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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98.01.31 어제 그리고 오늘
  2. 1996.12.30 Why read Sueskind?
  3. 1994.02.23 <닫힌 시절의 사랑> - 번역
  4. 1991.05.15 <장벽을 넘는 사람> - 번역
  5. 1989.05.20 <하인리히 뵐 연구> - 학술서
  6. 1986.09.05 <문둥병> - 번역
  7. 1986.02.25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 번역
  8. 1986.01.31 어린 시절
  9. 1985.03.01 인사
사사로이1998. 1. 31. 19:30
                                                       

      누구나 아름다운 순간들  못잊을 추억들을  지닌다고 하지만.......  
                                         
어제 그리고 오늘                                                              

                                                                           

 
 

                                          ▲ 전남대학교 시절
  ◀  일고 재직 시절       
      

  

  그리고 가장 먼 나들이..... E. Nolde의 그림 한폭에 끌리어 오래도록 꿈꾸었던...   
   
그러나 비바람 속에서 순간으로 끝나고 만 여행.  순간은 영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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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0) 1986.01.31
인사  (0) 1985.03.01
Posted by 서용좌
English1996. 12. 30. 22:57

Why read Sueskind?

 

<전남대학교 영자신문> Winter 1996, pp.26-27

   

   The works of Patrik Sueskind(1949-) have been introduced en messe in this country. What's more, they are off the shelf. In the pundits' eyes, "such a thing as a useless fiction in the world" lords it over. There is, of course, a role played by commercial skills manipulated by -- in sociologists' terms -- the post-capitalistic market economy logic. However, we can't deny it is human property that we all have in common a yearn for and fear of something 'unknown,' and that he/she can take even his/her life in his/her own hands  amid so much bread. "The sun exists not for growing cabbage"(Flaubert). Directing his remark, we know that literature exists not for anything such as an ideal human socialization. As far as keeping the fixed idea that literature should be moralistic, we can not gain anything from Sueskind's works. There is no bit of assertion at all that "literature can afford the esthetic supreme bliss"(V. Nabokov). Literature ought not to be observed from an idée fixe. With reason that the moral value we make it sure can't guarantee the absolute objectivity, arts and letters in general do justify themselves. The genuine function of literary work(arts) is to re-examine and reflect all our assertions including moral values.

   After studying history, Sueskind sets forth writings. In his first successful work Contrabass(1981), we see a contrabass player(35 years old, unmarried) speaks out his meditation about life through the contrabass as his object of affection and hatred. He determines to become an artist because of his hatred against his non-artistic father and chooses the contrabass, the biggest instrument which isn't suitable for a solo performance because of his revenge against his mother who only loves father. For him, an orchestra represents the model of the human society. The cruel class-reigning society resembles an orchestra in that players are classified depending upon their physical skills as well as the horrible class of their abilities. For him, nonetheless, music is something humanistic; a substantial element given inherently to the human soul and spirit. Far beyond the physical, phenomenal existence, beyond the rich and poor, and beyond the life and death, music exists forever. So does he try to play his contrabass perfectly. Falling in ardent love for a soprano, hardly befitting for his contrabass, he daydreams in that he cries "Sarah" in the middle of a performance one day.

   While going to his working bank and coming back to his room "where his life can be safe from the accidents-ridden outside improper for him" for 30 years, Jonathan Noel, a protagonist in The Dove(1987), faces a catastrophe only because of a stray dove. Jean-Baptiste Grenouille, another protagonist in The Perfume(1985), makes "the absolute perfume" for himself to attract others but finally turns out a murderer, as having extracted the fragrance from maidens' dying bodies. The protagonists in Sueskind tend to persue a perfection (i.e., a perfect instrumental performance, or a seducing-absolute perfume manufacture), and an absolute do-nothing state "gained from his utmost effort," when he can not help but recognize the impossibility of loving and being loved. Those protagonists in searching for a perfection come only to realize their existential deficiency in emotion. "Being outcast" means no other than the absence of human relations. Love keeps life even in the form of hallucination. Hatred can manage life, too. A utopia of reason (excluding emotion) will not come to in any future.

   In Sueskind's works, besides the issues with human relations, we can find the author's particular respect of artisanship through his persistence of descriptions in a perfect performance, best perfume manufacture and so forth. This point is much forceful in Mr. Sommer's Story(1991) and Three Stories(1995, translated with the title 'Forcing to the Depth' in Korean version). Mr. Sommer is depicted from a viewpoint of a seven-year-old boy in his autobiographic experiences. The boy wonders about Mr. Sommer, an ever eccentric person, who "constantly" scares other people. Suffering from mere "claustrophobia" in common people's eyes, Mr. Sommer tries to escape from people and death, but in fact, he looks for death and is drowned in a lake at a chilly night. The unheroic hero here is an example of the person born not to socialize properly. The readers can confirm freshly the ever conflict between artists and critics, when they read a story of a young paintress. The beautiful, talented artist finally comes to commit suicide because of her despair caused only by a critic's accidental comment on her work, saying that "shallow depth in spite of talent and emotion." Whereas those faultfinders who can neither draw nor write a line enjoy themselves in cosmetic demonstration of their junk knowledge in criticism, the artists who are exhausted in producing something or anything, are frustrated with their own too serious endeavors, as seen a death choice of the young paintress.

   With these inner manifestations, Sueskind may justify his secluded life somewhere in southern France, refusing any prize and proposal for public mass communications. For common people who surrender to the daily conventions and come back home late evening from all day long work, the author may let them get angry and be aware that a day is being passed away with nothing but fatigue, anger and a bit of wage. Writers like Sueskind touch our heart that is whether still regularly pumping blood or getting hardened like "shell fossilization" (Three Stories) by everyday burden, a Sisyphusean stone. Even if our one-dimensional, standardized heart functions normally today, it anew starts unpredictably tomorrow.


Patrik Sueskind(1949)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대거 소개되었다. 게다가 잘 팔리기도 한다. 사회학이나 그런 거창한 학문을 하는 식자들의 눈에는 “세상에 쓸모없는 소설 류”가 판을 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업적 수완 - 사회학자들의 용어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논리에 조작되어 - 이 큰 몫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낯선 것에 대한 겁과 동경을 공유한, 빵이 넘쳐도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인간의 속성이 맞물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양은 양배추의 생육을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플로베르). 그 형식을 빌어 말하자면, 문학은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를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문학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어떤 개별적 민족의 애국심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박이문) 문학은 그냥 거기에 있다.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혹은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만일 ‘문학이 사회를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고정관념에서  Sueskind 와 그의 작품들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심지어 ‘문학은 미적 지복을 주는 것’(V. Nabokov)이라는 주장도 들어있지 않다. 문학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보아서도 안된다. 우리가 확신하는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예술일반, 여기에서는 문학의 필요성이 생긴다. 문학(예술)의 본래의 기능은 도덕적 가치를 포함한 우리의 온갖 확신들을 재검토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학도의 첫 성공작 <콘트라베이스 Kontrabaß>(1981)는 작품성보다는 정교한 무대효과로 성공한 작품이다. 이 단촐한 일인극은 중년( 이 말은 이미 어중간한 개념이므로 35세를 밝히자)의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애증의 대상으로서의 콘트라베이스를 통한 자신의 생에 대한 묵상을 관객에게 토로하는 극이다. 비예술적 공무원 아버지, 예술에 빠진 허약한 어머니, 그는 어릴적 어머니를 우상처럼 사랑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는 그의 작은 누이들을 사랑하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은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예술가가 되기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손으로 다를 수 없고, 독주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악기 콘트라베이르를 선택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병들게 하고 아버지를 무덤에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가게 하려고 공무원( 국립오페라단 주자)이 된다. 그에게 콘트라베이스는 여성적인 악기이자, 죽음처럼 아주 심각한 악기이기도 하다. 그에게 “죽음은 그 숨겨진 잔인성에서 혹은 죽음이 지닌 불가피한 자궁기능에 있어서 여성적이다.”  자신의 악기인 콘트라베이스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열정으로 밤이면 망상에 빠지는 그는 어느 날엔가 공연 도중 “Sarah”를 외치는 백일몽을 꾼다.


오케스트라란 그에게는 인간사회 자체의 모형이다. 잔인한 계급능력이 지배하는 사회(= 오케스트라), 물리적인 계급과 재능이라는 가공할 계급으로 존재하는 오케스트라. 그렇지만 그에게 음악이란 뭔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음악은 순전히 현상적인 물리적인 존재의 피안에, 역사와 빈부의 피안에, 생사의 피안에 존재하므로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콘트라베이스를 완벽에 달하도록 연주하고자 한다.


1738년 시체썩는 냄새에 버금가는 생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생선좌판대 아래, 한 젊은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다. 어머니의 예상외로 버려둔 쓰레기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내아이는 어머니를 영아살인죄로 참수형 당하게 하면서 그의 일생을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향수 Das Parfum>(1985)는 부제처럼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Jean-Baptist-Grenouille는 추한 외모와 강인한 생명력과 독특한 특성으로 자라난다. 수천가지 향기를 멀리에서고 구별할 수 있고, 심지어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는 자신의 소외적 현실을 보상하기 위해 “절대적 향기”를 민들어내고자 한다, 이 향기를 지닌 그를 사람들이 무조건 사랑하게 될 향수를. 이 마법의 향기의 에센스를 그는 갓 죽은 젊은 여인들이 발산하는 마지막 향기에서 구한다, 즉 그는 엽기적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 향기로서 교수대의 위기를 빠져나오게 됨으로써 그의 발명의 위대함을 만끽하지만, 그것은 카니발의 비밀제(Orgie)에서처럼 아비규환으로 끝난다: “그들은 천사에게로 달려들어 그를 덮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누구나 그를 만지고 싶어했고, 그의 일부분이라도 갖고 싶어 했다. 작은 깃털하나, 날개 한 조각, 그의 놀라운 불꽃의 불티 하나라도 가지려고 다투었다. 그들은 그의 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피부를 잡아 떼었으며, 그의 육체를 물어뜯었다. 손톱과 이빨을 세우고 그들은 하이에나처럼 그의 육체에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천사는 서른 조각으로 찢겨졌으며, 그 패거리들은 모두 그걸 하나씩 움켜쥐고 음탕한 욕망에 이끌려 뒤로 물러앉아 먹기 시작했다. 반 시간 쯤 지나자 Jean-Baptist-Grenouille 는 살점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의 옷을 입고 (18세기 프랑스의 문화사적 정신사적 조류들을 파로나마), 사회의 Parabel이자, 시민사회의 발전소설 기법으로(추한 주인공의 천재성과 혐오감 사이의 긴장을 예리하게 묘사), 또한 후반부는 현대의 Krimi-Suspense의 기법으로, 이런 요소들은 문학적 mixtum compositum 으로서 비평계의 관심을 차지했다. 주인공들은 장인정신에 투철하다. 콘트라베이스 주자처럼 향수제조인 또한 직업윤리에 매우 정직하다, 비록 그것이 살인에 이른다 하더라도. 시대의 진정한 향료(Aroma)로서의  분뇨, 땀, 피, 부패의 불협화음은 향수제조인의 화장품 기술과 극단의 대비를 이룬다.


상대적으로 간소한 <비둘기 Die Taube> (1987) 역시 어느 Outsider의 이야기이다. 은행의 수위 Jonathan Noel은 “삶의 마땅치 않은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과 은행만을 오간다. 무서운 어린 시절, 사라진 (사실은 유태인이기에 집에서 잡혀간) 부모들, 도피와 성장, 아내의 불륜 등의 사건들이 Trauma가 되었기에 사건들을 기피했고, 파리에서의 30년간 그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질서를 광적으로 고수하는 그의 생은 단 한 마리 길잃은 비둘기로 인해 파국 Katastrophe을 맡는다. 오로지 그가 바라는 “단조로운 안정감의 상태”를 잃은 그는 싸구려 호텔을 찾아가 자살자의 고독한 마지막 성찬을 든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며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외친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빗소리라는 응답을 받고 돌연 공포가 사리진다. 그는 자유를 향해 걸어나간다. 다시 돌아간 그의 집에는 비둘기의 흔적도 없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만 어쩌면 그가 때로는 질투와 혐오의 심정으로 바라보던 벤치위의 거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 번도 골치아픈 표정을 짓지 않고, 무슨 고통을 받고있나거가, 두려워한다든가, 지겨워하는 구석도 전혀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살이의 태평스러움에 대한 노여운 질투심이다. 우리 또한 그런 일종의 부러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주인공들은 사랑을 구하지 못할 때 또 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확신할 때 완벽추구(악기의 완벽한 연주, 유혹적-절대적 향수 제조, “지독히 애써 얻은” 절대적 無爲의 상태)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 주인공의 극단적 완벽추구는 실존적 결손감정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실팍하지 못한 삶, 사랑할 수 없음, 내팽겨쳐진 존재. 내팽겨진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수 없다”는 내면의 표출만으로도 우리의 Noel 씨는 스스로를 구한다. 사랑은 착각의 형태로서일지라도 생을 지켜준다. 미움의 감정 또한 생을 지켜줄 수 있다. 감정를 배제한 이성의 역사는 어느 미래에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 <좀머Sommer씨 이야기>(1991)는 7세 소년의 시작으로 에피소드적인 경험들은 자전적으로 묘사하며,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Starnberger See를 무대로 한다. 소년이 만난 영원한 기인 Sommer씨, 그에게는 인형제조로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가 있지만, 그는 사람들을 겁내고 “끊임없이” 길을 떠돈다. 어른들은 소년에게 그가 <불안정증 (Klaustrophobie)>을 앓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 명확한 개념제시로 앞서의 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평생을 죽음을 피해 도망다녔지만, 기실은 죽음을 찾아다녔고 실제로 찾는다: 어느 시월 밤, 그는 “마치 커다랗고 환한 거울같은” 차가운 호수속으로 걸어들어가버린다.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소년은 구원 요청 대신 점점 작은 점으로 사라지는 Sommer씨를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그가 호수를 -  어디나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므로 -  걸어서 건너려는 것이구나’ 하는 어린이다운 인지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가 항상 사람들에게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라고 애원하던 것에 대한 회상때문이었다. 


이어 단편집 <세 이야기>(1995)는 우리나라에는 그중 한 작품인 <깊이에의 강요로> 번역되었다.“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이 숙명적 비평 한마디가 젊고 재능있는 화가를 회의와 절망 그리고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영원한 갈등 관계 -  한 획의 그림도 한 줄의 글도 쓸줄 모르는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비평으로 일갈하는 동안 생산의 고투에 녹초가 된 예술가들은 그 진지성 때문에 좌절하거나 투항한다: 투항은 비평가의 취향에 추파를 던지거나 아예 예술을 포기하고 일 자리 하나를 구하는 짓이다. 좌절은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의미한다. 쉬스킨트는 이로써 언론대중을 위한 인터뷰나 심지어는 모든 수상을 거부한 채 남불 등지에 은거한 자신의 은둔자적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저녁이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로 하여금 “내 인생에서 또 하루가 그저 사라졌구나, 권태와 분노와 돈, 내일 또 일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져다 준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라고 화를 내도록 부추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 Version

Patrik Sueskind가 읽히는 현상

Patrik Sueskind(1949)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대거 소개되었다. 게다가 잘 팔리기도 한다. 사회학이나 그런 거창한 학문을 하는 식자들의 눈에는 “세상에 쓸모없는 소설 류”가 판을 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업적 수완이 큰 몫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낯선 것에 대한 겁과 동경을 공유한, 빵이 넘쳐도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인간의 속성이 맞물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양은 양배추의 생육을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플로베르). 그 형식을 빌어 말하자면, 문학은 그 어떤 무엇을 의해서, 예를 들어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를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만일 문학에 사명감을 부여하는 고정관념에서 Sueskind의 작품들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심지어 ‘문학은 미적 지복을 주는 것’(V. Nabokov)이라는 주장도 들어있지 않다. 문학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보아서도 안된다. 우리가 확신하는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예술일반, 여기에서는 문학의 필요성이 생긴다. 문학(예술)의 본래의 기능은 - 기능이 있다면 -  도덕적 가치를 포함한 우리의 온갖 확신들을 재검토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역사학도의 첫 성공작 콘트라베이스 Kontrabaß(1981)는 작품성보다는 정교한 무대효과로 성공한 작품이다. 일인극의 콘트라베이스 주자(35세, 미혼)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자랐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예술가가 되기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서 가장 거대하고, 독주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다. 오케스트라란 그에게는 잔인한 계급능력이 지배하는 사회, 물리적인 계급과 재능이라는 가공할 계급으로 존재하는 사회 그 자체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음악이란 뭔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음악은 순전히 현상적인 물리적인 존재의 피안에, 역사와 빈부의 피안에, 생사의 피안에 존재하므로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콘트라베이스를 완벽에 달하도록 연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악기인 콘트라베이스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한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열정으로 밤이면 망상에 빠지는 그는 어느 날엔가 공연 도중 “Sarah”를 외치는 백일몽을 꾼다.


30년간  “삶의 마땅치 않은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과 은행만을 오가다 단 한 마리 길잃은 비둘기의 침입으로 인해 파국 Katastrophe을 맡지만,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침묵 속의 외침으로 자신을 구하는 Jonathan Noel(비둘기 Die Taube, 1987), 다른 사람의 사랑을 구하기 위한 “절대적 향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엽기적 연쇄살인자가 되는 Jean-Baptist-Grenouille(향수 Das Parfum, 1985). Sueskind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구하지 못할 때 또 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완벽추구(악기의 완벽한 연주, 유혹적-절대적 향수 제조, “지독히 애써 얻은” 절대적 無爲의 상태)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 주인공의 극단적 완벽추구는 실존적 결손감정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내팽겨진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사랑은 착각의 형태로서일지라도 생을 지켜준다. 미움의 감정 또한 생을 지켜줄 수 있다. 감정를 배제한 이성의 유토피아는 어느 미래에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내팽겨진 존재’의 사랑에 대한 거부-집착 등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 이외에도 장인기질에 대한 존중이 엿보인다. 완벽한 연주, 최고의 향수 제조에의 집착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7세 소년의 시각으로 자전적 경험들을 묘사한 좀머 Sommer씨 이야기(1991)나 우리나라에 깊이에의 강요로 번역된 단편집 세 이야기들(1995)에서 더욱 강한 목소리를 낸다. 소년이 만난 영원한 기인 Sommer씨, 그는 사람들을 겁내고 “끊임없이” 길을 떠돈다. 보통 어른 들의 눈에는 “불안정증 (Klaustrophobie)”을 앓고 있을 뿐인 그는 평생을 사람들과 죽음을 피해 도망다녔지만 기실은 죽음을 찾아다녔고, 실제로 어느 시월 밤 차가운 호수속으로 걸어들어가 버린다. 그는 사회화를 위해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본보기이다. 또는 ‘재능과 감동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부족하다’는 숙명적 비평 한 마디가 젊고 재능있는 화가를, 예쁜 여자를, 회의와 절망 그리고 마침내 자살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영원한 갈등 관계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한 획의 그림도 한 줄의 글도 쓸줄 모르는 비평가들이 오직 지식취향에 따른 비평언어로 목청을 돋구는 동안, 생산의 고투에 녹초가 된 예술가들은 그 진지성 때문에 좌절하거나 - 여주인공 처럼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 또는 투항하리라는 것이다. 투항은 비평가의 취향에 추파를 던지거나 아예 예술을 포기하고 일 자리 하나를 구하는 짓이다.


Sueskind는 이로써 대중매체를 위한 인터뷰나 심지어는 모든 수상을 거부한 채 남불 등지에 은거한 자신의 은둔자적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저녁이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 투항자로 하여금 “내 인생에서 또 하루가 그저 사라졌구나, 권태와 분노와 약간의 돈을 가져다 준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라고 화를 내도록 부추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Sueskind 같은 작가들은 우리들의 심장을 아직 살아있는지 건드려본다, 겨우 규칙적으로 피를 뿜어내거나 일상의 무게(시지프스의 돌)에 짓눌려 점점 “조개들의 화석”처럼 굳어가는 심장을. 그리고 매우 표준화된 일차원적인 우리들의 심장이라해도 일단 다시 뛰기 시작하면 그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4. 2. 23. 00:00

도서출판 삼문 1994.2.1



어떤 사람들이 마약중독 또는 일중독에 걸리듯이 빵중독에 걸린 소년의 체험에서 비롯된 젊은이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원제는 하인리히 뵐의 1955년 작

 "지난 시절의 빵 (Das Brot  der frühen Jahre)",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종전 후 기아와 궁핍의 시절의 빵을 가리킨다. 빵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성사적 의미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는 인간성의 척도가  된다. 궁핍의 시절,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 준 빵과 그렇지 않고 부의 축적을 위해서 모아둔 빵의 의미는 그렇지 않아도 흑백논리를 비판 받는 작가의 눈에는 선악의 기준이 된다.


이야기는 어느 월요일 아침, "담요를 머리 위까지 푹 끌어 덮고만 싶었던" 주인공 젊은이가  집에서 속달편지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홀로 도시로 나와 살게 된 일곱 해 동안에" 어머니의 사망통지, 아버지가 다리 부 러진 사고 때나 받던 속달편지에 놀란  주인공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약간은 성가신 부탁을 발견한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마중을 나가거라!"

이렇게 역으로 마중을 나가게 된 그가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자동세탁기의 수선과 정비를 담당하고 있는, 손에 적당한 일 값을 지닌, 나름대로 장래가 순탄한 젊은이. 1955년 현재 수입과 자동차를 가진 기술직 젊은이가 되기까지 ㅡ 그는 배고픈 숱한 기억들을 가지고 자랐다. 가장 끔찍한 기억은 고교 교사인 아버지의 고결성을 담보로 담임인 빵집 아들을 핑계로 빵집 가게에 "우연인 척" 들리자고 졸랐던 일이었다. 아들의 낙제점수에 빵집 주인이 화를 내고서 문을 닫아 버리기 전까지, 아버지는 배고픈 아들을 위해서 그 일을 감수했었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아버지의 책들을 내다가 빵과 바꾸는 아들을 위해서 책들을  "직접" 골라준 아버지 ---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아들의 "빵중독"은 가라 앉지 않았다. 그것은 배고픔 자체보다는 중독성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막 다 잡은 행운들을 물리치고, 게다가 그는 사장의 딸과 공공연한 약혼
 사이었다. 겨우 탄 이 "순탄한"  인생이라는 기차---  그러던 그가 갑자기, 어느 월요일,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하차를 결심한다. 왜? 어디로? 

 "나는 내가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후퇴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느 방향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무튼 후퇴하고자 했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후퇴: 한 소녀와의 예기치 못했던 사랑의 격정은 지금가지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매어있던

            가치들의 무의미성을 일순간 인식케 한다. 복고적 자본주의와 패덕의 윤리라는 현실로

            부터 하차를 감행한 그의 새로운 인생은 기존문화에 대한 퇴행적 반대기투와 더불어

            제시된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가?

            이것이 작가 하인리히 뵐, 주인공과 함께 우리가 언젠가는 생각해야 할 하나의 명제로

            남는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1. 5. 15. 23:30

Der Mauerspringer 
<장벽을 넘는 사람> -
페터 슈나이더Peter Schneider(1940~  ) 원작,
들불 1991


                        

는 문학의 사망이 공공연히 고지되었던 1968년, 베를린 대학 연좌데모에서 유창한

    연설로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다. 슈나이더는 문학사에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저

    유명한 연설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 한 토막:
 
 

 
 
우리는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우리는 순응했지요. 적응력이 있었구말구요.
 그리고 우리는 과격하지를  못했습니다. […] 우리는 대학인이라는 특권을 누려왔습
 니다.  […]  학업을 시작했고, 필수과목 강좌에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 ]  



   이 연설에서 그가 속죄하는 것은 대학인이라는 현존 자체였다. 시간소모에 불과했던 세미나, 복종을

  강요당했던 시험 공부들이 비판되었다. 그의 눈에는 거리에는 사람간의 진정한 왕래도, 의견교환도

  없고, 집에는 사람들 대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가구들이 버티고 산다. TV는 이 가구들이 진실하다고

  외쳐대기 위해서 존재한다. 기존의 예술은 무용지물이다. 상상력의 천재들이 그들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기존의 예술, 또는 작가의 상상력과 꿈들이 자존에 의해 잠식 당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 참상을 그리는 데 그친 사실주의자들, 그 어느 것도 "인간적 소망을 자본주의로부터 보호하려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보쉬공장의 보조노동자로 일했다.


  이 경험은 세계적 대기업의 작업환경의 의외적인 열악성, 콘베이어 벨트의 리듬에 종속되는 인간의

  문제, 도급수당제의 살인적 노동력 착취의 관행 등에 대한 폭로적 글들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체류가 준 경험 --- 독일 운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대한 인식 등이 반영된 작품

 
『렌츠 Lenz』(1973)로서 문단에 복귀했다. 이어서 『자칫하면 빨갱이』로 번역된 .....

   schon bist du 
ein Verfassungsfeind (1975)등의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
『장벽을 넘는 사람 』에서는 "머리 속의 장벽"을 경고했다.

 

          장벽을 넘는 사람  Der Mauerspringer             

   이 작품은 그가 문학으로 복귀한지 10년이 흐른 1983년 작이다.
 
   베를린 장벽을 적법하게 통과하면서 동쪽의 친구를 가진 주인공 과 그 동쪽  친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장벽에 얽힌" 이야기들을 뼈대로 하고 있다.  "샴의 쌍둥이" 도시

   베를린에서는, 우리에게는 놀랍게도 적법한 절차의 통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1970년대 브란트수상의 동방정책에 의한

   <독독기본
협정> 이후  다시 적법한 통행의 길이 열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상적인

   통로를 두고서도 "장벽을 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질문은 남겨두는 것이

  쫗을 것이다.  소설 읽기의 재미를 미리 빼앗지 않고  싶지는 않으니까.

  족:                                                                                                                     
         필자가 1992년 베를린 도착 이튿날 방문한 곳은 바로 이미 무너진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훼였다. 장벽에 남아있는 그림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물론 
『장벽을 넘는 사람 』의 표지를 그린 그림이었다. ( 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물론 그 일부는 사진으로 구할
수 있었다.

        
우리 독문과 과실에 걸어둔 그 중 하나의
        사진은 담장을 헐어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담고 있다:

          
    ~~ 아직도 허물어내야 할 벽들이 많이 있다.
                     Es gibt noch viele Mauern, abzubauen. ~~


▲ 1992년 가을 필자 촬영. 베를린 장벽 잔훼에 남아있는그림들은 분단 당시의 염원들을 보여주고 있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9. 5. 20. 14:54


한신문화사 1989. 5.20.


전후 독일문학 세계문단에 끌어올린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자 전후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1917-1985)의 방대한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섭렵한 입문서. 아직은 학문의 깊이보다는 넓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생들에게  안내서가 되기를 바라며, 그 차례를 소개합니다
.

  1. 개괄 및 연구방향
 
  2. 앙가즈망
 
     1) 시간적 현재성           2) 공간적 연대감

  3. 인도주의 미학  
     1) 언어의 도덕성           2) 인간의 존엄성           3) 문학의 자유와 한계

  4. 전쟁과 개인
     1) 전쟁의 무의미    
                  전후 단편들/ 『기차는 정확했다』/ 『아담아, 네 어디 있었더냐?』
     2) 평등의 허위
                  50년대 풍자적 단편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빵』
     3) 과거의 부담  
                 『돌보는 이 없는 집』/ 『아홉시 반의 당구』

  5. 현실과 이상사회
     1) 사회로부터의 탈영    
                 『어릿광대의 견해』/『부대 이탈』/ 『마지막 군복무』
     2) 이상사회의 싹  
                 『문둥병』 /『여인과 군상』
    
     3) 어떤 사회주의  
                 『카타리나 블룸의 실추된 명예』/ 『국민의 성향 보고』/
                『보호라는 이름의 포위』/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6. 요약과 정리       
       각주
       참고 문헌  
       연보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9. 5. 23:30

              문 둥 병 ................

    


   
이 작품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매우 예외적 장르인 극본 <Aussatz>로서,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던 독문과의  축제인 독문학제(1996)에 번역극으로서
   공연하기 위해서 급히 번역되었다.  1986.9.5. 전남대학교출판부

   
                        
 얼마나 급했던지 등장인물의  이름 중 Gerta를 Greta로 보고서
                         잘못 번역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그 이름이 시사적 이름(telling name)
                         으로서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암시하지만, 다행이도 이 경우는 그것을
                         면했기에, 부끄러운 가운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위안한다.)  


  
 하인리히 뵐은 방송극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지만, 첫 극본
 
  『 한 줌의 흙  Ein Stueck Erde 』(1961)은 초연에 실패했고, 이 두 번째

   극본인 이 작품은 그러나 아헨의  무대에서는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문둥병은 누구나 알 듯이 천형의 벌이라 간주되는 격리치료의 질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문둥병에 감염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인물을 위해서  사회가 빙자한 질병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

  이라서 격리가 필요한가? 성직자의 독신 계율을 구체적 소재로 다루는 이 작품은 사실

  평신도에게도 의무로 되어있는 정절의 덕행마저 이미 기만적인 현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혼인에 관한 "추상적 질서원칙"( 63년 작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참조!)에 대한 기만적 복종은 대기업주 부르의 <민주적> 작태에서 드러난다.

  아내에게 아내의 자유를 준 남편!  매우 민주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선행(?)은 그러나

  그의 성공적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 그는 자산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도 필요한 것이고, 또 가톨릭 신자로서의 평판을 위해서sms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임을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나 APO의 동조자인

  젊은 쿰페르트신부가 외치는 장면이다:
 
 
 
              
저는 다만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성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내연의 관계나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순결의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또한 이미 결혼 한
              사람들까지도  […] 순결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은 우리가 정말이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너그럽고, 죄악 자체에만 혹독하지요
  
  심지어 "신앙을 버리거나 여자를 보더라도 눈감아 줄" 여생의 성직 대신 "특권을 부여

  받고서 특권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일, 그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젊은 신부, 그리고 "포도주를 즐기고, 신학서보다는 소설 읽기를 즐기는, 그것도 최근의

  초현대적 소설을, 또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고 고백하면서도,  감히 "부랑자 신세"를 택하지 못하고 조금 타협하고 신학 안에 남아있

  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의  노 신부.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검역소에 억류된다. 젊은 신부의 자살이 '신원미상의

  문둥병자 사망'으로 둔갑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낌새>를 알아챈 형사 -- 그는

  시체에 접근했었으므로 잠정적 감염자로  분리된다 --, 죽은 신부의 <동쪽> 친구 --

  그는 신부의 동구행 잠적이라는 시나리오에 어울리도록 함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이자 대 부호의 아내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여자,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뛰쳐나온 주인공 쿰페르트신부 등이다. 이 특이한  문둥병

  아닌 문둥병의 치료 또는 해결은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둔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2. 25. 14:37

 

삼성출판사 1986.2.25


― 라인강변의 호화로운 별장지대를 무대로한 권력층 부유층 그러나 매우 서러운  여자들의  이야기 ―

이 작품은 1985년 여름에  타계한 하인리히 뵐에게는 그가  탈고하고 출판사에 넘긴 마지막 작품이다.


원제 Frauen vor Flusslandschaft


 "라인강의 기적"의 결과를 흠뻑 누리며 살고있는(?) 정치가 혹은 사업가의 아내들의 이야기


이런 여자들의 서러움과 고통이 무엇일까? 고통을 알기나 한가? 기껏해야 풍요의 권태가 주는 실존적 위기감 또는 잘해야 예술적 또는 정신적 일에 관계된 사치스러운 고민이겠지 …

그러나 그러한 기우는 첫 장면에서 사라진다. 이들의 고뇌는 보지 말아야 했던 것을 보았던, 듣지 말아야 했던 것을  들었던자의 매우 인간적 고통이다. 제 1장이 시작되면 라인강을 바라보는 별장 발코니에서 우수 속에 잠겨 일생을  회고하는 에리카 부플러가 등장한다. 그녀의 성공한 남편 헤르만, 그는 쿤트를 축으로 하는 정당의 기획자로서,  그의 두뇌 속에서   40년간의 연방독일의 정치가 요리되어 왔다. 이 정객들의 권모술수의 <연극>에 얽혀든 여인들은 일종의 배우들이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득표를 위한 행동이다, 그들은 체제의 긍정적 산물인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대신 공허한 내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안신경증적인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그 <연극>에서 이탈하면, 치유할 수 없는 우울이나 절망, 자살에 이른다. 종전 직후 옛 나치들이 민주주의자로 둔갑하여 정치의 일선에 뛰어들 무렵, 그들에 의해 영도되는 연방공화국의 땅 대신 차가운 라인강물을 택한 여인이 그런 경우이다. […]

그녀는 이 죽음을 통해서 당시 다섯 살 난 아들에게 결코 군복(유니폼)을 입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갔다. 그 아들은 당연히 군복무 거부자에 합류한다. 이 백작가문의 <빗나간> 황태자는 아버지의 칭호인 "백작"을 거부한다. "민주주의자 백작 ooo", 예컨대 이러한 불협화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야기는 호화판 요양소에 감금되어 살고 있는 정치가의 아내, 엘리자베트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녀는 "결혼의 파기"와 더불어 정신병원에 유폐되어 있다. 남편 역시 쿤트 주변의 인물이다. 그는 한 귀족의 딸을 아내로 원했기에 그녀와 결혼했다. 당시, 아버지를 소련군에게 잃고 자신은 그들에게 겁탈당한 귀족의 딸은 매우 값진 액세서리였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다. 전쟁 말기  나치당 남작이었던 아버지는 극렬당원이던 누군가  - 작품 내에서 "피의  사냥개"라고만 불 린다 - 의 사주에 의해서 남자 아이들을 다 목매달고 자신도 목을 맨 애국적 군인들 중의 하나였고,  남겨진 딸 그녀의 처녀성은   "하등인간" 소련군의 겁탈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랑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녀는 그 디미트리를 평생 사랑했고, 남편은 오히려 그녀를 겁탈해야 했다. 그녀는 결국 출산은 거부했지만, 표밭을 모으는 연극에는 동참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피의 사냥개가 변성명해서 복권되어 나타났을 때, 그를 알아본 그녀는 자제심을 잃고 광기에 내맡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은 본의 정치사회를 깡그리 부정하는 듯한 비판의 안목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비판서가 아닌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는 예를 들면 제 4장의 에파의 독백에서 넋을 읽게 된다:


 

     에파:  […] 저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빨강이건 초록이건 배의 각등들 하나 없구나.

             정박 금지인 봐 .

             아마 여기 어느 곳엔가는 니벨룽겐의 보물이 발견될지도 모르지 ― 라인강 기슭으로

             떠밀려 올라와, 찌그러진 왕관들, 황금쪼가리가 라인의 강물과 자갈에 오랫동안

             씻겨서, 구르는 잔돌에 맞아, 뭔가 사육제의 휘장처럼 시달려서 […]

             오오, 크림힐트와 브룬힐트, 그대들의 팔찌들, 구르는 돌에 쇠잔하여 강의 해초들이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겠지, 아마 미국의 장갑차가 진압했을 대 놀란 어느 시민이 급히
             떼내서 내버린 나치의 
표장과 비슷하겠지. 거기 초록빛 수렁 속에서 사라져버렸을 모든 것들 ― 

 

바로 그것이다. 니벨룽겐의 흥망성쇠를 태고의 유산처럼 음미하다가 갑자기 섞이는 "미군 장갑차", 그리고 어느  놀란 시민이 황급히 떼서 내버린 나치의 표장  ― 이렇게 인류의 속성과 원죄적 약점에 대한 평이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찾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1986. 1. 31. 21:00

    

▲ 이천 서(徐)씨 종훈

   

▲ 언제나 우리들의 우산이셨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 여전히 열성적이신 어머니와... ★ 중학교 입학을 압두고..........



▲ 유년 시절


▲ 처음 태어나서 두번째 모습?

  

▲ 제일 가까운 친구이자 자매 ※ 이 사진은 21세기에 추가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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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1985. 3. 1. 09:00
인사?

남의 글 파먹는 세월동안 하이에나가 된 듯 손가락이 네개씩으로 변하는 환상에 놀라
느닷없이 소설가의 세계에 들어선 나.
낯선 정체성으로 혼란 중.

평생의 직을 자발적으로 버리고, 마침내 소설가로 서고 싶다.

2011년 3월 1일 0시

경랑  서용좌
........................................................................................................................
편의상 이 글을 자유인 첫날인 2011년 3월 1일 대신에 홈 시작으로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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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