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2002. 12. 5. 23:30

bestmail 2002, 아니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
                        


Subject: 예비 03이 인사드립니다.
     Date: Thu, 05 Dec 2002 21:33:31 +0900 (KST)
     From:
                 

  안녕 하십니까.
  저는 수시모집에 합격한 예비 03학번이된 000 입니다.
  예전부터 교수님 홈피에 자주 들러서 독문학도의 꿈을 키워 왔는데,
  이제 저도 당당히 교수님 밑에서 공부할 수 있다니 몹시 기쁩니다.

  이렇게 저같은 새내기가 교수님께 메일을 보낸다는 것이 조금은
  건방지게 비쳐질것이 두렵지만서도 하루라도 빨리 독문학을 배워 보겠다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실은 제가 독문학을 하겠다고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선언했을 때
  다들 힘들고 외로운길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이런말을 꺼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인문학, 특히 독문학은 위기의 과목이고
  사양과목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수님 홈피에
  자주 들러 자칫 흔들릴 뻔한 저의 결심을 굳혀나갔습니다. 결국 저는
  수시 면접에 참가를 했고 이렇게 당당히 독문학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수능 성적상 흔히 서울에 괜찮다는 학교의 학과를 지원하고픈 욕망이
  끓었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교수님 홈피에 독문학강의란을 읽어보면서 느꼈던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런말이 떠오르더군요. '위기는 곧 좋은 기회가 될수 있다'
  분명 한국 사회는 미국, 일본 문화의 영향이 주류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 주류의 문화는 결국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 문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야흐로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서 유럽문화, 특히 독일 문화가 우리 사회에 많이 소개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펼쳐질 유럽과의 육로 직교역시대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다시말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제가 두서가 없는 말은 너무 많이 늘어 놓은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p.s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겨울방학기간 교수님께서 권장하고
        싶으신 독일문학 도서를 추천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또 제가 정말 부족하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앞으로 교수님과 자주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음악이 없다면 인생이란 하나의 착오일 것이다 -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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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11. 20. 22:21


입시지각생의 운동화 끈

                                                         『우리 어디에 서 있어도』2002 (이화에세이)          


해마다 겨울이 오고 수능이든 입학시험이든 결정적인 시험이 있는 날은 대개 날씨가 혹독한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한지 모두들 마음이 얼어붙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기억들이다.


오전의 논술과 오후의 면접, 그만하면 교수에게나 입시생에게나 긴장된 하루가 틀림없다. 차가 밀렸다가는 큰 일이므로 학생들이 움직이기 아예 전에 서둘러야 마음놓고 학교에 이른다. 신체리듬에 따라 참새형과 올빼미형이 있다지만, 나는 새벽같이 출근할 날이면 아무리 마음을 풀어도 짜증을 이기지 못한다. 입실 시간이 지나고도 빈자리가 꽤 있었다. 입시가 여러번의 지원기회가 있어서, 첫 시간에 지각하는 학생은 예상대로 대개 결시로 이어질 것이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고, 우리는 서서히 원서대조에 들어갔다. 삐그덕 교실 문이 열리고, 놀라서 고개를 든 학생들 앞에 울상으로 지각생이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규정대로 라면 입실이 거부될 상황이었다. 새벽부터의 짜증까지 겹치면 지각생이 불리하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상념은 불현듯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수십년 전 어느 이른 봄, 선배도 없는 외로운 대학시절은 신설독문과 신입생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라서 처음 외지로 나간 지방도시 출신에게는 대도시의 낯설음까지 더했다. 낯설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었나? 입학시험을 치르던 꽁꽁 언 겨울, 백설공주가 숨어사는 산만큼이나 오르락내리락 미로를 거쳐가는 캠퍼스는 주눅들게 하기 알맞았다. 오늘날에 보아서는 그저 아기자기한 정도라 해도, 당시의 시골소녀의 눈에는 그랜드 캐년 다름없었다. 약간 비뚜름히 오른쪽으로 산을 오르다가 어디에선가 왼쪽으로 굽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 쪽 아래로 펼쳐지는 거대한 건축물, 보기는 무맛이었고 우중충한 색조마저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데... 거기서도 어렵게 몇 고개를 올라 드디어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김치 다름없었다. 종일 7과목을 필기과목으로 치르는 입시에 겁도 났고, 하루 종일은 그 자체로서 부담이었다. 어떻게든 숨을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은 축복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어머니답게 따뜻한 맛있는 점심을 자꾸 더 뜨게 했고, 가물거리는 눈...


다시 시험장을 향하는 발걸음은 아침보다 더 무겁기만 했다. 시간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잡았지만, 들어갈 때는 오르막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렸다. 끈은 걸기적거리며 안팎으로 덜렁거렸다. 당연히 몸을 굽혀서 끈을 매어야 했겠지만, 미욱한 성정에 몸을 굽힐 시간이 없기도 했고, 몸을 굽혀서 버릴 1,2분과 끈이 풀려서 방해받을 1,2분 사이를 계산하는 머리는 실타래같이 얽히기만 했다. 누구도 실험을 해 보지 않은 두 가지 경우를 두고서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한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생각은 그 둘 사이를 헤맸고, 걸기적거리는 발은 자동적으로 옮겨 떼고 있었다. 시험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흘끗 바라본 시계로 이미 시작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 길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다면 어머니의 소원으로 지원대학을 바꾼 분풀이로서 도중하차했다는 누명을 쓸 게 뻔했다. 이제는 지각을 해도 일단 고사장에 갈 것인가 아닌가의 투쟁이었다. 계단에 이르러 넘어진 것은 꼭 풀린 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르막만 나타나도 피를 품어내기에 지쳐버리는 심장이 진짜 범인이었을 것이다.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5분도 더 지난 상태... 아 이렇게 두 학교를 다 놓지는 구나. 층계를 올라온 가슴은 콩콩 뛰다 못해 겨울 두터운 옷 위까지 벌렁거리고 있었고, 시계는 째각거렸다. 이 벽 너머, 바로 벽에 밀착된 책상 하나에 응시학생이 없구나...


우연이었을까?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아니 다시 쓰자. 나는 문을 붙잡았다. 숨을 몰아쉬고, 시간이 흘렀다. 눈을 떴다. 문을 조금 열었다.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빈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와서 문이 안에서 열렸는지, 밖에서 열렸는지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많은 세월 동안 그 순간을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버전으로 쓰이던 그 장면이 원본을 잊어버린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손수 그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나를 앉게 하신 교수님의 엉거주춤한 행동이었다. 덮혀있던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를 올려놓으시기까지 했다. 까만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구나... 나는 까막눈 비슷했다. 놀람의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시험지는 뿌옇게 변해갔다. 그렇게 치른 5교시 과목은 공교롭게도 전공이었다, 독문과 학생들을 위한 <독일어>.


그렇게 해서 나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 덕으로 이화식구가 되었다. 60년대 학부, 70년대 대학원, 80년대 박사과정을 이화에서 공부하면서, 그 시발점에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이 계신 것을 상기하곤 했다. 오늘 이렇게 입시에 늦는 학생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꼭 선생님을 본받으려는 생각에서는 아니겠지만, 지각생에겐 언제나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은 내가 교단에 선 이래 결석생을 결코 홀대하지 않는 숨은 이유 또한 선생님께서는 짐작도 못하실 비밀로 남아 있다.


지난 학기에는 모교의 학위논문 심사에 합류해서 감시회로까지 갖춘 현대식 교수실을 드나들며, 그 옛날 칸막이 교수실의 사랑 반만이라도 나의 제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지 새삼 코끝이 찡했다. 아슬아슬한 입학 후 여전히 지각 결석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어주시던 강희영교수님, 김영호교수님도 이화 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시고 정년하신지 오래이다. 너무 오랜 동안 배워서 다 베껴먹은(?) 이병애교수님마저 이제 곧 교정을 떠나시게 된다니, 내년 이맘때의 모교가 얼마나 썰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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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9. 16. 22:25
[전일시론 2002년]          
 

한가위 유감 - 우리를 스산하게 하는 가을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를 지나면 처서와 백로는 금새 다가온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옛말처럼, 음력 칠팔월은 어정어정 건들건들하는 사이에 지나는 것이다. 그것은 추수만 남아 한가해진 농촌을 이르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농촌을 보라.

입추는 물론 처서절기에마저 비가 내리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일년 농사 마무리는 튼 일이 된다. 오죽하면 “처서에 비 오면 독에 든 곡식도 준다”는 속담이 있었을까. 그래서 입추 절기엔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기구하고 비의 재앙을 피하고자 기청제(祈晴祭)가 있었다 했다.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여 밀물과 썰물의 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사리 현상이 발생하면, 서남해안 지역의 저지대는 침수하게 마련이었으니까.

자연재해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속수무책임이 드러나고 있다. 올해의 세계적인 기상악화로 인한 피해는 21세기 인류문명의 발전을 무색하게 한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인재의 요소가 더 짙게 드러나기도 한다. 산사태의 상당 정도가 인공적인 자연훼손 - 축지법을 위한 도로개설 - 탓이라는 보도였다. 그러고서 오늘의 농촌을 보라. 태풍에 쓰러진 벼포기에 매달린 경우는 그래도 상이다, 아예 논의 형태도 없는 우리의 훼손된 땅들... 잃어버린 꿈들.

우리는 기청제를 지내는 마음가짐으로 가을을 맞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도로 하나도 다리 하나도 “돌다리 두드리듯이” 생각에 생각을 또 하고 놓아야 한다. 내년이면 사라질 장흥군 유치면 덕산마을의 운명에도 가슴 조인다. 수몰지구로 고시되어 모두 이사를 해야 했겠지만, 여전히 아직 이사가지 못한 집들은 이번 집중폭우에 물에 잠겼다. 애초 댐공사로 인해 면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쯤으로 묵인하는 우리들. 댐이 파괴하는 것은 환경만이 아닌 우리들의 연대감이다. 댐의 혜택을 받을 대다수는 댐공사가 묵살한 소수의 인생에는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기주의와 무관심 ― 그것은 어찌보면 하나의 끈이다. 풍성하고 한가로워야 할 가을의 문턱에서 스산하기만 한 기운은 도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길을 뜯어 놓아 방치되던 것이 드디어 “푸른 길” 조성이 시작된다니 우선은 반가울 밖에. 철길이란 단순한 선이기보다는 어딘가로의 연결이었듯이, 이제 주변 공간과의 연계 속 풍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철도부지로 묶여 재산권 행사에 저자세이던 인근 주민들의 입장에선 다른 견해가 나올 법하다. 그들의 소수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무시해서는 진정한 민주적 사업이 아닐 것이다. 푸른 공원으로 변할 네 곳 광장에 대한 기대나 푸른 길을 산책할 수 있을 혜택과 더불어, 우리에게 푸른 길을 제공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소수의 권리를 잊어도 되는가.

그러는 사이에 “광주현대미술관” 계획도 설왕설래가 재현되고 있다. 애초에 현대미술관 건립 계획이 도청 이전 이후의 도청부지와 예술의 거리를 하나로 묶는 문화벨트 프로젝트로서 구상되었다지만, 그러나 예술의 거리 끝 중앙초등학교의 문제는 여전히 혼미한 상태로 이제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도심공동화로 중앙교는 20년전 5천 규모의 학생이 십분의 일로 줄고 교실은 아무리 특별실을 늘린다 해도 폐실되고 있는 현상이라니 축소 또는 이전이 바람직하겠지만, 이를 전체의 논리로서 소수를 핍박하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할까.

행여 일이 잘 마무리되어 우리 도시가 예향답게 또 하나의 미술관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문턱 높은 예술의 성곽을 지어 놓을 양이면, 기존의 광주시립미술관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100주년 기념전을 가진 베니스 비엔날레의 귀감을 보자. 2년에 걸쳐 자르디니 공원에 중앙 전시장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기에 우회 공사를 해야 했다는 일화는 냄비방 가슴으로 쉬 뜨겁기만 한 우리들 행정에 경종이 될 것이다. 냄비방 말고도 우리에겐 또 하나 흠이 있으니, 흉내 좋아하는 습성이다. 어디 좋은 데 미술관 따라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웅장한 규모의 위용을 자랑할 생각이라면, 아예 역사 깊은 초등학교를 절단내지나 말자. 낡은 교실은 허물어 푸른 나무들을 가꾸면 우리들에게 산소를 선사해 줄 것이니까.

이제 곧 한가위, 그러나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노래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언제냐 싶게 이제 곧 밤 동안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 수증기는 엉겨서 풀잎에 이슬을 내릴 것이다. 밤이슬같은 썰렁한 가을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사에 어딘지 따뜻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2002년 9월 16일)


Posted by 서용좌
소설2002. 9. 1. 23:30

<완료추천사>


실험 정신과 사색적 언어가 돋보인 작품



홍  성  암


   서용좌의 단편소설 <태양은>을 완료추천 작품으로 선정했다. 서용좌는 이미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도서출판 이유, 2001)으로 그의 작품적 역량을 들어낸 바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문단 데뷔 관행상, 단행본 출간도 문단 등단의 절차로 인정 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본인의 겸손으로 다시 한번 등단의 절차를 거친 것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장편 단행본 출간을 1차 추천 작품으로 인정하고 이번에 응모된 단편 <태양은>을 완료추천 작품으로 선정하게 된 것이다.


   서용좌는 이미 출간된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에서 인칭의 문제나 시점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실험적인 태도를 보인 바가 있다. 이 작품은 등장 인물에 일정한 이름이 주어지기보다는 ‘남1’, ‘남2’, ‘여1’, ‘여2’ 하는 식으로 기호화한다. 그리고 상호관계도 ‘선배’, ‘후배’, ‘친구’ 등으로 관계화시키고 또 더러는 상징체계로 ‘청바지’, ‘솜털’, ‘나팔꽃’, ‘달님’식으로 익명화한다. 그리고 매 장이 바뀔 때마다, 또는 같은 장에서도 시점이 바뀌면서 3인칭, 또는 1인칭으로 넘나들며 사건의 어느 측면을 조명한다.


   이렇게 서술시점을 옮기면서 서술자는 등장인물의 시점에 한정되어 사건과 심리를 인지할 뿐 텍스트 전체를 조망하지는 않는다. 이는 화자가 서술하는 세계는 텍스트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으로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현실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며, 화자를 통해서 부분밖에 인지할 수 없다. 그리고 총체적인 사건의 종합과 의미화는 독자의 몫이 된다.


   단편 <태양>에서도 그런 실험성의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앞의 장편에서처럼 사건을 이끄는 몇 개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고난과 슬픔의 상징인 ‘눈물방울’, 불구성을 의미하는 ‘맨발’과 ‘발가락’ 그리고 과거 단절의 의미로 ‘잘린 머리칼’, 그녀의 불행을 키운 ‘삼색 가위’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에 동정적인 유일한 시집식구인 숙모를 화자로 해서 질부, 남편, 계모, 아버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딸과의 관계양상을 때로는 1인칭, 때로는 3인칭의 시점으로 여자와의 관계를 조명한다. 그들의 조명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서술되는 것이어서 매우 단편적이지만 독자는 그것의 종합화를 통해서(화자의 도움을 받지만) 주인공 여자의 공고한 생애의 실체와 접맥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서술구조를 보면 주인공인 여자는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슬하에서 살게되는데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를 의식하게 되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미장원의 미용사가 된다. 그러던 차에 아직 대학생이던 남편을 만나게 되고,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냉대를 받는다. 딸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해서 기죽어서 시집살이를 하게된다. 그렇게 낳은 딸도 할머니와 시누의 손에서 자라며 무식한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입장이다. 그러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딸이 가출을 하게되고, 여자는 무시된 자신의 생애를 극복하고자 술을 마시게 되어 마침내는 알콜 중독자가 된다. 그리고 끝내는 밀폐된 방안에 감금된 상태에서 죽게된다.


   이런 서술구조는 자신의 성격적인 결함으로 역경 속에 살아야 하는 운명적 플롯의 전형으로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등장인물의 익명화와 시점 이동의 다양성, 그리고 사건을 이끄는 몇 개의 상징체계가 남기는 강한 인상 등으로 하여 작가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런 실험성이 하나의 시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화자의 관찰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색의 깊이와 접맥되어서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역할 유희에 서툰 그녀는 확실히 조금 맹해 보였다” 라든지 “컴퓨터 자판 모양으로 일정하게 배열된 묘표” 같은 서술 표현은 매우 신선하고 또 깊이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의 기법은 단순한 기법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등장 인물의 삶의 본질로 접근하는 지름길이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기존적인 작품의 통속, 또는 통념화에서 벗어나 새로움의 시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특히 시의 적절한 삽입은 작품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여기서 기법이 곧 내용이 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강한 실험정신에 토대를 둔 만큼 사건 전개나 사색적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신인들이 항용 빠지기 쉬운 몇 가지의 단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가 친절하지 못한 서술이다. 작가의 관념에 의해 대충 넘어가는 식의 서술은 그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독자로 하여금 작품 이해에 큰 장애가 된다. 둘째는 자주 발견되는 비문(非文)이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서술하지만 독자는 제각기 자기식의 어법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객관화된 문법체계를 따라야 한다. 셋째, 어휘의 정확하고 적절한 선택이다. 뛰어난 사색적 언어가 때로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적절치 못한 어휘선택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단점의 지적은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엽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문학작품은 언어의 예술이고, 언어로 사색하고, 언어로 사물을 존재케 한다는 면에서 파악한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서용좌의 추천 완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특히 우리 문학의 세계화가 절실히 필요한 현실에 비추어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분들의 소설창작 참여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외국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우리 소설의 소재적, 주제적 영역 확장에 기여하고 동시에 문학적 수준을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서용좌의 신인 등단은 더욱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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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료추천 소감


소나기 금방 들어 닥치는 무더운 한여름의 오후,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감히 하늘이라면 신성모독일까, 은총처럼 어디에선가 내려온 부름이라면 변명이 될까. 서당개 3년 풍월이라고, 하세월 하이에나처럼 남의 글 파먹고 산 나머지이리라. 기껏 교실 크기의 낡은 중학교 도서실에서 시작된 긴 긴 유혹에 굴해버린 지금, 제 5막에서야 등장한 한 조역의 역할처럼, 기대되지 않고 슬그머니 나선 밤길 걷기에 거창한 욕심은 없다.

예컨대 「태양은」이란 제목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인생에 주제가 없거늘 글쓰기에 무슨 주제냐 싶은데, 이름은 있어야 해서 첫 단어가 내걸렸을 뿐이니까. 이런 초라한 글을 빌미로 멍석을 깔아준 《소설시대》에 다만 고개 숙인다.

있어도 없는 엄마-아내-딸, 나를 참아주는 가족이 내 글의 온상이다. 까다롭다는, 괴팍하다는 나와 더불어 이웃해 사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모두를 사랑하나 보다.

                                                        2002년 여름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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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02. 9. 1. 23:00

    태양은   

 소설시대 4호

 

 태양은 바람을 타고 둥실 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따가운 등뒤로 그것을 느낀다. 나보다 한참 젊어서 떠난 여자가 매장되고 있다. 말하자면 토장(土葬) 절차가 냉랭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자들이 장지까지 따라나서는 일은 좀 뭣해도, 나 어린 질부의 장례에 발인만 보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꽃상여 대신 장의차와 혼백이 도착했을 때는 멀리에서 보아도 천광(穿壙)은 끝나 있었다. 광상(壙上)에 차일을 친 흔적도 없이 쨍쨍 햇빛이 광내에 내려꽂히고 있었다. 구덩이는 붉은 흙이 드러나 보일 뿐, 선입관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차가운 느낌을 발한다. 벌써 윗통을 벗다 시피 번들거리는 신체를 드러낸 건장한 체격 서넛이 노동 후의 쾌감을 즐기는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쉬고 있다가 상주들을 맞는다. 산역을 업으로 하다보면 그것 또한 일상이 되는 것인지, 건강 이온 음료수 선전 같은 데에 나오는 땀과 성취의 희열에 젖은 운동 선수 폼은 화덕처럼 이글거리는 열기로 인해 내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했다. 다행으로 나는 일찌감치 정지했으므로, 공동에서 멀리 서있게 되었다. 혼백이 도착하자마자 제물 진설이 부산하다. 특별히 오열하는 사람도, 숨어서 훌쩍거리는 사람도 그저 그렇다. 그저 숨을 죽이고 절차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이렇게 버려지는구나… 


삼일장이라지만 저녁 늦게 숨을 거둔 경우에는 만 이틀이 채 못된다. 이번 경우는 저녁 늦게 죽음이 확인되었다고나 할까. 응급실은 거쳤지만, DOA, 데드 온 어라이벌, 그러니까 도착 시 이미 사망이라는 진단으로 곧바로 영안실 행이었다니. 죽은 시각도 서로들 모른 채 그렇게 엉거주춤 장례절차가 있었고, 이제 그 마지막 과정이 냉랭하게 진행되고 있다. 매장 풍습은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던가, 세상 어딘가는 몰라도 우리 나라에선 고인돌로 미루어 선사시대에도 벌써…


이런 냉철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어른 축에 끼이는 내 역할이었다. 늘상 그랬다. 시댁이란 공간에서 여자들은 대개 그랬다. 지금 정중하게 버려지고 있는 자는 새장의 새, 집 속의 여자였다. 나는 새장의 새, 집 속의 여자… 누구라도 들을세라, 그녀는 그런 구절을 외곤 했다. 라디오 프로에서 딱 한번 들었는데 외어졌다고 했다. 그 시의 제목이 「새에 대한 생각」 인지도 모르면서. 숙모님댁에는 시집들이 많은가요,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숙부님 외국출장 가셨을 때나…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이 생일이라도 처음엔 큰집에서 챙겨주었고, 나중엔 괜찮은 식당에서 기분을 내는 편이었다. 내가 직장나가는 핑계로 음식장만을 못해서 그렇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그편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 행사는 항상 큰집에서였다. 어떤 며느리도 그런 큰집 시집살이는 어렵다. 단촐하게 살다 시집온 사람이면 더하다. 단촐하다 못해 외로움밖에 모르던 그녀는 어리둥절도 했으리라. 어리기도 헤서 더욱 안쓰러웠다.

바깥생활 하시니까 "새장의 새" 그런 시는 모르시지요. 엄청 가슴이 찡한 걸요, 날개는 부러지고 주둥이만 뾰쪽한 새… 

왜 몰라, 꾀 유명한 시인걸. 날개는 퇴화되고 부리만 뾰족하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아니 어떻게?

그래 여기 어디 시집이 있을 것이야.


저 어려운 책도 좀 주세요… 그녀는 책들을 그리워했다. 처음엔 그렇게나 짧은 학력인지 몰랐다. 학력에 대한 보상으로 어려운 책을 탐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소설도 수필도 건성으로 가지고만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세상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한 두 권 골라주기가 쉽진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는 거의 모든 책이 어렵다. 다행히 그녀는 시집이라야 가장 어려운 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으로는 시집 몇 권 골라주기는 부담이 없었다. 내용이라는 것이 무게가 모두 달라서 권해준 부담이 날아가 버리니까. 시집을 좋아해도, 사람들은 그녀를 조금 맹한 것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는 그녀가 시 몇 편에 탐닉한다고 아무도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상황에 맞는 모습을 주문했지만, 역할 유희에 서툰 그녀는 확실히 조금 맹해 보였다. 적대적이지는 않은, 그러나 확실한 계급사회를 의식하지 못한 그녀는 당연히 벽에 부딪곤 했다. 더러는 사람에, 어깨에, 아주 더러는 가슴에 부딪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장 험준한 벽은 예상대로 시댁 식구들이었다. 걱정 말라던 기사 같았던 남편은 결혼과 더불어 차츰 적진으로 넘어갔다. 남편은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굴릴 뿐이었고, 마루 바닥과 그녀를 제외하곤 남편의 그런 내색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폄이 시작되었나 보다. 여자의 남편이 조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옆의 딸은 고개를 더 깊게 떨구기만 한다. 어른들이 일러준 대로 하관을 잘 지켜보아야 한다. 곡을 그치거라…  누군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말해도 곡을 그칠 사람이 누구인가. 목놓아 울던 사람이 없다. 말은 떠다니고만 있다. 굄목 위에 관이 가볍게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어딘가에 부딪고 가는구나… 붉은 명정을 덮는 동작이 보인다. 곡이 잠깐 시작되다 만다. 형식적인 곡이다. 그게 아니다. 사람들은 곧 차렷 자세로 합창단들처럼 노래를 부른다. 곡을 하려는 사람, 그것을 말리고 예배의식을 질서 있게 도입하려는 사람이 잠시 엇갈린 것이다. 외가로는 일찍 깬 기독교 집안이지만 친가는 구식이고, 자식들은 점차 인텔리화하면서 기독교도가 되어가는 과정이라서, 그러니까 골수 정통 기독교인 가정이 아니어서 생긴 일화였을 것이다. 나는 노래를 알지도 못하고 입만 따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또한 꼭 가까이 다가갈 계제도 아니라서 어딘가 엉거주춤 머문다. 한 자리에 그냥 서 있으려니 근처의 묘표들만 키가 자라오듯 눈 속으로 파고들어 온다. 어딘가에 이 여자를 위한 묘표도 준비되어 있겠지…


컴퓨터 자판 모양으로 일정하게 배열된 묘표에는 대충 궁서로 여러 자손들의 이름이 보조되어 음각의 성명자가 적혀있다. 동네의 환경정리는 자유민주주의로 각양각색 서로가 서로를 흠집내는 것이 우리의 주택문화이지만, 묘표는 이웃 눈치를 보는 셈인지 하나 같이 일정한 크기이다. 망자는 묘표에 적힌 글씨가 아무리 달라도 계급이 없어진다. 이삼일 장례 기간 중에는 망자가 무슨 회장님이나 지방 유지라 해도 누구도 그의 그녀의 묘표 따위에는 별다른 신경을 쓸 리 없고, 관리소 측에서 그냥 주는 대로 묘표를 받아오기 때문이다. 이 바쁜 세상에 죽은 자를 위해 취향을 고려해줄 산 자는 아마 없는가 보다. 물론 선산이라는 제 2매장지로 승격될 때는 문중의 장식품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묘석에는 무엇이라 적힐 것인가. 무엇이라 적어야 할까. 아니 너는 무엇이라 적고 싶어 그러느냐? 서로 시댁에서 만난 사이인 나는 그녀의 처녀 적을 전혀 모른다. 어린 나이에 학생남편 따라 시집에 들어와 오늘에 이른 여자, 그것이 외형의 전부다. 돌이켜 생각하자면, 멋모르고 대졸 인텔리 혹은 기독교인, 혹은 대졸 인텔리 기독교인 등으로 둘러싸인 환경에 표류하여, 크지도 않은 눈을 높이 치켜들고 저 하나의 공간을 움켜쥐느라 소진해 버린 세월이 그녀의 인생의 총계였다. 서양이라면, 대졸 인텔리 기독교인들의 섬에 표류하여 애써 살다간 아무개여, 저 세상에선 아무도 아닌 섬에 이르러 숲 속의 새가 되거라… 라고 위로의 문구를 새겨 넣을 지도 모른다.


     날개는 퇴화되고 부리만 뾰죽하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몰래 중얼거렸다…


원래 시의 "중얼거린다"만 과거형으로 바꿔 묘비명으로 써도 족하리라. 그녀의 입에서와 다르게 무심코 과거형으로 내뱉은 내 마음은 벌써 그녀를 지우려 하는 것일까? 이 따가운 태양에 머리를 어지럽히면서 여기 왜 서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 여자를 매장하는 것인가? 어떻든 저승이 있다면 지하에 있을 것이기에 묻으려 하는가? 이들 가족이 기독교인들이라면 망자를 왜 하늘에 묻지 않는가? 하느님 가까이, 저 하늘 속에. 하긴 그래서 요즈음엔 망자를 연기로 만들기도 한다지… 아니면 사자를 겁내어서 이승에서의 관계를 끊기 위하여 매장하려는 것일까? 일종의 확인사살로서? 옛날 어디선가의 풍습으로는 시체 위에 무거운 돌을 눌러 놓는 매장법도 있었다고 했다. 시신을 염할 때 튼튼한 삼베로 12마디씩이나 묶는 것으로 보아도, 확인사살을 아니라 해도 확인이별 쪽은 확실하다. 목관에는 못을 박아, 석관은 말할 것도 없이 무거운 중량으로,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을 갈라놓는다.


그래요, 그랬어요. 전 사실 이만큼만 살다가 떠나게 될 줄 예감했어요. 딸아이가 영 등돌린 다음부턴 마음이 먼 데 하늘 보듯이 내 지나온 삶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혹시 제 이름을 알기나 하세요? 어차피 객식구처럼 가끔 만난 처지에. 게다가 숙모님이야 무슨 걱정이 있었나요? 눈물나게 고마운 것은 저에게 한 두권 시집을 선물해주신 일이었지요. 제게, 누구도 시집 같은 것을 선물해준 적이 없는 제게. 딸아이도 마찬가지였지요. 무식한 엄마, 거칠은 엄마라고 부끄러워했으니까. 무식하기야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딘가로 사라진 저는 뭐 유식쟁이에 끼이게 되었나요? 머리 나쁜 엄마 탓에 딸아이 성적이 그 모양이라고… 말로는 차마 안하면서 바라보는 눈길 눈길들… 그런 것이 독이 되어 들어갔지요. 그런 것은 독이 아니고 내가 삼켜온 술이 독이라구요? 녹아버린 것이 내장부터인지 마음부터인지 누가 안답니까? 차가운 땅속에 아주 단단히 갇히기 전에 내뱉는 소리가 으스스 귓가에 어린다.


그녀가 속앓이를 시작한 것은 아직 어린 나이로 아이를 가졌던 그때부터였다. 그녀의 인생관으로는 아이는 제 아버지를 가져야 했고, 그 일을 위해 그녀는 다른 많은 것을 버렸다. 아이는 태어날 때 제 아버지를 가졌다. 대신 제 어머니는 세상의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딸아이의 잇몸에 싹트는 하얀 이빨 조각만으로 행복했다. 달리 행복을 구할 데가 없었고, 그냥 그것이면 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조금 부끄러워했다. 그것이었다. 시댁에선 시어머니도 어렵고, 공부하느라 미혼인 손위 시누이도 어렵기만 했다.


어찌 저렇게 아무 것도 못하고 애 하나에 매어서도 쩔쩔 맨다니. 어쩌다 그리 순해 빠져서는. 순한 건지 모자라는 건지 원.

시어머니의 혼자 말에 시누이는 짜증이다. 엄마, 그러게 왜 양보할 걸 양보해야지. 엄마 이제 어떡할 건데?

얘야, 너도. 이제 뭘 어떻게 해. 네 동생이 책임진다는 걸 누가 말리며, 또 사람이 책임은 져야지. 여자가 집에서 뭐 별 자본가지고 산 대니, 인물 어지간하고 조용하면 되었지. 다음에 아들만 낳으면 되었지 뭘 그러니. 너도 곧 시집갈 것이면 그러는 것 아니다. 아 누나가 어서 가야지. 어서 어서 잘 들 골라 봐. 네 형부들 오죽 잘났냐? 


그 시어머니는 내게는 큰형님이었다. 큰형님네 가족은 평범 무탈했다. 시아주버님은 농협에 잠시 있었던 경험으로 작지만 탄탄한 사업을 지니고 있었다. 군수 살았던 개화된 장인 덕에 지방 유지들과의 교제 범위도 넓었다. 지방일수록 기독교는 개화된 특권 비슷했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러움을 샀다. 위로 세 딸을 낳았지만 늦게 본 막둥이 아들 하나로 기쁨을 더했다. 아들 딸 모두 대학을 보냈으니, 그 시절로서는 성공한 어머니였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큰딸은 부부교사로 부족한 듯 건실하게 살고 있고, 피아노를 전공한 둘째는 졸업 전부터 졸라대는 고교동창생을 따돌리고 중매자리를 놓아서 일찍 시집 보냈다. 어찌어찌 지방분교로 내려가 의과대학을 나온 사윗감에 걸맞게, 집안에 의사 하나는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무리를 했다. 셋째는 대학원까지 진학했으니, 자식들이 점차로 성공하는 기미에 내심 즐겁기만 했다. 그 아이 공부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온갖 정성을 들이지만, 노상 막둥이만 걱정이었다. 썩 양에 차지 않은 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랬지만, 우직하게 남들 따라 일찌감치 군대에 들어간 후는 걱정이 더했다. 그러나 딸들 덕분에 시간은 빨리 흘렀다. 명절 때에도 어떻게 휴가를 맞췄다. 참 좋은 세상이었다. 제대만 남았다.


아들 문제는 뜻밖에 시작되고 있었다. 학교 앞 미장원에서 얽히기 시작한 인연, 물론 처음에는 그냥 아무 일도 아니었다. 대학 입학 후엔 머리를 짧게 자를 필요는 없었고, 스타일도 자유로워서 이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이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들이랑 어울려 미장원에 들어갔다. 남학생들도 이발소 대신 미장원엘 가는 모양이었다. 이발소들이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었고, 고등학교의 구내이발소를 찾아가는 것은 좀스런 짓이었다. 그날 서너 명 남학생이 몰려들어간 미장원에는 겉보다는 안이 사뭇 작아서 주인 아주머니 외에는 어려 보이는 잔심부름꾼 하나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용사 한 사람이 머리를 깎자면 시간이 너무 걸릴 수밖에, 그런데 그들은 젊은이답게 마음이 급했다. 처음엔 그냥 천장을 향하고 기다렸지만, 다음에 여자 손님도 들어오니까 더 급했다. 조금 있으려니 머리에 보자기를 쓴 아주머니/할머니도 들어왔다. 할머니는 대뜸 애송이 처녀 쪽으로 가서 앉았다. 보자기가 풀리자 분홍색 뼈들이 나타났다. 동글동글한 뼈는 플라스틱 기구였다. 플라스틱이 풀리자 곱슬머리가 나타났고, 그 속으로는 허연 머리통이 비췄다. 처녀가 머리를 감기고 나니 아까 보단 나은 머리가 되었다. 손질을 하자 점점 더 나아졌다. 아하?


저 우리 다 한 줄로 기다려야 하나요?

아 저기도 미용사예요. 오래 되진 않았지만 분명 미용사니까 일하지요.

야 우리, 가위바위보 하자.  


그렇게 해서 초보미용사에게 걸린 그는 어색해 고개를 비뚜름히 그쪽 의자에로 엉거주춤 앉았다. 보자기 할머니가 앉던 모습을 흉내내었다. 그런데 미용사는 눈을 들지도 않았다. 거울 속에서도 눈을 주지 않은 채, 어떻게요? 하고 묻는 말이 입도 벌린둥 만둥 했다. 대충 약간만 짧게 라고 말하며 괜히 주눅든 그는 거울 대신 무릎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은 천으로 덮혔으니까 무릎이 있는 근처였다. 어딘지 스물거렸다. 머리카락이라도 등으로 들어간 것일까? 무심코 오른손을 움직여 가려운 쪽으로 뻗으려 했다. 그때 손목쪽 팔에 물방울이 살짝 스쳤다. 그때 그는 그것을 지나쳐야 했을 것이다. 물방울 일까말까 하는 작은 습기, 그것을 지나치지 못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그 작은 물방울의 출처를 올려다 본 그는 무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누가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처녀의 눈에 소리 없는 눈물이 한 방울 넘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십분의 일초, 그 다음 계속된 것은 영겁의 시간 같았다. 그는 처녀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죄인이 되어서 괜스레 고개만 쳐 박았다. 머리 깎이는 소리도 의식되지 않았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 있었고, 무심한 발걸음으로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밥 먹으러 가자는 친구들의 말에 어째 목이 마르다며 맥주집을 고집한 것은 그였다. 여자의 얼굴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올려다보았는데도 그랬다. 잔을 든 오른 손 팔목에 아니 조금 위쪽에 그 눈물방울이 말라있었다. 혀끝으로 가만히 대어보니 조금 짭짤한 느낌이었다.


야, 눈물의 농도는? 내 소나기 퀴즈 낼께.

이 자식이, 갑자기 맥주 타령이더니 웬 눈물?

아 또 눈물이라 하면, 육상에 사는 척추동물의 누선에서 나오는 분비액으로, 사람의 경우는 외안각 윗눈꺼풀 근처의 눈물샘에서 분비하는 투명한 액체로서…

야 집어 쳐, 너 그 암기법 고시공부나 시작해라 뭐.

어 그런데 육상에 사는 척추동물이라니, 그럼 육상에 살지 않는 척추동물도 있냐.

나 참,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는 척추동물 아니냐? 포유류의 눈물이야 그렇다지만, 악어의 눈물이란 말이 왜 있게!


여자는 남자보다 눈물이 많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순간에 울고 있었을까? 여자는 그의 생각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그는 소가 되새김하듯이 그 일을 되생각했다.


머리카락 무더기가 구르는 차가운 바닥, 비질을 하면 머리카락은 솜사탕뭉치처럼 그녀의 슬리퍼 위로 기어오른다. 그리 깨끗치 않은 흰 양말 위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더러 그녀의 발등을 간지른다. 머리를 깎는 내내 그냥 그곳만 보고 있으려니 더러운 흰 양말 앞 엄지 쪽엔 구멍이 날듯 헤진 부분이 더욱 시커멓게 드러났다. 좁디좁은 볼에 유난히 엄지 쪽만 튀어나와 망가뜨렸으리라. 그러고 보니 슬리퍼가 너무 넓어서 발 앞쪽이 자꾸 앞으로 쏠렸다. 민망해서 눈을 감자니 그것 또한 어색했다. 자는 줄 알면 좀 그렇다. 실눈을 뜨면 다시 헐렁한 슬리퍼 속의 메마른 발, 더러운 양말. 가늘게 구멍난 엄지발가락. 설마 하고 정신을 가다듬자니 그는 그녀의 발을 발가락을 그리고 있었다. 제 주인 아닌 것 같은 헐렁한 슬리퍼도 지저분한 양말도 벗긴 채. 발등은 파르스름 핏줄이 돋고 발등에는 가녀린 뼈 줄기가 드러났다. 더러운 희색 양말이 가렸던 발은 대조적으로 깨끗했다. 그럴 것이다. 하얗고 긴 발가락을 가진 외로운 발, 다 커서 홍역을 치르는가 뭔가 말라비틀어진 발을 움찍거리던 막내고모의 맨발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 속 막내 고모는 큰누나보다도 작은 체구로 방안과 마루 끝만을 오갔다. 왜 누나처럼 학교에 안 가는지, 왜 같은 밥상에도 오지 않는지, 고모니까 그러리라, 그것이 전부였다. 햇볕이 드는 오후에도 막내 고모는 조각 누비이불을 덮고 마루 끝에 눕다시피 앉아 있곤 했다. 고모가 움찔거리면 놀랍게도 맨발이 드러났다. 누어있는 특권이 맨발인가? 나중에 고모는 하늘 나라에 갔다고 했다. 하늘나라에는 맨발로 가는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도 맨발이 아니었다. 어려서 본 할머니와 어머니의 것은 찌그러진 양말, 알고 보니 버선이었다. 고모들의 하얀 양말은 사시사철 남성여성 공용이었다. 누이들의 것은 색도 있었고 줄무늬도 있었다. 뒤뜰 빨래 줄에 걸린 양말들은 많은 식구 수를 고려해도 많고 많았다. 그것들은 바람에 날려 철봉대에 걸리거나 나뭇가지에도 걸렸다. 장작더미까지 날아가 있기도 했다. 둥그런 전구 알에서 여러 바늘땀으로 새로 고쳐지는 것들 중 단연 양말이 으뜸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일 말고도 여러 일을 모여 앉아 하기 좋아했다. 여자들은 많아도 대개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대평원의 동물들이 뭔가에 대한 보호 본능으로 뭉쳐 이동하는 것과 비슷했다. 혼자 사색에 잠겨있는 것은 남자였다. 그는 남자아이였으므로 아이 때부터 혼자 사색에 잠겼다. 사색에 잠겼다는 것은 순전히 그의 착상인데, 예컨대 응접실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 모습이었다. 응접실은 ― 그것이 왜 응접실로 불렸는지는 이상하다, 별로 손님대접을 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 아버지 전용이라기 보다는 남자가 혼자 있고 싶으면 들어가는 방이거니 했다. 큰고모가 고모부이랑 오는 날이면 고모는 어머니에게로 고모부는 응접실로 갔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도 혼자서 그리로 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가만히 가서 앉아보곤 했다. 자연히 그곳은 사색하는 곳이라 생각되었다. 혼자 있으면 무엇인가 모를 가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사색이었다. 실생활에서 잠시 떠나기, 그렇게 구원을 주는 것이 따로 없었다. 학생이 되어 할 일의 짐이 많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리가 아프면 그곳에 들었다. 그는 응접실 단골이 되었다. 아버지는 대개 늦으셔서 빈 응접실을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은 넉넉했다. 어떤 때에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대로 해가 저물고 불을 켜지 않고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는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천천히 날이 저물고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자신의 존재 이외에는 아무런 초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가 어둠을 좋


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절대적인 고독감은 근사했다. 아버지 또한 그러신다는 생각에, 기이하면서도 동질감을 느꼈다. 아버지는 아마도 새벽녘의 날이 밝는 순간 홀로 이곳에서 유아독존의 느낌을 가지실 수 있을 것이라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혼자 쓰는 방에서 누군가가 깨우러 와야 일어나던 버릇으로 아침의 여유는 그림의 떡이었으니까. 대신 그 혼자만의 세계는 그에게 나머지 시간을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어머니랑 여자들이 집에서 그러하듯, 공동으로 이끌려 다니는 것이 아이들의 학교생활이라면, 그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어느 때고 혼자 만의 시공간 속에서 혼자 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으니까. 그곳은 완벽히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말하는 법을 터득해 나아갔고, 가만히 앉아서 허공에 수없는 문장들을 써나갔다. 만일 종이에 옮겨졌더라면 고교졸업반 문예지에라도 실려 다른 친구들의 세상 속으로 날아갔겠지만, 머리 속에서 쓰는 글은 한없이 쌓여만 갔다. 그는 풍요로웠고, 더는 욕심이 없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그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결혼으로 신식 문물에 빨리 적응한 경우셨다. 외할아버지는 을미사변 이듬해 태어나서 어려서 동학을 기억한다 하셨고, 이상한 반작용으로 서학을 받아들이셨다 했다. 외할아버지의 서학은 기독교였고, 있는 땅 바쳐서 교회하나쯤 개척해서 목사님을 모시는 일은 선진 가문의 영광일 터였다. 아버지는 그런 집안의 사위가 되는 행운이자 의무로서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친가에서는 외톨이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다음 차츰 아버지가 가족들을 다 돌보신 이후 가정은 기독교 쪽으로 쏠렸다지만, 아이들은 예전 일은 모르니 그런 아버지만을 알고 자라났다. 아버지는 대범한 큰아들을 원했을 것이나 아들은 늦게 서야 태어났다. 누이들 밑의 아들은 대가 세지 못하다는 공식이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를 위시한 여자들의 세계에서 과잉보호 받는 때문이라 했다. 그도 과잉보호를 받았다. 여자들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여자들은 남자들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막둥이를 챙긴 것은 느린 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를 목사관과 같은 가까운 좋은 환경으로 이끄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슈바이처같은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에 몸바치는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소년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뭔가 남자는 대들보 같아야 한다고 하시며, 의사같은 것은 은근히 얕잡아 보셨다. 그러나 그가 겨우 서울소재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상담 결과가 나온 뒤에, 아버지는 법관쯤의 기대를 접었다. 한 집안에는 그저 가업을 이을 아들로 족했으니까. 딸만 셋이었을 상황에 비하면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키는 다 자란 아들이 군대에 시달려서인지 힘들어하는 그 즈음 아버지는 더욱 사색에 잠겼다. 얼굴이 점점 길어졌다. 근심들이 슬며시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을까?     


그런데 맨발이 문제였다. 오직 뼈가 드러난 병든 고모에게서 흘끗 보았던 맨발의 기억. 그는 그것을 더러운 흰 양말 속 맨발에 대한 상상으로 엄청난 환상에 빠져버렸다. 무엇엔가 쫓기듯 곧 군대에 입대했지만, 군막사에는 그에게 안정감을 주던 아버지의 응접실을 대신해서 그의 사색을 담을 공간이 없었다. 일찍 눈을 감고 누워서 소등 시간이 지나 칠흑같이 어두워진 넓은 막사 내에서나 사색의 자리를 찾았다. 4차원의 공간, 앉아있는 대신 드러누워서요, 점점 어두워지는 대신 아주 어두워진 다음에 시작하는 변화만 빼고는 괜찮았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잠이 들기 전에 생각을 하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맨발이 문제였다.


어떤 다른 여자의 맨발들을 문득 보게 된 것은 면회소에서였다. 젊은 남자들에게는 젊은 여자들이 심심찮게 면회를 왔다. 처음에는 젊은 남자들의 우악스런 군화와 대비되는 젊은 여자들의 작은 신발이 신기했다. 전엔 집안 여자들의 작은 신발들을 왜 의식하지 않았었는지, 생각해 보니 참 의아했다. 캠퍼스 여학생들의 신발이 기억나지 않은 것 또한 의아했다. 여자들의 신발이 왜 하필 면회소에서만 돋보이는가. 당연히 그 대비로서 군화 때문이었으니, 그냥 그렇게 지나갈 일이었다. 매형과 함께 그를 면회 온 누이는 펑퍼짐한 단화였다. 하긴 설악산 여행중이라 했으니 그럴 밖에. 하지만 맨발 아닌 발이 이상했다. 그는 아무튼 그 다음에는 면회소 여자들의 작은 신발만이 바깥 세상의 상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얇아지는 옷차림을 주시했을지 모르나, 그는 맨발이었다. 발뒤꿈치가 드러나는가 싶더니 점차 앞은 물론 끈만 남는 아슬아슬한 노출에 몸이 뒤틀리곤 했다. 어쨌거나 쌀 반가마는 넘을 몸무게를 저 가느다란 굽에 끈만을 달고서 싣고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못해 신기(神氣)라 느껴졌다. 여자들은 신선이었다. 구름 위도 떠놀 수 있을. 그 1cm도 못될 끈을 벗기면 맨발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어쩐다? 바닥만을 붙여서 구두가 되는 일은 없나? 발바닥에 본드풀을 붙인다 해도 불가능할 일이었다. 아하, 맨발로는 보도를 걸을 수 없구나. 다른 말로, 보도를 걷는 맨발을 볼 수는 없구나. 여자의 맨발은 그럼 영 볼 수 없는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려 이젠 사라진 막내고모의 맨발처럼?


그는 여전히 맨발의 기억을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고모의 그것보다 더 뾰쪽하고 앙상한. 기억의 끝에 얻어낸 답은 잘려나간 머리카락들 보송이 사이에 드러난 살색이다 못해 허옇게 바랜 맨발이었다. 희검은 솜사탕 사이로 내비친 때묻은 발가락. 더러워진 흰 양말을 투과해 비추던 앙상한 맨발의 주인은 그가 눈물 맛까지 기억하는 그녀였다. 불이 켜져있어도 어두운 쓸쓸한 작은 미장원 차가운 바닥 위의 초라한 맨발. 뜨겁지도 않은 눈물 한 방울을 선사한 그녀. 그러다 현란해진 맨발들이 차츰 줄기 시작해서 조바심은 더했다. 여름이 끝나가기 전에 그는 마침내 휴가를 받았고, 곧장 그의 맨발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의 그녀를 향했다.


대학가는 빠르게 변한다. 딱 한번 갔었던 미장원은 위치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 사이 늘어난 큰 건물들은 우선 치장부터가 달랐다. 원색의 강렬한 구호와 시커먼 간판의 대조가 그랬다. 못 보던 없는 검은 궁서체의 서점 간판과 스테인드 글래스의 소주집과 분식집이 그랬다. 뭔가 억눌린 분위기는 애써 찾아낸 미장원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주인 여자는 여전히 은회색 비닐 앞치마였다. 뒷머리를 더 올려 빗었어도 한 번은 보았던 얼굴일 터였다.


저 여기 미스 아가씨 미용사…

아가씨 미용사요? 아니 이게, 아니 어떻게 걔를 찾아온 사람도 있나으? 

"있나요"라고 하기 싫어서 그러는지 이상하게 말꼬리를 흘렸다. 저 그러니까 작년 이맘때인가 저쪽에서 이발하고…

아니 그러니까, 걔하고 무슨 일있어으?

아니 그건 아니구요, 뭔가 하면 저…

참 우습네으, 알기는 아는 사람이으?


어렵게 더듬거려서 핑계를 대고 물은 끝이었다. 그래도 미용학원선생이 미용실 지점을 내면서 "걔를 스카웃 해갔다니까으" 라는 푸념을 드러냈다. 대학가는 아무 것도 안된다고, 사람들이 소주집에 모여 뭘하는지, 그런 덴 장사가 된다고, 바로 옆집 안 보았냐고.


학원선생이 낸 미장원 지점이라는 곳은 시내 쪽에 있었고, 그는 무작정 시내를 향해 걸었다. 시내에 이르러서도 어쩔 줄 몰라서, 다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곳은 모르는 곳이니 일단 손님처럼 들어가 본다? 그 다음은… 시간이 어중간해서 중간에 함께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럼 넌 그 여자를 만나서 데이트라도 하려는 것이더냐? 그냥 이 여름의 맨발만 보려는 것 아니었어?


그는 아직 한낮인데 그 곳 간판을 찾았다. 대학가와는 전혀 다른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거리 한 복판 4층 건물 2, 3층이 미장원이라 쓰여있었다. 그는 무턱대고 2층부터 투시해본다. 사람들은 똑같은 멋진 앞치마를 입고 이상한 소음 속에서 똑같은 동작으로 팔을 치껴든 채 사각사각 머리를 자르고 있을 것이다. 평균보다 작은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3층은 더욱 뿌연 공기 가운데 또 다시 똑같은 동작의 무엇인가에 열중한 사람들 뿐이다. 급히 눈을 거두어 다른 간판들을 읽어보았다. OO호프, 레스토카페OOO? 그는 아직 계단은커녕 입구에도 들어가지 않고 서 있었구나 싶었다. 다방은 없나? 그는 어슬렁거렸다. 가슴을 추스리고 정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그래서요? 어디 손님이 한 두분…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은 그녀를 말해준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글쎄요. 전 그런 곳에서 일한 적이 없는데요. 손님이 뭔가 착각…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은 그녀를 말해준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은 나만이 아는 비밀이거늘. 그래도 나를 부정한다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그런데 그게 제가 처음이라고…


아니다, 그 말은 과장이거나 내 상상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나는 그때 내가 그녀의 첫 손님이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그런데 사실 제가 놀랐던 것이 있었는데 묻지 못했습니다. 그 궁금증 때문에… 


아니다, 이건 그녀를 놀라게 할 것이다. 나는 그녀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맨발을 아니 나의 그녀의 맨발을 보는 것만을 원했지 않은가.


계단을 올랐다. 기대했던 향수가 아닌 독한 약냄새가 풍겨왔다. 각도를 달리한 수많은 거울들 틈에서 희멀건 까운 대신 늘씬한 제복의 여자들이 겹쳤다. 기억 속의 그런 왜소한 처녀의 모습은 없었다. 3층 그곳에도 더 활발한 움직임뿐이었다. 엉거주춤 느린 동작의 동그란 그녀는 없었다. 화려한 얼굴들을 주시할 수는 없는 일, 그 얼굴들에 대고 건넬 말도 없었다. 그는 돌아섰다. 문간은 한 발짝 앞이었다.


무슨 일이셔요?


아, 누군가 "무슨 일로 오셨죠?" 라고 야무지게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손님, 뭐하시게요?" 라고 하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무슨 일인가 하면 그것이, 저기 O대 앞 미장원에서…


사각사각 연기 냄새 속에서 가만히 움직여 오는 여자. 이제도 소녀만큼한 몸으로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머리를 하고 고개를 내민다. 숙인 채 내민다. 입은 열지도 않는다. 그는 서둘러 제가 좀 전할 말이 있어서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고는 돌아서 나온다. 그는 그렇게 기다릴 양이다. 그가 머뭇거리기만 하고 실제로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음을 그는 알지 못한다.


아직 거리는 환하다. 길 건너편으로 도망치듯 달린다. 전봇대에 살짝 부딪힌다. 군복이 전봇대에 부딪히다니, 민간의 눈으로 보면 한심한 놈이다. 문, 아니 문이 있어야 할 열린 공간은 일미터 넓이도 안되어 보인다. 그 속에서 그녀가 고개를 내밀면 그에게 들키지 않고 나갈 수는 없다. 쳐다보는 눈에 힘을 싣자 그녀가 나올 구멍이 점점 커진다. 시커멓게 뚫려서인지 막혀 보였던 그곳이 뿌연 안개처럼 넓어만 간다. 이제나저제나, 숫기 없어 보이는 그녀가 근무시간을 쪼개어 나올 리는 없다. 그러나 퇴근시간은 있기 마련이고, 그녀는 날이 어두워지면 나올 것이다. 어색해지면 그럴 수록 쳐다보는 눈에 그리고 이마에 힘을 실었다. 그녀가 나올 구멍이 점점 커진다. 점점 밝아진다. 제법 크고 따뜻해 보이는 저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희미하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눈여겨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가 그나마 앞모습으로 나올 것이 다행이다. 적어도 인상만은 지니고 있으니까.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 희한했다. 뒷모습은 아예 셈에 넣지 않았나? 아무튼 앞모습으로 드디어는 그녀가 걸어 나올 것이었다. 밖이 어두워지면서 구멍이 상대적으로 점점 밝아졌음은 그가 알 리 없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시간이 흘렀을 때 요란한 머리복색의 여자 둘이 나타났다. 미장원 여자답게 부풀린 컬이 멀리에서도 돋보였다. 이번에도 역시 부푼 머리에 유난히 어깨가 강조된 의상의 여자 실루엣이었다. 조금 간격으로 그런 여러 사람들이 나갔다. 그녀는 아직 아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청소담당인가? 그리고도 한참 동안 더 이상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눈을 비껴 그 문을 나갔을 리는 없다. 그러고도 한참만에 마침내 까운을 입지 않은 그녀가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서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숙인 고개만 아니었다면 작업복을 벗은 그녀의 차림은 오히려 생소했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적당한 치마의 실루엣은 참 생소했다. 일터를 벗


어나는 차림은 청바지 정도의 발랄한 모습이거나 날리는 짧은 치마여야 했다. 나름대로 시내 쪽의 훤칠한 미장원이 아니던가? 수더분한 아줌마 모양새는 다시 그 처음의 기억을 강하게 확인시켰다. 발을 보았다. 하루 종일 더러워진 흰 양말이 아닌 지금, 이번에 그녀의 발은 구두에 덮혀 있었다. 아직 여름이었으나 여름 같지 않은 구두 속에. 고등학생 같거나 아님 할머니 같은 구두 속에. 낭패였다. 정말 낭패였다. 그는 맨발을 원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무가내로 졸랐다. 우선 배가 고팠고, 뭔가 먹을 것이 절실했다. 아무 데고 김밥이 보이는 집으로 끌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김밥을 싫어하는 여자아이, 참 드문 일이었다. 다음 보이는 국밥 집, 국밥을 시켜 놓고도, 어중간한 국물을 떠먹으면서도 그리 할 말은 없었다. 그는 그저 한번 꼭 보고 싶었다, 그냥 꼭 보고 싶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런 정도의 말을 중얼거렸고, 어색할수록 맥주 좀 마셔도 되겠냐 그래놓고서 한 두잔 맥주를 마셨다. 여자가 국밥을 다 먹도록 아무 말도 못하던 그는 불어터진 국밥을 밀어 놓았다. 저 보시다시피 휴가 나왔는데요… 그 다음은 다시 막혔다. 저 소주 한 잔 해도 되겠습니까… 알코올은 안된다, 다짐하는 마음과 마시는 행동은 반대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튿날 새벽이 무섭도록 늦게 찾아오는 데 놀랐다. 그렇게 여자의 방에서 새벽을 맞고, 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더는 중얼거릴 말도 없이 고개만 떨구고 발을 옮겼다. 하루 종일 걸려서 생각해 낸 것은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뿐이었다. 하루 온종일 길에 있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뭔가 말은 해야 하지 않는가. 늦은 시각 그렇게 여자의 집을 다시 찾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려주는 밥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고, 그렇게 다시 긴 긴 새벽이 오는 것을 지새고 새벽길을 나섰다. 여전히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머니는 다행히 아무 것도 모르셨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막내 누이가 그를 살필 쯤에는 3박4일 짧은 휴가가 지난 뒤였다. 그는 그렇게 돌아왔다.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걸이로 시작되는 남자들만의 공동체 생활은 차라리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휴가의 기억이 꿈인가 싶었다. 그것도 며칠, 맨발들이 완전히 사라진 만추가 되어도 그는 여전히 맨발 하나를 찾고 있었다. 맨발이 그를 쫓고 있었다. 눈길이 막혀 아예 면회소가 앙상해지자 온 천지가 맨발자국이었다. 이상하리 만치 맨발은 반쪽의 모양으로 박히었고, 그가 찾는 맨발은 온 천지에 널린 맨발들과 구별되었다. 그는 한 겨울에 열병을 앓았다. 그는 사색으로 밤을 지샜다. 그는 다른 막사 입구 안쪽에서 발견되어 두개의 막사 뿐 아니라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막사의 동지는 상관으로부터 그 상관은 그 상관으로부터 심한 조사를 받았다. 어떻게 막사를 걸어 나갔는지 어떻게 다른 막사를 찾아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부끄러움이 그를 단속했다. 그는 조용해졌다. 미소도 더 잘 지었다.     


남겨진 여자는 놀라움 반 행복감 반으로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주 가까이, 아예 체내에서 숨을 쉬고 있는 느낌은 훈훈하기까지 했다. 겁은 나지 않았다. 말없이 찾아온 그는 말없이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그는 다시 올 것이고, 아이는 몸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제 그녀로서는 거의 가족을 다 갖춘 셈이었다.

그녀가 여중을 졸업하는둥 마는둥 여고진학을 포기한 것은 꼭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숨막히는 아버지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불쌍한 아버지는 그녀가 보지 않으면 덜 불쌍할 것이었다. 새 어머니와 네 동생들… 그것으로도 벅찬 아버지는 그녀를 돌볼 기력도 없이 미안해하고만 있었다. 생모를 잃은 아이답게 그녀는 일찍 철이 들었고, 아버지의 고통을 보았다. 예, 또는 아니오, 그 중에서도 보통 예 라고 말하는 딸이 미안한 아버지는, 그러나 아버지라서 딸에게 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긴 머리를 빗겨주는 일도, 리본을 매주는 일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빗다가 지각을 하곤 하는 그녀를 보다 못해 새어머니가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날, 딸은 처음으로 드러내고 울었다. 겨우 훌쩍거리는 것이었지만 그랬다. 눈물을 덜 닦은 채 잠든 딸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버지가 울었다는 것을 그녀는 꿈에서 기억한다. 꿈에서 아버지가 흘린 눈물도 느낀다. 팔뚝에 스친 눈물, 눈물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눈을 감고 있었으니, 아니 어쩌면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색깔을 보지는 못했다. 눈물에 색깔은 없는 것으로 기억되었다. 눈물은 따뜻하다. 아버지가 불을 껐는지 방이 어두워지고 아직도 팔에 남은 눈물자국을 볼에 대어 보았다. 깜깜하다보니 볼 대신 입술에 스쳤다. 눈물에서 바다 냄새가 났다. 소금에서 나는 냄새였다. 더 이상 외갓집에 가지 않는 동안 가끔은 밥상의 소금을 가만히 손가락에 묻혀가지고 나왔던 생각이 났다. 어머니냄새는 외갓집 냄새랑 다 이 비릿 찝찝한 소금 맛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눈물도 그런 맛


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아빠는 소금 맛이다… 그녀에게 부모는 소금이었다. 더운 여름날, 키 높이 자란 학교 뜰에서 늑장부리고 놀다가 뛰어 돌아오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올리다 가만히 그 팔뚝을 핥아보면 여전히 엄마 냄새가 나는 것이 신기했다. 아빠의 눈물 자국이 엄마 냄새라니… 팔뚝에서는 항상 아빠의 눈물 맛과 엄마 냄새가 함께 났다. 아버지는 더는 울지 않으셨다. 그녀도 더는 울지 않았다.


몇 해후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물 대신 마른 잎 소리가 나는듯 하던 겨울을 나면서, 그녀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마음을 접었다. 대신 머리카락이 잘라 버려지고 다듬어지는 미용실을 마음으로 택했다. 그건 나름대로 신기한 경험이 될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못보낼 상황은 아닌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불만이 뭐라서 그러느냐… 고향에서는 아무 것도 안될 것이었다. 책꽂이에서 사회과 부도를 꺼내 지도를 폈다. 날마다 지도를 뒤졌다. 집에서 대각선으로 가장 먼 곳으로 강원도지방을 생각했고, 고성, 속초, 양양, 강릉을 찾아보았다. 일단 어머니 냄새가 날지도 모르는 바다 가까운 곳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강릉도 너무 멀었다. 무슨 능 같아서 싫기도 했다. 아버지를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고향이 아니지만 살아갈 수 있는 곳, 또 친이모가 서울 근교에 있으니, 서울에는 아버지도 조금은 안심하셨다. 이모도 서울을 권했다. 그렇게 대학생들 넘치는 신촌 마포 가까운 곳에서 중졸 인생이 시작되었다. 졸업도 하기 전 겨울부터였다. 눈물은 첫날부터 그녀의 친구였다. 눈물 한 방울에다 대고, 그래 난 바보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모는 실기와 이론을 병행하는 1대 1 교육코스를 추천하셨지만, 그것 또한 숨통 막히는 일이었다. 심부름할 미장원은 널려 있었다. 야간반 코스라야 집에서 용돈을 갖다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때 처음 미용실 바닥을 쓸고 또 쓸면서,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땀을 많이 흘리고 잘 감지 않는다고 새어머니가 긴 머리를 싹둑 잘랐을 때, 그때는 조금 울었지만 시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머리는 또 자랐다. 그렇지만 그 때 잘려나간 머리와 함께 엄마의 손길이 묻었던 과거가 잘려나갔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난 미용실 머리카락들 사이에서 깨달았다. 과거는 머리카락 잘려나가듯 사라지는구나. 과거를 잃지 않으려면 머리카락처럼 세심하게 간수해야 하는구나… 그녀에게서 어머니는 그렇게 잘려 나갔다. 머리카락 청소만 하며 짬짬이 학원을 다니다보니 반년 훨씬 더 걸려서야


 자격증이 나왔다. 뒷머리를 길게 세칭 거지컷이 유행이었고, 커트 오는 손님은 죄다 퍼머를 시켰고, 드라이 손님을 위해서 앞머리는 드라이해야 예쁜 것으로 고정된 그런 때였다. 학원에서 졸면서 열심히 배운 업스타일이나 아이롱은 벌써 퇴물이었다. 그 전에 있던 미용사언니는 그녀가 일을 거드는 중에 벌써 독립해 나갔고, 주인은 다른 미용사를 고용하지도 않았다. 자격증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녀를 시다 취급했다. 그런 어느 날 늦은 시간이었다, 여럿이서 그가 들어온 것이…  


만일 다음해 여름, 난데없는 그의 출현이 없었더라면 그는 기억에 없을 수많은 손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정말 난데없이 찾아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어두워진 거리에서 그는 그녀를 졸랐다. 너무 진지해서 그녀가 차마 거부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로서는 어느 어두운 길을 따라 그녀를 안내할 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진 밤의 통제와 제한 앞에서 그들은 무력했다. 그 해 따라 3,40년간의 통금이 해제된 자유의 밤이었지만 밤 새 걸을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4각의 공간을 찾아들어야 했다. 군복 그대로의 군인이 여자와 더불어 한밤을 어슬렁거리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맨발을…  맨발을 보지 않고서는 부대에 돌아가지 않겠어.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유행가가 폐부에 와 닿았다.


알 수 없는 건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이는 다시 군대로 돌아가는 연인의 심리로 전이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전 떠나는 연인으로부터 미래를 약속받는 소녀의 심정이 아니었어요. 전 그를 알지도 못했어요. 그는 우선 어렵게 말을 했어요. 장미나무인가를 주고 떠나면서 그 나무의 성장에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는 서양 단편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첫 학기 교양과목 시간에 어떤 교수님이 들려준 이야기였더래요. 꼭 시인 같은 표정으로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그렇지만 저는 그 주인공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영어도 어려운데, 영어도 아니고 어려운 단어라서… 참, 그는 나무를 주지도 않았구요. 그가 말하는 대부분이 생소했을 뿐이었죠. 약속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이 처음 약속은 지킨다고 했던 그 말만 이해했어요. 그는 약속했어요, 다시 한번 온다고. 여름 이전에 오겠다고. 늦어도 여름엔 오겠다고.


그리고 그녀는 이른 봄 딸을 낳았다. 겨울 들어 눈길에 움직임이 어려워진 때, 그 보다도 날씬한 몸매가 유난히 강조되는 직장은 눈총 때문이라도 그만 두어야 했었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영양과 온기로 겨울을 나면서 그녀는 행복했을까? 애 아버지는 여름에는 올 것이므로 겁은 없었다. 그는 여름에는 올 것이었다. 저축금은 씀씀이가 적은 그녀로서는 몇 달은 버틸만했다. 최소실존비용도 개인차가 심하다. 오랜만에 군고구마가 익어가는 양철통 곁에 서서 불 속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군고구마도 먹었다. 어려서 먹었던 기억으로 포장마차에서 쌈지를 찾았으나 어딜 가나 오뎅뿐이었다. 여자 혼자서 포장마차에 다니는 경우도 흔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아이와 더불어서가 아니면 부끄러워했을 판이었다. 아이는 그녀에게 둘이라는 안도를 나중에는 셋이 될 것이라는 행복감을 심어주었다. 시간이 남은 그녀는 쌈지를 직접 만들어볼 생각도 했지만, 유부는 생선 덴뿌라에 밀려서 시장에서도 귀했다. 무우와 섞여 있을 때 골라 먹고자 동생들과 다투었던 덴뿌라는 이상하게 메스꺼웠다. 그런 정도를 제외하면 그녀는 아기를 위해서 아낌없이 잘 먹었다. 동생들과 어머니가 떠올랐지만, 동생들을 감싸던 어머니가 갑자기 이해되었다. 자신을 홀대하던 어머니 아닌 어머니. 그녀가 용서되는 것은 어머니의 아기가 아니었던 자신의 운명을 이해한 탓이었다. 자신의 친어머니, 그녀는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둘째 아이를 낳자마자 함께 죽은 어머니. 어머니는 그녀가 엄마를 불러보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녀는 이 아이를 두고 죽는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아이를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는 봄이면 태어날 것이고, 아버지는 어쩌면 여름이면 올 것이었다. 그녀는 나 여기 있어요, 그곳은 많이 춥나요? 하는 식의 편지를 쓰는 데에도 무척 힘이 들었지만, 아버지와의 끈은 필요했기 때문에 참았다. 그의 편지는 길기도 했지만, 많이 어려웠다. 어려운 것은 세상의 말들이 다 그러했다. 신년 벽두에 라디오에서 들려온 어려운


 말.


보람도 많고 아쉬움도 많았던 임술년 한 해를 보내고, 이제 우리는 희망찬 계해년의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난 한해 동안 여러분들은 나라와 사회, 그리고 가정과 스스로의 발전을 위하여 모두가 무척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나라 바깥의 여러 가지 사정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으나, 우리는 조금도 좌초하거나 머뭇거림이 없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디뎠습니다…

당초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던 한자리수 물가를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달성하였으며, 또한 세계적인 불황과 경기침체 속에서도 우리는 6%성장이라는 매우 값진 성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82년은 그를 만난 역사적 사건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를 만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으며 불안에서 벗어나 행복했던 한해였다. 세상이 불확실했거나 불안했거나 그건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점점 더 어려운 말.


우리의 의지는 단단했고 슬기는 빛났으며 단합은 튼튼했습니다… 오늘의 굳은 의지를 믿고 내일의 빛나는 결실을 믿으며, 또한 스스로가 하는 일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밝은 미래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위해 1983년이 우리 모두 자신을 가지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해가 될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또 기대하면서,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금년에도 행운이 언제나 함께 할 것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행운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바로 그것이었다. 나에게도 가정이 있다. 가정이 바야흐로 탄생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의지가 내게서 작용하는 듯한 신비, 언제였을까? 아득하기만 하다. 꿈처럼 지나갔던 며칠이었기에 현실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다만 태동을 주는 생명체만이 내 가정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다. 아득한 그날, 어디선가 배워 온 대로 처음의 완강한 거부,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슬그머니 끌려갔던 그의 세계? 그리고 또 언제 그가 찾아올 것인가? 이상하게도 그는 여름이 오면 오겠다는 말만 했었다. 방을 옮긴 건 몸매가 이상해지면서 일을 쉬게 될 때였다. 시내 나갈 일이 없으니 좀 더 넓은 방, 좀 더 환한 공기가 필요했다. 고향 같은 집, 그런 집을 원했다. 왜 가을은 아닌가? 겨울엔 왜 아닌가? 가을 겨울의 휴가에는 왜 올 수 없는지 말하지 않았다. 물을 상황도 아니었었다. 그렇지만 그의 아이가 자라기 시작하자 그를 향한 궁금증은 아메바처럼 번식했다. 겨울에 불쑥 찾으면 어쩌나? 달라진 모습에서 놀라면 어쩌나? 주소만으로 찾아올 수 있을지… 미리 편지로 아이를 알려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건 그녀로서는 당연한 긍정이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의 두려움 같은 것을 아는 어머니는 없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다. 다만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알리지 못한 것은 어떤 글로서 시작할 것인가, 그 첫 말을 찾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은 갔다.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알릴까? 정말 오는 것이지요? 제대하기 전이라도 여름이면 오는 것이지요? 왜 겨울엔 오지 않는 건가요? 그렇게 편지를 쓸까 말까 하면서 보낸 이백 날 낮과 밤은 길었다. 이제서야 모든 것을 편지로 알릴 수는 없을 것 같았고, 막상 닥쳐올 만남의 자리가 불안해졌다. 그녀가 잠을 설치는 것은 아이와의 씨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대통령의 신년사가 저리 거창한 것에 놀라서, 진짜 거창한 '우리의 미래'를 그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을 만난 것이 82년의 가장 큰 행복이었어요… 그렇게 시작하자 생각보다 알림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이 봄에 꼭 만나야 해요. 여름이 오기 전에 말이예요. 


그리고 봄이 뾰쪽 움트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빨리 그녀의 첫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급히 병원에서 연락받은 이모는 울먹이기만 했다. 아이 아버지를 물을 계제가 아니었다. 이모 모르게 시집갔을 조카딸이 아니었으니까. 어찌 된게냐? 그렇게도 묻지 않았다. 언니 일찍 떠나 보낸 뒤 마음 고생 뻔한 조카딸을 챙겨줄 수 없었던 자책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필 서울로 부른 것도 후회되었다. 오랜 온갖 일로 퉁퉁 불어터진, 그러나 온기가 남은 손으로 어깨를 만져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헤실헤실한 아이를 보더니만 다시 눈물기. 이모 왜? 저기 지금 군대에 있어서… 다 알고 있어, 출산 때 연락하라고 했는데, 여름이면 오니까 뭐. 이모는 나흘을 있다 가시면서 연신 울먹거렸다. 닷새 째부터는 문간방 색씨가 들락거렸다. 골목 수퍼 아줌마를 꼬셔서 제 밥까지 짓게 했다. 사람 좋은 수퍼 아줌마는 자기 가게의 부식 등을 확실히 계산하면서 밥은 넉넉히 따뜻하게 지어 주었다. 문간방 색씨는 갈거시랑이 같은 손으로 놀랍게도 기저귀 빨래도 한번씩 해주었다. 이런 아기 갖는 것이 소원이었드랬는데… 하면서 찔끔거리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남편 군대가고 아이 낳는 여자는 행복한 여자였다. 그것도 아직 이렇게 어린 여자가 복도 많지. 세상에 많은 남자들을 보면서 남편을 꿈도 못꾸는 처지가 되고 보니, 새삼스레 그 나이가 그리웠다. 그때 처음 이웃집 동갑나기와 서울 행 밤차를 탔던 봄. 그만한 나이로서 아이를 낳은 이 여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친구랑 둘이서 걸어온 웃음 팔기 십년 세월, 친구년은 이 생활 접는다고 운전자격 따서 택시를 모는 억척이었다. 억척을 가로막는 것도 있다. 개인택시 갖기가 소원이었던 친구가 흔하디 흔한 사고로 병신되어 상하방 전세값도 다 잃고 시골로 내려간 뒤, 여전히 문간방 신세인 그녀로서는 이 어린 애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었다. 이제 남편만 제대하면… 


아이는 낮밤을 몰랐고, 엄마도 따라서 낮밤 없이 힘들었다. 날이 풀리고 담벼락이나 마당 가 잡풀에서 여름 기색이 돌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다시 오지 않으면? 주소가 바뀌고 일을 쉰다는 편지에서도 그는 별반 의심은 하지 않았는데.


문간방 여자의 희망대로 우리는 결혼을 해야 했다. 결혼을 하기까지는 한참 망설임과 기다림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여름이 왔다. 아이는 막 고개를 들거나 이빨 없는 잇몸을 드러내며 키득거릴 수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서 제 자식을 보러 와야 한다. 그에게는 주소를 다시 한번 꼼꼼히 알렸고, 다방 같은 데 나가는 것을 피했다. 그녀에게 다방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만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 자식과 제 아내를 집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게 그가 멈칫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마당의 기저귀를 피해 그녀의 반쯤 닫힌 방문 앞마루에 앉을 때까지 그는 아이 소리를 분간못했다. 혹시 들었더라도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이런 ㅁ자형 서민 주택의 어딘가에서 항상 들려올 법한 소리였다. 주인인 듯한 아낙이 가리켜주는 방문 앞에서 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모양으로 헝클어진 듯 변해있는 여자는 마루에 고개를 내밀었고, 나오지도 않았다. 방안은 어두웠다. 일부러 조명을 낮추었을까? 아이는 제 아버지를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여자를 위로할 생각도 안아 줄 생각도 못했다. 봄 사월에 우리 아기가… 우리 아기? 그는 처음엔 놀라움을 미처 표현할 길도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 엘리엇의 탄식처럼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었나. 잠든 뿌리를 깨우듯이 봄비 내리는 날 여자는 아이를 낳았다지. 아버지는 아이를 여자의 초라한 방에서 만났다. 이상한 일은 아이 울음소리와 더불어 방이 깨어났고, 방은 갑자기 아늑했고, 따뜻한 만큼 밝아졌으며, 여기 저기 박힌 하얀 기저귀며 아기 용품이 방을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윗목에 앉아만 있던 그는 밤이 되자 일어섰다. 놀람은 들키지 않았고, 문간방 색씨나 수퍼집 아줌마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전했다. 집으로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가 우선 핑계였고, 실은 아기 아버지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던 그는 어머니의 곁을 택했을 것이다. 집에 들린 그를 어머니와 누나들은 의아해 했다. 좀처럼 얼굴을 펼 수 없는 아들과 그 곤한 아들을 달래려는 어머니. 어머니… 세상 아무 것도 모르시고, 갑작스런 휴가를 어슬렁거리는 아들을 도닥거려주시는. 그 사이에서 아버지는 괜스레 한 번 큰기침도 하시고, 자 이제 우리 아들이… 어쩌고 빈 말도 하셨다. 휴가란 말도 안 하더니만… 그는 그렇게 이틀을 더 버티다가 귀대에 대서 들어갔다. 어떻게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 아니 아내 그리고 아이, 아이는 정말 내게 태어난 것일까?


그렇게 그는 다시 군대에 돌아갔고, 제대 날은 아직도 멀었다. 전혀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가 군대 3년에 얻은 것은 놀랍게도 여자와 딸아이였다. 그 하나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여자와 딸. 잔인한 사월의 황무지에서 얻은 딸, 그런 이미지였다. 딸아이는 놀랍게도 시뻘겋기만 하고 눈은 실눈이다 못해 뜨지도 못했다. 이 아이와 에미는 핏줄의 인연을 구하고 있었다. 제발 부모 다 있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 그것만이 소원인 여자, 그는 낭패감을 느꼈지만, 성실했다. 



여름은 쉬 가고 아들은 가을 들어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아들은 멍에를 벗을 날이 가까운,  날아갈 기분이 아니라서 집에서는 이상히 여겼다. 처음 며칠을 아무 말 없이 멍하게 보냈다. 저녁때만 슬쩍 나갔다가 다들 잠이 든 후에야 들어오곤 했다. 복학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그리 할 일은 없을 것이고… 친구들 만나느라 그러겠지… 그러다 아들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잠깐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구요… 꼭 그렇게 말했다. 중요한 일을 처리한다? 그의 성실성으로는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도 며칠이 갔다. 그는 난데없이 부모님께, 먼저 결혼을 하겠다고 터놓았다.


그것이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 뭐 너 혹 군대있을 때 사고라도 친 거냐?

사고요?

그래 사고 말이다.

사고는 아니었어요. 그냥 꼭 그렇게 될 일이었나 봐요. 착한 여자이고, 들어와 살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또… 

그리도 또 뭐냐, 임신이라도?

사실은 딸아이를… 

뭐야, 딸까지 있는 여자라고?

그게 제 아이라서…


그보다 더 수선스러운 일은 세상에선 없을 것이다. 비슷한 중매결혼이라도 제 자식만 푸르러 뵌다. 이런 경우는 아예 전쟁이다. 처음엔 아이를 떼어놓고 인사를 갔다. 노발대발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더한 아연실색의 무표정을 좀 더 일찍 무서워했어야 했다. 온갖 수선스러운 과정을 겪은 뒤, 이빨도 제법 나고 이제는 하얘진 얼굴로 잘 웃기도 하는 딸아이와 애 엄마가 집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그렇게 남편이 가져온 가방 두 개에 아이 옷가지, 제 옷가지와 묻어서 시집에 들어왔다. 처음 며칠 동안 숨도 못 죽인 다음, 처음 나들이는 사진관이었다. 돌사진 보다는 먼저 결혼사진이 있어야 했다. 사진은 정식 같았지만 가짜였다. 딸아이도 자라면서 이 사진의 을씨년스러운 교과서적 분위기를 간파했다. 제 고모들의 축제 사진들과 다른 분위기를 사춘기 되면서까지 이해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의 불행은 그런 데에서 싹텄을까?


아무래도 그이가 결혼을 해준 건 미지수였어요. 그인 바로 그런 말을 했어요. 어떤 때였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이는 내가 아이를 낳은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했어요. 나중에 가서는 그이가 결혼 한 것이 이해할 수 없더라구요. 설명이 안되지요, 너무 쉽게 나를 데려간 것 말이어요… 사는 게 별것 아니다, 그런 생각이었을까요? 우리 사진에다 "1983년 겨울" 이라고 쓰는 대신, 년도만 쓴 스티커를 붙여서 접이 사진첩에 꽂았지요. 액자에도 똑같은 사진을 넣었구요. 하긴 사진첩이나 액자나 둘 다 상자 속으로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아래채에는 그가 책상을 옮기지 않아서 서랍 같은 것이 없었어요. 나중에 어머님이 장롱과 문갑을 물려주셔서 그 서랍에다 넣어 두었어요. 신랑 신부만 달랑 둘이 서있는 결혼식 사진, 꽃은 두고두고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미용실의 신부화장 때 본 사랑스런 부케들 대신 사진관 꽃이라서요. 부케는 아무래도 흰장미가 최고라는데, 숙모님, 전 분홍장미를 더 좋아했어요. 그럴 수 있기를 바랬는데… 아무튼 사진은 훌륭한 삶의 시작이었어요. 결혼하여 아이 낳고, 아니 아이 낳고 결혼하고, 약간 바뀐 순서는 밝히지만 않는다면 그리 큰 흠은 아니잖아요… 아버지도 이해하셨구요, 어머니는 좋은 사람 만나서 얼마나 잘 된 것이냐며, 글쎄 어머니도 쪼끔은 울어주시데요…


그래 그게 뭐 그리 흠이더냐. 그렇게 아쉬워하던 분홍 장미 대신 들고 찍은 카네이션에 섞인 그 황국 두 송이 때문에 미리 철 이른 죽음이 준비되었을까. 자네 살아온 내력이 왜 이리 내 가슴을 짓누르는지 몰라…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라고.


남편은 봄학기에 짝학기 복학을 했다. 그는 여전히 안채에 있는 공부방에서 밤늦기 마련이었고, 아래채의 초저녁 잠 없는 그녀는 아이가 잠들어버린 뒤 머리는 잠들지 않고 몸은 파김치가 되어 알 수 없는 혼돈을 헤맸다. 어렴풋이 잠들며 가위눌리는 일이 반복되자, 몇 달 걸려서 어렵게 시골장터에서나 있을 법한 삼색가위를 구했다. 실은 알록달록한 가위, 그것이면 가위눌리는 병을 잡는다 했었다. 이불 밑에서 가위가 발견된 것은 그러나 그녀에게는 큰 빌미 잡히기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정신상태를 의심받았다. 아이가 자라는 방 이불 밑에 소름끼치게 큰 가위라니, 그 색깔하며 여기가 무당집도 아니고… 가장 가슴아픈 단어, 비수같은 단어가 시작되었다. 수준은 별 수 없네 뭐. 대학원생 시누이의 야멸찬 비난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는 여자는 그녀 주변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단어였다. 대학도 가뭄에 콩 나듯이, 그것도 고향집에선 동네 복판 이태리식 양옥집 둘째딸만 다니지 않았던가. 그렇게나 높고 이질적인 것이 대학인데, 대학원생이라니. 그래도 너무했다. 어디 병 아니냐, 정녕 큰 병이다 하시는 시어머니의 더 무서운 말보다도, 수준이란 핀잔이 더 아팠다. 그런데 병은 병이었다. 가위 사건 이후로 안채로 옮겨간 아이는 다행히 잘 지냈다. 젖을 뗄 때가 훨씬 지났으니 자연스레 젖을 떼었고, 우유도 잘 받아먹었다. 다시금 혼자가 되어 이내 잠들지 못하는 병으로 수척해가던 여자는 낮에도 한참 바쁜 살림 중에 멍하니 앉아있었고, 그런 일은 제 방이고 시어머니 안방이고  대청이고 구분치 않게 되었다. 그냥 차라리 네 방에서 쉬거라… 제발 네 방안에서… 그렇게 그녀는 아래채 방안으로 방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함께 먹지도 않고 집안 일을 잘 거들지도 못하면, 그러면 뭣 하러 함께 볼 일이 있겠는가.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는 온통 분위기가 삼엄했다. 에미 저러는데, 에미는 병원에든지, 혹은 심하면 이혼해야지. 한창 때 멀쩡한 대학생이 저게 뭐야. 애는 처음부터 입양이나 했어야지… 그런 소리도 들렸다.


직접 들은 것인지 확신은 없으나 맨날 그런 눈치라 느꼈다. TV에서도 툭하면 입양아 통계가 들먹거려졌고, 마치 국력을 다른 데 모으기 위해서라도 키우기 어려운 아이를 수출하는 것은 계산에 맞는다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러는 사이엔 어디 뉴스 소리가 날까 봐서, 아이가 알아들을까 봐서 아이를 데리고 방안에만 더욱 틀어박혔다. 그러나 저녁엔 시어머니가 아이를 데려갔다. 긴 긴 저녁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딸아이는 어느 새 통통통 발걸음을 했고, 헤헤거리며 종일 안채에서 놀았다. 할머니 방문턱이 무서운 줄 모르는 아이로서는 아무 걱정도 아니었다. 하미야 하미야… 느닷없이 미소에 녹은 할머니가 슬쩍 누그러졌다. 오오냐 요놈아에서 오오냐 내 새끼로 변해갔다. 자아 이쁜 짓 할려면 니 에미에게 동생 하나 낳아 달래라, 너같은 놈 말고 네 아빠 닮은.


그렇게 딸은 할머니 방으로 아주 옮겨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작 막내시누이가 시집을 가자 그 방은 아이 방이 되었고, 마침 할머니 방 이웃이었다. 점차 할머니 세계로 가까이 가는 딸에게 엄마는 낯선 사람이었다. 낮에도 잠이 들락말락, 앉아서도 잠이 들락말락, 서서도 잠이 들락말락… 엄마는 나를 미워 해! 아이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차례대로 들락거리면서, 저를 끔찍히 반겨주길 깜박 잊는 엄마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모두 엄마랑 모여 머리에 종이왕관을 쓰고 찍은 사진에도 그녀 대신 애 고모가 올랐다. 가까운 데 사는 둘째 고모가 제 아이와 함께 엄마 노릇을 다 했고, 덕분에 그녀는 집에서 쉴 수 있었다. 그래 너처럼 에미 노릇 편하게 하는 에미가 어디 있다드냐. 너처럼 시에미 시누가 애 다 키워주는 경우가 어데 있는 줄 아냐.


    삶이 덜컥, 새장을 열어 젖히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시작이란 그래,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지


딸아이는 갸름하고 수려한 제 아버지를 닮았다. 많이 닮았다. 함께 9개월을 산 것도 아닌데, 군대에 가 있는 제 아비를 닮는 아기라니. 그 닮은 모습은 할머니를 얻을 수 있게 했지만, 어머니를 잃게 했다. 할머니는 연신 이왕 그럴 바엔 아들로 낳지… 하는 푸념을 대놓고 했다. "이왕 그럴 바엔", 그러니까 이왕 사고를 쳤다 해도 아들이 귀한 집이니 아들이라도 낳았으면 에미는 대순가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며느리로 들어와 사는 동안 곧 바로 아들을 낳았으면, 혹은 딸이라도 더 낳았으면 가능성을 보았을 터인데, 어떻게 더는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집안에서 위축될 대로 위축된 그녀는 몸도 마음도 열리지 않았고, 모든 것이 움츠렸을 것이다. 새벽녘에 살짝 잠들어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버릇이 되었고, 하루 종일 졸리다 말다 하면서도 동작은 되고 있었다. 아침 준비, 설거지, 오전엔 빨래와 청소, 하루는 안채, 하루는 아래채, 바깥 욕탕과 장독대, 부엌 대청소, 마당청소… 끝이 없었다. 점심 준비 설거지, 다림이질, 장보기, 저녁준비, 설거지, 꼬마 TV… 기계적인 일상에서 특이한 것은 딸아이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방 출입이 기특했더니만, 밥을 먹을 때에도 할머니, 숙제를 할 때에도 할머니였다. 여전 가사과 졸업의 유식한 할머니는 초등학교 숙제까지 다 거들어 주셨다. 받아쓰기라도 시킬 때에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혹시 처녀 적에 선생님을 하셨나 싶을 정도였다. 어딘지 사람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풍채도 그랬다. 그러니까 남편은 어머니를 닮은 점이 없었다. 아버지 모습은 조금 남았다. 길쭉하고 뾰쪽한 이마랑 푸르스름한 눈동자랑. 딱 그 푸르스름한 눈동자 때문에 가끔 들여다보는 제 아이의 평범한 둥근 눈은 생소하기만 했다. 그늘로 드러나는 눈동자. 예민해져 가는 눈동자. 게다가 남편은 아직 학생이었다. 아이가 제 아빠를 찾을 동안에도 여전히 학생이었다.

 

딸아이와의 문제는 건망증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잘 챙겨주지 못하는 에미에 대한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 할머니가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어도 가슴에 못을 밖을 때, 그러니까 갑자기, "이왕이면"으로 시작하는 한탄에서 제가 딸인 것이 불만일 때, 딸은 꼭 할머니처럼 에미를 원망했다. 몇대 독자 집안에서 아들이 없는 것, 그것이 제가 딸아이로 태어난 잘못인 것처럼 여겨질 때, 아니 그 에미가 괜스레 미울 때, 딸은 혹독했다. 사실 딸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삶보다 TV를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온갖 사람들이 온갖 관계로 얽혀있는 TV 속의 삶은 정말 사람 사는 삶 같았다. 집이라야 남편은 공부방 혹은 응접실에, 시부모는 안채에, 딸아이는 제 방에, 그렇게 각자 숨어지내는 절간인지라, 그녀의 작은 TV는 온갖 정보와 교감을 다 뿜어내고 있었다. 남편은 처음 예정과는 다르게 계속 진학을 했다. 세상이 달라져서 미래를 보려면 대학원은 다녀야 중간이라 했다. 점점 멀어지는 학력 격차는 별 문제가 안되었다. 약간의 경우가 차별이 나는 법이지, 아예 다른 차원에서는 비교도 안되는가 보다. 아이는 학교에 들어갔고, 신입생 등하교에는 물론 젊은 할머니가 따라 다녔다. 그 해에는 KBS에서 방영된 《울밑에 선 봉선화》서러움 보면서 그럭저럭 제 시름은 잊고 지냈다. 시에미 노릇은 저쯤 해야지 뭐. 끔직한 말들이 안채에서 오갈세라 그녀는 제 방 속 퇴물 TV앞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이야기 속 그 옛날 순천지방 이야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생생하게만 느껴졌고, 배역을 따라서 찔끔거렸다. 철물점이름, 서점 이름도 진짜만 같았고, 하긴 작가가 고향의 일가족 주변 이야기라고 하니 진짜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시간은 희한하게도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딸아이는 할머니랑 넓은 화면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심지어 어린이용 《까치》씨리즈를 볼 때도 아이는 옆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엄지도 서럽고 까치는 까치대로 불쌍하고, 왜 사람들이 마음을 닫아거는지, 아이들 이야기라는 생각도 없이, 《캔디》며 다른 순정 만화들도 혼자서 보고 있었다. 방에 갇히어 조금씩 기운나는 약을 마셨다. 처음에는 상에서 남아 나오는 노름한 음료수, 그것은 알코올 성분이었고, 일시적인 효험이 있었다. 부족하면 수퍼로 달렸다. 마알간 알코올병이 있었다. 아직 어렸다할 나이에 사이다 남은 것인 줄 알고 마셨다 죽을 뻔했던 그런 병이었다. 어딘가 아버지 냄새도 났다. 그리운 약은 성인인 그녀에게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여자는, 지금 땅 속에 뉘인, 여자였던 시신은, 그런 몸으로 나를 만났다. 나는 뒤늦게 그 집안에 들어간 더 잘 배운 어른. 결혼이 늦은 삼촌의 아내였으니, 숙모라 불렸다. 명절에나 가족 행사에나 만나는 터이지만, 어쩌다 보면 아이는 제 에미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가 작은 할머니께 인사해야지… 하면, 함무니 아니야! 라고 쏘아붙였다. 제 할머니가 색씨 할머니 그래라… 하시면, 그래 색찌 함무니이… 했다. 똘똘한 딸 아이 앞에서 주눅든 에미는 대강 음식 만지는 일로 물러서며, 아니면 찬장 청소, 부엌 바닥 청소, 어디 담벼락 청소, 청소에만 매달렸다. 식구들 눈에는 그것 또한 병적으로 보였다. 뭘 저렇게 닦고만 다니는지, 옛적에 온통 굴뚝까지 닦고 다녀서 굴뚝이란 아낙이 있었다잖나. 요새도 굴뚝이 있었음 닦고 말았겄제… 그 말이 옳았다. 할 일 없으면 시름달래는 여자들이 자개농 닦으며 세월 보낸다는 이야긴 들어보았지만, 변변한 농도 없이 시어머니가 거한 자개농 새로 들일 때 물려받은 농짝에는 애정이 가지 않는 것인지, 아무튼 어딘가 담벼락을 잘 문지르고 있었다. 당연히 먼지가 앉게 된 외벽까지를 닦고 다니니 이상한 결벽증에 온갖 병명을 들이대었다. 딸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담벼락 닦고 있는 엄마를 마주치면 질겁이었다. 친구들하고 어울려 돌아오는 길에는 더욱 그랬다. 너네 엄마야? 너네 엄마 뭘 하시니? 이상스레 온갖 담벼락을 닦고 다니던 모습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젠 마지못해 부엌에 나올 때도 술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우리야 어쩌다 보는 모습이지만 들킬 정도였다. 물그릇도 출렁거리고, 고르지 못한 부엌 바닥에선 근들거리고… 아차 큰일이다 싶게 어두운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이 아이가 왜 그럴까? 그런 생각은 명절의 번잡한 분위기 속에서 곧 흘러가 버리고, 쉬이 잊혀졌다. 다시 만나면 다시 놀라고, 흐트러진 눈빛으로 차라리 포악이나 했으면 덜 가슴아팠으리라. 할말이 그렇게 없는지, 냄새 들킬세라 아예 입을 닫아거는지, 무표정하게 다문 입, 그것이 그녀의 굳은


인상이었다. 어디에 서 있어도 어울리지 않는, 온 식구들이 치부까진 아니라 해도 조금은 군더더기로 느낄 만도 했다.


그렇게 버틴 세월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은 딸아이의 가출 소동 직전이었다. 아이가 적당한 입시에 실패하자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때 그녀는 울부짖지도 못했다. 그냥 우연히 그 집에 들린 나를 따라 나섰을 때의 놀라움. 저 잠깐 저하고… 십여년 넘게 한 집안 여자로 살았다지만, 핏줄은 무관한, 아니 어느 것도 무관한 우리가 무슨 말은 나누었겠는가. 그날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죽어버린 오늘까지 두 여자가 나눈 말이 몇 분이나 될까? 평생 한 집안 사람으로서 살았다지만, 나눈 말을 녹음했다가 편집한다면, 그게 몇 분이나 될까? 끔찍한 느낌이었다.


숙모님, 그게 제 탓이라는데요. 제 탓이었다구요. 그냥 그런 아무 말도 없이 애를 낳고 그런 것이요. 군대가서 사고친걸루 애를 낳는 여자가 어디있냐구요. 앞길 창창한 남자 발목 잡아 앉혔으면 되었지, 왜 애는 또 망쳐 놓았느냐구요. 애를 제가 망쳐요? 제 딸을요? 전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었어요, 도망도 안치고, 죽지도 않고, 밉건 곱건 제 에미 자리에요. 그 자리요, 그것 때문에요. 세상 모든 엄마는 살아야지요, 안그러나요. 우리 엄마는, 울 엄마는 못 버텼으니까요. 동생 낳다 죽을라믄 왜 날 낳다 죽지 그랬을까요. 그럼 깨끗했는데. 전 엄마라구요, 엄마니까 살구요. 엄마니까 살았지요. 너무 어려웠어요, 도통 알 수가 없었어요. 애 아버지는 참 심지가 있어요, 나 버리지 않고, 나 받아주고, 이렇게 살았지요. 속마음 그런 것이 뭐 중하대요. 저 이렇게 여기서 살고 우리 딸 잘 크고, 속마음 같은 것은 욕심이지요. 속마음까지 다 바란다면 정말 욕심이구요. 기가 막힌 때도 많았지요, 아니 내내 어지러웠나.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도 모르고 세월만 흘렀네요. 애 자라는 보람으루요. 그런데 이젠 그게, 이 애가 날 버리다니. 이 애가 날 못 참는다 막 나간단 말이지요. 집에선 숨이 막혀 죽는다고 대드네요, 그게 바로 대학을 갔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을. 재수 시작하자 시간이 좀 들쭉날쭉, 집에 있는 시간이 갑자기 많아진 거지요. 아니 시험 봐 놓고, 웬만한데 붙었다 하고 쉴 때 그랬어요. 이게 어느 날 소리를 꽥 질렀어요. 아무 일도 아닌데. 엄마, 왜 이래. 엄마 정신 차려. 제발 엄마, 이게 뭐야! 난 그냥 힘이 없어서, 저 좋아하는 삼색말이 해서 점심 줄려는 참에, 힘도 부치고, 또 뭔가 기름 냄새가 메스껍고 그래서 살짝 한 모금 먹고, 계란말이를 접시에 옮겨 담는데 이 애가 부엌으로 온 거예요. 대낮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날뛰는데, 겉잡을 수가 없더라니까요. 할머니 나오셔서, 이게 무슨 짓이냐, 할아버지도 계신데 이 무슨 해괴한 짓들이냐, 참 불쌍한 모녀들 거뒀더


니 이젠… 


참 불쌍한 모녀, 그 말에 그 애가 그렇게 상처받았을까요? 그랬나 봐요. 그 뒤론 애가 웃지도 않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더니, 제 아버지가 돌아오니 물었드래요. 왜 엄마랑 제가 불쌍한 거냐고? 불쌍한 자식, 그렇지요. 불쌍하지요. 제 엄마가 조금 못나고, 그러니까 기껏 시집살이 순종형이라 발언권 없고 착해빠진데 몸까지 망가진… 그 정도로 가족 내에서 랭킹 꼴찌다, 그런 건 싫어도 참을 밖에요. 하지만 불쌍한 엄마는 정말 싫었나 봐요, 덩달아서 불쌍한 제 자신도. 고종사촌들, 남자아이들에 비해서 크게 차별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래도 좀 차별은 으레 할아버지 다르고 할머니 다른 정도로 생각했었겠지요. 그러니까 아버지 다르고 엄마 다른 정도가 심해도 그럴 수 있나 보다. 시집살이는 그 애도 어려서부터 연속극에서 다 보며 컸을 걸요, 왜 《울밑에 선 봉선화》 뭐 《갈대》, 별의 별 것 다 보며 자랐으니까요. 그땐 그만큼 모질지 않은 시어머니는 다 천사쯤 되는 줄 알았잖아요. 그런걸 할머니 무릎에서 보며 자란 애니까.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난 슬며시 겁이 났어요. 애한테 걱정을 끼쳐줄까 봐 겁이 났고, 바로 부딪히면 말문이 다 막혔으니 말이예요. 왜 어머님 앞보다 더 그랬을까요. 난 그냥 죽고 싶었어요. 그래도 엄마는 살아야지요. 그렇다고 술이냐구요? 효력이 적을 걸요. 술병 들여오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 시댁 참 양반들이지요, 아니 참 우리 시댁 양반 맞지요, 살아 보시니까 그런가요. 장바구니 같은 건 아무도 안챙겨요. 너그러운 집안이지요… 나같은 것을 애초에… 


아니 숙모님, 좋은 이야기. 제가 마음을 달래면서 읽은 시여요. 일어나 멀리 날 때… 너는 너… 기어코 너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너… 이 애가 너른 세상에 나가야 하겠지요. 시는 가르침이 많더라구요. 저는〈풀이 눕는다〉그런 걸 외이며 살았는데. 우리 애한텐 〈새〉가 좋겠지요?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아니 다시요,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그런데 바람이 정말 눕나요? 풀 그런 것 말구요, 새, 새가 좋지요… 태양까지도 날아가게… 귀싸대기 새파란 참새가 안돼 안돼 바람 속에 날개를 털어야 해…


난 새삼스레 놀랐었다. 질부가 이렇게 속말을 하다니. 아니 언제 이렇게 술에 절었나, 그것 또한 무서웠다. 얼마큼 속이 타면 술로 속을 더 태웠을까. 나도 남편 따라 외식할 때면 한 두잔 마셔본 와인이 새콤달콤 맛이 있구나… 하던 참에, 알코올중독이란 무서움과 추함으로 다가왔다. 하긴 여자가 늙어가면서 두 가지 악습에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고 누가 그랬더라? TV 중독, 알코올 중독, 가장 심한 건 그 두 가지를 겸하는 것, TV 앞에 앉아서 줄창 술잔 입에 대는 것.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들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가장 심한 것은 군대에서 축구하는 것, 그런 식으로 웃어 넘겼던 이야기가 이젠 끔찍했다. 이 여자는 완전히 두 가지 다로구나, 아직은 젊은 나이에. 아직은 젊다… 아직은 TV 앞에 앉아서 술잔 입에 대기에도 너무 젊지만, 죽기엔 말해 무엇하랴. 아직은 너무 젊다, 아직은. 물론 그 때도 젊은 나이에 술에 절은 여자가 안쓰럽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상했고, 이해가 되었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눈물방울로 시작된 두 젊은이의 만남이 이렇게 술로 마감될 줄은 몰랐다. 짠 눈물에는 미미한 온기가 남아 있지만, 술은 화끈해도 냉랭한 물일뿐이다. 얼굴을 달게 하는 만큼 심장을 얼리는. 그날 제 시어머님께 집에서 재워 보낸다고 허락받고서 하룻밤 말동무를 해준 것이 전부인데, 이렇게 가슴이 아플 줄은 몰랐다. 혹은 그렇게라도 말을 들어준 것이 덜 후회될까?


숙모님, 그때 왜 제가 눈물을 흘렸게요. 저도 몰라요. 긴 얼굴에 어른스러워 보여서 언뜻 어려서 본 아버지 모습의 대학생이 들어와서요… 제게서 머리를 깎겠다지 뭐예요. 물론 여럿이 들어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었지요. 전 한 번도 손님 같은 건 의식해 본적이 없어서 그냥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데, 바닥이나 쓸고. 그때 그이가 내 앞 의자에 와서 앉은 거예요. 웬일인지 가슴은 뛰는데 내 모습은 꾀죄죄하기만, 그의 뒤통수는 다행히 눈도 코도 없어서 날 보지 못하겠지만, 그 머리카락은 자르기도 아까운, 손도 대기 아까운 찰랑거리는 건강함… 제가 그때 눈물을 떨구었나 봐요. 어려서 갑자기 긴 머리를 통째로 자른 날, 잠든 베개 밑으로 가만히 뒤통수를 쓸어주던 아버지 손도 느껴지고, 왜 그의 뒤통수에서 내 뒤통수 생각을 했겠어요. 그러느라 어물거리고 있는데… 제 자신이 머리카락 무더기 속에 서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제 자신이 초라하기만 하고… 도망치고 싶어도 손님이고… 아무튼 그날 이후 저는 정신을 차려서 커트도 하고 본격적으로 머리를 했지요. 열심히 해서 단골도 늘고. 이듬해 봄에는 더 시내 쪽으로 옮겼고. 2, 3층을 다 쓰는, 꽤 되는 가게였어요. 점장님도 잘해주고… 그러던 여름 그이가 갑자기 가게로 찾아와서는…  


그게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아니예요. 전 어차피 아무 것도 못해요. 시댁 들어와서는 단란하게 꿈을 꾸었죠. 일단 시부모님 마음에 드는 며느리가 되자… 그러려니 뭐든 어머님 시키시는 대로… 어머님은 그런데 아무 것도 안 시키셨어요. 세상에 김치찌개 하나 된장국하나 못 끓이는 여자도 시집을 온다시며… 사실 제가 중학 졸업 못하고 집 떠나서 언제 반찬 만드는 걸 보았겠어요. 세상엔 라면과 햄버거가 전부였는데, 기껏 가게에서 배달시켜 먹는 짜장면 아니면 김밥. 전요 김밥 먹다가 일어서고 하다보면 어찌 목이 메이든지 절대 김밥을 싫어해요. 김밥말이를 할 줄이나 알겠어요? 그래요, 결국 고깃국이 있어도 생선토막구이나 닭찜이 있어야 되는 시댁 밥상을 무슨 수로 잘 차려요… 맨날 파나 양파 다듬고 마늘 까고… 애 김밥 한 번 못 싸준 엄마, 그런게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애를 낳으면 다더냐. 저의 어머님 늘상 두고 쓰시는 말씀이지요. 몇 살이면 무슨 그림책으로 무슨 공부를 시작하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 뿐 아니라, 우리 집에선 어머니가 낳은 동생들도 그렇게 뭐 갖춰 가며 컸나요. 시댁은 엄청 달라요. 뭐 잘산다 그런게 아니라요. 뭣이 그렇게 법이 많은지, 법이라기 보다는 암튼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렇고… 나중엔 남편이 저를 문화센터에 보내더군요. 상차리기. 궁중요리 코스. 그런 사이에 꽃꽂이 교실이라니… 저는 꽃이 아깝기만 했어요. 불쌍하기도 했고. 아이가 중학교 가니까, 엄마가 영어 좀 더 해라… 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일찌감치 시장으로 길을 돌려서 순대에 소주 한 잔 하고, 그 온통 소금에 고춧가루 넣은 고소한 소금 맛에 기막혔지요. 집에서는 그런 소금은 구경도 못해요. 그런 흰 소금은 건강비상 일호지요, 미원이랑 흰 설탕도. 여름이면 시원한 물에 설탕 타서 먹으면 얼마나 개운한지… 그런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예요. 노랑 설탕을 그냥 타서 먹어 봤지요, 어찌나 찝찌름해서 집에선 설탕물도 못타 먹지요. 밖에 나와선 고춧가루 소금에 비닐 순대도 맛만 있는데. 왜 비닐 순대


냐구요? 집에선 그런 순대는 비닐로 만들었다고 구경도 못하게 하지요. 진짜 순대라는 걸 역겨워서 못 먹으면, 못 먹는 저만 병신이구요. 시장서 소주 마시고 다니다 들켜서 이젠 시장도 안 내보내세요. 담벽 안에 꽉 갇힌 거지요. 새장 속의 새, 집 속의 여자. 숙모님, 저 그거 몰라서 참았나요. 까짓 것 넘으려면 넘을 담벼락, 왜 참았겠어요, 애엄마니까. 내가 딸을 낳았으니까, 엄마다 하고. 못나도 엄마, 잘나도 엄마. 그런 것 아니어요? 난 사실 앉은뱅이 엄마라도 있었으면 했으니까. 사실이예요. 그런데 정말 앉은뱅이 엄마면 챙피해서 차라리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했을까요? 설마, 제 엄마를 죽어버렸으면 했을까요?


나중에 듣고 보니, 그때 상황이 매우 나빴다. 딸아이가 명문입시에 실패하자, 모두가 애 엄마를 흘끗거렸고, 대체 엄마가 저러니 교육이… 하는 눈으로, 이젠 외가의 내력까지 들먹였더란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에미가 보배운데 없으니 애를 무슨 수로 제대로 교육을 시키냐, 아들도 없이 저것 딸 하나를 대체 어디다 쓰느냐. 아들 타령은 새삼스러운 것으로,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더 이상 조르지 않더니만, 일이 그렇게 꼬였더란다. 딸아이는 그 "아들" 소리에 히스테리가 되어가고, 아무 것도 못할 바엔 남동생이라도 낳아서 저 편하게 해줄 것이지, 아무 것도 못해주는 엄마가 야속했을 것이고, 또 무엇보다 어려서 이래 챙피한 껍질처럼 느껴졌던 엄마에 대한 미움이 봇물처럼 터졌겠지. 대개들 자신이 미우면 누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혹독하게 미워하게 되는 법이니.

그 날도 저녁에 추도식 모임을 위해 일찍부터 집안 여자들이 모였다. 그녀는 두엇이서 전을 부치다 말고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막상 상을 차릴 때까지 여전히 모습이 없었다.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고, 딸아이는 속이 상해 아래채로 달려가더니, 멍하니 술에 취해 있는 제 엄마더러 그냥 죽어버려라 그랬다는 것이다. 엄마는 챙피해, 챙피해서 내가 죽겠단 말이야…  


그런 에피소드는 쉬쉬하면서도 다반사였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렇게 떠나갈 줄은 정말 몰랐다. 딸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할머니 사람답게 자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속내는 에미였을까? 셈에서 약한가 싶었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나름대로 최고를 해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가끔, 이 애가 제 애빌 닮아서 공부는 잘 한다오… 하면서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그랬다. 우리가 가끔 큰집에 들렸을 때면, 어려서도 방안에 박혀 있고 잘 나서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오랜 시간 한 곳에서 견디기를 잘하는 것 같았고, 그런 아이들은 대개 학교를 잘 견딘다. 그러나 어쩌다 만나면 표정은 시무룩했다. 자라면서는 더했다. 할머니 약은 효력이 떨어져 갔던가 보다. 엄마가 그리운데 엄마는 없었겠지. 이상하게 겁먹은 바보같은 여자만 있었겠지. 여전히 훤한 모습의 할머니, 화려한 고모들에 비해 어처구니없는 엄마. 왜 하필 엄마가 엄마인가 하는 눈빛, 그런 건 여자들이, 또 우리처럼 가끔 들리는 여자들이 더 날쌔게 느낀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몸을 떨었다. 어딘가 구석으로 그림자처럼 밀려버린 엄마를 견디지 못했다. 엄마 딸인 것을 부끄러워했다면, 엄마를 더욱 더 방안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딸이 돌아올 시간이면 겁이 나기도 했겠다. 첨엔 잘 듣던 약도 효력이 떨어졌겠지. 술을 늘리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도 가끔 나갔고, 동네엔 수퍼가 흔하다. 살림살이에 너그러운 집안 탓도 있었다. 그러나 독은 쉬이 퍼진다. 놀란 식구들이 감시를 시작할 때쯤엔 속수무책이 되어 있었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중독이 되었다. 입원 치료가 불가피했다. 입원한 그녀를, 돌아온 그녀를,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두어번 반복되는 입원 퇴원을 거치다 보니, 명색 어른들이 문병이나 가느냐고, 우리들 오는 것도 금하셨다. 무슨 자랑이라고 그런 문병을 다닌다냐고. 딸은 치를 떨었겠지. 위 아래로 피를 쏟는 엄마를, 그것도 제 스스로 중독이 되어간 엄마를 이해할 딸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행여 엄마를 닮아서 인생에 낙오


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겹칠 때면…


그 다음엔가 시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리 노환도 아니고 그저 조금 신장 문제로 부기 때문에 잠시 입원했을 때, 그 때 나타난 며느리 몰골을 보고 다시 한번 끔찍히 놀랐을 때에도, 설마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쾌적하다 못해 호흡기 등 부착되어 있는 기기들만 아니라면 작은 호텔같은 병실에, 깔끔한 딸들은 스타킹까지 갖춘 화사한 정장 풍으로 남의 집 병문안 오듯이 와 있었다. 중환이 아니고 보니, 잘 정리된 병실은 아늑했다. 그 틈새에 추한 며느리 꼴이라니, 대충 신은 신발에, 치마는 따로 돌고… 차림새는 그렇다 해도, 해골처럼 굳은 얼굴로, 희한하게 미소는 띄우고 ― 그것이 그저 취한의 홍조였을까? ― 이리 저리 발걸음을 놀리며 병수발을 자청하던 모습이 그냥 오싹하기만 했다. 정말 안쓰러워서, 그냥 우리 모두의 치부를 드러내주는 모양새 같아서.

 

딸은 그러니까 엄마를 치를 떨다가, 스스로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스스로 알코올중독인 엄마를 이해할 힘도 없었겠지만, 아버지 또한 모녀를 도와줄 수 없을 때, 딸은 폭발했다.


딸이 가출했다고 알려진 이래 그녀는 완전히 술에 절었다. 술 속에서 흐느적거렸다. 공급을 끊으려고 낮에는 사람들이 지켰지만, 밤이면 방문이 밖에서 잠겼다. 그러면 그녀는 창살 칸막이가 있는 길가 쪽 봉창을 열고 아는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건너편 집 아이들이 드나드는가 살폈고, 지나는 수퍼집 아줌마가 보이면 사정을 했다. 나중에는 아저씨에게도 사정을 했다. 나 죽어요… 이애 아빠만 오면 해결 나요… 지금 이애 아빠가 없으니 날 이렇게 못 나가게 하네요… 우선 숨 넘어가기 전에 한 병만…  


가게 아저씨와 아줌마는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자 서로를 욕했다. 그러게 왜 술을 가져다 주었느냐고… 서로 아니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것은 비겁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젊은 여자의 죽음에 조금이라고 끼이고 싶을까. 아무 소리 없이, 신음소리도 절망소리도 들리지 않은 하루 낮 하루 밤이 지나고 방문이 열렸다. 무심코 며늘아기가 안보인 며칠을 이상하다 하다가, 늦게 귀가면서 흘끔 잠긴 방문을 본 시아버지는 안채에다 친정에라도 보냈냐 물었다. 사실을 알고는 안사람더러 야멸차다며 호통을 쳤다.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려야지… 불쌍한 여자는 합리적인 아버님 덕분에 아직 미미한 온기가 남아 있을 때 발견되었다. 아니 누구라도 사람 사는 집에 그렇게 아무 소리 안나는 잠긴 방문을 오래 방치했을 리는 없다.


딸을 잉태시킨, 딸과 그녀를 보호해주었던 하늘같은 남자도 형체뿐이었겠지. 긴 세월동안 중간자리의 남편 또한 분열 직전이었을지 모른다. 참을성이 덜한 그녀가 먼저 무너져 내렸다. 부모형제 누구라도 뒷받침이 덜한 그녀가 먼저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 뿐이다. 가출했던 딸이 실제로는 곧 고모집으로 돌아와서 잘 견디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남편도 며칠 딸에게로 퇴근하며 아이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여자는 슬슬 치사량의 술을 마셨다. 술 속에 익사한 것이다.


저만치 새삼 조카의 단정하지만 어딘지 너무 부드러운 긴 모습이 어른거렸다. 검은 양복에 오뉴월 뜨거운 태양도 잘 참는 무던한 남자. 내 친정동생이라면 나무랄 바 없을, 내 동료라 해도 나무랄 바 없을, 참을성 있고 과묵한 남자. 아직 한창 나이의 저 남자는 그러나 40 초입에 상처를 했구나. 얼마큼 참기 힘들면 죽도록 술에 절기도 하는가. 남편이 출근하는 지 돌아오는지, 딸아이가 가출한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 딴 세상을 헤매는 아내를 참기에는 너무 단정한 남자, 저 남자도 불행했구나. 이제 곧 여름이 오면 세상은 맨발 천지가 될 것이고, 제 맨발을 찾아 어디로 헤매려나. 참 불행했구나. 아니 불행이구나, 어디 "화근이었던" 아내가 죽었다고 불행한 과거의 시간이 함께 사라지는가. 저 남자의 새장 안에서 죽어간 여자를 누가 쉬이 잊을 수 있겠는가. 누구라도 다 잊는다 한들 새장이야 새를 잊겠는가, 날지 못해 그 안에서 죽어간 새를. 죽어서 날아간 새를. 날지는 못했지만, 죽은 것은 하늘로 간다 하지 않는가. 그럼 날아간 것이지. 태양까지라도.     


     새 중에서 제일 작은 벌새들도

     이름없는 잡새들도

     하늘 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귀싸대기 새파란 참새가

     아, 안된다. 바람 속에 날개를 털어야 한다


     일어나 멀리 날 때 너는 너인 것이다

     기어코 너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너인 것이다.


살랑거리는 잎새들이 마침내 숨을 쉬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입에서 무엇인가 안도의 느낌, 할 일을 무사히 다 했다는 큰 숨이 나오는 것과 시간을 맞춘다. 바람이 한 번 더 크게 불어와 등어리 검은 옷 속에 꽂혀있던 태양의 살촉을 걷어간다. 그제서야 조금 움직여서 하늘을 본다. 예상처럼 밝아 터진 태양은 간 데 없고 흐린 잿빛의 하늘, 그녀는 순간 놀란다. 자신이 남의 눈에 설게도 어느 새 썬글라스를 걸쳐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탓이다. 사실 태양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리는 눈물에 눈화장 지워졌을까 들키기 싫어서였다.


"작은 어머니이, 외수욱모오니임… 가세요. 저기 벤치 아래 점심이 준비되어 있어요오." 상냥하게 팔을 잡아 흔드는 질녀, 질부. 이렇게 삶이 세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검노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어느 봉분 사이에선가 날아올라 그들의 옆을 스쳐 태양을 향하려는 듯 높이 사라진다. 벌써 다음 세상에 나비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원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 꼭 새가 되란 법도 없지. 꼭 한번 말을 나누고 떠난 여자, 나보다 훨씬 젊어서 땅에 묻힌 여자, 이제 그 여자와 나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도대체 하늘이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따라갈 수 없다 하는지


반혼(反魂)의 절차가 있는지 없는지, 우선 아침을 거른 상제들이며 손들에 대한 음식제공이 으뜸이다. 산 사람은 살어야제… 젊디젊은 남편을 위로하는 말들이 당연하고 또 매정하기 그지없다. 젊기야 젊지… 삼촌처럼이면 이제 장가들 나이네 뭐… 세상에 박한 것이 인심이라고, 산사람 걱정에는 서로 앞을 다툰다. 하긴 일가친척 모여 앉아 하는 말들이다 보니, 젊은 놈 하나 여자 잘못 만나 족쇄 채워졌다가 해방이라는 느낌도 무리는 아닐 게다. 미리 떠난 아내는 저 속에서 버선발로 영원할 것이었다.


초췌해진 당사자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깝다. 그를 힘들게 한 그녀의 반생동안, 그 맨발의 상념을 이젠 떨구는가? 고개를 들어 따가운 태양을 맞는 시선이 물기로 반짝인다. 태양은 아랑곳없다.



소설시대  4호, 한국작가교수회, 평민사 2002, 240-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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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8. 19. 22:30

전일시론 2002년            

우리의 골목대장들

 

어느 시기나 어느 동네나 골목대장은 있기 마련이다.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아이”, 국어 사전도 마지막 설명을 “아이”라고 규정한다. 아이들은 동네 골목대장을 두려워하고, 커서도 지금처럼 힘이 세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한다. 두려움과 불안은 부지중에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다. 그것이 문제이다.


옛날엔 어린 시절의 골목대장은 어미의 걱정이었다 ― 하긴 요즈음엔 그것도 대장이라고 대장하기를 바라는 어미도 있다 하지만. 골목대장에도 두 가지 형이 있다. 좋은 의미에서는 다른 아이들의 선두에서 놀이의 지도자가 되거나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좋은 성격과 능력의 소유자임을 엿보게 하는 경우이다. 문제는 아무 데서나 폭력성을 드러내고 약한 친구들을 못살게 굴며, 혼자서 대장이 된 기분을 독차지하려는 경향이다. 골목대장을 자처하는 아이들은 대개 지적으로 미숙한데 완력이 강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약한 아이들도 마음속으로는 완력에 대한 저항심을 갖게 된다. 더구나 골목 밖으로부터 위협이 닥쳐올 때는 놀랍게도 이러한 골목대장형이 제일 먼저 몸을 사린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비겁성이 그 속성인 것이다. 그나마 어린 시절의 골목대장을 귀엽게 봐 주며 그 긍정적인 면을 살리고자 함은, 그들이 아직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골목대장이 자라서 한 가락한 경우가 적지 않다. 동학의 전봉준이 고창 당촌 마을에서 훈장의 외아들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적에, 아이들의 골목대장으로 패싸움에선 늘 앞장을 섰다는 일화도 있다. 더 거슬러 가면 오성 이항복의 어린 시절 악동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동네 골목대장을 하던 그가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학문에 힘쓴 일이며, 16세에 어머니가 타계하자 제복하고 아예 학궁(學宮)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에서 선조왕을 호위하여 임진강을 건너는 충신이 되었음이며, 장인 권율장군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난세의 귀감이 된 일을 두고 말함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에 이른 김훈의 『소설 이순신』에도 어김없이 “골목대장으로 범상치 않았던” 어린 시절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당파싸움이 심했던 사실을 두고도, 우리에겐 골목대장을 선호하는 기질이 대대손손 있어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골목대장을 졸업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예컨대 어른들의 정치세계에서는 미숙함이 면죄부도 아니고, 더더구나 골목대장의 행태가 칭송될 수는 없다.


요즈음 정치계 인사들을 둘러싼 거짓말 공방은 골목대장의 목소리 다툼과 꼭 같아 우울하다. 아웃이야 ― 아니야, 싸움은 공이 아웃인가 아닌가에 따라 결판나지 않고, 골목대장이 아웃이라고 외치면 아웃이 된다. 정치인 도덕성 문제로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있는 “병역 비리” 운운 테이프의 진위, 테이프의 목소리의 진위, 물론 그 내용의 진위, 그런 판단이 꼭 골목대장의 큰 목소리 따라 결판이 날까 걱정이다. 완전 조작이다 ― 천만에 진실이다, 공이 아웃인지 아닌지, 다음엔 또 어느 쪽으로 튀어나갈지, 보통 사람은 골목대장들 등쌀에 어지럽기만 하다. 국회위원 재보선 때에도, 거물급 인사가 겨우 동네 골목에서 재기했다고 큰 소리였다. 거물급이면 누구라도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마빡 터지는” 싸움을 붙어보기라도 했어야 한다. 동네 골목은 전장에 차마 내보내기 여린 동지에게 맡겨두고, 쉬운 산술로 좌석 하나라도 바깥 전장에 나가서 챙겨야 했지 않은가. 동네 골목에서는 소인배에게도 너그러운 것이 인심이다. 그러다 보니 골목대장들은 골목만을 맴돌며 큰 소리다.

90년대 후반 한국의 개혁실패 이유를 진단하는 어느 책에서, 개혁세력이 군사독재의 그림자에 몸을 적신 나머지 국민대중을 개혁의 길로 동참시키지 못한 채 골목대장의 오만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는 논지를 폈던 생각이 난다. 골목대장들의 큰 목소리 정치로는 우리에게 개혁은 요원할 것이다. (2002년 8월 19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7. 22. 22:32

[전일시론 2002년]            노블리스 오블리제

국회의 국무총리 인사청문특별위원회가 가동되었다 한다. 본회의 투표 전 10여일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가관은 적반하장의 행태들이다. 한 마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부재 탓이다. 이것은 ‘귀족의 의무’ 라는 뜻이지만 혈통귀족이 아니라 정신귀족으로서의 의무요, 출신성분이 무효화한 현대사회에서는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를 말한다.

단어가 서양에서 나오고 보니 서양문화권에서는 당연한 덕목이다. 최근 영화화로 유명해진 타이타닉 호의 침몰시(1912년 4월) 추운 밤바다에서 노약자들을 보호하며 생명의 보트를 양보한 것은  세력 있는 신사들이었다. 이들은 1852년의 버컨헤드 호를 기억했을 것이다. 영국해군의 자랑스러운 수송선에서 세튼 대령 이하 사병 전원이 ‘여자와 어린이 먼저’라는 숭고한 전통을 세우며 죽어갔으니까. 20년전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헬기의 역할은 전함 주위에 떠서 날아드는 아르헨티나의 미사일로부터 전함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당시 전쟁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국의 핵잠수함에 의해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제네랄 벨그라노 호가 격침되고, 아르헨티나의 막강 프랑스제 엑소세 미사일은 영국 구축함을 두 척이나 침몰시켰다. 이러한 전쟁의 전면에 왕자가 참전하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러한 예가 없지 않다. 1965년 10월 4일, 수류탄 투척 연습 중이던 한 병사가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놓치고 말았을 때, 수류탄 위에 몸을 덥쳐서 부하들을 살리고 산화한 숭고한 강재구 소령의 행동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나라가 불안하다 하면 외국으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하는 부유층과 지도층이 적지 않다. 오죽하면 해외 원정 출산을 중개해 주는 여행 상품이 인기를 모으고 있을까. “베이비인유에스에이” 등의 웹싸이트는 “출장이나 여행중 부득이한 사정으로” 미국에서 출산하게 되는 한국인들을 돕는 명목으로 “유아시민권” 메뉴까지 달아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친절을 보이고 있다. “부득이한 사정”이라면 누가 왜 위화감을 갔겠는가. 그 동안 하필 모 정당의 대통령 후보 손녀가 미국에서 출생하자 끓어올랐던 서민들의 배신감과 좌절감은 오래 갈 것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격으로, 죄 지은 것이 없으나 죄지은 것으로 오해를 받았겠지만, 아무래도 떨떠름한 건 감출 길 없다.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논란 이후에 터진 연속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서 말이다. 이득은 명쾌할 때만 가치가 있다. 

거제에 가면 시목리에 팥죽논이란 논이 있는데, 을유(1885)년 큰 가뭄으로 흉년이 되어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먹었다는 논이다. 그러길래 바른 집안의 가르침으로는, 아무리 재산을 늘리려 해도 흉년에는 남의 논을 사지 말라 했고, 파장에는 물건을 사지 말라는 금도가 있었다. 학문을 해도 지조와 의리를 꺾으면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집안이 존경을 받았다. 청렴, 강직, 기개, 남에 대한 배려, 예의범절 등 전통사회의 명문가들이 지녔던 이 같은 선비정신을 회복할 때이다. 물질의 부(富)와 정신의 귀(貴)를 맞 트레이드해야 살 맛 나는 세상이 된다.

사족으로, 트레이드라면 월드컵을 빛낸 선수들의 현안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세계 유수의 팀으로 이적되어 온갖 기량을 펼치기를 누가 바라지 않을까. 한편, 당연한 온갖 포상에 당연하지 않은 ― 특혜든 특권이든 당연은 아니다 ― 병역면제까지 받은 이들의 앞날 역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 속에서 보고 싶다. 누구도 이들의 병역면제를 사회지도층의 특혜라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이들의 역할이 전무후무한 애국심 고취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스포츠 명인이든 사회의 지도적 가치를 휘몰고 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인 세상이다. ‘너무 훌륭하였으므로’ 당연히 병역도 면제해주어야 하는 것은 뭔가 아니다. 병역의무란 ‘훌륭하지 않은 보통 또는 보통 이하의’ 아들들에게만 해당되어서는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수 없다. 너무 훌륭한 아들들이 보통 아들들이 하는 병역의무도 수행할 때 더욱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스포츠 명인들의 병역면제는 귀하신 아들들의 병역면제와 더불어 그들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기회를 다소 박탈한 것이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주랬으니, 옛 가르침은 멋스럽기까지 한다. (2002년 7월 22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6. 25. 22:34

[전일시론 2002년]      오~ 필승 코레아 - 신화와 현실 

 

유월은 온통 뜨거움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신화를 창조해 냈다. 미지의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던 첫 경기의 승리는 섬광처럼 우리들 가슴에 희망을 불질렀다. 푸른 구장의 빛나는 기록은 회를 거듭할수록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강호 이탈리아를 상대로 실로 월드컵 역사에 남을 극적인 역전골을 터뜨리자, 온 나라는 정말 하나로 이글거렸다. 감동의 물결은 광장이고 골목이고를 가리지 않고 거리마다 넘쳐났다. 우리는 실로 오랜만에 하나가 되었다. 오~ 필승 코레아! 대~한민국 따다~따 따따~


실제로 88올림픽이다 2002월드컵이다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경기 유치가 성사될 때에도, 말없는 어딘가에는 스포츠 정치에 대한 일반적 회의론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산적한 대내 문제들을 묻어두고서 세계 속의 이미지에만 주력하는 것은 외화내빈이라는 시각이었다. 동포 북한은 멀리 두고 일본과의 공동주최도 실은 빈 허의 화려함이거니 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정치보다 스포츠에 정신을 쏟는 나라가 되었나 보다. 지자제의 중요성을 부르짖었던 민주정치 염원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민주시민의 기본권인 선거권도 아랑곳없다. 누가 단체장이고 누가 의원인가에 관심은 미미한 채, 선거는 이해관계에 얽힌 집안 잔치처럼 조촐하다 못해 빈약하게 치러졌다. 권력자 주변의 추악한 비리도 아랑곳없다. 오늘 아침이라고 새삼 6.25의 비극을 일깨우면 뭣하냐. 아무렴 어떠랴!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 쾌남쾌녀 한국인! 대~한민국 따다~따 따따~


4강의 문턱에 섰을 때 우리는 정말 한 마음으로 뭉쳤다. 시내 일원 초중등학교의 임시 휴업까지하면서, 전국 또는 세계에서 몰려들 손님들에 대한 배려이자 학생들의 나라사랑 마음 고취의 일환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했다. 나라사랑은 하늘을 찌를듯 높아만 가고, 20년 태극기 판매고를 올 유월 한 달에 만회했다는 기록이라 한다. 사실상 우리의 태극기를 그렇게 사랑해본지 몇 십해 만인가. 유관순누나의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태극기는 얼마나 추상적이었던가. 태극기가 광복 이후에는 관제 행사 이외에 이토록 사랑받은 적이 있었던가. 최소한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의 의미도 이해하기보다는 비미학적이라는 시선으로 시큰둥했던 터였다. 그러던 태극기가 동네마다 펄럭이고 처녀들의 앞치마에 소년들의 날개로 둔갑하여 우리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필요하다면 석전(石戰)에 돌이라도 싸다 날라 행주대첩을 이뤄낼 기세였다. 어느 외신은 “너무 관제적”이라는 오보도 한다지 않는가. 월드컵 축구가 가져다준 성과는 태극기 사랑 하나 만으로도 더 없이 값진 일이다.


빛고을의 4강 신화는 온 나라를 폭발하게 했고, 오죽하면 이를 일컬어 “단군이래 가장 기쁜 날”이라는 찬사가 나왔을까. 설마하니 스포츠 우승을 혹은 “월드컵을 거머쥡시다!”를 우리민족의 최종목표라 하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칭찬에는 과장이 따르는 법이니까. 꿈같은 4강신화가 이루어진 그날 우리는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좋았다. 결승신화도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도청 앞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나누어준 종이 깃발들에는 놀랍게도 “오 통일 코레아”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은 필승을, 내일은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제 이 들끓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식혀주려는듯이 일요일 아침엔 서늘한 비가 내렸다. 상극상생의 원리에 따르면 물을 이기는 불은 없다지 않는가. 웬만한 냉기로는 식힐 수 없을 열기도 그것이 꿈속의 일이려니 하면 쉽게 냉정을 찾아질 것이다. 현실이 결빙의 우박처럼 강타해오기 전에,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신화를 역사로 바꿔 쓰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라도 꿈과 현실을 바로 가늠해야 한다. (2002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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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6. 4. 22:36

[전일시론 2002년]              

조국과 모국어 

 

6월 한 달은 어느 때 보다 대한민국을 외치며 세상이 들끓었다. 여느 해 같으면 분단조국을 뼈저리게 의식하게 되는 6.25도 축구의 열광 속에서 잊고 지냈다. “괴뢰군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을 겪으며 자란 대한민국의 건전한 세대는 “거지가 득시글득시글 하는 남조선”에 대한 비방에 어처구니없어 한다. 실로 노숙자가 득시글득시글하는 장면도 뉴스에 나오는 사건처럼 의식되기에 우리의 일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은 건강식 걱정이요 다이어트라서, 배고픔을 걱정하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로 생각된다. 더 많이 생산해서 더 잘 분배하여 더 잘 살아보세... 하는 따위의 구호는 쉰 세대의 열정일 뿐, 신세대는 온통 지구촌의 IT에 집중되어 있다.


새것을 좋아하기는 신세대만이 아니다. 우리는 신사조에 민감한 민족이다. 이데올로기라도 새것일 수록 효과가 좋다. 6.25를 지나서 남쪽에 분류된 우리는 미국식 시장경제 아래에서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성장했다. 적어도 우수한 사람들은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6.25를 지나서 우리가 북쪽에 분류되었더라면, 우리는 또 다른 보호세력 아래에서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수한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사회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신사조를 더나 좋아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후회를 배운 덕일까? 우리는 열심히 문호를 개방하여 모든 사조가 범람하고 모든 자유가 넘치는 조국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98년 경제위기 이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좋은 조국에서 모국어로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학가는 영어와 컴퓨터가 최고의 가치이고, 실제로 졸업시기가 닥쳐오면 다른 능력은 갑자기 무용지물로 변한다. 다른 능력과 관련된 학업은 갑자기 찬밥신세가 되다 못해 원망의 대상이 된다. 우리 조국을 사수할 모국어조차 마찬가지이다. 모국어는 조국을 사수하지도 못하고, 조국 또한 모국어를 보호하지 못한지 오래이다. [이렇게 조국에 살면서 “모”국어를 강조하는 것도 바른 국어사용은 아님을 안다. 우리나라 말은 그냥 국어이니까.] 


“국어국문학과는 국어국문학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와 교육, 이를 통한 언어 기능 계발 및 정서 함양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과이다. 국어학과 국문학의 학문적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중략] 또한 이와 같은 전공 영역의 연구, 교육과 더불어 국민 일반의 모국어 사용 기능을 높이고, 정서 함양을 도모함으로써 문화 창달에 기여하게 된다.” 올해로서 만 50세가 되는 한 국문학과 홈에서 학과를 소개하는 글에서 발췌해온 글이다. “국민 일반의 모국어 사용 기능을 높이고 정서함양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창달에 기여하리라”는 계획은 그러나 꿈처럼 아득해져간다. 국민 일반이 모국어에 별 관심이 없는 바에야. 이제는 조국을 모국을 고국을 떠나 살거나 서로 혼동해서 사용하고, 또 그런 것에 마음을 쓰면 좀생이 취급을 당하게 된다.


무엇이건 새것이 좋고, 새로운 사조는 그래서 우리 땅에서 항상 세력을 얻는다. 이차돈의 불교도, 정약용의 실학도 이어서 천주교도, 마침내 개신교도 세력을 얻었다. 신의 위력이기도 하겠지만 수용 자세가 우리처럼 좋은 민족도 드문 것이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혁명도 크나 작으나 대개 성공한다, 새것이니까. 더불어서 영어도 컴퓨터도... 김치처럼 무슨 인이 박혀서 먹지 않으면 안되는 세대가 아직 남아는 있지만, 김치는 반찬도 아닌 세대가 얼마든지 자라나고 있다. 김치는커녕 밥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학교 캠퍼스에 통치마 한복이라도 입고 근무하면 무슨 날인가 물어오는 것이 요즈음이다. 우리가 우리 옷을 입는 것이 이상한 일이고 잘 해야 특별한 일이 되었다. 좋은 새것 때문에 너무 쉬이 버려버린 옛것들 중에는 꽤 좋은 것들도 있었겠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새 세대의 특성중 하나이다. 이렇게 몇십 성상을 지나고 보면 조국도 모국어도 잊힐 날이 올까?

(2002년 6월 4일?)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5. 27. 22:39

[전일시론 2002년]               성장

 

오월이 무르익었다. 며칠이면 여름에 자리를 내준다. 나무들은 새 잎을 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껏 자랐다. 이젠 그 그늘로 우리를 덮을 태세다. 


사람은 봄마다 새로 자라나는 나무만 같지 못하다. 연륜은 체험과 비례하지 않는다. 지식과는 더더욱 아니다. 더구나 다매체의 홍수 속에서 장님 코끼리 보기만큼도 세상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이 주눅든 말을 하필 성장의 대명사인 신록의 계절 끝자락에서 내뱉어야 하는지, 그것 또한 기이한 일이다. 생각해 보니 바로 자연의 놀라운 성장 때문에 우리의 성장을 생각하게 되는가 싶다.


한껏 자라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괴테의 『시와 진실』이라는 상당한 양의 글은 작가의 자서전쯤 되는데, 그중 한 단원에 “나무는 하늘만큼 자라지 않게 되어있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무들이 제각기 제 키를 제 양을 자랑하면서 자라나지만, 하늘을 찔러 스스로 부러질만큼 자라는 나무는 정말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수명 또한 그렇고 우리의 능력 또한 그렇다. 어느 새 우리는 나무의 키를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하늘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 사람이 사는 고층건물은 얼마나 높이 가능할까? 사람은 얼마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창세기의 바벨탑 교훈을 들어야 할까? 노아의 자손들이 다음 홍수를 피하기 위하여 하늘까지 닿는 돌탑을 쌓으므로, 여호와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이들의 통솔력을 중지시키시므로 이름을 바벨이라 했다(창11:1-9). 고대 바빌로니아 또는 그리스의 기록에 의해 추정되는 이 건축물의 높이는 210m 이상이라고 한다. 현대의 층 개념으로 환산해도 70층 정도는 된다. 그러니까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룩했다는 니므롯이 시날평지에 성읍을 세우고 탑을 구축하려 했을 때, 성장은 그곳에서 멈춘 것이다. 성서적 해석으로는,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인 인간들이 경영하는 일을 금지하고자 했던 신의 의지로 풀이되겠지만, 자연 속에서는 더 쉬운 말로 ‘하늘까지 자라는 나무는 없는 것이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흐른 오늘도 지구촌 어디에도 바벨탑 보다 더 높은 건축물은 드물고, 또 위태롭기까지 하지 않은가. 자연은 스스로 성장을 통제한다. 사람들은 고층 하늘 속에 사는 대신, 나무의 키를 넘지 않게 만큼 땅에 붙어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회 또한 거대한 생명체이다. 경제학자들의 의미있는 주장, “성장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다”라는 명제도 영원불멸한 명제는 아닐 것이다. 사회의 건강성을 재는 척도가 성장률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건강함이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타격을 주지도 타격을 받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라야 할 것이다. 우주같은 거창한 단어를 회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다만 자연 속에서 우리는 어떤 평형상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욕심 아닌 현 상태에서의 조화 같은 무엇. 이름하기 어려운, 찾기 어려운 어떤 평정상태를.


현대 사회는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이 사회의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위(無爲) 예찬이라도 필요하리라. 무위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음을 말한다. 목적 추구의 의식적 행위인 유위(有爲)를 인간의 후천적인 위선 혹은 미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무위에서야말로 완성이 있다’는 역설은 성장 일변도의 오늘날 우리 가치표준에 시사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푸르른 오월, 한껏 푸르되 자랄 수 있을 때까지만 자라는 나무들을 보자. 자랄만큼만 자란 다음 그 그늘로 한 여름 우리를 식히고 그 열매로 가을 겨울 우리를 살찌우는 나무들을. (2002년 5월 27일)

Posted by 서용좌