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7. 3. 7. 15:04

 

“봄은 멀고 다리 밑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3. 다리 밑
2017년 03월 06일 (월) 14:49:0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밤새 또 다리 밑에서 얼어죽은 사람이 있었구나, 쯧쯧.”

아침 일찍 신문을 보신 아버지가 아침 밥상에서 한마디 하셨다. 어쩌다가 장독대에 쌓인 하얀 눈 틈새로 얼어죽은 까치를 발견해서 놀란 것과는 또 다른 무서운 전율이 일었다. 밥알은 모래알이 되었다. 밥알을 씹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만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다리 밑’이 참으로 무서운 화두였다. 고집이 센 아이에겐 으레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애라서 그런다고 겁박하거나, 다리 밑에 모여 사는 집 없는 거지들은 아이들이라도 잡아먹는다고 위협을 했다. 그래도 가장 무서운 말은 다리 밑에서 누군가 얼어죽었다는 신문기사였다.

어린 나름대로 철학을 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왜 인간의 입을 창조했을까. 왜 날마다 똑같은 일, 먹어야 하는 일을 시켰을까. 입 때문에 사람이 싸우고 죽고 그럴 것을 몰랐단 말인가. 공짜인 햇빛과 물만 먹고 살아가는 식물들은 좋겠다. 동물은 공짜인 산소 말고도 먹이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동물인 인간에게도 먹이가 필수적이다.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 식물을 먹이로 하는 것으로 모자라 움직이는 동물까지를 먹이로 삼는다. 너무 어려운 일, 불공평하다. 나는 식물이고 싶다. 아니 풀만 먹는 토끼이고 싶다….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고귀하다는 의미를 알 수 없던 어린 시절이었다.

 

내 땅에 심은 곡식으로 내 식구가 연명하던 옛날에는 한반도만 하더라도 같은 땅에 훨씬 적은 인구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농사법을 몰랐던 탓이라 했다. 분업의 세상이 와서 농경은 농경대로 축산은 축산대로 전문 경영이 가능하다보니, 이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게 되었다. 아니, 언제부턴가는 건강상의 이유로 식욕보다 섭취를 줄이려는 어긋난 세상이 됐다. 뭔가 어긋났다는 말은, 여전히 넉넉지 못한 가계로 아사 직전에 이르는 경우를 전하는 충격적 뉴스들 때문이다. 못다 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의 요절 소식을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비슷한 참상이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돈이 돈을 낳아 무한축적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졌거나 이 험난한 인생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다. 직업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판검사나 변호사는 올곧은 심성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도 편견이고, 누군가를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단언하는 판검사나 변호사가 있어서도 아니 된다. 그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재벌 3세로 태어났다면 ‘더럽고 구역질나는 직업을 가진 남자’라고 지칭될 확률이 없었을 것 아닌가. 경찰도 자신이 단속을 받아 불리하면 신분을 속이고, 성직자나 교직자들도 파렴치한 범죄에 연루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동전까지 털어서 소방서에 기부하는 풀빵장사를 보라. 소유와 기부도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나로서 겨우 조금 더 아는 이야기를 하자면, 하인리히 뵐의 전후 작품 중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로 번역된 소설이 있다. 루르 탄광지대의 부유한 갈탄재벌의 아들이 전쟁 중에 돈과 권력의 결탁을 보면서 자라난다. 통장에 쓰인 어마어마한 숫자와는 상관없이 인색하게도 음식물을 아끼는 어머니, 심지어 바깥 애인에게조차 돈을 아끼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정상적인 교육의 기회를 버리고 어릿광대가 된다. ‘추상적인 돈’을 버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인과 군상』에서도 독특한 여성이 등장한다. 전쟁 말기에 연인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생필품(때로는 고급 와인)을 즐기기 위해서 유산으로 받은 집을 저당 잡혀서 살아가는 그녀에겐 인플레 내구성을 지닌 잠정적 자산을 지불하고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다.

 

자산은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과는 무관하므로 무의미한 추상적 돈일뿐이다. 돈을 생계유지와 무관하게 무한정으로 축적하는 일, 더구나 그것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돈이 돈을 낳는 식의, 놀고먹으면서 부를 축적하는 일이라면 추악함을 넘어서 죄가 되는 일이리라.

놀고먹는 재벌이 있을까만은, 사람들은 재벌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요술과 마술을 행사하는 우수한 두뇌들이 고용되어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양분화를 고착시킨다고 믿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언어에도 없는 한국적 의미의 재벌은 영어로는 겨우 사업집성체(business conglomerate)쯤으로 소개된다.

신화적인 추진력과 성실함으로 부를 일궈낸 일세대들은 사람들이 인정하면서도, 가족이나 친인척 중심으로 출자한 지주회사를 핵심으로 여러 자회사들을 지배하는 현재의 재벌구조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적은 지분을 가지고서도 경영권을 독단으로 행사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재벌가의 의지가 최근 국정농단의 사태에서도 무거운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다리 밑 지키는 딱한 소수는 여전히 존재한다

 

왜들 다 쓰고 죽지도 못할 엄청난 양의 돈을 원할까. ‘자손대대로 물려줄 자산이니 잘 관리하라’고 했다는 자산이 어디 한 두 군데인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서기 때문에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고, 둘 사이 격차가 클수록 부의 불평등 구조가 증폭된다.’는 피케티의 주장에 자본가들은 귀를 기우려야 할 때다. 죄까지는 아닐지라도 돈만을 추구하는 일은 너무 허망한 일이다. ‘일생을 돈 벌기에 매달리는 것은 야망의 빈곤이요, 자신에게 너무 시시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오바마의 말이 신선하다. 우리는 돈 자체보다는 조금 더 나은 존재이니까.

사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그 밥을 벌기 위해서 많은 좋고 나쁜 일들을 해야 하는 숙명이지만, 그 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칫하면 낙오자가 될 상황이니까. 몰락은 의외로 쉽게 오나 보다. 오늘도 천변 산책로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혹시 다리 밑 사람들이 간밤에 이부자리로 썼을 쓰레기 버금한 물건들에 마주치면 가슴 쓰려 어쩌나. 옛날에는 다 같이 주렸다지만, 지금은 더러는 건강과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로 안간힘을 쓰는 세상이 되었건만. 이 딱한 소수는 어쩌다가 다리 밑으로 밀려났을까. 촛불에서 십분 거리, 봄은 멀고 여전히 춥고 배고픈 다리 밑을 어쩌나.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7. 3. 7. 15:04

 

 

중학교 가는 우빈이 그리고 4학년 되는 성빈이를 위한 미니 백 - 용도?

 

그건 모르겠다. 우빈에게는 순천 이모할머니가 줄 100 달러 축하금도 넣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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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54

 

말 아닌 ‘소리들’만 넘쳐나 … ‘하얀 돛’ 만날 그날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2. 테세우스의 돛
2017년 02월 20일 (월) 10:30:4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제발 하얀 돛을 달고 돌아와다오!

고대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루스를 무찌르기 위해서 크레타 섬으로 떠난 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운명은 야속하여 승리의 기쁨 속에 생환하는 테세우스의 배에 검은 돛이 나부끼고,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기에 앞서 왕은 절벽 아래 푸른 바다로 뛰어들고 만다. 푸른 에게해의 전설이다.

 

탄핵소추의 배는 어떤 색깔의 돛을 달고 돌아오려나. 제발 하얀 돛을 달고 와다오! 살아오면서 검은 돛을 달지는 말아다오!

 

특검이다 헌재다 하는 비일상적인 단어들이 일상이 돼버린 오늘, 우리의 삶은 뒤바뀌고 오리무중인 것들로 불투명하기 그지없다. 특히 말이 의미내용을 담지 않고 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니, 말과 소리의 구별이 참으로 어렵게 됐다. 그런데도 말을 귀에 담고자 뉴스에 신경이 꽂힌 나날이다. 민낯이 다 들어났는가 싶으면 또 터지는 끝이 없는 진창 속, 그 속을 그만 보고 싶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까 봐서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아이의 심정이다. 물론 아이도 손가락 사이를 엉성하게 벌려서 볼 것을 어차피 본다.

그래서 아프다. 많이 아프다. 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산더미로 드러나는 가운데, 유독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이 눈에 띈다. 2014년 잔인한 4월 그날, 바닷물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에 가능하면 회피해왔던 주제, 세월호 그날. 

 

   
  ▲ 사진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그날 저는 정상적으로 이 참사, 이 사건이 터졌다 하는 것을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어요. 보고를 받아가면서.”

 

이 문장을 외다시피 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주어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보고 받으면서 계속 그것을 체크를 하고 있었다. 보고를 받아가면서. 끝. 여기에 주어의 행동은 없다. ‘보고 받는다’는 행동이 아니다. 보고를 받고 나서 취하는 행동, 그것이 행동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반응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거의 종일을 행동은커녕 반응도 내지 않으신 우리 대통령은 어물쩍 오보 탓을 하신다.

 

“그날 참 안타까웠던 일 중의 하나가 ‘전원이 구조됐다’ 하는 오보가 있었어요. (중략) 전원이 구조됐다 그래 갖고 너무 기뻐서, 아주 그냥 마음이 아주 안심이 되고, 이렇게 잘 될 수가 있나, 너무 걱정을 했는데, 그러고 있었는데 또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그게 오보였다 그래 갖고 너무 놀랐어요.” 

 

대통령은 오보가 있어서 아주 안심이 되었고,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오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단다. 정상적으로 보고를 받아가면서 안심했다가 놀랐다. 그것이 골자다. 보고를 받는 것이 행동이 아니듯, 놀랐다는 것도 행동은 아니다. 

그날 아침 9시 19분 ‘500명 탄 여객선 조난 신고’라는 긴급속보가 떴던 그날, 오장육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텔레비전에서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 11시 좀 지나서 학생들 전원구조라는 보도에 안도하다가 곧 다시금 지옥으로 빠졌다.

 

그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청와대는 해경본청과의 교신으로 정보가 정확하고 빨랐다. 11시 29분 청와대는 해경에 말했다. “(구조인원이) 161명이면 나머지…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거 아닙니까. 바깥으로 떠 있는 게 없으니까.” 사고의 실체를 청와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럼 대통령은?

오보라는 단어는 도피의 함정이자, 말이 아닌 소리에 불과하다. 그날 그 참사에도 불구하고, 오보 때문에 점심도 편하게 드시고, 오보 때문에 판단이 늦었을 뿐, 재택근무를 하며 ‘정상적으로’ ‘보고 받으면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는 소리에….

 

갑자기 오리털 이불에 난 구멍에 얽힌 우화가 생각난다. 옛날 서양 이야기다. 부지런한 할머니들은 날마다 오리털 이불을 창틀에 걸쳐놓고 빗자루 같은 긴 막대로 두들긴다. 밤사이의 먼지도 털어내고 오리깃털에 공기가 다시 들어가서 보송보송해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두들길 때마다 구멍으로 오리깃털들이 날아올랐다. 할머니는 구멍을 찾아냈다. 이를 어쩌나! 어떻게 이 구멍을 없애나! 할머니는 궁리 끝에 구멍을 잘라버리기로 했다. 큰 가위를 들고 와서 구멍을 싹둑. 그런데….

 

구멍은 자를수록 더 커진다. 잘못도 변명할수록 더 커진다. 그날의 행적정리에 따르면, “공식 일정도 없고 신체 컨디션도 좋지 않았기에” 관저에 있었다는데. 만일 대통령이 재택근무가 아닌 출근근무를 했더라면….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바라건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됐을까. 아니, 선원들만 구조한 ‘나쁜’ 해경들 때문에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수장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행적정리에는 참상을 인지한 직후에 어떤 조처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빈자리에서 괴소문들이 자라는 것이다. 그 괴상한 단어들을 어찌 차마 입에 올려서 스스로 인격이며 국격을 송두리째 내동댕이칠 수 있는지. 그날, 11시 29분 ‘거의 300명이 배 안에 있는 것’을 해경에게 확인한 ‘청와대’의 입은 누구의 입인가. 청와대가, 곧 대통령이, 그것을 알고도 즉시 마땅한 적극적인 행동을 서두르지 않은 죄 그것 하나, 결과와 상관없이 부작위의 죄 그것 하나가 문제다.

 

그날, 하필 그날에는 ‘컨펌’을 빨리 못 받았을까. 누군가에게서 컨펌을 받는 국가원수라는 이미지는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명목상 여전히 국가원수이면서 공영방송도 아닌 일인매체로 국민을 만나려는 처사(處事)는 국어사전에서 죄의식 또는 품격이라는 단어가 증발해버렸는가 의심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품격은커녕 논리도 없는 변론들은 말이 아닌 소리들로 넘쳐나니, 최고 수준의 지성과 판단력을 갖추었을 대리인단의 심사(心思) 또한 의아할 뿐이다.

 

눈이 그치듯, 언젠가는 비바람도 그칠 것이다. 우리는 곧 기다리는 하얀 돛을 보리라. 예전에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 “시인이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그런 날을 위해서, 하얀 돛이여, 어서 오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50

“집착할수록 곤두박질 치는 게 ‘명예’일진대…”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1. 내려놓기의 미학
2017년 02월 06일 (월) 14:11:51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 일러스트 돈기성  
 

눈이 가끔 내렸나 보다. 눈이 하얗게 덮인 산자락들의 풍경이 카톡카톡 소리를 내면서 내게 날아들곤 했다. 그러도록 나는 겨우내 눈 쌓인 산야를 보지 못하였다. 소설 쓰는 젊은이들이 태백으로 눈꽃기차여행을 떠나자고 했을 때에도 손을 내저었다. 늙은이 물 흐릴까 지레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행이 힘들어서이다. 소풍도 힘들기는 어려서부터이니, 또래들이 보름씩 해외여행을 떠난다 해도 부럽다 만다. 이 겨울에 따뜻한 섬나라? 한껏 멋이 있지만, 멋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도 오늘은 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씩 둘씩 내려놓아야 할 일들이 밀려옴을 체감한다. 몸 따로 맘 따로, 명절이 다가올 때는 차례상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지 은근히 겁이 났었다. 그렇게 설은 닥쳐왔고,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세배 오는 사람들도 북적대는 집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그렇게라도 모이지 않는다면 ‘함께’ 산다는 것을 어찌 느낄 수 있으랴.

 

이번 설에는 초등학교를 잘 마친 손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했다. 중학생이 되는 시작을 격려해 줄 수도 있지만, 의미를 초등학교 졸업으로 하기로 했다. 주어진 일을 잘 마친다는 것은 초등학교도 어렵다. 보통은 대졸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졸업은 영어로는 시작(commencement)이라는 단어로도 쓰는 것을 보더라도, 또 실제로 엄청난 새로운 시련의 시작임이 틀림없다. 그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다 살았다 싶은 때에 찾아오는 정년은 그 자체로의 허무함과 여생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어려운 고비이리라.

 

누구나 나이를 먹고 누구나 노인이 된다. 언젠가는 정년이 되고, 일을 놓고,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죽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무원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업장의 정년이 60세로 정해져있다. 교육공무원은 조금 예외이고, 가장 늦은 교수사회도 만 65세면 정년이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교수는 아예 정년이 없는데도 70세 정도가 되면 스스로 퇴임을 한다고 한다. 메스를 드는 의사는 어떤가. 농사라 해도 본격적인 농사에는 스스로 정년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기대수명이 늘었다고 해서 정년이 늦춰져야 한다는 것은 산술적 주장이다.

이 엄청난 실업과 미고용의 사회에서, 혹시라도 정년을 늦추자는 말은 기득권의 연장과 비슷한 말이 되고 만다. 노동시간을 줄여서라도, 임금을 줄이는 아픔 속에서라도, 일자리를 나누어야 하는 세상이 아닌가.

 

내가 재직했던 학과에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전통이 있다. 칼퇴직이다. 퇴임교수는 단 한 시간도 시간을 맡지 않는다. 내가 조금 남은 정년을 못 채우고 명예퇴직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학과들의 경우 대부분은 갑자기 출근을 그만두게 되는 교수들의 적응을 위해서라도, 또 듣기 좋은 말로 그 아까운 학식을 썩히기에 아깝다는 권유에 못 이긴 채 이삼년 더 시간강의를 맡기도 한다. 평생 하던 일, 이젠 쉬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우리 과의 전통 속에는 후속세대에 대한 배려가 숨어있을 것이다. 아무도 대놓고 말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럴 것이다.

 

강단 떠난 지도 벌써 한참 되었지만, 그러니까 옛날에는, 젊은 강사들의 학식이 내 또래 학자들보다 더 낫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학회지 논문심사 경험들을 되돌아보아도 그렇다. 이름을 가리고 심사할 때 우수하다고 보았던 논문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중에 인쇄되면 강사들의 것일 때가 많았다. 평가기준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내 의식으로는 그랬었다. 연구조차도 세월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옛날, 밥이 귀했던 시절에 노인들은 밥상에서 먼저 수저를 놓았다. 손님을 가더라도 밥을 반드시 남겼다. 젊은 사람들과 아랫사람들을 배려하는 기본이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사뭇 다르다. 소위 ‘능력 있는’ 노인들에게서 양보지심이 적다. 특히 정치판이라는 동네에서는 멈춤을 모른다. 노회함으로 포장하여 세를 과시하며,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 드물다. 그런 곳이다 보니 탄핵소추 중의 대통령에게 충언하는 사람 하나 없는 모양이다.

직무태만과 왜곡의 정도가 임계점을 넘었음에도 그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나, 어찌하여 주변의 그 많은 경륜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들이 탄핵정국의 표류를 멈추도록 하지 못할까. 손익 계산을 내려놓을 일이다, 다함께. 내려놓을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현명함의 쓸모가 아니겠는가. 미국의 떠오른 권력자 신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의사를 명쾌히 표명하는 출중한 여야 정치인들을 보는 심정은 오직 부러움뿐이다. 그렇게 할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너 나 없이 내려놓기를 불사해야 한다, 내려놓기만이 마지막 아름다움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을 것이리라. 

 

그렇다. 내려놓기의 미학은 비단 노인들에게가 아니라 그 때가 도래한 이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온 대지가 신춘을 꿈꾸는 동장군의 시절이지만, 도종환의 「단풍 드는 날」을 미리 되뇌어 본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후략]

 

물론 시를 읽고 감동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깨달음과 실천이다. 무엇들을 내려놓기 위한 첫걸음의 시작으로서, 년 전에 새해의 계획으로 무엇들을 사지 않기를 다짐해 본 적도 있다. 늘 그렇듯이 완전한 계획 달성이 되었을 리 없지만, 해가 거듭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새해의 계획은 그 해에 이루지 못한다 해도 앞으로의 삶에 조금은 방향설정이 되는 듯하다. 한번 결심했었던 기억만으로도 머릿속 마음속 어딘가에는 남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내려놓기라는 것이 비단 물건들에 국한되지 않기에 더욱 어려운 것 같다. 보이고 만져지는 물건들에서는 다소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진정으로 버려야할 것들이 켜켜이 쌓여있음을 느낀다. 궁극적으로는 비물질적인 것들까지, 특히 명예 따위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집착할수록 곤두박질치는 것이 명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연의 덫까지도 내려놓아야 아름다운 마무리라 할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3. 7. 14:46

‘노인’ 넘쳐나는데 ‘어른’ 찾아보기 힘든 사회라니…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0. 어른스러운 어른
2017년 01월 09일 (월) 14:19:41 교수신문 editor@kyosu.net

동지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더니, 어느새 2017년 깨끗한 달력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한 해가 밝으며,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또 한 살을 더한다. 저항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개개인의 철학이자,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젊어보이시네요!” 

누구나 싫어하지 않는 입발림 말의 1순위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어려보여요!”라는 변형으로 쓰인다. 나이보다 젊어보인다, 또는 어려보인다. 이 말은 과연 칭찬의 말일까. 

어리다는 말의 어원은 『용비어천가』(1447년)에서 ‘어리다(愚)’로 등장한다고 한다. 중세국어에서 ‘어리다’의 의미는 이처럼 ‘어리석다(愚)’였다가 ‘나이가 적다(幼)’로 변화하면서 17세기부터는 ‘어린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라 한다. ‘어린 소견’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현대어에서도 여전히 ‘생각이 모자라거나 경험이 적거나 수준이 낮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옛날에는, 뭔가 잘못을 하면 철이 없다고 속이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반대로 듬직하고 조신하다는 말은 칭찬이었기 때문에, 어른스럽다는 말이 오히려 좋은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변화가 생겼다.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1979)에 이르면 ‘젊은 여자끼리 몇 살쯤 어리다는 게 우월감이 될지언정 열등감이 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고 당시의 세태가 표현되었다. 어리다는 것이 여자의 우월감이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물론 젊은 여자들에 한한 이야기였고, 어른은 어른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언제부턴가 봇물이 터지듯 경계가 무너졌고, 지금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서는 도통 나이를 짐작도 못한다. 

딸을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가 이모 같다느니, 심하면 언니 같다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게끔 ‘어려보이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남자들도 예외가 아닌 것이, 아저씨보다는 오빠로 불리기를 좋아한다던가? 어리(석)게도!

   
 

등산복이 노인의 교복이 된 시대 

 

어려보인다는 것, 어린 것이 아니라 어려보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젊음만이 아름다운 가치일까. 온 나라가 운동과 건강식 붐이고, 건강관리를 받는 1년 회원권이 집 한 채 값인 곳도 있다는 뉴스에도 놀라움에 슬쩍 부러움이 섞인다. 

나이 들면 젊게 오래 살자고 운동을 하는 것이 생의 최종목적이 되어버린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웃도어가 노인들의 교복이 될 줄이야. 알록달록 옷들은 노구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고 겉돌아서 보는 눈이 다 피곤하다. 구부정하고 일그러진 자태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은 것이 아웃도어다. 히말라야 원정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온갖 기능성의 이름으로 너무도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도 않을까. 

그렇게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돈이 소모되고 있다. 거기에 소모된 시간만큼을 더 산다고 해도, 연장을 위해서 그만큼의 시간이 사라졌으므로 플러스-마이너스로 답은 같다. 

 

또 젊어보이는 것이 생물체의 사멸과도 무관하다. 이 시대의 철학은 그런 진실에 눈을 감는 듯하다. 위아래며 애어른 할 것 없이 미모 집착증이 온 나라를 삼키고 있다. 벌써 10여 년 전에 영국의 BBC에서 <한국에서의 미모의 값>이란 특집방송이 있었다. ‘미모 광(beauty craze)’에 사로잡혀 천차만별의 값을 지불하고 때로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완벽한 몸을 갖기 위해 애쓰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취지였다. 취업에도 필수적이라고 하니, 어쨌거나 젊어서는 미모가 중요할 것도 같다. 또 슈퍼리치들은 천문학적 투자로 미모를 사들이므로, 부와 미모는 동일 차원에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노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젊어보이는 가짜 얼굴들이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삶에까지 침투했다. 무작정 시커먼 눈썹과 억지로 파놓은 동그란 눈 때문에 오히려 밉상스러워진 이 얼굴들을 어쩌란 말이냐. 이것은 차라리 미학적 쇼크다. 우리들 원래 동그란 얼굴은 눈썹도 가늘고 눈도 가늘 때 훨씬 더 예쁜 것을! 

한글문서를 작성하면서 순간 느낀다. 문서처럼 쉽게 ‘되돌리기’를 할 수는 없을까. 요양병원에 내팽겨져서도 그 짙은 억지 눈썹이 낙인처럼 시커멓게 살아있으면 어쩌나. 소용없다. 우리는 옛날부터 따라쟁이다. 영이네가 세탁기 들여 놓았으니 순이네도 빚을 내어서라도 세탁기를 들여놓아야 했던 그 시절부터다. 영이엄마가 했으니 순이엄마도 해야 하는 그것, 야매(!)성형과 미용주사들. 자유성형공화국 만세!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 들어 예쁜 얼굴이야 있을까만, 옛날에 우리가 어려서 보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괜찮았다. 어려보이는 어른이 아니라 어른 같은 어른들이었다. 그것은 세월을 초월한 조화다. 지금도 기억한다. 적당히 늙고 주름진 얼굴에 적당히 센 머리에 적당히 굽은 등을 하고 널부렁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걷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른 나이에 있었을 많은 어려운 순간들을 이기고, 이제 다가오는 종착역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편안하게 보였다. 가지고 갈 것도 남기도 갈 것도 많지 않아서 뭔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삶이야말로 넉넉해 보였다.

 

내가 늙은이가 된 지금은 주변을 돌아보면, 파리하고 살짝 빛바랜듯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노인들의 자태가 여간해선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초록도 단풍이 들듯이, 황홀한 단풍도 우수수 바람에 날리듯이, 자연을 닮은 노인들이 그립다. 왜 지금은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스러운 어른되기가 힘들까. 거짓과 우격다짐으로 불린 명성과 재산이 많으면 잃을까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분통나고 그러는 것일까. 통계수치로 보면 옛날보다 잘들 사는데, 어른들도 젊은이들 따라서 헬조선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새 달력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는 다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하차하지 않고 나이를 먹는 것은 축복이다. 지구가 아직은 허락한 또 한 번의 봄을 맞게 되다니!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어려서 골목 양지바른 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또래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제 손녀들은 고무줄놀이 같은 것을 모르니 노래를 가르쳐줄 수도 없게 되었나? 할 수 없게 되는 일은 어차피 많아진다. 다만 한 계단 더 오른 어른으로서 덜 어리(석)자고 다짐할 일이다.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7. 1. 4. 00:40

아이들을 위해서 목도리를 떴다. 

 

첨엔 둘째 며느리 것, 그건 사진이 없지만 멋진 먹색!

 

그 다음 수빈 학교 색을 닮아서 빨강으로, 장갑까지.

장갑의 이니셜은 학교 Harvard-Wetslake

 

수빈은 발레 공연전이라서 화장을 했더란다.

그 다음엔 우빈과 성빈까지.

 

우빈은 중학생이 되는 교복 색과 맞춰서 회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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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이2016. 12. 3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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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16. 12. 30. 06:02

‘정치적 올바름’을 불편해 하는 사회… 內面 숙고할 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19. 옳은 것, 좋은 것
2016년 12월 26일 (월) 14:07:35 교수신문 editor@kyosu.net

한국과 미국에서 PC가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태블릿 PC 한 대가 과거를 정화하는 실마리가 돼 있는데, 전혀 다른 뜻으로 미국의 PC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정치적으로 옳은(politically correct)’을 줄여서 말하는 PC 현상이 미국의 대선에서 현 정부의 패인 중의 하나였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치적으로 옳은, 인권이 고려된, 차별적 편견이 없는’ 가치들은 사회적 불편부당을 개선해가려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가치라 하겠다. 우리는 갑자기 현대 문명권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관계 규범과의 충돌이 있었지만, 전후의 빈곤 탈출이 최선의 가치였던 시절에는 감히 정치적으로 옳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강자가 부강해지는 동안 약자는 밥을 굶지만 않아도 된다는 편향적 의식이 지탄의 대상도 아니었다. 빈부의 양극화를 낳은 사회경제적 갈등으로 인한 계급의식과 근거 없는 지역주의로 인한 차별과 불만이 여전한 우리 사회로서는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란 부러운 것이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기도 하다.

 

우리가 달성하지 못한 ‘정치적 옳음’이 최선으로 추구되고 있으면서 그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나라도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진다. 예컨대 현재 오바마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사회는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를 추구하려고 애쓴다. 크리스마스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공식적으로는 삼가자는 문화는 다민족국가에서 타 종교인을 의식한다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이자 예의바른 처사다. 절대다수인 기독교를 무조건적으로 최우선이라고 하는 대신에 소수 비기독교인의 감성을 ‘좀 봐주자!’ 그런데 전통적 기독교인 대다수는 그것이 싫었다는 말이다.

또 학교에서 펄럭이는 국기를 보면서 자라온 수많은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미국 국적이 아닌 몇몇 소수의 학생들의 불편감을 걱정해서 교정에 국기를 내걸지 못하는 현실에 황당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옳음도 싫으면 싫다는 반응은 감성적 판단이다. 감성적 의미에서는 옳고 그름 보다는 좋고 싫음의 대립이 일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 지도층의 독선이 이러한 편향적 가치와 합쳐졌을 때 생겨나는 폭발력이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옹호하며 ‘위대한 미국’을 외치는 트럼프 당선자의 거침없는 목소리에서, 그의 금발머리와 푸른 눈에서, 무엇보다 그가 이룩한 엄청난 부의 성채에서 강하고 우수한 인간의 승리를 본다. 궁핍을 모르는 사람, 자유경쟁이 도덕적이라고 믿는 슈퍼리치들은 가난이나 열등함을 죄악시하기 쉽다.

예컨대 인간을 우열로 판정하려했던 우생학에 젖어있던 히틀러 시절에 독일은 학생들의 세뇌에 탁월했다. 전국 장애인들 총 숫자가 얼마인데, 곱하기 일년에 그들을 위한 보조금 총액이 얼마인데, 그 액수를 젊고 건강한 신혼 커플에게 일정액씩 지급한다면 몇 커플을 지원할 수 있는가 따위로 방정식 문제를 풀게 하는 식이다. 그러한 교육현장에서는 장애인들은 우생학적으로나 국가경제적 이유로 ‘처리’돼 마땅하다는 인식을 가진 국민들을 길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환영을 하필이면 다양성이 존중받는다고 믿는 선진사회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트럼프의 대선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미국을 다시 하얗게’라는 낙서로 변형돼 길거리나 교정의 담벼락에 나타난다고 한다.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문양도 함께 등장한다는 뉴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건 기우이겠지만, 만일 미국의 학교교육에서 멕시코로부터의 무단 월경해온 사람들의 숫자가 일년에 몇이고 그들을 지원하는 액수가 총 얼마인데, 그 총액을 장학금으로 바꾼다면 몇 명의 학생들을 지원해줄 수 있나, 하는 식으로 산수를 가르치고, 그러므로 불법이민자는 악이고…. 만일 그렇게 세뇌된다면 백인계의 우월감과 인종주의는 예측 불허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소년 유격대원들이 미국놈들에게서 뺏은 총의 숫자를 더하는 식의 북한의 산수교과서를 미국의 입장에서 질 낫다고 탓할 수나 있겠나.

 

‘불안감’ 악용하는 정치세력

 

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 우수한 유럽인종들이 원조 인종주의자들이다. 19세기 중반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가 쓴 『인종 불평등론』은 ‘세계문명의 발전은 백색인종이 창조한 것이며, 열등인종과의 혼혈에 따른 인종적 퇴폐로 문명은 몰락한다.’는 공언을 내놓았다. 나치의 소위 ‘퇴폐예술’ 말살 정책도 거기에서 출발했고, 아리안 인종의 우월주의에 따른 전대미문의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인류가 선한 의지로서 진화해간다는 믿음은 불완전한 것 같다. 유럽에서는 벌써 네오나치즘이 고개를 들었다. 1960년대에 독일 국가민주당(NPD)에서 시작해, 프랑스의 민족전선, 이탈리아의 북부동맹,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등도 네오나치즘을 지향하며 목소리들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프란츠 보아스의 연구서 『원시인의 마음』(1911)에서 증명된 바, 인종은 생물학적 차원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예컨대 미군을 대상으로 한 IQ검사 분석에서 북부의 흑인들이 남부의 백인들보다 지능이 높다는 결과나, 인류형질학적 연구와 가계도 분석에서도 흑인과 백인의 혼합으로 태어난 소위 ‘잡종’ 인구가 ‘순수 유럽계’로 알려진 사람들보다 오히려 인종적으로 더 동질하다는 결과 등을 내놓았다. 궁극적으로 인종적 문화적 상대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최근의 인종주의는 생물학적인 차원보다는 종교적 문화적인 차이와 민족성의 문제를 표방하는 일종의 사회적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민족적 정체성과 번영을 위협받지 않으려는 본태적이자 맹목적 저항심과 그에 따른 두려움 같은 것에서 기인하는데, 정치세력이 이를 이용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까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우리도 정치적 옳음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 우선 백만이 훨씬 넘는 외국인과 다문화가정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 나 아닌 이웃, 다른 인종에 대한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일까. 굳이 면벽수도를 하지 않아도 조금만 마음을 가다듬으면, 타인을 향한 불안감은 기실은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다음 순간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지 알 수 없는 나, 나 자신 외에는 두려운 존재가 없다. 정치적으로 옳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가 되기를, 그를 따름에 있어서도 감성보다는 차분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소망한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80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6. 12. 18. 23:22

산의 소리

 

봄날이었다. 온도 차가 요동을 부리는 사이, 따뜻한, 봄날 같은 봄날에 대한 기대가 일렁였다. 대학의 봄은 구성원들 따라 다르게 온다. 새내기의 봄과 고학년의 봄이 다르듯이, 정규와 비정규는 칼로 에듯 다른 모양으로 봄을 맞는다. 학기가 모양새를 잡아가기도 전에 뒤숭숭한 소식들이 쏟아졌다. 주로 이메일을 통해서 밀려오는 걱정들이다. 그것들은 문자로 왔지만,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그것들을 재연하느라 귀가 아렸다.

전국강사투본 입장으론 연구강의교수 제도가 오히려 비정규트랙 강화라고 단언하네요.

그도 재계약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요, 김OO 남OO 선생이 우리의 내일이지 뭐.

15년 강의 잘 하다가 대우교수인데도 잘리고는 15년 투쟁 중이고, 10년 넘게 강의 하면서 우수강의에 몇 차례씩 뽑혀도 어느 날 순간에 해고되고, 것도 이메일로요.

이메일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남OO 선생 이야기가 나오면 난 더욱 기가 죽었다. 같은 프랑스어과에, 또 비슷하게도 여자대학교다. 프랑스에서 13년이나 공부를 했다는 학구파로, 나보다 훨씬 선배이지만 같은 시기에 대학 강단에 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난 상황에 밀려서 스스로 자리를 뺀 경우였고, 그 선배는 우수강의 상을 받으면서 여전히 희망을 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해고당했단다. 나도 계속 모교에 얼쩡거리고 있었더라면 게서도 잘렸을까. 온 몸의 피부가 얼음인지 마그마인지 모를 강렬한 자극으로 움츠러들곤 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실은 겨울로 들어 뭔가 더 심한 내리막 곡선을 느꼈었다. 설 며칠을 맘 편하게 지내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을지. 보퉁이보퉁이 먹을 것을 챙겨 싸주신 어머니, 3월 살 일 걱정하시며 미리 가만히 용돈을 넣어주신 아버지 생각을 떨칠 수 없어 무거운 나날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모처럼 집에 와서 일 없이 쌍용차 굴뚝농성을 걱정하는 딸이 더 걱정되었을 것이지만, 딸은 어머니 아버지의 딸 걱정을 모르지 않으니 누구의 가슴이 더 무거울까.

연인들이 사랑보다 사탕을 나누는 화이트데이가 찾아 왔지만 모두에게는 아니었다. 그날 평택공장 정문에 몇 백 명 사람들이 모여들어 철조망에 자물쇠를 거는 행사를 가졌다는 보도가 쪼그맣게 실렸다. 사탕 같은 빨강 하트 파란 하트, 각양각색의 자물쇠는 더 이상 상징적일 수 없었다. ‘힘내세요’, ‘이긴다’, ‘전원 복직’ 글귀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써서 연대의 의미를 새기는 사람들, ㅎ중공업 사람들, ㅁ송전탑 반대 할매들도 모였다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70미터 높이의 굴뚝에서 외로운 농성을 택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땅을 밟았지만,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는 때였다.

그러다가 ‘말이 씨가 된다고’, 오히려 굴뚝농성 관련해서 이야기 나누다가 아버지가 꺼내셨던 70년대 ‘똥물 사건’의 먼 후유증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줄이야. 어떤 도록에 서사와 편집 일감을 소개받아 찾아간 시골 마을에서였다. 마을 가운데 정자에 덩그러니 혼자 앉은 앙상한 몰골의 노인네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외약손 이리 내놔 봐. 시상에, 얼매나 아펐을겨. 나를 어느 순간 ‘사건’의 후유증을 앓다가 죽은 여동생으로 알았는지, 재봉틀 속에 딸려가서 병신 된 손을 내놓으라고 달래던 할머니. 나는 이 순간에도 왼손이 저려오는 것은 느낀다. 졸음 사이로 엄지와 검지 사이로 재봉틀의 바늘이 달려와 꽂힌다. 타이밍, 아아, 약 먹는 것을 잊었구나. 으아악!

지난해, 그렇게 봄이 왔다가 갔다. 여름가을겨울도 왔다가 갔다. 여름방학엔 메르스로 놀란 평택 집에서 아예 귀향을 금하셨다. 이곳은 청정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대회도 치르고 아시아 단위 문화전당도 개점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는 이 도시의 생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원룸에 박힌 날들이 더 늘었다. 강의 없는 겨울에도 세배만 겨우 하고 내려왔다. 서로 대화를 피했다는 것이 맞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날이 다시 왔다. 이번엔 쌍용 굴뚝이 조용했다. 마지막 굴뚝새마저 굴뚝을 내려와서 투항한 지 오래고, 변화는 사전 속에 죽어 널브러진 단어에 불과했다. 총선이라는 칼바람마저 불어댔으니, 봄날 같은 따뜻한 봄날에 대한 기대는 사치였다. 학기가 시작되어 모여든 이들은 뒤숭숭하다 못해 외계어같은 소리들을 쏟아냈다. 뭐가 뭔지 모를 ‘정견’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이메일을 통해서는 언제나처럼 우리 비정규의 단결을 촉구하는 소식들이 밀려왔다. 그것들은 늘 문자로 왔지만,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그 소식들을 곱씹느라 입과 귀가 아팠다.

대학교육협의회 농간 좀 봐요, 오히려 강사법을 폐기해서 교원신분 회복을 없던 일로…….

어떻게 임상강사만 인정하고 일반 강사는 교원지위 건에서 제외시키려 하니.

1년계약과 4대보험 덧붙여 퇴직금까지만 보증해줘도 언감생심…….

평생을 강사로 늙어가기도 어렵게 된…….

그러게, 부산OOO대 대선배님 말이요, 그 정도로 인정받는 학자가 그리 되실 줄이야.

훔볼트 대학 근대서양철학 전공이셨대죠 아마.

나름 유명했지요, ‘성과 사랑’이라거나 ‘차별과 차이’는 학내 최고 인기 과목이었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일반대중 상대로 ‘인간학’, 뭐, ‘행복의 조건’ 그런 강의로 호응 좋았대요.

무슨 소용.

자살이라니, 자살. 아무리 자살률 높은 나라라고 하지만 참.

작년엔가 일 년이면 1만 4천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던 걸. 하루 거의 40명이라고요.

거야, 한국사람들이 유독 우울증 치료를 꺼려서 그렇다고도 하고.

그 말은 안 맞아요. 우울증은 여성이 취약하다는데, 자살은 남자가 여자 두 배 더 넘으니. 사회적 원인이 더 큰 거네 뭐.

인정받는 학자 생활 만년에 빈곤으로 자살이라니.

빈곤, 그래요. 여기 서OO 샘, 그 왜, 논문 54편 대필했다고 유서 남기고 간 사람, 본인이 스트레스성 자살이라고 규정했었다지만, 빈곤 역시…….

그런데도 문제의 지도교수는 잘도 정년퇴임까지 갔다는 걸 보면, 참.

그 교수가 자신이 안 썼다고 실토를 했는데도, 대학조사위에선 그걸 공동연구니 관행이니 그랬다면서요. 그러니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아니, 사회 전체가 그냥 용인하는 겁니다요.

공동연구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것 아닌감? 다분히 창의적인 해석을 전제로 하는 인문학에서는.

아, 우리 이번 주말 무등산에나 가봅시다려!

견디다 못한 누군가가 엉뚱한 소리로 숨통을 텄다.

그랬다. 우리 모두는 살고 죽는 소리 아닌 다른 평이한 소리들을 그리워했다.

 

털고 싶다. 다 털고 싶다. 사람의 소리들을 털고 싶다. 그래, 무등산 팀에 슬쩍 끼어보자. 몸도 맘도 가볍게 원룸의 계단을 내려간다.

1187번 버스를 타면 되거든! 신안사거리에서 광주역 방향으로, 방향 틀리면 안 되고!

나를 인도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소리다. 나를 외지인 취급하는 신 선생의 말투를 떠올리며, 내가 광주사람은 아님을 실감한다. 이 시대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의 방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생각으로는 번지수가 사뭇 틀린 분개한 목소리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도 그렇다. 민주의 성지에서 제 당을 버린 인사들을 옹호하다니! 난 물론 정치적 감각은 꽝이니까.

어디서 돌아오는지 모르겠지만, 신안사거리에서 탈 때도 버스엔 거의 빈 좌석이 없었다.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창밖으로 나는 벌써 보이지 않는 산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자연이라고 하면 대지를 흙을 말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산이 자연이다. 높은 산은 그대로 거대한 자연의 품일 것 같은 상상으로 자랐다. 고향 팽성에는 산이라고야 백 미터 남짓 되는 것들뿐, 동네에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리는 부용산은 정말 나지막한 언덕에 불과하다. 평택 이름이 그렇지, 조선 초기 어느 문신이 지은 시에 ‘물은 천천히 흐르고 산은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골골마다 밭갈이를 일삼노라.’ 했다는 곳 아닌가. 그래서인지 산은 내게 늘 꿈의 장소였다.

파리 생활 첫해에 여행이랍시고 국경을 넘은 곳이 다보스였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으면서 동경하던 산, 마의 산이 그곳이었으니까. 베르니나 특급 등 접근성도 좋지만, 누가 스위스에 갈 기회에 다보스를 놓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천 년 묵은 전나무들…… 오래 묵는 사람들은 스키를 즐기기도 하겠지만, 잠시 방문한 여행자들에겐 산 자체가 온 정신을 빼앗아버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게 하는 그곳. 그저 산만을 바라보고 산을 숨 쉬라고 말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폐결핵요양소, 병약한 유럽 시민계층의 집합소인 그곳으로 사촌을 방문한 주인공 또한 병이 들어서…… 병과 죽음이 여전히 정신적일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었다, 그때는. 정신이 육신의 우위에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으니까.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은 다르다. 몸과 맘의 길항작용은 효력을 잃었다. 미국에서는 휘트먼쯤부터는 알았다. ‘영혼은 몸보다 더한 것이 아니고, 몸은 영혼보다 더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신도 그 어떤 것도 누군가의 영혼 보다 더한 것은 아니다.’라고. 몸과 맘은 하나다. 그만큼 확실한 사실이 산은 인간보다 거대하다는 것이다. 오늘 산에 이르면 잠시라도 산의 소리에 취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인간의 소리를 잊으며.

버스는 시내 길을 한 삼십 분 가더니 산길을 한참 돌아 종점 원효사에 도착한다. 버스 실황정보를 볼 생각도 않고 집을 나선 탓에 정류장에서 기다린 시간까지 하면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기분은 시쳇말로 째지게 좋았다. 얼마 만인가. 산의 정상은 아니라 해도 정상 같은 느낌을 받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높은 곳에도 절이 있고, 또 이 엄청난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이라니. 버스도 둘이나 정류소에 쉬고 있었다. 아래 너른 주차장도 차들로 거의 빈 데가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이 산 속으로 흡입되었을지, 새삼 놀랍기도 하고, 그 중의 일원이 되었다는 뿌듯함도 든다.

여기야, 한샘, 빨리 오네! 벤치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드는 쪽에서 나는 소리다.

산에서 나를 반기는 것도 우선 사람의 소리다.

아, 신샘, 더 빨리 왔네! 난 잘 모르니까 미리 온다고 온 건데.

누가 늦었대나!

우리는 저절로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자연에서 만나면야 어중간한 상표 떼고 친구다 싶다. 중요한 건 3월이 가기 전에, 그러니까 더운 기운 나기 전에 무등산을 만나는 일이다. 아니 이미 만났다. 첫 모습은 버스정류장의 형태로서. 벤치 주변에는 깡통이나 휴지들이 뒹굴고 있어 조금은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절이 참 높은 곳에 있네.

그래, 원효사, 엄청 유서 깊은 절이야. 6세기엔가 지었대. 지증왕인가 법흥왕 때라고 하니까.

우와, 그런데 웬 지증 법흥이야? 그때 설마 여기가 신라의 땅이었나?

절의 역사란 것이, 아니 역사란 것이 원래 우물쭈물 아닌가.

뭐야, 큰일 날 소리. 역사를 우물쭈물 써도 된다는 말로 들리네. 암튼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절이라면 역사 속의 전화들은 피했겠네.

웬걸. 임진왜란 땐가 정유재란 땐가 다 탔고, 동란 때도 또 탔다던데. 그 후 제대로 지은 것이 지금 모습이래.

이 높은 산 위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전쟁인가. 그래도 짓고 또 짓고…….

어, 유민샘이네.

어, 박샘이랑 같이 오네.

어, 두 사람 썸타?

글쎄, 두고 볼 일. 후훗.

 

절로 가는 길 - 재미있는 이름의 찻집인지 밥집인지가 웅장한 일주문 옆에 있었고, 우리는 절로 가는 길을 따라 절로 갔다. 곧 나타나는 건 작은 성벽처럼 늘어선 축대 위에 한 칸짜리 사모지붕의 범종각이다. 내가 정말 오랜 만에 이런 풍경들을 보는지, 이어지는 한 줄 6개 기둥의 회암루 대청마루에서만 한나절 쉬어가도 좋겠다 싶어졌다. 그래도 숙제처럼 절 마당에서 서있는 보살상과 금강역사상을 돌아, 너무 인공적이다 싶은 감로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샘,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약수 한 쪽박 마시고……. 원효대사의 진영을 모신 개산조당, 말끔한 느낌의 굽은 담장 너머에는 무등선원이라는 수행의 집도 얼핏 건너다보고서야 절을 나왔다. 절의 소리, 불경소리는 내가 고대하는 산의 소리는 아닐 터.

곧 등산객 수를 수집하는 계산기 앞을 통과하고 나니 비로소 산길이 나온다. 나는 공식적인 숫자가 되어 산에 발을 들여놓았고, 산은 나를 하나의 숫자로 기억할 모양이었다. 어딜 가나 겨우 숫자로서 존재한다는 공포심이 잠시 되살아났다. 세계인구, 한국인, 여자, 미혼, 비정규…….

산행이 시작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아스팔트길이다. 하지만 좌우가 숲이니까, 숲의 나무들이 엄청 높아서 산길이 맞나 보다. 산길은 놀랍게도 나뭇가지 끝에 어른거리는 연보랏빛으로 사람을 맞는다. 상식적으로 연둣빛을 기대하던 내 눈에 불그스레한 보랏빛은 의아했다.

어, 웬 보랏빛이네. 분홍빛. 이게 무슨 나무들이야, 꽃부터 피는 나문가?

에이, 한샘 꽝이네. 이파리들이 움트는 자리지. 이파리를 틔워내는 껍질들, 그게 나중에 갈색으로 붙어있을 받침들이지.

난 또.

유민샘의 직답에 시원하면서도 머쓱해졌다.

보랏빛이든 연둣빛이든 빛의 변화, 그게 봄 색깔 아냐? 그리 생각하려다가 문득, 봄빛은 나뭇가지의 목을 분지른다, 라던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들이었다, 그 시인의 시는. 시란 본디 어려운 글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까. 나뭇가지들이 봄빛에 닿아서 분질러지는가, 정말로. 버거운 양의 눈도 버텨내고 있다가 하필이면 봄빛에 닿아서 분질러질까. 툭 끊어져 죽어버리지 않고 되살아나려는 이 늙은 가지들에 피어나는 여린 숨이 추악하다고? 가지들을 올려다보는 내 목이 먼저 분질러질 참이다.

뭐해, 한샘, 벌써 지치는 거야?

저만치 앞서던 신 선생이 뒤를 돌아 소리친다.

으응.

으응, 뭐?

간다고!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린가. 아주머니 둘을 앞질렀더니 계속 소리가 따라온다.

딸년이 아니라 빨대지, 완전 빨대.

빨대라니. 댑다 뭔 말이래?

정금이 말이여, 딸년이 아조 대놓고 지가 엄마 빨대라 그란다네. 젙에서 봐도 그래. 즈그 엄마한테 빨대질 맞더라고. 직장조까 댕긴다고 저 치장허고 나갈라, 꼬맹이덜 학교다 어린이집이다 보낼라, 신랑 밥도 못해준다고 아예 꼭두새벽부터 엄말 불러댄다더라고.

요새 아덜이 죄 그라제 뭐. 그라도 시집이라도 갔응게 낫제. 다 큰 아덜 틀어 안고 사는 집 어디 한 둘이당가.

맞어, 아예 처녀총각 귀신나게 생겨서는, 돈 벌로 안 나가는 아덜도 쌔았다고 하데 뭐. 참, 명숙이 아들은 미국서 졸업장 땄어도 도로 왔다잖은가. 거그도 취직이 안 된갑제.

미국이라고 대졸이라고 다 취업이 되겄어. 세상이 취업 전쟁턴가 벼. 인구가 많어 그러겄제. 묵을 입은 많고 일자린 없고. 자동환가 뭔가 기계가 사람보다 낫으니까 사람 들어갈 자리가 줄제. 알파곤가 멋인가 좀 보소. 한판은 어쩌고 이겼다 해도……

사람 암 것도 아녀 참. 기계가 사람 일 다 해중께 편한 세상 왔다고 했는디, 그럼 인자 더 좋은 세상은 없겄네. 참, 세탁기 첨 나왔을 때 얼마나 좋았는가잉. 나넌 유난시레 손등이 까지고 그랬는디…….

좋은 일도 다 도가 있는 거여. 달도 차면 기웅께.

두 사람의 끈질긴 넋두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하필 보속이 비슷한지 소리는 계속 뒤를 따라온다.

그란디 희자 있잖여, 에지간히 희희낙락거리더만은.

먼 말?

아들 고시 합격했을 때도 그랬제만 연수원 졸업허기도 전에 재벌 집 사우 돼 갔잖어. 금방 또 판사로 발령 났고. 그땐 쪼까 뻐겼제. 근디 당아도 즈그 사는 집에 어메아밸 오락허덜 않은다잖어. 잘나도 병 아녀.

잘나믄 내 아덜 아녀, 나라 것이고 장모 것이제.

그나 무장 부모자석 간에도 잇속인지, 멋이나 써먹해지니께…….

못 살겠다. 일정하게 뒤따라오는 푸념들은 머리를 돌게 했다. 더러 옳은 소리도, 그 나름대로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 귀에는 다만 소음이었다. 목청들은 또 왜 그리 큰지. 툭 터진 공간에 나오니까 소리가 흩어지리라는 본능이 소리를 더 크게 내지르게 하는지도 몰랐다.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예사롭지 않게 주시했지만 소용없었다. 좀 시끄럽소, 라는 내 눈짓에 영향 받을 사람들도 정황도 아니었다. 순간 그들에게는 세상에 친한 둘만 있었다. 아무래도 미리 보내주어야 할 것 같아서 벤치로 피했다. 이만 허면, 머시 어짜고…… 다행히 그런대로 소리가 앞서며 먼저 길을 오른다.

저들은 얼핏 보아도 울 어머니 또래다. 어머니도 친구랑 산 나들이라도 하실까. 가만, 팽성엔 산다운 산이 없지. 안성의 고성산도 300미터도 안 된다. 산책이라도 가실까. 어디로 가실까. 평택대학교 캠퍼스로 벚꽃 구경이라도 가실까. 나들이 길에 친구하고 우리들 이야기를 하실까. 큰애는 프랑스서 박사 해 와서도 교수되긴 어렵나 봐, 시집도 안가고 큰일이다. 막내는 미국 보냈더니 - 옥실은 일찍 미국에 정착한 큰아버지의 양녀가 되었다 - 미국 사람하고 결혼해서 미국서 살아버리네. 조금 덜 쌩쌩한 둘째 하나가 결혼해 애들 낳고 가까이 살 뿐인데……. 아들이 없어 한탄이라도 하실까.

 

아서라, 일 떠나 집 떠나 산에 왔으니 집 생각일랑 집에 두자. 정말 산의 소리가 그리워 숲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새소리 벌레소리 하나 없다. 당연히 바람소리도 없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발성난청으로 고생하셨던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는 오히려 파도소리 비슷한 소리들이 들리셨다지. 그러니 이런 무음은 난청은 아냐. 이 조용함은…….

눈을 슬며시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산의 공기라도 느끼고자 했다. 공기 속에 황사 섞이듯 소리 가루 같은 것이 섞이지 않을까? 순간 엄청난 노래방이 통째로 다가오는 착각에 빠졌다. 쿵짝쿵짝 반주에 맞춰 대형 마이크를 통해 울려나오는 소음이었다. 그것이 하필 바로 코앞에서 울려댄다. 아뿔싸.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일어서니, 노란 통실한 배낭과 노란 통실한 사람이 옆 벤치에 한데 멎어있고, 소음은 거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친 놈.

깜짝 놀랐다. 내 입술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와 버렸다. 소리가 작았는지, 상대가 천둥 같은 기계음 소리에 휩싸여 못 들었는지, 칼부림은 나지 않았다.

못 말리는 인간이네.

내가 어처구니없어서 벤치에서 물러서려는 사이에 신 선생이 다가와 속삭인다.

그러게, 앞뒤가 안 맞는 인간이야. 자연사랑 산악회 노란 리본을 펄럭이지 말든지 공해물질을 유발하지 말든지.

저렇게 노래 크게 들으려면 산엘 왜 와.

우리가 된통 큰소리로 두런거려도 노래방 인간은 못 듣는 모양새였다.

와 여 섰노. 퍼뜩 가자.

다른 노란 리본이 노란 노래방을 채근하며 지나간다.

가만있어 보래이.

신 선생이 거기다 비꼬아 뭐라 큰 소리를 내질러보아야 어림없다. 그저 서둘러 기계의 소음에서 도망칠밖에. 휴우, 숨을 몰아쉬며 빨리 자리에서 멀어져야 했다. 이럴 땐 다행으로 오르막인데도 경사가 거의 없다. 오른쪽으로 한 번 굽는 삼거리에 쉼터가 나온다. 늦재라더니 만치정이라 쓰여 있다. 원효가 팔경으로 헤아렸다는 이곳 나무 벤치에 앉아 만치초적을 상상해본다. 해질 무렵 나무꾼들이 부는 풀피리 소리, 문득 그 소리가 그리워진다. 무엇이든 발전하는데, 있었던 것은 왜 사라지나. 발전이란 확장이 아니고 대체련가. 풀피리 소리는커녕 무리지어 떠들어대는 사람들 소리에 떠밀려 일어선다.

가자고, 더 쉴 것 없어. 계속 이 높이야.

산길이 아니네, 정말, 여기 무등산 이름은 이렇게 평평하고 가파르지 않는 산이란 뜻이라지?

아, 그건 아니고. 광주의 원래의 이름 무진과 무등이 같은 어원이라는 설.

어떻게?

‘무진(武珍)’이 원래 한자어가 아니라 차자표기니까. 그 ‘진’자의 한자 새김이 ‘들’에 가깝고. 그래, 실은 ‘무들’이나 ‘물들’에 가까운 소리라고. 물이 많은 들판. 무등도 무들에 가깝잖아, 그래 물이 많은 들판에 있는 산, 뭐 그런 것.

물이 많은 들판이면, 예부터 농사는 잘 되었겠네.

그렇지. 마한고분군이 나주에서 발견된 걸로 보아서는 저 아래 나주평야만은 못했겠지만. 하긴 그보다는 무등산 이름이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걸랑.

놀리지 마. 무등산은 이름 그대로 계급이 없음을 상징한다고, 광주사람 아닌 나도 아는데. 광주 오기 전부터도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그런 시 정도는 아는데 왜.

맞아, 슬픈 현대사와 맞물려 보통은 계급이 없다는 식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정치구호쯤으로 알려져 있지. 헌데 원래는, 그니까 예전에는 오히려 등급이 없는 최선, 절대 선의 의미였다고 하거든. 불교가 전래된 담에, 부처란 세상 모든 중생과 견줄 수 없이 우뚝하다는 존칭으로 무등산이라 불렀다는 이론이야. 고려 때는 여기 300개가 넘는 암자가 있었을 만큼 속세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고 하거든.

어, 그런가.

가자고.

거기서 바람재까지는 완전한 평지였다. 제대로 갖춰 입은 등산복이며 장비들이 무안하리만치 그냥 평범한 길이다. 왼쪽 언덕으로 건물들 대신 산철쭉이 다를 뿐.

갑자기 새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산의 소리다. 참새보다는 꼬리도 길고 큰 새, 설마 날씨로 보아 굴뚝새는 아닌, 별로 예쁘지는 않은 새 한 마리가 앞장서듯 날아간다. 어디선가 보았던 새였나? 바람재 470미터라 쓰인 표석을 안고 인증사진 한 장. 원효사가 해발 450미터였으니까 높이로는 겨우 20미터를 오른 것이다. 새는 건너편 가지에 앉아 있다. 더는 울지 않는다.

새 소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재생이 안 된다. 기호화되지 않아서 기억도 재생도 안 되는가? 뭐야, 그럼 그리운 산의 소리라는 것을 결국은 담아가지 못하는가? 기호를 모르니 표기할 수 없고, 표기할 수 없으니 저장이 될 리 없다. 언어라는 것, 인간의 언어로 표기하지 못하는 것들은 저장되지 않는다니. 기호화 되지 않은 소리는 소리에 불과하다. 아름답게 느꼈더라도 그저 아름다운 소리에 불과하다. 정체를 기록할 수 없다. 정체를 모른다. 정체가 없다.

 

여기선 밥을 못 먹어.

밥 소리가 유의미하게 들린다. 밥이라는 소리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워낙 드나들어.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한적한 곳이 있는데. 저쪽 중머리재 쪽으로.

너무 멀지!

아니 게까진 아니고, 조금 가면 토끼등, 게서 조금만 가면. 살짝 가파르긴 해도 조금만 가면 된다고.

아까 철쭉쉼터 덕산정으로 돌아가지.

인생에 되돌이는 없어. 험지라도 그냥 앞으로 내닫는 거지.

산에 올라서도 철학하시네, 휴우.

설왕설래 중에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나는 큰 숨만 내쉴밖에. 결국 여전히 평평한 길을 따라 소리정에 이른다. 정자마다 이름이 있지만 소리정이라니. 흩어지는 일행을 불러 모으기엔 참 좋겠다 싶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고 있어서 나쁠 것도 없고. 그런데 웬 소릴까. 여기에선 정말 산의 소리를 들을까. 그건 아니었다. 저 아래 쪽에서 뭉클뭉클 사람들이 쑥쑥 올라왔다.

아, 그쪽이 증심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라서 그래. 그냥 이리로 와!

갑자기 가파른 울퉁불퉁 길이 나타난다. 잠시 헉헉대는데 백운암처라는 작은 정자가 나온다. 크기는 작아도 이곳 오기가 힘들어서인지 빈 나무 탁자들이 남아있다. 시간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편이다.

그런데 아까 저 아래는 왜 소리정? 거기만 소리가 특별할까? 다를까?

거참, 우선 밥 먹읍시다요. 어, 배고파.

이것저것 어울릴 리 없이 아무렇게나 꺼내 놓은 밥들은 보기보다 훨씬 꿀맛이었다. 그러다가…….

밥맛 좋으요. 다 이리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트레스성 자살이란 유언을 남긴다냐.

그러게. 고등교육법에서는 교원이 아니고, 근로기준법에도 지위가 없으니, 우리는 유령이란 말이지.

일용직 노동자지 뭐.

일용직도 사람이다 그 말요.

우리는 밥만 먹으면 그 문자들 그 소리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재삼 확인해야 했다. 물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외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냉철히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 뭔가 유의미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 아님 누구라도 먼저 힘이 약해지면 그만 움켜쥔 손을 스르르 놓고 말 것이다. 54편의 논문을 쓸 수 있기도 전에 손을 놓아버릴 것이다. 책상에 쌓아놓고 온 벙어리 문자들이 천 톤의 무게로 짓눌러왔다. 산 위의 나를 아래로아래로 끌어당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내려오는 길로 접어들었다. 해발 500미터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반도 못 올라왔지만, 오르는 일에 매력이 있을 리 없다. 생이 내리막인데. 이리 젊어서 벌써 내리막인데.

모든 내리막처럼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박 선생은 성큼성큼 뛰어 내려가더니 언제부터 흔적도 없다. 일행을 따르자니 나무를 올려볼 틈이 없다. 상수리나무들은 겨울이 되어도 바싹 마른 잎들이 더러 매달려 있다더라, 봄엔 어떨까. 눈에 보이는 건 땅에 떨어져 깔려있는 침엽수들이다. 앞서 내려가던 사람들이 낮은 바위 아무 데나 앉아 기다리고 있다. 할 말들이 없어져서 입을 꽉 다물고들 앉아있다. 곁에 주저앉으면서야 침엽수들이 떨어져온 가지들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죽은 가지들은 부러져 떨어져버려야 추악하지 않다니. 낙오자가 되었으니 툭 부러져 떨어져버려라? 추하게 생에 매달리지 말고? 모르겠다. 식물학적으로는 그 시인의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식물학적으로 ‘죽어 있는 가지들은’ 새순을 내지 못하겠지.

서른도 안 되어 죽어버릴 거면서 하필 「노인들」을 읊은 그 젊은 시인은 죽은 가지 툭툭 부러지지는 봄 소리를 들었구나. 그래도 죽어 보이는 그런 앙상한 가지에서 연초록 새순들이 나오지 않은가. 나무들의 생존 전략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말라 비틀어져도, 더 말라 거의 죽어 있어 보여도, 마지막 숨을 놓지 않았다가 새 순을 내는 너희들. 한껏 소리를 질렀더냐?

그래, 나무의 생존전략은 그런 것이다. 어떤 동물들 보다 오랜 억겁의 진화를 거치는 동안 생성된 식물의 생존 방식이다. 생존 방식이란 그것이 어떻다 해도 추악할 리 없다. 생명은 생명으로 아름다울 권리를 가져 마땅하다.

문제는 이 우월한 지구상에서 살 수 없음을 절감하는 저열한 사람들이다. 우리들 또한 벌써 아름다움을 잃었다. 다른 사람의 넋두리는커녕 시마저 못 읽어낸다. 코앞의 생존에 매달려 다른 사람에 귀 기울일 틈이 없다. 겨우 끼리끼리 말한다, 우리들끼리, 비정규끼리. 급하면 서로도 외면한다. 모교에서의 뼈아픈 기억을 되새긴다. 은사님이 정년 하시면 당연히 내 차례려니 믿어왔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된 건 순간이었다. 추월에는 예고가 없었다. 결과는 지방시 신세다, 지방대학시간강사.

그래, 출세가 대수냐. 내가 공부한 대로라면 루소는 그렇게 말했었다. 작가란 출세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생계를 위해 사고하는 사람이 고상한 생각을 하기는 힘든 법이라고. 나는 그런 위대한 작가와는 다른 차원을 살고 있다. 그저 공부를 더 하면서 작은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생필품이 필요한 왜소한 존재일 뿐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잊었나 싶으면 떠오르는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사르트르 계열, 전후독일의 하인리히 뵐이었다. ‘어릿광대’ 비슷한 제목의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밖’은 실존철학적 의미로, 지금처럼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전쟁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잠깐, 웬 거장들 타령이냐. 전설이 된 그들은 이곳 산이 아니라 책상에 붙어서 날 노려보고 있음만으로 족하다. 그들은 나의, 내 생활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혼자임을 애석해하지 않으니 그들의 조언이 불필요하다. 혼자임은 생물체의 근본 속성이다. 타인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다. 나의 정서를 위해서, 오늘은 오직 산의 소리가 간절히 필요했을 뿐이다. 여기 어딘가에 분명 산의 소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표기할 수 있건 말건 소리는 있어야 한다. 있어 마땅하다. 생각을 접고 감각을 집중해서, 산 냄새를 느끼고 산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산에 침입한 인간들 아닌, 어떤 본래적 산의 존재가 토로해내는 소리를. 하지만 걱정의 소리들을 가득 품고 산에 들면서 산에서 온전히 산의 소리만을 탐한다면 그것은 욕심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들어섬으로 인해 이미 손상된 산은 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니, 산은 소리를 내고 있지만, 소리를 기호화해서 듣고 기억하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죽은 나뭇가지 분질러지는 소리, 마른 가지 껍질을 뚫고 움을 트는 소리를……. 아니, 나는 다만 내 울음소리만을 듣느라, 산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산은 산 높이가 아니라 별자리까지 가 닿을 머나먼 거리로 내게서 떨어져 있다.

밥 먹다 말고 집단 우울증에 빠져서 서둘러 내려가는 이 길에서 싱겁게 산 나들이가 저무는 모양이다. 그저 고통스러운 문자들의 아우성을 잠시 피했다는 안도감은 원룸의 방문을 여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농아들의 전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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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단편 「산의 소리」, 『햇빛에 취하다』, 시누대, 예원, 20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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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