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2. 6. 25. 22:34

[전일시론 2002년]      오~ 필승 코레아 - 신화와 현실 

 

유월은 온통 뜨거움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신화를 창조해 냈다. 미지의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던 첫 경기의 승리는 섬광처럼 우리들 가슴에 희망을 불질렀다. 푸른 구장의 빛나는 기록은 회를 거듭할수록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강호 이탈리아를 상대로 실로 월드컵 역사에 남을 극적인 역전골을 터뜨리자, 온 나라는 정말 하나로 이글거렸다. 감동의 물결은 광장이고 골목이고를 가리지 않고 거리마다 넘쳐났다.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하나가 되었다. 오~ 필승 코레아! 대~한민국 따다~따 따따~


실제로 88올림픽이다 2002월드컵이다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경기 유치가 성사될 때에도, 말없는 어딘가에는 스포츠 정치에 대한 일반적 회의론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산적한 대내 문제들을 묻어두고서 세계 속의 이미지에만 주력하는 것은 외화내빈이라는 시각이었다. 동포 북한은 멀리 두고 일본과의 공동주최도 실은 빈 허의 화려함이거니 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정치보다 스포츠에 정신을 쏟는 나라가 되었나 보다. 지자제의 중요성을 부르짖었던 민주정치 염원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민주시민의 기본권인 선거권도 아랑곳없다. 누가 단체장이고 누가 의원인가에 관심은 미미한 채, 선거는 이해관계에 얽힌 집안 잔치처럼 조촐하다 못해 빈약하게 치러졌다. 권력자 주변의 추악한 비리도 아랑곳없다. 오늘 아침이라고 새삼 6.25의 비극을 일깨우면 뭣하냐. 아무렴 어떠랴!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 쾌남쾌녀 한국인! 대~한민국 따다~따 따따~


4강의 문턱에 섰을 때 우리는 정말 한 마음으로 뭉쳤다. 시내 일원 초중등학교의 임시 휴업까지하면서, 전국 또는 세계에서 몰려들 손님들에 대한 배려이자 학생들의 나라사랑 마음 고취의 일환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했다. 나라사랑은 하늘을 찌를듯 높아만 가고, 20년 태극기 판매고를 올 유월 한 달에 만회했다는 기록이라 한다. 사실상 우리의 태극기를 그렇게 사랑해본지 몇 십해 만인가. 유관순누나의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태극기는 얼마나 추상적이었던가. 태극기가 광복 이후에는 관제 행사 이외에 이토록 사랑받은 적이 있었던가. 최소한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의 의미도 이해하기보다는 비미학적이라는 시선으로 시큰둥했던 터였다. 그러던 태극기가 동네마다 펄럭이고 처녀들의 앞치마에 소년들의 날개로 둔갑하여 우리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필요하다면 석전(石戰)에 돌이라도 싸다 날라 행주대첩을 이뤄낼 기세였다. 어느 외신은 “너무 관제적”이라는 오보도 한다지 않는가. 월드컵 축구가 가져다준 성과는 태극기 사랑 하나 만으로도 더 없이 값진 일이다.


빛고을의 4강 신화는 온 나라를 폭발하게 했고, 오죽하면 이를 일컬어 “단군이래 가장 기쁜 날”이라는 찬사가 나왔을까. 설마하니 스포츠 우승을 혹은 “월드컵을 거머쥡시다!”를 우리민족의 최종목표라 하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칭찬에는 과장이 따르는 법이니까. 꿈같은 4강신화가 이루어진 그날 우리는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좋았다. 결승신화도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도청 앞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나누어준 종이 깃발들에는 놀랍게도 “오 통일 코레아”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은 필승을, 내일은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제 이 들끓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식혀주려는듯이 일요일 아침엔 서늘한 비가 내렸다. 상극상생의 원리에 따르면 물을 이기는 불은 없다지 않는가. 웬만한 냉기로는 식힐 수 없을 열기도 그것이 꿈속의 일이려니 하면 쉽게 냉정을 찾아질 것이다. 현실이 결빙의 우박처럼 강타해오기 전에,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신화를 역사로 바꿔 쓰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라도 꿈과 현실을 바로 가늠해야 한다. (2002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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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6. 4. 22:36

[전일시론 2002년]              

조국과 모국어 

 

6월 한 달은 어느 때 보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세상이 들끓었다. 여느 해 같으면 분단조국을 뼈저리게 의식하게 되는 6.25도 축구의 열광 속에서 잊고 지냈다. “괴뢰군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을 겪으며 자란 대한민국의 건전한 세대는 “거지가 득시글득시글 하는 남조선”에 대한 비방에 어처구니없어 한다. 실로 노숙자가 득시글득시글하는 장면도 뉴스에 나오는 사건처럼 의식되기에 우리의 일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은 건강식 걱정이요 다이어트라서, 배고픔을 걱정하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로 생각된다. 더 많이 생산해서 더 잘 분배하여 더 잘 살아보세... 하는 따위의 구호는 쉰 세대의 열정일 뿐, 신세대는 온통 지구촌의 IT에 집중되어 있다.


새것을 좋아하기는 신세대만이 아니다. 우리는 신사조에 민감한 민족이다. 이데올로기라도 새것일 수록 효과가 좋다. 6.25를 지나서 남쪽에 분류된 우리는 미국식 시장경제 아래에서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성장했다. 적어도 우수한 사람들은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6.25를 지나서 우리가 북쪽에 분류되었더라면, 우리는 또 다른 보호세력 아래에서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수한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사회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신사조를 더나 좋아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후회를 배운 덕일까? 우리는 열심히 문호를 개방하여 모든 사조가 범람하고 모든 자유가 넘치는 조국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98년 경제위기 이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좋은 조국에서 모국어로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학가는 영어와 컴퓨터가 최고의 가치이고, 실제로 졸업시기가 닥쳐오면 다른 능력은 갑자기 무용지물로 변한다. 다른 능력과 관련된 학업은 갑자기 찬밥신세가 되다 못해 원망의 대상이 된다. 우리 조국을 사수할 모국어조차 마찬가지이다. 모국어는 조국을 사수하지도 못하고, 조국 또한 모국어를 보호하지 못한지 오래이다. [이렇게 조국에 살면서 “모”국어를 강조하는 것도 바른 국어사용은 아님을 안다. 우리나라 말은 그냥 국어이니까.] 


“국어국문학과는 국어국문학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와 교육, 이를 통한 언어 기능 계발 및 정서 함양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과이다. 국어학과 국문학의 학문적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중략] 또한 이와 같은 전공 영역의 연구, 교육과 더불어 국민 일반의 모국어 사용 기능을 높이고, 정서 함양을 도모함으로써 문화 창달에 기여하게 된다.” 올해로서 만 50세가 되는 한 국문학과 홈에서 학과를 소개하는 글에서 발췌해온 글이다. “국민 일반의 모국어 사용 기능을 높이고 정서함양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창달에 기여하리라”는 계획은 그러나 꿈처럼 아득해져간다. 국민 일반이 모국어에 별 관심이 없는 바에야. 이제는 조국을 모국을 고국을 떠나 살거나 서로 혼동해서 사용하고, 또 그런 것에 마음을 쓰면 좀생이 취급을 당하게 된다.


무엇이건 새것이 좋고, 새로운 사조는 그래서 우리 땅에서 항상 세력을 얻는다. 이차돈의 불교도, 정약용의 실학도 이어서 천주교도, 마침내 개신교도 세력을 얻었다. 신의 위력이기도 하겠지만 수용 자세가 우리처럼 좋은 민족도 드문 것이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혁명도 크나 작으나 대개 성공한다, 새것이니까. 더불어서 영어도 컴퓨터도... 김치처럼 무슨 인이 박혀서 먹지 않으면 안되는 세대가 아직 남아는 있지만, 김치는 반찬도 아닌 세대가 얼마든지 자라나고 있다. 김치는커녕 밥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학교 캠퍼스에 통치마 한복이라도 입고 근무하면 무슨 날인가 물어오는 것이 요즈음이다. 우리가 우리 옷을 입는 것이 이상한 일이고 잘 해야 특별한 일이 되었다. 좋은 새것 때문에 너무 쉬이 버려버린 옛것들 중에는 꽤 좋은 것들도 있었겠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새 세대의 특성중 하나이다. 이렇게 몇십 성상을 지나고 보면 조국도 모국어도 잊힐 날이 올까?

(2002년 6월 4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5. 27. 22:39

[전일시론 2002년]               성장

 

오월이 무르익었다. 며칠이면 여름에 자리를 내준다. 나무들은 새 잎을 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껏 자랐다. 이젠 그 그늘로 우리를 덮을 태세다. 


사람은 봄마다 새로 자라나는 나무만 같지 못하다. 연륜은 체험과 비례하지 않는다. 지식과는 더더욱 아니다. 더구나 다매체의 홍수 속에서 장님 코끼리 보기만큼도 세상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이 주눅든 말을 하필 성장의 대명사인 신록의 계절 끝자락에서 내뱉어야 하는지, 그것 또한 기이한 일이다. 생각해 보니 바로 자연의 놀라운 성장 때문에 우리의 성장을 생각하게 되는가 싶다.


한껏 자라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괴테의 『시와 진실』이라는 상당한 양의 글은 작가의 자서전쯤 되는데, 그중 한 단원에 “나무는 하늘만큼 자라지 않게 되어있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무들이 제각기 제 키를 제 양을 자랑하면서 자라나지만, 하늘을 찔러 스스로 부러질만큼 자라는 나무는 정말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수명 또한 그렇고 우리의 능력 또한 그렇다. 어느 새 우리는 나무의 키를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하늘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 사람이 사는 고층건물은 얼마나 높이 가능할까? 사람은 얼마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창세기의 바벨탑 교훈을 들어야 할까? 노아의 자손들이 다음 홍수를 피하기 위하여 하늘까지 닿는 돌탑을 쌓으므로, 여호와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이들의 통솔력을 중지시키시므로 이름을 바벨이라 했다(창11:1-9). 고대 바빌로니아 또는 그리스의 기록에 의해 추정되는 이 건축물의 높이는 210m 이상이라고 한다. 현대의 층 개념으로 환산해도 70층 정도는 된다. 그러니까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룩했다는 니므롯이 시날평지에 성읍을 세우고 탑을 구축하려 했을 때, 성장은 그곳에서 멈춘 것이다. 성서적 해석으로는,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인 인간들이 경영하는 일을 금지하고자 했던 신의 의지로 풀이되겠지만, 자연 속에서는 더 쉬운 말로 ‘하늘까지 자라는 나무는 없는 것이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흐른 오늘도 지구촌 어디에도 바벨탑 보다 더 높은 건축물은 드물고, 또 위태롭기까지 하지 않은가. 자연은 스스로 성장을 통제한다. 사람들은 고층 하늘 속에 사는 대신, 나무의 키를 넘지 않게 만큼 땅에 붙어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회 또한 거대한 생명체이다. 경제학자들의 의미있는 주장, “성장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다”라는 명제도 영원불멸한 명제는 아닐 것이다. 사회의 건강성을 재는 척도가 성장률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타격을 주지도 타격을 받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라야 할 것이다. 우주같은 거창한 단어를 회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다만 자연 속에서 우리는 어떤 평형상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욕심 아닌 현 상태에서의 조화 같은 무엇. 이름하기 어려운, 찾기 어려운 어떤 평정상태를.


현대 사회는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이 사회의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위(無爲) 예찬이라도 필요하리라. 무위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음을 말한다. 목적 추구의 의식적 행위인 유위(有爲)를 인간의 후천적인 위선 혹은 미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무위에서야말로 완성이 있다’는 역설은 성장 일변도의 오늘날 우리 가치표준에 시사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푸르른 오월, 한껏 푸르되 자랄 수 있을 때까지만 자라는 나무들을 보자. 자랄만큼만 자란 다음 그 그늘로 한 여름 우리를 식히고 그 열매로 가을 겨울 우리를 살찌우는 나무들을. (2002년 5월 27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