합병원을 내셨단다. 누군가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다 했다. 지금은 시댁과 친정 온통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다. 자녀 또한 계획표대로 잘 되었다. 의대생 아버지에게서 생산된 딸답게 소꼽놀이에서도 의사 역만 했다는 큰언니도 의사다. 내리 딸만 셋을 낳아 슬그머니 겁도 났었지만… 이라고 가끔 입버릇처럼 말하시는 이모는 기필코 아들을 보셨고, 그 모두가 의과대학 아니면 최소한 치과다. 나더러도 약대나 간호과를 가는 한에서 등록금 전액을 제의하셨지만, 어머니는 딸이 의사같은 것 못할 줄 미리 알고 계셨는지 욕심내지 않으셨다. 거기서 약사나 간호사는 이모네 의사자녀들과 너무도 확실한 일직선상의 비교이고 보니, 제하고 싶은 데로 나 둬라 좀, 하는 무덤덤한 반대로 딸 손을 들어 주셨다. 그러니까 학교 신문에 시 한편이 뽑혔던 나는 속없이 국문과에 진학했다. 국어교육과 아니면 교육대학을 갔어야 어머니 체면이 서는 선생님이 되었을 것을, 아니 그보단 대학 자체를 마칠 수나 있었을 것을. 인문대학은 등록금이 사범대학과 비교가 되지 않게 비쌌다. 그런 차이를 알 수 없었던 우리모녀는 이모의 눈총을 받았고, 그 대신 눈총과 함께 오는 돈은 받지 않았다. 첫사랑을 앓던 나는 1학년 성적이 시들했고, 10% 교직 이수자 신청에서 탈락하자 2학년을 포기했다. 물론 처음엔 휴학이었다. 봄날을 을씨년스럽다고 표현하는 작가를 이해하게 되었던 그런 봄날이었다. 을씨년스럼은 계절을 타지 않으리라는 것도 함께 배운 봄, 그 봄에 꿈은 접혔다. 그리고 여름이 가을이 지났다. 겨울에는 아예 두문불출, 이듬해 봄의 재생을 믿기 어려운 긴긴 잠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역시 심약해진 ― 이번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심약한 ― 어머니랑 조촐하게 사는 데 진력을 다했다. 우리에게는 결정적으로 에너지가 부족했고, 그래서 늘 돈이 부족했다. 돈 없이 돈 가진 자 무시하기, 그것 또한 우리의 놀이요 자존심이었다. 가까이는 이모네… 멀리는… 하지만 꿈도 없는 십여년의 세월은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내가 치과에 따라 들어온 것은 어머니가 더 이상 내 밤낮의 일을 참지 못해서 이모의 돈에 굴한 셈이었다. 너도 좀 쉬면서 결혼문제는 이모에게 맡기자, 자신이 없어진 어머니가 안쓰러워 더는 고집을 못했다. 그리고 병원 이삿날… 나는 그를 그렇게 만났다.

누군가의 조금 찡그린 닫힌 얼굴이 왜 그리 떠나지 않는지 모르는 동안, 처량한 신세도 잊은 채 나는 행복했다. 밤중에도 깜깜한 천장에 퍼지는 얼굴에 몰두했다. 천장이 뚫리면 더그매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건물에서 24시간을 산다. 그런데 그를 마주칠 확률이 그리 없다니.

그를 가까이 오래 보게 될 때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갑작스런 가을 바람에 어깨가 움츠리던 아침, 난데없이 함께 아침 못 먹었다고 지하로 불러낸 동생을 보러 들어갔을 때였다. 해장국과 설렁탕만을 파는 저쪽 코너에 그가 숟가락을 쥔 모습이었다. 유난히 각도를 안으로 구부려 쥔 숟가락은 몸과 평행이었고, 그러자니 고개를 숙인 자세였다. 고개를 숙이고 아침 해장국인지 설렁탕을 먹는 남자. 아 센 머리가 보이던 그가 아직 미혼의 그러니까 확실히 독신이었어?

커피자판기 쪽으로 움직이는 그를 따라, 동생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내 고갯짓은 영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따뜻한 아침을 주는 어머니나 아내가 없는, 그러니까 소유자가 없는 자유인으로 다가온다. 그는 자유인이다. 내 또래 약간 위로 보일까 말까, 그 옆얼굴엔 분명 나이테가 없다. 나 또한 자유인으로서, 조건에 관계없이 적어도 한 남자를 사랑해도 되는 처녀다. 처녀의 자유, 이 자유는 오직 그를 향한 집념이 되어갔다.

이제 그가 내 주문에 걸려 내 코트에 들어오면 된다. 그는 우선 치통을 알아야 한다. 그의 치아가 그 얼굴 생긴 만큼이나 강단있고 영 상하지 않는다면, 그렇담 식당에서 뼈다귀를 잘 못 깨물든, 뭔가 사금파리 조각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잘 못 먹다가 이가 부러지든, 아니면 누군가랑 층계에서 냅다 부딪쳐 앞니라도 어긋나야 한다. 살아가노라면 별별 일에 부딪치게 마련 아닌가. 가장 좋기는 퇴근 길 나서다말고 바로 이 근처에서 날깡패에게라도 걸려 쥐어 박히고서 이가 부러지든지. 그는 어쨌거나 치과에 나타나면 되었다. 그 다음 속수무책으로 누워있는 그를 관찰하는 것은 내 일이다. 그가 치과에 나타날 확률이라면 악담도 서슴치 않았다. 속으로 하는 악담이야 누군들 못해.  

어느 날 난 그의 아침 식탁 곁으로 다가간다.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 손바닥 안에는 스태플러 침 하나가 구겨진 채 숨어 있다. 그는 너무 가까이 지나가는 사람에 놀라서 고개를 든다. 그 사이 슬쩍 그의 시래기 해장국그릇 속에 쇳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나는 그냥 죄송하다는 투의 우물우물 말을 더듬고 만다. 계속 숟갈질을 하는 그의 입안에서 딸그락 소리와 함께 송곳니가 망가진다. 송곳니가 아니래도 좋다, 어딘가 스태플러 침은 그의 치아를 손상한다. 그는 치과에 올라온다. 그가 올라오기 전에 난 부지런히 접수부를 닦고, 작은 커튼에 살짝 향수를 뿌린다. 짜증난 그가 더욱 찡그린 얼굴로 유리창문을 밀기도 전에 내가 안쪽에서 열어준다. 많이 아프셔요?

아니 어떻게 제가 아픈 걸? ― 아프시니까 오셨겠지요. 우선 등록 하셔야지요. 원장선생님은 아직 커피 마시는 중이네요.

그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나는 조신하게 말한다. 성함은요? 아니 보험 카드를 주셔요. 안가지고 오셨다구요? 그럼 다음에 가져다 주셔도 되어요. 성함이?

그의 이름을 나는 여기 말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 병원을 찾아온 적도, 이름을 기록한 적도 없으니까. 하긴 알더라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 단 하나  '그'는 그냥 ㄱ이어도 좋다. 더구나  내 별명의 ㄴ자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ㄱ자와 ㄴ자가 얼마나 오묘하게 어울리는가 너 알고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친구에게 묻는다. ― 그거야 ㄱ과 ㄴ이지, 뭐 위 아래로 쓰면 ㅁ자가 되어서 얼마나 안정감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지, 그런 걸 너만 섬세하게 안다고 생각하진 마. 그 위에 ㅅ자를 놓아서 아예 집을 짓지 그러니?

친구는 모르고 있다. ㄱ자와 ㄴ자를 그냥 위아래로 두지 않고 가까이 밀어 놓으면 어떤 형상이 되는지를. 동서남북 어느 편에서 보아서도 완벽하게 끼이는 그 적나라한 포개진 자세를 그녀는 알 리가 없다. 콜비츠의 《사랑하는 사람들》어때? 심오한 의식의 작가에게서 하필 가장 식상한 포즈의 작품을 인용하면 그녀의 표정이 어떨까? 그녀에게 내가 침묵하는 건 내숭이 아니다. 자존심이다. 나의 그를 지키는 자존심. 만에 하나 나의 외설스런 생각을 눈치챘다가는 그녀는 당장에 그를 형이하학적 존재로 단정지을 것이 뻔하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는 단견에 가깝게 철저히 속단하고 확고하다. 그는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의 사무실, 그가 있던 사무실 문 위에는 A4 평으로 크기 정도의 작고 위엄있는 간판으로  XX심리문제연구소 라는 간판이 있다. 수 십번 바라본 간판이지만, 그것도 다들 퇴근하고 난 밤중 시간에 올려다보고 가곤 했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로 사람들이 돈을 버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하는 일이 그밖에도 무슨 대학의 무슨 강의를 한다는 것, 그 정도면 내숭을 가장한 채 알아낸 정보치고는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곳은 심리학연구소가 아니라 심리문제연구소니까, 간판으로 미루어 대학의 학문보다는 조금 낮은 연구소라 다행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친구는 정말 깔깔 웃어버렸다. "무슨 학"자가 붙어야 높은 학문이라구? 그래 뭐, 학문연구소가 아니고 문제연구소니까 조금 더 낮다고 치자, 그럼 너하고 되는 수준이라고 상상하니? 방통댄가 어디 겸임교수라 안했어? 꿈도 야물다! 우리가 요샌 소설이라도 읽느냔 말이야. 영화나 뜨면 그런 책 사볼까, 하긴 그 짓도 이젠 안하잖아?

사실은 내 젊은 시절 전부를 테트리스 화면과 살아왔다. 아무 것도 투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시간만 죽는 절대가 마음 편했다. 업보처럼 쌓이는 색색의 조각들, 전사처럼 수평선을 평정하는 내 오기, 다른 게임은 유희요, 다른 취미는 사치였다. 살아 숨쉬는 상대가 없어 비교가 안되는, 비교가 안되어 상처가 없는 화면. 그 추상세계에 매달려 살아온 밤들, 밤들.

하긴 저녁 아르바이트 땐 그것도 어려웠지. 기계적인 시간 배분, 6시 50분쯤 집을 나서서 유치원 7시 반에서 40분 도착 - 5시 반 출발, 레스토카페 6시 반 도착 - 1시 출발, 집에 도착하면 1시 20분. 퇴근은 주인언니 남자가 시켜주니까 빠르다. 하루에 접하는 두 세계는 너무 달라서 처음엔 상쾌했다. 유년에서 성년으로, 천사에서 속물로.

이건 나만이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하는데, 낮에 만나는 눈동자들은 얼굴 절반쯤에 있는데, 저녁에 마주치는 눈들은 이마 쪽으로 훌쩍 올라가 버린다. 하루에 한번씩 그렇게 자주 인간의 눈의 위치가 변하면 어지럼증을 타게 된다, 그래서 야위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 일욕심과 돈욕심 때문으로 생각하시고 '살 안 빠질' 제안을 받아들이셨을 것이다. 출퇴근도 안하는 조건, 하지만 이 치과병원에서 덩달아 가운만 입고 있는 직원신분은 애매하다. 내 나이 때문에 위생사도 보조사도 나를 그냥 언니라 한다, 기공사도 누나 대신 언니라 한다. 또 원장의 손위라는 부가가치가 있으니까 다들 친절한 것 같다. 하지만 유치원 보육교사 자격 외엔 운전면허증도 없는 순 무자격자가 치과접수에 앉아 있기 힘든 실상이 곧 드러났다. 첫 환자와 상담을 잘해야하는 간판인데, 내 하얀 이의 유혹만으로는 부족하다. 난 다시 궁지에 몰리고 있다.

이런 내게 무슨 꿈이 소용될까. ― 넌 꿈을 꿀 가치에 미달 아니냐? 나는 훽 친구를 겨냥하고 고개를 돌린다. 친구는 내 반박을 아예 무시할 양으로 그새 어디로 물러났는지 조용하다. 그럼 참 오랜만에 나 혼자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꿈이라면 나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인생에 꿈 같은 것을 믿기에는 너무도 생의 왜소함에 길들어 왔다. 누군가를 그리는 것? 그런 것은 꿈 축에 들지 않는다. 그건 정말 테트리스나 같다. 테트리스 화면도 나를 인식한 적이 없다. 그냥 내 삶 죽이기 상대로 적당할 뿐이다. 그 무미에 돌아버릴 것 같을 즈음, 어쩌다 살아있는 대상이 의식되었고, 그것에 추상적으로 목숨을 건다. 친구는 집착이라고, 나는 사랑이라고 우긴다.

아니, 사랑은 알 수 없는 말이다. 그의 그림자 그의 뒷모습 혹은 옆모습이 오피스텔 건물의 좁은 복도를 돌아 지나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아려온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그의 앞모습은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단 한번도 그를 바로 쳐다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 그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그의 앞모습을 모르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모르는 앞모습에 꿈을 담아서 전혀 다른 얼굴을 숭배하는 것, 혹은 옛날 한번 박혀버린 얼굴을 대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좁은 엘리베이터 속에서 단 한번 가까이 섰던 날, 후다닥 자세를 옆으로 틀어서 그의 헐렁한 양복 옆구리만을, 더 헐렁한 주머니만을, 주머니에 반쯤 들어간 손등만을 바라보았음,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내려야할 층에서 내리지도 않고 계속 그러고 있다가 손등과 양복주머니와 양복이 함께 멀어지는 동작을 덜덜 떨며 바라본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문이 다시 닫히자 후우 긴 한숨을 쉬어, 아직 안데 남아있던 한 두 사람을 놀래키고도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함,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어쨌거나 열심히 바라는 건 순간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그 대신 무엇을 잃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된다.

그런 기겁할 일이 갑자기 닥쳤다. 불사우나라는 이름의 섬뜩한 목욕탕이 옆 건물의 꼭대기 바로 아래층에 새로 생겼는데, 겨울 시즌에 맞춰 개장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겨울 초입은 따뜻하기만 했다. 그러자 공짜표들이 이웃에 돌았다. 그러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입시철이 된 것이다. 병원식구들은 퇴근을 서둘러 구경을 나섰다. 불기운은 이상한 돌무더기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옷을 반쯤 입은 채라고는 하지만 남녀가 한 동아리가 되어 멋대로 퍼져있는 공간들이 쉽게 편해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풍덩 함께 들어가는 수영장만 못한 것이, 몸뚱이들은 엉기적 드러나고, 이글거리는 불 때문에 기분 나쁜 배음이 살덩어리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우리 병원 식구들이라야, 위생사는 조무사보다 더 젊고 더 날씬하지만 미용체조인지 몸을 잘 움직여가며 불 곁에도 잘 견뎠고, 조무사는 몸매랄 수도 없는 퍼진 꼴로도 적극적으로 살을 빼려한다거나 땀을 내려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우리 둘이서는 그저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자리조차 밀리고 있었다. 그 인간이 글쎄… 라는 난데없는 타령들도 정말 들어야할 옆 사람에게서만 멈추지 않고, 몇 사람씩을 건너서 뭉근 김 속에 섞여 들어가 멀리까지 떠다닌다. 좋으면 무릉도원이지만 나삐 보자면 연옥의 풍경만 같았다. 뜨거운 불기운에도 뼈마디가 늘어나기는커녕 잔뜩 긴장한 옹색해진 어깨는 앞으로 쏠리기만 했다. 핸드폰이 없는 나는 좋은 핑계가 되어 전화 올 데가 있다고 먼저 샤워실로 물러났다. 겨우 서서 뜨거운 몸을 식히기도 어려운 공간이었지만 찬물이 상쾌했다. 좁은 엘리베이터 공간도 구원이었다. 젖은 머리를 손으로 대강 쓸고 유리문을 나서 두어 개 층계를 내려 밟던 나는 그만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여자와 함께 바로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풋풋한 지성적인 여자와.

젊다 못해 어린아이 인상의 여자는 설마 애인일까? 그새 깜깜해진 사방 속에 뾰얀 얼굴은 창백한 달처럼 빛났고, 몇 발짝 앞이었지만 검은 머리와 어울리는 분홍빛 입술이 도톰했다. 그의 일자 입술과는 전혀 닮지 않은, 그러니까 사람은 자신과 닮지 않은 형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뭇거릴 수도 없는 터라 아까운 걸음을 떼었다. 뒤돌아 보니 운동화스타일로 젊음을 과시한 여자는 풋풋함이 넘실대는 아예 아이였다. 연구소와 관련될까? 아님 방통대 학생인가?

나도 모르게 나는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도심이 아닌 외곽으로 빠져나가려는지 전철을 이용해서 나로선 다행이었다. 1미터쯤 거리로 가까이에 가 섰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대화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재잘거리며 흔들어대는 머리카락이 그의 코트앞자락에서 뭉개지고 있었다. 그를 올려보는 코는 그의 턱수염 자리에 닿을 듯 했다. 수염이 있었다면 닿을 거리였다. 아니 그냥도 닿았다. 외설스런 감동으로 소름이 끼쳤다. 얼마를 가다 내린 역은 완전히 주택가 가운데였다. 불빛 어두운 한적한 빌라들의 숲 속에 이르자 두 사람의 발소리는 더욱 활기를 띈다. 손을 잡고 거의 뛴다. 사방이 조용하니, 크로스로 맨 가방에서 절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학생이구나, 틀림없이 방통대. 그럼 제자인데 어쩌면? 더 빨리 달려간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소리가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누나, 추카추카, 얘야 어서 온, 여보오…

누나 축하해, 내가 만들었다, "축"자 여기 ㄱ자는 엄마가 쬐끔 고쳤다. "하"자는 완전 내가 했어, 엄마 그치? 추카추카! 아빠, 재수하면 두 번씩 말해줘야지? 누나야, 추카추카!

자 우리 딸, 고생했다. 그렇다고 아빠 오늘 차도 안가져 가셨는데 아빠한테 들른 거야? 자 어서 손만 닦아, 저녁부터 먹자, 요 돼지녀석도 배고픈지 귤을 몇 개나 집어다 먹으면서도 누나 기다리자는 구나, 기특하게.

엄마, 아빠, 우리 돼지야… 모두모두 감사해요, 이번에도 수능 모자라 떨어지면 어쩌나 너무 겁났어. 엄마 아빠 때는…

내 사랑은 환상이었다. 대상의 허상. 그가 내 소중했던 대학 초년 때 보들레르를 읽어준 풋나기 강사였을지, 나는 모르고 떠날 것이다. 그 뒤로도 십 수년씩 대학을 몇곱 다닌 엄청난 지식의 소위 해외파에게도 뿌리내리기 어려운 슬픈 현실이 있는지, 나는 모르고 떠날 것이다. 남자에게 아내의 돈은 살 속에 가시인지, 나는 모르고 떠날 것이다. 대도시 현대인의 사랑은 평균 3년하고 167일 두시간 지속된다는 어느 소설책에서 읽은 신빙성 있는 통계도 무색하다. 내 사랑의 봄은 겨울 초입에 산산조각이 났다. 시작도 없던 일, 끝이라는 단어도 우습다. 무엇인가를 쳐다보기만 한 내 젊은 날, 열아홉에서 오늘까지 육천 밤이다.

사랑이 아무리 부실해도, 아무리 속절없어도, 한번 쏜 화살은 그곳을 향해 날아간다, 일직선으로. 그곳에 아무도 없으면 그냥 지나칠 것이다. 지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둥글다면 내 등뒤에 와서 다시 꽂힐 때까지. 그 살촉에 내가 쓰러지더라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늘 쏘아보면서 밀어냈던, 나를 위해 충고만으로 살아가던 내 친구 차례다. 그녀는 아예 내 삶을 ― 원래 그녀의 삶이기도 했던 ― 혼자 통틀어 살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코멘트만 이 아니라 생으로 뛰어들어, 이성적인 그녀의 방식으로, 이제는 안쪽을 향하여.  

 

                                              *

채찍 모양으로 끝쪽이 가늘어지는 나의 더듬이는 우선 아름다움에서 확실히 나비만 못하다. 끝을 여왕의 가늘게 떠는 황금관 장식처럼 부풀린 호랑나비의 더듬이를 가졌다면 행여 그가 나를 바라보았을까? 굵은 몸은 아니나 몸에 비해 날개가 작다 보니, 화려한 색깔을 뽐내려도 나비에 댈 수 없는 운명이다. 앞 뒷날개 사이의 날개가시도 얼음짱에서 미끌어지는 나를 더는 지켜주지 못한다.

내일 아침해가 떠오르면 늦잠을 자지 않는 그가 커튼을 열어젖히고 하늘을 우러른다. 바닥에 떨어진 나방 하나가 썩은 잎 모양처럼 얼어붙어 있다. 그는 행여 글감 하나를 발견하여 나방의 생태를 생각할까? 어젠 달밤이 아니었던가, 첫눈이 내리기 십상인 음력 시월보름밤? 밤에 나방이 등불에 모이는 것은 온도나 습도 등 조건 따라 빛에 반응하여 날아드는 것이라지만, 이상하군, 달밤에?

그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에 대해서는 정리가 필요한 학자다운 사람이다. 짚신벌레가 열자극에서 물러나며,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 가려하는 것 따위, 그래, 외적인 자극으로 촉발되어 생기는 수동적인 반응이긴 하지만, 아니 그건 반사보다는 전신적 반응으로서 주성적 행동이라 했지. 그는 자신의 간단명료한 코멘트에 만족하며 메모를 위해 책상으로 향한다. 그가 PC를 켜기도 전에 나는 벌써 유령이 되어 〈새 글〉에 '부나비'를 올린다. 날개를 편 길이 약 40mm. 온몸에 암갈색 털이 촘촘히 덮여 있으며, 앞날개는 흑갈색…

커튼을 열고 밖으로 나온 사람은 그의 우아한 아내일 수도 있다. 어머나 깜짝이야, 이 겨울에 무슨 벌레지? 난 또, 썩은 껍질이잖아.

그는 오늘 따라 늦잠이다. 밤새 꿈이 뒤숭숭했고, 이상하게도 가슴이 결린다. 가슴을 오므릴대로 오므리다가 갑작스런 후회가 온다. 요사이 담밸 너무 피웠나, 이건 아닌데… 아내를 부르려해도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만지려해도 곁에서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빈 침상은 나무숲 공터의 밤공기처럼 축축하다. 엉뚱하게도 언젠가처럼 그 낯선 여자가 먼데서 손을 내밀고 있는 것 같다. 찢겨진 젖은 은행잎들 사이에서 연기처럼 솟은 듯, 멀리 펼친 망토 자락은 그물날개의 아늑한 유혹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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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3. 1. 21:43

 서정인 선생님 서재 탐방기 
                                      영어로 글읽기와 한글로 글쓰기 

                                                                  
소설시대 7호

심부름


전주시 덕진동, 사람들이 호반촌이라 하는 곳, 전화로 길 안내해주신 호반2길을 찾다보니 아담하고 질서정연한 주택가가 나온다. 오가는 사람 드문데, 길까지 마중 나오신 분이 『달궁』의 서정인 선생님이시리라.


이미 누렇게 찌들은, 87년 초판 열흘 뒤에 나온 2판『달궁』을 들고 선생님을 뵈러온 터다. 실로 십수 년이 지나 작가와 마주앉은 곳, 전기스토브가 막 켜진, 차라리 서늘한 거실이다. 누렁이와 흰둥이가 힘차게 짖던 햇빛 밝은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현학의 무게가 내린다. 서재에 쌓여있는 고서들의 무게일 것이다. 난생 처음 하는 숙제를 위해, 마음 다잡고 준비한 말문을 연다. 일천한 역사의 한국작가교수회에서 그나마 새내기인 제가, 평소 말을 안 듣는 사람이지만 이건 기꺼이 하고 싶은 심부름이라서… 더듬더듬. 선생님은 작가와 교직을 겸하는 같은 종의 운명에 일단 우호적이시다. 되었구나!



우선 가장 진부한 수순으로 여쭙는다. 사상계에 발표된「후송」으로 등단하실 때, 이미 대학원에 진학하셨고 또 교직에 계셨다 했는데, 어떻게, 왜, 글 쓰는 일에 투척하셨나요? 보통 말하는 60년대 당시 특유의 미학적 자의식에 관해서는 제 개인적으로는 경외감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문학이라는 것에 기꺼이 자기 삶을 던지고 싶은 욕망, 그 근원적인 생의 충동”을 무한히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왜 썼냐? 그냥 썼다. 그렇게 말씀하실 차례다. 정성들인다고 치장해서 내놓은 우문에 현답으로. 말씀 대신 『달궁가는 길』을 가리키신다. 정년을 기념하여 문단과 학교의 동료와 후배들이 출판한 책이다. “서정인의 문학세계”라는 부제답게, 선생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편집이다. 머리글에도 나와 있다.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보려던 기획 의도를 방해하고 간섭한 큰 훼방꾼이 바로 선생님이셨다고. 그런데 “술친구 서정인”만 예외로 삶을 들려준다. 글쓴이의 기우와는 달리, 절대로 옥에 티가 아니라 청자연적의 여유다. 여기 부록에 읽어 보세요.


예, 읽어 보았습니다, 한국일보에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리즈로 볼 때보다는, 여기 이 책에 “왜 써?”라는 제목으로 나오니 더욱 선생님 말씀답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평생의 업이 된 글쓰기에 뛰어들었어요. 중학교 때 몰래 읽었던 연애소설이나 삼국지가 재미있어서,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의 칭찬에 고무되어서. 어쩌면 내가 잘났다는 것을 과시할 방법이,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타낼 방법이 달리 없어서, 또는 어떤 갈증 때문에, 어쨌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판이 벌어졌다” 그 비슷하게 말씀하셨지요. 왜 쓰냐? 그동안 그저 글을 써왔다고.


누구는 노름 빛을 깊기 위해, 누구는 혁명가와 그 혁명가가 처형한 왕의 아들 둘 다를 위해서 시를 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며, 심지어 가슴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썼다는 바이런, 목이 잘리는 것같이 느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썼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다들 이름 없이) 예로 들면서도, 자신은 “그냥” 썼다고 하셨다.


그렇습니다. 말을 하래서 하지만, 문학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 쓰는, 쓰려는 사람들은 이유가 없습니다. 좋아하니까. 갑자기 다소 고조된 어조이시다. 최근에 어떤 상업학교 교장선생님이 말하기를, 자기 학생들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생산성이 높으니까. 문학이 뭐 필요하냐. 시, 소설 그런 것은 뭘 생산해 내는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필요 없다, 그러는 겁니다. 이래서야 되겠어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합니다. 하긴 또 어떤 학생이 그럽디다, 아무개작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쓴다고, 써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정도라야 작가의식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만 합니다. 하지만 주먹을 쥐고 혁명에 나서는 것과, 주먹을 쥐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의식의 변화를, 행동가는 행동을 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작가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볼 눈을 가지게 하면 됩니다. 문학이 왜 필요한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선생님께선 무엇을 쓸 것인가를 보기 위해서 눈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눈이 있으되 못 본다. 마음을 비우면 물건의 덧없음이 보인다.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럼 마음이 욕심입니까?


세상 많은 일들이 별들의 운행처럼 틀림없이 필연일 것이오. 허나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로 여겨져요. 그러니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지요.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 이 세상은 그것의 의미를 그것을 볼 눈을 갖춘 사람에게, 그 갖춘 정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볼 눈”을 우연히 제가 공부하는 독일 작가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겐 사물이 뚜렷해진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물을 통찰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며, 그러면 언어를 수단으로 통찰하고 그 안으로 꿰뚫어보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전후 독일 작가로는 처음으로 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뵐인데, 그는 인간적인 “촉촉한” 눈을 권했습니다. 라틴어의 “유머”가 독일어로는 “습기, 촉촉함”을 의미한다고.


열두시, 아니 『아홉시 반의 당구』, 그 작가 말이군요? 영역된 것을 읽었지요. 누구라도 작가는 우선 자신이 잘 보아야 합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것, 독자에게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것이 쓰는 이유와 또 목적이 되겠지요, 만일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쓰냐? 이것은 나의 평생 문제입니다. 쓰기는 항상 새로운 실험이다, 이 말은 나로서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형식? “형식과 신념”이란 제목으로 선생님의 한국문학창작상 수상소감이 있다. “형식과의 싸움은 끊임없는 실험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실험이라는 말은 처음 해 본다는 뜻이고, 그 처음이 마지막입니다.” (“처음의 낙하산도 반드시 펴져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작동한다고 믿는 신념” 아 그런 것을 가질 날은 멀구나. 큰일이네.) “달을 그리되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리는 것은 구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고 인용하신 것이 얼마나 어렵고 오묘한 주문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한 구름을 그려 달을 그린다?


형식미라면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강」은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단편소설 중의 하나”로 정평이 났지 않습니까? 절제된 문장, 단일한 인상과 효과, 통일된 구성, 인생의 한 단면을 통찰하는 능력 등으로, 교과서적 단편소설 미학의 최고봉으로 격찬되고 있는데, 그것을 대표작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누구든 떠올릴 『달궁』입니까? 혹은 시기별로 등단작「후송」이나 「강」을 거쳐, 『달궁』의 고지,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등을 통해 어떤 특징과 차이 또는 변화를 의식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미한테 어떤 자식이 제일 예쁘냐는 식이지만.


속으로는 내가 처음 빠져든 『달궁』이라 하시길 기대한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신다. 그게 굳이 말한다면 「뒷개」, 그리고 「벌판」… 그 언제 목포엘 간 적 있었어요. 종점 분위기, 싸한 비릿내가 늘 코끝에 머무는… 그런 것 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뒷개지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읽고 해설해 놓은 것만 따라 읽어요, 다른 것들 좋은 것 많은데….


‘뒷개’는 선생님의 회상에 잠긴 듯한 설명으로 어디 부둣가로 상상이 되지만, ‘벌판’은 어디 멜까. 선생님 작품들도 다 모르면서 여기 선 것이 부끄럽다. 「뒷개」는 『달궁』의 “바다 횟집”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아닙니까? 그런데 (저부터도) 사람들은 한번 명이 나면 몰리는 경향입니다. 「강」은 아예 학교 숙제의 표적이 되었고, 예컨대 「후송」만 해도 이명증 같은 병리현상이 개인적인 불행의 수준을 넘어서 어떤 사회적, 정치적 성격을 수반하는 고통의 표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사람들은 병약함이나 정신이상을 더 이상 낭만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병의 도덕적, 정치적 알레고리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달궁』의 사설조는 아예 서정인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창성은 문체만이 아닌 어휘들에서도, 예컨대「무자년 가을 삼일」의 “무자년”, 또는 “움직이는 계단”을 “도롱태”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 “얼음과자”를 빨고, “영상띄”를 감상하는 군상들,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시고.


이번에도 대답 대신 『문화예술』(문예진흥원, 2003년 10월호)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보여주신다. “한글로 글쓰기: 한국말은 한국인의 운명”이라는 글의 시작부분은 이렇다.


“나는 우연히 한국말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나는 한국 땅에 태어나서 한국말과 만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과 만났다. 그것이 준 것 말고는 나에게 세계가 없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결정했다. 나중 커서 외국어를 배우고, 제이, 제삼 외국어들과 접하자, 그것들은 나의 첫 말이 만든 세상을  넓혔다. 외국어 하나를 알면, 세계를 하나 더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운명으로서의 한국말을 쓰는 사람과 그냥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다르겠다 싶다. 부끄럽게도 나는 후자에 속한다. 



글읽기 - 글쓰기


그러기에 영문학 공부와 한국말로 글쓰기를 병행하시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혹시 상충이 될 것인지, 실로 그것이 궁금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영문학 공부한 것을 나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대학 진학 할 때, 그래요 영문학을 택한 것은 아마 고등학생의 눈으로 읽던 우리 소설에서 뭔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야겠지요. 손창섭의 「비오는 날」같으면 참 좋았는데 (나는 「잉여인간」을 읽었는데), 별로 많지가 않았어요. 지금은 달라요, 연전에 순천대학에 문예창작과에 교환 교수로 갔을 때 박지원의 「호질(虎叱)」 같은 것도 잘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함께 공부했어요. 그러나 50년대 당시엔 국문학은 별로다 그리 생각했었지요. 하여간 노문학과가 있었으면 좋을 걸 그랬어요. 그래 영문과 밖에 없었어요. 독문학, 불문학은 고등학교 때 안 배워서 어렵고. 여담이지만, 참 독일어 그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독일어가 어렵다 하셨습니까? 아주 우연입니다만, 어제 한 밤중도 넘어서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독일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클레멘스 브렌타노라고, 낭만주의 시인입니다, 영화는 물론 불행한 결혼생활을 다룬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시를 쓰다가 일어서서 읊어 내려가는 독일어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환상적인 한편 내면의 황홀과 고통을 함께 노래하는 시라서 그랬겠지만,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이제 제가 독문학에 대한 평생의 짝사랑을 접고 나의 언어로 나의 글을 쓰겠노라 작정한 이 시점에서. 저의 배신에 대한 시위였을까요? 하필이면 존경하는 소설가를 만나 뵙기 꼭 열두 시간 전에 들려오는 아름다운 독일어.


톨스토이 또한 제대로 원 텍스트로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았겠어요? 어쨌거나 영어로 제정러시아의 소설들, 프랑스 소설들을 읽었지요. 텐느의 불어저서 『영문학사』도 영어로 읽었지요. 제 자신은 전공하는 영시들 이외에도 많은 책들을 영어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외국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무엇이건 우선 많이 읽어야지요, 그런데 많이 읽는다는 것은 주체성을 그르칠 우려가 있지요. 그래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지요. 학이불사 즉망 (學而不思 則罔)이라….


허나 요새는 내용 없이 떠들기만 하니, 사이불학 즉태 (思而不學 則殆)라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의 경우, 많이 읽을수록 상아탑에 들지 않고 평범한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고, 외국문학을 읽을수록 한국적이 되셨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영어로 영문학 작품을 넘어 다른 책들까지 읽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은 톨스토이를 노문학하는 분들이 제대로 번역해 놓았더군요.


톨스토이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는 작가는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의 두 사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고골이고, 좋아하지 않는 작가는 헤밍웨이입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보면, 미국 신문 파리 특파원과 함께 피레네 산맥 계곡에서 낚시를 하다가, 국경 너머 스페인에서 투우 구경을 하는 여자가 나오지요. 가만히 세어보니 여러 남자, 마지막에는 아마 투우사와 놀아났습니다. 그게 원 소설인지. (우와, 내가 중학교 때 『해』를 소화 못한 것이 그냥 무식이 아니었구나.) 요즘 잘 팔리는 젊은 여자 작가들, 다들 재치 있고, 너무 멋있고, 세부에 대한 풍부한 자료도 돋보이고, 감각도 세련되어 훌륭합니다만, 집요함, 깊이, 객관성, 자기 아닌 딴 사람 이야기, 폭, 능청떨기나 시침 떼기, 뭐 그런 것이 조금 아쉬운 것 같습니다. (나는 젊지도 않고 잘 팔리기는커녕 이름도 없으니 다행이다. 내게 나무라심은 아니니까.)


그런데 선생님, 저희 미술대학에 오래 전에 화가교수가 역시 화가인 아버지의 훈계로 교수직을 그만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화가는 오로지 제 그림만 그려야지 무슨 남 가르칠 시간 있느냐는 호통에 고개를 숙였다는 후문이.


화가가 미대에 있었는데 그랬나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교수, 혹은 교수작가를 ‘주말작가’라 그러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시간 없어 못쓴다? 글쎄요, 이점은 확실합니다. 부지런만 하면 가르치면서도 쓰고, 게으르면 시간 많아도 못쓴다. 간결하고 단호하시다.


하긴 다시 독문학 얘기라서 죄송하지만 조금 안다는 게 그거라서, 에.테.아 호프만이란 역시 낭만주의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평일에는 판사요 기껏 약간의 음악가, 일요일 낮에는 그림을 그리며, 저녁이면 깊은 밤까지 매우 위트 있는 작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불안한 사회상황이나 혹은 필화사건으로 법관직을 잃으면 시립극장의 악장을 많았을 수준이었고, 모차르트를 존경해서 세례명을 아마데우스라 개칭까지 했답니다. 아무래도 옛사람들이 전인적인 경우가 더…….



어리석은 질문


선생님 작품을 읽다가 갑자기 느낀 점입니다만,「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에서 미로와 마이욜을 왜 혼동된다 하셨을까 의아했습니다. 마이욜 하면 우선 ‘누드의 조각가’를 떠올리지만, 중요한 것은, 로마 시대 이후 종교적 테마를 일체 사용하지 않은 첫 번째 조각가라는 점 아닙니까? 그가 표현하는 여성은 더 이상 신화 혹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 여성은 그 자체로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는 “우리들의 시대는 이미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했습니다. 같은 작품에 이런 구절, “믿음심판은 물론, 기독교가 시들해지고, 종교 자체가 희미해지자, 이상하게도 평화가 왔어요. 종교가 가르친 것이 종교가 없어지자 실현된 셈이지요. 종교가 사랑과 평화를 가르친 것은 그것이 가는 데마다 미움과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종교가 살신성인했어요.”라는 대목도 함께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특히 시대적 초미의 관심사와 관련하여 종교관을 살짝 여쭤 보고 싶어집니다. “대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라 규정하는 이슬람의 관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실지? 지금 종교가 성해서 싸움이라고 보십니까?


사실은 선생님께서 최근에 한 신문에 연재하시는 칼럼을 본 기억이 있다. 그 기억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다. 선생님은 이 비극을 “크게는 문명의 부딪힘이고, 작게는 종교의 다툼일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의 9.11 때 정해진 것이 아니고, 아주 먼 옛날, 어쩌면 예수와 마호멧이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쓰셨다. 가슴이 아프게 공감되는 부분이다.


기독교인인가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신다. 기독교를 우선 우리 정신의 말살 때문에 좋아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영문학교수로서 기독교문화를 열강하곤 했지요. 기독교문화 없이 영문학이 없으니까. 또 기독교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내가 말할 수 없이 존경하는 것, 그것은 겸손과 굴종(사실은 단 한번 영어를 쓰셨는데 ‘휴밀리에이션’이라고, 정확한 번역인지 모르겠다)입니다. 하나는, 온갖 바라는 것 해주십사 기도 후에,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둘은, 무조건적 신 앞에의 굴종.


그러나 이 본질적 기독교는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만 가능했다고 보신다. 현대의 타락한 기독교를 배제한 톨스토이의 원시기독교, 혹은 함석헌씨의 무교회주의를 말씀하신다. 현대에는 ‘기독교적’이란 말이 침략적, 자본주의적, 미국적 변주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양심적인 기독교 사회는 존재한다고. 예를 들면 에즈라 파운드, 미국 시인이면서 『사서』를 탐독하고 이탈리아에 살고, 미국 군인들을 일컬어 “루즈벨트와 그의 유태인들," “유태인들과 그들의 루즈벨트"한테 속아서 전장에 나왔다고 반전방송을 했던 노익장에 대해. 역사적으로는 미국 건설 초기의 중농주의에 대한 중상주의의 승리와 그 이후의 주류를 형성한 세력들에 대한 심도 높은 강의가 펼쳐질 기운이 넘치신다.


양심적인 서양인이 하필 매우 동양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파운드 비슷한 연배였던 극작가 브레히트도 노신을, 그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아큐정전』을 개작하기도 하고.  


그건 중국의 고전을 뒤집는 방향이잖아요. 오히려 헤세 같은 반전주의자도 동양사상에.


예 물론, 다른 이데올로기에서도 ‘양심적'이라 할 서양 작가들의 경우 동양을 또는 소위 제3세계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일 뿐입니다. 독일 시인 에리히 프리트는 유태인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이여!」라는 시를 발표했지요. 팔레스타인인들을 불시에 사막으로 내몬 이스라엘에게 경고였어요. “우리가 박해받을 때/ 나는 너희 중 하나였다./ 너희가 박해자가 되면/ 내 어찌 그대로 있을 수 있나?// [중략] 패배자들에게 너흰 명령했다/ “신발을 벗어라!”/ 속죄양들처럼/ 그들을 황야로 내몰았다.// 황야의 모래 위/ 그 맨발의 기억은/ 너희들 폭탄과 장갑차의 흔적 보다/ 더 오래 가리라.” 양심적인 서양인들은 사해동포주의로 돌아갈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호전적인 조국에 무조건적 순응하지는 못하는 것이 시인들의 생리입니까? 그렇게 조국에게서 곤욕을 치른 파운드 외에도, 선생님 작품 속에 “현대 영어시인 천오백 명을 상대로 조사해봤더니, 스물일곱인가가 신경파탄을 일으켰고, 열다섯이 자살했고, 열다섯이 술중독됐고, 열넷인가 전사했고, 감옥에 간 사람도 근 스물이…”라는 대목에서도 멍해졌습니다만.


꼭 시인보다도, 의식이 강하다 보면 충돌하는 경우가 흔하지요. 대중매체의 언어와 싸우는 것도 그렇고. 거기 보면….


다시 가리키시는 “한글로 글쓰기”에는, 말을 잘 못하면 방송이나 텔레비전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피해’는 ‘해를 입다’이니 ‘피해 입다’는 잘 못이다. “이런 글 백 번 써 봤자, 방송매체에서 태풍 매미가 입힌 피해라고 한 번 말하는 것을 당할 수 없다.”


축구 못하면 운동장 안나오는 것이 기본이지요. 그것을 지키니까, 인맥이고 학연이고 다 무시하고, 축구 잘하는 선수만 뛰게 하니까 월드컵 때 일이 되었지요. 그러니 한국말 못하면 방송 안나와야지요. 예상보다 단호한 어조로 한글의 오용을 나무라신다.


그 글에는 ‘미국 들어간다’는 틀렸고, ‘미국 나간다’가 맞다고 쓰여 있다. 맞다. 미국 나가계실 때, 하버드와 털사 대학에 몇 년 씩 계실 때, 영시 공부와 한글로 소설쓰기 두 가지를 다 하실 수 있었나요? 속으로만 물었다. ‘미국 나간다’라는 표현을 써보기 위해서.


그 밖에도 속으로만 물은 것이 많았다. 선생님이 애지중지하시는 오래된 책들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고 싶은 마음도 속으로 접었다. 출입문과 창문을 빼고는 모두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 소장서 중에는 영어권 책은 차치하고라도, 고전의 영역본들이 모두 19세기 책이다. 『오위디우스의 변신과 헤로이데스 선집 축자 행간 번역』(필라델피아 1861년), 『‘에픽테투스 전집』(보스턴 1865년), 『유리피데스의 비극들』(뉴욕 1875년, 1863년),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텐느의 불어 저서 『영문학사』(뉴욕, 1879년)와 『실러의 생애』(런던 1883년)를 영역본으로 가지고 계신다니. 하지만 무엇을 더 욕심내랴! 『용병대장』의 후속이자 결미부라고 하신 『말뚝』을 선물로 받았지 않은가.


겨울 해는 일찍 진다. 강아지들이 새삼스레 짖는다. 선생님의 배웅으로 문간을 나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니까. 솜씨 소문난 전주의 저녁밥, 곁들일 소주 한잔을 아쉽게 사양한다. 이름모를 한국 차의 향기가 옷에 베어있으니 되었다. 『달궁』의 산실 그 서재를 혹시 모를 두 번째 방문을 위해 다 헤집지 않고 아껴두길 잘했다. 사람들이 하이델베르크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은 그곳에 심장을 떼어놓고 오기 때문이라고 하질 않는가. 믿거나 말거나.          


                                        2003년 12월 30일 화요일


 소설시대 7호 , 한국작가교수회, 평민사 2004. 9-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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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