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7. 7. 6. 10:31
서용좌 3년 만의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  

2017년 07월 06일(목) 00:00

 

 

 

 

 

 

소설가 서용좌(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사진) 교수가 신작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푸른 사상)를 펴냈다.

2014년 ‘표현형’ 출간 이후 3년 만에 펴낸 작품에서 작가는 우리사회 대표적인 비정규직 중 하나인 시간강사의 삶을 들여다본다.

소설은 공부를 잘해 외국 유학까지 갔다 왔지만, 현실은 ‘지방시’(지방대학 시간강사)를 전전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인공이 저자의 전작 ‘표현형’의 서술자 한금실이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 ‘흐릿한 하늘의 해’에선 한금실의 의식이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가진 것은 없고 시간은 넘쳐나는 비정규직 강사의 현실은 막막하고 고달프다.

어느 순간 한금실은 일상의 순간들을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등장인물이자 서술자로서, 자신과 이웃의 사소한 사건들을 언어화한다. 소설 전편에는 소외되고 배제된 이웃들에 대한 애잔한 시선이 깔려 있다.

저자는 한금실이라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려 “글을 쓴다는 것은 인생을 그렇게 어설프게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리라”면서 “그러므로 나의 이야기는 다만 근저에 놓인 사건들의 주관적 변형에 불과한 것임을 안다”고 밝혔다.

/박성천기자 skypark@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7. 7. 5. 02:16
2017년 6월 24일 주말 ~

 

아이들이 다녀갔다. 아이들이 집에 온다고 하면 몽강리를 생각하나 보다.  

 

2009년 - 2014년 - 2017년 도레미파 사진이 증거다.

 

 

'사사로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발적 감금  (0) 2017.10.07
일, 작업  (0) 2017.10.07
강아지 미니 백  (0) 2017.03.07
뜨개질 목도리 - 아이들  (0) 2017.01.04
2016년 수빈이  (0) 2016.12.30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5. 02:16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336쪽, 푸른사상사 2017.6.20.

 

표지는 아들 - 캘리그라피는 손녀 - 이만한 뿌듯함이 크다.
OK 내고서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하는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사람들을 나누어 편 가르는 나라 … 사람이 만들어 완벽한 체제는 없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9) 둥지를 더럽히는 작가들

2017년 06월 19일 (월) 12:18:43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국제PEN한국본부 울타리 안에서 매년 6월이면 영호남문학인 교류대회가 열린다. 국제PEN부산지부와 국제PEN광주지부가 번갈아 주관하는 행사다. 올해는 여수 1박2일의 일정에 덤으로 향일암 코스가 들어었었다. 향일암, 그곳 일출을 보는 것은 설레는 버킷리스트 중에 넣어야 할 아름다운 곳이다. 그 오르는 계단의 높이와 가파름 때문에 몸의 허락을 받은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렷다.

 

첫날의 메인 행사 중에는 본격 학술강의는 아니나 특강 형식의 프로그램이 있었고, 그 중 ‘둥지를 더럽히는 작가들’이란 강연이 있었다. 중심 내용은 독일 나치시대의 문화 억압과 작가들의 고군분투에 관해서였는데, 문화를 억압하는 정권의 말로에 포커스를 둔 것 같았다.

중세 후기부터 사용된 ‘둥지를 더럽히는 짓’이란 개념은 주로 가족이나 공동체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행위를 지칭했으나, 현대적 의미에서 ‘둥지를 더럽히는 자’라고 할 때는 사회 경제 정치적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실제로 뭔가를 더럽히는 ‘행동’ 그 자체를 지칭했던 말이 그러한 더러운 행동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언동’을 가리키게 됐다니, 말의 변천은 놀랍다.

 

   
 

buecherverbrennung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사진출처= 독일연방자료실

 
 

나치는 가장 우월한 종족인 국민 전체가 나치식 사고를 갖도록 도덕교육을 중시했다. 따라서 나치정권에서 둥지를 더럽히는 사람들은 단연 유대혈통이었다. 또 저항하는 작가들은 ‘퇴폐’의 범주로서 낙인찍혔다. 그때 ‘퇴폐(entartet)’라는 단어는 원래 ‘같은 종족과는 다른’ 혹은 ‘별종’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이 나치시대에는 엉뚱하게도 정통을 벗어난 현대미술 전반에 대한 공격의 신호탄이 됐고, 음악과 문학 분야에도 적용됐다.

나치로서는 무엇보다 둥지를 더럽히는 퇴폐문학을 불태우는 일이 급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 첫해 4월부터 ‘소각해야할 도서목록’이 신문에 실리더니, 며칠 후에는 공식적인 리스트가 공표됐다. 5월 10일에는 독일 전역에서 유례없던 대규모 분서 의식이 치러졌다. 당일에만 전국의 22개 대학도시에서 같은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일시에 이른바 ‘비독일적인 책들’이 불태워졌다. 민중들의 무계획적인 자연발생의 성격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조종되고 조직적으로 정확히 계획된 캠페인’(한스-알베르트 발터)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도시에서 동시에 유대혈통, 평화주의자, 좌파 또는 나치의 복안에 맞지 않은 작가들의 책들이 불타올랐다. 베를린의 경우에는 약 7만 명이 참여했고, 훔볼트대학 도서관에서 책들을 꺼내서 황소가 끄는 수레로 오페라광장 장작더미로 실어 날랐다. 불타는 책들 속에는 마르크스, 투홀스키 등 소위 불온서적과, 프로이트 등 학문서, 하이네, 하인리히 만 등 순수문학 서적들이 포함됐다. 헤밍웨이, 에밀 졸라, 고리키 등 외국작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일 베를린에서 책이 소각된 작가들은 94명이었다고 한다. 이슬비 내리는 밤 11시의 풍경이었다.

 

나치정권의 블랙리스트 대상을 정리하자면 ①공산주의 서적 ②전선 병사 체험을 저속하게 그리는 작품 ③민족의 도덕적 종교적 근간을 파괴하는 작품 ④바이마르공화국을 찬미하는 서적 ⑤민족진영의 정당한 자의식을 훼손하는 서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불태울 책의 목록, 블랙리스트를 나치정권의 민족계몽선전부에서 직접 작성했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전적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생조합(학생회) 주축으로 작성됐다고 한다. 

 

그 수량은 어떠했을까. 첫 분서대상 리스트는 순수문학, 역사서, 정치 및 국가학 등에 국한됐고, 총 299명이 이에 해당했다. 종교, 철학, 교육학 서적은 첫 분서 때에는 아직 작성되지 않았다. 또 하나 중요한 금서목록인 ‘헤르만 문서’는 확신에 찬 나치 사서들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도서대출 금지 목록인데, 모든 도서관과 서점에서 추방해야할 작가들을 망라한 ‘수치스럽고 달갑지 않은 작가명단’은 149명 1만2천400종의 서적에 이르렀다. 다른 출처에 보면 나치시대 블랙리스트는 최종적으로 267명을 기록한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치의 그 악명에 비추어 고작 300명도 안 되는 블랙리스트? 그래서인지 정말 신랄한 일화가 있다. 2월말 국회의사당 화재 이후 무차별 체포를 피해 잠적한 작가들이 숱했다. 오스트리아로 피신해 있던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는 5월 10일의 분서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없자 그에 반발해서, 이틀 후 빈의 <노동자신문>에 공개서한을 실었다. ‘나를불태우라! 나의 삶 전부와 나의 저술활동 전부에 의거해서 나는 권리가 있다. 내책들을 장작더미의 순정한 불길에 넘기라고 요구할 권리, 갈색 살인도당의 피에 젖은 손과 썩은 두뇌에 바치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갈색은 잘 알려지다시피 나치스 돌격대의 제복이었다. 이어지는 분서 리스트에는 그라프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듬해 뮌헨대학 교정에서는 그의 요청(?)대로 성대한 분서식이 있었고, 독일 내 완전 출판금지며 국적 박탈이 이어졌다. 브레히트의 시 「분서」는 그라프의 서한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나치의 블랙리스트가 300명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인류 역사에서 악의 최정상을 실현했다고 하는 나치시대에도 ‘고작’ 그 숫자였다니. 실제로 사람들까지 불태웠던 정권치고는 그들 판단에 ‘극도로 위험한’ 최소정예만 골라서 금지시킨 것이다. 

우리는 그에 비하면 상상을 절하는 블랙리스트의 나라다. 당시 청와대가 문화체육관광부에 내려 보냈다는 A4용지 100장 이상의 그 문건에는 놀랍게도 문화예술계 인사 9천473명이 기재됐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444건의 지원배제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제 와서 화이트리스트로 둔갑한다면 그 역시 못 믿을 사회가 되는 것이리라. 

 

사람들을 나누어 편 가르는 나라라면 여전히 불안한 나라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사람이 만들어서 완벽한 체제란 없다. 둥지를 더럽히는 작가들은 사회의 균형으로서 늘 있어야 한다. 오른발이 너무 나가서 미끄러지는 순간 뇌진탕을 막아주는 것은 왼손이고, 왼발이면 오른손이다. 우습게도 그날 강연자는 왼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자멸의 길 앞당기는 비이성적 반목 … 무차별 테러 속 인간의 미래는?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8. 테러에 갇힌 호모 사피엔스
2017년 06월 05일 (월) 13:48:0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여전히 아름다운 신록의 푸르름도 슬픔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이렇게 좋은 계절, 아직 인류에게 온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지구상에서 무차별 살인이 난무하고 있다. 맨체스터 팝 공연장 테러는 무해한 청소년들을 겨냥했고, 카블 외교단지는 라마단인데도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외침으로 피로 물들었다.

 

역사책에서 ‘테러’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프랑스대혁명의 ‘공포’정치였던 것 같다. 혁명이 9월의 학살과 더불어 폭력으로 치달았을 때, 이 국가적 테러에 직면해서 혁명에 대한 유럽의 전반적인 공감대는 수그러들었다고 배웠다.

 

일반적으로 테러는 특정 목적을 지니고 특정 목표인물에 한정돼 왔다. 기원 후 1세기 유대인 저항집단은 로마군의 주둔에 반발해 대제사장 요나단을 암살하는 등 단검 공격을 자행했고, 그래서 시카리(shikari)라고 불렸다. ‘자객’이라는 뜻이다. 중세 페르시아 지방의 이슬람 종교단체들은 ‘암살자’를 고용해 종교적 목적달성을 꾀했으니, 테러는 중동지역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 속에서 오랜 역사를 지녀왔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가 전 세계로 확산됐다. 정치사회적으로 혁명적 변화의 효과적 달성을 위해 유력 정치인을 암살하는 방식이었고, 예컨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은 제1차 세계대전을 유발했다.

 

   
  ▲ 멘체스터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문객이 든 글귀가 인상적이다. 출처: www.hindustantimes.com  
 

 

테러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그 범위를 놓고 의미심장한 논쟁이 있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결별이 5막극 『정의의 사람들 Les justes』(1949) 때문이었다. 카뮈는 이 작품에서 1905년 러시아 사회혁명당 소속 테러단에 의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사건을 다루었다. 볼쇼이극장 앞에 내리는 목표물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는 계획은 실패한다. 행동대원 칼리아예프가 순간 망설임으로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아니, 대공비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함께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계획을 거둔 것이다.

 

작품의 의미내용은 ‘망설임’에 있었다. 카뮈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혁명가들과는 달리 폭군을 암살하는 경우에도 아이들과 같은 죄 없는 사람이 말려들 위험이 있으면 그 행동을 단념하는 망설임을 변호했다. 사르트르 측은 ‘반항적 태도’란 자기기만이며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했고, 카뮈는 정치철학적 에세이 『반항인 L’ Homme revolte』(1951)에서 사르트르의 ‘혁명적 인간’과 대립되는 ‘반항적 인간’을 제시함으로써 10년 가까운 우정에 파탄이 갔다. 카뮈가 옹호하는 것은 혁명적인 행동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반항이었다. 극좌와 극우의 절대주의에 굴하지 않고, 폭력을 부정하며 중용을 터득한 수단을 사용하는 끈질긴 저항 말이다. 카뮈에게는 내일의 정의를 위해서 오늘의 불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자본주의의 억압성과 폐해가 확인되면서 마르쿠제나 사르트르의 입장은 제3세계에서 민중의 저항을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한 폭력’이라는 의미로 정당화하는 쪽이었다. 화약고는 여전히 중동지역이었고, 서구 열강의 책임을 지적하는 논리도 있었다. 중세 십자군의 부활과도 같이 산업혁명을 통해 강력해진 서구 열강들이 중동지역을 분할 지배하는 구조가 갈등의 발단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격화는 6일전쟁·6월전쟁의 충격적 결과로 이어졌고, 고향땅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테러행위 뿐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은 뒤에도 반목과 테러는 확산 일로에 있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테러는 인간성의 ‘ㅇ’자도 언급할 수 없을 악의 수준에 달했다. 아니, 오늘의 종교적 정치적 반목은 전면전도 불사하는 양태로 발전돼, 테러는 대리전쟁 또는 보이지 않는 전쟁 수준으로 변모했으니, 미증유의 9·11 테러사건은 전쟁 그 자체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운집하는 비정치적 공간에 무차별 테러를 감행해 무엇을 노릴까. 무슨 이득을 얻어낼까. 성서와 코란의 가르침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우위를 점령하라 이르는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탈바꿈 과정에서 인간의 신체적 능력은 용도 폐기 직전으로 몰락했고,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총아가 아닌 듯 했다. 다행하게도 인간에게 남은 인지능력으로 새로운 직업군이 생겨났고, 인간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효용성을 증명해 보였다. 인간이 신의 가장 특별한 창조물이로서의 자부심을 가까스로 지닐 수 있었던 동안, 성서와 코란은 위안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라는 전대미문의 기술은 인간의 인지능력마저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내동댕이쳤다. 최근 불패의 기록으로 은퇴한 알파고를 보라. 모든 영역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앞지르고 있다.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닥터 왓슨(Watson for Oncology)’은 미국 유명 암센터 전문의가 진료한 1천명의 환자 기록을 분석해 30%의 환자에서 의사들이 놓친 치료방법을 찾아냈다고 알려져 있다. 날마다 업데이트 되는 닥터왓슨의 정보량을 어떤 인간의사가 따라가겠는가. 정보라면 그 범위는 무한대다. 어떤 펀드매니저가 인공지능을 추월한 금융지식을 갖겠는가.

 

그래도 예술의 영역을 말하겠는가. 그것도 희망사항일 뿐이다. 완벽한 연주는 물론 특정 생물학적 패턴과 수학적 패턴의 조합이면 작곡이 가능하며, 주제어의 입력만으로 미문을 만들어 낼 알고리즘이 탄생되고 있다.

유발 노아 하라리의 최신작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에는 ‘신과는 별 관계없고 기술과 관계있는,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나고 있는 용감한 신흥종교… 데이터敎’가 등장한다. 인지능력을 추월당한 호모 사피엔스를 용도폐기할지 말지, 이 새로운 신이 심판할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이건 이슬람 원리주의이건 또 무엇이건 우리가 가진 모든 가치와 모든 능력을 동원해 합심해서 총력으로 대비해도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새로운 신에 맞서지 못한다. 주어진 현상을 논리적으로 질서 짓는 자연 인식을 넘어 의미-인식(Sinn-Erkenntniß)이 가능했던 ‘멋진’ 호모 사피엔스는 이쯤해서 끝이 날 모양이다. 닥터 왓슨도 우리의 분노를 치유하지는 못할 텐데, 인간은 비이성적 반목과 불특정 테러 속에서 스스로 자멸의 길을 앞당기고 있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개인의 절망적 상황이 해소되는 ‘기회의 평등’을 기대하고 싶다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7.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2017년 05월 22일 (월) 11:27:51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장미가 피어나고, 장미대선도 치렀다. 마침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왔다. 누가 신록의 5월을 사랑하지 않으랴. 긴 겨울을 이겨낸 인동초의 현란한 꽃잎들 앞에서 마음 흔들리지 않을 사람 있으랴. 풀 속의 낮달맞이꽃 앞에서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으랴. 병꽃나무의 늘어진 꽃송이들은 과거급제한 이의 모자에 꽂힌 화려한 어사화 다름 아니지.

 

5월을 노래한 시인들은 너무도 많다. 「로렐라이」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5월을 감탄해 마지않은 시인들 중 하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나의 마음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었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새들 노래할 때/ 나의 불타는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김광규 역)

 

 

 

 
     
 

 

그가 젊어서 발표한 『노래의 책』에 들어있는 수많은 사랑의 시들을 배웠을 때, 그러니까 옛날에 내가 아직 대학 초년생일 때, 사랑 같은 것을 폄하했던 건방진 나는 하이네를 지나치기로 작정해 버렸다. 어렴풋이 자유 같은 개념에 취한 풋내기 문학도에게 문학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막연하게나마 무엇인가 저항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른바 ‘열공(열심히 공부함)’을 할 때서야 하이네가 쓴 많은 다른 시들은 전혀 다른 성격임을 알게 됐다.

 

침침한 두 눈엔 눈물조차 말랐구나/ 베틀에 앉아서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짜노라/ 우리는 그 안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으리/ 우리는 베를 짠다, 베를 짠다! (필자 역)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의 첫번째 연이다. 이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에게 또 한 겹의 저주를, 가난한 자들을 도외시하고 오직 부자들의 권익만을 보호하는 왕에게 또 한 겹의 저주를, 그리하여 오욕과 치욕만이 번성하는 조국에다 또 한 겹의 저주를 퍼붓는다. 젊은이의 가슴에 불타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했던 그 시인이 절절한 마음으로 노동자의 봉기에 참여하는 독설가로 변모한 것이다.

 

실제로 1844년 슐레지엔 지방에서는 직조공들의 봉기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자 기계화로 값싼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공장주들은 수많은 직조공들을 해고했고, 배고픈 직조공들은 공장주들에게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진압과정을 설명해서 무엇하리. 위정자들을 공격하기는커녕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문재인 대통령 격려사) 일어섰을 뿐임에도 무자비하게 총칼에 짓밟힌 광주의 5월을 겪은 우리가.

 

무엇이 이 시인을 서정시를 버리고 참여시를 쓰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 때문 아니었겠는가. 시인이 시를 쓸 수 없게 하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독일은 연방으로 탄생했지만 개개 왕국과 공국이 유지되었고, 프랑스는 물론 나폴리와 에스파냐가 옛 왕가의 복위를 맞았을 정도로 유럽은 반동보수의 시대로 들어갔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을 도화선으로 다시 유럽에 혁명의 기운이 살아나기까지, 문화는 다시 왕궁의 시녀역할에 머물게 되었다. 새 시대를 요청하는 젊은 목소리들은 탄압됐고, 하이네 또한 당국의 분서처분 대상자들에 포함됐던 것이다. ‘책들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에는 인간들도 불태우는 법이다.’(1821)라던 그는 망명 아닌 망명으로 나머지 평생을 파리에 가서 살면서 짝사랑 조국애로 애태우는 시들을 노래해야 했다.

 

우리나라에도 문화 예술을 탄압하는 블랙리스트의 시대가 저물었다. 시인은 마음 놓고 사랑의 시를 읊어도 될 것이라 믿는다. 실제로 시민들은 원하는 노래를 원하는 장소에서 불러도 된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말이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분개하지만, 최소한 더 이상은 제나라의 군인들이 총칼로 시민들을 짓밟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권력자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 나라가 된 것이라 믿는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련다는 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선언이다. 기회의 평등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존 스튜워트 밀이 주장한 자유경쟁원리는 ‘기회는 평등하게 주되 결과마저 평등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는 복잡 애매한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실천적 개혁프로그램에 있어 기회평등을 이루어 내는 일은 개인의 에너지를 발휘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해소하는 일이 전제돼야만 한다.

 

개인의 절망적인 상황 해소란 결코 녹록치 않은 과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인보다는 전체에, 특히 힘 있는 다수에 방점이 찍히다 보니, 힘없는 소수는 보호는커녕 백안시 된다. 과거의 왕족과 양반 대신에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서열과 계급이 생겨난다. 여전히 그러하다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왔더라도 사랑 노래만을 부르기는 어려우리라.

 

마침 아파트가 새 단장을 하려고 아름다운 페인트 색칠을 준비 중이다. 출입구마다 푸르스름 계열과 누르스름 계열의 두 가지 최종 안을 이미지로 올려두고 찬성 쪽에 꼬마 스티커를 붙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외벽에는 벌써 스파이더맨 여럿이 물줄기를 쏘아대며 줄에 매달려 있다. 페인트칠에 앞서 먼저 불순물을 제거하는 ‘세척’이라는 공정이란다. 나라도 새 단장을 하려면 오염된 구석부터 씻어내야 하리라. 기회에서부터 평등을 저해해왔던 개인의 절망적 상황을 해소하는 그 일을 새 정부에 기대한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이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5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부디, 어른들의 나태와 무능·오만까지 끌어안길”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6. 부활
2017년 04월 17일 (월) 11:06:19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어제가 부활절이었다. 올해의 부활절은 세월호 3주기 추모행사에 맞춰 왔다. 세월호의 부활을 의미하는 듯, 마치 하늘이 있어 그들을 다시 살리는 듯, 최후의 그들을 뭍에 올려놓고 왔다. 올 봄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인 물리적 하늘 그 이상으로 느껴진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에게도 이 부활절은 뭔가 뭉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활이란 영원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끔찍하고 놀랍도록 두려운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그 비슷한 말이 맴돈다.


 

긴 겨울 동안 사람은 확실히 환경의 동물임을 실감했다. 눈만 뜨면 텔레비전 화면을 켜는 행동에 굴하면서, 아차, 태양열로 반응하는 흔들인형(flip-flap)처럼 인파만 보이면 저절로 손을 흔드는 맹목과 무엇이 다르랴 반성했다. 4월이 되자 나는 일부러 엇박자를 내어 최근의 뉴스지향 습관을 털어내고 일상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 나라 안팎의 세상일을 어차피 잘 모르던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리웠다.


그래, 내려갈 사람은 내려갔고, 올라올 배는 올라왔으니 됐다! 그리고는 모처럼 평온이 찾아왔다. 이제 그 나머지는 스스로 귀결되리라.

 

   
  ▲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http://blog.naver.com/nabca)  
 

대선을 앞두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두가 몰입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담보해내야 한다는 열정이 옳겠다 싶기도 하다. 벌써부터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또 다시 막강한 배후가 염려된다거나 어제의 재림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선거도 하고 다른 준비도 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것이다. 결과는 알 수 없을 일이로되, 설마하니 지난 번 같은 불가해한 샴의 쌍둥이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확률적으로 보아도 그런 일은 가까운 장래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 아무래도 지난 몇 해는 온 나라가 판타지나 공상과학영화 속에서 살았나 보다.

 

그렇게 4월이 왔고 부활절이 됐다. 그러자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막연한 죄의식이 다시 일렁였다. ‘우리가 죽인 300여 희생자들에게’(고경일) 바친 만화 한 장, 동생의 무사귀한을 위해 놓아둔 팽목항의 운동화 한 짝, 그 사진을 슬쩍 본 기억은 영원하리라. 신나게 수학여행을 떠나서 돌아올 줄 모르는 자식을 어찌 잊으며, 더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 팽목항에서 보낸 3년의 연옥을 어찌 잊으라 하겠는가. 아침에 눈을 떠도 마음의 달력은 영원히 그날 2014년 4월 16일에 갇혀있을 그들의 삶을 그들 아닌 우리가 이해한다는 말은 감히 하지 말자.

 

‘눈을 뜨면 다시 어제 아침’이라는 모티브의 코미디-판타지 영화가 있었다. 미국영화인데, 다람쥐 비슷한 마멋이 제 그림자를 보면 다시 동면에 들어가 봄이 늦는다고, 그렇게 봄이 오는 것은 점친다는 성촉절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맨스까지 곁들인 그 영화는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자 어제 아침으로 깨어나는 악몽을 털고 내일을 맞게 된다는 해피엔딩이었지만, 팽목항은 영화가 아니었다. 아직 어둑한 새벽을 뚫고 물 밖으로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1073일, 뭍으로 올라와 안착하기까지 또 숱한 날들, 마음속에 멈춰있는 달력과 함께 정지되어버린 삶을 이승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을 잃고 느닷없이 서로 이웃이 되어 살아온 미수습자 가족들이 세월호를 맞으러 목포신항으로 옮길 차비를 하는 장면들을 보게 됐을 때의 부끄러움, 그것은 차라리 쓰라림이었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무슨 죄였을까만 그 긴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는 성소를 마련해 그들을 위로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가족들이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 길을 소형선박에 타고 뒤따른다는 뉴스에는 또 한 번 가슴을 졸여야 했다. 세월호가 오다가 맘 바꿔 다시 돌아가려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뒤에서 지키면서 달래려는 듯 조용히 뒤따른 그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감옥에서 탈출시도를 하는 것은 석방이 얼마 남지 않은 죄수들이라던 말이 생각났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늘 합리적이기만 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자식을 따라 가족을 따라 바닷물에 뛰어들고픈 자포자기의 유혹이 일면 어쩌나. 마침내 뭍에 오른 유령 배, 그 뼈다귀를 넋 없이 바라보며 영원히 자식을 가족을 삼켜버린 바다를 원망하며 이 마지막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있을 그들을, 아픔을 딛고 일어나야 하는 그 찢어진 가슴을 다독이고 싶다. 부활을 믿으세요!

 

물론 부활이나 영생은 호모 파버의 과학하는 두뇌로는 믿기 어려운 함수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는 간단하기도 하다. 우리가 부모님의 산소를 찾으면 거기 앉아서는 누구나 마음속으로 대화를 한다. 돌아내려오는 길에는 소통의 후련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살아있으면 부활이요, 영생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꽃다운 나이에 꿈에 부푼 시절에 스러진 영혼들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갑자기 나는 그간의 무작정 독서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플라톤의 프시케(Psyche)를 이제야 설핏 이해할 것 같다. 프시케는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영혼이라는 의미이며, 죽음에 의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된 이 영혼은 오히려 강한 존재가 된다. 육체를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사색이 가능해지므로, 영혼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보다 좋은 상태로 상승한다. 어쩌면 신의 영역 가까이로. 그 비슷한 이해를 이 봄에 함께 부활했을 젊은 넋들의 존재에서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담쟁이처럼 손에 손을 잡고 다 같이 함께 부활했을 너희들의 넋!

 

너희들의 넋은 이 땅에서 영원하리라. 어른들의 나태와 무능과 나아가서 오만까지를 해맑은 가슴으로 끌어안고, 세상의 온갖 나약함과 비겁함을 어루만지며, 더는 그러한 비극은 없을 것이라고 오히려 위로하면서. 너희는 아마 늘 헤매는 우리의 나침반이 되려는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4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 친구란 무엇일까?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5. 친구
2017년 04월 03일 (월) 13:18:18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요즈음 한국에서 뉴스 채널을 외면하고 살기는 면벽수도를 실행하고 있는 이가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 같다. 엄청난 뉴스들이 토네이도처럼 솟구쳐 오르니 피할 도리가 없다. 무엇보다 세월호가 올라와서다. 1073일 만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다시 한 번 텔레비전 화면에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고정시키고 있다. 제발 무사히 이제라도 무사히 오너라, 와서 비밀을 열자! 

그 사이사이 탄핵으로 파면돼 마침내 구속되기에 이른 전직 대통령 관련 소식들과 새 대통령직을 향한 열기들이 점멸한다. 무엇인가 먼저 해야 할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소심한 사람인지라, 내 머리는 아직 벌건 상처를 드러내고 있는 어제로 향한다. 세월호의 아픔과 반비례 곡선으로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또 하나 비선이라는 이름의 ‘40년 지기’ 관계가 그것이다.

 

계산하지 않았던 그 시절 친구 사이

 

친구가 뭘까. 근묵자흑이려니, 친구를 사귀려면 너보다 뭐라도 더 나은 사람을 사귀어라! 옛날 우리가 어려서 듣던 충고다. 나는 좀 괴팍했는지, 어린 심보에도 반항을 했다. 누구나 다 더 나은 친구들을 사귀고자 해 화살표가 계속 한쪽으로만 가면 어떻게 마주보며 손뼉을 치는 친구를 만나겠는가, 라고. 큐피드의 화살은 상호 조응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방통행으로 쏘아댄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예외인 셈이다.


 

   
 

한때는 피검사로 처음 알게 된 혈액형에 관심들이 많았다. A형은 돌다리도 두드리지만 답답하고, B형은 진취적이나 흔들리고, AB형은 천재형이라지만 가볍고, O형은 진중하지만 속내를 모르고…. 이 모든 멋대로 얻어들은 허튼 정보들을 가지고서 모이고 흩어지고를 되풀이하곤 했다. 물론 그 시절 우정에도 요즈음 말로 썸타기와 밀당이 있었다.

마음이 가는 친구 앞에서 부러 토라지거나, 며칠간 말도 걸지 않는다. 주의를 끌려는, 유치하지만 애교 있는 행동들이었다.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친구 사이 유불리를 따지는 계산들은 없었다.

 

친구라고 하면 가슴 아프게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떠오른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런던과 파리를 오가면서 서술된 다른 명문들은 차치하고,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대신해 목숨을 내던진다는 뭉클한 이야기였다.

 

프랑스 귀족 청년 다네이는 폭풍의 파리를 떠나 이제는 루시와 결혼한 몸으로 런던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운명적으로 다시 파리의 감옥에 갇힌다. 루시를 혼자서 흠모하던 영국인 변호사가 그녀를 위해 다네이를 구출해 내고자 파리로 간다. 그는 마침 닮은 몸을 빌미로 죄수와 자신을 바꿔치기에 성공한다. 다네이는 술에 떡이 된 채로 감옥 밖에서 정신을 차린다. 친구 일행의 무사 탈출을 확인하면서 단두대에 설 수 있는 용기와 사랑, 그 비장감에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고등학생이 소화하기에는 벅찬 내용이었지만, 작은 도서관에는 책들이 많지 않았고, 소설책들은 무턱대고 읽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이 봄까지 우리의 일상을 앗아가다시피 한 저 두 사람(박근혜·최순실) 40년 지기는 어떤 사이일까. 그들의 엄청난 계획과 추진력과 성과물(?)들을 보면 팀워크가 아주 빼어난 공동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의 적법성이 문제가 되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러 ‘시녀 같은’ 사람이라 규정했으니, 자신은 여왕이라는 전제였을까. 그 말처럼 단순하게 여왕과 시녀 사이인지, 실은 시녀 역이 제작 감독하고 여왕 역은 다만 주연을 맡은 연극인지 누가 알랴. 어떻게도 이해가 되지 않은 끈적끈적한 관계다. 오죽하면 ‘피보다 진한 물’이라고 표현됐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관계 자체를 넘어서 재판에 임하는 태도다. ‘시녀 같은’ 사람은 무례하다시피 항변하면서 자신과 여왕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여왕은 시치미를 떼고서 시녀에게 그 모든 잘못의 책임을 미루는 분위기다. 물론 일심동체란 말은 부부사이에도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하물며 여왕과 시녀 사이에야. 하긴 또 어딘가에 복병이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돈과 몸을 가진, 그러니까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머리도 체력도 우수한 그들이다. 일단 여왕역이 살아남아서 곧 다시 권력을 쥐고, 곧 시녀역을 구한다는 시나리오일까? 시녀께서 그 동안 쓴 시나리오는 상상을 절하니까, 다음 속편을 누가 짐작하랴. 

 

재미없다. 여왕이 스스로 내뱉은 단어라서 사용해보았지만, ‘시녀’ 버전은 여왕의 비인간성마저 드러내는 마중물에 가깝다. 공공의 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어렵다 못해 위험한 과제다.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이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가 돼 애꿎은 개구리를 맞추지나 않을까 사려야 한다. 탄핵 전후로 멀쩡한 학벌에 빛나는 지위에 있지만 골 빈 사람들이 내뱉는 사극 버전들은 또 어떻게 이해할까. 세상을 통째로 이해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괴롭다.

 

손상된 자아가 잉태한 비극

 

원론적으로 회의가 든다. 친구란 무엇인가. 진정한 친구에게라면 내 생각을 지배하게 내버려둘 수 있는가. 아니, 친구란 그저 함께 걷는 동행일 뿐이다. 함께 걸어서 좋은 동행이다. 오늘 이 순간을 늘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좋은 동행을 만나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는 않기에 행운이라 부르고 싶다. 

 

다만 자본집중이 가속화되는 이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맺는 관계는 우리가 어려서 철없이 지냈던, 유불리를 모르던 시절만 못하게 됐다. 마르틴 부버는 그것을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로 구분했는데, 친구를 ‘그것’ 즉 객체화한 이용가치로서 대한다면 진정한 인격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멀어질 따름이다. 

 

우리가 부지중에 바라게 되는 지고지순의 친구, 염화시중의 관계라 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완전한 평등을 전제로 해야 하리라. 진정한 ‘나와 너’의 관계란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건 지배 또는 의존관계가 시작되면 자아는 손상을 입게 되고, 손상된 자아는 비극을 잉태한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이 작은 개념, 형체도 없는 것 하나, 왜소한 자아를 유지하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비록 세상살이에 거치적거리더라도 그것만큼은 내어줄 수 없는 마지막의 것, 자아를. 하여 두 건강한 자아가 만나진다면, 비로소 그때 서로를 친구라 부를 수 있으리라.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타인들의 존재를 믿는 첫걸음이 되리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7. 7. 5. 02:14

 

 

“서로에게 ‘사과’ 를 한 알 내밀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4. 사과 같은 사과
2017년 03월 20일 (월) 11:22:50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editor@kyosu.net

 

겨울을 지나 봄을 맞는 일은 늘 어렵다. 새싹이 돋으려면 얼마나 무진 애를 써서 무거운 흙의 틈새를, 마른 가지의 껍질을 뚫어야 하는지.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우리에게 허가해 준 봄날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그 일’을 보도했고 또 알고서 분노했던 많은 국민들을 엄벌하고 말았을 것을, 이번에는 ‘그 일’을 책임져야 할 주역이 파면됐다. 

당위성이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냈음이다. 물론 국론의 양분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100명 중 92명이 정당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절대다수가 극소수를 폄하할 수도 없다. 생뚱맞은 말 같지만, 우리 서로에게 사과를 한 알 내밀자! 

 

 

아버지가 사다주신 紅玉

   
 


 

말장난도 가끔은 쓸모가 있다. 사과를 해야 마땅하지만 어색할 때, 상큼한 사과를 내민다는 것이다. 나도 실제로 사과로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 지난 신록의 계절 5월 끝자락에 사소한 일로 선배에게 밴댕이 속을 내비쳤었던 일이 있었는데, 평소에 친밀감을 느끼던 사이라서 가슴 아팠다. 그래 놓고 연말을 맞으니 해묵힐 일은 아니다 싶어졌다. 심성 넉넉한 친구가 선배와의 만남을 주선했을 때 슬쩍 사과상자를 들고 찾아갔다. 명절 돌아오니까요…… 우물쭈물…… 지난 일에 관해서는 한마디 없는 채로 끊어졌던 연줄이 이어졌다. 사과는, 사과의 효력이란 신기하다.

 

하고많은 과일들 중에서도 보통 사과를 으뜸으로 친다. 사과가 제일 맛있었던 기억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늦은 저녁에 사 들고 오시는 빨간 홍옥의 맛이었다. 할머니가 대청에 쌓아둔 국광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큼한 빨간 사과를 베어 물고서, 상기된 우리는 백설공주가 깨문 사과에 독이 빨간 쪽 푸른 쪽 어디에 숨겨졌을까 서로 우기며 재잘거렸다.


한번은 아버지가 제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사과를 쏘아 맞춰야 하는 벌을 받은 명사수 이야기도 함께 해주셨다. 우리는 오들오들 떨면서 귀를 기울였는데, 대부분의 옛날이야기가 그렇듯 해피엔딩이었다. 명사수는 한 치의 착오 없이 사과를 쏘았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감춰둔 두 번째 화살로 결국 폭군을 끌어내린다는 줄거리였다. 다 자라서야 독일문학의 고전기 프리드리히 실러가 쓴 『빌헬름 텔』에서 그것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 스위스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임을 알게 되었다. 전설에서도 압제자는 결국 내려온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역사에 태초부터 사과가 등장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 있으랴. 금기의 사과를 따먹은 인간이 신에 버금가는 지혜를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이브의 덕이다.


먼 옛날 트로이 전쟁도 황금사과 한 알이 시작이었다. 브레드가 <만일 If>에서 노래하는 ‘수천의 배를 진수시킬 수 있는 얼굴’은 파리스 왕자가 황금사과 한 알로 얻은 헬레나이자, 그녀가 불러들인 그리스 연합함대를 말한다. 사과는 그리스로마신화의 단골 메뉴다. 달리기의 명수 아탈란테 이야기의 전환점도 사과다. 아름다운 이 처녀를 얻고자 달리기시합에 참가한 많은 청년들이 죽어나가자 마침내 심판 멜라니온(또는 히포마네스)가 직접 시합에 나섰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서 받은 사과들을 던지며 그때마다 흠칫 흠칫 머뭇거리던 아탈란테를 겨우 이겼다고 하니까.

 

그렇게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사과는 과일의 중심이었다.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심겠다는 나무가 사과나무였다. 왜 하필 사과나무였을까. 이 무한 긍정, 삶은 다만 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인식은 합리적 이성의 방식이다. 그뿐인가. 뉴턴의 사과 한 알은 만유인력에 대한 깨달음을 선물하지 않았는가. 사과의 덕택으로 지혜를 얻었던 호모 사피엔스는 멍청한 감성으로 전쟁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이성에 더해 첨예한 과학을 하는 뇌까지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태초에 사과 이야기는 없는 듯하다. 자생하는 능금에 관한 이야기가 ‘계림유사’(1103년)에 등장하며, 조선에 이르러서는 종묘제사용으로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본격적으로는 광무10년(1906년)에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설치하고 여러 나라에서 과수의 품종들을 도입할 때 사과나무도 들어왔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1978년에는 대덕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정원에 바로 그 영국에 있던 ‘뉴턴의 사과나무’ 3대손이 이식되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뉴턴이 그 아래에서 명상을 했다던 ‘사과가 떨어진 나무’는 표지를 세워놓았지만 애석하게도 죽어버렸는데, 덜 죽은 곁가지 하나가 과수연구소로 보내져 생명을 회복했고, 후손들이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는 중에 그예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옛날엔, 내가 어렸던 시절엔, 사과는 달걀꾸러미 또는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토종닭 한 마리와 함께 정을 나누는 선물의 대명사였다. 지금은 퍼덕거리는 닭을 보자기에 싸 들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짚으로 엮은 달걀꾸러미도 사라졌지만, 사과는 여전히 제수용 배와 더불어 명절 선물로 꼽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과궤짝이 더러운 지폐의 이동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치 흑역사의 상징적 장면이었던 2002년 대선의 ‘차떼기 사건’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무려 150억 원이 숨겨진 사과상자들이 트럭째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OO당에게 전달된 장면은 첩보영화에서나 봄 직한 장면이었다.

 

모든 오명과 변칙에도 불구하고 사과는 상큼하고 맛있는 과일의 으뜸이다. 게다가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사과 한 알로 가능하니 얼마나 유용한가. 스스로 잘못이 느껴질 때도 사과를 한입 베어 물자. 이 봄에도 어김없이 사과 꽃들이 필 것이다. 사시사철 신선도를 유지한 사과를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대다수 국민들의 뜻과 헌법재판소의 법이 일치하는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5. 02:13

 

 

다른 사람의 죽음

-페트라 켈리를 기억하기 위해서 -

 

효주 전 의원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뉴스속보가 방송마다 떴다. 3월 중순, 20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이라는 화두가 온 나라를 삼키고 있던 때였다. 날마다 사건사고이지만 그래도 큰 건에 속했나 보다. 온 나라는 잠시 연효주라는 이름 석 자를 불쏘시개로 하여 뜨거운 가마솥 같은 열기와 연기에 휩싸였다.

혼자서? - 그럼 혼자서지, 독신인데.

아무도 없었을라고? 케미라도! - 아무도 없었대.

그래도 죽을 이유가 없으……. 아서.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4월 들어 본격적으로 선거가 다가오면서는 선거증후군치고도 상상을 절한, 시쳇말로 멘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날마다 더 지독한 단어들이 황사와 미세먼지에 섞여서 뱃속으로 침투되고 있었다. 엉뚱한 문자가 날아들었다.

한금실, 갑작스레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통화하자. 여고, 손경화.

우리 의원님이었어,

그 비보.

늦은 밤이었다. 깨어있어서 바로 들여다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우리 의원님이라니? 이름을 쓰고 나서 덧대어 쓴 것으로 보아 의미심장한 내용 같았다. 가만, 의원님이라면…… 설마 저 뉴스에 나왔던?

 

손경화를 생각해 보았다. 상냥함에 예쁘기까지 한 경화는 아나운서가 되겠다며 신방과를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반이었지만, 서로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경화가 웬일로 나를?

아니, 언젠가 꿈에서 내가 국회위원 보좌관일 때, 그것도 남자일 때, 딱 한번 경화를 만났다. 나는 우습게도 급한 연설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는데, 늘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옆방의 보좌관이 날 불러 세웠다. 소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보니 그 애가 바로 경화였다. 실제로 보좌관이 된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특별히 정치적 야심 때문이 아니라 집안의 배려로 의원실에 발탁되었다고들 했다. 느닷없이 꿈속에서 ‘금실아’ 하고 나타나더니, 또 느닷없이 현실에서 문자를?

어처구니없다. 경화가 내려오겠다고 했다. 우리대학의 김경래 교수를 만나러 오는데, 나더러 함께 가자는 부탁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연약했던 본성이 나오는가, 국회의원 보좌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행보이지만 약속을 했다. 전달할 물건이 있는데……, 경화의 말이었다.

 

김경래 교수는 현직이 아닌 명예교수였다. 과실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느닷없는 내 전화에도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연효주 의원님 돕던 제 친구가 교수님을 찾아뵙고 전할 것이……’라고 할 때도 크게 동하지 않았다. 다만 약속 당일에 시간이 임박해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오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나더러 이왕 다리가 되었으니 전할 물건만 받아 두라고, 다음에 연락하겠다고만 했다. 난감했다.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경화가 들고 온 것은 연의원의 아이패드였다. 김 교수님 앞으로 남겨진 아이패드. 그것을 가져온 경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놓고 가는 일이 중요했다. 유품보관소도 아닌 내 좁은 원룸에서 헝겊 가방에 덮인 그 아이패드는 죽은 듯 며칠을 그러고 있었다.

과실 강사용 우편함에 한금실 선생 앞이라고 쓰인, 작고 두꺼운 샛노란 봉투에 비뚤한 부피감이 있는 우편물이 있었다. 봉투를 열자 학교 사진이 들어있는 옛날 그림엽서가 나왔다.

최근의 현실을 맞닥뜨리기에는 뇌도 마음도 상했소. 이 또한 그 물건과 함께 있어야할 것이라서 보냅니다. 비겁하게 도망친 나를 찾는 대신 모두를 열어보아도 좋소. 그 다음은 알아서 하시오.

 

유에스비가 함께 있었다. 난생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물건을 받다니. 해골이 흔들릴 일이다. 조만간 그에게 전해져야 할 물건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그에게서 내게 무엇이 오다니. 생판 남의 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도 해와 달은 운행을 쉬지 않았고, 어김없이 선거일이 닥쳤다. 필연도 이변도 뒤범벅으로 새 판이 짜였다. 사람들이 한국이 어찌 되건, 지구는 아픔의 고통을 모르는 듯 했다. 아이패드와 유에스비가 나란히 놓인 책상 한쪽에 신경이 쓰여서 요새는 강의 준비에도 집중이 흩어졌다. 치워놓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마땅히 분류해서 치울 카테고리가 없다. 연효주를 검색해보았더니, 어디나 벌써 1964-2016이라고 고인 취급이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된다고만 간단히 실려 있다. 김경래 교수도 찾아보았다. 1943년 생, 미국 워싱턴대학 박사학위, 그 뒤 굴곡지긴 했지만 경제학과 교수직을 정년까지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어찌된 것일까? 두 사람은 지인이기 보다는 부녀 쪽에 더 가까울 정도로 다른 세대에 속했다. 어떤 자석의 힘이 두 물건을 이 책상으로 끌어당겼을까. 호기심이 인간의 저열한 특성인 것을 모르진 않지만, 나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우선 하나라도 열어보는 일이었다. 간단한 유에스비가 먼저였다.

무의식적으로 예상했던 대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거의 연대기 형식이었다.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을 하면서 정리를 하기로 했다. 정독을 해야 그 다음 행동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경래는 태평양전쟁의 틈에 태어나 해방 후 유년기를 거쳤다. 받아 마땅한 애정을 받을 길 없이 자라기는 동년배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해방 후 뒤숭숭한 정치와 한국전쟁을 다 몸으로 부대끼면서 통과했고, 게다가 그때는 드물지 않았던 소아마비를 앓아 가볍게 다리를 전다. 운동성이 떨어진 사람들이 그러듯 책을 가까이 했고, 성적은 늘 우수했다. 장학제도는 인색했지만 최소한의 영재들에게는 기회가 있었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학비 걱정은 없었다. 집안도 극빈한 상황은 아니라서 병신치고는 훌륭하게 자랐다. 물론 장애는 늘 장애였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그가 혐오하는 군대를 면케 해주는 깜짝 귀여운 역할을 해냈다. 그가 군대를 혐오하게 된 것은 부실한 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공부를 제대로 하다보면 사람은 반전주의자가 되기 십상인 모양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장학금으로 워싱턴에 입성했다. 세상은 책 속의 간접 경험으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넓고 다양했다. 1966년은 학생의 해였다. 페트라 켈리를 만났다. 입학도 전에 벌써 ‘우리 세대는 달라’라는 시를 써서 유명해져 있었다. ‘이번 세기 숱한 전쟁을 일으킨 모든 세력들 / 그러나 아무리 극성스런 악의 세력도 / 사랑의 힘만은 꺾을 수 없어 / 그 놀라운 힘 우리 안에서 / 66학번 우리 친구들의 힘이 되어 / 세상 밝히는 빛이 되리라.’

글짓기나 웅변대회를 휩쓸 정도였다는 이 유명한 여자는 놀랍게도 미국 태생이 아니었다. 전후 독일에서 태어난 페트라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 아버지를 만났다. 그가 본국으로 전근되었을 때, 페트라는 열 살 남짓 나이로 모국어를 떠나 영어로 살게 되었다.

외롭게 느끼면 더욱 열심히 하게 되는 거야……. 그는 자신의 이야기인지 그녀의 이야기인지 구분 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김경래가 유학 시절에 받은 가장 큰 충격은 행동하는 세대들의 태동을 몸으로 목격한 것이었다. ‘우리 흑인이 자유를 갈망한다고 해서 증오의 잔으로 자유를 마실 수는 없다.’고 했던 킹 목사를 눈으로 보았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타는가 했더니 곧 이어 암살당했고, 애도가 폭동으로 변질될 지경인 것을 가까이서 체감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 몇 번씩 투옥되고 집은 불타고 또 불타고…… 그런 박해를 겪고도 말하다니. ‘주님을 믿을 때 고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내 개인적인 불행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킹 목사가 암살되기 2주 전 집회에서 했던 말을 그는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 우리의 투쟁은 진짜 평등을, 그러니까 경제적 평등을 위한 것입니다. 점심을 통합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햄버거를 살 돈이 충분하지 않은데 통합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득이 됩니까?’

그래 진짜 평등은 경제적 평등이야.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금의환향의 시절, 그는 실은 귀국 예정에서 조금 뒤쳐졌다. 국내에서 받아서 나갔던 장학금은 끊겼지만, 미국은 잘 비비면 비빌 구석이 있었다. 그 당시 남한은 약체 신생국으로 간주되어서 보호의 대상이라는 분위기였다. 친절과 동정 사이 애매한 관심을 받는 미미한 나라의 미미한 학생은 조용히 공부에 매진했다. 페트라 같은 엄청난 에너지에 감격했지만, 어찌 보면 페트라를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그녀는 국제정치학, 그는 경제학으로 전공도 달랐다. 다만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은 미국에 간 뒤에야 터득했는데, 그것이 그녀의 영향이었는지, 공부의 지향점과 맞아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두 사람 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떠났고, 그리고는 실은 그녀를 잊었다.

 

페트라 켈리가 그의 뇌리 속에 되살아 난 것은 1980년 초였다. 독일 녹색당이 창당되고 대변인으로 우뚝 선 페트라가 뉴스의 중심에 섰다. 그렇구나, 여자가 독하게 일어서는구나……. 그때부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독일의 녹색당과 페트라 켈리를 뉴스의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다.

그해 한국은 봄부터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시위로 시작하더니, 오월 광주의 엄청난 민중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변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항쟁은 피로 좌절되었고,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진 하 세월이 걸렸다. 여름이 되면서 연좌제는 폐지한다면서 삼청교육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몰려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판이 시작되는 것과 거의 맞물려 대통령은 오월항쟁 등의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숨도 쉴 틈 없이 새로운 대통령이 등극했다. 그제야 100일 넘게 문을 닫았던 대학의 휴교령이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면 대학이 문을 닫은 동안 엄청난 일들이 있었다. 그 세월을 우리는 그저 가만히 살고 있었다.

가만히, 다들 가만히 살았다.

광주 오월 비극의 그해 8월 초,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의 사태에 대해 뒷북치는 입장을 밝혔다. 누구라도 한국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한국의 안보가 유지된다면 이를 한국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특히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복종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진단까지 내렸다. 그의 말에 분노했지만, 그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뜬구름이었다. 장군이 군복을 벗더니만 대통령이 되는 나라였다. 80년 5월 17일의 계엄령은 8월 27에 새 대통령을 낳는 웅대한 막으로 대단원을 장식했다. 석 달 열흘이면 세상이 평정된다. 어쩌면 순진한 광주가 어딘가 타깃이 필요한 작전에 스스로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도 없는 채로. 그렇게 통곡하는 광주는 도처에서 다시 통증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김 교수의 말로 정리를 해야겠다, 내가 왜곡하느니.

1983년 그때 연효주는 새내기 대학생이었다. 내가 지도교수를 맡은 학생인데, 한 학기를 채 마치지 않고서 돌연 자퇴를 상담하러 왔던 그녀를 기억한다. 경영대는 자신과는 너무 맞지 않다고, 경제면의 기사들을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마인드로 어떻게 전공책을 읽느냐고.

무슨 책을 못 읽는다고……?

『경영학적 OO의 틀』, 교수님이 기본 필독서라 하셨잖아요.

김교수로서는 자신보다 한발 앞서 도미해서 유펜에서 학위를 한 S대 O교수의 책을 신입생들에게 추천했다. 당시 미국은 가히 경영의 시대라는 화두가 각광이었다. 변호사나 정부관리가 유망 직종이었다가 70년대를 거쳐 기업경영의 시대가 되면서 경영학 석사과정이 최고의 주류를 이루었다. 미국 따라쟁이 우리 유학생들도 그런 분위기였다. O교수도 원래 독문학 전공이었다. 그렇게 다른 전공에서 경영학 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경영학과에 여학생들은 여전히 적었다. 그런데 똘똘해 보이던 여학생 하나가 시작서부터 이제 그만 두겠단다.

 

그 여학생이 재수 끝에 서울 소재 모 대학에 합격했다고 인사를 왔다.

하필 독문학을?

예. 독문학에서 출발해서 경영학자로 대성하신 분이 있으면, 경영학 시도하다가 독문학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하죠.

참 청개구리 심보네요.

그런 것만은 아녜요. 교수님은 우리가 입학하자마자 왜 독일 녹색당의 페트라 켈리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그 봄, 지지율 겨우 5.5%로 독일연방의회에 의석 27석을 확보해낸 젊은 여성이, 유학 시절에 워싱턴에서 만났던 여학생이 독일 사회를 흔들어 놓고 있다고. 이런 비슷한 말 기억하세요? 저는 다 외우는데요! 귀농을 꿈꾸는 자연주의자, 반체제 철학자, 젊은 무정부주의자, 고집스런 동물애호가, 마당을 잘 가꾸는 할머니로 구성돼 있는 오합지졸 국회의원들 이야기를.

그랬었나요, 내가?

그런 다음에도 연은 - 성만 불러야겠다 - 계속 연락을 해왔다. 방학에 고향에 내려오면 연구실에 자주 들렀다. 이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연의 고향 사람들은 북대보다는 이쪽으로 진학을 많이 했다. 그래서 처음에 우리대학에 진학했었던 것이고. 페트라 켈리의 근황에 대해서도 묻곤 했다. 연이 독일을 기억하는 코드는 오직 페트라 켈리였다. 동독의 수반 에리히 호네커가 그들을 대화에 초청한 내막이며, 녹색당은 나토의 결정에도 반대할 수 있는 정당이라고도. 의회 내 중점 사업은 평화정책, 인권 그리고 소수민족에 관한 것들이라고도 말해줬다. 돌이켜보면 나는 결국 연의 대화에 이끌려가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 역시 역사의 한 부분을 제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1985년이었다. 오월만 되면 대학생들은 광주의 오월을 실감했다. 그때는 ‘삼민투’가 결성된 직후였다. ‘민추위’ 산하 ‘민주화투쟁위원회’ 계열과 ‘주도세력’ 계열의 절충으로서 반쯤은 공개적인 투쟁조직이었다. 그들의 주도로 서울에서 70여명의 학생들이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광주에서는 80년 당시에 이미, 그러니까 그해 마지막 가는 12월에 벌써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고, 이태 뒤 부산에서는 사망사고까지 부른 방화사건이 크게 터졌었다. 무고한 한 학생이 연기 질식으로 사망했고, 주동자들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니 엄청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5개 대학 삼민투 위원장 중에 연의 고향 동기가 있었다. 고향 동기는 금서가 된 독일어 책 부분 복사물을 들고 그녀를 찾곤 했다. 독일어를 아는 건 당시 ‘금서’를 읽는 큰 장점이었다. 다른 대학의 삼민투 위원장들도 만나게 되었다. 미국문화원 농성 사건 뒤 체포된 73명 중 몇몇 사람은 연에게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건너서 언뜻 스치거나 했던 존경스런 인물 중에는 앞선 방화사건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아 복역 중인 놀라운 선배들도 있었다. 막연히 그녀의 가슴 속에 살기 시작한 누군가도 거기 있었단다.

연이 한 번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그 누군가’는 타 대학의 삼민투 위원장이었고, 당연히 구속되었다. 구속자 가족이 이루어낸 민가협에서 활동하는 그의 부친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더란다. 대개는 어머니들인 단체에서 혼자만 아버지여서 혹시 어머니가 안 계신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고. 물론 생각뿐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간헐적으로 내게 쏟아내는 연에게는 더는 가까운 사람이 없었을까. 젊은 그녀에게 설마 했지만 그래 보였다. 연은 미국문화원 안에 들어간 73명 속에도, 후에 수배당하거나 구속된 속에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한 지근거리에서 삼민투의 투쟁방식을 지켜보았다.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 그 어느 것도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통한의 아픔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이 흘렀다. 연은 졸업을 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막상 독일에서는 독문학 전공이외에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해서 조금은 놀랐다. 이메일이 가능해진 때였고, 가끔 씩 소식들이 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페트라의 소식을 먼저 알려주었다.

근년에는 티베트 문제에 개입해서, 독일 의회에서 티베트 문제가 언급되도록 했더군요.

그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들의 생명보호에까지 관심을 가졌더라고요.

녹색당 선거구호 들어보실래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 또한 보호할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인식한다……’ 어쩌고.

이번엔 ‘사회적 보호연맹’이란 것을 만들어 창립의장이 되었는데, 어째 녹색당과는 오히려 삐걱거린다네요. 현저히 영향력도 상실하고.

<12시 5분전>이라는 환경보호 시리즈를 낼 것이라고 하네요.

맙소사, 비보예요, 들으셨지요? 이 가을 시신으로 발견된 페트라 켈리, 게다가 추정하건대 사후 이삼주 후에야 발견되었다니요!

그랬다. 페트라 켈리가 ‘돌연’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1992년 가을이었다. 독일 신문 방송에서도 열 띤 보도들이 있었다. 총성에 얽힌 추측성 기사들도 난무했다. 자살, 타살과 자살, 타살…… 음모론까지 잠시 혼선이었다.

 

연은 자초지종 기사를 요약해서, 더러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이후 페트라의 일생 전체를 요약해서 알려왔다.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못하고 내버려 뒀다.

워싱턴의 미국 사람 - 그때는 그랬다 - 페트라는 우선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유럽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1972년부터 10여 년간 브뤼셀의 유럽공동체에서 일했다. 유럽공동체 경제사회위원회 행정사무관. 그러면서 독일 사민당 당원이었다. 1979년에는 사민당 슈미트 총리에게 공개서한을 쓰고 탈퇴했다니 거창했다. ‘다른 형식의 정치적 대표’를 모색하겠노라고, 생의 보호와 평화만이 우선이 아니라 남녀평등권의 원칙이 중요한 그런 단체를.

유럽공동체 본부가 있는 베를레몽 건물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세상은 남성의 것이라는 편견뿐이었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던 여성해방운동의 기치를 뼈저리게 느끼고 실천하려 했던 일벌레의 눈은 만족하지 못 했다. 성공한 여성은 남성의 배려(?)의 결과일 뿐, 양념처럼 빛나는 존재일 뿐, 핵심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너무 재미있어, 하인리히 뵐 등이 함께 했다는 유럽의회 진출을 모색하던 당시 그 이름말이다. ‘여타 정치연합 녹색’ 그게 뭔가. 그녀가 의미하는 ‘정당 반대당’ 바로 그것이었다니. 그녀 자신 앞으로 가지게 될 정치적 영향력을 상상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은 시비꾼, 잘해야 시민운동가쯤이라고 느꼈다는 그녀.

 

하지만 주변에서 볼 때는 처음부터 스타 이미지를 가졌다. 요제프 보이스나, 대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 등 눈부신 인물들과 나란히. 27명의 ‘여타 정치연합’으로서 출발했던 녹색당의 결과물은 다시 말해도 찬란한 성과였다. 생태주의와 사회적 책임, 풀뿌리민주주의와 비폭력에 관심을 집중한 녹색당은 시민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원자력발전소 건립반대에 그녀가 그토록 열심이었던 것은 어린 여동생의 암 발병과 죽음의 원인을 거기서 봤다는 개인적 경험도 크게 작용했었다. 여동생의 아버지인 미군장교는 일본의 원폭 투하 때 일본에 주둔했었다고.

연은 잔뜩 써 보냈다.

 

소설 같은 사생활도 기사화되어요. 보세요!

1947년, 전후 독일의 절대빈곤기에 태어난 페트라 카린 레만의 ‘새 생활’은 곤곤했다. 아버지 레만은 동독출신 나치병사로 바이에른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그곳에 정착했지만 일찍 집을 떠났다. 어머니와 함께 새아버지 미군 중령 존 E. 켈리를 따라 1960년에 미국으로 갔다. 그래서 켈리다.

워싱턴 대학 재학시절엔 교수님도 만났다 하셨잖아요. 교수님 말씀과 똑 같아요. 페트라 켈리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활동들, 그리고 죽음, 그의 비폭력 원칙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요. 독일의 현대사와 전쟁의 잔혹함을 깊게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고. 여기까진 교수님이 가끔 말씀해 주셨던 이야기죠. 그리고는 교수님이 말해주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아예 사생활. 유럽공동체의 행정사무관으로 일할 때 위원장이었던 그는 페트라로서는 ‘세 번째 아버지’같은 연인이었다고. 그와는 석 달 열흘을 못 간 것이, 40살 가까운 나이 차이 보다 사고의 낙차가 컸을 것이라고. 비효율적 농민을 이농하도록 권유한 ‘농업 1980’을 기획해낸 장본이었으니까. ‘네 번째 아버지’ 같았다는 연인인 20세 연상의 운송노조 위원장에게서는 아이를 갖는 특별한 경험을 했지만 헛일이었다. 가톨릭교도이자 아일랜드인인 그로서 이혼은 상상 불가였고, 설상가상으로 페트라의 건강도 심각했다. 의사는 중절을 권고했고, ‘매우 고통스러웠던’ 그 일로 모든 것은 끝났다.

 

마지막 동반자이자 ‘마지막 아버지’였다고 하는 G.장군과의 십여 년은 그녀의 일생 전부였다. 24년간 서독의 연방군 복무로 기갑사단 사령관이었던 그는 1979년 나토의 퍼싱II 유럽배치 계획과 관련하여 180도 방향을 바꾸어 재무장 반대로 돌아섰다. 1980년에는 재무장 반대와 평화를 요청하는 크레스펠트 선언문을 기초했고, 일 년 뒤 이백만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모스크바의 돈을 받았다거나 동독의 사주를 받았다고, 그렇게 간주되거나 모함되었다. 몇 번의 연좌데모 때마다 벌금형도 받았다. 전향한 장군과 생래적인 이상주의자의 결합은 스물 네 살의 나이를 뛰어넘어 눈부시게 출발했다. 때늦게 정치에 뛰어든 노장군에게 페트라는 ‘반은 수호천사요 반은 맹도견’이라 불렸다. 그렇게 무기 없는 평화를 외쳐대는 그들이 1983년에는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상상이 간다. 연방의회 중에 뜨개질하고 있는 녹색당 의원 사진이 뉴스에 나왔었지. 구겨진 바지로 자전거 출근은 기본, 후훗. 녹색당 초창기엔 퇴역 장군의 정치적 무게도 컸고 켈리의 녹색당 창립자로서의 이미지도 대단했지. 왜 노선 투쟁에서 영향력을 상실해갔을지. 하긴, 이상주의자가 이해하는 녹색당은 사상을 내놓더라도 권력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 여전히 원외야당의 성격을 고수하고 있었으니 정치에선 안 통했겠지. 녹색당은 정당이 되어갔고, 켈리는 녹색 이상으로 남은 거야.

 

티베트 까지 걱정, 아니 세상 전체를 개혁하려고 사방에 부딪혀갔지요. 산더미 같은 일 속에 살아가니까 주위의 걱정을 들었나 봐요.

‘사람들의 곤경과 자신을 선을 그을 필터가 결여되었지요.’

‘병참술도 없이 세계정치를 했지요.’

이상하죠, 통일의 열매는 사민당이 아닌 기민당의 것이네요, 참.

통일이후 총선에서는 녹색당이 오히려 참패했어요.

페트라 켈리는 지고한 요청과 엄격한 도덕으로, 체르노빌, 소아암 ……끝없는 테마에 매진했네요. 세상은 그들을 잊어가기 시작하는데.

그러다가요, 갑자기. 갑자기 그렇게.

 

 

다음 다음해 연이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는 담담하게 페트라 켈리를 일축했다. 모교에서 시간을 얻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한참을 빈둥대고 있었다. 내게 와서 하는 말로 미루어, 옛 동아리 사람들을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막상 정치 일선에…….

그들 중 마음을 보냈었다고 나중에 살짝 흘린, ‘그 누군가’를 여전히 멍하니 보는 느낌이었다.

일단 조치원 캠퍼스에 강의는 얻었어요. 학위하고 온 사람들 줄줄이 밀려 있어서 겨우…….

90년대 중반은 박사들 정체가 폭죽처럼 불어난 때였고, 인문학 특히 문학은 학생 정원의 축소로 신규전임에 임용되는 기회가 극히 줄고 있었다. 결혼은 충격적으로 멈칫하고 나더니 잊은 듯 했다. 해라, 안 한다, 그 일로 어머니와 심각한 지경에 갔었다 했다. 오히려 15대, 16대 총선을 치르는 동안 직접은 아니나 ‘그 누군가’를 지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에서, 그 다음엔 고향에서 무소속을 고집하던 ‘그 누군가’는 계속 고배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상대는 여당에서 고위직을 지낸 노장이었으니 고배를 마실밖에. 정당까지 바꾸어가면서 계속 당선되는 상대를 어쩌랴.

교수님, 이건 좀 너무 심한 경우 아녜요? 이 당에서 장관하고 국회의원하고, 대통령 바뀌니까 또 당 바꾸어서 국회의원 하고.

정치 현실에 ‘너무’ 라는 게 어디 있기나 하던가?

 

 

세월은 또 흘렀다. 세기가 바뀌었다.

연은 십년이 넘어도 ‘시간’ 꼬리를 떼지 못 했다.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비례대표에 넣으시겠다고요!

뭐, 비례대표라?

예, 저를 18대에. 아버지가 이루지 못하신 꿈이고, 다른 형제가 없으니까. 또 어머니가 아프셔요. 가업은 사촌 오빠에게 일임했고요. 제 미래를 보증해놓고 나서야 편히……. 결혼하는 걸 기다리느니 그것이 더 빠르겠다고! 마침 정치학도 부전공으로 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그렇게 그녀는 의원이 되었다. 마흔 다섯이었다. 상향공천을 시도하는 정당이라고 했지만 예외란 늘 있는 법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 무리수였을 외동딸 의원 만들기에 성공하시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말 그대로 혼자가 되었다. 그때도 그녀의 ‘그 사람’은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아니, 지방방단체장 선거에서까지 낙선한 후유증으로 아예 총선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했다.

나와 급격히 가까워진 시기는 바로 그 시기였다. 대화 상대가 그만큼 더 절실할 때였는가 보다. 물론 젊은 시절 소위 운동권에서 만났던 선후배들과도 다시 국회에서 또는 외부에서 접촉이 잦아졌겠지. 이상하게 통증을 호소하곤 했다. 삼민투 투쟁 선봉의 몇 사람이 전향하는 과정에서 연은 많이 놀라워했다. 서울 미국문화원 농성 사건뿐 아니라 부산문화원 방화사건 주동자들 중에서도 180도에 가까운 전향을 보일 때, 연은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녀가 존경스럽다고 여겼던 사람들, 제 몸을 던져 이웃을 민족을 위해 변화에 목숨 걸었던 사람들이 변할 때의 어리둥절함을 또래들에게는 토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아시잖아요. 그 선배는 ‘민족을 학살하고 그 피 위에 선 정권이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 할 수 있냐’고 항변하며 사형선고를 받았죠. 어떻게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그 신문을 대변하는 양 기사를 써요? 심지어 그 대통령후보를 지지할 수가 있는 거예요?

사형선고까지 당해 봤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연의원. 대한민국이 자유국가임을 명증하는 또 다른 사건이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의식을 바꿀 수도 있고 그것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좋은 나라.

연의원은 예상과 다르게 국방위원회에 들어갔다. ‘그 누군가’를 대신하는 심정인지도 몰랐다. 알고 보니 모두가 기피하는 곳이라고도 했다. 다음 지역구 출마와 연계가 멀어서 그렇다고도 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가. 연 의원은 군복무 가산점제도를 들고서 내게 열변을 토한 적이 있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군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 복무 년 수만큼 혜택이든 가산점이든 너무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겨우 동등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여대 졸업생들과 장애 남성의 헌법소원으로 위헌 판결이 나왔지만, 현실을 보라는 것이었다. 누구는 말 그대로 청춘을 나라를 위해 저당 잡혔는데, 몸과 맘을 위험스레. 누구는 부자 모두가 병역기피를 하고도 떳떳한 나라꼴이라뇨.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에 이어 ‘사람의 아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로 나뉜 팔자타령이 몇 십 년이 가도 그대로인거예요.

 

그러던 연이 돌연 번아웃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번아웃 - 일을 집착적으로 잘하던 사람이 갑자기 다 타버린 연료처럼 무기력해지는 일이라니!

연이 의원이 적성에 맞았을까? 그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맡은 일이면 그 일과 삶에 보람을 느끼고 충실감에 젖어 있는 편이었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그리도 그 보람을 잃고 돌연히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 것인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가 극도로 쌓였겠다. 국회 안에서 밖의 그를 기다리는 일이라니.

 

2012년이 되었다. 연의원은 의원실을 비울 준비를 했다. 지역구 경쟁은 처음부터 관심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사람의’ 지역구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예 당을 선택해보려던 그가 고등학교 한참 후배에게 밀렸을 때의 심정을 나도 알 것 같았다. 연은 입을 다물었다.

대학으로 돌아가려고?

강사 자리는 여전히 밀려들어오는 박사들로 넘치고 있죠.

그럼 무슨 연구소 내고?

아니에요. 우선 쉬고요. 참, 우리나라에도 녹색당이 태동이 될 것 같아요.

무슨 소리, 소속 당을 대표하던 의원님이 엉뚱한 이야기를.

교수님이 거기 동참하시는 건 어때요?

내가 무슨. 무슨 정치를.

페트라 켈리를 제 머리 속에 심으신 게 누군데요. 독일을, 독일의 녹색당을, 녹색의 가치를 심으신 게.

 

연은 녹색당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녹색당은 당명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뭘 하고 지낼까. 잠시 소통에서 잠적했지만, 어쩜 환영할 일인 것도 같았다. 그 나름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시점이니 분주할 터였다.

 

해가 바뀌더니 한 두 마디 코멘트를 해왔다.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방글라데시가 그 정도일까요? 건물이 무너져 3,000명이 죽어요?

어머, 싱가포르에도 폭동이라는 단어가 있나 보네요. 44년 만이라네요! 하긴 외국인 노동자들의 분노이니까, 내국인은 여전히 얌전한 나라. 얌전한 게 뭐죠?

 

해가 또 바뀌었다.

쾌거예요. 드디어 녹색당이 이름을 찾았어요, 녹색당. 아직도 망설이세요?

이 시대에도 합병이 이루어지다니요,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 말이어요.

새정치민주연합 탄생이라, 민주당은 역사 속으로 묻히는가요?

군부대 내 구타 사망사건이 터졌네요. 곪은 게 터진 거죠!

그것이 2014년 4월 초였다. 곧 이어 더 끔찍한 비극이 우리를 통째로 잠식해버린 이래…… 돌이켜 보니 우린 거의 소통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소속을 고집하는 묘한 그 사람을, 선거마다 낙선하는 그 사람을 외부에서 해바라기하는 일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또 한 번의 낙선을 더는 지켜볼 수 없는 심장은 미리 저절로 터져버리는 것일까. 내가 아는 한 연의 ‘그 누군가’는 이번에도 고전을 했다. 현역의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끝내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연은 떠났다. 아이패드에는 남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보낸 어느 것도 열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다. 가장 큰 배신은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연은 누구였을까.

 

 

기록 거기에서 돌연 멎어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머지 하나, 미지의 아이패드를 열어야 할지 그저 멍한 심정이 된다. 나는 아이패드의 주인 너머로 뜬금없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있다. 주검이 아니라 죽음이다.

일흔 살 남자와 마흔 다섯 살의 여자가 몇 분 간격으로 죽는다. 사는 집에서. 조그만 테라스가 있는 막다른 골목집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여자는 타살된다. 남자는……

 

아니, 다시.

그들은 베를린에서 본으로, 본 시내에서 북서쪽 타넨부쉬의 후미진 골목집으로 돌아온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도착하여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아침 남자가 일찍 일어난다. 나이든 사람 특히 장군의 이력으로 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은 상례다. 타이프라이터에 앉은 그는 뮌헨의 아내에게 일상적인 편지를 쓴다. 두 번째 편지지를 타이프라이터에 끼운다. 주어 다음 동사 ‘해야한다’의 철자 중간에 일어선다. 타자기 전원은 켜져 있다. 침실에서 잠들어 있는 젊은 연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동반자, 녹색의 아이돌. 장군 출신답지 않게 퍼싱II 서독 배치 정책에 반대하며 돌아선 그의 이력은 녹색당에서 이 아이돌과 함께 빛났다, 빛났었다. 선제공격을 염두에 둔 미사일 배치는 유럽 내 군사 균형을 깨뜨린다. - 라고 사직서를 썼던 그 손으로, 조금 전에 편지를 쓰던 그 손으로 피스톨을 든다. 자신을 쏘기 전에, 잠들어 있는 연인을 쏜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우리가 행하지 않고 놔두면, 우리는 생각도 못했던 일을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 라고 말했던 연인의 입은 영원히 닫힌다. 희망을 위해 투쟁 - 이라고도 썼던 그녀의 손은 썩기 시작한다.

 

---------------------

문학들, 47호 (2017년 봄호)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